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 작전 (영화)

영화 인천 상륙 작전, 혹은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
일부러 날짜를 맞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6· 25 전쟁의 휴전이 타결된 날인 7월 27일에 개봉했다.
보는 내내.. 감독이 표현하고자 한 사상이 본인의 내면과 잘 통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반대로 좌빨 매체에서 별 이유 같지도 않은 궤변 늘어놓으면서 이 영화를 왜 저렇게 못 물어뜯어서 야단인지가 적극 이해되었다. 북괴 치하에서 벌어지던 잔학한 공포통치, 세뇌, 인민재판, 숙청을 저렇게 적나라하게 그려 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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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막론하고 전쟁은 그저 참혹한 거고(그 전쟁을 먼저 일으킨 쪽이 누군데?), 공산당도 알고 보면 사실 착한놈이고 미군 국군도 민간인 왕창 학살했어(민간인 위장해서 치사하고 비열하게 도발한 놈 얘기는 절~대로 없이), 동족상잔의 비극은 남북 모두 책임이네 식의 메시지를 본인은 거의 부모 모독 패드립과 같은 급으로 정말 온몸으로 혐오한다. 저건 정말 천하에 듣기 싫은 불순하고 사악하고 마귀적인 사상이다.

이 영화는 요즘 각종 다른 매체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미 다 검증돼 있는 선악 구도를 괜히 비비 꼬고 비틀고 재해석(?)하고 절대악과 필요악을 교란하는 식의 전개가 없다. 그래서 참 건전하다.
스토리의 표현이나 묘사가 옛날 영화처럼 좀 진부한 건 일단 사상이 건전한 것에 비해서야 그리 큰 흠이 아니라고 본다.

특공대가 기차를 타고 적진으로 침투하는 건 김 재현 기관사(미군 딘 소장 구출 작전)의 이야기를 다룬 <미카 129>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1950년 7월에 있었던 일이니 시기적으로 인천 상륙 작전보다 2개월 전, 이제 막 대전을 빼앗겼던 시절의 얘기다. 그 시절엔 열차 객차들이 다들 저렇게 목재에 직각 의자로 돼 있었나 보다.

그리고 대원들이 흩어지기 직전에 서로 손목시계의 시각을 동기화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래야 시간 약속에 맞춰 정확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그 정도로 소형화된 손목시계는 굉장한 사치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해방 직후에 소련군이 들어와서는 민간인에게 행패와 약탈을 일삼았으며, 특별히 약탈한 손목시계들을 한 팔목에다 주렁주렁 차고 다녔다는 걸 생각해 보시라.
그로부터 20여 년 전에 윤 봉길 의사가 김 구와 교환한 시계는 손목시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회중시계였다는 점도 같이 생각해 보자.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 영화에서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배우는 잘 알다시피 그 이름도 유명한 리암 니슨이다. 테이큰에서 내가 완전 반해 버린 그 아저씨가 '군산, 원산, 인천' 등 한국의 지명을 발음하면서 맥아더 연기를 하다니 무진장 기쁘고 고맙다. 잘생겼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호의적이고 개인적인 품행과 사상이 건전한 배우인 것 같아 더욱 믿음직스럽고 호감이 간다. 아주 건전하고 뜻깊은 역사물 영화를 만든대서 여느 할리우드 영화를 찍을 때보다 훨씬 더 저렴한 출연료만 받고 선뜻 출연해 줬다고 한다.

이 사람이 전화통 붙들고 김 일성과 "난 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전쟁을 멈추고 철수하지 않으면 난 군대를 보내서 널 찾아내고 널 죽여 버릴 것이다." / "풋~ 잘해 보라우" 설마 이런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영화엔 더 감격스러운 장면이 있었다.
팔미도 등대가 점등되었을 때, 그리고 선발대로부터 조명탄이 성공적으로 발사됐을 때.. 어둠 속에서 '빛'이 쫙~ 비친다. 맥아더도 이걸 보고는 감격한다. 작전 성공을 이렇게 묘사한 게 단순히 적진을 다 때리부순 장면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었다. 성경에서도 빛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심상이고 어둠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이고 나쁜 심상이다.

  • 어머니를 지켜 주고 싶어 군대에 자원한 이 정재 vs 이념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 범수
  • 부하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이 정재 vs 홧김에 부하를 쏴 죽이는 이 범수
  • 대통령 하고 싶어서 인천 상륙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은 반대 세력 vs 나라를 지킬 총과 탄약을 더 달라는 소년병의 군인정신에 감동해 반드시 이 전쟁을 이기겠다고 다짐한 군인 맥아더
  • 인민군 내부에서조차 림 계진과 박 남철은 서로 감시 vs 국경을 초월하여 서로 신뢰하는 맥아더와 장 학수

어느 게 선이고 어느 게 악인지, 어느 게 빛이고 어느 게 어둠인지를 이 영화는 단순하게 잘 대조해서 보여 줬다.
또한 러시아어를 읊조리는 북한군 애들은 "신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보이기나 해?" 이러지만 맥아더 포함 미군 장성들은 수시로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러는 것 역시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간호사로 출연한 진 세연은 여기서도 항거 대상이 일제에서 북괴로 바뀌었을 뿐, 각시탈의 오목단과 비슷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결말부로 가면 드디어 인천 시내에 시뻘건 저주받을 선전 구호들이 철거되고 시내가 태극기 물결로 바뀐다. 이건 그야말로 8· 15 해방과 동급의 기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걸 아미타불로 바꾼 원흉이 중공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미제 분단 식민지로 들어갈 게 아니라 김 구와 함께 김 일성 밑에서 무혈 통일 이뤄서 우리 민족끼리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다" 요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인천 상륙 작전>은 감동적이면 감동적이지 불편할 내용은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괜히 표현이 식상하고 진부하네 이런 거 불평하기에 앞서 난 이런 역사를 다룬 귀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일단 고맙고 기쁘다.

이 영화에서는 일명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소년병" 씬이 흑백 과거 회상 형태로 잠깐 들어갔다. 이건 문헌에 따라서 날짜와 대사가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한데.. 6월 27일 or 29일, 서울 영등포 or 흑석동.. 어쨌든 개전 초기 서울을 빼앗기기 직전 또는 직후에 서울 한강 이남 전선을 시찰하던 맥아더 장군이 통역 장교를 대동하여 어느 앳된 병사와 실제로 나눈 대화이다.

"후퇴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자리를 지킬 것이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싸울 것입니다."
"원하는 건.. 딴 건 필요 없고 단지 총과 실탄을 좀 더 주십시오."


본인은 저 일화를 먼 옛날 시스템클럽 글을 통해서 진작부터 접했었다. 거기 운영자분이 맥아더를 굉장히 좋아하시기 때문에.

훗날 박 정희 대통령이 무슨 미국 무기 회사 임원과 청와대에서 몰래 거래를 하면서 "님이 내게 준 개인 비자금 100만 달러를 도로 님에게 줄 테니 이 가격만치 M16 소총을 더 주시오" 뭐 이랬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그런데 그건 솔직히 출처와 정확도를 확신을 못 하겠다. 그것과는 달리 맥아더 + 소년병 일화는 국내외 여러 군 관계자의 회고록에도 수록돼 있으며, 주작이 절대로 아니다.

일제 강점기를 생각해 보자. 비록 당장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무모한 짓으로 보여도, 계속 항쟁과 의거가 벌어지니까 외국에서도 "조선은 정말로 일제와 한 뿌리가 아니며 독립을 원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윤 봉길 의사가 폭탄 투척을 했을 때 장 제스가 얼마나 감탄했던가?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니 1940년대의 국제 여론은 구한말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일제를 쫓아낸 뒤 조선을 독립시키자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조선은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일제 식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카이로 선언에서 독립 보장이 명시되는 감격의 성과가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 그것처럼.. 당장 자국민부터가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확연한 의지를 드러내니 그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맥아더 장군의 심리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역사를 바꾸게 됐다.

개전 초기에 국군은 전열이 무너지고 지휘 체계가 황폐화되는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허둥대다 1개월쯤 뒤부터는 희대의 막장 조치인 즉결처분조차 시행할 정도로 암울한 지경에 도달했다. (군기가 얼마나 개판이었으면 상관의 '까라면 까' 명령에 불응하는 부하를 현장에서 재판 없이 바로 사살 허용..;; 부하란 굳이 병뿐만 아니라 초급 장교들도 포함이다. license to kill -_-)
게다가 맥아더는 채 병덕 같은 남한의 X맨 급인 무능한 수뇌부에 이골이 나 있기도 했다. (유 재흥은 전투 패배 후에 밴 플리트 장군에게 까였고, 채 병덕은 개전 초기부터 맥아더에게..)

그랬는데 그 타이밍에 마침 저런 모범 병사를 만난 것이다. 맥아더가 포레스트 검프에서 "이런 씨발. 내가 지금까지 들은 가장 훌륭한 대답이다. 귀관은 IQ가 한 160쯤 되는 천재임이 틀림없다!" 거의 이런 급으로 감탄했을지도 모르겠다.

66년 전에 거기에 있었던 그 소년병 당사자(고 신 동수 옹. 2013년에 작고)의 부인 되시는 분<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관람하고는 감격에 눈시울이 젖었다고 한다! "우리 남편이 살아서 같이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데 기자 양반, 혹시 이 영화 비디오로 하나 살 수 없을까? 남편 얼굴이 가뭇가뭇할 때마다 보고 싶어서 말이야." 가슴 뭉클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분의 인터뷰가 보도되고 나자 주연 배우인 이 정재 씨가 직접 비디오 테이프와 꽃다발을 들고 그분을 찾아뵈었으며, 리암 니슨도 직접 이분을 칭송하고 격려하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인천 상륙 작전은 평론가 평점 3점대 테러나 당할 작품은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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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시 2:2-4라든가 계시록에서 여러 민족들이 한데 뭉쳐서 특정 한 민족을 대적하는 사건을 언급한다. 이것은 영적으로 명백하게 좋은 현상이 아니며, 사실은 UN조차도 앞으로 그런 악역을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저런 트렌드와는 반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들이 한데 뭉쳐 한 나라를 도왔던 6· 25 전쟁은 거의 전무후무한 사례이고 예외적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미국이 개입했던 전쟁들 중 정당성 명분이 톱급으로 가장 큰 전쟁이었다.

뭐 괜히 쓸데없이 김치, 된장, 한복 이런 것보다야 차라리 한글이라든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시대를 너무 앞서 간 엄친아 괴수요 국제 정세의 달인인 어느 할배에 의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건국됐고, 저렇게 드라마틱하게 지켜져 왔다는 사실에나 좀 자부심 가졌으면 좋겠다. 과장 보태면 그런 건 좀 국뽕에 취해도 되겠구만, 왜 저런 정말 중요한 아이템엔 사람들이 관심이 별로 없나 하는 생각이 든다.

6· 25 개전 초기에 남한 정부의 우왕좌왕 실책과 병크가 나온 것을 비판할 건 비판하더라도... 국내 관료들과 미국 정치인들이 그 할배의 선견지명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받아들였다면 애초에 그 전쟁 자체가 벌어지지 않고 피해가 훨씬 줄어들 수도 있었다는 걸 먼저 감안해야 될 것이다.

그에 반해 김 구는 '그 할배' 같은 선악 관념이 없이, 남북 분단을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하며 어떻게든 중재하고 막으려 했다. 이 사람이 덜컥 암살 당해 버리는 바람에 중재자가 없어졌고 남북 관계는 더욱 싸늘하게 식으면서 전쟁이 났다는 식의 해석도 있는데.. 그건 김 일성을 너무 착하고 순진하게 본 어리석은 생각이다.

김 구는 암살 당하지 않았고 계속 살았다면 최악의 경우 피아 구분을 못 한 채 적화통일 꼭둑각시로 이용당하면서 이 승만의 4· 19 부정선거 하야보다도 대한민국의 미래에 더 악영향을 끼치고 더 추하게 몰락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잘해 봐야 그냥 전쟁 타이밍의 시간만 약간 더 버는 역할밖에 못 했을 것이다. 악한 힘은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고 견제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이런 북한이 <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좋게 평가했을 리는 만무하다. 대남 종북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신랄하게 디스했다. 지난 7월 29일자 보도를 보면 "남조선 괴뢰들이 지난 27일 그 무슨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에 대한 시사회 놀음을 벌리였다. 불가능한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작전이니, 죽음을 불사한 이야기니 뭐니 하는 희떠운(분에 넘치며 버릇이 없는) 수작들을 늘어놓고 있다."고 비난했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나에게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새 기능을 코딩할 자유를 지킨 호국영령들의 은혜를 잠시 생각하며 감사한다. 이상.

Posted by 사무엘

2016/08/23 08:33 2016/08/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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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퀴, 엔진, 문 등의 내부 배치가 특이한 놈

요즘 자동차들은 대형 고급 승용차가 아니면 트럭 정도만이 FR(앞쪽 엔진, 뒷바퀴 구동)이다. 중형 이하의 작은 승용차들은 다 연비와 공간에 더 유리한 FF(앞쪽 엔진, 앞바퀴 구동)로 물갈이됐고, 버스들은 1종 보통(대형이 아닌) 면허로도 운전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10몇 명짜리 '봉고차'급이 아닌 이상, 공간 확보와 조향에 더 유리한 RR(뒤쪽 엔진, 뒷바퀴 구동)로 바뀌었다.

