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뒷부분을 읽으면서 먼 옛날, 예수님이 배반 당하고 악의 무리들에게 체포되고 '답정너' 어거지 재판을 받은 후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을 곰곰이 묵상해 보았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이 십자가 사건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하고 기괴한 이벤트만 골라서 벌어진 끝에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예수님이 가끔은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발언 때문에 어그로를 끌긴 했지만, 일단은 기적 때문에 대중적으로 최소한의 인기와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백성들 눈치를 보는 '높으신 분'들은 예수님께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명절에는 체포와 처형을 더욱 피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현실에서는 최악의 상황만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가룟 유다를 보고는 예수님께서 “니가 이제 뭘 하려는지 난 뻔히 알고 있지만, 이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 니 할 일 하러 가라”와 다름없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유다를 밖으로 보내 주셨다. 적들과 내통하러 나가는 건데도 어찌나 곱게 보내 줬으면, 그때 다른 제자들은 유다가 다른 돈이나 물건을 챙기는 심부름을 하러 나가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그 뒤, 군중이 붙어 있지 않은 한밤중에 예수님이 거의 “옜다, 나 잡아 가슈” 급으로 일부러 한적한 바깥에 나가서 낚여 줬다. 그 덕분에 체포가 가능했다.

제아무리 악의 무리라 해도 예수님이 선한 일을 한 것.. 즉,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 걸 트집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어설픈 거짓 증언들은 같은 상황에 대해서 자기들끼리도 진술이 일치하지 않아서 법적 효력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나마 트집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성전 사흘 재건' 떡밥인데... 이건 처음 등장하는 곳이 원래는 요 2:19이지만 '카더라' 명목으로 마 26:61에서 먼저 미리 등장한다.
솔로몬이 기도를 한 내용이 있기도 하니 유대인들은 물리적인 성전 건물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컸던가 보다. 그런데 그 엄청난 성전을 걸고 저런 충격적인 말을 예수님이 하셨으니 그게 예수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모양이다.

물론 앞뒤 문맥 행간 다 짤라먹고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찌라시 기레기들의 수법은 지금이나 그 시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예수, 성전 폭파 발언 충격 일파만파”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다른 그 어떤 거짓 고소 개드립에도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않아서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는 즉각 대답하셨다. 대제사장 앞에서든(마 26:63-64), 빌라도 앞에서든(마 27:11) 말이다. 그것이 당장 자기 신변을 불리하게 만드는 답변이더라도 말이다.
예전부터도 예수님은 시종일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 16:15)

다른 사람들은 마태복음 22장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 종교, 시사 등 온갖 주제로 예수님께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냥 즉문즉답이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니 제끼고, 그분이 카운터어택으로 딱 하나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셨던 것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인데 왜 선조인 다윗이 자기 후손을 보고 주님이라고 불렀을까?” 정체성 질문 하나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떡실신했다.

그러니 이런 패턴을 아는 예수님의 적들이 트집을 잡은 방법은 역시나 100% 걸려들 수밖에 없는 종교라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을 악용하는 것이었다. 다니엘을 모함한 대신들이 다니엘을 행실로는 트집 잡을 수 없으니 기도라는 종교 관습으로 올가미에 넣었듯이 말이다. 다니엘도 그냥 그 30일 동안은 그냥 문 닫고 골방에서 몰래 기도할 수도 있었지만, 일면 고지식한 바보 같이 일부러 흉계에 걸려들었다.

