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답사기: 북악산 -- 下

북악산은 북한산보다 남쪽에 있는 산이긴 한데, 북악산 자체도 사실 내부에 분지가 있어서 북부와 남부라는 두 파트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성곽이 둘러져 있고 가장 높은 정상이 있고 청와대를 배경으로 보이는 그 산은 남부이다. 그리고 남부의 서쪽에는 창의문 안내소가 있고, 동쪽에는 말바위 안내소가 있어서 등산객들을 통제한다. 남부에 입산하려면 신분증을 제시하고 번호표 목걸이를 받아야 한다.

그 반면, 숙정문으로 나가서 움푹 파인 분지를 향해 내려가면 삼청각이 보이고, 숙정문 안내소에서 또 목걸이를 받거나 반납할 수 있다. 팔각정을 비롯해 북악산의 주요 관광지는 사실 북악산의 북부에 있다. 북부는 어차피 청와대가 보이지도 않으며, 목걸이 통제 구역이 아니다. 난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항공/위성 지도로도 지면의 고도는 거의 짐작할 수 없으므로.
지난번에 북악산을 수평 횡단했을 때는 북악산의 이런 지형적 특성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남부를 반쪽짜리만 구경했던 관계로, 이번에는 북악산을 수직 종단하면서 나머지 구간을 마저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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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북악산 남부에 진입도 예전에 다녀갔던 창의문 내지 와룡 공원이 아니라, 삼청 공원에서 했다. 위의 사진은 삼청동 골목길의 모습이다. 이로써 청와대의 왼쪽과 오른쪽 주변을 골고루 답사해 보게 됐다. 여기는 서울 도심과 가깝고 데이트 코스로 좋지만, 딱 봐도 차 세울 만한 곳은 없게 생겼다. 자차를 갖고 방문하기는 곤란하다.

내가 내린 버스 정류장은 '삼청공원 입구'와 '교육과정 평가원'이라는 명칭이 뒤섞여 쓰이고 있었다. 한국 교육과정 평가원이 한때 여기 근처에 있었지만, 지난 2010년에 이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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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을 오르는 자동차 도로는 늘 그렇듯이 청와대 쪽은 철망이 몇 겹으로 둘러져 있다.
창의문에서 정상으로 오를 때는 주변에 차도가 없이 가파른 경사를 계단으로 오르느라 정신 없었다. 그러니 이런 광경을 딱히 볼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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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시멘트 오르막길이 끝나고 등산로가 나왔다. 성곽 둘레길보다는 인위적인 느낌이 덜한 비탈길을 오른 뒤, 지난번에 들렀던 성곽 둘레길과 합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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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숙정문을 나서서 북악산의 남부에서 북부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길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냥 앞만 보고 쭈욱 올라서 팔각정으로 갈 수도 있고, 중간에 성북천 발원지라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더 길고 험한 등산로를 타고 동쪽으로 갈 수도 있다.
후자는 제2 산책로인데, 요게 일명 '김 신조 루트'이다. 그 시절에 남파된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로 침투할 때 이용한 경로라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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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신조 루트는.. 뭐 그렇게까지 특별한 게 있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길이 쭉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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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의 북부를 오르면서 이전에 지나 온 남부를 바라본 모습이다. 서울 성곽이 쭉 둘러져 있는 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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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호경암'이라는 바위이다. 성곽 둘레길에는 1· 21 사태 교전 때 총알이 박힌 소나무가 있더니만, 여기는 총알이 박힌 바위가 있었다.
그 시절에 단순히 시가전뿐만 아니라, 도주한 무장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산 속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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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마루 전망대에 도착했다. 내부순환로, 국민 대학교, 평창동 등이 모두 보이고 경치가 아주 좋았다. 산꼭대기에까지 무슨 건물을 어떻게 지었는지, 근처에는 사람이 거주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군사 시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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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예정 지점인 국민 대학교 인근과, 다른 방향인 평창동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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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더 진행한 끝에, 드디어 '하늘교'라고 불리는 하얀 다리에 도달했다. 북악산과 북한산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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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는 자동차 도로가 있다. 이 등산로 위에서 도로 쪽으로 오르내리는 통로는 일단은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도 차도를 따라 팔각정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그쪽으로 가지 않고 북한산, 국민대 방면으로 진행하여 북악산을 하산했다.
개인적으로 북한산 팔각정은 교회 친구들과 함께 차를 끌고 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밤이어서 전망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며, 사람들로 바글바글하고 정신없기까지 한 때 간 것이어서 딱히 등산 기분은 못 냈다.

가는 길목에는 뭔가 호국 불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여래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더 내려간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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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엔 와룡공원 쪽으로 하산하면서 성균관 대학교를 봤는데, 이번에는 더 외곽에 있는 국민 대학교를 처음으로 구경했다. 오오!
국민 대학교 건물은 가끔 내부순환로를 차로 달릴 일이 있을 때 가끔 보긴 했다. 내부순환로는 '정릉 터널'을 통해 북악산을 횡단하는데, 그 옆엔 '북악 터널'이라는 도로와 터널이 더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북악산과 북한산이 만나는 곳이다 보니 북한산 등산로도 근처에 있었다. 노래에 메들리가 있는 것처럼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하루 종일 산을 몇 콤보로 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본인은 거기까지는 차마 하지 않고 돌아왔다.

앞으로 등산 이야기가 좀 더 올라올 듯하다. 이러다 내 블로그가 프로그래밍 블로그에서 여행· 등산 블로그로 성향이 바뀌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북악산과 북한산 사이에 저런 길이 있는데, 사실은 서울 완전 북쪽 끝에 북한산과 도봉산의 경계엔 '우이령'이라는 고갯길이 있다. 거기도 안보상의 이유 때문에 거의 40년 동안 민간인 출입이 금지돼 있다가 2010년 무렵에 금지가 풀렸고, 지금도 신분증 지참에 "예약 + 하루 통행 인원수 제한"까지.. 북악산보다도 더 까다로운 제약이 남아 있다. 조만간 거기도 가 볼 생각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6/05 08:31 2016/06/0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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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북악산 -- 上

한동안 너무 바빴던 나머지, 남한산성 이후 다음 등산 때까지 블로그에 다른 글을 올릴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도 아주 흥미진진한 산행을 다녀왔다. 이번에 간 곳은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었다.

북악산은 자명한 이유로 인해, 서울에 있는 산들 중 아마 유일하게 신분증 까고 번호표 목걸이를 해야 입산 가능한 산이지 싶다. 인왕산은 사진 찍는 걸 감시하는 초소만 있던데 북악산은 그에 덧붙여서 저런 절차도 필요하다.

인왕산과 북악산은 빨간 날의(일요일 + 공휴일) 다음 날은 입산 금지이다. 감시 초소 직원들도 한 주에 하루 정도는 출근 안 하고 쉬어야 할 테니까. 북악산은 거기에다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입산 가능 시각도 정해져 있다. 현재 북악산에 있는 사람들의 신원이 모두 파악돼 있어야 하며, 해가 떨어진 뒤에는 산 속에 아무도 없게 마치 민통선에 준하는 수준의 관리를 하는 듯하다.

인왕산은 감시 초소는 있지만 저 정도까지 등산객들을 일일이 파악하고 통제하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해가 지고 나면 어차피 청와대 쪽으로 사진 찍는 것 감시는 할 필요가 없어지니 말이다.

사실, 청와대 근처에 있는 산들에 우리가 이 정도라도 접근하여 등산을 할 수 있게 된 건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다.
21세기 이전엔 그런 거 없었다. 1968년 1월에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 바로 근처까지 쳐들어왔던 전대미문의 사건의 여파로 인해, 북악산과 그 일대의 산들은 민간인 접근 절대엄금으로 봉인돼 버렸기 때문이다.

