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일로

서울 역 북부에서 시작해서 서대문 역(5)과 독립문 역(3)을 찍고 지하철 3호선의 선형을 따라 고양· 파주 방면으로 가는 도로는 국도 1호선 구간인 한편으로 이름이 '통일로'이다.
이 길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그게 고양과 파주까지 4차선 도로로 한데 뚫리고 '통일로'라는 이름까지 붙은 건 1972년 봄의 일이라고 한다. '통일호'라는 열차 이름은 1950년대 할배 때부터 있었지만, '통일로'는 박통이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바로 이 타이밍에 맞춰서 통일로의 종점에 임진각 관광지가 만들어졌으며, 통일촌이라는 민통선 마을도 생겼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7월 4일엔 우리가 학교에서도 배우는 7· 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됐다.
그러니 그때는 온통 통일, 통일 하던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진짜로 남북 통일이 이뤄질 줄 알고 많이 들떴었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파주 임진각 방면으로 갈 때 강변북로에서 이어지는 자동차 전용 도로인 자유로, 혹은 최근에 개통한 서울-문산 고속도로(17)가 즐겨 쓰인다.
자유로는 통일로 이후로 딱 20년이 지난 1992년에 개통했으며,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오두산 통일 전망대가 같이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유로나 고속도로와 달리, 기존의 통일로는 자동차 전용 도로도 아닌 데다 차로도 너무 좁고 확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냥 그저 그런 시내 도로 내지 국도 레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임진각으로 가는 도로의 원조는 바로 이 길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통일로의 고양시 북쪽 지점에는 '통일로 휴게소'라고 온갖 기념비들과 공원이 들어서 있고 공릉천이라는 하천도 가까이 있다. 본인은 북극 한파가 전국을 강타했던 새해의 첫 주말에는 거기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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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휴게소라고 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바로 근처에 식당이나 가게들이 들어선 건 아니고.. 그냥 공터 광장과 공원 정도만이 꾸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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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이니, 서울 올림픽이니 하는 왕창 옛날 냄새가 진동하는 기념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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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들어가서 올라갈 수 있는 정자 같은 게 아니어서 아쉽다. 자유롭게 개방된 2층 정자라면 올림픽대로에 있는 청담 도로 공원 같은 느낌도 났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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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휴게소'의 길 건너편에는 6· 25 사변 필리핀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에 따르면, 필리핀군은 488명이 참전했으며, 이 기념비는 1974년 10월 2일에 건립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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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군 기념비의 옆에는 고양시 출신 인물 중에 6· 25 참전 용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었다.
작년에 칠곡 왜관에서 봤던 애국 동산이 떠오른다. 거기서도 자기 지역 출신의 6· 25 참전 용사들을 잔뜩 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안보 관광을 많이 다니고 나니, 과거에 비슷한 부류의 기념물을 봤던 것이 서로 연계가 될 지경이다.
이 기념비는 2004년 7월 27일에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가 2011년 1월 4일부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통일로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런 볼거리도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통일로라는 이름의 도로는 경상북도 경주에도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남북 통일 염원과도 오마주한다는 취지로 1977년엔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에 통일전이라는 기념비가 건립됐기 때문이다. 통일전 근처의 도로 이름이 통일로이며, 심지어 '통일전 휴게소'도 있다.

내가 보기에 경주시는 박통 시절부터 관광 도시로서 특별 지원 대상으로 지정되어 혜택을 아주 많이 받았다. 1968년 12월에 국립공원 지정, 1974년에 보문 관광단지 개발, 통금에서 진작부터 열외, 호화 귀족 열차이던 새마을호 정차 따위 말이다. 게다가 도시형 국립공원이라는 건 현재까지도 경주시가 전국에서 유일하다.

끝으로.. 통일로라는 길이 닦이던 그 시절에 결의됐던 7· 4 성명이라는 건.. 우리나라가 영원히 으르렁대면서 적대할 것 같던 북괴하고도 그나마 “눈 가리고 아웅으로라도 좀 싸우지 말고 서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모색해 보자~”라는 제스처를 취해 봤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특히 1 21 김 신조 사태 때문에 서로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해져 있었던가?)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고 통일은 개뿔.. 남북 지도자는 애초에 서로 온전히 신뢰 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전근대 시절 옛날에 유럽에서는 귀족 장교들이 자국 졸병들보다 적국 장교를 더 신뢰할 정도였다고 하더라만(적이지만 최소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는다) 20세기 후반의 한반도엔 그런 거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못 가 남한은 통일은커녕 자기 내부에서도 유신 독재(ㅋㅋ)가 시작되었고, 북괴 역시 특히 74년을 기점으로 주체사상과 함께 더욱 흑화하게 됐다. 쟤들도 겉으로는 통일 통일 거리면서 한쪽에서는 땅굴이나 파고, 공작원을 보내 남한 대통령을 암살까지 하려 했다. 그러니 통일은 더욱 물 건너가고 반공 분위기만 더 강해졌다.

2. 캠핑

통일로 휴게소를 방문하던 당시엔 서울의 낮 기온이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강추위가 며칠 동안 전국을 강타하던 중이었다. 오죽했으면 최남단의 제주도까지 한파 경보가 내려졌으며, 한강이 얼고 황해 바다조차 일부 얼어서 양식업(...;; )과 비닐하우스 화훼업(치솟는 난방비)이 큰 피해를 호소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본인은 평범한 산 속이나 물가가 아니라, 이번엔 아예 얼어붙은 강 위에서 텐트 치고 자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 통일로 휴게소 부근부터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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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중앙까지 100% 언 건 아니지만 주변에는 물이 흐르다가 완벽하게 얼어 버린 곳이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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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주차장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텐트 치기 적합한 곳을 발견했다.
이불· 침낭 등 장비가 굉장히 많고 무거운 상태였기 때문에 도보 접근성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이것들을 오래 들고 다니니 팔과 허리가 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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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는 통일로 IC 부근의 상류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는 전구간이 꽁꽁 얼고 위에 눈까지 쌓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공원 같은 것도 없어서 인적이 더욱 없었다. 다만, 나 역시 강물 쪽으로 가기 위해서 갈대더미들을 타넘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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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세상에 이런 횡재가..
오도독오도독 눈 밟는 소리가 걸을 때가 아니라 누워서 몸 뒤척일 때 나는 그 느낌을 아시겠는가?
-15도도 이제 별 거 아닌 듯..^^ 아 그런데 다 좋은데 발은 좀 시렵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믿음이 부족해서 강 중앙으로 더 가까이 가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한숨 잘 잔 뒤 집으로 귀환했다.
그 당시엔 폰과 컴퓨터뿐만 아니라 차키의 버튼이 갑자기 먹히지 않기 시작했다. 키가 문제인지 차가 문제인지.. 차 문 못 열고 시동 못 걸면 어떡하나 깜짝 놀랐다. 키를 따뜻한 곳에 두니 다행히 다시 살아났다.

귀환할 때는 동부 간선 도로를 이용해 봤다.
의정부에서 서울 북부 구간이 싹 리모델링 돼서 확장되고 지하화가 된 걸 처음 봤는데.. 이게 딱 올해부터 개통한 거라고 한다.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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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천에서 야영을 한 뒤, 다음날 밤에는 중랑천 모처의 얼음판에서 또 야영을 했다.
여기는 공릉천보다도 얼음이 덜 생겨 있어서 중앙으로 접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텐트를 친 곳은 보다시피 명백하게 땅이 아니라 얼음이었다.

