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철도/도로 뒷북 이야기

1.
국내 고속도로계에서 독보적으로 낙후한 이단아이던 88 올림픽 고속도로는 지난 2015년 말에 드디어, 드디어 전구간이 4차선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름도 '광주대구 고속도로'라고 바뀌었다. 솔직히 이 도로는 착공· 건설 시기가(개통 시기가 아님.)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시기와 비슷할지 몰라도, 지리적으로는 올림픽과 정말 아무 상관도 없었으니까..

중앙분리대조차 없이 2차선이던 이 고속도로는 설계 최대 속도도 100이 아닌 80km/h이었으며, 중앙선을 침범하여 앞차를 추월하다가 마주 오던 차와 정면 충돌하는 사고가 잦아서 교통사고 발생 빈도 내지 사고 사망률이 여타 고속도로들보다 몇 배로 더 높았다. 백괴사전에서는 "44(死死) 내림픽 저속도로"라고 개드립을 치면서 깠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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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 여건이 다른 고속도로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히 리모델링된 국도보다도 열악했던 관계로, 한국 도로 공사는 여기 구간의 통행료는 여타 고속도로의 반값 정도로만 징수했다. 서울 지하철이 '최소 거리 이용 추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요금을 측정하듯, 고속도로 톨비 역시 비록 진입과 최종 진출 나들목 자체가 88 내부의 나들목이 아니더라도 경로상으로 88을 이용했을 만한 위치라면 그걸 감안하여 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다가 이 도로도 찔끔찔끔 선형 개선과 확장, 이설 공사를 되풀이했으며, 그게 드디어 작년 말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오랫동안 존속해 온 통행료 특별 할인도 폐지됐다.

전국의 고속도로 나들목들 중 유일하게 평면교차+비보호 좌회전(고속도로에서!)이라는 엽기적인 형태로 남아 있던 '남장수 IC'는 해당 구간이 대거 이설되면서 없어졌다. 이를 대체하는 동남원 IC가 생기긴 했지만 저기서 서쪽으로 수 km 떨어진 곳이다. 남장수 IC가 없어진 건 철도로 치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스위치백이라든가 통표 폐색 구간이 없어진 것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옛날에는 이 88 말고 다른 고속도로도 이름만 고속도로이지 2차선에 평면교차 같은 막장 시설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호남 고속도로, 영동 고속도로 따위도 처음엔 그랬다.
심지어 1990년대에 대구와 원주를 잇는 중앙 고속도로조차도 처음엔 2차선으로 건설되고 있었는데 감사원에서 이를 잡아 냈다. "이렇게 만들었다간 99.9% 나중에 또 확장하느라 더 고생하고 돈과 시간을 더 낭비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설계를 갈아엎고 다시 만들어라. 그리고 이를 선례로 삼아 앞으로 새로 만드는 모든 고속도로들은 처음부터 반드시 4차선 이상 크기로 건설해라."라는 현명한 지시를 내려서 개선이 됐다.

저렇게 1990년대에도 2차선으로 건설될 뻔한 고속도로가 있었는데 1960년대 말 그 옛날에 처음부터 전구간 4차선으로 시작을 했던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과정이 문득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진다. 출처는 정확히 알 수 없다만 그 시절에 박통이 이미 "내가 야당이 하도 반대해 대서 일단은 4차선으로만 건설하지만 경부 고속도로는 얼마 못 가 분명히 비좁아질 거다. 확장을 하게 될 테니 도로 주변에 건물 건설 허가를 내지 말고 준비를 해 둬라" 이런 예고까지 했다고 한다.

경부 고속도로가 유지 보수 비용이 결국 건설 비용만큼이나 더 들었다고 회자되긴 한다만, 그건 다른 고속도로들도 훗날 꾸준히 개선되어 온 건 대동소이했다. 허나 88은 박통도 아니고 나름 5공 시절인 1980년대에 건설된 주제에 오랫동안 개선되질 못해서 까임거리가 된 것이다. 영호남 화합? 실질적인 수요보다는 정치 논리에 따라 건설됐다 보니 리모델링의 우선순위도 뒷전으로 밀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것도 이제 다 지나간 일이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88 올림픽 고속도로에 이어, 철도 경전선도 올해는 대대적인 선형 개량 공사가 끝나서 여러 구간이 이설되고 여러 간이역들이 없어질 예정이다.
자, 다음부터는 철도 얘기를 주로 늘어놓도록 하겠다.

2.
과거에 20세기 말에 우리나라의 최하등급 열차는 비둘기호였다. 정선선에서 운행하다가 2000년 11월 14일을 끝으로 퇴역했다.
객차형 비둘기호는 너무 싸서 수지맞지 않은 운임 체계, 너무 낡고 노후화한 객차 같은 여러 이유로 인해(비산식 화장실, 수동 출입문, 별도의 발전차 없이 객차가 차축 연결해서 소규모 자가발전-_-, 에어컨도 없음..) 21세기에까지 존속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긴 했다.

그 다음으로 통일호도 객차형은 차량이 비둘기호 만만찮게 열악했던지라 2004년 3월 31일, KTX 개통을 앞두고는 모두 퇴역했다. 근성열차라고 불리던 청량리-부전 통일호가 이때 사라졌고 경춘선도 통일호가 모두 무궁화호로 바뀌면서 사실상 운임이 강제로 일괄 인상된 효과도 났다.

