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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 휴게소

경부 고속도로 옥천 구간에는 금강 휴게소라고 말 그대로 금강을 끼고 있는 매우 경치 좋은 휴게소가 있다.
처음에 해당 부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직원들의 숙소로 개발되었다가 나중에 유원지가 조성되었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고속도로의 개통 후 만 1년 만인 1971년 7월 7일부로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얘는 여느 휴게소들과는 다른 특징들이 여럿 있다. 그러니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요즘 관행처럼 상· 하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휴게소를 공유한다. 그러면서 방면별로 차량들이 완벽하게 분리돼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유턴· 회차가 가능하다.
  • 인근에 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 있다.
  • 금강 IC라고 유원지 방면으로 나가는 자체 나들목이 있다(금강 IC).
  • 그리고.. 조령리 마을이라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폐쇄식 고속도로 구간의 내부에 자리잡은 마을이 있다. 마치 전국에서 유일하게 DMZ 내부에 자리잡은 대성동 마을이 있듯이 말이다.

지하철이야 한번 카드를 찍고 개표 구간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는 아무 열차나 마음대로 탈 수 있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인천 공항의 경우, 보안· 면세 구역 안에서 다른 탑승동으로 이동하는 지하 셔틀열차를 탔다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출국 승객과 입국 승객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동선 특성 때문에 그렇다.

그럼 고속도로는 어떨까?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전통적으로 한번 진입한 차량의 유턴· 회차를 허용하지 않는 형태였다. 휴게소도 상· 하행별로 꼭 따로 만들곤 했다.
일반적인 고속도로 이용 차량들이 굳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일은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또한 상· 하행 운전자가 한 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다면 서로 짜고 통행권을 바꿔치기 하는 수법으로 톨비를 실제 이용 거리보다 훨씬 적게 조작해서 낼 수도 있다.

이 고전적인 수법을 봉쇄하기 위해 도로 공사 측에서는 통행권에다가도 차량 식별 정보를 기재하고, 휴게소를 상· 하가 분리된 형태로 만드는 등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제는 하이패스 덕분에 저런 꼼수 걱정 없이 고속도로 이용 차량의 동선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고속도로도 워낙 촘촘하게 많이 건설되어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우회 경로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프 내부에 사이클 많음) 단지 귀찮냐 덜 귀찮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100% 하이패스 기반으로 바뀌고 재래식 통행권이 완전히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가장 먼저 (1) 고속도로 시· 종점의 넓은 톨게이트들의 폭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차들을 번거롭게 세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톨게이트 직원이라는 직업도 마치 과거의 버스 안내양이나 타자수만큼이나 역사 속으로 사라질 테고..
이와 더불어 (2) 휴게소도 상· 하행 공용이고 방향 전환이 자유롭게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게 새로운 유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행담도 휴게소도 얼마 안 되는 상· 하행 공용이긴 한데 오랫동안 상· 하행 차량이 서로 격리 수용되었으며 방향 전환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모다 아울렛' 시설을 통해서 사실상 방향 전환이 가능해졌다.
여담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금강 휴게소는 옛날에 상· 하행 공용으로 만들어졌던 휴게소라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직원 숙소 내지 유원지 시설이 고속도로 휴게소로 개조된 것이니 상· 하행 따로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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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순직자 위령탑이 있긴 하지만, 차도를 횡단해야 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막 수월하지는 않다. 현재의 고속도로가 아니라 아까 답사했던 구도로에서 더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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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과정에서 순직한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77명이라고 집계돼 있지만, 정확한 순직자 명단이 공개된 적은 없다. 정말 77명뿐이고 이 숫자가 맞는지는 이제 와서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무슨 국정원 청사에 새겨진 n개의 별도 아니고 말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데 7월 7일에 맞춰서 일부러 77명이라고 북한스럽게 주작한 거라는 낭설까지 나돌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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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휴게소의 남쪽으로 금강 유원지 근처의 모습은 위와 같다. 보아하니 물을 저렇게 가둬 놓고 수력 발전 같은 것도 하는 모양이었다.
또한, 금강 IC라고 휴게소의 고유한 나들목/톨게이트가 있어서 저 유원지 방면으로 차량이 드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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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휴게소 자체의 내부 모습은 별로 소개하지 않은 것 같아서 사진을 하나 남긴다. 저 건물 자체는 간판의 윤고딕 서체만큼이나 200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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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여행을 통틀어서 내 독사진은 여기서 딱 한 장만 남겼다. 금강을 배경으로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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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으로.. 이것이 금강 휴게소에서 조령리 마을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아래의 굴다리이다. 저기 안엔 민가, 식당, 펜션 정도가 있다. 안에 들어가면 대충 저런 분위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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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저기 있는 어느 식당에 들러서 이번 하계 휴가 특식을 먹었다. 메기 매운탕과 향어회. 민물고기 요리인데 바다 생선 요리만큼이나 맛있었다.

3. 옥천 시내에서 생가 두 곳

본인은 정 지용 시인과 육 영수 여사가 옥천 출신이라는 것을 현장에 가서 도로 표지판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계획에 없었지만 이분들의 생가를 들러 봤다. 차로 금방 갈 수 있었으며, 두 생가도 서로 직선 거리 700m 남짓으로 가까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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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에 있는 정 약용 생가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생가 옆에는 고인의 동상과 문학 기념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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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지용은 잘 알다시피 <향수>라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시의 저자로 유명하다. 윤 동주 하면 <서시>가 떠오르듯이 말이다. 아, 실제로 정 지용은 윤 동주의 선배 겸 스승으로서 그에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저 안내판은 글꼴의 스타일로부터 추측하건대 21세기 작품은 절대 아니고 90년대에 만들어진 것 같다. 1988년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 그보다는 나중이다.

안내판에는 정 지용의 최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는 6· 25 사변 중에 실종되는 바람에 한동안 모든 교과서와 전기에서 생몰년도가 "1902 ~ ?" 라고 기재되었다. 그 와중에 월북 가능성이 점쳐지는 바람에 민주화 이전에는 그의 존재와 작품까지 몽땅 흑역사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8년부터 그런 금기가 해제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추가적인 기록과 증언이 발견된 덕분에 그가 1950년을 넘기기 전에 폭격을 맞아 죽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납북 당하던 중이긴 했지만 북한에서 어차피 제대로 활동도 못 하고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빨갱이 누명도 확실하게 벗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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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육 영수 여사 생가이다.
평범한 초가집이던 정 지용의 생가와 달리, 저분의 생가는.. 무슨 으리으리한 대궐 같았다. 방금 전까지 흥부의 집을 보다가 놀부의 집을 보는 느낌?
집안이 대대로 지주였으며, 일제 시대에 이미 자가용을 굴리고 다녔을 정도로 옥천 지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금수저 부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육 여사의 부친이 처음에 사위를 깔보고 무시할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는데 그 사위가 나라를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돼 버렸으니.. 참 어지간히도 대형 사고를 쳤다.
육 여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로 어질고 훌륭한 대통령 영부인이었다고 추앙받는다. 본인은 뜻하지 않게 이분의 기일에 맞춰서 생가를 구경하게 됐다.
생가는 재건 복원된 레플리카이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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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뭐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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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육 여사의 어린 시절 사진과 유작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원조가카가 부인을 잃은 후에 남긴 시 몇 편이 놓여 있다.
원조가카는 포병 장교 출신의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 악기 연주와 문학에도 능통한 수재였다. 특정 분야에서 완전 넘사벽급 기상천외 비상한 창의성을 발휘한 천재는 아닌 것 같지만, 리더십과 보편적인 지적 능력이 남들 평균보다 더 뛰어난 영재였던 건 확실하다.

지도자에게는 영재가 천재보다 더 어울리는 자질이기도 하다. 지도자는 세부 실무에 천재들을 잘 배치해서 맡기고 관리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니들이 일하는 데 필요한 돈줄은 내가 대 주고 책임도 내가 지겠다. 니들은 좋은 실적 결과물만 내놓아라" 이렇게 말이다.

거기에다.. 소싯적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차별과 무시 당한 건 대놓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긴 칼 찬 군인이 돼서 돌아와서 설욕하고.. 장인에게 무시 당했던 것은 아예 대통령이 돼서 설욕했으니 이 사람의 승부욕과 집념과 끈기도 참 비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은 원조가카에게 매우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으며, 그게 원조가카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불행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공식 석상에서는 장녀인 레카가 영부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원래 영부인만 한 포스는 부족했을 것이고, 이때부터 원조가카도 예전 같은 자제력을 잃고 좀 폭주하려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인이 없으니까 여자 연애인과 여대생에게도 더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암살 당하던 당시처럼 말이다.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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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은 이렇게 넓은 풀밭과 정자(사진엔 안 나왔지만)도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나들이 하기에 좋았다.
옥천에서 경부 고속도로 외에도 이런 답사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7 08:35 2019/09/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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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세상에 덥지 않은 여름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는 폭염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견딜 만했던 것 같다. 작년이 워낙 악몽이었으니 말이다.
본인은 올해도 어김없이 하계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광복절 징검다리 연휴에다가 연차를 추가로 써서 말이다. 강원도, 인천에 이어 올해는 중부 지방 내륙 위주로 돌아다녔다.

이번 여행이 예전의 휴가 여행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은 첫째, 날씨다. 이틀 내내 날씨가 '흐리고 비'였기 때문에 이번 여행 사진에는 파란 하늘이 찍힌 게 없다. 하지만 여전히 습하고 더웠기 때문에 땀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으며 냉방이 필요했다.
그리고 둘째, 내륙 위주로 돌아다니느라 이례적으로 바다에는 못 갔다. 바다 물놀이는 그 전 주말에 마침 부산에서 볼일이 생긴 덕분에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겸사겸사 하고 왔다.

3년 전에 학술대회 참석 때문에 10월이 다 돼서야 부산에 들러서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만, 해수욕장이 정식으로 개장해 있는 실제 피서철에 저길 가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잔잔한 호수나 다름없던 서해와 달리(작년 을왕리 기준), 여기는 파도와 수심이 급이 달랐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서해는 해변으로부터 최하 100미터 이상은 진입 가능하며 안전 부표도 저 멀리 떨어져 있고, 심지어 썰물 때는 부표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기도 하지만.. 동해는 그런 거 없다. 부표가 해변에 훨씬 더 가까이 있으며 사실은 모래밭 바닥의 경사부터가 서해보다 훨씬 더 급격하다.

