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의 부자 금수저 열전

우리나라엔 삼성이니 현대니 백 종원, 이 수만=_=이니 하는 기업인 말고도 다음 인물들이 정말 엄청난 부자였다. 물려받았던 자수성가했건..

1. 육 영수 (훗날 박 정희 대통령 영부인)

옥천에서 손꼽히는 초호화 부잣집 출신이었다. 일제 시대 1930~40년대에 이미 집에 자가용이 있었고 전화기가 있었다. =_=;;
생가를 찾아가 보면.. 꼴랑 집 한 채가 아니라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의 '단지' 형태이다. 근처에 있는 정 지용 시인 생가하고는 완전 넘사벽 급으로 차이가 난다.

그러니 이분의 애비(육 종관)는 사위 박 정희를 아주 깔보고 개무시했다. 가난한 군바리 놈팽이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저 때는 인재가 부족해서 30대에 무궁화나 별까지 다는 사람도 있는 "대신"에, 계급이 높아 봤자 군인들의 연봉이나 복리후생도 개판이었다.

"신랑 육 영수 군과 신부 박 정희 양.."은 실제로, 진짜로 그 당시 결혼식 사회자가 저질렀던 실수이다. 심지어 신부가 신랑보다 키도 더 컸고. ㄲㄲㄲㄲㄲ
그랬는데 사위가 결혼 후 10년 만에 나라를 뒤엎어버리고 대통령이 되니.. 장인어른이 뒤늦게 사위에게 사죄를 했댄다.

박 정희는 모욕을 당한 건 절대로 잊지 않고 이를 악물고 자기 신분을 상승해서 설욕하는 타입이었다. 교사였다가 일본군 장교가 돼서, 나중엔 대통령이 돼서..

2. 공 병우 (안과 의사 + 한글 기계화 연구인)

이 사람은 진짜 개룡남이다. 그 옛날, 1930년대에 혈혈단신으로 일본 유학 가서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까지 따고 안과 의사가 됐다.
그 뒤 경성 한복판에서 개원을 했으니 진짜 돈을 빗자루로 쓸어담았다. 물려받은 거 없이 자기 노력 능력만으로 저렇게 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창기엔 개인 납세자 중에서 전국 톱급으로 세금을 많이 낸 걸로 유명세를 탔다. 안 그래도 능력자 억만장자인 데다, 강직하고 옳곧은 성품 덕에 소득을 하나도 안 숨기고 곧이곧대로 신고했더니 저런 세금폭탄이 떨어졌다.. 근데 그거 다 내고도 하나도 꼴리는 거 없었댄다.
"왜놈들로부터 해방돼서 이제야 내 나라가 세워졌는데 닥치고 정직하게 세금 내서 나랏님을 도와주자" 그런 마음이었다고.. ㅠㅠㅠㅠ

공 박사는 1950년대, 나라가 6 25 때문에 보릿고개니 국제시장, 몽실언니 이러는 개판오분전 폐허가 됐을 때도 혼자 여권 발급받고 미국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유학이나 비즈니스가 아니라 단순 관광 목적으로 말이다..!! (창랑호 만송호 이런 뱅기를 탔으려나?)
1960년대 글자판 표준화 갖고 싸우던 시절에도 이미 외제차 자가용을 굴렸고 아예 운전수까지 고용했다.

그때 나라에서 세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채택했으면 공 박사가 고맙다고 꾸벅꾸벅 하면서 ETRI 같은 기관에 저 사람 사재만으로 슈퍼컴이나 각종 연구 자재 장비가 더 기증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내 뇌피셜).;;;
그 시절에 공 박사 같은 애국자 천재와 국가가 대립하고 싸우는 관계가 돼 버린 건.. 참 두고두고 땅을 칠 국가적 불행이었다.

