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산주의 유머
구소련의 사회/정치 관행을 풍자한 공산주의 유머 중에는 이런 게 있다.
소련의 한 작은 마을에 살던 이반이 시베리아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그나마 살아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한데 모여서 그에게 수용소 생활이 어땠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거기 일상은 물자가 좀 열악하고 따분한 노동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고 털어 놓았다. 이에 어떤 마을 사람이 이렇게 반문했다.
"놀랍군, 이반. 하지만 얼마 전에 시베리아에서 돌아왔다가 다시 끌려간 미하일의 말은 정반대였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끔찍한 인권 유린, 살인적인 중노동이 밤낮으로 이어졌다고 말야."
그러자 이반은 담배를 깊게 빨고는 한 마디 했다.
"아, 그 친구? 말을 그딴 식으로 했으니 당연히 또 끌려갈 수밖에 없지."
... 마을 사람들은 모두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흩어졌다.
(2)
러시아에 사는 한 유대인 부부가 이스라엘로 이주하려고 애썼는데, 행정상의 잘못으로 인해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남편인 아브라함을 제외한 그의 아내와 아이들만 소련을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었다.
가족이 찢어지게 되었고 당분간 서신 왕래만 가능할 텐데, 부부는 소련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간단한 규칙을 정했다. 편지에서 남편이 검은색 잉크로 쓴 글자는 사실이므로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되고, 붉은색 잉크로 쓴 글자는 전부 거짓이니 반대로 이해하라는 것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이스라엘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편지는 검은색 글씨로 "여긴 모든 게 괜찮다. 여건이 더 좋아지고 있고 먹을 것도 풍부하고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등 온통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이었는데...
편지는 끝까지 읽어 봐야 했다. 추신엔 이런 문장이 있었다.
"그런데 말이오, 한 가지 문제가 있소. 아무리 해도 붉은색 잉크를 도무지 구할 수 없구려."
이걸 보면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할 수 없는지, 남한과 북한끼리는 제대로 된 이산가족 상봉은커녕 서신 왕래와 전화 통화조차 왜 절대로 성사되지 못하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조금이라도 정보 왕래의 통로가 뚫리면 사람들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천외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가령, 빽빽한 텍스트에서 세로드립은 고전적인 테크닉 중 하나일 뿐이다.
범죄자가 아닌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은 북한의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소수의 간첩· 불온세력간의 의사소통은 불행히도 남한의 안보를 저해하는 용도로 악용된다. 그러니 서로 왕래를 절대로 할 수 없게 막아 놓는다.
2. 일본의 재일 교포 북송 사업
저 공산주의 유머에서 1은 그렇다 치더라도 2의 경우 실제로 비슷한 사례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과거에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자, 일본은 그 뒤에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렇다고 일본으로 정식 귀화하지도 않고서 자기네 나라에서 계속 정착해 있는 조선인 집단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거 뭐 과거의 식민지 시절처럼 정부 차원에서 대놓고 차별하고 착취하거나 잡아 가둘 수도 없고..;; 그 당시 남한과 북한은 모두 공식적으로 일본과는 서로 생까는 미수교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본토 사정도 워낙 가난하고 혼란스러웠으니 재일 교포들을 일일이 다 받아 주고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6·25 전쟁을 한바탕 치른 뒤 1950년대 말엔 북한이 일본 내부의 조총련을 주축으로 하여 재일 한국인들을 대대적으로 북한으로 데려 오려는 공작을 벌였다. 북한은 노동 인력을 확보하고 자기 체제를 어필하고 싶었으며, 일본은 재일 교포들을 빨랑 워이~ 내보내고 싶었으니..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서 거래가 성사되었다. 물론 일본이 대놓고 공산주의 국가와 손잡는 건 국제 정세상 보기가 안 좋기 때문에 적십자라는 민간 단체를 거쳐서 일을 진행했다.
북한 당국과 일본 적십자사는 우리로 치면 마치 월북 권유 불온삐라처럼, "북한은 공산권 국가로부터 원조를 직통으로 받으면서 한창 발전 중임. 아직도 전쟁 폐허에 거지들이 우글거리는 헬게이트 남조선과는 차원이 다름! 무상 의료 무상 복지! 지금 이 기회에 북한으로 가면 정착 지원이 얼마이고 혜택이 어쩌구" 하면서 온갖 감언이설로 재일 교포들을 현혹했다.