바다에서 사람이 접근 가능한 영역은 매우 좁은데 사람은 많고 바글바글하니.. 해운대에서는 물에 들어간 채 돌아다니기는 어렵고 그냥 제자리에서 파도만 맞다가 나와야 했다. 아무 대비 없이 복부에 맞으면 좀 아플 정도로 파도가 강했으며, 성인 남성인 본인도 신체가 앞으로 떠밀릴 정도였다.
아울러, 해운대는 여느 한적한 시골 해수욕장과는 딴판인 곳인 관계로, 모래밭에서 텐트를 칠 수는 없더라.

뭐, 바다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번 여행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먼저 (1) 옥천-추풍령 사이에서 경부 고속도로 심층 탐구 답사를 했으며, 그 다음 (2) "군인 없는 양구"라 불리는 영양과 봉화 일대에서 자연과 철도를 즐겼다.

1. 경부 고속도로 옛 구간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뒤, 곧장 옥천으로 갔다. 중간에 용인-서울 고속도로 등 다른 곳도 들르면서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번 여행 때는 오로지 경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경부 고속도로는 내년이면 벌써 개통 50주년이 된다. 지금이야 경부 고속도로는 수도권 한정으로 도로 바로 옆까지 아파트가 지어져서 거대한 방음벽이 둘러졌으며, 무려 8~10차로로 확장되고도 차들로 몸살을 앓는 지경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1970년에 갓 개통했던 당시에는 얘는 전구간이 겨우 4차로일 뿐이고 주변은 온통 그냥 논밭이었다. 비상 활주로 공용(신갈, 천안, 김천 어딘가?)이어서 제대로 된 중앙분리대가 없거나, 아니면 그냥 화단 형태로 만들어졌던 구간도 있었다. 거기에다 다니는 차량도 매우 적으니, 인근 주민이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최초로 6차로 이상으로 확장된 구간은 1987년, 회덕-남이 사이이다. 서울-수원 구간은 6차로를 거치지 않고 1991년에 곧장 8차로로 확장되었고, 2010년대가 돼서야 판교 주변 등 일부 구간은 10차로까지 확장됐다. 여기 말고도 곳곳이 도로를 다시 만드는 수준의 선형 개량과 확장을 거쳤기 때문에 지금 경부 고속도로 개통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구간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고속도로를 처음 만들 때 열악한 여건 하에서 너무 날림 졸속으로 만든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원조가카도 "내가 야당이 하도 반대해서 일단 4차로만 만들지만.. 얘는 앞으로 너무 비좁아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길가에 건축을 허가하지 말고 언제든지 확장 가능하게 대비해 놔라" 이런 예상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마치 옛날에 갑작스러운 북괴 남침 때 정부가 너무 허둥거리고 미숙하게 대처한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할배 자신은 "북괴가 곧 반드시 남침할 것"을 알고 미국에다 계속 더 도와 달라고 지원을 요청했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이 묵살당했으니 이에 대해서는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있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거라는 것까지 예견했던 선각자가 북괴의 침략을 예견하지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본인은 그렇게 경부 고속도로의 어제와 오늘은 모습 차이가 어떠했을지를 생각하면서 운전했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구간만 좀 막혔지 그 뒤부터는 쌩쌩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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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동이면에서 옛날 고속도로가 현재의 고속도로와 나란히 지나는 흔적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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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로는 한쪽만 재포장 되었고 나머지 구간은 그냥 주차장 공터처럼 쓰이고 있다. 마치 과거에 경의선이 복선이었다가 국토 분단 후에는 단선만 쓰이게 됐던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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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고속도로 구간이었던 '금강2교'이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니 여행이 더욱 운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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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니 거대한 공터가 나타나 있었다. 캠핑 하기 딱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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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쭉 달렸다. 길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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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폐선 같은 감흥을 고속도로 폐구간에서 경험하게 될 줄이야..
여기 길바닥 아무데서나 텐트 치고 혼자 고독을 즐기며 밤을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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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옥천 터널, '그분'이 임박했다~!
저 촌스러운 한글 글자는 '어설픈 둥근고딕' 계열보다도 더 오래된 197, 80년대 작품임이 틀림없다.
터널의 이름이 처음에는 '당재 터널'이다가 나중에 '옥천 터널'이라고 바뀌었는데...

언제 개명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개명되고 나서 처음 만들어진 표지판이 한 번도 안 바뀌고 저렇게 전해진 것이지 싶다.
밑에 로마자 표기만이 훗날 로마자 표기법의 개정으로 인해 땜질 형태로 바뀌었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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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현역 시절의 옛날 사진으로만 보던 그 터널 입구를 직접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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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터널은 위의 사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행과 하행이 서로 모양과 길이가 다른 짝짝이로 만들어졌다.
얘로 말할 것 같으면 대전-대구 사이의 난공사 구간 중에서도 손꼽히는 가히 최악의, 마의 구간이었다고 한다.

기술과 노하우라고는 쥐뿔도 없던 열악한 시절에 거기는 지형도 참 지랄맞았던 것 같다. 발파를 한번 했다 하면 지반이 무너지고 토사가 흘러내리고 현장이 황폐화되는 현실에 직면했다. 여기서만 공식 통계상 낙반 사고 13건에 9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인부들은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특히 터널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느티나무를 베어 버렸더니 산신령이 노해서 이런 사고가 나는 거라는 낭설이 쫙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느티나무를 베라는 명령을 내렸던 어느 공병 중령 장교조차 그 다음날 교통사고를 당해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부들이 너무 겁먹은 나머지 작업 지시를 거부하고 도주할 지경이 됐으며, 일당을 몇 배로 더 올려 준대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간부들이 이들을 달래느라 왕창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어렵고 힘든 건 알겠다만, 개통 날짜는 정해져 있고 그때 무려 대통령 각하께서 참석하실 예정이다. 개통식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연기할 수 없으니 무조건 까라면 까라. Impossible is nothing이야. 못 하면 너네 회사 문 닫을 줄 알아!"라고 시공사인 현대 건설을 무식하게 쪼아 댔다. 어휴.. 그땐 그랬다.

그러니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높으신 관리자들도, 심지어 정 주영 현대 회장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과로를 감내하며 아예 현장에서 죽치고 살아야 했다. 중장비를 조종하던 인부가 도중에 화장실에 갈 여유도 도저히 없어서 참다못해 운전석에 앉은 채로 바지에다 쌌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그나마 현대 건설에서 일반 시멘트보다 만들기 어렵고 훨씬 더 비싸지만(단가가 2배 이상) 수십 배가량 더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를 동원하는 묘책을 내서 공기를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영업수지 흑자를 포기하고 말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옥천 터널은 거의 30년 동안 쓰이다가 지난 2003년, 옥천 구간의 선형 개량과 이설로 인해 고속도로 구간에서 제외되었다.
하행 터널만이 2차선 도로로 쓰이고 있고, 상행 터널은 폐쇄되어 김치 저장 창고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와인 저장 창고로 쓰이고 있는 경부선 철도의 옛 성현 터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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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나온 뒤에도 계속해서 이런 멋진 길이 이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과거의 경부 고속도로 본선 구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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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옛 고속도로의 흔적은 옥천의 거의 동쪽 끝에서 구도로가 신도로와 다시 마주치는 듯하면서 끝났다. 현재 고속도로로 치면 '영동1터널'을 동쪽으로 지난 지 얼마 안 된 지점이다.
본인은 다시 옥천 방면으로 돌아와서 여기 일대의 나머지 관광을 시작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4 08:33 2019/09/0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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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호 일대는 강물이 십자형으로 만나는(세로: 북한강과 경안천, 가로: 남한강과 한강) 교차로일 뿐만 아니라, 행정구역도 남양주(북서)와 양평(북동), 하남(남서)과 광주(남동)로 제각기 갈리는 굉장히 흥미로운 곳이다.
주변의 지형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면 얼추 아래와 같다. 각 사분면별로 땅의 이름, 강의 이름, 산과 강변 공원과 교량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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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 교차로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남한강 이남에도 행정구역상 양평이 있으며, 경안천 서쪽에도 광주시 퇴촌면이 있음.)

여기 주변은 상수원 보호를 위해 개발이 절대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의 정취가 물씬 풍기며 경치도 대단히 아름답다. 다산 생태 공원과 두물머리 공원에 대해서는 본인이 예전에 답사기를 올린 적이 있다.
하지만 강북 말고 강남, 특히 광주시 쪽은 딱히 갈 일이 없었고 접근도 쉽지 않기 때문에 오랫동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양평에서 약간 남쪽으로 남한강만 건너면 되는데 접근이 어려운 이유는... 거기 주변에는 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동쪽의 양평 시내 쪽으로 한참을 더 가면 양평대교가 나오지만 그건 2012년에야 건설된 것이고 그마저도 고속도로용(45번 중부내륙)이기 때문에 일반 차량들은 이용하지 못한다.

광주시 쪽의 남한강변으로 가려면 남쪽으로라도 잔뜩 내려가서 경안천을 건너는 광동교를 건너야 한다. 저기는 거의 고립된 섬이나 마찬가지 같으며, 개인적으로는 '광주섬'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을 정도이다. 가까운 미래에 남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저기 주변에 생길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월엔 본인은 여기에 한번 가 볼 기회가 생겼다.
본인 어머니의 어느 친구분이 은퇴 후 바로 저기 일대의 시골 마을에 주말 농장을 분양받으셨기 때문이다. 본인은 어머니를 따라 거기에 한번 놀러 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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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왔는데 밤에 잠은 당연히 밖에서 잤다. 이 당시 한낮에 30도를 훌쩍 넘는 7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에는 침낭을 덮어야 할 정도로 쌀쌀했다.
물론 본인은 이런 날씨가 아주 좋았다. 비까지 오면 완전 금상첨화였을 텐데~!

본인은 집과 직장에서 내내 버그와 싸우다가 불금을 기념하여 여기를 찾아갔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도시에서 보지 못한 진짜 버그들과 대판 싸우게 됐다. >_<
자그마한 벌레들이 컴퓨터나 자동차 내부로 들어가서 기계의 동작을 물리적으로 망가뜨릴 것만 같았다.

