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에서의 관광 일정을 마친 뒤, 이제 평화의 댐을 보러 화천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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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다와 산뿐만 아니라 계곡과 강,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이것대로 또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물에 들어가서 발이라도 담그고 나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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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마어마한 높이 좀 보소.
평화의 댐은 잘 알다시피 5공 시절에 다소 불순하고 비현실적인 동기 하에 만들어졌다. 하다못해 다목적 댐도 아니고..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고 보니, 훗날 북한이 진짜로 예고 없이 수공을 퍼부었을 때 물을 제어해서 재앙을 예방하는 역할을 그럭저럭 수행하긴 했다.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듯이 "어쨌든 결과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처럼 된 셈이다.

사실, 4대강도 그렇고 우리나라처럼 계절 변덕이 심한 나라에서 치수와 관련된 토목 공사 투자가 무의미한 뻘짓인 경우는 별로 없었다. 불볕더위와 가뭄이 조금만 계속돼도 옛날엔 제한급수에 온갖 난리 호들갑을 떨었으며, 반대로 태풍이나 홍수가 한번 났다 하면 TV에서는 전국적으로 수재의연금 성금 모집하던 게 불과 20여 년 전의 관행이었다. 요즘은 지구 온난화다 뭐다 하면서 기상 이변이 예전보다 더 심하면 심해졌지 날씨가 결코 온순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같은 난리 호들갑이 왜, 무엇 덕분에 쏙 들어갈 수 있었겠는지를 잘 생각해 보자.

내가 방문하던 당시에도 평화의 댐은 또 무슨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서 댐 위로 지나가 볼 수는 없었고, 댐 주변에서 댐과 공원의 사진만을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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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공원에는 온갖 공격 무기들의 모형이 전시돼 있는데.. 예술 작품을 표방하다 보니 도색은 저렇게 형형색색으로 돼 있다.
평화의 댐 자체는 민통선에 있지 않다. 하지만 근처의 두타연 계곡은 민통선 안이라고 한다. 여기를 들어가려면 또 다른 장소에서 출입증을 끊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검문소에서 즉각 신분증만 까면 되는지 난 잘 모르겠다.

전국의 어느 민통선이든 자가용을 이용한 출입 허가를 받은 외지인은

  1. 받은 임시 출입증을 차 앞유리에 잘 보이게 노출시킬 것.
  2. 이런 데서 교통사고라도 나면 피차 왕창 골치 아파지니 절대적으로 안전 운전할 것.
  3. 목적지가 아닌 길가에 무단으로 주· 정차를 하지 말고 길을 빨리 통과할 것.
  4. 블랙박스를 끄고 다닐 것. (군사 시설을 무단 촬영하지 말 것)
  5. 민간인이 전투복을 입고 다니지 말 것.
  6.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모든 용무를 마치고 퇴장할 것.

이라는 수칙이 존재한다. 도로 통과형이 아닌 일반적인 민통선 구간들은 반드시 들어갔던 초소로 나오는 게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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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목적지가 있는 홍천으로 가기 위해 경로를 남쪽으로 바꿨다. 양구, 화천 다음으로 계속 서쪽으로 가면 철원이 나온다. 하지만 철원은 예전에 간 적이 있으며, 어차피 우리나라의 최북단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서는 춘천-홍천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남행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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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어느 쉼터를 발견했다. 이 사진엔 담기지 않았지만 뒤에는 지붕 달린 정자도 있다. 저 벤치에 앉아서 노트북 PC를 들여다보는 인증샷도 남기고 싶었으나.. 본인은 싱글 솔로이다 보니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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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화천 수력 발전소를 발견했다. 역시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여기 근처에는 군부대 포병 훈련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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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계획에는 없었는데, '파로호' 안보 전시관이라는 게 있어서 여기도 잠시 들렀다. 파로호란 근처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북한강 상류가 화천댐에 가로막히고 고여서 호수를 형성한 것이다.
여기 일대의 댐과 수력 발전소는 일제 강점기 말기(1944년)에 건설되었으며, 6· 25 전쟁 중이던 1951년 4~5월 사이에는 북한군의 수공에 맞서 이 댐을 점령하거나 파괴하기 위해서 국군· UN군과 북한· 중공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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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의 풍경은 이 사진 한 장만 남겼다.
이렇게 화천을 지나고 드디어 춘천에 진입했다. 춘천, 그리고 더 남쪽의 홍천에서는 군사 훈련 중인 탱크들이 줄지어 도로를 달리는 걸 유난히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저속으로 일종의 떼빙(대열운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 자동차들의 통행이 좀 지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반적인 군용차와는 달리 탱크는 엔진 소리가 뭐랄까.. 유별나게 시끄럽고 더 기괴했다. 여느 중장비의 엔진 소리와도 달랐다. 차마 말과 글로 묘사할 수가 없다. 게다가 탱크는 차체의 폭도 여느 자동차보다 더욱 크기 때문에 좁은 도로에서 교행이나 추월하기가 더욱 난감했다.

그래도 저것도 다 나라 지키려고 저러는 건데 신기한 구경 하나 하는 셈치고 관대히 넘어갔다. 6· 25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에 우리나라는 저런 탱크가 아예 한 대도 없었다. 그 반면 북한군은 242대 보유. 이 숫자 통계는 초딩 시절부터 배워서 알고 있었다.
안전 운전에 지장을 줄 정도로 졸음이 밀려 와서 춘천 외곽에서는 잠시 차를 세워서 20분 남짓 쪽잠을 잔 뒤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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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의 공식 명칭은 '강 재구 소령 추모 공원'이고 입구 주변이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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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기철 목사 하면 '일사각오'가 떠오르듯 강 재구 소령은 그야말로 '희생정신', '살신성인'의 아이콘이다.
1960년대에 한국군이라는 게 조직 분위기가 지금 군대보다 결코 더 좋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못살던 시절이었고 북한의 무력 도발 위협은 임팩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러면 군대를 열악한 자원이라도 최대한 잘 활용해서 나라를 잘 지키기라도 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합리적인 시스템 대신, 까라면 까 식의 미개한 일본군 관행에 사람 잡는 구타· 똥군기가 만연했다. 그래 놓고는 "나 간부다" 편법 한 마디에 초소가 숭숭 뚫리기도 했으니 군대가 제 역할 제대로 못 했다.

그리고.. 지금이니까 연간 군대 내 전체 자살자· 사고 사망자가 두 자리 수이지 그때는 세 자리 수를 가뿐히 넘어서곤 했다. 옛날 군대가 지금 군대보다 좋은 건 딱 하나, 아직 출산율 높고 인구가 많던 시절이다 보니 조금만 몸이 안 좋으면 방위· 면제로 빠지는 길도 지금보다야 훨씬 더 꽤 관대하게 열려 있었다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부하가 실수로 병사들 한가운데로 떨어뜨린 수류탄을 수습하려고, 그것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상관이라는 사람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걸 온몸으로 웅크려 덮어서 막은 뒤 산화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건 정말 전군의 사기를 진적시키는 미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강 소령이 소속되었던 부대는 북한과 대치해 있는 평범한 전방 부대는 아니고, 베트남 파병을 갈 예정이던 부대였다. 박통이 외화벌이와 국력 신장을 위해서 선진국 군인에 비해 저렴한 인건비와 높은 가성비를 메리트로 내세우며 베트남전 파병을 결의했다. 그러자 맨주먹과 근성밖에 가진 게 없고,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것보다야 더 짧고 굵게 돈을 많이 벌어 와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 한 장정들이 여기에 많이 지원한.. 그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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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재구 소령 추모비와 추모탑이 이렇게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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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은 아담한 크기이고 강 소령의 흉상, 초상화, 유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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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소령은 나이 30도 못 되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 대신 그야말로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영예를 얻었다. 고인의 모교에서는 육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고등학교까지 다 고인을 기리고 있고, 육군 부대에도 '재구 대대'라는 이름의 대대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모델격의 인물을 마음에 두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육사 32기 출신의 엘리트 군인으로 대장까지 역임한 정 승조 장군(1976년 임관, 2013년 예편)이 있는데, 이분이 1976년 당시에 육사를 수석 졸업하고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을 때에도 "강 재구 소령의 전기를 읽고 큰 감화를 받아서 육사를 갈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밝힌 바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 육사는 학비 걱정 없지, 진로도 안정적이지, 가히 오늘날의 SKY급 대학에 맞먹는 위상과 입결을 자랑했다는 점도 생각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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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세로쓰기여서 읽기가 어렵다. 강 소령 역시 처음에는 수류탄을 다른 데로 멀리 던져 버리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몸으로 폭발을 막는 방법을 선택하게 됐다.

이분에 대해서 상훈 기록을 찾아보면, 어디서는 태극 무공 훈장이라는 최고 등급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고 다른 어디서는 4등 공로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는데.. 무슨 성경의 모순 구절을 보는 것 같다.
이것도 성경의 모순 구절 풀듯이 문제를 풀면 된다. 본문 텍스트에 나와 있듯, 정답은 '둘 다 받았다'이다. 더 높은 훈장은 나중에 추가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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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산화하던 당시에 입었던 전투복은 수류탄 파편을 맞아서 저렇게 너덜너덜해져 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다른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수류탄 폭발로 인해 고인은 사지가 절단될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고, 그래도 폭발과 함께 즉사한 건 아니고 잠시 살아 있었다고 한다.

수류탄을 실수로 떨어뜨린 병사의 실명(박 해천 이병)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저 병사는 비록 무슨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평생 얼마나 큰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채 살았을지 모르겠다. =_=;; 지금은 그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나기도 했고, 저분의 근황이 어떤지는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게 없다.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버린 이상, 나라면 은폐(?)를 위해 개명부터 했을 것 같은데, 그 시절은 지금처럼 쉽게 개명이 가능한 때도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_-;;

실제로 생존 무장공비 출신인 김 신조 씨는 얼굴이 알려진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름까지 교과서에 대문짝만 하게 실려서 그 당시 남조선 군필자들의 웬쑤가 됐다. "니놈 때문에 내가 군대 전역도 늦어지고 말년에도 얼마나 조뺑이 치고 고생했는지 알아?" 야사에 따르면 길거리에서 어느 예비역 아저씨에게 뒤통수를 까이기까지 했다고.. 결국 그는 부담감을 견디다 못해 실제로 '김 재현'으로 개명까지 했다. 최소한 법적으로는 김 신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근황이 더 검색되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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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 와서 새롭게 처음 알게 된 사실은 강 재구 소령도 생전에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까지 인터넷으로만 봐 오던 곳들을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잘 마쳤다.
날씨가 여전히 덥고 물과 전기가 부족하고, 또 배고프고 피곤하기도 해서 여기서 더 놀지는 않았다. 조양 IC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집에 돌아갔다.