나머지 디젤 동차형 통일호는 '통근열차'라고 이름이 바뀌었는데, 얘들은 진해선, 동해남부선, 군산선 등에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차근차근 무궁화호로 교체되면서 명줄이 위태로워졌다. 기관차-객차형처럼 차량이 완전히 다른 무궁화호 말고, CDC 객차 자체가 일명 RDC 무궁화호로 개조되기도 했다.

현재 통근열차의 최후의 보루는 서울에서 북쪽으로 가는 경의선과 경원선밖에 안 남았다. 허나 경의선에서는 이미 진작에 전철에 밀려 퇴출되었으며, 현재 전국에서 오리지널 CDC가 다니는 곳은 이제 소요산 이북의 경원선이 유일하다! 과거에 정선선 비둘기호와 비슷한 꼴이 된 셈이다. 비둘기호:정선선 = 통근열차:경원선 정도의 비례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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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20년쯤에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약 빨고 더 연장되어 연천까지 가 버리면 이제 CDC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더 북쪽의 잔여 구간은 지금 경의선이 그런 것처럼 안보 관광 열차가 대신 맡을 것이고.

물론 경원선 연장 구간은 전철이 들어간다고 해도 일단은 복선 노반만 확보해 놓은 '단선 전철' 형태로 운행될 예정이다. 그런데 복선 구간 운행이 너무 당연시되는 지하철 통근형 전동차가 갑자기 단선 구간에서 상하행 교행을 한다니 그것도 참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될 것 같다. 하긴, 천하의 KTX도 과거에 광주 역을 드나들 때는 꼬불꼬불 단선 구간을 다니긴 했다.

3.
21세기 이래로 경기화학선, 세풍제지선, 화순선 등 여러 산업· 화물 철도들이 소리소문 없이 열차 운행과 관리가 중단되고 사실상 폐선 테크를 타 왔다.
하지만 화물 분야에서 철도가 마냥 몰락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라, 지난 2010년 말에는 부산신항선이라는 걸출한 화물 철도가 개통했다. 그것도 복선으로. 여객이 아니고 항구 화물 전용 철도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쯤 뒤, 작년에는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평택에서 평택항으로 향하는 화물 철도가 또 신규 개통했다. 이름하여 평택선. 경부선과 연결하는 삼각선도 상하행으로 모두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무 방향으로나 통한다.

경부선 전철에서 성환-평택은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이기도 하고 역간거리가 무려 9km가 넘는다. 공항 철도를 제외하면 수도권 전철에서 역간거리가 가장 긴 구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이엔 온통 들판에 소규모 마을밖에 없기 때문에 역이 만들어질 여지가 별로 없다.

평택 다음 성환 역에도 사이에 웬 지선 철도가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뻗어 나간다. 이건 하행 방향으로만 있고 서울 상행 방향은 없는데, 다름아닌 성환읍 학정리의 야산 하나를 몽땅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군부대로 향하는 비밀 철도이다. 서빙고 역에서 미군 기지로 들어가는 그 철도, 그리고 호남선에서 논산 육군 훈련소 방면으로 가는 강경선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관련 신문 기사들을 검색해 보면 그 군부대는 탄약창인가 보다. 탄약은 굳이 사방으로 파편이 날리는 수류탄 같은 부류가 아니더라도, 내부에 다 화약이 들어있는 위험물이다. 한 탄약고가 공격을 받아 폭발하면 인근의 다른 탄약고까지 연달아 재귀적으로-_- 폭발하면서 Doom 2의 레벨 23 Barrels o' fun이 실사판으로 재연되는 참극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스플래시 대미지를 예방하기 위해 탄약창은 최대한 넓게 띄엄띄엄 지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탄약창의 부지가 굉장히 크다. 다만 여기에 땅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눈꼽만 한 보상밖에 못 받고 오랫동안 재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서 꽤 고달프게 지냈다고 한다.

4.
그 밖에 작년에 있었던 의미 있는 사건으로 또 떠오르는 건.. 서울 역과 노량진 역에 정식 환승 통로가 개통했다는 것이다.
버스와는 달리 지하철은 내렸다가(=집표 구역 밖으로 나감) 다시 탔을 때 환승 할인이 없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서울 지하철 9호선이 개통한 뒤에도 노량진 역에는 물리적인 환승 통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공항 철도와 경의선도 기존 지하철 1· 4호선 서울 역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는 수도권 전철 전체를 통틀어 예외적으로 철도끼리 내렸다가 30분 이내에 다시 타도 환승 할인이 인정되게 되었다. 일명 소프트 환승이다.

사실, 지금은 찍고 나간 동일 게이트에 5분 이내에 다시 들어가도 1회에 한해 기본 운임 재징수 면제라는 예외까지도 추가돼 있다. 이런 것들도 다 소프트웨어로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다 구현 가능한 건데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으니 막아 놓았던 것이다.