산천 어디서든 텐트만 치면 나만의 밀실이 생긴다는 게 좋다. 그리고 밖이 아무리 추워도 장비를 충분히 챙기면 체온 에어포켓으로 버틸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이렇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1/29 08:35 2021/01/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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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가는 길.. 요게 무슨 시설인지 사진만 보고 아시는 분은 굉장한 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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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노골적인 힌트를 드리자면, 수 년 전에 저기서 벌어진(벌어졌다는) 일보다 이번 뭉괴뢰 정부에서 저지른 탈북자 북송이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큰 죄악이다. 이건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항이며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요즘은 대통령이 대놓고 종북 발언을 하기가 좀 뭣하니, 통일부 장관을 희대의 빨갱이로 임명해 놓고 그놈을 통해서 자기 심정을 대리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산을 전철이 아닌 차로, 그리고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지방도만 이용해서 가니 무척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이 지역에서 본인이 가장 먼저 답사한 것은 반월-상록수 역 사이에서 KTX가 달리는 경부고속선 선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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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천 다음으로 반월천에도 맑은 물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낮이 되어 살짝 덥기까지 한데.. 옷 벗고 들어가서 물놀이를 하고 싶어졌다.
반월천의 물은 수리산에서 발원해서 저 멀리 시화호 쪽으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지금 이 시야에서 바로 옆이 경부고속선이며, 뒤에는 안산선 전철이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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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경부고속선 선로와 함께 나란히 반월 호수 부근까지 갔다.
여기까지 간 김에 일직 터널 위의 유명한 열차 촬영 명당도 다시 들러 보고 싶었다.
본인은 무려 7년 전에 가 본 적이 있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삽질만 하다가 재답사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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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터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남쪽의 다른 산길을 잘못 올랐다. 거기도 어귀는 터널 근처의 산길과 비슷하게 생겼고, 옆으로 철조망이 처진 것까지 동일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맞는 길로 가긴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지름길 진입로는 검찰일보인가 어디의 사유지로 바뀌고, 주변이 철망이 쳐지고 CCTV까지 생겨 있었다. 이 때문에 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나중에 여기 일대의 인터넷 지도를 보니, 터널 주변을 더 크게 우회해서 터널의 위쪽으로 접근하는 다른 길이 있긴 한 듯하다. 하지만 그 길은 7년 전에 갔던 길은 아니며, 그렇게 갔을 때 그 촬영 명당에 실제로 도달할 수 있는지도 직접 답사를 하지 않는 한 모르겠다. 7년 전에는 갈 수 있었던 길이 지금은 막혔다는 것 하나는 사실인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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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인해 KTX 명당에는 못 들렀고, 그 대신 바로 옆의 경치 좋은 반월 호수 주변을 산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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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름 없는 야산의 꼭대기에는 군사 시설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있다. 산의 이름이라든가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궁금해지는데 인터넷 지도에는 딱히 안 나오는 것 같다. 그저 덕고개 당숲 같은 주변 산책 코스만 나올 뿐..
이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닌 뒤, 한적한 반월 역에 들러서 각종 재충전과 보급을 했다. 안산 시내의 공영 주차장들은 3시간까지는 무료여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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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최 용신 기념관 및 묘지를 지난 2005년 이후 무려 15년 만에 다시 찾아갔다.
그 긴 세월 동안 샘골 공원은 싹 리모델링 되었고 최 용신 기념관이 정식으로 지어졌으며 주차장도 생겼다. 주차장엔 샘골 교회에서 굴리는 승합차도 두어 대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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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이렇게 바뀌었을 줄이야.. 길도 다 포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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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는 약혼남이던 김 학준의 약력도 소개돼 있었다. 이분도 조선어 학회 사건 때 투옥된 적이 있었나...? 저건 김 학준의 약력인지 정 태진의 약력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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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첫 답사했던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되게 싹 바뀌었다. 다만, 지금은 코로나19 시국 때문에 기념관 안에는 못 들어갔다.
기념관이 여기 언덕 위에서는 단층 건물인 것 같지만, 언덕 아래쪽으로 층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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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이다.

이제 본인은 수인선의 개통에 앞서 서해선 전철부터 타 보기 위해 남쪽 종점인 원시 역 부근으로 갔다. 본인은 아직 서해선도 전혀 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지 역 이남은 크고 한적한 도로의 양 옆에 역시 듣던 대로 공장들이 가득했다. 근처의 야산에 웬 전망대 공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만 시간 관계상 가 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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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시 역 이남으로 도로의 끝은.. 이렇게 시화호로 흘러드는 반월천의 하류가 가로막고 있었다. 강 건너편은 화성시이다.
여기도 나름 공원이 잘 꾸며져 있었으며 강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도 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맑고 푸르고 화창하던 하늘이 흐려지고 어두워졌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29 19:35 2020/09/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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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2일을 낀 주말에 본인은 수인선의 전구간 복선전철 부활을 기념하고 경축하기 위해 답사 여행을 떠났다. 기왕 수원· 화성· 안산까지 가는 김에, 딱 수인선 열차만 타는 게 아니라 주변의 지역들까지 포함해서 아예 2박 2일짜리 경기도 서남부 종합 여행을 다녀왔다.
한 달 전에 다녀온 3박 4일짜리 여행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이번에도 짧은 시간 동안 철도와 관련된 많은 장소들을 답사하면서 좋은 경험과 추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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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퇴근한 당일 밤에 곧장 여행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안양의 수리산 기슭에 있는 병목안 산림욕장이었다. 여기 한구석에 짱박혀서 텐트 치고 잠들었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시원하고, 계곡에 물도 졸졸 흐르고.. 여기는 정말 최고의 숙소였다. 나 말고도 큼직한 차 끌고 와서는 뒷문 열어 놓고 자는 아재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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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잘 자고 새벽에 눈을 떴다. 다음으로는 산림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병목안 시민 공원'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경치가 워낙 좋으니 이른 아침부터 산책과 운동을 하는 인근 주민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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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과거에 채석장이었다고 한다. 서울로 치면 용마산 채석장을 리모델링한 용마 폭포 공원 같은 곳이다.
여기서 채집한 돌이 경부선 복선화 및 수인선의 건설 공사에서 쓰였으며, 옛날에는 돌을 수월하게 나르라고 경부선 안양 역에서 여기까지 아예 철길도 깔려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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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채석장이었던 곳답게 넓은 풀밭과 거대한 바위 언덕이 일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인공 폭포도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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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내부에는 채석장 시절에 쓰였던 쬐끄만 선로와 협궤 화차 레플리카가 한구석에 전시돼 있었다. 오오~~ 표준궤와 협궤가 모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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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흔적이 있는 공원이라니 대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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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병목안'은 여기 지형의 특성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병목 현상' 할 때의 병목과 동일한 의미의 단어이다.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광명에는 폐광산을 공원화한 광명 동굴이 있는데.. 채석장도 뭔가 심상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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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아래에도 경치 좋은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었다. 집 근처에 이런 공원이 있으면 무척 좋겠다.
여기서 특별히 소개하지는 않지만 공원과 산림욕장 사이에는 캠핑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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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목안 공원 다음으로는 안양에 있는 다른 공원인 '삼덕 공원'을 찾아갔다. 얘는 도심에 가까이 있는 자그마한 근린공원이다. (공원도 많이 돌아다녀 보니 급의 차이가 있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바로 옆에 공영주차장이 있기도 해서 자가용 접근성은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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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 공원은 삼덕 제지라는 기업을 운영하던 업주가 지난 2003년에 은퇴하면서 공장 부지를 안양시에다 통째로 기부한 덕분에 조성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이런 훈훈한 미담만 전해지지만.. 그 이면에는 씁쓸한 사연이 전해진다.
업주는 말도 안 되는 요구와 음해· 파업을 남발하는 악성 노조의 갑질 횡포에 이골이 난 나머지, 거의 40년을 경영했던 공장을 에라이 싹 처분해 버리고 이민 간 거라고 한다..;; 덕분에 배은망덕한 종업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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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한쪽 구석에는 창업주의 흉상,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공장 굴뚝의 축소 레플리카가 남아 있다. 이 사람도 당연히 흙수저 개룡남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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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원의 옆으로는 수암천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올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가뭄 걱정 없고 개천마다 물이 졸졸 흐르고 있는 건 참 보기 좋았다.
얘는 먼저 봤던 수리산 병목안 계곡에서 발원해서 안양 역 건너편까지 흐른 뒤, 안양천으로 합류한다. 원래 시내에서는 대부분의 구간이 복개되었는데, 요 근래에 다시 뚜껑을 걷어내고 복원을 많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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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남산의 남쪽으로 용산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지막한 언덕이 하나 있다. '둔지산'이라고 이름도 당당히 붙어 있지만, 그다지 높지 않고 전지역이 미군 기지로 점령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름은 인지도가 대단히 낮다.