서울 지리를 잘 모르던 시절에는 난 북한산과 북악산의 차이도 잘 몰랐다. 북악산은 북한산보다 훨씬 서울 중심부 안에 있다. 본인은 북악산을 오르기 위해 무작정 '창의문'으로 향했다. 예전에 인왕산을 올랐다가 돌아오면서 버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쳤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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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의 바로 옆에 있는 최 규식 경무관의 동상을 가까이에서 다시 접했다.

그는 용감한 정의인으로 종로 경찰서장에 재직 중,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여 오는 공산 유격대와 싸우다가 장렬하게도 전사하므로 정부는 경무관의 계급과 태극 무공 훈장을 내렸다.
비록 한때의 비극 속에서 육신의 생명은 짧았으나 의를 위하는 그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 남으리라.
1969년 1월 21일
조각 및 제작: 이 일영
글: 이 은상
글씨: 김 충현


알고 보니 저 동상은 고인의 순직 1주기를 기념해서 만들어졌다.
태극 무공 훈장은 우리나라의 무공 훈장 중 최상위 등급으로, 이 정도 훈장은 6· 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급의 영웅이 아니면 살아서는 못 받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군인이 아닌 경찰에게 이런 훈장이 추서된 사례도 현재까지 저분만이 유일하다.
바로 몇 년 전(1965), 강 재구 소령이 수류탄 투척 훈련 중에 부하가 실수로 떨어뜨린 수류탄을 몸으로 감싸고 산화하여 동일한 태극 무공 훈장이 추서됐다는 것도 기억해 두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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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을 오르면서 작년에 갔던 인왕산과 부암동 쪽을 본 모습이다. 인왕산과 북악산은 모두 산 속에 성곽과 감시 초소가 있고, 아예 군부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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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길은 성곽을 따라 대략 이런 형태였다. 이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성벽 너머로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계단을 따라 산을 오를 수 있었는데, 경사가 꽤 가파른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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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주변은 경치가 이러했다.
우리가 평소에 서울 시내 쪽에서 바라보는 북악산의 전면은 바위가 참 인상적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는 이미 북악산의 뒤쪽으로 가는 것이고, 산을 타면서 딱히 그런 바위를 볼 일은 별로 없었다. 앞쪽은 영구 봉인돼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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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바로 북악산과 북한산 사이에 조성된 마을인 평창동이다. 각종 고급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부자· 유명인사들이 사는 단독 주택들이 가득하여 마치 서울 안의 딴 세상 같다. 교통이 왕창 불편하겠지만, 다들 차를 끌고 다닐 테니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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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의 정상은 생각보다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북악산'이 한때는 '백악산'이라고도 불렸다. 창의문에서 북악산 정상까지는 지도상의 직선 거리가 짧은 만큼 경사가 굉장히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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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1 사태 때 북한군과의 교전 중에 총알이 박힌 소나무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러 저렇게 표시를 해 놓은 게 좀 징그럽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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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따라 가다가 '청운대'라고 불리는 다른 봉우리에도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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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걷는 길은 성곽 안에 있기도 하다가 성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철조망이 저렇게 있으니 무슨 GOP 철책처럼 보였다.
이거 사진이 도대체 어떻게 찍혔는지 광량 조절이 이상하게 됐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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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도착한 뒤에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이 저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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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숙정문'이라고 불리는 대문에 도착했다. 나름 사대문 중 하나이며 '북대문'에 해당하는 대문이다. 얼마 전에 남한산성을 본 적이 있다 보니 모습이 친근했다.
본인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서울 성곽과 '대문'에 대해서 지금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좀 개념이 생겼다.
남대문은 서울 역 근처에 있는 그 숭례문이고, 동대문은 국도 6호선상에 있는 그 흥인지문이다.

서대문(돈의문)은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 역 근처에 있긴 했지만 일제 강점기 때 헐려서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옛날엔 노면 전차가 이 문을 통과했는데, 전차 노선을 복선화하려다 보니 이 성곽이 걸림돌이 됐다고.. 얘는 사대문 중 유일하게 복원이 못 되고 2016년 현재 존재하지 않는 문이다.

마지막으로 북대문이 바로 저 숙정문이지만, 높은 산 속에 있는 관계로 다른 문들만치 유명하거나 사람들이 막 드나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쉽게 말해 존재감이 별로 없다. 남대문하고는 접근성이 가히 넘사벽급으로 차이가 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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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처음에는 창의문에서 숙정문, 와룡 공원까지 북악산을 성벽을 따라 수평으로 횡단하는 코스를 생각하고 왔다.
차를 이용해서 북악산을 오르면 아까 같은 정상으로는 못 가지만, 그래도 성벽 둘레길보다 높은 곳으로 가서 '팔각정'이라고 불리는 정자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면 도보 등산로와 자동차 길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창의문과 와룡 공원 사이에, 청와대와 더 가까운 지점에 '삼청 공원'이 있고 거기에도 북악산 숙정문을 경유하여 팔각정까지 가는 등산로가 있다. 이건 북악산을 횡단이 아니라 종단하는 코스인 셈이다.

북악산에는 일명 '김 신조 루트'도 있고 북한산 형제봉과 연결되는 '하늘다리'도 있는데 거기로 가려면 숙정문의 밖으로 나가서 서울 성곽보다 훨씬 더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야 한다.
위의 사진은 그 종단 등산로를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찍은 것이다. 이 등산로는 나중에 북악산에 다시 와서 개척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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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이 정도로 보이기 시작하니 이번 등산도 거의 끝이 난 것 같다. 옛날에는 저기도 다 산이었을 텐데 산중턱까지 다 개발되고 도로가 생기고 길이 닦인 것이다.

정작 와룡 공원에는 가 보니 별 거 없었다. 공 병우 박사가 운영하던 한글 문화원의 소재지가 와룡동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기서는 마을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면서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성균관 대학교 서울 캠퍼스, 감사원, 통일부 같은 건물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등산을 하면서 서울에 이런 곳도 있다는 걸 알아 가는 건 즐거운 일이다.

안국 역과 혜화 역이 지리상으로는 생각보다 굉장히 가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6/05/30 08:26 2016/05/30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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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초, 봄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을 때 또 무작정 산을 올랐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말로만 수도 없이 들었지 직접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남한산성을 구경하러 청량산으로 갔다.
전에 불암산을 오를 때는 서울 지하철 4호선의 종점인 당고개 역으로 갔고, 하산은 남양주 쪽으로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5호선의 종점인 마천 역으로 갔고, 하산은 하남 쪽으로 했다.

또한 불암산은 하산한 뒤 남양주의 산기슭에 군부대가 있던데, 여기 청량산은 반대로 등산 전 서울의 끝자락 지점에 군인 간부 아파트와 군부대가 있었다. 듣자하니 특전사 부대라고 함.
지하철 운임에 조조할인이 적용될 정도로 굉장히 이른 시간에 산행을 했다. 덕분에 아침 7시 정각이 되자 군부대에서 기상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군가 BGM들..;; 단 4주간의 짧은 경험이지만 훈련소 시절 생각이 났다.

