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답사기: 앵봉산· 봉산

서울 북서쪽의 은평구에는 동쪽으로는 북한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서울과 고양시의 경계 병풍 역할을 하는 길다란 언덕? 산?이 있다. 높이가 200여 m 남짓밖에 안 되니 등산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그냥 공원· 산책로에 가깝다.
정상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냥 대놓고 횡단· 종단에 의의를 둬야 한다. 또한 산기슭은 온통 건물들이 들어서 있으며 등산용품 매장이나 유원지 같은 걸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저기는 전형적인 동네 뒷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봉우리엔 북쪽에서부터 남쪽 순으로 앵봉산· 봉산· 수색산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다. 본인은 지난 한겨울에 저기를 다녀 왔다.
서울 시내 등산을 다니면서 본인은 한양도성, 북한산성 등 산과 관련된 여러 유물, 제도, 순환 관광 코스들에 대해 알게 됐다. 저기를 답사하면서 이번에는 '서울 둘레길'에 대해서 이제야 드디어 확실하게 감을 잡았다.

예전에 북한산이나 아차산을 오를 때도,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아니라 능선이나 중턱에 이상한 길이 나 있는 건 지도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 한데 이어져 있고 서울시에서 비교적 최근에 작정하고 일관된 시스템으로 '둘레길'이라는 걸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는 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공식 홈페이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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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나름 지리 공부도 되고 나쁘지 않은 발상인 것 같다. 높은 산들은 그냥 중턱에만 길이 나 있고, 앵봉산· 봉산처럼 낮고 긴 산은 정상 능선이 경로이다.
서남부는 산이 없는 관계로 예외적으로 안양천을 따라 길이 나 있다. 그러니 옛날에는 산을 피하느라 경부선 철도도 영등포로 우회하는 형태로 놓인 것이지 싶다.

이런 의미를 두고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 역에서 내려서 먼저 앵봉산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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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와 정자, 체력 단련 시설이 나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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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참호 같은 군사 시설도 등장했다.
안 그래도 답사 당시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저 참호 안에 들어가서 한숨 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기 안은 왠지 따뜻할 것 같았다.
한겨울엔 땀이 안 나는 대신 콧물이 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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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산의 건너편은 초록색 펜스로 가려졌다. 군사 시설 때문은 아니고, 건너편에 서오릉이 있어서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이다. 이 점에서는 의릉 때문에 펜스가 쳐진 서울 천장산과 사정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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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딱 한 군데 전망대가 있기도 해서 풍경 사진을 남길 수도 있었다. 여기 말고 다른 곳은 온통 나무가 우거져서 산 아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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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에는 이렇게 텔레비전 송신탑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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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펜스의 색깔이 잠시 검정으로 바뀌기도 하다가 다시 초록으로 복귀하면서 내리막이 이어졌다.
나중엔 울타리와 산책로도 없어지고 흙길이 나오다가 서오릉로와 합류하는 걸로 앵봉산 구간이 끝났다. 여기까지 3km가 넘게 좀 걸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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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들이 다니는 서오릉로를 횡단하면 봉산 구간이 곧장 나온다.
이 공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차를 세워 놓기에 안성맞춤인데 여기는 딱히 차 끌고 방문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딜레마이다.
참고로, 답사 당시에 저기는 길이 온통 빙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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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도 정상(?)이라고 불리는 곳에는 정말 금방 도달할 수 있다. 꽤 넓은 공터가 닦여 있으며, 전망대와 정자, 그리고 봉수대 모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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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건너편에는 비슷한 높이의 언덕인 망월산이 있고, 망월산과 봉산 사이에 '고양 향동 공공주택 지구'라는 이름으로 한창 공사판이 벌어진 게 보였다. 몇 년 뒤면 저기도 온통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게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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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높이가 대략 어떻고 산기슭이 어떤 분위기인지는 위의 사진 한 장으로 대략 설명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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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지난 뒤에도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이런 식으로 길이 계속 이어졌다.
산이 자연스럽게 끝날 때까지 증산· 수색 방면으로 계속 가고 싶었지만, 시간과 보급의 한계로 인해 서울 시립 서북 병원쯤에서 하산을 결정했다. 내려가는 길이 온통 미끄러운 빙판이 돼 있어서 다니기가 몹시 힘들었다.

최종 하산 지점은 봉산을 정면으로 관통하여 서울과 고양시를 잇는 터널 근처였다. 이건 작년 여름 시점의 로드뷰를 봐도 아직 미개통 상태였을 정도로 정말 최근에 뚫린 터널인 것 같았다.
국도 1호선 증산로 방면으로 한참을 걸은 뒤, 최종적으로는 새절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다. 비록 산의 절대적인 높이는 낮은 편이지만 여느 산을 오를 때와 비슷한 시간 동안 총 7km가 넘게 걸은 것 같다.

산 너머로 그린벨트 마을 같은 게 있었으면 고양시 쪽으로 하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저쪽은 공사판이고 볼 게 없어서 도로 서울 시내 방면으로 하산하게 됐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본격적으로 '서울 둘레길'이라는 컨셉으로 북한산 쪽도 돌아다녀 보고 이곳의 완전 반대편인 동부의 일자산 쪽도 가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7/04/19 08:34 2017/04/1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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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가족 여행 (2016/9/15~17)

지난 추석 때 본인은 제주도로 2박 3일 가족 여행을 다녀 왔다. 이로써 본인은 지금까지 제주도를 딱 세 번 방문했다.
맨 처음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인데,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로는 4년 전에 회사 워크숍으로 역시 2박 3일간 다녀 왔다. 그 뒤 이게 세 번째이다.

이번에 간 건 버스를 타고 가이드를 따라다닌 단체· 패키지 여행이 아니라, 숙소만 잡고 차를 렌트한 뒤 가족 단위로 자유롭게 돌아다닌 여행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여행과 차이가 있다. 글을 둘로 나눌까 하다가 귀찮아서~ 또 글 분량 대비 사진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어서 그냥 한 포스트에 전체 일정을 몽땅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의 지명으로서 '제주'라는 고유명사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 제주특별자치도: 행정구역으로서의 명칭이다. 이때 접미사 '도'는 경기도, 경상도 할 때의 그 도이다. 그러고 보니 한자는 의외로 그냥 '길'을 뜻하는 道였다. 都 같은 다른 글자가 아니구나.
  • 제주도: 섬으로서의 명칭이다. 이 '도'의 한자는 당연히 島. 한라산이 있으며 대한민국 영토 중에 가장 넓은 그 섬을 가리킨다. 제주특별자치도라는 행정구역은 바로 제주도와 그 주변에 있는 우도· 마라도 등의 마이너 섬들을 통틀어 일컫는다.
  • 제주시: 다시 행정구역 명칭이다. 제주도를 정확하게 남북으로 이등분해서 북반구 영역(주변 섬들 포함)은 제주시에 속하며, 남반구 영역은 서귀포시에 속한다. 우도는 제주시 소속이지만 마라도는 서귀포시 소속이다.

이런 제주도와는 달리, 울릉도는 도 단위의 고유한 행정구역이 할당돼 있지 아니하다. 그냥 본토의 '경상북도' 소속이고 그 하위 범주로서 '울릉군'이라는 주소를 가진 형태이다. 뭐, 얘는 위도로만 따지면 강원도 소속이어도 할 말이 없는 위치이긴 하지만 말이다.

면적으로만 따지면 전국에 울릉도보다 더 넓은 섬은 거제도, 강화도, 진도처럼 몇 개 더 있다. 인천 공항의 건설을 위해 간척으로 합쳐 놓은 영종+용유도도 울릉도보다 약간 더 넓다. 그러나 이들은 본토와 상대적으로 가까운 편이며 아예 다리도 놓였기 때문에 섬이라는 느낌이 덜 든다.

울릉도는 본토와 다리로 연결되지 않은 섬 중에서는 아마 제주도 다음으로 가장 넓지 싶다. 제주도 만만찮게, 아니 그 이상으로 본토와는 100km가 넘게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때문에 강원도에 준하는 급의 위도에도 불구하고 6· 25 전쟁의 포화조차도 비껴 갔을 정도이다. (공산당에게 점령 당했거나, 수복을 위해 군대가 상륙하고 전투가 치러진 내력이 없음)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도 단위의 구역을 독립시키기에는 울릉도는 너무 좁고 인구가 적다. 다리가 없고 공항도 없으니 자동차와 비행기 모두 아웃. 왕래하는 교통수단은 오로지 배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에 반해 제주도는 면적과 거리가 모두 독보적인 원탑이며, 고대엔 아예 탐라국이라는 별개의 국가를 이루기도 했을 정도로 단절성이 뛰어나기에 저렇게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지 싶다. 서울이 특별시인 것만큼이나 우리나라의 섬들 중에 행정구역상으로 '특별'이라는 말이 붙은 곳은 제주도밖에 없다.
과거에는 제주도는 행정구역 명칭도 '특별자치'라는 단어가 없이 똑같이 '제주도'였다. 그래서 개념을 더욱 혼동하기 쉬웠다. 똑같은 단어인데 넓은 범위에서의 의미와 좁은 범위에서의 의미가 달라서 헷갈리기 쉬운 게 세상엔 많이 있다. ('이름', IME 등등..)

제주도와 울릉도에 비하면 쓰시마 섬(대마도)은 외국 영토치고 이례적으로 굉장히 가까이 있는 섬이다. 하지만 얘는 근대에 일제가 강탈한 게 아니고 역사적으로 굉장히 오래 전부터 일본인들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소유주가 진작부터 지금처럼 굳어졌다.
이런 걸 생각하면 섬과 행정구역 사이의 경계를 생각하는 게 의외로 재미있으면서 한편으로 골치 아픈 문제인 것 같다.

사회 지리 얘기는 제끼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비행기는 평소에 자주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아니니, 어딜 가든 비행기를 탈 기회가 찾아오면 이것만으로도 나의 신경이 바짝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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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 본 현대 자동차 남양 연구소이다. 지상에서 뭔가 익숙한 지형지물이 보이니 반가웠다.
뿌옇게 형상만 보이던 사진을 콘트라스트 올리는 보정을 하니 부득이하게 흑백 사진처럼 바뀜. 주행 트랙에서 저 둥그런 위쪽 끝과 아래쪽 끝 사이의 거리는 나름 거의 2km에 달한다.
저게 나타나기 불과 몇십 초 전엔 '자동차 안전 연구원'의 주행 트랙도 봤다. 두 기관의 거리를 알고 있으니 시간차를 통해 이 비행기의 주행 속도를 얼추 계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광주 부근에서는 광주 공항도 볼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내가 착륙하지 않는 다른 공항도 내려다보는 건 아무래도 자주 경험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제주도에 도착한 뒤엔.. 공항에서 렌터카 사무실은 어떻게 찾아갈지, 공항 주변은 분명 자동차들로 교통지옥일 텐데 어떻게 빠져나갈지 이런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공항 주변 도로의 혼잡을 완화하기 위해 올해 하반기부터 렌터카 업체들은 다 공항 바깥 외곽으로 이주했으며, 그 대신 업체들이 연합하여 승객과 렌터카 허브를 왕래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조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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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이호 테우 해수욕장을 들렀다. 가족 중에 나만 유일하게 물놀이 준비를 하고 여행을 떠났으며, 나 혼자 바닷물에 들어가서 물과 흙을 묻히며 재미있게 놀았다. 물에 들어가는 건 언제나 웰컴. 이로써 올해 본인은 서해, 동해에 이어 남해 바닷물까지 모두 경험하게 됐다.

