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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임 바이츠만. (Chaim Weizmann; 1874-1952)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문과 계열의 만렙 박사였다면, 현대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은...;; 천재 과학자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미국을 끌어들여서 나라를 세웠다면, 저 사람은 영국을 끌어들여서 자기네 땅을 얻어 냈다. 서로 나이 차이도(1874 & 1875년생) 거의 안 나는 동시대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윈스턴 처칠과도 동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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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임 바이츠만은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옥수수로부터 아세톤을 저렴하게 양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게 전시 군수 물자인 탄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이었던지라 그는 이것 덕분에 완전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됐다.
영국 정부에서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에게 훈장을 주려 했다. 그때 그 사람이 말했다. "저는 돈과 명예는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 민족을 약속된 땅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서 살게 해 주세요." 성경에서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자기 동족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우리 대영제국의 식민지 중엔 거기보다 더 넓고 좋은 땅도 얼마든지 있는데. 가령, 아프리카에 우간다 영토 일대는 어때?"라는 제안에도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ㄴㄴ. 런던이 지금 같은 영국 수도가 되기도 전부터 예루살렘은 원래 우리 땅이었습니다. 부디 거기를 돌려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영국 내부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물론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1차 세계 대전의 말에 1917년에 밸푸어 선언이 이뤄졌다.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발효된 카이로 선언 및 포츠담 선언과 비슷하다. 일제로부터 조선의 독립이 그때 명시됐으니 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귀환이 곧장 이뤄진 건 아니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 유대인들이 몇백만 명씩이나 나치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세계 질서가 확 바뀐 뒤에야 이스라엘이 세워질 수 있었다. 사람에겐 기본적으로 귀차니즘이 있는지라 박해를 안 받으면 잘 안 움직이니까.;;

어쨌거나 초대 대통령이 군인이나 외교관 같은 다른 직업이 아니라 과학자라니 참 멋있고 부럽다(우리나라는 박 근혜 대통령이 일단 전자공학과 출신이긴 하다만..). 바이츠만은 자기 실력을 민족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사용한 위인 애국자였다.

2.
이스라엘의 국가인 Hatikvah(희망)은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우연의 일치인지 <밝은 빛을 따라서 앞만 향해 나가자>라는 희망적인(?) 내용의 찬송가 멜로디로 쓰인다. 하지만 쟤네들 국가 가사는... 나 같은 비유대인이 보기에도 인간적인 감정상 정말 구슬프고 찡하고, 나라 없는 백성의 한이 레알 서려 있는 게 느껴진다. 1절 가사를 대충 드라마틱하게 의역하면 이런 내용이다.

“내 심장은 동방을 향해, 시온을 향해 오늘도 꿈틀댄다.
우리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으리.
약속의 땅에서 자유로운 내 조국을 세우는 날을 염원한 지가 어언 2천 년.
그곳은 시온 땅의 예루살렘이어라.”


이 글에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뺏었네 나쁜 깡패네 하는 얘기는 논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점을 양해 바란다. 원래 그런 분쟁이 얼마든지 안 생길 수 있었고 이스라엘은 합법적으로 땅을 받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도 다 합의가 돼 있었는데 영국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오해가 생기면서 내력이 복잡하게 배배 꼬인 게 있다. 그런 것까지 다 설명하기에는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다.

아 그리고, 이스라엘도 사람 사는 곳이고, 모든 이스라엘 국민들이 자기네 국가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저런 노래가 너무 국뽕스럽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 중에도 애국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일본인 중에도 기미가요가 너무 존재감 없다고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
하나님이 보우하셨는지 유대인들이 참 똑똑하긴 했다. 바이츠만 말고 프리츠 하버(1868-1934)도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천재 과학자이다. 그는 공기 중의 질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인공 질소 비료를 만들어 냈다. 햇볕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핵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공기로부터 사람을 살리는 빵을 만드는 급의 엄청난 기적을 이뤘다. 기아 해소와 인류 복지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는 응당 노벨 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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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는 바이츠만과는 달리 줄을 치명적으로 잘못 섰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도, 시온주의자도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이 아닌 독일에 충성했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그래서 조국을 위해 사람을 살리는 발명만 한 게 아니라 독가스도 발명했다. 1차 세계 대전 때 전장에 처음으로 살포된 염소 가스부터 시작해, 유대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절의 치클론 B 독가스도 다 이 사람 혼자 또는 공동 연구로 만들어졌다.

그럼 그가 그 덕분에 독일로부터라도 인정받고 떵떵거리며 살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이용 가치는 있지만 굉장히 애매한 왕따 포지션이 되어서 타지에서 무척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독일로부터는 나중에 나치 당이 집권하면서 "저런 더러운 생물(=유대인)을 고위 과학자 자리에 앉혀 둘 순 없다"라고 문전박대를 당했고, 영국 등 다른 나라로부터는 "저 자식은 머리는 비상하지만 정신이 완전 맛이 간 싸이코야."라고 단단히 찍혔다.

그래도 다행히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일찍(1934년) 죽은 덕분에 히틀러와 엮이지는 않았으며,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거나 반대로 나치 출신의 전범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관여한 발명품이 가까운 미래에 심지어 자기 동족을 학살하는 용도로까지 쓰인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역설이다. 그는 사람을 살린 엄청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위인전에는 도저히 오를 수 없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과학자의 연구 윤리를 논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씁쓸한 사례가 되었다.

4.
이스라엘 건국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의 건국도 다시 좀 복습하고 글을 맺겠다.
1948년 5월 10일에 우리나라에서 남쪽만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14일에 이스라엘이 건국됐고, 같은 날 낮에 한반도에서는 북으로부터 대남 송전이 끊겼다.
그 달 말일인 31일엔 그 국회의원들을 바탕으로 제헌국회가 개최됐고, 당시 의장이던 이 승만의 요청으로 이 윤영 목사의 감사 기도가 이때 행해졌다.
이어 그 해 7월 17일엔 잘 알다시피 헌법이 제정되었고,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서 약 3년간의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전인 1948년 3월에 이북에서는 이미 자기만의 국기와 국가도 다 정하고 분단은 기정사실이 된 상태로 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악의 무리들은 서로 동무 동무 하면서 비판과 삿대질이나 일삼으면서 어떻게 백성들의 재산과 자유를 빼앗고 몽땅 착취하고, 서로 감시하고 통제하고 믿질 못하는 생지옥을 만들까, 어떻게 남조선까지 몽땅 집어 삼킬까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 반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하나님께서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고 ...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우리에게 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것은 개인의 종교관을 떠나서 매우 다행이고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5/09/05 08:38 2015/09/0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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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게임 외

1980년대에 구소련은 미국 포함 전세계에 퍼져 나간 명게임을 두 종류 발명해 냈다.
하나는 1984년, 알렉세이 파지노프라는 프로그래머가 개발한 테트리스라는 비디오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1986년에 드미트리 다비도프라는 심리학자가 고안한 오프라인 소셜 게임인 마피아 게임이다. MT 같은 데서 많이 해 보셨을 그 게임 말이다.

테트리스에 대해 잠깐만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과거 도스 시절에 아래아한글은 테트리스와 두 번 인연이 있었다. 1.51도 나오기 전, 1.2 시절에 잠깐 텍스트 모드에서 실행되던 테트리스를 액세서리로 제공한 적이 있었다가 나중에 2.5 내지 3.0에서 덧실행 기능이 추가되면서 테트리스가 덧실행 프로그램이라는 명목으로 재도입되었다.

테트리스는 게임 자체야 메카닉이 매우 간단하니, 그래픽· 비주얼은 걍 발로 만든 수준으로 넘긴다 해도 게임 진행만 되는 물건 형태로는 고딩/대딩 수준의 프로그래밍 실력으로 몇 시간만 코딩하면 뚝딱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테트리스의 저작권을 보유한 회사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이걸 상업용 소프트웨어에다 번들로 제공하거나 유료 게임 서비스를 하려면 꽤 막대한 양의 로얄티를 지불해야 한다.

