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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 태우

이 사람은 민주화가 이뤄지고 지금 같은 6공 체제(5년 직선 단임제)가 출범한 뒤에 최초로 선출된 5년 단임제 대통령이다.
이때 야당 후보들이 단일화가 제대로 못 돼서 여전히 군인 출신 대통령이 선출됐다는 게 특이한데.. 이 시기는,

  • 무연 휘발유와 유연 휘발유의 과도기 (1987년 7월 ~ 1992년 말. 대통령 집권 기간과 거의 일치)
  • 범죄와의 전쟁
  • 분당과 일산 신도시 개발
  • 각종 교통 인프라들 건설 시작: 판교-구리 고속도로 건설(현 수도권 1순환 고속도로의 먼 전신), 서해안 고속도로, 인천 공항, 경부 고속철...!!
  • 지방자치제 시행 (개구리 소년 사건이 벌어진 때가 이거 선거일..)
  • 북괴가 의외로 인명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의 유의미한 도발을 한 적이 없음

요런 게 인상적이라고 느껴진다. 제4 땅굴이 1990년 봄에 발견되긴 했지만, 이때는 군견만 죽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고 동독이고 차우세스쿠고 다 운지하던 시절이었으니.. 북괴도 몸 사렸던 건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땐 남한과 북한이 나란히 UN에 가입했다(1991).

아울러, 이 시기에 미국-이라크 걸프 전쟁이 벌어졌던 것, 그리고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독립 국가 연합'이라는 선수단이 출전했던 것이 본인의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7. 김 영삼: 많은 변화들

김 영삼은 우리나라 역사상 초대 할배나 마이너(윤 보선, 최 규하..)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선거를 통해 군 출신이 아닌 민간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첫 사례이다. 별명을 괜히 문민정부라고 지은 게 아니었다.

지금은 매우 믿어지지 않지만, 이때는 현직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대통령을 희화화하면서 "YS는 못 말려" 같은 유머 책까지 출간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사람 때 나라 분위기가 실제로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 금융실명제 시행
  • 대전 엑스포
  • 고속도로 통행료 후불제
  • 쓰레기 종량제
  • 행정구역 개편 (직할시가 광역시로..)
  • OECD, WTO 기구 가입. 슬슬 선진국 인증?

역사· 정치와 관련해서는 이런 것도..

  • 군 내부 사조직이던 하나회를 전격 해체
  • 조선총독부 구 청사 철거
  • 전 두환과 노 태우 비자금 재판...;;;

이 사람 재임 때 있었던 북괴 관련 사건은 다음과 같다.

  • 김 일성 사망 1994. 7. 정말 최대 압권
  • 국군 포로 조 창호 중위의 귀환 1994. 10.
  • 이 철수 대위 귀순 1996. 5. 현재까지 최후의 전투기 비행 귀순자
  • 강릉 무장공비 침투 1996. 9. 현재까지 잠수함 공작원 기반의 최후 대남 도발 (알려진 것)

이것들도 벌써 30년 전에 가까운 과거가 돼 간다.
이제 흑백뿐만이 아니라 컬러도 4:3 종횡비의 VHS급 저화질 사진/영상은 희뿌연 과거의 역사 기록이 돼 간다는 게 신기하기 그지없다.;;

8. 김 영삼: 대형 참사와 흉악 범죄들

그런데 1990년대 김 영삼 시절은 다른 면으로도 정말 판타스틱하긴 했다.

  •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1993. 3.
  • 아시아나 항공 733편 추락 1993. 7.
  • 서해훼리호 침몰 1993. 10. (1993년 한 해에만 육해공이 나란히..)
  • 성수대교 붕괴 1994. 10.
    (당시 대한뉴스에서는 조 중위 얘기만 다뤘고, 성수대교는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그 해 12월 말을 끝으로 폐지를 앞두고 있기도 했고, 사건 사고 보도는 이미 싸제 방송사들이 훨씬 더 신속하게 자세히 해 주고 있었으니까.)
  •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1995. 3.
  • 삼풍 백화점 붕괴 1995. 6.
  • 대한 항공 801편 괌 추락 1997. 8. (현재까지도 대한 항공 최후의 여객기 인명 사고!!)
  • 기업들 줄도산, **외환 위기 IMF** 1997. 12.

보다시피, 한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 아시아나와 대한 항공에서 나란히 여객기 추락 사고가 났었다.
이것들이 당연히 당대 대통령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사고가 겹치는 빈도가 이때 유난히 너무 높았다. 무슨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만 경제가 성장하고 우리도 이제 선진국이네 마네 하지만, 사회 시스템은 원칙이 없고 미개하고 부정부패 편법이 만연하다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우리 제발 좀 늙어 죽어 보자고 난리가 났었다. 우리나라는 저런 사건 사고들로부터 배우고 시스템을 개선해서 옛날에 비해 그나마 많이 나아지고 청렴해지고 안전해졌다.

그리고 이땐 대형 사고 참사뿐만 아니라, 흉악 범죄도 장난이 아니었다.

  • 부친 방화 살해 금수저 패륜아 박 한상 1994. 5. (사형 미집행)
  • 택시 강간 연쇄살인범 온 보현 1994. 9. (사형 집행)
  • 지존파 1994. 10. (사형 집행)
  • 부친 살해 패륜 대학 교수 1995. 3. (무기징역)

그나마 김 영삼은 1997년 12월 30일, 자기 집권 이전부터 확정돼 있던 사형수들을 몽땅 사형 집행을 하고 물러났다. 이게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후의 사형 집행이 돼 버렸다.
단지, 온 보현과 지존파는 당대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흉악해서 예외적으로 1995년 11월에 바로 집행을 해 버렸다.

9. 김 대중: 행적에 대한 괴담

이 사람은 IMF 시기를 경험한 것, 북괴의 수괴를 직접 만나고 어쨌든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
시기도 새 밀레니엄 전환기이고 고속 인터넷에다 휴대전화가 막 보급되던 때였던 것으로 인해, 역시 중요도와 존재감이 크다.

지금은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의약 분업이 2000년 이 사람 집권 때 이뤄졌다.
그리고 서울 2기 지하철 전구간 개통, 인천 국제공항 개항, 서해안 고속도로 전면 개통도 덤..

그런데.. 이 사람은 유난히 노래와 관련된 괴담이 많이 나도는 경향이 있다.
'독도는 우리땅' 노래를 금지시키고 6· 25의 노래조차 악의적으로 개사해서 원곡을 금지시켰다는데..
일단 내가 알기로 이것들은 사실이 아니다.

그때가 무슨 국가 공권력 차원에서 특정 노래를 못 부르게 하는 게 가능한 시절은 아니었다. 물타기 된 불순한 6· 25 노래가 우연히도 그때 민간 차원에서 발표된 것은 맞지만, 나라에서 그걸 채택해서 강제로 밀어붙이지는 않았었다.
단지, 남북 정상 회담뿐만 아니라 신 한일 어업협정도 그 당시엔 엄청난 논란이 많았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 제2 연평해전 당시의 불리한 교전 수칙이 이 사람 집권 때 일부러 개정된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 전부터 그랬다.

  • 1999년 제1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함장이 종북세력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정치 보복을 당했다는 썰 역시 내가 아는 바로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박 정성 제독, 송 영무 제독. 내가 무슨 군 출신인 건 아니니 내가 잘못 아는 게 있다면 재반박 환영)

  • "북한은 핵을 개발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내가 책임 진다"라는 두고 두고 까이는 엄청난 발언도.. 2001년경의 발언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한은 의외로 정확한 최초 출처가 잘 나오지 않는다. 마치 6 25 개전 초기에 할배 대통령의 행적처럼 말이다.

  • 국정원의 대북 휴민트들을 적에게 몽땅 누설하고 와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고도 하는데 이 역시 구체적인 증거는 잘 모르겠다.

주된 팩트와, 그 팩트 속에 교묘히 섞여 들어간 자잘한 과장 왜곡 주작은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저 세부 팩트가 그렇다고 해서 저 사람이 저런 오해가 불거지고도 남을 정도의 이상한 행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적에게 퍼 준 거 하며, 제2 연평해전이 벌어진 날 태연히 축구 보러 일본으로 뜬 건 뭐.. 욕 먹어도 할 말 없다. 특히 그 세월호 7시간 갖고 지랄하던 그 잣대를 적용한다면 더욱 말이다.
더구나 백 보 양보해서 저 사람의 의도가 악의적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물은 결코 좋게 나오지 않았다. 뭐 그건 그렇고..

* 총평과 여담

(1)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제일 많이 배출한 대학은 육사...;;;이다.
그런데 2021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서울대 출신 대통령, 그리고 유일한 노벨 상 수상자라고 하면 의외로 사람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
유일한 박사학위 소지자라고 하면 할배, 아니면 반대로 고졸 출신이라고 하면 김 대중· 노 무현이라고 금방 떠오르는데, 저건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진다.

(2)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은 어째 재임 순서와 사망 순서가 완전 역순이다.. 무슨 스택도 아니고..
노 무현 09. 5.
김 대중 09. 8.
김 영삼 15. 11.
노 태우 21. 10.
그 다음 전 두환 21. 11. (후배를 따라 나란히 갔구나. 그래도 전직 대통령들 중 퇴임 후에 제일 오래 길게 살았음!!)

(3) 대전 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은 만들어진 지 30년이 훌쩍 넘은 현재까지도 최 규하 한 명밖에 없다.;; 그것도 역대 최단기, 제대로 재직하지도 못했던 대통령만..

Posted by 사무엘

2021/11/27 08:35 2021/11/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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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승만: 한강 인도교 폭파 관련 오해

할배의 집권 시기였던 제1공화국은 미국과 비슷한 4년 중임 간접 선거(나중에 헌법이 개정되어 다 바뀌긴 했지만)와 부통령, 청와대 대신 경무대, 단기 연호, 써머 타임, 화폐 단위가 원이 아니라 ‘환’, 아직 서울 특별시 외에 직할시 광역시 따위 없음.. 이렇게 시스템이 지금과는 다른 게 너무 많았다. 한국어와 한글, 태극기 같은 것만 같았다.

병역조차도 건국 직후 맨 처음엔 모병제였는데 6 25 사변의 트라우마가 생긴 뒤부터 징병제로 바뀌었다. 심지어 기간도 역대 최장인 3년이어서 박 정희 때 1 21 사태로 인해 연장됐던 최장 기간과 동일했다. 뭐 그건 그렇고..

할배의 집권 시절의 흑역사 중 하나로 6· 25 사변 초기의 한강 인도교 폭파가 즐겨 회자되고 있다. 이건 시간을 벌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긴 했지만, 너무 일찍 터뜨리는 바람에 진짜로 후퇴해야 할 병력과 피난 가야 할 시민들도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해서 곤혹을 치르게 됐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다만, 피난민들이 멀쩡히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뜬금없이 그 다리를 폭파해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성수대교 붕괴 사고 때처럼 추락하고 꼬르륵..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쪽으로 역사 인식이 바뀌고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누가 고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무를 포함해 각종 위키에서도 한강 인도교 폭파 때의 자국민 인명 피해가 ‘군경 77명 사망’으로 고쳐졌다.

“그 큰 대교를 폭파하려면 비용은 둘째치고 폭파를 준비하는 데만 최소 몇 시간이 걸린다. 민간인 진입을 통제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인이 인도교 위에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엔 민간인의 피해는 없고, 군경 77명의 피해가 있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 나무위키. 얘는 일방적인 보수 우편향 사이트가 절대 아니다.


