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891년, '오쓰 사건'이라고..
일본을 방문 중이었던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를 대상으로 어느 정신이상 망상장애 일본인이 칼을 휘둘러 외국 국빈 암살 미수라는 엄청난 사고를 친 적이 있었다.

이때는 러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참 전이었고 일본은 대국 러시아 앞에 넙죽 엎드리고 쩔쩔매던 시절이었다. 조선에서도 일본을 견제하려고 괜히 러시아에게 붙으려 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에 을미사변이 1895년에..)

그랬는데.. 저 사건은 수틀리면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쟁이 날 수도 있는 심각한 사항이었다.
일본에서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그야말로 천황부터 신민들까지 몽땅 국가적으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메이지 천황이 직접 나서서 황태자를 문병 갔고, 전국 각지에서 "황태자님,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쾌유를 빕니다" 전보가 빗발쳤다.

가해자는 당연히 붙잡혔다.
그런데 그때 일본의 법은 "황족을 고의로 죽거나 다치게 한 자는 대역죄를 적용하여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였다. 이때 황족이란 자국의 황족을 의미했다.
러시아의 황태자는 저 법에서 가리키는 황족이 아니었다. 더구나 저 사람도 다치기만 했지 죽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일본의 법으로는 가해자를 무기징역까지는 처해도 사형에 처할 수는 없었다.

이때 일본 정부에서는 담당 판사에게 외압을 넣어서 "우린 지금 러시아에게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 그러니 러시아 황태자도 황족으로 간주하고 어떻게든 저놈을 사형시켜라" 이렇게 명령했다.
그러나 그 당시 판사는 "우리 일본은 그렇잖아도 서구 열강에게 밀리고 무시당하는 중이다. 그런데 상황이 급하다고 사법이 그렇게 일관성 없게 누구 기분 따라 들쭉날쭉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국제 사회에서 미개한 호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원칙대로 무기징역까지만 때렸다.

우와 이거 영국을 상대로 법을 논하면서 항변했던 청나라 임칙서를 보는 것 같다.
일본에서는 저런 소신판결이 통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 국가적인 사죄 운동과 가해자의 무기징역 처분으로 만족하고 사과를 받아들였다. 일본에게 더 딴지 걸거나 보복하지는 않았다.

2.
1898년엔 이웃 조선에서 자국 국왕을 상대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고종은 그 옛날에 커피를 굉장히 좋아했던 사람인데, 거기에 누군가가 치사량을 넘는 아편 마약을 탄 것이다.
고종은 커피잘알이어서 그런지 몇 모금 맛만 보더니 맛이 이상하다고 바로 뱉어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들 순종은 그걸 마셔 버리는 바람에 오랫동안 끙끙 앓고 평생 후유증 장애까지 얻게 됐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최근에 국왕과 사이가 안 좋아진 신하 김 홍륙이 지목됐고, 공범도 몇 명 잡혔다.
그리고 이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는 함 태영이라고.. 그야말로 구한말, 일제 시대, 대한민국을 두루 아우르며 법조인, 목사, 교사, 부통령까지 역임했던 젊은 똘똘이 천재 지식인이었다.

그는 자기가 공부했던 법리로 이 사건을 조사해 보니, 김 홍륙이 진짜로 암살에 개입했는지 증거조차 아직 불확실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역모는커녕 무죄 선고를 하려 했다.
고종은 노발대발하여 당장 저놈을 역적으로 몰아서 사형에 처하라고 외압을 넣었으나.. 함 태영은 자기 소신을 고집했다. 그러자 고종은 그 사람을 짜르고 다른 판사를 동원해서 기어이 김 홍륙 일당을 사형에 처해 버렸다.

뭐, 왕족을 암살하려 한 놈이니 당사자를 사형에 처하는 건 그 어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친다. 아까 그 일본법 기준에도 완벽히 부합한다.
근데 이번에는 그냥 죽인 게 아니라 시체를 공개 전시해서 백성들이 다 뜯고 찢게 했으며, 마누라를 포함한 가족까지 몽땅 감옥에 가둬 옥사시키거나 유배형에 처했다.

자, 1898년이면 오쓰 사건보다 나중이고 조선에서 갑오개혁도 일어난 뒤였다. 반역죄인이라도 연좌제 내지 죽은 시체한테 소급 처벌은 한참 전의 '영조' 때부터 이미 폐지· 금지 상태였다. 그랬는데 고종은 그야말로 감정적인 괘씸죄에 의거한 잔인한 형벌과 초법적인 보복을 마구 남발했었다. 서 재필, 김 옥균 때도 그랬고, 김 홍집 때도 그랬고..

이 사건은 당연히 국제적으로 지탄받았다. 일본이 남의 나라 궁궐에 무단으로 쳐들어가서 왕후를 살해한 만행이 세계에 알려져서 규탄받고 이미지가 깎이긴 했지만, 그 피해 당사자 국가의 내부에서 미개한 짓이 벌어진 것도 마찬가지다. 세계 각국 외교관들이 이 소식을 자국으로 타전했다.

뭐, 변명이나 참작의 여지는 있다. 고종은 참 좋지 않은 시국에 힘겹게 왕 노릇 하느라 정신 건강이 좋을래야 좋을 수 없던 상태였다.
안에서는 반역 쿠데타에 암살/독살 음모, 밖에서는 외세 침략..;; 오죽했으면 남의 나라 대사관으로 도망가서 목숨을 구걸할 정도였으니.. 자국의 사법과 치안이 개판이기 때문에 군주가 오히려 자국의 치외법권이고 외국 법이 통용되는 곳으로 도피한 것이다.