잘 알다시피 테트리스는 엄청난 히트를 쳤다. 이것 때문에 학교와 직장 곳곳에서 지각과 태업이 속출하는 바람에, 이건 자본주의 진영을 몰락시키기 위해 소련이 몰래 개발해서 퍼뜨린 거라는 음모론이 나돌 정도였다. 그래도 테트리스 자체에는 딱히 이념적인 요소가 있지는 않다.
그에 반해 마피아 게임은 역시 소련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스머프도 주인공과 설정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가 듬뿍 담긴 만화영화라는 음모론이 있는데, 그것보다는 더 현실적이다.

마피아는.. 인간의 죄성을 교묘하게 잘 이용하는 심리· 정치 게임이다. 게임을 해 본, 특히 크리스천이라면 이 말에 절실히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건국 초기에 벌어졌던 좌우익 진영 대립과 광기어린 학살극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마피아 게임의 현피 실사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전국 곳곳에서 파업, 폭동, 반란이 벌어지고 유언비어 공산주의 선동질에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럽다. 이걸 가만히 놔 두면 나라는 완전히 끝장 나고 망한다. 그러니 쟤들을 색출해서 잡아 가두고 죽이긴 해야 하는데.. 악의 무리들이 대놓고 “내가 빨갱이요”라고 정체를 밝힐 리가 있나..;;

온갖 거짓말이 횡행하고 서로를 믿을 수가 없고, 자고 일어나면 누가 죽어 있을지 모른다. 위에서 까라니 까야 되고 실적을 만들어야 하는 아래 부하들 입장에서는.. 속된 말로 없는 빨갱이라도 만들어 내야 할 판이 된다. 이런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반공 진영이건 용공 진영이건 맛이 안 가는 게 이상한 일이다.

마피아만 해도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고 대신 남을 마피아로 몰아서 죽이는 것 때문에 일명 '우정파괴 게임'으로 통한다. 하물며 그게 당장 내 목숨이 걸린 현실이라고 생각해 보시라.
게다가 마피아 게임은 이거 뭐 아무 단서가 없으니 동등한 조건에서는 마피아가 승률이 시민보다 더 높을 수밖에 없다(심지어 경찰과 의사가 있다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민주주의 인권 운운하는 국가라 한들, 이런 상황에서는 시민의 승률을 강제로 높이기 위해서 초법적인 비밀 첩보/수사 기관을 두는 것이다.

이런 상황 설명 없이, 남로당의 사악한 만행은 쏙 빼 놓고 서북 청년단만 무슨 악의 축인양 욕한다? 혹은 좌우익 둘 다 똑같이 잘못했다고 양비론으로 퉁쳐? 내 양심으로는 동의할 수 없다. 모르고 그런 주장을 한다면 바보인 것이고, 알고도 그런 거짓말을 일부러 퍼뜨리는 거라면 사악한 자이다. 이거 뭐 일본의 역사 왜곡을 욕하고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좌익의 요인 암살, 양민 학살, 대중 선동에 맞서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정신으로 화답한 게 우익 측의 폭력이었다. 자기는 기독교 욕하면서 남은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이길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이지 않은가?

4·3 사건 같은 것도.. 진압 과정에서 대규모 양민 학살이 있었던 것은 분명 너무 과한 흑역사긴 하지만, 그건 분명 주모자가 우리나라 건국을 방해하려고 사전 준비되어 온 조직적인 폭동을 일으켜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 가족이나 젖먹이까지 죽이면서 일으킨 반란이다.

흑역사는 흑역사로 뉘우치고, 정부 입장에서 사과하는 것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흑역사로 말미암아, 국가 전복 반역 행위가 그저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유하자면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에 의해 후세인이 축출된 이라크 정부, 조선로동당은 그 이름도 유명한 IS, 그리고 서북 청년단 같은 반공 단체는 IS의 착취와 악행에 완전히 학을 뗀 쿠르드 민병대 정도에 대응한다고 봐도 되겠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에는 4·3 사건 말고도.. 이 재수의 난 같은 사건도 있더군.. 이런 와중에 우리나라가 공산화되지 않고, 필리핀이나 중남미처럼 되지도 않고 이렇게 우뚝 선 건 정말 기적이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상, 마피아 게임으로부터 든 일련의 생각들이었다. =_=;;
남로당에 대해 절대 침묵하면서 서북단 청년단만 때리는 이런 치우친 아저씨들 때문에.. 한글, 철도, 기독교, 컴터 얘기만 화기애애하게 이어졌을 내 블로그와 SNS도 심각한 글, 과격한 글이 올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지금 대통령에 대해서, 일베에 대해서, 혹은 새누리당과 새민련에 대해서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은 얼마든지 용납한다. 그러나 필요악과 절대악의 관계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좀 용납하기 힘들 것 같다. 앞으로 어지간해서는 '필요악'을 주제로 또 글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27 08:23 2014/10/2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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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 수용소의 참상 같은 것보다는 덜 심각한 분위기로 비교적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1. KBS 박 진희 북한 전문 기자

작년 말에 북한에서 장 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이 권좌에서 쫓겨나고 숙청당하던 당시에, 아주 이색적인 기자가 TV 전파를 타서 눈길을 끌었다.

박 진희 기자는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훗날 탈북하고, 일본을 거쳐서 2008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빡세게 교정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구수한 평양 사투리가 아주 신기하며 인상적이다.
정치범 수용소 출신인 강 철환, 그리고 김일성 대학 출신인 주 성하 씨는 신문 기자인 반면 저 사람은 방송 기자이다. 게다가 여성. 이런 경우는 최초이다.

이 사람을 개인적으로 인터뷰한 기사도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2. 김 정일 사망 발표

그 당시 TV에서 한동안 모습을 안 비추는 것 같던 리 춘히 아나운서가 검은 상복을 입고 완전 슬픈 표정으로 나타났다.
“위대한 령도자 뽀그리우스 동지께서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현지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알린다. ㅠ.ㅠ”

17년 전에 김 일성이 죽었을 때도 보도 스타일이 저랬는가 궁금하다.... 가 아니라 당연히 그때도 온갖 미사여구로 혹부리우스의 죽음을 미화하고 애도하고 난리가 났었다.

3. 북한 관광을 온 외국인

굉장히 흥미로운 자료이다. 저 외국인들은 북한을 방문한 건 둘째치고라도 어떻게 이 정도 퀄리티의 영상을 녹화해 갈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아마 몰래 북한 정부에다 달러를 엄청 많이 줬지 싶다.

도착하자마자 북한 출신의 통역 가이드가 붙는다. 외국인이 North Korea라고 말하자 가이드는 곧바로 DPRK라고 표현을 교정한다. 아시다시피 북한에서는 자기 나라를 가리킬 때 '북'과 '한'이라는 형태소를 모두 싫어하기 때문이다.
쟤들은 김 일성 동상 앞에 헌화와 참배-_-를 한 뒤 전쟁 박물관과 심지어 판문점까지 관광을 한다. (2011년이라 아직 김 정일 동상은 없던 시절.) 북한의 위치에서 휴전선 이남의 태극기를 바라보는 장면은 마치 달에서 지구를 보는 것만큼이나 굉장히 흥미롭다. 국내 매체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시점이니 말이다.

4. 3차 핵실험 보도

“조선 중앙 통신사 보도! 제 3차 지하 핵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
저 봐라.. 핵실험 한번 했다고 앵커는 펄럭이는 인공기를 배경으로 눈 부릅뜨고 목에 힘 주고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포고를 하는가? 병맛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북한 용어를 빌리자면 참 '기백 넘치는'(?) 말투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저 뉴스 보도 중에도 “우주를 정복한 그 정신 그 기백으로”라는 표현이 있다.

