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님'을 붙일 것인가

대한민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관례적으로 ‘예수’라고 안 하고 꼭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예: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마 불자들은 비슷한 논리로 ‘부처’ 대신에 ‘부처님’이라고 하지 싶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렇게 접사 ‘님’이 붙지 않은 경우가 있다. 특히 개역, 한킹 같은 옛날 20세기 성경 말이다.
찬송가 가사에도 “예수 따라가며”,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인하여” 등 가끔은 이 접미사가 생략된 게 있다.

난 옛날에, 지금보다 권위주의 유교 사상이 더 강했을 옛날에 성경 및 찬송가 번역자가 예의를 모르고 싸가지가 없어서 ‘님’을 생략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께서’를 붙인 것만으로도 높임의 의미가 들어갔다고 본 거겠지.
“예수께서 가라사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보다 훨씬 더 간결하고 운율 잘 맞고 매끄럽게 읽힌다.

이제 와서 익숙한 찬송가 가사의 강박/약박 내용어/기능어 배치와 운율까지 깨뜨리면서 억지로 ‘님’을 첨가해서 수정하는 것에도 개인적으론 반대 소신이다. ‘님’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암튼 그건 그런데..

그래서 요즘 나오는 성경 역본들은 본문에도 ‘님’이 추가되는 추세이다. 다만, 번역 방침이 그렇다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님’을 넣지 않아야 마땅할 것이다.

(1) ‘그분’이 아니라 ‘이름’ 자체만을 가리키는 경우: 수태고지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 십자가 명패 “이 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 예수라는 이름 앞에 모두 무릎을..

(2) 적대진영의 대사: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들어 봤는데.. 네놈은 도대체 뭐임?” (사도행전 19장 그 유명한..)
저거는 부정한 악령의 말이다. ‘예수님’ 이렇게 해 놓으니 꽤 어색하다.

(3) ‘여호수아’의 헬라 표기인 예수. 행 7:45, 히 4:8
이거는 킹 제임스 기반 역본들에만 존재하는 특징인데.. 님 붙일 필요가 전~~혀 없다. 특히 후자 히브리서는 진짜 예수님과 달리 안식을 못 줬다는 문맥이다!
근데 모 민간 군소번역 중에는 이것도 예수님이라고 옮긴 사례가 있더라.

그러니 ‘님’을 안 붙여도 상관없고, 붙일 거면 제대로 봐 가면서 붙여야 된다는 것이다.
마치 아예 한글로만 써 놓으면 상관없는데, 한자를 병기했는데 틀려 버리면 병기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효과가 날 수 있다.. 이런 것이다.

아, 하나 더. 가나의 혼인 잔치 요 2:5의 경우, 예수님을 높이는 스타일로 번역하면 “그분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지”라고 마리아도 예수님을 높여서 번역하는 편이고..
좀 인본주의적으로 어머니가 아들을 거론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저 사람이 시키는 대로”라고 번역하는 편이다. 한국어는 이런 것도 갈린다.

2. 맞춰/맞혀

신 19:5는 산에서 벌목 중에 도끼를 잘못 놀리는 바람에 옆의 사람을 사고로 죽였을 때... 즉 과실치사와 도피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을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우리말 성경들은 "도끼가 자루에서 쓰윽 빠져나가 이웃을 맞춰서 죽게 하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더라. 오리지날 개역성경 이래로 개역개정, 그리고 킹 제임스 계열인 한킹과 흠정역, 표준역까지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이건 도끼가 다른 사람 머리를 명중한.. 다시 말해 투사체가 목표물에 닿은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맞춰서'가 아니라 '맞혀서'가 돼야 한다. 발음은 동일할지라도 말이다.

'맞추다'와 '맞히다'는 “내가 문제를 얼마나 맞혔는지 확인하려고 답안지를 정답지와 맞춰 봤다(대조)”, “총은 영점을 잘 맞춰(세팅) 놔야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힐 수 있다” 이런 관계이다.
다시 말해 맞추는 건 맞히기 위한 준비나 풀이 과정에 가깝다. 아니면 맞혔는지 여부를 확인해 보는 절차랄까? 비슷한 상황에서 쓰이니 헷갈리기 쉽지만, 동일한 표현은 분명 아닌 셈이다.