그리고 이 말을 믿고 실제로 북한으로 가는 사람들이 몇백 명 정도 생겼다. 교류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남한/북한과는 달리, 북한/일본은 그 당시 아직 일말의 서신 교류는 가능했던 모양이다. '만경봉호'라고 불린 북송선을 먼저 타기로 한 어떤 교포는 후발대에게 편지로 연락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여기서는 저 서양 유머 버전처럼 변별 요소가 잉크 색깔이 아니었다. CJK 문화권답게 "내가 편지를 세로쓰기로 보내면, 저 소문이 사실이란 뜻이오. 이북이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니 너도 후속 북송선을 타고 빨랑 오시오. 하지만 가로로 써서 보내면 저거 다 거짓말이라는 뜻이니 오지 마시오."라고 규칙을 정했다.
결과가 어땠을까? 후발대에게 도착한 편지들은 검열을 의식하여 겉보기로 내용은 온통 지상락원 드립에 위대한 김 일성 장군님 칭송이었다. 그러나 텍스트가 배열된 형태는 한 치의 예외 없는 가로쓰기였다! 그래서 그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월북(?)을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영락없이 저 공산주의 유머의 실화 버전이지 않은가?
심지어 "여기는 일본의 ○○○만치 풍요로워요!"라는 문장도 있었는데, 북한 관리가 일본 문화를 몰라서 검열을 통과했을 뿐, ○○○는 실제로는 '달동네, 꽃동네' 급의 일본의 극빈민가 명칭이었다. 영락없는 반어법이 된 셈.
일본에서 재일들은 다소 차별 받으며 2등 인민 취급을 받아 왔다고 하지만, 북한에서의 실제 대접은 2등도 못 되는 삼류 이하 적대계층이었고 여건이 훨씬 더 나빴던 것이다. 차라리 일본에서 계속 지내는 게 나았다. 그들은 감언이설에 속은 것이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라. 2등 인민이라지만 일단 자유 진영 바깥 문물을 맛보다가 저 미끼에나 달랑 낚여서 들어온 사람들을 북한 당국이 호의적으로 대접해 줄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감시하고 착취하고 부려먹기나 하겠지.
3. 검열의 과거 실제 사례
하긴 옛날에 유럽에서는 1차 세계 대전 때 참호전이 워낙 참혹한 생지옥이다 보니, 병사들이 고향으로 편지를 보낼 때 현장 묘사를 대놓고 하지 말라고 불가피하게 검열을 했다. 전시에 이 정도로 표현의 자유를 좀 통제하는 건 심지어 미국도 괜히 반전 여론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슬금슬금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면 낫지, 나치 독일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로 가 보자. 입구에는 보통 "ARBEIT MACHT FREI(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한다)"라는 표어가 마치 군부대 입구의 표어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어떤 수용소의 것은 ARBEIT의 B에서 윗부분의 D 모양이 아랫부분의 D보다 살짝 크게 글자 모양이 좀 왜곡돼 있었다. 보통은 둘 다 완전히 동일하거나, 아랫부분이 윗부분보다 더 크지 않던가.
전혀 자유롭지 않은 참혹한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이 저딴 표어까지 강제로 만들어야 하다 보니, 아~주 소극적이고 깨알같은 저항으로 역설을 표현한 것이었다. 삐딱한 B의 의미는 "자유 같은 소리 하고 쳐자빠졌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였다.
노동 정신을 크게 왜곡한 저 역사적 사례로 인해, 말 자체는 별로 문제될 게 없던 저 표어는 오늘날 그쪽 바닥에서는 나치식 경례만큼이나 절대금기 표어가 되어 버렸다. 뭐, ARBEIT 자체는 알바/아르바이트 덕분에 한국어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독일어 단어가 돼 있긴 하다만..;;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손 기정 마라토너는 일장기와 관련하여 가슴아픈 사례가 과거에 있었다.