저런 북한 특유의 호전적인 웅변· 선동 말투는 한반도의 공산주의자들이 진작부터 개발해서 써먹어 왔지 싶다. 북한은 순수한 의미의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한 온갖 추악한 거짓 선동 전술은 여전히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건 변함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09/18 08:27 2014/09/1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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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여러 번 글을 통해 내 의견을 피력했듯이.. 대한민국의 건국/초대 대통령인 이 승만 박사를 매우 존경하며 그는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지엽적인 병크나 비리에도 불구하고, 정말 기적적으로 건국되고 지켜지고 유지된 자랑스러운 나라이다.

김 구의 <백범일지>만 읽다가 이 승만의 <독립정신>도 접하고 나면, 정말 독자의 지성과 품격, 안목까지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다. 그 꼬질꼬질하던 옛날 구한말에 벌써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를 생각하고 한 나라의 이상향을 옳은 방향으로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니. 사악한 공산주의자들의 흉계를 외교력으로 저지하고 나라의 반쪽이라도 붉게 물들지 않게 지켜 낸 것을 감사하게 된다.

이 박사에 대해서 독립 운동가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악의적인 흠집과 필요 이상의 온갖 중상모략에 대해서 본인은 거의 대부분 실드가 있고 대응책이 있다. 임시정부 시절에 부린 똘끼라든가 친일파 등용(?) 정도는 얼마든지 해명 가능하다.

중국의 마오 쩌둥을 생각해 보자.
그는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수천만 명의 인민을 굶겨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대약진운동에 문화혁명 홍위병 등 온갖 삽질 개뻘짓을 자행하여.. 196, 70년대에 우리나라가 반사 이득으로 경제 도약을 할 기회까지 줬다. 6·25 때 일본이 덕을 본 것만큼이나 우리도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삽질의 덕을 본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 쩌둥은 중국 내부에서 여전히 공7 과3 정도의 국부로 예우받고 있고, 심지어 국내에서도 마오 쩌둥 존경한다는 사람까지 있다. -_-;; 정신 좀 차리시길. 마오 쩌둥은 6·25 때 중공군 파병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멸공 북진통일의 기회를 영원히 박탈해 버린 적장이다!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

“비록 적장이지만 훌륭하다” 급의 다른 실드는? 내가 보기엔 글쎄...??
그리고 인간적으로 훌륭한 면모가 있다고 해서 당신은.. 히틀러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토 히로부미 같은 사람을 존경하고 흠모하고 위인전에까지 선뜻 올리시겠는가? -_-;;

아무리 사람마다 가치관과 견해가 차이가 날 수 있다 해도, 마오 쩌둥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그 누가 보더라도 이 승만보다 더 존경할 만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_-;;;; 최소한 한강 다리 폭파 병크보다는 우리에게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친 인물이다.
저건 6·25 때 보도연맹인지 국민방위군 같은 거 일일이 다 끄집어내서 때리는 잣대와 동일한 잣대라고는 절대로 볼 수 없다. 내 말 틀렸나?

이런 잣대하고만 비교해 봐도 이 승만에 대한 잣대만 비정상적으로, 불순한 의도로 지나치게 가혹하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걍 건국하지 말고 간판 내리고 김 일성 치하에서 통일 조국 이루며 살았어야 했다”가 아닌 이상.. 그 시절에 불가능했던 일을 못 이뤘다고 헛소리 하는 건 건전한 생각이 아니며 이성적인 판단도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난 이 승만을 미화, 우상화, 숭배 따위를 하지 않는다. 단지, 멀쩡한 애국자 초대 대통령에게 별 희한한 생트집 구실로 부관참시를 하고, 그냥 긍정적인 면모를 얘기만 하면 미화네 숭배네, 일베충 뉴라이트 수꼴 이 따위 헛소리를 해 대며, 저 사람 독재가 김 일성 독재와 똑같았다는 둥의 역사 왜곡, 능멸, 난도질을 하는 꼴을 보니 피거솟을 느끼며 그걸 극도로 혐오하여 반박할 뿐이다.

뭐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이 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실책이 없는 건 당연히 아니며 잘못한 것도 적지 않다. 설령 아랫사람 부하 잘못이라고 해도, 그런 병신 같은 부하들을 통제를 못 하거나 인재 등용을 제대로 못 한 건 대통령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노 무현 전대통령을.. 법조인으로서는 좋아하지만 그는 대통령 그릇이 아니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듯, 이 승만도 외교 독립 운동가로서만 좋아하고 대통령으로서는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 정도야 충분히 정당한 비판이고 이견이다. 그 사람이 외교를 잘한 것만치 내치를 잘하지는 못했다는 것은 나도 응당 동의하는 바다.

다만,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 승만의 정치적 과오는.. 최소한 누가 자꾸 헐뜯는 것처럼 절대 악의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과정에서 발생한 돌발행위나 과잉진압, 너무 위급하고 나라가 가난하고 열악해서.. 피아 식별도 안 되고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 여건이 아니어서, 인재를 도무지 구할 수 없어서, 지금 뭐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당장 뭐든지 다 보장하고 허용하기에는 빨갱이들의 거짓 선동이 너무 위험해서 등등등...으로 대부분~~ 실드가 쳐진다.

옛날에 했던 비유를 또 들겠다. Windows 95가 32비트 선점형 멀티태스킹 OS임에도 불구(자유 진영 민주주의)하고 도스와 16비트 코드가 섞인(구시대 악습, 친일 경찰 간부, 일부 자유 제약 등등) 불안정하고 BSOD가 만연한 이상한 제품으로 만들어졌던 건.. 그 당시 일반 “사용자들의 컴”이 Windows NT / OS/2를 도저히 돌릴 수 없는 환경이었고 도스 호환성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 없다. 지금 컴퓨터 환경을 갖고 옛날에 Win95를 만든 엔지니어를 욕하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승만이 악의적이지 않았다는 건 차라리 햇볕 정책이 비록 실패이지만(북한 체제나 주민 인권 개선에 아무 도움도 안 됐고 우리 돈만 엄청나게 축났고, 도리어 그게 다 핵 개발로 돌아왔고.. -_-) 악의적이지는 않았다고 믿는 것보다는 100배 이상 훨~씬 더 쉽게 믿을 수 있다. 자, 더 흥분할 것 같으니, 개인의 정치색이 들어간 논쟁은 여기에서 커트하도록 하고.

본론으로 돌아오면, 잘 알다시피 북한의 갑작스러운 6·25 남침 때 우리나라 정부와 군대는 우왕좌왕 허둥대다가 영남 지방까지 밀려나면서 졸전을 거듭했다. UN군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때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지워질 뻔했다. 그런데 이게 우리 입장에서는 꼭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기만 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승만 대통령은 저 북한 빨갱이들이 조만간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미국에다가 추가 군사 지원을 끊임없이 요청했지만 미국이 그 요구를 묵살하고 쟤들이 설마 그러겠느냐고 안이하게 대처한 것도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 군부 역시 대통령의 선견지명과는 반대로, 국지전에서 더 나아간 전면전 남침 조짐이 거듭 보고되는 걸 무시하고 태평하게 지내기도 했었다. (그렇게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천하의 군사 강국 미국조차도 옛날에 진주만 기습 폭격을 당하고 9·11 테러를 당했듯이..)