승용차는 대형이 FR인데 버스는 소형이 FR인 게 흥미롭다. 이를 종합하면 트럭이 아닌 승용· 승합차는 차량의 크기에 따라 FF-FR-RR의 형태로 엔진과 구동 형태가 바뀌기라도 하는가 보다. (뭐 외국엔 승용차도 경차 위주로 RR이 일부 있기도 하니, 이게 절대적인 경향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런 이유로 인해 대형 버스는 다른 차들과는 달리 엔진 소리가 뒤쪽에서 들리며, 엔진과 연결된 팬벨트가 돌아가는 것도 뒤쪽에 보인다. 대부분의 차량들의 앞면에 으레 붙어 있는 라디에이터 그릴이 버스의 앞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1980년대까지는 국내의 대형 버스에도 전방 엔진 모델이 있었다. 본인도 초딩 시절에 시골에서 그런 버스를 탄 기억이 남아 있다.
전방 엔진 버스는 운전석이 있는 앞부분의 바닥이 유난히 높았고, 운전석의 오른쪽 중앙이 보다시피 뭔가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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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맨 뒷좌석이 위로 봉긋 솟아 있지 않고 높이가 앞의 다른 좌석들과 동일했다.
요즘 버스들은 맨 뒷좌석은 위로 한두 계단 높이 솟아 있는 게 당연시되고 있는데, 이 버스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게 어릴 때도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졌다.
비행기로 치면 보잉 사가 개발한 전무후무 유일한 삼발기인 727을 보는 느낌이다. 날개 밑에 엔진이 달려 있지 않은 게 신기함.

후방 엔진 버스에서는 맨 뒷자리가 폭도 좁은 데다 시끄럽기까지 한 최악의 폭탄 자리인 반면, 전방 엔진에서는 맨 뒷자리에 그 정도까지 페널티는 없을 듯하다.
반대로 운전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버스는 무거운 엔진이 전방에 달려 있는 데다 옛날엔 파워 스티어링마저 없었을 테니 정지 상태에서 조향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다. 하물며 주차는 완전 고역이었겠다. 지금처럼 후방 카메라나 경보 장치가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현대 FB(전방 엔진) 버스와 RB(후방 엔진) 버스는 외형으로는 구분하기가 어렵지만 맨 뒷좌석의 높이를 보면 구분 가능하다. 대우 자동차도 BF105 같은 초기 모델은 전방 엔진 FR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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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일대우(대우 자동차에서 버스 생산 부분만 계승한 후신)에서는 현대 자동차와는 달리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전방 엔진 버스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국내에서는 판매하지 않고 전량 수출만 한다. 외국에 무슨 특별한 수요가 있어서 어째 수출 전용으로라도 생산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뭐, 이 글에서는 주로 전방 엔진 얘기만 했지만 잠깐 버스의 외형 얘기를 조금만 더 하고 넘어가겠다. 미국의 스쿨버스처럼 앞에 보닛이 달린 버스, 그리고 무슨 10~20톤 이상급 초대형 트럭처럼 뒷바퀴에 바퀴가 앞뒤로 두 줄이 달린 버스도 국내에서는 볼 수 없다.
화장실이 달린 버스가 달리기엔 우리나라는 국토가 너무 좁다. 철도계에서 열차의 주행 속도가 올라가면서 침대차가 사라졌듯이, 버스도 고속도로와 휴게소 인프라가 발달하면서 자체적으로 화장실을 내장할 필요는 없어졌다.

옛날 버스 중에는 앞쪽 출입문이 요즘 버스처럼 앞바퀴의 앞에 있는 게 아니라 앞바퀴의 뒤에 달린 버스도 있었다.
물론 현대 카운티처럼(예전의 코러스/콤비.. 그러고 보니 전부 'ㅋ' 돌림 이름이네.) 중형 버스까지는 오늘날까지도 그런 형태의 차들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더 커 보이는 차가 그런 형태인 건 참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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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선보인 시발 자동차의 자매품 버스..;; '씨X 뒈X' 같은 욕설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리라. -_-;;

2. 동력원이 특이한 놈

바로 앞의 사진에서 버스의 앞면에 걸린 현수막 문구를 제대로 읽어 보면.. '국산 시발 디젤 버스'이다.
버스 같은 대형차는 만약 기름으로 달린다면 디젤 엔진 기반인 게 너무 당연한 얘기인데, 그때는 디젤 차량을 국내에서 만들어 낸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라서 저렇게 써 붙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천연가스로 달리는 버스들이 1990년대 이후부터 야금야금 등장하기 시작했고, 다른 버스는 몰라도 최소한 대도시의 시내버스들은 거의 다 물갈이가 됐다. 천연가스 버스는 이제 특이한 놈이라고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주류이다. 석유 내연기관은 소형차용 휘발유와 대형차용 디젤로 나뉘는데, 어째 천연가스 엔진은 소형차(택시)와 대형차(버스)에 모두 쓰인다는 게 신기하다.

서울 시내의 공기가 시골에 비해 썩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천연가스 버스의 도입은 공기 질의 개설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잘 알다시피 디젤 차량은 선진국들에서 정말 찍어 누른다 싶은 수준으로 배기가스 규제를 걸고 있다.
과거의 디젤 버스들은 엔진이 달린 후면부에 매연 그을음도 시커멓게 잔뜩 묻어 있어서 몹시 더러웠다. 이건 단순히 흙먼지가 묻은 게 아니었다.

경상용차인 다마스와 라보는 알고 보니 휘발유도 디젤도 아니고 진작부터 가스 전용이다. 그런데 웬 배기가스 규제를 받고 그것 때문에 차를 단종하네 마네 말이 있었나 모르겠다.

한편, 2010년대부터는 서울에서 남산 투어용으로 하이브리드도 아닌 순수 전기 버스가 다니고 있다. 요렇게 생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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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데 환경 보전을 위해 전기를 선택한 건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안 그래도 전기차는 배터리 문제 때문에 지금도 소형차 수준에 머물고 있는데, 대형 버스가 그것도 배터리 집전 방식만으로 승객을 가득 싣고 에어컨 틀고 산길을 오를 수 있는지가 우려되기도 한다.
실제로 운행 개시 후 얼마 못 가 이런 애로사항이 잔뜩 제기되었다. 하지만 예전에 남산에 갔을 때도 버스가 다니고 있는 걸 보니, 문제점을 수정해서 운용은 계속하고 있는가 보다.

고질적인 배터리 충전+항속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 자동차에서는 몇 년 전에 수소 연료전지 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연구가 얼마나 진행됐는지, 양산과 실용화 단계까지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배기구가 있긴 하지만 그냥 수증기+물만 나온다고 한다.

외국에는 더 엽기적인 발상을 해서 버스 차체에다 배터리 대신 가공전차선을 장착한 '트롤리버스'라는 게 있다. 비록 바퀴는 궤도 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점에서 노면 전차와 다르지만, 공중에 있는 전차선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궤도 교통수단이나 마찬가지이다. '무궤도 전차'라고 불리기도 한다.
뭐 그럴 거면 "조향을 아예 할 필요가 없는 노면전차나 경전철을 만들고 말지, 저딴 걸 왜 만들어?"라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위치가 좀 콩라인스러운 면모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버스의 입장에서는 정교한 레일을 만들 필요 없고 버스도 안에 간단한 집전 장치와 모터만 있으면 되고 배터리 충전 필요 없이 풍부한 전기를 팡팡 끌어다 쓸 수 있으니 나름 괜찮다. 얘도 아까 말한 전방 엔진 버스와 마찬가지로 맨 뒷좌석이 위로 툭 튀어나와 있지 않다.
외국에는 차선이나 하나 떼 낸 버스 전용 차선이 아니라 아예 버스 전용 고가 도로도 있다고 한다. 이것과 트롤리버스가 연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교통 평론가 한 우진 님의 블로그에 소개돼 있다.

전기 모터는 열과 폭발 뒷감당을 하는 내연기관보다 작고 조용하다. 냉각수나 엔진오일, 배기가스 촉매 변환 계통 따윈 없어도 되고 정비성과 유지보수성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이 때문에 차량 내구연한을 기름 차량보다 훨씬 더 길게 잡아도 된다.

당장 이북의 평양에도 트롤리버스가 있으며, 영화 <태양 아래>에서는 하필 퍼진 버스를 시민들이 밀고 가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그리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버스가 가파른 비탈길을 매연 안 내뿜고 깨끗하게 오르기 위해서 재래식 케이블 전차와 더불어 트롤리버스를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트롤리버스라 하면 노면전차만큼이나 좀 낡고 꼬질꼬질하고, 못사는 나라에서 노인학대급 차량을 굴리는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편견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3. 외형이 특이한 놈

버스와 트럭을 정확한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시내버스 중에서 덩치가 가장 큰 슈퍼 에어로시티는 길이가 거의 11미터에 달하며 엔진 배기량은 10리터, 엔진 최대 출력은 300대 초반 마력이다. 이 덩치에 얼추 대응하는 트럭은 8톤 초장축 정도 된다.
(1종 보통 면허로 사람이 많이 타는 버스는 15인승까지밖에 운전할 수 없지만, 트럭은 이 8톤보다도 더 큰 12톤 미만까지도 운전할 수 있다. 그러니 운전 면허라는 건 단순히 기술 수준보다는 법적 책임감을 두고 제정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그런데 버스 한 대의 덩치를 더 키우고 대당 수송력을 더 키우기 위해 두 가지 시도가 있었다. (1) 위로 층수를 더 늘리거나 (2) 버스의 앞뒤 길이를 더 늘이는 것이다. 그리고 선뜻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두 종류의 버스를 생각보다 옛날에 서울에 도입하려 한 적이 있었다.

높이를 키우거나 길이를 키우면 대당 수송력은 일반 버스보다 확실히 1.몇 배가량 더 증가한다. 입석까지 감안하면 차 한 대에 100명 이상은 너끈히 탈 수 있다. 하지만 외제차를 소량 수입하는 것이다 보니, 수송력 대비 차량 단가는 일반 버스의 2배 이상으로 훨씬 더 증가하고 정비도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어서 가성비 문제 때문에 도입이 무산되곤 했다.

먼저, 2층 버스 얘기부터 하자면.. 얘 원조는 역시 빨간 2층 버스를 굴리던 영국이다. 유명한 런던 명물이니 사진 첨부는 귀찮아서 생략한다.
2층 버스는 여행객을(특히 외국인) 대상으로 굴리는 도시 관광버스 계열이 있는가 하면, 본격 노선 버스(일반 시내버스) 계열이 있다. 전자는 2층은 천장이 없이 뚫려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일반 시내버스용으로는 국내에서 1991년 10월부터 2개월간 서울 시청 - 사당 - 과천 노선을 시범 운행한 적이 있다. 차종으로는 독일 '네오플란'이라는 메이커 수입차를 3대 도입했다. 본인은 그 당시 자동차생활 같은 잡지에서 이에 대해 흥미롭게 다뤘던 걸 본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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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버스는 딱히 회전반경이 걸리는 건 없겠지만 아무래도 무게중심이 높다 보니 커브를 돌 때는 특별히 조심해야겠다. 승용차보다 약~간만 차체가 높은 SUV만 해도 고속 회전 중에 전복 위험이 더 커지니 말이다.
또한 2층 버스는 당연한 말이지만 노선을 짤 때 중간에 높이가 4~5미터 남짓한 육교, 교량, 신호등 따위와 부딪치지 않는지를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2층으로 인해 같은 면적에 걸리는 하중이 증가하는 건 바퀴를 더 달면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승하차 시간이 길어지는 건 감안해야 할 문제 되겠다. 2층 버스의 구조에 맞는 복층 승강장과 출입문이라도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열차로 치면 승강장 길이보다 더 긴 열차가 들어와서 앞의 일부 출입문만 열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당시에 저 2층 버스를 베타테스트 해 봤다. 도로 주행에 딱히 문제는 없었지만, 총체적으로 볼 때 시내 대중교통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차량을 놀이공원 셔틀버스 부류로 용도변경 처분했다. 그 동안 오히려 철도에서 ITX-청춘이라는 국내 최초의 2층 열차가 등장했으나 얘는 아직 경춘선에서만 볼 수 있다.

2층 다음으로, 일명 아코디언 버스라고 불리는 굴절 버스 차례다. 철도 차량이나 트레일러 트럭처럼 중간에 꺾이는 부분을 만들어서 차체의 길이를 늘렸다(11미터 → 거의 18미터). 얘도 의외로 역사가 오래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85년 여름경에 서울 시내에서 스웨덴제인 스카니아-볼보 차량을 도입해서 테스트한 적이 있었다. 기술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역시 유지· 정비 비용 같은 가성비 문제 때문에 흐지부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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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묻혔던 굴절 버스는 그로부터 20여 년 뒤, 2004 서울 버스 대개편 때 다시 등장했다. 이때는 이탈리아 이베코 차량이 살짝 로컬라이즈와 원가 절감 디버프를 거쳐서 들어온 뒤, 470 같은 일부 파란 간선 버스에 투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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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4자리 번호인 초록 버스와 3자리 번호인 파랑 버스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버스 개편 당시의 원래 의도는 둘을 훨씬 더 차별화하는 것이었다. 파랑 버스는 진짜 '대로'급의 간선에서 버스 전용 차선 위주로만 달리고 정거장도 적고 심지어 빨강 버스처럼 요금까지 더 비싸게 받으려 했다. 그리고 그런 파란 버스에 굴절처럼 수송력이 큰 차량을 집어넣는다는 게 계획이었다.