지금이야 5년도 더 전에 환승 통로가 개통했지만, 2010년 이전엔 '국철/중앙선' 청량리 역과 서울 지하철 청량리(1호선) 역도 마치 경의선 신촌과 지하철 신촌(2호선)만큼이나 환승이되지 않았고 별개의 역으로 취급되곤 했다. 또한 서울 지하철 6호선이 갓 개통했을 때에도 신당 역은 2호선과의 환승 통로가 아직 완공되지 않아서 몇 달간을 환승이 안 되는 역으로 영업을 했었다. 이때엔 소프트 환승 같은 건 없었다.

서울 역의 경우 지하철과 공항 철도가 정말 도를 지나칠 정도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관계로, 수직 이동 삽질을 줄이고 수평 이동도 무빙워크로 도와 줄 환승 토로가 정말 절실했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환승 통로 만들어 주세요" 급이었다. 그래서 작년 3월에 먼저 개통했다.
한편, 노량진은 민자역사의 건설과 맞물려서 환승 통로의 개통이 한없이 늦어졌다. 이건 마치 분당선 야탑 역과 인근 버스 터미널과의 통로 개통과도 비슷한 문제였던 것 같다. 둘 다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일이 늦어졌고 그 동안 승객들만 불편을 겪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래도 작년 10월 말에 환승 통로가 생기긴 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물리적인 환승 통로가 뚫린 덕분에,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두 역에만 존재하던 소프트 환승 예외 로직은 폐지되었다. 마치 88 올림픽 고속도로가 리모델링이 완료되면서 반값 통행료 제도가 없어진 것과 같은 이치다.

단, 서울 역에 있는 4개 전철 노선 중 경의선은 여전히 여타 노선들과 단절되어 있으며, 여기는 수도권 전철에서 유일하게 소프트 환승 예외가 계속 유지된다. 1시간에 1대밖에 안 다니는 마이너 지선에까지 굳이 환승 통로를 뚫을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신촌은 아주 유니크한 구간으로 그렇게 명맥이 유지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20 08:38 2016/04/20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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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 중에는 아동용 위인전을 안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으면서 어떤 인물을 왕창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는데, 나중엔 그 사람에 대해 감춰져 있던 흑역사도 알게 되고 위인전들이 그 인물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면서 미화와 왜곡을 일삼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환상이 깨지고 일종의 동심 파괴를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발명왕 에디슨의 경우 경쟁자인 테슬라와 얽힌 아주 지저분한 흑역사가 존재하며, 나폴레옹도 단순히 전쟁만 벌인 게 아니라 부하의 아내를 비열하게 빼앗은 것과 타 원주민 학살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십일조 잘 바친 신앙인(?) 기업가로 칭송받는 록펠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생리학자 노구치 히데요는 자국의 지폐에 등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지만 사실 업적으로나 인간성으로나 위인 레벨은 절대 아니라는 게 이미 다 까발려져 있다.

사실은 심지어 세종대왕, 이 순신 같은 (복음을 거부하는 핑계로 즐겨 언급되는) 언터쳐블급인 인물이라 해도 업적과는 별개로 다 부족한 죄인인 건 변함없으며, 까보면 다 흑역사가 나올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가 죄인으로 판명되고 지옥에 가는 게 어떤 경우건 아무 이유 없이 어거지로 이뤄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어떤 인물을 다루면서 일방적인 미화나 왜곡을 하지 않고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도저히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 내용도 너무 적나라하게 써 놨다. 그래서 성경은 정황상 도저히 인간의 저작물일 수가 없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이런 식으로 성립할 정도이다.

다윗의 흑역사, 모세의 흑역사.. 그리고 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욥기만 해도 그렇다. 흔한 동화라면 권선징악 구도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나쁜 부자, 구두쇠 악당 부자, 나쁜 계모를 조지는 이야기가 주류일 텐데 이건.. 부자인데 아주 착한 부자이고 의인이 왜 아무 까닭 없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너무 초월적으로 심오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욥이 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이 무조건 모범적이고 바람직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으며, 욥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너무 답답한 나머지 결국 성질 부리고 인간성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사람을 모 종교의 성인처럼 너무 떠받들고 칭송하는 것도 잘못됐지만, 그렇다고 자기도 그 상황에서는 그 이상으로 뻘짓 했을 거면서 남을 탓하고 욕만 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다. 감히 예수님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아무리 까발려 봐도 정말 먼지가 거의 안 나올 것 같은 인물이 있으며, 예수님에 근접하는 삶을 살았던 극소수의 인물은 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때 주 기철 목사는 바로 그런 그룹에 속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교회가 무너지고 교단이 무너지고 조선 기독교계가 황폐화되는 현실 속에서 신사 참배를 홀로 거부하다가 온갖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형무소에서 순교한 분이다. 게다가 유 관순이나 윤 봉길, 조선어 학회 학자들과는 달리 법정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아서 형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걔네들 일제의 관점에서도 법적으로 아무 근거 없이 불법으로 구금· 협박· 폭행을 당한 것일 뿐이다.
작년 성탄절 때 웬일로 KBS1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것을 감명깊게 잘 봤다.

