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891년, '오쓰 사건'이라고..
일본을 방문 중이었던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를 대상으로 어느 정신이상 망상장애 일본인이 칼을 휘둘러 외국 국빈 암살 미수라는 엄청난 사고를 친 적이 있었다.

이때는 러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참 전이었고 일본은 대국 러시아 앞에 넙죽 엎드리고 쩔쩔매던 시절이었다. 조선에서도 일본을 견제하려고 괜히 러시아에게 붙으려 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에 을미사변이 1895년에..)

그랬는데.. 저 사건은 수틀리면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쟁이 날 수도 있는 심각한 사항이었다.
일본에서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그야말로 천황부터 신민들까지 몽땅 국가적으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메이지 천황이 직접 나서서 황태자를 문병 갔고, 전국 각지에서 "황태자님,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쾌유를 빕니다" 전보가 빗발쳤다.

가해자는 당연히 붙잡혔다.
그런데 그때 일본의 법은 "황족을 고의로 죽거나 다치게 한 자는 대역죄를 적용하여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였다. 이때 황족이란 자국의 황족을 의미했다.
러시아의 황태자는 저 법에서 가리키는 황족이 아니었다. 더구나 저 사람도 다치기만 했지 죽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일본의 법으로는 가해자를 무기징역까지는 처해도 사형에 처할 수는 없었다.

이때 일본 정부에서는 담당 판사에게 외압을 넣어서 "우린 지금 러시아에게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 그러니 러시아 황태자도 황족으로 간주하고 어떻게든 저놈을 사형시켜라" 이렇게 명령했다.
그러나 그 당시 판사는 "우리 일본은 그렇잖아도 서구 열강에게 밀리고 무시당하는 중이다. 그런데 상황이 급하다고 사법이 그렇게 일관성 없게 누구 기분 따라 들쭉날쭉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국제 사회에서 미개한 호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원칙대로 무기징역까지만 때렸다.

우와 이거 영국을 상대로 법을 논하면서 항변했던 청나라 임칙서를 보는 것 같다.
일본에서는 저런 소신판결이 통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 국가적인 사죄 운동과 가해자의 무기징역 처분으로 만족하고 사과를 받아들였다. 일본에게 더 딴지 걸거나 보복하지는 않았다.

2.
1898년엔 이웃 조선에서 자국 국왕을 상대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고종은 그 옛날에 커피를 굉장히 좋아했던 사람인데, 거기에 누군가가 치사량을 넘는 아편 마약을 탄 것이다.
고종은 커피잘알이어서 그런지 몇 모금 맛만 보더니 맛이 이상하다고 바로 뱉어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들 순종은 그걸 마셔 버리는 바람에 오랫동안 끙끙 앓고 평생 후유증 장애까지 얻게 됐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최근에 국왕과 사이가 안 좋아진 신하 김 홍륙이 지목됐고, 공범도 몇 명 잡혔다.
그리고 이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는 함 태영이라고.. 그야말로 구한말, 일제 시대, 대한민국을 두루 아우르며 법조인, 목사, 교사, 부통령까지 역임했던 젊은 똘똘이 천재 지식인이었다.

그는 자기가 공부했던 법리로 이 사건을 조사해 보니, 김 홍륙이 진짜로 암살에 개입했는지 증거조차 아직 불확실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역모는커녕 무죄 선고를 하려 했다.
고종은 노발대발하여 당장 저놈을 역적으로 몰아서 사형에 처하라고 외압을 넣었으나.. 함 태영은 자기 소신을 고집했다. 그러자 고종은 그 사람을 짜르고 다른 판사를 동원해서 기어이 김 홍륙 일당을 사형에 처해 버렸다.

뭐, 왕족을 암살하려 한 놈이니 당사자를 사형에 처하는 건 그 어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친다. 아까 그 일본법 기준에도 완벽히 부합한다.
근데 이번에는 그냥 죽인 게 아니라 시체를 공개 전시해서 백성들이 다 뜯고 찢게 했으며, 마누라를 포함한 가족까지 몽땅 감옥에 가둬 옥사시키거나 유배형에 처했다.