이틀 동안 1분 1초가 버릴 게 없는 즐거운 여행을 했다. 산과 계곡과 바다를 모두 구경했으며 고속도로부터 엔진 브레이크 비탈길까지 골고루 750km에 달하는 거리를 운전했다. 이 정도로 욕구를 해소했으니, 당분간은 또 서울을 빠져나간다거나 차 끌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 안 들 것 같다. 시골은 차량 운행이 뜸하고 어디든지 주차 걱정 없이 차를 세울 수 있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강원도는 꽤 넓다. 내년 여름에는 정선, 영월, 태백, 동해처럼 태백선 철도와도 인접해 있는 강원도의 '남부'를 돌아다녀 볼 예정이다. 영역이 공교롭게도 강릉 이남이냐 이북이냐로 나뉘는 것 같다. 이번에 다닌 곳은 온통 북부이니 말이다.
또한 내년엔 이제 병특 마친 직후에 만들었던 여권이 유효 기간이 1년 남짓밖에 안 남는데, 아직도 여권엔 사증란이 많이 남아 있다. 어딜 가든 외국 여행도 한번 다녀오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23 08:31 2016/09/2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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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y 2: 내륙 산악 드라이빙

아침에 눈을 뜨니 숙소 주변은 안개가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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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다를 뒤로 하고 양구로 가기 위해 꼬불꼬불 고갯길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둘째 날엔 하루 종일 이런 길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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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위성 사진 지도를 보면, 동북부는 온통 초록색 삼림으로 뒤덮였는데 양구 일대만 사람 머리로 치면 땜통처럼 동그랗게 패여 있다. 양구는 대구처럼 일종의 분지 지형이며 6· 25 전쟁 당시에 외국인 종군기자는 우묵한 사발(punch bowl)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한글로는 장모음의 표기가 생략되어 '펀치볼'이라고 적는데, '볼'이라고 해서 ball인 건 아니다. ball은 단모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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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옛날 서체가 참 정겹다. 옛날에 우리나라는 각종 표지판과 간판, 자막에 이런 어설픈 둥근고딕 형태의 서체를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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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한번 탔다가 다시 내려오니 '사발의 안'에 자리잡은 양구 시내가 나타났다.
을지 전망대와 제4 땅굴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양구 통일관에 가서 입장료를 내고 민통선 출입 신고를 하면 된다. 절차가 고성 통일 전망대를 관람하는 것과 비슷하다. 단, 오후에 늦게 도착해서 시간이 충분치 않으면 둘 중 하나는 못 볼 수도 있다.
양구 통일관 자체도 북한의 실상 같은 안보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양 옆에는 각종 전적비· 충혼탑과 탱크가 놓여 있고 또 독특한 외형을 한 '전쟁 기념관'도 있다. 나름 볼것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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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화해와 협력을 통한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 이 좁아 터진 땅덩어리에 1국가 2체제가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에 반해 북괴는 여전히 자기 체제의 유지를 위해 주체사상과 남조선 혁명, 공산화 통일 구도를 접은 적이 없다.
하지만 북괴의 마귀적인 현 체제를 갈아엎지 않으면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수 없으며, 그럼 남북은 통일을 하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안 하는 것만도 못하다. 그러니 현실은 둘 중 하나가 물리적으로 없어져야만 통일이 될 것이고 남한 주도의 통일은 사실상 무력 흡수 형태가 될 공산이 크다.

그걸 감당할 리스크가 없다면? 그냥 영구분단, 고립, 봉쇄이라도 제대로 해서 북한이 스스로 붕괴라도 하게 내버려 둬야지.
매정· 냉정하게 들리더라도 저 북괴한테 평화를 구걸하며 계속 퍼주는 것보다는 저거야말로 훨씬 올바르고 더 인간적인 조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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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전쟁 기념관은 전쟁터를 형상화한 기발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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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증을 받은 뒤엔 양구 통일관의 북쪽(12시 방향)으로 간다. 로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 3시를 선택하면 을지 전망대로 가며, 계속 12시 방향으로 직진하면 땅굴로 갈 수 있다. 난 먼저 을지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도 북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먼저 3시 방향으로 나 있는 이유는.. 산을 오르는 우회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길이의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을지 전망대는 해발 고도가 무려 1000미터가 넘고 국군 GOP가 코앞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높이를 무시하고 보면 전망대와 땅굴은 직선 거리가 상당히 가까우며 길이 서로 연결돼 있다. 하지만 보안 때문인지 안전 때문인지는 몰라도 민통선 안에서 이 두 장소를 곧장 왕래할 수는 없었다. 전망대를 본 뒤엔 다시 민통선 밖으로 나와서 그 로터리까지 갔다가 그야말로 수십 km를 뺑이를 치면서 땅굴을 보러 가야 했다. 동선이 아쉽다.

뭐 아무튼..
앞서 얘기했듯이 을지 전망대는 본격 군사 시설이기 때문에 전망대 건물 자체와 양구 시내 방면으로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북한 쪽은 촬영이 절대 금지.
하긴, 파주의 도라 전망대는 금이 그어져 있어서 카메라질은 금 밖에서 어깨 너머로만 할 수 있던데, 여기는 통제가 더 심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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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 전망대에서는 나무로 뒤덮인 빽빽한 산과 숲, 그리고 끝없이 둘러진 철조망, 띄엄띄엄 설치된 우리나라와 북한의 GOP를 볼 수 있었다. 도라 전망대는 평지, 철원의 평화 전망대는 초원, 고성의 통일 전망대는 바다인데 여기는 그냥 산이다.

믿어지지 않는 얘기이지만 가이드 아가씨의 설명에 따르면, 옛날에는 북한이 남한 병사들을 꾀어 내려고 자기네 여군들을 근처의 계곡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대놓고 노출시켰다고 한다. 이거 무슨 선녀와 나무꾼 얘기도 아니고..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미인계엔 미인계로 대응했는데, 1992년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를 일부러 을지 전망대 GOP 근처에서 했다고 한다. 이 1992년도 대회에서 진을 차지한 우승자가 바로 이 승연 씨. 하지만 이분은 각종 부적절한 언행들로 인해 지금은 몸값이 많~이 하락하고 망가진 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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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망대와는 달리 이 전망대는 응당 내비 지도에 나와 있지 않다.
산을 내려갈 때는 2단 고정 엔진 브레이크를 단단히 걸면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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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인 제4땅굴 광장에 도착했다. 얘는 서부가 아닌 동부 전선에서 최초이자 현재까지 최후로 발견된 땅굴이다.
과거의 제1과 제2 땅굴은 지상에서의 이상 징후를 토대로 발견된 반면, 제3과 제4는 귀순자의 증언을 토대로 발견되었다. 다만, 제4 땅굴을 제보한 귀순자는 우리나라 군 내부에까지 드나들었다가 나중에 또 중국에서 잠적해 버렸기 때문에 쟤 혹시 이중간첩이 아닌가, 제4 땅굴은 그저 역정보 떡밥 유포일 뿐인가 하는 불안한 음모론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귀순자가 얘기하는 장소 일대에서 시추공을 이곳 저곳 내리꽂으며 수백 번이나 허탕을 친 뒤에야 땅속의 빈 공간을 발견했다. 우리나라가 땅굴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한 때는 1989년 12월 24일이다. 그 뒤 우리 쪽에서 역갱도를 파기 시작해서 북한의 땅굴과 실제로 관통에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정도 뒤인 1990년 3월 3일이다.

제2와 제3 땅굴은 민통선 검문소를 통과한 뒤에도 북쪽으로 엄청 깊숙히 들어간 곳에 있지만, 이 제4 땅굴은 가는 경로의 대부분이 의외로 민통선으로 잠겨 있지 않았다. 단지, 땅굴 광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무슨 군부대 입구처럼 막혀 있었고, 여기 안으로 들어가려면 아까 양구 통일관에서 발급받은 출입증을 제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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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땅굴은 자가용을 끌고 개인 단위로 찾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가는 길목에 이런 표지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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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 광장의 중앙에는 이런 멸공탑이 세워져 있고, 땅굴 발견 당시에 육군 참모총장이던 이 진삼 대장이 작성했다는 '건립취지문'이 새겨져 있다.
저 사람은.. 리즈 시절에 자기가 북파공작원 신분으로 휴전선을 몰래 넘어가서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북한군 수십 명을 사살했다는 이빨 무용담을 늘어놓아 왔으나... 그게 사실인지 주작인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는 군인 신분을 벗어난 정치질과 똥별질 때문에 안 좋은 평판이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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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견 헌트 소위의 무덤과 동상을 드디어 현장에서 실물로 보게 됐다. 제1과 제2 땅굴을 저지하던 시절엔 우리 군인들이 북한군의 총격을 당하거나 지뢰를 밟아서 죽거나 다치곤 했다. 제3 땅굴이 발견됐을 때는 다행히 그런 얘기가 없었음.
어쨌든, 과거 경험을 토대로 인명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4 땅굴을 정찰할 때는.. 화약 냄새를 맡을 줄 아는 군견을 처음으로 투입하여 먼저 보내 봤다.

그리고 이 전략은 매우 현명했음이 입증되었다. 저 군견은 땅굴 안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고 혼자 앞으로 뛰어가다가 북한군이 설치한 지뢰를 밟고 폭사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죽을 걸 군견이 대신 죽어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값진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 군견은 사후에 이렇게 떠받들여지게 되었고, 소위라는 장교 계급과 인헌 무공 훈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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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의 입구는 이렇게 생겼다.
제2 땅굴은 그냥 전구간 걸어다녀야 한다.
제3 땅굴은 북한군이 판 땅굴 내부에서는 걸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판 역갱도는 걸어서 오르내리는 갱도도 있고 전동차로 오르내리는 갱도도 있다. 전동차를 타려면 땅굴 입장료에다 전동차 이용료를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그 반면 제4 땅굴은 역갱도에서는 걸어야 하고 땅굴 내부는 전동차로 다닌다. 터널의 단면적이 너무 작아서 사람이 걸어 다니려면 어정쩡한 오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그마한 전동차를 타고 쪼그리고 앉은 채로 이동해야 한다. 안 그래도 북한은 가평 남이섬과 임진각 공원에 있는 꼬마열차를 연상케 하는 협궤 레일을 제4 땅굴 내부에 부설해 놓기도 했었다.

물론 제2와 제3 땅굴도 공간이 충분히 큼직한 건 아니다. 성인 남자가 간신히 서서 걸을 수 있는 정도이며, 울퉁불퉁한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기 쉽기 때문에 안전모는 반드시 쓰고 다녀야 한다.

제4 땅굴은 길지만 민간인에게 공개된 구간은 겨우 100여 m 남짓에 불과하며, 생각했던 것만치 거창하게 볼 건 없었다. 지하로도 민통선 영역까지만 가지, 남방한계선을 넘어 DMZ까지 가지는 않는다. 위도를 비교해 보면 제4 땅굴의 입구는 을지 전망대보다는 훨씬 남쪽에 있다(몇백 m 정도 차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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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간단한 안보 전시관이 있어서 6· 25 전쟁 때 양구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또한 제4 땅굴의 특징도 잘 설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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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땅굴 역시 내비게이션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4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20 19:32 2016/09/2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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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관광을 마친 뒤엔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동부의 최북단을 구경하기 위해 고성으로 향했다. 강릉 이북으로는 100km 가까이나 더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이니 서부의 북방 한계와는 차이가 너무 크다. (참고로 정동진이 서울의 도봉산-장암뻘과 비슷한 위도이고, 양양 국제 공항이 있는 곳이 38선과 거의 같은 위도이다. 하지만 동부는 그 위로도 속초에 고성까지 계속 북상 가능하다.)