일본은 단순히 조선에서 수탈만 저지른 게 아니라 조센징들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없애고 그들을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영미귀축과 맞장을 뜨려면 자기 제국의 덩치를 부풀려야 했으며, 그래서 조센징들도 단순히 노예에 물자 셔틀에만 머물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덴노 헤이카를 위한 총알받이가 되게 세뇌를 시켜야 했다.
쉽게 말해 SCV, 드론을 넘어서 마린이나 인페스티드 테란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거다. 정신 상태로 치면 질럿에다가도 비유가 가능하겠다. "My life for Tenno!" -_-

지금 생각하면 이건 정말 "무슨 마약 빨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급이었다. 뭐, 일본인으로 만들어 봤자 자국민과 동등한 레벨도 아니고 2류 3류 신민이었겠지만. 일본 자국민과 동급의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신노예를 만들려는 의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그렇다고 자국민도 편하게 지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걔네들 역시 전쟁광 수뇌부 때문에 겁나게 고생하긴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신궁을 보니까 저 정도면 단순히 국기/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가 아니라 종교적인 게 맞긴 해 보였다.
일본에서는 패전 후에 덴노가 인간 선언을 하자 고작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평생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때문에 멘붕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가 신으로 떠받들던 존재가 사실은 나와 똑같이 먹고 자고 싸는 인간에 불과했다니!"

맥아더도 이런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들 습성을 감안했기 때문에, 비록 히로히토 덴노가 악질 전범이긴 하지만 대놓고 그를 법정에 세워 처벌하거나 덴노 제도 자체를 없앨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북한 정권이 확 붕괴하고 김씨 부자가 자기와 똑같은 인간임이 폭로되고 나면 북한에서 제대로 세뇌돼 있던 핵심 계층 중에는 저렇게 멘붕하는 사람이 분명 나오지 싶다.

그 대신, 맥아더는 자신이 히로히토 옆에서 일부러 양아치 같은 거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언론을 통해 내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로 맥아더를 신으로 숭배하고 집에 신사까지 만들어 모시는 사람들이 나왔다고 한다. 거의 행 14:11-13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일본은 전반적인 정신 문화가 성경의 기독교와는 완전 상극이라는 게 느껴졌다. 일제는 이런 정신 문화를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다. "누가 너희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그러더냐? 니 예배도 할 거 다 하고, 여기서 잠깐 고개만 까딱하고 경의를 표해 주면 너도 살고 나도 가오가 살고 아무 탈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구냐? 이건 그냥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이지 종교적인 게 아니래도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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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참배와 동방요배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지켜야 할 신성한 제1의 임무이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성주들께서도 서양 기독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모두 참(수)하고 유황불에 던져 넣었던 것을 기억하라. 저들의 유일신은 우리 천황과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대적하는 것이다."

조선 땅에 있던 대다수의 종교 종파들은 집요한 협박과 회유, 특히 가족까지 동원한 악랄한 해코지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다. 거기에 굴복했다고 해서 딱히 민폐가 가는 게 아니니 이건 애초에 예수님을 안 믿는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비판할 거리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인 민폐는 굴복 안 했을 때 더 끼쳤을 가능성이 높지..

그러나 일부 기독교회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주 기철 목사 같은 영성으로는 저런 일제의 꼬드김은 영적으로 볼 때 출애굽기에서 파라오가 모세에게 제안했던 교묘한 절충안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임이 빤히 보였다. 오늘날로 치면, 성경을 들먹이면서 일부 배도한 목사가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하니까 동성애자들도 다 자기 스타일 대로 순수한 사랑을 하면 됩니다" 이러는 것과도 같다.

회유에 안 넘어가자 일제는 결국 "어쭈? 우리 덴노 헤이카가 더 강한지, 네놈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더 강한지 두고 보자!"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목사는 여러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고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나중에는 목사직에서 해임되어 사택에서도 쫓겨났으며 교회가 폐쇄당했다.

주 기철 목사의 막내 아들 주 광조는 어린 시절, 그 와중에도 평소에는 평양 경찰서를 거의 자기 집처럼 드나들면서 형사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저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도 모른 채. "광조 왔다~!!ㅋㅋㅋ" 그러면 형사들이 용의자 취조할 때 먹이는 코렁탕...은 아니고 주먹밥이라도 쥐어 주고 "요 귀요미 녀석 또 왔냐?" 그렇게 귀여워해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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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주 목사의 가족들을 다 불러 놓고 주 목사를 공개적으로 고문 시연을 했으니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가 생겼겠는가?
주 광조는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몇 년간 실어증을 앓았다고 한다.

저 때 TV에서 맛보기로만 묘사한 고문은 '비행기 태우기'이다. 그 당시에 일제가 행한 '흔한' 고문이다.
그나저나 주 목사 하면 못 위를 맨발로 걸었다는 ㅎㄷㄷ한 일화까지 전해지는데, 이건 언제 어느 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이고 누구의 증언을 통해서 전해지는지 정확한 출처를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게 궁금하다.

성경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친가정적인 교리를 표방하기 때문에, 근대 이래로 마 19:29, 막 10:30처럼 가족을 버리는 것까지 권장하는 정말 극단적인 상황은 대환란이 아니면 역사적으로 북한이나 일제 말기, 이슬람권 같은 곳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들은 나중에는 주 목사의 부인인 오 정모 사모도 두들겨 패면서 분풀이를 했다. "에라이, 남편을 죽으라고 부추기는 독한 년 같으니! (네놈들 때문에 우리까지도 실적 못 내서 상부로부터 잔뜩 갈굼 먹고 고달프단 말이다!)"