얘는 탈 때 계단을 덜 올라도 되는 저상(1번. 내부 배치 특이)에다 엔진도 기름이 아닌 천연가스 기반이어서(2번. 동력원) 버스의 여러 분야에서 신기원을 개척했다.
운용하는 데 2층 버스만치 기술적으로 어렵거나 위험한 요소는 없지만, 주차나 회차는 좀 아슬아슬할 듯하다. 그리고 중간문이나 후문에서 운전사의 시선을 교묘하게 피한 불법 무임승차를 주의해야 할 것이다. 뭐 CCTV로 잡아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서울 시민들이면 잘 알다시피 저상 버스는 2000년대의 시즌 2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했으며, 몇 년 못 가 시내 도로에서 사라졌다. 고장이 나면 국내 기술자들이 뒷감당을 할 수 없었으며, 디버프가 너무 심하게 됐는지 엔진 출력이나 냉방 조절도 기사 재량으로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기획예산처에서는 굴절 버스의 도입을 세금 낭비 돈지랄로 끝났다고 깠었는데, 이에 대해 한 우진 님은 그렇지 않다는 반박글을 썼었다.
이때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현대 자동차에서 국산 굴절 버스 프로토타입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베코 외제차가 보였던 냉방 같은 문제까지 해결해서 말이다. 하지만, 양산은 더 되지 않았다. 뭔가 포니 쿠페처럼 묻혀 버린 것 같다.

지하철에서는 6호선의 609편성 국산 인버터 지하철이 고장이 너무 잦아서 퇴출되고 다시 외제 인버터로 돌아갔는데.. 버스는 반대로 외제가 정비가 힘들어서 퇴출되고 다시 국산차로 돌아간 것이 특이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10 08:32 2016/08/1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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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 칼리스타(1992)와 기아 엘란(1996).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그 옛날에 저런 자동차도 팔았나 싶은데, 위의 두 자동차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 본인은 직접 본 경험이 전무하다. (초딩 시절에 대우 임페리얼조차 길거리에서 본 적이 있건만, 저것들은 정말 듣보잡. 그나마 칼리스타는 자동차 잡지를 통해서 접하긴 했었다.)
  • 나름 2인승 스포츠카 컨셉으로 영국제 자동차를 그대로 들여 와서 생산했다.
  • 생소한 컨셉에다 너무 비싼 가격으로 인해 망했음. (수제 생산 크리)

굳이 나 말고도 자동차 매니아들이라면 국내의 자동차 역사에서 두 차량이 갖는 유사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1. 기아 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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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자동차는 1980년대 말에 외제차 수입 규제가 완화되자마자 3000cc급 대형 고급차 컨셉으로 머큐리 세이블이라는 미제 승용차를 수입 판매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쯤 전인 1970년대 말에 현대 자동차에서 최고급차 컨셉으로 포드 그라나다를 포드 사 CI조차 안 걷어내고 그대로 판매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머큐리 세이블은 무엇보다도 도어에 번호 기반 자물쇠가 장착돼 있는 게 정말 신기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그 뒤로 기아 자동차는 스포츠카를 만들 결심을 하게 되고, 영국 로터스 사의 스포츠카인 엘란을 생산 라인을 인수해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건 외제차를 하나도 안 고치고 100% 똑같이 만들어 판 건 아니며 엔진, 서스펜션, 내장재 등 여러 곳에 변형과 로컬라이제이션이 가해졌다.

현대 자동차에서 1990년대 초에 '엘란트라'라는 준중형 승용차를 내놓았는데, 그때는 얘를 수출할 때 이 '엘란'과의 이름 충돌을 의식해서 '엘'은 빼고 '란트라'라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이름으로 수출해야 했다.
하지만 나중에 기아 자동차가 '엘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인수하고 그 기아 자동차를 현대 그룹이 꿀꺽 해 버리니, 그때부터는 이름 충돌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이제 '엘란트라'는 후속 모델 아반떼의 수출명으로도 당당히 쓰이고 있으니 참 세상 많이 변했다.

그랜저와 제네시스 사이의 중간 체급이라고 전륜구동 준대형 '아슬란'을 만든 건 망한 듯하지만, 그래도 엘란트라처럼 엑셀과 쏘나타 사이의 준중형 체급은 굉장한 선견지명으로 판명됐으며 오늘날까지도 잘나가는 중이다. 자동차 엔진 기술을 개발하는 것 자체뿐만 아니라 이렇게 평균적인 소비자들의 수요 심리를 잘 읽는 것도 자동차 회사 경영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엘란은 범퍼 위로 라디에이터 그릴이 없는 게 인상적이다. 이게 그 시절에 스포티한 디자인 유행이었던 것 같다. 대우 에스페로와 현대 아반떼 초기형 말고는 이런 디자인을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엘란은 20년 전 물가로 3천만 원이 넘는 비싼 가격이었으며, 전국적으로 1055대 남짓만 생산된 뒤 단종됐다. 이것도 나중엔 차를 좀 팔려고 제작사에서 원가 미만인 2천만 원대 후반 가격으로 손해를 감수하고 팔기도 해서 얻은 실적이었다. 참고로 대우 임페리얼이 최종 생산량이 863대였다.

2. 쌍용 칼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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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란이 미래지향적이라면 칼리스타는 딱 봐도 복고풍의 컨셉이다. 원 제작사는 영국의 팬서(panther. 만화 주인공 핑크 팬더도 곰이 아니라 표범임) 웨스트윈드 사로, 이를 쌍용 자동차에서 인수하여 SUV 말고 쌍용 최초의 승용차 명목으로 국내에서 생산했다. 영국 본토에서는 동일 모델의 차명이 '리마'(Lima)였다고 하는데, 칼리스타는 도대체 무슨 어원이고 누가 지은 이름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옛날 자동차의 주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휀다(바퀴 덮개)가 저렇게 돌출돼 있는 것이다. 외국의 차덕들도 서양이 아닌 웬 동북아시아 대한민국에서 이런 차가 생산되다는 것에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고 하지만, 딱 봐도 이런 자동차는.. 매니아들 말고는 일반 서민들에게 많이 팔리게 생기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대기업 총수 같은 부자들이 그랜저 대신 이런 차를 굴리지는 않을 테고.

스포츠카를 표방하고 있어서 엔진의 성능은 나쁘지 않았으나, 자동화 대량 생산을 못 한 탓에 차 가격은 1990년대 초 물가로 역시 무려 3천만 원을 넘어섰다.
결국 앞의 엘란만치도 못 팔았다. 연 판매량은 10~20대에 불과했으며, 1994년까지 누적 판매 100대를 채 못 채우고 단종됐다(78대). 그것들도 다 국내에서 굴러다닌 게 아니라 수출 처분되기도 했다.

칼리스타 이후로도 이런 복고풍 로드스터 승용차는 국내에 현재까지 다시 등장한 적이 없다. 엘란보다도 먼저 만들어진 차인데 굉장히 파격적인 시도였던 것 같다. 엘란이 등장한 때는 칼리스타가 이미 단종된 뒤였다.

* 이 외에 대우 르망 이름셔(Irmscher, 1991)도 생각난다. 이건 완전히 새로운 차종은 아니고 그 당시에 생산되던 대우 르망을 '이름셔'라는 외국 회사에서 스포츠형으로 튜닝해서 고급화하고 성능을 올려 놓은 것이다.
르망은 분명 엑셀· 프라이드 같은 소형차 체급인데 이름셔 에디션(?)은 엔진 배기량부터가 중형차급 2000cc로 버프되어서 엄청난 성능을 자랑했으며, 그 외에 다른 내외장제도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보통 국내에서는 세금 규제를 피하려고 이미 있는 외국 원판 차량도 배기량을 줄여서 내놓곤 한다. 옛날에 그라나다도 그랬고 대우 에스페로도 준중형 차급에 비해 너무 작은 1500cc 엔진을 얹은 게 화근이어서 빌빌댔다. 이름셔는 그와는 정반대 케이스였다.
하지만 이름셔 역시 인지도 부족과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별로 인기를 못 얻었다. 1000몇백만 원에 달했는데, 그 돈 쓸 거면 아예 대놓고 중형차를 사는 게 나았기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7/23 19:32 2016/07/2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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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 회상

1. 들어가는 말

오늘날의 거대하고 복잡한 운영체제와는 달리, 도스는 이니셜 D-_-가 암시하듯이 달랑 플로피디스크 한 장만으로 부팅이 가능할 정도로 참을 수 없이 작고 가벼웠다. 정말 필수불가결인 파일은 부팅에 쓰이는 io.sys, 그 뒤 셸 역할을 하는 텍스트 명령 해석기인 command.com이 전부다.
msdos.sys라는 파일도 있는데 얘는 정확하게 무슨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은 config.sys의 DEVICE 명령을 통해 실행되는 sys 파일과, com 실행 파일이 서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우스, 그래픽 카드 에뮬(simcga, msherc ^^), 사운드(sound, unsound) 같은 여러 램 상주 드라이버들은 com이었지만, 씨디롬 드라이브는 sys였으며 그것도 주 메모리를 꽤 많이 차지하는 드라이버였다. 단, 부팅 후에 sys 파일을 별도로 실행해 주는 유틸리티가 있기도 했다.

디스크로부터 파일을 읽으려면 파일 시스템이 정립돼 있어야 하며, 이건 운영체제가 하는 일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운영체제를 로딩하는 프로그램도 파일 형태로 저장돼 있다. 이런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부팅에 쓰이는 운영체제 프로그램은 디스크에 단순히 파일 형태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 바이오스가 물리적이고 원초적으로 인식 가능한 첫 지점에 저장돼 있어야 한다. 이건 굳이 도스뿐만 아니라 어느 운영체제라도 마찬가지이다.

도스는 단일 사용자 단일 프로그램 구동 체계이다 보니, 한 프로그램이 그야말로 컴퓨터 하드웨어를 전부 있는 그대로 조종 가능하게 허용하는 백지수표, 열린 허허벌판 같은 환경이었다. 프로그램의 인터페이스도 명령 기반, TUI, GUI 등 제각각이었고 정말 창의적이었다. 요즘 프로그램들만치 UI가 획일화됐다는 느낌이 없이 형형색색 컬러풀했다.

물론 그건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다. 이런 빵빵한 컴퓨터 자원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에 실행하고 작업 전환을 할 수 없다면 그것도 컴퓨터에 대한 예의-_-가 아니다.
그러니 운영체제가 더 강력하게 모든 걸 통제하는 지금 같은 환경으로 궁극적으로는 바뀌는 게 맞긴 하지만.. 인제 와서 도스가 다시 새삼스럽게 그리워질 때도 있다.

2. 역사

본인이 경험한 MS-DOS의 가장 옛날 버전은 학교 내지 컴퓨터 학원에서 봤던 3.2/3.3이다. 2.x 이하나 4는 실물로 구경을 못 해 봤다. 다만, 5.0과 6.2는 집 컴퓨터에 내장돼 있던 물건이다 보니 개인적으로 친숙하다.

1981년에 첫 출시되었다고 전해지는 MS-DOS 1.0은 그야말로 정말 골동품 폐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Windows 1.0이 프로그램 창을 겹치게 배열하는 걸 지원하지 않았다면, DOS 1.0은 디스크에 서브디렉터리를 만드는 걸 지원하지 않았다..;;
그나마 도스가 최소한의 도스다운 틀을 갖춘 건 2를 거쳐서 3.x대에 와서부터이다. 특히 5.25내지 3.5인치 고밀도(1.2, 1.44MB) 플로피디스크를 지원하기 시작한 첫 버전이 이 버전이기 때문이다. 3.x에 와서야 좀 물건다운 물건이 나왔다는 점에서는 도스와 Windows가 역사가 서로 비슷한 것 같다.

그 다음 4.0의 아주 기념비적인 업적은 파일 시스템이 FAT12에서 FAT16으로 확장되어, 이론적으로 지원 가능한 디스크 볼륨의 용량이 2GB로 커진 것이다.
그 시절에 기가바이트는 가히 꿈의 규모였기 때문에 홍보 자료에서는 그냥 '제한이 없어졌다'라는 표현이 관용적으로 쓰였다. 참고로, FAT12 시절의 하드디스크의 용량 한계는.. 고작 32MB였다. =_=;;

또한 MS-DOS shell이라고 나름 드래그 드롭도 지원하고 Windows GUI를 어설프게 베낀 듯한 파일 관리자 셸이 추가된 것도 4부터이다. 하지만 MS-DOS 4는 구체적인 내역은 모르겠지만 불안정하고 버그가 많아서 좀 문제작으로 남았다고 한다.

도스 5.0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은 그 이름도 유명한 HIMEM.SYS와 DOS=HIGH일 것이다. EMM386은 4.0 때 SYS 버전이 있었지만 5.0부터는 EXE로 형태가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이 버전에서는 과거의 불편하던 EDLIN을 대체하는 QBASIC 기반의 텍스트 에디터가 추가되었으며, 명령 프롬프트에서 cursor 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고 히스토리 기능도 넣어 주는 DOSKEY 유틸도 이때 추가됐다.

지워진 파일을 첫 글자 이름을 집어넣어서 복구하는 undelete 역시 아마 6이 아닌 5에서 첫 추가됐지 싶다. 이건 PC-tools나 노턴 유틸리티가 먼저 제공하던 꼼수 기능이었는데 동일 기능을 도스에서 직접 수용한 것이다.

