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먼 옛날.. 특히 성경 시대

(1) 처음엔 병거라는 게 운용되다가 나중에 군인이 직접 말에 타는 걸로 바뀌었다.
모세 일행을 추격하러 나섰던 이집트 군대, 엘리야의 승천 장면.. 그러다가 요한계시록의 말 탄 자들
안장과 등자가 발명되고 말이 품종 개량되어 덩치와 체력이 커진 덕분이다.

(2) 옛날의 공성전의 후신이 오늘날로 치면 참호전 정도 되겠다.

(3) 그러고 보니 성경에는 수많은 전투 장면이 나오지만, 딱히 해전이 기록돼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나마 요나서와 사도행전이 바다 냄새 풍기는 스토리가 많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평범한 항해와 난파 얘기이니까..

1. 육군, 총기

(1) 주 무장이 냉병기에서 화약 총포로 바뀌면서, 군인과 무인은 영역이 달라지고 차이가 더욱 커졌다. 무인과 가깝고 개인의 피지컬이 크게 부각되는 병과는 특수부대나 저격수, 공작원 같은 쪽으로 세분화되고, 장교보다는 부사관의 성격이 강해졌다. 큼직한 방패나 금속 갑옷이 없어지고, 방어구는 방탄모나 방탄조끼 정도만 남았다.

(2) 1700년대까지만 해도 군인들이 빨강 파랑 등 화려한 군복을 입고 직접 전장에서 싸웠지만(나폴레옹, 미국 독립전쟁 등).. 지금은 그렇지 않고 그냥 활동하기 편하고 위장 잘 되는 칙칙한 색상으로 전투복이 싹 바뀌었다. 이젠 계급장이 눈에 너무 잘 띄는 것조차도 실전에서는 위험한 지경이니까.. 무연화약이 발명되고 개인 각개전투가 가능해진 덕분이다.
화려한 군복은 사관생도 예복으로나 남아 있다. 제식이나 총검술 같은 그냥 옛날 군대 legacy이다.

(3) 총이 발명되기는 했지만,
옛날에는 화약 가격이 그렇게도 비싸서 천하의 영국군 레드코트조차도 실탄 쏘는 훈련을 평소에 좀체 못 할 정도였다고 한다.
훗날 1차 세계 대전 때는 유대인 과학자 ‘하임 바이츠만’이.. 화약 만들 때 필요한 아세톤을 쉽고 저렴하게 합성하는 기술을 개발해서 나라를 구하고 영국의 승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4) 공용화기인 기관총 말고, 개인화기가 방아쇠를 누르고만 있으면 두두두두 갈겨지는 ‘자동’ 모드까지 지원하기 시작한 지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총은 전문적인 기관총이 아니기 때문에 방열 능력에 한계가 있는지라, 정말 1시간 동안 계속 갈기고 있을 수는 없다.

19세기 사람들은 기관총만 갖고도 너무 놀라서 이제 사람들이 무기의 위력이 너무 무서워서 전쟁을 선뜻 못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실제로는 기관총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고, 나중에 핵무기까지 발명된 뒤에야 진짜 현타가 찾아오게 됐다.

권총은 작아서 불순한 용도로 은닉하기 쉽기 때문에, 군용 소총은 사정거리 길고 위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규제가 심하다. 민간인이 수렵이나 호신 용도로 그나마 가장 쉽게 구경하고 보유할 수 있는 총은 위의 두 속성과는 거리가 먼 산탄총이다.
권총은 경찰에게 적합하다. 군대에서는 빈약한 보조 무장에 지나지 않지만, 경찰에게는 그게 삼단봉이나 테이저 건 다음으로 최후에 등장하는 최강의 무력이다.

2. 해군

(1) 목재 범선 시절에는 배수량 겨우 몇백 톤짜리 작은 배에 수십 명의 선원이 타고 대양을 건너고 이걸로 심지어 전투도 벌였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그 시절 화력으로는 배를 통째로 다 파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적선에다 다리 놓고 쳐들어가서 배에서 백병전 벌여서 승무원들만 제압하고, 배는 노획하거나 심지어 빼앗겼던 배를 도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공성전이나 시가전이 건축물 대신 배에서 벌어지는 거나 마찬가지.. 요즘 같으면 적군이 아니라 그냥 테러리스트나 해적과 싸우는 것하고 비슷한 양상이다. -_- 배를 통째로 격침시켜서는 안 되고 인질도 보호해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하긴, 옛날에는 해군과 해적의 구분도 지금만치 분명하지 않았고, 국가 공인 해적인 사략선 같은 조직도 있었다.

(2) 옛날 범선 시절엔 대포들이 배 옆구리에 일렬로 쭈욱 늘어서 있었으며, 그 구조상 위로 발포는 불가능했다.
이런 배를 전열함이라고 불렀는데, 배의 재질이 철로 바뀌고 동력원이 돛 대신 엔진으로 바뀌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전함이 등장했다. 20세기가 돼서야 함포가 밖으로 돌출돼 나오고 구경이 더 커지고, 나름 고각으로 대공 발포도 가능해졌다.

(3)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해전에서는 포의 사정거리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했다. 바다야말로 아무 지형 장애물이 없으니, 우리는 안 맞고 적은 맞을 수 있는 사정거리에서 포 쏴서 맞히면 장땡이었기 때문이다. 포의 사정거리를 올리려면 배가 커져야 했다.
물론, 적선이 아예 보이지도 않고 지구의 둥근 곡률을 실감할 정도로 수십~수백 km 이상 아득히 먼 곳에서 쏘는 수준은 아니었다.

(4) 러일 전쟁 시절엔 전투기 폭격기라는 게 사실상 없다 보니, 러시아 발트 함대가 인도양 건너 무려 7개월을 항해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왔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삽질인 것 같은데..??
러일 전쟁은 육군의 203 고지전과 해군의 쓰시마 해전이 같이 존재하는 것도 그렇고.. 양상이 굉장히 특이했다. 40여 년 뒤에 소련군이 일본 관동군을 박살내는 방식은 그때와는 또 완전히 달라졌다.

오늘날은 핵무기가 너무 위력이 강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더는 이걸 갖고 경쟁을 하지 말자고 나라들이 조약을 맺게 난리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너도 나도 대형 전함을 개발하는 게 요즘으로 치면 핵 개발을 하는 것과 비슷한 군사 위협이었다. 그래서 강대국들은 우리 다같이 일정 배수량을 넘게 전함을 만들지는 말자는 조약을 서로 체결할 정도였다. 참 격세지감이다.

