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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게임 외

1980년대에 구소련은 미국 포함 전세계에 퍼져 나간 명게임을 두 종류 발명해 냈다.
하나는 1984년, 알렉세이 파지노프라는 프로그래머가 개발한 테트리스라는 비디오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1986년에 드미트리 다비도프라는 심리학자가 고안한 오프라인 소셜 게임인 마피아 게임이다. MT 같은 데서 많이 해 보셨을 그 게임 말이다.

테트리스에 대해 잠깐만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과거 도스 시절에 아래아한글은 테트리스와 두 번 인연이 있었다. 1.51도 나오기 전, 1.2 시절에 잠깐 텍스트 모드에서 실행되던 테트리스를 액세서리로 제공한 적이 있었다가 나중에 2.5 내지 3.0에서 덧실행 기능이 추가되면서 테트리스가 덧실행 프로그램이라는 명목으로 재도입되었다.

테트리스는 게임 자체야 메카닉이 매우 간단하니, 그래픽· 비주얼은 걍 발로 만든 수준으로 넘긴다 해도 게임 진행만 되는 물건 형태로는 고딩/대딩 수준의 프로그래밍 실력으로 몇 시간만 코딩하면 뚝딱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테트리스의 저작권을 보유한 회사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이걸 상업용 소프트웨어에다 번들로 제공하거나 유료 게임 서비스를 하려면 꽤 막대한 양의 로얄티를 지불해야 한다.

잘 알다시피 테트리스는 엄청난 히트를 쳤다. 이것 때문에 학교와 직장 곳곳에서 지각과 태업이 속출하는 바람에, 이건 자본주의 진영을 몰락시키기 위해 소련이 몰래 개발해서 퍼뜨린 거라는 음모론이 나돌 정도였다. 그래도 테트리스 자체에는 딱히 이념적인 요소가 있지는 않다.
그에 반해 마피아 게임은 역시 소련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스머프도 주인공과 설정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가 듬뿍 담긴 만화영화라는 음모론이 있는데, 그것보다는 더 현실적이다.

마피아는.. 인간의 죄성을 교묘하게 잘 이용하는 심리· 정치 게임이다. 게임을 해 본, 특히 크리스천이라면 이 말에 절실히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건국 초기에 벌어졌던 좌우익 진영 대립과 광기어린 학살극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마피아 게임의 현피 실사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전국 곳곳에서 파업, 폭동, 반란이 벌어지고 유언비어 공산주의 선동질에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럽다. 이걸 가만히 놔 두면 나라는 완전히 끝장 나고 망한다. 그러니 쟤들을 색출해서 잡아 가두고 죽이긴 해야 하는데.. 악의 무리들이 대놓고 “내가 빨갱이요”라고 정체를 밝힐 리가 있나..;;

온갖 거짓말이 횡행하고 서로를 믿을 수가 없고, 자고 일어나면 누가 죽어 있을지 모른다. 위에서 까라니 까야 되고 실적을 만들어야 하는 아래 부하들 입장에서는.. 속된 말로 없는 빨갱이라도 만들어 내야 할 판이 된다. 이런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반공 진영이건 용공 진영이건 맛이 안 가는 게 이상한 일이다.

마피아만 해도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고 대신 남을 마피아로 몰아서 죽이는 것 때문에 일명 '우정파괴 게임'으로 통한다. 하물며 그게 당장 내 목숨이 걸린 현실이라고 생각해 보시라.
게다가 마피아 게임은 이거 뭐 아무 단서가 없으니 동등한 조건에서는 마피아가 승률이 시민보다 더 높을 수밖에 없다(심지어 경찰과 의사가 있다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민주주의 인권 운운하는 국가라 한들, 이런 상황에서는 시민의 승률을 강제로 높이기 위해서 초법적인 비밀 첩보/수사 기관을 두는 것이다.

이런 상황 설명 없이, 남로당의 사악한 만행은 쏙 빼 놓고 서북 청년단만 무슨 악의 축인양 욕한다? 혹은 좌우익 둘 다 똑같이 잘못했다고 양비론으로 퉁쳐? 내 양심으로는 동의할 수 없다. 모르고 그런 주장을 한다면 바보인 것이고, 알고도 그런 거짓말을 일부러 퍼뜨리는 거라면 사악한 자이다. 이거 뭐 일본의 역사 왜곡을 욕하고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좌익의 요인 암살, 양민 학살, 대중 선동에 맞서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정신으로 화답한 게 우익 측의 폭력이었다. 자기는 기독교 욕하면서 남은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이길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이지 않은가?

4·3 사건 같은 것도.. 진압 과정에서 대규모 양민 학살이 있었던 것은 분명 너무 과한 흑역사긴 하지만, 그건 분명 주모자가 우리나라 건국을 방해하려고 사전 준비되어 온 조직적인 폭동을 일으켜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 가족이나 젖먹이까지 죽이면서 일으킨 반란이다.

흑역사는 흑역사로 뉘우치고, 정부 입장에서 사과하는 것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흑역사로 말미암아, 국가 전복 반역 행위가 그저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유하자면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에 의해 후세인이 축출된 이라크 정부, 조선로동당은 그 이름도 유명한 IS, 그리고 서북 청년단 같은 반공 단체는 IS의 착취와 악행에 완전히 학을 뗀 쿠르드 민병대 정도에 대응한다고 봐도 되겠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에는 4·3 사건 말고도.. 이 재수의 난 같은 사건도 있더군.. 이런 와중에 우리나라가 공산화되지 않고, 필리핀이나 중남미처럼 되지도 않고 이렇게 우뚝 선 건 정말 기적이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상, 마피아 게임으로부터 든 일련의 생각들이었다. =_=;;
남로당에 대해 절대 침묵하면서 서북단 청년단만 때리는 이런 치우친 아저씨들 때문에.. 한글, 철도, 기독교, 컴터 얘기만 화기애애하게 이어졌을 내 블로그와 SNS도 심각한 글, 과격한 글이 올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지금 대통령에 대해서, 일베에 대해서, 혹은 새누리당과 새민련에 대해서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은 얼마든지 용납한다. 그러나 필요악과 절대악의 관계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좀 용납하기 힘들 것 같다. 앞으로 어지간해서는 '필요악'을 주제로 또 글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27 08:23 2014/10/2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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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분석

구약 성경에서 예레미야는 일명 '눈물의 선지자(대언자)'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며, 이사야서 다음에 나오는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의 저자이다.

앞의 책인 이사야서에서도 앞부분에 잠깐 민족의 타락 얘기가 나오지만 분량이 그리 많지 않으며 얘는 외국 민족에 대한 예언이 더 많다.
그 반면, 예레미야서는 외국 민족에 대한 예언은 뒷부분에 잠깐 나오는 게 전부이고 주 내용은 민족의 타락에 대한 책망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항복하고 바빌론으로 잡혀 가야 모두가 살 수 있다는 정치적인 얘기도 많다. 이 때문에 그는 당대의 동족들로부터 반역자라고 욕을 엄청 먹었으며 살해 위협을 받고 폭행, 투옥과 감금도 당했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의 히브리 음차 알파벳 철자는 Jeremiah이지만, 그리스어가 기본인 신약 성경에 가면 Jeremias와 Jeremy도 나온다. 뭐, 신약이라고 해 봤자 실질적으로 나오는 책은 마태복음밖에 없지만. Jeremy는 오늘날에도 영미권에서 인명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게 두 건 있다고 언급한다.
하나는 렘 31:15 “라마에서 애통하며 몹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를 인용한 마 2:17-18인데,
정작 구약 본문을 보면.. “엥? 그게 그 얘기예요? 이 문맥이 헤롯 왕의 유아 학살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요?” 싶은 생각도 든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그게 그 예언이라고 의미를 인위적으로 부여하지 않았으면 눈치를 채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본문 자체가 과거, 교리적, 예언적으로 굉장히 중의적으로 기록되기라도 했는가 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 27:9인데.. 이건 좀 더 어려운 문제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거라고 하나, 정작 예레미야서에는 예수님과 관련해서 은 30냥 인신매매 같은 걸 암시하는 구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토기장이? 예레미야서에는 18~19장 사이에서 토기장이가 빚는 토기 관련 퍼포먼스만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예수님이 은 30냥에 팔리는 것을 암시하는 예언은 스가랴서에 있다. (슥 11:12-13)

그럼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더구나 KJV 유일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이것과 거의 같은 패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KJV 이외의 다른 변개된 성경들이 잘못됐다고 까기도 했다.
바로 막 1:2-3 말이다. 거기에는 이사야서 인용도 있고 말라기서 인용도 있다. “이사야 + 말라기 = 대언자들(prophets)”이 돼야 맞는데, 변개된 성경에서는 말라기의 예언까지 싸잡아서 '대언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써 놨으니 이는 명백한 오류인 것이다.
애초에 이런 논리를 펴기까지 했으니 신구약간 예언 언급의 정확도에 대해서 KJV 빌리버는 민감하게 접근해야만 한다.