이런 경험을 해 보면 단순히 도시에 꾸며져 있는 공원의 풀숲하고 진짜 시골의 풀숲은 이런 데서 야생의 급이 차이가 난다는 것과, 텐트의 방충망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또한, 생명 자연발생설을 믿었던 옛날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_-;; 하긴, 흐르는 물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 지렁이가 흙을 삼켰다가 뱉으면서 땅을 기름지게 해 준다는 것, 구더기가 파리의 유충일 뿐 둘이 같은 종이라는 것 등도 인류가 알아낸 지 생각만치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 걸 선뜻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평균적인 비위와 근성이 강하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시골에서는 인공물이 별로 없으니 음식물 정도의 쓰레기 투척이나 노상방뇨에도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다. 글쎄, 기생충 같은 위생 차원에서는 그것도 너무 많아지면 별로 안 좋긴 하지만..
자연이 어지간한 생체 배설물· 폐기물을 자체적으로 정화하는 능력은 컴퓨터로 치면 garbage collection을 떠오르게 하는 것 같다. 스타에서도 생체인 저그는 테란· 플토와 달리 자기 체력이 천천히 자체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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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섬을 감싸는 지방도 342호선은 강을 따라가는 동시에 꼬불꼬불한 산도 타는 경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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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강변을 따라 공원과 산책로도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방문하던 당시에는 너무 더워서 구경만 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가을쯤에는 여기서 돗자리 펴고 더 오래 있을 수 있겠다. 물론 더워도 날씨가 아주 쾌청하니 풍경 사진을 찍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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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섬의 서쪽에는 하중도에 '팔당 물안개 공원'이라는 게 있었다. (혹은 팔당물 안개 공원?? 띄어쓰기가 확실치 않음 ㅡ,.ㅡ;;) 녹지의 면적으로만 따지면 두물머리와 다산 공원을 아득히 능가한다. 하중도와 본토를 연결하는 교량 아래에는 연꽃이 잔뜩 심어져 있었다.
산책로는 거리가 편도로만 1~2km에 달하기 때문에 이 더운 날 도보 답사는 할 수 없고, 그냥 조금만 살펴보고 돌아왔다.

여기는 넓고 경치는 좋지만 서울 방면에서의 교통 불편과 홍보 부족, 그리고 이 뙤약볕에 그늘이나 화장실, 카페, 편의점 등 보조 시설이 부족한지라 토요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별로 없었다. 본인도 이제야 처음 알게 됐을 정도이니 이 공원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덥긴 해도 두물머리나 다산은 이 시간대에 이 정도로 한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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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다음으로는 팔당 전망대 부근에서 강을 바라보며 풍경 사진을 남겼다. 딱히 산 같은 고지대가 아닌 곳에 '전망대'라니 심상이 좀 어색하다만, 여기는 맨 위의 일러스트에서 진짜로 원점에 해당하는 중심지이다.
전망대 주변에는 카페와 식당이 여럿 있고, 좀 외곽에는 짙은 분홍색으로 칠해진 모텔도 있었다. 산 좋고 물 좋은 동네에서 데이트 하다가 잠은 여기서 자라는 건가 싶다.;;

이렇게 광주섬(?)에 눈도장을 찍고 땅밟기를 마쳤다.
정암산 등산도 하고 싶은데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야말로 광주섬에 대한 총체적인 관광을 하는 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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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호 주변은 상수원 보호 명목으로 사람이 얼씬도 할 수 없다. 저렇게 공원이 꾸며져 있으면 그것만으로 감지덕지지 팔당댐 근처는 아예 철망·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본인은 문득 한강 물을 가까이서 체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뚝섬 한강 공원에 들렀다.

10여 개에 달하는 서울 한강 공원들 중 투톱은 여의도와 뚝섬이지 싶다. 둘 다 지하철역 접근성이 아주 좋은 데다 여의도는 위치가 너무 좋고, 뚝섬은 한강 공원들이 여기저기 조성되기 전부터 이미 민간 싸제 유원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뚝섬의 경우 지금도 국공립 시설뿐만 아니라 민간 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는데, 그 중엔 '아리랑 하우스'라고 커페, 레스토랑과 오리보트 대여 서비스를 하는 곳이 있다. 여기 말고 한강에서 오리보트를 탈 수 있는 곳이 한강 공원에 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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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보트는 자전거처럼 페달을 밟아서 돌리는 것 말고 전동 모터가 달린 것도 있으며, 대여료도 더 비싸다. 보트 한 척에는 최대 3명(240kg)까지 탈 수 있다더라.
전동이라 해도 그냥 빠르게 걷는 수준이다. 수면에 긴 여파를 남기면서 시속 수십 km로 질주하는 고속 모터보트는 따로 있으며 요금도 더 비싸다.

운전하는 게 놀이공원 범퍼카 같은 느낌이다만.. 그렇다고 다른 배에 일부러 부딪치지는 말아야 한다.
또한 한없이 멀리 나가거나 아예 강 건너편으로 갈 수도 없다. 부표 이내에 가로· 세로 공히 200미터 남짓한 사각형 영역 안만 돌아다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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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교량이 아니라 쪽배로나마 한강 서울 구간의 수면을 자가운전으로 돌아다녀 보는 건 이게 태어나서 거의 처음이었다.
여기도 엄연히 방대한 면적의 물이 흐르는 구간이니, 나름 바다 냄새가 나고 바람도 육지보다 더 많이 불어서 시원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8/24 08:33 2019/08/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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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두물머리 공원

여느 봄이 다 그랬겠지만 지난 5월부터 6월 초 정도가 날씨가 참 좋았다. 한낮에 건물이나 차량 안에서는 에어컨이 필요하지만 아직은 열대야 따위 없이, 더워도 기분 좋게 더웠기 때문이다.
바람 불거나 그늘에 들어가거나 해가 지면 금세 시원해지고, 밤에는 20도나 그 아래로 아주 서늘해지고.. 건조해서 빨래는 금방 마르고.. 지금 이 상태에서 더 덥지만 않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이럴 때가 나들이 가기에도 아주 좋은 시기이다. 그래서 본인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동쪽으로 달려갔다.
재작년에 비슷한 컨셉으로 남양주 다산 유원지를 갔었는데 그때는 날씨가 흐리고 비까지 와서 충분히 경치 구경을 못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날씨가 최적인 덕분에 자연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들어 오던 양평 두물머리 공원부터 들른 뒤, 다음으로 다산 유원지를 다시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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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양평으로 가는 길은 뭐랄까 신세계로 가는 느낌이다.
일명 '구도로'는 예빈산과 한강 사이의 틈새에 구불구불 만들어져 있는데, 1990년대 이전에는 이게 국도 6호선이었다. 그러나 더 곧은 길이 개통하면서 그게 국도의 지위를 대체하게 됐다. 새 길은 산을 팔당 1~4터널 시리즈로 뚫고 지난다.
위의 사진은 물론 구도로의 모습이다. 강 건너편엔 검단산이 보인다.

새 길은 '경강로'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옛 길의 남양주 구간은 '다산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울에도 지하철 6호선 버티고개-신당 사이 구간의 길이 다산로이며, 다산 콜센터도 있으니 정 약용의 흔적을 서울과 남양주에서 두루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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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 공원의 첫 모습은 이런 넓은 공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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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에는 남한강이 보이고 뒤에는 카페들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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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편까지 최단 직선 거리를 잡아도 750m 남짓이다. 옛날에는 이 자리에 나루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요즘은 아예 다리를 놓거나, 바다의 섬들을 왕래하는 연락선을 굴렸지 겨우 강을 건너는 나룻배는 완전히 전멸했다. 배에도 정식 선장과 항해사, 기관사가 있을 뿐이지 겨우 노 젓는 뱃사공은...;; 참 낭만적이긴 하지만 비현실적인 직업이 됐다. 인력거의 수상 버전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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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강이 곁들어진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그래서 풍경 사진을 여러 장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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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흙길 공터 대신 넓고 푸른 초원과 좁은 산책로가 이어졌다. 보기만 해도 멘탈이 힐링힐링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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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계속하자 바닥이 동그란 광장과 함께 '두물경'이라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여기가 땅의 모서리이며, 여기 전방이 남한강· 북한강이 합쳐져서 한강으로 바뀌는 교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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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후로도 아름다운 경치는 계속 펼쳐졌는데, 여기까지만 소개하도록 하겠다.
혼자 가서 독서와 사색이나 코딩 삼매경에 빠지기 좋고, 연인이 있다면 같이 데이트 하기에도 좋고, 아예 처자식이 딸렸다면 같이 놀러 가도 좋은 곳이다.

다만, 여기는 벤치에 앉으면 앉았지 돗자리를 깔고 놀 만한 곳은 별로 없다. 그럴 목적으로는 서남쪽의 다산 유원지(다산 생태 공원)가 더 낫다. 본인은 2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거기도 다시 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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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옷, 유채꽃이 날 반겨 줬다.
양평 두물머리 공원이 여의도 같은 섬이라면, 다산 유원지는 본토와 단절되지는 않았지만 혼자 강으로 쑥 튀어나온 일종의 '곶'이다.
주차는 다산은 완전 무료이고, 두물머리는 공영 주차장 말고 강에서 제일 가까이 있는 싸제 주차장은 고정 요금 2000원을 징수했다.
참고로 양평과 남양주 모두 무료 와이파이를 쏴 주고 있어서 공원 안에서도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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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최대한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구간은 다산이 두물머리보다 더 길게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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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두물머리 만만찮게 넓고 푸른 초원이 많이 널려 있었다.
이런 수풀뿐만 아니라 돗자리를 깔 수 있는 풀밭도 있고 말이다. 다만, 텐트를 치는 건 낮· 밤을 불문하고 금지였다.
사진을 더 많이 찍긴 했지만 귀찮아서 제일 특징적인 것만 소개하고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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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건 다산 생태 공원의 특징을 적당한 색채와 적당한 구도로 잘 담은 풍경 같다.
종합하자면, 두물머리의 강점은 넓고 웅장한 자연의 비주얼, 그리고 긴 산책로이다.
다산의 강점은 강을 더 가까이에서 구경하면서 자연의 정취를 느끼며 쉬는 공간이다. 여기 일대에 놀러 갈 생각이 있으신 분은 이 점을 참고하면 되겠다.