그 뒤 6.0은.. 변한 게 많았다.
가장 유명한 건 하드 디스크를 압축해 주는 '더블 스페이스'라는 유틸리티의 도입이다.
이건 무슨 요술을 부리거나 하드 디스크를 물리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파일 시스템 차원에서 데이터를 zip 같은 소프트웨어 압축을 적용하는 것일 뿐이다. 당장 용량 확보에는 도움이 되지만 디스크의 액세스 속도가 좀 느려지고 에러에 취약해지며, 하드웨어를 좀 험하게 다루는 일부 프로그램과는 트러블의 여지가 생긴다.

참고로 1993~1994년이면 Windows 3.1이 보급되고 어지간한 PC의 하드디스크는 몇백 MB 정도이던 시절이다.
더블 스페이스는 그렇잖아도 꽤 중요하고 민감한 간판 기능인데, 버그를 많이 잡고 안정화를 더 시켜서 6.2가 나왔다.
그런데 이게 '스태커'라는 타사의 제품을 무단 도용한 것으로 판결이 나서 '더블 스페이스'를 뺀 6.21이 나왔고,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여 '드라이브 스페이스'를 대신 도입한 6.22로 6.x대가 마무리 되었다. 지금이야 마소에 대해서 IE 브라우저의 독점 소송이 유명하지만, 1990년대 중반엔 저거 저작권 침해 소송이 IT 업계에서 굉장한 화두였다.

압축 유틸리티 말고도 6.x대엔 멀티 부팅이라는 매우 유용한 기능이 추가됐다. 즉, C/C++의 조건부 컴파일처럼 사용자가 선택한 옵션 방식대로 디바이스 드라이버를 로딩하여 부팅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디스크 점검 scandisk, 조각 모음 defrag, 시스템 점검 msd, 주 메모리 확보 유틸리티 memmaker 등이 추가되고 PC-Tools로부터 라이선스 받은 안티바이러스 msav 같은 유틸도 도입됐다. 덕분에 노턴 유틸리티가 예전보다는 좀 덜 필요해졌다.

모든 내부/외부 명령에 /? 옵션을 줬을 때 도움말이 나오는 것도 처음부터 존재한 게 아니었다. 6이거나 아니면 5부터인데 그건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옛날에는 도움말 텍스트를 일일이 내장시켜 줄 정도로 컴퓨터의 메모리나 디스크 용량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독 제품으로서 MS-DOS의 역사는 1994년에 출시된 6.22가 끝이었다. 도스는 Windows 95/98/ME와 함께 7.0. 7.1. 8.0 버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0년에 드디어 20여 년의 긴 수명을 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도스 외부 명령어 중에서 몇몇 필요한 건 Windows 9x 계열에서는 Windows\command로 갔고, NT 계열은 그냥 system32 디렉터리에 있다. 그리고 NT 계열은 format이나 diskcopy 같은 유틸리티도 콘솔에서 실행될지언정 도스가 아니라 Windows용 프로그램이라는 차이가 있다.

3. 그 당시의 유사품/경쟁자

한편, 도스의 바리에이션으로는..
PC-DOS는 그냥 MS-DOS가 IBM 브랜드만 달고 나온 동일 제품이었다고 한다. 한동안 그러다가 6.x대부터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는데 이미 그때는 PC 환경이 Windows로 충분히 넘어가기 시작했으니 별 의미는 없다. 따지고 보면 IBM은 OS/2가 망한 데다, 도스 분야도 뒷북으로 끝나고 별 재미를 못 본 셈이다. "IBM 호환 PC"라는 걸출한 대인배 이름만 남긴 채 PC 시장에서는 철수했다.

DR-DOS는 MS-DOS의 전신인 CP/M을 직접 만든 게리 킬달이라는 엔지니어가 '디지털 리서치'라는 회사를 세워서 따로 만든 MS-DOS의 대항마이다. '디알'이지 '닥터 도스'는 아님.. 뭔가 기능이 MS-DOS보다 뛰어났다고 얘기는 들었는데 구체적인 내역은 잊어버려서 기억이 안 난다.
DR-DOS를 '노벨' 사가 인수하여 새로 내놓은 것이 '노벨 도스'이며, 이건 1990년대 초중반까지 나왔다.

한편, 4DOS는 커널을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건 아니고 명령 인터프리터인 COMMAND.COM만 대체하는 기능 확장판으로 컴덕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 이걸 시먼텍(Symantec) 사에서 인수하여 자신들이 인수한 다른 유명 솔루션인 '노턴 유틸리티'에다가 집어넣은 것이 NDOS이다. 각종 도스 명령들에서 2% 부족하던 것을 보완하는 편의 기능이 굉장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가령, 중간에 파일이 사라져도 괜찮은 batch-to-memory 배치 파일)

그리고 8.3 짧은 파일 이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descript.ion이라는 숨김 파일을 만들어서 파일명에 대한 '주석'을 표시하는 것도 4DOS의 작품이었다. 옛날에 MDIR도 이걸 지원했다. 파일이 복사· 이동· 개명· 삭제됐을 때 주석도 같이 관리하는 게 좀 번거로운 일이 됐으니까.. NTFS처럼 운영체제의 파일 시스템 차원에서 메타데이터를 관리하는 기능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셸 유틸리티가 뒷감당을 해야 한다.

4. MS-DOS의 한글화

MS-DOS가 최초로 한글판이 나온 것도 2나 3 버전부터이지 싶다. 정말 먼 옛날에는 마소가 잠깐 동안 조합형 코드 기반으로 도스를 한글화화기도 했다는데 지금으로서는 거의 Windows 2.1의 한글판 같은 도시전설이 돼 간다.
허나, 1987년에 지금의 KS X 1001, 그 당시의 KS C 5601 완성형이 제정되자마자 표준을 잘 지키는 마소는 완성형으로 광속으로 갈아탔다. 그게 이미 도스 3 시절의 일이다. 마소는 그냥 표준을 따른 것일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조합형 코드를 죽이고 한글을 파괴한 원흉(?)으로 일부 진영으로부터 좀 지탄받곤 했다.

그런데 한글 MS-DOS가 텍스트 모드에서 한글 입출력을 구동해 주는 바이오스 유틸리티를 처음부터 내장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쉽게 말해 hbios와 그 특유의 바탕체 글꼴을 구경한 건 최소한 도스 5나 6부터이다. 3이나 4 시절에나 그런 게 없었으며, 한글 바이오스는 다른 프로그램으로 구동했었다. 이건 내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음.

hbios는 Windows 95로 가면서 mshbios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그 당시의 고유 글꼴은 <날개셋> 편집기에 '마소바탕'이라는 글꼴을 통해 구경할 수 있다. 도깨비나 태백한글 같은 싸제 한글 바이오스들은 조합형/완성형, 두벌식/세벌식, 명조/고딕 등 글꼴과 글자판과 코드를 다 선택 가능했지만, 마소의 보급 바이오스는 당연히 완성형, 두벌식, 명조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마소에서 한글화한 프로그램들은 2바이트 문자에 대한 처리가 굉장히 잘 돼 있었다. 2바이트를 구성하는 앞뒤 문자 중 하나가 가려지거나 지워지면 다른쪽 문자도 반드시 같이 사라졌기 때문에 텍스트 모드에서 메뉴나 대화상자가 표시될 때도 문자가 깨지는 걸 보이는 법이 없었다. 이에 대한 처리가 세심하게 돼 있었다.

5. 도스 시절의 멀티태스킹

비록 그래픽은 아니고 텍스트 기반이긴 하지만, Windows 3.x 비스무리한 도스 기반 멀티태스킹 운영환경(운영체제는 아니고..)으로 DESQView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난 이름만 들어 보고 실제로 구경은 못 했다. 외국에서는 그럭저럭 쓰는 사람이 있었던 듯하지만 Windows의 등장 이후에는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실은 더 발전된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를 마소에서 직접, 그것도 Windows나 OS/2와는 별개로 만들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무려 1986년, Windows조차 이제 막 개 허접한 1.0이 나왔던 시절에 MS-DOS 3을 기반으로 일명 '멀티태스킹 MS-DOS 4.0'이 계획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그 도스 4.0과는 무관한 새로운 개발 브랜치였다.

멀티태스킹 MS-DOS 4는 제품이 나오기는 했고 의도도 나쁘지 않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시대를 너무 앞서간 문제작이었다. 그 옛날에 그 열악한 하드웨어 환경에서 도대체 뭘 더 바라겠는가? 컨셉에 비해 상품성이 떨어졌다.
게다가 그 당시 마소는 지금처럼 독자적인 불특정 다수용 유명 소프트웨어를 독점 판매하는 공룡 기업이 아니었으며, 여전히 하드웨어 제조사에다 소프트웨어를 납품하면서 먹고 사는 기업이었다. 즉,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잘 안 되지만, 업계에서의 위상이 '갑'이 아니라 '을'이었다.
프로젝트를 발주했던 IBM이 이 물건을 더 구입해서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프로젝트는 흑역사가 되었고, 이 멀티태스킹 MS-DOS 4는 오히려 유럽의 일부 컴퓨터에 OEM 형태로 공급되는 걸로 개발 계보가 끝났다.

멀티태스킹 MS-DOS 4는 비록 GUI 환경은 아니지만 Windows의 전유물로만 알려졌던 NE (new executable) 실행 파일도 지원하고 지금으로서는 무척 신기한 면모가 많았다고 한다. 정작 NE를 사용하던 Windows는 NT가 등장하기 전에는 콘솔 모드라는 게 없었는데, GUI 기반이 아니던 멀티태스킹 도스가 NE를 어떤 형태로 사용했는지 궁금하다.

6. 맺는 말

도스 시절에 메모리 관리를 하는 건 요즘으로 치면 연봉별로 돈 관리하는 요령과 비슷했다. 램이 1MB 이하일 때, 2MB일 때, 4MB일 때, 8MB 이상일 때... HIMEM.SYS와 EMM386을 세팅하는 법, 기본 메모리를 최대한 확보하는 법, 메모리가 왕창 많이 있다면 램 드라이브와 디스크 캐시를 운용하는 요령 등.. 그런 게 1990년대 컴퓨터 잡지들이 고급 정보랍시고 많이 다룬 정보였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격세지감이 느껴질 뿐이다. 그 당시에 기본 메모리라는 개념은 돈에다 비유하자면 당장 손에 있는 현금이고, 나머지 확장 메모리는 통장 잔고나 신용카드 같다는 생각도 든다. =_=;;

MS-DOS의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걸 느낀다. 금수저 출신의 독종에 천재에 똘끼와 운, 엔지니어 기질과 사업가 기질을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여건에다 던져 놔도 결국은 성공했겠다 싶다. 공부만 계속했어도 교수나 변호사가 됐을 사람이 결국은 소프트웨어의 황제로 등극해서 교수· 변호사보다 더한 억만장자가 됐으니까.

물론 빌 역시 그 과정에서 언제나 실력만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지는 않았으며, 경쟁자 치사하게 죽이기 같은 짓을 전혀 안 했다는 건 아니다. MS의 모든 기술과 제품이 100% 빌의 머리에서 비롯된 원천기술인 건 아니며, 그가 미래에 대해 예측한 것이 전부 적중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자기보다 더 똑똑한 엔지니어들을 한데 통솔하고 이끌어서 시너지 효과를 잘 낼 줄을 알았다. 그리고 실수를 하고 병크를 저지르더라도, 회사를 완전히 말아먹을 정도로 치명적으로 하지는 않았으며 곧 수습했다.

한편, 게리 킬달은 뭔가 스티브 워즈니악 같은 포스가 느껴지는 공돌이로 보이는데, 실력에 "비해" 빛을 못 보고 좀 어이없게 훅 가 버린 게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기술만 있고 너무 고지식하기만 하면 저렇게 되기 쉬운데, 나부터가 딱 그런 스타일이라는 게 문제임.. -_-;;

Posted by 사무엘

2016/05/18 08:39 2016/05/1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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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이야 우리들의 눈을 현혹하는 온갖 사진과 짤방, 동영상들이 인터넷을 통해 컴퓨터로 현기증 날 정도로 범람하고 터져 나가는 시대이다.
하지만 불과 2~30년 전만 해도 PC는 글이 아닌 그림을 처리하기에는 용량과 성능이 꽤 버거운 물건이었다. 컴퓨터로 뭔가 실사 사진 자체를 구해다 보기가 쉽지 않았다. PC 통신으로 인기 연예인 사진을 단 한 장 다운로드 해서 보는 것조차도 단단히 작정하고 기다릴 준비를 하고서 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도 출처는 종이 화보나 필름 사진 스캔, 또는 아날로그 TV 화면 캡처였다..

21세기에 태어난 애들이 이런 얘기를 듣는 건.. 우리 세대가 부모님에게서 1950, 60년대에 나라가 얼마나 폐허였고 못살았는지를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아아~ 나도 이런 식으로 올드 타이머 꼰대의 대열에 합류하는구나..;;
그래도 난 옛날 컴퓨터 환경 회상이 좋다. 그러니 얘기를 계속하겠다.

그 시절엔 bmp, pcx를 넘어 gif 정도만 돼도 디코딩이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아래아한글 도스용에서 그림을 삽입해 보면 gif는 유독 렌더링이 더뎠다. 그런데 하물며 jpg는... 전용 뷰어가 필요하고 386에 램 얼마 이상, 부동소수점 코프로세서는 필수 이런 걸 요구하는 엄청난 포맷이었다. png 역시 그 당시로서는 신생인 만만찮게 무거운 포맷이었고.