(5) 그러나 요즘 군함은 2차 대전 시절의 전함보다 오히려 다시 작아졌다. 엄청나게 거대한 배는 항공모함뿐이다. 그건 배가 직접 싸우는 게 아니라 함재기가 싸우는 거고..
항공모함을 표방하는 프로토스 캐리어와, 태평양 전쟁 시절 대형 전함을 표방하는 테란 배틀크루저의 관계가 더 잘 와 닿을 것이다. 후자는 심지어 포 이름조차도 ‘야마토’이다!!!
대형 전함은 대형 대륙 횡단 여객선과 동급으로 유행이 끝나서 퇴역했다. 하지만 해병대의 입장에서는 재래식 전함이 있어서 나쁠 게 없다. 상륙 작전 때 뒤에서 사정거리 수십 km에 달하는 함포를 펑펑 쏘면서 아군을 지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엄호 사격이 아닌 엄호 포격..!!

여담이지만, 군함뿐만 아니라 도로도 비슷하게 스케일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은 대도시라도 시내 도로를 예전처럼 너무 큰 10차로, 12차로 급으로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량 통행을 억제하고 보행자와 대중교통을 우대하는 쪽으로 도시를 설계한다.
시내 도로는 뭔가 전함 같고, 보행자가 아예 없는 자동차 전용 도로나 고속도로는 항공모함에 대응하는 것 같다. 차라리 후자는 전자보다 더 커질 여지가 있다.

(7) 그나저나 잠수함은.. 여느 수상함과는 성격이 좀 다르고, 육군 저격수 같은 특수 병과의 해군 버전 같은 느낌이 든다. 저격수의 바다 버전이랄까? 하긴, 저격수는 전투복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길리슈트를 입고 잠복한다.;;

3. 공군

(1) 2차 대전까지만 해도 전투기가 고작 왕복엔진 프로펠러기였다는 것, 원자폭탄을 미사일로 날린 게 아니라 유인 폭격기가 직접 투하했다는 것..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제트 엔진이라는 게 아직 제대로 상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태평양 한복판에서 항공모함 함재기끼리 싸운 전투만 해도 가히 그 시절로서는 SF급의 첨단 전투였겠지만,
적선 근처까지 직접 저공 비행해서 폭탄이나 어뢰를 떨궜던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는.. 뭔가 심하게 위험하고 삽질스러워 보인다. 저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이것도 다 미사일이란 게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로켓 엔진은 제트 엔진의 파생형이다.

(3) 적성국가에서 누가 적기나 적선을 몰고 귀순해 와서 그걸 갖다바치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보상이 주어지며 그 사람은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이런 캐이득 귀순을 적극 유도하고 장려하기 위해서이다.
그나마 배는 느리고 승무원이 많기라도 하기 때문에 돌발행동이 극히 어려운 반면, 전투기 같은 건 한두 명밖에 안 타는데 기동성은 넘사벽이다. 그러니 조종사가 나쁜 마음 품으면 그 비싼 국가 자산을 갖고 돌발행동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세계 각국에서는 수송기도 아니고 전투기 조종 정도면 간부인 건 너무 당연한 일이고, 부사관도 아니라 장교에게 맡긴다. 수백 kill을 자랑하는 인간흉기 최정예 저격수나 특전사 대원은 부사관이지만, 전투기 조종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허나, 구 일본군은 이런 어마어마한 전투기를 운용한 군인의 계급이 꼴랑 ‘병’이었던 유일한 군대이지 싶다. 다시 말하지만 전투기를 정비하는 군인이 아니라, 조종하고 그걸로 목표물을 공격하던 군인 말이다. 인류 역사상 유일하다.

(4) 해병대가 육군과 해군 사이에서 좀 짬뽕 같다면(병의 복무 기간은 육군과 동일하지만, 그래도 간부는 장교는 육사가 아닌 해사 출신).. 항공모함 함재기는 공군과 해군 사이에서 좀 짬뽕 같다. ㄲㄲㄲ
육군과 해군이 운용하던 항공대가 독립해 나가서 공군이 됐는데.. 미국은 아직 상징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이제 공군에서 우주군이라는 걸 따로 독립시키려는가 보다.

4. 여담: 총알과 포탄과 미사일

오늘날 바다에서 군함들이 서로 보이는 곳에서 총포를 주고받는 건.. 그냥 옛날 백병전이나 전열보병과 다름없는 짓으로 취급된다.
아니면 저건 우리나라 제2 연평해전 때 그랬던 것처럼.. 확전을 억제하려고 우리 쪽에서 비정상적으로 불리하게 봐 주고 먼저 얻어터져 줬을 때에나 벌어지는 일이다.

그것처럼 전투기에서 기총사격..?? 이건 뭐 육군으로 치면 대검이나 권총 딱총 정도의 초라한 무장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무장도 가끔은 필요할 때가 있고, 또 미사일 만능주의만 외치기에는 미사일은 너무 비싼 무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총포 같은 재래식 무장이 육해공을 막론하고 완전히 퇴출된 건 아니다.

  • 한번 동력을 얻어서 날아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엔진이 달려서 추진을 하면 그건 로켓이나 어뢰 같은 물건이 된다.
  • 날아가서 박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폭발해서 파편도 날리면 그건 단순 총알 탄환을 넘어서 수류탄이나 포탄, 폭탄이 된다.
  • 거기에다가 그냥 날아가는 게 아니라 목표물을 향해서 방향 전환까지 하면 그건 유도탄이나 미사일이라고 불린다.

Posted by 사무엘

2023/07/20 08:36 2023/07/2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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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수와 피난

작년 8월 여름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고, 나라 전체가 탈레반 집단에게 점령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50여 년 전, 남베트남이 망할 때와 상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저 나라는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뒤에도 역사가 참 파란만장했다. 한때는 여기에 웬 소련 공산당 빨갱이들이 들어와서 1980년 무렵엔 전쟁이 벌어졌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 등의 자유 진영에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대거 보이콧 했던 이유가 이 전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엔 여기는 이슬람 꼴통들 천지로 전락했다.
1970년대에 나라가 잘 살고 여성도 자유로운 복장으로 길거리를 활보했는데, 2010년대가 되니 옛날에 건물이 있던 곳은 폐허가 되고 여성은 부르카인지 히잡인지를 뒤집어쓴 답답한 복장으로 바뀌어서 혼자 함부로 길거리를 다니지도 못하게 됐다. 둘을 비교한 사진을 보신 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하면.. 약소국 신생 독립국들이 2차 대전 이후로 무작정 강대국으로부터 해방만 되는 게 장땡이 아니었겠다 싶다. 그럼 이제 식민지 착취나 인종 차별 같은 건 없겠지만, 그 뒤로도 내전이 벌어져서 동족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고, 식민 통치보다 더 악랄한 싸이코 폭군이 등장해서 나라 말아먹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당장 이북이 저 지경이 돼 있다. 그 반면 우리나라의 건국과 역사 흐름은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제아무리 천하의 미국 천조국이 쬐끄만 자유 진영 국가를 지원하고 도와준다 해도.. 그 지원 대상 국가가 도를 넘게 부패해 있고 자기들 스스로 자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사가 없다면 아무 소용 없다. 무기를 지원해 봤자 그 무기가 빼돌려지거나 심지어 적에게 넘어간다면 미국이라도 미쳤다고 그 나라를 도와주겠는가.