자, 1898년이면 오쓰 사건보다 나중이고 조선에서 갑오개혁도 일어난 뒤였다. 반역죄인이라도 연좌제 내지 죽은 시체한테 소급 처벌은 한참 전의 '영조' 때부터 이미 폐지· 금지 상태였다. 그랬는데 고종은 그야말로 감정적인 괘씸죄에 의거한 잔인한 형벌과 초법적인 보복을 마구 남발했었다. 서 재필, 김 옥균 때도 그랬고, 김 홍집 때도 그랬고..

이 사건은 당연히 국제적으로 지탄받았다. 일본이 남의 나라 궁궐에 무단으로 쳐들어가서 왕후를 살해한 만행이 세계에 알려져서 규탄받고 이미지가 깎이긴 했지만, 그 피해 당사자 국가의 내부에서 미개한 짓이 벌어진 것도 마찬가지다. 세계 각국 외교관들이 이 소식을 자국으로 타전했다.

뭐, 변명이나 참작의 여지는 있다. 고종은 참 좋지 않은 시국에 힘겹게 왕 노릇 하느라 정신 건강이 좋을래야 좋을 수 없던 상태였다.
안에서는 반역 쿠데타에 암살/독살 음모, 밖에서는 외세 침략..;; 오죽했으면 남의 나라 대사관으로 도망가서 목숨을 구걸할 정도였으니.. 자국의 사법과 치안이 개판이기 때문에 군주가 오히려 자국의 치외법권이고 외국 법이 통용되는 곳으로 도피한 것이다.

이러니 고종은 노이로제 수준으로 극도로 예민해졌으며.. 망상에 빠져 아무나 막 의심하고 죽이고, 누구를 사형에 처할 때 곱게 죽이지 않고.. 뭔가 궁예나 히틀러나 스탈린의 말년 같은 모습으로 얼마든지 빠질 법했다.

게다가 민씨 집안으로부터의 부추김도 있었다. 뭐, 고종은 실제로는 히틀러나 스탈린 정도로 깽판을 칠 권력 자체가 없으니 그런 스케일로 깽판 치지는 않(못)았지만 말이다.
고종에 대해서 예로부터 저런 독살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1919년에 고종이 진짜 죽었을 때는.. 일제에 의한 독살 의혹 루머가 쫙 퍼질 만도 했다. (진실은 저 너머에..)

그리고 원인이야 어쨌든, 그의 이런 행태는 "일본 정도면 조선을 지배해도 되겠다"라는 국제적인 통념에 기여를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해방 후에 "우리는 군주제는 절대 다시 하지 말고 민주공화정으로 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식자층들이 하게 됐다.

참고로, 훗날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대 대머리 땅끄 대통령도 사법부에 외압을 넣고 개입한 적이 있었다. 뭐 이런 것들..

  • "대통령 각하께서 대국민담화를 해 버렸으니 국민 앞에서 약속을 지켜야 된다. 이 윤상 군의 유괴살인범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사형에 처해라"
  • "여성들한테 독약 먹이고는 죽어가는 걸 스너프 사진을 찍었다고? 아이고 88 서울 올림픽이 코앞인데 세계가 지켜보는 와중에 동네 창피하다. 더 조사할 것도 없고 그놈은 바로 사형 때려~ 이건 명령이다"

하지만 이건 정치범이 아니라, 증거 확실하고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뒈져야 마땅한 흉악범을 처단한 것이어서 구한말 고종과는 상황이 다르다. 시체를 공개적으로 잔인하게 능멸한 것도 아니니..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정의를 구현한 사이다 같은 구석도 있었다. ㄲㄲㄲㄲㄲ

3.
자, 원래는 글을 여기까지만 쓰고 말려고 했는데, 고종과 관련하여 또 하나 흥미로운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 바로 1896년의 치하포 사건..!!

이건 따지고 보면 조선 땅에서 무고한 일본인이 아무 면식도 없는 조선인에게 살해당한 테러이자 강력 범죄였다.
하지만 이건 을미사변 때문에 그렇잖아도 반일 감정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록 애매한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표면적인 명분은 민비 암살에 대한 보복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일본도 이때는 이걸 명분으로 대놓고 무력 보복을 하지는 않고 몸을 사렸다. 총칼 대신 외교부가 개입해서 "범인을 꼭 체포하고 사형에 처하도록 해라~ 사건 조사를 우리가 하겠다" 이렇게 점잖게만(?) 압박을 넣었다.

