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경부 고속도로 최후 유일의 4차로 구간과 추풍령

이제 본인은 구도로가 아니라 실제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옥천에서 추풍령까지 이동했다. 옥천 휴게소 이후부터 영동1 터널까지, 2019년 현재 경부 고속도로 416.1km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4차로로 남아 있는 마지막 구간을 쭉 달려 봤다. 영천-경주-울산 구간도 오랫동안 4차로였지만, 거기는 2010년대 내내 지겹게 공사를 한 끝에 바로 작년 말에야 전구간이 6차로로 간신히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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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옥천 근처에는 이렇게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갓길이 없어지고 속도 제한이 80으로 내려간 위험 구간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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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딱히 그런 기미가 안 보인다. 특히 금강 휴게소 인근의 금강을 건너는 구간은 높은 교량, 그것도 2000년대가 돼서야 완공된 교량이기 때문에 거기가 또 가까운 미래에 확장될 것 같지는 않다. 천하의 경부 고속도로에도 이렇게 차로가 적고 좁은 구간이 있다는 게 실감이 안 간다.
차에 동승자가 없었던 관계로, 이 사진들은 다 본인이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던 중에 잠시 핸들을 놓고 좀 위태롭게 찍은 것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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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경부선 추풍령 역의 승강장이다. 추풍령 IC와 철도역은 역시 몇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가까운 편이다.
추풍령 역은 경부선에서 해발 고도가 가장 높은 역이다. 물론 경부선 구간이 높아 봤자 220m대에서 노는데, 진짜 산악 철도인 태백선· 영동선 역들의 고도(7~800m대!)하고는 비교하는 게 실례이지만, 그래도 철도는 오르막에 매우 취약하니 저 정도만으로도 열차가 오르기 버겁긴 하다.

과거 초창기에 경부선은 김천 이전의 구미에서도 지금의 국도 4호선처럼 금오산 고개를 올라가는 형태로 만들어졌었다. 그런데 그렇게 철길을 만들었더니 20세기 초의 증기 기관차가 오르막을 도저히 끝까지 오르질 못하고 중간에 픽픽 퍼졌다.
그렇다고 거기에다 스위치백 같은 걸 만들 여건은 못 됐으니 그 구간에서만 열차의 뒤에 보조 기관차를 장착하는 형태로 매우 불편한 운행을 해야 했는데..

결국 1910년대에 구미 시내를 삥 둘러서 평지를 우회하는 형태로 선형이 바뀌었다. 그 덕분에 새로 생긴 구간에서 구미 역이 1916년에 개업했으며, 구미 출신인 원조가카는 집을 떠나 장거리를 이동할 때 그 구미 역을 잘 이용했을 것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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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이 휴게소는 경부 고속도로 전구간의 거의 정중앙 지점에 위치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고속도로 휴게소이다. 금강과는 달리 상· 하행이 분리돼 있지만, 금강처럼 자체 나들목(추풍령 IC)을 갖췄다는 공통점도 있다.

다만, 얘도 1971년 1월 1일부로 개업했으니 고속도로 개통과 동시에 영업을 시작한 건 아니다.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당시에는 길을 닦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지경인데 휴게소까지 같이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1970년 하반기에 경부 고속도로에는 휴게소 같은 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ㄷㄷㄷ 그러다가 금강 휴게소가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 1주년에 맞춰 같은 해 7월에 뒤이어 개업했다.

추풍령 휴게소 부근은 강을 끼고 있는 금장 휴게소보다 고도가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4차로가 아닌 6차로이다. 구도로는 선형이 꼬불꼬불 굽었고 매우 불량했으며, 여기 일대에서 실제로 큰 사고가 나기도 했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개통 이래 최초로 발생한 대형 교통사고는 1970년 8월 21일 발생한 고속버스 추락 사고(25명 사망, 22명 부상)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0년 7월 14일에도 수학여행 전세 버스의 연쇄 추돌 사고(18명 사망, 70여 명 부상)가 나서 그야말로 대형 사고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둘 다 사고 지점이 동일하게 추풍령 휴게소 부근의 고갯길이었다!

문제의 구간은 2006년 말에 대대적인 선형 개량과 6차로 확장이 완료됐다. 그에 비해 옥천-영동 구간은 2003년에 선형 개량만 됐고 여전히 4차로이다. 옥천-영동 쪽은 구도로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 반면에 추풍령 쪽의 구도로는 완전히 흑역사가 된 것 같다. 일부 구간은 기존 국도 4호선의 확장 영역으로 흡수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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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휴게소의 근처의 언덕에는 경부 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 있다. 순직자 위령탑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높으며, 주변에 넓은 풀밭도 꾸며져 있다.
상행 방면 휴게소와 더 가까이 있긴 하지만, 양 휴게소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행 방면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도 도보로 준공 기념탑에 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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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풀밭도 경치가 아주 좋기 때문에 풍경 사진을 남겨 봤다.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에의 길이다. -- 1970년 7월 7일 대통령 박 정희"
"이 고속도로는 ... 우리 자체 재원과 기술과 역량만으로 최단 시간에 이뤄낸 우리의 영광스러운 자랑이다. -- 1970년 7월 7일 건설부 장관 이 한림"


기념탑 아래 벽면에는 뭐 이런 문구들이 새겨져 있었다. 높으신 분들이 고속도로 건설을 치하하는 감격의 덕담을 한 마디씩 남겼다.

