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성의 독립운동가

(1) 최 재형(1860-1920)
요즘 이 이름은 ‘이 회창’처럼 감사원장을 역임한 대선 후보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활동한 유명 독립운동가 동명이인도 있었다.
그는 겨우 10대의 나이로 생활고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탈북하듯이 무작정 러시아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꽃제비처럼 쓰러져 굶어 죽을 뻔했는데.. 어느 선한 러시아인 선장 부부가 그를 구해 주고 양자처럼 공부도 시키고, 자기 상선(무역선)에 태워서 선원일도 가르치면서 잘 키워 줬다.

그는 러시아어에 능통해서 한국어와 통역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와 러시아 업주 사이에 중재를 잘 하고 일감 조율을 잘 한 공로로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그는 이걸로도 모자라서 양부모로부터 한 밑천 물려받았는지 군수업을 시작해서 엄청난 부자까지 됐다. 알거지 빈털터리 상태에서 러시아에서 이 정도로 성공했으니 정말 역전의 용사 개룡남이 따로 없는데..

그는 러시아에서 자신 같은 불우한 처지에 놓인 동포들을 돕고 가르치는 일에 애썼으며, 조국 조선이 일제에 망할 위기에 처하자 항일 독립 운동에 자기 자산을 대부분 탕진했다. 그리고 안 중근 의사에게 권총을 사 주고 사격 훈련을 시켰다. 안 의사의 의거의 배후에 이 사람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 중근이 아저씨 차 태식이라면, 저 사람은 문 달서 정도 되는 셈..

그는 훗날 1919년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정말 뼛속까지 애국자로 살았지만.. 이 때문에 일제로부터 추적을 받기 시작했고 러시아 정부로부터도 밉보이게 되었다. 결국 1920년에는 일본군에게 잡혀서 그대로 총살 당해 순국했다.

(2) 함 태영(1872-1964)
생몰년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승만 할배와 거의 동연배이며 비슷하게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이 사람은 공부 잘하고 똑똑했는지, 20대 초반의 나이로 법관양성소를 수석 졸업하여 판사가 됐다. 갑오개혁으로 인해 등장한 근대식 법조인의 1호 원로 원조인 셈이다.

그래서 고종 황제 시절에 김 홍륙이 저지른 고종· 순종 독살 미수 사건(1898)을 재판했는데.. 먼 훗날, 대한민국에서 심계원(감사원)장과 제3대 부통령도 역임했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에서 모두 고위 공무원을 한 사람이라니, 정말 엄청나지 않은가?? 일제 시대에도 전관예우를 받아서 계속 법조인으로 있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거절하고 그 동안은 목사와 교육자로 살았다.

서 재필과 이 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는 그냥 반역자로 몰렸고, 일제 시대 동안엔 미국에 가 있었다. 함 태영은 저런 사람과는 굉장히 대조적이다.

(3) 서 재필(1864-1951)
이 사람도 최 재형 이상으로 근성의 개룡남이었으며, 함 태영 이상으로 머리 좋고 공부를 겁나게 잘했던 것 같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면서 과거에 급제했다. 하지만 개화물 먹은 뒤 갑신정변으로 인해 역적으로 몰려서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했다. 부모와 친형제, 아내까지 몽땅 사약, 자결, 피살 등의 방법으로 죽었다~!! 이때 심지어 어린 자식까지 죽고 말았다.

요즘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 당사자도 멘붕 자살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제 조선의 조 짜만 나와도 학을 떼는 골수 혐한 친일파로 돌아서지 않았을까?
그런데 서 재필은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망명 가서는 빈털터리 상태에서 먹고 살려고 직싸게 고생하며 주경야독을 거듭했다. 물론 도와 주는 선교사 후견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미국은 아직 인종 차별도 있던 살벌한 상태였다.

그는 그 여건에서도 학교에서 1등을 도맡아 하면서 고등학교 졸업식 때 대표 고별 연설을 하는 우등생 모범생이 됐고--(물론, 미국 토박이 동년배 고등학생들보다야 나이가 훨씬 더 많았음..)--, 자국도 아닌 미국에서 의사가 됐다. 친인척을 모두 잃은 알거지 역적 신세로 미국으로 망명 간 지 딱 10년 만에 미국 의사가 된 것이다.

다행히 고국에서도 갑오개혁을 계기로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해서는 사면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구한말 때 잠시 귀국해서 독립 덕후 활동을 하던 당시엔.. 그는 머리로 동포의 자주 독립은 지지하지만 가슴에 조선 자체에 대한 애정은 싹 사라진 상태였다.
조선 땅에서는 완전 코쟁이 미국인 행세를 하면서 "오우 노!! You Koreans들은 이래서 안 돼.. ㅉㅉㅉ" 삿대질을 하고.. 조선 백성들도 그냥 가르치고 계도해야 할 미개인 정도로 생각하면서 자기와 거리를 뒀다고 한다. 뭐, 인간적으로 이해는 된다.