양양까지는 동해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갔다. 길 곧고 차가 거의 없는 덕분에 시속 140~150까지도 밟을 수 있었다. 하조대 IC 이북부터는 고속도로도 없으니 거기부터는 얄짤없이 국도 7호선으로 콜. 항구와 해수욕장을 나란히 끼고 달릴 때는 당장 차를 세우고 물에 들어가고 싶었다.

참고로, 내가 방문했을 때 기준으로 여기 국도 7호선은 옛 도로를 새 도로로 교체· 개량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영동 고속도로는 올림픽 준비 때문이고 여기는 그냥 너무 후져서 갈아엎는 듯하다. 어디는 내비의 도로 선형과 실제 도로 선형이 전혀 일치하지 않아서 화진포로 들어갈 때도 한참을 헤맸다. 게다가 여기는 너무 북쪽이기 때문에 인터넷 지도들도 항공 사진이나 거리뷰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아서 길을 더욱 익히기 힘들다는 걸 감안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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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1시간 반이 넘게 달려서 드디어 화진포에 도착했다. 바다, 그것도 해수욕장 근처에 저렇게 호수가 있다니? 거기에다 숲과 나무가 드리워져 있으니 경치가 강릉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옛 정치인들이 교통도 왕창 불편한데 굳이 여기에까지 와서 별장을 괜히 만든 게 아니었겠다 싶었다. (뭐, 나중에 5공 시절엔 전땅크 아저씨가 청남대라는 대통령 별장을 청주시 외곽에 또 만들기도 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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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 일성 별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화진포의 성'부터 찾아갔다. 숲 속 언덕에 지어진 저 위치부터가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화진포의 성은 그 자체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지어졌다. 그러나 해방 후에 여기 일대가 잠시 북한 치하로 들어가고, 김 일성 일가가 여기에 와서 놀았던 기록과 사진이 전해지기 때문에 김 일성 별장이라는 이름도 덤으로 붙었다. 북한 정권이 저걸 직접 건설한 건 아니다. 지금 건물은 원래 건물의 모양과 구조를 본따서 다시 지어진 거라고 한다.

안에는 옛날 응접실의 복원 모형이 있고, 옥상에는 전망대가 있다. 아, (1) 이 화진포의 성과 (2) 나중에 소개할 이 승만 별장, 그리고 여기에서 별도로 소개하지는 않은 (3) 화진포 생태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화진포 유원지 통합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 이것도 한 곳에서 하나만 사면 당일 동안 세 곳에서 모두 통용 가능하기 때문에 강릉의 통일 공원 티켓과 역할이 비슷하다. 다들 걸어서 가기에는 몇백 m 정도 거리의 압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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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의 성 전망대에서 해수욕장과 호수를 내려다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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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화진포의 성 근처의 평지에는 '이 기붕 부통령의 별장'도 있다. 이건 규모도 작으며 티켓 없이 누구나 간단히 들어갔다가 보고 나올 수 있다. 주변엔 잔디밭과 나무, 벤치가 잘 조성돼 있다. 얘 역시 의외로 건물 자체는 일제 강점기 때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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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만 대통령 별장은 해수욕장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하지만 이정표가 잘 갖춰져 있으니 현장에서 각 별장들을 찾아가는 건 별 어려움이 없다. 이 별장은 6· 25 전쟁이 끝나고 남한이 고성군 일대를 확실하게 수복한 뒤인 1950년대에 새로 만들어졌다.
맑은 동해 바다에다 호수에 이런 유적지까지 곁들어져 있다니 화진포는 참 특별한 해수욕장인 것 같다.

화진포에서 5km 정도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우리나라 최북단 주유소가 아닌가 생각되는 '통일전망대 주유소'가 나오고, 길 건너편엔 통일 전망대 출입 신고소가 나온다. 여기에 들러서 대표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통일 전망대 입장료를 내면 민통선 출입증이 나온다.

출입증을 받은 뒤엔 지금까지 지나왔던 좁고 꼬불꼬불한 길로 도로 나오는 게 아니라, 4차선+중앙분리대가 갖춰진 국도 7호선 새 도로로 빠져나가서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민통선 진입을 위해서 누구 통제를 받는다거나, 일정 시각 간격으로 다같이 출발한다거나 하는 건 없음. 개인 행동 가능하다.

민통선으로 들어가니, 내륙 방면으로는 서쪽 경기도 파주의 도라산 역처럼 이곳 역시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제진 역과 금강산 관광 관련(지금은 파토 난) 출입경 사무소 등이 있었다. 하지만 통일 전망대로 가려면 오른쪽 해변 방면으로 가야 했다.
파주는 서울과 가깝고 워낙 관광객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개인이 자차를 직접 끌고 민통선에 들어가는 건 없다. 그 대신 버스 타고 다니는 패키지 관광이 발달해 있다. 하지만 여기는 오지여서 그런지 관광이 개인 방문 중심으로 운영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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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망대의 주차장 앞마당에 도달하니 날 맞이한 것은 다름아닌 3010호 디젤 기관차를 개조해서 만든 카페였다. 철원 민통선 안의 월정리 역 근처에는 4001호 디젤 기관차가 있더니 이건 또 웬 떡이냐? 나 이런 거 완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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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마당에서 내려 언덕을 또 오르면 드디어 통일 전망대 건물에 도착한다.
여기는 듣자하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망대 중에 가장 먼저 생겨서 이름도 굉장히 흔한 보통명사스러운 '통일' 전망대라고 한다. 또한 전국의 전망대들 중 일단은 가장 북쪽에 있다. '일단은'이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는 잠시 후에 다시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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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것이 통일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북쪽의 풍경이다. 바다에, 모래사장에, 산에, 동해선 철도까지..! 경치 한번 완전 죽인다.
관광지로 손색이 없는 해수욕장이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아무에게도 개방될 수 없는 장소로 봉인되었다는 게 안타깝다. 서부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날씨가 더 맑았으면 저 멀리 금강산까지 보였을 거라고 한다.

근처에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부처님과 성모님(?)에게 빌면서 남북 통일을 염원해 보라는 배려인지 하얀 종교 형상들이 있었고, 또 6· 25 전쟁 체험 전시관도 있었는데, 사진 첨부는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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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 화면 인증.
통일 전망대는 비록 민통선 안에 있지만 내비 지도에 표시돼 있으며, 게다가 전망대 내부에서도 "북쪽으로 사진 촬영 금지" 같은 제약과 통제가 전혀 없었다. 주변에 민감한 군사 시설이 없는지 분위기가 훨씬 덜 삼엄했다. 그 이유를 본인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통일 전망대는 지리적으로 굉장히 북쪽에 있으며 북한 영토를 볼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군사분계선과는 여전히 수 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전망대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접해 있는 전망대"는 아니다. 덜 위험하고 군에서 딱히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용도로 사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분위기가 널널했던 것이다. 여기 주변엔 단순 철조망 이상으로 GOP나 해안 경계 초소 같은 건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우리나라가 동쪽 해안은 극단적으로 많이 북진해서 땅을 수복한 덕분에 공간이 이렇게 많이 생겼다.

여기 말고 진짜 군사 시설로도 활용되는 '위험한' 전망대는 '금강산 전망대'라고 따로 있다. 일명 717 OP. 얘는 통일 전망대보다 더 내륙(서쪽)에 있고 위도도 훨씬 더 북쪽이어서 남방 한계선 철책이 훤히 보이고 말 그대로 금강산도 더 가까이 보인다. 그 앞의 북한 땅에 있는 '감호'라는 호수도 '통일'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금강산'에서는 보인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 차이점을 참고하시라. (저건 내가 찍은 거 아니고 출처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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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전망대는 개인이 '신고'만 한 뒤 불쑥 방문할 수 없으며, 단체가 군부대로부터 사전 '허락'을 받은 뒤에만 방문 가능하다고 한다. 사실, 본인이 나중에 방문한 을지 전망대도 한때는 이런 '단체+허가' 형태였으나, 비교적 최근에 제약이 완화된 것이다. 금강 전망대도 민간 개인 단위로 개방해 달라는 요구가 없지는 않으나, 금방 성사될 것 같지는 않다.

뭐, 본인은 이렇게 통일 전망대의 관람을 마쳤다. 근처에 DMZ 박물관도 있었지만 월요일에 찾아갔던 관계로 휴관이어서 방문하지 못했다.
일과 시간 동안 계획했던 관광 코스들은 답사가 모두 끝났다. 시각은 오후 3시 반 무렵이었다. 이제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면서 동해 북단에 있는 해수욕장들을 둘러봤다.

최북단의 해수욕장은 명파 해수욕장이다. 크기는 생각보다 아담하다. 그런데 피서철이 끝나고 해수욕장이 폐장한 뒤엔 여기는 철책이 둘러지고 민간인의 출입이 완전히 금지돼 있었다. 역시나... 그 아래의 해수욕장들도 그러했다.
그러니 철책이 없고 1년 내내 적어도 낮에는 출입 가능한 최북단 해수욕장은 화진포였다. 그래서 본인 역시 아까 관광을 했던 화진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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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바다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해수욕장이 폐장해 있었지만 날씨가 습하고 후덥지근했으며, 본인은 이미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기온과 수온은 물놀이를 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해변을 걷고 다리 정도는 바닷물에 담그는 관광객도 몇 명 있었다.
본인 역시 여기까지 왔는데 동해 바닷물을 적셔야겠다는 생각으로 물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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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모래사장의 경사가 서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몸을 때리는 파도가 굉장히 강했다.
안전요원도 없는 상태에서 뒤로(바다 쪽으로) 밀려가는 파도에 잘못 휩쓸리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여기서는 바닷가에서 몇 발짝밖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해변에서 거의 2~300미터 가까이 진행했던 지난번 서해 해수욕장과는 완전 비교된다.
그런데 거센 파도 때문에 해변엔 물이 온통 흙탕물이어서 동해 바다가 서해 바다보다 딱히 깨끗한지는 제대로 실감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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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북에게도 바다 구경을 시켜 주지 않으면 그건 맥북에 대한 실례이고.

이렇게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해수욕장 근처에는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더 남쪽의 거진항 근처의 마을로 갔다. 거기 식당에서 회 요리를 먹고 씻고 전자기기들을 충전했다.
완전히 밤이 된 뒤에는 해변 도로의 공터에다 차를 세운 뒤,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닷바람을 쐬면서 노숙과 차박을 했다. 돗자리를 깔고 담요를 덮고 손전등을 켜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3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18 08:31 2016/09/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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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파주, 2014년 철원 당일치기 여행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올해엔 본인은 아예 2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투어를 다녀왔다. 자료 리서치와 최적 경로 프로그래밍, 예산 편성, 운전, 관광 전부 1인 단독 플레이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돌아왔다. 여행의 자유가 있고 자동차가 있으면 얼마나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중에 신혼여행을 가도 이 정도의 감흥은 못 느낄 것 같다.;;

※ Day 1: 동해 바다 최북단

한밤중에 집을 나서서 제2중부 고속도로(37)와 영동 고속도로(50)를 달렸다. 강원도에 가까워지자 길이 젖어 있었으며 금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선이 안 보이고 와이퍼를 고속으로 가동해야 할 정도로 비가 오는 곳도 있었다.
거기에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도로 곳곳이 보수 공사 중이어서 운전을 더욱 조심해서 해야 했다. 갑자기 차선이 줄어들거나 도로 선형이 바뀌는 지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심야가 아니라 주말 낮이었으면 병목 때문에 길이 왕창 막혔을 것이다.