이처럼 예수님도 자기 정체성만은 당당하게 드러내셨다. 대제사장은 드디어 명목상 신성모독이라는 중대한 껀수를 하나 잡았으니 이렇게 기쁠 데가. 하지만 겉으로는 옷을 찢고 오버하면서 “oh my god!! ㅠ.ㅠ 어머나 세상에 제 입으로 제 발로 하나님을 사칭하는 놈이 있다니 이런 참람할 데가!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단 말이냐? 이 새퀴는 뒈져야 마땅하다”라고 짜여진 각본대로 아주 생지X(비속어 죄송~~)을 해 댔다. 옛날에 악의 무리들이 나봇을 신성모독죄 누명을 씌워 인민재판을 벌이고 죽였을 때처럼 말이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그 창조주가 현신했는데 피조물들로부터 따귀를 맞고 침뱉음, 조롱, 학대를 당한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피조물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제자들은 실족하고 멘붕에 빠지고 도망쳤다. 5천 명의 군중을 먹이고, 물 위를 걷고, 중병을 고치고 마귀들을 내쫓고 죽은 사람까지 살렸던 자기 스승이 언제부턴가 고난, 죽음 얘기를 하면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더니.. 왜 이렇게 너무 나약하게 험한 꼴을 당하는 걸까?

베드로는 의욕이 넘쳐서 처음엔 예수님의 적들을 향하여 용감하게 칼까지 휘두를 정도였지만.. 예수님이 자기 기대와는 너무 딴판으로 행동하자 제풀에 기가 죽었고.. 결국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위급한 상황에서 그분을 세 번 부인하는 인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반역죄 신성모독죄로 몰아서 죽이고 싶었지만, 자기들도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판에 자체적으로 사형 집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그분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적 원수인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나중에는 “우리에게는 카이사르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이러기까지 한다. 일제 강점기로 치면 조센징들이 “우리에게는 덴노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이런 짓을 한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걸로도 모자라서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 버린 확인사살 크리티컬은 “저 사람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아올지어다”이고 말이다.

하지만 빌라도도, 헤롯도 예수님을 찬찬히 살펴보니 저 사람은 딱히 사형을 당할 만한 중죄인이 절대 아니었다. 헤롯은 예수님을 그냥 해롭지 않은 미치광이 정도로 치부한 듯하나 빌라도는 예수님이 보통사람이 아니란 걸 직감했다. 목숨을 전혀 구걸하지 않고 태연한 그분의 포스에 자신이 오히려 압도당하고 초조해졌다. “다.. 당신은 왜 아무 말도 없느냐? 주변에서 온통 당신을 고소하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나에게는 너를 처벌하거나 풀어 줄 권한이 있는데 왜..? 으응..??” 같은 식.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었지만 이미 민심은 광기로 치닫고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선동을 당했는지, 아니면 무기력한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했는지 백성들조차 폭도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요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흉악범에게나 집행되는 십자가형을 요구했다. 그리고 빌라도는 자기 정치 생명 보존을 위해 이를 허락해 버렸다. 그것도 명절 기간에..;; 이때 같이 들러리로 끌려나와 갑자기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 두 명은 날벼락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온갖 기적을 베풀며 당장이라도 자기 민족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킬 것 같던 슈퍼스타 예수가 하루아침에 너무도 무기력하고 나약하게 십자가형을 당하자.. 무지한 군중들은 그분에게 온갖 야유를 퍼부었다. '성전 사흘 재건' 떡밥도 다시 나온다. (마 27:40)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더니 당신 꼴 좋다~!”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더니 저 사람은 자기 자신은 못 구하네? ㅋㅋㅋㅋㅋ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 & 유대인의 왕이라면 한번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ㅋㅋㅋㅋ”

그러나 이때 예수님의 기도는 정말 비장하고 숙연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눅 23:34)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들도 처음에는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었다. 제 코가 석 자인 주제에.
그러나 누가복음의 진술에 따르면 둘 중 하나는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정말 드라마틱하고 놀라운 회심을 했다. (눅 23:42)

그 뒤의 결말은 여기서 굳이 길게 각색해서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당한 여느 죄수들과는 달리 불과 몇 시간 만에 일찍 숨이 끊어졌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피한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생명을 내어놓은 거라고 한다. 십자가형은 참수나 화형과는 달리 죽을 때까지 죄수를 내버려 두는 형벌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저런 행적이 나올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사되고 묻힌 지 사흘 만에 부활했으며, 이를 본 제자들은 그야말로 가슴이 터질 듯 기쁨으로 용기백배하여 담대한 복음 전도자로 바뀌었다. 그 어떤 난관이나 심지어 죽음과 순교도 이들의 증언을 꺾지는 못했다. 그래서 기독교가 태동할 수 있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교들 중 신이 인간을 먼저 사랑했고 인간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피흘려 죽었지만 부활까지 했다고 가르치는 유일한 종교이다!