이때 고종은.. 일본의 요구에 호락호락 따르지 않고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난 김 구가 일본인을 죽이고 나서 거의 직후에 현행범으로 체포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조선 정부는 범인을 색출하고 체포하라는 일본 측의 요구에도 일부러 영혼 없이 세월아 네월아 늑장 대응하다가.. 사건 발생 무려 3개월 후에야 그를 체포했다.

일본 측:, "너네 법을 보니 살인범은 참수를 하게 돼 있네? 저놈을 반드시 참수해 주시오"
조선 왈: "ㄴㄴ 우리도 근대화 돼서 갑오개혁 이후로 사형은 교수형으로 집행한다. 작년에 동학의 수괴 전 봉준도 교수형이었으니 김 창수(김 구의 옛 이름) 역시 교수형에 처하겠음."

이래 놓고는 김 구를 감금한 채로 또 딜레이를 시전했으며.. 고의에 가깝게 죄수들을 아주 허술하게 관리했다. 결국은 탈옥이라는 명목으로 김 구를 사실상 석방 방면해 버렸다.
글쎄, 이때 서울-인천 간에 전화가 갓 개통돼서 국왕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 명령을 전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들 아시다시피 백범일지에는 워낙 이빨 주작도 많아서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고종은 김 구의 처분에 관해서는 절대로 일본 말을 호락호락 듣지 않음으로써 을미사변에 대해 아주 쪼잔 소심하게 저항하고 뒤끝을 부리긴 한 것으로 보인다. "니들이 민비 암살범(미우라 고로)을 대놓고 감싸고 풀어 줬어? 그럼 우리도 일본인을 죽인 조선 신민을 감싸 줄 거다"랄까?
이것도 위의 1, 2번과 더불어 생각할 점인 것 같다. 오쓰 사건, 독다 사건에 이어 치하포 사건이라니..!!

이렇듯, 김 구는 2년 가까이 해주와 인천 감옥에서 빵살이를 하다가 탈옥을 했다.
참고로 이 승만은 조금 나중인 1899년에 고종 폐위 음모에 휘말려서 5년 반이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사면을 받고 풀려났었다. 이 승만은 서대문 형무소의 전신인 한성감옥에서 지냈기 때문에 김 구와는 장소가 달랐다.
뭐, 고종은 그로부터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헤이그 밀사 파견 내역이 발각되는 바람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 폐위됐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6/07/27 08:35 2026/07/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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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 승만 할배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으로서 0에서 1을 만든 거인 위인 초인인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20세기 초 젊은 시절에 가츠라 테프트 밀약을 당하는 걸(조선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일제 식민지가 승인됨) 직접 겪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반세기 뒤에 자기가 대통령이 됐을 때는 미국이 울나라를 버리고 싶어도 못 버리게 나라 틀을 짰다.

생각을 해 보셔, 해방 직후부터 용산에 주한 미군 기지가 있었으면 6· 25 당시에 겨우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겠냐?
친서방, 시장 경제 자유 민주주의, 농지 개혁, 독도 평화선, 주한미군, 반공포로 석방, 한미 상호방위조약, 학생들한테도 민주주의 교육, 국비 유학 장학생 양성..
폐허 속에 붕괴 직전이던 집을 정말 초인적인 인맥 빽 동원해서 무너질 일이 없게는 만들어 놨다.

뭐, 큰 고비를 넘긴 뒤, 인의 장막 속에서 서서히 자기과시와 흑화 조짐이 보인 것은 사실이다.
곳곳에 할배 동상이 세워졌다. 1950년대 후반 몇 년간은 3월 26일인가 할배 탄신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됐다. 지폐에 할배 얼굴은 진작부터 들어가 있었고.
우리나라 역사상 생존 현직 대통령이 이 정도로 라이브로 떠받들어졌던 건 저 1공 시절이 유일 전무후무하다.

그래도 이때는 한국인들이 대통령이란 걸 처음으로 경험해 보고, 조선 왕정 시대와 일제 시대의 관념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도 꼴랑 10년 남짓이었다.
할배는 조선 황실을 그렇게도 싫어하고 박대했는데 그래도 늘그막에 자기가 왕 같은 대접은 좀 받고 싶어한 것 같다. 그러니 할배 주위에 아부꾼 간신배들도 끊이지 않았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배는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것이 압도적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할배가 진짜로 악의적인 독재자였으면 애초에 젊은 애들한테 민주주의 교육을 안 시켰을 것이다. 4 19 따위는 그 시절 북괴나 동구권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관총과 탱크로 유혈진압 하면 그만이었다.

