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지난 봄에 중랑 물 재생 센터와 서울 하수도 과학관에 다녀 온 것에서 착안하여, 올가을엔 말로만 듣던 수도 박물관을 다녀왔다.
수도 박물관은 서울숲의 근처에 있는 '뚝도 아리수 정수 센터', 쉽게 말해 상수도 정수장이라는 보안 시설의 내부에 있다. 즉, 서울숲의 내부에 있는 시설이 아니며, 강변북로 근처에 있는 고유한 출입구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이건 당연히.. 정수장 자체와도 별도로 개설된 출입구이다.

여기를 어떤 교통편으로 찾아갈까 망설였는데..
이곳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비도 이 기회에 한번 찾아가 보기로 작정했다.
이 위령비는 자동차 전용 도로의 진출입로 옆이라는 좀 엄한 곳에 있는 관계로.. 차가 없이는 접근할 수가 없다. 그러니 전체 교통편은 자연스럽게 자가용으로 결정됐다. =_=;;;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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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간선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옆의 중랑천은 한강으로 합류하고 이 길 역시 자연스럽게 강변북로로 합류하게 된다. 다만, 합류 직전에 성수대교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나들목이 나온다.
이 나들목의 접속 도로는 '뚝섬로'이다. 뚝섬로와 고산자로가 만나는 '성수대교 북단 교차로'에서 계속 직진하면 서울숲 쪽으로 가게 되며, 오른쪽으로 꺾으면 그제서야 성수대교로 가게 된다.

단, 이때 예각으로 더 깊게 오른쪽으로 꺾으면 여기서도 지하도를 거쳐서 강변북로 동쪽 구리 방면으로 진입할 수 있다.
위령비는 설마 그 광활한 강변북로 본선에 있는 건 아니고, 강변북로와 뚝섬로를 잇는 진출입로, 철도로 치면 연결선에 속하는 좁은 도로 사이에 있다. 그나마 여기는 차들이 본선 구간만치 빠르게 달리지는 않으니 드나드는 게 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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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진출입로의 상행과 하행 사이의 공간에.. 위령비 참배객을 위한 주차장이 있다. 상· 하행 모두 어느 방향으로나 진출입 가능하다.
이 위령비 때문에 자동차 전용 도로 구간 내부에.. 무슨 휴게소도 아니면서 사고· 고장이 아닌 일반적인 명분으로 차를 세우고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공터가 생겼다는 것이 무척 이색적이다.
위령비는 저 전방의 도로를 횡단하면 바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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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성수대교는 1979년 10월 16일에 완공됐다. 별 관련은 없지만, 이건 당시 대통령이던 원조가카가 암살 당하기 열흘 전의 일이었으며, 원조가카 역시 준공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5년 만인 1994년 10월 21일, 경찰의 날 기념일 아침에 구 성수대교는 상판이 하나 무너져 떨어지는 대형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32명이나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망자가 부상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 사상자가 이런 형태로 발생한 이유는 시내버스 한 대가 거꾸로 뒤집혀서 천장을 아래로 향한 채로 바닥에 수직 낙하했기 때문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이 그 버스의 승객이었다.

사고의 원인은 물론 부실공사였지만, 얘는 그래도 훗날 무너진 삼풍 백화점만치 악질적인 부실공사와 막장 운영의 산물은 아니었다. 또한, 성수대교도 외관상 아무 문제 없이 멀쩡하다가 무슨 지뢰 터지듯이 무너진 게 아니며, 당일에 차가 원활하게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이음매 사이의 균열이 심하게 벌어져 있기도 했다. (백화점은 아예 당일 5층의 영업과 출입이 금지되고 에어컨 가동이 중단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원..)

이 위령비는 보다시피 사고 3주기인 1997년 10월에 만들어졌는데, 이때는 이미 성수대교가 다시 만들어져서 개통된 뒤였다(1997년 7월). 단지, 그 당시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열차가 다니던 구 당산철교가 상태가 매우 안 좋다는 진단을 받아 헐렸으며, 다시 건설되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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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 주변은 이렇게 생겼다.
경부 고속도로 관련 기념탑과 위령비는 다 고속도로 나들목을 형상화한 모양이던데.. 저 비석은 뭘 형상화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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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비석 뒤에는 희생자 32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경부 고속도로 순직자 위령비도 저렇게 뒷면에 명단이 적혀 있더라만..
이 중 무학여고 학생이 9명이고, 나머지 인원 중에는 필리핀 사람 1인, 그리고 서울교대 학생 1인도 포함돼 있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 위령비는 양재 시민의 숲에 있고, 거기엔 대한 항공 858편 폭파 사고 희생자 위령비도 근처에 같이 있다.
그것처럼 성수대교 위령비 역시 아예 근처의 서울숲 내부로 옮기면 사람들이 찾아가기는 훨씬 더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유족들이 한강과 더 가깝고 성수대교가 같이 보이는 여기가 더 낫다는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에.. 그냥 지금 위치로 정해졌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인 1999년 8월 18일 밤엔 딸을 사고로 잃은 어느 아버지가 위령비 옆에서 음독 자살하여 주변을 한없이 안타깝게 했다.
다른 언론 보도를 검색해 보면 그분은 희생자 유족 대표 명목으로 위령비의 건립도 주도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극도의 슬픔과 정신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직장도 그만뒀으며.. 나중에는 딸 생각만 하며 거의 매일 위령비 곁을 떠나질 않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자식 하나만 잃어도 보통 사람은 저렇게 멘탈이 견디질 못할 텐데,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때는 더 극단적인 예도 있었다.
정 광진이라는 변호사는 딸만 넷이었는데 세 명을 저 사고로 잃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욥 실사판이 따로 없다. "집이 무너져서"(욥 1:19) 대신에 "백화점이 무너져서"로 치환하면 된다.

그래도 유가족이 이 엄청난 비극과 상처를 신앙의 힘으로라도 극복했다면.. 피해 보상금으로 장학 재단을 만들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후학들을 후원하는 초인적인 대인배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재단의 이름에다가는 물론 죽은 자녀의 이름을 붙이고 말이다.

성수대교 희생자 중에는 서울교대 재학생이던 이 승영 씨의 유가족이 그렇게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거기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고 한다. 세 딸을 잃은 정 변호사도 재단을 만들었으며, 관련 보도 자료를 보면 "딸들이 살아 생전에 다니던 교회" 얘기가 나온다.

종교의 순기능이란 게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지 싶다. 굳이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라도 말이다. 이건 성경이 배타적으로 규정하는 죄와 심판, 복음, 구원, 성령의 열매 같은 '영적인 영역'과는 별개인 '정신적인 영역' 얘기이다.
그에 비해 세월호 사고 유족 중에서는 정치 선동꾼 말고 저렇게 뜻있는 결단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특히 일반인 유족 말고 단원고 유족 중에서 말이다. 난 딱히 못 들어 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성수대교나 삼풍 백화점 같은 처참한 대형 참사들을 겪고도 "아직까지도 달라진 게 없네" 운운하면서 한탄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소를 잃은 뒤에라도 외양간을 많이 고쳤으며, 그때에 비해서는 시스템이 보이지 않게 많이 개선되고 나아졌고 투명· 청렴해지고 안전해졌다.
비록 지금도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옛날엔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막장 헬이었는지, 법과 FM 대신 미개한 편법과 꼼수, 무식한 "까라면 까" 똥군기와 의지드립이 얼마나 더 만연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때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이다.

옛날에 그 여건에서는 그런 방법론이 불가피했던 점도 있긴 했다. 마치 지금 한국과 일본이 명목상 동맹이라고 해서 과거에 일제에 대항했던 독립 운동가들이 무의미한 뻘짓을 한 게 아니며.. 지금 마소가 오픈소스 진영과 친해졌다고 해서 과거 빌 게이츠와 발머 시절의 독점 정책이 삽질이 전혀 아니었던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6· 25 개전 초기에 야만적인 즉결처분이 괜히 있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그렇게 독하게 나가면서 기업의 힘을 키우고 나라를 구한 덕분에 후대 사람들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지내고 과거의 적(?)과도 열등감 없이 우호 관계를 맺고 있고, 과거의 관행과 방법론의 한계를 비판할 여유조차도 생긴 셈이다. 관계가 그렇게 정리된다.

이 복잡한 현대 문명에서 대형 사고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외국 선진국도 먼 옛날엔 건물이나 다리가 무너지는 급은 아니지만, 멀쩡히 날던 비행기가 공중분해 되거나 출입문이 확 뜯어져서 승객들이 밖으로 튕겨 나가서 죽는 황당한 사고도 난 적이 있다. 그런 사고를 겪고서야 안전 시스템이 보강되었으며 동일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무거운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옆길로 너무 많이 샜다. 이제 본론으로 되돌아가 수도 박물관 얘기를 하도록 하겠다. 성수대교 위령비 구경을 마친 뒤, 본인은 차를 몰고 수도 박물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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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된 길다란 간판이 방문객을 반겨 주었다.
주차는 근처에 있는 서울숲 주차장에다 하면 됐다. 요금은 저렴한 편이지만 수요 대비 주차 공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주말에는 차를 가져오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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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지도는 온통 흐리게 처리돼 있어서 본인도 직접 방문하기 전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수도 박물관은 달랑 건물 한 채(저 지도에서 4번 본관)가 전부인 형태가 아니고, 생각보다 넓었다.
옛날에 현역이다가 지금은(대략 1990년대부터) 더 쓰이지 않게 된 낡은 정수 시설들이 다 박물관으로 개조되었으며, 최신 보안 시설은 옆에 따로 만들어져서 철조망으로 둘러싸였다. 옛 서울 역과 지금 서울 역 건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 뒤, 수도 박물관 자체는 2008년에 만들어졌다.

인근의 서울숲 내부엔 강변북로를 횡단해서 한강 쪽으로 가는 육교가 하나 뻗어 있는데.. 이와 비슷하게 수도 박물관 내부에도 한강으로 가는 육교가 이어져 있다. 즉, 이 부근에 육교가 총 2개 있는 셈이다.
뭐, 그렇게 가도 강변의 자전거 도로나 산책로에 도달하지, 무슨 한강 공원이 나오지는 않는다. 인근의 뚝섬 한강 공원 쪽으로 1km가 넘게 한참을 가야 된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9/09/28 08:33 2019/09/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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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부 고속도로 최후 유일의 4차로 구간과 추풍령

이제 본인은 구도로가 아니라 실제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옥천에서 추풍령까지 이동했다. 옥천 휴게소 이후부터 영동1 터널까지, 2019년 현재 경부 고속도로 416.1km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4차로로 남아 있는 마지막 구간을 쭉 달려 봤다. 영천-경주-울산 구간도 오랫동안 4차로였지만, 거기는 2010년대 내내 지겹게 공사를 한 끝에 바로 작년 말에야 전구간이 6차로로 간신히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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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옥천 근처에는 이렇게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갓길이 없어지고 속도 제한이 80으로 내려간 위험 구간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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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딱히 그런 기미가 안 보인다. 특히 금강 휴게소 인근의 금강을 건너는 구간은 높은 교량, 그것도 2000년대가 돼서야 완공된 교량이기 때문에 거기가 또 가까운 미래에 확장될 것 같지는 않다. 천하의 경부 고속도로에도 이렇게 차로가 적고 좁은 구간이 있다는 게 실감이 안 간다.
차에 동승자가 없었던 관계로, 이 사진들은 다 본인이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던 중에 잠시 핸들을 놓고 좀 위태롭게 찍은 것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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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경부선 추풍령 역의 승강장이다. 추풍령 IC와 철도역은 역시 몇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가까운 편이다.
추풍령 역은 경부선에서 해발 고도가 가장 높은 역이다. 물론 경부선 구간이 높아 봤자 220m대에서 노는데, 진짜 산악 철도인 태백선· 영동선 역들의 고도(7~800m대!)하고는 비교하는 게 실례이지만, 그래도 철도는 오르막에 매우 취약하니 저 정도만으로도 열차가 오르기 버겁긴 하다.