인근 주민들은 이거 듣는 게 일상이 돼 있겠구나. 단, 지도를 보니 이 군부대는 위례 신도시의 개발로 인해 딴 데로 이전하고 부지가 재개발될 계획인가 보다. 서울 2기 지하철이 없던 시절에는 여기만 해도 굉장한 외곽이고 오지였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전, 아직 맛집들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고 있는데 "서울 빠이빠이. 여기부터는 하남시입니다" 이런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산이 행정구역상 하남에 있는가 보다. 단, 나의 목적지인 남한산성은 하남이 아니라 광주 소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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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도립공원이며 여기 일대는 유명한 등산 코스이다. 그래서 등산로는 내가 가 본 산들 중 가히 톱급으로 잘 닦여 있었다. 난간에다가 바닥은 미끄럼 방지용 매트까지.. 비가 내린 직후의 날씨이지만 진흙 진창을 밟을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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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딱히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며 산을 남들 이상으로 빠르게 잘 타지는 못한다. 하지만 1시간 남짓 느릿느릿 쉬기를 반복하면서 산을 오르니 남한산성엔 생각보다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저기는 서문(west gate)이었다.
아침 7시 남짓한 이른 시간이어서 산은 한산했지만, 그래도 하산하는 몇몇 일행과 마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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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봉 옹성에 들렀다가 왔다. 아무 산에나 이런 구조물이 있는 게 아니니 남한산성은 확실히 레어템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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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올라온 길 방향을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 날씨가 흐리고 어두워서 전망이 그리 좋지는 않다. 또한 그렇게 막 높게 올라온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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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내가 하산할 지점(하남시 춘궁동)을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이다. 좌우로 산(언덕?)에 둘러싸인 일종의 계곡 같은 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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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안팎은 대충 이런 형태였다. 대포와 폭격기가 발달하면서 지금이야 이런 성 같은 건 군사적 가치가 전혀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가파른 산들 사이에 분지가 조성된 여기가 천혜의 요새 그 자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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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북문이다. 본인은 하산은 이쪽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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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로터리. 남한산성 내부에는 아예 각종 맛집 마을이 조성돼 있으며, 자동차가 들어오는 정도를 넘어서 정규 노선 버스가 다닌다. 물론 산중턱이니 올라가는 데 기름이 많이 들 것 같다. 북한산성 주변은 이런 거 없음.
주변엔 한옥 형태의 한식당이 가득하다. 내가 갔을 때는 시간 관계상 아직 문을 연 곳은 없었음. 그래도 다들 가격이 왕창 셀 것 같았다.

저기서 방향을 꺾어서 조금만 더 가면 남한산성 행궁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건 미처 생각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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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북문으로 나가서 하산을 시작했다. 지도에서 봤을 때 고도 대비 등산로가 좀 짧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지그재그 스위치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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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벗어나서 버스 정류장이 나올 때까지 한참을 걸었다. 서울 외곽에서 산 하나만 넘으면 이렇게 전원적인 마을이 펼쳐진다는 게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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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봐 뒀던 버스 종점 겸 공영주차장에 도달했다. 공간이 얼마나 여유로운지, 저 주차장은 관리인도 없고 전면 무료이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차를 여기에다 두고 안심하고 등산을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본인은 등산 원칙이 "갔던 길로 돌아오지 않는다"이기 때문에 어지간히 장거리 등산 원정을 떠나는 게 아닌 이상, 차는 가져가지 않는다. 여기서는 옆에 세워져 있던 마을 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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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하남 시내에서 내려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는데...;; 시가지 도로의 모습은 약간 문화 충격을 느낄 정도였다. 나름 광역버스 9301이 지나는 길인데도 시내 도로가 이렇게 작다니.
하남대로라고 불리는 국도 43호선 구간을 제외하면 다 저런 것 같았다.

서울 역까지 가장 깊숙이 들어가는 버스는 9301뿐이고, 나머지 도시형 버스들은 다들 동서울 터미널 정도까지만 갔다. 물론 어느 것이든 국도 43호선의 천호대로 구간으로 들어가서 5호선 강동 역을 경유하는 건 변함없으므로 본인은 아무 거나 타고 귀가했다. 하남시와 인접한 서울 동쪽 끝자락에도 그린벨트가 풀리고 아파트가 곳곳에서 지어지는 게 보였다.
어쩌다 보니 남한산성 답사기는 다른 등산기보다 글이 좀 길어졌다.

Posted by 사무엘

2016/05/24 08:34 2016/05/2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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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이야기 계속..)
유명한 순교자 중에 손 양원 목사는 신사 참배 거부로 인한 투옥(일제)에다 빨갱이들에 의한 순교라는 박해와 순교 2관왕을 달성했다. 게다가 그는 자기 아들을 죽인 폭도를 양자로 입양했으며, 미국으로 유학 보내려던 친아들에 대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보내 주신 것을 감사, 이 미천한 가문에서 감히 순교자가 배출하게 해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 이렇게 간증했던 정말 넘사벽급의 크리스천이었다.

저분 말고도 몰년이 1950년 가을/겨울인 분들이 너무 많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 원 성덕 목사: 공산 치하의 의주 영산 교회를 시무하던 1950년 12월,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살해당했다.
  • 이 창현 영수(領袖. 장로교의 직분 이름): 1950년 11월 18일 공산군에게 체포. 평원리 뒷산에서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라는 신앙 고백과 동시에 총살 당하고 구덩이에 매장됨.

북괴 공산 빨갱이 집단의 만행을 잊지 말아야겠다. 빨갱이의 만행을 용서하는 것과, 빨갱이를 빨갱이라고 인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여기는 반공 정신 함양을 위해서도 방문할 가치가 있는 좋은 곳이었다.
기념관의 밖에도 야외 예배 공간과 산책로가 있는지라, 반쯤은 기독교 수양관이나 기도원 같은 분위기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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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갖다 놓고는 "나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 엥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ㅜㅜㅜ 그런데 비록 대한민국이 지금 신앙의 자유가 마음껏 보장된 고마운 나라라고 해도, 이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때 마냥 웃을 일은 아니다.

첫째, 우리는 비록 옛날처럼 성경을 대놓고 불태우거나 성경 소지자를 국가에서 나서서 죽이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성경이 변개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꾸 그 믿음을 고집하면 죽는다"라는 위협은 없지만, "그 고집을 조금만 꺾으면 돈도 훨씬 더 많이 벌고 인생이 참 편해질 텐데?" 같은 유혹은 곳곳에 상존해 있다. 옛날에는 가야 할 길이 참 물리적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이었겠지만, 지금은 가야 할 길이 뭔지조차 엄청 혼란스러워지고 전투 양상이 교묘해져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좁은 길을 가고 진리를 수호하고 살면, 그게 곧 사육신에 준하는 생육신이 될 수 있다. "죽기까지 신실하라"(계 2:10)라는 말은 정말 피할 수 없는 경우 죽음까지 불사할 정도로 신실하라는 말이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100% 죽으라는 얘기는 아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실제로 죽이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둘째로..
아직까지는 매우 극단적이고 비관적인 상상으로 비쳐질지 모르나, 대한민국 땅이라 해도 가까운 미래에 그야말로 물리적인 박해가 시작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전세계적인 반성경 반기독교 감정이 횡행한다면 다른 모든 정치 집회나 폭력 시위는 허용되면서 공개적인 거리 설교나 선교 행위만은 금지될 것이다. 동성애가 죄라고 공석에서 말하는 게 금지되고, 이걸 어기면 잡혀 가고 전과자가 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공직에서 쫓겨날지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진보의 탈을 쓴 안티 대한민국 종북 성향의 흉악한 정치인· 국회의원· 법조인이 권력을 장악한다면, 저런 날이 훨씬 더 빨리 찾아오게 될 것이다.

비록 신약 크리스천들은 적그리스도 통치와 엄청난 자연 재해를 직접 경험하는 대환란까지는 겪지 않고 그 전에 휴거되겠지만, 대환란의 전이라 해도 어느 정도까지 세상이 맛이 가는 걸 보고 휴거될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세상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직전까지 절~대로 성경 친화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니 영적으로 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이것만 생각해도 끔찍한데 아예 교회가 대환란을 직접 겪는다는 말은 꿈에서도 생각하기 싫다.

