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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24 예레미야서 분석 by 사무엘 (3)

예레미야서 분석

구약 성경에서 예레미야는 일명 '눈물의 선지자(대언자)'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며, 이사야서 다음에 나오는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의 저자이다.

앞의 책인 이사야서에서도 앞부분에 잠깐 민족의 타락 얘기가 나오지만 분량이 그리 많지 않으며 얘는 외국 민족에 대한 예언이 더 많다.
그 반면, 예레미야서는 외국 민족에 대한 예언은 뒷부분에 잠깐 나오는 게 전부이고 주 내용은 민족의 타락에 대한 책망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항복하고 바빌론으로 잡혀 가야 모두가 살 수 있다는 정치적인 얘기도 많다. 이 때문에 그는 당대의 동족들로부터 반역자라고 욕을 엄청 먹었으며 살해 위협을 받고 폭행, 투옥과 감금도 당했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의 히브리 음차 알파벳 철자는 Jeremiah이지만, 그리스어가 기본인 신약 성경에 가면 Jeremias와 Jeremy도 나온다. 뭐, 신약이라고 해 봤자 실질적으로 나오는 책은 마태복음밖에 없지만. Jeremy는 오늘날에도 영미권에서 인명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게 두 건 있다고 언급한다.
하나는 렘 31:15 “라마에서 애통하며 몹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를 인용한 마 2:17-18인데,
정작 구약 본문을 보면.. “엥? 그게 그 얘기예요? 이 문맥이 헤롯 왕의 유아 학살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요?” 싶은 생각도 든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그게 그 예언이라고 의미를 인위적으로 부여하지 않았으면 눈치를 채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본문 자체가 과거, 교리적, 예언적으로 굉장히 중의적으로 기록되기라도 했는가 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 27:9인데.. 이건 좀 더 어려운 문제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거라고 하나, 정작 예레미야서에는 예수님과 관련해서 은 30냥 인신매매 같은 걸 암시하는 구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토기장이? 예레미야서에는 18~19장 사이에서 토기장이가 빚는 토기 관련 퍼포먼스만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예수님이 은 30냥에 팔리는 것을 암시하는 예언은 스가랴서에 있다. (슥 11:12-13)

그럼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더구나 KJV 유일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이것과 거의 같은 패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KJV 이외의 다른 변개된 성경들이 잘못됐다고 까기도 했다.
바로 막 1:2-3 말이다. 거기에는 이사야서 인용도 있고 말라기서 인용도 있다. “이사야 + 말라기 = 대언자들(prophets)”이 돼야 맞는데, 변개된 성경에서는 말라기의 예언까지 싸잡아서 '대언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써 놨으니 이는 명백한 오류인 것이다.
애초에 이런 논리를 펴기까지 했으니 신구약간 예언 언급의 정확도에 대해서 KJV 빌리버는 민감하게 접근해야만 한다.

그러나 막 1:2와 마 27:9의 다른 점을 굳이 찾자면..
전자의 경우 명백하게 대언자들의 글이라고 written이라는 동사가 있는 반면, 마태복음의 예레미야 인용은 그냥 spoken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도 은 30냥 운운하는 예언을 하긴 했지만, 그건 구전으로만 전해졌을 뿐 예레미야서에 정식으로 기록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마치 예수님의 가르침 중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행 20:35)와 비슷한 급의 예외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저 말 역시 정작 사복음서에서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7:14)를 비롯해 50장, 53장 등에서 예수님 예언이 잔뜩 들어있다. 하지만 예레미야서는 관심사가 온통 바빌론 포로일 뿐, 딱히 예수님 예언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예외적인 힌트를 통해 예레미야 역시 그 먼 옛날에 예수님에 대한 여러 암시와 힌트를 받긴 했다는 추측도 할 수 있다.

그럼, 다음으로 예레미야서 자체의 특징을 좀 살펴보도록 하자.

1. 성경의 다른 책들에 대한 오마주가 생각보다 많다. 간단한 예로,

  • 1인칭의 자조적인 기도(느헤미야)
  • 악인의 형통에 대한 회의와 의문: 시편 73편, 하박국 1장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서에도 12장에 이런 내용이 있다.
  • 자기가 태어난 날에 대한 저주(욥기): 특히 20장 끝부분은 이거 예레미야서가 아니라 욥기 3장을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노골적인 분위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레미야서의 앞부분은 워낙 암울한 논조이기 때문에 저런 내용이 전부 등장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에스겔서 오마주라고까지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어서 아들까지 이가 시리다”라는 잘못된 조상 은덕/조상 탓 통념에 대한 반박이 렘 31:29와 겔 18:2에 같이 나온다.

또한 거짓 대언자와의 대결이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에 '미가야 vs 시드기야'를 기억하시는지? 예레미야서에는 28장에서 하나냐와의 대결이 나온다.
거짓 대언자 시드기야는 참 대언자 미가야의 따귀를 때리면서 도발을 했는데, 거짓 대언자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퍼포먼스 차원에서 걸고 있던 나무 멍에를 뺏어서 부러뜨리면서 “여러분 이거(= 예레미야의 말)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하나님은 바빌론의 멍에를 '이렇게' 꺾어 버리실 겁니다!”라고 선동질을 제대로 했다.

이런 개막장 분위기에 예레미야는 기도 안 차서 그냥 자리를 떠 버렸고.. 하나냐는 그로부터 두 달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천벌을 받아 급사했다고 성경에 나온다.