이 패턴은 우리나라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6 25의 극초반에는 군기가 잔뜩 빠져서 허겁지겁 후퇴만 하는 오합지졸 국군을 보고는 미국의 반응은 “이 자식들 노답~~”이었다. 후퇴 금지 즉결처분이라든가 제주도 망명 정부 계획이 최후의 수단 차원에서 괜히 나왔던 게 아니었다.

그랬는데 서울 한강 이남에서는 어느 무명 용사가 “저는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이 자리를 절대 뜨지 않고 지킬 것입니다. 부디 탄약을 더 주십시오”라는 명대사로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켰다. 다음으로 낙동강 전선에서는 무려 사단장이라는 백 선엽 장군이 야전에서 직접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날 쏴 죽여도 좋다” 이런 모습을 보였으니 미국도 다시 적극적으로 한국을 도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고, 얘기가 또 옆길로 많이 샜다. 다시 아프가니스탄 얘기로 돌아오면..
알고 보니 저 나라는 영해라는 게 없는 내륙국이더라. 어쩐지 그래서 탈출하는 사람들이 배가 아니라 수송기를 타려고 난리를 쳤던 것이었다.

그런데 비행기는 빠르기는 하지만 선박보다 수송 능력이 훨씬 부족하다.
그런 데다, 비행기는 타 교통수단과 달리 외벽 같은 데에 껴서/붙어서/몰래 짱박혀서 탑승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조건은 피난민에게는 굉장한 악재이다. 그래서 어디 못사는 나라에서는 어떻게 몰래 탔는지 “여객기의 랜딩기어 수납 공간에 어느 밀입국자가 숨진 채 발견” 이런 사건이 보도될 때가 있다.

그런데 하물며 비행기의 외벽에 끼어 탔다가 비행 중에 떨어져서 죽는 건.. 정말 희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건.. 9 11 테러 때 창 밖으로 뛰어내린 희생자 이후로 거의 20년 만에 처음 봤다.

2.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 화물기 추락 사고

지금 저 동네의 정치 시국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일이긴 하지만..
9년 전, 2013년 4월에는 무거운 미군 장갑차를 싣고 아프가니스탄 소재의 미 공군 기지를 이륙했던 보잉 747-400 개조 화물기가 갑자기 추락하는 대형 사고가 났었다. (내셔널 항공 102편 추락 사고) 원인은 화물 적재 불량이었다. (☞ 사고 영상)

육상 교통수단은 짐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가다가 짐이 떨어지는 바람에 “주변 차”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나 선박은 엄청 무거운 짐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비행/항해 중에 짐이 한쪽으로 쏠리고 기울어져서 자기가 추락이나 침몰 같은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저 사고의 경우, 비행기가 이륙해서 기수가 살짝 위로 들렸을 때.. 화물칸 장갑차의 결박이 풀려 버렸다.
15톤이 넘는 무거운 장갑차는 뒤로 굴러가서 벌크헤드를 쳐 버렸고, 이 때문에 비행기의 미익을 조종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무게중심이 기체의 뒤쪽으로 급격히 쏠리면서 기체의 받음각이 치솟고, 이로 인한 항력도 엔진의 출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올라갔다.
이 때문에 그 화물기는 이륙한 지 얼마 되지도 못해서 실속에 빠진 채 지상으로 힘없이 추락했다. 승무원 7인 전원 사망.

추락하지 않았더라도 조종을 못 하니 1985년의 JAL123편 같은 꼴 나서 언젠가는 자세가 어긋나고 추락했지 싶다.
에.. 자동차에다 비유하자면 몇십 톤짜리 강철 코일을 실은 트레일러가 겁도 없이 교차로에서 고속 급선회를 하다가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강철 코일 따라 차량이 통째로 옆으로 뒤집힌(전도) 걸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자동차는 그냥 뒤집히는 걸로 끝나지만, 비행기는 양력을 잃고 추락한 것이다.
이제 앞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군용기 또는 미군에서 외주 준 민항기가 뜰 일은 없어지는 건가..?? 문득 저 사고 생각이 났다.

3. 전투기의 호위

지난 2018년에는 6· 25 사변 장진호 전투 현장에서 발견된 국군 전사자들 유해를 하와이에까지 가져가서 신원 확인 후, 다시 우리나라로 송환한 일이 있었다.
유해를 실은 수송기가 우리나라 영공에 진입하자 우리나라에서는 그에 맞춰 전투기들을 무슨 보디가드처럼 출격시켜 수송기의 양쪽을 엄호했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수송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이렇게 인사했다.

“오랜 시간 먼 길 거쳐 오시느라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 영상)

이게 영화나 드라마의 대사가 아니라 현실이었다니..

태양의 후예에서 “성공한 인질 구출 작전에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말씀입니까? 정치와 외교는 제 책임입니다. 우리 국민을 무사히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사처럼 사이다이고..
현충원에 있는 할배 묘지에 새겨져 있는 헌시 “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 있는 백성 되게 하시고”처럼 감동적이다. 그리고 2013년 레카 시절 국군의 날 기념식 영상처럼 뭉클하다.

지난 8월에 모종의 계기로 홍 범도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에도 전투기들이 똑같이 수송기를 호위했다. 이때는 3년 전에는 안 했던 섬광탄까지 폭죽처럼 쏴 줬다. (☞ 영상)
홍 범도는 독립군 활동을 하다가 자유시 참변을 겪고, 그 뒤엔 소련 인민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헤이그 밀사 중 하나였던 이 위종처럼 말이다. 소련으로 가긴 했지만 딱히 한국에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이나 북한의 건국과 연루된 것은 없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독립운동가나 6· 25 참전 용사의 유해가 귀환할 때 전투기 호위를 했는데, 지난 도쿄 올림픽 때 대만에서는 선수들이 귀국할 때 이런 이벤트를 시행했었다.
대륙을 꺾고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너무 기특하다면서, 귀국하는 선수들이 탄 여객기의 주위에 미라주2000 전투기를 네 대 띄워서 호위해 준 것이다. 총통 각하가 특별 지시를 내린 거라고 한다. 공군이 이런 의전에도 동원될 때가 있는 셈이다.

4. 세계에서 제일 큰 비행기의 최후

인류가 만들어 낸 역대 가장 거대한 비행체야 나치 독일 시절의 힌덴부르크 비행선이다. 허나, 부력이 아닌 양력으로 날면서 가장 많은 payload를 싣고 이륙 가능한 세계 최대 비행기는 바로.. 구소련에서 지난 1988년에 개발했던 An-225였다. 여객기가 아니라 화물기 겸 군 수송기 용도로 만들어졌다.