윤 서인 인라이트 역사 만화에서나 봤던 설이 위키에도 반영되어 들어가다니 놀랍다. 그런데 폭파 당시에 민간인 피해가 없었다고 해도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럼 그 군경은 도대체 그 시간에 무슨 일로 거기에 있다가 폭발과 함께 강물로 떨어져 순직한 걸까..?? 민간인을 다 통제시켜 놓고 위험한 곳에 있다가 죽은 거면 직무상 순직으로밖에 볼 수 없을 텐데?
그리고 77명이라니. 이거 무슨 경부 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수도 아니고, 숫자가 좀 인위적이어 보인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팩트를 더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 한강 인도교 폭파는 관련 사진이 전해지는 게 전혀 없다. 1· 4 후퇴 때 평양에서 대동강 철교가 폭파되고 피난민들이 거기를 건너는 모습이 잘못 전해지는 경우가 있으니, 거기에 오도되지 마시기 바란다.

  • 폭파 당시 말고 폭파 “후”에.. 다리에 대한 출입 통제가 제대로 안 돼서 피난민 행렬이나 차량이 추락한 경우는 좀 있었다. 이때는 가로등도 없는 칠흑같은 한밤중이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끊어진 것을 뒤늦게 발견했어도 뒤따라 오는 행렬에 떠밀려서 다리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정말 보면 볼수록.. 별로 크지도 않은 이 쬐끄만 나라는 그리 멀지도 않은 과거인 근현대사에 과장과 왜곡과 날조가 너무 많은 거 같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만 보면 사람마다 정반대의 사관을 갖게 되기에 딱 좋다.
김 구의 행적이나 독립군의 전과도 그렇고.. 저 한강 인도교 폭파도 그런 카테고리에 들겠구나.

2. 박 정희: 인상의 변화

대한민국 역사상 최장기 집권을 한 양반이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집권 중에 얼굴이 연식 때문에 삭아(?) 가는 모습도 종류별로 제일 다양하게 존재한다.
솔직히 할배만 해도 1948년에 취임 선서하는 모습이나, 12년 뒤에 4· 19 시위 부상자들을 문병하는 모습이나 내가 보기엔 인상이 거의 차이가 없이 똑같은 할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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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 성명을 내는 모습 사진은 없는지..?? 이걸 못 구해서 딴 걸로 대신했다. 그래도 할배는 12년의 격차가 그닥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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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원조가카는.. 대외적으로 왼쪽 같은 인상이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70년대 중후반으로 갈수록 오른쪽처럼 인상이 많이 삭기도 했다.;;;
그러니 원조가카를 존경하는 진정한 매니아라면.. 사진에서 이 아저씨 머리가 하얗게 샌 정도, 옆에 영부인이 있느냐 장녀가 있느냐 등등의 단서를 토대로 이게 60년대 중후반 모습인지, 70년대 중후반 모습인지 정도는 바로 알아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 업적에 대한 시간 관념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가령, 월남전,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동 건설 근로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 국민 교육 헌장 선포, 경부 고속도로 개통, 10월 유신 정도는 시간 순 나열이 가능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이런 거나 시험 문제로 좀 낼 것이지..
개인적으로는 새마을 운동이 1960년이 아닌 1970년대로 내 생각보다 나중이라는 것에 약간 놀랐다.

3. 박 정희: 일화들

아울러, 박 정희 대통령은 남과 대화를 하다가 대답을 센스와 재치 있게 잘 한 일화가 여럿 전해지는 사람이다.

(1) 미국의 어느 무기상과 거래를 하면서 비자금도 받았는데.. 박통은 이걸 받아서 그냥 쓰윽 하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하지도 않고.. “이 돈은 이제 내 껍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돈을 너한테 도로 줄 테니 그 액수만치 M16 소총을 더 갖다 주시오”라고 대답해서 상대방을 벙 쩔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건 정확한 출처와 일시가 검증 가능한 일화인지 모르겠다.

(2) 1970년대 초쯤엔가 지방 시찰을 갔다가 전주의 유명한 콩나물 국밥 식당 ‘삼백집’에서 전투력 최강의 욕쟁이 할머니를 대면했다. 그 할머니는 이 손님이 대통령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어 이눔 봐라? 네놈은 박 정희 대통령이랑 되게 닮았네? 옜다, 계란이나 더 쳐먹어라” 라고 서빙을 해 줬는데, 박통은 “내가 대통령을 닮은 게 아니고 대통령이 나를 닮은 게요~ ㅎㅎ”라고 점잖게 넘겼다고 한다.

(3) 1965년,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방문해서는(☞ 당시 대한뉴스 영상).. 나름 타국 원수 귀빈이 납셨는데 원하는 거 있으면 들어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생도들 퍼레이드, 생도들에게 연설, 진귀한 선물 등.. 그런데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지금 징계· 벌받고 있는 생도들이 있으면 다 사면해 주시겠습니까?”라는.. 정말 뜻밖의 요청을 했다.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사면령이 떨어지자 박통은 식사 중에 생도들로부터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고, 이 생도들은 졸업과 임관 후에 한국 파견 근무를 선호하는 친한파가 되었다.

아.. 박통은 생각이 깊고 정말 위대한 지도자였다.
학칙 위반 생도 사면은.. 이 사람이 좌빨들이 그렇게도 욕하는 일본 육사를 나오는 바람에 자신부터 군잘알, 사관학교 생도 생활 잘알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었지 싶다. 군알못으로 출세한 사람이라면 어디 저런 답변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성경에서 솔로몬이 하나님에게 부귀영화나 절대권력, 적장의 모가지 따위가 아니라 "백성들을 바르게 통치할 지혜"를 달라고 간구해서 이쁨받았던 것과 비슷한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그 이듬해의 린든 존슨 대통령 방한 환영 행사도 그렇고.. 1960년대에 원조가카가 미국으로부터 점수 따서 지원 많이 받으려고 이런 식으로 노력을 굉장히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4. 전 두환: 일반적인 행적, 치안 안정

1980년대 전땅크는..

  • 통금 해제
  • 컬러 텔레비전
  •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 서울 올림픽 유치와 준비
  • 한강 종합 개발 사업과 올림픽대로
  • 정보화 시대: 삼성 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개발, 8비트 컴퓨터 개발, 1984년의 제1회 전국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

이런 것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다음으로 전땅크는 범죄 예방과 사회 치안 쪽으로도 다음과 같은 독자적인 선정을 베풀었다.

  • "아이가 죽으면 너도 살고, 아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이 윤상(1980), 원 혜준(1988) 유괴 살인 사건. 가해자는 대통령의 약속대로 바로 사형에 처해졌다. 각각 아직 4공이던 초창기와 6공 출범 직전 시기의 일이다.
  • 삼청교육대: 1980년, 4공 시절에 잠깐 있다가 말았던 엽기적인 군대식 교화 시설이다. 비록 강제 징집 때문에 오점이 남긴 했지만 우리나라는 그 시절에 이런 거라도 있어야 했을 정도로 사회 기강이 개판이었다. 지방 조폭, 술 쳐먹고 행패 부리는 양아치들... 본인은 심지어 지금이라도 삼청교육대가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엔 7~80% 정도 동의한다.
  • 가정파괴범: 대한민국 역사상, 살인 없이 강도 강간 누범만으로 사형이 선고되고 집행됐던 때는 할배도, 원조가카도 아닌 전땅크 시절이 유일했다~!! (1985년 11월)

이런 건 서 정주 시인이 지은 오글거리는 송시에도 언급돼 있지 않은 것 같다.;;
전땅크는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무려 30년이 넘게.. 역대 대통령들 중 독보적으로 제일 오래 생존한 사람이기도 하다. 역시 사람은 건강하고 볼 일이다.

5. 전 두환: 악을 선으로 갚기

지난 1984년에 우리나라는 극심한 수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때 북한에서 구호물자를 보내 줬다.
이건 사실, 북한에서도 남한이 그걸 받을 거라고 기대도 안 하고 농담/조롱 반 진담 반으로 “안됐네.. ㅉㅉㅉ 우리가 도와줄까? 구호물자 좀 보내줘?”라고 떠본 것이었다.

그런데 전땅크가 그걸 덥석 물고.. “응~! 좀 도와주면 고맙겠..! 우리가 남이가”이라고 손을 내밀어 버렸다. 그러자 북한도 없는 살림에 구호물자를 갑작스레 챙기느라 혼쭐이 나야 했다.
북에서 급조해서 보내 준 쌀, 시멘트와 옷감 따위의 품질이야.. 이 글에서 더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남한에서는 답례로 그 받은 쌀과 시멘트와 옷감 가격의 수십 배에 달하는 전자제품 공산품들을 북한 근로자들에게 선물로 뿌려줘서 북측의 자존심을 콱콱 구겼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전땅크가 대북 심리? 외교전에서 압승을 거둔 셈이다.

참고로 이건 전땅크의 목을 노렸던 아웅산 폭탄 테러가 벌어진 지 겨우 1년 남짓밖에 안 됐던 시점의 일이었다. 훗날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안 해 놓고 말이야” 이러는 것만 봐도.. 전땅크 역시 멘탈이 보통 멘탈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북괴는 이런 무식하고 야만적인 짓거리로 인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규탄과 손가락질 받고 단교 당하면서 외교전에서 장렬히 자폭했다. 실드의 여지가 없는 몰수패를 당했다.
그랬는데 남한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까지 유치하면서 승승장구 중이니, 남한을 어떻게든 방해하고 저지하면서 자기들도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그러니 초대형 릉라도 경기장을 건설하고 류경 호텔도 착공하고, 올림픽 대신 "세계 청년 학생 축전"을 유치하면서 별별 짓을 다했지만.. 대부분 돈만 날리는 뻘짓으로 끝나고 경제는 나락으로 빠져들게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21/11/24 08:36 2021/11/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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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나치 경례 거부

  • "주변에서 모두가 '예, 예' 할 때 혼자만 양심껏 소신껏 '아니요'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
  •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사관 생도 신조 중)

이런 것의 예시로 요런 짤방이 종종 인용되곤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많은 군중들이 오른팔을 뻗치면서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있을 때 혼자 생까고 가만히 있었던 이 사람은 정체가 무엇일까?
그는 아우구스트 란트메서(1910-1944)라는 독일인이며, 사진은 의외로 전시가 아니고 히틀러의 집권 초기이던 1936년, 나치 독일의 모 군함의 진수식 때 촬영된 거라고 한다.

구체적인 사연은 검색해 보면 다 나오니 여기서 일일이 소개하지 않겠다.
핵심은 이 사람은 유대인 여자와 결혼해서 딸까지 생겼는데 하필 거의 같은 타이밍 때 나치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에게 축객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그는 저 군함을 제조한 조선소의 직원이었다. 그러니 진수식 행사엔 사실상 강제 동원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치 당에도 가입하긴 했지만, 유대인이니 정치니 이념 그딴 건 별 관심 없고 그냥 취업 때문에 가입한 것에 가까웠다.