그런데 안양에도 존재감이 서울의 둔지산 같은 산이 있다. 바로 수리산의 북쪽, 서독산의 남쪽에 있는 일명 박달산이다. 얘는 언덕 전체가 예비군 훈련장을 포함한 군부대들로 꽉 차 있다. 그러니 여기 주변엔 산책로나 등산로 따위는 일체 존재하지 않고 그냥 차량 진입로 한 곳만 있다.
서울 근교에서 예비군 훈련장이 있는 산을 따져 보자면 서북부에는 노고산, 동남부에는 인능산이 있는데.. 서남부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산이 바로 이 산인 셈이다.

뭐, 얘도 그냥 수리산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수리산의 유명 봉우리는 저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 북악산과 북한산이 다른 산인 것처럼, 그리고 관악산과 삼성산이 다른 산인 것처럼 여기도 뭔가 다른 산으로 취급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본인은 수리산은 오른 적이 아직 한 번도 없다.;;

여기까지 온 김에 본인은 인터넷 지도 로드뷰로 볼 수 없는 풍경도 좀 염탐을 했다.
안양 구경은 오전에 이 정도로 한 뒤, 본인은 시흥을 거쳐서 더 남쪽 안산으로 내려갔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27 08:36 2020/09/2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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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청도 관광

짧은 시간 동안 이곳 저곳을 우산 들고 돌아다니느라 꽤 힘들었는데.. 곧장 또 청도로 이동했다. 칠곡에서 대구까지는 경부 고속도로(1), 대구에서 청도까지는 대구-부산 고속도로(55)로 답이 딱 나왔다.
경부는 차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니는 차도 그 이상으로 많고 비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만치 빠르게 달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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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와인 터널은 남성현 역에서부터 길 안내가 잘 돼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길 곳곳에 토사와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심상찮더니, 역시 폭우로 인해 영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주변 경치 사진만 몇 장 찍었다.

왜관에 이어서 청도까지 경부선 폐터널을 연달아 감상하는 것을 노렸는데.. 아쉽다. 어쩐지 주변에 주차된 차들이 너무 없어 보이긴 했다.
허탕 치고 돌아가는 관광객들에게 주변 상인들이 복숭아라도 팔려고 들이밀고 있는 게 좀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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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 이름인지 단순 사자성어인지 알 수 없는 이 한자 문구는 경부선을 건설하던 당시에 일본인이 새겨 놓은 것인데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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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터널에 못 들어간 대신,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빗길을 뚫고 대신 찾아간 곳은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과 내부의 기념관이었다. 청도에 이런 역사적 사연이 있었구나~!
단, 놀랍게도 포항에도 기계면에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이 있으며, 두 지역이 서로 자기가 새마을 운동의 원조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중이라고 한다..! 이름도 참 새마을스럽게 '기계'네..;;;

다만, 두 곳의 자료를 대조해 보면, 시기적으로 원조 발상지는 청도가 맞는 듯하다. 포항 저 동네는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되고 나서 첫 성과가 가장 탁월해서 대통령에게 직접 칭찬을 들은 마을이다. 관계가 그렇게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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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에 우리나라 농촌은 저런 대대적인 마개조 사업이 필요할 정도로 상황이 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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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기념관은 단순히 원조가카의 치적을 자랑하는 보수 성향의 성지가 아님을 주의하라. 1957년은 아직 1공화국이지, 박통이 집권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박통의 집권 전부터 이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몇몇 지도자들이 스스로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면서 힘을 합쳐서 길을 닦고 주민들 의식 개조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우리 마을 코앞에 경부선 철길이 지나는데 여기다가 열차도 세워 달라고 철도청에다 투서를 찔러 넣고 돈 모아서 철도역까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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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1969년 여름, 경상도의 수해 현장 순시를 마친 박통의 눈에 이곳 신도리 마을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이곳의 내력이 보고되었다.
이것을 보고 박통은 feel이 꽂혀서 그 해 11월에 농촌 근대화 촉진법을 발표했다고 한다..;; 류 태영 박사 같은 참모의 도움으로 "근면 자조 협동"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우리는 할 수 있다 / 잘 살아 보세" 의식 개조 농촌 근대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의외로 1960년대 3공 시절에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이런 것만 있었지 국가 차원에서의 새마을 운동은 아직 없었다.
그러니 그 시절부터 자체적으로 근대화 운동(?)을 하고 있던 마을이라면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라고 주장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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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새마을 운동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최고 등급 열차 이름도 새마을호가 되고... 박통의 따님은 '새마음(!!!)의 길'이라고 20대 중반의 나이로 책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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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은 우리나라가 K팝, 한류, K방역-_- 같은 것보다 더 선하고 건전한 문물을 세계에 전한 것이었다.
이웃의 중공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뻘짓을 하면서 자폭하던 동안, 한국은 그나마 제정신 박힌 건전한 운동을 하며 중흥을 이룩한 것에 그 후손들은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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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카는 대통령이 되기 1년 남짓 전에 여기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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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더 이상의 기념관 내부 사진 소개는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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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엔 공원도 넓게 잘 꾸며져 있었다. 날씨가 맑을 때 왔으면 경치가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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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공원에 이어 여기서도 박 정희 대통령 동상을 보게 되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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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거 역은 실제 역사는 수십 년 전에 철거되고 없지만, 이 공원 내부에 레플리카가 지어져 있었다. 마치 중앙선 구 능내 역, 영동선 양원 역, 함백선 함백 역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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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원은 이런 풍경의 마을 내지 펜션촌으로도 이어졌다.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개천은 역시 흙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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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공원처럼 여기도 이렇게 산의 측면에다가 자기 이름을 새겨 놓은 구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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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건물이 철거되고 역명판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게 마치 옛날 군함 백두산함이 스크랩되고 현재 마스트만 남아 있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렇게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을 답사한 뒤 오늘,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청도 역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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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한 지 벌써 7년이 넘은.. 과거 한국 철도계의 왕자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 한 편성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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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대해 말은 오래 전에 들었지만 성지 순례를 이제야 하게 됐다.
새마을호 디젤 동차 실물을 만난 기쁨도 잠시.. 열차의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표면 곳곳에 부식이 진행되고 있고, 열차로 올라가는 사다리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어서 몹시 아쉬웠다. 심지어 거미줄에 큼직한 거미가 붙어 있기까지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하고 신경을 쓰고 지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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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내부에는 새마을호 열차뿐만 아니라 아주 자그맣게 토속 공원이 꾸며져 있기도 하다. 예전에 중앙 고속도로 단양 휴게소 부산 방향의 테마 공원의 하위 호환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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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이것으로 둘째 날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다.
해가 진 뒤에야 허기를 달랜 뒤, 잠은 교외의 어느 으슥한 공원 정자에다 텐트 치고 잤다. 환상적이었다. 비는 저녁쯤에 그친 듯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9 19:36 2020/08/2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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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낙동강 일대 관광