난 운전대를 잡는 동안은 어지간해서는 몸 컨디션과 시간대를 불문하고 거의 졸지 않는 편인데, 이번엔 비 오는 밤에 고속도로 운전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이 느껴졌다. 그래서 부득이 휴게소에 들러서 3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주변 경치 감상을 포기하면서까지 심야 운전을 강행한 이유는 도로 정체가 없을 때 서울을 빠져나가고 해가 뜨자마자 강원도에서 관광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첫 목적지인 이 승복 기념관에 도착했다. 고속도로 속사 IC와 그리 멀지 않고, 또 올림픽도 얼마 안 남았으니 특별히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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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나름 해발 700m에 달하는 대관령 고지대라고 한다. 주변의 산들엔 안개가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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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은 단순히 건물 한 채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동상, 묘소, 생가와 학교의 복원 모형 등 볼거리가 많았다. 정식 개장하기 전인 이른 시간이었지만(아침 7시 무렵) 친절하게도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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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포즈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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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한 일가족들이 이 언덕에 한데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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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두 사람이 한데 공유하고 표면이 짙은 초록색 형태인 옛날 나무 책상은.. 본인도 초딩 저학년 시절에 학교에서 실제로 사용한 적이 있다. 교실 바닥도 저렇게 목재여서 청소 시간엔 밀대로 닦는 게 아니라 아니라 왁스칠을 해야 했다.
그 밖에 생가 사진, 각종 기념비 사진, 그리고 밖에 뜬금없이 전시돼 있는 각종 탱크와 전투기 사진은 첨부를 생략하겠다. 이것 말고도 올려야 할 사진이 너무 많아서 말이다.

역사적으로 명백히 입증된 사건을 안 믿고 자작극설 같은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 왔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든가 난징 대학살, 그리고 아폴로 계획 달 착륙에 대해서 말이다. (종교의 영역으로 가면 예수님의 부활까지도..)
뭐, 같은 맥락으로 이 승복에 대해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조선일보의 주작이라고 뜬금없이 이의 제기를 한 불순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1990년대 말에 있었다.
이건 유족들의 강렬한 반발과 함께 주작이 아닌 팩트라고 최종 판결이 났다. 하지만 안 그래도 잊혀지고 동상이 철거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던 이 승복은 이미 완전히 확인사살을 당한 뒤였다.

쟤는 무슨 대단한 반공 영웅이 결코 아니다. 10살짜리 초딩이 무슨 정치를 알고 이념을 알았겠는가?
그저 학교에서 배운 대로 평범하고 순진하게.. 마치 "차조심 해라 / 낯선 사람을 무작정 믿고 따라가지 마라"를 실천하듯이 "공산당 나빠요 / 싫어요"를 시전한 죄밖에 없는데 빨갱이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1.21 사태 때는 김 신조라는 공비 딱 한 명만이 생포되었는데, 이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는 김 익풍이라는 사람이 생포되었고 훗날 완전히 전향했다. 그는 사건 당일로부터 무려 41년이 지난 2009년 12월에야 이 승복 기념관 관장의 제안으로 이 승복의 묘지를 참배하고, 유족들에게 공개적으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주작설에 대해서도 극구 부인했음은 물론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그때 이 승복의 가족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님..;;

이 승복 기념관의 관람을 마친 뒤 곧장 강릉으로 달려갔다. 해는 완전히 떴지만 중간에 비상등을 켜고 달려야 할 정도로 안개가 짙게 낀 구간도 있었다. 운전을 극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그래도 비는 더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하늘이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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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통일 공원이 있는 곳은 바다와 산, 영동선 철도가 나란히 지나니 바깥 경치가 아주 아름다웠다. 함정 전시관에서는 퇴역한 커다란 전함과 탈북용 어선, 그리고 강릉 무장공비 잠수함을 구경했는데 생각보다 볼 게 많았다. 예전에 평택 해군 기지를 견학한 적이 있어서 전함 내부의 풍경은 그럭저럭 익숙했다.

해군은 배가 그야말로 생활관 겸 전장이고 안 그래도 힘든 선원 생활이 군대와 결합하니 얼마나 힘들까 싶다. 그리고 배는 곧 기계덩어리이며, 모든 기계는 관리하는 인력을 필요로 하니 육군 보병보다야 더 기술지향적이다.
여기에는 '전북함'이라고 길이 119미터, 배수량이 3천 톤 정도 되는 구축함이 1999년에 퇴역한 후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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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옛날 골동품들.
난 25년쯤 전 초딩 시절에 컴퓨터 학원에서 GWBASIC을 배울 때, 정확하게 저 두 컴퓨터들의 실물을 구경하고 써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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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바다를 보며 찍은 사진이다. 방파제 같은 시설 주변에서 파도를 막으려고 이렇게 잔뜩 집어넣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테트라포드'라고 한다. 뾰족하게 만들어서 파력을 효과적으로 상쇄하기 위해 공이나 정육면체가 아니라 다리가 4개 달린 형태이다.

그런데 방파제에서 멀쩡한 길을 놔 두고 사람이 저기 위를 일부러 지나가는 건 바다의 낭만을 즐기는 것과는 억만 리 떨어진.. 거의 자살행위 급의 미친 짓이다. (☞ 더 자세한 설명)
십중팔구 발을 헛디디거나 미끄러져서 아래 틈새로 쏙 빠지기 쉬운데.. 몇 m 아래에 있는 단단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수 차례 부딪히면서 바닷물에 빠지기 때문에 매우 높은 확률로 중상 또는 사망이 보장된다.

물에 안 빠지고 목숨을 부지했더라도 혼자서 위로 다시 기어올라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며, 심지어 살려 달라는 외침 소리가 바깥까지 퍼져 나가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안 그래도 인적도 드문 곳인데 비명 소리도 파도 소리에 그냥 묻히기 때문이다. 익사하지 않더라도 테트라포드들 사이에 갇힌 채로 조용히 탈진해서 죽기 딱 좋다.
더구나 구조 신고가 접수됐다 하더라도 빠진 사람을 찾는 건 심히 어려우며, 구조 작업 역시 극도로 힘들고 위험하다. 저기에 비하면 차라리 아무 지형 장애물이 없이 파도에 휩쓸려서 물에만 곱게 빠진 건 완전 양반이다. 거긴 보트를 투입해서 곧장 출동이라도 가능하지.

테트라포드는 어지간한 플랫폼 아케이드 게임에 있는 데쓰 트랩, 남극 크레바스, 민통선 안의 지뢰밭, 사냥용 덫, 함정 급으로 위험하다고 봐야 한다.
모래사장+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저길 갈 일은 물론 없고, 저기서 사고를 당하는 사람은 다 낚시꾼들이다. 낚시 명당이긴 하지만 안전을 등가교환하고 가는 장소라는 건 진지하게 생각할 점이다.

한편, 전북함의 옆에는 어느 북한 주민들이 탈북할 때 사용했다는 어선이 있었다. 이 배는 그나마 탈북에 성공한 경우에 속하지만, 어떤 사람은 배에 탄 채로 죽어 버려서 배는 식량과 연료가 떨어진 채 시체만 싣고 일본으로까지 떠내려간 비극적인 경우도 있다. 사진 첨부는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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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있는 것은 바로 1996년 강릉 무장공비들이 탔던 북한제 잠수함이었다. 벌써 20주년이 됐다. 같은 계열의 색으로 도색은 다시 반들반들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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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은 일반 군함보다 공간이 훨씬 좁고 거주성이 열악했다. 일어서 있을 수가 없다. 물(잠수함..)이든 땅(땅굴..)이든 그 아래 속에서 지내는데 공간을 넉넉하게 내기란 힘들 것이다. 게다가 북한 사람들은 못 먹어서 키부터가 남한 사람보다 작으니까.
잠수함 안은 온갖 복잡한 계기판과 밸브, 스위치들로 가득했는데, 계기판 아래에 자그맣게 찍혀 있는 "1991. 평양"이라는 글자가 참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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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이 잠수함이 좌초하면서 부서진 부분인 듯하다. 이것 말고도 사진 찍은 게 많이 있지만 첨부를 생략한다.

지금까지 함정 전시관을 살펴봤다.
강릉 통일 공원은 (1) 함정 전시관, (2) 항일 기념 공원, (3) 안보 전시관이라는 세 파트로 나뉜다. 함정 전시관은 나머지 둘이 있는 곳에서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직선 거리 7~800m)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고저 차이도 상당하기 때문에 이동을 위해 차량이 사실상 필수이다. 뭐, 어차피 여기까지 찾아가는 수단 자체가 자동차밖에 없기도 하지만.

(2)는 그냥 공터에 각종 옛날 전투기와 6· 25 전투 전적비에다가 강릉 항일 인사 추모비가 있는 수준이지만, (1)과 (3)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둘 중 아무 한 곳에서만 입장료를 구입하면 당일 하루 동안 양쪽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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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기념 공원은 위와 같이 생겼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항일 관련 전시물보다는 해방 이후 관련 전시물이 더 많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파란 프로펠러기는 박 정희 대통령 시절에 사용되었던 대통령 전용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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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항일 관련 전시물인 강릉 의병 항쟁 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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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전시관의 모습. 출입문의 위에 있는 파란 지붕이 뭔가 실사가 아닌 CG 그러데이션처럼 굉장히 예쁜 색상으로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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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안보 전시관에는 여느 6· 25 내지 반공 관련 자료뿐만 아니라 강릉답게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 대한 자료가 더 많이 있었다. 무장공비들이 은신처 마련을 위해 판 구덩이를 가리키는 말인 '비트'가 이 사건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얘는 그냥 '비밀 아지트'의 약자라고 한다. 영어 bit나 beat와는 관계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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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 중인 동영상을 촬영한 건데 평소답지 않게 굉장히 선명하고 깨끗하게 잘 찍혔다.
조 창호 중위는 내가 이 블로그에서 전에 소개한 적도 있는데.. 참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슬픈 사례이다.
저건 행방불명 전사자로 현충원에 등재되었던 자기 이름을 몇십 년 만에 손수 지우는 모습이다.
전사한 걸로 간주되어 1계급 특진을 해서 '중위'를 추서받은 것이었는데, 당사자가 살아서 돌아왔으니 저분은 형식적으로나마 진짜 중위로 진급식을 한 뒤 곧장 전역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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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전시관을 나와서 언덕을 내려가면서 찍은 모습. 카메라는 내가 눈으로 본 색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파란 하늘과 바다가 저렇게 어우러진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2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15 19:20 2016/09/1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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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무더위로부터 자극과 동기를 받아 본인은 이번 여름에는 바다에도 다녀 왔다. 지난 봄엔 등산을 많이 갔는데 여름엔 드디어 바다도 간 것이다. 물론 등산은 한 10월쯤 돼서 덜 더위지면 운동 차원에서 다시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가고 싶은 산이 아직 몇 군데 더 남아 있다.