국내에는 송 명희 시인이 예수님의 고난을 뭔가 인간적인 애틋한 심상으로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얼마나 아프실까>,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누구 때문에> 같은 찬양 말이다. 물론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단순히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나 여느 순교자 같은 성격은 아니다. 또한 무슨 도살장에서 도축 당하는 짐승을 불쌍해하듯이 인간의 입장에서 무작정 동정할 만한 성격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뭐랄까 정말 엄청나고 대단한 일인 건 틀림없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봉인까지 아무 문제 없이 뚫고 무덤을 탈출하자, 기존 악의 무리들은 보초병들을 매수하여 여론 조작을 시도했다. 보초병들이 조는 사이에 제자들이 무덤에 침입해서 예수 시체를 훔쳐 갔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걸로 대응했다.
그 시절에 로마 군인이 근무 중에 졸다가 적발되었다? 이건 중대 군기 문란죄이며 당사자는 그야말로 끔살을 면치 못했다. 또한 죄수 같은 걸 놓쳤다면 지키던 간수가 자기 목숨을 대신하여 책임을 져야 했다. (행 12:19 베드로를 놓친 감옥 간수들의 최후. 행 16:27 감옥이 지진으로 파괴되자 간수는 곧장 자결하려 함)

아무리 유대교 종교인들이 돈을 많이 주고, 또 졸았던 것에 대해서 자신들이 적극 변호하고 실드를 쳐 주겠다고 약속은 했어도... 졸다가 예수 시체를 도둑맞았다는 소문을 로마 군인이 퍼뜨린다는 건 어지간해서는 자충수에 가까운 짓이었을 텐데 싶은 생각이 든다. 뭐, 고의성이 있든 없든 예수님 시신을 놓친 군인들은 어떤 경우든 신변이 좀 걱정되는 처지가 되었겠지만.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의 앞뒤가 안 맞는 행적을 좀 더 살펴볼 수 있다.
자기가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 절대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 백성들 눈치를 보고 그들의 예상 반응을 시뮬레이션하고, 서로 의논을 하면서 잔머리를 굴린다.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에 대한 대답도.. 예 아니면 아니요라고 하면 될 것을 그들은 어떻게 대처했던가? (마 21:25-27)

또한 온갖 율법을 어기면서 예수님을 거짓 고소하고 추악한 짓은 다 했으면서... 가룟 유다로부터 반환받은 돈은 제 딴에 더러운 돈이라고 성전의 보고에다 안 넣고 율법 따지면서 종교적인 행세를 한다(마 27:6).