칠곡 관광의 제1부는 전적 기념관 구경이었고, 제2부는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에서 낙동강을 따라 남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왜관 소방서 앞 사거리" 일대 답사 형태로 진행됐다.
여기는 경부선 철길이 단선이던 시절에 쓰였던 구 철교(지금 "호국의 다리")와 구 터널이 남아 있으며, 이것 말고도 아기자기한 의미를 지닌 공원들이 가까이 밀집해 있었다. 주차 걱정도 전혀 없어서 더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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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구 경부선 왜관 터널의 입구이다. 경부선이 단선이던 시절, 1905년부터 적어도 1930년대 말까지 약 30년 동안은 철길이 여기를 지났다는 뜻이다. 지금은 터널 바로 옆에 식당 건물이 들어섰다.
이런 폐터널은 사유지의 창고로 개조되어 방치되는 편이다만.. 얘는 등록문화재로 정식으로 등재되고 터널의 양방향이 뚫려서 공원으로도 이어지게 개조되었다. 지방 정부 차원에서 보존을 위해 나름 노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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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무나 터널 안에 들어가 볼 수도 있다. 바닥에는 일부 빗물이 떨어지고 고인 곳도 있었다.
터널의 유래를 설명한 표지판 그림도 옆에 같이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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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은 근처의 "왜관 소공원"이라는 아담한 공원으로 이어졌다. 공원은 여기 저기에 공터와 정자가 있어서 경치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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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사과 같은 열매가 열린 가로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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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소공원의 길 건너편에는 '애국 동산'이라고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 10여 명이 으리으리한 묘비와 함께 소개돼 있는 묘지 언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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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병철(1903-1945). 유 관순과 거의 동갑내기로 10대 중반의 나이로 칠곡에서 3· 1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정모 한번 했고..
그 뒤로 임시정부와 신간회에 후원, 야학 교사, 그리고 이미 다 와해되어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독립군(?) 군자금 모집까지 다양한 분야 계열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 분이다. 이 때문에 3· 1 운동으로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뒤인 1938년에 한번 더 경찰서 정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 정도 이력만으로 그는 일제 말기에 불령선인으로 찍히기에 충분했다. 감시를 받으며 지내던 와중에 1945년 여름, 사실상 마지막 의거인 "부민관 폭탄 투척" 사건이 터지자 또 어거지 같은 꼬투리를 잡혀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래서 아마 호송 열차를 타고 대구로 끌려가는 길이었지 싶은데.. 그는 열차가 낙동강 철교를 달리고 있을 때.. 비록 손은 결박 당했겠지만 경찰들을 몸으로 뿌리치고 확 뛰쳐나가서 다리 아래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순국한 때는 8월 7일.. 경부선이 전구간 복선화가 완료되어 새로운 낙동강 철교가 개통한 지 겨우 1년 남짓 된 시절이었고, 저 때는 무엇보다도 히로시마에 작은 꼬마가 떨어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1주일~열흘 남짓 동안 조금만 수모를 참고 버텼으면 조국의 광복을 보고 석방돼 나왔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그런 바깥 소식, 게다가 일제에게 불리한 소식을 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 사람이 무슨 총칼 폭탄으로 일본인을 죽인 것도 아니고, 저 정도 행적은 사형 당할 정도의 죄도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런 시기에 또 잡혀 들어가면 무슨 꼬투리를 잡혀서든 살아서 나오기 힘들 거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영원히 행방불명된 김 익상 의사의 최후와 비슷..)
아니면 고문 당하면서 동지들의 신변까지 실토하게 될 것을 염려했거나..

내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일제가 원폭 맞아서 갑작스럽게 항복하고 허겁지겁 빠져나온 것은 미국에게나 우리에게나 매우 엄청난 행운이었다.
자국민한테도 1억 옥쇄 X랄하던 미친놈들이 시간이 충분했으면 나가더라도 감옥에 갇혀 있던 항일 애국지사들을 다 죽이고 증겨 인멸하고 파괴하고 나갔을 것이다.

동남아에서 도망칠 때도 위안부들 다 죽이고 나갔던 것처럼. 히틀러가 패전을 앞두고 파리를 몽땅 불지르려고 했던 것처럼..
도 병철 같은 사람이 체포되던 중에 괜히 자결을 한 게 아니었다. "1주일만 참았으면 됐을 텐데" 같은 아쉬움도.. 결말을 다 아는 후손들이나 할 수 있는 얘기이지, 당대를 살았던 사람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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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비의 뒷면에는 여기에 무덤은 없지만 어쨌든 칠곡 출신의 애국지사들 수십 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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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덕의 꼭대기에는 UN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왜관 지구 전승비가 놓여 있었다. 여기는 정식 현충원은 아니지만 참 독특한 보훈 시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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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터널, 소공원, 애국 동산 다음으로 경부선 구교량이라 할 수 있는 '호국의 다리'를 반쯤 건너 보는 것으로 칠곡 관광을 마무리했다.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강물은 온통 흙탕물이고 풍경은 뭐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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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강변 공원도 금방이라도 침수될 듯 물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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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도 중앙선의 옛 시내 관통 구간이 교량(장군교)에서 폐터널로 바로 이어지는 구간이 있는데.. 마치 그런 걸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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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08:35 2020/08/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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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칠곡 다부동/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 호국 평화 기념관