그랬는데 나치 당에서 유대인들을 못 살게 굴기 시작했으며, 자기에게도 멀쩡한 아내를 버리라고 이혼을 종용한 것이다. 그러니 당이 좋게 보일 리가 없고 경례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전부였다. 이 사람은 단순히 사랑하는 자기 아내를 버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훗날 등장한 백장미단 조피 숄 같은 급으로 전시에 거창한 신념이나 소신을 갖고 나치 경례를 거부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저런 포즈로 대외 공개용 사진이 찍혀 버리자 나치 당에는 저 괘씸한 놈이 누군지 곧장 추적을 시작했고, 당사자 역시 신변의 위협을 진지하게 느끼게 됐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스웨덴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발각됐다. 인종오염법으로 기소되어서 수용소 행..;;

아내는 전쟁 중에 여러 수용소에 끌려 다니다가 1942년쯤에 결국 살해당했다(아마 가스실에서). 저 사람은 살아서 풀려나긴 했지만 이미 비국민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혀 있었다. 어느 죄수 부대에 징집되었다가 1944년쯤에 전쟁터에서 실종 내지 전사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도 어린 딸 둘은 고아원 내지 친인척 집을 거치면서 다행히 살아남아서 자기 부모의 사연을 후세에 전해 줄 수 있었다. 저 사진도 오랫동안 숨겨져 있다가 1991년에 딸에 의해 공개된 거라고 한다.

2. 미국의 태평양 전쟁 참전 거부 (입법)

미국은 1941년 말에 일본으로부터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 공습을 당한 것으로 인해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그래서 새끼 빼앗긴 암곰을 능가하는 복수귀로 각성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엄청난 빡침이 담긴 대국민 담화인지 연설을 한 뒤, 의회로부터 대일 선전포고와 참전 승인을 받았는데.. 상원에서는 전쟁 개시 관련 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러나 하원에서는 388:1로 반대가 딱 하나 있었다.

전미가 왜놈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눈이 시뻘개졌던 험악한 시국에서 홀로 반대표를 던진 용자는 바로..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자 여호와의 증인 급의 반전주의 소신이던 '지넷 랭킨(1880-1973)'이라는 사람이었다.
이 아줌마는 1차 대전부터 시작해서 2차 대전, 6 25 사변, 월남전까지 일체의 전쟁에 대해 자국이 참전하는 것을 일관되게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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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위기에서 이런 아웃사이더가 당장 테러· 협박을 당하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미국이 다양성이 존중받으며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숙한 나라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일제나 나치 독일에서 누군가가 저런 반전 운동을 공개적으로 했다간 그 사람은 어찌 됐겠는가? (군중 속에서 팔 뻗어서 같이 경례 안 한 것만으로도 아까처럼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뒤끝이 뒤따랐거늘..)

하지만 천조국이라도 선 넘을 정도로 이상한 소신을 포용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 아줌마는 이를 계기로 소속됐던 공화당에서 퇴출되고, 정치판에서의 커리어가 통째로 끝장 났다고 한다.
결국 2차 대전 이후의 반전 운동은 정치인이 아니라 사회 운동가로서 개인 단위로 진행됐다. 분야는 다르지만 개고기 반대하면서 이상한 똥고집 부리던 프랑스의 그 아줌마 생각이 문득 난다.;;

3. 곁가지: 미군의 일본군 시체 훼손

이건 참 경이롭고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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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1944년 5월, 미국의 어떤 아가씨가 남자친구로부터 웬 해골바가지를 선물로 받고는.. 잘 받았다며 감사 답장을 보내는 모습이 보도된 것이다.
남친은 해군에 입대해서 태평양 전쟁터에서 한창 고생 중이었는데.. 전사한 어느 적군 병사의 유해에서 두개골을 추출해서 여친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전시이니 저 여친도 군수공장에서 근무 중이었으며.. 저 때 나이는 겨우 20살이었다.

그 당시에 일본에 대한 미국의 증오심은 일선의 병사들이 일본군 시체에서 해골바가지를 뜯어내서 장신구로 쓰고 연인에게 선물로 보낼 정도로 극심했다.
최악의 증오스러운 적을 상대로 싸우는 데다, 억만 리 떨어진 망망대해의 섬에 상륙해서 밀림 속에서 전투를 벌이던 태평양 전쟁터는 환경도 최악의 생지옥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본놈들도 상대방에 대해 "저놈들은 귀축영미, 항복했다간 무조건 죽음" 이딴 소리에 골수까지 세뇌된 괴물들이었다. (얼마나 세뇌됐으면, 훗날 전쟁이 끝났으니 귀환하라는 말조차도 안 믿고 섬에 틀어박혀서 거지꼴로 몇 년을 버틴 사람들조차 있었을 정도..)
같은 백인 코쟁이에 기독교 배경이 있고, 말과 문화가 일말의 통하는 구석이라도 있는 서부 전선의 나치 독일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전쟁터에서는 최악의 조건이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그야말로 인외마경이 펼쳐졌다. 그 살벌함은 포카혼타스 Savages를 아득히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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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 보시라. 천조국 군인들이 차라리 평시에 군기가 빠져서 민간인을 상대로 외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우는 있지만..
전시에 적군의 시체를 훼손해서 저렇게 갖고 놀고 그게 저 정도로 대대적으로 매스컴까지 탔던 건 남북 전쟁, 미영 전쟁, 1차 대전, 월남전, 이라크전 등등등을 통틀어서 저 태평양 전쟁이 전무후무할 것이다. 물론 군 수뇌부에서 이런 짓을 금지하고 단속하긴 했지만, 악이 받칠 대로 받친 군인 개개인의 감정을 다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천하의 미군이니까 이 정도로 정신줄을 놓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해골바가지만 득템해서 장식품으로 써먹는 정도의 짓밖에 안 한 것이다.
일본군은 뭐.. 연합군 포로들을 훨씬 더 잔혹하게 고문하고 학대해서 다 죽이고, 100인 참수 경쟁을 벌이고, 어떤 곳에서는 심지어 대놓고 식인까지 했다.

이런 악랄한 경험으로 인해, 미국은 쟤들은 안 되겠다고 원자 폭탄까지 터뜨릴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훗날 전범 재판에서도 일제 전범들을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총살도 아닌 그냥 교수형을 집행할 것을 건의하게 됐다. 교수형은 군인으로서의 예우를 박탈한다는 걸 뜻한다.
반대로 나치 독일 전범에 대해서는 독소 전쟁의 트라우마가 있는 소련이 더 강하게 교수형 사형 집행을 요구했다.

4. 일본 전범의 사형 거부 (사법)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와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뒤엔, 다들 잘 알다시피 일본의 군인 지휘관과 정치인 중에 전쟁 범죄자를 가려내어 단죄하는 재판이(극동 국제 군사 재판) 열렸다. 침략 전쟁을 벌이고, 전투 중에 적군을 죽이는 게 아니라 민간인이나 포로를 고문하고 학살한 짓거리들 말이다.

그런데 이때 재판을 진행했던 연합국--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소련-- 판사들 중에 '라다비노드 팔'이라는 인도인은 유일하게 아싸 행세를 했다.
다른 판사들은 전범들을 처형하는 것에 다 동의했고 총살이냐 교수대냐를 갖고 논쟁하는 정도였던 반면, 저 인도인 판사는 혼자 강경하게 처형을 반대하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을 실드 쳤다.

그는 단순히 인본주의 박애주의자로서 사형 제도를 반대한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민족 감정상으로 엄청난 친일 성향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다가 법을 뒤늦게 끼워 맞춰서 적용하는 건 부당하다, 왜 일본에 대해서만 일관성 없이 가혹한 잣대를 적용하느냐, 연합국은 가혹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줄 아느냐, 너는 왜 그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인제 와서 일본 탓을 하느냐" 등..
법리까지 거의 무시하면서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일본을 적극 옹호했다.

그러니 일본에서는 저 사람이.. 우리 한국으로 치면 후세 다쓰지--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일본 변호사--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극진한 예우와 존경의 대상이 됐다.;;; 야스쿠니 신사에 추모비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도 진작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본이 자국 인도를 식민지로 부려먹은 영국과 맞서 싸웠기 때문에 저 사람도 '적의 적은 친구' 논리로 일본을 옹호했던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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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인도는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에 대한 국민 정서도 오늘날까지 굉장히 우호적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애 이름까지 ‘아돌프 히틀러’라고 지어서 Adolf Lu Hitler Marak라는 이름의 1958년생 정치인도 있을 정도이다~!
하긴 인도인들은 영국인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지 나치 독일에 의해 수용소 가스실로 끌려갔던 적은 없으니까.. 일면 수긍이 간다.

Posted by 사무엘

2021/11/01 08:35 2021/11/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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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성의 독립운동가

(1) 최 재형(1860-1920)
요즘 이 이름은 ‘이 회창’처럼 감사원장을 역임한 대선 후보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활동한 유명 독립운동가 동명이인도 있었다.
그는 겨우 10대의 나이로 생활고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탈북하듯이 무작정 러시아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꽃제비처럼 쓰러져 굶어 죽을 뻔했는데.. 어느 선한 러시아인 선장 부부가 그를 구해 주고 양자처럼 공부도 시키고, 자기 상선(무역선)에 태워서 선원일도 가르치면서 잘 키워 줬다.

그는 러시아어에 능통해서 한국어와 통역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와 러시아 업주 사이에 중재를 잘 하고 일감 조율을 잘 한 공로로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그는 이걸로도 모자라서 양부모로부터 한 밑천 물려받았는지 군수업을 시작해서 엄청난 부자까지 됐다. 알거지 빈털터리 상태에서 러시아에서 이 정도로 성공했으니 정말 역전의 용사 개룡남이 따로 없는데..

그는 러시아에서 자신 같은 불우한 처지에 놓인 동포들을 돕고 가르치는 일에 애썼으며, 조국 조선이 일제에 망할 위기에 처하자 항일 독립 운동에 자기 자산을 대부분 탕진했다. 그리고 안 중근 의사에게 권총을 사 주고 사격 훈련을 시켰다. 안 의사의 의거의 배후에 이 사람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 중근이 아저씨 차 태식이라면, 저 사람은 문 달서 정도 되는 셈..

그는 훗날 1919년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정말 뼛속까지 애국자로 살았지만.. 이 때문에 일제로부터 추적을 받기 시작했고 러시아 정부로부터도 밉보이게 되었다. 결국 1920년에는 일본군에게 잡혀서 그대로 총살 당해 순국했다.

(2) 함 태영(1872-1964)
생몰년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승만 할배와 거의 동연배이며 비슷하게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이 사람은 공부 잘하고 똑똑했는지, 20대 초반의 나이로 법관양성소를 수석 졸업하여 판사가 됐다. 갑오개혁으로 인해 등장한 근대식 법조인의 1호 원로 원조인 셈이다.

그래서 고종 황제 시절에 김 홍륙이 저지른 고종· 순종 독살 미수 사건(1898)을 재판했는데.. 먼 훗날, 대한민국에서 심계원(감사원)장과 제3대 부통령도 역임했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에서 모두 고위 공무원을 한 사람이라니, 정말 엄청나지 않은가?? 일제 시대에도 전관예우를 받아서 계속 법조인으로 있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거절하고 그 동안은 목사와 교육자로 살았다.

서 재필과 이 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는 그냥 반역자로 몰렸고, 일제 시대 동안엔 미국에 가 있었다. 함 태영은 저런 사람과는 굉장히 대조적이다.

(3) 서 재필(1864-1951)
이 사람도 최 재형 이상으로 근성의 개룡남이었으며, 함 태영 이상으로 머리 좋고 공부를 겁나게 잘했던 것 같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면서 과거에 급제했다. 하지만 개화물 먹은 뒤 갑신정변으로 인해 역적으로 몰려서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했다. 부모와 친형제, 아내까지 몽땅 사약, 자결, 피살 등의 방법으로 죽었다~!! 이때 심지어 어린 자식까지 죽고 말았다.