참고로 이 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은 아까 봤던 옥천 터널을 빨리 뚫어 내라고, 개통식 날짜를 못 맞추면 너희들 국물도 없을 거라고 건설사들을 무진장 갈구고 쪼아댔던 그 당사자이기도 했다. =_=;;;;
딱 같은 시기에 김 현옥 서울 시장도 군인 출신의 정말 못 말리는 지독한 "까라면 까" 불도저였으니.. 군사 정권 시절에 나라 분위기가 그렇게 군대식으로 극도로 경직돼 있었던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뭔가 역사적인 사건에다 기념을 한 문구는 대부분 이 은상 시인이 작성한 것 같던데.. 아까 순직자 위령비뿐만 아니라 준공 기념탑에도 글이 있었던가..?? 그건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경부 고속도로는 첫 개통 당시에는 공식 명칭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때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라고 불렸다! 그래서 준공 기념탑과 순직자 위령탑에도 저 긴 이름이 새겨진 걸 볼 수 있다.
옛날에도 '경부'라는 이름이 쓰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비격식 약칭이었다. 그런데 그게 공식 명칭으로 바뀐 것은 1981년 11월 7일, 고속국도 노선지정령이 개정되고부터이다.

아이고 글이 왕창 길어져 버렸는데..
여기까지가 옥천과 추풍령, 경부 고속도로와 관련된 테마 답사였다. 이제 본인은 제2부로 자연을 즐기기 위해 경북 영양으로 향했다.

5. 영양군에서 외박

(1) 김천에서 영양으로 갈 때는 내비의 안내대로 중부내륙(45)과 당진-영덕(30)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후자가 워낙 한산했던 덕분에 차량 성능 테스트를 빙자한 폭주 시험/실험을 거기서 시행할 수 있었다.
전방에 시야가 탁 트였고 다른 차도 없는 절호의 기회가 종종 찾아왔다. "복동아 지금이야!"-_- 같은 소리가 뇌리에 전해지는 듯할 때 필사적으로 확 밟았다. 주행 당시에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악셀 페달이 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풀로 꽉 밟았는데도 이상하게 차가 더 가속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엔진 회전수와 속도가 더 올라가지 않았다. 당연히 레드 존 상태 따위가 전혀 아닌데도... 더 오래 밟고 있으면 가속이 됐을지 모르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그렇게까지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번 휴가 때는 예전에 수립했던 185km/h를 간신히 재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더 성능이 좋은 차였다면 그 정도로 밟았으면 190~200은 분명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2) 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를 모두 달려 보니, 표지판에 표기된 각 지역까지의 거리 기준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고속도로야 입체교차 진출입로가 존재하고 자기 영역이 명확하다. "대전 xx km" 이러는 것은 대전 IC로 진출하는 갈림길까지의 거리이다. 그러나 다른 국도· 지방도에서 "영양 xx km" 이러는 것은 해당 지역의 도로 원표까지의 거리인데.. 시청이나 군청 같은 대표 행정기관이 있는 곳과도 비슷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구역상으로는 그 지역 내부에 이미 진입했지만 킬로 수가 아직 한참 더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럼 국도 중에도 입체교차 진출입로와 중앙분리대까지 있어서 반쯤 고속도로인 물건이 있는데.. 얘는 그럼 지역의 중심부까지의 거리와 IC까지의 거리가 혼재하고 있는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지방 국도를 운전할 일이 또 생겼을 때 눈여겨보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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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에는 저녁이 다 돼서야 도착했다. 시가지는 정말 작았으며 2차선 도로가 전부이고, 교차로에도 황색 신호밖에 없었다.
영업을 하는 카페를 용케 찾아서 거기서 2시간 가까이 머물렀다. 목을 축이고 인터넷을 확인하고 폰과 컴퓨터를 충전하며 쉬었다. 오아시스가 따로 없었다. 이 보급으로 오늘 밤을 보내고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 버텨야 하니, 전자 기기들은 무조건 꽉 충전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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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를 벗어나면 주변은 온통 이렇게 산과 강과 들밖에 없었다.
얼마 안 가 날이 저물었으며 주변은 암흑천지가 됐다. 흐리고 비가 계속해서 내렸지만 습하고 몹시 더웠다.
본인은 국도 31호선을 따라 봉화 방면으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적당히 으슥하고 인적이 없고 캠핑을 하기에 적합한 곳 탐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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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적당한 곳을 발견하여 주변에 차를 대고 텐트를 쳤다. 안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잠들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오지에서도 iptime 와이파이가 잡히다니 신통한 노릇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10 08:34 2019/09/1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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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 휴게소

경부 고속도로 옥천 구간에는 금강 휴게소라고 말 그대로 금강을 끼고 있는 매우 경치 좋은 휴게소가 있다.
처음에 해당 부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직원들의 숙소로 개발되었다가 나중에 유원지가 조성되었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고속도로의 개통 후 만 1년 만인 1971년 7월 7일부로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얘는 여느 휴게소들과는 다른 특징들이 여럿 있다. 그러니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요즘 관행처럼 상· 하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휴게소를 공유한다. 그러면서 방면별로 차량들이 완벽하게 분리돼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유턴· 회차가 가능하다.
  • 인근에 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 있다.
  • 금강 IC라고 유원지 방면으로 나가는 자체 나들목이 있다(금강 IC).
  • 그리고.. 조령리 마을이라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폐쇄식 고속도로 구간의 내부에 자리잡은 마을이 있다. 마치 전국에서 유일하게 DMZ 내부에 자리잡은 대성동 마을이 있듯이 말이다.