일행이 있으니, 혼자 달랑 해수욕장에 갔을 때와는 달리 소지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이렇게 물에 들어간 내 모습을 사진 찍어 줄 사람도 있고 말이다.
이 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좀 끈적거리는 게 동해보다는 서해 바닷물에 더 가까워 보였다. 단, 제주도답게 검은 모래도 있고, 바닥이 울퉁불퉁한 곳이 많아서 편하게 돌아다니기는 어려웠다.

해수욕장의 이름이 좀 특이한데, '테우'는 제주도 고유의 모양을 한 소형 어선을 의미하는 '제주어'이다.
물놀이를 딱 마치고 나니까 날씨가 급격히 흐려지고 비까지 내려져서 타이밍이 절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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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시내를 벗어나 남부의 서귀포시로 갔다. 제주도 남부를 횡단하는 동안 이런 산길을 굉장히 길게 지났다. 여기는 도로와 도로가 만나는 곳도 신호등 교차로가 아니라 로터리 형태로 된 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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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제주도의 동남쪽 끝에 있는 성산 일출봉을 올랐다. 높이가 해발 180m 남짓 된다. 처음엔 초원과 오솔길로 시작하지만 정상 부근의 바위는 나름 가파른 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시간 관계상 한라산 등산은 하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 아쉬운 대로 등산 흉내를 냈다.
식사와 이동 시간을 빼니 첫째 날의 일과는 이 정도로 마치게 됐다. 산과 바다를 제각각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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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아침엔 천지연 폭포를 구경했다. 사진을 따로 첨부하진 않지만 여기까지 가는 길도 울창한 숲과 호수? 개천이 아주 잘 꾸며져 있어서 경치가 좋았다.
또한, 저 사진엔 용케 안 들어갔지만 현장 주변은 아침부터 온갖 관광객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구도가 잘 나오는 바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으려면 한창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유사품인 천제연 폭포와 혼동하지 말 것...;; 사실, 둘 다 비슷하게 경치가 아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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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천지연보다는 작고 덜 유명한 '원앙 폭포'라는 곳에 들렀다. 차를 세운 뒤 계곡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했는데..
여기는 천지연과는 달리 물놀이를 할 수 있었다. 물은 해수욕장보다 훨씬 더 맑고 차갑고 깨끗하고 좋았는데...! 어제 같은 물놀이 준비를 하지 않고 나온 게 너무 후회됐다. 발만 담그고 돌아가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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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절리(柱狀節理)라고 용암이 바닷물과 닿아서 식으면서 생긴 기묘한 지형이라는데, 중문 대포 해안에 있는 걸 봤다. 인간이 돌을 일부러 저렇게 깎은 게 아닌데 자연적으로 어떻게 저런 모양이 생길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용암 아니랄까봐, 바위가 뭔가 흐르는 듯한 모양에 구멍이 숭숭 난 채 시꺼멓게 굳은 걸 보니, 선지 생각도 났다.

이로써 둘째 날 오후가 됐고 여행의 전체 일정은 후반부로 들어섰다.
지금까지는 보다시피 공무원들이 관리하는 자연 명소들을 주로 들렀다. 자연 명소라는 특성상 관광 장소는 100% 실외이고, 외지 관광객의 입장료가 2000원가량이었다.

이제 후반부부터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설 박물관들을 들렀다. 이런 곳은 입장료도 9천원~1만원대로 훨씬 더 비싸진다.
4년 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는 첫째 날은 한라산 등산으로 하루를 보냈고 둘째 날 자연 관광은 송악산과 마라도가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셋째 날은 서울 도착을 오후 2시쯤에 했을 정도로 식사와 이동 말고 딱히 활동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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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국 테마파크는 우리나라 포함 세계 각국의 온갖 유적· 유물과 유명 건물들을 적게는 1/3, 많게는 1/25급으로 축소한 구조물들을 넓은 실외에 전시해 놓았다. 만리장성, 자금성, 에펠 탑, 미국 국회의사당이던가 백악관, 이집트와 멕시코의 피라미드, 우리나라의 청와대, 경복궁, 옛 서울 역, 피사의 사탑, 자유의 여신상 등 볼것이 아주 많다.

여기 말고 누나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가고 싶어했던 박물관으로는 오설록 녹차 박물관과 그 근처에 있는 제주 유리의 성이었다. 하지만 이 두 곳은 내가 4년 전에 갔던 곳이기 때문에 또 가지 않았다.
돌아다니면서 세계 자동차 박물관을 종종 지나쳤는데 여기에도 못 갔으며, '제주 아쿠아플라넷'도 후보지에는 있었지만 시간 관계상 들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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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에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박물관은 살아 있다'라는 실내 응용 미술(?) 박물관이었다. 이런 식으로 2D와 3D 착시를 일으키는 벽화에 쏙 포즈를 취해서 자기가 그림 속의 주인공이고 높은 곳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거나 사지가 잘린 것처럼(!) 흉내를 내고, 그걸 다른 일행이 사진 찍어 주는 곳이다. 걸어다니면서 조용히 눈팅만 하는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손수 퍼포먼스를 좀 하면서 추억을 남겨야 한다.

저건 내가 표정 연기를 잘했다고 가족들이 다들 좋아했다. 밑에 부대찌개 그림이 있는 줄은 현장에 있을 때 미처 몰랐다. 제기랄. =_=;;

지금까지 다녀갔던 곳들은 자연 관광지는 대체로 어머니께서 제안하셨고, 맛집 식당과 박물관들은 누나의 제안으로 들렀다.
그 반면 셋째 날에는 한림 공원과 넥슨 컴퓨터 박물관을 들렀는데, 이것들은 내가 제안한 장소였다. 컴퓨터 박물관은 4년 전 당시에도 없다가 새로 생긴 곳이고, 반대로 한림 공원은 먼 옛날 수학여행 때 들른 곳이긴 하지만 다시 구경하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둘째 날에는 주요 짐들을 호텔에다 놔 두고 편하게 다녔지만, 마지막 날은 다시 숙소로 돌아오지 않으니 체크아웃 후 첫째 날처럼 다시 모든 짐을 차에 싣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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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 공원은 그야말로 식물원, 동물원, 동굴, 수석 전시관, 민속촌이 몽땅 합쳐진 멀티테마 공원이었다. 원래 있던 자연 지형을 토대로 조성된 국립공원이 절대 아님. 개인 사업가가 깡촌 황무지에다가 흙 깔고 외국에서 사 온 식물 종자들을 어렵게 심어서 일군 사립 공원이다. 어지간한 박물관들이 다 둘러보는 데 1시간 남짓한 시간을 잡지만, 여기는 1시간 반~2시간은 족히 잡아야 했다. 그러고도 입장료가 딱히 더 비싼 것도 아니었다.

맑고 하늘이 파랄 때 갔으면 경치가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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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 컴퓨터 박물관은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서귀포 외곽이 아니라 제주 시내에 있었다. 이 때문에 여기는 동선을 고려하여 공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림 공원을 다니던 중에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하필 오후에 컴퓨터 박물관을 관람할 때부터는 딱 그쳤고 하늘이 맑아졌다. 날씨를 감안하면 올실내인 컴퓨터 박물관을 오전에 관람하고, 오후에 한림 공원에 가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컴퓨터 박물관은 전반적으로 저런 곳이었다. 컴퓨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옛날 컴퓨터 기계들이 즐비하고 특별히 고전 게임을 할 수 있는 옛날 컴퓨터, 그리고 일부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는 부스가 있었다.

하지만 나처럼 하드웨어 덕후가 아닌 평범한 프로그래머가 보기에도 넥슨 컴퓨터 박물관은 컨텐츠 면에서 좀 2%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있어 보였다. 옛날 게임 소프트웨어 자체는 오늘날의 컴퓨터에서도 인터넷으로 구해서 에뮬로 얼마든지 띄울 수 있으니 희소성이 부족하다. 컨텐츠를 보강해서 아예 비디오 게임 전용 테마 박물관으로 가든지, 아니면 컴퓨터 박물관이면 에니악이나 우리나라 최초의 슈퍼컴 같은 학술적인 역사 자료까지 잔뜩 더 보강해서 개성을 강화했으면 어떨까 싶다. 두 이념을 좀 어중간하게 빈약하게 추구한 것 같다.

전반적인 규모도 다른 테마 박물관보다 작기 때문에 관람은 서둘러서 하면 한 3, 40분이면 다 할 수 있다. 다만, 게임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으니 어린애들을 풀어놓고 시간 보내기에는 좋다. 실제로 우리가 갔을 때도 여기는 아이들 천지였다.
지하 1층은 카페 + 무료 고전게임 오락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코인 제약도 없다 보니 한 사람이나 가정이 자리를 너무 오래 차지하고 있는 걸 방지하는 수단이 없는 건 아쉬웠다.

굳이 사진을 첨부하지는 않지만.. "그 날이 오면 3" 게임을 할 수 있는 컴퓨터가 비치돼 있던데, 출시일이 웬 1990년으로 기재돼 있었다. 1편이나 2편의 출시일과 혼동한 듯. 3편은 1993년작이다.

한메 타자 교사도 있어서 본인은 세벌식으로 바꿔서 베네치아 게임을 해 봤는데.. 키보드의 감이 생소하고 또 최종이 아닌 390 배열로 하느라 버벅대서 8단계 2만 점대 초반에서 죽었다.
그런데, 이 점수로도 순위권에 아슬아슬하게 들지 못했다. 이미 하고 간 사람들 중에 타자 고수가 많았다. 이 사람들은 다 두벌식으로 쳤을 텐데.. 이 모바일 시대에도 컴퓨터 키보드 타자 고수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하다.
공공장소의 컴퓨터를 사용하고 난 뒤엔 민주 시민답게 설정을 다시 두벌식으로 되돌려 놓는 것을 본인은 잊지 않았다. -_-;;

박물관 관람을 다 마친 뒤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은 걸 확인한 뒤엔 흑돼지 삼겹살을 먹었다. 제주도에서 한 마지막 식사가 제일 비싼 식사였다.
시간이 빠듯하지 않을까 서둘렀는데 그래도 시간이 1시간 남짓 있었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 있는 자연 유적지인 용두암을 추가로 구경했다. 여기는 딱히 입장료가 들지는 않았다. 바위 사진보다도 비행기 사진에 더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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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제 시간에 무사히 자동차를 반납하고 공항 수속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는데..
연휴 마지막 날엔 엄청난 트래픽을 감당치 못하고 비행기들이 줄줄이 지연을 먹고 있었다. 면세 구역은 돗자리까지 깔고 몇 시간째 탑승을 기다리는 인파들로 가득했고 마치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이거 김포 공항의 통금에 걸려서 인천 공항에서 돌아와야 하는 건 아닌가 우려도 했지만 다행히 통금 시각은 밤 10시가 아닌 11시였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그 전에 서울에 도착함. 돌아오는 비행기는 광동체인 보잉 777이어서 마치 국제선을 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행기는 참 매력적인 교통수단이다.
이륙할 때 엔진이 최고 출력으로 가동되어 온몸으로 공기를 내뿜는 그 소리(청각)는 선로 위 전동차의 VVVF 구동음에 필적하는 청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소리가 너무 크고 우렁차기 때문에 어설픈 장비로는 녹음을 제대로 할 수도 없다.