과거 초창기에 경부선은 김천 이전의 구미에서도 지금의 국도 4호선처럼 금오산 고개를 올라가는 형태로 만들어졌었다. 그런데 그렇게 철길을 만들었더니 20세기 초의 증기 기관차가 오르막을 도저히 끝까지 오르질 못하고 중간에 픽픽 퍼졌다.
그렇다고 거기에다 스위치백 같은 걸 만들 여건은 못 됐으니 그 구간에서만 열차의 뒤에 보조 기관차를 장착하는 형태로 매우 불편한 운행을 해야 했는데..

결국 1910년대에 구미 시내를 삥 둘러서 평지를 우회하는 형태로 선형이 바뀌었다. 그 덕분에 새로 생긴 구간에서 구미 역이 1916년에 개업했으며, 구미 출신인 원조가카는 집을 떠나 장거리를 이동할 때 그 구미 역을 잘 이용했을 것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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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이 휴게소는 경부 고속도로 전구간의 거의 정중앙 지점에 위치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고속도로 휴게소이다. 금강과는 달리 상· 하행이 분리돼 있지만, 금강처럼 자체 나들목(추풍령 IC)을 갖췄다는 공통점도 있다.

다만, 얘도 1971년 1월 1일부로 개업했으니 고속도로 개통과 동시에 영업을 시작한 건 아니다.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당시에는 길을 닦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지경인데 휴게소까지 같이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1970년 하반기에 경부 고속도로에는 휴게소 같은 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ㄷㄷㄷ 그러다가 금강 휴게소가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 1주년에 맞춰 같은 해 7월에 뒤이어 개업했다.

추풍령 휴게소 부근은 강을 끼고 있는 금장 휴게소보다 고도가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4차로가 아닌 6차로이다. 구도로는 선형이 꼬불꼬불 굽었고 매우 불량했으며, 여기 일대에서 실제로 큰 사고가 나기도 했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개통 이래 최초로 발생한 대형 교통사고는 1970년 8월 21일 발생한 고속버스 추락 사고(25명 사망, 22명 부상)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0년 7월 14일에도 수학여행 전세 버스의 연쇄 추돌 사고(18명 사망, 70여 명 부상)가 나서 그야말로 대형 사고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둘 다 사고 지점이 동일하게 추풍령 휴게소 부근의 고갯길이었다!

문제의 구간은 2006년 말에 대대적인 선형 개량과 6차로 확장이 완료됐다. 그에 비해 옥천-영동 구간은 2003년에 선형 개량만 됐고 여전히 4차로이다. 옥천-영동 쪽은 구도로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 반면에 추풍령 쪽의 구도로는 완전히 흑역사가 된 것 같다. 일부 구간은 기존 국도 4호선의 확장 영역으로 흡수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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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휴게소의 근처의 언덕에는 경부 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 있다. 순직자 위령탑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높으며, 주변에 넓은 풀밭도 꾸며져 있다.
상행 방면 휴게소와 더 가까이 있긴 하지만, 양 휴게소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행 방면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도 도보로 준공 기념탑에 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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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풀밭도 경치가 아주 좋기 때문에 풍경 사진을 남겨 봤다.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에의 길이다. -- 1970년 7월 7일 대통령 박 정희"
"이 고속도로는 ... 우리 자체 재원과 기술과 역량만으로 최단 시간에 이뤄낸 우리의 영광스러운 자랑이다. -- 1970년 7월 7일 건설부 장관 이 한림"


기념탑 아래 벽면에는 뭐 이런 문구들이 새겨져 있었다. 높으신 분들이 고속도로 건설을 치하하는 감격의 덕담을 한 마디씩 남겼다.

참고로 이 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은 아까 봤던 옥천 터널을 빨리 뚫어 내라고, 개통식 날짜를 못 맞추면 너희들 국물도 없을 거라고 건설사들을 무진장 갈구고 쪼아댔던 그 당사자이기도 했다. =_=;;;;
딱 같은 시기에 김 현옥 서울 시장도 군인 출신의 정말 못 말리는 지독한 "까라면 까" 불도저였으니.. 군사 정권 시절에 나라 분위기가 그렇게 군대식으로 극도로 경직돼 있었던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뭔가 역사적인 사건에다 기념을 한 문구는 대부분 이 은상 시인이 작성한 것 같던데.. 아까 순직자 위령비뿐만 아니라 준공 기념탑에도 글이 있었던가..?? 그건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경부 고속도로는 첫 개통 당시에는 공식 명칭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때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라고 불렸다! 그래서 준공 기념탑과 순직자 위령탑에도 저 긴 이름이 새겨진 걸 볼 수 있다.
옛날에도 '경부'라는 이름이 쓰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비격식 약칭이었다. 그런데 그게 공식 명칭으로 바뀐 것은 1981년 11월 7일, 고속국도 노선지정령이 개정되고부터이다.

아이고 글이 왕창 길어져 버렸는데..
여기까지가 옥천과 추풍령, 경부 고속도로와 관련된 테마 답사였다. 이제 본인은 제2부로 자연을 즐기기 위해 경북 영양으로 향했다.

5. 영양군에서 외박

(1) 김천에서 영양으로 갈 때는 내비의 안내대로 중부내륙(45)과 당진-영덕(30)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후자가 워낙 한산했던 덕분에 차량 성능 테스트를 빙자한 폭주 시험/실험을 거기서 시행할 수 있었다.
전방에 시야가 탁 트였고 다른 차도 없는 절호의 기회가 종종 찾아왔다. "복동아 지금이야!"-_- 같은 소리가 뇌리에 전해지는 듯할 때 필사적으로 확 밟았다. 주행 당시에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악셀 페달이 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풀로 꽉 밟았는데도 이상하게 차가 더 가속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엔진 회전수와 속도가 더 올라가지 않았다. 당연히 레드 존 상태 따위가 전혀 아닌데도... 더 오래 밟고 있으면 가속이 됐을지 모르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그렇게까지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번 휴가 때는 예전에 수립했던 185km/h를 간신히 재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더 성능이 좋은 차였다면 그 정도로 밟았으면 190~200은 분명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2) 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를 모두 달려 보니, 표지판에 표기된 각 지역까지의 거리 기준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고속도로야 입체교차 진출입로가 존재하고 자기 영역이 명확하다. "대전 xx km" 이러는 것은 대전 IC로 진출하는 갈림길까지의 거리이다. 그러나 다른 국도· 지방도에서 "영양 xx km" 이러는 것은 해당 지역의 도로 원표까지의 거리인데.. 시청이나 군청 같은 대표 행정기관이 있는 곳과도 비슷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구역상으로는 그 지역 내부에 이미 진입했지만 킬로 수가 아직 한참 더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럼 국도 중에도 입체교차 진출입로와 중앙분리대까지 있어서 반쯤 고속도로인 물건이 있는데.. 얘는 그럼 지역의 중심부까지의 거리와 IC까지의 거리가 혼재하고 있는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지방 국도를 운전할 일이 또 생겼을 때 눈여겨보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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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에는 저녁이 다 돼서야 도착했다. 시가지는 정말 작았으며 2차선 도로가 전부이고, 교차로에도 황색 신호밖에 없었다.
영업을 하는 카페를 용케 찾아서 거기서 2시간 가까이 머물렀다. 목을 축이고 인터넷을 확인하고 폰과 컴퓨터를 충전하며 쉬었다. 오아시스가 따로 없었다. 이 보급으로 오늘 밤을 보내고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 버텨야 하니, 전자 기기들은 무조건 꽉 충전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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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를 벗어나면 주변은 온통 이렇게 산과 강과 들밖에 없었다.
얼마 안 가 날이 저물었으며 주변은 암흑천지가 됐다. 흐리고 비가 계속해서 내렸지만 습하고 몹시 더웠다.
본인은 국도 31호선을 따라 봉화 방면으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적당히 으슥하고 인적이 없고 캠핑을 하기에 적합한 곳 탐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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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적당한 곳을 발견하여 주변에 차를 대고 텐트를 쳤다. 안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잠들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오지에서도 iptime 와이파이가 잡히다니 신통한 노릇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10 08:34 2019/09/1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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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 휴게소

경부 고속도로 옥천 구간에는 금강 휴게소라고 말 그대로 금강을 끼고 있는 매우 경치 좋은 휴게소가 있다.
처음에 해당 부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직원들의 숙소로 개발되었다가 나중에 유원지가 조성되었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고속도로의 개통 후 만 1년 만인 1971년 7월 7일부로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얘는 여느 휴게소들과는 다른 특징들이 여럿 있다. 그러니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요즘 관행처럼 상· 하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휴게소를 공유한다. 그러면서 방면별로 차량들이 완벽하게 분리돼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유턴· 회차가 가능하다.
  • 인근에 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 있다.
  • 금강 IC라고 유원지 방면으로 나가는 자체 나들목이 있다(금강 IC).
  • 그리고.. 조령리 마을이라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폐쇄식 고속도로 구간의 내부에 자리잡은 마을이 있다. 마치 전국에서 유일하게 DMZ 내부에 자리잡은 대성동 마을이 있듯이 말이다.

지하철이야 한번 카드를 찍고 개표 구간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는 아무 열차나 마음대로 탈 수 있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인천 공항의 경우, 보안· 면세 구역 안에서 다른 탑승동으로 이동하는 지하 셔틀열차를 탔다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출국 승객과 입국 승객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동선 특성 때문에 그렇다.

그럼 고속도로는 어떨까?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전통적으로 한번 진입한 차량의 유턴· 회차를 허용하지 않는 형태였다. 휴게소도 상· 하행별로 꼭 따로 만들곤 했다.
일반적인 고속도로 이용 차량들이 굳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일은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또한 상· 하행 운전자가 한 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다면 서로 짜고 통행권을 바꿔치기 하는 수법으로 톨비를 실제 이용 거리보다 훨씬 적게 조작해서 낼 수도 있다.

이 고전적인 수법을 봉쇄하기 위해 도로 공사 측에서는 통행권에다가도 차량 식별 정보를 기재하고, 휴게소를 상· 하가 분리된 형태로 만드는 등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제는 하이패스 덕분에 저런 꼼수 걱정 없이 고속도로 이용 차량의 동선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고속도로도 워낙 촘촘하게 많이 건설되어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우회 경로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프 내부에 사이클 많음) 단지 귀찮냐 덜 귀찮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100% 하이패스 기반으로 바뀌고 재래식 통행권이 완전히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가장 먼저 (1) 고속도로 시· 종점의 넓은 톨게이트들의 폭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차들을 번거롭게 세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톨게이트 직원이라는 직업도 마치 과거의 버스 안내양이나 타자수만큼이나 역사 속으로 사라질 테고..
이와 더불어 (2) 휴게소도 상· 하행 공용이고 방향 전환이 자유롭게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게 새로운 유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행담도 휴게소도 얼마 안 되는 상· 하행 공용이긴 한데 오랫동안 상· 하행 차량이 서로 격리 수용되었으며 방향 전환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모다 아울렛' 시설을 통해서 사실상 방향 전환이 가능해졌다.
여담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금강 휴게소는 옛날에 상· 하행 공용으로 만들어졌던 휴게소라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직원 숙소 내지 유원지 시설이 고속도로 휴게소로 개조된 것이니 상· 하행 따로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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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순직자 위령탑이 있긴 하지만, 차도를 횡단해야 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막 수월하지는 않다. 현재의 고속도로가 아니라 아까 답사했던 구도로에서 더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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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과정에서 순직한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77명이라고 집계돼 있지만, 정말 77명뿐이고 이 숫자가 맞는지는 이제 와서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무슨 국정원 청사에 새겨진 n개의 별도 아니고 말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데 7월 7일에 맞춰서 일부러 77명이라고 북한스럽게 주작한 거라는 낭설까지 나돌 정도이다.