지하철이야 한번 카드를 찍고 개표 구간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는 아무 열차나 마음대로 탈 수 있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인천 공항의 경우, 보안· 면세 구역 안에서 다른 탑승동으로 이동하는 지하 셔틀열차를 탔다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출국 승객과 입국 승객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동선 특성 때문에 그렇다.

그럼 고속도로는 어떨까?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전통적으로 한번 진입한 차량의 유턴· 회차를 허용하지 않는 형태였다. 휴게소도 상· 하행별로 꼭 따로 만들곤 했다.
일반적인 고속도로 이용 차량들이 굳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일은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또한 상· 하행 운전자가 한 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다면 서로 짜고 통행권을 바꿔치기 하는 수법으로 톨비를 실제 이용 거리보다 훨씬 적게 조작해서 낼 수도 있다.

이 고전적인 수법을 봉쇄하기 위해 도로 공사 측에서는 통행권에다가도 차량 식별 정보를 기재하고, 휴게소를 상· 하가 분리된 형태로 만드는 등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제는 하이패스 덕분에 저런 꼼수 걱정 없이 고속도로 이용 차량의 동선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고속도로도 워낙 촘촘하게 많이 건설되어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우회 경로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프 내부에 사이클 많음) 단지 귀찮냐 덜 귀찮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100% 하이패스 기반으로 바뀌고 재래식 통행권이 완전히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가장 먼저 (1) 고속도로 시· 종점의 넓은 톨게이트들의 폭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차들을 번거롭게 세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톨게이트 직원이라는 직업도 마치 과거의 버스 안내양이나 타자수만큼이나 역사 속으로 사라질 테고..
이와 더불어 (2) 휴게소도 상· 하행 공용이고 방향 전환이 자유롭게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게 새로운 유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행담도 휴게소도 얼마 안 되는 상· 하행 공용이긴 한데 오랫동안 상· 하행 차량이 서로 격리 수용되었으며 방향 전환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모다 아울렛' 시설을 통해서 사실상 방향 전환이 가능해졌다.
여담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금강 휴게소는 옛날에 상· 하행 공용으로 만들어졌던 휴게소라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직원 숙소 내지 유원지 시설이 고속도로 휴게소로 개조된 것이니 상· 하행 따로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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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순직자 위령탑이 있긴 하지만, 차도를 횡단해야 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막 수월하지는 않다. 현재의 고속도로가 아니라 아까 답사했던 구도로에서 더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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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과정에서 순직한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77명이라고 집계돼 있지만, 정확한 순직자 명단이 공개된 적은 없다. 정말 77명뿐이고 이 숫자가 맞는지는 이제 와서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무슨 국정원 청사에 새겨진 n개의 별도 아니고 말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데 7월 7일에 맞춰서 일부러 77명이라고 북한스럽게 주작한 거라는 낭설까지 나돌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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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휴게소의 남쪽으로 금강 유원지 근처의 모습은 위와 같다. 보아하니 물을 저렇게 가둬 놓고 수력 발전 같은 것도 하는 모양이었다.
또한, 금강 IC라고 휴게소의 고유한 나들목/톨게이트가 있어서 저 유원지 방면으로 차량이 드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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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휴게소 자체의 내부 모습은 별로 소개하지 않은 것 같아서 사진을 하나 남긴다. 저 건물 자체는 간판의 윤고딕 서체만큼이나 200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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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여행을 통틀어서 내 독사진은 여기서 딱 한 장만 남겼다. 금강을 배경으로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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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으로.. 이것이 금강 휴게소에서 조령리 마을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아래의 굴다리이다. 저기 안엔 민가, 식당, 펜션 정도가 있다. 안에 들어가면 대충 저런 분위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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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저기 있는 어느 식당에 들러서 이번 하계 휴가 특식을 먹었다. 메기 매운탕과 향어회. 민물고기 요리인데 바다 생선 요리만큼이나 맛있었다.

3. 옥천 시내에서 생가 두 곳

본인은 정 지용 시인과 육 영수 여사가 옥천 출신이라는 것을 현장에 가서 도로 표지판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계획에 없었지만 이분들의 생가를 들러 봤다. 차로 금방 갈 수 있었으며, 두 생가도 서로 직선 거리 700m 남짓으로 가까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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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에 있는 정 약용 생가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생가 옆에는 고인의 동상과 문학 기념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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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지용은 잘 알다시피 <향수>라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시의 저자로 유명하다. 윤 동주 하면 <서시>가 떠오르듯이 말이다. 아, 실제로 정 지용은 윤 동주의 선배 겸 스승으로서 그에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저 안내판은 글꼴의 스타일로부터 추측하건대 21세기 작품은 절대 아니고 90년대에 만들어진 것 같다. 1988년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 그보다는 나중이다.