여기를 구경한 뒤 본인은 근처의 예빈산 중턱에서 텐트 치고 야영도 하고 싶었지만.. 보급 부족과 피곤 등 여러 이유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그냥 귀가했다. 예빈산은 아직 등산도 못 한 산인데.. 언젠가 꼭 도전하고 싶다.

글을 맺으면서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남양주는 생각보다 꽤 큰 도시인 것 같다.
보통은 불암산과 수락산의 동쪽으로 별내, 퇴계원, 그리고 포천과 가평 근처까지 '경춘선' 라인이 남양주라고 일컬어지는데..
한편으로 양평 방면으로 덕소, 팔당, 그리고 한강을 접하는 다산 유원지까지도 남양주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는 남양주의 완전 남쪽 끝이며, 남북은 산으로 가로막혀서 생활권이 단절돼 있다. 남양주는 도농 복합일 뿐만 아니라 다핵도시인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8/21 08:36 2019/08/2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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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

1. 컴퓨터와 인간

전에도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 싶은데..
컴퓨터는 전원을 넣은 뒤에 실제로 사용 가능해질 때까지 준비 시간이 대단히, 가장 긴 전자 기기에 속한다.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 컴퓨터와 단순 계산기를 비교해 봐도 차이를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컴퓨터에는 '부팅'이라는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하드디스크 대신 SSD 덕분에 부팅 속도가 굉장히 빨라지긴 했지만, 컴퓨터가 사용 가능해질 때까지 내부적으로 무수히 많은 준비 작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 그런 걸까??
범용 컴퓨터는 타 전자 기기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넘사벽급으로 확장과 프로그래밍 활용도가 높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선천적으로 할 줄 아는 건 없다시피하고 프로그램만을 기막히게 빨리 잘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컴퓨터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전자 기기라면 회로 하드웨어 차원에서 콕콕 박혀 있을 명령과 데이터도 다 일일이 매번 메모리에다 새로 주입해 줘야 하며, 자신과 일체형이 아닌 타 하드웨어들을 감지하고 초기화하고 점검해 줘야 한다. 오늘날의 컴퓨터가 괜히 '프로그램 내장형'인 게 아니며(메모리에 내장), 그러니 이런 오버헤드가 클 수밖에 없다.

컴퓨터와 단순 비교는 안 되겠지만, 인간만 해도 직립보행과 큰 두뇌를 얻기 위해 타 동물들에 비해 생물학적으로 다른 장점을 희생한 게 많다고 한다. 태어난 직후엔 다른 어떤 동물의 새끼보다도 무능하고 연약한 상태이며,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엄마 품에 오래 있어야 한다. 비슷한 덩치의 다른 동물에 비해 힘이 약하고 소화 효율도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그 연약한 인간은 동물이 상상도 할 수 없고 신묘막측의 영역에 가까운 언어 습득과 구사 능력이 있으며,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불을 다루는 능력도 지구상에서 인간 외에 다른 어떤 생명체도 갖추고 있지 않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이 스스로 불을 피운다거나 돌멩이를 집어서 던질 줄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공깽일 것이다. (뭐, 그래 봤자 인간에게 제압당하는 건 변함없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컴퓨터가 타 전자 기기들과 구조적으로 다른 것만큼이나 인간도 다른 포유류와 구조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둘이 서로 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양상이긴 해 보인다.

2. 정치와 종교 싸움

인간이 나누는 여러 대화 주제들 중에 정치와 종교는 제일 골치 아프고 답 안 나오며 사람을 친구 아니면 적으로 극단적으로 가르는 분야이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자존심을 걸고서 자기 신념을 고집하는 분야이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이런 주제는 안 꺼내는 게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분야에 어느 정도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그저 먹고 자고 싸고 씨 뿌리는 욕망만 충족되면 되는 개돼지 짐승이 아니며, 그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가치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크리스천에게는 종교관 한정으로 복음 전파의 의무도 있다.

둘 중 정치는 내가 속한 "집단의 현재 현실" 또는 가까운 미래와 관계가 있다. 내가 낸 세금을 정치인들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쓰지 않고 사회와 국가· 민족 전체를 공멸로 몰고 가고 있다면, 이에 대해 분노하고 항거하는 것이 개인의 권리이자 어느 정도 의무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이 뻘짓 한 게 당장 나에게까지 돌아와서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 반면, 종교는 "개인의 가치관(특히 경전의 해석 체계) 내지 영원", 먼 미래(특히 죽음 이후)와 관계가 있다. 현실 그 자체인 정치와 달리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분야에 대한 신념을 다루며, 스케일도 집단이 아니라 개인으로 줄어든다.

정상적인 정교 분리 국가라면, 주변에 온통 자신과 종교관이 다른 사람뿐이라고 해도 세금이 낭비된다거나 국가 안보가 무너진다거나 하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이게 다르면 사람간에 어느 수준 이상으로는 더 가까워질 수 없어진다. 특히 이것 때문에 결혼도 못 하고 파토 난다.
이렇듯, "집단의 물질적인 현재"와 "개인의 영적인 미래"를 다루는 두 축은 인간의 자아 및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동일한 분별력과 믿음과 양심이라면 정치 성향과 종교관도 뭔가 일관되게 동일하게 나오지 않겠나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본인과 신앙관이 일치하고 정치 성향만 정반대인 사람, 혹은 반대로 정치 성향만 일치하고 종교 쪽은 정반대인 사람도 많이 봐 왔다. 글쎄, 어떤 건 취향 존중의 영역이겠지만.. 명백하게 옳고 그름의 영역인 것까지 좌우 균형 취향으로 왜곡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3. 인종간의 우열?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라고.. 20세기 중반에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엄청난 생물학자가 있다. 이과 출신이라면 다들 이름을 기억하실 것이다. 크릭은 2004년에 사망했지만 왓슨은 90대의 나이로 현재까지 살아 있다. (과거 vs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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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람은 획기적인 연구 성과 덕분에 노벨 상을 받고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으나.. 나중엔 무슨 마가 꼈는지 유전자 차원에서의 인종의 우열 운운하는 또라이 같은 망언도 많이 늘어놓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늘그막의 이미지를 많이 구겼다.
인텔의 창업주인 누구누구가 엔지니어로서는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노조를 탄압한 악덕 기업주였네 뭐네 하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저 사람들은 기업가가 아닌 학자였고, 단순히 돈만 밝힌 것하고는 흑역사가 차원이 달랐다.

타 분야의 전문가가 자기 전공과 무관한 정치· 종교· 이념 쪽으로 어그로를 끄는 것도 아니고, 유전자 쪽 연구의 넘사벽급 전문가가 직접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니 논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백인과 흑인이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갖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흑인 직원을 다뤄 본 사람이라면 내 말에 다들 공감할 거다." / "인종 간 지능의 우열을 가리는 유전자가 앞으로 10년 안에 발견될 수 있을 것" ... ㅡ,.ㅡ;;

이 때문에 왓슨은 국제 왕따로 전락해서 강연 초청과 책 출판 계약이 몽땅 짤리고.. 한때는 생계를 위해 노벨 상 메달을 경매에 내놓기까지 했을 정도로 몰락했다고 한다.
학자가 논문 표절, 연구 결과 조작, 연구비 횡령, 마루타 실험-_- 같은 업무상의 비윤리적인 짓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사상과 신념이라는 외부 요인만으로 학계에서 매장 당하기란 참 쉽지 않을 텐데.. 저 사람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안 그래도 진화생물학 진영에서는 진화론은 우생학과 아무 관계 없다고 못을 박으며, 기독교 창조론자들이 벌이는 진화론 비방(?)과 음해를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왓슨과 크릭의 언행은 진화론이 동일선상에서 비방 받을 빌미를 잔뜩 제공하게 됐다. 물론 교인들도 밖에서 개독 소리 들을 짓, 예수 이름이 모독 받을 짓을 한 게 많으니 서로 상쇄되는 건가.. -_-;;;

이 점을 감안하여 본인은 거리 설교를 하면서 기원에 대해 잠깐 언급할 때, 진화론을 대놓고 공격하고 욕하지 않는다. 단지, 우주와 생명이 다 우연히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는 게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만 말한다.

난 왓슨 저 양반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취지는 얼추 알 것 같다. 백인들이 탁월한 과학 기술로 세계를 정복했으며, 나머지 나라 사람들은 미개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말을 저렇게 공공연하게 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저 사람이 비정상적인 PC(정치적 올바름) 트렌드를 저격하면서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고 동성애는 잘못됐다, 빨갱이는 박멸해야 된다" 같은 식으로 과격한 말을 한 거라면 성경적으로 실드 받을 여지라도 있을 텐데.. 저건 아무 실드 없이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일 뿐이다.

인종 간에 유전자 차원에서 지능의 우열이 정말 있을 수는 있다고 치자.
평균 이상으로 천재 괴수들을 줄줄이 배출한 가문이 있다면 저 사람들은 유전자 차원에서 뭐가 있는지 궁금해질 법도 하다. 실험 결과가 참 불편하게 느껴지겠지만 그걸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객관적으로 규명할 수만 있다면 과학자의 연구 대상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연구가 정치 개입 없이 객관적으로 제대로 진행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우며, 그건 십중팔구 "열등한 인종은 없애 버려야 된다, 고자로 만들어서 대를 끊어야 된다" 같은 나치즘 내지 다윈 상을 암시하는 결론으로 곡해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혼자만 하고 마는 것도 아니고 공공연하게 표현까지 하는 건 미친 짓 위험한 짓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지 싶다.