난 77인의 명단 자체가 공개된 적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더라. 저 위령탑의 뒷면을 보면 순직자의 이름과 거주지(시/구)가 적혀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난 그건 현장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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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휴게소의 남쪽으로 금강 유원지 근처의 모습은 위와 같다. 보아하니 물을 저렇게 가둬 놓고 수력 발전 같은 것도 하는 모양이었다.
또한, 금강 IC라고 휴게소의 고유한 나들목/톨게이트가 있어서 저 유원지 방면으로 차량이 드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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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휴게소 자체의 내부 모습은 별로 소개하지 않은 것 같아서 사진을 하나 남긴다. 저 건물 자체는 간판의 윤고딕 서체만큼이나 200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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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여행을 통틀어서 내 독사진은 여기서 딱 한 장만 남겼다. 금강을 배경으로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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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으로.. 이것이 금강 휴게소에서 조령리 마을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아래의 굴다리이다. 저기 안엔 민가, 식당, 펜션 정도가 있다. 안에 들어가면 대충 저런 분위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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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저기 있는 어느 식당에 들러서 이번 하계 휴가 특식을 먹었다. 메기 매운탕과 향어회. 민물고기 요리인데 바다 생선 요리만큼이나 맛있었다.

3. 옥천 시내에서 생가 두 곳

본인은 정 지용 시인과 육 영수 여사가 옥천 출신이라는 것을 현장에 가서 도로 표지판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계획에 없었지만 이분들의 생가를 들러 봤다. 차로 금방 갈 수 있었으며, 두 생가도 서로 직선 거리 700m 남짓으로 가까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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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에 있는 정 약용 생가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생가 옆에는 고인의 동상과 문학 기념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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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지용은 잘 알다시피 <향수>라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시의 저자로 유명하다. 윤 동주 하면 <서시>가 떠오르듯이 말이다. 아, 실제로 정 지용은 윤 동주의 선배 겸 스승으로서 그에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저 안내판은 글꼴의 스타일로부터 추측하건대 21세기 작품은 절대 아니고 90년대에 만들어진 것 같다. 1988년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 그보다는 나중이다.

안내판에는 정 지용의 최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는 6· 25 사변 중에 실종되는 바람에 한동안 모든 교과서와 전기에서 생몰년도가 "1902 ~ ?" 라고 기재되었다. 그 와중에 월북 가능성이 점쳐지는 바람에 민주화 이전에는 그의 존재와 작품까지 몽땅 흑역사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8년부터 그런 금기가 해제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추가적인 기록과 증언이 발견된 덕분에 그가 1950년을 넘기기 전에 폭격을 맞아 죽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납북 당하던 중이긴 했지만 북한에서 어차피 제대로 활동도 못 하고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빨갱이 누명도 확실하게 벗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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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육 영수 여사 생가이다.
평범한 초가집이던 정 지용의 생가와 달리, 저분의 생가는.. 무슨 으리으리한 대궐 같았다. 방금 전까지 흥부의 집을 보다가 놀부의 집을 보는 느낌?
집안이 대대로 지주였으며, 일제 시대에 이미 자가용을 굴리고 다녔을 정도로 옥천 지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금수저 부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육 여사의 부친이 처음에 사위를 깔보고 무시할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는데 그 사위가 나라를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돼 버렸으니.. 참 어지간히도 대형 사고를 쳤다.
육 여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로 어질고 훌륭한 대통령 영부인이었다고 추앙받는다. 본인은 뜻하지 않게 이분의 기일에 맞춰서 생가를 구경하게 됐다.
생가는 재건 복원된 레플리카이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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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뭐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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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육 여사의 어린 시절 사진과 유작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원조가카가 부인을 잃은 후에 남긴 시 몇 편이 놓여 있다.
원조가카는 포병 장교 출신의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 악기 연주와 문학에도 능통한 수재였다. 특정 분야에서 완전 넘사벽급 기상천외 비상한 창의성을 발휘한 천재는 아닌 것 같지만, 리더십과 보편적인 지적 능력이 남들 평균보다 더 뛰어난 영재였던 건 확실하다.

지도자에게는 영재가 천재보다 더 어울리는 자질이기도 하다. 지도자는 세부 실무에 천재들을 잘 배치해서 맡기고 관리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니들이 일하는 데 필요한 돈줄은 내가 대 주고 책임도 내가 지겠다. 니들은 좋은 실적 결과물만 내놓아라" 이렇게 말이다.

거기에다.. 소싯적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차별과 무시 당한 건 대놓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긴 칼 찬 군인이 돼서 돌아와서 설욕하고.. 장인에게 무시 당했던 것은 아예 대통령이 돼서 설욕했으니 이 사람의 승부욕과 집념과 끈기도 참 비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은 원조가카에게 매우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으며, 그게 원조가카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불행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공식 석상에서는 장녀인 레카가 영부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원래 영부인만 한 포스는 부족했을 것이고, 이때부터 원조가카도 예전 같은 자제력을 잃고 좀 폭주하려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인이 없으니까 여자 연애인과 여대생에게도 더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암살 당하던 당시처럼 말이다.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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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은 이렇게 넓은 풀밭과 정자(사진엔 안 나왔지만)도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나들이 하기에 좋았다.
옥천에서 경부 고속도로 외에도 이런 답사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7 08:35 2019/09/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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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세상에 덥지 않은 여름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는 폭염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견딜 만했던 것 같다. 작년이 워낙 악몽이었으니 말이다.
본인은 올해도 어김없이 하계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광복절 징검다리 연휴에다가 연차를 추가로 써서 말이다. 강원도, 인천에 이어 올해는 중부 지방 내륙 위주로 돌아다녔다.

이번 여행이 예전의 휴가 여행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은 첫째, 날씨다. 이틀 내내 날씨가 '흐리고 비'였기 때문에 이번 여행 사진에는 파란 하늘이 찍힌 게 없다. 하지만 여전히 습하고 더웠기 때문에 땀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으며 냉방이 필요했다.
그리고 둘째, 내륙 위주로 돌아다니느라 이례적으로 바다에는 못 갔다. 바다 물놀이는 그 전 주말에 마침 부산에서 볼일이 생긴 덕분에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겸사겸사 하고 왔다.

3년 전에 학술대회 참석 때문에 10월이 다 돼서야 부산에 들러서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만, 해수욕장이 정식으로 개장해 있는 실제 피서철에 저길 가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잔잔한 호수나 다름없던 서해와 달리(작년 을왕리 기준), 여기는 파도와 수심이 급이 달랐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서해는 해변으로부터 최하 100미터 이상은 진입 가능하며 안전 부표도 저 멀리 떨어져 있고, 심지어 썰물 때는 부표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기도 하지만.. 동해는 그런 거 없다. 부표가 해변에 훨씬 더 가까이 있으며 사실은 모래밭 바닥의 경사부터가 서해보다 훨씬 더 급격하다.

바다에서 사람이 접근 가능한 영역은 매우 좁은데 사람은 많고 바글바글하니.. 해운대에서는 물에 들어간 채 돌아다니기는 어렵고 그냥 제자리에서 파도만 맞다가 나와야 했다. 아무 대비 없이 복부에 맞으면 좀 아플 정도로 파도가 강했으며, 성인 남성인 본인도 신체가 앞으로 떠밀릴 정도였다.
아울러, 해운대는 여느 한적한 시골 해수욕장과는 딴판인 곳인 관계로, 모래밭에서 텐트를 칠 수는 없더라.

뭐, 바다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번 여행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먼저 (1) 옥천-추풍령 사이에서 경부 고속도로 심층 탐구 답사를 했으며, 그 다음 (2) "군인 없는 양구"라 불리는 영양과 봉화 일대에서 자연과 철도를 즐겼다.

1. 경부 고속도로 옛 구간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뒤, 곧장 옥천으로 갔다. 중간에 용인-서울 고속도로 등 다른 곳도 들르면서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번 여행 때는 오로지 경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경부 고속도로는 내년이면 벌써 개통 50주년이 된다. 지금이야 경부 고속도로는 수도권 한정으로 도로 바로 옆까지 아파트가 지어져서 거대한 방음벽이 둘러졌으며, 무려 8~10차로로 확장되고도 차들로 몸살을 앓는 지경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1970년에 갓 개통했던 당시에는 얘는 전구간이 겨우 4차로일 뿐이고 주변은 온통 그냥 논밭이었다. 비상 활주로 공용(신갈, 천안, 김천 어딘가?)이어서 제대로 된 중앙분리대가 없거나, 아니면 그냥 화단 형태로 만들어졌던 구간도 있었다. 거기에다 다니는 차량도 매우 적으니, 인근 주민이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최초로 6차로 이상으로 확장된 구간은 1987년, 회덕-남이 사이이다. 서울-수원 구간은 6차로를 거치지 않고 1991년에 곧장 8차로로 확장되었고, 2010년대가 돼서야 판교 주변 등 일부 구간은 10차로까지 확장됐다. 여기 말고도 곳곳이 도로를 다시 만드는 수준의 선형 개량과 확장을 거쳤기 때문에 지금 경부 고속도로 개통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구간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고속도로를 처음 만들 때 열악한 여건 하에서 너무 날림 졸속으로 만든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원조가카도 "내가 야당이 하도 반대해서 일단 4차로만 만들지만.. 얘는 앞으로 너무 비좁아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길가에 건축을 허가하지 말고 언제든지 확장 가능하게 대비해 놔라" 이런 예상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마치 옛날에 갑작스러운 북괴 남침 때 정부가 너무 허둥거리고 미숙하게 대처한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할배 자신은 "북괴가 곧 반드시 남침할 것"을 알고 미국에다 계속 더 도와 달라고 지원을 요청했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이 묵살당했으니 이에 대해서는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있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거라는 것까지 예견했던 선각자가 북괴의 침략을 예견하지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본인은 그렇게 경부 고속도로의 어제와 오늘은 모습 차이가 어떠했을지를 생각하면서 운전했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구간만 좀 막혔지 그 뒤부터는 쌩쌩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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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동이면에서 옛날 고속도로가 현재의 고속도로와 나란히 지나는 흔적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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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로는 한쪽만 재포장 되었고 나머지 구간은 그냥 주차장 공터처럼 쓰이고 있다. 마치 과거에 경의선이 복선이었다가 국토 분단 후에는 단선만 쓰이게 됐던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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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고속도로 구간이었던 '금강2교'이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니 여행이 더욱 운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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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니 거대한 공터가 나타나 있었다. 캠핑 하기 딱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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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쭉 달렸다. 길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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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폐선 같은 감흥을 고속도로 폐구간에서 경험하게 될 줄이야..
여기 길바닥 아무데서나 텐트 치고 혼자 고독을 즐기며 밤을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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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옥천 터널, '그분'이 임박했다~!
저 촌스러운 한글 글자는 '어설픈 둥근고딕' 계열보다도 더 오래된 197, 80년대 작품임이 틀림없다.
터널의 이름이 처음에는 '당재 터널'이다가 나중에 '옥천 터널'이라고 바뀌었는데...