안내판에는 정 지용의 최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는 6· 25 사변 중에 실종되는 바람에 한동안 모든 교과서와 전기에서 생몰년도가 "1902 ~ ?" 라고 기재되었다. 그 와중에 월북 가능성이 점쳐지는 바람에 민주화 이전에는 그의 존재와 작품까지 몽땅 흑역사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8년부터 그런 금기가 해제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추가적인 기록과 증언이 발견된 덕분에 그가 1950년을 넘기기 전에 폭격을 맞아 죽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납북 당하던 중이긴 했지만 북한에서 어차피 제대로 활동도 못 하고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빨갱이 누명도 확실하게 벗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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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육 영수 여사 생가이다.
평범한 초가집이던 정 지용의 생가와 달리, 저분의 생가는.. 무슨 으리으리한 대궐 같았다. 방금 전까지 흥부의 집을 보다가 놀부의 집을 보는 느낌?
집안이 대대로 지주였으며, 일제 시대에 이미 자가용을 굴리고 다녔을 정도로 옥천 지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금수저 부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육 여사의 부친이 처음에 사위를 깔보고 무시할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는데 그 사위가 나라를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돼 버렸으니.. 참 어지간히도 대형 사고를 쳤다.
육 여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로 어질고 훌륭한 대통령 영부인이었다고 추앙받는다. 본인은 뜻하지 않게 이분의 기일에 맞춰서 생가를 구경하게 됐다.
생가는 재건 복원된 레플리카이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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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뭐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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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육 여사의 어린 시절 사진과 유작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원조가카가 부인을 잃은 후에 남긴 시 몇 편이 놓여 있다.
원조가카는 포병 장교 출신의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 악기 연주와 문학에도 능통한 수재였다. 특정 분야에서 완전 넘사벽급 기상천외 비상한 창의성을 발휘한 천재는 아닌 것 같지만, 리더십과 보편적인 지적 능력이 남들 평균보다 더 뛰어난 영재였던 건 확실하다.

지도자에게는 영재가 천재보다 더 어울리는 자질이기도 하다. 지도자는 세부 실무에 천재들을 잘 배치해서 맡기고 관리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니들이 일하는 데 필요한 돈줄은 내가 대 주고 책임도 내가 지겠다. 니들은 좋은 실적 결과물만 내놓아라" 이렇게 말이다.

거기에다.. 소싯적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차별과 무시 당한 건 대놓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긴 칼 찬 군인이 돼서 돌아와서 설욕하고.. 장인에게 무시 당했던 것은 아예 대통령이 돼서 설욕했으니 이 사람의 승부욕과 집념과 끈기도 참 비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은 원조가카에게 매우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으며, 그게 원조가카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불행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공식 석상에서는 장녀인 레카가 영부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원래 영부인만 한 포스는 부족했을 것이고, 이때부터 원조가카도 예전 같은 자제력을 잃고 좀 폭주하려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인이 없으니까 여자 연애인과 여대생에게도 더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암살 당하던 당시처럼 말이다.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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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은 이렇게 넓은 풀밭과 정자(사진엔 안 나왔지만)도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나들이 하기에 좋았다.
옥천에서 경부 고속도로 외에도 이런 답사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7 08:35 2019/09/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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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세상에 덥지 않은 여름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는 폭염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견딜 만했던 것 같다. 작년이 워낙 악몽이었으니 말이다.
본인은 올해도 어김없이 하계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광복절 징검다리 연휴에다가 연차를 추가로 써서 말이다. 강원도, 인천에 이어 올해는 중부 지방 내륙 위주로 돌아다녔다.

이번 여행이 예전의 휴가 여행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은 첫째, 날씨다. 이틀 내내 날씨가 '흐리고 비'였기 때문에 이번 여행 사진에는 파란 하늘이 찍힌 게 없다. 하지만 여전히 습하고 더웠기 때문에 땀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으며 냉방이 필요했다.
그리고 둘째, 내륙 위주로 돌아다니느라 이례적으로 바다에는 못 갔다. 바다 물놀이는 그 전 주말에 마침 부산에서 볼일이 생긴 덕분에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겸사겸사 하고 왔다.

3년 전에 학술대회 참석 때문에 10월이 다 돼서야 부산에 들러서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만, 해수욕장이 정식으로 개장해 있는 실제 피서철에 저길 가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잔잔한 호수나 다름없던 서해와 달리(작년 을왕리 기준), 여기는 파도와 수심이 급이 달랐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서해는 해변으로부터 최하 100미터 이상은 진입 가능하며 안전 부표도 저 멀리 떨어져 있고, 심지어 썰물 때는 부표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기도 하지만.. 동해는 그런 거 없다. 부표가 해변에 훨씬 더 가까이 있으며 사실은 모래밭 바닥의 경사부터가 서해보다 훨씬 더 급격하다.

