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핵심 원리, 법리들

1. 선택과 책임 (1)

지난 2010년 10월 경에 미국 테네시 주 사우스풀턴 시에서는 가정집에서 화재가 났는데 그 지역 의용소방대에서는 뻔히 보고도 불을 꺼 주지 않은 일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집은 연 75$인 회비를 내지 않았고, 그 소방조합에 자발적으로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 주인이 자기 집은 화재 따위 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자 집 주인은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서 화재 진압 비용을 몇 배라도 낼 테니 제발 불을 꺼 달라고 읍소했다. 그러나 소방관은 그 읍소도 단호히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유도리 부탁을 들어 주면 앞으로 아무도 평소에 소방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고 불이 났을 때만 일회용으로 돈을 내려 할 것이다. 그러면 소방조합이 운영될 수 없게 된다."
소방관들은 화재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가 소방조합에 가입된 옆집에 불이 옮겨 붙으려 하는 것만 차단하고 돌아갔다.

이런 소방관의 처신은 매우 정당하며 잘못된 게 단 1도 없다!! 자기 선택에는 자기가 그대로 책임지고 심은 대로 거둬야지?
나는 이런 자유주의 원칙을 쌍수 들고 지지하며, 이것이 성경의 법리 원칙이기까지 하다고 생각한다. 잠 1:25-26도 떠오르고 말이다. 살아 있을 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죄 가운데 죽었다가 지옥 가는 혼들이 늘어놓지만 퇴짜 맞는 변명도 딱 이런 패턴인 경우가 매우 매우 많을 것이다.

저렇게 소방조합 가입 안 해서 쪽박 쓴 사람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사람은..
생명보험 가입하자마자 피보험자가 죽었지만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서 결국 보험금을 전액 수령한 "10억을 받았습니다" 당사자, 아니 그 유족일 것이다. ㄲㄲㄲㄲㄲㄲㄲ
뭐.. 이런 식으로 평생 죄 짓고 살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도 이론적으로 당연히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보편적으로 미래 예측 능력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2. 선택과 책임 (2)

이것도 위의 얘기의 연장선인데.. 아마 예전에도 내가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옛날 전근대 시절과 현대(특히 197,80년대쯤 이후)의 관념· 사고방식의 차이가 뭐냐 하면..

- 옛날: 싸움에서는 무조건, 닥치고 승리하든가 아니면 죽든가 둘 중 하나였다. 의지드립, 약육강식, "인생은 실전이야 존만아" 관념이 훨씬 더 강했다. 초인적인 위인, 영웅이 생길 여지가 지금보다 더 많았다.
- 지금: 도저히 승산이 없으면 일단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해서 후일을 도모하려 한다. 무모한 희생을 피하고, 안전이나 인권을 더 챙긴다. 위인, 영웅이 등장할 여건 자체를 안 만들려 든다.

- 옛날: 빚을 졌으면 니 자신이나 자식새끼를 노예로 팔아서라도 갚아야 했다. 사람을 고의로 죽였으면 닥치고 사형이었다.
- 지금: 변제 능력 보지도 않고 돈 덥석 빌려준 채권자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 빚이 아무리 많아도 상속포기 파산을 하면 약간 불이익이 따르긴 하지만 어쨌든 빚 안 갚아도 된다. // 흉악 범죄를 저질렀어도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든 사회의 책임도 있고 심신미약 상태여서 뭔 정상 참작을 하고 궁시렁궁시렁...

- 옛날: 게임만 해도 뭐 삐끗하면 즉사하는 형태인 게 훨씬 더 많았다. 모르면 죽어야 하고 레벨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 지금: 훨씬 더 친절해졌다. 어지간한 게임들은 다 HP가 있고 저장 불러오기 기능이 있고 undo에 더 관대해졌다. 일부러 현실감을 추구하는 일부 장르를 제외하면 아군이든 몬스터든 즉사가 잘 없고, TTK (여러 발 맞아야 사망)가 더 길어졌다.

- 옛날: 부모님이 주신 이름값을 해야지?? 무슨 대놓고 '김개똥, 강간녀' 같은 미친 이름일 때에나 개명이 허용됐다.
- 지금: 개인의 자유를 얼마든지 존중해 준다. 범죄 내력을 세탁 은폐하려는 불순한 의도만 아니면 얼마든지 개명 허용이다.