아울러, 예레미야서에는 사도행전을 오마주한 듯한 장면도 있다.
예레미야로부터 너무 과격하고 파격적인 메시지를 들은 뒤 사람들이 “이 자식 이거 어떡하면 좋을까? 예전에도 좀 똘끼 부리는 사람이 있긴 했는데 그때는 이렇게 됐었다” ... 처럼 '전례'를 따지고 드는 내용이 있다.
이건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유대인들 공회가 보인 반응과 매우 유사하다. 행 5:36-39와 렘 26:17 이후를 서로 비교해 보시라.

그 뿐만이 아니다. 성경에서 에티오피아 내시가 나오는 장면도 사도행전 8장과 더불어 예레미야 38장이며, 둘 다 긍정적으로 나온다. 전자에서는 내시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으며, 후자에서는 내시가 예레미야를 구출해 준다! 하나님 역시 그 내시에게 보상을 해 주셨다(렘 39:16-18).

2. 예레미야서에서 대표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단어 내지 관용구로는

  • 칼, 기근, 역병 sword, famine, pestilence 3종 콤보 세트
  • 일찍 일어나 ...하기 rising up early and ...ing
  • backsliding(타락하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예레미야에서만 압도적으로 자주 쓰인다.
  • unpunished: “니가 아무 벌도 안 받고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문맥에서 몇 번 나온다. 이 단어는 잠언과 예레미야서에서만 나온다.
  • horrible thing: “그 땅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졌도다.” (렘 5:30) 요즘 식으로 치자면 충격과 공포 정도 되겠다.

이 정도가 있다.

3. 이 책에는 했던 말 반복 패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서는 성경에서 주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라는 말이 나오는 유일한 책인데, 23:6과 33:16에 걸쳐 반복해서 등장한다.

상처를 조금만 고쳐 주고는 평안이 없는데 평안 드립을 치는 것: 6:14와 8:11에서 반복된다.
도벳에 있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앞으로 '살육 골짜기'라고 불릴 것이다: 7:32와 19:6에서 반복된다.
그 많은 기적이 행해졌던 이집트 탈출 사건보다도 바빌론 귀환 사건이 더 큰 기적이라고 알려질 것이다: 16:14-15와 23:7-8에서 반복된다.

여러 이방 민족들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뒷부분에서도 49:18-20과 50:40,44-45처럼.. 뭔가 copy & paste 같은 느낌이 드는 표현이 심심찮게 발견되는데, 단어를 하나씩 일일이 대조해 보면 완전히 같지도 않고 약간은 차이가 발견된다. 10:12-16와 51:15-19도 헛된 우상들을 까는 문맥에서 동일한 메시지 copy paste이다.

그리고, 열왕기하의 끝부분은 예레미야서의 끝부분과 같다. (왕하 25:27-30; 렘 52:31-34)
한편 역대기하의 끝부분은 바로 다음 책인 에스라서의 첫부분과 같다. (대하 36:22-23; 스 1:1-2)
그러니 역사서인 열왕기와 역대기는 책 자체에는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이 역시 각각 예레미야와 에스라가 기록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다소 설득력을 얻는다.

4. 이 외에 예레미야서에서 인상적인 부분

  • '하늘의 여왕'이 언급돼 있으며(7:18, 44:17-18) 크리스마스 트리를 까는 듯한 대목(10:3-5)이 나오는 유일한 책
  • '마음이야말로 가장 사악하다'(17:19), '옛 길로 가라'(6:16)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음
  • 일명 하나님의 전화번호라고 불리는 렘 33:3이 예레미야서에 있음

성경의 여느 역사서와 선지서들이 그렇듯이 예레미야서 역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에 대해서 혹독한 경고와 심판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렇게 멸망하고 끝인 게 아니라 이 하나님의 선민들은 나중에 반드시 회복되며, 이들을 징벌하는 도구로 쓰였던 민족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하게 굴었다가 아예 씨도 안 남기고 처절하게 망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결론이다.

“쟤들? 어차피 자기네 신 제대로 안 믿어서 저 꼴 난 거잖아? 그러니 우리가 마음껏 막 대해도 되지”...를 성경은 절~대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이스라엘 애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민족이니 꼴 좋지”이다. 반유대주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다. 우리 말고도 이스라엘을 싫어하고 괴롭히고 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이다가 덩달아 망할 악역들은 차고 넘치니 크리스천이 그런 데에 가담하지는 말아야 한다.

오죽했으면 네가 낮과 밤 천체 운동을 뒤집어엎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 회복 약속도 뒤엎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까지 성경은 말한다. (렘 31:35-37)
바빌론으로 70년간 포로로 끌려가더라도 “일단 항복만 하면 니 목숨은 내가 절대 보장한다. 무슨 여행, 요양이라도 다녀 오듯이 잘 갔다 오너라”이다.

사람 인생에서는 잠깐 갔다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여행이 영원히 못 돌아오는 단절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1차 세계 대전, 6·25 전쟁 중의 1·4 후퇴, 그리고 이 승만 대통령의 하와이 요양 등..
그런데 바빌론 포로 귀환은 이런 추세를 정면으로 역행하는 사건이다. 이때는 이집트의 10재앙 같은 것도 없고, 모세 같은 넘사벽급의 걸출한 지도자가 없는데도! 그래서 이 사건이 모세의 기적을 능가하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이렇게 생각할 거리가 많을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도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불과 쇠망치에다 비유하였으며(23:29), 말씀 변개(perverted the words of the living God)에 대한 언급(렘 23:36)이 있기 때문이다. 36장과 끝부분에서는 성경 자필 원본이 소실되는 장면도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24 08:24 2014/10/2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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