...
자, 이렇게 경건한 곳을 들른 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용인에 있는 삼성화재 교통 박물관이었다. 마침 이 타이밍에 맞춰서 흐리던 날씨도 아주 맑아진지라, 분위기 전환용으로 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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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는 백 남준의 작품이라는데 흰색 칠을 씌운 옛날 자동차들이 쭉 세워져 있었다.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건 마치 패션 유행처럼 변해 온 것 같다. 마차와 별 차이 없던 빈약하던 시절, 저렇게 동글동글 두툼하던 시절 등등~ 나도 차 모양만 보고는 이건 대략 몇 년대 디자인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스페어 타이어도 한때는 차 뒤에 있다가 나중엔 측면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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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교통 박물관인데 이 물건이 없어서는 곤란하겠지. 1886년에 벤츠가 발명한 세계 최초의 4행정 휘발유 엔진 자동차이다. 오늘날의 어지간한 경차에 맞먹는 984cc 배기량으로 엔진 출력은 겨우 1마력이 채 되지 않았다.
컴퓨터 회로의 집적도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자동차 엔진도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엄청나게 발전해 왔다. 그런데 전자식 컴퓨터의 역사는 아직 100년이 채 안 됐다는 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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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실물 전시는 자동차 위주이고, 거기에 철도와 선박 이야기가 약간 겉절이로 낀 정도였다. 비행기는 딱히 소개가 없고 야외에 옛날 소형 프로펠러기 두 대가 전시된 게 전부이다.
철도에 대해서는 증기, 디젤, 전기 기관차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옛날 열차 승차권 컬렉션도 있었는데.. 이런 물건만 전문적으로 구경하려면 의왕에 있는 철도 박물관을 가는 게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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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언어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자동차인 '시발'. 미군 지프 부품을 이용해서 최초로 한반도에서 밑바닥부터 '생산'된 자동차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옛날엔 삼륜차가 있어서 지금의 다마스· 라보 같은 생계형 용달차 역할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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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나름 아주 어렸을 때(초딩~) 포니 2 말고 포니 1이 돌아다니는 걸 아주 가끔 본 적도 있는데.. 실물을 얼마 만에 다시 보는지 모르겠다. 반가워서 사진을 두 장 찍었다. 포니는 알다시피 우리나라에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이다.
여기에 우리나라 올드카가 전시된 건 포니, 시발, 코로나, 기아 삼륜차 정도가 전부였다. 여기가 무슨 <금호상사>처럼 올드카 전문 전시관은 아니니까. 그래도 브리사나 봉고를 보지 못한 건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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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풍미했던 영국과 미국의 대형 고급 승용차가 전시되어 있다. 롤스로이스 팬텀(검정)이야 유명하고, 캐딜락 엘도라도는 미국식의 각진 디자인이 참 인상적이다. 자기네 본토가 독보적으로 땅 넓고 자원 풍부하고 내수 수요도 많다 보니, 차를 엄청 크게 만들곤 했다.

딴 얘기이다만, 역사상 최초로 전륜구동 승용차를 만든 곳은 프랑스의 시트로엥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복잡한 엔진 부품에 끼여 있고 조향 역할도 하는 앞바퀴에다가 구동축까지 집어넣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 포니는 현실적으로 만들기가 더 쉬운 후륜구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포니 택시를 탔을 때 뒷좌석의 중앙 하부를 관통하던 커다란 구동축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러나 전륜구동이 개발되면서 중소형 승용차는 효율이 더 좋아지고 뒷좌석 공간도 더 확보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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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 전시된 '혀기형 증기 기관차'.
얘는 수인선과 수려선에 투입될 목적으로 생산된 협궤용 증기 기관차이다. 아까 보고 온 그 오천 역 일대를 실제로 지나며 달렸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두 개념이 이렇게 서로 연결이 된다. 이 증기 기관차는 디젤 동차의 등장과 함께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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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바깥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어서 돗자리 깔고 텐트 치고 놀거나 쉴 수 있었다. 가족 단위로 애들을 데리고 오기도 좋고, 학교에서 단체 관광을 오더라도 끄떡없을 듯했다.
그런데 토요일에 이렇게 날씨가 좋으면 이런 박물관보다는 근처의 에버랜드가 사람들로 터져 나갔을 것 같다. ^^

이상으로 이천· 용인 테마 여행을 아주 즐겁게 마쳤다.
여기 말고도 우리나라의 서쪽 끝, 남쪽 끝, 동쪽 끝, 중부 등 몇 군데 가 보려고 찜해 둔 곳이 있다.
거기도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주요 기능 개발이 끝나고 박사 과정도 연구 학기로 들어갔을 때쯤 1년에 한 번씩 가 볼 생각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10/06 19:23 2015/10/0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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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작년 5월에 철원에 성공적으로 다녀 온 것에 고무되어 이번에는 토요일 개천절에 경기도로 테마 여행을 떠났다.
날씨는 한창 맑고 좋고, 학교는 입시생들 논술고사 때문에 폐쇄이고, 공휴일이라 교회 신학원도 안 하니 이런 날은 잠시 짬을 내어 어디 갔다 올 가치가 충분했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8.2가 아직 갈 길이 멀며 회사일과 학교 과제가 날 압박해 오고 있지만, 일단은 잠시 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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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를 한 직후에 고속도로를 좀 뛰었더니, 역시나 시내 구간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엄청난 연비가 나왔다.
사람에게 힘든 건 기계에도 동일하게 힘든 법. 경제 속도 + 최대한 관성으로 쭉쭉 달려 주는 게 답이다.
(주유를 하고 나면 차내 컴퓨터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던 연비 정보가 싹 없어지고 초기화된다.)

그리고 아침 일찍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옛 수려선에 있던 오천 역 건물이었다. 이것은 현재까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협궤 철도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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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선(수원-여주)은 일제 강점기이던 1930년에 부설되었다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반세기에 가깝게 전인 1972년에 이미 폐선되어 없어진 철도이다.
선로와 노반은 다 사라졌지만, 이천에 있던 오천 역 건물만은 민가로 바뀌어서 유일하게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 붉은 벽돌 외형이 그 대표적인 예. 요즘 지어지는 철도역들은 유리궁전 스타일이 대세이지만 그때는 저게 주된 건축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와서는 이 건물은 거주민이 없이 흉가처럼 방치됐고, 부지 일대는 재개발이 확정되었다. 그래서 저 건물도 언제 불도저로 싹 밀려 쥐도 새도 모르게 철거될지 알 수 없다.
철덕으로서 나도 어서 가 봐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을 갖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드디어 성지순례를 마쳤다. 역사 주변의 여러 지점에서 사진을 찍은 뒤, 마지막으로 옆 건물에 올라가서 역사를 내려다보며 한 컷을 더 찍었다.

아무쪼록 저 건물은 사라지지 않고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이 됐으면 좋겠다. 경의선 신촌 역 옛 역사가 보존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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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역 건물을 답사한 뒤에는 '진짜' 성지순례를 하러 갔다. 인근에 있는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을 방문한 것이다. 오천 역에서 거의 7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본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두 곳을 동시에 답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순교자 기념관은 어느 성도가 산 속 사유지를 기증해서 건립되었으며, 지금 서울 합정동에 있는 선교 100주년 기념 교회던가? 거기서 걷히는 헌금으로 운영된대서 입장료조차도 안 받는 대인배 기념관이었다.