개전 당시에 대통령 수뇌부가 서울을 너무 금방 포기해 버린 것, 국민들에겐 페이크를 치면서 마치 세월호 선장이 도망치듯이 먼저 피난을 가 버린 것 때문에 여론이 안 좋아졌다. 이건 오늘날까지 이 승만을 씹는 사람들이 단골로 꺼내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건 그렇게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A. 이 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에 측근들로부터 피난을 안 가면 안 되겠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난 국민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라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프란체스카와 측근들이 1시간 가까이 설득한 뒤에야 비로소 피난을 갔다.

B. 반대로 무초 대사가 26일 밤쯤에 대통령을 찾아가 벌써 서울을 버리고 떠나서는 안 된다고 1시간 가까이 설득했다. 그러나 “내가 잡혀서는 안 돼. 좀 안전하게 피난 가야겠어”라는 대통령의 말에 더 설득을 포기했다.


이 두 모순되는 이야기가 인터넷을 찾아보니 공존한다. 누가 무슨 얘기를 갖고 대통령을 1시간째 설득했다는 건지? 둘 다 책 인용이고 여러 군데에 동일한 형태로 복붙이 돼 있어서 신뢰도는 충분히 갖춘 source이다.

그런데, 내가 잠시 리서치를 한 바로는.. 교차검증이 잘 안 된다.
A 문헌에서는 무초 대사는.. 참모진이 이미 대전으로 내려간 뒤부터에나 등장하며, B 문헌은 반대로 A 정도의 디테일로 26~27일 사이의 대통령의 구체적인 전후 행적이 나와 있지 않다.
한밤에 국제 전화를 걸어서 “군사 지원이 필요하니, 자고 있는 맥아더를 깨워서라도 당장 불러 달라. 안 그러면 한국에 있는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한 명씩 죽을 줄 알아라” 이렇게 대통령이 협박조로 강하게 얘기한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맥아더는 그 당시 미국이 아닌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 시차가 비슷함)

“A 사건에 의해서 피난이 결정된 뒤에 B에 기록된 대로 무초가 최후에 피난을 만류했다”.. 라고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게 자연스러울 듯하지만, 그렇게 종합하기에는 A가 말하는 시간대가 너무 늦다.

설마 진짜로 B와 A가 나란히 시간 순으로 벌어진 걸까? 이 승만이 그렇게까지 우왕좌왕 변덕쟁이였을 것 같지는 않은데. (처음엔 피난 가기로 결심 → 무초와 싸우고 난 뒤 피난 안 가기로 슬그머니 마음을 고쳐먹음 → 다시 측근의 제안을 받아들여 피난)

참고로 이 승만에 대해 '덜 긍정적'으로 진술하는 B도 조 갑제 닷컴 같은 우파 논객 홈페이지에 소개되고 인용돼 있다.
또한, 엔하위키조차도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와 함께 A안과 B안을 모두 소개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혼란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팩트가 아니라 이 승만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서 각자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A 또는 B를 미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나도 한때는 A 설만 있는 줄 알았으나, B도 신뢰도가 무시 못 할 수준이어 보인다.
이건 정치 성향이나 정치인 호불호 문제가 아니라 역사 팩트 문제이기 때문에 편견 없이 자료를 나중에 좀 더 조사해 봐야겠다. 어느 쪽이든 역사 왜곡과 조작이 부디 없기를.

Posted by 사무엘

2014/08/24 08:33 2014/08/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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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턴 워커 중장 (1889~1950)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하고, 나중에 한국 전쟁에도 중장 계급으로 참전했다. 그가 세운 가장 큰 공은, 필사적으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더는 물러나지 않게 하고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코리아를 지키겠다.” 이게 성공한 덕분에 나중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도 가능했다.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은 임무에 사병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워커의 옆에 있던 맥아더도 워커를 거들면서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라고 “까라면 까”를 돌려서 표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지프를 타고 이동 중인데 맞은편에서 다른 군용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 왔다. 그걸 피하려다 지프는 길 밖으로 굴러떨어져 뒤집혔고, 운전병과 장군은 모두 현장에서 즉사했다. (하긴, 한글학자 석인 정 태진도 6·25 중이던 1952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었고..)

가해 차량도 군용차였기 때문에 이 승만 대통령이 나서서 그 차의 괘씸한 운전병을 총살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하긴, 저 때는 아직 즉결처분 제도가 있던 막장 시절이었다.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침략에 국군은 졸전에 후퇴를 거듭하면서 사기가 떨어지고 군 기강이 개판이 돼 있었다. 명령과 통솔이 안 먹히고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부대가 와해되는 지경이다 보니.. 오죽했으면 정말 고육지책으로 윗사람이 자기 말 안 듣는 부하를 재판도 없이 초법적으로 응징할 권한을 줬었다. “내 명령이 있기 전에 멋대로 전선에서 후퇴하는 놈은 곧바로 총살이다!” 같은 식.

그랬는데 현실에서는.. 아 글쎄 사단장이 자기 기분 좀 나쁘다고, 훈시하는데 좀 몸을 움직였다고 사병을 제멋대로 총살하고,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명령을 수행 안 한다고 중대장이 소대장을 꼬투리 잡아 총살하는 지경이 벌어진 것이다. 무슨 보노의 삼류만화 패밀리 <아침조회> 편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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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하물며 미군 장군을 교통사고로 죽게 한 운전병이 과연 목이 온전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워커 장군의 유족들이 이 승만을 필사적으로 뜯어말렸고, 이건 고의가 아닌 실수로 인한 사고임이 밝혀지면서 해당 운전병은 징역 3년형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즉결처분 제도는 부작용과 병폐가 너무 많기도 하고, 또 극약 처방이 아니면 지휘가 안 될 정도의 위기가 그럭저럭 해소도 된지라 이듬해인 1951년 7월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걷다'라는 동사에 -er이 붙은 walker이라는 단어를 본인은 레밍즈 게임에서 처음으로 봤던 듯하다. 특별한 작업이나 임무 없이 그저 좌우로 돌아다니기만 하는 보통 생쥐를 가리키고 있으면 저 명칭이 뜬다. 오늘날 서울 광장동에 조성된 '워커힐'이라는 지명과 호텔 상호는 저 워커 장군을 기려셔 명명되었다.

수 년 전엔 지인 초대를 받아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하루 투숙한 적이 있었는데, 시설도 호화롭고 산과 강이 어우러진 주변 경치도 굉장히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한다.

2. 윌리엄 딘 소장 (1899~1981)

6· 25 개전 초기이던 7월 중순에 대전을 사수하는 전투를 지휘했던 분이다. 그러나 병력의 열세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대전을 내어주고 후퇴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어 대열에서 이탈하고 실종되었다.

그래서 미군은 특공대를 열차에 태우고 대전으로 다시 투입하여 그를 구출하려 했으나, 북한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이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전에 자원하여 미카 129호 증기 기관차를 운전하다가 적진에서 총격을 받고 순직한 분이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김 재현 기관사이다.

딘 소장은 참으로 놀랍고 한편으로 부끄럽게도, 한국인의 배신과 밀고를 몇 번 당하는 바람에 무려 투스타의 신분으로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혔었다. 평양에까지 끌려가기도 했지만 그나마 심각하게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으며, 1953년 휴전 후에 포로 교환 차원에서 석방된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이 대인배인 건, 이런 천하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특별히 부각시키고 트집잡고 늘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딘 소장은 자신을 밀고한 사람이 나중에 체포되었을 때도 그를 용서하고 감형을 탄원했다고 한다.
온갖 편파적인 선동질과 역사 왜곡, 시체 장사로 가득한 오늘날 좌익 매체들의 사악한 짓거리와는 참으로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미군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한국 철도인의 은혜를 미국은 끝까지 잊지 않았다. 여러 차례 미국의 높으신 분들이 고인에게 감사를 표했을 뿐만 아니라 2012년 6월 26일에는 고인에게 미국 국방부 특별 민간 봉사상(특별 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전후에 딘 소장은 영예롭게 예편하였으며, 천수를 누리다 별세했다.