바다에서 사람이 접근 가능한 영역은 매우 좁은데 사람은 많고 바글바글하니.. 해운대에서는 물에 들어간 채 돌아다니기는 어렵고 그냥 제자리에서 파도만 맞다가 나와야 했다. 아무 대비 없이 복부에 맞으면 좀 아플 정도로 파도가 강했으며, 성인 남성인 본인도 신체가 앞으로 떠밀릴 정도였다.
아울러, 해운대는 여느 한적한 시골 해수욕장과는 딴판인 곳인 관계로, 모래밭에서 텐트를 칠 수는 없더라.

뭐, 바다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번 여행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먼저 (1) 옥천-추풍령 사이에서 경부 고속도로 심층 탐구 답사를 했으며, 그 다음 (2) "군인 없는 양구"라 불리는 영양과 봉화 일대에서 자연과 철도를 즐겼다.

1. 경부 고속도로 옛 구간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뒤, 곧장 옥천으로 갔다. 중간에 용인-서울 고속도로 등 다른 곳도 들르면서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번 여행 때는 오로지 경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경부 고속도로는 내년이면 벌써 개통 50주년이 된다. 지금이야 경부 고속도로는 수도권 한정으로 도로 바로 옆까지 아파트가 지어져서 거대한 방음벽이 둘러졌으며, 무려 8~10차로로 확장되고도 차들로 몸살을 앓는 지경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1970년에 갓 개통했던 당시에는 얘는 전구간이 겨우 4차로일 뿐이고 주변은 온통 그냥 논밭이었다. 비상 활주로 공용(신갈, 천안, 김천 어딘가?)이어서 제대로 된 중앙분리대가 없거나, 아니면 그냥 화단 형태로 만들어졌던 구간도 있었다. 거기에다 다니는 차량도 매우 적으니, 인근 주민이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최초로 6차로 이상으로 확장된 구간은 1987년, 회덕-남이 사이이다. 서울-수원 구간은 6차로를 거치지 않고 1991년에 곧장 8차로로 확장되었고, 2010년대가 돼서야 판교 주변 등 일부 구간은 10차로까지 확장됐다. 여기 말고도 곳곳이 도로를 다시 만드는 수준의 선형 개량과 확장을 거쳤기 때문에 지금 경부 고속도로 개통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구간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고속도로를 처음 만들 때 열악한 여건 하에서 너무 날림 졸속으로 만든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원조가카도 "내가 야당이 하도 반대해서 일단 4차로만 만들지만.. 얘는 앞으로 너무 비좁아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길가에 건축을 허가하지 말고 언제든지 확장 가능하게 대비해 놔라" 이런 예상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마치 옛날에 갑작스러운 북괴 남침 때 정부가 너무 허둥거리고 미숙하게 대처한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할배 자신은 "북괴가 곧 반드시 남침할 것"을 알고 미국에다 계속 더 도와 달라고 지원을 요청했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이 묵살당했으니 이에 대해서는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있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거라는 것까지 예견했던 선각자가 북괴의 침략을 예견하지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본인은 그렇게 경부 고속도로의 어제와 오늘은 모습 차이가 어떠했을지를 생각하면서 운전했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구간만 좀 막혔지 그 뒤부터는 쌩쌩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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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동이면에서 옛날 고속도로가 현재의 고속도로와 나란히 지나는 흔적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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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로는 한쪽만 재포장 되었고 나머지 구간은 그냥 주차장 공터처럼 쓰이고 있다. 마치 과거에 경의선이 복선이었다가 국토 분단 후에는 단선만 쓰이게 됐던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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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고속도로 구간이었던 '금강2교'이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니 여행이 더욱 운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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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니 거대한 공터가 나타나 있었다. 캠핑 하기 딱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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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쭉 달렸다. 길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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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폐선 같은 감흥을 고속도로 폐구간에서 경험하게 될 줄이야..
여기 길바닥 아무데서나 텐트 치고 혼자 고독을 즐기며 밤을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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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옥천 터널, '그분'이 임박했다~!
저 촌스러운 한글 글자는 '어설픈 둥근고딕' 계열보다도 더 오래된 197, 80년대 작품임이 틀림없다.
터널의 이름이 처음에는 '당재 터널'이다가 나중에 '옥천 터널'이라고 바뀌었는데...

언제 개명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개명되고 나서 처음 만들어진 표지판이 한 번도 안 바뀌고 저렇게 전해진 것이지 싶다.
밑에 로마자 표기만이 훗날 로마자 표기법의 개정으로 인해 땜질 형태로 바뀌었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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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현역 시절의 옛날 사진으로만 보던 그 터널 입구를 직접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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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터널은 위의 사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행과 하행이 서로 모양과 길이가 다른 짝짝이로 만들어졌다.
얘로 말할 것 같으면 대전-대구 사이의 난공사 구간 중에서도 손꼽히는 가히 최악의, 마의 구간이었다고 한다.