이 자리에서 내가 긴 말 하지는 않겠지만, 리 승만이 악의적인 분단의 원흉이라니(!!) 친일파 득세 원흉이라니, 리 승만 대신 김 구만 대통령 됐으면.. 그거는 정말 일고의 가치가 없는 소리이다.

2.
자, 저렇게 리 승만 할배는 항일 독립운동으로나 훗날 울나라 초대 대통령으로나 워낙 큰 족적을 많이 남겼다. 공도 있고 과도 있으며, 그거 갖고 호불호도 많이 갈리는 편이다. 과는 공에 비하면 그야말로 자릿수가 다를 정도로 쨉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아, 오해하지 말라. 리 승만이 정치인으로서 실책을 저지르고 잘못한 것이 작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잘한 것이 정말 너무 넘사벽급으로 엄청나다는 말을 하는 것일 뿐이다.
디즈니 뮬란의 끝부분 대사처럼 말이다. "뮬란, 자네는 제멋대로 가출해서 입대해서 자기 상관을 속이고 궁궐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온갖 사고를 치고는.. 우리 국가와 민족을 구해냈다" 할배의 공과 과가 이런 관계라는 얘기다.)

이런 할배에 비해 서 재필은 그 정도 임팩트가 없어 보인다. 해방 후에 국내에서 정치를 하지를 않았으니 실책이나 악행, 과오를 깔 것도 없다.
그러니 서 재필에 대해 막연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그냥 미쿡인이었음. 한국어도 다 까먹고 고국과 동족을 깔보고 무시했음. 미국으로 돌아가서 지 한몸 편하게 잘 살았음. 친일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 애국애족 한 것도 아님.”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이다. 무덤에 누워 있던 서 재필이 저 말을 들으면 벌떡 일어나서 “뭐가 어쩌고 저째?” 하면서 불같이 화를 내지 싶다. 그 사람이 왜 미국인 행세를 했는지 생각은 해 보셨는가?

서 재필은 20세 청년 나이로 벌였던 갑신정변이 실패하는 바람에 역적으로 몰려서 정말 참혹한 멸문지화를 당했던 사람이다. 자기 부모, 와이프, 심지어 자기 아들, 양아버지, 형.. 집안이 몽땅 싸그리 몰살당했다. 처형, 자결, 노비로 강등..

우리의 고종은 갑신정변 잔당들을 해외로 자객까지 보내서 집요하게 제거했다. 가령, 김 옥균은 중국 상하이에서 피살당한 뒤, 목이 짤리고 머리가 한양 시내에 내걸렸다. (시체를 방부 처리해서 한국으로 운구해 와서는 일부러 저런 짓을)
서 재필은 목숨 부지하려고 일본을 거쳐서 미국까지 도망치게 됐다. 이 모든 게 무슨 고대 근대 중세도 아니고, 1880년대에 구한말 한반도 땅에서 벌어졌다!!

서양에서는 아예 왕을 암살한 반역범이라 해도 가족한테까지 저런 보복을 하지는 않았다. 저 때로부터 수백 년 전에도 말이다. 당사자야 사지 찢기고 내장 끄집어내진 채 죽었을지언정, 가족은 추방이나 신분세탁 정도로 끝났다. 한 마디로 조선이 미개했거나 최소한 고종이 엄청난 암군 폭군이었다. (+ 민씨 일가도)

서 재필은 영어의 영 짜도 모르던 상태에서 인종차별도 쩔던 미국 한복판에 알거지 상태로 내던져졌다. 그러니 생존하려면 이를 악물고 정말 미칠 듯이 주경야독 공부, 공부밖에 할 게 없었다.
결국 그는 만학도 신분으로 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졸업생 대표 연설), 미국 시민권을 받고 거기서 의대를 나와서 의사까지 됐다! 박 정희가 신분 상승을 위해 외국 나가서 만주군 장교가 됐다면, 서 재필은 더 먼 외국에 나가서 저렇게 출세한 것이다.

그는 미국 간 지 12년 만에 성경의 요셉과 비슷한 급으로 신분이 바뀌어서 조선 땅에 돌아오게 됐다. 독립협회 세워서 자기 고국을 청나라 간섭 없는 나라, 미국 같은 선진적인 시스템을 갖춘 나라로 만들려고 말이다.

