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북한 주민들이 북한을 탈출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일단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간 후, 거기서 또 국경을 넘어 친북 성향이 아닌 나라로 가서는 거기서 배나 비행기를 타고 남한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을 매수하기 위해 뇌물을 줘야 하기 때문에 자금이 많이 필요하다. 탈북 여대생 이 현서 씨의 TED 강연 같은 걸 들어 보면 정말 처절한 사연을 들을 수 있다.

왜 그렇게 힘들게 빙 돌아서 남한으로 오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최단거리 루트인 휴전선 일대는 경계가 너무 삼엄하고 철조망과 지뢰밭도 즐비해서 접근이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인민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지 않으면 체제 유지가 안 되기 때문에, 그리고 남한의 입장에서는 자유 왕래를 허용했다간 일부 불순분자들의 이적· 간첩 행위가 만연할 것이기 때문에 남과 북은 이런 서로 다른 이유로 인해 상호 왕래를 금지하고 있다.

반대로, 다른 화해니 평화니 온갖 정치 쇼를 한다 해도, 이런 기본적인 남북 왕래와 서신· 통신 왕래조차 지금까지 이뤄진 게 없으니 옛날 햇볕 정책이니 뭐니 하는 건 들인 돈에 비해 아무 선한 열매가 없으며, 심지어 그 돈이 다 북괴의 핵 개발에 보태졌다고 단정을 지어도 반박이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다. 분단의 본질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안목을 갖춰야 한다.

한때는 집단으로 배를 타고 탈북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에 <광호의 일기> 시리즈를 출간하기도 했던 김 만철 씨와 그쪽 집안이 대표적인 예임. 요즘은 북한 당국도 그걸 알기 때문에 어선이 조업을 하는 것도 일일이 다 감시하고, 특히 일가족 전체가 한 배에 타는 것 자체를 허락을 안 해 준다.

근래에는 오히려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육군 병사가 DMZ를 성큼성큼 횡단해서 귀순하기도 했다. 노크 귀순 사건도 있었고, 심지어 상관 병사들을 프래깅 한 뒤에 귀순한 경우도 있다. 민간인보다는 차라리 거기서 직접 근무를 하는 군인이 육로 접근이 더 쉬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공군 전투기 파일럿에게는 육로나 해로보다 더 좋은 선택이 있다. 바로, 자기가 조종하는 비행기로 직접 남한 영공으로 진입해서 탈북하는 것. 어쩌면 이게 제일 화끈하고 쉬운 방법이다.
파일럿까지 됐을 정도이면 북한에서도 최정예 엘리트이며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탈북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래도 자유가 좋아서 남한을 선택한 것이다.

1. 노 금석

6· 25가 휴전으로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1953년 9월 21일에 귀순했으니 귀순 공군 파일럿 라인의 거의 1호가 아닌가 싶다(귀순 당시 22세). 뭐, 전쟁 전인 1950년 4월에 이 건수라는 북한 파일럿이 이미 귀순했다고는 하지만, 너무 오래 됐고 기록이나 관련 소식이 부족하다.

노 금석은 그 옛날에 공산주의 거짓 세뇌 교육 내지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서 벌인 온갖 행패에 이미 진절머리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겉으로는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척하지만 기회만 되면 비행기를 이용해 언제든지 북한을 탈출할 생각을 진작부터 했다고 한다.
8월 종파 사건도 벌어지기 전의 워낙 옛날이었으니 그때의 북한은 김 일성에 대한 우상화는 지금보다 덜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북한은 예나 지금이나 생지옥인 건 변함없다.

그는 훈련 작전 중에 대열을 이탈한 뒤, 목숨을 걸고 저공을 비행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미 점찍어 뒀던 김포 비행장에 스스로 착륙했다.