서 재필은 한국이 배출했지만 한국이 제대로 키워 주지 못한.. 참 여러 모로 아까운 인재였다.
그의 유해는 1994년 3월경에 한국으로 돌아왔다(전 명운 의사의 유해와 함께). 공 병우 박사가 다른 관혼상제나 행사에는 좀체 참석을 안 했는데, 이 사람의 유해 봉환식에는 일부러 찾아가 참석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일본인

(1) 소다 가이치(1867-1962)
일본인으로서 기독교 선교사 겸 고아원 원장으로 평생을 헌신한 분이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면서 105인 사건이나 3· 1 운동 때는 조선인들을 편들고 실드 쳤으며, 전후에는 자국을 상대로 전쟁 범죄에 대한 회개와 사죄를 촉구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정신을 잃고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조선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살아났으며, 월남 이 상재 선생으로부터 기독교 전도를 받기도 했다. 그런 경험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호의가 자연스럽게 생긴 것 같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유일하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묻혔다. ‘후세 다쓰지’ 만만찮은 대한 독립 유공자 일본인으로서 손색이 없으나, 정식으로 인정은 아직 못 받았다.

(2)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조선총독부 산림과에서 근무한 관료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의도가 없이 진짜 순수하게 학자 내지 덕후로서 조선의 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일본인이었다. <조선의 소반(밥상)>(1929)과 <조선도자명고(도자기 도예 관련)>(1931)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망우리 묘지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은 아니고 두 명 중 하나이다.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는데, 죽을 때의 유언도 “조선 식 장례로 조선 땅에 묻어 달라”였다고 한다.

3. 역관 출신

(1) 김 홍륙 (러시아어)
이 사람은 천민 출신이었지만, 함경도 출신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어부 생활을 한 덕분에 러시아어 회화가 가능했다.
마침 1880년대의 조선 정치판에서는 “친러가 살 길이다” 라인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잘하는 인재를 찾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런 시대를 잘 탄 덕분에 벼락출세길이 열렸으며 고종의 측근으로서 부귀영화를 엄청난 누리게 됐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쥐락펴락 하는 고위 공직자에 걸맞은 인품, 교양, 학식을 갖추지 못한 채 친인척까지 동원해서 부정축재와 학정을 일삼았다. 무능한 암군 소리를 듣는 고종이 보기에도 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그는 결국 짤렸다(파직).

그런데 김 홍륙은 이에 앙심을 품고 고종과 순종 부자를 통째로 암살, 독살하려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이 마시는 커피에다가 몰래 치사량의 아편을 탔는데.. 고종은 커피 맛이 이상한 걸 알고 곧바로 뱉었지만, 순종은 그걸 그대로 마셔 버려서 한동안 앓아누우며 고생했다.

이 어설픈 사건은 곧장 배후가 드러났는지, 김 홍륙은 곧바로 교수형을 당했다. 왕을 통째로 암살하려 했으니 이거야말로 10여 년 전 갑신정변 주동자를 능가하는 역적이었으며, 동시대의 중국이었다면 능지형을 당해도 쌌다. 그래도 갑오개혁을 계기로 연좌제가 폐지되고 잔인한 형벌도 금지된 덕분인지, 그는 김 옥균이나 서 재필 같은 급의 멸문지화를 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훗날 1919년, 고종은 식혜를 마시고 나서는 심한 복통과 각혈을 호소하다가 죽어 버렸기 때문에 이거야말로 일제에 의한 독살설의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고종의 붕어가 3· 1 운동의 강력한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것도 명백한 팩트이고..

(2) 이 하영 (영어)
이 사람은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랬는데 미국인 의료 선교사 알렌과 만나게 되고, 어설픈 일본어와 영어 실력만으로 고종 황제의 개인 통역관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사례를 보면 인생은 정말 타이밍인 듯..

그는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출세하고 성공하면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줄 잘 서고 기회 잘 잡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결국은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일제로부터 자작 지위도 받고, 조선 귀족으로서 떵떵거리며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더 옛날에 김 대건 신부도 똑똑해서 외국어를 몇 개씩이나 구사했다고 한다. 조선의 관료들도 그 실력이 아까우니 가톨릭 신앙만 버리면 당장 살려 주고 벼슬도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남에게 없는 외국어 실력을 갖고도 이렇게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연 저렇게 산 사람도 있었다.;;
참고로 이 하영의 손자 중 하나가 참 군인이라 일컬어지던 이 종찬 장군이다.

4. 이완용보다 더 부자 매국노

구한말에 나라를 팔아넘겨서 그 댓가로 호의호식했던 매국노는.. 그 뒤에 활동했던 생계형 친일파나 부역자하고는 성격이 좀 다르다. 전자가 후자보다 수가 더 적으며, 훨씬 더 부유하게 살았고 죄질도 더 나쁘다고 봐야 한다.

매국노의 대명사야 뭐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교집합 그랜드슬램을 모두 찍은 이 완용이다. 하지만 재산으로만 따지자면 이 완용보다 더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서 더 갑부, 더 억만장자가 된 반역자도 있었다.

  • 민 영휘: 남이섬이 바로 이 사람의 손자인 민 병도의 사유지라 해서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그 시절에 그 정도 가격이면 한국 은행의 총재까지 역임했던 능력자 민 병도가 개인 연봉과 퇴직금만으로 마련할 수 있는 부동산이고, 딱히 친일의 댓가· 피 묻은 돈이라고까지 볼 수는 없다는 판결이 내려진 상태이다. (참고로 국사학자는 이 병도이구나)

  • 윤 덕영: 지금의 수성동 계곡까지 포함해서 서울 옥인동, 인왕산 자락까지 그야말로 초대형 저택을 꾸렸던 미친놈이었다. 재산이 이 완용보다도 몇 배는 더 많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받은 은사금을 밑천으로 해서 각종 부동산이나 사업으로 재산을 더 불린 것도 생각해야 한다. (참고로 축구 선수 골키퍼는 홍 덕영..;;)

Posted by 사무엘

2021/10/29 08:35 2021/10/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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