이런 그가 자기 가족을 절멸시켜 버린 애증의 고국에서 “헤이, my name is 필립 제이슨. // 오우 노!! 코리아는 이래서 노 답!! ㅉㅉㅉ” 이렇게 미국인 행세를 한 거는 정말 정말 소심한 복수이자 귀여운 애교인 거 같은데 말이다. 미국인 행세를 해야 자기가 미국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고 남들이 자기를 함부로 해코지를 못 하지 않겠는가?

그는 진짜로 자기 고국이 싫어졌으면 박 중양처럼 신념형 친일파가 됐거나, 미국에 틀어박혀서 평생 병원이나 경영하면서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이다. 미쳤다고 현실의 서재필처럼 살았겠냐?
정말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소릴 듣는다.

더 코미디 같은 건.. 이런 서 재필조차도 리 승만의 업적을 가리고 존재를 지우는 대타 용도로는 잘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_=
왜, 미국에 세계 각국 영사관에는 각 나라의 국부들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우리나라는 거기에도 리 할배 대신 서 재필 동상이 있는 식으로 말이다. (영화 건국전쟁 참조) 정말 썅소리 나오지 않을 수 없다.

3.
할배는 대통령으로 선출은 합법적으로 됐는데 장기 집권을 하려고 법을 고쳤던 반면..
박 정희는 첫 시작부터가 군사정변이고 집권 중에도 유신 쿠데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치적인 사고를 제일 크게 쳤고 제일 오래 집권했지만, 그 규모에 비해서 자기를 내세우려 한 정도는 덜했다. 과묵하고 뚝심 있는 편이었다.

박 정희는 우리나라 대통령들 중에 명예박사 학위가 전혀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딴 요식행위 다 쓸데없다고 거절하고 안 받았다.

  • “학생 여러분은 내일의 주인공이지 지금 오늘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쓸데없이 좌익분자들한테 선동돼서 반정부 데모질 시위 하지 말고 조용히 공부나 하기 바랍니다)”
  • “내가 벌이는 일이 지금은 잔뜩 욕 먹을지 모르지만 평가는 후세가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할 겁니다. 그래도 성이 안 차면 나중에 내 무덤에다 침이나 실컷 뱉으시오.”

쿨하고 씨크하고.. 뭔가 미래를 바라보고 행동하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저 사람은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과연 언제까지 대통령을 했을까? 9대 임기가 끝나는 84년쯤에 자체개발 핵무기 공개하고 90년대 올림픽 유치까지 마치고 나서 퇴임했을까?
저 사람은 제 명에 죽었다면 자기 무덤도 성대하게 꾸미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지 싶다. 지금 같은 왕릉처럼 만들지 말라고 말이다.;;

박 정희는 영부인이 역대 제일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생각할 점이다.
영부인이 소록도까지 찾아가서 위문했던 것 때문에 오죽했으면 2012년도 대선 때 그 동네가 7시 지역에서 '유일'하게 레카 표가 뭉괴 표보다 더 많았었다.

그리고 더 여담을 보태자면..
박 정희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뭔가 모욕이나 무시를 당하면 그걸 절대로 넘기지 않고 언젠가 반드시 다 설욕했다.
그래서 학교 선생질 하다가 일본인 교사들로부터 무시 당하자 아예 만주국 장교가 돼서 돌아와서 걔들을 데꿀멍 시켰으며,
가난한 놈팽이라고 장인어른으로부터 무시 당하자.. 아예 나라를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돼서 장인으로부터 사과까지 받았다.;; 무섭지 않은가?