가는 길부터가 포스가 넘쳤다. 몇몇 주택과 회사· 공장을 지나서 산을 계속 오르자, 산상설교부터 시작해서 성경 구절 팻말들이 방문자를 반겨 주었다. 나중에는 한국에서 순교한 목사· 전도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들이 옆에 쭈욱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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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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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안에는 이런 그림체로 순교를 묘사한 그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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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 호 사건 때 목숨을 잃은 토머스 목사/선교사는 '순직'인 건 명백하겠지만 '순교'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치 지난 2004년에 김 선일 씨도 이라크에서 업무상 '순직'을 한 것이지 '순교'는.. 글쎄? 인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요나에 대해서도 순교자로 묘사해 놓은 그림이 있었다. 요나가 요나서를 기록하고 나서 나중에 다른 일을 하다가 순교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나서의 그 사건에서만은 그는 성경적으로 볼 때 절대로 순교자 모드가 아니었다. 이런 건 좀 분별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거시적으로는 정말 선교의 빚을 지고 있는 게 맞다. 그 옛날에 미국에서 (헬)조선으로 선교사를 보낸 건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에서 무슨 베트남, 캄보디아, 네팔 따위로 선교사를 보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본인 당사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처자식까지 얼마나 고생해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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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2층에는 예배실이 있어서 교회에서 단체 관람을 온 사람들이 모여서 간단히 예배 집회를 열 수 있었다.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벽에는 우리나라 교회사와 관련된 여러 글과 사진 자료들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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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번역의 변천사. 스캔 하나는 참 깨끗하게 잘 했다.
다만, 우리나라에 처음부터 킹 제임스 성경 계열의 역본이 전해지지 못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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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3층에는 '순교자' 믿음의 선배들이 쭈욱 나열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기독교(개신교 포함)는 천주교와 달리 조선 정부에 의한 박해는 그리 많지 않다. 기독교는 프랑스인이 아닌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전파되었고, 공권력에 의한 박해보다는 제사 거부 같은 걸로 인한 민간 차원에서의 박해가 더 많았다.
그나마 구한말 때의 거의 유일한 순교자로는 백 홍준 장로만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도 직접적으로 사형을 당한 건 아니고 옥사다.

일제 강점기 때도, 독립 운동과 무관하게 기독교 신앙 자체만으로 인한 박해는 말기의 신사 참배 강요 이전까지는 딱히 심한 지경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정말로 엄청난 수의 순교자가 발생한 건 오히려 해방 이후부터였다. 공산주의자, 일명 빨갱이들은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일당독재 우상화를 거부하는 기독교를 지독하게 박해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기념관에 적혀 있는 소개 문구이다.

* 북한의 교회 재건
"38선이 놓이면서 북한에서는 교회의 탄압이 계속되었고, 이를 피하여 많은 신도들이 남한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북한의 공산당들은 교회가 새롭게 재건되는 강한 힘을 느끼게 되자 1946년 11월 3일이 일요일인데도 이 날을 북괴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의 날로 정했다(참고로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총선거일은 월요일!). 이에 교회들은 즉시 반발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여 북한 당국에 보냈다. 이러한 항거에 부딪치자 공산당들은 이들을 투옥하고 강제 노동을 시키면서 박해를 가했다.
드디어 1946년 11월 28일에는 그들의 어용 단체로 기독교 연맹을 조직하여 교회를 공산주의 선전에 이용하고, 김 일성을 절대 지지하며 선거에 솔선수범한다는 결의문까지 발표하게 했다. 이에 따라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들은 투옥되거나 추방 당했다."


옛날 로마 제국 시절에 대음모자 콘스탄틴이 부패한 국가 어용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신)를 만들고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더 악랄하게 괴롭히고 박해한 것과 완전히 똑같다. 평양이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에 반해 우리 남한, 대한민국은..

* 남한의 교회 재건
"해방 후 남한은 미군이 진주함으로써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만세!) 일제 말엽에 강제로 모든 교파의 통합이 이뤄졌고 해방 후에도 그 합동 교단을 그대로 존속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에 새문안 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이 모여 교회의 통합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각 교파 교회로의 환원에 대한 집념이 더 강한지라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등 각 교파는 각자 활발히 선교하여 교세를 확장하여 갔다."


이래서 남한과 북한의 운명이 극과 극으로 갈린 것이다.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한없이 타락하던 북이스라엘과, 그나마 좋은 왕과 나쁜 왕이 번갈아가며 나오던 남유다 왕국처럼!
난 개인적으로 교파가 저렇게 찢어진 것을 그렇게 나쁜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제 강점기 때처럼 사람의 신앙의 자유를 거슬러서 강제로 통합을 하고 그 통합을 주도한 주체가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게 훨~씬 더 나쁘고 악한 현상이다.

대한민국은 크리스천 초대 대통령 덕분에.. 한중일 나라들 중 유일하게 건국/정부 수립 거의 직후부터 성탄절이 빨간날로 지정되었으며, 군대 내부에 군목을 비롯한 군종 병과가 가장 앞장서서 제정되었다. 정교일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헌 국회 기도문 같은 건 본인은 아주 고맙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5/10/04 08:38 2015/10/0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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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여름의 여행 일지

1.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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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4호선의 북쪽 종점인 당고개 역의 주변을 보면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게 참 인상적이다.
기왕 등산을 할 거면 그 산을 한번 올라 보고 싶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했다.
결국은 같은 수락산이긴 한데 지난 3월엔 깔딱고개 근처까지 간 반면, 이번엔 귀임봉을 지났으며, '서울 둘레길'을 지나서 7호선 마들 역 근처로 귀환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맥북은 나의 소중한 등산 동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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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앙선 아신 역

이제 전동차의 운행 계통은 경의선과 중앙선이 통합되어 경의중앙선이라고 불리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경의선과 중앙선은 같은 수도권 광역전철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 중앙선이 지나는 지역인 양평은 상수도 보호로 인해 태생적으로 개발 제한 봉인이 걸린 곳이 많으며, 개량된 중앙선 역시 강을 가까이 지나는 구간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풍경 사진 중에서 역시 산과 강을 담은 것만 투척한다. 색감이 예뻐서. 한적한 경춘선이나 중앙선 전철역으로 나가서 코딩이나 독서를 하고 있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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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린벨트 마을 답사

방학+주말을 기념해서 등산만 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고 차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다.

난 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바와 같이, 서울 외곽의 야산과 그린벨트 지대 탐험에 대한 로망이 좀 있는 사람이다. 한번은 동부간선 → 지방도 23호선을 타고, 서울 공항 근처의 신촌동과 심곡동 마을을 드디어 밤에 몰래 답사했다. 여기 사는 주민은 어떤 사람들일까? 대대로 여기 살던 선조의 후손? 아니면 겁나게 부자들? 민통선 안에서 농사 짓는 사람들만큼이나 신기하게 느껴진다.
미처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지만 전방에서 갑자기 굉음과 함께 거대한 수송기가 활주로에 내려앉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서울 공항(=공군 기지)이 코앞이니까.

그 뒤 청계산로로 갈아탔다. 자연의 정취가 살아 있는 으슥하고 한적한 도로를 달리면서 대왕 저수지와 신구대학 식물원 일대를 구경했다. 여기는 바깥쪽 차선이 다 자전거 도로로 만들어져 있었다. 요런 데서 차 세워 놓고 혼자 자면 가히 야영 캠핑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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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가 도로는 서울-용인 고속도로(171)이다.

계속 진행하자 길은 경부 고속도로를 나란히 지나면서 북쪽으로 가기 시작했으며, 말 그대로 청계산 등산로와 신분당선 청계산입구 역이 나왔다. 중간엔 서울 신원동의 새정이마을을 들러서 답사했다.

4. 경기화학선 폐선 부지

양재-서초 IC 사이는 잠깐 경부 고속도로 구간으로 건넜고, 다음으로 본인은 남부순환로를 타고 서울의 서쪽 끝으로 갔다. 남부순환로는 중간에 압박스러운 경사는 그렇다 치고, 중앙에 화단이 쭉 조성돼 있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서울에서 이런 도로는 여기밖에 없는 듯. 도로 폭이 차선수를 홀수 개로 어정쩡하게밖에 만들 수 없는 규모이기라도 했나 보다.

그리고 본인이 새벽에 간 곳은.. 오류동 역과 푸른수목원의 사이에 있는 경기화학선 폐선 부지였다. 세상에, 주거지 근처에 이렇게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폐선을 보는 건 옛날 수인선 협궤 폐선 이래로 처음이었다. 게다가 여긴 엄연히 인서울 지대인데! 과연 철덕의 성지 순례 코스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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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울 지하철 7호선 천왕 차량기지

서울 남서쪽 끝까지 먼 길을 찾아가서 철도 답사를 했는데, 여기를 들르지 않고 간다면 그건 철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천왕 차량기지를 경건한 마음으로 한바퀴 빙 돌면서 성지순례를 했다. 자동차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여기를 직접 가 보는 날이 오는구나!