3. 조지 리비 중사 (1919~1950)

공병대 소속의 미군 병사로, 위의 김 재현 기관사와 매우 비슷한 시기와 장소(1950년 7월 19일)에서 전사한 분이다(이 사람은 7월 20일!). 대전 전투에서 딘 소장이 후퇴할 때 같은 그룹에 속해 있었던 셈이다.

그는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위험한 일(= 자기를 적군에게 노출하는)을 용감하게 도맡아 하고, 심지어 인간 총알받이 역할까지 하면서 적을 교란시키고 전우들의 탈출과 부상병 이송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총알을 여러 발 맞고 과다출혈로 산화한다. 살아남은 전우들에 의해 그의 무용담이 알려지면서 그에게는 훈장도 일찌감치 추서되었다.

영문 위키백과에는 이 행적만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에 대해서 대전 전투 이전의 행적이 더 알려져 있는 듯하다. 북한군의 진격이 코앞에 임박한 위험한 상황에서, 파주의 임진강 위에 놓여 있던 어느 다리를 끊어서 진격을 저지했다고 한다.

파주시는 임진강 이북이 민통선으로 봉인된 형태인데, 장파리에 가 보면 국도 37호선과 민통선 지대를 연결하는 한 교차로가 '리비 사거리'라고 명명되어 있다. 본인은 작년에 이 길을 따라 들어가서 허 준 선생 묘소에 가 봤었다.
이것이 저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리고 민통선 지대로 들어가는 다리가 바로 '리비교'이며, 이게 그 사람이 끊었던 다리를 훗날 복원한 것이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4/08/19 08:20 2014/08/19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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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로 발을 코에 대고

'봉은사 땅밟기'....는 아니고 '남극점 땅밟기'를 세계 최초로 성공한 사람은 알다시피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 일행이다. 이건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인 1911년의 일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예전에 이 사람에 대해 한번 다룬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인 1994년엔 산악인 허 영호 대장이 이끄는 팀이 한국인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썰매를 안 타고 끌면서, 무려 1000km가 넘는 거리--'리'도 아니고 '킬로미터'!--를 도보만으로 이동하여 남극점을 정복한 것은 영국, 이탈리아, 일본에 이어 넷째였다고 한다. 아문센 팀은 알다시피 개가 끄는 썰매를 탄 것이기 때문에 제끼고.

물론 정확하게 같은 거리를 이동한 건 아니겠지만, 아문센은 55일이 걸렸다. 그러나 우리나라 팀은 44일 만에 갔다. 그리고 아문센/스콧 시절에는 탐사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미리 길을 개척하고 보급 물자 기지도 일정 간격으로 준비해 놔야 했지만, 요즘은 GPS가 발달하고 다른 장비와 물자도 좋아진 덕분인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100년 전과는 달리, (1) 중간 보급 없이 (2) 순수 도보만으로 남극점까지 간 것이다.

그러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건 날짜다. 모든 탐험대들이 남극점에 도달하는 날짜는 한 치의 예외 없이 12월~1월로 맞춰져 있다. 그때가 남반구에서는 한여름이기 때문이다. 계절상으로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탐험대는 현장에서 영하 30도를 밑도는 극심한 추위 때문에 고생한다. 하물며 겨울에는 남극 중심부에 절대로 못 들어간다.

다음 글을 읽어 보자.
1994년 당시 기록은 아니고, 2004년에 남극점을 정복한 박 영석 대장에 대한 보도 자료이다. 하필 공교롭게도 남극 연구소에서 전 재규 대원이 순직(2003년 12월)한 그 기간에 탐험 중이었구나.

남극점으로 가는 동안 이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대원들끼리 대화 내용이 줄곧 “아.. 난 막걸리 한 사발과 홍어회나 좀 먹고 싶다 / 난 딸기우유 3리터 plz”였댄다.
그리고 수능 출제 위원의 감금 기간보다도 더 긴 6주 남짓한 기간 동안... 저 사람들은 세수, 빨래를 전혀 못 하고 머리도 한 번도 못 감았다고. 으악~~

그 상태로 밤엔 3인용 텐트 하나에 5명의 사람이 뽁짝뽁짝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공간을 아끼려고 “서로 엇갈려 머리를 두고” 잤다고 한다.
“서로 발을 코에 대고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북한 정치범 수용소 그림에 묘사된 것처럼 잤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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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상헌 북한 인권 정보 센터 이사장이 탈북자의 증언을 토대로 그려서 잘 알려진 바로 이 그림.)

탐사 대원 5명 전체의 한 끼 식량의 무게가 800g에 불과했다고 한다. 5를 나누고 3을 곱하면 그래도 500g 정도는 되겠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호모 사피엔스의 신체 구조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오늘날 무보급 남극 탐사가 가능해진 건 아무래도 현대 과학 기술이 접목된 고열량 보존 식품이 개발된 덕분일 것이다. 비록, 이건 일상적인 음식에 비해 맛은 보장을 못 하겠지만 말이다.

한편, 북한의 저 생지옥에서는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하는 죄수들에게 1인당 하루 식량 배급이 강냉이 200~300g 남짓이라고 그런다. 그러니 배급받는 것만 먹었다간 영양실조 걸리고 굶어 죽으니, 쥐도 잡아먹고 쇠똥에 파묻힌 곡식 알갱이까지 끄집어 먹는 거다. 그저 묵념.

극지 탐험 관련 글을 읽으면서도 북한 인권 생각이 날 정도로 내가 우익 성향이 강해지긴 했다.
저 사람들은 그래도 미지의 지대를 개척한다는 자부심으로 고생을 견디며, 무사히 귀환하고 나면 심신이 달련되고 명예라도 따른다. 하지만 이북 동네는 도대체 뭐냐.. 가슴아프다.

2. 비둘기 자세

'비둘기 자세'라고 하면 본인은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3기 4화 요가 교실 편의 병맛 대사를 바로 떠올리면서 낄낄대곤 했다.
“비둘기의 포즈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너 임마 그거 요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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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러분 이거 아시는가?

‘비둘기 자세’란 게 있다. 남북한의 비둘기 생김새가 정녕 다르지 않을진대, 그 자세의 의미는 남북이 천양지차다.

남쪽 것은 요가의 한 동작이다. 다리를 벌리고 앉아 등 뒤로 팔을 넘겨 뒤쪽 발을 잡아 끌어올린다. 앞가슴을 쭉 내민 비둘기 모습과 닮았대서 붙은 이름이다. 팔과 다리 선을 가꿔주고 옆구리 군살을 빼는 효과가 있단다. 늘씬한 연예인이 이 자세를 취한 사진이 퍼져 너도나도 따라 하는 동작이 됐다.

북녘 것은 고문의 한 방법이다. 양손을 등 뒤로 돌려 벽의 고리에 묶는다. 고리 높이가 바닥에서 60㎝ 정도밖에 안 돼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가 된다. 먹이를 쪼며 걷는 비둘기 모습이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배 속에 든 걸 모두 토해낼 정도로 고통스럽다. 실제로 북한인권을 다룬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이 자세로 촬영했다가 몸에 마비가 왔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남북의 거리가 이만큼 멀다. 맞붙어 한반도고, 한 뿌리 한 겨렌데 이웃나라보다 더 멀고 더 새 뜬다. 한쪽은 못해서 안달이고 다른 쪽은 할까 봐 섬뜩한 비둘기 자세처럼, 말 쓰임새가 다른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 남쪽이 청년실업과 업무스트레스, 노후불안에 떨 때, 북쪽은 굶주림과 질병, 처형의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목숨과 바꾸지 않고는, 최소한 목숨을 걸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는 원초적 공포다. (중앙일보 이 훈범 국제부장)


난 비둘기의 포즈 북한 버전을, 역시 탈북자들이 그린 정치범 수용소 그림을 통해 본 적은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저런 자세로 있는다고 해서 어떻게 구토까지 할 정도로 고통을 당하는지 그 역학· 생리학적 원리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굳이 상상하거나 체험하고 싶지도 않고. 어떤 그림을 보더라도 토하는 장면 묘사는 절대로 안 빠진다!