또한, 급격한 가속 때문에 뒤로 쏠리는 그 가속도는 다른 대형 대중 교통수단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비행기 말고 뭔가 스릴있고 짜릿하다는 놀이기구들도 근본 원리는 다 사람에게 G의 왜곡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 바이킹 등.

착륙할 때 점점 고도가 낮아지고, 바퀴가 땅에 닿으면서 '쿵!' 착지 충격이 느껴질 때도 즐겁다.
서양 일부 문화권에서는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승객들이 박수를 친다던데.. 뭔가 사람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반영해서 생긴 문화 같다.
착륙 직후 플랩이 펼쳐지고 뭔가 저항이 걸리는 듯한 큰 소리가 나는 건 전동차로 치면 회생 제동이 걸리는 소리와 비슷하며, 자동차에서 엔진 브레이크가 걸리는 소리와 비슷한 것 같다.

이렇듯, 조종사에게는 제일 힘들고 긴장되는 순간이(이착륙) 승객에게는 제일 즐거운 순간이다.
모든 게 훌륭하다. 단, 딱 하나, 비행기에는 과거 새마을호 열차처럼 Looking for you 같은 "음악"이 없었을 뿐이다.
이것이 내게는 항덕과 철덕 사이의 운명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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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글을 맺기 전에 아이템 하나 추가함.
제주도의 풍경 상징이라 하면 딱 연상되는 건 (1) 본토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는 야자수, 그리고 (2) 이 돌하르방이다.
돌하르방은 그저 장승의 제주도 바리에이션이기라도 한 건지, 처음에 누가 언제 왜 무슨 용도로 만든 물건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정말로 옛날에 만들어진 물건보다는, 근현대에 유명해지고 나서 관광 마케팅 목적으로 일부러 따라 만들어진 모조품 돌하르방이 월등히 더 많다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_=;; '돌하르방'이라는 이름 자체도 '참치'만큼이나 근현대에 와서야 정립된 명칭이다.

돌하르방은 생각보다 크기가 다양하며, 사소하게는 저렇게 왼손과 오른손 중 위에 놓는 손의 위치도 통일돼 있지 않고 케바케이다.
제주도에 가면 "모처에 있는 요것이 현존하는 제일 오래 된 원조 돌하르방이다!" 이런 거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난 돌하르방은 여러 모로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과 비슷한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해 왔다.
저 모아이 석상 사진은 소인국 테마파크에 있는 걸 촬영한 것이다. 모아이도 원래는 돌하르방처럼 모자도 쓰고 있고 심지어 눈알도 붙어 있으나, 오늘날은 소실되고 없는 석상이 훨씬 더 많다.

Posted by 사무엘

2016/10/13 19:36 2016/10/13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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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에서의 관광 일정을 마친 뒤, 이제 평화의 댐을 보러 화천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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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다와 산뿐만 아니라 계곡과 강,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이것대로 또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물에 들어가서 발이라도 담그고 나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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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마어마한 높이 좀 보소.
평화의 댐은 잘 알다시피 5공 시절에 다소 불순하고 비현실적인 동기 하에 만들어졌다. 하다못해 다목적 댐도 아니고..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고 보니, 훗날 북한이 진짜로 예고 없이 수공을 퍼부었을 때 물을 제어해서 재앙을 예방하는 역할을 그럭저럭 수행하긴 했다.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듯이 "어쨌든 결과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처럼 된 셈이다.

사실, 4대강도 그렇고 우리나라처럼 계절 변덕이 심한 나라에서 치수와 관련된 토목 공사 투자가 무의미한 뻘짓인 경우는 별로 없었다. 불볕더위와 가뭄이 조금만 계속돼도 옛날엔 제한급수에 온갖 난리 호들갑을 떨었으며, 반대로 태풍이나 홍수가 한번 났다 하면 TV에서는 전국적으로 수재의연금 성금 모집하던 게 불과 20여 년 전의 관행이었다. 요즘은 지구 온난화다 뭐다 하면서 기상 이변이 예전보다 더 심하면 심해졌지 날씨가 결코 온순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같은 난리 호들갑이 왜, 무엇 덕분에 쏙 들어갈 수 있었겠는지를 잘 생각해 보자.

내가 방문하던 당시에도 평화의 댐은 또 무슨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서 댐 위로 지나가 볼 수는 없었고, 댐 주변에서 댐과 공원의 사진만을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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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공원에는 온갖 공격 무기들의 모형이 전시돼 있는데.. 예술 작품을 표방하다 보니 도색은 저렇게 형형색색으로 돼 있다.
평화의 댐 자체는 민통선에 있지 않다. 하지만 근처의 두타연 계곡은 민통선 안이라고 한다. 여기를 들어가려면 또 다른 장소에서 출입증을 끊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검문소에서 즉각 신분증만 까면 되는지 난 잘 모르겠다.

전국의 어느 민통선이든 자가용을 이용한 출입 허가를 받은 외지인은

  1. 받은 임시 출입증을 차 앞유리에 잘 보이게 노출시킬 것.
  2. 이런 데서 교통사고라도 나면 피차 왕창 골치 아파지니 절대적으로 안전 운전할 것.
  3. 목적지가 아닌 길가에 무단으로 주· 정차를 하지 말고 길을 빨리 통과할 것.
  4. 블랙박스를 끄고 다닐 것. (군사 시설을 무단 촬영하지 말 것)
  5. 민간인이 전투복을 입고 다니지 말 것.
  6.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모든 용무를 마치고 퇴장할 것.

이라는 수칙이 존재한다. 도로 통과형이 아닌 일반적인 민통선 구간들은 반드시 들어갔던 초소로 나오는 게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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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목적지가 있는 홍천으로 가기 위해 경로를 남쪽으로 바꿨다. 양구, 화천 다음으로 계속 서쪽으로 가면 철원이 나온다. 하지만 철원은 예전에 간 적이 있으며, 어차피 우리나라의 최북단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서는 춘천-홍천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남행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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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어느 쉼터를 발견했다. 이 사진엔 담기지 않았지만 뒤에는 지붕 달린 정자도 있다. 저 벤치에 앉아서 노트북 PC를 들여다보는 인증샷도 남기고 싶었으나.. 본인은 싱글 솔로이다 보니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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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화천 수력 발전소를 발견했다. 역시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여기 근처에는 군부대 포병 훈련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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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계획에는 없었는데, '파로호' 안보 전시관이라는 게 있어서 여기도 잠시 들렀다. 파로호란 근처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북한강 상류가 화천댐에 가로막히고 고여서 호수를 형성한 것이다.
여기 일대의 댐과 수력 발전소는 일제 강점기 말기(1944년)에 건설되었으며, 6· 25 전쟁 중이던 1951년 4~5월 사이에는 북한군의 수공에 맞서 이 댐을 점령하거나 파괴하기 위해서 국군· UN군과 북한· 중공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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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의 풍경은 이 사진 한 장만 남겼다.
이렇게 화천을 지나고 드디어 춘천에 진입했다. 춘천, 그리고 더 남쪽의 홍천에서는 군사 훈련 중인 탱크들이 줄지어 도로를 달리는 걸 유난히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저속으로 일종의 떼빙(대열운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 자동차들의 통행이 좀 지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반적인 군용차와는 달리 탱크는 엔진 소리가 뭐랄까.. 유별나게 시끄럽고 더 기괴했다. 여느 중장비의 엔진 소리와도 달랐다. 차마 말과 글로 묘사할 수가 없다. 게다가 탱크는 차체의 폭도 여느 자동차보다 더욱 크기 때문에 좁은 도로에서 교행이나 추월하기가 더욱 난감했다.

그래도 저것도 다 나라 지키려고 저러는 건데 신기한 구경 하나 하는 셈치고 관대히 넘어갔다. 6· 25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에 우리나라는 저런 탱크가 아예 한 대도 없었다. 그 반면 북한군은 242대 보유. 이 숫자 통계는 초딩 시절부터 배워서 알고 있었다.
안전 운전에 지장을 줄 정도로 졸음이 밀려 와서 춘천 외곽에서는 잠시 차를 세워서 20분 남짓 쪽잠을 잔 뒤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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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의 공식 명칭은 '강 재구 소령 추모 공원'이고 입구 주변이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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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기철 목사 하면 '일사각오'가 떠오르듯 강 재구 소령은 그야말로 '희생정신', '살신성인'의 아이콘이다.
1960년대에 한국군이라는 게 조직 분위기가 지금 군대보다 결코 더 좋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못살던 시절이었고 북한의 무력 도발 위협은 임팩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러면 군대를 열악한 자원이라도 최대한 잘 활용해서 나라를 잘 지키기라도 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합리적인 시스템 대신, 까라면 까 식의 미개한 일본군 관행에 사람 잡는 구타· 똥군기가 만연했다. 그래 놓고는 "나 간부다" 편법 한 마디에 초소가 숭숭 뚫리기도 했으니 군대가 제 역할 제대로 못 했다.

그리고.. 지금이니까 연간 군대 내 전체 자살자· 사고 사망자가 두 자리 수이지 그때는 세 자리 수를 가뿐히 넘어서곤 했다. 옛날 군대가 지금 군대보다 좋은 건 딱 하나, 아직 출산율 높고 인구가 많던 시절이다 보니 조금만 몸이 안 좋으면 방위· 면제로 빠지는 길도 지금보다야 훨씬 더 꽤 관대하게 열려 있었다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부하가 실수로 병사들 한가운데로 떨어뜨린 수류탄을 수습하려고, 그것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상관이라는 사람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걸 온몸으로 웅크려 덮어서 막은 뒤 산화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건 정말 전군의 사기를 진적시키는 미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강 소령이 소속되었던 부대는 북한과 대치해 있는 평범한 전방 부대는 아니고, 베트남 파병을 갈 예정이던 부대였다. 박통이 외화벌이와 국력 신장을 위해서 선진국 군인에 비해 저렴한 인건비와 높은 가성비를 메리트로 내세우며 베트남전 파병을 결의했다. 그러자 맨주먹과 근성밖에 가진 게 없고,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것보다야 더 짧고 굵게 돈을 많이 벌어 와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 한 장정들이 여기에 많이 지원한.. 그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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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재구 소령 추모비와 추모탑이 이렇게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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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은 아담한 크기이고 강 소령의 흉상, 초상화, 유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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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소령은 나이 30도 못 되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 대신 그야말로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영예를 얻었다. 고인의 모교에서는 육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고등학교까지 다 고인을 기리고 있고, 육군 부대에도 '재구 대대'라는 이름의 대대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모델격의 인물을 마음에 두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육사 32기 출신의 엘리트 군인으로 대장까지 역임한 정 승조 장군(1976년 임관, 2013년 예편)이 있는데, 이분이 1976년 당시에 육사를 수석 졸업하고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을 때에도 "강 재구 소령의 전기를 읽고 큰 감화를 받아서 육사를 갈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밝힌 바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 육사는 학비 걱정 없지, 진로도 안정적이지, 가히 오늘날의 SKY급 대학에 맞먹는 위상과 입결을 자랑했다는 점도 생각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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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세로쓰기여서 읽기가 어렵다. 강 소령 역시 처음에는 수류탄을 다른 데로 멀리 던져 버리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몸으로 폭발을 막는 방법을 선택하게 됐다.