이런 이유로 인해 도스에서 그래픽 뷰어는 나름 단순 텍스트/헥스 뷰어 이상의 유니크함과 전문성(?)을 지녔고 또 그래픽 에디터와는 별개의 입지를 가진 프로그램이었다. GUI 운영체제의 셸이 제공하는 기본 중의 기본, 필수 중의 필수 기능이 그때는 그렇게나 특별한 기능이었다. 도스까지 갈 것도 없이 무려 Windows 95 시절, 웹 브라우저 같은 게 없던 때엔 운영체제 차원에서 jpg 파일을 바로 볼 수 있지 않았다. 그림판은 bmp/pcx 전용이었으니까.;;

그래픽 뷰어는 완전 상업용 제품이라기보다는 셰어웨어로 만들기에 좋은 소재였다. 디렉터리 이동 + 파일 리스트 선택 기능을 구현한 뒤, 사용자가 엔터를 누르면 그 그림을 표시해 주는 게 기본 형태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좀 단조로우니 그래픽 뷰어에는 여러 장의 그림을 슬라이드 쇼처럼 보여주는 기능이 응당 추가됐다. 현란한 화면 전환 효과는 덤이고. 요즘 같으면 화면 보호기와 역할이 비슷해졌다.

비주얼 쪽 말고 다른 방면으로는.. 파일 관리 기능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단순히 뷰어 이상으로 많은 그림 파일들을 일괄적으로 포맷을 변환하고 크기를 보정하고 효과를 주는 기능이 들어갔다. 이건 전문적인 그래픽 에디터와도 기능이 겹치는 구석이 있지만, 이쪽은 드로잉 기능이 없으며 한 파일이 아니라 여러 파일들에 대한 일괄 편집에 더 최적화되었다.
이런 분야에 속하는 프로그램으로 본인은 현재까지 다음과 같은 제품들을 기억하고 있다.

1. Graphic Workshop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 컴퓨터 잡지/서적을 통해 알게 됐다. 1990년대 초인 꽤 옛날부터 개발되어 온 프로그램이며, 내 기억이 맞다면 GIF를 굉장히 일찍부터 지원해 온 걸로 유명했다.
스크린샷을 보면 알 수 있듯, 전반적으로 셸은 파란 배경의 단순한 텍스트 모드에서 동작했고 단순 표시뿐만 아니라 포맷 변환, 크기 조절 같은 그림 파일 관리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1989년에 처음 개발됐는데 91년에 벌써 버전이 6을 넘어간 건 도대체 개발과 버전업이 어떻게 돼 왔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MS Word는 다른 제품과 번호를 맞추기 위해서 2에서 바로 6으로 넘어가긴 했다만..;;
개발사인 Alchemy Mindworks라는 회사는 지금도 살아 있으며, 이 프로그램은 Windows용으로 계속 개발 중이다.

2. SEA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픽 뷰어 중에서는 느낌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일단, 왓콤 C/C++ 32비트 에디션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게임도 아닌 것이 첫 실행 때 DOS/4GW(도스 익스텐더) 로고가 떴다.
성능면에서는 jpg 파일의 디코딩이 경쟁 프로그램들 중 가장 빠르다고 자처했다. 그림뿐만 아니라 소리 파일 재생이 됐으며, 동영상도 AVI 중에 1990년대 중반 런렝쓰 정도의 간단한 방식으로 압축 된 건 바로 재생 가능했다.

스크린샷을 보면 알 수 있듯 일괄 변환과 슬라이드 쇼 기능 정도는 물론 갖추고 있었으며,
이 모든 것에 더해서 전반적인 GUI 껍데기도 NextStep 운영체제를 흉내 낸 듯한(바탕에 검정 제목 표시줄) 상당한 고퀄이었다.
여러 모로 인상이 좋고 장인 정신이 느껴지는 잘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비등록 셰어웨어 버전도 첫 실행 때 '등록 해 주세요. press any key'가 뜨는 것 말고는 별다른 제약이 없어서 상당한 대인배이기까지 했다.

3. ACDSee

운영체제에 gif/jpg/png급 그림 파일을 보는 기능이 자체적으로 없던 Windows 95~98/2000 시절에는 개인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유용하게 썼다. 이름이 똑같이 '씨'인데 앞의 도스용 프로그램은 sea이고 요 프로그램은 see이다.
얘도 한때는 내가 운영체제를 새로 설치한 뒤에 MDIR만큼이나 곧장 설치하는 필수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굉장히 유용하게 썼다. SEA의 Windows 버전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해당 기능을 운영체제가 흡수한 뒤에는 정말 자연스럽게 존재감이 싹 없어져 버렸다.

그 첫 신호탄은 Windows에 IE 웹브라우저가 포함돼 들어가면서 기본적인 그래픽 뷰어 문제는 사실상 제공되기 시작한 사건이다.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게 글과 그림으로 이뤄져 있으며 웹브라우저는 그 자체가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은 아니고 훌륭한 그래픽 뷰어였기 때문이다. 단, IE는 옆 파일을 바로 열람하는 기능조차 없고 진짜 보는 것 하나만 가능하기 때문에 전문 뷰어/슬라이드 쇼 프로그램이 여전히 존재 의미가 있었다.

한 디렉터리 안에 있는 그림 파일들을 IE 창에서 쭈욱 열람하기 위해서 그 디렉터리를 기준으로 <img src="...."/> 태그를 쭈욱 나열하는 html 파일을 '생성하는 프로그램'을 짜서 개인적으로 활용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이건 썸네일만 읽어들이는 게 아니라 파일들을 몽땅 한 페이지에다 읽어들이는 것이니 성능면에서는 좀 안습한 짓이긴 하다.

그리고 둘째 확인사살은 Windows XP이다. 얘부터는 탐색기 내부의 파일 리스트에서 그림 썸네일을 보는 편의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으며, 그럭저럭 가볍고 괜찮은  그래픽 뷰어까지 내장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별도의 싸제 그래픽 뷰어 프로그램에 대한 필요는 거의 사라졌다. 이런 이유로 인해 기존의 그래픽 뷰어들은 생존을 위해서 포토샵 같은 이미지 보정 기능을 더 강화한다거나 디지털 카메라 사진 관리 같은 더 차별화되고 전문적인 영역으로 넘어갔으며, 내 기억 속에는 현업에서 다들 물러나고 추억의 영역만 남게 되었다.

한때는 Paint Shop Pro에 내장돼 있는 Browse 기능도 유용하게 썼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MS Office에서도 2003부터 Picture Manager라는 유틸리티가 생겨 있다. 예전에는 희귀했던 기능들이 지금은 다 기본으로 내장되고 대중화가 된 것이다.
단, Windows XP의 기본 그래픽 뷰어는 애니메이션 GIF를 재생하는 것까지도 지원했는데 Vista 이후부터는 그 기능은 없어졌다. 왜 빠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여기까지가 그래픽 뷰어 프로그램에 대해 본인이 갖고 있는 추억이다.
하긴, 음악을 듣는 것도 한때 꽤 먼 옛날엔 거원 제트오디오, WinAmp 같은 프로그램을 따로 썼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냥 WMP만 쓰지 다른 건 안 쓰게 됐다.
그래도 동영상은 WMP가 코덱과 자막 등 부족한 구석이 많이 있어서 팟/곰 같은 제3자 프로그램이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알기로 마소에서 WMP도 거의 IE11만큼이나 이제 더 만들 게 없는지 별로 육성은 안 하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6/05/16 08:32 2016/05/1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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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역사에 대해서 글을 쓰는 건 거의 3년 반 만에 처음인 것 같다.
지난번 자동차 이야기에 이어, 이번엔 화제를 VIP의 애마 말고 다른 쪽으로 좀 돌리도록 하겠다.

까마득히 먼 옛날인 순종 황제라든가 이 승만· 김 일성 같은 사람이 몰았던 차는 유니크템으로서 오늘날까지 실물이 존재하는데..
정작 해방 후에 한국 땅에서 직접 처음부터 조립해서 생산된 최초의 자동차인 '시발'(1955)은 의외로 실차가 오늘날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이거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발은 차체 외형은 자동 기계 공작 없이 엔지니어가 일일이 손으로 두들기고 펴서 만들고, 엔진은 미국 자동차 부품을 불법 복제해서 넣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이 물건들은 수출로 팔려 나가지는 못했을 것이고, 차량이 한물 갈 때쯤 다들 폐차 처분되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자동차 박물관 같은 데에 전시돼 있는 시발 택시는 그 시절에 달렸던 실차가 아니며, 다들 레플리카이다(예전의 고증을 반영해서 후대에 옛 물건을 일부러 새로 만든 복원품). 지금 불국사가 신라 시대에 지어진 원판이 아니라 훗날 재건된 건물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발 이후에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를 현대 자동차 위주로 좀 늘어 놓으면 이렇다.

  • 코티나(1968): 현대 자동차가 창립 후 면허 생산한 최초의 자동차. 외국의 자동차를 단순히 완제품 수입만 해서 판 게 아니라 면허 생산한 것임.
  • 포니(1975~1976): 잘 알다시피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 디자인 자체는 외국의 디자이너(쥬지아로)가 한 것이고 엔진도 일제(미쓰비시 새턴)이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지구상에 없던 모양의 자동차를 한국 땅에서 생산해 내는 데 성공함.
  • 프레스토(1985): 포니의 후속으로 개발된 포니 엑셀의 세단형 버전에 붙은 별칭이며, 요건 현대차 최초의 전륜구동 승용차이다. 전륜구동은 후륜구동보다 부품 수가 더 적지만 만들기는 더 어려웠다. 첫 승용차인 포니가 괜히 후륜구동이었던 게 아님.
  • 엑셀(1989): 연료 분사 방식이 카뷰레터에서 전자제어 다중분사(MPI)로 넘어가는 과도기. 최신 기술은 최상위 모델인 GLSi에서 첫 도입됐다. 이때 CF에서는 자동차에도 드디어 컴퓨터가 들어간다며 최첨단 기술이랍시고 왕창 자랑을 해 댔었다.
  • 엘란트라(1990): DOHC 흡기 방식 도입으로 엔진 출력 향상. 이 역시 최신 기술은 최상위 모델에 도입되곤 했다. 엘란트라 이전엔 그랜저의 최상위 모델인 V6 3000cc (1989)짜리도 SOHC 방식이었다.
  • 스쿠프(1991): 최초의 2도어 쿠페. 엔진을 최초로 독자 개발(알파 엔진). 터보차저
  • 액센트(1994): 최초로 로얄티가 전혀 들지 않고 현대 자동차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100% 독자 개발한 승용차다. 이만치 기술이 발달했다.

확실히 현대 자동차의 역사는 포드 사와 기술 제휴를 하던 시절과, 그 후 미쯔비시 사와 손잡은 시절로 시즌 1과 2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와 미쓰비시 사이의 기술 주종 관계 역전은 우리나라의 자동차 역사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구나 공동 개발한 자동차들이 하필 일본에서는 다 망했는데 한국에서만 대박을 친 것도 신기하고 말이다(그랜저/데보네어 V, 에쿠스/프라우디아).

1990년대에 자동차의 엔진 성능은 비슷한 시기에 무슨 컴퓨터의 클럭 속도가 증가한 것만치 그 정도로 폭발적으로 뻥튀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즘 차는 같은 배기량으로도 몇십 년 전 자동차가 상상도 못 할 만치 큰 출력이 나오는 건 사실이다. 특히 DOHC 흡기라든가 터보차저가 엔진 출력을 크게 끌어올려 주긴 했다.

포니 같은 옛날 차들을 보면 엔진룸이 요즘 차보다 더 길고 각지게 돌출돼 있는 주제에 정작 뚜껑을 열어 보면 공간은 더 휑하다. 부품들도 다 기계식이고 단순하다.
하지만 요즘 차들은 온통 복잡한 전자 부품들로 가득하고 그러면서도 엔진룸은 최대한 줄이고 객실 공간을 짜내다시피하게 설계된 것이 눈에 선하다.

포니부터 시작해서 엑셀, 스텔라, 쏘나타 Y2까지 그 시절 자동차들은 조르제토 쥬지아로의 디자인이다. 그러나 1986년에 나온 각그랜저는 시간대가 얼추 저 시절에 듦에도 불구하고 쥬지아로의 디자인이 아니며, 디자인과 설계까지 모두 현대/미쓰비시 공동 개발이다. 우리나라의 동전 중에 500원만이 다른 동전보다 늦게 따로 등장했으며, 열차 명칭 중에 새마을호는 비둘기/통일/무궁화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먼저 쓰이고 있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쥬지아로 이후로 한참 뒤, 2000년대 말에 fluidic sculpture라는 이념 하에 YF 쏘나타와 아반떼 MD를 디자인한 사람은 안드레 허드슨이라는 미국인이다. 쏘나타는 미국물 먹은 디자인이고, 경쟁 차종인 K5는 유럽물 먹은 디자인이라고 흔히 비교되곤 했다.