성경이 말하는 전반적인 맥, 법리, 구원관은 '지금'이 아니라 '옛날' 관점에서 봐야 더 절실히 공감하고 믿을 수 있다.
하긴, 옛날엔 저렇게 사회가 살벌했기 때문에 애들이 요즘 애들보다 훨씬 더 일찍 철 들었던 것 같다. 철 들지 않으면 당장 쳐맞거나 밥을 굶거나 심지어 목숨이 위태로워졌을 테니까. =_=;;

"어쨌든 그건 니 사정이고 지금 사고 친 걸 어떻게 책임지고 수습할래?
아무리 니 혼자 스스로 열심히 진심으로 노력했어도 규정대로 규칙을 지키면서 게임을 한 게 아니라면 실격이다. 과정이나 동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관점에서 봐야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이라는 개념도 이해가 된다. 선악을 분별 못 할 정도로 너무 어리거나 지능이 딸려서 법적으로 면제되는 게 아니라면 책임이라는 게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단지, 인간의 깜냥으로 무모한 희생까지 불사하는 게 아니라, 신이 이뤄 주신 위대한 희생을 받들이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저 인생은 실전이니까 너도 온갖 치사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정글을 헤쳐 나가는 게 아니고, 그에 상응하여 신이 너에게 베풀어 준 은혜와 사랑을 받으라는 쪽으로 해결책이 있을 뿐이다!
그게 바이블 게임의 보스를 깨는 공략법이다.

3. 달란트 비유, 양극화

신약 성경 복음서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인 달란트/므나 비유 말이다.
얘의 핵심 주제가 그저 단순히 "재능 낭비하지 마라, 니가 받은 걸 썩혀 놓고 놀리지 마라"였다면..
2달란트와 1달란트 받은 종이 칭찬을 받고, 정작 5달란트 받은 사람은 돈을 파묻어 놓고 탱자탱자 노는 걸로 스토리를 짜는 게 더 이치에 맞았을 것이다. 과부의 헌금 2렙돈이 더 가치 있었다는 비유처럼 말이다. 그렇잖은가? 그게 더 극적인 효과가 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양극화.. "받은 자는 더 부유해지고, 없는 자는 그나마 있던 것마저 뺏긴다~~"
부익부 빈익빈 복리 이자 선순환 악순환이라는 냉정한 원리까지 가르치고 싶어서 1달란트를 게으르고 악한 종으로 설정하신 것이 틀림없다.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자.

그렇잖아도 이 비유는 성경에서 꽤 이례적으로 "돈을 환전상한테 맡겨서 이자라도 받아 왔어야지?"라는 경제 관념까지 등장한다. 단순히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 수준이 아니다. 단순히 돈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야말로 궁극적으로 천당 아니면 지옥이라는 양극화로 치닫기는 할 것이다.

4. 이방인· 불신자에 대해서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자기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도다"부터 시작해서 '믿지 않음'을 죄로 규정하고 당연히 부정적으로 매우 깐다. 잠언에 나오는 어리석음은 생물학적인 지능이 낮은 게 아니라 그런 부류의 영적 악함이 가미된 불신, 죄악을 가리킨다.

(1) 그러나 한편으로 이방인이건 이교도건 원시 미개 부족이건.. 율법을 직접 받지만 않았을 뿐, 누구든지 민족 불문하고 양심을 통해 보편적인 선과 악 관념이 있다는 것도 부각시킨다. 살인이나 간음은 나쁘다(창 20:4-5, 행 28:4), 죄 지으면 천벌 받는다(욘 1:14) 따위..
민족이나 시기에 따라 경륜은 차이가 날 수 있지만, 각 개인의 선악 관념과 구원의 길에 대해서는 하나님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평하게, 환경과 무관하게 배려하고 있다.

(2) 성경은 구원자로서의 예수 얘기만 양보 없이 배타적이지, 나머지는 심지어 "나쁜놈이라 할지라도 자기네 기준으로 잘하는 거, 맞는 말 하는 게 있으면 너도 인정하고 배워라" 이런 실용적인(?) 논조이다.
"뱀처럼 지혜로워라"라든가, 눅16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횡령이라는 짓거리를 본받으라는 게 아니라 그 준비 정신을..),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듣고 행동은 본받지 마라" 이런 여러 예들을 보면 유추할 수 있다.

(3) 성경엔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서 가나안 땅에 쳐들어가라, 이방 민족들을 멸절시켜라~~ 이런 얘기가 역사서에 많이 기록돼 있다. 물론 그건 그 이방 민족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었으며, 반대로 이스라엘 역시 죄악 심판을 엄청 많이 처절하게 당했다. 오히려 선민이기 때문에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받은 것도 있다. 그러니 이건 하나님이 불공평 편파적인 게 아니다.

5. 황금률, 이타주의

세상엔 "자기가 대접받고 싶으면 너도 그만큼 남에게 대접해 줘라"라고 이타주의..라기보다는 쎄임 쎄임 상호주의를 말하는 격언이 있다. 공자 논어에도 비슷한 요지의 문구가 있지 싶다. "니가 싫어하는 것이라면 남에게도 떠넘기지 마라"라고 말이다.