언제 개명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개명되고 나서 처음 만들어진 표지판이 한 번도 안 바뀌고 저렇게 전해진 것이지 싶다.
밑에 로마자 표기만이 훗날 로마자 표기법의 개정으로 인해 땜질 형태로 바뀌었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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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현역 시절의 옛날 사진으로만 보던 그 터널 입구를 직접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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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터널은 위의 사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행과 하행이 서로 모양과 길이가 다른 짝짝이로 만들어졌다.
얘로 말할 것 같으면 대전-대구 사이의 난공사 구간 중에서도 손꼽히는 가히 최악의, 마의 구간이었다고 한다.

기술과 노하우라고는 쥐뿔도 없던 열악한 시절에 거기는 지형도 참 지랄맞았던 것 같다. 발파를 한번 했다 하면 지반이 무너지고 토사가 흘러내리고 현장이 황폐화되는 현실에 직면했다. 여기서만 공식 통계상 낙반 사고 13건에 9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인부들은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특히 터널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느티나무를 베어 버렸더니 산신령이 노해서 이런 사고가 나는 거라는 낭설이 쫙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느티나무를 베라는 명령을 내렸던 어느 공병 중령 장교조차 그 다음날 교통사고를 당해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부들이 너무 겁먹은 나머지 작업 지시를 거부하고 도주할 지경이 됐으며, 일당을 몇 배로 더 올려 준대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간부들이 이들을 달래느라 왕창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어렵고 힘든 건 알겠다만, 개통 날짜는 정해져 있고 그때 무려 대통령 각하께서 참석하실 예정이다. 개통식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연기할 수 없으니 무조건 까라면 까라. Impossible is nothing이야. 못 하면 너네 회사 문 닫을 줄 알아!"라고 시공사인 현대 건설을 무식하게 쪼아 댔다. 어휴.. 그땐 그랬다.

그러니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높으신 관리자들도, 심지어 정 주영 현대 회장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과로를 감내하며 아예 현장에서 죽치고 살아야 했다. 중장비를 조종하던 인부가 도중에 화장실에 갈 여유도 도저히 없어서 참다못해 운전석에 앉은 채로 바지에다 쌌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그나마 현대 건설에서 일반 시멘트보다 만들기 어렵고 훨씬 더 비싸지만(단가가 2배 이상) 수십 배가량 더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를 동원하는 묘책을 내서 공기를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영업수지 흑자를 포기하고 말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옥천 터널은 거의 30년 동안 쓰이다가 지난 2003년, 옥천 구간의 선형 개량과 이설로 인해 고속도로 구간에서 제외되었다.
하행 터널만이 2차선 도로로 쓰이고 있고, 상행 터널은 폐쇄되어 김치 저장 창고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와인 저장 창고로 쓰이고 있는 경부선 철도의 옛 성현 터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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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나온 뒤에도 계속해서 이런 멋진 길이 이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과거의 경부 고속도로 본선 구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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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옛 고속도로의 흔적은 옥천의 거의 동쪽 끝에서 구도로가 신도로와 다시 마주치는 듯하면서 끝났다. 현재 고속도로로 치면 '영동1터널'을 동쪽으로 지난 지 얼마 안 된 지점이다.
본인은 다시 옥천 방면으로 돌아와서 여기 일대의 나머지 관광을 시작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4 08:33 2019/09/0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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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호 일대는 강물이 십자형으로 만나는(세로: 북한강과 경안천, 가로: 남한강과 한강) 교차로일 뿐만 아니라, 행정구역도 남양주(북서)와 양평(북동), 하남(남서)과 광주(남동)로 제각기 갈리는 굉장히 흥미로운 곳이다.
주변의 지형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면 얼추 아래와 같다. 각 사분면별로 땅의 이름, 강의 이름, 산과 강변 공원과 교량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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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 교차로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남한강 이남에도 행정구역상 양평이 있으며, 경안천 서쪽에도 광주시 퇴촌면이 있음.)

여기 주변은 상수원 보호를 위해 개발이 절대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의 정취가 물씬 풍기며 경치도 대단히 아름답다. 다산 생태 공원과 두물머리 공원에 대해서는 본인이 예전에 답사기를 올린 적이 있다.
하지만 강북 말고 강남, 특히 광주시 쪽은 딱히 갈 일이 없었고 접근도 쉽지 않기 때문에 오랫동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양평에서 약간 남쪽으로 남한강만 건너면 되는데 접근이 어려운 이유는... 거기 주변에는 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동쪽의 양평 시내 쪽으로 한참을 더 가면 양평대교가 나오지만 그건 2012년에야 건설된 것이고 그마저도 고속도로용(45번 중부내륙)이기 때문에 일반 차량들은 이용하지 못한다.

광주시 쪽의 남한강변으로 가려면 남쪽으로라도 잔뜩 내려가서 경안천을 건너는 광동교를 건너야 한다. 저기는 거의 고립된 섬이나 마찬가지 같으며, 개인적으로는 '광주섬'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을 정도이다. 가까운 미래에 남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저기 주변에 생길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월엔 본인은 여기에 한번 가 볼 기회가 생겼다.
본인 어머니의 어느 친구분이 은퇴 후 바로 저기 일대의 시골 마을에 주말 농장을 분양받으셨기 때문이다. 본인은 어머니를 따라 거기에 한번 놀러 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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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왔는데 밤에 잠은 당연히 밖에서 잤다. 이 당시 한낮에 30도를 훌쩍 넘는 7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에는 침낭을 덮어야 할 정도로 쌀쌀했다.
물론 본인은 이런 날씨가 아주 좋았다. 비까지 오면 완전 금상첨화였을 텐데~!

본인은 집과 직장에서 내내 버그와 싸우다가 불금을 기념하여 여기를 찾아갔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도시에서 보지 못한 진짜 버그들과 대판 싸우게 됐다. >_<
자그마한 벌레들이 컴퓨터나 자동차 내부로 들어가서 기계의 동작을 물리적으로 망가뜨릴 것만 같았다.

이런 경험을 해 보면 단순히 도시에 꾸며져 있는 공원의 풀숲하고 진짜 시골의 풀숲은 이런 데서 야생의 급이 차이가 난다는 것과, 텐트의 방충망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또한, 생명 자연발생설을 믿었던 옛날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_-;; 하긴, 흐르는 물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 지렁이가 흙을 삼켰다가 뱉으면서 땅을 기름지게 해 준다는 것, 구더기가 파리의 유충일 뿐 둘이 같은 종이라는 것 등도 인류가 알아낸 지 생각만치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 걸 선뜻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평균적인 비위와 근성이 강하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시골에서는 인공물이 별로 없으니 음식물 정도의 쓰레기 투척이나 노상방뇨에도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다. 글쎄, 기생충 같은 위생 차원에서는 그것도 너무 많아지면 별로 안 좋긴 하지만..
자연이 어지간한 생체 배설물· 폐기물을 자체적으로 정화하는 능력은 컴퓨터로 치면 garbage collection을 떠오르게 하는 것 같다. 스타에서도 생체인 저그는 테란· 플토와 달리 자기 체력이 천천히 자체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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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섬을 감싸는 지방도 342호선은 강을 따라가는 동시에 꼬불꼬불한 산도 타는 경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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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강변을 따라 공원과 산책로도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방문하던 당시에는 너무 더워서 구경만 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가을쯤에는 여기서 돗자리 펴고 더 오래 있을 수 있겠다. 물론 더워도 날씨가 아주 쾌청하니 풍경 사진을 찍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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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섬의 서쪽에는 하중도에 '팔당 물안개 공원'이라는 게 있었다. (혹은 팔당물 안개 공원?? 띄어쓰기가 확실치 않음 ㅡ,.ㅡ;;) 녹지의 면적으로만 따지면 두물머리와 다산 공원을 아득히 능가한다. 하중도와 본토를 연결하는 교량 아래에는 연꽃이 잔뜩 심어져 있었다.
산책로는 거리가 편도로만 1~2km에 달하기 때문에 이 더운 날 도보 답사는 할 수 없고, 그냥 조금만 살펴보고 돌아왔다.

여기는 넓고 경치는 좋지만 서울 방면에서의 교통 불편과 홍보 부족, 그리고 이 뙤약볕에 그늘이나 화장실, 카페, 편의점 등 보조 시설이 부족한지라 토요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별로 없었다. 본인도 이제야 처음 알게 됐을 정도이니 이 공원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덥긴 해도 두물머리나 다산은 이 시간대에 이 정도로 한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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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다음으로는 팔당 전망대 부근에서 강을 바라보며 풍경 사진을 남겼다. 딱히 산 같은 고지대가 아닌 곳에 '전망대'라니 심상이 좀 어색하다만, 여기는 맨 위의 일러스트에서 진짜로 원점에 해당하는 중심지이다.
전망대 주변에는 카페와 식당이 여럿 있고, 좀 외곽에는 짙은 분홍색으로 칠해진 모텔도 있었다. 산 좋고 물 좋은 동네에서 데이트 하다가 잠은 여기서 자라는 건가 싶다.;;

이렇게 광주섬(?)에 눈도장을 찍고 땅밟기를 마쳤다.
정암산 등산도 하고 싶은데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야말로 광주섬에 대한 총체적인 관광을 하는 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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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호 주변은 상수원 보호 명목으로 사람이 얼씬도 할 수 없다. 저렇게 공원이 꾸며져 있으면 그것만으로 감지덕지지 팔당댐 근처는 아예 철망·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본인은 문득 한강 물을 가까이서 체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뚝섬 한강 공원에 들렀다.

10여 개에 달하는 서울 한강 공원들 중 투톱은 여의도와 뚝섬이지 싶다. 둘 다 지하철역 접근성이 아주 좋은 데다 여의도는 위치가 너무 좋고, 뚝섬은 한강 공원들이 여기저기 조성되기 전부터 이미 민간 싸제 유원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뚝섬의 경우 지금도 국공립 시설뿐만 아니라 민간 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는데, 그 중엔 '아리랑 하우스'라고 커페, 레스토랑과 오리보트 대여 서비스를 하는 곳이 있다. 여기 말고 한강에서 오리보트를 탈 수 있는 곳이 한강 공원에 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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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보트는 자전거처럼 페달을 밟아서 돌리는 것 말고 전동 모터가 달린 것도 있으며, 대여료도 더 비싸다. 보트 한 척에는 최대 3명(240kg)까지 탈 수 있다더라.
전동이라 해도 그냥 빠르게 걷는 수준이다. 수면에 긴 여파를 남기면서 시속 수십 km로 질주하는 고속 모터보트는 따로 있으며 요금도 더 비싸다.

운전하는 게 놀이공원 범퍼카 같은 느낌이다만.. 그렇다고 다른 배에 일부러 부딪치지는 말아야 한다.
또한 한없이 멀리 나가거나 아예 강 건너편으로 갈 수도 없다. 부표 이내에 가로· 세로 공히 200미터 남짓한 사각형 영역 안만 돌아다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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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교량이 아니라 쪽배로나마 한강 서울 구간의 수면을 자가운전으로 돌아다녀 보는 건 이게 태어나서 거의 처음이었다.
여기도 엄연히 방대한 면적의 물이 흐르는 구간이니, 나름 바다 냄새가 나고 바람도 육지보다 더 많이 불어서 시원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8/24 08:33 2019/08/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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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국 여행 이력

올해 본인은 지난 추석 때 가족과 함께 쓰시마 섬 패키지 관광을 하고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본을 가 봤으며, 한반도를 통틀어서 가장 가까운 외국을 다녀오게 됐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기도 했으니, 본인의 여행 이력과 관련해 여러 분야에서 신기록이 세워졌다.