차량기지 중에는 도봉이나 개화처럼 아예 내부에 역이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7호선 장암, 9호선 개화 역) 지축, 창동, 구로, 군자, 신내처럼 다른 전철역 근처에서 기지를 그럭저럭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아니면 철도로는 접근을 못 해도 고덕이나 수서나 모란처럼 고속/고속화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차창 밖으로 어렴풋이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하지만 천왕 차량기지는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차량기지들 중에 가장 존재감이 없고 접근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곳이라고 여겨져 왔다.

여느 차량기지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구간은 담장과 철조망이 쳐져서 은폐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용케 요런 곳을 찾았다. SR001 전동차가 지상에 나와 있는 실물 사진을 건지는 데 성공했다. 허나, 내가 하는 행동은 남이 보기엔 영락없이 국가 기간 시설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무단 촬영이나 하는 수상한 간첩-_-처럼 보였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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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을 통해 그린벨트 마을 3군데와 경기화학선 철길, 그리고 천왕 차량기지 답사라는 수확을 거두고 돌아왔다. 자동차는 이런 데 활용하라고 만들어진 편리한 문명의 이기임을 실감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5/07/10 08:36 2015/07/1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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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설 연휴 기간에 본인은 가족 전체가 동남아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 관광이다.
부모님이 퇴직하셨고 본인을 포함한 자녀들은 아직 미혼이니, 지금 같은 시기가 온 가족이 같이 여행을 떠나기에 적절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외국 가는 비행기를 탄 지도 무려 6년이 돼 가고..
더 늦기 전에 여행기를 이제야 간단히 정리해서 올린다.

가족이 한꺼번에 움직인 덕분에, 지금까지 공항 철도나 리무진 버스로만 가던 인천 공항에 난생 처음으로 자가용을 끌고 가 봤다. 운전은 언제나 본인이 도맡아 했고.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공항의 장기 주차장엔 벌써부터 차들로 포화 직전이었는데, 가까스로 빈 자리를 하나 발견해서 차를 세웠다.

그렇게 기대를 품고 공항에 도착했으나, 베트남 항공 소속의 여객기가 정비 상태를 이유로 거의 10시간이 넘게 지연됐다. 관광 일정에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어차피 이건 크리티컬한 업무를 목적으로 나가는 게 아니고 인천 공항은 안 그래도 내부 시설이 굉장히 좋은 공항이니, 출국 도장을 찍은 상태로 탑승동에서 이렇게 오래 지내고 있는 것도 나름 색다른 경험이었다.

항공사 측에서는 처음엔 기다리는 동안 밥이나 먹으라고 식권 정도를 내 줬으나, 지연이 길어지자 결국은 사람들을 버스에 태우고 도로 여객 터미널 입국장으로 보내서 출국 심사를 취소시키고 인근의 호텔에다 승객들을 보내 줬다. 저녁 식사까지 무료로 제공해 주고..;; 비행기 하나가 지연되는 바람에 승객들도 불편했지만 항공사 역시 손해를 굉장히 많이 봤지 싶다.

덕분에 현지 호텔을 구경하기 전에 운서동 공항 신도시 일대의 호텔부터 먼저 구경하게 됐다. 주변에 아파트 말고 전원 주택들은 전망이 참 좋아 보였다. 뭐, 본인이야 노트북 PC가 있으니 기다리는 동안 프로그램도 짜고 글도 쓰면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밤 비행기를 타고 먼저 베트남 북부의 하노이 공항에 도착했다. '하노이의 탑'의 원조 국가에 왔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여기는 역사적으로 나름 프랑스를 이기고 미국까지 이긴 나라라고 자존심이 쩐다고 한다. 그리고 호치민을 정말 미치도록 숭상한다고.

베트남에서는 해안으로 건너가서 배를 타고 우리나라 제주도나 남해를 뺨치는 다도해와 동굴을 구경하고 맛있는 해물 요리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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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시가지의 모습. 우리나라는 택시가 기본적으로 2000cc급 중형인 반면, 여기는 경차가 주류이다.
하긴, 우리나라도 2, 30년 전에는 1500cc급도 안 되는 소형차인 포니가 택시로 제일 많이 굴러다니곤 했다.
그리고 이보다도 베트남엔 오토바이가 훨씬 더 많이 굴러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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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호치민 광장을 구경했다. 호치민 자체는 나름 인품을 갖춘 좋은 지도자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기는 어쩔 수 없는 사회/공산주의 국가이더라. 구소련이 망한 지가 언젠데 낫과 망치 깃발 실물을 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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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약 1시간 반 동안 1000km남짓을 비행하여 캄보디아의 씨엠 립 공항에 도착했다.
이 공항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행기에서 내린 뒤, 브리지나 셔틀버스가 없이 승객들이 활주로를 직접 걸어서 여객 터미널로 들어가야 하는 공항이다. 철도역으로 치면 선로를 그대로 횡단해야 하는 시골 간이역 정도?

날씨는 베트남보다 더욱 더워져서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가 위도가 몇 도이고 자전축이 몇 도 기울어져 있지? 서울과 비교했을 때 햇볕을 받는 각도의 cos 값이 얼마나 차이가 나지?" 같은 별 잡생각이 다 들 지경이었다.
여기는 입국 관리 공무원에게 공식적인 비자 발급 비용 외에도 대놓고 1$씩 뇌물을 줘야만 심사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_=;;

날씨도 더운데 앙코르 와트는 정말 핵심만 초스피드로 보고 돌아왔다. 요게 제일 먼저 만들어진 사원이고, 그야말로 캄보디아의 국기에도 그려져 있을 정도로 상징적인 유적이다. 캄보디아를 먹여 살리는 제1순위 관광 자원인데.. 이것도 처음 발견되었을 때와는 달리 굉장히 많이 파괴된 거라고 하니 참 안습하다.
서양 사람들은 처음엔 이걸 미개한(?) 동남아시아 사람이 만들었을 거라고 믿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마인의 후손이 만들었다고 우기기엔 표현되어 있는 종교관이 전혀 서양스럽지가 않은걸?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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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뿌리와 뒤엉킨 이 유적지는 아까 것보다는 더 나중에 만들어졌다. 앙코르 제국도 여러 시즌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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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 유적지는 굉장히 넓기 때문에 중간 중간엔 툭툭이를 타고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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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적지들이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는 얼마나 더 화려하고 웅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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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도시인 씨엠 립은 6번 국도던가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다니는 큰길만 벗어나면 곧장 그냥 황무지 깡촌이었다. 카누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서민들이 사는 수상 주택 단지를 구경하기도 했다. 이런 단지가 조성된 것에도 다 사연이 있다고 함.

물은 별로 깊지는 않지만 정말 처참하게 더럽기 때문에 저 물이 몸이나 옷에 묻는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저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1년 365일을 살 수 있나, 생계는 어떻게 꾸리며 위생 문제와 먹고 입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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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캄보디아라 하면 잊을 수 없는 건 일명 '폴 포트'라는 미치광이가 벌였던 킬링필드 학살극이다. 희생자의 유골을 안치해 놓은 어느 납골당을 방문하고 거기 적혀 있는 옛날 사진과 안내문을 보기도 했다.