난 개인적으로는 인종뿐만 아니라 언어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우열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로마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가 우열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어떤 언어는 다른 언어보다 더 오버헤드 적고 간결하고, 학문이나 기계화나 성경 번역 같은 용도에 구조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어휘, 문법, 문자 표기 등등을 총체적으로 따져 봤을 때 말이다. 선천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의 비율까지는 차마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런 견해를 피력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고, 열등한 언어를 쓰는 사람은 머리를 개조해서 모국어를 강제로 바꾼다거나 나가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총체적인 검증과 비교가 가능하지 않으니 이런 생각은 혼자만의 심증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오늘날 언어학 전공자들은 문화 제국주의 운운하면서 언어의 기원이나 우열 같은 거 따지는 짓을 절대 금기시하고 불가지론으로 부치고는 있다. 그러나 언급을 꺼린다고 해서 실체 자체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도 덕이 안 되는 짓이고.. 참 어려운 문제이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9/08/07 08:34 2019/08/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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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대로에서 중랑천 서쪽 구간은 남북으로 동대문구와 성동구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성동구에서 중랑천과 청계천으로 둘러싸인 삼각형 비슷한 지대는 뭐랄까.. 서울 시내이면서 서울 같지 않은 냄새를 물씬 풍긴다.

평범한 주택이나 업무 시설이 아니라 군자 차량기지부터 시작해서 빗물 및 하수 처리장,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스 탱크, 남쪽 끝에는 성동 자동차 검사소.. 민간인이 범접하기 어려우며 교외 변두리에나 있을 법한 인프라 시설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한 장한평은 중고차 시장과 자동차 부품 상가가 유명하기도 하다.
그러니 여기 일대에 지하철 차량기지까지 들어선 것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성수에서 용답까지 없는 길을 일부러 만들어 가면서 괜히 애쓴 게 아니었다.

그런데 2010년대 이래로 이 동네가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하수 처리 시설의 일부가 복개되어 지하로 들어가고, 그 위의 부지가 공원으로 꾸며지는 듯하다.
근래에는(2017) '서울 새활용 플라자'라고 이름만 들어도 용도와 성격이 짐작되는 시장 겸 공공시설이 들어섰으며, 바로 옆엔 '서울 하수도 과학관'이라는 것도 나란히 생겼다.

결정적으로 하수 처리장의 이름마저 '물 재생 센터'라고 바뀌었으니, 이 동네는 친환경, 재활용 산업이라는 컨셉을 표방하면서 꼬질꼬질한 과거 이미지를 벗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안 그래도 천호대로 일대의 군소 하천들을 답사하던 와중에 거기 정도면 방문하기 아주 좋은 곳이다. 그래서 본인은 거기를 찾아갔다.

새활용 플라자는 천호대로에 가까이 위치한 서울 청년 회의소에서 500m쯤 남쪽에 있다. 걸어서 못 갈 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외진 곳에 있기도 하니.. 장한평 역 8번 출구 인근에서 대략 20분 간격으로 25인승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된다고 한다. 뭐, 본인은 자전거가 있으니 이 정도는 이동하기 딱 좋은 거리와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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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는 이렇게 생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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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여기가 정녕 서울 한복판이란 말이냐...;; 주변의 넓은 풀밭 벌판에 압도되어 버렸다. 옛날에 서울 마곡 미개발 지대를 보는 것 같았다.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부터 한 바퀴 돌면서 경치 감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는 주차료가 징수되는 구역 내부이기 때문에 자동차는 아무나 못 들어온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울타리나 출입 금지 표지판도 없고 사람 몸은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있다.

여기에 각종 공원 시설들이 본격적으로 지어지고,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덜 유명하고 황량한 지금 모습을 기록으로 많이 남겨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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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 동안 공사를 많이도 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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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관? 박물관 내부에는 시설의 명칭에 걸맞게 우리나라의 하수 처리 시설의 변천사에 대한 자료가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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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물 지도이다. 나름 하천이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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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이런 물 재생 센터는 총 네 곳 있다. 난지도 같은 쓰레기 처리장의 액체 버전이라 할 수 있는데..
난지와 서남은 각각 고양과 김포에 근접한 너무 서쪽 끝에 있고, 동남쪽의 탄천에도 하나 더 있다. 그나마 중랑은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이면서 서울 시내와도 그리 멀지 않으니 위치가 가장 좋다.

또한 중랑은 인서울 하수 처리장 중에 제일 먼저 생긴 곳이라고 한다. (나머지 세 곳은 80년대의 한강 종합 개발 사업 때 만들어졌지만 얘만은 박통 때 만들어짐)
근처의 군자 차량기지는 공교롭게도 최초의 인서울 지하철 차량기지인데.. 기막힌 인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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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도 과학관을 포함해 물 재생 센터까지 시설 전체의 축소판 미니어처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 봤던 그 황량한 벌판에는 앞으로 꽃밭과 연못이 조성되려는가 보다. 난지도 하늘 공원 같은 공원이 여기에도 생길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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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매립지에서 메탄 가스를 수집해서 열병합 발전을 하듯이, 하수 처리장에서도 메탄 수집이 가능한가 보다. 게다가 소규모로나마 수력 발전도 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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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이 저 정도로 중요한 자원인지 몰랐다. 질소처럼 생명체를 구성하는 원소 중 하나이며, 비료 내지 화약의 제조에도 쓰인다.
'나우루'라고 석유도 아닌 인광석 하나만으로 벼락부자가 됐다가.. 그게 고갈되면서 쫄딱 망한 나라가 있긴 했다.

이런 전시관 자체는 그냥 한 층이 전부이고 볼거리가 아주 많은 건 아니었다. 동영상까지 일일이 다 시청하더라도 2~30분이면 다 관람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서울 한복판에 이런 테마의 박물관과 넓은 공터가 있다니, 흥미로운 체험을 했다.

맨홀 아래의 길은 어떻게 나 있는지,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면 더러워진 물과 대소변은 어떻게 처리되는지 뭔가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옛날에는 동네 곳곳마다 일명 똥차라고 불리는 분뇨 수거차가 번거롭게 다녀야 했다. 재래식 화장실 기반인 곳에서는 끔찍한 악취가 진동하는 오물들을 퍼야 했고, 수세식에 정화조까지 갖춰진 건물이라도 침전물 찌꺼기(슬러지)는 몇 달 간격으로 직접 긁어 가야 했다. 슬러지는 한번 분해를 거쳤기 때문에 최초의 그 X만치 흉악한 외형과 악취를 지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미관상 절대로 보기 좋게 생기지는 않은 건 마찬가지이다.

그랬는데 요즘 어지간한 도시에서는 그런 풍경이 사라졌다.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오물을 건물 정화조에서 썩히는 게 아니라 그대로 중앙 하수 처리장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하수도와는 별개로 부설된 통로로 말이다.

생각해 보니 우린 상수도 요금만 내지, 하수 처리 비용을 따로 지불하지는 않는다. 쓰레기는 유료 봉투에다 넣어서 버린다지만 버려지는 물은 정확하게 집계하는 게 가능하지 않으며, 의미도 없어서 그렇지 싶다. 상수도 요금에다가 하수 처리 비용까지 포함해서 징수하는 게 더 낫다.

중랑 물 재생 센터가 있는 곳은 청계천이 중랑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더 서남쪽으로 중랑천이 한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는 서울숲이라는 녹지 공원과 함께 인서울 거의 최후의 공장으로 여겨지는 삼표 시멘트가 있으며, 지도에서 가려지기까지 한 '서울 한강 사업 본부'와 함께 '수도 박물관'이 있다. 둘이 서로 좋은 대조군을 형성하는 듯하다.

아울러, 아차산-광나루 사이의 언덕에는 '서울 물 연구원'이라는 게 있어서 거기도 온통 지도에서 가려져 있다.
한강의 서울 시내 구간 정도면 이미 상수원으로 취수하지도 않는 하류일 텐데.. 물 관련 보안 시설이 비단 상수도 취수 시설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9/07/26 19:38 2019/07/26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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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한강이라는 거대한 강이 있다. 서울은 수도답게 고층 빌딩이 즐비하며,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에 한참을 더 가야 시내가 나오고.. 자연물인 강조차도 폭이 저렇게 왕창 크다는 생각을 본인은 어린 시절부터 했었다.
한강이 임진강과 합류한 막바지 하구는 폭이 여기보다도 더 크며, 이름부터가 '조강'이라고 달리 불린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는 소금물이 수시로 드나드는 반쯤 바다이며, 사실은 북한이 코앞에 있어서 일반인이 접근할 수도 없으니 논외로 하자.

서울 전역을 통틀어 강이 한강만 있는 건 아니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산들의 계곡에서 개천이 발원하여 흘러내린다. 이것들은 지형이 낮아지고 다른 물줄기와 합쳐지면서 굵어진 뒤, 최종적으로는 한강으로 흘러든다. 모양이 트리 구조와 얼추 비슷하다. 사이클이 존재한다면 그건 하중도를 뜻할 것이다.

본인은 서울과 여기 변두리에 존재하는 하천으로 청계, 중랑, 도림, 안양, 탄.. 딱 5개 정도만 금방 떠오른다.
청계천은 딱 서울 도심을 지날 뿐만 아니라 이 명박 서울 시장 시절부터 복원 사업 때문에 너무 유명해서 모를 수가 없고.. 중랑천은 동부 간선 도로 때문에 금세 알게 됐다.

도림천은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일부 구간을 덮어 버렸기 때문에 알고, 안양천은 전철 구일 역의 교량과 서울-광명 경계 때문에, 탄천은 분당-판교의 경계 때문에 알았다.
좀 더 생각해 보니 탄천으로 흘러드는 양재천이 있으며, 은평구에서 국도 1호선 증산로와 나란히 흐르는 불광천, 그리고 근처의 서대문구에는 홍제천이 있다. 동쪽으로는 성내천이라는 것도 들어 봤다.

본인은 서울에 한강과 청계천 말고도 하천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추가로 알게 됐다. 복개되어서 지표면에서 존재감이 싹 사라지고 사실상 지하수처럼 바뀐 하천 구간도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복개라는 게 단순히 그 위로 고가 형태로 도로나 철도가 지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고 만만한 하천의 경우, 주변의 땅과 구분이 전혀 안 되게 싹 복개되어서 시가지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바다는 간척하고 하천은 복개해서 땅을 확보하는가 보다.

가령, 청계천의 경우 복원 구간이 잘 알다시피 서울 시청 광장에서 시작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청계천이 원래부터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청계천의 제일 먼 발원지는 청운동의 인왕산 모 계곡 정도로 추정된다. 거기서부터 서울 시청 정도는 여전히 복개되어 있다.