그런데 본인은 외국 여행을 갈 때마다 뭔가 아귀가 공교롭게 안 맞아서 필요 이상의 손해와 삽질을 감수하곤 했다.
10년 전에 군필 기념으로 미국 여행을 갔을 때는 국내의 휘발유 1리터 가격이 지금과 비슷한 1600원 초중반이었는데, 1$의 환율은 1400원을 훌쩍 넘어 있었다. 그때 이후로 달러 환율은 현재까지 다시는 그만치 오른 적이 없었고 말이다.

게다가 거의 130$ 가까이 주고 비자 신청 인터뷰까지 또 해야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안 가 2009년쯤부터는 단기 관광 비자가 면제되었다. 그러니 2008년 가을에 미국 다녀온 건 최악의 바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제주도보다도 가까운 곳을 다녀 오지만 그래도 외국이니까 여권이 필요한데.. 병특 만료 기념으로 10년 전에 만들었던 여권은 딱 올해 추석 연휴 기간에 맞춰서 기한 만료 예정이었다. 뭐, 유효 기간이 6개월 이내로 줄어든 여권은 신규 출국용으로는 사실상 못 쓰는 여권이긴 하다만..

이것만 아니면 본인은 앞으로 수 년간 외국 나갈 일이 없을 사람이다. 여권이 무슨 면허 갱신도 아니고 몇 년간 여권 없이 살아도 되는 처지인데 결국은 단절 기간 없이 또 새 여권을 만들게 됐다.
요즘은 출입국 때 일일이 도장을 찍지도 않고 사증란이 소모될 일이 더욱 없으니, 본인은 면수가 절반인 알뜰 여권을 신청했다. 다만, 그래 봤자 할인되는 금액은 3000원 남짓으로, 5만 원에 가까운 전체 발급 수수료에 비해서 그렇게 많이 저렴해지는 건 아니었다.

2. 고속도로

외국 여행을 가는데 인천 공항이 아니라 반대편의 부산항으로 가는 게 무척 이색적이었다. 부산에도 서울로 치면 내부순환로 같은 고가 형태의 시내 고속화도로가 응당 있다. 그러니 부산 중에서도 최남단인 부산항까지 가는 게 생각만치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거기를 달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또한, 본인은 서울-부산을 왕복하는 동안 차의 성능 테스트도 같이 진행했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150~160km씩은 흔히 밟았으며, 차 없고 탁 트인 곳에서는 잠시나마 180~185까지도 밟는 데 성공함으로써 과속의 신기록을 수립했다. 원쑤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방아쇠를 당긴... 건 아니고,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끝까지 꽉~ 밟았다.

내 경험상 속도가 100~110을 넘어가면 계기판의 초록색 경제 운전 ECO 표시등이 꺼졌다. 이 이상 속도부터는 차도 점점 힘이 부치고 연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120~140 정도의 속도는 페달을 약간만 밟아도 어렵지 않게 나오는데.. 150 이상이 자동차의 내부 상태가 확 달라지는 경계인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는 가속 페달을 이전보다 훨씬 더 세게 밟아야 했다. 차가 힘들어하는 게 느껴지고 가속이 눈에 띄게 잘 안 되기 시작했다. 이게 100마일의 장벽이기라도 한지 모르겠다.
그래도 1년에 많아야 두세 번 장거리 고속도로를 뛸 때가 아니면 저 페달을 자전거 페달 밟듯이 힘 줘서 밟을 일이 언제 있겠으며, 엔진 회전수 타코미터가 4~5000까지 치솟는 걸 언제 보겠는가? KTX는 200을 넘어서 300도 가는데, 승용차로 이 정도는 밟아 봐야지..

뭐, 본인 역시 추월을 하기만 한 게 아니라 추월을 당하기도 했다. 나 같으면 어지간해서는 저기서 이 좁은 틈으로 끼어들지는 않았을 텐데, 나보다 더 위험한 칼치기를 감행하며 추월하는 간 큰 차들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치기를 하는 차보다는 엄연히 추월 차로인 1차로에서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저속으로 세월아 네월아, 그것도 2차로의 차와 거의 나란히 가고 있는 차들이 훨씬 더 민폐라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그리고 앞에 장애물이 없다시피하고 지금 속도로도 얼마든지 커브를 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브레이크를 밟는 것도 뒷차 운전자를 긴장시키고 유령 정체를 유발하는 주범이다. 애써 얻은 속도를 헛되이 허공으로 날리는 짓이니 차의 연비에 안 좋은 건 두 말할 나위도 없다.

3. 부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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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타고 외국으로 가는 건 아무래도 인천항에서 황해를 횡단하여 중국으로 가는 게 개인적으로 더 쉽게 떠오른다. <아저씨>, <공모자들> 같은 범죄 영화를 너무 강렬하게 봐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인천뿐만 아니라 부산도 항구 도시로서 아주 중요하며, 일본은 대륙 진출을 위해 무려 110년 전부터 경부선 열차와(부산 역) 부산항이 서로 딱 연계되게 만들어 놨다.

비행기가 아니라 배이니 캐리어를 따로 부치지 않아도 되고 무게 제약이 없는 건 약간 좋았다. 물론 망망대해로 나가는 만큼 기본적인 짐 검사를 하지만, 비행기처럼 액체 반입까지 제한할 정도로 빡세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객기는 출발 후 활주로로 갈 때는 견인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반면, 배는 비행기보다 훨씬 커도 자력 택싱이 가능할 것이다.

기체 내지 선체의 왼쪽에서 탑승하는 건 비행기와 배가 공통인 것 같다. 비행기가 배의 관행을 물려받았겠지..
하지만 각각의 교통수단에 '-호'라는 고유한 명칭이 붙어 있는 건 비행기에는 없는 선박만의 관행이다. 비행기는 그냥 운행편 번호가 있고, 똑같이 찍어 낸 기체 자체의 모델명(보잉 747, 에어버스 380..)만이 있을 뿐이다.

장거리를 좀 오랫동안 가는 여객선이라면 선실이 반쯤 호텔 방처럼 꾸며져 있고 승객이 누울 곳도 있다. 하지만 쓰시마 섬을 오가는 배는 운행에 한두 시간밖에 안 걸리고 주행 속도도 제법 빠른(시속 6~70km!) 고속정이다 보니, 내부가 좀 더 버스나 비행기에 가깝게 꾸며져 있었다. 승객은 고정된 자기 좌석에만 앉아 있어야 하며, 항해 중엔 바깥 갑판으로 나갈 수도 없다. 좌석엔 심지어 안전벨트까지 있었다.

옆에 시모노세키로 가는 성희호 여객선을 보니 크기도 우리 배(니나호)보다 더 크고 뭔가 내가 생각하는 그런 주거성을 갖춘 배처럼 보였다. 더 장거리를 다녀서 그런 듯한데, 저런 큰 배를 굴릴 정도로 수요가 나오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여러 차이점들을 생각하며 일본을 다녀왔다. 갈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돌아올 때는 2m가 넘는 높은 대한 해협의 파도로 인해 평생 겪어 보지 못한 배멀미를 경험하게 됐다.
배가 그야말로 사방으로 들썩이며 요동쳤으며, 파도를 타고 내려갈 때는 쿵쿵 진동까지 느껴졌다. 그냥 놀이기구 탄 듯이 들썩거리는 걸 즐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느 샌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온통 식은땀으로 흠뻑 젖고, 평소에 그렇게도 뜨끈뜨끈하던 손발은 힘과 열기가 쫙 빠졌으며, 얼굴이 노래지고 속이 어지러워졌다. 이 와중에도 남을 챙기기까지 해야 하는 승무원은 어떻게 배에서 근무를 할 수 있나 대단하게 느껴졌다.

부산항에서 쓰시마 섬 히타카츠(히타카쓰) 항까지 갈 때는 80분 남짓 걸렸지만, 돌아올 때는 파도 때문에 2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자동차로 치면 고속도로에서 비포장 오프로드로 바뀐 거나 마찬가지다.
선박은 고속버스와 마찬가지로 탑승권에 도착 예정 시각이 공식적으로 기재되지 않는 교통수단이라는 걸 알게 됐다. 도로 사정이 아니라 바다 사정의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항해를 절반이나 2/3 정도 한 뒤에야 선장이 예상 도착 시각을 방송으로 얘기했다.

4. 일본 - 작다!

과연 일본은 (거의) 모든 게 작고 아기자기하고 아담하더라. 이 말부터 해야겠다. 좋게 말하면 알뜰 검소하고 실속 있고, 나쁘게 말하면 답답하고 짠돌이스럽다.

(1) 먼저 음식 얘기부터.. 음식값이 환율을 감안해도 한국과 비슷해 보이길래.. 그리 비싸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국 같은 양과 서비스로 그 가격인 건 아니다. ㄲㄲ 양이 뭐 이렇게 적은지? 음식물 쓰레기가 나올 수가 없다. 과일과 생선회를 이렇게 작은 덩어리로 썰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국 음식은 한없이 기름진 중국 음식보다는 일본 음식에 더 가까운지라 전반적인 입맛은 한일 양국이 서로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 음식에 한국 같은 벌건 김치가 곁들여 나오지는 않는다. 또한 회는 언제나 고추냉이 넣은 간장에 찍어 먹지, 한국 같은 고추장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국 같은 소금과 참기름에 구운 김도 일본에는 없다.

(2) 다음으로 숙소를 살펴보면.. 우리가 그리 비싼 호텔에서 투숙하지 않은 건 감안하더라도.. 한국이라면 지방의 그냥 허름한 여관에도 있을 법한 냉장고와 침대가 없더라. 객실 화장실 세면대와 변기는 어찌나 아담한지 건물 화장실이 아니라 유아용 내지 교통수단 안의 화장실 같았다.

(3) 일본의 서민들은 살아서도 이렇게 작게 사는데, 하물며 죽은 뒤에는 더 얄짤없다. 황족 말고는 누구든 매장 자체를 못 하며, 무조건 화장 후 납골당 행이라고 한다. 하긴, 후손들이 일일이 다 관리하지도 못하는 묘지만 자꾸 늘어 가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고 모든 시신을 저렇게 처리하는 건 일면 합리적이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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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끝으로, 일본 하면 역시 경차다. 미국은 깡촌 시골에 온통 SUV급의 커다란 다용도 픽업 트럭이 다닌다지만 일본은 차들이 온통 작다. 베트남 같은 나라이면 얄짤없이 툭툭이 삼륜차였을 텐데, 그래도 일본 정도의 기술 있고 잘 사는 나라이니까 경차인 것이다.

5. 일본 - 차량과 교통

(1) 그래도 택시까지 경차는 아니더라. 그 대신, 딱 1990년대 디자인의 옛날 차들이 많이 다녔다. 일본이 아무리 자동차를 튼튼하게 잘 만든다 해도, 자가용도 아닌 영업용 자동차를 내구연한 없이 설마 20년이 넘게 굴릴 정도로 지독한 구두쇠인가 궁금했는데.. 그건 아니다. '도요타 크라운'의 택시 전용 모델이 1995년부터 2017년까지 외형 변경 없이 그대로 생산된 거라고 한다.

국내 현대차의 경우, YF 쏘나타가 생산되던 동안에도 직전의 NF 쏘나타가 택시용으로는 생산됐다. (LF가 나오면서 단종) NF가 워낙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쏘나타의 전신인 1980년대의 완전 옛날 중형차인 스텔라도 택시는 무려 1997년까지 생산됐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저 도요타 크라운 택시는 정말 오래된 것 같다. 과거의 살아 있는 화석이던 미쓰비시 데보네어 초기형(1960~1980년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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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일행이 패키지 관광을 다니면서 탑승한 차량은 요런 25인승 크기의 마이크로버스였다. 한국이라면 그런 버스는 현대 카운티 같은 "전방 엔진+중간문" 형태만 있을 텐데, 크기가 저렇게 작으면서 대형 버스처럼 "후방 엔진+앞문"인 물건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기했다.