그들의 또 다른 위선적인 면모는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라고 그들을 맹렬하게 책망하시는 23장에 기록되어 있다. 마 23:29-33을 보면.. 한 마디로 이런 내용이다. “우리 선조들은 참 병신 같아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대언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어요.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안 그랬을 겁니다.”
허나, 이들이 얼마 안 있어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걸 생각한다면 피식 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물론, 우리라고 해서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다면 과연 예수님의 진면모를 영적으로 파악하고 그분의 길을 따랐을지.. 아니면 역시나 육신적인 선동에 혹해서 그분을 정죄하는 일에 동참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성경은 인간이라면 바다가 갈라지고 홍해 중앙을 멀쩡히 건너는 넘사벽 기적 체험을 하고도 딱 사흘 뒤엔 목 말라 죽겠다고, 이딴 식으로 고생하면 뺑이 칠 거면 걍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영웅 예수님이 입성하는 걸 흥분해서 환영하던 인파들도 며칠 뒤에 태도가 180도 돌변하여 “폭도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라는 저 무능한 꼰대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인간이 생각보다 굉장히 변덕이 심하고 간사하다고 말하는 책이다. 당신이라고 해서 안 그럴 것 같은가? “천만에”다.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바빌론 포로 귀환 이래로 이제 절대로 우상 숭배 안 하고 최소한 구약 성경 유일신만 믿기로 작정을 한 종교 꼴통들이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구약 성경을 필사하고 보존해 온 종교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이들이 비록 예수님 당대에 전반적으로 영적으로 좀 맛이 가 있긴 했어도 이들만이 마치 악의 축인 양 싸잡아 정죄하는 것은 성경 독자로서 옳지 못한 태도이다. 세상에는 바리새인만도 못한 인간들 역시 엄청 많다는 걸 알아야 하며, 특히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반유대주의 풍조에 동조하는 건 절대로 성경적인 자세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글이 굉장히 길어져 버렸는데.. 맺기 전에 하나만 더, 빌라도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 보겠다.
먼저 빌라도. 그는 현장에서 저렇게 우유부단하고 고뇌하던 모습으로 인해, 그저 운 나쁘게 저 현장에 있었을 뿐이고 악의적이는 않았던 나약한 보신주의자라는 식으로 실드 치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빌라도를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헤롯하고도 다시 친해졌을 정도로(눅 23:12) 결국 예수님의 대적들 편에 확실하게 섰기 때문이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이건 진지한 구도적인 질문이 아니라,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한 마디 툭 던진 립서비스일 뿐이었다. “ㅉㅉ 이 상황에서 뭔 놈의 얼어죽을 진리 타령이냐?”에 가깝다.

원쑤지간이던 빌라도와 헤롯이 과연 무엇을 매개체로 화해했을지도 생각해 보면 뻔한 노릇이다. 까놓고 말해 술자리에서 술안주로 예수님을 같이 씹으면서 친해진 게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내가 보니 그 사람 완전 바보 싸이코더구만! ㅋㅋㅋ” “그러게? ㅋㅋㅋ 사실은 나도 똑같이 생각했지!” 그는 예수님을 대면하면서 양심이 좀 찔리던 기억은 이런 식으로 잊어버리고 훌훌 털어내 버렸다.

그리고 유다는 인간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였다가 한 순간에 대실수를 저지르고 그걸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수습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 정도로 여겨진다. 하도 부정적으로만 평가되다 보니 마치 원 균을 재평가하듯이 유다도 최대한 개인 상황을 감안하여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신학 해석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유다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동정의 여지가 없이 성육신한 마귀라는 해석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마귀이니라” (요 6:70)가 비유가 아니라 평이한 사실 진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행 1:25에서도 베드로가 유다는 단순히 죽은 게 아니라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고 얘기하는 게 뭔가 저 사람 정체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육신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마귀 역시 짝퉁 성육신해서 훗날 예수님의 제자로 위장해 들어갔다는 뜻이 되는데.. 사실이라면 많이 무섭다. 성경에는 유다 자체가 마귀라는 말뿐만 아니라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눅 22:3), “사탄이 유다에게 이상한 생각을 넣었다”(요 13:27) 같은 상이한 진술이 모두 들어있다.
이것은 마치 다윗의 잘못된 인구 조사의 배후에 무슨 일이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상이하게 진술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삼하 24:1, 대상 21:1). 동일한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것으로 보인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가 나중에 목을 매어 자살했는데, 이 사건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증언을 보면 그는 내장이 튀어나오며 상당히 끔찍하게 죽은 것 같다. (행 1:18)
단, 사도행전 1장에서 언급되는 피 밭과, 마태복음 27장에서 언급되는 피 밭은 개념상 서로 다른 장소이다.
전자는 유다가 개인적으로 비축해 둔 돈으로 산 자기 땅이다. 그러나 후자는 따로 토기장이의 땅을 사서 조성한 공동묘지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11/10 08:30 2014/11/1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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