단순히 산이나 계곡이나 강이 아니라 꼭 바다 구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 바쁜 와중에도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다녀온 소감을 먼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제아무리 가정과 사무실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들어온다 해도, 피서를 직접 가는 것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게 느껴졌다. 안 갔다왔으면 후회했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잘 알다시피 해수욕장의 퀄리티는 동해가 서해보다 더 낫다. 서해는 얕고 물이 더 탁하다. 서울 사람들이 가까운 인천 앞바다를 놔 두고 괜히 강원도나 부산까지 가는 게 아니다. 부산은 대도시답게 빽빽한 고층 건물이 해수욕장 모래사장의 바로 앞까지 닿아 있고 심지어 해운대 해수욕장은 지하철로도 접근 가능하다. 그리고 거긴 잘 알다시피 피서철엔 사람들로 완전 터져나간다..;; 이런 풍경을 정작 수도권인 인천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학 동안 본인은 학기 중일 때보다 회사에 더 자주 출근하고, 주일마다 교회, 그리고 방학 기간 동안 성경 특강을 부탁받은 것도 있어서 행동 반경에 제약이 심했다. 그래서 동해보다 더 가까운 서해부터 1박 2일 스케줄로 먼저 가게 됐다. 동해는 멀기도 하고, 비단 바다 구경뿐만 아니라 각종 안보 관광 코스를 엮어서 최하 2박 이상의 스케줄로 다시 갈 예정이다.

일단 서해의 어느 해수욕장을 갈지 많이 고민했다. 사실, 공항이 걸쳐 있는 용유도에도 끝자락에 해수욕장과 유원지가 있긴 한데 그건 제외하고, 또 전라도 이남으로까지 너무 멀리 가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크고 유명해서 혼잡할 걸로 예상되는 해수욕장도(대천 같은..) 제외하고, 해변에 상업 시설들이 너무 다닥다닥 늘어서 있지 않고, 적당히 외지고 잠시 속세를 떠났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곳을 골랐다.

그래서 태안군의 북쪽에 있는 구례포/학암포 해수욕장이 선택됐다. 참고로 최후까지 경합했던 후보는 거기 남쪽에 있는 (1) 안면도에 소재한 해수욕장들, 그리고 (2) 장항선+서천화력선을 구경할 수 있는 춘장대 쪽이었다. 비록 철도 구경은 못 했지만 그래도 구례포/학암포 주변에도 마치 춘장대 해수욕장처럼 근처에 화력 발전소가 있긴 했다. 일말의 공통점이다.

서해를 갈 예정이니 응당 서해안 고속도로를 탔다.
평소에 자주 구경하는 경부 고속도로는 차선수가 정말 많고 넓다. 그리고 온갖 광역· 고속버스들이 넘쳐나며 버스 전용 차선까지 있다. 그 반면, 서해안 고속도로는 경부보다는 아담하며 수도권 구간에서도 버스를 거의 볼 수 없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서울 서남부는 이미 경부선 전철이 발달해 있고, 또 경부와는 달리 서울 진입로(서부간선)가 너무 비좁아서 병목이 심해서 경부 같은 교통망을 구축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지 싶다.

태안은 서산을 경유해서 국도를 타고 산 같은 비탈길도 한참을 오른 뒤에야 나타났다. 일요일 예배를 마친 뒤 저녁이 돼서야 현장에 도착했는데, 오토캠핑장 주변은 차 끌고 텐트 친 피서객들로 가득했다. 나야 홀몸이고 자동차가 곧 이동식 텐트이니 따로 텐트를 치지 않았다. 에어컨 냉기가 남아 있는 동안은 차 안에서 좀 쉬다가, 냉기가 빠졌을 때쯤 이제 주변 지형과 시설 정찰을 시작했다. 그래도 바닷가답게 바깥도 제법 시원한지라, 냉기가 빠진 뒤에도 차에서 자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심야와 이른 아침, 해수욕장이 정식 개장하지 않은 시간대이긴 하지만 모래밭에 돗자리 깔고 바닷바람 맞으며 책 읽고 코딩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꿈 같은 피서가 시작됐다. 먼 길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바닷물에다가는 아직은 발만 담갔다. 진짜 본게임은 시작도 안 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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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주변은 몇십 m 떨어진 물체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해무가 짙게 껴 있었다. 그리고 썰물 상태여서 동해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갯벌이 쫘악 펼쳐져 있었다. 바닷물은 한 200m쯤 뒤로 싹 밀려났으며 이 때문에 부표(사진엔 안 나옴)까지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 돗자리 깔고 노트북 PC까지 올려 놓은 채로 사진을 찍었지만, 밀물 때는 여기 일대는 다 물에 잠겼다. 아무튼, 이로써 등산 코딩에 이어 갯벌 코딩까지 달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해가 뜨고 더워졌으며, 해무가 차츰 걷히고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개장 시각이 지나자 텅 비다시피하던 해변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렇다고 인산인해 수준인 건 물론 아니고, 혼자 쾌적하게 물 속을 돌아다니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본인 역시 이 무렵부터 하반신뿐만 아니라 상반신과 얼굴까지 몽땅 바닷물에 담갔다. 기온과 수온이 모두 해수욕에 안성맞춤이었다.

본인은 비록 수영을 할 줄은 모르지만,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그 느낌이 정말 좋았다. 바다는 계곡이나 강과는 달리 계속 파도가 치니 물이 뭔가 역동적이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이 많은 물을 밀어내는 엄청난 힘이 어디서 유래된 걸까? 지구의 자전? 달의 인력? 온도 차이? 이렇게 비열이 엄청난 물질이 액체라는 유체라는 게 지질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물의 저항과 공기 저항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별별 잡생각을 하며 물놀이를 했다.

서해는 정말 얕고 바닥의 경사가 완만해서 모래사장으로부터 한참을 멀리 떨어져도 여전히 발이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그럼 여기는 바닥의 경사가 몇 퍼밀인 걸까? 철도 차량의 경사 한계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까?" 뭐 이런 생각도 덩달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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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밀물과 썰물의 차이라는 것을 이렇게 직접 보니 몹시 신기했다. 정오 무렵이 되니까 물이 제일 많이 들어왔으며, 그 넓던 갯벌이 감쪽같이 몽땅 바닷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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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안개가 곁들어져서 여기도 꽤 괜찮은 풍경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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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오른쪽에는 요렇게 나무로 덮인 언덕도 있는데, 이 산길을 따라 몇백 m쯤 걸으면 이웃의 학암포 해수욕장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물놀이에다 주변 지역 산책도 몇 시간 하니, 생각보다 팔다리가 쑤시고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 그래서 본인은 저 길을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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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점심 시간이 어중간하게 지난 오후 2~3시경, 드디어 해수욕장을 나와서 옷을 갈아입었으며, 학암포 근처의 민박· 펜션과 식당들이 즐비한 마을로 가서 식사를 했다.
바다에 갔으니 해물을 먹어야지. 해수욕장 잘 찾아간 것에 대한 자가보상 차원에서 두세 명 분량의 회 코스 요리를 마지막 매운탕까지 혼자 다 먹어치웠다.

의식주 중에서 의와 주는 전혀 신경쓸 필요 없으니 교통비(유류/톨비)를 제외한 나머지 예산은 전부 '식'에 집중 투입되었다. 사실 여행 기간 내내 이때 말고 나머지 끼니는 거르거나 부실하게 해결한 편이었다. 또한 밥뿐만 아니라 전기 공급도 열악한 상태였는데 식당에 있는 동안 컴퓨터와 전화기를 덩달아 충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때 총체적인 에너지 보충을 했다.

학암포 해수욕장은 마을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또 물에 들어가지는 않고 다시 돗자리 깔고 누워서 해변과 언덕을 구경하며 쉬었다.
그렇게 저녁 무렵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엔 정체 시간대를 피할 겸, 서해안 고속도로의 유명한 행담도 휴게소에서 몇 시간 동안 머물면서(휴식+코딩) 추억을 더 만들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원하는 대로 머물 수 있는 것은 역시 자차가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피서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생업 전선에서 여전히 피서 전과 다를 바 없는 폭염을 경험하면서 좌절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동해도 조만간 어서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해에서는 뿌연 해무, 갯벌과 초록색 바닷물을 보고 왔다면, 동해에서는 더 맑고 깊고 시퍼런 바다를 보게 될 듯하다.

그나저나 햇살이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물에서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얼굴, 팔뚝, 심지어 발등까지 제법 탔다. 물은 자외선의 차단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는 걸 실감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12 19:28 2016/09/1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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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천장산, 낙산

컴퓨터도 더 작은 모바일로 바뀌고, 철도도 더 작은 경전철로 바뀌는 게 트렌드인지..
지금까지 산책삼아 다녀 온 작은 언덕들의 주요 탐험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도록 하겠다.

1. 천장산

서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구소들이 가득하고 남쪽에도 산림 과학원, 카이스트 경영 대학원 등이 있어서 왠지 지적인 느낌이 드는 산이다. 그런 쪽 말고도 동남쪽에는 경희 대학교가 있고 동쪽에는 의릉과 한국 예술 종합 학교(일명 한예종)이 있다.
게다가 산의 이름부터가 '하늘 아래 명당'이라는 뜻인데 이런 산을 오르는 느낌은 어떨지 궁금해서 지하철 6호선 상월곡 역에서 내려서 산책로를 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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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아파트도, 교수 아파트도 아닌 과학자 아파트다. ㄷㄷㄷ 하긴, 과학자들은 국가를 먹여 살리는 기간 인력이지.
그런데 지금 '과학자 아파트'라는 단어로 구글링을 하면 온통 북한 소식만 검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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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이렇게 빽빽한 나무들로 가득해서 산림욕을 즐기기 좋았다.
단, 천장산은 앞서 말했듯이 산기슭에 여러 연구소와 심지어 문화재까지 있는 관계로 접근이 통제된 곳이 아주 많았다. 사방팔방 등산로가 뚫려 있는 봉화산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일단 국립 산림 과학원이 관리하는 '홍릉숲' 영역은 전부 펜스가 쳐져서 막혀 있었다. 서쪽의 연구소 방면도 접근 불가이며 거기 있는 건물들을 구경도 할 수 없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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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41m짜리 낮은 산이니 정상에는 아주 금방 도달한다. 그런데 홍릉숲 말고 맞은편 쪽도 전부 펜스가 둘러져서 막혀 있다. 펜스 건너편은 '의릉' 쪽에서 올라와야만 갈 수 있다.
즉, 그냥 동네 뒷산 오르듯이 오르면 천장산은 거의 셰어웨어 데모 수준만 구경할 수 있었다. 갈 수 있는 경로가 단 한 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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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는 북서쪽을 바라보는 딱 한 곳에만 있었다. 북부 간선 도로를 넘어 가까이 있는 언덕은 북서울 꿈의 숲 내지 오패산이고,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은 그냥 북한산이다.
여기를 지난 뒤부터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냥 계단을 따라 꼭대기에서 하산하며, 산기슭 둘레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한예종의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다. 의릉을 가려면 한예종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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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은 서울 동대문구· 성북구 주민, 제복 입은 현역 군인, 한복 착용자 등등이 무료 입장 가능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입장료 1000원을 내야 들어갈 수 있었다. 풀밭이 참 깔끔하게 닦여 있던데.. 본인은 여기서 천장산을 다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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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산의 진짜 꼭대기에 도달했다. 위의 사진에서 연두색 펜스 왼쪽이 처음 들렀던 곳이고, 지금은 의릉 쪽에서 산을 다시 올라 있다. 의릉 쪽 등산로는 정상까지 나무 판자 내지 시멘트로 마치 협궤 철길 같은 등산로가 닦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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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릉 방면에서 산을 한 바퀴 도는 쪽으로 하산했다. 저 멀리 경희 대학교 평화의 전당이 보였지만 길이 봉인돼 있어서 그쪽으로 직접 갈 수는 없었다. 여기는 통제 구역이 많아서 산을 종단할 수 없으며, 들어왔던 의릉 입구로 되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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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무들에 둘러싸인 초록색 지붕의 건물이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나중에 지도와 대조해 보니 저건 한예종 미술원 건물이었다. 본캠 건물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한예종이 있던 이곳에는 잘 알다시피 안기부 청사가 있기도 했다. 남산 청사와 더불어 이렇게 천장산 청사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다 합쳐져서 내곡동으로 간 것이다. (의릉 근처에 있던 것이 지금은 헌릉 근처로 바뀌었다는 게 흥미롭다.) 사실 아까 그 미술원 건물도 과거에는 안기부 건물의 일부였다고 함. 그러니 그 시절엔 민간인이 이렇게 천장산에 자유롭게 접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안기부 강당 건물은 리모델링되거나 철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나 남아 있었다. 별로 볼 건 없이 썰렁해서 사진 첨부는 생략하지만, 그 강당에서 지난 1972년에 남북 7· 4 공동 선언이 발표됐다고 한다.