(3) 차들이 좌측통행인 것이야 익히 들었고, 지구상에 좌측통행 우핸들인 나라가 일본만 있는 게 아니니 그리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중앙선이 흰색 실선으로 그어져 있는 것이 개인적으로 더 신기했다. 그리고 일부 구간은 황색 실선 중앙선도 있긴 하던데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6. 일본 - 그 밖에

  • 일본은 한국과 시간대가 동일한 드문 외국 중 하나이다. 시차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게 은근히 좋았다.
  • 생뚱맞은 오지에 공중전화도 아니고 음료수 자판기가 눈에 자주 띄었다. 지진 같은 재난에 대비해서 일정 간격으로 의무적으로 배치한 것이며, 불가피한 비상 상황일 때는 자판기를 부수고 물품을 털어서(!) 연명하는 것도 허용된다고 한다. 한편, 한국에도 별별 물건을 파는 자판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 자판기까지는 일본에서밖에 못 봤다.
  • 전압이 110볼트이고 옛날 스타일 플러그가 필요하다는 점은 의외로 미국과 비슷한 면모이다.
  • 일본이 집과 차는 작고 음식은 적지만, 지폐는 한국 지폐보다 세로가 약간 더 크다. 1000엔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노구치 히데요가 그려져 있는 걸 봤다. 우리나라 지폐에는 아직까지도 먼 옛날 조선 시대 사람밖에 없는데 나름 근현대의 인물, 그것도 정치인이 아닌 자국의 과학자가 그려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비록 노구치 히데요 자체는 행적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 쓰레기 분리 배출/수거를 한국만치 꼼꼼하게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트에서 물건을 산 뒤에 봉지를 1~2엔 가격에 따로 판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런 쪽으로는 한국보다 미묘하게 더 관대하고 후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07 08:37 2018/10/0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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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여행기: PART 4 (2018/7/24)

통일관 안에는 북한의 실상, 북한의 대남 도발사 같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뭐 그렇다고 마냥 북괴의 만행 비난에 반공 멸공만 강조하는 분위기는 아니고, 말 그대로 통일 통일 거리는 프로파간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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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포로에게는 탄광 맞벌이 일을 시킵니다. 아무리 충실하게 일을 해도 국군 포로의 집은 확실하게 3대까지 반동 낙인을 찍습니다. (그래서 아오지 탄광 같은 특별히 더 힘든 곳으로 배치를..)"
저건 옛날에 국군 포로 귀환자로 잘 알려진 조 창호 중위가 정확하게 당했던 대우이기도 하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싸우다가 자기 의지에 반하여 생지옥으로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생각하고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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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2016년 10월경, 한창 레카가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탄핵 당하고 매장 당하던 시절의 북괴 로동 신문이다. 역시 윗동네에서도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느라 정신 없었다.
국정농단이 어떻고 하는 건 쟤들이 알 바 아니고, 북괴가 원하는 대로 안 해 주는 남조선의 애국 대통령이니까 싫다고 몰아내라고 선동하는 것일 뿐이었지.
쟤들은 '외치다'도 '웨치다'라고 표기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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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수봉 공원 내부에 있는 현충탑의 주변 모습이다. 원래 자유 공원에 충혼탑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그걸 1972년에 수봉 공원 현충탑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여기 주변으로는 나무 그늘과 산책로, 정자, 간단한 운동 시설도 있어서 쉬러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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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재일 학도 의용군 참전비이다. 아까 자유 공원에 있던 참전비는 자국 "인천" 학도병의 것이니 헷갈리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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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은 인천 지구 전적비이다. 별도로 소개하지는 않지만, 옆에는 UN 참전 기념탑도 있다.
이건 특정 집단의 참전 기념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투와 승전 자체를 기념하는 것이 목적이다.

나라가 전반적인 분위기가 정상이라면, 필요 이상으로 옛날에만 집착하고 군대 얘기 전쟁 얘기만 꺼내는 건 군국주의 전체주의 수꼴 냄새가 풀풀 나는 발상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라 분위기가 정상이 아니다. 본인은 온갖 악의적인 역사 왜곡과 나라 정체성 부정, 악의 무리에게 굴종하는 불의한 거짓 평화가 횡행하는 꼴을 견딜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항과 반발 심리로 우리나라가 악의 무리로부터 자신을 지켜 온 역사를 더욱 심도 있게 공부하고 주변에 알릴 것이다.

이렇게 공원을 쭉 돌아다녀 봤다. 지도상으로는 산 속에 어린이용 놀이공원과 양궁장, 그리고 인공 폭포 광장도 있는 모양이던데, 본인은 거기에는 들르지 못했다. 밖이 너무 더워서 공원을 꼼꼼히 돌아다닐 여건이 못 됐기 때문이다.
또한, 인천에 거주하는 실향민들의 염원을 전하는 망배단(望拜壇)이라는 비석도 있었는데, 이건 사진 소개를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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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본인이 인천에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오랫동안 말로만 들어 왔던 '국제 성서 박물관'이었다. 인천 주안 감리교회에서 자기 예배당 바로 옆에 부설한 별관인데, 실제로 박물관은 그 건물의 5층에만 놓여 있다. 하지만 한 층만으로도 생각보다 넓고 볼 게 많았다. 자기 신앙의 뿌리와 정체성에 일말의 관심이 있는 교인이라면 꼭 가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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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이 종교 개혁과 성경의 보급에 끼친 영향,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 우리나라 교회사 등 여러 주제를 다루면서 소장 자료도 굉장히 고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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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셩교젼서. 말은 들어 봤다. 옛날에는 한자음을 표기할 때 y가 가미된 모음이 지금보다 더 많이 쓰였던가 보다.
존 로스는 킹 제임스 성경을 대본으로 삼아 한국어 성경 번역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왜 지금 우리나라는 변개된 성경이 주류가 됐나 모르겠다. 하긴, 개역성경에도 KJV 표현이 일부 전해지는 게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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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성경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장로교가 주류가 된 현재와는 달리, 우리나라 초창기에는 감리교가 더 우세했다. 또한 이 승만, 김 구, 유 관순, 최 용신, 이 준, 남궁 억 등 한국의 주요 크리스천 독립 운동가들은 대부분 감리교 출신이다. 이것은 국내의 감리교회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점이기도 하다.

장로교는 하나님의 전지전능 섭리를 굉장히 강조해서 칼빈주의 예정론을 지지하는데, 너무 오버해서 하나님께서 죄악까지 다 설계하고 예정하고 지옥 갈 사람도 미리 다 찍어 놓으셨다고 얘기하니 그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반면, 감리교는 존 웨슬리 이래로 알미니안주의에 입각하여 신자의 행실을 더 강조하는데.. 악행이 계속되면 아예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까지 우기니 이는 지나친 비약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뭐 그건 그렇고, 참고로 주 기철은 감리교가 아닌 장로교 목사였다는 점을 덧붙이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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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서양으로 넘어간다.
옛날에는 성경전서 책이 어지간한 사전이나 도록 연감 이상으로 정말 거대하고 부피가 컸다. 그레이트 성경만 거대했던 게 아니다.

이건 충분히 수긍이 가능한 일이다. 옛날에는 기계만 해도 요즘의 물건보다 기능과 성능이 뒤쳐지면서도 더 크고 무거웠다. 하물며 지금으로부터 몇백 년 전에 깨알같은 글자를 정교하게 찍는 인쇄술이 발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며, 지금 같은 얇디얇으면서 튼튼한 종이를 만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옛날에는 성경의 여백 곳곳에 온갖 삽화들이 많이 들어갔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그야말로 장인 정신이 깃든 예술 작품처럼 꾸민 셈이다. 오늘날 같은 경제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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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bible과 she bible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 킹 제임스 성경이 출간 당시에 어른들의 사정으로 인해 케임브리지 판과 옥스퍼드 판으로 갈려서 sin/sins 같은 극소수 미묘한 차이가 발생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혹시 그걸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케임브리지 판이 맞음)

킹 제임스 성경 유일무오설을 공격하는 유치한 수법 중 하나는 이렇게 시기와 장소에 따른 KJV edition들의 파편화를 거론하면서 "그럼 도대체 어느 edition이 유일무오한 건가요? ㅋㅋㅋ"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답 내지 반박은 다 마련돼 있다.

KJV는 출간되는 과정에서 저런 파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실수 때문에 vintage와 vinegar를 헷갈린 일명 '식초 성경', 그리고 not을 빼먹어 버려서 아예 "너는 간음할지니라"가 된 '사악한 성경'이 만들어져 나온 적도 있었다. 저 때는 컴퓨터가 없었으며, 인쇄는 여전히 노동 집약적인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번역자의 실수가 아니라 인쇄소 식자공의 실수가 들어갈 여지도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나저나 저 룻 3:15의 경우, 심지어 NASV와 NIV처럼 non-KJV 역본들간에도 끝부분의 주어가(도시로 들어간 사람)이 룻이냐 보아스냐 차이가 있긴 하다.

이 외에 사진을 일일이 소개하지는 않지만..

북한 성경: "조선기독교도련맹중앙위원회 1983"라는 소속과 연대가 붙어 있었다. 문체는 현대어이고 공동번역 스타일이었다. 종교 쪽으로 에큐메니컬한 사람들이 대체로 정치 쪽으로도 에큐메니컬한 편이니.. 그래도 야훼가 아니라 여호와 표기이긴 했다.

에티오피아어 성경: 유니코드 문자표에서나 봤던 희한한 문자가 책의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걸 난생 처음 봤다. 마치 이과생들이 그리스 문자를 수식에서 기호 용도로만 실컷 봐 왔다가 그걸로 그리스어 자연어 텍스트를 써 놓은 걸 보고 놀라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에티오피아 문자는 영역이 U+12?? ~ U+13??이어서 U+11??대인 한글 자모의 바로 다음이다. 그래서 본인도 이 문자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듯하다.

필사 성경: 박물관에는 국내의 여러 신자들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그냥 읽는 것도 아니고, 손수 타이핑도 아니고.. 종이에다 펜으로 다 베껴 쓴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말 어지간한 근성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것으로.. 본인은 2018년 개인 하계 휴가를 마무리 했다.
다시 말하지만 날씨 타이밍 하나는 완벽했다. 이런 날씨에 피서 휴가를 안 가면 도대체 언제 가겠는가?
다만, 2박 3일을 차와 텐트에만 의지하며 숙소를 따로 안 잡았는데, 그러기에는 밤에 너무 덥긴 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여파가 휴가를 마친 뒤에도 며칠간 계속되었으며, 직장에 출근해서까지 한동안 고생했다.