얘는 그 큰 보잉 747은 말할 것도 없고, A380보다도 더 컸다. 요즘은 저런 4발(엔진 수) 비행기조차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단종되는 추세이지만 An-225는 무려 6발이었다. 그리고 예비용 자매기가 구소련의 붕괴 시국으로 인해 끝내 만들어지지 못한지라, 얘는 동형의 다른 기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유일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워낙 덩치가 큰 덕분에 부란 우주왕복선도 실어 나르고 다른 여객기의 벌크헤드 같은 대형 부품도 수송하고..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30년 넘은 낡은 비행기이다 보니 내부 기기들이 지금 관점에서는 낙후했으며, 조종을 위한 승무원이 좀 많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세계의 항덕들이 주목해 온 이 역사적인 비행기가 그만 소실되었다. 다른 사고도 아니고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 수리 불가능한 손상을 입고 대파 당했다. 비행 중 격추는 아니고, 공항 격납고에 가만히 주기 중이었는데 공습을 받아 같이 박살 난 것이다. 전쟁이 야기한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5. 우리나라 내부에서의 최대 항공 사고

그나저나.. 우리나라 국적의 여객기가 옛날에 겪었던 네임드급 사건· 사고로는 북괴가 저지른 대한항공 858편 폭파(1987), 소련에 의한 007편 격추(1983), 괌에서 801편 착륙 실패 추락(1997) 등 여럿 있다. 이것들은 사고 장소는 다들 외국이었다.
정작 대한민국 내부에서 벌어진 역대 최대 규모 항공 사고는.. 의외로 국적기의 사고가 아니어서 인지도가 별로 높지 않다. 바로 2002년 4월 15일에 악천후 속에서 부산 김해 공항에 착륙하려다 실패하고 인근 야산에 추락한 중국 국제항공 129편 사고이다.

이 사고로 승객 155+승무원 11명 중에 130명이 사망하고 36명만 살아남았다. 승객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이건 1993년에 발생한 아시아나 항공 733편 추락보다 더 큰 사고였다(68명 사망, 48명 생존).
이 두 사고는 지형 때문에 착륙 난이도가 높은 공항에다, 악천후와 조종사 과실까지.. 발생 원인이 서로 좀 비슷하다. 하지만 아시아나 733은 추락 후에 다행히 화재와 폭발이 없었던 반면, 저건 그렇지 않아서 더 처참한 사고가 되었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여객기 한 대의 추락만으로 무려 500명이 넘는 사람이 몰살 당했다거나..=_=, 천조국처럼 여객기가 납치 당해서 고층 건물과 충돌하는 엽기적인 일을 자국 내부에서 당한 적은 없다.
본인조차도 2002년 5월 25일, 대만의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추락 사고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작 저 사고는 한참 뒤 나중에야 뒷북으로 접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부산에서는 김해 공항을 대체할 더 크고 안전한 동남권 공항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게다가 김해는 군 공용이기까지 한 관계로, 민항기의 운용에 제약이 더 크다.
굉장히 오랫동안 진통이 많았는데 결국은 가덕도에 신공항의 건설이 확정되었는가 보다.
서울에 공항이 여의도-김포-인천의 순으로 확장되었다면, 부산은 공항이 수영-김해-가덕도의 순으로 확장되는 모양새이다.

한편, 우리나라 국적기에서 사망자가 수십 명 이상 발생한 심각한 대형 사고는 저 801편 사고 이후로 현재까지 20년이 넘게 전무하다.
메롱 상태인 나라 말고, 세계를 통틀어 나름 선진국의 플래그십 항공사가 낸 '마지막' 대형 사고 기록은 현재로서는 2009년 에어 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가 차지하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3/16 08:35 2022/03/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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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간 마후라

6· 25 때 육군이야 북괴를 상대로 힘싸움 땅따먹기를 직접적으로 하던 주역이었으니 각종 전투에서 대승하거나 참패한 기록들이 즐비하다. 이런 육군과 달리 해군과 공군은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았다.

애초에 북괴 공산군도 육군과 달리 해· 공군은 남한에 비해 그다지 우세하지 않았다. 해군의 경우 개전 초기에 '대한해협 해전'을 시작으로, 동· 서해를 막론하고 바닷길로 침투하는 공산군을 여럿 저지하는 전과를 올렸다. 섬들은 38선 이북 지역도 휴전 당시에 몽땅 국군과 UN군이 점령해 있기까지 했다.

다음으로 공군은? 대놓고 북괴 전투기 패거리와 공중전이 벌어진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땅에서 힘겨운 고지전 줄다리기가 계속되는 동안, 지상을 폭격하는 것으로 아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여럿 수행했다.
그 전과 중에는 1952년 1월 대동강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이 있다. 적진의 영공을 용맹하게 뚫고 들어가서 적의 보급로를 끊은 쾌거이며, 옛날 영화인 "빨간 마후라"가 저 작전을 모티브로 따서 만들어졌다. 무려 1964년작인데 컬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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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 참 오랜만에 들어 본다. 요즘 외래어 표기법이라면 그냥 머플러겠지.. 비후까스가 아니라 비프 커틀릿인 것처럼 말이다.
사람에게 다는 머플러는 목도리이고, 기계 엔진에다 장착하는 머플러는 소음기이다. 그리고 '빨간 마후라'는 영화 제목인 한편으로 동명의 영화 주제가가 그대로 공군 군가가 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그만치 파급력이 컸으며, 또 55년 전의 국산 영화치고는 꽤 잘 만들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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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에 "빨간 마후라"라는 관행을 최초로 만든 원조는 공군의 창군 멤버인 김 영환 준장(1921-1954)이었다고 한다. 어떤 일화가 계기가 됐는지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이미 여러 썰들이 나도니 검색해서 참고하시기 바란다.

2. 팔만대장경을 지킨 파일럿

그런데 이 사람은 도그파이트를 벌여서 적기를 수십 기 격추시킨 에이스라든가, 적진을 불바다 쑥밭으로 만든 전과가 아니라 다른 방면의 행적 때문에 훌륭한 군인으로 추앙받는다. 바로 1951년 8월 무렵, 빨치산 토벌 명령을 받고 출격했지만, 팔만대장경이 소장돼 있는 가야산의 해인사만은 목숨 걸고 항명하여 폭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관총으로 폭탄 대신 총알만 주변에다 퍼붓고 왔다.

이건 전술적으로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정규군끼리의 교전은 이미 38선 근처에서 엎치락뒷치락 고지전 형태로 귀착됐지만, 한 본토에 깊숙이 침투한 게랄라 빨치산들은 지리산 같은 험지에 숨어 들어가 짱박힌 바람에 쉽게 토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 속의 절간들은 놈들이 지내기 좋은 만만한 공간이었다.