기술과 노하우라고는 쥐뿔도 없던 열악한 시절에 거기는 지형도 참 지랄맞았던 것 같다. 발파를 한번 했다 하면 지반이 무너지고 토사가 흘러내리고 현장이 황폐화되는 현실에 직면했다. 여기서만 공식 통계상 낙반 사고 13건에 9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인부들은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특히 터널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느티나무를 베어 버렸더니 산신령이 노해서 이런 사고가 나는 거라는 낭설이 쫙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느티나무를 베라는 명령을 내렸던 어느 공병 중령 장교조차 그 다음날 교통사고를 당해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부들이 너무 겁먹은 나머지 작업 지시를 거부하고 도주할 지경이 됐으며, 일당을 몇 배로 더 올려 준대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간부들이 이들을 달래느라 왕창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어렵고 힘든 건 알겠다만, 개통 날짜는 정해져 있고 그때 무려 대통령 각하께서 참석하실 예정이다. 개통식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연기할 수 없으니 무조건 까라면 까라. Impossible is nothing이야. 못 하면 너네 회사 문 닫을 줄 알아!"라고 시공사인 현대 건설을 무식하게 쪼아 댔다. 어휴.. 그땐 그랬다.

그러니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높으신 관리자들도, 심지어 정 주영 현대 회장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과로를 감내하며 아예 현장에서 죽치고 살아야 했다. 중장비를 조종하던 인부가 도중에 화장실에 갈 여유도 도저히 없어서 참다못해 운전석에 앉은 채로 바지에다 쌌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그나마 현대 건설에서 일반 시멘트보다 만들기 어렵고 훨씬 더 비싸지만(단가가 2배 이상) 수십 배가량 더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를 동원하는 묘책을 내서 공기를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영업수지 흑자를 포기하고 말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옥천 터널은 거의 30년 동안 쓰이다가 지난 2003년, 옥천 구간의 선형 개량과 이설로 인해 고속도로 구간에서 제외되었다.
하행 터널만이 2차선 도로로 쓰이고 있고, 상행 터널은 폐쇄되어 김치 저장 창고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와인 저장 창고로 쓰이고 있는 경부선 철도의 옛 성현 터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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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나온 뒤에도 계속해서 이런 멋진 길이 이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과거의 경부 고속도로 본선 구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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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옛 고속도로의 흔적은 옥천의 거의 동쪽 끝에서 구도로가 신도로와 다시 마주치는 듯하면서 끝났다. 현재 고속도로로 치면 '영동1터널'을 동쪽으로 지난 지 얼마 안 된 지점이다.
본인은 다시 옥천 방면으로 돌아와서 여기 일대의 나머지 관광을 시작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4 08:33 2019/09/0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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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고속도로에는 서울-부산 전구간을 통틀어서 수 km 이상 곧은 직선이 그것도 지리적으로 정확하게 남북 수직으로 뻗은 곳이 딱 두 군데 있다.
바로 죽전 휴게소에서 신갈 IC까지의 용인 시내 구간과, 좀 더 아래의 천안 북부 일대의 성환 활주로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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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 구간은 유사시에 고속도로가 아니라 전투기의 활주로로도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아주 중요한 특징이 있다.
활주로 공용 구간은 여기 말고도 김천 아포 역-대신 역 사이의 경부선-경부 고속도로 평행 구간과, 울산-부산 사이에 더 있기도 한 것 같은데, 저 성환 활주로와 용인 구간은 100% 확실하고 아주 유명한 구간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들 구간은 무엇보다도 고정된 형태의 중앙분리대가 없었으며(있더라도 쉽게 걷어낼 수 있는 임시 가공물 형태),
아스팔트 대신 시멘트 포장이 유지됐고 도로 주변에 가로수나 가로등도 없이 황량한 벌판이었으며, 인근에는 군 초소와 보급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야 유사시를 대비해 경부 고속도로의 활주로 공용 구간을 틀어막고 진짜로 비행기를 띄우고 내리는 훈련을 하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그러기에는 고속도로에서의 자동차 통행량이 너무 늘었고 대체 활주로 시설도 마련된 관계로, 그런 용도는 최소한 20세기 말부터 진작에 폐기되었다. 지금은 그 구간도 모두 고정된 중앙분리대가 생기고 아스팔트 포장으로 바뀌어서 다른 구간과의 차이가 없어졌다.

게다가 용인-서울 구간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로 주변에 다른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버렸고, 천안 쪽도 북천안 IC가 추가되면서 육교 형태의 장애물이 중간에 하나 생겼다. 활주로 공용의 흔적은 이렇게 점점 사라지는 중이다.
하긴, 활주로 공용 구간 인근의 부지는 개발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하는 교통사고가 나기도 더 쉽기 때문에 민간인의 입장에서는 좋을 게 별로 없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독일의 아우토반은 활주로 겸용을 염두에 두고 고속도로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덕분에 포장도 필요 이상으로 아주 두껍고 튼튼하게 돼 있다고 한다. 그때는 사람들이 집집마다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남는 도로 용량도 활용하고 그게 일석이조의 좋은 방법이었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아우토반을 처음으로 이걸 계획하고 만든 주체가 전쟁광 나치 독일이기도 했고.