그러나 막 1:2와 마 27:9의 다른 점을 굳이 찾자면..
전자의 경우 명백하게 대언자들의 글이라고 written이라는 동사가 있는 반면, 마태복음의 예레미야 인용은 그냥 spoken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도 은 30냥 운운하는 예언을 하긴 했지만, 그건 구전으로만 전해졌을 뿐 예레미야서에 정식으로 기록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마치 예수님의 가르침 중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행 20:35)와 비슷한 급의 예외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저 말 역시 정작 사복음서에서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7:14)를 비롯해 50장, 53장 등에서 예수님 예언이 잔뜩 들어있다. 하지만 예레미야서는 관심사가 온통 바빌론 포로일 뿐, 딱히 예수님 예언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예외적인 힌트를 통해 예레미야 역시 그 먼 옛날에 예수님에 대한 여러 암시와 힌트를 받긴 했다는 추측도 할 수 있다.

그럼, 다음으로 예레미야서 자체의 특징을 좀 살펴보도록 하자.

1. 성경의 다른 책들에 대한 오마주가 생각보다 많다. 간단한 예로,

  • 1인칭의 자조적인 기도(느헤미야)
  • 악인의 형통에 대한 회의와 의문: 시편 73편, 하박국 1장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서에도 12장에 이런 내용이 있다.
  • 자기가 태어난 날에 대한 저주(욥기): 특히 20장 끝부분은 이거 예레미야서가 아니라 욥기 3장을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노골적인 분위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레미야서의 앞부분은 워낙 암울한 논조이기 때문에 저런 내용이 전부 등장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에스겔서 오마주라고까지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어서 아들까지 이가 시리다”라는 잘못된 조상 은덕/조상 탓 통념에 대한 반박이 렘 31:29와 겔 18:2에 같이 나온다.

또한 거짓 대언자와의 대결이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에 '미가야 vs 시드기야'를 기억하시는지? 예레미야서에는 28장에서 하나냐와의 대결이 나온다.
거짓 대언자 시드기야는 참 대언자 미가야의 따귀를 때리면서 도발을 했는데, 거짓 대언자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퍼포먼스 차원에서 걸고 있던 나무 멍에를 뺏어서 부러뜨리면서 “여러분 이거(= 예레미야의 말)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하나님은 바빌론의 멍에를 '이렇게' 꺾어 버리실 겁니다!”라고 선동질을 제대로 했다.

이런 개막장 분위기에 예레미야는 기도 안 차서 그냥 자리를 떠 버렸고.. 하나냐는 그로부터 두 달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천벌을 받아 급사했다고 성경에 나온다.

아울러, 예레미야서에는 사도행전을 오마주한 듯한 장면도 있다.
예레미야로부터 너무 과격하고 파격적인 메시지를 들은 뒤 사람들이 “이 자식 이거 어떡하면 좋을까? 예전에도 좀 똘끼 부리는 사람이 있긴 했는데 그때는 이렇게 됐었다” ... 처럼 '전례'를 따지고 드는 내용이 있다.
이건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유대인들 공회가 보인 반응과 매우 유사하다. 행 5:36-39와 렘 26:17 이후를 서로 비교해 보시라.

그 뿐만이 아니다. 성경에서 에티오피아 내시가 나오는 장면도 사도행전 8장과 더불어 예레미야 38장이며, 둘 다 긍정적으로 나온다. 전자에서는 내시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으며, 후자에서는 내시가 예레미야를 구출해 준다! 하나님 역시 그 내시에게 보상을 해 주셨다(렘 39:16-18).

2. 예레미야서에서 대표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단어 내지 관용구로는

  • 칼, 기근, 역병 sword, famine, pestilence 3종 콤보 세트
  • 일찍 일어나 ...하기 rising up early and ...ing
  • backsliding(타락하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예레미야에서만 압도적으로 자주 쓰인다.
  • unpunished: “니가 아무 벌도 안 받고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문맥에서 몇 번 나온다. 이 단어는 잠언과 예레미야서에서만 나온다.
  • horrible thing: “그 땅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졌도다.” (렘 5:30) 요즘 식으로 치자면 충격과 공포 정도 되겠다.

이 정도가 있다.

3. 이 책에는 했던 말 반복 패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서는 성경에서 주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라는 말이 나오는 유일한 책인데, 23:6과 33:16에 걸쳐 반복해서 등장한다.

상처를 조금만 고쳐 주고는 평안이 없는데 평안 드립을 치는 것: 6:14와 8:11에서 반복된다.
도벳에 있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앞으로 '살육 골짜기'라고 불릴 것이다: 7:32와 19:6에서 반복된다.
그 많은 기적이 행해졌던 이집트 탈출 사건보다도 바빌론 귀환 사건이 더 큰 기적이라고 알려질 것이다: 16:14-15와 23:7-8에서 반복된다.

여러 이방 민족들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뒷부분에서도 49:18-20과 50:40,44-45처럼.. 뭔가 copy & paste 같은 느낌이 드는 표현이 심심찮게 발견되는데, 단어를 하나씩 일일이 대조해 보면 완전히 같지도 않고 약간은 차이가 발견된다. 10:12-16와 51:15-19도 헛된 우상들을 까는 문맥에서 동일한 메시지 copy paste이다.

그리고, 열왕기하의 끝부분은 예레미야서의 끝부분과 같다. (왕하 25:27-30; 렘 52:31-34)
한편 역대기하의 끝부분은 바로 다음 책인 에스라서의 첫부분과 같다. (대하 36:22-23; 스 1:1-2)
그러니 역사서인 열왕기와 역대기는 책 자체에는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이 역시 각각 예레미야와 에스라가 기록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다소 설득력을 얻는다.

4. 이 외에 예레미야서에서 인상적인 부분

  • '하늘의 여왕'이 언급돼 있으며(7:18, 44:17-18) 크리스마스 트리를 까는 듯한 대목(10:3-5)이 나오는 유일한 책
  • '마음이야말로 가장 사악하다'(17:19), '옛 길로 가라'(6:16)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음
  • 일명 하나님의 전화번호라고 불리는 렘 33:3이 예레미야서에 있음

성경의 여느 역사서와 선지서들이 그렇듯이 예레미야서 역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에 대해서 혹독한 경고와 심판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렇게 멸망하고 끝인 게 아니라 이 하나님의 선민들은 나중에 반드시 회복되며, 이들을 징벌하는 도구로 쓰였던 민족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하게 굴었다가 아예 씨도 안 남기고 처절하게 망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결론이다.

“쟤들? 어차피 자기네 신 제대로 안 믿어서 저 꼴 난 거잖아? 그러니 우리가 마음껏 막 대해도 되지”...를 성경은 절~대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이스라엘 애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민족이니 꼴 좋지”이다. 반유대주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다. 우리 말고도 이스라엘을 싫어하고 괴롭히고 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이다가 덩달아 망할 악역들은 차고 넘치니 크리스천이 그런 데에 가담하지는 말아야 한다.

오죽했으면 네가 낮과 밤 천체 운동을 뒤집어엎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 회복 약속도 뒤엎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까지 성경은 말한다. (렘 31:35-37)
바빌론으로 70년간 포로로 끌려가더라도 “일단 항복만 하면 니 목숨은 내가 절대 보장한다. 무슨 여행, 요양이라도 다녀 오듯이 잘 갔다 오너라”이다.