<신이 보낸 사람>의 주연 배우 김 인권 씨는 저걸 체험해 봤더니 정말 작-_-살나게 괴롭고 사지 마비 증세가 오더라고 증언한 바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19 08:25 2014/03/19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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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 30일, 5공 시절에 KBS 텔레비전에서는 6·25가 발발한 지 33주년과 휴전 30주년을 기념하여 소박한(?) 이벤트를 하나 편성했다.
남북 이산가족까지는 못 하더라도 같은 대한민국 안에서라도(domestic) 원치 않게 헤어지고 연락이 끊어진 이산가족을 매스컴의 힘을 동원해서 찾아 보자는 1시간 반 남짓한 길이의 생방송 이벤트 프로그램이었다.

그랬는데..
이 프로가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영된 이후,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상상도 못 한 이변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막혀 있던 봇물이 터졌다.

KBS 사무국은 전화통이 불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일 밤과 새벽까지, 출연 신청도 없이 수천 명의 이산가족이 여의도로 찾아왔으며, 1회로 기획되었던 생방송은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무려 138일 동안 연달아 방영되는 기염을 토했다.
쉽게 말해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고(그 해 9월)와 아웅산 폭탄 테러(그 해 10월)가 벌어진 동안에도 저 프로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여기에라도 내 모습을 내보내서 어떻게든 가족을 찾으려고 여의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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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은 외신으로도 특종을 타고 보도됐으며 기네스북에 당당히 등재되었다.
TV에서 사람을 공개적으로 찾는 건 십중팔구 범죄자 수배밖에 없을 텐데 TV가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을 찾는 역할을 하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태어난 해에 있었던 옛날 일이다. 그러니 난 당연히 직접 체험한 적은 없고,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편린 정도만 머릿속에 지니고 있다.
인터넷, 휴대전화, SNS 없고 전화 보급률도 더딘데 마침 5공 시절에 컬러 텔레비전은 딱 집집마다 보급되던 시절이었으니 기술적으로 시기가 적절했다.

어느 중년의 남매가 서로 다른 지방에서 전화로 연결이 됐다. 혈육 인증을 위해 이름과 가족, 가족사, 신체 특징 같은 걸 물었는데 그게 일치하자..
그냥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두 사람 모두 자지러지게 펑펑 울음을 터뜨린 장면이 내 기억에 남는다. 이건 그 어떤 연기로도 제대로 재연할 수 없을 것이다. 방청객도, 아나운서도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이 스튜디오에서 만나게 됐을 때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성경을 아는 분이라면 이쯤에서 요셉 이야기를 떠올려도 좋을 것 같다. (창 43:30, 45:1-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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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천도 울어 버린 인간 드라마, 1983년 KBS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그때 TV 출연 신청이 총 10만 건 정도가 들어와서 그 중 절반인 5만 건 정도가 실제 접수되어 방송을 탔으며, 거기서 또 20% 정도 되는 1만여 가족이 상봉에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혈육을 끝끝내 찾지 못한 이산가족도 굉장히 많았다는 뜻이다. 6·25가 가져온 분단의 비극은 이렇게 처참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프로가 방영된 때로부터 또 무려 30년이 지나 있다.
참고로 국내 이산가족이 아니라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행사는 대한 적십자사가 민간 차원에서 1971년에 실태를 조사하고 1985년에 한번 추진했던 것 이후로는, 김 대중· 노 무현 정권이 돼서야 성사되었다. 규모는 아무래도 저 국내 이산가족 상봉에 비할 바가 못 되며, 상봉 후 재결합은 당연히 안 되고 이 사람들은 잠깐 만났다가 도로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만 했다. =_=;;.

그 당시 북한에서는 남한 사람과 만나는 이산가족들을 행사 몇 달 전부터 평양으로 불러서 밥 잘 먹이고 잘 재워서 굶주린 티, 험하게 산 티를 최대한 감추고 내보냈다. 또한 남한 사람과 만났을 때는 “우리는 수령님, 장군님의 은혜로 잘 지내고 있다”라고 기계적으로 대답하라고 세뇌 교육도 당연히 시켰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런데 님 달러 좀”이라고 뒷돈까지 삥뜯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런 궁색한 이벤트도 이산가족의 입장에서는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은지 모르겠다만, 겨우 저런 식의 상봉은 바람직한 통일을 정말로 염두에 둔 조치라고는 볼 수 없다. 남과 북이 정말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개방과 평화 통일을 할 의향이 있다면 상식적으로 그 전에 서신 왕래와 관광 여행부터라도 성사시켜야 하지 않겠나?

구원받은 지체들은 이 세상에서 헤어지더라도 다시 부활하고 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복된 소망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13 08:26 2014/03/13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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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이 보낸 사람>

난 아시다시피 개인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철도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연예, 스포츠, 드라마, 영화 같은 건 거의 관심 없으며 안 보고 지낸다.
그 흥행 대박이라는 겨울왕국조차도 안 봤다. 난 솔직히 월트 디즈니 스타일을 싫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여유가 아주 많으면 저것도 보기 싶긴 한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엔 꼭 봐야 하는 영화를 발견했다. 그래서 불금 시간을 쪼개서 야밤에 혼자 차까지 몰고 영화관 갔다.
내가 본 영화는 바로 이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를 깔끔한 상태에서 편견 없이 직접 감상하고 싶으신 분은 이 글을 읽지 말 것.

- 탈북자로부터 코치를 받았는지, "-했지비", "-하라우" 글로만 봤던 이런 북한 사투리를 실제로 들을 수 있다.
- 김 일성· 김 정일 사진이 벽에 걸린 집 책상 위에 놓인 성경책... 정말 살떨린다.
- 북한 주민의 실상이라 하면 마약도 빠질 수가 없을 텐데, 역시 그것까지 놓치지 않고 화면에 담았다. 훌륭하다.

1. '카타콤'이 고대 로마 제국 시절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지금 바로 이북 윗동네에 있다. 물론, 나처럼 이미 북한 사정에 대해서 어지간한 거 다 찾아보고 이미 아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 영화에서 크리스천은 한결같이 광신자, 위선자, 나약한 찌질이로만 묘사되고 그나마 좋게 나오는 건 죄다 천주교 쪽뿐인데, 미화는 바라지도 않고 최소한 중립적으로 묘사된 영화가 있어서 보기에 심리적으로 편했다.

2. 영화에서 지하 교회 신도들이 "나 예수쟁이요"라고 자기 명을 재촉하면서 티내는 방법은 물고기나 십자가 형상 같은 게 아니라 오로지 찬송가 흥얼거림과 성구 암송이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가 얼마나 큰일을 냈는지가 영화 중에 나온다.

남조선에서 자유롭게 교회 다니고 계신 분들은, 앞으로 주일 예배 때 기쁜 마음으로 자기 최고의 성량과 음감을 동원해서 예배당이 떠나갈 정도로 씩씩하게 회중 찬송에 동참하시기 바란다. 이건 설교 만만찮게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절차이며, 저쪽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목숨 걸고 하고 있다.

3. (스포일러) 극중에 기적은 없었다.
주인공은 너무 확신에 차서 내 손으로 우리 주민들을 다 탈출시키겠다고 그랬지만.. 때마침 김 정일이 죽으면서 국경의 경계가 매우 강화되고, 뇌물이 안 통하는 냉혈한 군 간부가 부임한다. 주민들의 신뢰와 팀웍도 와해되고 지하교회는 일망타진되어 주민들은 하나씩 잡혀 가고 죽는다. 그리고 주인공도 총살당하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교회 멤버는 어느 꼬마 소녀 한 명뿐이다.