이렇게 의릉과 천장산 구경을 한 뒤, 본인은 무작정 한예종 캠퍼스를 지나서 큰길을 찾아 쪽문 밖으로 나갔다. 초행길이었지만 이렇게 나가는 게 맞았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자 이내 버스가 다니는 길이 나오고, 상월곡 역의 다음 역인 돌곶이 역이 나왔다. 이렇게 여행을 마쳤다.

2. 낙산

낙산은 안습한 높이 때문에 온통 아파트와 건물로 뒤덮인지라, 항공 사진을 봐도 산 같아 보이지가 않을 정도이다. 그래도 지형상 엄연히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는 산이며, 꼭대기에 도달하고 나면 서울의 중심부에서 번화한 대학로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다. 산이라고 하면 보통 2차원 공간이 연상되지만 낙산에서 공원에 속하는 영역은 한양 도성을 따라 길쭉한 '길'이라는 1차원적인 성격이 강하다.

동대문(흥인지문)이 있는 교차로에서 북쪽을 보면 한양 도성이 시작되고 땅의 고도가 높아진다. 평소에 여기를 종종 자동차를 몰며 지나가기도 하는데, 저 성곽 공원에는 무엇이 있을지 언젠가 한번 땅밟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지난번에 남산에서 한양 도성 구간을 지나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지하철 동대문 역에서 내린 뒤, 실제로 성곽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낙산을 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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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문은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존재감이 없었고, 동대문과 남대문은 왕년에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과하기도 한 뜻깊은(?) 곳이어서 존치. 그 반면 서대문은 다른 명분이 없어서 일제 강점기 당시에 노면 전차 복선화를 구실로 헐림...;; 뭐 이런 말이 있던데.
어쨌든 동대문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동대문의 양 옆으로는 동소문(혜화문), 그리고 남소문(광희문)이 있다. 비록 성곽은 동소문 방면 것만 남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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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오르막을 오르자 주택은 뜸해지고 고급 카페와 전망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거지 대신 공원 티가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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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너머 건너편도 굉장한 고지대인 것 같은데 저기에도 집들이 빽빽하다.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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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정상까지 시내버스도 다니고 있었다.
예전에 교회 친구들과도 낙산 공원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남쪽의 동대문 쪽에서 안 오고 서쪽의 대학로 쪽에서 오르느라 성곽이 있는 이곳까지 올라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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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밖으로 나가니 한성 대학교가 바로 내려다 보였고, 그 밖에 경치는 대략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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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인가 제3 전망광장까지 가니 성곽이 잠시 끊어졌고, 본인은 여기서 산을 내려갔다. 요런 계단을 내려가니 또 빽빽한 빌라촌이 나왔고, 거기를 지나자 각종 극장들이 보였다. 방통대 건물이 멀리 보이길래 거기와는 90도 수직인 방향으로 이동하여 큰길을 찾았고, 이내 지하철 혜화 역에 도달하여 산책을 마쳤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07 08:33 2016/09/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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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봉화산

서울 중랑구에 있는 봉화산은 둘레길만 따라 산기슭을 한 바퀴 도는 거리는 4km가 좀 넘고, 정상까지 높이는 해발 160m 정도 되는 작고 낮은 산이다. 인접한 산맥 능선이 없이 혼자 불쑥 솟아 있는 일종의 '독립구릉'인지라 예로부터 지리· 지형적인 이용 가치가 높았다고 한다. 지금은 서울 지하철 6호선의 종착역이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작명되어 있다.

본인은 혹서기에는 높은 산 대신 서울 곳곳에 공원 형태로 조성돼 있는 작고 낮은 산들을 틈틈이 답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는 봉화산 역 → 정상 → 중랑구청의 순으로 봉화산 북남 종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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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역 4번 출구로 나가서 산을 향해 계속 전진하니 일단 나무들이 무성한 공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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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지나서 계속 산의 중심부 쪽으로 비탈길을 오르자, 길은 점점 좁아지고 흙길 등산로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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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은 산의 규모에 비해 출입구와 등산로가 거미줄처럼 굉장히 많이 나 있었다. 그래도 어느 걸 타도 적당히 중심부 쪽으로만 가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길 잃을 염려는 안 해도 된다.
여느 산들과 마찬가지로 산중턱에는 운동 기구들이 설치된 공터가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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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송전탑과 매점(!)이 나오고, 거기를 지나자 정상이 나왔다. 정상에는 듣던 대로 봉수대가 있었다. 하긴, 산이 이름부터가 봉화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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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전체를 통틀어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는 여기 하나뿐이었다. 곳곳에서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던 용마산과는 반대다. 봉화산은 육군 사관학교와 가까이 있기도 하지만 이 산에서 그쪽을 내려다볼 수는 있지는 않다. 보안상의 이유도 있을 것이고. 위의 풍경은 중랑천과 천장산 방면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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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지나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봉화산 도당굿 보존 위원회' (서울시 무형 문화재 제34호) 이런 건물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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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구청 쪽으로 하산하는 길은 뭐 이런 식이었다. 7호선 먹골 역 방면인 서쪽으로도 갈 수 있고 길이 그야말로 사방으로 뻗은 듯했다.
중랑구청은 봉화산의 남쪽 중에서도 약간 동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있다. 본인이 이 지점을 선택한 이유는 여기도 아까 봉화산 역 방면의 북쪽과 마찬가지로 공원이 꾸며져 있으며, 여기 근처에서는 집으로 환승 없이 한 번 만에 가는 버스를 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본인은 이로써 서울 지하철 4~6호선의 종점 근처에 있는 산들을 모두 가 봤다. 4호선 당고개(수락산, 불암산), 5호선 마천(청량산), 6호선 봉화산까지. 이제 7호선 도봉산만 남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18 08:35 2016/08/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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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름 밤엔 저녁에도 집에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더웠다. 저 멀리 강원도에 훌쩍 떠나 버리고 싶은데 시간 관계상 아직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그 대신 동부 간선 도로를 타고 내 마음의 고향인 교외선 일대로 홀연히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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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역은 송추 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뒤 얼마 안 지나서 장흥 유원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그런데 폐역 상태이다 보니 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아무 표지판도 없었다. 그래서 다 와 놓고도 역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선뜻 찾을 수 없었다.

열차가 다니지 않고 인적도 끊긴 간이역 근처의 으슥한 골목에다 차를 세워 놓은 뒤, 저녁을 먹고 컴퓨터 작업을 하고 책을 읽다가(가로등 불빛) 이동식 텐트 안에서 잠들었다. 새벽이 되니까 살짝 한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원하던 경험이 바로 이것이었다. 차를 아무 데나 세워도 될 정도의 한적하고 으슥한 시골에서 혼자 이렇게 자 보는 거. 정말 꿀잼이었다. 그것도 철도역 근처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인가? 물론 위의 사진들은 이튿날 새벽에 동이 튼 뒤에 찍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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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체가 아니라 HY울릉도라는 간판 서체 자체가 여기는 1990년~2000년대 이후로 시간이 정지했음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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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장흥의 서쪽 다음 역이며 교외선에서 그나마 가장 크고 최후까지 역무원이 상주했던 곳인 일영 역의 승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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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 역은 밖의 마당(?)에 지붕만 있는 실외 광장 대합실이 있었다. 다른 철도역에서는 보지 못한 독특한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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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찾은 송추 역은 건물 모양과 마당, 그리고 광장 대합실이 있는 것이 모두 일영 역과 비슷한 형태였다. 하지만 일찌감치 영업이 중단되고 거의 폐역처럼 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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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추 역의 앞마당에 있는 광장 대합실.
요약하자면 일영과 송추는 형태가 비슷하고 장흥만 임시 승강장만 달랑 놓인 좀 간이역스러운 스타일이었다.
장흥이 아니라 송추나 일영의 저 앞마당에다가 차를 세워 놓고 거기서 밤을 보냈으면 또 느낌이 달랐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날은 일단 교외선만으로 만족하고 돌아왔지만, 가까운 미래엔 중앙선(양평)과 경춘선(가평)의 한적한 전철역 근처에도 가서 캠핑을 하고 싶다.
그리고 바다로도 가고 싶다. 강원도 동해, 그리고 김포-강화 쪽의 서해 모두. 언젠가 꼭 갔다 와서 여기에 사진과 여행기를 올릴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16 08:30 2016/08/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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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 공원 내부의 셔틀버스, 맹꽁이 전기차

서울 상암동에 있는 하늘 공원은 월드컵 경기장과 가까이 있으며, 역시나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시기에 맞춰서 개장했다. 사실 얘는 인근의 평화의 공원, 노을 공원, 난지천 공원과 더불어 '월드컵 공원'이라는 단지를 구성하는 공원 중 하나이다. 요컨대 서울에는 올림픽 공원만 있는 게 아니라 월드컵 공원도 있다.