산처럼 진군하기 힘들고 엄폐물이 많은 요새에 저격수가 숨어 있다고 치자. 그래서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총알 때문에 아군이 하나 둘 헤드샷 맞고 죽어 나가고 병사들의 사기도 곤두박질 친다. 이 와중에 저격수만 곱게 잡을 방법이 도저히 없다면 별 수 없다. 시간과 여건만 허락한다면 저격수가 있을 만한 곳을 몽땅 폭격해서 불바다로 만들고 모조리 무식하게 깡그리 밀어 버리는 brute force가 제일 확실하다.

현실에서는 지뢰나 시간폭탄만 해도 일일이 어렵고 위험하게 해체하지 않는다. 그냥 안전한 곳에 한데 옮겨 놓고 터뜨려 버리지 않던가? 이와 비슷한 이치이다. 저런 건 그 장치를 설치한 놈을 데리고 와서 족쳐도 해체를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산 속의 문화재는.. 뭐랄까 무고한 민간인만큼이나 군의 입장에서는 피아 식별과 작전 수행을 어렵게 하는 존재였다. 국군이 살인마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적군이 자꾸 민간인으로 위장하거나 혹은 민간인을 방패로 내세우며 비열하게 싸우니까 빡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는 것이다.

뭐, 문화재는 최소한 사람은 아니다만,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산 속의 여러 문화재들이 안타깝지만 폭격을 맞고 소실되었다. 그러나 김 영환(당시 대령)은 팔만대장경마저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그는 항명죄로 인해 징계 위원회에 회부됐지만 문화재 보호라는 명분이 참작되어 다행히 실제로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먼 훗날인 2010년, 금관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3. 화엄사를 지킨 경찰

이런 식으로 6· 25 때 군· 경이 항명까지 불사하면서 문화재를 보호한 사례가 최소한 한 건 더 있다.
그 주인공은 군인이 아닌 경찰 간부인 차 일혁 경무관(1920-1958)이다. 공교롭게도 앞의 김 영환 장군과 거의 같은 연배이고 30대 나이 때 사고사한 것도 동일하다.

이분은 1951년 5월경,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지리산 내의 모든 사찰과 암자들을 불지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고작 소수의 빨치산 몇 놈 때문에 수백 년 묵은 거대한 문화재들을 몽땅 잿더미로 만드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화엄사(전남 구례군 소재)와 그 일대 사찰에 대해서는 같이 작전 중이던 군부대와 협의하여 건물을 다 부수는 게 아니라 문짝만 떼어서 불태웠다. 뭐, 문이 없으면 건물 안이 다 보이니 어차피 빨치산들이 은폐하기 어려울 것이다.

해인사 폭격에 대한 항명과는 다른 별개의 사건이라는 것을 본인은 검색을 추가로 한 뒤에야 확실하게 알게 됐다. 이분에 대해서도 사후에 조계종과 문화재청으로부터 감사장이 추서되었으며, 계급 역시 경무관으로 특진했다.

다만, 이분의 업적이 재조명된 것은 2000년대가 다 돼서였다. 종로 경찰서의 최 규식 경무관이야 북괴 무장공비를 검문하다가 전사했으니 그야말로 당대의 대통령이 직접 추모했으며 동상이 세워지고 태극 무공 훈장에다 경무관 특진까지 광속으로 추서됐지만, 저분은 분야가 다른 관계로 아무래도 그런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뭐 그래도 박 정희 정권은 문화재의 복원과 보존에 굉장히 신경 썼던 정권이긴 하지만 관심이 이런 데에까지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4. 파리와 교토

적군을 쳐부수는 것도 좋지만 역사 유물인 문화재는 적군의 것이라도 보존해야 한다는 관념이 서양에도 응당 있었다. 대표적인 예는 2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이다.

처음에는 히틀러도 과거의 네로처럼 '예술을 사랑하는 독재자' 기믹이 있었는지 프랑스 파리의 문화 유물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궁지에 몰리자.. 그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점령지를 몽땅 불지르고 부숴 버리라는 광기어린 명령을 부하 사령관에게 내렸다.

이때 프랑스를 점령해 있던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1894-1966)은 차마 그런 짓은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총통의 명령을 씹었으며,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그는 항복하던 당시에는 프랑스 시민들로부터 갖은 욕을 먹고 야유를 당했다. 그러나 그의 항명 사실이 알려지면서 얼마 안 가 프랑스로부터도 감사와 칭송을 받는 영웅 대접을 받게 됐다. 그의 장례식 때는 프랑스 군인 장성과 레지스탕스 지도자들도 찾아왔다.

훗날 이 일화를 배경으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히틀러가 콜티츠에게 거듭해서 전화를 걸어서 자기 명령이 이행되었는지 확인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콜티츠는 상관이 건 전화를 받긴 했지만 차마 응답은 못 한 채 침묵하고 말이다.
이건 1966년작으로, 역시 "빨간 마후라" 내지 "소령 강 재구"와 비슷한 고만고만한 시기이다. 단, 영상을 검색해 보니 얘는 흑백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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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말고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국이 태평양을 넘어 일본의 수도까지 폭격하면서 도시들을 쑥밭을 넘어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그래도 천조국 미국도 일본의 경주 급인 교토는 건드리지 않았다. 인도적인 차원보다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였다. 문화재는 남겨 둔다고 해서 연합군을 죽이는 일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앞서 언급했던 파일럿 김 영환도 항명으로 인한 징계를 받게 됐을 때, 콜티츠 장군과 미군의 폭격을 예로 들면서 자신을 변호했다고 한다.

5. 옛날 영화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나라 영화계는 5공 전땅크 시절~민주화 초창기인 1980~90년대 초까지가 좀 침체· 암흑기였지, 더 옛날인 저 60년대는 오히려 여러 명작들이 쏟아져 나오던 중흥기였다. <상록수>(1961),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맨발의 청춘>(1964), <빨간 마후라>(1964), <하녀>(1960)처럼 말이다.

암흑기일 때는 <서편제>(1993)가 고작 100만을 넘었다고 자랑을 칠 정도였지만 <쉬리>(1999)를 계기로 영화계의 판도가 바뀌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 중반이 돼서야 국산 영화가 모처럼 명작들이 쏟아져 나오며 잘 나가기 시작한 것 같다. 이때부터 영화 티켓 발매도 완전히 전산화되어 관람객 수가 정확하게 집계되기 시작했다.