사람 인생에서는 잠깐 갔다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여행이 영원히 못 돌아오는 단절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1차 세계 대전, 6·25 전쟁 중의 1·4 후퇴, 그리고 이 승만 대통령의 하와이 요양 등..
그런데 바빌론 포로 귀환은 이런 추세를 정면으로 역행하는 사건이다. 이때는 이집트의 10재앙 같은 것도 없고, 모세 같은 넘사벽급의 걸출한 지도자가 없는데도! 그래서 이 사건이 모세의 기적을 능가하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이렇게 생각할 거리가 많을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도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불과 쇠망치에다 비유하였으며(23:29), 말씀 변개(perverted the words of the living God)에 대한 언급(렘 23:36)이 있기 때문이다. 36장과 끝부분에서는 성경 자필 원본이 소실되는 장면도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24 08:24 2014/10/2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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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년간 개발되어 온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유구한 역사를 표 하나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득 이런 표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 ^^

버전 플랫폼/모듈 구조 편집기의 에디팅 엔진 입력 기능 기타
1 ('00) 편집기+라이브러리 2바이트 조합형 기반. 옛한글 지원 안 함
줄당 글자수 제한 있었음
16비트 입력 단위
글쇠배열만 차이가 나는 2개의 입력 항목
세벌식 모아치기, bksp 없이 낱자 수정, bksp 달라붙기+역도깨비 등의 세벌식 응용 기능 최초 제공
 
2 ('02) 초보적인 수준의 플러그 인과 TSF 모듈 한컴 2바이트 기반+완조형 옛한글
줄당 글자수 무제한+탭+자동 줄바꿈 최초 지원
32비트 입력 단위
최대 4개의 독립된 입력 항목
입력 설정치의 한계값이 더 커짐
가상 낱자, 최종 변환 규칙 도입
한글 입력 순서 재연 기능 최초 도입
편집기 프로그램은 이때 지금과 같은 골격을 거의 갖춤
3 ('04) 유니코드 API 기반
최초로 외부 모듈 도입
플러그 인 구조 확립
지금과 같은 파일 구조, 제어판 UI 확립
유니코드. 조합형 옛한글 표현 가능해짐
TSF+운영체제 IME를 통한 입력도 지원
불연속 다중 블록, drag & drop 최초 지원.
초보적인 수준의 undo 지원
64비트 입력 단위 확립
임의의 개수의 입력 항목과 전환 규칙 (단축글쇠)
한글 여러 성분을 한 글쇠에 한꺼번에 배당
입력 스키마+문자 생성기 계층 확립
글쇠와 오토마타는 수식 기반
임의의 문자 조작 프로토콜 뼈대 첫 도입
특수 도깨비불, 결합 축약 규칙, 사용자 정의 조합
지금과 같은 형태의 제어판 UI
도움말 전면개정
4 ('06) 64비트 바이너리 도입
지금과 같은 디렉터리 구조 확립
외부 모듈 안정화, Windows Vista 규격 지원 추가
undo 알고리즘이 훨씬 더 강력해짐
조합 상태를 표시하는 방법(cursor/밑줄 등)이 더 정교해짐
세로쓰기 지원
  다양한 외부 글쇠배열 파일 읽기 기능
XML parser, 상수 명칭 테이블 도입
외부 모듈에서 옛한글 입력 가능해짐
지금과 같은 형태의 다국어 UI 지원
5 ('08) 변환기, 입력 패드 도입
입력 설정 파일 포맷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전히 정착함
시스템 DLL 의존 방식 변경
유니코드 5.2 옛한글 추가 지원
비정규화 문자열도 정상 처리하고 비표준 동작 없어짐
임의의 조합 테이블을 내장한 한글 글꼴 지원
문자 조작 프로토콜 1차 개정
보조 입력 도구 도입
다중 문자, 음절 구분 방식이 다른 다중 한글 자모 추가
예제 입력 도구 추가
6 ('11)   대용량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짐
텍스트 변경 후 화면을 갱신하는 알고리즘을 전면 개선함
초-종성 공유 낱자 결합 규칙, 두벌식 종성 전용 타입
자동 조합 종료 타이머
bksp 동작 방식 세분화
단어 단위 한자 변환
사용자 정의 글쇠 인식 기능
다양한 텍스트 필터 추가
도움말 전면개정
7 ('13) 외부 모듈에 Windows 8 지원 추가   내부 입력 로직 및 (한글 입력 순서 재연 기능) 전면 개편
문자 조작 프로토콜 2차 개정
후보 변환 기능 세분화(#1~#4)
글자판 전환 수식에 C, N 변수 추가
bksp 동작 연쇄 적용 옵션
고급 입력 스키마, 고급 입력기에 고급 치환 기능 추가
TSF A급 한정, 외부 모듈에서도 옛한글에 대한 고급 조작 가능해짐
프로그램 아이콘 전면개정

1.x부터 7.x까지 각 메이저 버전대에서 이뤄진 진짜 중요한 과업들을 정리하였다. 저 표에 아이템 한 줄을 적기 위해서 최하 수 주~한두 달 가까이 작업을 해야 한 것들이 즐비하다. 14년 짬밥이 어디 간 게 아니다.

역시 3.x대가 제일 파격적인 변화가 많았다. 그러나 그 변화가 사용자들에게 제대로 와 닿기 위해서는 4.x 이후에서 도입된 무수한 편의 기능들이 뒷받침돼야 했다.

각 시기별로 중점적으로 개발이 진행되었던 분야가 있다. 일종의 유행이랄까? 가령, 4.x때는 여러 분야에서 발전이 있었지만 한글 입력 본연의 역할과 관련된 기능이 추가된 건 거의 없었다.
그 반면, 5~6.x까지 거치면서 프로그램의 모듈 구조나 에디팅 엔진 등이 그럭저럭 완성된 뒤에는 지금까지 오로지 한글 입력 엔진 쪽에만 미친 듯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굵고 붉은 단어가 현재의 작업 내역이다.

7.x대에서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완전체 진입이 이뤄지지 않으려나 희망을 걸어 본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21 08:30 2014/10/2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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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컴퓨터라고 하면 미국에서 발명되었으며 그 때문에 각종 명령어와 메시지도 기본적으로 죄다 영어이고, 한국어· 한글과는 굉장히 어울리기 힘든 범접할 수 없는 기계라고 여겨져 왔다. 지금처럼 컴퓨터의 자원과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국제화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말이다.

그런데 컴퓨터와 더불어 현대 과학 기술의 양대 결정체라고 불리는 자동차도 사정은 비슷한 듯하다. 비록 자동차는 컴퓨터처럼 정보를 다루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문자· 언어와 직접적으로 얽혀 있지는 않지만, 국산차라 해도 차의 내부와 외부에서 한국어· 한글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물론 우리나라가 초기에는 외제차를 수입해서 조립 판매하는 수준이고 또 내수보다 수출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만큼, 차이름 역시 알파벳으로 적고 발음하기 쉽게 지어야 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국산차에까지 한글 표기에 너무 인색했던 건 아쉬운 점이다. '시발' 자동차만 해도 당당히 앞에다가 ㅅㅣ-ㅂㅏㄹ이라고 풀어쓰기로 당당하게 이름을 적어 놓지 않았던가?

(여담. 풀어쓰기에다가 장음 부호 '-'까지 덧붙인 것은 아무래도 한글을 좀 일본어 카타카나 스타일로 표기한 게 아닌가 싶다. 오늘날에는 단어가 비속어 욕설과 비슷하게 들리게 되어 난감해진 건 차치하고라도, 장음 부호 때문에 '시발'이 아니라 언뜻 보기에 '사발'처럼 보이니 더욱 안습하긴 하다..)

아무튼, 본인은 언제부터 영어 알파벳을 읽고 쓸 줄 알게 됐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다. 하지만 아마 컴퓨터를 접하기 전에 자동차의 뒤에 적혀 있는 EXCEL, PONY, PORTER 등의 이름들을 읽으면서 알파벳을 자연스럽게 습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알파벳을 뗀 뒤에 컴퓨터를 자연스럽게 시작한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에 순우리말로 명명된 자동차가 전혀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시발'은 우리말이긴 하나 한자어이기 때문에 순우리말은 아니고.
대표적인 차는 바로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에 생산되었던 대우 자동차의 '맵시'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맵시'가 고유명사로 쓰인 예로는 아래아한글의 글자 꾸밈/배너 그리기 프로그램인 '글맵시'와 더불어 저 자동차를 떠올리면 된다. 본인은 아주 어렸을 때 실물을 본 기억이 있다.

'맵시'의 후속 모델은 '맵시-나'이다. 여기서 '나'는 다른 접사가 아니라 '가나다' 할 때의 '나'이다. 즉, 요즘 같았으면 '맵시 II(투)' 또는 '뉴 맵시'인 셈인데, 후속 모델을 뜻하는 단어까지 우리말로 붙인 것이다.

사소한 사항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배기량 1500cc를 채 넘지 않는 소형차가 타이어의 휠너트가 5개인 것이 인상적이다. 현대 차의 경우 2000cc급부터 시작하는 그랜저조차도 초기 모델은 4개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랜저는 뉴 그랜저부터 5개로 올라갔고, 쏘나타는 EF까지 다 여전히 4개이다가 NF부터 5개로 올라갔다.

옛날에는 휠너트가 5개인 승용차를 보면 최하 중형 이상급의 고급차 외제차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도 그런 걸 느꼈다.

자,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순우리말 자동차는 '누비라'인데, 맵시와 누비라 모두 대우 자동차의 작명이라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에스페로의 후속 차종인 '누비라'의 경우,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차가 되라는 의미로 김 우중 회장이 직접 지은 거라고 한다. 오늘날의 열차 이름인 '누리로'와 비교된다.