이분에 대해서 상훈 기록을 찾아보면, 어디서는 태극 무공 훈장이라는 최고 등급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고 다른 어디서는 4등 공로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는데.. 무슨 성경의 모순 구절을 보는 것 같다.
이것도 성경의 모순 구절 풀듯이 문제를 풀면 된다. 본문 텍스트에 나와 있듯, 정답은 '둘 다 받았다'이다. 더 높은 훈장은 나중에 추가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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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산화하던 당시에 입었던 전투복은 수류탄 파편을 맞아서 저렇게 너덜너덜해져 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다른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수류탄 폭발로 인해 고인은 사지가 절단될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고, 그래도 폭발과 함께 즉사한 건 아니고 잠시 살아 있었다고 한다.

수류탄을 실수로 떨어뜨린 병사의 실명(박 해천 이병)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저 병사는 비록 무슨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평생 얼마나 큰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채 살았을지 모르겠다. =_=;; 지금은 그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나기도 했고, 저분의 근황이 어떤지는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게 없다.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버린 이상, 나라면 은폐(?)를 위해 개명부터 했을 것 같은데, 그 시절은 지금처럼 쉽게 개명이 가능한 때도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_-;;

실제로 생존 무장공비 출신인 김 신조 씨는 얼굴이 알려진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름까지 교과서에 대문짝만 하게 실려서 그 당시 남조선 군필자들의 웬쑤가 됐다. "니놈 때문에 내가 군대 전역도 늦어지고 말년에도 얼마나 조뺑이 치고 고생했는지 알아?" 야사에 따르면 길거리에서 어느 예비역 아저씨에게 뒤통수를 까이기까지 했다고.. 결국 그는 부담감을 견디다 못해 실제로 '김 재현'으로 개명까지 했다. 최소한 법적으로는 김 신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근황이 더 검색되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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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 와서 새롭게 처음 알게 된 사실은 강 재구 소령도 생전에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까지 인터넷으로만 봐 오던 곳들을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잘 마쳤다.
날씨가 여전히 덥고 물과 전기가 부족하고, 또 배고프고 피곤하기도 해서 여기서 더 놀지는 않았다. 조양 IC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집에 돌아갔다.

이틀 동안 1분 1초가 버릴 게 없는 즐거운 여행을 했다. 산과 계곡과 바다를 모두 구경했으며 고속도로부터 엔진 브레이크 비탈길까지 골고루 750km에 달하는 거리를 운전했다. 이 정도로 욕구를 해소했으니, 당분간은 또 서울을 빠져나간다거나 차 끌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 안 들 것 같다. 시골은 차량 운행이 뜸하고 어디든지 주차 걱정 없이 차를 세울 수 있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강원도는 꽤 넓다. 내년 여름에는 정선, 영월, 태백, 동해처럼 태백선 철도와도 인접해 있는 강원도의 '남부'를 돌아다녀 볼 예정이다. 영역이 공교롭게도 강릉 이남이냐 이북이냐로 나뉘는 것 같다. 이번에 다닌 곳은 온통 북부이니 말이다.
또한 내년엔 이제 병특 마친 직후에 만들었던 여권이 유효 기간이 1년 남짓밖에 안 남는데, 아직도 여권엔 사증란이 많이 남아 있다. 어딜 가든 외국 여행도 한번 다녀오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23 08:31 2016/09/2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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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y 2: 내륙 산악 드라이빙

아침에 눈을 뜨니 숙소 주변은 안개가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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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다를 뒤로 하고 양구로 가기 위해 꼬불꼬불 고갯길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둘째 날엔 하루 종일 이런 길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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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위성 사진 지도를 보면, 동북부는 온통 초록색 삼림으로 뒤덮였는데 양구 일대만 사람 머리로 치면 땜통처럼 동그랗게 패여 있다. 양구는 대구처럼 일종의 분지 지형이며 6· 25 전쟁 당시에 외국인 종군기자는 우묵한 사발(punch bowl)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한글로는 장모음의 표기가 생략되어 '펀치볼'이라고 적는데, '볼'이라고 해서 ball인 건 아니다. ball은 단모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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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옛날 서체가 참 정겹다. 옛날에 우리나라는 각종 표지판과 간판, 자막에 이런 어설픈 둥근고딕 형태의 서체를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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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한번 탔다가 다시 내려오니 '사발의 안'에 자리잡은 양구 시내가 나타났다.
을지 전망대와 제4 땅굴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양구 통일관에 가서 입장료를 내고 민통선 출입 신고를 하면 된다. 절차가 고성 통일 전망대를 관람하는 것과 비슷하다. 단, 오후에 늦게 도착해서 시간이 충분치 않으면 둘 중 하나는 못 볼 수도 있다.
양구 통일관 자체도 북한의 실상 같은 안보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양 옆에는 각종 전적비· 충혼탑과 탱크가 놓여 있고 또 독특한 외형을 한 '전쟁 기념관'도 있다. 나름 볼것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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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화해와 협력을 통한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 이 좁아 터진 땅덩어리에 1국가 2체제가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에 반해 북괴는 여전히 자기 체제의 유지를 위해 주체사상과 남조선 혁명, 공산화 통일 구도를 접은 적이 없다.
하지만 북괴의 마귀적인 현 체제를 갈아엎지 않으면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수 없으며, 그럼 남북은 통일을 하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안 하는 것만도 못하다. 그러니 현실은 둘 중 하나가 물리적으로 없어져야만 통일이 될 것이고 남한 주도의 통일은 사실상 무력 흡수 형태가 될 공산이 크다.

그걸 감당할 리스크가 없다면? 그냥 영구분단, 고립, 봉쇄이라도 제대로 해서 북한이 스스로 붕괴라도 하게 내버려 둬야지.
매정· 냉정하게 들리더라도 저 북괴한테 평화를 구걸하며 계속 퍼주는 것보다는 저거야말로 훨씬 올바르고 더 인간적인 조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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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전쟁 기념관은 전쟁터를 형상화한 기발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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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증을 받은 뒤엔 양구 통일관의 북쪽(12시 방향)으로 간다. 로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 3시를 선택하면 을지 전망대로 가며, 계속 12시 방향으로 직진하면 땅굴로 갈 수 있다. 난 먼저 을지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도 북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먼저 3시 방향으로 나 있는 이유는.. 산을 오르는 우회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길이의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을지 전망대는 해발 고도가 무려 1000미터가 넘고 국군 GOP가 코앞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높이를 무시하고 보면 전망대와 땅굴은 직선 거리가 상당히 가까우며 길이 서로 연결돼 있다. 하지만 보안 때문인지 안전 때문인지는 몰라도 민통선 안에서 이 두 장소를 곧장 왕래할 수는 없었다. 전망대를 본 뒤엔 다시 민통선 밖으로 나와서 그 로터리까지 갔다가 그야말로 수십 km를 뺑이를 치면서 땅굴을 보러 가야 했다. 동선이 아쉽다.

뭐 아무튼..
앞서 얘기했듯이 을지 전망대는 본격 군사 시설이기 때문에 전망대 건물 자체와 양구 시내 방면으로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북한 쪽은 촬영이 절대 금지.
하긴, 파주의 도라 전망대는 금이 그어져 있어서 카메라질은 금 밖에서 어깨 너머로만 할 수 있던데, 여기는 통제가 더 심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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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 전망대에서는 나무로 뒤덮인 빽빽한 산과 숲, 그리고 끝없이 둘러진 철조망, 띄엄띄엄 설치된 우리나라와 북한의 GOP를 볼 수 있었다. 도라 전망대는 평지, 철원의 평화 전망대는 초원, 고성의 통일 전망대는 바다인데 여기는 그냥 산이다.

믿어지지 않는 얘기이지만 가이드 아가씨의 설명에 따르면, 옛날에는 북한이 남한 병사들을 꾀어 내려고 자기네 여군들을 근처의 계곡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대놓고 노출시켰다고 한다. 이거 무슨 선녀와 나무꾼 얘기도 아니고..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미인계엔 미인계로 대응했는데, 1992년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를 일부러 을지 전망대 GOP 근처에서 했다고 한다. 이 1992년도 대회에서 진을 차지한 우승자가 바로 이 승연 씨. 하지만 이분은 각종 부적절한 언행들로 인해 지금은 몸값이 많~이 하락하고 망가진 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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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망대와는 달리 이 전망대는 응당 내비 지도에 나와 있지 않다.
산을 내려갈 때는 2단 고정 엔진 브레이크를 단단히 걸면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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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인 제4땅굴 광장에 도착했다. 얘는 서부가 아닌 동부 전선에서 최초이자 현재까지 최후로 발견된 땅굴이다.
과거의 제1과 제2 땅굴은 지상에서의 이상 징후를 토대로 발견된 반면, 제3과 제4는 귀순자의 증언을 토대로 발견되었다. 다만, 제4 땅굴을 제보한 귀순자는 우리나라 군 내부에까지 드나들었다가 나중에 또 중국에서 잠적해 버렸기 때문에 쟤 혹시 이중간첩이 아닌가, 제4 땅굴은 그저 역정보 떡밥 유포일 뿐인가 하는 불안한 음모론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귀순자가 얘기하는 장소 일대에서 시추공을 이곳 저곳 내리꽂으며 수백 번이나 허탕을 친 뒤에야 땅속의 빈 공간을 발견했다. 우리나라가 땅굴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한 때는 1989년 12월 24일이다. 그 뒤 우리 쪽에서 역갱도를 파기 시작해서 북한의 땅굴과 실제로 관통에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정도 뒤인 1990년 3월 3일이다.

제2와 제3 땅굴은 민통선 검문소를 통과한 뒤에도 북쪽으로 엄청 깊숙히 들어간 곳에 있지만, 이 제4 땅굴은 가는 경로의 대부분이 의외로 민통선으로 잠겨 있지 않았다. 단지, 땅굴 광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무슨 군부대 입구처럼 막혀 있었고, 여기 안으로 들어가려면 아까 양구 통일관에서 발급받은 출입증을 제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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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땅굴은 자가용을 끌고 개인 단위로 찾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가는 길목에 이런 표지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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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 광장의 중앙에는 이런 멸공탑이 세워져 있고, 땅굴 발견 당시에 육군 참모총장이던 이 진삼 대장이 작성했다는 '건립취지문'이 새겨져 있다.
저 사람은.. 리즈 시절에 자기가 북파공작원 신분으로 휴전선을 몰래 넘어가서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북한군 수십 명을 사살했다는 이빨 무용담을 늘어놓아 왔으나... 그게 사실인지 주작인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는 군인 신분을 벗어난 정치질과 똥별질 때문에 안 좋은 평판이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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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견 헌트 소위의 무덤과 동상을 드디어 현장에서 실물로 보게 됐다. 제1과 제2 땅굴을 저지하던 시절엔 우리 군인들이 북한군의 총격을 당하거나 지뢰를 밟아서 죽거나 다치곤 했다. 제3 땅굴이 발견됐을 때는 다행히 그런 얘기가 없었음.
어쨌든, 과거 경험을 토대로 인명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4 땅굴을 정찰할 때는.. 화약 냄새를 맡을 줄 아는 군견을 처음으로 투입하여 먼저 보내 봤다.