본인은 지난 10여 년 동안 여기를 교회 친구들이나 다른 지인과 함께 몇 번 가 봤다. 하지만 지하철(월드컵경기장 역)로든 승용차로든 월드컵 경기장 쪽에서 접근해서 하늘 공원으로는 걸어서 계단으로 직접 오르기만 했다.
하늘 공원 내부의 주차장에 직접 주차를 한 건 최근에 간 게 처음이었다. 그리고 공원 꼭대기까지 도보가 아니라 '맹꽁이 전기차'라고 불리는 내부 셔틀버스를 타고 올랐다.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물론 무료는 아니다. (1인당 편도 2천, 왕복 3천원)

남산에도 전기 버스가 다니긴 한다만, 하늘 공원에도 이런 게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사실, 하늘 공원뿐만 아니라 옆의 노을 공원 캠핑장과 노을 공원 주차장 사이에도 동일한 전기차가 다닌다. 차량 한 대엔 10~12명 정도가 탈 수 있다.
이 전기차는 제3궤조나 전차선을 통해서 급전받는 건 아니고 배터리 기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차량이 한없이 쉬지 않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고 주기적으로 충전이 필요하다. 또한 차량의 덩치나 출력에도 응당 한계가 걸린다.

맹꽁이 전기차를 타는 느낌은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유적지 내부에서 툭툭이를 타던 느낌과 비슷했다.
사실, 우리나라 정도의 자본과 기술이 있는 나라이니까 전기차이지, 못사는 나라라면 이렇게 관광지· 공원 내부를 다니는 셔틀은 죄다 선진국에서 차령 경과로 폐차된 2행정 삼륜차 툭툭이 같은 차량일 것이다. 배기가스 처리도 제대로 안 하는 것들..;;
전기 자동차가 배터리 충전과 항속거리 문제만 잘 해결해서 내연기관 자동차 대신에 실용화가 됐다면 얼마나 가볍고 조용하게 잘 달렸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2. 식물 이야기

하늘 공원에 펼쳐진 푸른 억새밭과 꽃밭은 이번이 처음 구경하는 건 아니지만 다시 봐도 경치가 참 아름다웠다. 머리가 복잡할 때 기분 전환 효과가 탁월했다. 강 건너 멀리 빌딩숲이 아니라 들판만 바라보면 무슨 마라도 내지 Windows XP 초원 배경 같지, 인서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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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빨간 꽃은 양귀비이다. 모든 버섯이 독버섯은 아니며 모든 뱀이 독사는 아니듯, 모든 양귀비가 마약 성분이 든 품종인 것도 역시 아니므로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처럼 꽃밭을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John Rutter라고, 찬송가 중에서도 좀 시편 8편스러운 창조 세계 찬양과 성탄 캐롤 분야 작곡이 전문인 영국의 유명한 음악가가 있다. 이 사람이 만든 성가 중에 Look at the world (바라보라 세상의 모든 일들)라는 불후의 명곡이 있는데..

Look at the earth: bringing forth fruit and flower
Look at the sky: the sunshine and the rain

Praise to thee, O Lord for all creation
Give us thankful hearts that we may see!
All the gift we share, and every blessing
All things come of thee.


곡중의 2절 가사가 떠올랐다.

꽃은 동물로 치면 일종의 생식기이다. 풍매화는 꽃가루를 단순히 바람에다 날리기만 하지만, 충매화는 예쁜 꽃과 달콤한 꿀을 만들어서 곤충을 끌어들인 뒤, 꽃가루가 덩달아 묻은 곤충들이 열심히 날아다님으로써 꽃가루+암술 교접과 번식이 저절로 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충매화가 풍매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생겼다. 풍매화는..?? 퀄리티가 "엥? 걔들도 꽃이 피긴 해?" 수준이다. 소나무나 벼가 꽃이 핀다고는 하지만 백합· 장미 같은 걸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옛날에 <생명 영원한 신비> 다큐에서도 충매화에 대해서는 풍매화와 비교했을 때 정말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룬 거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신자들은 신이 그렇게 만들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믿고, 그 다큐에서는 생명이 스스로 진화해서 그런 걸 만들었다고 얘기하니,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풍매화는 그냥 광고 찌라시 내지 스팸 메일을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 살포하는 것이고, 충매화는 그래도 목적을 갖고 가게를 찾은 고객에게 사은품과 함께 자매품 광고를 같이 하는 것과 같다. 후자가 광고 효율이 더 높을 거라는 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기계공학적으로 봐도 풍매화가 그냥 글라이더 내지 증기 기관이라면, 충매화는 진짜 엔진 달린 비행기 내지 내연 기관 급의 혁신인 것 같다.

본인은 생물학하고는 완전히 담을 싼 배경이지만 이렇게 식물의 번식 방식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자동차 운전과도 관계가 있다. 봄철에 나무 아래 그늘에다 차를 세워 놨는데, 나중에 보니 잎과 가지 정도만 위에 떨어진 게 아니라 차 전체가 뿌연 송홧가루 테러를 당해 있었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그래도 차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게 의외로 멀리까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송홧가루를 이렇게 많이 살포해도 가성비는 꿀벌이 나르는 것에 비할 바는 못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식물 중에도 곤충과 상생하는 게 아니라 아예 곤충을 잡아먹는 놈도 있고, 또 '라플레시아'처럼 거대하지만 지독한 악취를 내는 못생긴 꽃을 피우는 놈도 있다. 그런데 그건 그것대로 꿀벌이 아니라 '파리'를 끌어들여서 꽃가루를 퍼뜨리려는 의도라니 참 이것도 걔네만의 생존 전략인 셈이다.

그리고 하나 더.. 동물은 어지간히 이상한 예외적인 종을 제외하면 암컷과 수컷이 따로 있다. 식물은 반대로 비록 수분(가루받이) 자체는 다른 몸체의 것으로 하더라도 일단 한 몸체에 암술과 수술이 같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허나, 이것도 예외가 있어서 동물 중에도 자웅동체가 있으며, 식물 역시 암그루와 수그루가 따로인 자웅이주(암수딴그루)가 있다.

자웅이주의 대표적인 예로는 살아 있는 화석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은행나무가 있다. 전세계를 통틀어 단 한 품종밖에 존재하지 않아서 언어 계통으로 치면 고립어처럼 다른 나무와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없는 아주 유니크한 놈이라고 한다. 얘가 수분을 해서 열매를 맺었는데 그게 잘못해서 터지면 주변에 지독한 악취를 풍긴다. 암그루와 수그루가 서로 만나지만 않게 배치하면 도시 가로수로서 다른 자질들은 다 훌륭한데 그 악취만이 문제라고..

그런데 묘목 수준일 때 이 은행나무가 암그루인지 수그루인지를 파괴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판별하는 게 과학적으로 꽤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여러 모로 나무들도 다 같은 나무가 아니고 침엽수와 활엽수, 상록수와 낙엽수 구분도 있는 등 굉장히 신기한 특성이 많다.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은 지금처럼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덕후가 될 여지는 없는 시절을 살았으니, 그 머리로 자연 속에서 완전 동식물 분류 덕후가 된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귀결인 것 같다. (왕상 4:33)

단백질인가 뭔가 하는 성분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똑같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질이어도 식물이 동물보다 보존성이 훨씬 더 뛰어나며, 부패하더라도 그 중간 과정(비주얼이나 악취)이 훨씬 덜 혐오스럽다. 식물의 씨 vs 계란, 두유 vs 우유 같은 식품의 차이점을 생각하면 명백하다. 꽃가루도 일반적인 환경에서 딱히 상하거나 썩지는 않는다고 하며, 꿀조차도 상한다거나 냉장· 냉동 보관 필수 이런 말은 내가 들은 적이 없다. 이것도 시사하는 바가 큰 차이점이라 여겨진다.

3. 풍경

갑자기 식물 얘기가 좀 길어졌다만..
하늘 공원에서는 아래에 있는 '난지 한강 공원'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인다. 하늘 공원이 고지대이고 식물들 때문에 산책로 위주로만 다녀야 한다면, 한강 공원은 말 그대로 한강과 더욱 가까이 있으며 잔디밭이 있어서 거기서 돗자리 깔고 놀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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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은 디지털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아서 모든 사진은 스마트폰으로만 찍었다.

그나저나, 월드컵 공원에 포함돼 있지는 않지만 월드컵 경기장 근처에는 또 매봉산이라는 자그마한 언덕이 있다. 얘는 쓰레기와는 무관하고 진짜로 자연적인 산이다. 여기 산 속에는 1980년대까지 국가에서 석유를 비축해 놓던 기름 탱크가 남아 있는데, 요것들은 나름 국가 기간 시설인 관계로 민간 항공 지도에 표시되지 않고 가려져 있다.
이쪽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답사해 보고 싶다. 옛날에는 이 언덕 전체가 아마 민간인 접근 금지였지 싶다.

4. 쓰레기 매립지의 변천

하늘 공원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평범한 해발 100미터짜리 언덕이 아니다. 여기가 한때는(25~30년쯤 전) '난지도'라고 불리는 거대한 쓰레기 산이었다는 걸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려울 것이다. 올림픽 공원을 건설하던 부지에서는 몽촌토성 유물이 나왔지만 월드컵 공원의 부지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쓰레기가 쌓여서 저 높이와 덩치의 산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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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난지도에서 '난'은 難이나 亂 같은 안 좋은 뜻이 절대 아니라 蘭, 즉, 난초라는 꽃을 뜻하는 아주 향기로운 이름이었다. 쓰레기 매립이 시작되기 전에 거기는 자연의 정취가 가득한 들판이었고 데이트 내지 심지어 신혼여행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는 원래 지금과는 정반대로, 홍수를 맞으면 종종 침수도 되는 저지대였다.
그랬던 곳이 한때는 서울 시민들이 배출하는 오물, 건축 폐기물, 하수 슬러지 등등을 한몸에 뒤집어쓰고서 온갖 해충과 악취를 내뿜는 죽음의 장소로 전락한 것이다. '달동네'만큼이나 예쁜 이름과 실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예에 속한다.

이런 내력으로 인해 하늘 공원 곳곳에는 땅 속 쓰레기의 부패로 인해 발생하는 메탄 가스를 수집하는 시설이 있고 바로 옆엔 열병합 발전소인 지역 난방 공사도 있다. 일반 쓰레기들은 방사능 폐기물만치 위험하지는 않으며, 완전히 분해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방사성 원소의 반감 붕괴 주기만치 길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절대적인 양이 너무 많으니 처리하는 게 골칫거리이다.

하늘 공원의 이런 외형과 내력이 믿어지지 않거니와, 옛날에는 겨우 마포구 상암동 일대가 쓰레기 매립지일 정도로 서울 시내가 그만큼 작기도 했다는 것 역시 실감이 안 간다. 남산이 있는 곳이 벌써 서울의 남쪽 외곽으로 간주되었고 합정동 일대에 무려 화력 발전소가 있으며, 조선 시대엔 한강 모래사장에 아예 사형장(새남터)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시절에 거기는 서울 시내에서 완전히 떨어진 교외 변두리로 여겨졌음을 뜻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에 비해 사회 인프라가 부족하고 시민 의식이 미개해서 교통사고 1위, 쓰레기 배출량 1위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러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땐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쓰레기 봉투 종량제와 쓰레기 분리 배출이 당연한 관행으로 잘 정착한 지 오래다. 지금의 우리나라 정도면 이제 세계적으로도 쓰레기나 하수 처리 같은 건 환경 오염을 최소화하게 선진적으로 잘하는 축에 든다. 육지뿐만 아니라 안산 시화호나 울산 태화강도 옛날에는 죽음의 호수, 죽음의 강 어쩌구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말이 딱히 없다. 오염 물질을 처리하는 기술도 예전에 비해 많이 발달한 덕분이다.