4. 사실, 주인공은 분명 지하 교회에 소속돼 있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믿긴 하지만, 그래도 아내만치 독실하지는 않고 마음 상태가 종종 동요도 하는 일종의 입체적인 인물이다. 주연 배우인 김 인권 씨가 대본을 보고는 “난 저런 주인공을 연기하기엔 너무 신앙이 부족하다”라고 말했다곤 하지만, 주인공이 그렇게까지 초인적인 인물은 아니다.

마약도 하고, 또 모든 게 끝장 난 결말부에서는 “아.. 혹시나 했지만 역시 신은 우리를 돌봐주지 않았다. / 아예 믿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딱 한 번만 시치미 떼고 예수 부인하면 살 수도 있었는데 왜 내 아내는 저런 고지식한 길을 고집했을까?” 같은 인간적인 심정의 말도 한다.
기독교 신앙보다는 그냥 아내의 죽음에 감명을 받아서 마을 사람들을 전부 어떻게든 탈북시켜야겠다는 인도주의적인 신념이 더 부각되어 그려진다.

5. 설정상 주인공의 출신과 배경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혼자 저렇게 트럭을 몰래 얻어타고 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건 현실에서는 그리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평양 교회에 도움을 받으러 원정 가 봤는데, 거기는 알다시피 북한 정권의 하수인인 어용교회일 뿐임. “우리나라에 종교 박해 같은 건 없다” 대외적으로 이 개드립을 치던 아저씨는 잠시 후 주인공에게 분노의 린치를 당해서 피떡이 된다. 저 사람은 주인공과 원래 아는 사이였는데 뭔 일을 겪으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변절한 듯.

6. 교회 동지 중 어떤 남자 하나는 도강하다가 들켜서 군인으로부터 무참한 구타와 성희롱을 당하는데.. 그 뒤 완전히 멘붕하여 미치광이로 변한다. 몰래 숨겨 둔 예수 얼굴 그림에다 눈 모양만 뚫어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집 지붕 위에 올라가서 남들 보는 앞에서 헬렐레 하다가 갑자기 분신 자살한다.
이것은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탈북자의 증언과도 관계 없이 집어넣은 창작이고 허구인 듯하다.

7.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중엔 북한에서 찍혔다는 각종 탈북자 심문· 구타 동영상과 북한 지하 교회 녹취 동영상, 육성 녹음이 흘러나온다. 이것도 지금 내가 목숨이 붙어 있는지 내 목을 손으로 만져보게 될 정도로 소름 끼치고 엄청나게 섬뜩하다.

참고용 동영상이다. 2분 40초대 이후부터..
“아버지여! 교회가 다 무너졌습니다. 살얼음 같은 이 땅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순교가 발생했는지요! ... 복원하시고 역사하시는 주의 보혜사를 보내 주옵소서” (문장 보정)

북한의 지하 교회는 가장 연약하면서도, 북한의 저 미친 체제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악질 반동분자들의 모임이다! (아래 그림 중 하나는 조선 혁명 박물관과 만수대 언덕 근처에 있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김씨 부자 동상이고, 다른 하나는 금수산 기념 궁전 내부의 은은한 배경으로 새겨져 있는 부자 석상임.)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8. (쓴소리) 끝으로, 내가 이런 자리에서 또 험악한 말은 가능한 한 하고 싶지 않다만...
여기에까지 신천지 갖다붙이는 애들은 도대체 정체가 뭔지 궁금하다. 지난번 대선 시즌 때 새누리당이 신천지하고 커넥션 있다고 괴담 퍼뜨린 놈들하고 혹시 같은 배후 아닌가?

그래, 만에 하나 신천지와 커넥션이 있다고 치자. 그래도 신천지가 과연 종북 빨갱이보다 더 사악하고 해로운 인간들일까 싶다. 신천지는 교회에나 해를 끼치지만 쟤들은 아예 나라 전체를 무너뜨리고 좀먹는 놈들인데. ㅡ,.ㅡ;;

Posted by 사무엘

2014/02/21 08:32 2014/02/2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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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국민의 외국 여행이 완전히 자유화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년쯤 전인 1989년 1월 1일부터다.
그 전에, 특히 1980년대 이전에는 대한민국 국민은 단순 관광 목적으로는 아예 여권을 만들 수 없었다.

대학생의 어학연수나 배낭 여행? 그런 거 없었다.
신혼여행으로 하와이나 몰디브? 푸켓? 그런 거 없었다. 단순히 돈이 없어서 밖으로 못 뜨는 게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믿을 수 없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옛날에는 외교관의 관용 여권 내지 무역 회사 간부의 상용 여권 정도만이 있었다. 그런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 일반인이 합법적으로 외국으로 나가려면 유학이나 해외 취업 같은 정말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만 했다.
그때는 여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완전 엘리트 똘똘이 내지 심지어 정부와 커넥션이 있다는 보증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다가 1983년에는 50세 이상 중장년층만 그 당시 물가로 100~200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예치금을 낸 뒤에야 관광 해외 여행이 허가되었다. 그때는 미국 비자 받기도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테고 물가 대비 비행기 운임도 더욱 비쌌을 테니 해외여행은 가히 세상 살 만치 다 살고 아주 풍족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어르신들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나 국제선 비행기를 탈 수 없던 시절에 대한 항공 007편, 902편, 858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참 억울하긴 했을 것 같다)

그 연령이 1987년경에 40대를 거쳐 30대까지로 낮아진 뒤, 서울 올림픽까지 끝난 1989년부터 장벽이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때는 우리나라가 소련과 수교하고 차우세스쿠 정권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격변기이긴 했다. 아 참, 대한 항공에 이어 아시아나 항공이 취항한 것도 딱 이 시기이고.

그런데 생각해 보자.
하다못해 그 전의 일제 강점기 때에도 조선인들은 '황국 신민' 자격으로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 러시아, 대만까지 별다른 제약 없이 드나들 수 있었으며 일부 용자는 미국도 갔다 왔다.

그와 대조적으로 대한민국은 자유를 표방하면서도 왜 그토록 오랫동안 국민의 해외 여행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을까?
나라에서 자국민의 외국 방문을 너무 엄하게 통제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외국으로 유학 갔다가 귀국 안 하고 거기서 정착해 버린 고학력자 엘리트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1. 냉전으로 인한 불온사상 통제

옛날에는 냉전 때문에 국제 정세가 지금보다 매우 험악했다. 그 시절에 동북아시아에 공산화가 되지 않은 나라는 별로 없었다는 걸 명심하시라. 북한, 중국, 소련 같은 사상적으로 위험한 나라와 방문 금지 국가가 이웃에 즐비했다. 국민들을 호락호락 외국으로 보내 줬다간, 누가 밖에서 공산주의 물 몰래 먹고 와서 뻘짓을 할지 어떻게 아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은 초대 대통령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주로 제시하는 그림이긴 한데..)

그래서 1980년대에는 여권을 만들려면 예치금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시키는 반공 교육도 잔뜩 받아야 했다. 거액의 예치금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안정된 사회 기반이 있으며, 나이도 충분히 먹어서 알 거 다 알고 용공사상에 낚일 우려가 없는 사람에게만 여권 발행을 허락했는데도... 그걸로도 안심이 안 돼서 반공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하긴, 일제 강점기 때에 한반도에 공산주의 사상이 전래되었던 것도 비교적 자유로웠던 국제 왕래 덕분이니 저러는 사정을 이해는 한다.