주 기철 목사뿐만 아니라 오 정모 사모도 신앙면에서는 정말 한 근성 한 분이었다. "따뜻한 숭늉을 한 사발 좀 마시고 싶소" 이런 유언을 남긴 남편 보고 "당신은 살아서 형무소를 못 나갑니다. 조선의 교회를 위해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런 말을 격려(?)랍시고 이를 악물고 했을 정도이니 일본 경찰과 간수들이 경악할 법도 했을 것이다. "저 조센징이 믿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우리 황국신민 중에 덴노를 위해 저렇게까지 충성을 바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같은 생각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주 목사는 정식으로 사형을 당한 게 아니며, 비록 지독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최후의 순간 자체가 "바보야, 그러게 좀 적당하게 두들겨 패고 강약 조절을 했어야지 아주 죽여 버리면 어떡해!" / "헉~ 죄..죄송합니다 ㅠㅠ"  같은 고문치사도 아니었다. 일제는 이런 면모에서는 오히려 아주 치밀하고 교묘했다. (유명한 고문치사 사건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훗날 대한민국 시대에 몇 건 터졌었다.)

이거 뭐 아무리 고문을 해도 소용없고 주 목사만 회생 불가의 죽기 직전 상태가 되자, 일제는 그를 슬쩍 병보석으로 풀어 주려 했다. "이 사람은 어찌 됐건 우리가 죽인 건 아니야. 우리 손으로 위대한 순교자 따위 만들고 싶지는 않아~" 면피를 위해서였다.

이런 예가 의외로 여럿 있다. 3· 1 운동 당시에 수원의 유 관순이라고 기록을 통해 뒤늦게 알려진 이 선경, 일제 말기에 진실을 외치다 주 기철과 비슷한 시기에 순국한 소년 주 재년도.. 다 의외로 옥중에서 죽은 게 아니다.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 후유증 때문에 몇 달 못 가 죽은 거다. 풀어 줘도 그건 사실상 석방이 아니었다.

이런 속셈마저 눈치 챈 오 사모는 남편에 대한 병보석 제안을 거부하였으며, 주 목사는 마지막 면회 후 감방 바닥에 누워 있던 중에 드디어 기력이 다하고 소천했다. 허나, 오 사모의 강직하고 대쪽같은 행적은 남편이 이렇게 순교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속된 말로 '시체 장사'를 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당연히 외쳐야 할 때 도저히 벙어리로 있을 수가 없어서, 무익한 종으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갔을 뿐입니다. 주 목사의 행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남편 개인이 대외적으로 막 알려지고 떠받들어지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최대한 경계하고 만류했다.
뭐, 주 목사를 거론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개나 소나 "나도 저분 존경해요" 립서비스 차원에서 위선적으로 이러는 건 대단히 보기 좋지 않으며, 이런 짓은 심지어 본인에게조차도 적용되는 사항이 될 수도 있으니 특별히 조심해야겠다.

그 시절에 주 목사의 자녀들은 일제로부터 불령선인 취급을 받아 쫄쫄 굶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너무 고생하면서 컸다. 너무 고지식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부모가 매정하고 야박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의로 양육된 자녀들은 바르게 잘 컸다. 장남 주 영진은 6· 25 때 빨갱이들에게 순교하여 손 양원 목사 가문처럼 부자가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4남인 주 광조가 제일 늦게까지 살아 있으면서 선친의 행적에 대해 증언하다가 지난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 목사는 일제의 통치에 정치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다. 종교 영역의 침범이 아닌 창씨 개명 정도까지는 별 반발 없이 따르기도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간 것일 뿐이지만, 그 행동이 결과적으로 나라 사랑에 항일 운동을 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 됐고 일제로부터 그런 짓(?)을 한 반동분자로 취급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이라는 꽤 높은 등급의 훈장이 추서되었으며(유 관순· 윤 동주와 같은 급) 서울 현충원에 가묘까지 만들어져 있다. 평양에서 유해를 찾아 와 이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특별히 만화로 각색된 것이 <만화로 보는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 기철 목사>(2007), <대동강의 순교자 주 기철>(1998, 두란노) 이렇게 두 종류가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 글에서 몇 컷 소개한 만화는 전자이다.
KBS 다큐멘터리는 일본의 신학계에서도 주 목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취재해 보인 것이 흥미로웠다. 하긴, 일본인들은 이 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그렇게도 치밀하게 연구했다는데 그 국민성으로 주 기철 목사까지 연구하는 건 이상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일제도, 북한 정권 같은 것도 없는 이 대한민국 땅에도 엄연히 신앙 생활에 고난과 시험은 있다. 내가 늘 말하지만, "너 이렇게 믿으면 죽는다" 대신에 "너 여기서 약~간만 타협하면 돈과 명예와 좋은 대외 평판을 무진장 얻을 텐데!"라고.. "눈 딱 감고 나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걸 네게 주겠다"라는 마귀의 시험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시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교리 쪽이든, 행실 쪽이든 참 좁은 길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더 낮아지고 바보 되는 것. 그걸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견디고 할 말한 뿐이다.

그리고 지난 3월 17일엔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배경과 출연진을 토대로 <일사각오>라는 영화도 나왔다. .