3등을 한 남 승룡 선수는 손 기정에 대해... 1등을 해서 금메달을 받고 히틀러와 악수까지 한 건 별로 안 부럽고, 진짜 부러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우승자인 덕분에 월계수 화분을 득템했으며, 그걸로 복부의 일장기를 그럭저럭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시상대의 측면에서 찍은 사진은 손 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다시피 일장기가 여전히 노출되는 형태로 찍혔으며, 일본의 언론은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그 사진을 인용하면서 마치 인쇄 실수나 기술 한계인~~ 척 일장기 부분을 하얗게 덧칠하여 슬쩍 지우고 얼룩으로 가려서 사진을 내보냈으나, 포토샵이 없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이건 조선 총독부 검열에서 고의적인 덧칠 삭제라는 게 탄로났다. 그래서 해당 신문사는 기자와 화가가 콩밥을 먹고 사장이 경질되었으며, 그걸로도 모자라서 신문 자체가 정간 처분까지 받는 보복을 당했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였으니까 저런 행동이 항일 독립 운동의 일환이라고 칭송받지, 순수하게 언론의 자세로만 따지자면 저런 식의 사진 변개는 아무리 일본이 원쑤라고 해도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축구 한일전이라 해도, 한국 선수가 반칙을 한 건 한국인 심판이라도 지적할 수 있어야 하며, 언론은 현장에서 있었던 일은 일단은 있는 그대로 보도해야 하지 않는가? 책에서도 번역자는 번역만 해야지 제멋대로 원문을 해석하고 고쳐서는 안 되듯 말이다.
물론, 지금의 배부른 기준을 갖고 그 시절을 제멋대로 판단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일제가 동아일보를 저 정도로 해코지한 이유도 "일장기라는 최고조넘에 대한 모독 때문"이지, 팩트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않고 사진을 왜곡했기 때문" 자체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손 기정 본인도 동아일보 이상으로 표현의 자유 제약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다. 우승 소감 인터뷰를 녹음할 때 말이다. "저 언덕에서 일장기가 나를 반겨 주더군요. (...) 이 승리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전 일본 국민의 승리입네다" 이런 영혼이 없는 말을 강제로 각본대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낯뜨거운 대목에서 손 기정의 말투가 오그라들자 옆에서 누군가가 '크게 말해!' 면박을 주는 장면까지 살짝 녹음되어 들어갔다. 그게 그 시절의 아픈 모습이었다.
4.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
주변 잡설이 또 길어졌으니 다시 재일 교포 북송 얘기로 돌아오겠다.
이렇게 일본과 북한이 서로 짜고 재일 교포들을 북송하는 것에 대해, 남한을 접수하고 있던 이 승만 정권은 굉장한 불쾌함과 거부감을 표시했다. 비록 우리 남한도 너무 가난해서 이들을 다 포용하고 먹이고 재우고 일자리를 줄 처지는 못 되지만, 그래도 이들도 같은 동포인데 북한으로 그것도 거짓말로 꾀어서 보내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뭐, 남북 체제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압박감도 덤으로 있었겠지만 말이다.
지금으로 치면 중국과 불거져 있는 탈북자 북송 문제와 비슷하다.
목숨 걸고 탈북을 시도한 사람들을 다시 생지옥으로 돌려보내는 건 인간적으로는 정말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짓이다.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저 탈북자들은 자국 땅에 있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고, 또 북한과 맺은 약속도 있고 하니 저렇게 미지근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일본이 재일 한국인이라는 '난민'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도 이와 같지는 않지만 비슷했다. 저놈들이 북한 가서 어찌 될지는 내 알 바 아니고, 일단은 골치 아픈 사람들이 우리 땅에서 나가 주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다.
게다가 그 당시에 이 승만은 평화선을 선포해 놓고, 독도 일대에서 깝죽거리는 일본 어선을 해군까지 동원해서 무자비하게 쫓아내고 나포하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쓰시마 섬까지 한국 땅이니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가 찬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편지나 소포가 왔는데 우표가 울릉도· 독도가 그려진 것이면, 그 우표에서 독도 부분을 뜯어내고 물건은 그대로 반송을 해 버릴 정도였다...;; 그런 쪼잔한 저항이 통용될 정도로 한국과 일본은 안 그래도 미수교인 데다 앙숙이 돼 가고 있었다. 이런 일본이 재일 교포 북송 문제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고집불통 대통령의 말을 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있었겠는가? 도대체 무슨 이쁜 구석이 있다고?