요즘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 당사자도 멘붕 자살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제 조선의 조 짜만 나와도 학을 떼는 골수 혐한 친일파로 돌아서지 않았을까?
그런데 서 재필은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망명 가서는 빈털터리 상태에서 먹고 살려고 직싸게 고생하며 주경야독을 거듭했다. 물론 도와 주는 선교사 후견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미국은 아직 인종 차별도 있던 살벌한 상태였다.

그는 그 여건에서도 학교에서 1등을 도맡아 하면서 고등학교 졸업식 때 대표 고별 연설을 하는 우등생 모범생이 됐고--(물론, 미국 토박이 동년배 고등학생들보다야 나이가 훨씬 더 많았음..)--, 자국도 아닌 미국에서 의사가 됐다. 친인척을 모두 잃은 알거지 역적 신세로 미국으로 망명 간 지 딱 10년 만에 미국 의사가 된 것이다.

다행히 고국에서도 갑오개혁을 계기로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해서는 사면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구한말 때 잠시 귀국해서 독립 덕후 활동을 하던 당시엔.. 그는 머리로 동포의 자주 독립은 지지하지만 가슴에 조선 자체에 대한 애정은 싹 사라진 상태였다.
조선 땅에서는 완전 코쟁이 미국인 행세를 하면서 "오우 노!! You Koreans들은 이래서 안 돼.. ㅉㅉㅉ" 삿대질을 하고.. 조선 백성들도 그냥 가르치고 계도해야 할 미개인 정도로 생각하면서 자기와 거리를 뒀다고 한다. 뭐, 인간적으로 이해는 된다.

서 재필은 한국이 배출했지만 한국이 제대로 키워 주지 못한.. 참 여러 모로 아까운 인재였다.
그의 유해는 1994년 3월경에 한국으로 돌아왔다(전 명운 의사의 유해와 함께). 공 병우 박사가 다른 관혼상제나 행사에는 좀체 참석을 안 했는데, 이 사람의 유해 봉환식에는 일부러 찾아가 참석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일본인

(1) 소다 가이치(1867-1962)
일본인으로서 기독교 선교사 겸 고아원 원장으로 평생을 헌신한 분이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면서 105인 사건이나 3· 1 운동 때는 조선인들을 편들고 실드 쳤으며, 전후에는 자국을 상대로 전쟁 범죄에 대한 회개와 사죄를 촉구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정신을 잃고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조선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살아났으며, 월남 이 상재 선생으로부터 기독교 전도를 받기도 했다. 그런 경험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호의가 자연스럽게 생긴 것 같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유일하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묻혔다. ‘후세 다쓰지’ 만만찮은 대한 독립 유공자 일본인으로서 손색이 없으나, 정식으로 인정은 아직 못 받았다.

(2)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조선총독부 산림과에서 근무한 관료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의도가 없이 진짜 순수하게 학자 내지 덕후로서 조선의 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일본인이었다. <조선의 소반(밥상)>(1929)과 <조선도자명고(도자기 도예 관련)>(1931)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망우리 묘지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은 아니고 두 명 중 하나이다.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는데, 죽을 때의 유언도 “조선 식 장례로 조선 땅에 묻어 달라”였다고 한다.

3. 역관 출신

(1) 김 홍륙 (러시아어)
이 사람은 천민 출신이었지만, 함경도 출신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어부 생활을 한 덕분에 러시아어 회화가 가능했다.
마침 1880년대의 조선 정치판에서는 “친러가 살 길이다” 라인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잘하는 인재를 찾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런 시대를 잘 탄 덕분에 벼락출세길이 열렸으며 고종의 측근으로서 부귀영화를 엄청난 누리게 됐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쥐락펴락 하는 고위 공직자에 걸맞은 인품, 교양, 학식을 갖추지 못한 채 친인척까지 동원해서 부정축재와 학정을 일삼았다. 무능한 암군 소리를 듣는 고종이 보기에도 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그는 결국 짤렸다(파직).

그런데 김 홍륙은 이에 앙심을 품고 고종과 순종 부자를 통째로 암살, 독살하려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이 마시는 커피에다가 몰래 치사량의 아편을 탔는데.. 고종은 커피 맛이 이상한 걸 알고 곧바로 뱉었지만, 순종은 그걸 그대로 마셔 버려서 한동안 앓아누우며 고생했다.

이 어설픈 사건은 곧장 배후가 드러났는지, 김 홍륙은 곧바로 교수형을 당했다. 왕을 통째로 암살하려 했으니 이거야말로 10여 년 전 갑신정변 주동자를 능가하는 역적이었으며, 동시대의 중국이었다면 능지형을 당해도 쌌다. 그래도 갑오개혁을 계기로 연좌제가 폐지되고 잔인한 형벌도 금지된 덕분인지, 그는 김 옥균이나 서 재필 같은 급의 멸문지화를 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훗날 1919년, 고종은 식혜를 마시고 나서는 심한 복통과 각혈을 호소하다가 죽어 버렸기 때문에 이거야말로 일제에 의한 독살설의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고종의 붕어가 3· 1 운동의 강력한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것도 명백한 팩트이고..

(2) 이 하영 (영어)
이 사람은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랬는데 미국인 의료 선교사 알렌과 만나게 되고, 어설픈 일본어와 영어 실력만으로 고종 황제의 개인 통역관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사례를 보면 인생은 정말 타이밍인 듯..

그는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출세하고 성공하면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줄 잘 서고 기회 잘 잡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결국은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일제로부터 자작 지위도 받고, 조선 귀족으로서 떵떵거리며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더 옛날에 김 대건 신부도 똑똑해서 외국어를 몇 개씩이나 구사했다고 한다. 조선의 관료들도 그 실력이 아까우니 가톨릭 신앙만 버리면 당장 살려 주고 벼슬도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남에게 없는 외국어 실력을 갖고도 이렇게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연 저렇게 산 사람도 있었다.;;
참고로 이 하영의 손자 중 하나가 참 군인이라 일컬어지던 이 종찬 장군이다.

4. 이완용보다 더 부자 매국노

구한말에 나라를 팔아넘겨서 그 댓가로 호의호식했던 매국노는.. 그 뒤에 활동했던 생계형 친일파나 부역자하고는 성격이 좀 다르다. 전자가 후자보다 수가 더 적으며, 훨씬 더 부유하게 살았고 죄질도 더 나쁘다고 봐야 한다.

매국노의 대명사야 뭐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교집합 그랜드슬램을 모두 찍은 이 완용이다. 하지만 재산으로만 따지자면 이 완용보다 더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서 더 갑부, 더 억만장자가 된 반역자도 있었다.

  • 민 영휘: 남이섬이 바로 이 사람의 손자인 민 병도의 사유지라 해서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그 시절에 그 정도 가격이면 한국 은행의 총재까지 역임했던 능력자 민 병도가 개인 연봉과 퇴직금만으로 마련할 수 있는 부동산이고, 딱히 친일의 댓가· 피 묻은 돈이라고까지 볼 수는 없다는 판결이 내려진 상태이다. (참고로 국사학자는 이 병도이구나)

  • 윤 덕영: 지금의 수성동 계곡까지 포함해서 서울 옥인동, 인왕산 자락까지 그야말로 초대형 저택을 꾸렸던 미친놈이었다. 재산이 이 완용보다도 몇 배는 더 많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받은 은사금을 밑천으로 해서 각종 부동산이나 사업으로 재산을 더 불린 것도 생각해야 한다. (참고로 축구 선수 골키퍼는 홍 덕영..;;)

Posted by 사무엘

2021/10/29 08:35 2021/10/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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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차우세스쿠의 몰락

1945년 4월 말,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형 당하고 처참하게 시신 능욕을 당하는 걸 보고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는 절대로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으며, 자살한 자기 시신을 철저히 화장해 없애서 적에게 신원 확인이 안 되게 하라고 부하들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으며, 치열 대조를 통해 히틀러의 시신이 확인됨)
무솔리니가 죽은 지 겨우 이틀 뒤에 히틀러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 뒤 1989년 12월 말, 루마니아의 공산 독재자 니콜라 차우세스쿠가 시민 혁명에 의해 축출되고 처형 당했다. 20세기의 독재자 중에서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멍청한 짓을 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번엔, 이 사건을 접하고는 평소에 켕기던 게 많아서 “우리도 까딱 잘못했다간 이렇게 되는 거 아냐?”라고 와들와들 떨고 당황했던 인간들 중 하나는 북괴 김씨 일가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당연히 주민들이고 군인이고 서로 더욱 감시하고 밀고하게 만들고, 그런 비생산적인 짓거리에 세금과 공권력을 더욱 투입하고..
북한은 그야말로 역대급으로 폐쇄적이고 내부에서 항쟁, 혁명, 쿠데타 같은 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형태로 사회 구조가 더욱 썩고 곪아 버렸다.

영화 “Downfall/몰락”(2004)은 히틀러가 전쟁에서의 패색이 짙어지자 부하들을 탓하며 광분하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행적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다음으로 “일본 패망 하루 전”(2016)은 역시 항복 열흘쯤 전부터 원자폭탄 두 방 맞은 것 하며, 히로히토 천황은 어린 신민들을 위하야 어엿비 너겨 항복을 결단하는데 밑에서 또라이 같은 장교들이 항명하여 쿠데타를 벌이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본에서 스스로 ‘일본 패망’ 이딴 식으로 영화 제목을 붙인 건 당연히 절대 아니다.. ㅋㅋ 저건 우리나라 개봉 때 붙은 로컬라이즈된 제목이다.
이 둘은 동양과 서양에서 제각기 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 전범국이었던 두 나라가 말기에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영화들이라 하겠다.
독일의 히틀러는 총통으로서 국가 원수와 군 사령관 역할을 겸한 반면, 일본 천황은 신민들에게 얼굴조차 안 비치는 신이고 밑에 육군과 해군이 제멋대로 놀면서 폭주했다는 차이가 있다.;;

독일이 패망하는 영화가 제목이 Downfall인데.. 일본이 원폭 두 방을 맞고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을 때 일본을 상대로 시행되려 했던 특급 전면전 작전의 이름도 Downfall이었다.
북괴 정권이 일제나 나치 독일처럼 멸망하지 못하고 김씨 일가가 차우세스쿠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2. 중요한 개념 정리

(1) 남한과 북한이 이산가족들의 눈물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서로 왕래를 금지하는 이유는..

  • : 간첩, 공작원들이 지령 받고 와서 불순한 짓을 할까 봐 두려워서
  • : 자기 주민들이 바깥 사정을 알게 되고 자기 체제의 치부도 알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렇기 때문에 북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고 이념 앞에서 가족도 없고, 남한 체제에 동화되지 않을 정도로 멘탈이 강제 개조된 인간흉기만을 남한에 공작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반대로 남한에서는 그 어떤 종북분자들도 아예 북으로 가서 눌러앉아 살라는 말은 절~~~대로 안 듣는다. OK???

이게 반박불가인 팩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디 반박할 테면 반박해 보셔~)
그러니 이 본질적인 방해 요인을 해소하지 않고서 남북 교류니 협력이니 개방이니 헛짓 하는 건 전부 그냥 돈지랄 정치 쑈 사기극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거나 국제 정세가 바뀌면 언제라도 파토 날 수 있다.
자유로운 서신 왕래나 전화 통화 하나 없이 무슨 개방이여 미친..

(2) 종북과 좌빨은 엄밀히 말하면 서로 다른 속성이다.

