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0년쯤 전에 도스용으로 만들어졌던 프로그래밍 툴 중에는 자기 언어로 만들어진 예제 프로그램으로 그럴싸한 게임을 제공하는 경우가 있었다.
QBasic의 경우, 포트리스 내지 Scorched Earth와 비슷한 형태의 턴 기반 슈팅인 '고릴라'가 유명했으며.. 길다란 뱀을 사방으로 적절히 조종하면서 아이템(?)을 먹는 퍼즐인 nibbles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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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을 먹을수록 뱀은 길이가 더 길어지며, 머리가 벽은 물론이고 자기 몸통과도 부딪치지 않도록 조종을 잘 해야 한다. 그리고 레벨이 올라갈수록 뱀의 이동 속도가 더 올라가고 장애물도 더 많아져서 게임 진행이 더 어려워진다.
영문판 원판은 80*25 텍스트 화면에서도 아스키 그래픽 문자를 적절히 이용해서 글자 한 칸을 상하로 쪼개어 세로 공간을 두 배로 늘리는 편법을 구현했다. 하지만 한글판에서 제공된 nibbles는 문자 코드의 한계로 인해 그런 게 다 삭제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마소 말고 볼랜드 개발툴에서 제공한 예제 프로그램 중에는 가히 이 분야의 끝판왕이 있었다. 번듯한 체스 게임이 컴퓨터 AI까지 포함해서 소스가 통째로 제공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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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기억하는 분 계신가..?
그런데 이게 bgidemo보다 훨씬 덜 유명하고, 본인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얘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아무 버전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예제는 아니었기 때문이지 싶다.
즉, 보급형인 Turbo가 아니라 기함급인 Borland라는 브랜드가 붙은 C++ 내지 Pascal을 설치하고, Windows 개발 환경에다 자체 프레임워크 라이브러리까지 다 선택해야 얘를 구경하고 돌려볼 수 있다.

이 예제 프로그램의 이름은 볼랜드에서 개발한 C++용 Windows API 프레임워크의 이름을 딴 OWL Chess였다.
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Turbo Vision 기반의 도스용 체스 예제도 있었다. 체스판과 말을 그래픽 모드가 아니라 텍스트 모드에서 꽤 기괴한 색과 특수문자를 동원해서 표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확한 내역은 너무 오래돼서 잘 모르겠다.

Windows용 OWL Chess는 이런 식으로 동작했던 걸로 본인은 기억한다.

  • 16비트 전용이다. 32비트 에디션에도 포함됐다거나, Delphi 및 C++ Builder 같은 후대의 컴포넌트 기반 RAD툴로 리메이크 됐다는 소식은 내가 아는 한 없다. 그러니 얘는 Windows XP에서 실행됐을 때도, 저 스크린샷에서 보다시피 프로그램의 제목 표시줄에 테마가 적용돼 있지 않다.
  • 역시 저 스크린샷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창 크기는 고정 불변이다. 요즘처럼 모니터가 크고 화면 해상도가 높은 시대엔 크기 조절이 안 되는 프로그램은 사용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려울 것이다.
  • 키보드 포커스가 딴데로 넘어가서 프로그램이 비활성화 되면 즉시 게임판이 가려지고 pause 모드로 바뀐다.
  • 컴퓨터 AI는 1990년대의 바둑 같은 보드 게임 AI들이 그랬던 것처럼 규칙 기반으로 move를 평가하고, 재귀적으로 수읽기를 하면서 알파-베타 가지치기로 복잡도를 제어하는 식으로 구현됐다. 생각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지만, 멀티스레드라는 것도 없던 시절에 이 동작이 찔끔찔끔 idle time processing만으로 잘 만들어져 있다. 컴퓨터의 생각이 현재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는지가 수시로 현란하게 시각적으로 표시되기 때문에 지겹지 않다.

하긴, 1990년대 초중반에는 프로그래밍깨나 공부 좀 한 사람들이 도스의 그래픽 모드에서 아기자기한 오목· 장기 게임을 구현해서 PC 통신 자료실에 무료로 공개한 게 많았다. 아, 심지어 화투 치는 고도리...도 그 시절부터 있었다.
또한 그 시절에 유명한 프로그래밍 기술 간행물이던 '비트 프로젝트' 시리즈에도 초창기엔 Borland C++로 개발한 Windows용 장기 게임이 있었다.

지금이야 국내에서 유료 판매까지 되고 있는 장기 게임 프로그램으로는 '장기도사'가 있다. 하지만 그 전에는 '바다장기'라는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얘가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원조 OWL Chess의 소스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프로그램의 외형과 동작이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다장기도 검색을 해 보면 16비트스러운 스크린샷밖에 안 나오는 게 더욱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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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서양의 체스와 동양의 장기가 완전히 동일한 게임은 아닐 텐데, 체스 AI를 장기 AI로 룰을 개조하는 건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판 AI 코드도 move를 기술하고 평가하는 룰 계층만 바꿔 주면 어지간한 보드 게임의 AI에 모두 대응 가능하도록 상당히 추상적이고 깔끔하게 잘 만들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바다장기는 AI를 '추론 엔진'이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했다.

일개 예제 프로그램의 체스 AI가 전문 상업용 AI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어디인가? 지금 저 프로그램의 소스를 다시 볼 수 있으면 보드 게임 AI의 구현과 관련해서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얘의 소스만 어디 github에 따로 올라와도 될 텐데 말이다.
본인은 체스는 룰조차도 모르지만.. 그래도 학창 시절에 오목과 스크래블이라는 보드 게임 AI를 연구했던 이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이런 쪽에 더욱 흥미를 느낀다.

Posted by 사무엘

2021/03/17 19:35 2021/03/1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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