현대/대우/기아에서 내놓은 승용차 중에서는 이 정도가 전부인 듯하고, SUV중에는 쌍용 자동차의 '무쏘'가 바로 코뿔소를 뜻하는 '무소'를 변형한 명칭이다. 스포츠스러운 느낌을 그럭저럭 잘 표현했다.

그리고 '야무진'이라는 굉장히 기발한 이름의 1톤 트럭이 있었다. 삼성 자동차에서 아주 초창기이던 1998년에 내놓은 물건인데, 경영난 때문에 얼마 생산되지는 못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르노 자동차에 인수되기도 전의 일이다.

복고풍 유행을 타고 순우리말 이름을 가진 자동차가 또 등장할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다음으로 주제를 바꿔서 관련 잡설을 늘어놓도록 하겠다.

1.
그러고 보니, 영단어이긴 하지만 '맵시'만큼이나 '엑셀'도 자동차 이름 겸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이름이다.
엑셀보다 로터스 1-2-3이 도스에서 훨씬 더 유명했던 옛날엔 엑셀이 자동차 이름으로 날리고 있었고, (1990년대 중반까지)

공교롭게도 자동차 엑셀이 사라진 뒤(1990년대 후반)부터는 스프레드 시트 엑셀이 Windows에서 세계를 평정했기 때문에 두 이름의 심상이 국내에서 딱히 크게 충돌하지는 않았던 거 같다.

2.
대우 그룹은 IMF 때 진작에 분해되어 버렸고 대우 자동차라는 정체성은 이제 버스에서나 볼 수 있으며, 김 우중 회장은 그저 몰락한 파렴치 경제사범 정도로나 치부되는 편이지만.. 이걸 마냥 비판만 하고 폄하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삼성의 이 건희 회장이 1993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휴대전화 불량품 화형식을 거행한 뒤 “처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신경영을 선포한 것처럼, 김 회장도 '탱크주의'를 내세우면서 품질 혁신을 외쳤고 특히 1993년엔 세계 경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선포했다.

이때 시장 개척을 매우 잘 해 놓은 덕분에, 동유럽권에서는 대우라는 기업에 대한 이미지가 지금까지도 매우 좋다고 한다. 독일에서 차 범근 축구 감독을 아직도 기억하듯이!
가령, 국내에서는 진작에 자취를 감춘 '씨에로' 같은 대우 차가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공장이 '우즈대우'라는 이름으로 국유화된 상태로 지금까지도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김 회장이야 잘나가던 시절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야망 넘치는 저돌적인 자서전을 남긴 게 유명하다. 1989년이니 공 병우 박사의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 왔다>와도 출간 시기가 비슷하다.

또한 저 사람도 공 박사 같은 급의 덕후는 아니어도 워커홀릭 기질에다가 시간 최적화에 일가견이 있었다.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비행기는 언제나 밤 시간대만을 이용했다고 한다. 번거롭게 숙소 잡을 필요 없이 비행기 안에서 수면과 이동을 동시에 처리한 뒤, 곧바로 일하려고.

사업을 하고 거대한 기업을 이끌면서 수많은 종업원들을 먹여 살리려면 저런 머리와 근성 정도는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현대 자동차처럼 기술 개발에도 신경을 쓰지, 무리한 확장에만 치중하다가 대우 그룹이 망해서 사라진 것이 일면 아쉽게 느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18 08:23 2014/10/18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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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랜만에 옛날 GWBASIC 추억 얘기를 또 늘어놓아 보겠다. 예전에 했을 법도 해 보이는데 여러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니 안 한 것 같다. 베이직 얘기를 전문적으로 하는 건 한 2년 만의 일이다.

GWBASIC은 초딩이었던 본인을 프로그래밍의 세계로 이끈 추억의 장난감이다.
본인은 어릴 때부터 컴퓨터가 다른 전자 기기와는 뭔가 차원이 다른 대단한 물건이라는 걸 실감했다.
텔레비전은 오로지 일방적으로 전달만 하는 물건인 반면, 컴퓨터는 내가 직접 명령을 내려서 모니터에 찍히는 글자의 색깔을 바꿀 수 있고, 내가 원하는 화면을 구성할 수 있고,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소리도 내고 파일로부터 정보를 읽고 쓰면서 뭔가 '나만의 능동적인 세계'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은 딱히 머리가 빨리빨리 잘 돌아간다거나 수학 덕후 최적화 덕후 기질이 있지는 않았다. 단지,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는 것 자체에 집착했다. 그래서 정보 올림피아드도 경시에서는 영 재미를 못 보고 그 대신 공모 부문에서 다 입상했다.

GWBASIC은 결과를 즉시 확인할 수 있는 대화식 구조라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다. 행번호에 GOTO문 남발은 굉장히 기괴하고 거추장스러운 개념이긴 하지만, 행번호가 없는 명령은 곧장 실행되고, 행번호가 붙은 명령은 메모리에 등록되어서 나중에 행번호 순으로 한꺼번에 실행된다는 그런 발상은... 참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듯하다. RUN, MERGE, DELETE, CHAIN처럼 기억된 프로그램 자체를 확장하거나 바꾸는 명령이 있다는 것도 기괴하고 말이다.

GWBASIC에는 프로그램을 불러오거나 저장하는 명령으로 LOAD, SAVE가 있다. 그런데 GWBASIC은 좀 특이한 게, 여느 프로그래밍 툴처럼 소스 코드를 plain text로 저장하는 게 아니라 내부 바이너리 바이트코드로 저장하는 게 기본 옵션이다. 바이트코드는 같은 소스를 저장했을 때 plain text보다 크기가 작고, 로딩/저장 속도도 더 빠르다는 이점이 있다.

세월이 워낙 많이 흘렀기 때문에 지금은 그 바이트코드의 포맷이 다 알려져서 인터넷에 굴러다닌다. 포맷이 정식으로 공개된 건지 아니면 해커들이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해서 알아낸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소스 코드를 볼 수 있게 저장하려면 SAVE"파일이름", A라고 뒤에 A를 덧붙여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P라는 옵션이 있다. P 옵션은 A와는 반대로 소스 코드를 내부 바이너리 코드로 저장하되 그걸 XOR 기반의 간단한 암호화까지 해서 저장한다.
P 옵션으로 저장된 소스는 불러와서 실행은 가능하지만, LIST로 내용을 열람하거나 코드를 수정할 수 없다. 따라서 비록 GWBASIC에 소스 코드를 EXE로 컴파일하는 기능은 없지만, 다 만든 프로그램을 남에게 인계할 때는 P 옵션으로 저장된 프로그램 파일을 전해 주면 소스 코드 유출을 막을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GWBASIC에 무슨 전문적인 코드 암호화나 난독화 기능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겨우 그 정도의 허접한 보호 기능은 당연히 뚫리고도 남았다.
P 옵션의 암호화 방식도 다 알려져 있고, GWBASIC의 버그를 이용하여 보호 기능 자체를 뚫어 버리는 방법도 존재한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베이직 프로그래머들 사이에 나돌던 공공연한 비밀 테크닉이었다.

자, 0xFF 문자 2개로 구성된 2바이트짜리 파일(가칭 UN.BAS)을 만든다. 간단하지만 키보드로 바로 입력할 수 없는 문자이긴 한데.. 헥사 에디터를 쓰든지 아니면 GWBASIC 자체를 이용해서 이런 파일을 생성하는 프로그램을 짜서 돌려도 된다.

그 뒤, P 옵션이 붙은 임의의 소스를 LOAD한 뒤, 그 상태에서 UN.BAS를 뒤이어 LOAD하고 나면..
기존 소스의 프로텍션이 풀리고 LIST 열람이 가능해지는 걸 볼 수 있다. 마법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뿐만이 아니다.
NEW를 입력해서 기억되어 있던 소스를 다 지운 뒤에도 UN.BAS를 LOAD하면.. 방금 지워졌던 소스가 되살아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게 도대체 어째서 가능할까? (UN.BAS는 0xFF 0xFF일 뿐, 저 소스 코드 자체가 들어있는 거 절대 아님.. -_-)
사실, GWBASIC은 내부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바이트코드를 디코딩해서 LIST로 출력하고 소스 코드를 고치는 것을 허용할지 여부를 간단한 boolean 변수 하나로만 판단하는 듯하다. 저장할 때 XOR 인코딩 여부 역시 그 변수로 판단하며, 불러올 때의 XOR 디코딩 여부는 파일 앞부분에 있는 헤더로 판단한다.
그러니, 그 메모리 주소의 값만 바꿔 버리면 프로텍션을 곧바로 풀 수 있다. GWBASIC의 보안 체계는 근본적으로 허술했던 것이다.