본인은 이런 사실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고 서울 시내의 모든 하천을 돌아다닐 필요까지는 없고.. 가성비가 높은 천호대로의 동대문구· 성동구 구간을 중심으로 자전거를 타고 답사를 했다. 여기는 짧은 거리에 비해 꽤 다양한 하천들을 볼 수 있으며, 최근에 근사한 공원으로 조성된 중랑구 하수 처리 시설과 하수도 박물관도 있다. 그래서 예상했던 것보다 굉장히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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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동 역 교차로를 지나서 천호대로가 시작되는 구간을 달려 보면.. 신설동-용두 역 사이에만 하천을 두 개나 건너게 된다. 바로 성북천과 정릉천이다. 하지만 다들 워낙 작기 때문에 다리를 건넌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고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이들 모두 청계천으로 합류한다.

성북천은 북악산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지만 계곡을 제외한 상류 구간은 복개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부터 한성대입구 지하철역에서부터 여기까지가 그나마 조금씩 복개를 걷어내고 복원되어서 위의 사진과 같은 산책로가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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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좀 더 지나면 나오는 이 하천은 정릉천이다. 정릉천도 상류는 복개되어 파묻혔고, 그나마 숨통을 튼 구간은 온통 내부순환로 고가가 위로 지나기 때문에 지상에서 제 모습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하긴, 본인은 작년에 고려대에 다녀올 때 이 산책로를 유용하게 이용했다.
내부순환로는 홍제천, 청계천 등 여러 하천의 선형을 따라 만들어졌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청계천 대신 정릉천으로 갈아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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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정릉천이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내부순환로도 마장 IC 이후로 청계천에서 정릉천 쪽으로 선형이 바뀌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청계천 박물관과 판잣집 체험관이라는 통나무집도 바로 여기 근처에 있다.
청계천이야 지금 같은 깔끔한 산책로가 조성되기 전에는 그 위로 고가도로가 지나고 있었고, 더 옛날에는 판잣집들이 즐비했고 물은 똥물 수준으로 더러웠다는 것을 국내 역덕 지리덕이라면 다들 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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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본인은 청계 고가 차도를 실물로 본 기억은 없다. 아직 서울 지리도 잘 모르고, 어쩌다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버스보다 지하철을 훨씬 더 즐겨 타던 대학교 초창기 시절이니 그런 걸 볼 일이 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청계 고가 차도의 폐쇄· 철거와 서울 역 민자 역사 개관이 2003년 하반기로 꽤 비슷한 시기에 시행됐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 반면,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서대문 고가 차도와 서울 역 고가 차도가 철거된 것은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이것들은 내가 운전을 해서 직접 지나가 본 적도 있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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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본인은 답십리까지 갔다. 여기서 주목한 곳은 바로.. 군자 차량기지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전농천이라는 존재감 없는 개천이다.
얘도 원래는 북쪽의 배봉산에서 발원한다고 전해지지만.. 배봉산부터가 별로 크고 높은 산이 아니고 물줄기가 워낙 보잘것없는 수준이니 도시 개발을 위해 얄짤없이 복개되었다.

성동구 공영 주차장과 견인 차량 보관소가 바로 그 복개된 부지 위에 조성되었다. 시기적으로는 1970년대 후반.. 천호대로라는 길 자체가 닦인 때와 비슷하다. 어쩐지~! 여기는 교량 분위기가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로에 교량 같은 이음매가 있더라.
그리고 남쪽의 복개 부지는 응당 차량기지가 사용하며, 전농천은 차량기지의 아래를 지나서 근처의 청계천으로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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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농천은 주차장과 차량기지 사이의 400미터 남짓한 직선 구간만이 복개되지 않았으며, 산책로도 한쪽에 짤막하게나마 마련돼 있다. 하지만 퀄리티가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위쪽에 차도와 나란히 지나는 인도가 더 낫다.
이 길은 청계천 같은 다른 하천으로 연결되는 게 없이 여기에서만 얼쩡거려야 하며, 중간에 앉아서 쉴 곳도 없다. 물의 양과 질이라든가 경치 역시 썩 좋지 않다.

그래도 하천을 따라 서울이라는 도시의 지리와 개발 내력을 공부하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금화, 시민, 충정, 삼일 등.. 서울의 역사를 풍미하는 옛날 아파트들에 대해서도 자료를 한데 찾아서 글을 한번 썼으면 싶다.

하천의 생태에 대해서 궁금증이 하나 떠오른다.
가뭄이 계속되면 거기를 흐르던 물은 어쩔 수 없이 말라 버릴 것이다. 그래도 비가 그치자마자 물줄기가 즉시 칼같이 끊기는 건 아니다. 최상류의 계곡이라도 말이다.
이 물이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 강의 발원지에 가면 무엇이 있고 주변 지형이 어떤 형태일까?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모르겠지만 산 속 식물이 물을 자체적으로 저장해 놓고 증산 작용을 통해 그걸 수증기 형태로 위로 끌어올려 주는 것이 기여하는 게 크다고 한다. 그 많은 물이 위치 에너지를 얻어서 올라가는 것도 그냥 되는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에 나무를 비롯해 각종 식물들을 많이 심어 놓으면 뿌리가 흙을 붙잡아 줘서 홍수 때 산사태를 예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가 안 오는 동안에도 계곡에 물이 공급되는 선순환이 계속된다. 산이 벌거숭이 민둥산이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여기까지 구경한 뒤 본인은 여기 근처에 있는 하수도 과학관을 찾아갔다. 글이 길어지니 여기 얘기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9/07/24 08:31 2019/07/2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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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풍경 기록 + 이성산 답사

미세먼지 어택 때문에 우중충했던 2~3월과 달리 이번 4월은 유난히 날씨가 맑고 좋은 날이 많았다.
다음은 4월 초부터 말까지 서로 다른 날짜에 찍은 주변 풍경 사진들이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건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었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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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간선 도로와 중랑천, 용마산의 풍경이다. 동부 간선 도로는 서울 시내의 자동차 전용 도로들 중 고도가 제일 낮으며 유일하게 강의 좌우로 상행과 하행이 분리돼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당시 본인이 서 있었던 보행자용 산책로 주변에는 온통 벚꽃이 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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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응봉산을 오르는 길목의 모습이다. 응봉산의 주변은 노란 개나리로 뒤덮여 있었다. 개나리 역시 벚꽃만큼이나 뭔가 봄의 상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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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한강 공원이다.
다만, 올해부터는 텐트를 치는 게 특정 구역 안에서만 가능하게 큰 제약이 걸렸다. 그래서 위의 텐트는 곧장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돗자리는 여전히 가능하니 텐트 규제의 목적이 잔디 보호는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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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양화 한강 공원이다. 이때는 풀밭이 아니라 강물 바로 근처의 나무 그늘 밑에서 돗자리를 깔고, 거기서 누워서 쉬기도 하고 볼일을 봤다.
세계의 도시들 중에 동일 행정구역과 생활권이 서울의 한강만치 거대한 강을 중간에 낀 채로 형성된 사례가 또 있나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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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부터는 올해 봄에 완전히 새로 개척해서 다녀 온 곳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집에서 너무 멀지 않으면서 적당히 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주차 걱정도 없는 서울 교외 지역을 물색한 결과.. 하남시에 있는 이성산을 다녀왔다. 나름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산의 북서쪽으로는 군부대가 있고, 서남쪽으로는 수도 정수 시설이 있고.. 주변엔 온통 무슨 공장에 물류 센터이니 평범한 거주· 업무 지역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산은 민감한 시설이 있는 쪽을 피해서 동남쪽으로만 접근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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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좀 오르니 가장 먼저 넓은 풀밭과 함께 저수지가 나타났다.
이성산은 해발 200m대의 아주 자그마한 산인데, 서울의 봉화산이나 구리의 구릉산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천마산보다는 더 높고 크다.
먼 옛날 삼국 시대에는 이 산 주변이 '이성산성'이란 게 둘러져서 요새화됐다고 한다. 이게 무슨 남한산성· 북한산성 같은 퀄리티는 아니기 때문에 지금 남은 건 그냥 돌무더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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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르막을 약간만 더 오르자 능선과 함께 또 넓은 풀밭이 나타났다. 여기는 동쪽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라고 한다.
아래로는 외곽순환 고속도로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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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무슨 건물이 있었던 자리이다.
서울의 동부에는 불암산성, 아차산성에 이어 이성산성처럼 조선보다 더 오래된 석성의 흔적이 전해지는 게 흥미롭다.
흔적이 너무 희미하다 보니 얘들은 오랫동안 정확하게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조차 불분명했는데.. 같이 출토된 문화재들의 스타일로 유추하건대 이성산성의 주인은 신라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관련 링크 1, 링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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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 정상에 도달했다. 간단한 표지석과 산불 감시 초소가 있었다.
산의 이름인 二聖은 아마 백제의 건국의 주인공인 비류와 온조에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서울 관악산의 서쪽으로는 삼성산이 있고 이건 승려 세 명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와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고 보니 백제는 반신반인 영웅호걸이 알에서 태어났네 하는 초월적인 설화나 신화가 없이, 건국 스토리가 가장 평범(?)하다는 특징이 있다. 비류와 온조라는 그냥 평범한 고구려 왕족이 모국을 자발적으로 떠나서 새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주몽이나 혁거세와는 상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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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갈 때는 이렇게 숲이 우거지고 인위적인 울타리나 문화재 구역이 없는 좁은 길로 갔다. 그래도 아까 봤던 저수지 쪽으로 가서 처음에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예전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4~5월 봄과 9~10월 가을이 등산 가기 제일 좋은 시기인 것 같다. 너무 덥지 않으면서 온통 초록색으로 물든 숲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5/24 08:32 2019/05/2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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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라의 경제를 얘기하는데 파리가 앉았습니다 (☞ 링크)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방송 사고들 중에는 배 철수 감전 사고, 카우치 성기 노출, 모 광신도의 방송국 점거 난입 같은 심각한 것도 있고, 사고를 넘어 범죄 사건에 가까운 것도 있다. "귓속에 도청장치"는 엽기 해프닝에 가깝게 끝났지만 그 사람이 나쁜 마음 품고 칼 같은 거라도 갖고 들어가서 앵커를 공격했다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그런데, 그런 것 말고 지난 2001년, "나라의 경제를 얘기하는데 파리가 앉았습니다"는 심각한 요인이 없이 그냥 웃긴 방송 사고로는 압도적인 1위를 지키고 있다. MC가 짤막하게 사과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가기만 했으면 됐을 텐데 애드립으로 저 유명한 대사를 읊는 바람에 웃음병이라는 불길에다 기름을 끼얹어 버렸다.;;;;

이런 사고까지 원천봉쇄 예방하려면 앞으로 여름에 방송국 스튜디오에서는 공항 활주로에서 새를 쫓아내는 것처럼 파리도 몽땅 쫓아내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링크로 소개한 동영상은 그 원본 동영상이 아니라.. YTN에서 작년 말에 그 문제의 당사자 인물(나 민호 팀장)을 다시 초청해서 인터뷰를 한 영상이다. 세월이 세월이다 보니 이제는 머리도 많이 하얘지셨는데.. 17년 전에 자신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모습을 보고는 역시 자지러지게 빵터지시더라.. ㅋㅋㅋ

그리고 댓글을 보고도 빵터졌다. "3년째 이거 보고 개웃는다 ㅋㅋㅋㅋㅋ" / "빡쳤는데 이거 보고 항암 치료 받고 간다" 등.. 어째 의도치 않았는데 이분들이 "병시나 산소"만큼이나 여러 네티즌들의 정신 건강 증진이 큰 기여를 했다.