  • 좌빨: 북괴에 대한 호감도나 충성도와는 무관하게 그냥 우리나라 경제 구조를 증세, 공유 위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처럼 바꾸고 싶어함. 부자들 증오하면서 자기는 부자가 되고 싶어함.
  • 종북: 우리나라 정치 경제 구도와는 무관하게 그냥 우리나라 정체성을 부정하고 북괴 수뇌에게 충성하고 저쪽에 못 퍼 줘서 안달. 미국/일본 잣대와 중국/북괴 잣대가 심각하게 일관성 없음.

그러니 서로 다르긴 하다. 종북은 아니고 좌빨만 강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둘이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만 해당하고 다른 하나가 완전 강경하게 정반대인 사람은 거의 없다. 미사일 아니면 발사체, 간첩 아니면 활동가(!!)라는 차이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3) 오늘날의 북괴는 무슨 스탈린, 레닌이 어떻고 하는 공산주의 집단은 아님.
공산주의 이념보다는 '공산주의자의 수법'만 그대로 계승해서 자기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집단이다. 이게 핵심..

3. 현실 직시

(1) 고래잡이를 근절시켜 준 것은 그린피스의 무식 과격한 시위가 아니라 고래기름 대체재의 개발이었다.

(2) 고문과 강압수사를 이만치라도 없앤 건 DNA감식, CCTV 등의 과학수사이지, 민주팔이 데모꾼들의 깽판 시위가 절대 아님.
민주화를 골백 번 한다 해도 고문과 강압수사를 동원해서라도 용의자를 잡아내야 할 강력 범죄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3) 산의 나무를 베지 않아도 되게 하고 벌거숭이 민둥산을 푸르게 지키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한 것은.. 무슨 자연 보호 운동 따위가 아니라 화석연료이다(땔감의 역할 대체). 그리고 그 더티한 화석연료조차 쓰지 않아도 되게 해 준 것은 정말 역설적이게도 원자력이다!!

(4) 1940년대의 일제를 굴복시킨 것은 사랑의 원자탄 fat man과 little boy이지, 무슨 아가리 파이팅이나 맨주먹 항쟁 따위가 아니었다.
(아 물론, 일제를 굴복 항복시켰다고 해서 한반도가 100% 자동으로 해방되지는 않을 수 있었고, 일제만 물러난다고 해서 거기가 자동으로 한국인 소유로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거기부터는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기여한 것도 약간 있음)

(5) 우리나라가 민주주의가 잘 정착한 건 그나마 독재 흉내나 좀 냈다는 대통령들부터가 사실은 민주주의를 적극 추구했으며, 호구에 가깝게 너무 착하고 선량하고 순진해 빠졌던 덕분이다. 세상에 어느 정신나간 바보 등신 독재자가.. 자기더러 물러나라고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다치자 문병을 갔으며, 너희들이 장하다고 칭찬을 했느냐 말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선량하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데모질 좀 해 봤자 옛날의 북한, 중공, 헝가리, 캄보디아처럼, 요즘 미얀마처럼 총칼과 탱크에 진작에 싹 다 진압되고 갈려 나갔을 것이다.

아이고 이런 예가 얼마나 더 있을까? 현실을 좀 똑바로 직시하도록 하자.
현실을 직시할 줄 모르니까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오로지 "일제와 독재에 항쟁"밖에 없는 줄 안다.
그리고 북한 주민들은 민주 의식 저항 의식이 부족해서 김씨 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했다느니,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게을러서 남한보다 못살게 됐다느니(혹은 미국놈들이 경제 봉쇄를 해서-_-) 같은 개 헛소리가 찍찍 나오는 것이다. 이건 사상과 분별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뜻한다.

4. 사상 단속

본인의 지인 중에는 현역 군 장교도 있고 국· 공립대의 교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보아하니 이분들은 소속의 특성상 개인 SNS에서 정치· 종교 분야의 자기 사상과 견해를 표현하는 것에도 좀 제약을 받는 것 같다. 상부에서 자기들의 SNS 계정까지 모니터링이라도 하는지, 몸을 사리시는 게 느껴진다.

내가 알기로 공무원은 타 영리 활동 겸직(사교육 교사, 대리운전, 알바 등..)이나 노조 설립, 정당 활동 정도가 금지이다. 비영리로는 시인 등단까지도 가능한 걸로 아는데.. 왜 업무 외의 영역인 사생활에 저런 제약이 가해지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저런 지엽적인 사상 단속은 그리도 꼼꼼히 하면서..
지금 공립 학교에서 어린애들한테 철저하게 정치 이념을, 그것도 매우 해롭고 악하고 불순하고 잘못된 쪽으로 주입해 넣고 있는 전교조 교사들 단속은 교육계에서 제대로 하고 있는가? 난 이에 대해 깊은 회의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교사를 뽑을 때 인성 면접에서 다같이 “김XX 개XX”를 소리내어 복창하고 동의시키든가, 그게 민망하고 남사스러우면 임용 시험에서 필적 확인 문구로라도 저걸 필사시켜야 하지 않나 싶다.
민망하고 남사스럽다고 최소한의 인증을 안 하다 보니 지금은 교육계가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적화됐기 때문이다.

사상이 저쪽으로 불량한 놈들은 사형, 추방, 삼청 교육대, 정신병원 중 하나가 마땅하겠지만, 사정상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법조인, 성직자, 정치인, 교육자 같은 직업은 절대로 가질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냥 사기업 월급쟁이나 자영업 장사로 자기 전공 기술만 이용해서 밥벌이를 할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권위와 영향을 행사하는 직업은 절대로 넘볼 수 없게 해야 한다.

5. 죄책감??

또한 본인은 군인(특히 일개 병사가 아니라 사관생도나 장교)이나 사형 집행관이라는 사람이 자기 직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쓸데없이 죄책감 운운하는 게 굉장히 싫고 마음에 안 든다.
그건 의대생이나 현업 의사가 무섭거나 비위 상한다고 해부 실습 내지 수술을 못 하는 것과 비슷한 꼴이다. 그럼 애초에 그 업계로 가질 말았어야지..

사형수한테 밧줄 씌우고 교수대 버튼 누르는 교정직 공무원은 자기 감정이 아니라 불쌍한 피해자 유족을 대변하는 심정으로 일을 해야 한다. 어디 뱃대지가 불러서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남북 통일이니 협력이니 하기 전에, 먼저 북한에 올바른 통치 체제를 이식하고 개방을 시키고 서신과 통신 왕래라도 시켜야 된다. 그게 억만 배는 더 중요한 일이다.
인과관계와 우선순위를 이렇게 따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이런 게 정치 성향이나 종교관에 따라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사항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비정상인가..?? ㅡ,.ㅡ;;;

내 경험상 필요악을 없애자고 선동하는 놈들은 그놈들이야말로 진짜 절대악이 아닌 적이 없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8/18 08:35 2021/08/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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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 십용사

본인은 작년 말쯤에 본인과 같은 진영에 속한 이웃 교회 형제들과 교제할 일이 있어서 화성 동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반원 모양의 방사형으로 만들어진 시가지가 인상적이었는데.. 외곽의 도로에는 웬 '십용사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흠, 육탄 십용사 멤버 중 일부가 이 지역 출신이기라도 했나 보다.

3년쯤 전에 도로명을 통해서 우연히 이 윤탁 한글 영비를 알게 된 것처럼.. 도로명을 잘 지은 게 나름 지역 역사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저기는 아예 육탄 10용사 기념 공원까지 길목에 있는 걸 봤다. 다만, 시간과 동선 관계상 개인적으로 들러 보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군사 정훈 차원에서 기리는 여러 인물과 사건들 중, 육탄 10용사는 극히 드물게, 거의 유일하게 6 25 사변 "이전"의 굉장한 옛날이 배경이어서 이질적이다. 1년 남짓 전이던 1949년 5월, 지금 같은 휴전선이 아니라 38선이 아직 유효했고 개성 시내가 남한 땅이었던 시절이다.

문제는.. 38선에 따르면 개성 시내는 남한이지만, 바로 북쪽의 고지대인 송악산 중턱과 정상이 북한 땅이어서 남한이 방어하기가 매우 불리했다는 것이다. 북괴는 6· 25를 벌이기 전부터 여기에서 수시로 툭탁거리고 국지전 시비를 걸면서 남한을 귀찮게 했다. 그래서 그걸 견제하려면 북괴가 송악산의 남쪽 기슭에 만들어 놓은 벙커라도 파괴해야 했다.
(뭐, 그 시절 용어로는 벙커 대신 러시아어 '토치카'가 더 즐겨 쓰인다. 휴전선의 길이도 킬로미터가 아니라 꼭 155 '마일'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특공대에 자원해서 혈혈단신으로 괴뢰의 토치카를 수류탄으로 까 버리고 전세를 뒤집고 송악산 고지의 탈환에 큰 공을 세운 용사들이 열 명이었고 '육탄 10용사'라고 전해진다. 이들은 적진에서 장렬히 산화했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에서는 이 사람들을 진정한 군인 애국자라고 아주 성대하게 기념했다. 동상 만들고 노래 만들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이름을 딴 군부대와 상 등도 제정하고 별 짓을 다 했다.

전쟁터라는 게 한 사람의 뻘짓 때문에 수십 명이 몰살당할 수 있고, 반대로 한 사람의 희생 덕분에 수십 명이 목숨 건질 수도 있는 동네이다. 그리고 옛날에는 지금보다 인명 경시 풍조가 더 심했으며, "이기든지 죽든지", 멸사봉공 진충보국 같은 관념이 더 강했다는 것도 감안할 점이다.

하지만, 저 사람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송악산 기슭과 개성 시내는 6 25 전쟁 때 결국 지못미가 돼서 완전히 북한으로 넘어갔다.
게다가 저 사람들도 죽은 게 아니라 작전에 실패했으며, 전부나 일부가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는 증언이 훗날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북한의 대남 방송에서도 육탄 10용사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병사가 출연해서 자기 고향과 가족 인증을 했댄다..;;

너무 옛날 일인지라 이제 와서 정확한 진실을 알기는 난감하다.
다만, 북한에서 존재를 인정하고 언급한다고 해서 걔네들 말이 언제나 다 맞는 건 아니다.
북한에서 뜬금없이 효순이 미선이 자리를 만들고 추모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걔들이 무슨 대공 안보 관련 사건에 휘말렸거나 미군의 '악질 범죄'에 희생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무슨 광주에 투입됐던 대남 공작원의 묘지인지 위령비인지를 만들었다면서 5 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걔들은 자기와 아무 관계 없는 4 19 의거나 6 29 민주항쟁 등도 자기들이 이용할 가치가 있으면 제멋대로 기념하고 선동 자료로 써먹는다.
그리고는 정작 진짜로 침투했던 대남 공작원이나 6 25 공산군 병사들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면서 존재를 부정하고 유해를 가져가지 않는다.

즉, 이런 쪽으로는 북괴의 대처가 일관성 없이 제멋대로인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쟤들의 반응만을 직접적인 근거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육탄 10용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황상 그 시절에 10명의 특공대가 조직돼서 폭탄을 들고 송악산 고지를 향해 달려갔다는 사실 자체는 팩트이지만.. 그 이상 정확한 사건의 결말을 알기는 어려워 보인다. 거기가 무슨 철원 백마고지마냥 6 25 때 피로써 수복해 내서 지금 전해지는 영토인 것도 아니고, 또 지금이 옛날처럼 카미카제 같은 전술이 마냥 미화되는 시기인 것도 아니니..