그리고 이 전략은 매우 현명했음이 입증되었다. 저 군견은 땅굴 안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고 혼자 앞으로 뛰어가다가 북한군이 설치한 지뢰를 밟고 폭사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죽을 걸 군견이 대신 죽어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값진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 군견은 사후에 이렇게 떠받들여지게 되었고, 소위라는 장교 계급과 인헌 무공 훈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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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의 입구는 이렇게 생겼다.
제2 땅굴은 그냥 전구간 걸어다녀야 한다.
제3 땅굴은 북한군이 판 땅굴 내부에서는 걸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판 역갱도는 걸어서 오르내리는 갱도도 있고 전동차로 오르내리는 갱도도 있다. 전동차를 타려면 땅굴 입장료에다 전동차 이용료를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그 반면 제4 땅굴은 역갱도에서는 걸어야 하고 땅굴 내부는 전동차로 다닌다. 터널의 단면적이 너무 작아서 사람이 걸어 다니려면 어정쩡한 오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그마한 전동차를 타고 쪼그리고 앉은 채로 이동해야 한다. 안 그래도 북한은 가평 남이섬과 임진각 공원에 있는 꼬마열차를 연상케 하는 협궤 레일을 제4 땅굴 내부에 부설해 놓기도 했었다.

물론 제2와 제3 땅굴도 공간이 충분히 큼직한 건 아니다. 성인 남자가 간신히 서서 걸을 수 있는 정도이며, 울퉁불퉁한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기 쉽기 때문에 안전모는 반드시 쓰고 다녀야 한다.

제4 땅굴은 길지만 민간인에게 공개된 구간은 겨우 100여 m 남짓에 불과하며, 생각했던 것만치 거창하게 볼 건 없었다. 지하로도 민통선 영역까지만 가지, 남방한계선을 넘어 DMZ까지 가지는 않는다. 위도를 비교해 보면 제4 땅굴의 입구는 을지 전망대보다는 훨씬 남쪽에 있다(몇백 m 정도 차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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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간단한 안보 전시관이 있어서 6· 25 전쟁 때 양구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또한 제4 땅굴의 특징도 잘 설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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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땅굴 역시 내비게이션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4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20 19:32 2016/09/2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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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관광을 마친 뒤엔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동부의 최북단을 구경하기 위해 고성으로 향했다. 강릉 이북으로는 100km 가까이나 더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이니 서부의 북방 한계와는 차이가 너무 크다. (참고로 정동진이 서울의 도봉산-장암뻘과 비슷한 위도이고, 양양 국제 공항이 있는 곳이 38선과 거의 같은 위도이다. 하지만 동부는 그 위로도 속초에 고성까지 계속 북상 가능하다.)

양양까지는 동해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갔다. 길 곧고 차가 거의 없는 덕분에 시속 140~150까지도 밟을 수 있었다. 하조대 IC 이북부터는 고속도로도 없으니 거기부터는 얄짤없이 국도 7호선으로 콜. 항구와 해수욕장을 나란히 끼고 달릴 때는 당장 차를 세우고 물에 들어가고 싶었다.

참고로, 내가 방문했을 때 기준으로 여기 국도 7호선은 옛 도로를 새 도로로 교체· 개량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영동 고속도로는 올림픽 준비 때문이고 여기는 그냥 너무 후져서 갈아엎는 듯하다. 어디는 내비의 도로 선형과 실제 도로 선형이 전혀 일치하지 않아서 화진포로 들어갈 때도 한참을 헤맸다. 게다가 여기는 너무 북쪽이기 때문에 인터넷 지도들도 항공 사진이나 거리뷰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아서 길을 더욱 익히기 힘들다는 걸 감안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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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1시간 반이 넘게 달려서 드디어 화진포에 도착했다. 바다, 그것도 해수욕장 근처에 저렇게 호수가 있다니? 거기에다 숲과 나무가 드리워져 있으니 경치가 강릉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옛 정치인들이 교통도 왕창 불편한데 굳이 여기에까지 와서 별장을 괜히 만든 게 아니었겠다 싶었다. (뭐, 나중에 5공 시절엔 전땅크 아저씨가 청남대라는 대통령 별장을 청주시 외곽에 또 만들기도 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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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 일성 별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화진포의 성'부터 찾아갔다. 숲 속 언덕에 지어진 저 위치부터가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화진포의 성은 그 자체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지어졌다. 그러나 해방 후에 여기 일대가 잠시 북한 치하로 들어가고, 김 일성 일가가 여기에 와서 놀았던 기록과 사진이 전해지기 때문에 김 일성 별장이라는 이름도 덤으로 붙었다. 북한 정권이 저걸 직접 건설한 건 아니다. 지금 건물은 원래 건물의 모양과 구조를 본따서 다시 지어진 거라고 한다.

안에는 옛날 응접실의 복원 모형이 있고, 옥상에는 전망대가 있다. 아, (1) 이 화진포의 성과 (2) 나중에 소개할 이 승만 별장, 그리고 여기에서 별도로 소개하지는 않은 (3) 화진포 생태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화진포 유원지 통합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 이것도 한 곳에서 하나만 사면 당일 동안 세 곳에서 모두 통용 가능하기 때문에 강릉의 통일 공원 티켓과 역할이 비슷하다. 다들 걸어서 가기에는 몇백 m 정도 거리의 압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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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의 성 전망대에서 해수욕장과 호수를 내려다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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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화진포의 성 근처의 평지에는 '이 기붕 부통령의 별장'도 있다. 이건 규모도 작으며 티켓 없이 누구나 간단히 들어갔다가 보고 나올 수 있다. 주변엔 잔디밭과 나무, 벤치가 잘 조성돼 있다. 얘 역시 의외로 건물 자체는 일제 강점기 때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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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만 대통령 별장은 해수욕장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하지만 이정표가 잘 갖춰져 있으니 현장에서 각 별장들을 찾아가는 건 별 어려움이 없다. 이 별장은 6· 25 전쟁이 끝나고 남한이 고성군 일대를 확실하게 수복한 뒤인 1950년대에 새로 만들어졌다.
맑은 동해 바다에다 호수에 이런 유적지까지 곁들어져 있다니 화진포는 참 특별한 해수욕장인 것 같다.

화진포에서 5km 정도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우리나라 최북단 주유소가 아닌가 생각되는 '통일전망대 주유소'가 나오고, 길 건너편엔 통일 전망대 출입 신고소가 나온다. 여기에 들러서 대표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통일 전망대 입장료를 내면 민통선 출입증이 나온다.

출입증을 받은 뒤엔 지금까지 지나왔던 좁고 꼬불꼬불한 길로 도로 나오는 게 아니라, 4차선+중앙분리대가 갖춰진 국도 7호선 새 도로로 빠져나가서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민통선 진입을 위해서 누구 통제를 받는다거나, 일정 시각 간격으로 다같이 출발한다거나 하는 건 없음. 개인 행동 가능하다.

민통선으로 들어가니, 내륙 방면으로는 서쪽 경기도 파주의 도라산 역처럼 이곳 역시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제진 역과 금강산 관광 관련(지금은 파토 난) 출입경 사무소 등이 있었다. 하지만 통일 전망대로 가려면 오른쪽 해변 방면으로 가야 했다.
파주는 서울과 가깝고 워낙 관광객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개인이 자차를 직접 끌고 민통선에 들어가는 건 없다. 그 대신 버스 타고 다니는 패키지 관광이 발달해 있다. 하지만 여기는 오지여서 그런지 관광이 개인 방문 중심으로 운영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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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망대의 주차장 앞마당에 도달하니 날 맞이한 것은 다름아닌 3010호 디젤 기관차를 개조해서 만든 카페였다. 철원 민통선 안의 월정리 역 근처에는 4001호 디젤 기관차가 있더니 이건 또 웬 떡이냐? 나 이런 거 완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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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마당에서 내려 언덕을 또 오르면 드디어 통일 전망대 건물에 도착한다.
여기는 듣자하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망대 중에 가장 먼저 생겨서 이름도 굉장히 흔한 보통명사스러운 '통일' 전망대라고 한다. 또한 전국의 전망대들 중 일단은 가장 북쪽에 있다. '일단은'이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는 잠시 후에 다시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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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것이 통일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북쪽의 풍경이다. 바다에, 모래사장에, 산에, 동해선 철도까지..! 경치 한번 완전 죽인다.
관광지로 손색이 없는 해수욕장이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아무에게도 개방될 수 없는 장소로 봉인되었다는 게 안타깝다. 서부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날씨가 더 맑았으면 저 멀리 금강산까지 보였을 거라고 한다.

근처에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부처님과 성모님(?)에게 빌면서 남북 통일을 염원해 보라는 배려인지 하얀 종교 형상들이 있었고, 또 6· 25 전쟁 체험 전시관도 있었는데, 사진 첨부는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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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 화면 인증.
통일 전망대는 비록 민통선 안에 있지만 내비 지도에 표시돼 있으며, 게다가 전망대 내부에서도 "북쪽으로 사진 촬영 금지" 같은 제약과 통제가 전혀 없었다. 주변에 민감한 군사 시설이 없는지 분위기가 훨씬 덜 삼엄했다. 그 이유를 본인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통일 전망대는 지리적으로 굉장히 북쪽에 있으며 북한 영토를 볼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군사분계선과는 여전히 수 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전망대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접해 있는 전망대"는 아니다. 덜 위험하고 군에서 딱히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용도로 사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분위기가 널널했던 것이다. 여기 주변엔 단순 철조망 이상으로 GOP나 해안 경계 초소 같은 건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우리나라가 동쪽 해안은 극단적으로 많이 북진해서 땅을 수복한 덕분에 공간이 이렇게 많이 생겼다.

여기 말고 진짜 군사 시설로도 활용되는 '위험한' 전망대는 '금강산 전망대'라고 따로 있다. 일명 717 OP. 얘는 통일 전망대보다 더 내륙(서쪽)에 있고 위도도 훨씬 더 북쪽이어서 남방 한계선 철책이 훤히 보이고 말 그대로 금강산도 더 가까이 보인다. 그 앞의 북한 땅에 있는 '감호'라는 호수도 '통일'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금강산'에서는 보인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 차이점을 참고하시라. (저건 내가 찍은 거 아니고 출처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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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전망대는 개인이 '신고'만 한 뒤 불쑥 방문할 수 없으며, 단체가 군부대로부터 사전 '허락'을 받은 뒤에만 방문 가능하다고 한다. 사실, 본인이 나중에 방문한 을지 전망대도 한때는 이런 '단체+허가' 형태였으나, 비교적 최근에 제약이 완화된 것이다. 금강 전망대도 민간 개인 단위로 개방해 달라는 요구가 없지는 않으나, 금방 성사될 것 같지는 않다.

뭐, 본인은 이렇게 통일 전망대의 관람을 마쳤다. 근처에 DMZ 박물관도 있었지만 월요일에 찾아갔던 관계로 휴관이어서 방문하지 못했다.
일과 시간 동안 계획했던 관광 코스들은 답사가 모두 끝났다. 시각은 오후 3시 반 무렵이었다. 이제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면서 동해 북단에 있는 해수욕장들을 둘러봤다.

최북단의 해수욕장은 명파 해수욕장이다. 크기는 생각보다 아담하다. 그런데 피서철이 끝나고 해수욕장이 폐장한 뒤엔 여기는 철책이 둘러지고 민간인의 출입이 완전히 금지돼 있었다. 역시나... 그 아래의 해수욕장들도 그러했다.
그러니 철책이 없고 1년 내내 적어도 낮에는 출입 가능한 최북단 해수욕장은 화진포였다. 그래서 본인 역시 아까 관광을 했던 화진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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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바다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해수욕장이 폐장해 있었지만 날씨가 습하고 후덥지근했으며, 본인은 이미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기온과 수온은 물놀이를 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해변을 걷고 다리 정도는 바닷물에 담그는 관광객도 몇 명 있었다.
본인 역시 여기까지 왔는데 동해 바닷물을 적셔야겠다는 생각으로 물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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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모래사장의 경사가 서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몸을 때리는 파도가 굉장히 강했다.
안전요원도 없는 상태에서 뒤로(바다 쪽으로) 밀려가는 파도에 잘못 휩쓸리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여기서는 바닷가에서 몇 발짝밖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해변에서 거의 2~300미터 가까이 진행했던 지난번 서해 해수욕장과는 완전 비교된다.
그런데 거센 파도 때문에 해변엔 물이 온통 흙탕물이어서 동해 바다가 서해 바다보다 딱히 깨끗한지는 제대로 실감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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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북에게도 바다 구경을 시켜 주지 않으면 그건 맥북에 대한 실례이고.