2. 4딸라 (☞ 링크)

2000년대 초반에 <태조 왕 건>에서 궁예의 관심법과 "누구인가?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대사가 병맛 코드와 너무 잘 어울린 덕분에 대박을 치고 유행어로 등극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야인시대>에서는 "내가 고자라니"가 불멸의 명대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전자에서 궁예를 맡았던 김 영철이 후자에서는 장군의 아들 김 두한 역으로 포스 있게 출연했다. 그리고 6· 25 전쟁 도중에 미군을 상대로 우격다짐 배째라 협상을 해서 군수 노무자들의 일당을 1$에서 무려 네 배나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냥 무턱대고 "4딸라! 4딸라!"라고 우기기만 했다..;;

그리고 2019년 초, 버거킹에서는 15년도 더 전의 이 드라마 장면을 패러디 했다. 나이도 그만치 더 드신 김 영철 씨를 다시 모셔 와서 CF를 찍었다.
웬 꼰대가 햄버거 가게에 가서 무식하게 4딸라 4딸라만 외치길래 도대체 무슨 의미가 담긴 장면인가 궁금했는데.. 세상에 원전이 저거였다. 어떻게 저걸 광고 소재로 쓸 생각을 했을까..?? 그나저나 CF에 나오는 여자 알바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꽤 예쁘장해 보인다.

영어 원어민 강사 겸 유명 유튜버인 올리버 선생이..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내가 고자라니"를 적절한 연기와 함께 영어로 더빙하기도 했다. 보고서 완전 빵터졌다. ㅋㅋㅋㅋㅋㅋ

3. 종말 (☞ 링크)

이건 <인류 멸망 보고서>(2012)라는 국산 영화의 셋째 에피소드 "해피 버쓰데이" 중에 나오는 가상의 TV 뉴스 화면이다.
우연히 보게 됐는데.. 아놔 ㅍ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ㅠ.ㅠ
우리나라 영화 중에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종말편"과 "귓속에 도청장치"를 섞은 듯한 실사판을 만든 게 있었다니 세상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라의 경제를 얘기하는데 파리가 앉았습니다" 이래로 동영상을 보고 현웃 빵터지기는 처음이었다. ㅠㅠㅠㅠㅠ

여자 앵커: "저는 죽기 전에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수많은 괜찮은 남자들을 놔두고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이 남자와 불륜의 늪에 빠져 청춘을 다 바쳐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비열하게 저를 버리고 새파랗게 젊은 보도국 김 송이 리포터와 놀아나고 있습니다! ㅠ.ㅠ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이 인간 쓰레기를 국민 여러분 앞에서 제 손으로 꼭~ 아아아악!"


이 배우 진짜 혼신을 다해 열연했다 ㅍㅎㅎㅎㅎㅎㅎㅎㅎㅎ

남자 앵커: (시치미 뚝 떼고) "에.. 시청자 여러분, 저는 방송인으로서 마지막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아.. (님이) 왜 여기 앉아 계세요?"
기상 캐스터: "네~ 꼭 한번 (뉴스 앵커 자리에) 앉아 보고 싶었습니다! ^_^ (빵끗) 안 됩니까? 오늘 마지막인데? ^___^"


아 미치겠음.. ㅠㅠㅠㅠㅠㅠㅠㅠ
하긴, 2012년은 마야 달력이 어쩌네 하면서 또 시한부 종말론이 살짝 고개를 들기도 했던 때 같다. 뭐, 그로부터 7년이나 지난 지금도 세상은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지만 말이다.
성경에서 재림과 종말 날짜가 철저하게 "안알랴줌" 모드인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된다.

4. 흙꼭두장군 (☞ 링크)

1990~1993년 즈음 본인의 초등 저~중학년 시절. TV에서는 저녁 5시 반~7시 사이에 어린이용 프로를 많이 방영해 줬었다.
KBS의 경우, 만화영화뿐만 아니라 외국 동화를 각색한 '인형극'도 방영해 줬었다. 아라비안 나이트, 삼총사, 왕자와 거지 등.
그리고 KBS2에서는 월~목과 달리 금요일 저녁엔 국산 만화영화를 방영하곤 했다. 은비까비, 날아라 슈퍼보드 등. 이 바닥에도 스크린쿼터 같은 국산작 할당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TV에서 시리즈로 방영된 것 말고 90분 안팎 분량의 국산 단편 만화영화도 있었는데, 이런 건 어째 또 KBS 대신 주로 MBC에서 특집 명목으로 방영하는 편이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머털도사", 그리고 이것만치 유명하지는 않지만 "흙꼭두장군"이라는 것도 있다. MBC에서 창사 30주년 기념으로 "여명의 눈동자" 실사 드라마뿐만 아니라 단편 애니메이션도 나름 수작을 만들었다.

줄거리 소개 1 / 줄거리 소개 2

내가 본방을 봤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 흙꼭두장군이 주인공(빈수)에게 "숙제도 안 하고 쳐자면 어떡해?"라고 도발(?)하면서 등장하는 맨 첫 장면.. (실제 대사가 저렇지는 않다 ㅋㅋ)
  • 그리고 주인공이 도굴꾼에게 납치 감금당했을 때 "이 알약을 먹으면 며칠 동안 밥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도 될 거야" 이렇게 도움을 주는 거..
  • 어떤 할아버지가 밤에 무덤 봉분을 끌어안고 자다가 맛이 가고 지능 퇴갤했다는 일화
  • 나중에 흙꼭두장군의 병거가 바퀴가 부러져서 어째 주인공이 땜빵을 하는 것

정도이다.
아, 무슨 만화영화에서.. 남자와 여자애가 입원했는데 남자는 괜찮지만 여자는 병세가 심각해서 더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의사양반이 말하는 게... 그것도 알고 보니 흙꼭두장군의 장면이었다.

성인이 된 뒤에야 이 작품의 세계관을 다시 생각해 보면... 완전 시골 마을에다 이사 온 병약 여자아이(새길)는 소설 소나기와 비슷하고,
악당이 전혀 아니고 재질도 돌/흙이긴 하지만, 무생물 인형이 말을 하고 움직이고 "내가 살아 있는 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이러는 건 사탄의 인형 처키(;;;)와 비슷하다.
왕릉이 어떻고 하는 건 툼레이더, 특히 "라라 크로프트와 빛의 수호자"에 나오는 톨텍 장군과 비슷해 보인다.

198-90년대 기준으로 2012년 전이면 삼국시대 중에서도 극초반일 텐데.. 어느 왕조 왕릉을 생각하고 작품을 만든 걸까? (작품에서 정식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신라에서 모티브를 딴 듯)
최신 CG와 HD 화면 종횡비를 적용하여 지금 리메이크/리마스터링 돼 나오면 지금 3, 40대 연령대 중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5. AniMusic -- Pipe Dream (☞ 링크)

애니매트릭스도 아니고 애니뮤직이라니..
이건 본인이 대학교 시절 2000년대 초에 봤던 엄청 옛날 동영상인데 지금도 기억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그 시절엔 유튜브가 없었으니 웹페이지에서 동영상을 보려면 asf, wmv 형태로 굴러다니는 파일을 Media Player ActiveX 컨트롤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봐야 했다.

지금이야 현란한 CG가 게임과 영화에서 너무 넘쳐나니까 별 감흥이 없지만.. 저 시절에 박자에 맞춰서 수많은 공들이 금속판에 부딪치는 동영상은 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저걸 처음에 만들었던 회사는 지금도 살아 있고 유사 계열의 다른 영상물도 여럿 만들었더라. 설립자가 컴공과 음악을 겸비한 능력자인 덕분에 음악을 직접 작곡도 했다. 보유한 기술 내지 솔루션으로 B2B 장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앨범을 만들어서 일반인에게 판매도 하는 모양이다.

저걸 패러디해서 CG 아닌 실사판(!!!)을 시도하는 근성가이는 나타나지 않을지 궁금하다. 세상에는 튀기 위해 별 희한한 짓을 다 하는 용자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세팅 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실사 도미노처럼 말이다.

옛날에는 코덱도 얼마나 파편화가 심했는데 전부 다 교통정리가 됐는지.. 인터넷으로 동영상 보는 거 하나는 정말 편해졌다.
더구나 옛날 같았으면 컷씬에서나 나왔을 수준의 3D CG 동영상을 이제는 인게임에서 실시간으로 보는 세상이 됐다. 놀랍기 그지없다.

6. 그래픽 데모 (☞ 링크)

말이 나왔으니 CG 관련 동영상을 하나 더 투척하겠다.
외국에는 '그래픽 데모'라는 걸 전문적으로 만드는 해커 집단이 있다.
지금 링크로 소개하는 동영상은 fr-041_debris이라는 명칭으로 검색하면 나오는데, 원래는 177KB, 겨우 181,248바이트밖에 차지하지 않는 자그마한 Windows용 실행 파일 형태이다.