잠시 역사 얘기를 하자면, 김포 국제공항의 전신인 김포 비행장은 일제가 1938년에 건설해 놓았던 공군 기지로, 처음엔 민간 공항이 아니었다. 그때는 거기가 인서울도 아니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수원 비행장 같은 곳일 뿐이었다(물론 일제 강점기 땐 수원 비행장이 없었고.. ㅋ). 1950년대에 민· 군 공용으로 사용하던 인서울 공항은 여의도 공항이었다. 얘는 일제 강점기 초기부터 있었으니 역사가 매우 길다.

그러다가 김포 공항이 1958년 1월 말에 개항해서 민간 공항 기능을 물려받았으며, 김포 공항은 군 기지가 없는 100% 민간 공항으로 바뀌었다. 1960년에 이 승만 대통령이 하야 후에 하와이로 갈 때는 김포 공항을 이용했다. 그리고 1971년에 지금의 성남 서울 공항이라는 공군 기지가 추가로 생기면서 여의도 공항의 군사 기능까지 인계했다.

과거에 부산에서는 비좁은 수영 공항을 대체하기 위해 외곽에 지금의 김해 국제공항이 생겼지만 여전히 군· 민 공용이다. 부산의 인천 공항 격인 '영남권 신공항'도 몇 차례 논의되었지만 결국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논의만으로 끝났다. 그 반면, 서울에서는 여의도 공항의 역할을 김포(민)와 성남 공항(군)이 분산 인계받고, 김포로도 모자라서 인천 공항까지 생겼다.
아무튼 요렇게 대체 공항이 생김으로써 여의도 공항은 간판을 완전히 내렸으며, 활주로 부지는 여의도 광장으로 바뀌었다가 오늘날 여의도 공원이 되었다.

아무튼, 갑자기 적기가 불쑥 나타나서 사뿐히 착륙까지 했으니, 당시 김포 비행장 관계자들은 발칵 뒤집혔다. 미국은 냉전 시절의 적국이던 소련의 위협적인 미그 15 전투기를 어떻게 좀 구해서 분석할 수 없을까 전전긍긍하던 상태였는데, 웬 적군 파일럿이 귀순하면서 최신형 미그 15 현물을 갖다 바친 것이다.

혹시 이 사람을 따라 북한 전투기가 날아오지 않을까 비행장 전체는 최강의 경계령이 떨어졌다. 미그 15기는 곧바로 격납고로 옮겨졌고 파일럿 당사자는 사진 촬영 후 최고로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군 당국으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이내 귀순 용사 영웅으로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며 무려 10만 달러(60년 전 물가로!)에 달하는 포상금을 받았다. 이제 평생 일 안 해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을 듯.

그는 굳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에 눌러앉을 필요도 없이, 그 밑천으로 곧장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냉전 초기였던 그 당시에, 적국에서 귀순한 전투기 조종사는 미국의 입장에서도 "언제든지 웰컴"인 최고급 인재였다. 그는 거기서 영어를 배우고 미 공군, 보잉, 록히드, 엠브리-리들 항공 대학교 같은 걸출한 기관을 드나들면서 관련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은퇴 후 2015년 현재에도 생존하여 미국에서 평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1953년의 귀순은 정말 그의 인생을 바꾼 현명한 결단이었다.

2. 정 낙현

이 승만 정권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되었던 1960년 8월 3일, 이 사람도 원산에서 미그 15를 몰고 출격했다가 동해안의 속초 비행장으로 단독 착륙 후 귀순했다. 그 당시 파일럿의 나이는 24세.
그 뒤 남한에서 별 문제 없이 정착하고, 공군 교관 등 고위직을 역임하다가 대령으로 잘 예편했다고 나온다. 귀순 파일럿 출신 대령 1호이긴 한데, 그 외에 다른 특이 사항은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196, 70년대의 영상 기록관 자료나 옛날 신문 기사들만 나오지 최근 근황은 알 수 없다.