이건 "자유(혹은 권한,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주장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비판에는 대안이 있어야 한다"처럼 특정 종교나 이념을 떠나서 수학· 논리 차원에서 매우 합리적이고 정당한 법칙이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에서는 이걸 '황금률'이라는 뽀대나는 타이틀을 붙여서 부른다.

심지어 성경에서 예수님도 마 7:12 (+ 눅 6:31)에서 이 개념을 언급하셨다.
(1) 하나님 사랑과 (2) 이웃 사랑이 율법을 다 요약한 핵심이라고 공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명시돼 있는데, 황금률도 나름 그 정도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사상이라는 것이다. 마 22:40과 마 7:12를 비교해 보시라.

물론, 황금률은 좋은 도덕 계명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는 없다. 이건 적당히 합리적인 것, 의로운 걸 추구하는 일반 불신자 이방인이라도 얼마든지 똑같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뭔가 마 5:46과 비슷한 구도가 된다.

다만, 마 7:12 주변은 "남 눈치 보면서 먼저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니들이 먼저 과감하게 베풀어라... 얼마나 과감하게? 니가 남으로부터 받고 싶은 만큼!! 쎄임쎄임 선순환을 너희가 먼저 시작하라~ 베풀고 나서 못 돌려받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하지 마라~" 라는 뉘앙스가 들어있긴 하다. 그래서 단순한 상호주의보다는 이타주의 뉘앙스가 더 느껴진다.

6. 하나님 사랑 vs 이웃 사랑

성경에서 하나님 사랑은 '니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라고 구체적인 방식을 명시하고 있는 반면.. 이웃 사랑은 '니 자신을 사랑하듯이'..라고 단순하게 수식하고 있는 걸 주목해 보자. 굉장히 세심하게 차이를 둔 워딩인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 직관적으로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니 뭔가 믿음 행사가 필요하고 니 육신적인 본성을 거슬러서 뭔가를 하는 쪽으로 유도했다.

그러나 나와 똑같은 레벨인 이웃 사랑은..?? 니 자신을 꾸미고 치장하고 맛난 거 먹이고 좋은 체험 시키는 것과 똑같이 하면 된다고.. 이기주의를 그대로 직관적으로 투영시켜서 이타주의를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 사랑을 그런 식으로 실행할 수는 없지만, 이웃 사랑은 그런 식으로 하면 되니까. ㅋㅋㅋ 흥미롭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같은 책에서 동시에 등장하지 않았다. 전자는 신명기에서 거듭 거론되는 반면, 후자는 의외로 레위기 19장이 최초이다(18, 34절).

여담으로.. 성경에서 the law와 the prophets가 나란히 등장했다면 이건 모세오경과 선지서.. 라고 구약 성경 전체를 관용적으로 일컫는 문구라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즉, law가 비인칭인 것처럼 prophets도 비인칭인 것이다.
마 5:17과 마 7:12는 동일한 개념을 가리키는 셈이다(율법을 포함해 성경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성취하러 왔다). 우리말 성경 중에는 한킹이 나름 이 관점을 반영해서 번역했다.

7. 기타

(1) 지금까지 나왔던 여러 얘기들을 한데 정리하면..
성경은 죄, 심판, 구원에 관해서는 결과 지향적이다. 그러나 그 뒤의 상급은 동기· 과정 지향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자의 거액 헌금보다도 과부의 2렙돈 헌금이 더 값지다고 평가하신 것이다. 이런 거 평가는 어떤 형태로든 절대 공정하다. 환경 탓, 가정 환경 탓을 할 여지가 절대 없다.

(2) 성경은 "십자가 다음에 왕관, 영광" 주의이고, "작은 것에 먼저 충실해야 나중에 더 큰 것이 맡겨진다"의 신봉자이다. 이 원칙이 그야말로 철칙이다.

(3) 오· 남용되는 일이 없어야겠지만 "보이지 않는 믿음은 보이는 행실로 드러난다" 주의를 지지한다.
성경이 말하는 신의 존재나 사후 세계 같은 것은 일단 과학으로 증명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에 일단 증거 없이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각종 교리들은 일말의 논리와 일관성과 형평성이 있다. 믿어야 하는 공리들이 인간의 보편적인 양심마저 저버릴 정도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반지성주의 맹신 광신 급이 절대 아니다.

물리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어느 정도 인과? 상관관계가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불신자들도 니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 "영적인 것을 먹이는 사역자가 물질적인 보상 받는 것은 합당하다." / "사형수도 용서받고 구원은 받지만 그 대신 교수대에서 꽤꼬닥은 하고 가는 게 합리적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정도 보장은 돼 있기 때문에 충분히 믿을 만하며, 이래도 믿지 않은 것은 안타깝지만 완악한 죄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게 아니었으면 난 이렇게 기독교 관련 글을 남들 보라고 못 올린다~!

Posted by 사무엘

2024/04/05 08:35 2024/04/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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