그리고 GWBASIC의 고유 파일 포맷에 따르면, 프로텍션이 걸리지 않은 파일은 0xFF로 시작하고, 걸린 파일은 0xFE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0xFF 0xFF 2바이트짜리 파일은 GWBASIC으로 하여금 프로텍션 플래그는 해제하지만 그 뒤에 거의 즉시 파일이 끝나 버리기 때문에 메모리 상의 다른 소스 코드는 건드리지 않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원래는 그렇게 파일이 갑작스럽게 끝났을 때의 처리를 GWBASIC이 깔끔하게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졸지에 프로텍션만 풀어 버리는 게 가능한 듯하다.
NEW를 한 것까지 어떻게 undo를 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런 게 오늘날의 소프트웨어 보안 용어로 치자면 일종의 버그이고 exploit이다.
만약 GWBASIC이 Windows, Office, Visual Studio처럼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제품이고 GWBASIC이 세계 기업들의 돈줄을 좌지우지하는 솔루션이었다면 이건 뭐 당장 긴급 업데이트/패치감이 됐을 것이다. 회사의 자산인 소스 코드가 간단한 해킹으로 죄다 유출되게 생겼으니 말이다.

업데이트 명분으로 맨날 귀가 따갑도록 나오는 “악의적으로 조작된 파일을 열 경우 임의의 코드가 실행... 까지는 아니어도 뭐가 어찌될 수 있는 보안 취약점이 Microsoft 모 제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문구가 가리키는 게 바로 이런 거다.
자그맣게 조작된 파일이 GWBASIC의 저장 프로텍션을 풀어 버리니, 이 꼼수가 보안의 관점에서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어서 문득 글을 써 보았다.

옛날에, 286 XT/AT를 갖고 '교육용 컴퓨터' 이러던 시절에는 단색 그래픽 모드에서 동작하는 여러 '교육용 소프트웨어'들도 있었다. CAI라고 들어 보셨는가?
'약수와 배수', '컴퓨터 개론' 같은 타이틀이 있었는데, 개중에는 정말 놀랍게도 GWBASIC으로 개발된 것도 있었다.
물론 런타임인 GWBASIC.EXE와 소스 코드들은 다 파일 이름과 확장자를 교묘하게 바꿨고, 실행은 CAI.BAT라는 파일로 했다.

소스 코드를 열어 보니 당연히 프로텍션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본인은 저 테크닉을 이용하여 프로텍션을 풀고 코드를 열람해 보기도 했다. 분량이 상당히 방대했으며 지금 다시 봤으면 여러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을 발견했을 법도 해 보지만, 본인은 그 당시엔 프로그래밍 실력의 부족으로 인해 그다지 충분한 재미를 못 봤다.

그 느리고 허접한 GWBASIC으로 자체 한글 출력과 그것도 모자라서 입력까지 구현했는데 과연 어떻게 구현했을지가 궁금해지지 않는가?

GWBASIC의 후신인 QBasic이야 고릴라 내지 NIBBLES 같은 예제 게임 프로그램이 MS-DOS 5.0에 같이 곁들여 제공되기도 했다.
순수 GWBASIC으로 근성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은? 먼 옛날에 무슨 허접한 자동차 경주 게임 같은 걸 본 게 마지막이다. 각 스테이지의 이름은 태양계의 행성 이름이었는데... 기억하는 분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상용 제품인 QuickBasic도 GWBASIC의 전통을 이어받아 소스 코드를 자기 고유 포맷으로 저장하는 기능이 있었다. 물론 GWBASIC과 호환되는 포맷은 아니었다. 그리고 축소판인 QBasic은 그런 기능이 없다.
지금은 '큐베'라고 하면 음악 DAW 프로그램인 큐베이스(Cubase)가 먼저 떠오르는 세상이 됐으니 이것도 격세지감이다.

* 그리고 GWBASIC과 관련된 추가 여담.
IBM PC(=도스)용으로 이식된 GWBASIC이야 기본 프롬프트가 Ok이지만, 더 구닥다리 8비트 롬 베이직 같은 걸 보면 프롬프트가 READY인 경우가 있다. 빌 게이츠 아저씨가 GWBASIC을 최초로 만들 때 원래 의도했던 메시지는 ready였다고 한다.
그 사고방식은 오늘날 같은 Windows+GUI 시대에까지도 남아 있다. Excel이나 Visual Studio, 심지어 MFC 기본 어플이.. 내부적으로 더 처리할 메시지가 없이 사용자의 입력만 기다리는 idle 상태로 진입했을 때 아래의 상태 표시줄에 나타나는 메시지는 바로 Ready이며, 우리말로는 그냥 '준비'이다.

그랬는데 ready가 ok로 바뀐 이유는.. 메모리를 단 3 바이트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뿌우우... 묵념.

단, Ok도 다 대문자 OK도 아니고, 대문자 O에 소문자 k로 정해진 이유는 본인으로서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15 08:23 2014/10/15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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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주요 사건들과 철도

1.
경부선이 개통하던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 역이 있는 곳보다 더 북쪽에, 서울 중심과 더 가까우며 지금으로 치면 지하철 5호선 서대문 역과 가까운 곳에 경부선 서대문 역이 있었으며 이것이 그때의 진짜 서울 역이었다. 지금의 서울 역은 남대문 역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유 관순 열사는 잘 알다시피 이화 학당을 다녔는데, 이화 학당은 지금의 이화여고가 있는 곳에 있었다.
이화여고는 서대문 역과 가깝다. 따라서 이화 학당 역시 그 시절엔 경부선 서울 역의 역세권에 있었으며, 유 관순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고향 천안을 수월하게 오갈 수 있었다.

서대문 역은 1919년 3월, 3·1 운동이 벌어지던 와중에 폐역되었으며, 남대문 역 이북으로는 서대문이 아닌 신촌으로 꺾는 드리프트 선로가 1920년 말에 뒤늦게 건설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구 서울 역 건물은 1925년 9월에 완공되었다.

2.
농촌 운동가 최 용신 선생은 샘골 학원 주변으로 수인선 철도가 생기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참 애석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1935년 사망, 수인선은 1937년 개통. 약 2년 반 차이) 그래도 자기 지역으로 철도가 건설될 예정이라는 소식 정도는 듣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3.
1929년의 광주 항일 학생 운동의 배경에도 철도가 있다. 나주에서 광주 사이를 열차로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이유는 물론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했기 때문임. 이게 결국은 수십 명의 학생들이 엉겨붙은 패싸움으로 커져 버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호남선 나주 역(광주보다 더 남쪽)과 광주 역을 오가는 열차란 상상하기 어렵다. 서울 방면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는 있어도, 목포 방면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호남선은 몰라도 경전선 쪽은 지금까지 변화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때의 광주 역은 지금의 광주 역과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리고 광주 동쪽으로는 담양과 남원으로 가는 '전남선'이라는 철도가 부설되어 있었다. 이것도 참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남선은 1944년에 일제의 전쟁 물자 공출로 인해 선로가 철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 광주 역은 다른 곳으로 이설되고 새로 건설된 경전선이 광주를 지나게 되었으나, 이마저도 선로가 남쪽 외곽으로 이설되면서 광주 역은 지금과 같은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이다.

뭐 지금의 광주송정 역인 구 송정리 역이 호남선과 전남/경전선과의 환승역이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1929년에 다녔던 열차는 어떤 형태로든 호남선 남부와 전남/경전선을 직결하는 통근열차요, 지금으로 치면 광역전철뻘 되는 열차였던 것 같다.

그리고 여담으로, 대도시 중심부에 있지만 철도 선형상으로는 왠지 고립된 고자처럼 되었다는 점에서는 신촌과 광주 역이 서로 좀 비슷한 구석이 있다.

4.
끝으로, 조선어 학회 사건이 있다.
1942년 여름, 영생 여자 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이 방학을 맞이하여 집에 가러 열차를 탔다. 한 열차를 같이 탄 여학생들이 낄낄대며 한국어로 수다를 떨었는데, 하필 옆에 조선인 사복 형사가 타고 있었다.
때는 이미 창씨 개명에 조선어 사용 금지 등의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 중이던지라.. 일제의 앞잡이이던 그 형사는 “이것들이 황국 신민이면 신민답게 일본어를 쓸 것이지 왜 조선어를 쓰고 난리냐?”라고 꾸짖었다. 그 학생들은 우리끼리 얘기를 나누는 것일 뿐인데 웬 참견이냐는 식으로 대들었다. (상대방이 일제 끄나풀인지 처음엔 몰랐음)

이에 형사는 빡쳐서 다음 역에서 여학생들을 강제로 끌어내려 심문을 했고, 나중에는 일행 중에 제일 강하게 반항하던 박 영희라는 학생의 집에까지 쳐들어가서 옛 일기장을 압수했다. 그런데 거기에 “학교에서 국어(=일본어)를 썼다가 선생님에게서 꾸지람을 들었다”란 문장이 있는 걸 보고는...