사소한 외형으로는 한 90년대를 전후해서 자막이 세로쓰기가 아닌 가로쓰기로 바뀌었으며, 극장 간판에 벽화 형태로 그려지는 영화 광고도 화가가 정성스레 그린 그림이 아니라 그냥 디지털 인쇄물로 바뀐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9/06/19 08:33 2019/06/1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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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북한 주민들이 북한을 탈출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일단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간 후, 거기서 또 국경을 넘어 친북 성향이 아닌 나라로 가서는 거기서 배나 비행기를 타고 남한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을 매수하기 위해 뇌물을 줘야 하기 때문에 자금이 많이 필요하다. 탈북 여대생 이 현서 씨의 TED 강연 같은 걸 들어 보면 정말 처절한 사연을 들을 수 있다.

왜 그렇게 힘들게 빙 돌아서 남한으로 오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최단거리 루트인 휴전선 일대는 경계가 너무 삼엄하고 철조망과 지뢰밭도 즐비해서 접근이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인민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지 않으면 체제 유지가 안 되기 때문에, 그리고 남한의 입장에서는 자유 왕래를 허용했다간 일부 불순분자들의 이적· 간첩 행위가 만연할 것이기 때문에 남과 북은 이런 서로 다른 이유로 인해 상호 왕래를 금지하고 있다.

반대로, 다른 화해니 평화니 온갖 정치 쇼를 한다 해도, 이런 기본적인 남북 왕래와 서신· 통신 왕래조차 지금까지 이뤄진 게 없으니 옛날 햇볕 정책이니 뭐니 하는 건 들인 돈에 비해 아무 선한 열매가 없으며, 심지어 그 돈이 다 북괴의 핵 개발에 보태졌다고 단정을 지어도 반박이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다. 분단의 본질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안목을 갖춰야 한다.

한때는 집단으로 배를 타고 탈북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에 <광호의 일기> 시리즈를 출간하기도 했던 김 만철 씨와 그쪽 집안이 대표적인 예임. 요즘은 북한 당국도 그걸 알기 때문에 어선이 조업을 하는 것도 일일이 다 감시하고, 특히 일가족 전체가 한 배에 타는 것 자체를 허락을 안 해 준다.

근래에는 오히려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육군 병사가 DMZ를 성큼성큼 횡단해서 귀순하기도 했다. 노크 귀순 사건도 있었고, 심지어 상관 병사들을 프래깅 한 뒤에 귀순한 경우도 있다. 민간인보다는 차라리 거기서 직접 근무를 하는 군인이 육로 접근이 더 쉬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공군 전투기 파일럿에게는 육로나 해로보다 더 좋은 선택이 있다. 바로, 자기가 조종하는 비행기로 직접 남한 영공으로 진입해서 탈북하는 것. 어쩌면 이게 제일 화끈하고 쉬운 방법이다.
파일럿까지 됐을 정도이면 북한에서도 최정예 엘리트이며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탈북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래도 자유가 좋아서 남한을 선택한 것이다.

1. 노 금석

6· 25가 휴전으로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1953년 9월 21일에 귀순했으니 귀순 공군 파일럿 라인의 거의 1호가 아닌가 싶다(귀순 당시 22세). 뭐, 전쟁 전인 1950년 4월에 이 건수라는 북한 파일럿이 이미 귀순했다고는 하지만, 너무 오래 됐고 기록이나 관련 소식이 부족하다.

노 금석은 그 옛날에 공산주의 거짓 세뇌 교육 내지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서 벌인 온갖 행패에 이미 진절머리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겉으로는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척하지만 기회만 되면 비행기를 이용해 언제든지 북한을 탈출할 생각을 진작부터 했다고 한다.
8월 종파 사건도 벌어지기 전의 워낙 옛날이었으니 그때의 북한은 김 일성에 대한 우상화는 지금보다 덜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북한은 예나 지금이나 생지옥인 건 변함없다.

그는 훈련 작전 중에 대열을 이탈한 뒤, 목숨을 걸고 저공을 비행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미 점찍어 뒀던 김포 비행장에 스스로 착륙했다.

잠시 역사 얘기를 하자면, 김포 국제공항의 전신인 김포 비행장은 일제가 1938년에 건설해 놓았던 공군 기지로, 처음엔 민간 공항이 아니었다. 그때는 거기가 인서울도 아니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수원 비행장 같은 곳일 뿐이었다(물론 일제 강점기 땐 수원 비행장이 없었고.. ㅋ). 1950년대에 민· 군 공용으로 사용하던 인서울 공항은 여의도 공항이었다. 얘는 일제 강점기 초기부터 있었으니 역사가 매우 길다.

그러다가 김포 공항이 1958년 1월 말에 개항해서 민간 공항 기능을 물려받았으며, 김포 공항은 군 기지가 없는 100% 민간 공항으로 바뀌었다. 1960년에 이 승만 대통령이 하야 후에 하와이로 갈 때는 김포 공항을 이용했다. 그리고 1971년에 지금의 성남 서울 공항이라는 공군 기지가 추가로 생기면서 여의도 공항의 군사 기능까지 인계했다.

과거에 부산에서는 비좁은 수영 공항을 대체하기 위해 외곽에 지금의 김해 국제공항이 생겼지만 여전히 군· 민 공용이다. 부산의 인천 공항 격인 '영남권 신공항'도 몇 차례 논의되었지만 결국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논의만으로 끝났다. 그 반면, 서울에서는 여의도 공항의 역할을 김포(민)와 성남 공항(군)이 분산 인계받고, 김포로도 모자라서 인천 공항까지 생겼다.
아무튼 요렇게 대체 공항이 생김으로써 여의도 공항은 간판을 완전히 내렸으며, 활주로 부지는 여의도 광장으로 바뀌었다가 오늘날 여의도 공원이 되었다.

아무튼, 갑자기 적기가 불쑥 나타나서 사뿐히 착륙까지 했으니, 당시 김포 비행장 관계자들은 발칵 뒤집혔다. 미국은 냉전 시절의 적국이던 소련의 위협적인 미그 15 전투기를 어떻게 좀 구해서 분석할 수 없을까 전전긍긍하던 상태였는데, 웬 적군 파일럿이 귀순하면서 최신형 미그 15 현물을 갖다 바친 것이다.

혹시 이 사람을 따라 북한 전투기가 날아오지 않을까 비행장 전체는 최강의 경계령이 떨어졌다. 미그 15기는 곧바로 격납고로 옮겨졌고 파일럿 당사자는 사진 촬영 후 최고로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군 당국으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이내 귀순 용사 영웅으로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며 무려 10만 달러(60년 전 물가로!)에 달하는 포상금을 받았다. 이제 평생 일 안 해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을 듯.

그는 굳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에 눌러앉을 필요도 없이, 그 밑천으로 곧장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냉전 초기였던 그 당시에, 적국에서 귀순한 전투기 조종사는 미국의 입장에서도 "언제든지 웰컴"인 최고급 인재였다. 그는 거기서 영어를 배우고 미 공군, 보잉, 록히드, 엠브리-리들 항공 대학교 같은 걸출한 기관을 드나들면서 관련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은퇴 후 2015년 현재에도 생존하여 미국에서 평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1953년의 귀순은 정말 그의 인생을 바꾼 현명한 결단이었다.

