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한번씩 이전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 같지만..
우리나라의 경제· 금융 내지 통화 정책 쪽의 굵직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1.
가장 먼저 화폐 자체부터..
우리나라는 6· 25 전쟁 때문에 화폐 단위를 여러 번 초기화 리셋을 했다. 돈 찍는 기계와 지폐 도안 원본을 적에게 송두리째 빼앗겼으니 그 돈은 당장 무효화시켜야 했다.
이때는 일본의 도움까지 받아서 도안을 새로 만들고 돈을 부랴부랴 다시 찍었던 일화가 유명하다. 일본은 한국이 예뻐서가 아니라 한국의 빽인 미국한테 잘 보이고 이쁨 받아야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국을 돕게 됐다. 물론 일본은 한국의 전쟁 특수로 돈을 많이 벌었으니, 저게 오로지 일본만 일방적으로 삥 뜯기고 자선행위 하는 건 아니었다.
그 뒤 우리나라는 전쟁이 끝나 가던 1953년엔 화폐 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1950년대는 지폐에 지금처럼 조선 시대 사람이 아니라 당대 생존 중인 대한민국 사람 얼굴이 있었던 유일한 시절이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뭐... ^^
그러다가 1962년, 박 정희 정권 때 또 화폐개혁이 행해졌으며, 단위 명칭도 환에서 원으로 도로 '환원'됐다. -_- 이게 2025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최후의 화폐개혁이다. 현재까지 통용되는 화폐단위가 이때 완전히 정립됐다.
이렇게 단위가 리셋됐던 직후에는 짜장면 한 그릇이 30원이었으며, 두툼한 사전 같은 책 한 권이 300원 남짓 했었다. 지금 물가는 그 시절에 비해 0이 2개쯤 더 붙었다.
2.
그 다음으로 10년쯤 뒤, 1972년 8월에는 사채 동결이라는 전무후무한 조치가 취해졌다. 제도권 은행을 육성하고 저축을 장려하려고. 그래서 기업들 돈 빌려주고 살리려고 꽤 강압적인 조치가 취해졌었다.
오늘날이야 사채는 밑바닥 인생을 위한 제3금융권으로나 취급되지만, 저 때는 우리나라에 제도권 금융이 그닥 탄탄하지 못했다. 금성사나 삼성전자조차도 직원들 월급 줄 걱정을 하는 평범한 중소· 중견기업에 불과했으며, 부자 개인한테서 사채를 썼다가 기한 내에 못 갚고 망하는 기업도 있을 정도였다.
저 때는 경제 성장률이 높고 금리가 아주 높았기 때문에 개나 소나 사채를 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안 믿기지만 사채가 일종의 주식· 비트코인 같은 재테크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민간인 개미 중에도 영끌해서 고리대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랬는데 갑작스러운 저 조치로 인해 돈을 빌렸던 기업들은 숨통이 트고, 반대로 돈을 빌려줬던 사채업자들이 낭패를 봤다. 종잣돈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출처를 추궁당하고, 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이자가 팍 줄고, 빌려준 돈의 상환 기한도 확 완화됐으니..
그러니 사채 동결은 민생과 나라 경제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송두리째 바꿔 놓은 급진적인 조치였다. 나쁘게 말하면 오로지 그 시절이니까 가능했던 반민주적인 폭거였다.
허나, 그로부터 몇 달 뒤엔 아예 10월 유신이 시작되면서 나라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쪽까지 더 경직되는 쪽으로 바뀌었다.
3.
그런 일이 있고 나서 20여 년 뒤, 1993년 김 영삼 시절에는 금융실명제가 시행됐다. 이건 2025년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내려진 대통령 긴급명령이다.
옛날 박 정희 시절엔 누구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은행에 돈을 맡기게 만들어야 했으니 예금주가 누군지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중에 좀 먹고 살 만해진 뒤에는 검은 돈 범죄자금 지하경제를 척결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에 금융실명제가 시행됐다. 거의 출산 관련 정책이 1990년대 이후부터 정반대로 유턴 했던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런 굵직한 변화 말고 은행과 관련해서는..
1980년대에 ATM과 초보적인 수준의 신용카드 도입, 1990년대에 은행 창구에 대기 번호표 도입, 2000년대에 인터넷 뱅킹 도입, 2010년대부터 모바일 뱅킹 도입, 종이 없는 전자문서 시스템 도입..;;
이러면서 금융이 물류 교통에서 암호화 통신의 영역으로 많이 바뀐 것을 짚을 필요가 있다.
수십 년 전, 금융이 통신이 아니라 물류이던 시절에는.. 직딩들은 월급도 현금 봉투로 받았다.
국제선 여객기 조종사들은 조종실에다 현금 돈가방을 싣고 날아갔다.;; 도착지 공항에서 그 현찰을 써서 주기료와 유류비를 결제했었다.;;
게다가 신용카드도.. 가게 점주들은 카드 전표 종이쪼가리들을 카드사로 직접 보내고, 그로부터 현찰을 답장으로 받는 형태로 돌아갔다! 정말 엄청나지 않은가?