미리 말하는데, 내년 하계휴가로는 군인 없는 양구· 인제라 불리는 경북의 대표적인 오지들 "봉화-영양-울진"을 답사하고자 한다. 철도고 군사 이슈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계곡과 바다만 즐기고 올까 한다.
그 뒤 내후년은 남해 일대를 생각하고 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8/08/06 19:35 2018/08/0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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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여행기: PART 3 (2018/7/24)

박물관 관람을 계속했다.
말 제대로 안 통하고 아무 생활 기반도 없던 억만 리 타지에 가서 3D 업종에 종사하며 억척같이 일하고 돈 모으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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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면 양반이지, 멕시코로 이민 간 사람들은 알로에인지 에네켄인지 손을 다치기 쉬운 더 이상하게 생긴 작물을 키우는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리고 멕시코 라인은 미국 라인과 달리 이민자가 막 많지도 않았으며, 후세들은 그냥 현지와 동화되면서 한국 정체성을 상실해 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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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창호야.. 예전에 도산 공원에 갔을 때도 봤지만 그야말로 "애국이란 게 뭐 거창한 게 절대 아니다. 당신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하고 있습니까?"주의자였다.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신실해야 큰일을 맡을 수 있게 된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 이게 굉장히 성경적인 심상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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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KBS 해외동포상이란 게 있긴 했다.
서 남표 교수는 카이스트 총장 재임 시절의 행적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인 커리어 자체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미 1995년에 저런 데에도 뽑힌 적이 있고..
2002년에는 김 진우 교수가 뽑혔는데 이분은 언어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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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 대학교의 교명은 '인천+하와이'의 줄임말이다. 설립 배경에 국내의 타 대학들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사연이 있다.

이민사 박물관을 관람한 뒤, 월미도에서의 마지막 코스로는 테마파크에서 놀이 기구를 타고 싶었다.
하지만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는 별다른 예고나 안내 없이 정비를 이유로 테마파크가 휴관 상태였다. 그래서 놀이기구를 타 보지는 못했다. 그 대신 근처에 있던 등대를 찾아가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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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인천 상륙 작전 당일에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 등대는 팔미도라고 월미도보다 훨씬 더 작은 다른 무인도의 등대이다.
본인은 월미도 등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에 미국 여행 갔을 때 서부 UC 버클리와 동부 버클리 음대를 헷갈렸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월미도 관광을 마친 뒤, 본인은 동쪽으로 쭉쭉 관광을 시작했다.
영종도, 월미도는 모두 행정구역상 인천 중구이다. (신도와 장봉도는 인천 옹진군) 그 반면, 앞으로 경유하게 되는 곳들은 '미추홀구'이다.
미추홀? 완전 처음 듣는 이름이어서 도대체 뭔가 싶었는데.. '남구'가 무려 2018년 7월부로 이름이 저렇게 바뀐 거라고 한다. 바뀐 지 한 달도 안 된 따끈한 새 이름이다.

처음에는 구가 다 동서남북 평범한 이름으로 붙기 시작했는데 인천도 도시의 외형이 바뀌면서 그 이름이 도시의 실질적인 방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됐다.
가령, 서울 남산은 오늘날 서울의 완전 중심부에 있을 뿐 남쪽 끝에 있는 산이 전혀 아니며, 동인천 역도 부평구에 소재하지도 않고 인천의 동부에 있는 역이 절대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남구라는 구 이름이 다른 역사적 근거가 있는 명칭을 사용하여 개명됐다고 한다.

이제 본인은 인하 공전을 찾아가서 대한민국 수준 원점, 교육용 보잉 727기를, 그리고 옆에 인하 대학교에서 우남호 여객기를 찾아가서 인증샷을 찍었다.
인하대는 캠퍼스 안의 차도가 온통 일방통행 위주로 만들어진 게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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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원점은 설명을 해 놓은 안내판을 모두 촬영했다. 나도 지금까지 배경을 잘 몰랐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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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727은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레어템인 삼발기이며, 엔진이 주날개 아래에 달려 있지 않다.
이 기체는 1991년에 동체 착륙 사고를 겪고 나서는 비행 불가 판정을 받고 인하 공전에 교보재로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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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DC-3 여객기는 대한 항공의 전신인 '대한 국민 항공사(KNA)'에서 '우남호'라는 이름으로 1954년에 도입한 기체를 훗날 대한 항공이 인수한 것이다. 얘는 그로부터 15년 뒤인 1969년에 만기 퇴역하고 1974년에 인하 대학교로 기증되었다.
KNA는 DC-3 여객기 달랑 세 대를 운용했는데... (창랑호, 만송호, 우남호) 창랑은 납북 테러를 당했고 만송은 사고로 날려먹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우남호만이 살아남아서 만기 퇴역했다. 이 때문에 KNA는 경영난과 빚에 허덕이게 되었고, 창업주가 자살하는 참극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하와이 교포 1세들이 비행기를 타고 1955년에 모국을 방문한 것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항기의 태평양 횡단이었다고 한다. 교통수단이 배에서 비행기로 바뀐 것이다.
아까 전에 관람했던 이민사 박물관과 잘 연계되는 내용이다.

인하대 구경을 마친 뒤에는 여기서 동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공원인 수봉 공원을 찾아갔다. 수봉산이라고 월미산과 비슷한 높이의 아담한 언덕에 자리잡아 있다.
얘는 언제 무슨 계기로 만들어진 공원인지 모르겠지만, 현충탑과 각종 전적비들이 자유 공원 만만찮게 여럿 있었으며 통일· 안보 전시관도 있었다. 산 중턱까지 차를 몰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일인 덕분에 한산하고 주차 걱정도 없어서 좋았다.

부산으로 치면 뭔가 보수산 공원과 비슷한 곳 같았다.
그래도 보수산은 4· 19니 민주 운동이니 하는 것을 기념하는 시설도 있는 반면, 수봉산에는 온통 주적 북한과 맞서 싸운 것에 대한 기념물만 있었다. 뭐, 보수산에도 대한해협 전승비가 있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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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봉 공원은 길의 토폴로지가 T자와 비슷했다. 세로줄 I 모양 경로는 자동차로 접근 가능하다. 그래서 가로줄과 만나는 끝까지 올라가면 그 교점에 한국 자유 총연맹이라는 우파 단체에서 운영하는 '인천광역시 통일관'이 있다. 여기가 자가용으로 다닐 수 있는 한계 지점이었다.

거기서 ─자 모양의 좌우로는 도보로만 진행할 수 있는데(차도는 공원 관리 차량 전용), 한쪽 끝으로 가면 광장과 함께 현충탑이 나오고, 다른 쪽 끝으로 가면 차도를 다리로 건넌 뒤에 인천 지구 전적비가 나왔다. 그 양 끝도 막힌 게 아니라 공원을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가 있었다. 단지 거기는 자가용으로는 진입할 수 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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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08:32 2018/08/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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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여행기: PART 2 (2018/7/23)

카페와 카페리, 장봉도 식당을 거치면서 폰과 노트북은 배터리를 꽉 채웠다. 다음 보급이 어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폰은 이 상태로 아예 꺼 버렸다.
고속 충전이 되는 전용 어댑터를 챙기지 않고 그냥 일반 USB 케이블만 챙긴 바람에 폰의 충전 속도가 발목을 잡았다. 이거 무슨 원주율을 arctan(x)의 x=0 부근 급수 전개로부터 유도된 왕창 수렴 느린 공식으로 구하는 것 같은(pi/4 = arctan(1) = 1 - 1/3 + 1/5 - 1/7 ...).. 그런 답답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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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 아니 삼목 선착장으로 돌아오니 저녁 7시 무렵이었다. 아직 해가 떠 있고 여전히 더운 것을 감안하면, 을왕리나 왕산 해수욕장으로 또 돌아가서 물놀이를 계속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그러지는 않고, 곧장 인천대교를 건너서 본토로 돌아왔다.

이제 휴가의 컨셉이 피서에서 인천 시내 관광으로 바뀌었으니 다음 목적지인 인천 자유 공원을 찾아갔다. 인천대교도 구간 단속 때문에 과속을 거의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폭주는 비트코인과도 같아서 사패산 터널이든, 강남 순환로든 무엇이든 어떤 도로가 처음 생겨서 단속이 강화되기 전에 일찍, 미리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자유 공원은 고맙게도 전면 무료이고 혼잡하지도 않은 공영 주차장이 근처에 있어서 주차 걱정이 전혀 없었다.
공원 한구석의 으슥한 모퉁이에 텐트를 치고 거기서 잠들었는데, 밤에도 시원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너무 더워서 웃통 벗고 물에 적신 수건을 등에 걸쳐야 했다. 아침에 시원한 바닷물과 함께 신선놀음을 했던 경험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휴가 날짜 자체는 이렇게 왕창 더운 날에 절묘하게 잘 잡았다. 기껏 휴가를 떠났는데 비가 쏟아진 것보다는 나으니 말이다. 또한 텐트 안에서 노숙하는 동안에도 코딩을 계속하여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버그를 두 개나 잡았다.

3. 셋째 날: 월미도와 인천 시내 명소 관광

해가 뜨자마자 자유 공원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이 공원은 '응봉산'이라고 불리는 최대 높이 70m 남짓한 언덕에 자리잡아 있는데, 이른 새벽부터 산책과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안 그래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라고 하고, 산책과 운동과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또한 인천 자유 공원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매카써 장군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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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은인인 더글러스 맥아더(최종 계급은.. 오성장군 원수!). 이 동상은 무려 1957년에 세워졌다고 하니, 지금은 그로부터 무려 60년이 훌쩍 넘었다. 내가 이 명물을 직접 보러 물놀이도 동해 대신 황해를 택하면서 인천 러쉬를 갔다.
시간대의 한계(역광...) 때문에 그리 좋은 구도와 색감으로 사진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리고 위에 새는 날아가거나 내려올 생각을 안 해서 사진에도 그대로 찍혔다.

맥아더는 부친부터가 별 단 장군이었고, 거기에 개인 노력을 가미하여 1, 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최연소 장군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6· 25 사변 때 그가 입안했던 인천 상륙 작전은 전쟁사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천재적인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선이 교착된 채로 휴전을 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않는가?

다만, 맥아더는 상륙 작전의 대성공을 계기로 좀 자만에 빠졌는지, 이후 중공군의 개입에 대해서는 오판을 거듭하며 수세에 몰렸다. 수틀리면 또 핵 터뜨리지 같은 생각으로 트루먼 대통령과도 대립하다가 예편하게 된 것 역시 아쉬운 점이다.

맥아더는 컨셉이었는지 파이프 담배를 무는 걸 좋아했으며, 공식 석상에서는 반드시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모자를 벗어서 정수리가 드러난 모습은 히로히토 일왕이라든가 이 승만 할배와 함께 찍은 사진 같은 일부 소수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카리스마 넘치고 콧대 높고 기세등등 오만방자(?)해서 아무하고나 서글서글 친하게 지내지 않고 적도 많은 타입이었는데..

우리나라의 이 승만 대통령이 이런 맥아더와 완전 사이 좋은 절친 관계였다. 아무나.. 그것도 미국인도 아닌 가난한 듣보잡 신흥 국가 사람이 맥아더 같은 깐깐한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둘 다 비슷한 고집쟁이 괴짜 꼴통인 한편으로 엄청난 천재형이다 보니,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었나 보다.

아무튼, 이 사람 동상의 존재를 불편해하는 악질 빨갱이들은 동정의 여지가 없는 인간 쓰레기들이다. 사회 정의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원래는 놈들을 대한민국 국적 박탈하고 외국으로 추방해서 한국 땅 영원히 못 밟게 만들든가, 정신병원· 수용소 내지 사형장으로 보내야 된다. 그리하지 않고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비롭고 관대하게 처분한다 해도 이런 놈들이 최소한 교육자, 법조인, 정치인, 군· 경 공무원 같은 직업은 네버, 절대, 결코 가질 수 없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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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인천 자유 공원에는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1882-1982)과 6· 25 당시의 인천 학도 의용대 참전비가 세워져 있다.
먼 옛날에는 심지어 자유의 여신상의 축소판 레플리카까지 놓여 있었다고 한다. 똑같이 자유, 자유 하니까 유사성이 있어서 건립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맥아더와는 관계가 없으며 다른 논란의 여지도 많았기 때문에 20년 남짓 만에 철거되었다(1976-1997).