미국 같은 땅 넓은 나라는 굳이 도로를 빌리지 않더라도 공항 짓고 활주로로 쓸 땅은 넘쳐난다. 그리고 미국의 자동차 전용 도로는 중앙분리대 정도가 아니라 상· 하행이 아예 가로수로 가로막힌 채 도로가 따로 건설된 경우도 많다.
하지만, 광활한 사막을 넘나드는 interstate highway 중에는 진짜 허허벌판에 끝없는 직선만 펼쳐진 도로도 있는데 이런 곳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지 못하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북한의 고속도로는 역시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김 일성의 집권 말기인 1992년에 완공된 평양-개성 고속도로는 북한의 고속도로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선형이 매우 곧다. 지나가는 차 없지, 도로폭 넓지(6차선), 선군정치이지, 당연히 활주로 활용을 염두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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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고속도로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남아메리카에는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이 있다. 이 코딱지만 한 섬에 있을 건 다 있어서 공항도 있다. 가장 가까운 대륙 영토인 칠레까지가 직선으로 3000km에 달하기 때문에 배만으로는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공항은 활주로가 이용객에 비해 대단히 크고 길다. 그 이유는 이 공항이 우주 왕복선의 비상 착륙 활주로로도 공용할 수 있게 NASA의 지원을 받아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비행기가 아니라 비행기+우주 왕복선 구도가 된 셈.

Posted by 사무엘

2013/01/26 08:33 2013/01/2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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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전에 우리나라 영남 지방에서 살던 선비가 한양으로 가기 위해 도보나 말로 이동한 경로는 어땠을까?
전통적으로 상주-문경-충주-이천 코스였다고 한다. 일명 영남 대로. 이것은 지금의 중부내륙 고속도로와 얼추 비슷한 선형이다. 그 유명한 문경새재도 이 경로에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구도는, 일제가 20세기 초에 경부선 철도를 살짝 다른 선형으로 건설하고 그 경로를 훗날 경부 고속도로가 인증까지 하면서 크게 바뀌게 되었다. 마치 서울 지하철 2호선이 훗날 서울의 도시 모양에 큰 영향을 끼쳤듯이, 경부선은 훗날 우리나라의 도시 발전 양상을 바꿔 놨다.

일제는 경부선을 실제로 건설하기 전부터 남의 나라의 지형을 무단으로 측량하면서 노선을 면밀히 검토했다. 상주와 충주를 경유하는 전통적인 경로가 서울과 부산을 직선으로 잇는 최단 노선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철도를 그렇게 건설하지는 않았다.
지형이 너무 험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중부내륙 고속도로도 온통 고가와 터널이 가득한 형태로 무려 2004년에야 전구간 개통했을 정도이다.

그 대신 경유하게 된 곳이 대전과 수원이다. 우회라면 일종의 우회이다. 상주와 충주가 간선 철도인 경부선과 심지어 중앙선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쇠퇴한 반면, 대전과 수원은 이 경부선 덕분에 폭발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특히 대전은 이름부터가 아무것도 없는 뻘밭-_-이라는 뜻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남선까지 건설되어 영남과 호남이 만나는 교통 요지가 됐다.

이 글에서는 경부 고속도로 얘기를 좀 하겠다. 단순히 지식 설명 위주인 여타 사전류의 설명과는 달리.. 철도와 비교하면서 나만의 글빨과 색깔로 각색을 하겠다.
우리나라에 경인선 철도가 가장 먼저 생기고 그 다음 경부선이 건설되었듯이, 고속도로도 경인 고속도로가 1968년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후, 1970년 7월 7일에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독에서 아우토반을 구경하고 온 박통이 거기서 뭔가 동기를 얻어서 야심차게 밀어붙인 프로젝트이다. 직접 지도를 펴서 노선을 구상하고, 나들목 모양까지 스케치하고..;; 전통 시절에 건설된 88 올림픽 고속도로와는 여러 모로 비교된다.

훗날 경부 고속철도가 1992년에 기공식을 한 후 10년이 넘게 질질 끌면서 예상 경비의 n배나 더 많은 비용을 들인 끝에 겨우 완공된 반면, 경부 고속도로는 비록 좀 날림기가 있긴 해도 2년 반 만에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저비용으로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1km당 1억 원 꼴이었다나? 독재 정권이 뭔가 일을 추진하는 효율은 좋았다. 작년에는 잘 알다시피 경부 고속도로 개통 40주년을 맞이했다.

경부 고속도로는 일본의 동명(東明) 고속도로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연장(내 기억이 맞다면 380km대)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둘이 자주 비교되곤 한다. 전자가 후자 건설비의 1/8만으로 건설되었다고 함.
참고로 21세기에 전구간 완공된 중부내륙 고속도로는 인플레와 토지 보상, 그리고 고가와 터널 같은 난관으로 인해 1km당 거의 경부 고속도로 전체 건설비에 맞먹는 비용이 들었다. -_-;;

경부 고속도로의 정식 명칭은 잘 알다시피 ‘서울-부산간 고속국도’였고, 처음엔 전구간 왕복 4차선으로 개통했다. 개통식은 대구에서 열렸다. 얼마나 속성으로 작업을 했으면, 차선 도색이 개통식 3시간 전에 부랴부랴 끝났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 자체가 완전 처음이었던지라 군인들도 투입하고 외국에서 중장비를 급히 수입해서 투입하고, 박 대통령이 헬기와 지프 타고 현장을 직접 지휘하는 등.. 별별 해프닝이 많았다.