저런 현물 거래가 통신으로 대체될 수 있게 된 건..
공개 키 비대칭 암호화라는 정교한 알고리즘이란 게 개발되고, 그걸 민간인들 PC와 스마트폰에서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컴퓨팅 성능이 발전한 덕분이다.
돈이 오가는데 무슨 게임 세이브 파일 조작하듯이 변조가 가해져서는 절대 안 되니 암호화를 하는데.. 그게 군대에서 암구호 전파하듯이 암호키를 배포하는 식으로는 근본적인 보안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각종 값비싼 소프트웨어들에 대해서 씨디키라든가 시리얼 번호 생성기, 불법복제 방지 장치를 무력화시키는 크랙이 등장했던 이유는? 역공학을 통해 보안 쪽 알고리즘이 유출됐기 때문이다.
그럼 돈이 오가는 건?? 공격자가 금전 거래 패킷을 낚아챘더라도, 암호화 알고리즘을 다 알고 있더라도, 심지어 한쪽의 암호화 키를 알고 있더라도.. 이걸 변조할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러니 암호화의 패러다임, 차원이 완전히 다른 암호화가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뭐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니 생략하고 넘어가겠다. 이건 통상적인 대칭 키 암호화보다 계산량이 차원이 다르게 훨씬 더 많고 복잡하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인터넷 뱅킹을 넘어 모바일 뱅킹 덕분에 계좌이체가 야외에서 거의 현금처럼 통용되게 됐다. 계좌이체는 카드 긁은 내역보다는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결제 내역이 기록으로 남는 건 변함없다.
금융 실명에 이어서 금융 전산화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범죄를 예방하고, 특히 탈세의 여지를 차단했는지를 생각하면 그 혜택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전산 금융은 언제 갑자기 훅 가고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한 번 정도는 은행들이 지금까지 오갔던 돈들의 차액을 현금으로 정산하기는 한다고 한다.
모바일· 인터넷 뱅킹도 밤에 1시간 정도는 중단되곤 한다. 이건 단순히 시스템 정비 차원을 넘어서 정산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시간이다. 이 시간대를 무작정 새벽 3~4시로 옮긴다거나, 예비 서버를 돌려서 무슨 뉴욕 지하철처럼 24시간 끊김 없는 뱅킹을 구현할 수는 없다고 한다. 정산은 날짜가 바뀌기 전에 꼭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화폐라는 걸 만들어 낸 뒤, 처음에는 그 기준 매개물질?물체로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싶어하고 귀중하다고 여기고, 거기에다 변질도 잘 되지 않는 금· 은 같은 귀금속을 사용했다. 중국이나 한국은 여러 사정상 그것보다 더 저렴한 구리를 사용했지만 말이다(엽전 동전..).
하지만 오늘날은 인간들이 생산하는 경제 가치 내지 경제 규모가 지구상의 모든 금을 채굴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고 또 전산화도 됐다. 현금 거래의 비중이 아주 줄어들었다.
이거 덕분에 화폐 개혁도 어지간하면 할 필요가 없어졌다. 자동차 한 대 가격이 무슨 64비트 정수로도 감당 못 할 정도로 커졌다거나 하지 않은 한;;
우리나라는 남한과 북한이 합쳐지는 급의 격변이 생겼을 때 헌법 고치면서 그때쯤에나 화폐개혁도 같이 하면 될 것 같다.
비슷하게 현물 수송이 아니라 통신의 영역으로 바뀔 만도 한 것은 투표이다.
투표 용지 실물이 아니라 누구누구한테 N표 정보만 개인 전자 서명으로 암호화해서 중앙 서버로 보내면 끝.. 선거 비용도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고 얼마나 수월하겠나?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허나, 이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인 불신풍조와 오· 남용 악용, 조작 가능성 때문에 쉽지 않아 보인다.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몽땅 전자투표로만 뽑겠다고 하면 선뜻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뭐 그렇다. 완전 자율주행 자동차가 등장하는 것만큼이나 요원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IT 기술을 몇 가지 더 열거하고 글을 맺도록 하겠다. ㄲㄲㄲ
1.
PC로 인터넷 뱅킹을 하려면 잘 알다시피 여러 보안 프로그램 설치, 공인 인증서 등록과 갱신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나 핸드폰 모바일 뱅킹은 간편 로그인 하나만으로 간단히 시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PC는 여러 사람이 한 기기를 익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위험한 기기인 반면, 핸드폰은 처음부터 주인 1인만 사용하게 돼 있고 기본적인 인증과 보안은 폰의 운영체제에서 자체적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쎄, 생각해 보니 이런 식으로 비슷한 쌍이 하나 더 있다. 내비게이션.