그런데 그걸 실행하면 7분에 달하는 분량의 정교한 3D 그래픽 동영상이 음악과 곁들어져서 흘러나온다. 게다가 이건 2007년,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물건이다!

동영상에 나타나는 각종 카메라와 객체의 움직임(곡선 궤적~!!), 그리고 BGM의 음표 정보들을 그야말로 최소 단위로 압축에 압축을 거듭해서 집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걸 Direct3D 9.0c 엔진으로 실시간으로 렌더링 해서 동영상을 표시한다.
놀랍지 않은가? 최소한의 씨앗만으로 최대한의 정보량을 갖는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난수 생성, 프랙탈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테크닉이 동원됐지 싶다.

이 프로그램은 처음 실행될 때는 각종 데이터들을 extract/expand하느라 수십 초가량의 로딩이 필요했다. 그 다음부터는 그야말로 CPU와 배터리를 full로 쓰면서 데모를 표시했다(2000년대 말 당대의 듀얼코어 급 PC 기준).
그러니 이런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프레임 손실 없이 인코딩 하려면 캡처 보드 같은 하드웨어 차원의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장르에 속하는 데모 동영상이 더 있다.
그리고 100K도 아니고 겨우 64KB짜리 실행 파일로 2~3분짜리 이런 동영상을 출력하는 데모도 있으니.. 인간의 최적화 실력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19/05/18 08:31 2019/05/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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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희 대통령 기념관

마음 울적한 날에 거리를 걸어 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는 아니고, 국뽕을 한 사발 거하게 혈관에다 주입하고 취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본인은 올 3월에 리모델링 개관했다는 원조가카 기념관에 다녀왔다.
김치 한복 된장 정도로는 택도 없고 한글이나 할배, 원조가카 정도는 돼야 국뽕의 재료가 될 수 있지 않겠나.

본인은 저기에 2012년, 2017년 이렇게 두 번이나 가 봤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독립된 블로그 글을 통해서 후기를 올린 적은 없었다.
작년 말에는 기념관 근처를 지날 일이 있었는데 웬 공사로 인한 휴관/폐관 상태였다. 안 그래도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저기도 정치 보복, 이념 보복을 당하고 있기라도 한지, 이화장처럼 공사를 가장한 무기한 폐쇄 상태는 아닌지 불길한 생각이 잔뜩 들었다.

그래도 기념관은 우려와 달리 다행히 깔끔하게 리모델링이 잘 됐고, 올해 삼일절부터 재개장했다.
전에는 이름이 좀 오해의 여지가 있게 '기념 도서관'이었는데(실제 의미는 기념관 및 도서관), 리모델링하면서 확실하게 '기념관'이라고 이름도 고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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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원조가카의 어린 시절 개인사에 대해서 이 정도로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았던 거 같다.
어쩐지, 옛날에 "만화 박정희"라고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박통에 대해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한 책에서도 박통이 어린 시절에 나팔 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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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까지는 철원에서 열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아아, 원조가카도 어린 시절에 금강산선 열차를 타 봤구나~! 기념관에서 읽은 제일 반가운 문구였다.

보다시피 원조가카는 지금으로 치면 교육 대학교와 군 사관학교 두 곳을 나왔다. 둘 다 안정된 진로와 명예가 보장된 코스이며, 공부를 대충 쉬엄쉬엄 해서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확실히 똑똑한 사람이긴 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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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가카가 이뤄낸 것들..
x축은 61년부터 79년까지 시간이고, y축은 경제 정책 전반, 토목 건설, 과학 기술, 새마을 운동, 안보· 국방, 교육· 문화· 복지 이렇게 카테고리별로 박통이 만든 것들을 소개해 놓은 게 무척 유익했다.
또한, 저 테이블이 있는 방의 중앙에는 각종 토목 공사들의 준공식 때 원조가카가 테이프를 끊는 용도로 사용한 금색 가위들이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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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가카가 재임 기간 동안 해마다 저렇게 표어, 모토랄까 슬로건이랄까.. 그런 걸 제정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예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리 박사 할배는 이름을 지어 준 게 많고, 원조가카는 뭔가 글씨를 쓴 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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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공업화 산업화가 환경을 꼭 파괴만 하는 줄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더티한 화석 연료는 역설적으로 나무를 땔감용으로 벨 일이 없게 해 준다. 그리고 원자력은 그 다음 화석 연료를 쓸 일을 줄여 준다.

우리나라의 산림 녹화는 석탄 산업 육성과 맞물린 덕분에 성공했는데.. 지금은 그 석탄 산업도 망했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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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1950년대 할배 시절에는 아직 국가 차원의 의료 보험이라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박통 때 일단 공무원을 대상으로 먼저 의료 보험이 시작되었고, 이게 지금처럼 전국민에게 몽땅 시행된 것은 박통에다 전대갈 시절까지 지난 1989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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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유명한 국민 교육 헌장이다.
멸사봉공 진충보국스러운 표현 일색이라고 트집을 잡자면 한도 끝도 없이 잡을 수 있겠지만, 본인은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라는 문구는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본인이 몇 년 전의 블로그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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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원조가카의 치적이 잔뜩 소개된 뒤, 맨 마지막에 '유신 -- 대통령의 고뇌와 결단'이라는 글자와 함께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의 가카 마네킹.. 요렇게 꾸며진 어두운 방이 나왔다. 참 웃겼다.
"머릿속에 구상해 놓은 계획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벌써 물러나기에는 이 몸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아직도 북괴의 위협은 여전한데.." 아이고...;; ㅋㅋㅋㅋ

지금 이 2010년대에도.. 이놈의 헬조선은 답이 없다고, 영어만 되면 그저 외국으로 뜨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 미개한 조센징들은 국민성이 민주주의와 맞지 않고 불도저형 독재자가 한 명 나와서 싹 다 갈아엎어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분도 많다.

하물며 완전 전쟁 폐허 거지꼴이던 1960년대에는 사람들 생각이 어땠을까?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노예근성 패배의식이 얼~마나 만연했을까?
자국의 미개한 실상과 조센징의 국민성에 너무 절망한 나머지... 애초에 구한말 때부터 단군의 후손들은 다 일본 밑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신념형' 친일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윤 치호이다.

지금으로 치면 그냥 나라 간판 내리고 천조국의 50몇 째 주로 편입해 들어가자는 식으로 말이다. 기회주의 권력 지향 매국노라든가 생계형 부역자, 싸이코패스 악질 헌병 같은 부류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원조가카라는.. 조선인에게 너무 과분했던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해서 조선을 대한민국으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사람들의 의식부터 개조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 "피똥 싸는 가난 물리치고 잘 살아 보세"라고 독려했다. 고속도로 놓고, 발전소 짓고 공장 짓고, 과학 연구소 만들고, 기능공을 양성했다.

성경의 느헤미야처럼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느 4:16-18)를 전파했다.
역대기하 26장에 나오는 웃시야 왕처럼 농사 시스템을 개선하고 신무기를 개발하고 기계(엔진)를 만들었다.
이런 사람이면 10년이고 100년이고 독재 하면서 종북 용공 빨갱이 자식들은 다 죽여서 씨를 말려 버렸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바라기에는 원조가카도 역량이 한계가 있었다. 반동분자들을 너무 관대하고 너그럽게 다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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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다 보고 나면 이렇게 쾌적한 독서와 공부 공간이 나온다. 옆에 도서관과 카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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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내부에 있는 추모 공간의 벽면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0에서 1을 만든 할배 다음으로 1에서 100을 만든 선한 독재자 원조가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는 반일· 항일을 가장 수준 높게 실천한 사람이다.
소싯적에 일본군 장교를 지원해서 들어갔다고?
뭐, 항일 독립운동을 한 것보다야 비주얼 모양새가 안 나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예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던 시절에 일제로부터 월급 받는 직업에 종사한 것 자체만으로 친일 반민족질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으며, 원조가카가 아예 헌병대 장교로 들어와서 자국 안에서 동포들을 괴롭히고 착취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독립 운동이라고는 맥이 다 끊긴 1940년대에 동족도 없는 먼 변방에 나가서 중국군하고나 싸웠지.

그는 선생까지 됐는데도 굳이 더 고생해서 군인으로 신분을 업그레이드 했으며, 긴 칼 차고 돌아와서는 선생 시절에 자기를 깔보던 일본인들을 버로우 태우고 데꿀멍 시켰다. 그냥 현실 불만족과 출세욕 때문에 그랬을 뿐이다.
이 정도는.. 카이스트(국비 장학생..;;) 나와서 국내 대기업 내지 연구소에서 몇 달 근무해 봤는데, 헬조선 이공계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 의대나 로스쿨로 다시 진학한 정도의 일탈일 뿐이다! 그 이상의 악질적인 짓은 아니라는 것이다.

할배 시절의 반민특위 해체와 친일 부역자 재등용에 대해서는 애산 이 인의 판단이라든가, Windows 9x의 16비트 코드 재사용과 같은 반박 비유가 있다. 그리고 원조가카의 과거에 대해서는 딱 저런 비유를 들어서 대처하면 된다.

내가 단언하건대 원조가카는 되도 않은 욕지거리 험담 늘어놓는 머저리들, 그리고 그들이 대안으로 내세우는 사상 불순한 정치인들보다 인품, 그릇 크기 등등이 0이 몇 개는 더 붙은 정도로 더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그 시절에 전혀 통용되지 않았던 오늘날의 관행, 그 시절에 절대로 실현 불가능했던 일, 자기도 절대로 실천하지 못했을 도덕 청렴을 이루지 못했다는 식의 일고의 가치도 없는 생트집 불평에는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맨날 천날 일제 잔재 탓, 군사 문화 탓만 하는데.. 비록 거기에도 악한 것 잘못된 것이 있긴 했어도 195, 6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 땅에서 군대는 어지간한 민간 싸제보다는 더 똑똑한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선진 문물을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만 해도.. 그 일제 잔재의 원산지 본거지가 어찌 그렇게도 선진국이 됐고 노벨 상 수상자까지 배출하는 과학 기술 강국이 됐는가? 역사로부터, 자기보다 잘난 사람으로부터 배우지를 않고 저런 썩은 사고방식으로만 살아서는 평생 찌질이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4/24 08:33 2019/04/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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