그러니 육탄 십용사는 문자적 적용보다는 '영적 교훈'이 더 의미를 갖는 영역인 것 같다. 북괴 몰아내고 개성 시내를 대한민국 국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해당 장소에 대한 고증과 재조사 발굴이 대대적으로 필요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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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현충원에 있는 육탄 10용사 현충비. 굉장히 옛날(2007년!)에 찍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또 달라졌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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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1/07/05 08:35 2021/07/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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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권 선언

지난 1948년에는 이스라엘이 건국됐고(5월) 대한민국도 미군정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하여 건국됐으며(8월), 이어서 연말인 12월 10일엔 UN 총회를 통해 '세계 인권 선언'이란 게 선포됐다. (☞ 한국어 번역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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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어떤 아지매가 4절지? 2절지 정도 되는 큼직한 종이에 뭔가가 빼곡히 인쇄된 걸 펼쳐들고 있는 모습 패러디 짤방을 본 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 아지매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영부인이었고, 원전이 바로 세계 인권 선언이라는 것을 본인은 비교적 최근에야 알게 됐다. =_=

  • 어린이 헌장도 아니고(어린이를 학대하지 말고 기본적인 건 보장해 주며 특별히 보호해 주자),
  • 제네바 협약도 아니고(전쟁을 하더라도 지킬 건 지키고 싸우자, 포로의 인권을 최소한은 보장하자),
  • 국민 교육 헌장 같은 것도 아니고(교육 잘 하고 잘 받아서 민족을 중흥시키고 새 역사를 창조하자)..

모든 인간은 누구나 인종 피부색 국적 종교 무관하게 존엄하고 평등하다, 저것 갖고 부당한 차별 박해를 하지 말자,
인간에게는 결혼하고 먹고 자고 국적 선택할 권리가 있고, 거주지 옮기고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전근대적인 세습 노예 제도나 피의자 고문은 잘못됐다, 자국민을 무국적자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등등~~

지금 우리로서는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그야말로 제국주의 식민지와 우생학, 2차 세계 대전 같은 비극적인 짓거리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30개에 달하는 조항에 담겨 있다.

이 선언은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저기에 담긴 이념이 세계 자유 진영 국가들의 헌법에 그대로 녹아들어가 사실상 국제 관습법이 됐다. 그리고 성경 같은 여느 유명 문헌 만만찮게 수백 가지의 언어로 번역됐다.
이 시기에 세계 각국의 나라들이 왕정을 버리고 공화정으로 체계가 바뀌었다. 오죽했으면 조선 만만찮은 꼴통 카스트 신분제 국가이던 인도조차도 최소한 법으로는 이제 신분제를 부정하고 만민이 평등한 민주 국가를 표방하게 됐을 정도이다.

물론 지금은 인권 운동이라는 것들이 너무 오바하고 선 넘어서 사형 제도 폐지와 동성애 합법화, 범죄자 인권만 챙기기, 죄 지을 권리만 챙기기, 죄를 죄라고 말하는 것을 반인권 프레임 씌워서 금지시키기.. 이딴 식으로 변질된 면모도 많다. 하지만 저 시절에 저런 인권 선언이 세계적으로 선포된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었다.

저런 인권 선언이 없던 옛날을 생각해 보자. 서양은 타 인종· 타 민족을 노예로 부렸고, 조선은 자국민의 과반을 노비로 부려먹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국력이 강해지고 나니 아예 인종 전시회, 인간 동물원을 열었다.
흑인 노예는 짐승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도기 생물 정도로 여겨졌다. 죽은 시체를 해부해 보니 장기 구조가 백인과 아무 차이가 없는 걸 보고는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이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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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원주민 여성인 사키(세라) 바트만(1789-1815). 유럽인들의 침략으로 영국에 혼자 끌려와서 알몸으로 구경거리 취급을 당하다가 타지에서 한 많은 삶을 일찍 마감했다.)

그리고 상피병이나 이상한 비늘증 유전병에 걸려 외모가 흉측해진 사람은 구약 시절의 문둥병 환자 취급이었다. 천벌 받은 죄인이니까 왕따 시키거나, 아니면 서커스에 보내서 놀림감으로 만들었다. (요 9:2 같은..).
세계 인권 선언은 바로 저런 짓을 앞으로 되풀이하지 말자고 다같이 결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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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메릭(1862-1890). 흑인이 아니라 엄연히 유럽 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전병으로 인해 심각한 피부 기형이 발생하여 인간 취급을 못 받았다. 평생을 놀림과 학대를 받으며 기구하게 살았다. 이 사람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the elephant man (1980)이라는 영화도 이미 나와 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포로 70년을 겪고 나니 종족 특성이 싹 바뀌었다. 비록 그 뒤에도 주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다해 100점짜리로 섬긴 것은 여전히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옛날처럼 바알 같은 우상을 대놓고 따르지는 않고 외형적으로 골수 유일신 민족으로 탈바꿈했다.
그것처럼 이 인류도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참극까지 겪은 뒤에야 옛날 같은 식민지 쟁탈전, 인종과 종교로 인한 전쟁이 '1세계의 외형'으로 한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멎었다. 아쉬운 대로 평화가 찾아온 셈이다.

다음으로 국제 기구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독교계 중에서도 꼴통에 가까운 보수 우파, 그리고 정치 종교 통합과 세계 단일 정부 음모론 이런 걸 진지하게 고려하는 진영에서는 UN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심지어 UN이 창립된 뒤부터 세상은 전쟁이 오히려 더 늘어나고 더 혼란스러워졌다고 까며, 미국 한정으로는 "The UN wants your gun! 총을 빼앗긴 다음에는 성경을 빼앗길 겁니다" 이런 괴담까지 나도는가 보다.

물론 UN이 딱히 기독교 성경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기관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우리나라부터가 UN이 없었으면 어떻게 버텼겠는가?
글쎄, 미래엔 성경의 예언대로 세계가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대적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6 25 사변 때는 세계가 연합해서 대한민국을 도와줬다. 우리나라는 그게 너무 고마워서 향후 수십 년간 UN 창립일을 공휴일로 기념하고 놀 정도였다.

그리고 20세기 중후반에 전쟁이 늘어난 것은.. 오히려 식민지 지배를 하던 강대국들이 물러나고 나서 그 지역 조무래기들이 정치가 불안정해서 툭탁거리고 싸우는 것의 비중이 더 크다. UN이 능력이 부족한 건 있어도 UN이 잘못한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뭐, 내가 보기에도 21세기의 UN은 20세기 중반의 창립 당시 초심을 갖고 있던 UN과 같은 성격의 조직이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쟤들의 존재 자체를 근본부터 백안시하고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죽했으면 국제 연맹을 계승해서 UN이란 게 생겼을까? 그것도 세계 대전 연합국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따 와서 말이다.
창조 진화 논쟁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우 장춘 박사와 종간 잡종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고, 연대기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우주 배경 복사와 방사성 원소 연대 측정법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떤 입장에 대해 찬성하건 반대하건, 그 대상이 뭔지는 정확하게 알아야 하므로!)

그런 것처럼 세계사,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심 있는 사람, 프란시스 셰퍼의 "그러면 우리는 어찌 살 것인가" 의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UN과 세계 인권 선언의 등장 배경과 맥락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제국주의 시절에 진짜 불쌍한 사람과 희소병 환자의 인권을 당대의 기독교회가 챙겨주지 못했다면, 훗날 그냥 무신론적 인본주의에 입각한 인권 선언이 태동하는 것을.. 신자들이 마냥 부정적· 회의적으로 보고 목소리를 내기란 곤란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반대로 세계 인권 선언의 등장 배후에 성경적인 동기가 들어간 걸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21 08:36 2021/06/2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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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다 살아나온 사람

"한글이 목숨"....;;; 이라는 압도적인 문구를 남긴 외솔 최 현배 선생(박사).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한국 교회에 큰 족적을 남긴 안 이숙 여사.

이분들은 대놓고 정치· 군사· 외교 쪽으로 항일 독립 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어 한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라는 자기 관심분야를 통해서 한국은 일본과 같지 않고 우리 민족은 일본이 강요하는 천황 숭배와 전쟁 프로파간다에 따를 수 없음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저것 말고도 굉장한 공통점이 있다. 무엇인지 아시는가?

일제 말기에 투옥됐고, 1945년 8월 18일에 형무소에서 처형될 예정이었는데 그 전날 17일에 극적으로 석방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 이건 검증 가능한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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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현배는 조선어 학회 사건 때문에 1942년에 체포· 투옥돼서 징역 4년형을 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안 이숙의 기록은 정확도가 더 떨어지는 것 같다. 1939년에 일본 국회의사당에서 불온삐라(?)를 뿌린 뒤 체포됐는데 굳이 조선의 서대문도 아닌 평양 형무소에 옮겨져서 해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슨 죄로 징역 몇 년을 선고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둘 다 이북 지역이긴 하네..
(뭐, 주 기철 목사도 정식 재판과 형 선고 없이 그냥 경찰서 명의로 멋대로 구금 당한 채로 옥사함)

이 자리에서 모든 정황 근거를 나열할 수는 없지만.. 일제는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자기 나라가 망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경우.. 식민지의 형무소 죄수들을 몽땅 죽여 버리고, 본토 안에 있는 조선인들도 어떻게든 제압하고 해코지하고 같이 동귀어진할 시나리오 정도는 준비해 놓고 있었다.
히틀러가 전쟁에서 지자 프랑스 파리를 포함해 자기 휘하의 도시들을 몽땅 불살라서 없애려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심리, 같은 이치이다. 북괴도 무력 싸움에서 지게 되면 저런 식의 자폭을 얼마든지 감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원자폭탄 두 방으로 인해 일본이 8월 15일에 갑작스럽게 항복하고 허겁지겁 본토로 돌아간 건 우리 입장에서도 굉장한 호재이고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장기화됐으면 굳이 8월 18일이 아니었더라도 저 사람들 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뭐 광복군이 참전을 못 해서 나라가 분단됐네..? 애걔 그 병력으로 싸우긴 뭘 싸우냐, 아무 영양가 없는 소리이다.

그런데 정말로 쟤들이 8월 18일에 최소한 함흥과 평양.. 전국의 모든/대부분의 형무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지도 않은 죄수들을 제멋대로 한꺼번에 몽땅 죽여 버릴 계획을 세워 놓았었는지는 나로서는 판단을 못 내리겠다. 비밀 행정 명령 문서 같은 거 나오는 게 없으려나..?? 8월 18일이 또 다른 D-day이기라도 했는지 말이다.

2. 일제 말기의 한국 교회 강제 통합

안 이숙 여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시절 얘기를 하나 첨언하자면..
1945년 7월, 우리나라의 모든 기성 기독교 교파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통합되어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이라는 단일 교파로 잠시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이건 갑자기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라 거의 1940년대 초부터 일제가 한 교파씩 야금야금 회유시키거나 없애면서 집요하게 노력한 끝에 이뤄낸 것이었다.

이제 무슨 평양 봉수교회마냥 어용 단일 교파만이 공인 정통이고, 나머지는 몽땅 비인가 이단이 된 것이다. 주 기철 목사가 순교한 지도 1년 넘게 지난 때이고, 내가 보기엔 이건 신사참배 이상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한 더 심각한 문제 같은걸..? 그러나 다행히도 이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일제가 그로부터 겨우 한 달 남짓 뒤에 완전히 패망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시작되었던 1945년 9월 8일,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기존 교단 교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리고 긴 토론 끝에 통합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교파별로 다시 찢어지고 각자 제 갈 길 가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마치 정교분리만큼이나 불가피하면서도 바람직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거야말로 진정한 일제 잔재 청산이었다.