또 저 사람 가문은 부친, 당사자, 아들에 이르기까지 다들 아들을 40~50 나이가 돼서야 얻었다. 대를 이은 노산 가문인 게 인상적이다. 박 정희가 1917년생인데 아들 박 지만의 막내아들이 2014~2015년생이니.. 그래도 박 지만은 요즘 세상에 아들만 넷인 애국자 집안이 됐다.;;

4.
이런 박 정희에 비해.. 후임 전땅끄는 좀 더 '촐랑촐랑' 경박한 이미지인 것 같다. =_=;;
자기를 드러내고 쑈맨십 내세우는 걸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이때 '땡전뉴스'라는 게 있었다. 심지어 영부인도 남편이랑 같이 어디서 환호를 받으면 같이 손 흔들면서 화답도 했다.
"인간 전두환", "이 시대에 대한민국을 위해 준비된 답정너 대통령"...;;

박 정희 때는 5 16이나 유신 쿠데타 시절에도 언론이 이 정도로 치켜세우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ㅎㅎ 리 승만 시절과는 좀 다른 형태의 아부꾼이 등장했다.
왜, 옛날에 미국 맥아더 원수도 쑈맨십 있고 언론을 적절히 잘 구워삶던 사람이지 않았던가?
인물 사진, 풍경 사진 한 장을 언론에 내보내더라도 이 구도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를 치밀하게 계산하는 거 말이다. 전땅끄에 대해서도 그런 기질이 느껴진다.

그 과시욕이 어딜 가지 않아서 제주공항 신설 활주로 준공식에 참석하러 갈 때도 군용기까지 악천후에 무리해서 의전용으로 띄웠다가 날려먹은 적이 있었다.
땅끄는 평생 사는 방식이 그러했기 때문에 정치질의 달인이 됐고, 그 기질이 나중에는 "카메라들이 나만 좀 삐딱하게 찍어. / 요즘 젊은 친구들이 나한테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내한테 당해 보지도 안 해놓고"라는 희대의 멘탈갑 명대사로 이어졌다.

전땅끄는 할배나 박 정희와 달리, 직선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내력이 전혀 없는 대통령이었다.
그래도 저 사람도 권좌에 오르는 과정이 좀 에바였지, 일단 대령통으로서 재임 중의 뚝심 있는 행적은 괜찮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저 사람도 죽을 때는.. 북한 땅 보이는 전방에 이름없이 묻어 달라고 당부했었는데.. 지금 장지를 정하기는 했나? 어디 묻혔나? 참 궁금하다.

※ 나머지 여담

(1) 백범 김 구에 대해서 '킬구'라는 별명이 나도는데.. 이건 당사자의 성깔과 행적을 감안하면 마냥 터무니없는 별명이나 멸칭이 아니었다.
소싯적에 일본인 민간인을 린치해서 죽였던 ‘치하포 사건’뿐만이 아니라, 그는 임시정부를 운영하던 시절에도 수틀리면 테러와 암살을 종종 사주했기 때문이다. 변절한 안 중근의 아들을 암살하려 했고, 김 립 같은 생사람을 밀정이라고 의심해서 죽여 버리기도 했고.. 뭔가 주토피아 땃쥐 “Ice them!” 같은 인상이다.
그랬는데 그도 결국은 암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2) 할배와 박 정희 사이에 잠깐 대통령을 했던 윤 보선은.. 권력욕이 있었는지 2공 시절 대통령을 퇴임하고도 3공 시절에 대선에 ‘또’ 출마를 했던 유일한 인물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1960~61년 사이 윤 보선 시절에 경무대가 청와대로 바뀌고, 형무소가 교도소로 용어가 바뀌었다.

(3) 할배는 “대통령은 n회 이상 중임할 수 없다. 단, 초대 대통령은 예외로 한다”라고 정말 속내가 노골적으로 뻔히 보이는 개헌을 추진했었다.
그 뒤 전땅끄는 선례가 선례인 관계로 옛날 같은 독재 장기집권을 대놓고 추진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국가원로 자문회 운운하면서 대통령 위의 ‘상황’ 자리를 만드는 데 진심이었다. 꼼수 보소.. 그 흔적이 현행 헌법에까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당연히 사문화된 지 오래다.

(4) 대한민국 역사상 범죄자를 길거리에다 조리돌림 시켜서 망신 준 건 1961년에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 시절이 유일, 전무후무했다.
한편, 살인이 아니라 강간 절도 범죄 누범만으로 무려 ‘사형’이 집행된 건 1985년 즈음, 전땅끄 시절의 가정파괴범 처벌이 유일했다.

(5) 박 정희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빡쳐서 북괴를 상대로 “미친 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라고 일갈했었다. (내 철모와 군화를 가져오너라!)
김 영삼은 역사 바로 세우기 명목으로 중앙청 건물 철거를 강행하면서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라는 말을 남겼다.

Posted by 사무엘

2025/06/27 19:35 2025/06/2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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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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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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