3. 백 남준 (예술가)

1950년대에 서울 한복판에서 자가용 있고 "피아노" 있고, 바나나를 먹을 수 있는 집에서 자랐다. =_=;; 자 이 정도면 말 다 했지? 아마 집에서 TV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 그는 생계 걱정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덕질을 마음껏 할 수 있었고, 그게 개인적인 천재성까지 가미돼서 독보적인 비디오 아티스트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분은 정~~말 성품이 온화하고 친절하고 겸손하고, 칭찬이나 공을 주변 조력자들에게 돌리고.. 인성이 정말 킹왕짱이었다고 한다. 개차반 졸부가 절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공 병우 박사에 대해서는 2000년대 이후 스마트폰 모바일 시대까지 살아 있었으면 무슨 덕질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백 남준은 2010년대 이후 브라운관 디스플레이가 없어진 뒤에는 무슨 덕질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난 오랫동안 백 남준과 백 "낙"준이 헷갈리긴 했다.. ^^

4. 근현대사 관련 인물

  • 윤 보선도 예상 이상의 명문가 금수저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 시대에 사비로 영국 유학까지 가능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의외로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는지.. 2공화국이 물 건너간 뒤에도 박 정희의 라이벌 격으로 대선에 출마했었다.
  • 이 시영· 이 회영 6형제는 대대로 고위 벼슬을 지낸 갑부 집안 출신이었는데.. 독립운동 하느라 가산을 탕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 그 반면 이 완용· 이 하영 이런 인간들은 친일매국의 댓가로 일제 시대 동안 신흥 갑부로 등극했다. 부동산 재산이 정말 엄청났었다. 물론 그게 전부 일제로부터 받은 건 아니고, 자기들이 머리 굴려서 재테크로 재산을 더 불린 것도 많다.

5. 나머지

한편, 서울대 치대를 나와서 치과 의사를 하다가 관두고 사업을 해서 여느 치과 의사보다 훨씬 더 떼돈 번 사람도 있다. 하긴, 치과 의사가 될 머리로 뭘 하든 성공 못 하겠나 싶다.

  • 오스템임플란트 창업자
  • 원로 배우 신 영균 (.....;)

글쎄, 가수 자우림 윤아의 남편도 서울대 치대 나온 치과 의사이다. 자우림이 어느 인터뷰에서 "설대 치대 출신 치과 의사와 같이 살아 보니 어때요?"라는 질문에 "지금까지 남편이 저보다 돈 더 많이 벌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라고 대답해서 주변을 벙 찌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이런 인물도 떠오른다.

  • 정석의 저자 홍 성대: 사립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모교에다 강의동을 지어서 기증할 정도로 억만장자가 됐다.
  • 前 카이스트 화학과 김 봉수 교수: 생활비가 교수 월급만으로 감당이 안 돼서 주식을 시작했다는데.. 관심 분야 업계 흐름과 주식의 세계를 그야말로 자기 전공 공부하듯이 공부한 듯하다. 그야말로 교수 연봉의 수십, 수백 배를 벌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4/10/04 08:35 2024/10/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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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 휴게소

경부 고속도로 옥천 구간에는 금강 휴게소라고 말 그대로 금강을 끼고 있는 매우 경치 좋은 휴게소가 있다.
처음에 해당 부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직원들의 숙소로 개발되었다가 나중에 유원지가 조성되었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고속도로의 개통 후 만 1년 만인 1971년 7월 7일부로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얘는 여느 휴게소들과는 다른 특징들이 여럿 있다. 그러니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요즘 관행처럼 상· 하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휴게소를 공유한다. 그러면서 방면별로 차량들이 완벽하게 분리돼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유턴· 회차가 가능하다.
  • 인근에 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 있다.
  • 금강 IC라고 유원지 방면으로 나가는 자체 나들목이 있다(금강 IC).
  • 그리고.. 조령리 마을이라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폐쇄식 고속도로 구간의 내부에 자리잡은 마을이 있다. 마치 전국에서 유일하게 DMZ 내부에 자리잡은 대성동 마을이 있듯이 말이다.