이렇게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해수욕장 근처에는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더 남쪽의 거진항 근처의 마을로 갔다. 거기 식당에서 회 요리를 먹고 씻고 전자기기들을 충전했다.
완전히 밤이 된 뒤에는 해변 도로의 공터에다 차를 세운 뒤,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닷바람을 쐬면서 노숙과 차박을 했다. 돗자리를 깔고 담요를 덮고 손전등을 켜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3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18 08:31 2016/09/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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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파주, 2014년 철원 당일치기 여행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올해엔 본인은 아예 2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투어를 다녀왔다. 자료 리서치와 최적 경로 프로그래밍, 예산 편성, 운전, 관광 전부 1인 단독 플레이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돌아왔다. 여행의 자유가 있고 자동차가 있으면 얼마나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중에 신혼여행을 가도 이 정도의 감흥은 못 느낄 것 같다.;;

※ Day 1: 동해 바다 최북단

한밤중에 집을 나서서 제2중부 고속도로(37)와 영동 고속도로(50)를 달렸다. 강원도에 가까워지자 길이 젖어 있었으며 금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선이 안 보이고 와이퍼를 고속으로 가동해야 할 정도로 비가 오는 곳도 있었다.
거기에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도로 곳곳이 보수 공사 중이어서 운전을 더욱 조심해서 해야 했다. 갑자기 차선이 줄어들거나 도로 선형이 바뀌는 지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심야가 아니라 주말 낮이었으면 병목 때문에 길이 왕창 막혔을 것이다.

난 운전대를 잡는 동안은 어지간해서는 몸 컨디션과 시간대를 불문하고 거의 졸지 않는 편인데, 이번엔 비 오는 밤에 고속도로 운전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이 느껴졌다. 그래서 부득이 휴게소에 들러서 3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주변 경치 감상을 포기하면서까지 심야 운전을 강행한 이유는 도로 정체가 없을 때 서울을 빠져나가고 해가 뜨자마자 강원도에서 관광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첫 목적지인 이 승복 기념관에 도착했다. 고속도로 속사 IC와 그리 멀지 않고, 또 올림픽도 얼마 안 남았으니 특별히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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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나름 해발 700m에 달하는 대관령 고지대라고 한다. 주변의 산들엔 안개가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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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은 단순히 건물 한 채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동상, 묘소, 생가와 학교의 복원 모형 등 볼거리가 많았다. 정식 개장하기 전인 이른 시간이었지만(아침 7시 무렵) 친절하게도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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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포즈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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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한 일가족들이 이 언덕에 한데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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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두 사람이 한데 공유하고 표면이 짙은 초록색 형태인 옛날 나무 책상은.. 본인도 초딩 저학년 시절에 학교에서 실제로 사용한 적이 있다. 교실 바닥도 저렇게 목재여서 청소 시간엔 밀대로 닦는 게 아니라 아니라 왁스칠을 해야 했다.
그 밖에 생가 사진, 각종 기념비 사진, 그리고 밖에 뜬금없이 전시돼 있는 각종 탱크와 전투기 사진은 첨부를 생략하겠다. 이것 말고도 올려야 할 사진이 너무 많아서 말이다.

역사적으로 명백히 입증된 사건을 안 믿고 자작극설 같은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 왔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든가 난징 대학살, 그리고 아폴로 계획 달 착륙에 대해서 말이다. (종교의 영역으로 가면 예수님의 부활까지도..)
뭐, 같은 맥락으로 이 승복에 대해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조선일보의 주작이라고 뜬금없이 이의 제기를 한 불순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1990년대 말에 있었다.
이건 유족들의 강렬한 반발과 함께 주작이 아닌 팩트라고 최종 판결이 났다. 하지만 안 그래도 잊혀지고 동상이 철거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던 이 승복은 이미 완전히 확인사살을 당한 뒤였다.

쟤는 무슨 대단한 반공 영웅이 결코 아니다. 10살짜리 초딩이 무슨 정치를 알고 이념을 알았겠는가?
그저 학교에서 배운 대로 평범하고 순진하게.. 마치 "차조심 해라 / 낯선 사람을 무작정 믿고 따라가지 마라"를 실천하듯이 "공산당 나빠요 / 싫어요"를 시전한 죄밖에 없는데 빨갱이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1.21 사태 때는 김 신조라는 공비 딱 한 명만이 생포되었는데, 이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는 김 익풍이라는 사람이 생포되었고 훗날 완전히 전향했다. 그는 사건 당일로부터 무려 41년이 지난 2009년 12월에야 이 승복 기념관 관장의 제안으로 이 승복의 묘지를 참배하고, 유족들에게 공개적으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주작설에 대해서도 극구 부인했음은 물론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그때 이 승복의 가족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님..;;

이 승복 기념관의 관람을 마친 뒤 곧장 강릉으로 달려갔다. 해는 완전히 떴지만 중간에 비상등을 켜고 달려야 할 정도로 안개가 짙게 낀 구간도 있었다. 운전을 극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그래도 비는 더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하늘이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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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통일 공원이 있는 곳은 바다와 산, 영동선 철도가 나란히 지나니 바깥 경치가 아주 아름다웠다. 함정 전시관에서는 퇴역한 커다란 전함과 탈북용 어선, 그리고 강릉 무장공비 잠수함을 구경했는데 생각보다 볼 게 많았다. 예전에 평택 해군 기지를 견학한 적이 있어서 전함 내부의 풍경은 그럭저럭 익숙했다.

해군은 배가 그야말로 생활관 겸 전장이고 안 그래도 힘든 선원 생활이 군대와 결합하니 얼마나 힘들까 싶다. 그리고 배는 곧 기계덩어리이며, 모든 기계는 관리하는 인력을 필요로 하니 육군 보병보다야 더 기술지향적이다.
여기에는 '전북함'이라고 길이 119미터, 배수량이 3천 톤 정도 되는 구축함이 1999년에 퇴역한 후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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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옛날 골동품들.
난 25년쯤 전 초딩 시절에 컴퓨터 학원에서 GWBASIC을 배울 때, 정확하게 저 두 컴퓨터들의 실물을 구경하고 써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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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바다를 보며 찍은 사진이다. 방파제 같은 시설 주변에서 파도를 막으려고 이렇게 잔뜩 집어넣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테트라포드'라고 한다. 뾰족하게 만들어서 파력을 효과적으로 상쇄하기 위해 공이나 정육면체가 아니라 다리가 4개 달린 형태이다.

그런데 방파제에서 멀쩡한 길을 놔 두고 사람이 저기 위를 일부러 지나가는 건 바다의 낭만을 즐기는 것과는 억만 리 떨어진.. 거의 자살행위 급의 미친 짓이다. (☞ 더 자세한 설명)
십중팔구 발을 헛디디거나 미끄러져서 아래 틈새로 쏙 빠지기 쉬운데.. 몇 m 아래에 있는 단단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수 차례 부딪히면서 바닷물에 빠지기 때문에 매우 높은 확률로 중상 또는 사망이 보장된다.

물에 안 빠지고 목숨을 부지했더라도 혼자서 위로 다시 기어올라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며, 심지어 살려 달라는 외침 소리가 바깥까지 퍼져 나가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안 그래도 인적도 드문 곳인데 비명 소리도 파도 소리에 그냥 묻히기 때문이다. 익사하지 않더라도 테트라포드들 사이에 갇힌 채로 조용히 탈진해서 죽기 딱 좋다.
더구나 구조 신고가 접수됐다 하더라도 빠진 사람을 찾는 건 심히 어려우며, 구조 작업 역시 극도로 힘들고 위험하다. 저기에 비하면 차라리 아무 지형 장애물이 없이 파도에 휩쓸려서 물에만 곱게 빠진 건 완전 양반이다. 거긴 보트를 투입해서 곧장 출동이라도 가능하지.

테트라포드는 어지간한 플랫폼 아케이드 게임에 있는 데쓰 트랩, 남극 크레바스, 민통선 안의 지뢰밭, 사냥용 덫, 함정 급으로 위험하다고 봐야 한다.
모래사장+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저길 갈 일은 물론 없고, 저기서 사고를 당하는 사람은 다 낚시꾼들이다. 낚시 명당이긴 하지만 안전을 등가교환하고 가는 장소라는 건 진지하게 생각할 점이다.

한편, 전북함의 옆에는 어느 북한 주민들이 탈북할 때 사용했다는 어선이 있었다. 이 배는 그나마 탈북에 성공한 경우에 속하지만, 어떤 사람은 배에 탄 채로 죽어 버려서 배는 식량과 연료가 떨어진 채 시체만 싣고 일본으로까지 떠내려간 비극적인 경우도 있다. 사진 첨부는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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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있는 것은 바로 1996년 강릉 무장공비들이 탔던 북한제 잠수함이었다. 벌써 20주년이 됐다. 같은 계열의 색으로 도색은 다시 반들반들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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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은 일반 군함보다 공간이 훨씬 좁고 거주성이 열악했다. 일어서 있을 수가 없다. 물(잠수함..)이든 땅(땅굴..)이든 그 아래 속에서 지내는데 공간을 넉넉하게 내기란 힘들 것이다. 게다가 북한 사람들은 못 먹어서 키부터가 남한 사람보다 작으니까.
잠수함 안은 온갖 복잡한 계기판과 밸브, 스위치들로 가득했는데, 계기판 아래에 자그맣게 찍혀 있는 "1991. 평양"이라는 글자가 참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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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이 잠수함이 좌초하면서 부서진 부분인 듯하다. 이것 말고도 사진 찍은 게 많이 있지만 첨부를 생략한다.

지금까지 함정 전시관을 살펴봤다.
강릉 통일 공원은 (1) 함정 전시관, (2) 항일 기념 공원, (3) 안보 전시관이라는 세 파트로 나뉜다. 함정 전시관은 나머지 둘이 있는 곳에서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직선 거리 7~800m)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고저 차이도 상당하기 때문에 이동을 위해 차량이 사실상 필수이다. 뭐, 어차피 여기까지 찾아가는 수단 자체가 자동차밖에 없기도 하지만.