2. 여행을 빌미로 한 원정출산 내지 병역기피 방지

미국으로 날아가서 자기 배 속의 자식 새끼를 미국 시민으로 만들고 군대에서 빼는 약삭빠른 부유층 집안 얘기를 들으면 누구라도 열받지 않겠는가?

더구나 주민등록 전산 시스템도 없고 정부의 행정력이 지금보다 빈약하던 시절에 부유층 자제가 저런 꼼수를 써서 외국에서 잠적해 버리면... 징병제를 하는 나라에서 병역기피자를 잡아낼 길이 없었다. 부자들에 대한 서민들의 반감과 증오심은 더욱 커질 것이고.
게다가 옛날엔 지금보다 우리나라의 군사 안보가 더욱 위태로웠었다.

3. 과소비 + 외화유출 방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나라 분위기가 어땠던가? 외화 벌이에 목숨 걸고 완전 국산품 애용 + 양담배 추방 이러던 시절이었다. WTO(세계 무역 기구) 가입, 세계화, 개방 같은 풍조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단순 관광 목적 해외 여행은 사치를 넘어 죄악· 금기시되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하다못해 1970년대 박 정희 시절엔 기술적으로는 이미 다 가능해졌는데도 빈부 계층간에 위화감이 조성된다는 이유로 텔레비전조차도 컬러를 도입하지 않고 흑백 시스템을 일부러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외국 여행도 통제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 이유가 있으니, 과거에 있었던 이 나라의 외국 여행 통제에 대해서도 무슨 군사 정권의 산물이네 어쩌네 하면서 부정적인 면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970년대에 20대 나이를 보낸 본인의 부모님께 그 시절의 분위기에 대해 여쭤 봤다. 사실 그 시절엔 대다수 서민들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궁핍했고, 먹고 사느라 바쁘지 해외 여행 따위는 어차피 꿈에도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었다고 한다. 신혼여행도 당연히 강원도나 부산 정도에, 돈 좀 보태면 제주도인 게 당연시되었고 말이다. 그러니, 나라에서 해외 여행을 막든 안 막든 그딴 거 관심 없고, 어차피 그건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니 딱히 제약이나 억압이라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1989년에 봉인이 풀리자마자 중산층 이상 서민들은 휴가철에 앞다퉈 해외로 나갔다. 각종 여행사 산업이 흥왕하기 시작했다. 1988년까지 흑자이던 관광 수지가 곧바로 적자로 떨어졌다. 그리고 해외 관광을 처음 하는 사람들 중에 일부 몰지각한 부류들이 벌이는 '어글리 코리안' 추태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국제 매너라는 개념 자체가 지금까지 없었을 테니.. 쩝~

요즘 경제가 어렵고 서민들 살기가 힘들어 죽겠다고 징징대는 말이 많다. 하지만 휴가철만 되면 공항은 외국 여행 가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성수기에 유명 관광지로 가는 비행기 표는 없어서 못 구한다. 솔직히 우리나라 정도면 서민들이 평균적으로는 정말 잘 살고 세계 상위급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옛날과 비교했을 때는 더욱 말이다.

우리 이전 세대가 마음대로 해외 여행도 못 가고 꾹 참고 일하여 국력을 일으키고 국위를 세계에 선양한 덕분에 다음 세대들은 마음껏 지구촌을 누비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대한민국 여권 정도면, 극소수 최상위 선진국을 제외하면 무비자로도 못 가는 나라가 없지 않던가.

“밤이 피는 김포 공항 비가 내리고 시간은 자꾸 가는데..”라고 바니걸스의 <김포 공항>이라는 가요가 있다. 이건 해외 여행 자유화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1977년에 발표된 곡이다. 그때는 국제선은 정말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 탈 수 있었을 테고 지금보다 국내 도로 인프라가 열악했을 테니, 오히려 국내선의 운영 비중이 더 높지 않았나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4/02/18 08:31 2014/02/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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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반공 교육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로 기적적인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저 이북 동네는 오로지 자기 권력 유지만을 위해 다른 공산주의 종주국조차 가지 않은 최악의 길만을 골라서 가면서 고립과 폐쇄, 공멸의 길을 갔다. 그리고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이 품고 있는 대남적화 야욕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꿈도 희망도 없고 심지어 종교조차 없는 주민들이 절망 끝에 상당수가 전국적인 수준으로 마약에까지 빠진 것은 흔히 접하는 기아· 영양실조나 정치범 수용소 같은 것과는 레베루가 다른 문제다. 안 그래도 0으로 수렴해 가던 남북간의 화합· 일치 가능성을 완전한 0으로 확인사살 시키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원래는 마약이 위조지폐, 불법 무기와 더불어 북한의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였는데, 그게 국제간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수출이 불가능해지자 북한 내부에서 나돌기 시작하면서 나라를 헬게이트로 만든 것이다.

정말 국제적으로도 나쁜짓은 가지가지 골라서 하는 양아치들이다. 중국이 탈북자를 강제 북송시키는 것은 인륜적으로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걔들이 마약 유통을 단속하는 건 지극히 정당한 행정 조치이지 않은가.
어지간해서는 정치적인 발언은 자제하려 하나, 소위 친북 정권의 햇볕 정책이라는 건 저런 북한의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도 전혀 해결한 게 없으면서 그저 북한에게 나쁜짓 할 자금만 잔뜩 그것도 심각하게 많은 액수로 준 걸로 보인다. 그러니 내가 도무지 고운 시선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뭐 아무튼.

현실이 엄연히 그런 이상, 우리는 알량한 민족 드립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며 반공 정신이 그때나 지금이나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아무리 밉고 마음에 안 들어도, 김씨 부자가 그들보다 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반공 교육이라 하면 뭐 어떤 게 떠오르는가? 내 경험상 내가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반공 교육은

  • 그저 북한 공산당의 잔인한 만행만 부각시키면서 증오심, 적개심을 키우는 것이 아니요,
  • 경제 이론을 들먹이면서 공산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유치한 숫자놀음이 아니요,
  • 우리나라 정치· 법조계에 간첩· 종부기들이 이미 싹 다 깔려서 나라가 거덜나기 직전이라고 호소하는 것도 아니요,
  • 심지어는 종교적으로 접근해서 신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마귀 적그리스도 666 식으로 선동하는 것도 아니다.

아 물론... 김 정은의 목을 따라고 초특급 인간흉기 북파공작원이라도 양성한다면야 그 정도 요원에겐 정신교육 차원에서 '원쑤'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 세뇌를 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 게 아니고 일반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역시나 우리나라의 수립과 발전 과정에 대한 “감사와 자부심”, 그리고 위의 권위에 대한 “신뢰”가 아닌가 싶다.
한 마디로 말해 남에 대한 디버프가 아니라, 나에 대한 버프가 필요하다! 이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돌려 놓기란 대단히 어렵다.

마치 학교에서 하는 성교육으로 어린 학생에게 성경적인 성 관념을 심어 줄 수 없듯, 저런 사상도.. 형식적이고 유치한 “때려잡자 공산당” 식의 반공 교육만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기 나라에 아무 애착도 없고, 이상한 음모론이나 믿는 사람들에게 백 날 간첩· 종부기 드립을 쳐 봐야 씨알도 먹히겠나?

방향이 잡히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왜 우리나라가 이상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가 이해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치라도 온 게 정말 기적에 가까우며 그 비결이 무엇인지가 이해된다.
큰 방향이 잡히고 나서는 더 세부적인 팩트, 데이터 같은 건 그저 논쟁용으로나 필요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무슨 일베니, 뉴라이트니 친일 나부랭이 같은 특정 계층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상한 딱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선량하고 건전한 애국 사상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버프'의 많은 부분을 우리나라 철도를 통해서 받았다~!!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3/12/22 08:20 2013/12/2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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