지하철이야 한번 카드를 찍고 개표 구간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는 아무 열차나 마음대로 탈 수 있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인천 공항의 경우, 보안· 면세 구역 안에서 다른 탑승동으로 이동하는 지하 셔틀열차를 탔다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출국 승객과 입국 승객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동선 특성 때문에 그렇다.

그럼 고속도로는 어떨까?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전통적으로 한번 진입한 차량의 유턴· 회차를 허용하지 않는 형태였다. 휴게소도 상· 하행별로 꼭 따로 만들곤 했다.
일반적인 고속도로 이용 차량들이 굳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일은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또한 상· 하행 운전자가 한 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다면 서로 짜고 통행권을 바꿔치기 하는 수법으로 톨비를 실제 이용 거리보다 훨씬 적게 조작해서 낼 수도 있다.

이 고전적인 수법을 봉쇄하기 위해 도로 공사 측에서는 통행권에다가도 차량 식별 정보를 기재하고, 휴게소를 상· 하가 분리된 형태로 만드는 등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제는 하이패스 덕분에 저런 꼼수 걱정 없이 고속도로 이용 차량의 동선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고속도로도 워낙 촘촘하게 많이 건설되어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우회 경로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프 내부에 사이클 많음) 단지 귀찮냐 덜 귀찮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100% 하이패스 기반으로 바뀌고 재래식 통행권이 완전히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가장 먼저 (1) 고속도로 시· 종점의 넓은 톨게이트들의 폭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차들을 번거롭게 세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톨게이트 직원이라는 직업도 마치 과거의 버스 안내양이나 타자수만큼이나 역사 속으로 사라질 테고..
이와 더불어 (2) 휴게소도 상· 하행 공용이고 방향 전환이 자유롭게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게 새로운 유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행담도 휴게소도 얼마 안 되는 상· 하행 공용이긴 한데 오랫동안 상· 하행 차량이 서로 격리 수용되었으며 방향 전환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모다 아울렛' 시설을 통해서 사실상 방향 전환이 가능해졌다.
여담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금강 휴게소는 옛날에 상· 하행 공용으로 만들어졌던 휴게소라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직원 숙소 내지 유원지 시설이 고속도로 휴게소로 개조된 것이니 상· 하행 따로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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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순직자 위령탑이 있긴 하지만, 차도를 횡단해야 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막 수월하지는 않다. 현재의 고속도로가 아니라 아까 답사했던 구도로에서 더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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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과정에서 순직한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77명이라고 집계돼 있지만, 정말 77명뿐이고 이 숫자가 맞는지는 이제 와서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무슨 국정원 청사에 새겨진 n개의 별도 아니고 말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데 7월 7일에 맞춰서 일부러 77명이라고 북한스럽게 주작한 거라는 낭설까지 나돌 정도이다.

난 77인의 명단 자체가 공개된 적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더라. 저 위령탑의 뒷면을 보면 순직자의 이름과 거주지(시/구)가 적혀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난 그건 현장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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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휴게소의 남쪽으로 금강 유원지 근처의 모습은 위와 같다. 보아하니 물을 저렇게 가둬 놓고 수력 발전 같은 것도 하는 모양이었다.
또한, 금강 IC라고 휴게소의 고유한 나들목/톨게이트가 있어서 저 유원지 방면으로 차량이 드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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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휴게소 자체의 내부 모습은 별로 소개하지 않은 것 같아서 사진을 하나 남긴다. 저 건물 자체는 간판의 윤고딕 서체만큼이나 200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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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여행을 통틀어서 내 독사진은 여기서 딱 한 장만 남겼다. 금강을 배경으로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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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으로.. 이것이 금강 휴게소에서 조령리 마을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아래의 굴다리이다. 저기 안엔 민가, 식당, 펜션 정도가 있다. 안에 들어가면 대충 저런 분위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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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저기 있는 어느 식당에 들러서 이번 하계 휴가 특식을 먹었다. 메기 매운탕과 향어회. 민물고기 요리인데 바다 생선 요리만큼이나 맛있었다.