(2)는 그냥 공터에 각종 옛날 전투기와 6· 25 전투 전적비에다가 강릉 항일 인사 추모비가 있는 수준이지만, (1)과 (3)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둘 중 아무 한 곳에서만 입장료를 구입하면 당일 하루 동안 양쪽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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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기념 공원은 위와 같이 생겼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항일 관련 전시물보다는 해방 이후 관련 전시물이 더 많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파란 프로펠러기는 박 정희 대통령 시절에 사용되었던 대통령 전용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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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항일 관련 전시물인 강릉 의병 항쟁 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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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전시관의 모습. 출입문의 위에 있는 파란 지붕이 뭔가 실사가 아닌 CG 그러데이션처럼 굉장히 예쁜 색상으로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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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안보 전시관에는 여느 6· 25 내지 반공 관련 자료뿐만 아니라 강릉답게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 대한 자료가 더 많이 있었다. 무장공비들이 은신처 마련을 위해 판 구덩이를 가리키는 말인 '비트'가 이 사건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얘는 그냥 '비밀 아지트'의 약자라고 한다. 영어 bit나 beat와는 관계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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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 중인 동영상을 촬영한 건데 평소답지 않게 굉장히 선명하고 깨끗하게 잘 찍혔다.
조 창호 중위는 내가 이 블로그에서 전에 소개한 적도 있는데.. 참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슬픈 사례이다.
저건 행방불명 전사자로 현충원에 등재되었던 자기 이름을 몇십 년 만에 손수 지우는 모습이다.
전사한 걸로 간주되어 1계급 특진을 해서 '중위'를 추서받은 것이었는데, 당사자가 살아서 돌아왔으니 저분은 형식적으로나마 진짜 중위로 진급식을 한 뒤 곧장 전역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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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전시관을 나와서 언덕을 내려가면서 찍은 모습. 카메라는 내가 눈으로 본 색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파란 하늘과 바다가 저렇게 어우러진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2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15 19:20 2016/09/1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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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무더위로부터 자극과 동기를 받아 본인은 이번 여름에는 바다에도 다녀 왔다. 지난 봄엔 등산을 많이 갔는데 여름엔 드디어 바다도 간 것이다. 물론 등산은 한 10월쯤 돼서 덜 더위지면 운동 차원에서 다시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가고 싶은 산이 아직 몇 군데 더 남아 있다.

단순히 산이나 계곡이나 강이 아니라 꼭 바다 구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 바쁜 와중에도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다녀온 소감을 먼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제아무리 가정과 사무실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들어온다 해도, 피서를 직접 가는 것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게 느껴졌다. 안 갔다왔으면 후회했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잘 알다시피 해수욕장의 퀄리티는 동해가 서해보다 더 낫다. 서해는 얕고 물이 더 탁하다. 서울 사람들이 가까운 인천 앞바다를 놔 두고 괜히 강원도나 부산까지 가는 게 아니다. 부산은 대도시답게 빽빽한 고층 건물이 해수욕장 모래사장의 바로 앞까지 닿아 있고 심지어 해운대 해수욕장은 지하철로도 접근 가능하다. 그리고 거긴 잘 알다시피 피서철엔 사람들로 완전 터져나간다..;; 이런 풍경을 정작 수도권인 인천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학 동안 본인은 학기 중일 때보다 회사에 더 자주 출근하고, 주일마다 교회, 그리고 방학 기간 동안 성경 특강을 부탁받은 것도 있어서 행동 반경에 제약이 심했다. 그래서 동해보다 더 가까운 서해부터 1박 2일 스케줄로 먼저 가게 됐다. 동해는 멀기도 하고, 비단 바다 구경뿐만 아니라 각종 안보 관광 코스를 엮어서 최하 2박 이상의 스케줄로 다시 갈 예정이다.

일단 서해의 어느 해수욕장을 갈지 많이 고민했다. 사실, 공항이 걸쳐 있는 용유도에도 끝자락에 해수욕장과 유원지가 있긴 한데 그건 제외하고, 또 전라도 이남으로까지 너무 멀리 가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크고 유명해서 혼잡할 걸로 예상되는 해수욕장도(대천 같은..) 제외하고, 해변에 상업 시설들이 너무 다닥다닥 늘어서 있지 않고, 적당히 외지고 잠시 속세를 떠났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곳을 골랐다.

그래서 태안군의 북쪽에 있는 구례포/학암포 해수욕장이 선택됐다. 참고로 최후까지 경합했던 후보는 거기 남쪽에 있는 (1) 안면도에 소재한 해수욕장들, 그리고 (2) 장항선+서천화력선을 구경할 수 있는 춘장대 쪽이었다. 비록 철도 구경은 못 했지만 그래도 구례포/학암포 주변에도 마치 춘장대 해수욕장처럼 근처에 화력 발전소가 있긴 했다. 일말의 공통점이다.

서해를 갈 예정이니 응당 서해안 고속도로를 탔다.
평소에 자주 구경하는 경부 고속도로는 차선수가 정말 많고 넓다. 그리고 온갖 광역· 고속버스들이 넘쳐나며 버스 전용 차선까지 있다. 그 반면, 서해안 고속도로는 경부보다는 아담하며 수도권 구간에서도 버스를 거의 볼 수 없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서울 서남부는 이미 경부선 전철이 발달해 있고, 또 경부와는 달리 서울 진입로(서부간선)가 너무 비좁아서 병목이 심해서 경부 같은 교통망을 구축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지 싶다.

태안은 서산을 경유해서 국도를 타고 산 같은 비탈길도 한참을 오른 뒤에야 나타났다. 일요일 예배를 마친 뒤 저녁이 돼서야 현장에 도착했는데, 오토캠핑장 주변은 차 끌고 텐트 친 피서객들로 가득했다. 나야 홀몸이고 자동차가 곧 이동식 텐트이니 따로 텐트를 치지 않았다. 에어컨 냉기가 남아 있는 동안은 차 안에서 좀 쉬다가, 냉기가 빠졌을 때쯤 이제 주변 지형과 시설 정찰을 시작했다. 그래도 바닷가답게 바깥도 제법 시원한지라, 냉기가 빠진 뒤에도 차에서 자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심야와 이른 아침, 해수욕장이 정식 개장하지 않은 시간대이긴 하지만 모래밭에 돗자리 깔고 바닷바람 맞으며 책 읽고 코딩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꿈 같은 피서가 시작됐다. 먼 길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바닷물에다가는 아직은 발만 담갔다. 진짜 본게임은 시작도 안 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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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주변은 몇십 m 떨어진 물체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해무가 짙게 껴 있었다. 그리고 썰물 상태여서 동해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갯벌이 쫘악 펼쳐져 있었다. 바닷물은 한 200m쯤 뒤로 싹 밀려났으며 이 때문에 부표(사진엔 안 나옴)까지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 돗자리 깔고 노트북 PC까지 올려 놓은 채로 사진을 찍었지만, 밀물 때는 여기 일대는 다 물에 잠겼다. 아무튼, 이로써 등산 코딩에 이어 갯벌 코딩까지 달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해가 뜨고 더워졌으며, 해무가 차츰 걷히고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개장 시각이 지나자 텅 비다시피하던 해변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렇다고 인산인해 수준인 건 물론 아니고, 혼자 쾌적하게 물 속을 돌아다니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본인 역시 이 무렵부터 하반신뿐만 아니라 상반신과 얼굴까지 몽땅 바닷물에 담갔다. 기온과 수온이 모두 해수욕에 안성맞춤이었다.

본인은 비록 수영을 할 줄은 모르지만,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그 느낌이 정말 좋았다. 바다는 계곡이나 강과는 달리 계속 파도가 치니 물이 뭔가 역동적이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이 많은 물을 밀어내는 엄청난 힘이 어디서 유래된 걸까? 지구의 자전? 달의 인력? 온도 차이? 이렇게 비열이 엄청난 물질이 액체라는 유체라는 게 지질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물의 저항과 공기 저항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별별 잡생각을 하며 물놀이를 했다.

서해는 정말 얕고 바닥의 경사가 완만해서 모래사장으로부터 한참을 멀리 떨어져도 여전히 발이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그럼 여기는 바닥의 경사가 몇 퍼밀인 걸까? 철도 차량의 경사 한계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까?" 뭐 이런 생각도 덩달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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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밀물과 썰물의 차이라는 것을 이렇게 직접 보니 몹시 신기했다. 정오 무렵이 되니까 물이 제일 많이 들어왔으며, 그 넓던 갯벌이 감쪽같이 몽땅 바닷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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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안개가 곁들어져서 여기도 꽤 괜찮은 풍경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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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오른쪽에는 요렇게 나무로 덮인 언덕도 있는데, 이 산길을 따라 몇백 m쯤 걸으면 이웃의 학암포 해수욕장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물놀이에다 주변 지역 산책도 몇 시간 하니, 생각보다 팔다리가 쑤시고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 그래서 본인은 저 길을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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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점심 시간이 어중간하게 지난 오후 2~3시경, 드디어 해수욕장을 나와서 옷을 갈아입었으며, 학암포 근처의 민박· 펜션과 식당들이 즐비한 마을로 가서 식사를 했다.
바다에 갔으니 해물을 먹어야지. 해수욕장 잘 찾아간 것에 대한 자가보상 차원에서 두세 명 분량의 회 코스 요리를 마지막 매운탕까지 혼자 다 먹어치웠다.

의식주 중에서 의와 주는 전혀 신경쓸 필요 없으니 교통비(유류/톨비)를 제외한 나머지 예산은 전부 '식'에 집중 투입되었다. 사실 여행 기간 내내 이때 말고 나머지 끼니는 거르거나 부실하게 해결한 편이었다. 또한 밥뿐만 아니라 전기 공급도 열악한 상태였는데 식당에 있는 동안 컴퓨터와 전화기를 덩달아 충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때 총체적인 에너지 보충을 했다.

학암포 해수욕장은 마을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또 물에 들어가지는 않고 다시 돗자리 깔고 누워서 해변과 언덕을 구경하며 쉬었다.
그렇게 저녁 무렵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엔 정체 시간대를 피할 겸, 서해안 고속도로의 유명한 행담도 휴게소에서 몇 시간 동안 머물면서(휴식+코딩) 추억을 더 만들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원하는 대로 머물 수 있는 것은 역시 자차가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피서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생업 전선에서 여전히 피서 전과 다를 바 없는 폭염을 경험하면서 좌절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동해도 조만간 어서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해에서는 뿌연 해무, 갯벌과 초록색 바닷물을 보고 왔다면, 동해에서는 더 맑고 깊고 시퍼런 바다를 보게 될 듯하다.

그나저나 햇살이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물에서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얼굴, 팔뚝, 심지어 발등까지 제법 탔다. 물은 자외선의 차단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는 걸 실감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12 19:28 2016/09/1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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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천장산, 낙산

컴퓨터도 더 작은 모바일로 바뀌고, 철도도 더 작은 경전철로 바뀌는 게 트렌드인지..
지금까지 산책삼아 다녀 온 작은 언덕들의 주요 탐험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도록 하겠다.