* 보너스: 현대 자동차의 차명 관련 개드립

  • 코티나: 앞서 언급했듯이 현대 자동차가 생산한 최초의 차량이다. 최초라는 건 시행착오의 시범타라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의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차가 생각보다 잘 퍼지고 고장이 잦았던지라, 코티나의 초창기 모델은 '고치나', '코피나', '골치나' 등 불명예스러운 개드립이 많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치면 버그가 꽤 많았던 듯.
  • 그라나다: 역시 유럽 포드 사의 차량을 면허 생산한 것이다. 얘는 그 당시로서는 그랜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꿈의 최고급 승용차였으며, 국내에 아직도 이 차를 애지중지 관리 잘 하면서 소장 중인 사람이 있다. 채널 A 카톡쇼에서 그 차주와 차를 취재한 적이 있는데(제18회).. 차주의 가족들은 차명에서 G를 B로 바꿔서 차를 '불안하다'라고 부른다고 한다. 너무 옛날 차여서 언제 갑자기 퍼질지 몰라서 타기 불안하다고. -_-;;
  • 쏘나타: '소나 타'. 이건 그 당시 경쟁사(대우?)의 회장조차도 현대를 디스할 때 구사한 드립이라고 한다.-_-;;; 한국어 보조사의 특성상 나름 중의성도 있다. (1) 사람이 아닌 소를 싣는 데 적합한 차라는 의미와, (2) 이런 저질 차를 탈 바에야 차라리 소를 타는 게 낫다는 의미. 그래서 1985년에 스텔라의 최상위 트림으로 Y1 모델이 나왔을 때에는 CF에 분명히 '소나타'라고 기재돼 있었지만, 그 이듬해, 심지어 Y2이 나오기도 전에 곧장 '쏘나타'라고 한글 표기가 ㅅ이 ㅆ으로 바뀌었다!
  • 에쿠스: 어느 난센스퀴즈에 따르면, 궁예가 타고 다니는 차라고 한다. -_-;; 글쎄, 한 나라의 국왕이니까 저 정도 기함급 승용차를 몰 만도 하겠다. 그런데 이젠 에쿠스도 단종되고 제네시스 EQ 900으로 넘어갔으니 옛날 이야기가 됐다.

소나타/쏘나타 드립에 대해서는 다음 사진과 화면을 참고할 것.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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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과거에 쏘나타는 후면 엠블렘의 첫 글자가 떨어져 나가서 '오나타'라고 바뀌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름 하나 갖고 참..;; 조감도가 한 획만 빠져서 오감도로 바뀐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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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5/06 08:38 2016/05/06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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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종 어차(1903)

황제의 즉위 무려 40주년을 기념하여 도입됐으며(참고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60년이 넘었다만..), 이게 한반도 땅에서 최초로 달린 자동차이다. 차종은 '포드 모델 A'이라는 2도어 오픈카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확실치 않으며, 자동차 역사 연구자 사이에서 그게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이런 거야말로 고종 실록 같은 데에 수록되지 않았나?

허나, 이 차는 얼마 못 가 러일 전쟁 기간 중에 소실된 관계로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시절에 자동차는 얼마나 비싼 물건이었을 텐데, 명백한 사고 폐차도 아니고 러일 전쟁 자체가 한국 땅에서 벌어진 것도 아닌데(청일 전쟁이 아님), 도대체 그 당시에 국가 자산 관리가 얼마나 막장으로 되고 있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래서 얘는 가정사로 치면, 첫째 자식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이름도 없이 일찍 죽은 형· 누나 정도의 존재감으로 취급된다.

2. 순종 어차(1913)

일제 강점기가 된 뒤에 데라우치 총독이 자기 차와 더불어 조선 황실에 대한 예우를 위해 선물해 준 차라고 한다. 1911년엔 고종 어차 시즌 2로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이 들어왔고, 1913년에는 순종 어차 명목으로 더 큰 캐딜릭 8기통 리무진이 들어왔다. 고종-순종 부자가 타라고 차를 두 대 구매했으나, 실소유자는 곧 순종-왕비 부부로 바뀌었다. 도입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운전대는 명백하게 오른쪽에 있다.

이 차들에 대해서도 도입 시기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아니다. 1911-1913년 도입이라고 하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한참 나중인 1918년식이라는 얘기도 있고. 저래 뵈어도 엔진의 배기량은 5000cc가 넘는데 제원상 최대 출력은 30몇 마력밖에 안 됐다는 것 역시 참 안습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자동차 기술의 한계가 거기까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들은 엄연히 현재까지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자동차 실물이다. 그리고 저 차종 자체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차량이 전세계적으로 극소수인데, 한국에 있는 물건은 보존 상태가 양호해서 세계 자동차 역사의 관점에서도 유물로서 가치가 대단히 높다고 한다. 6· 25 전쟁의 포화까지 견뎠을 정도이니, 얼마 타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종 어차 최초 도입분과는 운명이 정반대이다.

일단 아래 사진에서 왼쪽 것이 1911년도 다임러 리무진이고 오른쪽 것이 1913년도 캐딜락 리무진이다. 범퍼와 라디에이터 그릴의 모양이 서로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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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한때는 흙 묻고 빛 바래고 먼지가 수북이 앉은 채로 창덕궁 차고에 방치돼 있었으나, 1990년대 말에 현대 자동차와 영국의 올드카 복원 전문 업체가 협력해서 표면을 광 내고 대대적으로 보수를 했다. 복원하는 덴 시간이 5년에 가깝게 걸렸으며 비용도 10억 원가량이 들었다고 한다.

복원 작업은 2001년 말에 완료됐으며, 이 덕분에 어차는 완전히 새 차처럼 변했다. 캐딜락의 경우 원래 검정이었는데 표면 도색도 빨강으로 바꾼 듯하다. 현재 이들은 경복궁 안의 국립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캐딜락 리무진의 before과 after를 대조한 것이다.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했다. 저 차들이 191X년대에 갓 들여 온 직후에는 저렇게 반들반들 윤이 났을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지금 시퍼렇게 녹이 슬었다고 해서 그게 처음 만들어지던 당시에도 퍼렇지는 않았으며(동상은 원래 갈색· 구리색임), 옛날 사진이 지금 누렇게 바래 있다고 해서 옛날 그 당시의 풍경 자체가 누렇게 바랬던 건 아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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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 일성 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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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름아닌 북한의 수괴인 김 일성이 몰고 다니던 승용차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구소련 시절의 자동차이다.
구소련이라 하면 총(AK47!)과 비행기(AN-??)와 우주선은 만들었어도 정작 고유 모델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정보는 영 생소하다. 저건 ZIS 110이라는 모델로, 1948년에 김 일성이 스탈린으로부터 선물받았다고 한다.

김 일성은 이 차를 즐겨 몰고 다녔다. 6· 25 전쟁 중에는 안전한 후방에서 보고나 받고 명령만 내린 게 아니라, 경북 왜관까지 남하해서 전선을 시찰하고 북한군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고속도로도 없던 와중에 참 멀리까지도 내려왔다. 낙동강을 사수하네 마네 하던 리즈(?) 시절엔 그야말로 한반도 전역의 적화통일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는데 1950년 가을,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었고 김 일성은 시급히 후퇴를 해야 했다. 평양까지 빼앗기고 계속 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앞은 강으로 가로막혀 있고 다리가 없고 차량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다. 다른 길로 뺑뺑이를 칠 수도 없고.. 그래서 김 일성은 (아마 눈물을 머금고) 자기 애마를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난 차량이 남한에서 노획되었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이 차량은 1950년 10월 22일,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km쯤 떨어진 청천강 근처에서 남한 국군(6사단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고 노획됐다. 국군이 38선을 최초로 넘어서 국군의 날이 시초가 된 10월 1일 이후로 정확히 3주 만의 일이다.
이걸 최초로 발견하고 신고한 병사가 누군지를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검색은 더 귀찮아서 안 하련다. 그 병사는 당연히 큰 포상을 받았다.

김 일성의 리무진은 대한민국의 국고로 귀속됐다. 김 일성은 차만 버렸지 차키까지 놔 두지는 않았겠지만, 그 시절의 옛날 차들은 지금 같은 첨단 이모빌라이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타터 모터의 배선만 연결하면 강제 시동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차가 그때 이후로 줄곧 한국에서 애지중지 보존되어서 반공 안보 교육(?) 아이템으로 쓰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 승만 대통령은 1951년, 미 8군 사령관이던 월튼 워커 장군의 부인에게 이 차를 선물로 줬다. 워커 장군은 잘 알다시피 1950년 12월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교통사고로 한국 땅에서 순직했기 때문이다(교전 중 전사는 아니고..).

부인 되시는 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인수했지만 차는 곧 고장 났다. 냉전 중에 미국에서 적성국인 구소련제 차량은 부품을 구해 유지 보수를 하기도 어려웠던 관계로, 그녀는 차를 또 처분해 버렸다. 그렇게 김 일성 리무진은 미국 땅에서 정처 없이 30년 가까이를 방황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차가 사고가 나고 폐차됐다면 김 일성 리무진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랬는데 사단법인 유엔 한국 참전국 협회라는 단체에서(대표: 지 갑종) 1970년대에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이 차의 소재를 미국에서 찾아 냈으며, 뉴저지에 소재한 어느 자동차 수집상으로부터 거금을 주고 1982년에야 그 차를 한국으로 도로 역수입을 해 왔다. 먼 나라로 수출되었던 포니가 20여 년 뒤에 드라마 촬영을 위해 도로 역수입된 것처럼. 그때 고맙게도 대우 그룹 김 우중 회장이 재정적인 지원을 해 줬다고 한다.

또한, 그때 이래로 지 회장이 러시아 엔지니어까지 초청해서 관리를 잘 한 덕분에, 김 일성 리무진은 현재도 간단한 정비만 하면 곧장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좋다고 한다. 이분은 6· 25 전쟁 휴전 60주년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2013년 7월 16일, 차량을 전쟁 기념관에다 기증했다. 덕분에 우리는 전쟁 기념관에서 김 일성 리무진과 동시에 곧 소개할 이 승만 리무진도 나란히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6· 25 전쟁을 계기로 김 일성은 자기 애마뿐만 아니라 강원도 고성에 있던 자기 별장도 빼앗겼다.

4. 이 승만 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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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일성 차량에 비해 이 승만 리무진은 설명할 게 훨씬 없다. 1956년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의전용 방탄 캐딜락이다. 그러므로 전쟁 중에 굴러다닌 건 아님. 애초에 이 승만은 6· 25 때 피난도 자차가 아니라 열차를 타고 갔다.

얘는 어차처럼 창덕궁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2000년부터 전쟁 기념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었으며, 2013년경에는 역시 때 빼고 광 내는 부분적인 복원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이 작업은 당연하지만 구한말 어차를 복원하는 것만치 힘들고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차 역시 당장 시동 걸고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정태를 넘어 동태보존 상태라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28 08:31 2016/04/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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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철도/도로 뒷북 이야기

1.
국내 고속도로계에서 독보적으로 낙후한 이단아이던 88 올림픽 고속도로는 지난 2015년 말에 드디어, 드디어 전구간이 4차선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름도 '광주대구 고속도로'라고 바뀌었다. 솔직히 이 도로는 착공· 건설 시기가(개통 시기가 아님.)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시기와 비슷할지 몰라도, 지리적으로는 올림픽과 정말 아무 상관도 없었으니까..

중앙분리대조차 없이 2차선이던 이 고속도로는 설계 최대 속도도 100이 아닌 80km/h이었으며, 중앙선을 침범하여 앞차를 추월하다가 마주 오던 차와 정면 충돌하는 사고가 잦아서 교통사고 발생 빈도 내지 사고 사망률이 여타 고속도로들보다 몇 배로 더 높았다. 백괴사전에서는 "44(死死) 내림픽 저속도로"라고 개드립을 치면서 깠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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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 여건이 다른 고속도로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히 리모델링된 국도보다도 열악했던 관계로, 한국 도로 공사는 여기 구간의 통행료는 여타 고속도로의 반값 정도로만 징수했다. 서울 지하철이 '최소 거리 이용 추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요금을 측정하듯, 고속도로 톨비 역시 비록 진입과 최종 진출 나들목 자체가 88 내부의 나들목이 아니더라도 경로상으로 88을 이용했을 만한 위치라면 그걸 감안하여 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다가 이 도로도 찔끔찔끔 선형 개선과 확장, 이설 공사를 되풀이했으며, 그게 드디어 작년 말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오랫동안 존속해 온 통행료 특별 할인도 폐지됐다.

전국의 고속도로 나들목들 중 유일하게 평면교차+비보호 좌회전(고속도로에서!)이라는 엽기적인 형태로 남아 있던 '남장수 IC'는 해당 구간이 대거 이설되면서 없어졌다. 이를 대체하는 동남원 IC가 생기긴 했지만 저기서 서쪽으로 수 km 떨어진 곳이다. 남장수 IC가 없어진 건 철도로 치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스위치백이라든가 통표 폐색 구간이 없어진 것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옛날에는 이 88 말고 다른 고속도로도 이름만 고속도로이지 2차선에 평면교차 같은 막장 시설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호남 고속도로, 영동 고속도로 따위도 처음엔 그랬다.
심지어 1990년대에 대구와 원주를 잇는 중앙 고속도로조차도 처음엔 2차선으로 건설되고 있었는데 감사원에서 이를 잡아 냈다. "이렇게 만들었다간 99.9% 나중에 또 확장하느라 더 고생하고 돈과 시간을 더 낭비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설계를 갈아엎고 다시 만들어라. 그리고 이를 선례로 삼아 앞으로 새로 만드는 모든 고속도로들은 처음부터 반드시 4차선 이상 크기로 건설해라."라는 현명한 지시를 내려서 개선이 됐다.

저렇게 1990년대에도 2차선으로 건설될 뻔한 고속도로가 있었는데 1960년대 말 그 옛날에 처음부터 전구간 4차선으로 시작을 했던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과정이 문득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진다. 출처는 정확히 알 수 없다만 그 시절에 박통이 이미 "내가 야당이 하도 반대해 대서 일단은 4차선으로만 건설하지만 경부 고속도로는 얼마 못 가 분명히 비좁아질 거다. 확장을 하게 될 테니 도로 주변에 건물 건설 허가를 내지 말고 준비를 해 둬라" 이런 예고까지 했다고 한다.