1970년에는 박 순국이라는 북한 공군 파일럿이 미그 15를 몰고 비행하다가 남한 영공에 들어왔고, 이내 남한 전투기들에 둘러싸여 속초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이 사람은 귀순 의사가 없었고 처음에는 "실수로 남조선에 들어왔을 뿐이다. 나를 어서 북으로 송환해 달라"라고 거듭 주장했으나, 한국· 미국의 정보 기관이 선배격인 정 낙현까지 동원해서 끈질기게 회유를 한 끝에 최소한 겉보기로는 전향했다고 한다.
다만 박 순국은 남한에서 과음을 일삼다가 간이 나빠져서 1976년에 사망했다. 이 점에서는 바로 다음에 소개할 이 웅평과 비슷한 처지가 됐다.

3. 이 웅평

본인이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았던 1983년 2월 25일엔 남한에서는 팀 스피릿 훈련이 진행 중이었으며, 여기에 대응하여 북한도 전투기를 출격시킨 상태였다. 이 사람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그 19를 조종하던 채로 탈북을 감행했다. 남한의 공군에게도 이내 발각되었지만 그는 날개를 흔들어서 귀순 의사를 밝혔으며, 남한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으면서 수원 비행장에 착륙했다.

훈련 중에 진짜로 적기가 출현하다 보니 그 당시엔 우리나라도 혼비백산해서 민방위 관계자가 서울· 인천· 경기 지역에 경계 경보를 때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귀순이 대외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북한에서 전투기 파일럿으로 모자랄 것 없이 살던 상류층이었지만, 남조선의 라면 봉지 하나만 보고도 감격해서 탈북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라면이 뭐예요? 먹는 거예요?"는 둘째치고라도, 세상에 "판매나 유통 과정에서 훼손· 변질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 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 이런 민주적이고 당연한 절차조차도 북한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귀순 후 역시 남한에 잘 정착했으며, 남한 정착 12년 만인 1995년에 정 낙현에 이어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으며, 무엇보다도 혼자 불쑥 탈북한 자기 때문에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이 해코지를 많이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나중에 다른 탈북자의 증언을 들어 보니 그의 예상은 불행히도 정확했다. 다들 수용소로 끌려 갔댄다. 가장이 전투기라는 국가 자산까지 무단 유출하면서 탈북을 감행한 괘씸죄에 대한 연좌제였다.

그는 가족 걱정을 술로 달래다가 간의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1990년대 말부터 간경화로 투병하다가 2002년 5월에 사망했다. 그 전에 대구 성서 초등학교의 개구리 소년 중 하나인 김 종식 군의 아버지 김 철규 씨도 정확히 같은 이유 때문에 2001년 10월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참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4. 이 철수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벌어지기 4개월 남짓 전이던 1996년 5월 23일에 귀순한 분이며, 이분은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 최후의 귀순 공군 파일럿이다. 평안남도에서 미그 19를 몰고 출격한 점(아직도 구형 미그 19를!), 저공 고속 비행으로 북한을 탈출한 점, 우리나라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수원 비행장에 착륙한 점, 당사자가 훗날 대령까지(2010년에) 진급한 점은 13년 전 이 웅평의 판박이이다.

단, 이 사람이 귀순할 때는 과거의 이 웅평 때와는 달리, 서울과 인천에 민방위 경보가 울리지 않아서 평시 경계가 소홀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또한 이 웅평과는 달리 이 사람은 현재까지도 건강하게 현역 복무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탈북자 출신으로는 최초로 장성 자리까지 내다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강릉 무장공비 사건 때 유일하게 생포된 공작원은 이름이 이 광수이다. 그는 대한민국으로 완전히 전향한 후 해군 군무원 겸 교관, 안보 강사 등으로 재직 중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도 "내가 어뢰를 오래 다뤄 봤고 북한 관행도 잘 아는데(어뢰에다 숫자를 표기하는 방식)... 저건 확실하게 북한 소행으로 보인다. 2009년 11월에 벌어졌던 대청해전에 대한 보복이다."라고 소신 발언을 하기도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14 08:37 2015/12/1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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