다음으로 1시간이 좀 넘게 운전해서 칠곡에 갔다. 꼬불꼬불 해변길과 포항 시내를 거친 뒤, 20번 고속도로(포항-익산)를 처음으로 달려 봤다. 다만, 여전히 몹시 피곤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거의 30분 가까이 기절하듯이 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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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장 먼저 백 선엽 장군의 공훈이 남아 있는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 도착했다. 55번 고속도로 다부 IC의 바로 옆에 있어서 찾아가기 쉬웠다. 기념관의 뜰에는 탱크와 미사일이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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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9월에 낙동강 전선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 가히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한 혈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물러나고 대구까지 북괴에게 빼앗기면 더 물러날 곳도, 더 확보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다면 남한 수뇌부는 진짜로 제주도나 외국 망명까지 고려하는 지경이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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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은 비가 내려서 온통 물바다인데 마침 비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 쉼터가 있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서 새참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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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 경찰 추모비와 무명 용사 묘지가 있었다.
백 선엽 장군은 종북 반역 매국 세력의 패악질로 인해 자신이 현충원에 못 들어간다면 차라리 자기를 여기 다부동 전적지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던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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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기념관은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리모델링 공사 중이어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규모도 작고, 홈페이지를 보니 막 특별한 것이 전시돼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하필 백 선엽 장군의 서거로 인해서 이곳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시기에 기념관이 개방되어 있지 않은 것은 일면 아쉬운 점이다. 리모델링 자체는 백 장군의 서거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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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인은 서쪽으로 10여 km 정도 더 이동해서 낙동강 근처까지 갔다.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과 호국 평화 기념관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데, 후자가 뭔가 전쟁 기념관의 칠곡 버전처럼 제법 규모 있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부터 먼저 들어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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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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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편과 악의 무리들이 나란히 대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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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칠곡은 6· 25 사변 당시에 남한이 영토의 90%를 빼앗기는 위기에 처했을 때, 낙동강을 마지노 선으로 잡고 최후의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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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있는 분들은 이 기념관을 직접 방문해서 관람해 보시기 바란다.
일일이 사진을 소개하지는 않지만 1950년 8월 하순에 벌어졌던 유학산 전투, 수암산 전투, 가산산성 전투 이런 것도 다뤄져 있다.

이랬는데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덕분에 불과 한 달 뒤인 9월 하순엔 남북 영토가 전쟁 이전 시점으로 되돌아갔으니 정말 고맙고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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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주인공의 실제 모델 인물. 그랬구나.
다만, 내 기억으로 영화에서는 형이 중공군에 합류했고 강원도 산간의 금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뭔가 각색이 있었던 듯하다.
중공군이 칠곡까지 남하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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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의 꼭대기 층에서는 아래의 낙동강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경부고속선 철길이 근처를 지나는데, 마침 주행 중인 KTX를 굉장히 괜찮은 구도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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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의 입구이다. 저 언덕 위에 자그맣게 보이는 건물이 방금 관람했던 호국 평화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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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 기념관은 평화 기념관보다 규모가 작고 볼거리가 적었지만 최소한 전투 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모습은 유익했다. 김 재옥 기념관과 장사 상륙 작전 기념관에도 이런 레플리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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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유치하고 원색적인 북괴 비난 같지만.. 솔직히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북괴의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쟤들이 전면 개방되지 않는 한 우리도 저런 놈들과 협력, 통일 같은 수작에는 절대로 응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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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야외엔 이런 전적비도 있었다. 둘째 날 오전에는 이렇게 전적 기념관들을 관람하며 시간을 보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4 19:34 2020/08/2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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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본인은 지난 4월말 황금 연휴 동안의 근거리 여행에 이어, 8월에도 매년 해 온 것처럼 하계 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올해는 교회 수련회가 없었던 것을 감안하여 개인 여행을 기존의 1박 2일이나 2박 3일보다 긴 3박 4일로 잡았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더 멀리 나가고 다양한 곳을 둘러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바이러스 말고도 이번 여행에서의 큰 복병은 이례적으로 길게 지속된 장마였다. 이 때문에 원래 7월 말~8월 초에 다녀 오려던 것을 한 주 미루기도 했다.
하지만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광복절 연휴나 그 이후까지 계획을 질질 미루고 싶지는 않아서 그 다음 주에는 출발을 강행했다. 사실, 비가 내리던 날도 해만 안 날 뿐 땀 뻘뻘 흐르고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처음에 생각했던 올해의 여행 계획은 통영-대전 + 중부 고속도로(35)를 끝까지 타고 남하해서 남해안 정도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평소에 서울에서 거기까지 갈 기회는 잘 없었으니까.. 다도해 해상 공원을 구경하고 남해안의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경전선 폐역이나 88 올림픽 고속도로 구도로를 답사하는 것 정도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7월쯤 되면서 좀 수정됐다. 백 선엽 장군의 서거 소식을 계기로, 올해는 강원도를 전혀 경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보 관광의 비중을 매우 크게 잡게 됐다. 바로 1950년 여름의 격전지였던 칠곡 일대의 답사가 추가된 것.. 거기에다 작년에 관람했던 영화 <장사리>에 대한 기억이 살아나면서 물놀이 장소도 그쪽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남해안까지 가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경로가 당초 계획보다 더 동쪽으로 기울어졌다. 역대 휴가 여행 중, 본인의 고향과 가장 가까이 가게 됐다.

1. 충주 동락 전투 승전 기념 공원, 동락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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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해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충주의 서쪽 끝인 동락 전투 승전 기념 공원이었다. 경유한 고속도로는 50, 45와 40의 순으로 번호가 작아졌다. 넓고 한적하고 으슥한 공터에 일찌감치 도착한 뒤, 잠도 여기서 한숨 잤다.
해 안 나고 덥지 않고, 아직 비도 안 오고 화장실과 수돗물이 바로 옆에 있기까지 해서 첫 야영을 아주 기분 좋게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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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 전투는 6· 25 전쟁 중에 국군의 육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해군의 승전은 후방 동해에서의 대한해협 해전)
김 재옥 교사가 동락 초등학교 운동장을 점령한 적의 동태를 아군에게 침착하게 잘 신고한 덕분에 승리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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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공원이 있는 곳에서 300미터 남짓 떨어진 저 동락 초등학교 지점으로 아군이 박격포를 쐈다. 현장엔 그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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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비도 있고 참전 유공자 기념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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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으로 들어오는 짤막한 길은 도로명이 "김재옥길"이라고 명명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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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은 맑은 물이 흐르고 경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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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동락 초등학교로 들어가서 김 재옥 교사 기념관에 들어갔다.
방학 기간이고 평소 방문 인원이 매우 드물어서 그런지, 교무실을 찾아가서 교직원에게 요청을 해야 문을 열어 줬다.
이 학교 자체도 2020년 현재 전교생이 몇십 명 남짓밖에 안 된다고 본인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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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참전 기념비와 김 재옥 교사 현충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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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재옥 교사에 대한 소개 문구.
이분은 요즘으로 치면 거의 대학생 나이로 교사로 부임했다가 거의 곧장 전쟁을 맞이했다. 그리고 군인과 결혼하면서 교사 커리어는 얼마 쌓지도 못하고 퇴직하여 전업주부가 됐다.
그 뒤엔 겨우 30대 초반의 나이로 범죄에 희생되어 세상을 떠났다..;;
가족 대부분이 싸이코패스에게 몰살 당했지만 당시 집에 없던 아들 딱 한 명만 살아남아서 대를 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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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 초등학교 운동장. 뭔가 정겨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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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안은 생각만치 볼 건 없었다. '동락리 전투'를 '리' 자를 떼어내고 '동락 전투'라고 고쳐 부르려는지, 글자를 땜빵한 흔적이 보였다.
동락 전투에 참전했던 주역들이 1988년 7월 7일에 이 학교에 모여서 회고 간담회를 개최했던 사진이 걸려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19 08:33 2020/08/1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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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운길산의 정상에 도달했다.
이 산은 국립공원이나 각종 둘레길 같은 브랜드가 없고, 딱히 군사 시설이나 역사적인 사연도 없는 아주 평범한 산이었다. 구조도 흙산이어서 정상 부근에 거대한 바위 같은 것 역시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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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는 어쩐 일인지 넓은 전망대가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본인 말고도 다른 등산객 일행이 서너 명가량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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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본인이 세팅한 숙소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의 중간쯤에 헬리패드와 함께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의 주변에 고맙게도 이런 평상이 3개 정도 있었던 덕분에 거기에다 간편하게 텐트를 칠 수 있었다. 텐트를 지고 힘들게 산을 오른 보람이 있었다.