이렇게 자유 공원의 답사를 마친 뒤, 본인은 더 서쪽에 있는 월미도를 찾아갔다.
월미도는 한때 '월미산'이라는 해발 108m 남짓한 언덕으로 구성된 섬이었다. 하지만 일제 시대 때 간척을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서 사전적인 의미의 섬은 아니게 되었다. 그때는 부유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 내지 휴양 시설이 들어섰으며, 심지어 바닷가에 '월미 해수욕장'도 들어섰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해수욕장 피서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자가용 승용차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철도가 등장해서 여가를 위한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진 뒤부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에 해수욕장이라는 것이 도입된 것도 일제 시대 때이다. (1913년의 부산 송도 해수욕장이 최초)
오늘날 인천은 그 시절과 달리, 본토에는 해수욕장이 없다. 본토에서 떨어진 섬으로 가야 간척되지 않은 갯벌이 있고 물도 그나마 더 맑은 해수욕장이 나온다는 것이 부산과의 차이점이다.

해방 후에는 월미도 일대는 각종 공장, 항만, 군사 시설이 잔뜩 들어서면서 민간인 접근 금지 구역이 되었다. 심지어 해군 제2함대까지 주둔해서 '수방사의 해군 버전' 역할을 했으며, 연안뿐만 아니라 월미산 전체도 입산 금지였다. 그러다가 제2함대는 평택으로 이전하고 2001년이 돼서야 월미산은 공원으로 탈바꿈하여 개방되었다고 한다.
다만, 월미도 말고 그 남쪽에 있는 일명 소월미도는 지금도 인천 해양 경비 안전서, 인천 해상 교통 관제 센터 등..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코렁 시설들이 가득한 보안 통제 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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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안 그래도 너무 더워서 등산을 못 한 지 몇 달째 됐는데, 월미산을 정상까지 올라 봤다.
둘레길은 저렇게 큼직하게 잘 닦여 있고, 거기서 계단을 오르면 정상 쪽으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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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면 먼저 큼직한 광장에 도달하는데, 거기서 (1) 진짜 산 정상, (2) 구식 대포가 놓인 옛 성곽, (3) 전망대 타워를 골라서 갈 수 있었다. 그 세 곳의 모습은 위의 사진으로 보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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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은 대략 이러하다.
월미산을 다녀온 뒤엔 산기슭에 있는 한국 이민사 박물관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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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수교 이래로 단군의 후손들의 첫 이민이라 할 수 있는 1900년대 초의 하와이 이민, 멕시코-쿠바 이민 등.. 가끔 TV 다큐멘터리에서나 봤을 법한 근현대사 이야기들을 시기와 지역별로 일목요연하게 접할 수 있어서 아주 유익했다. 부산에서 봤던 '부산 근대 역사관'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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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19:31 2018/08/01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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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여행기: PART 1 (2018/7/22)

본인은 재작년과 작년(2017) 여름에 강원도를 다녀왔다.
재작년에는 영동 고속도로 이북으로 안보 관광 위주로, 작년에 그 이남으로 철도 답사 위주로 나눠서 바다와 산을 즐기며 힐링 잘 하고 왔다.

그 뒤 본인은 올해의 하계휴가 때는 인천을 다녀왔다. 올해의 피서 장소는 작년 말 겨울에 미리 정했으며, 심지어 내년 여름에 갈 곳도 정해 놨다.
비록 바다의 퀄리티만 따지자면 황해가 동해보다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반도에서 내륙에 제일 깊숙이 붙어 있고 서울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바닷가에 한 번쯤 가 보는 것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인천 시내 관광도 계획했기 때문이다.
본인은 반공 우파 시민으로서 아직 맥아더 장군 동상 구경을 못 해 봤다. 인천 상륙 작전 현장은 강원도 첩첩산중 오지에 있는 어지간한 안보 박물관이나 전적비 이상으로 역사 교육에 유익할 것이다.
강원도의 동부 전선 고지전은 최소한 1951년과 그 이후에 벌어진 전투인 반면, 인천 상륙 작전은 개전 초기인 1950년 9월에 벌어진 사건이니 시기가 서로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다.

이런 여러 정황을 감안하여, 본인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광과 물놀이를 위해서 영종도를, 그것도 대중교통 대신 자차를 몰고 방문하게 되었다.
원래는 시기를 지금 7월 말 내지 8월 초쯤으로 생각했지만, 지난 7월 중· 하순이 날씨가 어떠했던가? 1994년을 능가하는 살인적인 무더위가 전국을 강타했던지라, 결국 시기를 좀 더 앞당겨서 휴가를 떠났다. 일요일 교회 예배를 마친 뒤 오후부터 화요일까지로 일정을 잡았다.

1. 첫째 날: 비행기 촬영과 저녁 물놀이, 해변에서 외박

이번 휴가의 첫 목적지는 인천 공항 전망대였다. 하지만 전망대 자체는 너무 일찍(무려 오후 4시!) 문을 닫아서 운영하지 않는 상태였으며, 언덕도 그렇게 막 높지는 않았다. 그래서 김포 공항으로 치면 오쇠 삼거리 정도에 해당하는 공항 남쪽 착륙 경로를 추가로 찾아가서 거기서도 저공 비행 착륙 중인 비행기들을 근접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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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가는 길에 공항 고속도로에서 원없이 밟고 싶었지만 제대로 그러지 못했다. 과속 단속 카메라가 악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많았던 데다(구간 단속 포함), 1차로의 저속 차량까지 피하다 보니 끽해야 최대 140km/h 남짓밖에는 밟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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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는 대한 항공 로고가, 뒤에는 스카이팀 로고가 그려져 있는 여객기이다. 기종은 보잉 777.
이게 본인이 찍은 비행기 사진 중에 비행기가 제일 크게 잘 나온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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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었는데, 여객기들은 날개 아래에 마치 자동차로 치면 번호판처럼 무선 통신 호출 부호가 그려져 있는가 보다. HL 7783, HL 8067처럼 말이다.
비행기가 아예 땅에 있거나 반대로 너무 높게 떠 버리면 날개 아래를 볼 수가 없을 텐데, 착륙을 앞두고 저공 비행 중인 모습을 가까이서 관찰한 덕분에 이런 것도 볼 수 있었다.

공항 근처에서 비행기 출사를 그럭저럭 한 뒤, 이제 공항 남서쪽의 용유도 구간으로 들어갔다.
영종도와 용유도의 분위기 차이는 마치 제주도 북부 시내와 남부의 서귀포시, 그리고 경부 고속도로 동쪽의 분당과 서쪽의 산기슭 주택가들 사이의 차이와 비슷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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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마주친 마시안과 용유 해수욕장은, 그 당시 시간대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6시~7시쯤) 온통 갯벌밖에 없었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을왕리 해수욕장은 입구부터가 사람과 차들로 북적대고 온갖 민박과 식당이 들어서 있어서 제대로 돌아가는 중인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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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차를 세우자마자 바닷물에 들어가서 30분 정도 놀았다. 이제 좀 무더위를 날려 버리고 살 것 같았다. "해수욕도 식후경"이 아니라, 반대로 해수욕부터 한 뒤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물회 냠냠..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밤 9시 무렵이었다. 이제 모래밭에 텐트를 치고 안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여기는 동해가 아니라 황해이고, 더구나 썰물이어서 그런지 파도와 바람이 없다시피했다. 바다가 아니라 그냥 커다란 호수에 온 것 같았다. 파도가 역동적으로 휘몰아치는 곳을 원한다면 멀어도 동해로 가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도 물은 그렇게 더럽지도 미지근하지도 않고 충분히 해수욕을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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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과 새벽에도 막 시원한 건 아니어서 텐트 안에서는 이불 없이 옷통도 벗고 잤다. 뭐 그래도 열대야에 시달리는 서울 시내보다는 여기가 더 시원했다. 바다에 또 뛰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텐트 안을 바닷물과 모래로 더럽히고 싶지는 않으니 여기서 제동이 걸렸다.
밤에는 주변에서 온통 폭죽을 터뜨려서 시끄러웠다. 하지만 본인은 워낙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는 데 지장이 없었다.

2. 둘째 날: 한낮 물놀이, 장봉도

새벽 5시 반쯤 눈을 뜨니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한밤중엔 물이 들어오는 것 같았는데 이때는 다시 물이 빠져 있었다.
간밤에 텐트 안에서 컴퓨터 작업(..)을 실컷 했기 때문에 아침에는 배터리가 남아 있지 않았으며, 8시 무렵부터는 이미 햇볕의 열기가 느껴지면서 텐트 안에서 지내기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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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할 것이 없으니 이때부터 오전 내내 3시간이 넘게 물놀이를 즐겼다. 평일 아침이어서 그런지 어제 저녁보다는 바다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빠져나갔던 물도 다시 들어오고 있었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밀물과 썰물은 마치 교류 전기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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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 중일 때는 물이 차가운 것과 별개로 폭염 자체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물 밖으로 나오니 차와 폰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져 있고, 신체도 물기가 마르자마자 곧장 따가운 뙤약볕이 느껴졌다.
그만큼 바닷물이 지금까지 더위를 잊게 하는 데 혁혁한 기여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물은 더위는 막아도 자외선을 막아 주지는 않는다. =_=;;; 옷과 신발이 막아 주는 것은 물과 정반대이다.
덕분에 얼굴과 팔은 자외선 차단제를 발랐음에도 불구하고 더 검어졌으며(tanning), 아예 무방비이던 발등과 목덜미 등의 노출 부위는 벌겋게 타서(sunburn..) 내가 샌달을 신었고 U자형으로 파인 셔츠를 입었다는 것을 표시해 주었다. =_=;;

12시가 넘어서야 아쉬움을 뒤로 하고 텐트를 걷고 짐을 쌌다. 그리고 근처 카페에 들러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2시간 남짓 폰과 컴퓨터를 충전하고, 물을 보충하고 옷 정리 등 여러 작업을 했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개발 작업도 했다. 물놀이를 오래 해서 그런지 슬슬 피곤하고 졸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후에는 차를 몰고 영종· 용유도의 북부를 돌아다니면서 어제와는 달리 이륙하는 비행기들을 구경했다. 그 뒤 삼목 선착장으로 가서 장봉도로 가는 카페리를 탔다(신도 경유). 여기는 인천 공항을 만드느라 간척을 하기 전에는 삼목도라는 또 다른 섬이었다고 한다.
영종도 근처의 신도는 아주 가깝기 때문에 배 탄 지 10분이면 도착하고, 거기를 거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장봉도까지는 삼목에서 총 3~40분이 걸린다. 차를 실을 수도 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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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바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까 이제 좀 해수욕장에서는 경험할 수 없던 바다 바람이 느껴졌다.
배 안은 시원하고 쾌적하고 콘센트도 쓸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밤에 숙소를 따로 안 잡으니 다른 건 몰라도 폰과 노트북의 충전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전적으로 식당과 카페에서만 보급을 받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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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도에서는 주변의 바위섬과 해변을 구경했으며, 오늘의 특식 겸 유일한 단백질 섭취 명목으로 2~3인분 n만원짜리 매운탕을 혼자서 다 먹어 치웠다.
여기도 해수욕장(옹암)이 있다. 영종· 용유도보다 더 깊숙한 오지로 갔으니 더 한산하고 더 맑은 해변을 구경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이 시간대엔 갯벌만 펼쳐져 있고 제대로 물놀이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어서 허탕 쳤다. 뭐, 어차피 본인 역시 여벌옷 등 물놀이 채비를 하지 않은 채로(나머지 짐은 차에다 두고) 배를 타 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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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8/07/30 08:36 2018/07/3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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