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가 참 좋다.
늦더위가 지난 9월 중순까지 계속되더니만.. 그래도 한바탕 가을비가 내리고 나니 이제야 여름이 완전히 끝난 것 같다. 낮 기온은 20도 중후반이고 햇볕이 여전히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덥다. 그리고 밤과 새벽엔 기온이 10도 중후반으로 뚝 떨어지고 눈에 띄게 쌀쌀해졌다.
날씨가 이러니 낮에 야외 활동을 하기에도 좋고, 밤에 캠핑을 하기에도 좋다. 무더위가 물러가는 건 좋지만, 호박 농사 시즌도 끝이 보이는 것 같아 일면 아쉽다.
시기가 지난 8월말 이후로 1달 정도 지났으니 이번엔 호박 농사 근황을 좀 전하도록 하겠다.
본인은 호박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보유하고 있다.
- 어딜 가나 늘 휴대하는 저 호박 쿠션
- 사 놓고 실내에서 감상하는 늙은 호박: 지난 8월 중순에 사 놓은 아이들은 아직 잘 있다. 10월 중에 도축해서 호박죽을 만들어 먹을 것이다.
- 실내 창가에서 키우는 호박: 사생활 노출의 여지가 있어서 지금까지 그닥 언급하지 않았지만, 심은 지 1~2달쯤 된 아이가 있고 아주 잘 자라고 있다. 창가를 다 꼬불꼬불 뒤덮었고 덩굴 길이가 4~5미터 정도 됐다. 그런데 아직까지 꽃은 하나도 핀 적 없다. 그냥 영양 생장에만 재미 붙인 듯..
- 집 옥상에다 화분을 놓고 키우는 호박: 역시 지금까지 언급이 없었지만 요 9월 동안 아주 많이 잘 컸다. 열매까지 몇 개 맺혔다.
- 강변에서 무단 경작하는 호박: 지금까지 제일 자주 거론했던 애들이다. 지난 7월 폭우의 피해를 크게 입었지만 이제 많이 회복됐다.
이 글에서는 마지막 두 아이템인 옥상 호박과 강변 호박 얘기를 주로 할 것이다. 먼저 강변 호박.. (9월 초 어느 새벽에 찍었던 저 꽃 사진이 인상적이다~^^)
이 아이들은 7월 물난리 때문에 거의 다 멸망해 버렸고, 일부 잔당 두어 포기만이 슬금슬금 삼손의 머리털 다시 자라듯이 줄기가 새로 돋아났다.
세력이 정말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역시 물난리 이전처럼 다 뒤덮은 지경은 아니다.
게다가 환삼덩굴 잡초들이 그 물난리 직후부터 너무 많이 잘 자라기 시작해서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다. 지금 저 풍경도 잡초를 낫과 가위로 정말 많이 베고 또 베어서 그나마 저렇게 된 것이다.
7월 폭우 전에는 호박들이 알아서 잡초들을 다 뒤덮어 버렸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매번 잡초를 뽑을 필요가 없었다.
호박밭 갈 때마다 잎을 10~20장씩 뜯어 와도 별 티가 안 날 정도였는데.. 이젠 호박이 잡초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잡초한테 뒤덮여서 누렇게 시든 잎도 있고 말이다. ㅠㅠㅜ 폭우 전과 같은 영광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 듯하다.
지난 여름 동안은 강변 무단경작 호박이 싱싱하게 잘 자랐고, 옥상 화분 호박은 비리비리한 편이었다.
잎이 탈모 아저씨의 정수리 머리털이 숭숭 빠지듯이 다 빠지고 앙상해지고 시들어 가니.. 이거 갈아엎고 농사 다시 지어야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랬는데 8월 하순쯤.. 비가 좀 내리고 그때에 맞춰 액상 비료를 발라 줬더니 옥상 호박들이 폭풍 분발했다. 한동안 꽃이 죽어라고 안 피다가 지난 8월 30일에 암꽃이 4송이인가 한꺼번에 폈다~!
이때는 강변 호박의 꽃가루를 자전거로 수송해서 옥상 호박 암술에다 묻혀 줬다. 수분이 다 성공한 건 아니지만 새 생명이 잉태되었다. 원래 7~8월 동안 10여 개는 봤어야 했을 아이들을 9월이 다 돼서야 늦둥이로 구경하는구나.
이 동그란 아이는 2주 동안 잘 커서 사과 정도 크기가 됐는데.. 위의 줄기가 다 시들고 말라 비틀어졌길래 따서 먹었다.
겉에 무늬가 너무 없어서 외형은 좀 이질적이었지만.. 겉이 단단하고 속에는 중심부가 약간 노랗게 익기도 했고 아무 이상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 아이들도 생후 약 2주 만에 맛있는 애호박으로 바뀌었다.
생후 1주일 된 이 아이들의 앞날에 한없는 복이 임하기를..