신사 참배 거부는 단순히 자기 종교 입장에서의 지조만을 고집한 게 아니라 사악한 일제의 군국주의 통치에 대해 거부의 뜻을 당당히 표현한 거라고 의미를 굉장히 많이 부여하고 있다. 그 당시 일제 당국조차 기독교는 자기네 식민 지배에서 굉장한 걸림돌이었다고 문서에다 기록했다고 영화는 소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조선 청년들을 군대에다 강제 징집하자는 발상은 1930년대에 이미 논의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징병은 완전 말기인 1944년이 돼서야 시행됐는데, 여기엔 조선인들의 이런 저항이 기여한 게 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의식이 고분고분 일본인으로 개조되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총을 쥐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6/03/28 08:36 2016/03/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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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래 전인 블로그 개설 초창기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 1.0부터 9x/ME까지
가난하지만 파이가 가장 큰 16비트 도스 진영을 특별히 공략한 전용 제품이다. 그러니 x86 전용. 가난한 컴에서 리소스를 최대한 짜내야 했던 관계로 코드는 쑤제 어셈블리어가 가득했으며, 어차피 이식성도 없었다.

※ NT 3~4
9x 같은 현실 절충이 아니라, 이상과 이식성을 추구한 컨셉을 살려 x86뿐만 아니라 Alpha, MIPS를 지원했다. 특히 NT 4의 경우 PowerPC까지 지원하여 지원하는 아키텍처가 가장 많았다. 실행 파일 포맷의 이름을 괜히 Portable Executable이라고 지은 게 아니었다.
Alpha의 경우 64비트 아키텍처이긴 했지만, Windows 자체는 여전히 32비트로만 동작했다. 물론 그때는 메모리 용량상으로 64비트는 어차피 전혀 의미가 없었으며, 단지 같은 클럭으로 32비트보다 대용량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한다는 점에서만 의의를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OS/2는 Windows NT에 준하는 귀족 된장(?) OS임에도 불구하고 이식성이 없이 x86 전용이었다. 이식성 있는 코드 위주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000
NT 계열이지만, 이제 한물 가고 망했다고 간주되는 아키텍처들에 대한 지원을 대거 끊어서 사실상 x86 전용이 됐다. 인텔에서 발표 예정인 IA64 Itanium 아키텍처와 연계하여 최초의 레알 64비트 OS로 거듭나려 했지만 CPU의 출시가 늦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 XP
이제야 x86 (32비트)과 Itanium (64비트) 에디션이 동시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Itanium는 알고 보니 정말 대차게 망한 관계로, 얘를 정식으로 지원하는 Windows는 XP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 -_-;;
그 대신 x86과 잘 호환되는 x64 내지 x86-64라는 새로운 아키텍처가 64비트 PC의 대세가 되었다. PC도 이제 메모리가 슬슬 4GB 방벽에 걸릴 타이밍이 되기도 했고.

그래서 2005년, 이미 SP2까지 출시되고 나서야 Windows XP는 x64용 에디션이 나왔다. 허나 정말 존재감 없이 지나가 버렸으며, XP는 대외적으로 여전히 싱글 코어 + 32비트 OS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더 강하다.

※ Vista와 7
Itanium은 칼같이 짤렸고 그 대신 x86 (32비트)과 x64 (64비트) 패턴이 나란히 정착했다. 7부터는 서버 에디션은 이제 32비트가 없이 64비트 에디션만 나오고 있다.

※ 8과 그 이후
저기에다가 모바일용 CPU인 ARM 에디션이 새롭게 추가됐다만, 이 에디션은 키보드 달린 일반 컴퓨터에서 볼 일은 딱히 없을 것 같다. 이 구도가 당분간 계속 이어질 듯.

이렇듯, Windows는 운영체제의 버전이 바뀌면서 지원 플랫폼도 은근히 자주 바뀌어 왔다. 이 외에도 운영체제 별 문자 입력 시스템의 변천사라든가 다국어 글꼴 시스템의 변천사를 다뤄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다국어 하니까 짚고 넘어갈 사항으로는..
Windows NT는 3.51부터 한글화되어 나왔다. 그러나 한글판이 나온 건 1996년, 이미 95도 나오고 NT 4.0이 나오기 몇 달 전이었던지라 3.51의 한글판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니 NT 3.51이 윈도 3.x의 셸 기반이었다고 해서 NT 3.51의 한글판이 한글 윈도 3.x의 투박한 비트맵 바탕체를 썼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Windows 자체가 한글판이 나온 건 무려 2.1때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우리나라 IT 인프라에서 뭘 그리 바랄 게 있겠는가..? 이 역시 3.0이 나오기 얼마 전일 정도로 시기가 매우 늦기도 해서 존재감은 거의 부각되지 않고 싹 묻혔다. 저 광고 말고는 스크린샷이고 기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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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3/23 08:24 2016/03/2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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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호선의 역사

* 꽤 오래 전인 블로그 개설 초창기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1. 개통식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인 8월 15일에 맞춰서 정부 수립을 했다. 그런데 이 8월 15일은 우리나라의 철도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날이다. 1974년 8월 15일은 서울 지하철 1호선 "겸" 수도권 광역전철이 같이 개통한 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최고급 열차이던 관광호가 새마을호로 이름을 바꿔 첫 운행을 시작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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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진을 보자. 이 둘은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겉으로는 흑백 사진이지만, 철덕이라면 전동차의 색깔이 저절로 컬러로 복원돼서 뇌에 비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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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동선과 스케줄을 보면, '서울 지하철 1호선'(종로선)의 개통식이 먼저 청량리 역 승강장에서 열렸다. 마침 친절하게도 당시 시각까지 사진에 담겨 있다. 아침 11시 15분경.
지하철 개통식 때는 서울 지하철 공사(현 서울 메트로) 소속의 흰 배경에 창틀 부분만 빨강 도색인 전동차가 사진에 담겼다.