요즘은 폰 내비 앱도 정말 기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맨 처음에 지금 이 차량이 어디에 있고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건 차의 붙박이 순정 내비가 폰보다 월등히 더 뛰어나다. 터널 안에서 안정적으로 위치를 파악하는 것도 폰은 순정 내비의 적수가 못 된다.
왜? 순정 내비는 GPS 신호뿐만 아니라 지금 차량의 핸들 방향과 바퀴 회전수를 통해서도 차의 위치와 속도를 어렴풋이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서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 낫다.
또한 차량 내비는 대부분의 경우, 이전의 차량 위치/방향과 지금 차량 위치/방향이 고정불변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차량을 그대로 탁송이라도 하지 않는 한). 그 반면 핸드폰은 그런 보장이 전혀 없으니 처음에 자기 위치와 방향을 파악할 때 한참 동안 삽질할 수밖에 없다.
뱅킹은 보안과 관련이 있으니 모바일이 PC보다 더 간편하고 유리한 반면, 내비의 동작은 자동차의 그 static한 특성이 모바일보다 더 유리한 구석이 있다. 이 점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2.
인간의 경제 생활에서 현금이 이렇게 많이 없어진 만큼, 종이 통장도 예전보다 훨씬 더 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완전히 퇴출되고 사라진 건 아니니 위상이 애매한 듯..
이렇게 통장에다가 거래 내역을 찍어 주는 용도로는 이 2020년대까지도 구닥다리 도트 프린터가 현역이다. 도트가 이 분야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수단이다.
통장의 빈 여백에다가 incremental하게 줄 단위로 찌익찌익 뭔가를 추가로 찍어 주는 일을.. 무슨 잉크젯이나 레이저 프린터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는 영수증이나 명세표를 출력하는 걸 여전히 도트 프린터가 담당했었다. 하지만 가게 POS기에서 영수증이 '찌익찌익' 소리 내면서 출력되는 걸 마지막으로 본 게 다들 언제이신가? 깜빡거리며 켜지는 형광등과 비슷한 시기에 다들 퇴출됐지 싶다.
군대에서 울퉁불퉁 흔들리는 전차 안에서 뭔가를 인쇄해야 할 때 러기드 장비로서 충격식 도트 프린터가 쓰인다고는 하는데.. 그 정도로 특수한 거 말고 일반인이 도트 프린터와 그 특유의 180dpi 저해상도 한글 폰트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마지노 선은 정말 은행 통장뿐인 것 같다.
3.
오늘날 현대인들이 누리는 전자 금융을 가능하게 한 주역은.. 지금도 수많은 암호화 트랜잭션들을 거뜬히 소화하고 계시는 메인프레임 컴퓨터들이다.
메인프레임은 입출력 대역폭이 매우 크며, 수많은 작은 작업들을 동시에, 중단 없이 처리하는 것에 최적화돼 있다. 렌더링이나 시뮬레이션을 위해 오로지 대용량 병렬 연산에만 최적화돼 있는 슈퍼컴퓨터하고는 설계 이념이 미묘하게 다르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IBM이라는 공룡 기업이 있는데도 과거엔 CRAY처럼 슈퍼컴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기업이 또 존재했던 것이다. (IBM System/360 vs CDC 3600처럼)
메인프레임은 모바일은 말할 것도 없고 PC나 슈퍼컴과도 다른 수요가 있는 시장이다. 예나 지금이나 IBM이 전용 아키텍처 설계하고 칩 만들고 전용 컴퓨터에 전용 운영체제를 독점 공급하고 있다.
즉, 일반 유저들이 실감을 못 할 뿐, 저 분야에서는 IBM이 일종의 애플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랬는데 IBM은 PC를 과소평가 했다가 마소와 인텔에게 자리를 빼앗겼고, 쟤들은 또 모바일을 과소평가 했다가 구글· 애플이나 ARM에게 자리를 빼앗겨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저런 메인프레임은 구닥다리 COBOL 프로그램들이 현역으로 돌아가는 주 무대이기도 하다. ㄲㄲㄲ 반세기 전에 Y2K 문제를 일으키면 어쩌나 제일 우려의 대상이었던 분야가 바로 이런 쪽이었다.
COBOL은 코드가 영어 문장과 비슷하게 돼 있고, 인라인 어셈블리나 포인터 따위 없는 아주 쌈박한 고급 언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는 인터프리터나 가상머신 바이트코드 언어는 아니고, 네이티브 코드로 컴파일되는 언어이다.
오늘날 COBOL 같은 언어가 새로 개발됐다면 당연히 저런 식으로 구현됐겠지만 COBOL은 가상머신 바이트코드 같은 개념이 아직은 너무 사치스럽고 급진적이던 시절에 만들어진 옛날 언어이다. 그래서 저렇게 됐다. 비슷한 시대의 레거시 언어인 FORTRAN도 비슷한 처지와 위상이다.
Posted by 사무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