개역성경이야 워낙 오래됐으니 그렇다 치지만 그게 개역개정이 나올 때도.. 한킹이나 흠정역이 여러 번 교열되고 심지어 표준역이 나올 때도 이 구절은 바뀐 적이 없었다는 게 참 신기하다. 그만큼 사람들이 '맞춰'와 '맞혀'의 차이에 대해 둔감한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부딪치다'와 '부딪히다'처럼 말이다.

3. 듣기만 해도 알아들을 수 있게 번역해야

본인의 오래된 지론인데 말이다.
성경은 가능한 한 동음이의어가 없게, 낭독만 들어도 알아듣는 데 99% 이상 지장이 없게,
텍스트는 한자나 아라비아 숫자 같은 타 문자의 보조 없이 한글(+ 공백, 문장부호)을 쭉 늘어쓴 것만으로도 독해하는 데 지장이 없게 번역해야 하지 않나 싶다.

가령, 사자는 그냥 lion을 나타낼 때만 쓰고, 메신저를 뜻하는 사자는 '전령' 같은 다른 말로 바꿔야 할 듯하다.
'악의'는 아기와 발음이 겹치기 때문에 '악의적' 또는 다른 유의어로 바꾸는 게 더 좋게 들린다.

그리고 '네'는 같은 문맥에서 '너의'도 되고 숫자 4도 될 수 있어서 매우 심각한 모호성이 존재하는 관형어이다. 한국어의 구조 차원의 에러, 버그, 결함이 아닐지? 안 그래도 '내'와 '네'조차 발음 구분이 안 되는 지경인데.
'내/네'는 my라는 뜻으로 굳히고, thy는 '너의'라고 풀어 써 주는 게 현실적으로 덜 어색하고 제일 자연스럽겠다.

아울러 첫날/천 날은 일천 날, 첫째 날 정도로 구분해 주고,
낫게/낮게 → 나은 걸로, 낮은 걸로.. 풀어 줘야 하지 않을까? 이런 건 한자로 해결 가능한 동음이의어도 아니다!

flying → 활용형이 그냥 '나는'이 돼 버려서 이것도 체언과 분간이 안 되고 말이 굉장히 보기 안 좋다.
'비행하는'으로 완전히 대체 가능한 것도 아니고 '날으는'을 허용하든지 뭐 어찌 대책이 나와야 할 것 같다. 심지어 '날으는'조차도 '나르는'과도 구분이 안 되어 완벽한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우리말은 한글 특유의 모아쓰기 특성 덕분에 띄어쓰기를 안 해도 어지간해서는 알아보는 데 큰 지장이 없다. 그리고 적당히 붙여 쓴 게 전체 의미를 한 덩어리 단위로 묶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가끔은 정말로 헷갈릴 때가 있다. '삶은 달걀'(boiled / life is) 같은 예도 있고, 또 '바라바라 하는', '바보'(행 13:6), '노'(렘 46:25)처럼 짧아서 헷갈리는 고유명사도 있다.

헷갈리는 한자어에 대해 괄호+한자 병기를 하기에 앞서, 헷갈리는 고유명사에 대해 별도의 표시가 훨씬 더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 같다.
옛날에는 고유명사들을 별도의 폰트로 표기하기도 했지만 컴퓨터 시대에 서식이 없는 텍스트에서는 그런 걸 어떻게 표현할 텐가? 이런 게 숙제라는 것이다.

저런 문제에 비해서 뭐 "강하고 담대하라"가 비표준어이니까 "마음을 강하게 먹고 담대해져라" 이렇게 늘이는 거는 훨씬 후순위의 문제이다. 그것만 물고 늘어지고는 '거룩하다'는 '거룩하라'라고 잘도 쓰더구만? 형용사· 명사 품사통용은 어차피 절대적인 답이 없는 문제이다.

예전에도 몇 번 했던 말이지만 난 인터넷, 네티즌 이런 말을 어설프게 순화하는 것보다, 장(페이지/챕터) 같은 말을 더 잘 분간되는 말로 바꾸는 게 현실적으로 훨~~씬 더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5/12/14 08:35 2025/12/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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