국어를 썼으면 칭찬을 받아야지 왜 꾸지람이냐? 그 선생 누구야? 이거 악질 반동 새끼구만?” 취조를 한 끝에.. 옛 교사였던 한글학자 석인 정 태진 선생의 정체가 드러났다.
일제 고등 경찰은 이 사람이 소속되었던 조선어 학회까지 과격 무장 독립 운동 조직으로 날조하고 일망타진해서 성과 한 건 올리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조선어 학회 사건이 벌어진 계기이다. 더 자세한 내력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참고하시라.

난 옛날에는 한글, 국어 쪽으로만 관심이 있었는데 지금 이 사건을 다시 읽어 보니, 그 당시 영생여고보 학생들이 이용한 철도 노선은 함경선이었고 지금의 북한 치하에서는 평라선 구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깊이 와 닿는다. 아아~ 지금도 국토가 분단되지만 않았다면..!
철도교에 입문하고 나면,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철도를 중심으로 다시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긴다.

안 중근 의사가 중국이 아닌 국내의 철도역 승강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라도 했다면 거기는 그야말로 철덕들의 성지가 되지 않았겠는가?
6·25 때도 군인· 경찰 말고 민간인 중에 가장 많이 순직한 사람들이 바로 철도인이다. 철도 사랑과 나라 사랑이 별개가 아닌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12 08:32 2014/10/1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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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에서 컬러로 (2)

사진술과 관련하여 옛날에 비슷한 주제의 글을 하나 올린 적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오랜만에 내용을 좀 보충하도록 하겠다.

1. 컬러로 복원한 흑백 사진

사실, 흑백 사진을 컬러 사진으로 '복원'한다는 개념은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없는 정보를 원래대로 재구성하는 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흑백 사진에다가 그럴싸하게 인위로 색을 입히는 과정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건 마치 가사를 하나 줘 놓고 멜로디를 붙여 보라는 주문 내지
외국어 텍스트를 줘 놓고 번역(특히 직역이 아닌 의역 형태로)을 하라는 주문과도 같기 때문에,
작업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의 느낌이 나는 작품이 나올 수 있다. 흑백 사진이 찍히던 당시에 원래 색상이 저랬으리라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외국의 한 예술가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은 꽤 그럴싸하다.
20세기 초· 중반을 살았던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까마득한 옛날을 산 것 같아 보이지 않는 효과가 난다.
그 옛날 모습을 시각적으로 느끼는 방법으로는 (1) 흑백 사진, (2) 컬러 그림 아니면 (3) 그 시절을 대충 재현해 놓은 실사 영화 정도가 다일 텐데 (4) 채색한 흑백 사진은 그 중간에 속하는 새로운 영역인 것 같다.

참고로 사진이 찍힌 최초의 전쟁은 1850년대의 크림 전쟁이며, 1860년대의 미국 남부 전쟁도 사진이 전해진다. 물론 흑백. 그러나 이때는 노출 시간이 길었던 관계로 교전 중의 장면은 찍을 수 없었고, 전쟁이 끝난 뒤의 풍경이나 병사들이 작정하고 포즈를 취한 사진만을 찍을 수가 있었다.

2. 처음부터 컬러로 찍힌 고전 사진

우리나라에서는 196, 70년대의 박 정희 대통령 시절만 해도 컬러 사진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없다는 얘기는 아님).
하지만 예전 글에서도 썼듯이 컬러 사진 자체는 생각보다 굉장히 일찍부터 존재했다. 박 정희가 아니라 이 승만 대통령도 컬러 사진이 존재하며 2차 세계 대전 시절의 히틀러· 에바 부부도 컬러 사진이 있다.

초창기의 컬러 사진으로 유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에 제정 러시아 말기에 세르게이 프로쿠딘-고르스키라는 작가가 남긴 사진들이다.

단, 시대가 시대인지라 저 사람은 RGB별로 세 장의 풍경 사진을 찍어 놓기만 했지, 그걸 실제로 현상해서 컬러 사진이 완성된 걸 보지는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저 사진들은 원판을 토대로 훗날 합성해서 만들어 낸 이미지이니 이거야말로 '복원'이라는 표현이 말이 된다. 100년 전에 3원색 합성까지 완료된 컬러 사진 현물이 지금까지 저렇게 선명하게 전해져 온다는 뜻은 절대 아님.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으면 사진 자체가 누렇게 바래 버렸을 것이다.

후처리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그래도 흑백 사진 채색처럼 인위적인 해석이 가미된 것은 아니니 흥미진진하다. 저것은 그림도 아니고 재연이 아니라 진짜 100년 전의 사람과 풍경이었다니!
참고로 12번. '츄소봐니아 강' 사진에서 강물에 기름띠 같은 게 줄줄 보이는 이유는.. RGB별로 사진이 찍히는데 간격이 길어서 시시때때로 변하는 물결 모양으로 인한 불일치가 생겼기 때문이다.

1910~1911년이면 아문센과 스콧 일행이 남극에 갔던 시기와도 비슷한데 이때 남극의 모습이 컬러로 찍혔으면 어땠을까 싶다. 하지만 그 극지에 컬러 사진 촬영을 위한 막대한 양의 장비를 들고 다니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글 주제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사진 하니까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덧붙인다.
요즘처럼 영상 자료가 넘쳐나는 “seeing is believing” 시대에 실물이나 합성 사진이 아니고, 그렇다고 CG도 아닌 진짜 생그림으로 어떤 사건을 묘사했다고 하면.. 그건 십중팔구 뭔가 안 좋고 심각한 내용이다. 특히 인권 유린과 관계가 있는 것들이라는 걸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린애가 자기를 성폭행한 가해자를 묘사했다거나, 탈북자들이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증언한 것, 파륜궁 수련자에 대한 고문 장면 등.
사진을 남길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이고, 그렇다고 CG로 재구성을 하기에는 민망하고 돈도 안 되고 인권· 초상권이 침해되는 영역이니까.

물론, 난징 대학살이나 일본군 생체실험, 나치 수용소 같은 건 사진이 전해지긴 한다. 그건 그 집단이 정말 전부 맛이 가 있었으니까 가능한 일이고, 그나마 컬러 사진이 충분히 보급되기 전의 옛날 이야기이다. 인류 역사상 그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터이나 현실은 지구 어디선가 아직도 그런 일이 있는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10 08:17 2014/10/10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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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업무 때문에 구질구질한 재래식 Windows API 기반 네이티브 데스크톱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련의 신문물들을 접할 일이 있었다. 바로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Windows Phone 플랫폼 개발 때문이었다.

1. Windows 8.1

Windows 8로 넘어가면서 부팅부터 UEFI라는 기술이 도입되면서 뭐가 좀 바뀌었다. 운영체제를 다시 설치하려고 부팅 디스크 탐색 순서를 바꾸려고 해도 BIOS Setup에서 좀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게 되었다.

Windows Phone 에뮬레이터를 돌리려면 역시 BIOS Setup을 들어가서 기본적으로 꺼져 있는 CPU 가상화 기능을 켜야 하며, OS도 아무거나 쓰면 되는 게 아니라 8.1 Pro 이상급이 반드시 필요하다. Hyper-V 기능이 home급에서는 지원 안 되고 Pro나 엔터프라이즈 급 이상부터만 지원되기 때문이다.
Pro 이상에서만 지원되는 대표적인 기능이 바로 원격 데스크톱 서버 기능인데.. 그런 비슷한 기능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요즘은 스마트폰 CPU도 PC와 별 차이 없을 정도로 굉장한 고사양이기 때문에 에뮬레이션을 위해서는 CPU 차원에서의 온갖 첨단 기능이 덩달아 필요해진 듯하다. 덕분에 이젠 가상 머신에서도 Windows Aero 효과가 돌아가는 세상이 되기도 했다.

Windows 8 이상의 그 각지고 단순해진 GUI를 보면, 비스타/7에 비해 퇴화한 것 같고 화면을 왜 저렇게 만들었나 싶은 생각이 처음에 들었다. Windows 8부터는 아시다시피 고전 테마가 없어지고 화면 scheme은 오로지 "표준 아니면 고대비"로 극도로 단순화됐다.
하지만 이젠 저것도 그럭저럭 적응이 돼 간다. 외형이 단순해진 대신, 단조로움을 덜기 위해 창틀의 색깔이 시시각각 변하는 기능이 생기기도 했고. ㅎㅎ

운영체제를 설치하는 중에 전체 화면에서 배경색이 서서히 알록달록하게 변하는 건, 마치 도스 시절 VGA mode 13h에서 전체 화면 게임 프로그램이 팔레트 스크롤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 Visual C++ 2013

외형이 별로 바뀐 게 없고 시간 간격도 2012에 비해 겨우 1년 차이밖에 안 나는지라 변화량을 만만하게 봤었는데, 실제로 써 보니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다. 아기자기한 기능들이 많이 강화되고 좋아졌다.