2. 정 낙현

이 승만 정권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되었던 1960년 8월 3일, 이 사람도 원산에서 미그 15를 몰고 출격했다가 동해안의 속초 비행장으로 단독 착륙 후 귀순했다. 그 당시 파일럿의 나이는 24세.
그 뒤 남한에서 별 문제 없이 정착하고, 공군 교관 등 고위직을 역임하다가 대령으로 잘 예편했다고 나온다. 귀순 파일럿 출신 대령 1호이긴 한데, 그 외에 다른 특이 사항은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196, 70년대의 영상 기록관 자료나 옛날 신문 기사들만 나오지 최근 근황은 알 수 없다.

1970년에는 박 순국이라는 북한 공군 파일럿이 미그 15를 몰고 비행하다가 남한 영공에 들어왔고, 이내 남한 전투기들에 둘러싸여 속초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이 사람은 귀순 의사가 없었고 처음에는 "실수로 남조선에 들어왔을 뿐이다. 나를 어서 북으로 송환해 달라"라고 거듭 주장했으나, 한국· 미국의 정보 기관이 선배격인 정 낙현까지 동원해서 끈질기게 회유를 한 끝에 최소한 겉보기로는 전향했다고 한다.
다만 박 순국은 남한에서 과음을 일삼다가 간이 나빠져서 1976년에 사망했다. 이 점에서는 바로 다음에 소개할 이 웅평과 비슷한 처지가 됐다.

3. 이 웅평

본인이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았던 1983년 2월 25일엔 남한에서는 팀 스피릿 훈련이 진행 중이었으며, 여기에 대응하여 북한도 전투기를 출격시킨 상태였다. 이 사람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그 19를 조종하던 채로 탈북을 감행했다. 남한의 공군에게도 이내 발각되었지만 그는 날개를 흔들어서 귀순 의사를 밝혔으며, 남한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으면서 수원 비행장에 착륙했다.

훈련 중에 진짜로 적기가 출현하다 보니 그 당시엔 우리나라도 혼비백산해서 민방위 관계자가 서울· 인천· 경기 지역에 경계 경보를 때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귀순이 대외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북한에서 전투기 파일럿으로 모자랄 것 없이 살던 상류층이었지만, 남조선의 라면 봉지 하나만 보고도 감격해서 탈북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라면이 뭐예요? 먹는 거예요?"는 둘째치고라도, 세상에 "판매나 유통 과정에서 훼손· 변질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 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 이런 민주적이고 당연한 절차조차도 북한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귀순 후 역시 남한에 잘 정착했으며, 남한 정착 12년 만인 1995년에 정 낙현에 이어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으며, 무엇보다도 혼자 불쑥 탈북한 자기 때문에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이 해코지를 많이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나중에 다른 탈북자의 증언을 들어 보니 그의 예상은 불행히도 정확했다. 다들 수용소로 끌려 갔댄다. 가장이 전투기라는 국가 자산까지 무단 유출하면서 탈북을 감행한 괘씸죄에 대한 연좌제였다.

그는 가족 걱정을 술로 달래다가 간의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1990년대 말부터 간경화로 투병하다가 2002년 5월에 사망했다. 그 전에 대구 성서 초등학교의 개구리 소년 중 하나인 김 종식 군의 아버지 김 철규 씨도 정확히 같은 이유 때문에 2001년 10월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참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4. 이 철수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벌어지기 4개월 남짓 전이던 1996년 5월 23일에 귀순한 분이며, 이분은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 최후의 귀순 공군 파일럿이다. 평안남도에서 미그 19를 몰고 출격한 점(아직도 구형 미그 19를!), 저공 고속 비행으로 북한을 탈출한 점, 우리나라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수원 비행장에 착륙한 점, 당사자가 훗날 대령까지(2010년에) 진급한 점은 13년 전 이 웅평의 판박이이다.

단, 이 사람이 귀순할 때는 과거의 이 웅평 때와는 달리, 서울과 인천에 민방위 경보가 울리지 않아서 평시 경계가 소홀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또한 이 웅평과는 달리 이 사람은 현재까지도 건강하게 현역 복무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탈북자 출신으로는 최초로 장성 자리까지 내다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강릉 무장공비 사건 때 유일하게 생포된 공작원은 이름이 이 광수이다. 그는 대한민국으로 완전히 전향한 후 해군 군무원 겸 교관, 안보 강사 등으로 재직 중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도 "내가 어뢰를 오래 다뤄 봤고 북한 관행도 잘 아는데(어뢰에다 숫자를 표기하는 방식)... 저건 확실하게 북한 소행으로 보인다. 2009년 11월에 벌어졌던 대청해전에 대한 보복이다."라고 소신 발언을 하기도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14 08:37 2015/12/1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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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흔히 육해공 3군으로 나뉘는데, 이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육군: 땅개로 설명 끝이다. 장병들은 병영에서 생활하면서 각종 작업이나 일과 수행을 위해 온갖 장소를 돌아다녀야 한다. 보병+소총수라는 제일 기본 보직이 있으며 이들에겐 행군 능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단, 의사 중에 TOP은 외과 의사이듯이, 육군 중의 TOP 병과는 역시 포병이 아닌가 싶다.
  • 해군: 배가 곧 생활 공간 겸 전장이기도 하다는 게 중요한 특징이다. 해군만의 그 특유의 세일러 복장이 있다. 육군에 행군과 화생방이 있다면 해군엔 전투수영이 있다. 연평해전, 천안함 등의 사건으로 인해, 근래까지 병사들 중에서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한 전사자가 제일 많이 나온 곳이다.

그리고,

  • 공군: 여타 군과는 달리 공군은 소수의 전투기 조종사를 지원하고 비행장· 기지 내부를 방어한다는 개념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투 병과의 비중이 높으며, 병사가 무슨 비행기 타고 영공을 지키다가 전사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육군 같은 행군· 숙영은 없지만 화생방의 비중이 높다.

공군 훈련소에서 수류탄 훈련은 완전 야메로 넘기면서 교관이 “너희들이 이걸 던지는 상황이라면 전쟁은 이미 진 거다.”라고 말하는 건 유명한 일화인 듯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기지 바깥을 몇 겹으로 지키고 있던 육군 병력이 전멸했다는 뜻이므로.