본인은 여기서 저녁을 먹고 하룻밤 묵었다. 예빈산, 갑산 새재고개에 이어 운길산까지.. 남양주 남부에 있는 산의 정상이나 능선에서 야영 기록을 연달아 남기게 됐다.
이불만 덮으니 밖은 전혀 춥지 않고 지낼 만했다.

4. 국도 45호선과 대성리 유원지

한숨 잘 자고 나서 텐트를 걷고 산을 내려갔다. 이른 아침에 국도 45호선을 타고 북한강을 따라 북쪽 가평 방면으로 이동했다. 안개가 자욱히 껴 있는 시원하고 한적한 시골길을 주행하는 기분은.. 정말 끝내주게 좋았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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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의 첫 목적지는 대성리 역 근처에 있는 북한강변의 넓은 풀밭이었다. (그 전에 대성리 역 화장실의 도움을 받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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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전반적으로 흐리고 우중충한 잿빛으로 찍혔지만 지내기는 이때가 덥지 않고 무척 좋았다. 주변엔 저 멀리 자전거 타거나 산책하는 사람만 가끔 지나가고, 이 공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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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여기서 돗자리 깔고 있으면서 폰과 노트북의 남은 배터리를 모두 소모했다.
아직 일반적인 식당이나 카페가 문을 열기에는 좀 이른 오전이었지만, 그래도 아침 9~10시쯤 되니 민간 카페(?) 말고 브랜드 체인점 카페는 문을 연 게 있었다. 거기서 또 2시간이 넘게 있으면서 음료와 전기를 보충하고 인터넷 확인도 했다.

5. 청평댐과 지방도 391호선

아침이 지나고 낮이 가까워지자 해가 뜨고 날이 급격히 더워졌다. 그리고 도로에는 이전보다 차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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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을 받은 뒤엔 이제 어디에 갈지가 고민됐는데.. 마침 신청평대교 아래의 강변에 아주 넓은 풀밭과 함께 한낮부터 텐트들이 잔뜩 보였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저 멀리 댐 같은 것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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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본인은 옳다구나 하고 그리로 내려갔다. 낮에는 또 여기서 텐트를 치고 지냈다.
자세한 내역을 적지는 않지만 이 날 카페와 텐트 안에서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코딩 작업도 많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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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일과를 진행하니 오후 3시쯤이 됐다.
이제 가평 쪽으로 탐험을 더 계속할지, 아니면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끝에.. 이번 여행의 공세종말점(?)을 감안했을 때 신 청평대교를 건너서 유턴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강 건너편의 지방도 391호선 강변 구간도 어차피 몽땅 미지의 영역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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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점심을 먹고, 어느 근사한 카페에서 전자기기들을 추가로 충전하며 마지막 보급을 받았다.
391번 지방도는 마냥 평지에서 강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가끔 경사와 커브가 아주 급한 산길 형태로 돌변하기도 했다. 운전이 꽤 다이나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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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날이 슬슬 저물고 있다. 여기는 아마 양평과 가평 경계의 어느 카페촌이었지 싶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 지도를 펴서 정확한 위치를 추적할 수도 있겠지만.. 귀찮아서 생략한다.
이 당시 서종대교 위로 60번 고속도로는 차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상· 하행 어디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6. 강변 오토캠핑

그리고 저녁 6시 반쯤, 가평을 벗어나 양평 서종면 구간에서 드디어 텐트들이 즐비한 넓은 캠핑장을 발견했다. 캠핑장은 보통 '수상레저'라는 상호가 붙은 곳에 같이 있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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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 텐트... 취미 성향이 이런 쪽인 남자사람이라면 높은 확률로 낚시에도 재미를 붙일 법하지만.. 그러고 보니 본인은 어제와 오늘 동안 자덕들은 많이 봤어도 낚시꾼은 거의 못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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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물 바로 코앞에다 텐트를 치고 강 구경 하면서 밤을 보내니 이것도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산에서 보냈던 어젯밤과도 비교되고 말이다. 한강 공원이나 팔당호 주변의 강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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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를 친 모든 사람들이 야영을 하지는 않았다. 해가 떨어지니 상당수는 돌아가고 텐트는 몇 개 남지 않았다. 그래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어제는 등산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지 눈을 감자마자 곧장 기절했지만, 이 날 밤은 덜 피곤하고 마음이 들떠서 그런지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면서 몸이 시동이 쉽게 꺼지지 않았다. 새벽 3시가 넘게 컴퓨터 작업과 독서를 반복하다가 그제서야 잠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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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날씨는 어제와 거의 같았다. 어제와 비슷하게 아침 드라이브를 즐기며 귀가했다. 길거리 사진은 이것 하나만 올리지만, 여기 도로 주변 풍경이 전반적으로 다 이런 식이었다.

남한강 합류 지점이 가까워지자 강폭이 커지고 주변에 갑자기 울타리와 철조망이 둘러지면서 “상수원 보호 구역” 표지판이 곳곳에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걸 보니 여행이 끝났다는 게 벌써부터 느껴졌다.
이렇게 휴가 여행을 마쳤다. 그러고 보니 경기도조차 벗어나지 않은 단거리 투어가 됐지만.. 새로운 장소들을 개척하면서 자연인· 자유인 체험을 잘 하고 왔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20/05/11 08:34 2020/05/1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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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4월 말부터 5월 초 사이에 석가탄신일, 근로자의 날, 주말, 어린이날이 거의 일렬로 쭉 이어지는 황금 연휴가 있는 편이다. 일본은 4월 29일이 쇼와의 날이라고 해서 자기네 리즈 시절이었던 히로히토 일왕을 기리는 공휴일인데.. 한국은 석가탄신일이 얼추 비슷한 시기에 공휴일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성탄절과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1970년대에야 추가된 종교 공휴일이 나름 봄철의 연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이 기간 동안 너도 나도 외국으로 나가느라 인천 공항은 터져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더러 외국으로만 나가지 말고 내수 경제도 좀 살려 달라고 나라에서 고속도로 톨비도 면제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런 것 없다. 천재지변 급의 재앙 때문에 하늘길이 꽁꽁 묶여 버렸다. 인천 공항은 재작년에 평창 올림픽에 맞춰서 제2 여객터미널까지 당당히 개장했는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이냐..;; 안습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국내는 다행히 전염병이 기세가 많이 꺾였으며,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도 완화되었다. 그러니 본인은 이 연휴 기간 동안 하계 휴가에 준하는 국내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의 컨셉은 "2020년 춘계 황금연휴를 이용한 자연인 체험 -- 북한강변을 중심으로"가 됐다.