경부 고속도로가 유지 보수 비용이 결국 건설 비용만큼이나 더 들었다고 회자되긴 한다만, 그건 다른 고속도로들도 훗날 꾸준히 개선되어 온 건 대동소이했다. 허나 88은 박통도 아니고 나름 5공 시절인 1980년대에 건설된 주제에 오랫동안 개선되질 못해서 까임거리가 된 것이다. 영호남 화합? 실질적인 수요보다는 정치 논리에 따라 건설됐다 보니 리모델링의 우선순위도 뒷전으로 밀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것도 이제 다 지나간 일이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88 올림픽 고속도로에 이어, 철도 경전선도 올해는 대대적인 선형 개량 공사가 끝나서 여러 구간이 이설되고 여러 간이역들이 없어질 예정이다.
자, 다음부터는 철도 얘기를 주로 늘어놓도록 하겠다.

2.
과거에 20세기 말에 우리나라의 최하등급 열차는 비둘기호였다. 정선선에서 운행하다가 2000년 11월 14일을 끝으로 퇴역했다.
객차형 비둘기호는 너무 싸서 수지맞지 않은 운임 체계, 너무 낡고 노후화한 객차 같은 여러 이유로 인해(비산식 화장실, 수동 출입문, 별도의 발전차 없이 객차가 차축 연결해서 소규모 자가발전-_-, 에어컨도 없음..) 21세기에까지 존속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긴 했다.

그 다음으로 통일호도 객차형은 차량이 비둘기호 만만찮게 열악했던지라 2004년 3월 31일, KTX 개통을 앞두고는 모두 퇴역했다. 근성열차라고 불리던 청량리-부전 통일호가 이때 사라졌고 경춘선도 통일호가 모두 무궁화호로 바뀌면서 사실상 운임이 강제로 일괄 인상된 효과도 났다.

나머지 디젤 동차형 통일호는 '통근열차'라고 이름이 바뀌었는데, 얘들은 진해선, 동해남부선, 군산선 등에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차근차근 무궁화호로 교체되면서 명줄이 위태로워졌다. 기관차-객차형처럼 차량이 완전히 다른 무궁화호 말고, CDC 객차 자체가 일명 RDC 무궁화호로 개조되기도 했다.

현재 통근열차의 최후의 보루는 서울에서 북쪽으로 가는 경의선과 경원선밖에 안 남았다. 허나 경의선에서는 이미 진작에 전철에 밀려 퇴출되었으며, 현재 전국에서 오리지널 CDC가 다니는 곳은 이제 소요산 이북의 경원선이 유일하다! 과거에 정선선 비둘기호와 비슷한 꼴이 된 셈이다. 비둘기호:정선선 = 통근열차:경원선 정도의 비례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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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20년쯤에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약 빨고 더 연장되어 연천까지 가 버리면 이제 CDC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더 북쪽의 잔여 구간은 지금 경의선이 그런 것처럼 안보 관광 열차가 대신 맡을 것이고.

물론 경원선 연장 구간은 전철이 들어간다고 해도 일단은 복선 노반만 확보해 놓은 '단선 전철' 형태로 운행될 예정이다. 그런데 복선 구간 운행이 너무 당연시되는 지하철 통근형 전동차가 갑자기 단선 구간에서 상하행 교행을 한다니 그것도 참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될 것 같다. 하긴, 천하의 KTX도 과거에 광주 역을 드나들 때는 꼬불꼬불 단선 구간을 다니긴 했다.

3.
21세기 이래로 경기화학선, 세풍제지선, 화순선 등 여러 산업· 화물 철도들이 소리소문 없이 열차 운행과 관리가 중단되고 사실상 폐선 테크를 타 왔다.
하지만 화물 분야에서 철도가 마냥 몰락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라, 지난 2010년 말에는 부산신항선이라는 걸출한 화물 철도가 개통했다. 그것도 복선으로. 여객이 아니고 항구 화물 전용 철도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쯤 뒤, 작년에는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평택에서 평택항으로 향하는 화물 철도가 또 신규 개통했다. 이름하여 평택선. 경부선과 연결하는 삼각선도 상하행으로 모두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무 방향으로나 통한다.

경부선 전철에서 성환-평택은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이기도 하고 역간거리가 무려 9km가 넘는다. 공항 철도를 제외하면 수도권 전철에서 역간거리가 가장 긴 구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이엔 온통 들판에 소규모 마을밖에 없기 때문에 역이 만들어질 여지가 별로 없다.

평택 다음 성환 역에도 사이에 웬 지선 철도가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뻗어 나간다. 이건 하행 방향으로만 있고 서울 상행 방향은 없는데, 다름아닌 성환읍 학정리의 야산 하나를 몽땅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군부대로 향하는 비밀 철도이다. 서빙고 역에서 미군 기지로 들어가는 그 철도, 그리고 호남선에서 논산 육군 훈련소 방면으로 가는 강경선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관련 신문 기사들을 검색해 보면 그 군부대는 탄약창인가 보다. 탄약은 굳이 사방으로 파편이 날리는 수류탄 같은 부류가 아니더라도, 내부에 다 화약이 들어있는 위험물이다. 한 탄약고가 공격을 받아 폭발하면 인근의 다른 탄약고까지 연달아 재귀적으로-_- 폭발하면서 Doom 2의 레벨 23 Barrels o' fun이 실사판으로 재연되는 참극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스플래시 대미지를 예방하기 위해 탄약창은 최대한 넓게 띄엄띄엄 지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탄약창의 부지가 굉장히 크다. 다만 여기에 땅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눈꼽만 한 보상밖에 못 받고 오랫동안 재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서 꽤 고달프게 지냈다고 한다.

4.
그 밖에 작년에 있었던 의미 있는 사건으로 또 떠오르는 건.. 서울 역과 노량진 역에 정식 환승 통로가 개통했다는 것이다.
버스와는 달리 지하철은 내렸다가(=집표 구역 밖으로 나감) 다시 탔을 때 환승 할인이 없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서울 지하철 9호선이 개통한 뒤에도 노량진 역에는 물리적인 환승 통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공항 철도와 경의선도 기존 지하철 1· 4호선 서울 역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는 수도권 전철 전체를 통틀어 예외적으로 철도끼리 내렸다가 30분 이내에 다시 타도 환승 할인이 인정되게 되었다. 일명 소프트 환승이다.

사실, 지금은 찍고 나간 동일 게이트에 5분 이내에 다시 들어가도 1회에 한해 기본 운임 재징수 면제라는 예외까지도 추가돼 있다. 이런 것들도 다 소프트웨어로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다 구현 가능한 건데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으니 막아 놓았던 것이다.

지금이야 5년도 더 전에 환승 통로가 개통했지만, 2010년 이전엔 '국철/중앙선' 청량리 역과 서울 지하철 청량리(1호선) 역도 마치 경의선 신촌과 지하철 신촌(2호선)만큼이나 환승이되지 않았고 별개의 역으로 취급되곤 했다. 또한 서울 지하철 6호선이 갓 개통했을 때에도 신당 역은 2호선과의 환승 통로가 아직 완공되지 않아서 몇 달간을 환승이 안 되는 역으로 영업을 했었다. 이때엔 소프트 환승 같은 건 없었다.

서울 역의 경우 지하철과 공항 철도가 정말 도를 지나칠 정도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관계로, 수직 이동 삽질을 줄이고 수평 이동도 무빙워크로 도와 줄 환승 토로가 정말 절실했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환승 통로 만들어 주세요" 급이었다. 그래서 작년 3월에 먼저 개통했다.
한편, 노량진은 민자역사의 건설과 맞물려서 환승 통로의 개통이 한없이 늦어졌다. 이건 마치 분당선 야탑 역과 인근 버스 터미널과의 통로 개통과도 비슷한 문제였던 것 같다. 둘 다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일이 늦어졌고 그 동안 승객들만 불편을 겪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래도 작년 10월 말에 환승 통로가 생기긴 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물리적인 환승 통로가 뚫린 덕분에,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두 역에만 존재하던 소프트 환승 예외 로직은 폐지되었다. 마치 88 올림픽 고속도로가 리모델링이 완료되면서 반값 통행료 제도가 없어진 것과 같은 이치다.

단, 서울 역에 있는 4개 전철 노선 중 경의선은 여전히 여타 노선들과 단절되어 있으며, 여기는 수도권 전철에서 유일하게 소프트 환승 예외가 계속 유지된다. 1시간에 1대밖에 안 다니는 마이너 지선에까지 굳이 환승 통로를 뚫을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신촌은 아주 유니크한 구간으로 그렇게 명맥이 유지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20 08:38 2016/04/20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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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 중에는 아동용 위인전을 안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으면서 어떤 인물을 왕창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는데, 나중엔 그 사람에 대해 감춰져 있던 흑역사도 알게 되고 위인전들이 그 인물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면서 미화와 왜곡을 일삼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환상이 깨지고 일종의 동심 파괴를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발명왕 에디슨의 경우 경쟁자인 테슬라와 얽힌 아주 지저분한 흑역사가 존재하며, 나폴레옹도 단순히 전쟁만 벌인 게 아니라 부하의 아내를 비열하게 빼앗은 것과 타 원주민 학살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십일조 잘 바친 신앙인(?) 기업가로 칭송받는 록펠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생리학자 노구치 히데요는 자국의 지폐에 등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지만 사실 업적으로나 인간성으로나 위인 레벨은 절대 아니라는 게 이미 다 까발려져 있다.

사실은 심지어 세종대왕, 이 순신 같은 (복음을 거부하는 핑계로 즐겨 언급되는) 언터쳐블급인 인물이라 해도 업적과는 별개로 다 부족한 죄인인 건 변함없으며, 까보면 다 흑역사가 나올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가 죄인으로 판명되고 지옥에 가는 게 어떤 경우건 아무 이유 없이 어거지로 이뤄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어떤 인물을 다루면서 일방적인 미화나 왜곡을 하지 않고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도저히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 내용도 너무 적나라하게 써 놨다. 그래서 성경은 정황상 도저히 인간의 저작물일 수가 없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이런 식으로 성립할 정도이다.

다윗의 흑역사, 모세의 흑역사.. 그리고 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욥기만 해도 그렇다. 흔한 동화라면 권선징악 구도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나쁜 부자, 구두쇠 악당 부자, 나쁜 계모를 조지는 이야기가 주류일 텐데 이건.. 부자인데 아주 착한 부자이고 의인이 왜 아무 까닭 없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너무 초월적으로 심오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욥이 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이 무조건 모범적이고 바람직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으며, 욥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너무 답답한 나머지 결국 성질 부리고 인간성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사람을 모 종교의 성인처럼 너무 떠받들고 칭송하는 것도 잘못됐지만, 그렇다고 자기도 그 상황에서는 그 이상으로 뻘짓 했을 거면서 남을 탓하고 욕만 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다. 감히 예수님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아무리 까발려 봐도 정말 먼지가 거의 안 나올 것 같은 인물이 있으며, 예수님에 근접하는 삶을 살았던 극소수의 인물은 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때 주 기철 목사는 바로 그런 그룹에 속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교회가 무너지고 교단이 무너지고 조선 기독교계가 황폐화되는 현실 속에서 신사 참배를 홀로 거부하다가 온갖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형무소에서 순교한 분이다. 게다가 유 관순이나 윤 봉길, 조선어 학회 학자들과는 달리 법정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아서 형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걔네들 일제의 관점에서도 법적으로 아무 근거 없이 불법으로 구금· 협박· 폭행을 당한 것일 뿐이다.
작년 성탄절 때 웬일로 KBS1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것을 감명깊게 잘 봤다.

일본은 단순히 조선에서 수탈만 저지른 게 아니라 조센징들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없애고 그들을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영미귀축과 맞장을 뜨려면 자기 제국의 덩치를 부풀려야 했으며, 그래서 조센징들도 단순히 노예에 물자 셔틀에만 머물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덴노 헤이카를 위한 총알받이가 되게 세뇌를 시켜야 했다.
쉽게 말해 SCV, 드론을 넘어서 마린이나 인페스티드 테란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거다. 정신 상태로 치면 질럿에다가도 비유가 가능하겠다. "My life for Tenno!" -_-

지금 생각하면 이건 정말 "무슨 마약 빨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급이었다. 뭐, 일본인으로 만들어 봤자 자국민과 동등한 레벨도 아니고 2류 3류 신민이었겠지만. 일본 자국민과 동급의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신노예를 만들려는 의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그렇다고 자국민도 편하게 지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걔네들 역시 전쟁광 수뇌부 때문에 겁나게 고생하긴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신궁을 보니까 저 정도면 단순히 국기/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가 아니라 종교적인 게 맞긴 해 보였다.
일본에서는 패전 후에 덴노가 인간 선언을 하자 고작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평생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때문에 멘붕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가 신으로 떠받들던 존재가 사실은 나와 똑같이 먹고 자고 싸는 인간에 불과했다니!"

맥아더도 이런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들 습성을 감안했기 때문에, 비록 히로히토 덴노가 악질 전범이긴 하지만 대놓고 그를 법정에 세워 처벌하거나 덴노 제도 자체를 없앨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북한 정권이 확 붕괴하고 김씨 부자가 자기와 똑같은 인간임이 폭로되고 나면 북한에서 제대로 세뇌돼 있던 핵심 계층 중에는 저렇게 멘붕하는 사람이 분명 나오지 싶다.