색깔 scheme이 하양과 검정 말고 '파랑'이 하나 더 생겼는데 파랑은 옛날의 우중충한 2010 분위기를 내는 스타일이어서 개인적으로는 비호감.
운영체제의 기본 컨트롤을 쓰는 게 아니라 모든 걸 자기가 직접 그린다는 특성상, 스크롤 바가 굉장히 똑똑해졌다. cursor가 속한 줄 위치가 스크롤 바에도 언제나 표시되어 나오고, 스크롤 중에 페이지 썸네일을 표시하는 기능도 있다.

옵션(프로젝트 옵션과 프로그램 옵션 모두) 대화상자가 드디어 크기 조절이 가능해졌으며, C++도 코딩 중의 자동 서식과 자동 완성 기능이 제법 강화되었다.

Visual Studio (C++ 포함)는 지난 2005 버전 때부터 Express라는 무료 버전이 정식으로 배포되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플랫폼 SDK(= 무료 배포)도 자체적으로 컴파일러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것까지 express 에디션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상업용 버전과는 달리 2013 Express 버전은 Windows 8용 Metro/Phone 앱만 만들 수 있는 'for Windows' 에디션과, 예전의 재래식 native 프로그램만 만들 수 있는 'for Windows desktop' 에디션이 따로 나뉘었다.

3. C++/CX

드디어 그 이름도 유명한 '요물'을 만져 보게 됐다. 처음에는 단순히 C++을 닷넷용으로 마개조한 Managed C++와 C++/CLI의 후신인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C++/CX와 Windows RT API는.NET 내지 C++/CLI하고 무늬는 비슷하지만 내부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어, 옛날의 C++/CLI에서는 일반 C++ 개체(new)와 관리되는 새로운(__gc new) 개체는 서로 has-a 관계조차도 맺을 수 없었다. 취급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개체를 다른 개체의 멤버로 가질 수 없었다는 뜻이다. C++/CX는 그런 제약이 없다.

.NET 그쪽 바닥은 전통적인 바이트코드 기반 런타임이지만 C++/CX는 엄연한 네이티브 코드 기반이다. 가장 큰 차이로 후자에는 garbage collector가 없다. ref new로 할당하는 ^ 라는 이상한 포인터가 있긴 하지만 얘는 내부적으로 그냥 레퍼런스 카운팅으로 관리될 뿐이다. .NET과 비슷한 API를 차용하고, C#에서 partial도 가져오고 델리게이트나 boxing 같은 것도 가져왔지만, 내부는 여전히 native라는 게 참 인상적이다. 게다가 이제 퇴물 신세가 됐나 싶던 COM 인터페이스까지 다시 끄집어냈다니!

Visual C++ 200x 시절에만 해도 이제 MS가 C++을 버렸네(특히 MFC!!), 네이티브 코드 시절이 끝났네, 심지어 Windows 차기 버전은 닷넷 같은 바이트코드 기반으로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다네 하는 온갖 낭설이 떠돌았는데.. 201x로 와서는 그런 낭설이 완전히 불식된 듯한 느낌이다. MFC는 2008 feature pack 때부터 잘 알다시피 환골탈태하였으며, C++ 언어 자체도 C++11 같은 온갖 확장 규격에 힘입어 한없이 강력하고 복잡해졌다. 거기에다 Windows RT의 코드 기반도 네이티브 코드에 힘을 실어 줬으니 C++은 예나 지금이나 건재한 언어 인증을 하게 됐다.

이런 요물의 등장으로 인해 도리어 .NET의 위상이 굉장히 어중간해졌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GDI+도 너무 금세 버림받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고 말이다. 얘는 이제 하드웨어 가속 지원도 못 받는다니, 안티앨리어싱이 되는 그래픽이 필요하다면 얄짤없이 Direct2D라도 새로 공부해야 하게 생겼다.

뭐 내부 메커니즘이야 어떻든, 네이티브 코드 C++에서도 delete 따질 필요 없이 new를 막 남발해도 된다는 게 무척 신기하며, 마치 자동차로 치면 수동을 몰다가 자동을 모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세상에 다 썼으면 반드시 반납을 해야 하는 리소스가 메모리만 있는 건 아닌데, 파일이나 다른 커널 오브젝트들은 어떻게 관리되며 생명 주기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질 때도 있다. 참고로, 레퍼런스 카운팅도 GC에 비해서 마냥 가볍고 편리하기만 한 물건은 아니며 약점이 있다.

Windows RT API들은 정말 복잡한 namespace와 클래스, 추상 계층들이 넘쳐난다. 지저분한 Windows API를 정말 허접하게 감싼 MFC 정도를 생각했다가 요즘 프레임워크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다.
멤버뿐만 아니라 클래스 자체에다가도 public 같은 접근성을 지정할 수 있으며, 더 상속이 안 되게 하는 sealed 속성을 줄 수 있다. 일반 C++에서는 허용되지만 C++/CX에서는 “무슨 클래스에서는 생성자가 public이어서는 안 된다, 데이터 멤버가 뭐여서는 안 된다”는 식의 까다로운 제약도 굉장히 많아서 처음엔 답답함을 느꼈다. (상속이라는 게 없는 언어에다가도 클래스를 제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들어간 제약이라 함.)

이 기회에 delegate라는 게 뭔지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선언 자체는 C++로 치면 함수 포인터 내지 멤버 함수 포인터에 대한 typedef를 선언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며, 이놈의 인스턴스는 따로 new로 선언해야 한다. 그때 생성자에다가 다른 함수 명칭라든가 람다 함수를 집어넣어 주면 된다.
람다의 경우 this를 캡처로 주면 자연스럽게 멤버 함수도 대리자가 될 수 있으니 매우 유연하다. 물론 그 유연성은 성능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이겠지만 말이다.

Windows RT API에는 비동기적으로 행해지는 동작이 많으며, Concurrency Runtime 라이브러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표준 C++ 라이브러리의 일부인 모양인데 create_task에다가 할 일들을 넣어 주고, 그 일이 반드시 다 끝난 뒤에 수행할 일은 저 함수의 리턴값에다가 .then 메소드를 호출하고 거기에다가 또 람다 형태로 넣으면 된다. 기본적으로 코딩 패턴이 그러하다.
.wait 메소드를 이용해서 동기화를 시켜도 되지만, 이 경우 Windows Phone은 UI 스레드까지 멈춰 버려서 데드락이 발생하는 듯하다. 참고로 C#의 경우 언어 차원에서 await이라는 전용 키워드가 존재한다고 함.

도대체 저 라이브러리는 어떻게 구현되었나? 소스 내부에 CreateThread, WaitForSingleObject 같은 Windows API라도 썼는지 궁금했지만.. 디버거로 내부 추적이 전혀 되지 않을 뿐더러 온갖 암호 같은 복잡한 템플릿은 도저히 분석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분석을 포기했다.
아무튼, C++은 람다 함수가 도입되어서 코드를 값으로 집어넣는 게 가능해지고, 이게 템플릿과도 결합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예전의 C++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무궁무진한 활용이 가능해지긴 했다.

Windows RT 환경에서는 재래식 Windows API는 쓸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럴 수 없는 것도 있다. 이걸 일일이 다 분류하는 것도 마소의 엔지니어들의 입장에서는 엄청 고된 일이었겠다.
실행을 잠깐 멈추는 Sleep 함수도 누락되고 없기 때문에 Concurrency::wait를 써야 한다고 한다. 난 저걸 알기 전에는 이벤트 오브젝트를 만들어서 WaitForSingleObjectEx 함수를 쓰곤 했다.

끝으로, Windows RT의 C++/CX 환경은 네이티브 코드를 표방하는 관계로 재래식 static library와 DLL을 모두 만들어 쓸 수 있다. 단,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static library의 경우 링커가 경고를 띄운다. 그건 오로지 같은 C++ 프로젝트에서만 활용 가능하니 재사용성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RT 환경에서는 Windows Runtime Component라는 특수한 형태의 DLL을 만들어서 코드를 재사용하는 것이 권장되는 방법이다. Windows RT계의 COM 같은 물건인데, 그렇다고 COM 정도로 문법이 크게 제약되고 경직된 건 아니다. C#으로 표현 가능한 언어 요소들을 모두 표현할 수 있고, 아무래도 원시적인 인클루드와 라이브러리보다는 더 깔끔한 빌드/재사용 시스템인 듯하다.