이 승만은 어렸을 때 조선이 외교전에서 밀려서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서서히 일제에게 먹혀 망하는 걸 똑똑히 지켜본 대통령이었다. 그게 평생 남는 트라우마였다. 그래서 먼 훗날 대통령이 된 뒤엔, 비록 내치에서는 부하를 잘못 뽑고 병크도 많이 저질렀지만 외교는 정말 한 치의 양보가 없는 초강경 노선을 고집했다. 그는 그 시절 세계 각국의 정상들 중에 최강의 고학력자였으며, 이 바닥은 똘끼 충만한 고수 100단이 돼 있었다. 이 꼰대 영감쟁이가 뭔 똥고집을 부리다 무슨 사고를 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는 전쟁 중에 북한 송환을 원치 않던 거제도 반공 포로를 무단으로 석방해 버린 전력도 있다. "자유를 원하는 개인에게 자유를 선사해 주는 게, 그들을 인질로 잡고서 외교 거래를 하는 것보다 더 올바른 일이다. (그러니 이 자유를 지키는 전쟁을 무작정 정치 논리대로 어중간하게 휴전해 버려서도 안 된다!)"를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재일 교포의 북송은 비록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판사판인데 무슨 북파 공작원마냥 공작원을 "일본에다" 보내, 북송 주선 기관인 일본 적십자사 본사에다 테러를 가하려 했다.
실미도 북파 공작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군사 정권이 아닌 이 승만 때 우리나라가 북한도 아닌 일본에다가 공작원을 보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무슨 항일 독립 운동가도 아니고! 이게 1959년의 일이다. 게다가 그 공작원 중에 김 구의 암살범인 안 두희까지 있었다는 건..;; 어지간한 소설과 영화를 능가하는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첫 시도가 그만 검문에 의해 발각되어 버렸으며, 추가적인 양성과 투입이 있기 전에 4·19로 인해 이 승만이 하야하면서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묻히게 됐다.
곧이어 박 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이들은 쿠데타 이력를 무마하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공 + 경제 개발을 적극 실천해야 했다. 그래서 1965년에는 그 당시에 매국질이라고, 일제 강점기 피해를 푼돈에 졸속으로 퉁쳤다는 욕을 잔뜩 쳐먹으면서 결국 일본과 재수교를 하게 된다. 경제 개발을 할 자금 밑천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 승만 시절에는 일본이 아직 전범 낙인이 단단히 찍혀 있던지라, 뼛속까지 반일 대통령이 비록 허세뿐이나마 일본을 상대로 갑질을 막 해댔다. 그러나 박통 때는 우리가 급전이 필요한 관계로 일본에게 상대적으로 저자세로 굽히고 들어가야 했다. 평화선도 이때 폐지되었다.
과거에 재일 교포 북송에 관여하던 조총련은 나중에 박통 때엔 육 영수 여사 피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이미지를 더욱 나쁘게 구겼다. 이때는 책임 소재 규명에 미온적인 일본이 괘씸하다면서 박통의 입에서도 "(우리라고) 동경 폭격 못 할 줄 알아?"라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에 버금가는 강한 말이 나왔다.
하긴, 일본은 역사적으로 핵폭탄뿐만 아니라 도쿄 소이탄 대공습의 끔찍한 트라우마가 있는 동네인데 저 소리 들으면 굉장히 발끈하긴 했겠다. 박통도 언제나 일본에 무조건 굽신굽신 하지는 않았다.
박 정희가 나라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끼친 영향이 워낙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이 승만 시절의 배고프던 남한은 남한의 역사인 것 같지가 않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 정도로 이질감이 크다. 화폐 단위만 해도 1962년 이래로 현행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으니 딱 박 정희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이 승만은 '박 근혜' 같은 직계 후손도 없어서 더욱 단절감이 크다. 조선과 일제 강점기를 모두 경험하고서, 이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세워만 놓고 건국 초기의 시행착오 병크로 인한 뭇매는 다 맞은 뒤 혜성처럼 사라져 버린 그리운 영웅이다. 기적을 통해 민족 해방을 경험하고, 나중에 타지에서 죽은 건 성경의 모세를 닮았다.
끝으로, 재일뿐만 아니라 먼 옛날에 쿠바에 이민 간 교민들도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환영받지 못하고 사생아뻘 되는 지위로 전락해 있다고 들었다. 쿠바도 우리나라와는 아직까지 미수교 상태이다. 이 역시 슬픈 20세기 한반도 역사의 단면인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