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답사기: 발화산+응달산

청계산의 동쪽으로는 경부 고속도로를 건너서 인릉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청계산의 남쪽으로는 외곽순환 고속도로를 건너서 또 다른 산들이 존재한다. 이 산들 자체가 막 높고 유명한 건 아니지만, 이 영역에 속한 운중동, 석운동, 대장동은 성남시에서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손꼽히는 오지이다. (뭐, 현재까지는 그런 편이지만 가까운 미래에 또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

여기는 자연의 정취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 공간에서 공개적으로 밝히기엔 약간 므흣한 국가 기밀 시설도 있어서(단순 군부대가 아님) 신비로움을 더욱 부추긴다. 그래서 본인은 다음 산행지를 여기 일대로 선택했다. 여기는 등산보다도 땅밟기 탐험의 성격이 더 강했다. 이번 산행, 아니 탐험은 입산 경로부터가 꽤 독특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배경 설명이 먼저 길게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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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청계 톨게이트(요금소)에 도착했다. 이런 곳을 자가용으로 스쳐 지나는 게 아니라 대중교통으로 방문하게 될 줄이야..
1650번 좌석버스는 송파 IC에서 고속도로로 진행해서는 가천대 정류장에 한 번만 정차한 뒤 곧장 여기에 도착했다. 성남 요금소에서 청계 요금소까지는 막히지만 않자 꽤 금방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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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순환 고속도로가 이렇게 광역 좌석버스 정류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하긴, 경부 고속도로에도 곳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지만 그건 요즘은 망하고 졸음 쉼터로 용도가 바뀌는 추세이다.

청계 요금소 주변에는 ‘청계 휴게소’라는 작은 휴게소도 있던데,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느 장거리 고속도로 휴게소라기보다는 그냥 경부 고속도로의 어귀에 있는 만남의 광장 내지 하이패스 센터 같아 보이는 아담한 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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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빠져나가면 곧장 아무나 무료로 이용 가능한 주차 공터가 나타난다. My precious!! 안 그래도 오지 탐험인데 본인 역시 여기엔 차를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산행 경로를 편도로 짰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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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서 반대 방향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서, 혹은 지금 본인의 경우 등산로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고속도로를 횡단해서 반대편으로 가야 했다. 그렇다고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해서는 절대 안 된다.

주로 하이패스 관련 처리 착오 때문에 운전자나 요금소 직원이 차에서 내려서 고속도로 횡단을 시도하다가 차에 치이는 안타까운 사고 소식이 전해지곤 한다. 하이패스를 겨우 시속 30km로 통과하는 고지식한 FM 운전자는 요즘 세상엔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특히 길가에 다 왔다고 해도 절대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4.5톤 초과의 대형 트럭 하이패스 차량들이 길가의 게이트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행자의 고속도로 횡단을 위해서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은 터널이 도로 아래에 마련돼 있다. 단, 이 터널은 길고 가파른 상구배(오르막)이며, 우회 경로가 너무 길고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애로사항이었다.

청계 톨게이트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아무튼 고속도로를 횡단한 거의 직후부터 흙길이 나오고 산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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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맨 처음으로 발을 디딘 산의 이름은 ‘발화산’이다. 순우리말인지 한자어인지(특히 ‘發火’!!) 그 남쪽으로 이어지는 네임드급 산인 ‘바라산’과는 어원이 어떤 관계인지, 그런 건 알지 못한다.

이 산은 남쪽 바라산 방향으로 흙길을 올라가면 무슨 묘지가 나오는 모양이다. 거기서 계속 남쪽으로 가서 완전히 바라산으로 가거나, 아니면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산의 능선을 타고 응달산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듯하다.
본인도 원래는 그걸 의도했는데.. 묘지까지 가지 않고도 고속도로가 보이는(그리고 그 대신 산의 고개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도 길이 나 있는 듯해서 호기심에 그 길을 가 봤다.

그리고 그건 고난의 시작이었다.
뭔가 중장비가 지나간 흔적이 있고, 흙길이 없는 건 분명 아니었다. 좀 무리하면 지나가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진짜 공인된 정규 등산로를 만날 때까지 약 1km쯤 되는 이 길은 울타리, 이정표 등 그 어떤 등산 시설도 없었으며, 수십~1백 m 남짓 주기로 또 사람 키만치 자라 있는 수풀이 앞길을 막았다. 한때 개방돼 있었지만 버려지고 폐쇄된 지 몇 년쯤 된 옛 등산· 산책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풀을 발로 밟아 쓰러뜨리고, 커다란 거미가 앉아 있기까지 한 거미줄을 몇십 개쯤 헤치고, 손등과 팔목에 생채기가 몇 군데 나고 옷과 백팩이 흙투성이가 되고 바지엔 이름 모를 시꺼먼 식물 씨앗 같은 게 달라붙어서 일일이 떼내고, 집채만 한 나무로 둘러싸인 좁은 샛길을 통과하기 위해 양팔을 들거나 머리를 숙이기도 하고..