생각했던 것만치 멀리 나가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답사했던 적이 없는 장소를 다니면서 자연을 즐기고 왔다. 특히 "하루는 산에서 자고 하루는 강가에서 자기"를 목표로 설정하여 잘 달성했다.
딱 하나 미스는 처음에 떠나는 길에 시간대를 잘못 선택해서 극심한 교통 체증에 시달린 것이었다. 역시 이 시국에 나만 여행을 가는 게 아니었다..;; 평범한 아침 시간대가 아니라 새벽 같은 다른 시간대를 선택했어야 했다.

사고 하나 없이 오로지 차량과 분기점 병목만으로 길이 이 정도로 막히는 건 굉장히 오랜만에 봤다.;; 팔당대교 진입로에는 2~3km에 달하는 차들이 길게 늘어섰다.
명절 귀향· 귀경길이 아닌 상황에서 차 내비 화면에 "2시간 연속 주행하셨습니다. 좀 쉬었다 가세요"가 뜨는 걸 보니 자괴감이 들었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건 마치 우주 로켓이 1단 엔진을 가동해서 지구 대기권을 빠져나가는 것과 같았으며,
서울 교외에서 남양주든 양평이든 가평이든 어디든 가는 건 지구 저궤도에서 3단 엔진을 가속해서 달이든 화성이든 가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서울-남양주가 2시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일단 서울을 벗어난 뒤부터는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1. 중앙선 구 능내 역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는 바로 남양주 조안면에 소재한 중앙선 능내 역이었다. 이 역은 중앙선 복선 전철화와 선형 개량(=대대적인 선로 이설)으로 인해 2008년 말에 폐역했지만, 역 주변이 통째로 공원 내지 관광지로 보존 처리되었다.
본인은 다산 유원지는 두 번이나 다녀왔지만, 저기는 지금까지 가 본 적이 없었다. 다산 유원지와 이 정도로 가까이 있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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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내부와 승강장은 지난 2월에 답사했던 화랑대 철도 공원과 여러 모로 비슷한 분위기였다.
단, 여기는 "자덕들의 성지"라는 점에서 화랑대 철도 공원과는 차이가 있었다. 반포 한강 공원이 자덕의 성지인 것처럼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선과 경춘선은 모두 복선 전철로 개량되면서 많은 구간이 이설됐는데, 기존 구선로 구간, 특히 강을 따라 달리는 구간은 상당수 자전거길로 리모델링 됐기 때문이다. 능내 역은 이 과정에서 특혜를 입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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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철도 공원이 그렇듯이, 저기 보이는 객차 안에도 카페가 있다. 하지만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는 역시 코로나 크리 때문에 영업이 중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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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에서 역 건물을 바라본 모습이다. 이 시선의 후방으로는 자전거 도로가 나란히 놓여서 자전거들이 씽씽 지나갔으며, 근처에는 자전거 대여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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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의 근처에는 선로와 자전거 도로, 주차장이 이런 식으로 이어졌다.

2. 물의 정원

능내 역을 답사한 뒤, 다음으로 본인은 북한강을 따라 가평 방면으로 올라가다가 '물의 정원'이라는 강변 공원을 발견하여 거기를 들렀다.
팔당 물안개 공원 같은 곳이 남양주의 북한강 구간에도 있었구나. 다만, 규모는 이게 훨씬 더 작다. 그리고 여기가 팔당 물안개보다는 먼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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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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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좋고.. 아무 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근사한 풍경화가 나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넓은 풀밭을 자유롭게 거닐다가 벤치에 앉아 쉬거나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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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내부에는 이렇게 섬 같은 곳을 드나드는 다리가 있었다. 섬 안이나 밖이나 면적은 비슷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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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장면 남긴다. 본인은 여기서 2시간 남짓 머물면서 신선놀음을 하다가 다음 장소로 이동해서 등산을 시작했다.

3. 운길산

등산 대상은 큰 고민 없이 의외로 금방 정해졌다.
운길산은 본인의 여행 경로와 가까이 있고 산 중턱의 수종사 부근까지 차를 몰고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상 근처에 평상까지 준비돼 있으니 가히 최적의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본인은 첫째 날은 여기서 텐트 치고 잤다.

마침 이 날이 석가탄신일이기도 해서 수종사 주변의 주차장 공터엔 불자들이 등산객 이상으로 아주 많았다. 절과 운길산 역을 오가는 셔틀버스(소형 승합차..)도 다닐 정도였다.
산을 올라간 다음에는 다음날 아침에 내려올 예정이니 본인은 여기서 오늘의 마지막 보급을 받았다. 음료수를 보충하고 전자기기들을 충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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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를 지나고 나니 주변에는 절 방문객이 아닌 등산객만 남고 주변이 썰렁해졌다.
거기서 정상까지 명목상 이동 거리는 800m 남짓에 불과했지만, 고도는 거의 300m 가까이 상승해야 했다. 즉, 등산로가 꽤 가파르고 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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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물의 정원' 쪽을 내려다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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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과 저 멀리 남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모습이다. 산에서는 이런 넓은 전망을 볼 수 있으니 좋다.

Posted by 사무엘

2020/05/08 08:33 2020/05/0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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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박물관 입구에서 본관까지 쫙 펼쳐진 풍경이다. 본관으로 가는 중간 길목에서 "물과 환경 전시관"에 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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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에 전시된 것은 애들 눈높이에 맞춰서 그냥 물의 소중함, 숲과 자연과 환경의 소중함 같은 것들이어서 따로 사진을 소개하지 않겠다. 상수도 시설보다는 더 포괄적인 주제이다. 그렇다고 "물은 답을 알고 있다" 급의 황당한 낭설이 버젓이 소개된 건 아니었다. ㅎㅎ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을 때도 계곡에 어떻게 물이 흐를 수 있을까?"는 성인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의문인 것 같다. 짐작하다시피 숲에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식물이 광합성을 해서 산소를 만들어 내는데, 이 산소의 출처조차도 물 분자를 구성하던 산소 원자라는 것을 이과 출신이라면 익히 잘 알 것이다.

다만, 한국이 물 부족 국가라는 얘기는 1990년대에 어디선가 UN 통계를 인용하면서 언론에서 한창 떠들어댔었던 이슈인데, 지금은 그게 상당수 근거 없는 루머일 뿐이라는 반박도 나와 있다.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난리였었는데 말이다. 특히 폭염과 가뭄을 몇 번 겪고 나서는 도시에서도 제한급수 운운했었으며, 공중 목욕탕에서는 물이 훨씬 더 빨리 끊기고 매번 수동 재조작을 해야 물이 나오는 불편한 "절수기"가 장착된 샤워기를 의무적으로 운용해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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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도 정수장 내부에 위치한 수도 박물관답게.. 서울 아리수를 직접 시음해 보라고 음수대가 실외에 비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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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이 수도 박물관 본관이다.
하수도 과학관은 시설들을 지하화해서 확보한 지상 부지에다가 최신 스타일로 지은 새 건물인 반면, 수도 박물관 본관은 문화재급의 옛날 건물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저건 구한말에 우리나라 서울? 한양에 처음으로 상수도 시설이 구축될 때 지어졌던 바로 그 건물 원판이며, 실제로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중 하나이기도 하다.