3. 옥천 시내에서 생가 두 곳

본인은 정 지용 시인과 육 영수 여사가 옥천 출신이라는 것을 현장에 가서 도로 표지판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계획에 없었지만 이분들의 생가를 들러 봤다. 차로 금방 갈 수 있었으며, 두 생가도 서로 직선 거리 700m 남짓으로 가까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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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에 있는 정 약용 생가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생가 옆에는 고인의 동상과 문학 기념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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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지용은 잘 알다시피 <향수>라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시의 저자로 유명하다. 윤 동주 하면 <서시>가 떠오르듯이 말이다. 아, 실제로 정 지용은 윤 동주의 선배 겸 스승으로서 그에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저 안내판은 글꼴의 스타일로부터 추측하건대 21세기 작품은 절대 아니고 90년대에 만들어진 것 같다. 1988년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 그보다는 나중이다.

안내판에는 정 지용의 최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는 6· 25 사변 중에 실종되는 바람에 한동안 모든 교과서와 전기에서 생몰년도가 "1902 ~ ?" 라고 기재되었다. 그 와중에 월북 가능성이 점쳐지는 바람에 민주화 이전에는 그의 존재와 작품까지 몽땅 흑역사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8년부터 그런 금기가 해제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추가적인 기록과 증언이 발견된 덕분에 그가 1950년을 넘기기 전에 폭격을 맞아 죽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납북 당하던 중이긴 했지만 북한에서 어차피 제대로 활동도 못 하고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빨갱이 누명도 확실하게 벗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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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육 영수 여사 생가이다.
평범한 초가집이던 정 지용의 생가와 달리, 저분의 생가는.. 무슨 으리으리한 대궐 같았다. 방금 전까지 흥부의 집을 보다가 놀부의 집을 보는 느낌?
집안이 대대로 지주였으며, 일제 시대에 이미 자가용을 굴리고 다녔을 정도로 옥천 지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금수저 부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육 여사의 부친이 처음에 사위를 깔보고 무시할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는데 그 사위가 나라를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돼 버렸으니.. 참 어지간히도 대형 사고를 쳤다.
육 여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로 어질고 훌륭한 대통령 영부인이었다고 추앙받는다. 본인은 뜻하지 않게 이분의 기일에 맞춰서 생가를 구경하게 됐다.
생가는 재건 복원된 레플리카이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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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뭐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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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육 여사의 어린 시절 사진과 유작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원조가카가 부인을 잃은 후에 남긴 시 몇 편이 놓여 있다.
원조가카는 포병 장교 출신의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 악기 연주와 문학에도 능통한 수재였다. 특정 분야에서 완전 넘사벽급 기상천외 비상한 창의성을 발휘한 천재는 아닌 것 같지만, 리더십과 보편적인 지적 능력이 남들 평균보다 더 뛰어난 영재였던 건 확실하다.

지도자에게는 영재가 천재보다 더 어울리는 자질이기도 하다. 지도자는 세부 실무에 천재들을 잘 배치해서 맡기고 관리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니들이 일하는 데 필요한 돈줄은 내가 대 주고 책임도 내가 지겠다. 니들은 좋은 실적 결과물만 내놓아라" 이렇게 말이다.

거기에다.. 소싯적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차별과 무시 당한 건 대놓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긴 칼 찬 군인이 돼서 돌아와서 설욕하고.. 장인에게 무시 당했던 것은 아예 대통령이 돼서 설욕했으니 이 사람의 승부욕과 집념과 끈기도 참 비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은 원조가카에게 매우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으며, 그게 원조가카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불행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공식 석상에서는 장녀인 레카가 영부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원래 영부인만 한 포스는 부족했을 것이고, 이때부터 원조가카도 예전 같은 자제력을 잃고 좀 폭주하려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인이 없으니까 여자 연애인과 여대생에게도 더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암살 당하던 당시처럼 말이다.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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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은 이렇게 넓은 풀밭과 정자(사진엔 안 나왔지만)도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나들이 하기에 좋았다.
옥천에서 경부 고속도로 외에도 이런 답사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7 08:35 2019/09/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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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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