어떤 나라가 힘이 없어서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고 나중에 독립조차도 자기 힘으로 스스로 쟁취한 게 아니라면, 결국은 한 외세가 물러난 뒤에도 다른 외세들의 이념 각축장이 되고 파란만장 기구한 역사가 이어지는 건 남의 일만이 아닌 것 같다. 특히나 그런 와중에 공산주의는 단순히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농민· 노동자(?)뿐만이 아니라 먹물깨나 먹은 지식인도 잘 현혹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결국 실현 불가능한 사상을 강제로 실현하려다 보니 인민들을 온통 바보 노예로 만들어야 하고 딴 생각 잡 생각을 못 하게 극도의 폭력과 공포로 통치를 해야 하고 종교도 말살하고 서로 감시와 밀고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도자의 우상화와 절대독재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김 일성이고 호치민이고간에 자기 우상화를 하지 말라고 유언을 했어도 유언이 당연한 듯이 씹히는 이유는.. 그렇게 우상화를 해야만 공산주의 체제가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매우 악한 사상인 이유는 "능력껏 벌어서 필요한 만큼/혹은 1/n만치 분배한다"라는 성선설을 제시해 놓고는 정작 그걸 실현하고 운영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성악설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필요악이라고 선을 긋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성선설 따위는 없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고찰을 한 사람이라면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반공 때문에 불가피하게 벌어졌던 필요악이나 부조리를 보는 눈이 한결 관대해진다.

이런 것들을 보고 느꼈다.
귀국하고 나니 공항의 주차난은 더욱 심해져서 이중주차에, 도로변 주차까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이 수하물을 찾는 동안 본인은 먼저 밖으로 나가서 차를 여객 터미널로 가져왔다. 여객 터미널에서 장기 주차장까지는 수백 m 이상 떨어져 있으니까. 차는 깜빡 잊고 블랙박스를 켜 놓은 채로 추위 속에서 닷새 가까이 방치됐지만, 다행히 시동이 잘 걸렸다.

동일한 고속도로 구간에서 불과 1주일쯤 전에 짙은 안개 때문에 106중 추돌 사고가 발생했었지만, 지금은 안개고 뭐고 없이 도로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5/03/13 08:30 2015/03/1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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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국민의 외국 여행이 완전히 자유화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년쯤 전인 1989년 1월 1일부터다.
그 전에, 특히 1980년대 이전에는 대한민국 국민은 단순 관광 목적으로는 아예 여권을 만들 수 없었다.

대학생의 어학연수나 배낭 여행? 그런 거 없었다.
신혼여행으로 하와이나 몰디브? 푸켓? 그런 거 없었다. 단순히 돈이 없어서 밖으로 못 뜨는 게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믿을 수 없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옛날에는 외교관의 관용 여권 내지 무역 회사 간부의 상용 여권 정도만이 있었다. 그런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 일반인이 합법적으로 외국으로 나가려면 유학이나 해외 취업 같은 정말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만 했다.
그때는 여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완전 엘리트 똘똘이 내지 심지어 정부와 커넥션이 있다는 보증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다가 1983년에는 50세 이상 중장년층만 그 당시 물가로 100~200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예치금을 낸 뒤에야 관광 해외 여행이 허가되었다. 그때는 미국 비자 받기도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테고 물가 대비 비행기 운임도 더욱 비쌌을 테니 해외여행은 가히 세상 살 만치 다 살고 아주 풍족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어르신들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나 국제선 비행기를 탈 수 없던 시절에 대한 항공 007편, 902편, 858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참 억울하긴 했을 것 같다)

그 연령이 1987년경에 40대를 거쳐 30대까지로 낮아진 뒤, 서울 올림픽까지 끝난 1989년부터 장벽이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때는 우리나라가 소련과 수교하고 차우세스쿠 정권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격변기이긴 했다. 아 참, 대한 항공에 이어 아시아나 항공이 취항한 것도 딱 이 시기이고.

그런데 생각해 보자.
하다못해 그 전의 일제 강점기 때에도 조선인들은 '황국 신민' 자격으로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 러시아, 대만까지 별다른 제약 없이 드나들 수 있었으며 일부 용자는 미국도 갔다 왔다.

그와 대조적으로 대한민국은 자유를 표방하면서도 왜 그토록 오랫동안 국민의 해외 여행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을까?
나라에서 자국민의 외국 방문을 너무 엄하게 통제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외국으로 유학 갔다가 귀국 안 하고 거기서 정착해 버린 고학력자 엘리트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1. 냉전으로 인한 불온사상 통제

옛날에는 냉전 때문에 국제 정세가 지금보다 매우 험악했다. 그 시절에 동북아시아에 공산화가 되지 않은 나라는 별로 없었다는 걸 명심하시라. 북한, 중국, 소련 같은 사상적으로 위험한 나라와 방문 금지 국가가 이웃에 즐비했다. 국민들을 호락호락 외국으로 보내 줬다간, 누가 밖에서 공산주의 물 몰래 먹고 와서 뻘짓을 할지 어떻게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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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은 초대 대통령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주로 제시하는 그림이긴 한데..)

그래서 1980년대에는 여권을 만들려면 예치금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시키는 반공 교육도 잔뜩 받아야 했다. 거액의 예치금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안정된 사회 기반이 있으며, 나이도 충분히 먹어서 알 거 다 알고 용공사상에 낚일 우려가 없는 사람에게만 여권 발행을 허락했는데도... 그걸로도 안심이 안 돼서 반공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하긴, 일제 강점기 때에 한반도에 공산주의 사상이 전래되었던 것도 비교적 자유로웠던 국제 왕래 덕분이니 저러는 사정을 이해는 한다.

2. 여행을 빌미로 한 원정출산 내지 병역기피 방지

미국으로 날아가서 자기 배 속의 자식 새끼를 미국 시민으로 만들고 군대에서 빼는 약삭빠른 부유층 집안 얘기를 들으면 누구라도 열받지 않겠는가?

더구나 주민등록 전산 시스템도 없고 정부의 행정력이 지금보다 빈약하던 시절에 부유층 자제가 저런 꼼수를 써서 외국에서 잠적해 버리면... 징병제를 하는 나라에서 병역기피자를 잡아낼 길이 없었다. 부자들에 대한 서민들의 반감과 증오심은 더욱 커질 것이고.
게다가 옛날엔 지금보다 우리나라의 군사 안보가 더욱 위태로웠었다.

3. 과소비 + 외화유출 방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나라 분위기가 어땠던가? 외화 벌이에 목숨 걸고 완전 국산품 애용 + 양담배 추방 이러던 시절이었다. WTO(세계 무역 기구) 가입, 세계화, 개방 같은 풍조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단순 관광 목적 해외 여행은 사치를 넘어 죄악· 금기시되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하다못해 1970년대 박 정희 시절엔 기술적으로는 이미 다 가능해졌는데도 빈부 계층간에 위화감이 조성된다는 이유로 텔레비전조차도 컬러를 도입하지 않고 흑백 시스템을 일부러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외국 여행도 통제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 이유가 있으니, 과거에 있었던 이 나라의 외국 여행 통제에 대해서도 무슨 군사 정권의 산물이네 어쩌네 하면서 부정적인 면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970년대에 20대 나이를 보낸 본인의 부모님께 그 시절의 분위기에 대해 여쭤 봤다. 사실 그 시절엔 대다수 서민들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궁핍했고, 먹고 사느라 바쁘지 해외 여행 따위는 어차피 꿈에도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었다고 한다. 신혼여행도 당연히 강원도나 부산 정도에, 돈 좀 보태면 제주도인 게 당연시되었고 말이다. 그러니, 나라에서 해외 여행을 막든 안 막든 그딴 거 관심 없고, 어차피 그건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니 딱히 제약이나 억압이라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1989년에 봉인이 풀리자마자 중산층 이상 서민들은 휴가철에 앞다퉈 해외로 나갔다. 각종 여행사 산업이 흥왕하기 시작했다. 1988년까지 흑자이던 관광 수지가 곧바로 적자로 떨어졌다. 그리고 해외 관광을 처음 하는 사람들 중에 일부 몰지각한 부류들이 벌이는 '어글리 코리안' 추태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국제 매너라는 개념 자체가 지금까지 없었을 테니.. 쩝~

요즘 경제가 어렵고 서민들 살기가 힘들어 죽겠다고 징징대는 말이 많다. 하지만 휴가철만 되면 공항은 외국 여행 가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성수기에 유명 관광지로 가는 비행기 표는 없어서 못 구한다. 솔직히 우리나라 정도면 서민들이 평균적으로는 정말 잘 살고 세계 상위급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옛날과 비교했을 때는 더욱 말이다.