1899년 9월이 한국의 철도 원년이라면 1908년 9월은 한국의 상수도 원년이다. 그리고 여기가 한반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상수도 정수장이었으며, 박물관이 개관한 2008년은 상수도 개통 100주년이었던 셈이다.
'송수실'이라는 단어 자체가 친근하고 자주 쓰이는 게 아니다 보니, 구글에서는 이 단어로만 검색해도 곧장 수도 박물관 본관이 바로 검색되고 사진이 쭈루룩 걸려 나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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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관에서는 드디어 우리나라 수도 시설의 역사에 대한 자료를 많이 열람할 수 있었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언제 어디서나 맑은 물이 콸콸 흘러 나오는 게 그냥 된 일이 절대 아니다.

옛날에는 '물장수'라고 신문이나 우유, 연탄을 배달하듯이 마시는 물과 씻는 물을 배달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가한 시골 마을이 아니라 서울처럼 인구가 많은 곳은 겨우 우물 몇 곳만으로는 물 수요가 감당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가뭄이나 환경 오염이 없어도 맹물조차도 얼마나 단가가 높고 귀했을지 상상이 된다. 지금은 그나마 저런 물장수와 제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은 정수기 위쪽에다 꽂는 그 물탱크에 담긴 생수를 나르는 인부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합성 세제나 공장 폐수에 의한 물 오염만이 없을 뿐이지, 당장 인간의 배설물이나 기생충에 의한 오염과 수인성 전염병(콜레라 같은..)은 오히려 더 만연해 있었다. 무식하게 친환경 친자연만 추구한다고 인체 건강에 좋은 게 절대 아니다.

개인적으로 학창 시절에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업을 겸사겸사 들어 놓은 게 평생 교양(?)의 밑천으로 쓰이는 것 같다. 서울 지리 쥐뿔도 모르던 시절에 접했던 <성북동 비둘기>만큼이나.. <북청 물장수>라는 시도 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드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굉장히 고된 직업 내지 알바를 굉장히 시원하고 낭만적인 느낌으로 묘사했지만.. 물장수에게서 물을 사야 하는 세상이라면 정말 갑갑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등 양쪽으로 물동이를 이고 낑낑대는 게.. 영화에서는 <킬 빌>에서 키도 누님이 파이 메이 밑에서 수련 받을 때...
그리고 아예 엄 복동에서도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기 전에 물장수 일을 하는 장면 정도가 기억에 남아 있다. ㄲ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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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림을 시작으로 수도 박물관 본관 내부는 구획 구분 없이 커다란 방 하나에 이런 게 전시되어 있는 게 전부였다.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기존 마차 사업자들이 반발했듯이, 상수도가 개통하면서 물장수들도 많이 반발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1908년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동시에 수돗물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물장수라는 직업 자체가 신속하게 없어진 것 역시 아니다. 그러니 <북청 물장수> 같은 시가 무려 1924년에 발표될 수 있었던 것이지 싶다.

지금은 한강에서 수돗물 공급을 위한 취수는 저 멀리 팔당댐부터 시작해서 잠실대교(정확히는 잠실 수중보) 이북까지의 상류 구간 몇 군데에서 한다. 하지만 정수장은 이런 뚝도를 포함해 하류에도 존재하며, 지금의 선유도 공원도 과거에는 수돗물 정수장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아래의 그림은 2000년대 중반의 옛날 보도 자료이긴 하지만, 취수장과 정수장의 관계를 보여준다. 수도 박물관이 있는 곳이 바로 '뚝도 정수장'이다.
취수장이건 정수장이건 상수도와 관련된 시설은 군부대 내지 발전소에 준하는 보안 시설로 간주되어 민간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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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한강에 상수도가 처음으로 건설됐던 시절에는 취수 시설도 지금만치 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박물관 내부의 설명을 보면 "취수정은 송수실로부터 166m(고작!!) 떨어진 한강 중류 2.4m 수심 강바닥을 3m 정도 판 후 ..... 이런 크기의 콘크리트 정수정을 설치하고, 바닥에서 높이 30cm 되는 곳에 개구부를 설치하였다"라고 돼 있다.
쉽게 말해, 지금처럼 저 멀리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그냥 정수장 근처에서 적당히 물을 끌어다 썼던 것이다.

수돗물은 "취수 → 침전 → 여과(필터링..) → 정수"의 순으로 세균과 불순물을 걸러낸 뒤, 수도관을 타고 최종 수요지에 도달했다. 후대 절차로 갈수록 걸러내는 불순물의 규모가 더 작아진다. 흔히 알려져 있는 염소 소독은 정수 단계에 속한다.
상수도 정수장에서는 그럭저럭 깨끗하거나 약간 더러운 물을 음용 가능할 정도의 깨끗한 물로 바꾸는 반면(90점을 97점 정도?), 하수 처리 시설에서는 최악의 더러운 물을 그래도 적당히 더럽고 자연 회복 가능할 정도의 수질로 바꾼다는 차이가 있다(0~10점을 4, 50점대로?).

아무튼, 물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나면 옛날에는 펌프를 돌려서 여기서 3km 남짓 떨어진 중랑천 건너편의 '대현산'이라는 언덕 꼭대기의 배수지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지금은 꼭대기까지 온통 건물이 지어져서 별 존재감이 없는.. 신금호-행당 일대의 그 해발 80m짜리 언덕 말이다. 거기까지 올라간 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사대문 안과 용산까지 공급됐다. 오오...

지금도 거기에 송수· 배수 관련 시설이 있긴 하다. 하지만 다 지하화됐기 때문에 기존 시설과 부지는 '응봉 공원'이라는 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신금호 역 2번 출구와도 아주 가깝기 때문에 찾아가기 쉽다. 여담이지만, 아차산-광나루 사이에도 '아차산 배수지'가 있다.

이렇듯, 서울 상수도의 원리와 역사를 소개해 놓은 본관이 제일 흥미로웠다. 옆의 별관은 기획 전시용인 모양이었으나,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는 컨텐츠가 없었다.
근처에는 과거에 수돗물을 지금에 비해서 느리고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여과하던 거대한 지하실(?)이 개방되어 있었다. 일명 '완속여과지'이다. 여기서 지는 池, basi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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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완속 여과'라고 해서 물을 깨끗한 모래에다 투과시켜서 불순물을 걸러냈다고 한다. 모래 자체도 주기적으로 청소하거나(주 1회) 교체(연 1회 이상)하고 말이다.
여과 진행 속도는 하루에 4m에 불과할 정도로 느리기 때문에 '완속'이다. 다만, 지금은 그렇게 여과하기에는 공급해야 할 물이 너무 많고, 또 취수한 원수의 수질도 예전보다 좋지 않기 때문에 화학 약품을 동원한 급속 여과 방식이 쓰인다. 급속 여과가 완속 여과보다 30배 이상 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진행 속도가 120~150m/일)

완속 여과지가 현역이던 시절에는 이 모래 위로 물이 출렁출렁 넘쳐 흘렀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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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뒷쪽은 휴식 공간 위주였다. 현대식 상수도가 등장하기 전에 쓰였던 물레방아, 공동 수도, 우물, 펌프가 전시되어 있었고, 테이블과 평상도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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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인공 폭포도 구경하면서.. 여기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

Posted by 사무엘

2019/10/01 08:33 2019/10/0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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