난지도는 1978년부터 쓰레기 매립지로 쓰였지만 1992년부터 매립이 중단됐으며(쓰레기가 너무 많이 쌓여서..), 국가에서는 이 쓰레기더미를 몽땅 흙으로 덮고 녹지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무슨 묘지 공원처럼 말이다. 돈이 한두 푼 든 게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거기는 다시 시민들의 휴식 공간과 데이트 코스로 잘 바뀌었다. 서울 안에 등산로도 아니고 그 정도 고지대이면서 그 정도로 넓은 녹지는 흔치 않다.

그 대신 1992년부터 지금까지 서울 포함 수도권의 쓰레기 매립은 인천 서구 검단5동, 공항 철도 청라 역의 북쪽으로 경인 아라뱃길의 건너편에 있는 거대한 부지에다가 하고 있다. 거기엔 웬 뜬금없이 '드림파크'라는 이름의 골프장과 공원이 있는데, 거기는 이미 매립이 다 끝나고 휴양· 레저 부지로 탈바꿈한 곳이다. 기왕 골프장을 만들 거면 멀쩡한 산 깎고 환경 파괴하지 말고 쓰레기 매립장 위에 그럭저럭 잘 만든 것 같다.

드림파크보다 더 서쪽에 논밭이나 갯벌이 아니고, 재개발 부지는 아니어 보이고, 그렇다고 군사 보안 시설도 분명 아닌데 거대한 제방이 쳐져 민간인의 접근은 막힌 한 넓은 땅이 보인다. 거기가 바로 현재 쓰이고 있는 쓰레기 매립지이다. 과거의 난지도 시절만치 무식하게 쏟아붓고 파묻는 게 아니라, 분비되는 각종 부패 액체(침출수)와 기체(메탄..) 처리는 영글게 잘 하고서 매립한다.

거기가 옛날에는 행정구역상으로 김포군이었기 때문에 '김포 매립지'라고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행정구역이 인천으로 바뀌었다. 마치 김포 공항이 처음 지어지던 시절에는 김포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서울 강서구로 바뀐 것과 정확하게 같은 맥락의 변화이다. (김포 지못미)
한강의 상수도 취수 시설은 점점 상류로 이동해서 남양주까지 갔고, 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는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서 성남(경부), 안산(서해안), 하남(중부)까지 갔다. 김포 공항도 서울의 관문으로 운용하기엔 너무 비좁고 혼잡해져서 저 멀리 영종도에다 인천 공항이 대신 만들어졌다.

이처럼 쓰레기 처리장도 세월이 흐르면서 저 멀리 인천 서쪽 끄트머리로 옮겨졌다. 하지만 쓰레기 처리장을 받는 지역의 입장에서는 마치 교도소나 시신 화장장만큼이나 땅값 떨어뜨리는 영 좋지 않은 시설이 오는 것이니, 이런 걸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다 쓰레기 처리장을 유치하는 대신에 서울시에서는 우리를 위해 뭘 해 달라, 뭘 보장해 달라는 식으로 딜이 오가곤 한다. 어 이건..? 철도를 지하화하지 않고 지상으로 만드는 대신에 뭘 만들어 달라 이러는 싸움과 비슷한 분위기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13 08:36 2016/08/1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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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남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서울의 너무 중심에 있는 바람에 지금까지 등산 대상에서 아오안이었던 산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남산. 물론, 옛날 그 사대문의 안 좁디좁은 한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남쪽이라는 얘기다.
서울 남산이라 하면 케이블카와 거대한 타워가 상징이지만, 그것 말고도 남산 일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참 많이도 변해 왔다. 과거에 여기 일대는 한양 도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예 수련을 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조선신궁'이라는 커다란 신사가 여기 기슭에 만들어졌다.

해방 후에 신사는 당연히 곧장 철거됐다. 그 뒤, 이 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박통이 들어선 1961년부터는 남산에 잘 알다시피 코렁탕 시설인 중앙정보부 청사가 들어섰다. "남산에서 왔습니다."란 말만 들어도 사람들이 벌벌 떨 지경이었대나. 이북에서 온 간첩만 벌벌 떨어야 하는데 무고한 시민들까지 떨었다는 게 문제다.

여기서 잠시 설명충 기질을 발휘하자면,
남산은 바로 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인 1995년까지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와 중앙정보부가 있던 곳이었다.
그 반면 남영동 대공분실은 치안 본부, 즉 오늘날의 경찰청 관할이다.
그리고 서빙고 대공분실은 군 소속이었다. 국군 보안 사령부, 지금의 기무 사령부 관할이다.
그러니 똑같이 코렁탕을 제조하는 곳이어도 소속이 제각기 모두 달랐다.

공 병우 박사는 세벌식 글자판을 주장하다가 정부 정책을 건방지게 비판하는 죄로 1970년대에 중정 요원에게 연행되어 남산 구경을 하고 온 적이 있다. 그것 말고도 중정과 안기부의 흑역사는 많다.
5공 시절에 김 근태, 박 종철 같은 사람이 고문을 당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며, 이 근안 역시 경찰 출신이니 여기서 활동했었다.
그럼 박통을 암살한 김 재규는? 10. 26 사태의 수사권이 아무래도 전땅크 아래의 보안 사령부에 있었던 관계로, 그는 서빙고로 끌려가서 자기 옛 부하들에게 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신사는 전부 공원(특히 안 중근 의사 기념관. 중앙 기준 10시 방향)으로 바뀌었으며, 과거의 중정/안기부 건물은 다 유스호스텔, 방재 센터 등 다른 평범한 건물로 개조됐다(11~12시 북쪽 방향). 남산 기슭은 그린벨트 지대인지라 이미 만들어진 건물을 철거를 하면 했지 더 증· 개축은 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김 영삼 정권 때는 조선 총독부 청사만 헐린 게 아니라 남산의 외관을 가리던 외인 아파트도 폭파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는 지금 식물원이 조성돼 있다. (5시 남쪽 방향)

그러니 지금은 과거에 비해 남산이 그나마 자연 본연의 모습을 정말 많이 되찾은 셈이다.
사실, 남산은 본격적인 산행의 대상이 되기에는 시내와 너무 가깝고, 산 높이도 너무 낮은 관계로 진작부터 관광지 내지 공원 컨셉으로 꾸며져 왔다. 그래서 타워가 있는 정상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도 전국에서 최초로 생겼다. 정상에 도달해도 "남산 무슨봉 해발 262m" 이런 표지석 같은 건 없다.
뭐, 단순 관광객들은 케이블카나 관광버스를 타고 올라가겠지만, 여기도 도보로 정상까지 오르는 등산 코스가 없는 건 아니다.

본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산을 한 번도 오른 적이 없었다. 교회 친구들과 함께 주일 저녁에 남산 근처까지 차를 몰고 간 적은 있었지만 거기를 제대로 구경하지는 못했으며 케이블카도 못 타 봤다. 그래서 이 기회에 운동삼아 남산을 걸어서 올라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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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선 회현 역에서 내려서 남산 쪽을 향해 골목길을 오르니 남산 공원 입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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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공원은 경치가 좋고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런 공원과 산이 있다니,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공원에는 독립 운동가 김 구와 안 중근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넓은 공터는 이름부터가 '백범 광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쪽에는 안 중근 의사의 어록이 새겨진 바위들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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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 시민의 숲 근처에는 윤 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더니 여기에는 안 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었다. 기념관 자체는 1970년대부터 있었지만, 지금의 세련된 건물로 새로 만들어진 건 2010년대의 일이라고 한다.

안 중근 의사는 뜻을 결의하면서 왼손 약지의 앞단을 절단한 행적이 워낙 임팩트가 강한지라, 안 중근 하면 그 "대한국인 손바닥" 그림이 상징처럼 따라다닌다. 그나마 열 손가락 중에서 제일 덜 중요한 부위이니까.
이분은 무예에만 강한 게 아니라 글씨도 잘 쓰고 사상적인 배경도 무척 심오했다. 처음부터 요인 암살 같은 과격한 방법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이거 정말 좋게 가지고는 씨알도 안 먹히고 동양의 평화가 이뤄질 수가 없어 보이니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다.

기념관에는 안 의사의 생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던 당시의 상황, 고인이 사용한 권총 등 어지간한 자료는 다 전시돼 있다.
사소한 사실이다만, 안 의사는 교수형을 당해서 순국했다. 총살을 당한 건 윤 봉길이니 혼동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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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울 타워(N타워?)가 보이는 쪽으로 계속 전진했다. 옆에는 가림막을 치고 성벽을 다시 만드는지 뭔 공사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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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은 이런 식으로 쭉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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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한복판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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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계단을 오른 끝에 드디어 정상 도착. 적당한 아침에 도착하니 타워 주변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엄청 많았다.
맨 먼저 봉수대가 보이기에 등산 인증샷은 봉수대에서 저렇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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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를 가까이에서 올려다보면서 기념 촬영. 그리고 건너편 봉우리엔 정체를 알 수 없는 탑이 있어서 또 사진을 찍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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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은 동쪽으로 버스들이 내려가는 방향으로 했다. 남산은 타워가 있는 정상까지 포장된 차도가 있긴 하지만 일단 관광버스나 노선버스 전용이다. 아무나 자가용을 끌고 올라갈 수는 없다. 차라리 엔진 없는 자전거는 허용된다.
어쨌든, 이 차도에서 또 도보 등산로가 갈라져 나가는 곳이 있어서 본인은 응당 그쪽으로 경로를 바꿨다. 역시 남산에도 돌계단뿐만 아니라 더 자연 친화적인(?) 등산로가 있었다.

하산을 계속하니 등산로는 아스팔트 도로와 합류했으며, 본인은 결국 국립 극장이 있는 쪽으로 나와서 장충단로라는 큰길에 이르렀다. 그리고 길 바로 건너편에는 '한국 자유 총연맹' 본부가 있었다. 남산 공원에는 김 구 동상이 있더니, 자유 총연맹 내부에는 이 승만 동상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동대입구 지하철역까지는 좀 멀 것 같아서 버스를 타고 싶었으나.. 버스 승강장을 찾지 못해서 결국 그 거리를 다 걸어서 갔다. 3· 1 운동 기념탑, 유 관순 열사 동상, 제2 남산 터널을 몽땅 구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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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국민대, 성균관대), 안산(연세대)처럼 어째 대학교 구경과 함께 등산이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번에는 동국대 차례가 됐다.

단, 이번 산행에서는 남산을 동서 위주로 횡단하다 보니 남북으로는 상대적으로 충분히 구경하지 못했다.
남쪽의 식물원이라든가 북쪽의 남산골 공원, 타임캡슐 광장 같은 건 못 봤다.
금수저를 위한 초등학교라고 옛날부터 유명하던 '리라 초등학교'도 남산 북쪽 기슭에 있다. 대성동 초등학교만큼이나 특이한 학교인 걸로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7/18 19:32 2016/07/1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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