1. 천장산

서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구소들이 가득하고 남쪽에도 산림 과학원, 카이스트 경영 대학원 등이 있어서 왠지 지적인 느낌이 드는 산이다. 그런 쪽 말고도 동남쪽에는 경희 대학교가 있고 동쪽에는 의릉과 한국 예술 종합 학교(일명 한예종)이 있다.
게다가 산의 이름부터가 '하늘 아래 명당'이라는 뜻인데 이런 산을 오르는 느낌은 어떨지 궁금해서 지하철 6호선 상월곡 역에서 내려서 산책로를 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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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아파트도, 교수 아파트도 아닌 과학자 아파트다. ㄷㄷㄷ 하긴, 과학자들은 국가를 먹여 살리는 기간 인력이지.
그런데 지금 '과학자 아파트'라는 단어로 구글링을 하면 온통 북한 소식만 검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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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이렇게 빽빽한 나무들로 가득해서 산림욕을 즐기기 좋았다.
단, 천장산은 앞서 말했듯이 산기슭에 여러 연구소와 심지어 문화재까지 있는 관계로 접근이 통제된 곳이 아주 많았다. 사방팔방 등산로가 뚫려 있는 봉화산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일단 국립 산림 과학원이 관리하는 '홍릉숲' 영역은 전부 펜스가 쳐져서 막혀 있었다. 서쪽의 연구소 방면도 접근 불가이며 거기 있는 건물들을 구경도 할 수 없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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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41m짜리 낮은 산이니 정상에는 아주 금방 도달한다. 그런데 홍릉숲 말고 맞은편 쪽도 전부 펜스가 둘러져서 막혀 있다. 펜스 건너편은 '의릉' 쪽에서 올라와야만 갈 수 있다.
즉, 그냥 동네 뒷산 오르듯이 오르면 천장산은 거의 셰어웨어 데모 수준만 구경할 수 있었다. 갈 수 있는 경로가 단 한 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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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는 북서쪽을 바라보는 딱 한 곳에만 있었다. 북부 간선 도로를 넘어 가까이 있는 언덕은 북서울 꿈의 숲 내지 오패산이고,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은 그냥 북한산이다.
여기를 지난 뒤부터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냥 계단을 따라 꼭대기에서 하산하며, 산기슭 둘레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한예종의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다. 의릉을 가려면 한예종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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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은 서울 동대문구· 성북구 주민, 제복 입은 현역 군인, 한복 착용자 등등이 무료 입장 가능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입장료 1000원을 내야 들어갈 수 있었다. 풀밭이 참 깔끔하게 닦여 있던데.. 본인은 여기서 천장산을 다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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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산의 진짜 꼭대기에 도달했다. 위의 사진에서 연두색 펜스 왼쪽이 처음 들렀던 곳이고, 지금은 의릉 쪽에서 산을 다시 올라 있다. 의릉 쪽 등산로는 정상까지 나무 판자 내지 시멘트로 마치 협궤 철길 같은 등산로가 닦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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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릉 방면에서 산을 한 바퀴 도는 쪽으로 하산했다. 저 멀리 경희 대학교 평화의 전당이 보였지만 길이 봉인돼 있어서 그쪽으로 직접 갈 수는 없었다. 여기는 통제 구역이 많아서 산을 종단할 수 없으며, 들어왔던 의릉 입구로 되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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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무들에 둘러싸인 초록색 지붕의 건물이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나중에 지도와 대조해 보니 저건 한예종 미술원 건물이었다. 본캠 건물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한예종이 있던 이곳에는 잘 알다시피 안기부 청사가 있기도 했다. 남산 청사와 더불어 이렇게 천장산 청사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다 합쳐져서 내곡동으로 간 것이다. (의릉 근처에 있던 것이 지금은 헌릉 근처로 바뀌었다는 게 흥미롭다.) 사실 아까 그 미술원 건물도 과거에는 안기부 건물의 일부였다고 함. 그러니 그 시절엔 민간인이 이렇게 천장산에 자유롭게 접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안기부 강당 건물은 리모델링되거나 철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나 남아 있었다. 별로 볼 건 없이 썰렁해서 사진 첨부는 생략하지만, 그 강당에서 지난 1972년에 남북 7· 4 공동 선언이 발표됐다고 한다.

이렇게 의릉과 천장산 구경을 한 뒤, 본인은 무작정 한예종 캠퍼스를 지나서 큰길을 찾아 쪽문 밖으로 나갔다. 초행길이었지만 이렇게 나가는 게 맞았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자 이내 버스가 다니는 길이 나오고, 상월곡 역의 다음 역인 돌곶이 역이 나왔다. 이렇게 여행을 마쳤다.

2. 낙산

낙산은 안습한 높이 때문에 온통 아파트와 건물로 뒤덮인지라, 항공 사진을 봐도 산 같아 보이지가 않을 정도이다. 그래도 지형상 엄연히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는 산이며, 꼭대기에 도달하고 나면 서울의 중심부에서 번화한 대학로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다. 산이라고 하면 보통 2차원 공간이 연상되지만 낙산에서 공원에 속하는 영역은 한양 도성을 따라 길쭉한 '길'이라는 1차원적인 성격이 강하다.

동대문(흥인지문)이 있는 교차로에서 북쪽을 보면 한양 도성이 시작되고 땅의 고도가 높아진다. 평소에 여기를 종종 자동차를 몰며 지나가기도 하는데, 저 성곽 공원에는 무엇이 있을지 언젠가 한번 땅밟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지난번에 남산에서 한양 도성 구간을 지나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지하철 동대문 역에서 내린 뒤, 실제로 성곽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낙산을 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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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문은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존재감이 없었고, 동대문과 남대문은 왕년에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과하기도 한 뜻깊은(?) 곳이어서 존치. 그 반면 서대문은 다른 명분이 없어서 일제 강점기 당시에 노면 전차 복선화를 구실로 헐림...;; 뭐 이런 말이 있던데.
어쨌든 동대문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동대문의 양 옆으로는 동소문(혜화문), 그리고 남소문(광희문)이 있다. 비록 성곽은 동소문 방면 것만 남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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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오르막을 오르자 주택은 뜸해지고 고급 카페와 전망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거지 대신 공원 티가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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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너머 건너편도 굉장한 고지대인 것 같은데 저기에도 집들이 빽빽하다.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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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정상까지 시내버스도 다니고 있었다.
예전에 교회 친구들과도 낙산 공원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남쪽의 동대문 쪽에서 안 오고 서쪽의 대학로 쪽에서 오르느라 성곽이 있는 이곳까지 올라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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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밖으로 나가니 한성 대학교가 바로 내려다 보였고, 그 밖에 경치는 대략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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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인가 제3 전망광장까지 가니 성곽이 잠시 끊어졌고, 본인은 여기서 산을 내려갔다. 요런 계단을 내려가니 또 빽빽한 빌라촌이 나왔고, 거기를 지나자 각종 극장들이 보였다. 방통대 건물이 멀리 보이길래 거기와는 90도 수직인 방향으로 이동하여 큰길을 찾았고, 이내 지하철 혜화 역에 도달하여 산책을 마쳤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07 08:33 2016/09/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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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봉화산

서울 중랑구에 있는 봉화산은 둘레길만 따라 산기슭을 한 바퀴 도는 거리는 4km가 좀 넘고, 정상까지 높이는 해발 160m 정도 되는 작고 낮은 산이다. 인접한 산맥 능선이 없이 혼자 불쑥 솟아 있는 일종의 '독립구릉'인지라 예로부터 지리· 지형적인 이용 가치가 높았다고 한다. 지금은 서울 지하철 6호선의 종착역이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작명되어 있다.

본인은 혹서기에는 높은 산 대신 서울 곳곳에 공원 형태로 조성돼 있는 작고 낮은 산들을 틈틈이 답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는 봉화산 역 → 정상 → 중랑구청의 순으로 봉화산 북남 종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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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역 4번 출구로 나가서 산을 향해 계속 전진하니 일단 나무들이 무성한 공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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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지나서 계속 산의 중심부 쪽으로 비탈길을 오르자, 길은 점점 좁아지고 흙길 등산로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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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은 산의 규모에 비해 출입구와 등산로가 거미줄처럼 굉장히 많이 나 있었다. 그래도 어느 걸 타도 적당히 중심부 쪽으로만 가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길 잃을 염려는 안 해도 된다.
여느 산들과 마찬가지로 산중턱에는 운동 기구들이 설치된 공터가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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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송전탑과 매점(!)이 나오고, 거기를 지나자 정상이 나왔다. 정상에는 듣던 대로 봉수대가 있었다. 하긴, 산이 이름부터가 봉화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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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전체를 통틀어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는 여기 하나뿐이었다. 곳곳에서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던 용마산과는 반대다. 봉화산은 육군 사관학교와 가까이 있기도 하지만 이 산에서 그쪽을 내려다볼 수는 있지는 않다. 보안상의 이유도 있을 것이고. 위의 풍경은 중랑천과 천장산 방면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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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지나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봉화산 도당굿 보존 위원회' (서울시 무형 문화재 제34호) 이런 건물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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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구청 쪽으로 하산하는 길은 뭐 이런 식이었다. 7호선 먹골 역 방면인 서쪽으로도 갈 수 있고 길이 그야말로 사방으로 뻗은 듯했다.
중랑구청은 봉화산의 남쪽 중에서도 약간 동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있다. 본인이 이 지점을 선택한 이유는 여기도 아까 봉화산 역 방면의 북쪽과 마찬가지로 공원이 꾸며져 있으며, 여기 근처에서는 집으로 환승 없이 한 번 만에 가는 버스를 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본인은 이로써 서울 지하철 4~6호선의 종점 근처에 있는 산들을 모두 가 봤다. 4호선 당고개(수락산, 불암산), 5호선 마천(청량산), 6호선 봉화산까지. 이제 7호선 도봉산만 남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18 08:35 2016/08/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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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름 밤엔 저녁에도 집에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더웠다. 저 멀리 강원도에 훌쩍 떠나 버리고 싶은데 시간 관계상 아직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그 대신 동부 간선 도로를 타고 내 마음의 고향인 교외선 일대로 홀연히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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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역은 송추 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뒤 얼마 안 지나서 장흥 유원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그런데 폐역 상태이다 보니 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아무 표지판도 없었다. 그래서 다 와 놓고도 역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선뜻 찾을 수 없었다.

열차가 다니지 않고 인적도 끊긴 간이역 근처의 으슥한 골목에다 차를 세워 놓은 뒤, 저녁을 먹고 컴퓨터 작업을 하고 책을 읽다가(가로등 불빛) 이동식 텐트 안에서 잠들었다. 새벽이 되니까 살짝 한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원하던 경험이 바로 이것이었다. 차를 아무 데나 세워도 될 정도의 한적하고 으슥한 시골에서 혼자 이렇게 자 보는 거. 정말 꿀잼이었다. 그것도 철도역 근처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인가? 물론 위의 사진들은 이튿날 새벽에 동이 튼 뒤에 찍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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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체가 아니라 HY울릉도라는 간판 서체 자체가 여기는 1990년~2000년대 이후로 시간이 정지했음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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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장흥의 서쪽 다음 역이며 교외선에서 그나마 가장 크고 최후까지 역무원이 상주했던 곳인 일영 역의 승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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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 역은 밖의 마당(?)에 지붕만 있는 실외 광장 대합실이 있었다. 다른 철도역에서는 보지 못한 독특한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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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찾은 송추 역은 건물 모양과 마당, 그리고 광장 대합실이 있는 것이 모두 일영 역과 비슷한 형태였다. 하지만 일찌감치 영업이 중단되고 거의 폐역처럼 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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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추 역의 앞마당에 있는 광장 대합실.
요약하자면 일영과 송추는 형태가 비슷하고 장흥만 임시 승강장만 달랑 놓인 좀 간이역스러운 스타일이었다.
장흥이 아니라 송추나 일영의 저 앞마당에다가 차를 세워 놓고 거기서 밤을 보냈으면 또 느낌이 달랐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날은 일단 교외선만으로 만족하고 돌아왔지만, 가까운 미래엔 중앙선(양평)과 경춘선(가평)의 한적한 전철역 근처에도 가서 캠핑을 하고 싶다.
그리고 바다로도 가고 싶다. 강원도 동해, 그리고 김포-강화 쪽의 서해 모두. 언젠가 꼭 갔다 와서 여기에 사진과 여행기를 올릴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16 08:30 2016/08/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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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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