우리 이전 세대가 마음대로 해외 여행도 못 가고 꾹 참고 일하여 국력을 일으키고 국위를 세계에 선양한 덕분에 다음 세대들은 마음껏 지구촌을 누비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대한민국 여권 정도면, 극소수 최상위 선진국을 제외하면 무비자로도 못 가는 나라가 없지 않던가.

“밤이 피는 김포 공항 비가 내리고 시간은 자꾸 가는데..”라고 바니걸스의 <김포 공항>이라는 가요가 있다. 이건 해외 여행 자유화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1977년에 발표된 곡이다. 그때는 국제선은 정말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 탈 수 있었을 테고 지금보다 국내 도로 인프라가 열악했을 테니, 오히려 국내선의 운영 비중이 더 높지 않았나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4/02/18 08:31 2014/02/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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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노트북 PC나 읽을 책을 챙겨 들고 한적한 전철역으로 떠나서 피서를 즐기는 건 수도권 광역전철 역세권에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지금까지 경의-일산선, 분당선, 과천-안산선, 서울 7호선, 공항 철도 등 여러 노선을 다녀 봤다. 하지만 1호선과 직결되는 광역전철이나 경춘선은 상대적으로 덜 탔다. 안 그래도 토요일 낮에는 지하철들이 혼잡한 편인데 거기는 특히 너무 혼잡하기 때문이었다.

경춘선은 통일호, 무궁화호를 거쳐 지금은 전동차와 ITX 청춘이라는 실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광역전철이다. 비록 혼잡하고 타러 가기가 힘들고(무려 상봉까지!) 열차가 중앙선보다도 드물게 다니긴 하지만(경의선 서강-공덕의 배차간격과 비슷함), 주변 경치가 워낙 좋기 때문에 한 번쯤은 날 잡아서 다시 시승해 봤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경춘선 중에서도 백양리와 김유정 역에서 내려서 역 주변을 카메라에 담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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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백양리 역 승강장이다. 이 넓은 승강장에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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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의 바깥은 이렇게 생겼다.
주변이 워낙 한적하고 부지가 넉넉하니 광장도 있고 자전거 거치대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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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주차장은 그냥 무료 개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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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역 쪽을 대고 바라본 풍경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정말 운치 있어 보이지 않는가?
그나저나 경춘선은 역시 은근히 길더라. 서울-수원 정기권(거리 비례 6단계)으로도 백양리 역까지만 가도 내릴 때 추가 차감이 발생했다.

다음, 김유정 역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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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은 원래 신남 역이라고 불렸으나, 근처에 소설가 김 유정 문학촌이 있다 하여 2004년에 역명이 이렇게 바뀌었다. 이 역은 역명판의 한글 서체도 다 코레일체 대신 궁서체를 사용하고 있으며, 역사가 한옥 컨셉의 특이한 형태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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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은 선로가 고가가 아닌 평지에 있다. 그리고 역사에서 승강장으로 갈 때 육교가 아니라 '지하도'를 이용한다. 그래서 전철역이 아니라 시골의 일반열차역 같은 인상이 느껴진다.
세상에 평지 선로 + 지하도 형태인 역은 매우 드물다. 반월, 대방, 구일 정도가 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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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전철역이 아니라 시골의 일반열차 철도역처럼 보이지 않는가?
역 주변에도 한옥 스타일의 정자와 뜰이 있다. 경춘선 탐방 때 한번쯤 들러 볼 만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3/08/26 08:34 2013/08/26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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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선 구성 역

수도권 광역전철 분당선은 혼잡한 서울 시내와 분당 신도시를 지나지만 종종 한적한 곳도 지난다.

구룡은 서울 강남에서 잉여력 높기로 악명 높아서 '굴욕'이라고까지 불릴 정도인 역이다.
이매는 야탑과 서현 사이에 새로 생긴 역인데 출구 근처에 기본적으로 역세권이라 불릴 만한 업무· 상업 시설이 없으며, 길거리에 행인이 거의 안 보인다. 예전에 역이 괜히 없었던 게 아니다.

오늘은 그러한 역들 중의 하나로 '구성' 역을 살펴보겠다.
구성은 죽전 이남의 보정 다음에 등장하는 역으로, 서울-성남-용인을 잇는 대표적인 두 길인 경부 고속도로와 국가 지원 지방도 23호선--이 구간에서는 특별히 용구대로라는 이름으로도 불림--의 사이에 자리잡아 있다. 신분당선 청계산입구 역과 더불어 지하철 출입구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곧장 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역이기도 하다.

고속도로가 코앞에 보인다는 건 그만큼 역도 한적한 곳에 있다는 뜻이다. 청계산입구 역과 같은 맥락이다.
주변의 분당선 역들이 여느 지하철들처럼 다 용구대로를 따라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구성 역은 용구대로를 한 블록쯤 벗어나서 용구대로와 고속도로의 중간의 어정쩡한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역 주변에 보이는 건 자그마한 개천, 한적한 들판이다.

역이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는 선형 때문이다. 자동차 도로만 따라 남쪽으로 내려갈 경우 교차로에서 급곡선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일부 단거리 마을버스만이 일부러 대로에서 벗어나 구성 역 출입구 근처까지 들어갔다가 나오지, 간선 버스들은 그냥 용구대로만 달리면서 구성 역을 비껴 가 버린다.

구성 역은 비록 대로에서의 접근성을 희생했지만 이 때문에 여느 분당선의 역답지 않게 주변이 아주 전원적이며, 공간이 넉넉하여 공영 주차장 같은 시설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역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관계로 다음, 네이버, 구글 등의 지도의 항공 사진들은 다 2013년 7월 현재까지도 역 주변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그냥 허허벌판만을 표시하고 있다. 하긴, 2010년 말에 생긴 신경주 역조차도 항공 사진에서 주변이 제대로 표시되기 시작한 건 정말 얼마 안 됐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본인은 구성 역으로 직접 답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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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에서 내린 후 1번이나 2번 출구로 나가면 이런 지하 마당이 이용객을 반긴다. 고도상으로는 지하여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완전한 지상이 나오지만, 이곳은 하늘 위가 완전히 뚫려 있다. 분위기가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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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으로 나오면 옆엔 좁은 도로가 뚫려 있고, 저 건너편에는 넓은 부지를 이용한 공영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너머로는 그냥 들판이며, 더 건너편은 경부 고속도로이다.
공간이 넉넉한 덕분에 주차장 이용료는 어지간한 상업용 건물보다는 저렴한 편이다. 하루 종일 주차해도 6000원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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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라면 역의 좌우로 나 있는 도로로 빙 둘러서 다리를 건너야 옆의 용구대로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냥 센터에 있는 샛길을 이용해서 대로로 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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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역 바로 옆에는 신기하게도 역세권 버프를 받은 절이 하나 있다. <전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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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과 대로 사이에는 이런 게 있더라.
포장도 되지 않은 이런 공터는 이미 무료 주차장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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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용구대로는 차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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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가인 용구대로 주변과는 달리, 구성 역 주변은 정말 한가롭고 전원적이었다.
구성 역은 공간이 넉넉하고 부지에 여유가 있는 덕분에 훗날 고심도 급행 전철(GTX) 같은 철도가 건설될 때 환승역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구성 역 주변이 언제까지 이렇게 한가할지는 모르겠는데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을 좀 지켜봐야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3/07/31 08:32 2013/07/3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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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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