3. 과거 커밍아웃

박 영희 여사는 함흥여고보에 재학 중이던 1942년경, 전혀 의도치 않게 조선어 학회 사건이 벌어지는 빌미를 제공했다. (자세한 내역에 대해서는 이전 글을 참고할 것.)
저분은 그 당시에는 경찰서에 연행돼서 고생 좀 했지만 곧 풀려나고 학교를 무사히 졸업도 했는데.. 그 뒤로 저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엄청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일생의 비밀 흑역사로 치부한 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랬는데 40년이 지난 1982년 여름, 일본에서 자기네 역사 교과서를 개정해서 침략을 진출이라고 수정하고 일본어 강요를 자발적인 일본어 선택 같은 식으로 말을 이상하게 바꿨다는 게 알려지면서 한국과 중국이 크게 반발하게 됐다. 이때 이분은 자신이 조선어 학회 사건의 발단이 됐던 그 여학생 박영희였다고 커밍아웃을 했다.

“아직 나 같은 역사의 증인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놈들은 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너무 뻔뻔합니다. 나 때문에 고초를 겪으신 분들께 너무 죄송합니다” 라고 언론에다 인터뷰를 했다. 그게 1982년 8월 2일자 중앙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것도 지금도 검색해 보면 나온다.

이분은 1982년 당시에 환갑을 앞둔 58세였다고 소개됐다. 그러니 한국식 나이라면 1925년생이겠다.
이분은 그 뒤로 딱히 다른 근황이나 소식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분이 지금도(2021년) 살아 있을 확률은 극히 낮을 것이다. 1982년 이후로 또 거의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있으니..

그리고 저 박영희 여사보다 훨씬 더 유명한 사람.
김 학순 할머니(1924-1997)는 1991년 8월 14일, 자신이 태평양 전쟁 기간에 타지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납치와 윤간을 당하고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하다가 살아서 나온 피해자라고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 증언했다. 요즘 용어를 동원하자면 일종의 ‘미투’ 운동을 시작했다.

박 영희 여사와 거의 같은 연배이고,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시기도 41~42년 사이.. 조선어 학회 사건과 아주 비슷한 시기이다. 그랬는데 전자는 그나마 학교를 다니던 중에 저런 사건을 겪었고, 후자는 그렇지 못하고 더 험한 일을 당했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커밍아웃을 한 시기가 9년 정도 차이가 있다.

최 현배 박사 vs 안이숙 여사 다음으로는 박 영희 여사 vs 김 학순 할머니 비교가 나왔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그래서 나는 1980년대, 길어야 90년대까지 아직 암울하던 시절에 반일 하던 것은 그럭저럭 진정성을 인정하지만, 2010년, 2020년대에까지 뗑깡 부리듯이 되도 않은 반일 거리는 것은 진정성 신빙성을 굉장히 의심하고 반쯤 정신병으로 치부한다.
여사와 할머니라는 호칭은.. 중요한 커밍아웃을 하던 당시의 나이를 감안해서 서로 달리 붙였다.

4. 조선어 학회와 한글 학회의 사무실

정 세권(1888-1965)이라고 일제 시대인 1920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식 부동산 개발 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해서 건축 사업을 진행한 기업가가 있다. (☞ 관련 링크)

일제 시대에는 남산과 남대문에서 가까운 용산-중구 일대엔 일본인이 주로 살았고(지금의 서울/경성 역도 처음엔 이름이 남대문 역)..
좀 더 북쪽으로 서대문 근처 중-종로구 일대엔 조선인이 주로 살았다. 경부선 철도가 맨 처음 생겼을 때는 서대문 역이 경성 역 역할을 했는데 3· 1 운동 이후에 그 구간이 없어졌다.

이에, 정 세권은 일본인의 주거 구역이 서울의 북쪽으로 더 올라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종로구 북쪽에 한옥 주택을 많이 지을 생각을 했다. 지금의 북촌 한옥 마을도 이때 그의 계획에 따라 조성된 주택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항일 독립운동을 적극 도왔다.
특히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던 조선어 학회에다 건물을 기부해서 사무실을 무료로 마련해 줬다~! 영화 <말모이>에서도 주된 배경으로 나오는 그 작업실 말이다.

딱 종로에다가 사무실을 마련해 줬기 때문에 거기서 일하던 간사장 이 극로 선생이 눈병에 걸렸을 때 근처의 공안과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공 병우 박사가 안과 의사에서 한글 덕후 세벌식 타자기 발명가가 되도록 동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사건의 인과관계가 이렇게 연결된다.
정 세권은 건축과 자금으로 민족 정체성(!!)을 지킨 큰 공로가 인정되어 사후에 당연히 각종 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조선어 학회는 해방 후에 한글 학회로 간판을 바꿔 단 뒤에도 장소와 관련된 혜택을 받았다.
지금까지 입주해 있는 광화문 근처의 빨간 벽돌 한글 회관은 197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이거 건립을 위해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애산 이 인 선생이 사재를 무려 3천만 원이나 기부했고.. (당시 현대 포니 승용차 한 대가 230만 원 남짓) 그걸로도 모자라 죽을 때 자기 재산을 몽땅 한글 학회에다 기증했다.

그리고 박 정희 대통령이 1억 원을 기부하고 그걸 당시 영애이던 박 근혜가 직접 전해 줬다고 전해진다.
한글 회관은 이런 식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지어졌다. 4년쯤 전에 블로그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또 한번 이렇게 복습해 보았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18 08:35 2021/06/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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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6과 5 18

1. 군사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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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우리나라의 역사를 크게 바꿔 놓은 혁명이었다. 저 우표가 나왔던 때는 당해(1개월), 그리고 1주년이었는데.. 올해는 무려 60주년이다.

원조가카는 그 암울하던 시절에 어째 자기 목을 걸고 저렇게 나라를 뒤엎어서 통째로 마개조할 생각을 했는지.. 가히 또라이 그 자체였다. 10여 년 뒤엔 이걸로도 모자라서 유신이라는 것까지 만들어 내고..
할배는 자기가 물러난 이후로 웬 미친 후계자가 갑툭튀해서 그래도 선한 독재를 하고 있는 걸 하와이에서 인지할 기회는 있었나 모르겠다.

10수 년 전부터 해 온 생각이지만, 할배는 정말 모세 같다. (넘사벽급의 위대한 초대 지도자. 홍해 -- 원자탄, 타지에서 죽음)
원조가카는 느헤미야(느 4:17,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고..)나 웃시야 왕(대하 26. 영농과 국방 개혁, 기계 제조) 같다.

박 정희 시절부터 사회 시스템이 바뀐 것 중 하나가 단기 대신 서기 연호이다. 그래서 당장 저 우표만 봐도 1961년에 나온 첫 버전은 날짜가 단기로 표기된 반면, 1주년 기념 우표는 서기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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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진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자유당 시절의 정치 깡패들이 서울 시내에서 공개 조리돌림 당하는 거.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_=;;

특히 다른 깡패들은 여럿이 뭉쳐서 퍼레이드(?)를 했지만, 수괴이던 이 정재는 단독으로 제일 앞장서서 가면서 개쪽을 당해야 했다.
옆에 감시하는 사람들은 경찰도 아니고 무려 특수부대 급의 군인이었다. 알고 보니 이것 말고 다른 각도와 시점에서 찍은 사진도 여럿 전해진다.. 오오~

대한민국에서 1948년 건국 이래로 공권력에 의해 공개 조리돌림이 행해진 건 이게 유일하다. 우리나라 역사상 살인 없이 연쇄 강간만으로 사형이 선고된 건 5공 시절이 유일했듯이 말이다.
이때가 혁명일로부터 겨우 닷새 뒤인 1961년 5월 21일이었다는 것도 같이 알아 두면 좋다. 요즘은 악질 음주운전 사고 가해자나 아동 학대치사 살인범을 이런 방식으로 죄값을 좀 치르게 했으면 좋겠다.

2. 광주 사태

1980년대 노래 중에서 '바위섬'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다. 얘는 벧후 3:5-6의 without form and void 분위기를 온몸으로 외치는 노래 같다.

  •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 곳에
    (==>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 그때 있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성경에 창 1:1과 1:2 사이에 정말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처럼, 저 노래도 사실은 정말 엄청난 과거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어진 거라고 한다.
그럴싸해 보이지 않는가? 언젯적부터 해 온 오래된 생각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5월 16일로부터 겨우 이틀 뒤는 어째 16하고는 이념적으로 완전히 딴판인 기념일이다. 이 날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 소수의 북괴 공작원이 시민을 사칭하면서 진짜 시민과 군경 사이를 이간질하고 서로 오해하게 만들고, 약간만 대립하고 끝났을 사건을 악에 받친 유혈 참극으로 도지게 만들었을 가능성은 있음.
    (진실을 규명하려면 이런 거나 규명해야 하는데, 인제 와서 규명이 제대로 될 가능성은 거의 없음. 참고로 1980년대 초는 무장공비가 활발하게 드나들었으며, 동해 서해의 남부 지방까지 막 침투하고 잡히기도 하던 시절이었음.)

  • 누구 말처럼 600명씩이나 침투는 가능하지 않음. 6 25 초반의 대한해협 해전 때의 북괴 공작원의 침투 규모하고 딱 혼동한 것 같다.
    더 옛날에 북쪽에 더 가깝게 침투했던 울진-삼척 무장공비도 100여 명에 불과했고, 그것도 여러 차례 나뉘어서 침투한 것이었다.

  • 안면인식으로 30여 년 전의 광수 찾는 건 너무 심한 뱀발 무리수

  • 무기고 탈취와 탱크 조종, 능수능란한 군사 활동 자체만으로는 북괴 공작이라고 전혀 간주할 수 없음.
    저 땐 남한도 남자들이 군사 독재 하에서 군복무를 3년씩이나 강제로 했었다. 훗날 LA 폭동 때도 군대에서 배운 게 제대로 발휘됐다니까?

  • 북괴에서 띄워주고 선전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자신과 관계 있는 사건이라는 보장도 없음.
    아웅산 테러 공작원의 존재는 생까고, 효순이 미선이한테는 평양 학교 명예 학생 임명도 하고 저런다. 이것 말고 다른 일관성 없는 반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 시민군들이 몽땅 북괴 공작원 빨갱이라는 소리나, 그 반대 극단으로 진압군이 멀쩡한 비무장 시민들 가슴을 도려내고 싸이코패스마냥 총질했다는 소리는 거의 다 신빙성이 결여되는 과장 거짓이라 여겨진다. 악의적이거나, 아니면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왜곡됐거나.
  • 도를 넘는 성역화, 그리고 반대로 도를 넘는 폄하와 비하 모두 금물. 시민 희생자를 추모할 거면 진압 군경 전사/순직자도 같이 추모해야 한다.
  • 김 일성이건 전땅크건 회고록은 공평하게 다 출간하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주 사태가 진짜로 전대갈의 쿠데타에만 반대하고 항거하는 민주화(?) 시위였다 하더라도 그건 나라를 북괴 침략으로부터 지키고 가난을 떨쳐낸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하고 위대한 업적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파급력과 영향력을 따지자면 4 19 의거보다도 가중치가 더 낮다. 그냥 제주 4 3 사태나 박통 말기의 부마 항쟁 이런 것보다 급을 높게 쳐야 할 이유를 난 모르겠다.