영양실조(중도 낙과), 악천후, 병충해 안 겪고 무럭무럭 잘 커서
토실토실 포동포동 뒤룩뒤룩 살찌다가
납작둥글 쭈글쭈글한 채로 허옇게 폭삭 늙어 버리기를!
아아, 세상에 어느 식물 채소가 이런 예술적인 삶을 살 수 있으리요?
너는 그 이름도 예뻐서 호박이더라.
살아 생전엔 너를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힐링과 위안을 선사하고,
훗날 살코기를 먹는 사람에게는 좋은 영양분을 공급해 주고,
자기와 똑같은 2세를 ctrl+C, ctrl+V로 퍼뜨릴 튼실한 호박씨도 수백 개씩 듬뿍 남기기를..
이 미천한 씨 뿌리는 자가 씨 맺는 채소의 창조주께 삼가 간절히 축원하나이다.
* 성경의 책 이름도 하박국이 아니라 호박국이었으면 좋겠다. ^^
현재는 이 아이 하나가 유일하게 장기 복무에 합격해서 생후 1달째 됐다. 우왓~~!
7월 물난리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강변 호박에서도 이런 커다란 아이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을 텐데.. 올해 딱 한 번을 못 버텼다. ㅠㅠㅠ
그런데 7월 물난리 이전에 강변에서 몇 개 땄던 작은 호박들은 다 단호박이었다.
일반호박으로서 이 정도로 큰 아이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의 모든 수고는 자기 입을 위한 것이나 그래도 식욕은 채워지지 않느니라” (전 6:7)
호박 농사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 담긴 성경 말씀인 것 같다. ^^
그리고 8월 30일로부터 3주쯤 지났던 9월 22일에는 옥상 호박들이 단체로 암꽃을 한꺼번에 피웠다(5송이). 평소에는 매일 수꽃만 5~10송이씩 피다가 갑자기 암꽃 만발 이벤트 시즌 2가 또 찾아온 것이다. 그나마 이때는 수꽃도 많이 같이 폈기 때문에 여기 호박들끼리 수분이 가능했다.
이걸 보면 호박의 내부 생태는 도대체 뭘까? 쟤들은 머릿속에 무슨 생태 알고리즘이 입력돼 있는 건지 몹시 궁금하다.
(1) 무슨 조건이 만족되면 싹이 나고 무슨 조건이 만족되면 몸집이 커지다가 꽃을 피우고 열매가 맺히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주변이 많이 추워졌을 때.. 10월 중하순이 돼서 호박들이 자기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싶을 때 갑자기 발악하다시피해서 암꽃을 마구 피우긴 한다. 이건 내 경험상 확실한 것 같다. 식물에게도 종족 보존 본능이 있으며, 호박에게 그 정도 지능과 알고리즘은 있다.
그래도 한여름에도 암꽃이 안 피는 건 아닌데..? 이런 세세한 조건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2) 요 근래에 공부(?)를 해서 알게 된 건데.. 식물은 같은 몸체 안에서도 생장 부위별로 영양분과 수분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자기 몸집을 키우려는 놈, 새순을 만들려는 놈, 꽃과 열매를 만들려는 놈 등..
여러 스레드들이 한 리소스를 두고 경합이라도 하는 건가?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경쟁에서 도태 당하면 암꽃 씨방이라도 맺히려다가 말고 시들어 떨어지기도 한댄다. 그리고 열매를 많이 보려면 '필요 이상'으로 무성한 잎이나 줄기는 적당히 제거도 해 줘야 된다.
음 그런 것이구나. 이런 걸 잘해야 호박 박사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3) 화분에다가는 물과 비료를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주 많이 과감하게 줘도 되겠다. 예전에 호박이 자꾸 시들어 가던 게 그냥 물이나 영양분의 부족 때문이었던 것 같다. 비료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주면 식물이 오히려 말라 죽는다는 말에 쫄아 있었는데.. 호박 덩굴이 덩치가 충분히 커진 뒤부터는 그런 말에 너무 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100% 야생인 강변 호박은 이제 뿌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물을 주고 싶어도 못 주는 지경이 됐다. 그런데 여기는 관리 하나도 안 해도 흙이 언제나 적당히 축축하고, 화분 호박보다 대체로 더 잘 자라긴 하는 것 같다.
(4) 요즘은 이상하게도 꿀벌이 보이질 않는다~! 원래 8~9월에도 꿀벌이 있지 않나?
지난 5~7월엔 꽃이 피기만 하면 새벽 5~6시 사이에도 꿀벌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건물 옥상까지 날아다니곤 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호박 암꽃이 있으면 내가 인간 꿀벌 역할을 하고 있다.
이상이다.
난 뭔가 호박이 내게 지금까지 이런 기쁨을 줬으니 나도 그 보답으로 호박을 지켜 줘야겠다~~ 이런 관념이 생겨 있다. 부성애 비스무리한..
강변 호박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옥상 호박은.. 필요하다면 화분을 통째로 들어서 옮길 수도 있는데 앞으로 날씨가 추워지면 보온을 좀 어찌할 수 없겠는지 고민된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