이 사람들은 저 열차를 마치 자가용처럼 시승하고 다녔다. 그 당시 종합 사령실이 종로5가 역에 있었던 관계로 그 역에서 내려서 사령실도 잠시 들른 뒤, 서울 역도 지나 남쪽으로 쭈욱 내려갔다.

그렇게 지하철 개통식 팀이 도착한 뒤에야 수원, 인천, 성북 방면의 지상 '수도권 전철'의 개통식이 바로 구로 역 승강장에서 아침 11시 50분쯤에 열렸다. 이번에는 철도청 소속의 파란 배경에 창틀 부분만 흰 도색 전동차가 얼굴마담 역할을 했다. 물론 '초저항'이라고 불리는 저 식빵 모양의 일제 전동차 자체는 철도청 것이든 서지공 것이든 완전히 동일하다.

서울에서 수원이나 인천을 가려면 예전에는 털털거리는 디젤 동차를 타야 했는데 그게 모두 깔끔한 전철로 바뀌었고, 그 전철이 서울 종로에 있는 지하철 구간과 직통 운행까지 한다는 것이 이 지하철· 전철 개통의 의의였다.

가끔 코레일이나 서울 메트로 전동차를 타고서 안에서 철도의 역사 관련 동영상이 나오는 걸 살펴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자기 회사에 해당하는 얘기만 한다. 서울 메트로에서는 지하철 개통 얘기만 하고, 코레일에서는 수도권 광역전철 개통 얘기만 한다. 우리는 두 사건이 모두 순차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면 되겠다.

지하철· 전철 직통 시스템의 개통식은 원래는 대통령도 참석하고 아주 웅장· 성대하게 치러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알다시피... 아침 10시부터 장충동 국립 극장에서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광복절 기념식이 있었는데 거기서 영부인인 육 영수 여사가 괴한에게 총격을 당했기 때문이다(10시 23분).

지하철 개통식 사진에 찍힌 11시 15분은 그 대형 사고가 터진 지 50분 남짓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러니 저 사진에 나온 사람들은 마냥 기쁜 표정만 지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은 그 당시 양 택식 서울 시장이 아주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과업이었으며, 원래대로라면 개통식은 그의 인생 최고의 날이 돼야만 했다. 하지만 하필 그 날 대통령의 영부인이 세상을 떠나는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그는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시장 자리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그의 후임인 구 자춘 시장은 양 택식의 지하철 건설 계획을 거의 다 갈아엎었다. 하지만 저 사람도 선임 뺨치는 불도저였으며, 다음 노선인 2호선이 거대한 순환선으로 만들어진 건 그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2. 발전 내력

서울 지하철 1호선 겸 수도권 전철은 처음에는 한 편성당 6량으로 개통했지만 이미 1980년 12월에 8량으로 증설되었고, 1984년에는 10량으로 증설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 당시 열차를 타고 있는 동안은 "객실에서는 금연입니다. 출입문은 30초 동안 열려 있습니다(일반열차보다 훨씬 더 빨리 닫히고 금방 출발하므로). 지하철 전동차 안에는 화장실이 없습니다."라고, 난생 처음으로 일반열차가 아닌 지하철을 타는 사람을 대상으로 초보적인 안내 방송도 일일이 육성으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경부 고속도로가 처음 개통했을 때 "이 도로에는 사람이나 손수레, 자전거 따위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참 홍보를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1974년 첫 개통 당시의 운행 계통과 운행 시격은 다음과 같았다.

  • 청량리-성북(지금의 광운대 역): 40분
  • 서울역-청량리: 10분 (R/H 땐 5분)
  • 서울-구로: 10분
  • 구로-인천: 20분
  • 구로-수원: 40분

즉 남쪽으로는 10분 간격으로 구로, 인천, 수원, 인천 행이 번갈아가며 왔다고 생각하면 되고 북쪽으로는 4대 중 1대 꼴로 성북 행이고 나머지는 청량리까지만 간 셈이다.
인천까지 가는 전철이 급행도 없고 배차간격이 지금의 중앙선과 비슷한 수준이요, 수원 가는 전철은 지금의 소요산 행 열차보다 배차간격이 더 길었다는 얘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경부, 경인선 모두 그냥 복선이었고 특히 경부선 전동차는 지금 급행 전동차가 그런 것처럼 일반열차의 틈새를 이용해서 운행되었으니, 열차를 많이 투입할 수 없었음이 자명하다.
1981년 12월 23일에는 경부선 수원-영등포 구간이 2복선으로 확장되면서 경부선 전동차를 더욱 증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일반열차 눈치 볼 필요 없이 전동차만의 선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때 상대식 승강장을 하고 있던 역은 자연스레 쌍섬식 승강장이 됐다.