그런데 지들이 뭐 나라를 구하기라도 한 줄 알아요. 유공자 생색 제일 많이 내고.. 뭐? 5 18 왜곡 금지법??
이딴 식으로 나오니 그때 정말로 억울하게 무고하게 오인 사격으로 죽었을 수도 있는 광주 시민을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추모하고 기리고 싶은 생각마저도 싹~~ 사라지게 된다.

나도 망망대해 위에 솟은 바위섬 꼭대기에서 밤에 텐트 치고 코딩 하다가 자 보고 싶다~
그리고 저 노래의 모티브인 동네는 구질구질한 피해의식 반골기질 좀 버리고(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건 물론 아님) 건전한 생각과 의식으로 "재창조" 됐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1/05/22 08:36 2021/05/2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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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안의 마을들

우리나라 영토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 휴전선이라고도 불리는 군사분계선이 중앙에 있고, 거기 곁을 비무장지대와 민간인 통제 구역이 감싸고 있다. 여기 주변은 위험하기 때문에 비행 금지 구역임은 물론, 지리 정보가 민간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다. 여기서 민간 지도란,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전자는 원칙적으로 군인과 민간인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고 가끔 GP를 지키는 소수의 군인들만이 경찰처럼 둔갑해서 몰래 들어간다. 그 반면, 후자는 민간인만 출입 금지이다. 거기에 조상 대대로 밭이나 묘소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 농사나 성묘 같은 정당한 볼일이 있을 때만 인근 군부대의 허가를 받고 낮 시간대에 한해 드나들 수 있다.

그럼 전국의 모든 민통선 안(= 민통선 이북)은 밤엔 군인을 제외하면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암흑 지대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거기에 주민이 상주하는 마을도 있기 때문이다.

그 원조 1호는 판문점에서 제일 가까이 있고 휴전 직후부터 조성됐던 대성동 마을이다. 이 마을은 처음부터 이 근처에 존재했던 마을이며, 6· 25 정전(휴전) 협정에 따라 존재를 인정받고 보장받았다.
여기는 휴전 회담이 진행된 판문점의 근처인 덕분에, 1951년 하반기부터는 전쟁의 포화에 휘말릴 일이 없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 대신 여기는 우리나라가 땅을 수복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방어하기 불리한 곳을 포기하게 됐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해주 반도와 개성 시내를 내어주고 북한이 서울과 더 가까워졌다.

사실 대성동 마을 일대는 민통선과 남방한계선의 구분도 아직 없어서 코앞이 군사분계선이며, 강원도 전방에다 비유하자면 아예 비무장지대 안이나 마찬가지이다. GOP도 아니고 GP가 있을 곳에 민간인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그만치 엄청나게 위험하고 거주민들의 행동과 이동에 제약이 크다.

한때 우리나라 대성동과 건너편 북한의 기정동에서 국기 높이 달기 병림픽(?)을 벌인 적이 있었고, 그게 초등인가 중인가 도덕/윤리의 마지막 단원 북한 통일 문제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나중엔 남한이 그냥 gg 치고 손 떼서 북괴의 160m짜리 깃대가 한동안 세계에서 제일 높은 깃대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는데.. 구체적으로 몇 년대에 벌어진 일인지는 아무리 찾아 봐도 정확한 기록이 나오는 게 없다. 팩트 확인이 잘 안 된다.

나중에는 저기 말고도 통일촌, 해마루촌, 횡산리 등 민통선 안 마을들이 몇 곳 더 조성됐다. 아래 그림을 보시라. (☞ 출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들 민통선 마을은 출입이 까다롭긴 하지만, 대성동만치 군사분계선과 북한이 코앞이고 위험하고 유엔군의 통제를 받을 정도로 수위가 높은 곳은 아니다. 그림에서도 대성동은 다른 마을들과는 성격이 다름을 언급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통일촌이나 해마루촌은 파주의 도라 전망대 및 제3 땅굴 임진각 안보 관광 패키지에도 포함돼 있어서 일반인이 비교적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대성동을 아무 연고 없는 일반인이 단순 호기심 차원에서 관광..??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쪽의 관광 난이도는 판문점의 관광 난이도와 대등하다.

이런 마을들은 전쟁 때 원주민들이 다 피난 가면서 폐허가 되고, 그 상태로 민통선 구역으로 봉인됐다가 뒤늦게 마을로 재건되었다. 사람을 받아들일 거면, 밭은 몰라도 주택이 있는 곳은 그냥 민통선에서 해제해 주지 싶은 생각도 든다만.. 지형상의 한계나 군사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그리 하지 않은 것 같다.

철원에 이런 마을이 유난히 많은 이유는 저기가 넓은 평야를 낀 천혜의 곡창 지대이기 때문이다. 6 25 때 우리나라가 수복해 냈고 김일성이 빼앗긴 걸 통탄했을 정도인 금싸라기 땅이다. 그 유명한 민통선 안 메기 매운탕 식당인 '전선 휴게소'도 이 지대(정연리-유곡리) 사이에 있다.

그 반면, 철원보다 더 동쪽부터는 산세가 더욱 험해지고 지형이 너무 메롱이 되는 관계로, 민통선 마을 같은 게 없으며 거주민도 없다. 가령, 동쪽 끝의 고성군 수동면 같은 곳은 마을이 산과 휴전선으로 완전히 고립되게 생겼으니 주민들이 모두 이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거기는 주민이 전무하여 사문화된 행정구역으로 전락했다.

그림에 표시된 마을들 중에서 마현1리는 혼자 조성 시기가 1959년인 게 이색적이다. 얘는 바로 그 시기에 나라의 동남부 지방을 깡그리 삭제해 버린 태풍 ‘사라’의 피해 이재민들이 이주해서 개척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이냐 하면 부산이 아니라 무려 울진이다. 1963년 이전엔 울진이 경북이 아니라 강원도 소속이었던 관계로, 강원도 도지사가 이재민들에게 이 참에 정부 지원금도 받아서 같은 강원도인 철원으로 이주를 주선했다..;;

그렇게 66세대 359명의 주민들이 군용 트럭 23대를 나눠 타고 저 마을로 가는 데만 3박 4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 시절에 울진에서 철원까지 가는 경로에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도로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한동안 군용 텐트에서 살면서 근성으로 황무지를 일궈서 밭을 만들었다. 여기가 한때 격전지였던 관계로 땅 조금 파면 탄피들이 무슨 광물처럼 튀어나왔나 보다. 그걸 주워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그랬는데 이듬해 봄엔 이 승만 정권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마을에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했던 강원도 도지사와 철원 군수는 모두 교체됐다. 이 사람들이 마현1리에 정착한 때가 1960년 4월 7일이니 4 19 의거로부터 겨우 두 주 전... 말 다 했다. =_=;;
그리고 기껏 고생해서 밭을 일궈 놨더니 여기에 진짜 원래부터 살았던 원주민이 찾아와서 땅 내놓으라면서 소송을 걸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자금이 부족한 입주민은 여기서도 소작농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 마현1리 이주민촌은 30년전 경상도지방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사라호 (59년9월17일)에 가옥과 전담을 모두 떠내려보낸 경북 울진군 일대의 농민 66가구가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 삶을 시작한 곳이다.
(...)
조국강토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동족상잔의 흔적만을 안은채 갈가리 찢겨버려져 있던 민통선 안쪽 황무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기름진 철원 평야의 한 부분이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우거진 잡초더미와 6·25가 남겨준 온갖 잔재들만 눈앞에 가득할 뿐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국군과 인민군의 훈련 포성에 몸을 떨며 군용 천막을 치고 개간의 삽질을 시작했다.
부르튼 손으로 잡목과 온갖 무기 파편·돌등을 제거하고 우거진 싸리숲을 없애기 위해 몸에는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곳곳에 처박혀있는 불발포탄의 위험 속에서도 『이 땅을 일구어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개척의 삽질은 끝없이 이어졌다.
눈앞의 황무지가 옥탑으로 변할 생각을 하며1인당 2·5홉씩의 배급잡곡으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 출처)


이때 선조들이 얼마나 고생했으면.. 그로부터 30여 년 뒤인 1989년, 마현리 주민의 세대가 바뀔 즈음에 건립된 입주기념비에는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조국강산의 가장 중심된 이 농토가 누구의 피땀으로 가꾸어졌는가를…. 괭이와 호미로 6·25 동란 이후 버려진 황무지를 옥토로 가꾼 개척 정신의 빛나는 업적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라는.. 정말 피를 토하는 듯한 비장하고 처절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핵심은 대성동 말고도 민통선 안에 자리잡은 민간인 마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마현리 주민들은 실제 이곳 출신이 아니며 오히려 진짜 여기 원주민들과 분쟁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더 관심 있으신 분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기존 보도 자료들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 링크 1, 링크 2, 링크 3, 링크 4)

그리고 요즘은 마현리는 주변의 밭은 몰라도 마을 자체는 민통선 안이 아닌 것 같다. 국도 5호선에서 멀쩡히 진입할 수 있고 마을 내부도 버젓이 로드뷰가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이길리에 소재한 마을은 민통선 안이다. 72~73년에 조성된 민통선 마을들, 특히 이름이 대놓고 통일촌이라고 지어진 저 마을은 임진각이 건립되면서 같이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해마루촌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김 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 내지 경의선 연결과 같은 맥락에서 조성된 실향민 마을이다. 상공에서 보면 마을 도로가 높은음자리표 모양으로 꼬불꼬불하게 만들어져 있는 걸로 유명하다.

끝으로, 철원도 아니고 서쪽 끝도 아닌 중간(연천)에 마을이 딱 하나 있는 게 연천의 횡산리이다. 시기도 혼자 1977년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데.. 얘는 임진강과 군사분계선의 선형이 굉장히 교묘하게 꼬이는 곳에 있어서 뭔가 섬 같은 느낌이 들며, 제2의 대성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는 특별한 사연 없이 원래 여기서 살던 사람들이 나중에 민통선 마을이 조성됐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온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1977년, 1985년 두 차례에 걸쳐서이다.

이상이다.
대성동 마을의 주민이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는 건 이제 다들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나무위키에는 거기뿐만 아니라 저런 다른 민통선 마을 거주민에게도 같은 혜택이 적용된다고 쓰여 있는데.. 실제로 그러한지 법적 근거를 잘 모르겠다.

병역법이나 병역법 시행령 등 관련 법을 아무리 찾아봐도 장애인이나 탈북자가 면제이지, 저 지역 출신에 대한 언급은 딱히 안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육지 말고 바다 쪽 민통선도 생각해 봐야 한다. 교동도는 통제가 아주 느슨하긴 하지만 그래도 민통선에 속한 곳이며, 백령도나 연평도 같은 서해5도도 개념적으로 대성동 및 타 민통선 마을에 준하는 특이한 오지이다. 그러니 면제 혜택을 주려면 그쪽과의 형평성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저 정도로 특이하게 사는 극소수의 사람들한테, 부정 수급의 가능성도 전무한 혜택을 주는 것 자체야 형평성 불만이 제기될 여지가 없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민통선 마을들과 대성동을 완전히 같은 급에 두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지난 2019년경엔 대성동 마을 토박이인 어느 친자매(유 수빈· 유 정빈)가 대학 졸업 후에 무려 여군 장교를 같이 나란히 지원해서 매스컴을 탔다. (☞ 관련 링크)
남자였어도 합법적으로 군대를 안 갈 수 있는 신분인데 여자가 그것도 언니와 동생 둘 다 군대 쪽으로 진로를 정했다니 매우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맨날 군인들을 보고 살았는데 자기도 그런 군인처럼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세상엔 이런 일도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5/09 08:33 2021/05/0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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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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