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잡설

1. 다른 언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영어와 일본어는 임의의 인명을 소리만 듣고 받아적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영어는 언문 일치가 개떡이기 때문이요, 일본어는 한자 때문이다. 특히 한자 문화권에서는 내 자식은 특별하게 키우려고 일부러 잘 안 쓰이는 어려운 한자만 골라서 집어넣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그런 문화권은 일상 생활에서는 잘 알려진 쉬운 이름만 사용하는 애칭이 발달해 있는 것이다. 영어 알파벳은 단어 단위로 한자 같은 뜻글자를 이루고 있는 것에 가깝다. ^^

한국어가 영어보다 문법이 복잡하고 어렵고, 띄어쓰기 같은 맞춤법도 엄밀하게 정착해 있지 못한 면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정이 꼭 절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글은 그런 게 필수불가결한 변별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걸 꼭 안 지켜도 어지간하면 뜻이 잘 통하기 때문이다. 사실 영어에서 단어 철자나 띄어쓰기가 틀리는 것은 한글 자모를 잘못 적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ㅈ을 ㅊ으로 잘못 적는 게 아니라 아예 ∨ 같은 엉뚱한 글자로 적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이다.

2. better than nothing은 이게 다른 것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다는 '꼴찌, 무익'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위안' 뉘앙스일까? 영어로 이 둘은 어떻게 구분하면 좋을까?
'아닌' 것과 '없는' 것은 의미가 비슷하지만 다를 때도 있다. 이런 게 헷갈릴 때가 있다.

3. 영어에서 비교급을 쓸 때 간단한 형용사에 대해서는 잘 알다시피 -er, -est 어미가 붙지만,
3음절 이상의 긴 단어이거나 형용사 자체가 -ous, -ful 같은 접미사가 붙은 단어라면 그런 어미가 또 붙지는 않고, more, most 같은 부사가 비교급을 만들어 준다.
그런데 문제는 more, most 자체도 many의 비교급으로서 형용사의 의미가 있다는 것.
나의 영문법 지식에 따르면, "더 유명한 사람들이 오고 있다"와 "유명한 사람들이 더 오고 있다"가 영작을 할 때 구분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치 한국어에서 조사 '과(와)', '랑'이 and라는 의미도 있고 with라는 의미도 어느 정도 동시에 갖고 있어서 발생하는 모호성/중의성 정도와 비슷한 차원인 것 같다.

4. '한번'은 붙일까 띄울까?
인간의 언어에서 1이라는 숫자는 두 가지 방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는 0이 아니라 1이라는 의미일 때(부재가 아니라 실존)이다. 이때는 영어에서도 a, the 같은 관사가 붙는다.
둘째는 복수가 아니라 1이라는 의미이다. 이때는 영어로 정확하게 one이라는 숫자가 쓰인다.

그래서 0이 아니라는 부정관사에 가까운 의미로 쓰는 '한번'은 붙여 쓰고, 진짜 정확하게 one time이 되어야 할 때는 '한 번'이라고 띄어 쓴다고 생각하면 대체로 맞다.

"언제 한번 놀러 오시죠." / "우리 한번 맞장 떠 볼까?" / "그런 방법도 한번 써 봤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놀러 오는 것, 맞장 뜨는 것처럼 안 하던 행위를 해 본다는 게 중요함)
"이미 접수가 되어 있으니 글쓰기 버튼은 한 번만 눌러야 합니다." / "한 번만 더 틀렸다간 진짜 죽는다" (왜 띄었는지 명확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0/02/01 17:49 2010/02/0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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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빈 2010/02/02 09:37 # M/D Reply Permalink

    안녕하세요 사무엘님.

    2번의 better than nothing은 위안의 의미입니다. 혹시 아시는데 괜히 대답한건가요 ^^;

    3번의 More famous people are coming은 말씀대로 "더 유명한 사람들이 오고 있다"와 "유명한 사람들이 더 오고 있다"의 두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문맥상 구분이 안된다면 "People who are even more famous are coming"이나 "More people who are famous are coming"으로 명확히 할 수 있겠습니다.

    1. 사무엘 2010/02/02 10:33 # M/D Permalink

      조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영어에 일가견이 있으신가 보군요.
      네, 사실 꼴찌/무익이라는 뜻일 때는 nothing보다는 not better than "ANYTHING"이 더 어울릴 겁니다.
      그리고 "better late than never" 같은 표현도 있는 걸 감안하면 nothing은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위안이라는 확신이 더욱 서네요. ^^
      자연어라면 어느 언어이든 아주 예상을 초월하는 곳에서 모호하고 비합리적인 면모가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어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죠.

  2. 상빈 2010/02/02 15:15 # M/D Reply Permalink

    대학때 수화에 관한 수업을 들었는데, '수화도 자연어이다'란걸 뒷받침하는 증거로 중복성과 다의성을 들던게 기억이 나는군요. 사무엘님 말씀대로 자연어라면 모호함이 있는거고, 그 모호함이 언어의 아름다움인 것 같습니다.

    1. 사무엘 2010/02/03 10:39 # M/D Permalink

      네. 그런 모호성이 있으니까 언어 유희, 농담 같은 것도 있을 수 있는 거겠죠 ^^
      수화 하니까 생각나는데, 음악은 과연 어떤 면에서 언어와 유사하며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지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3. 상빈 2010/02/04 02:25 # M/D Reply Permalink

    음악은 너무 어려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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