이런 것들을 경험하고 나니 뭔가 미래에 갔다 온 듯한 느낌이었다.
XAML은 Win32 개발로 치면 rc 파일 같은 것이고
public ref class는 Win32에서 __declspec(dllexport) 같은 건가?

예나 지금이나 완전한 형태의 Windows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슨 언어든 문법 확장이 불가피했지만 지금은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고 더 노골적으로 하는 듯하다.
시대를 불문하고 불변인 자기만의 전문 영역이 있어야겠지만, 한편으로 최신 시대 조류도 놓치지 말고 따라갈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독립 개발자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계신 깁뿔 님께서 오래 전에 Windows 8 개발 공부를 하면서 올려 놓으신 팁들을 이 기회에 뒤늦게나마 유용하게 활용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07 08:36 2014/10/0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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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카메라 이야기

디지털 카메라는 20세기 말~21세기 이래로 세상의 문화 풍조를 바꿔 놓은 혁신적인 물건임이 틀림없다.
그 전까지는 컴퓨터 화면에서 사진이라는 걸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비디오 디스플레이 기술은 더 오래 전에 트루컬러급으로 발전했지만, 실사 사진을 얻는 방법은 TV 화면 수신이라든가 스캐너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실사급의 그래픽을 자랑하는 게임이 상대적으로 더욱 신기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랬는데 지금은 정말 개나 소나 아무나 손쉽게 주변으로부터 사진을 얻을 수 있으며, 이를 혼자만 저장해 놓고 보는 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방방곡곡으로 알리고 퍼뜨릴 수 있게 됐다. 정지 사진으로도 모자라서 동영상까지 그 자그마한 기계로 가능하니 어지간한 소형 캠코더 역할까지 한다. 이로써 1인 미디어, UCC 같은 게 출현 가능해졌다. 그리고 필름 카메라와 카세트/VHS 같은 아날로그 시청각 매체는 급속히 퇴물로 전락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동영상은 용량이 크고 통신 트래픽이 방대한 관계로 인터넷 상에 올릴 데가 마땅찮았다. 그래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영상은 깨진 링크도 무진장 많았다. 그러나 유튜브 같은 전세계급 동영상 포털이 등장하면서 이마저도 옛말이 되었으니 참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하나 보려고 Media Player ActiveX 컨트롤을 까네 마네 하던 시절도 참 아련한 추억이 돼 간다. 플래시가 버전 7부터 flv 재생 기능이 추가된 것이 한 10여 년 남짓 전의 일인데, 이게 또 세상을 바꿔 놨다. 당장 유튜브가 이 기술을 기반으로 출현했으니 말이다.

본인이 최초로 사용해 본 디지털 카메라는 2002년인가 삼성 디지맥스라는 100만대 화소의 완전 초창기 골동품이다. 그때 이후로 디지털 카메라는 화소 수 증가 경쟁이 시작되었다. 수 년 뒤에 구입한 다음 카메라는 300만대의 화소에 간단한 무음 저품질 동영상 기능이 추가되었고, 그것 다음에 구입한 카메라는 이제 동영상까지도 그럭저럭 MPEG-2 급의 화질은 나오는 물건이 되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보급형 중저가 디카 급의 사진과 동영상은 카메라를 들고 다닐 필요도 없이 스마트폰만으로도 척척 만들어 내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 종래의 디지털 카메라는 폰카로는 만들 수 없는 DSLR급의 고퀄 등급에서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사진 분야에는 워낙 전문가 매니아들이 많으며, 고성능과 저성능 장비의 퀄리티 차이도 충분히 크기 때문에 그 업계가 망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본인은 원래는 그런 분야에 전혀에 가깝게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철도 촬영 때문에 카메라와 사진 같은 쪽에 그래도 일말의 식견은 생겨 있다.
성능이 안 좋은 카메라는 다음과 같은 한계가 존재한다.

※ 시야

1. 아무래도 시야각이 사람 눈보다는 작은 관계로, 넓은 장면을 한번에 담기 어렵다. 본인은 미국 가서 그랜드 캐년을 보면서 이걸 절실히 느꼈다. 이래서 파노라마 사진이라는 테크닉이 존재하는구나!

2. 또한 사진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상이 둥글게 휜다. 본인은 철길을 촬영하면서 아래의 레일이 둥글게 휜 걸 보고 이런 현상을 느꼈는데, 초소형 몰래 카메라 같은 건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한 걸 볼 수 있다.
사진이라는 건 컴퓨터그래픽에서 다루는 것처럼 사물들이 딱 rotation, projection을 거쳐서 정확하게 2차원 평면에 그려지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0차원의 점에 속하는 렌즈가 빛을 모으는 형태이다 보니.. 중심에서 먼 곳일수록 휘는 게 불가피한 듯하다. 옛날에 브라운관 TV/모니터만 해도 평면을 만들어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빛을 모으기

3. 카메라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빛을 모으는 기능은 기계가 사람의 눈보다는 확실히 부족하다.
그래서 야경, 밤하늘의 별 내지, 명암 윤곽까지 보이는 선명한 보름달을 찍으려면.. 어지간히 좋은 장비와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닐 것이다. 노이즈를 감수하고라도 노출 시간도 굉장히 길게 잡아야 한다.

사실, 태양이나 목성, 토성 같은 천체의 사진은 실제로 사람이 우주 탐사선을 타고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당장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다. 태양의 경우 어마어마한 넘사벽급으로 광량을 줄여서 찍은 것이고, 반대로 외행성들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어마어마하게 빛을 모으고 또 모아서 보정하여 그런 이미지를 얻은 것이다.
광량을 그렇게 줄였기 때문에 태양이 그저 노랗게 보이고 흑점이 검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행성 관측하듯이 똑같은 광량으로 보면 태양은 흑점이고 뭐고 없이 그저 똑같이 맹렬한 흰 빛으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눈이나 카메라는 곧바로 상한다.

4. 사진을 많이 찍어 본 분들은 이미 충분히 경험하셨겠지만,
디카는 집이나 교통수단 안에서 “내부와 창밖 외부를 동시에 균형 잡힌 명도로 찍기”가 몹시 어렵다! 어느 쪽에 focus를 주느냐에 따라 창밖이 너무 밝아지거나 내부가 너무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디카만 그런지 필카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을 사진 용어로는 '명암차'라고 하며, 좋은 카메라는 그 명암차의 dynamic range도 크다고 한다.

※ 흔들림 보정

5. 예기치 않은 흔들림 때문에 사진을 망치는 일 자체는 어쩔 수 없다. 허나, 이게 흔들린 사진이라는 걸 디카의 조그마한 preview 화면만으로는 확대해서 봐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걸 애초에 알았으면 현장에서 촬영을 다시 했을 텐데, 출사를 다 끝내고 PC에서 사진을 큼직하게 확인한 뒤에야.. “에이 흔들렸잖아!” 이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blur된 이미지를 복원하고 카메라 차원에서 흔들림 보정 기술까지 등장해 있으니 이 역시 장비에 돈을 많이 투자하면 극복 가능한 장벽이긴 하다. 패턴인식 기술을 동원해서 “이건 흔들린 걸로 의심되는 사진입니다”를 감지하는 것도 어떠려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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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카메라의 특성을 알면, 사람의 눈이 얼마나 정교하고 대단한 신체 기관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바닥과 평행한 구도로 반듯하게 사진을 찍으려면 삼각대도 필요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액세서리들도 추가된다.
또한, 정지 사진을 찍는 건 마치 사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셔터는 방아쇠이고, 격발 시 흔들림 현상이 없으려면 영점을 잘 잡아야 할 테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4/10/04 08:29 2014/10/04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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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딩 신선놀음 중

오랜만에 근황 겸 내 사진이나 좀 투척하겠다. 이제 날짜상으로는 여름이 다 갔다지만 난 여전히 낮과 밤에 반팔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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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북한산 맑은 공기를 주입해 주면 코딩이 잘 되는 거 같다.. ㅋㅋ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느 전원 주택 2층 다락방에서의 신선놀음. 참고로 우리집 아님.

날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학교· 교회 등의 지인 한정으로나 의미가 있겠지만..
도대체 저 인간은 왜 어딜 가나 맨날 노트북 PC를 들고 다니고 게다가 인터넷조차 없이도 혼자 뭘 끄적거리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내 연구실을 오프라인 방문하는 걸 언제든지 환영한다.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컴퓨터 펼쳐 놓고 작업하고 있는 곳이 어디든지 연구실.
내가 지금 한글 입력에서 관심사가 무엇이고 뭐가 고민인지를 코드와 함께 친절하게 알려 드리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01 08:39 2014/10/0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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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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