가끔 고속도로 아래로 바깥 경치, 그리고 무슨 수십 년간 보존된 DMZ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웅장한 가을 자연 경관이 펼쳐진 것에는 감탄했지만, 이거 "빠져나가는 건 가능한가? 무장공비도 아니고 아침부터 나 혼자 이거 웬 생쑈를 하는 건가? 지금은 간신히 나아가고 있지만 길이 도중에 진짜로 끊겨 버리면 어떡하지? 이러다 고개 건너편은 구경도 못 하고 능선만 따라 산이 끝나 버리면 어떡하지? 지금까지 온 게 얼마인데?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별 잡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여기를 빠져나가는 동안 다른 등산객을 마주친 건 당연히 전무했다. 낫이나 정글도라도 하나 좀 챙겨 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험한 산행을 했지만, 그래도 이 넓은 산지가 전부 내 것 같았고, 여기서 잠을 자든 혼자 무슨 짓을 하든 티가 안 날 것 같긴 했다. 위의 사진은 그나마 덜 험준한 곳의 모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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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심겨져 있는 식물과 나무의 종류가 바뀌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울타리와 나무 계단이 쳐진 정규 등산로가 결국 나타났다. 드디어 고생이 끝났다. 이 부근에 고속도로 위로 청계산과 발화산을 횡단하는 육교(청계육교 + 하오고개)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등산로를 따라 드디어 고개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다. 꼭대기에서는 무슨 KBS 송신탑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철탑이 등산객을 반겨 주었다. 바라산 방면에서도 이쪽으로 오는 길이 있었는데, 내가 능선을 따라 이런 삽질을 안 했으면 그 길을 따라 여기에 도달하게 됐을 것이다.

이 지점이 아마 발화산에서 가장 높은 정상으로 추정되었다. 작고 낮은 듣보잡 산이어서 그런지 인근의 다른 산과는 달리 정상 표지 같은 것도 없다. 이제야 등산이 원래의 계획 궤도에 진입했으며, 본인은 동쪽의 운중· 석운동 방면으로 하산을 선택했다. 이 산 꼭대기에서부터 하산하는 길은 그 이름도 유명한 성남 누비길 구간에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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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산의 정상에서 본인이 입산을 시작한 청계 톨게이트를 내려다봤다.

산 내려가는 장면은 별로 볼 것 없는 흙길과 숲길뿐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사진은 생략한다. 여기는 주변 지역 탐험이 아니면, 산 자체는 멀리서 원정까지 와서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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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어느 정도 내려가자 철조망이 나타났다. 정말 그 어떤 경고문이나 팻말도 없이 그냥 철조망뿐이었다.
사실, 발화산의 고개 너머 남쪽에는 거대한 코렁시설이 있다. 그쪽으로는 나무도 정말 빽빽하게 심겨져 있어서 위에서는 아래에 뭐가 있는지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다.

이유는 안알랴줌이고 어귀 딱 한 군데에만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달랑 안내된 게 마치 청계산 상적동 구간 근처에 있는 군부대 입구를 보는 느낌이었다. 뭐 그래 봤자 여기는 그 코렁시설의 정말 북동쪽 변두리 외곽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기 주변만 아무리 어슬렁거리며 들여다본다 해도 뭔가 대단한 걸 염탐할 수는 없다.

옛날에 경찰대가 용인에 있던 시절엔 학생들이 운동 차원에서 법화산 산길을 구보했을 텐데, 여기서 근무하거나 연수를 받는 ‘그분’들은 이 산 산길을 달리면서 체력 단련을 하지 싶다. 아무튼, 여기에 착륙하는 걸로 발화산은 답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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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코스인 응달산을 찾아갔다.
발화산과 응달산 사이는 나름 높은 산중턱 고지대이지만, 비교적 넓은 평지와 함께 차도와 건물도 있어서 시골 마을 느낌이 났다.
응달산 등산로는 북쪽으로 차도를 따라 한 300m쯤 걸으니 나타났다. 중간에 오른쪽으로 꺾어서 자동차까지 진입 가능한 오르막길이 나오는데, 거기로 가지 말고 더 직진해야 한다. 거기는 한전 관할의 비밀 기지(송전? 변압?)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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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달산도 높이 250m가 될까 말까인 낮고 작은 동네 뒷산 급이어서인지, 산속엔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다만, 등산로는 전반적으로 아주 크고 넓게 잘 닦인 편이었다. 산악 자전거가 다녀도 될 정도였다.
그나저나 ‘다음’ 지도는 2018년 2월 기준으로 응달산을 혼자 ‘옹달산’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오타를 고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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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응달산 중턱에 있는 한전 비밀 기지이다. 언뜻 보면 무슨 철도 차량 기지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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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정표는 부실하게 마련되어 있어서 언제부턴가 살짝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본인은 계속 동남쪽으로 가서 대장동 시골 마을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예전에 태봉산에서 내려다보았던 그곳 말이다. 하지만 어떤 방향은 동북쪽으로 가서 산운마을 아파트 단지로 가는 것 같았다.

거기를 피해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언제부턴가 묘지와 차도가 나오고 산이 끝나긴 했다. 하지만 마을로 가려면 한참을 더 걸어 내려가야 했다. 내 발 밑으로 용인-서울 고속도로가 터널로 지나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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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일대는 역시 분위기가 판교· 분당 신도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한적한 논밭, 한편으로는 형형색색의 빌라와 단독주택이 인상적이었다. 차가 없어서 두루 둘러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

하지만 대장동도 이제 막 재개발 붐이 일고 있어서 곳곳에 굴착기와 덤프 트럭이 돌아다니면서 공사 중이었다. 사진에 나온 저 건물들도 대다수는 이미 주민들이 빠져나가고 철거 예정이었다. 내가 지금 본 광경을 불과 몇 년 뒤, 3~5년 안으로는 못 보게 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의 오지 탐험이 더욱 뜻깊은 답사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이 오지에서 거의 유일한 대중교통은 대략 15~20분 간격으로 다니는 마을버스 32번이다. 주변에 버스 정류장 표식은 전혀 없지만, ‘두밀로’와 ‘모두마니로’라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여기서 버스를 타고 무사히 귀가했다. 중간에 거친 동원동 일대와 낙생 저수지의 풍경도 인상적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8/02/02 08:30 2018/02/0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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