군용기에는 비행기 대 비행기가 싸우는 전투기만 있는 게 아니다. 지상에다 다량의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이 전문인 폭격기도 있고, 정찰기· 조기경보기도 있다. (한편, 전투와 폭격을 겸할 수 있는 공격용 군용기를 전폭기라고 한다)
그리고 또 무시 못 할 비중을 차지하는 건 다름아닌 수송기이다. 방대한 물량이 생명인 오늘날의 전장에서 군대 유지의 생명은 보급이다. 수송기는 이 보급을 책임지는 물건이기 때문에, 비록 전투기 같은 화려함은 없을지언정 전쟁에서의 숨은 일등공신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배보다 수송량은 부족하지만 속도가 워낙 넘사벽이니..

역사적으로 볼 때 월남전의 상징이 헬리콥터라면, 걸프전 하면 수송기를 떠올려도 좋다. 다량의 수송기 덕분에 그 먼 중동에서 벌어진 전쟁에 미국(+다국적군)이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조종사밖에 못 타는 전폭기만 먼저 도착해 있으면 뭘 하나. 정비 인력, 각종 부품, 무장, 보급이 없는데?

군용 수송기는 웬지 프로펠러기가 많이 눈에 띄는 것 같다. 본인의 직장이 있는 판교도 아무래도 서울 공항과 가까운 곳인지라 종종 수송기가 저공으로 날아다니는 게 눈에 띈다.
굳이 군용기뿐만이 아니라 화물기가 전반적으로 그렇긴 하지만, 얘네들은 민항기에 비해 랜딩기어가 굉장히 낮은 걸 볼 수 있다. 개로 치면 다리가 몹시 짧은 닥스훈트 같은 품종? 기체가 지면에 더욱 가까이 있다. (왼쪽은 보잉 737, 오른쪽은 수송기 C-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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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실 화물을 싣는 모든 교통수단들이 공통으로 갖는 특징이다. 기체의 높이가 낮아야 무거운 화물을 기내에 반입하기가 쉬우니까. 시내버스만 해도 사람이 타기 불편하다고 저상 버스가 있는 지경인데 하물며 화물은 어떠하겠는가? 짐받이에다가 탑승교를 마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영화에서도 종종 보지만, 수송기의 뒷문은 아예 아래로 열어젖혀서 화물을 싣는 입구 램프(ramp)로 종종 쓰인다. 중세 영화 장면에서 성(castle)문을 바닥 쪽으로 열어서 문짝을 그대로 도랑과 성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bridge)로 쓰듯이 말이다.
이렇게 비행기의 기체가 지면과 가깝게 낮아지다 보니, 날개는 기체에서 상당히 윗부분에 달릴 수밖에 없어진다. 그래야 날개 밑에다 엔진이든 프로펠러든 달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수송기의 외형은 일반 민항기와는 살짝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런 날개의 구조는 비행기의 연비 절약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특성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군용차만 해도 사륜구동에 차체가 온통 무거운 쇳덩이여서 튼튼하고 힘은 좋다만, 완전 기름 먹는 하마이지 않던가. 군용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장에서 임시로 만들어진 거칠고 험악한 활주로에서도 안 부서지고 뜨고 내릴 수 있게 튼튼하고 다소 무겁게 만들어진다. 그러니 군용 수송기는 민항기보다 경제성이 여러 모로 떨어진다.

앞서 말했듯이 수송기는 전투기보다 '간지'가 덜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종 병과를 전공한 정예 공군 장교가 도저히 전투기를 조종할 수 없게 됐을 때 차순위로 빠지는 게 수송기나 헬리콥터 쪽 보직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보직으로 가는 인원도 있긴 하지만) 그리고 전투기의 조종간을 잡은 경험만이 공군 장성으로 진급할 때나 전역 후 민항사로 재취업할 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경력으로 인정받는다. 수송기 경력은 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송기도 전쟁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이니, 그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아야겠다.

※ 덧붙이는 말

1. 수송기 추락 사고

우리나라는 1982년에 도대체 무슨 마가 씌였는지 군 수송기가 두 대나 산에 추락하는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하나는 2월에 제주도 한라산이고, 다른 하나는 6월에 서울 청계산.
사고의 원인(악천후 때문에 방향· 위치 감각 상실), 사고 기체(C-123),
게다가 인명 피해(50여 명의 탑승 장병 전원 사망)까지 완전 판에 박은 듯이 똑같다.

그 이듬해에 민간에서 워낙 큰 사건· 사고가 또 나긴 했지만(KAL기 추락, 그리고 아웅산 폭탄 테러)
5공 시절에 군 내부에서 발생한 저 사고는 완전히 흑역사로 치부되고 비밀로 함구되었으며, 희생자 유족은 제대로 된 보상이나 예우도 못 받았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관련 자료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저런 거야말로 재조명과 진상 규명이 필요한 이슈가 아닌가 싶다.
과격한 훈련 중에 전투기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순전히 날씨 때문에 육지 지형을 파악 못 해서 비행기가 떨어졌다는 게 애석하다. 뭐, 기체의 노후화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는 듯하지만 말이다.

2. 조종사가 되기

항공업계는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위험한 전문직군이다 보니, 의료계와 더불어 조직 내부의 군기가 세고 그 대신 종사자의 대우도 매우 좋은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방법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공군 사관학교 + 조종 병과로 가는 것이다. 군기 바짝 든 건장한 공군 출신 조종사는 민항사에서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이건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가 보장돼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어릴 적부터 몸 좋고 공부도 매우 잘해야 하거니와, 돈이 안 드는 대신 인생의 상당량을 국가를 위해 고된 군생활에 바쳐야 한다.

게다가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의무 복무 기간은 10년이지만, 공군 조종사만은 그 기간이 15년이다. 양성 비용이 워낙 많다 보니 국가에서 좀 더 오래 뽕(?)을 뽑아야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예전에는 군을 거치지 않고 민간 테크만으로 조종사가 되는 방법은 사실상 외국으로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미국은 자동차는 이미 신발이나 다름없는 필수품이고, 진짜 돈 많은 유명인사는 자동차를 넘어 자가용 비행기까지 날리는 천조국이니 말이다.
지금은 상황이 나아져서 국내에도 차츰 항공 관련 학과가 개설된 대학이나 조종사 양성소가 생기고 있다. 그러나 국내든 국외든 그야말로 극심한 돈지랄은 불가피하다. 그 비싼 비행기를 조종하는 법을 배우는 게 돈으로나 노력으로나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항공사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을 거쳐서 배출된 조종사는 한동안 자기 연봉에서 교육비가 공제된다. 그런 식으로 채무를 청산한다. 청산이 완료되기 전에 조종사가 그 회사를 퇴사한다면 미납 교육비를 모두 뱉어 주고 나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대한 항공 조종사 출신인 말씀 보존 학회 대표가 문득 대단하게 보인다. =_=;;; 공사가 아닌 민간 출신이다. 킹 제임스 진영을 이끄는 사람들은 다들 참 똑똑한 사람들이긴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3/08/05 08:36 2013/08/0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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