이러니 고종은 노이로제 수준으로 극도로 예민해졌으며.. 망상에 빠져 아무나 막 의심하고 죽이고, 누구를 사형에 처할 때 곱게 죽이지 않고.. 뭔가 궁예나 히틀러나 스탈린의 말년 같은 모습으로 얼마든지 빠질 법했다.

게다가 민씨 집안으로부터의 부추김도 있었다. 뭐, 고종은 실제로는 히틀러나 스탈린 정도로 깽판을 칠 권력 자체가 없으니 그런 스케일로 깽판 치지는 않(못)았지만 말이다.
고종에 대해서 예로부터 저런 독살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1919년에 고종이 진짜 죽었을 때는.. 일제에 의한 독살 의혹 루머가 쫙 퍼질 만도 했다. (진실은 저 너머에..)

그리고 원인이야 어쨌든, 그의 이런 행태는 "일본 정도면 조선을 지배해도 되겠다"라는 국제적인 통념에 기여를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해방 후에 "우리는 군주제는 절대 다시 하지 말고 민주공화정으로 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식자층들이 하게 됐다.

참고로, 훗날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대 대머리 땅끄 대통령도 사법부에 외압을 넣고 개입한 적이 있었다. 뭐 이런 것들..

  • "대통령 각하께서 대국민담화를 해 버렸으니 국민 앞에서 약속을 지켜야 된다. 이 윤상 군의 유괴살인범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사형에 처해라"
  • "여성들한테 독약 먹이고는 죽어가는 걸 스너프 사진을 찍었다고? 아이고 88 서울 올림픽이 코앞인데 세계가 지켜보는 와중에 동네 창피하다. 더 조사할 것도 없고 그놈은 바로 사형 때려~ 이건 명령이다"

하지만 이건 정치범이 아니라, 증거 확실하고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뒈져야 마땅한 흉악범을 처단한 것이어서 구한말 고종과는 상황이 다르다. 시체를 공개적으로 잔인하게 능멸한 것도 아니니..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정의를 구현한 사이다 같은 구석도 있었다. ㄲㄲㄲㄲㄲ

3.
자, 원래는 글을 여기까지만 쓰고 말려고 했는데, 고종과 관련하여 또 하나 흥미로운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 바로 1896년의 치하포 사건..!!

이건 따지고 보면 조선 땅에서 무고한 일본인이 아무 면식도 없는 조선인에게 살해당한 테러이자 강력 범죄였다.
하지만 이건 을미사변 때문에 그렇잖아도 반일 감정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록 애매한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표면적인 명분은 민비 암살에 대한 보복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일본도 이때는 이걸 명분으로 대놓고 무력 보복을 하지는 않고 몸을 사렸다. 총칼 대신 대신 외교부가 개입해서 "범인을 꼭 체포하고 사형에 처하도록 해라~ 사건 조사를 우리가 하겠다" 이렇게 신사적으로만(?) 압박을 넣었다.

이때 고종은.. 일본의 요구에 호락호락 따르지 않고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난 김 구가 일본인을 죽이고 나서 거의 직후에 현행범으로 체포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조선 정부는 범인을 색출하고 체포하라는 일본 측의 요구에도 일부러 세월아네월아 늑장 대응하다가 사건 발생 무려 3개월 후에야 그를 체포했다.

일본 왈, "너네 법을 보니 살인범은 참수를 하게 돼 있네? 저놈을 반드시 참수해 주시오"
조선 왈, "ㄴㄴ 우리도 근대화 돼서 갑오개혁 이후로 사형은 교수형으로 집행한다. 작년에 동학의 수괴 전 봉준도 교수형이었으니 김 창수(김 구의 옛 이름) 역시 교수형에 처하겠음."

이래 놓고는 김 구를 감금한 채로 또 딜레이를 시전했으며.. 고의에 가깝게 죄수들을 아주 허술하게 관리했다. 결국은 탈옥이라는 명목으로 김 구를 사실상 석방 방면해 버렸다.
글쎄, 이때 서울-인천 간에 전화가 갓 개통돼서 국왕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 명령을 전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들 아시다시피 백범일지에는 워낙 이빨 주작도 많아서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고종은 김 구의 처분에 관해서는 절대로 일본 말을 호락호락 듣지 않음으로써 을미사변에 대해 아주 쪼잔 소심하게 저항하고 뒤끝을 부리긴 한 것으로 보인다. "니들이 민비 암살범(미우라 고로)을 대놓고 감싸고 풀어 줬어? 그럼 우리도 일본인을 죽인 조선 신민을 감싸 줄 거다"랄까?
이것도 위의 1, 2번과 더불어 생각할 점인 것 같다. 오쓰 사건, 독다 사건에 이어 치하포 사건이라니..!!

이렇듯, 김 구는 2년 가까이 해주와 인천 감옥에서 빵살이를 하다가 탈옥을 했다.
참고로 이 승만은 조금 나중인 1899년에 고종 폐위 음모에 휘말려서 5년 반이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사면을 받고 풀려났었다. 이 승만은 서대문 형무소의 전신인 한성감옥에서 지냈기 때문에 김 구와는 장소가 달랐다.
뭐, 고종은 그로부터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헤이그 밀사 파견 내역이 발각되는 바람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 폐위됐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6/07/27 08:35 2026/07/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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