개통 날짜도 그렇고 7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많은 듯한데, 건설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순직자가 공식 집계상 77명이다. 산을 넘어야 하는 대구-대전 사이가 가장 어려운 구간이었고 순직자도 대부분 여기서 발생했다. 추풍령 휴게소에는 순직자 위령비로 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 계단이 77개이라고 한다. 거기가 그렇잖아도 공사가 어려웠던 구간이기도 하고 고속도로의 거의 중앙 지점이기도 하니 위령비를 세우기 좋은 위치이다.

경부 고속도로는 전반적으로 철도 경부선과 노선이 비슷하지만, 경기도에서 철도는 서쪽(평택, 수원, 서울 영등포구)으로 빠지고 도로는 동쪽으로 빠진다(안성, 용인, 서울 서초구). 또한, 경부선은 밀양으로 가지만 고속도로는 경주와 울산, 양산을 경유한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고속도로도 경주를 제외하고 철도처럼 지름길로 건설할까 하는 의견이 당시 있었으나, 경주를 무시하기엔 인근의 포항과 울산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지금과 같은 노선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부 고속철도가 경주 경유 노선으로 건설되었고, 도로는 경주를 경유하지 않는 대구-부산 민자 고속도로가 훗날 따로 건설되었다는 게 흥미로운 점이다. 철도와 도로의 건설 방식이 서로 엇갈렸다.

경부 고속도로의 구간별 특징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일단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휴게소는 상행은 죽전(=마지막 휴게소)이요, 하행은 기흥 휴게소이다. 수원 나들목(IC)은 행정구역 상으로는 용인에 있는데, 여타 수도권과는 달리 폐쇄식 요금소가 있는 구간이면서 나들목 주변까지 온통 도시화가 진행되어 건물이 빼곡하기 때문에 주변 풍경이 무척 이색적이다. 일반적으로 고속도로 나들목이 있는 곳은 푸른 들판-_-이 어우러진 한적한 외곽이지 않던가.

청주-청원 사이는 확장 겸 분기점 건설 공사로 인해서 경부 고속도로 전구간에서 유일하게 터널이 없으면서 상행과 하행 도로가 별도의 지형의 도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신탄진 인근과 김천 인근은 경부 고속도로와 경부선, 그리고 심지어 경부 고속선이 서로 굉장히 근접해서 나란히 달리는 구간이다. 영천과 경주 일대에는 도로 근처에서 중앙선과 동해남부선 철도도 볼 수 있다.
잘 알다시피 경부 고속도로는 버스 전용 차선이 존재하는 유일한 고속도로인데, 전구간은 아니고 신탄진 이북부터 적용된다.

비록 부산은 서울에 이어 전국 2위의 대도시라고 하지만 위성도시 인프라는 수도권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서울 요금소가 무려 성남시 정자동에서 벌써 등장하고 그 이북부터는 외곽 순환 고속도로도 있고 해서 통행료 징수 방식이 바뀌는 반면, 부산 쪽 요금소는 노포 나들목까지 지나서 이미 부산 시계에 진입한 뒤에야 등장한다.

경부 고속도로를 만든다고 했을 때, 당시 정치권에서는 지금 4대강이나 운하를 반대-_-하는 것만큼이나 반발이 많았다. 당연히 그때는 평범한 서민들이 차 몰고 다니는 시대가 전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고속도로 닦아서 부자들이나 좋은 일 시킨다고, 그 돈 있으면 호남이나 심지어 강원도나 좀 발전시키라고 등등..;; 훗날 대통령까지 한 유명한 정치인도 이때 길바닥에 거의 드러눕고 “배 째라” 하는 수준으로 반대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박통은 반대를 무시하고 일을 밀어붙였고, 나중에는 이렇게 코멘트를 했다.
“내가 지금은 야당이 하도 반대해 대서 4차선만으로 끝내지만, 이 도로는 얼마 못 가 분명 비좁아질 것이다. 확장을 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 그러니 도로 좌우 50미터로는 건물 허가를 주지 말고 노반을 확보해 둬라.”

실제로 오늘날 경부 고속도로는 거의 모든 구간이 최하 6차선, 아니면 8차선으로 확장돼 있다. 경주-영천 같은 극소수 구간이나 아직 4차선이다. 서울 시내는 진작에 크고 아름다운 8차선으로 확장되었으나, 고속도로를 따라 다닥다닥 지어진 신도시 때문에 수도권 구간은 출퇴근 시간에 정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서울 시내 구간도 극심한 정체를 겪는 곳이다만, 여기는 진입로가 아예 고가인지라 4차선 상태에서 이제 더 확장도 못 하고, 어쩌면 좋을까? -_-

철도는 경부선, 고속도로는 이 경부 고속도로가 우리나라 교통망의 핵심 동맥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고속도로에 번호를 매길 때도 횡축은 끝자리가 0, 종축은 끝자리가 5이지만, 경부만은 그 상징성과 예외성을 감안하여 당당히 1번이다. 요즘은 도로도 철도도 선형이 비슷한 여러 도로를 한데 싸잡아서 한 번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지만(가령, 고속도로의 경우 25 = 논산-천안 + 호남; 55 = 대구-부산 + 중앙; 35 = 중부 + 통영-대전 등), 경부는 전구간이 일관되게 건설된 노선이기도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1/02/28 08:25 2011/02/2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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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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