그 대신, 맥아더는 자신이 히로히토 옆에서 일부러 양아치 같은 거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언론을 통해 내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로 맥아더를 신으로 숭배하고 집에 신사까지 만들어 모시는 사람들이 나왔다고 한다. 거의 행 14:11-13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일본은 전반적인 정신 문화가 성경의 기독교와는 완전 상극이라는 게 느껴졌다. 일제는 이런 정신 문화를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다. "누가 너희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그러더냐? 니 예배도 할 거 다 하고, 여기서 잠깐 고개만 까딱하고 경의를 표해 주면 너도 살고 나도 가오가 살고 아무 탈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구냐? 이건 그냥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이지 종교적인 게 아니래도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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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참배와 동방요배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지켜야 할 신성한 제1의 임무이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성주들께서도 서양 기독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모두 참(수)하고 유황불에 던져 넣었던 것을 기억하라. 저들의 유일신은 우리 천황과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대적하는 것이다."

조선 땅에 있던 대다수의 종교 종파들은 집요한 협박과 회유, 특히 가족까지 동원한 악랄한 해코지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다. 거기에 굴복했다고 해서 딱히 민폐가 가는 게 아니니 이건 애초에 예수님을 안 믿는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비판할 거리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인 민폐는 굴복 안 했을 때 더 끼쳤을 가능성이 높지..

그러나 일부 기독교회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주 기철 목사 같은 영성으로는 저런 일제의 꼬드김은 영적으로 볼 때 출애굽기에서 파라오가 모세에게 제안했던 교묘한 절충안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임이 빤히 보였다. 오늘날로 치면, 성경을 들먹이면서 일부 배도한 목사가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하니까 동성애자들도 다 자기 스타일 대로 순수한 사랑을 하면 됩니다" 이러는 것과도 같다.

회유에 안 넘어가자 일제는 결국 "어쭈? 우리 덴노 헤이카가 더 강한지, 네놈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더 강한지 두고 보자!"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목사는 여러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고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나중에는 목사직에서 해임되어 사택에서도 쫓겨났으며 교회가 폐쇄당했다.

주 기철 목사의 막내 아들 주 광조는 어린 시절, 그 와중에도 평소에는 평양 경찰서를 거의 자기 집처럼 드나들면서 형사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저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도 모른 채. "광조 왔다~!!ㅋㅋㅋ" 그러면 형사들이 용의자 취조할 때 먹이는 코렁탕...은 아니고 주먹밥이라도 쥐어 주고 "요 귀요미 녀석 또 왔냐?" 그렇게 귀여워해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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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주 목사의 가족들을 다 불러 놓고 주 목사를 공개적으로 고문 시연을 했으니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가 생겼겠는가?
주 광조는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몇 년간 실어증을 앓았다고 한다.

저 때 TV에서 맛보기로만 묘사한 고문은 '비행기 태우기'이다. 그 당시에 일제가 행한 '흔한' 고문이다.
그나저나 주 목사 하면 못 위를 맨발로 걸었다는 ㅎㄷㄷ한 일화까지 전해지는데, 이건 언제 어느 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이고 누구의 증언을 통해서 전해지는지 정확한 출처를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게 궁금하다.

성경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친가정적인 교리를 표방하기 때문에, 근대 이래로 마 19:29, 막 10:30처럼 가족을 버리는 것까지 권장하는 정말 극단적인 상황은 대환란이 아니면 역사적으로 북한이나 일제 말기, 이슬람권 같은 곳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들은 나중에는 주 목사의 부인인 오 정모 사모도 두들겨 패면서 분풀이를 했다. "에라이, 남편을 죽으라고 부추기는 독한 년 같으니! (네놈들 때문에 우리까지도 실적 못 내서 상부로부터 잔뜩 갈굼 먹고 고달프단 말이다!)"

주 기철 목사뿐만 아니라 오 정모 사모도 신앙면에서는 정말 한 근성 한 분이었다. "따뜻한 숭늉을 한 사발 좀 마시고 싶소" 이런 유언을 남긴 남편 보고 "당신은 살아서 형무소를 못 나갑니다. 조선의 교회를 위해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런 말을 격려(?)랍시고 이를 악물고 했을 정도이니 일본 경찰과 간수들이 경악할 법도 했을 것이다. "저 조센징이 믿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우리 황국신민 중에 덴노를 위해 저렇게까지 충성을 바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같은 생각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주 목사는 정식으로 사형을 당한 게 아니며, 비록 지독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최후의 순간 자체가 "바보야, 그러게 좀 적당하게 두들겨 패고 강약 조절을 했어야지 아주 죽여 버리면 어떡해!" / "헉~ 죄..죄송합니다 ㅠㅠ"  같은 고문치사도 아니었다. 일제는 이런 면모에서는 오히려 아주 치밀하고 교묘했다. (유명한 고문치사 사건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훗날 대한민국 시대에 몇 건 터졌었다.)

이거 뭐 아무리 고문을 해도 소용없고 주 목사만 회생 불가의 죽기 직전 상태가 되자, 일제는 그를 슬쩍 병보석으로 풀어 주려 했다. "이 사람은 어찌 됐건 우리가 죽인 건 아니야. 우리 손으로 위대한 순교자 따위 만들고 싶지는 않아~" 면피를 위해서였다.

이런 예가 의외로 여럿 있다. 3· 1 운동 당시에 수원의 유 관순이라고 기록을 통해 뒤늦게 알려진 이 선경, 일제 말기에 진실을 외치다 주 기철과 비슷한 시기에 순국한 소년 주 재년도.. 다 의외로 옥중에서 죽은 게 아니다.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 후유증 때문에 몇 달 못 가 죽은 거다. 풀어 줘도 그건 사실상 석방이 아니었다.

이런 속셈마저 눈치 챈 오 사모는 남편에 대한 병보석 제안을 거부하였으며, 주 목사는 마지막 면회 후 감방 바닥에 누워 있던 중에 드디어 기력이 다하고 소천했다. 허나, 오 사모의 강직하고 대쪽같은 행적은 남편이 이렇게 순교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속된 말로 '시체 장사'를 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당연히 외쳐야 할 때 도저히 벙어리로 있을 수가 없어서, 무익한 종으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갔을 뿐입니다. 주 목사의 행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남편 개인이 대외적으로 막 알려지고 떠받들어지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최대한 경계하고 만류했다.
뭐, 주 목사를 거론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개나 소나 "나도 저분 존경해요" 립서비스 차원에서 위선적으로 이러는 건 대단히 보기 좋지 않으며, 이런 짓은 심지어 본인에게조차도 적용되는 사항이 될 수도 있으니 특별히 조심해야겠다.

그 시절에 주 목사의 자녀들은 일제로부터 불령선인 취급을 받아 쫄쫄 굶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너무 고생하면서 컸다. 너무 고지식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부모가 매정하고 야박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의로 양육된 자녀들은 바르게 잘 컸다. 장남 주 영진은 6· 25 때 빨갱이들에게 순교하여 손 양원 목사 가문처럼 부자가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4남인 주 광조가 제일 늦게까지 살아 있으면서 선친의 행적에 대해 증언하다가 지난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 목사는 일제의 통치에 정치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다. 종교 영역의 침범이 아닌 창씨 개명 정도까지는 별 반발 없이 따르기도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간 것일 뿐이지만, 그 행동이 결과적으로 나라 사랑에 항일 운동을 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 됐고 일제로부터 그런 짓(?)을 한 반동분자로 취급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이라는 꽤 높은 등급의 훈장이 추서되었으며(유 관순· 윤 동주와 같은 급) 서울 현충원에 가묘까지 만들어져 있다. 평양에서 유해를 찾아 와 이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특별히 만화로 각색된 것이 <만화로 보는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 기철 목사>(2007), <대동강의 순교자 주 기철>(1998, 두란노) 이렇게 두 종류가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 글에서 몇 컷 소개한 만화는 전자이다.
KBS 다큐멘터리는 일본의 신학계에서도 주 목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취재해 보인 것이 흥미로웠다. 하긴, 일본인들은 이 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그렇게도 치밀하게 연구했다는데 그 국민성으로 주 기철 목사까지 연구하는 건 이상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일제도, 북한 정권 같은 것도 없는 이 대한민국 땅에도 엄연히 신앙 생활에 고난과 시험은 있다. 내가 늘 말하지만, "너 이렇게 믿으면 죽는다" 대신에 "너 여기서 약~간만 타협하면 돈과 명예와 좋은 대외 평판을 무진장 얻을 텐데!"라고.. "눈 딱 감고 나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걸 네게 주겠다"라는 마귀의 시험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시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교리 쪽이든, 행실 쪽이든 참 좁은 길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더 낮아지고 바보 되는 것. 그걸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견디고 할 말한 뿐이다.

그리고 지난 3월 17일엔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배경과 출연진을 토대로 <일사각오>라는 영화도 나왔다. .

신사 참배 거부는 단순히 자기 종교 입장에서의 지조만을 고집한 게 아니라 사악한 일제의 군국주의 통치에 대해 거부의 뜻을 당당히 표현한 거라고 의미를 굉장히 많이 부여하고 있다. 그 당시 일제 당국조차 기독교는 자기네 식민 지배에서 굉장한 걸림돌이었다고 문서에다 기록했다고 영화는 소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조선 청년들을 군대에다 강제 징집하자는 발상은 1930년대에 이미 논의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징병은 완전 말기인 1944년이 돼서야 시행됐는데, 여기엔 조선인들의 이런 저항이 기여한 게 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의식이 고분고분 일본인으로 개조되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총을 쥐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6/03/28 08:36 2016/03/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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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래 전인 블로그 개설 초창기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 1.0부터 9x/ME까지
가난하지만 파이가 가장 큰 16비트 도스 진영을 특별히 공략한 전용 제품이다. 그러니 x86 전용. 가난한 컴에서 리소스를 최대한 짜내야 했던 관계로 코드는 쑤제 어셈블리어가 가득했으며, 어차피 이식성도 없었다.

※ NT 3~4
9x 같은 현실 절충이 아니라, 이상과 이식성을 추구한 컨셉을 살려 x86뿐만 아니라 Alpha, MIPS를 지원했다. 특히 NT 4의 경우 PowerPC까지 지원하여 지원하는 아키텍처가 가장 많았다. 실행 파일 포맷의 이름을 괜히 Portable Executable이라고 지은 게 아니었다.
Alpha의 경우 64비트 아키텍처이긴 했지만, Windows 자체는 여전히 32비트로만 동작했다. 물론 그때는 메모리 용량상으로 64비트는 어차피 전혀 의미가 없었으며, 단지 같은 클럭으로 32비트보다 대용량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한다는 점에서만 의의를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OS/2는 Windows NT에 준하는 귀족 된장(?) OS임에도 불구하고 이식성이 없이 x86 전용이었다. 이식성 있는 코드 위주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000
NT 계열이지만, 이제 한물 가고 망했다고 간주되는 아키텍처들에 대한 지원을 대거 끊어서 사실상 x86 전용이 됐다. 인텔에서 발표 예정인 IA64 Itanium 아키텍처와 연계하여 최초의 레알 64비트 OS로 거듭나려 했지만 CPU의 출시가 늦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 XP
이제야 x86 (32비트)과 Itanium (64비트) 에디션이 동시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Itanium는 알고 보니 정말 대차게 망한 관계로, 얘를 정식으로 지원하는 Windows는 XP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 -_-;;
그 대신 x86과 잘 호환되는 x64 내지 x86-64라는 새로운 아키텍처가 64비트 PC의 대세가 되었다. PC도 이제 메모리가 슬슬 4GB 방벽에 걸릴 타이밍이 되기도 했고.

그래서 2005년, 이미 SP2까지 출시되고 나서야 Windows XP는 x64용 에디션이 나왔다. 허나 정말 존재감 없이 지나가 버렸으며, XP는 대외적으로 여전히 싱글 코어 + 32비트 OS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더 강하다.

※ Vista와 7
Itanium은 칼같이 짤렸고 그 대신 x86 (32비트)과 x64 (64비트) 패턴이 나란히 정착했다. 7부터는 서버 에디션은 이제 32비트가 없이 64비트 에디션만 나오고 있다.

※ 8과 그 이후
저기에다가 모바일용 CPU인 ARM 에디션이 새롭게 추가됐다만, 이 에디션은 키보드 달린 일반 컴퓨터에서 볼 일은 딱히 없을 것 같다. 이 구도가 당분간 계속 이어질 듯.

이렇듯, Windows는 운영체제의 버전이 바뀌면서 지원 플랫폼도 은근히 자주 바뀌어 왔다. 이 외에도 운영체제 별 문자 입력 시스템의 변천사라든가 다국어 글꼴 시스템의 변천사를 다뤄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다국어 하니까 짚고 넘어갈 사항으로는..
Windows NT는 3.51부터 한글화되어 나왔다. 그러나 한글판이 나온 건 1996년, 이미 95도 나오고 NT 4.0이 나오기 몇 달 전이었던지라 3.51의 한글판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니 NT 3.51이 윈도 3.x의 셸 기반이었다고 해서 NT 3.51의 한글판이 한글 윈도 3.x의 투박한 비트맵 바탕체를 썼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Windows 자체가 한글판이 나온 건 무려 2.1때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우리나라 IT 인프라에서 뭘 그리 바랄 게 있겠는가..? 이 역시 3.0이 나오기 얼마 전일 정도로 시기가 매우 늦기도 해서 존재감은 거의 부각되지 않고 싹 묻혔다. 저 광고 말고는 스크린샷이고 기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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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3/23 08:24 2016/03/2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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