2복선화 공사는 그때 이미 구로 이남은 방향별 복복선으로, 서울 시내 구간은 공사가 쉽지 않아 선로별 복복선으로 정착한 것 같다. 방향별 복복선은 기존 복선 선로의 양 끝에 선로를 하나씩 추가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예전부터 있던 내선은 일반열차가 계속 쓰고 신설된 외선으로 전동차가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수원 이남으로도 계속 달리는 일반열차와는 달리, 수원에서 북쪽으로 회차해야 하는 전동차는 선로를 바꾸는 회차 과정에서 일반열차 내선을 침범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회차할 때만은 여전히 일반열차 눈치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2복선의 선로 용량에 걸맞게 전동차를 증차하기가 어려웠다.
이 고질적인 문제는 먼 훗날인 2003년, 병점 역이 개통하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차량기지와 함께 회차 전용 입체 교차로가 신설된 것이다. 병점뿐만 아니라 천안에도 전동차 회차 및 장항선 분기가 모두 입체 교차로로 잘 구비돼 있다.

90년대에 들어서서는 경인선도 2복선화가 추진됐다. 거기는 일반열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 타당성 조사는 진작에 다 통과했기 때문에 일이 성사됐다. 그리고 경부선과 경인선이 합류하는 구로-영등포 간은 아예 3복선화도 진행되었다. 1991년 11월 23일은 경인선 2복선화 기공식과 경부선 해당 구간 3복선화의 개통식이 거행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경인선 2복선화는 부평-주안-동인천의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구일 같은 역은 이를 계기로 형태가 크게 바뀌기도 했다.

사실 그 해 5월 25일에는 공사 때문에 1박 2일 남짓한 시간 동안 전동차가 잠시 단축 운행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 경부 고속철 2차 공사 구간에서 경부 고속도로 위를 타넘는 언양 고가 공사와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되겠다. 첨단 공법을 동원한 덕분에 공사의 대부분은 차량 통행을 막지 않고 그대로 진행할 수 있지만 아치의 기초를 놓는 한나절 남짓한 시간은 고속도로를 잠시 막아야 했다고 한다.

경인선과 더불어 경부선 수도권 전철도 수원이 아닌 무려 천안까지 남하하는 공사가 1996년부터 추진되었다. 그 시절에 경부선 일반열차를 타면서 아직 완공되지 않은 전철역 승강장이 휙휙 지나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경부선은 이제 천안 이북은 2복선 전철이 되었지만 일반열차 때문에 경인선처럼 충분하게 급행 전동차를 운행하지는 못한다.

서울 서남쪽이 그렇게 변화를 겪고 있는 동안, 북쪽 종점인 성북 일대에서는 1호선 전동차의 병목을 야기하고 선로 용량을 깎아먹던 '평면교차' 문제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진행됐다.
1978년 12월에는 경원선 용산-성북 구간에도 전동차가 투입되어 종전의 디젤 동차를 대체하고 1호선의 지선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이놈은 선로 합류와 회차 과정에서 유감스럽게도 1호선 전동차와의 평면교차를 야기하고 있었다.

얘는 2005년에 광역전철 중앙선으로 분리해 나감으로써 문제가 해결됐다. 용산-성북이 아니라 용산-덕소가 됐다. 마치 안산선 열차가 처음엔 1호선 경부선의 지선으로 운행되다가 훗날 4호선으로 완전히 독립해 나간 것과 같은 방식이다.
또한 경춘선 무궁화호가 야기하던 평면교차도 경춘선 복선 전철이 다른 선로로 이설되면서 사라졌다. 다만 이런 조치로 인해 반대로 말하면 성북(지금의 광운대) 역이 그 덩치에 비해서 경춘선도 못 타고 중앙선도 못 타고 오로지 1호선 전동차밖에 못 타는 역으로 역할이 줄기도 했다.

다만, 처음에는 이 수도권 전철의 북쪽 종점은 계속해서 올라가서 한동안 의정부북부에 머물러 있다가 이제는 동두천과 양주를 거쳐 소요산까지 올라갔고, 장기적으로는 무려 연천까지 갈 거라고 한다. 경원선 자체는 아예 민통선 안의 월정리와 철원까지 복원할 계획이 잡혀 있고.. 정말 40년 동안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룬 셈이다.

그나저나 먼 옛날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의 내부 인테리어가 온통 빨강이었다는 것이 본인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로마자 표기법이 바뀐 게 반영되고 국철과 지하철 구분 없이 색깔을 남색으로 획일화한 모습만 직접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옛날 사진을 보면.. 오히려 "내가 착각을 하고 있나, 색맹이 됐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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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3/20 08:31 2016/03/2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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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엔 강원도 동부 전선에서 일명 '노크 귀순' 사건이 벌어졌다.
굶주리던 북한 주민이 목숨 걸고 생지옥을 떠나 자유의 땅에 찾아온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와는 별개로, 남방 한계선의 경계 상태가 지금까지 개판이었다는 게 탄로나는 바람에, 군대의 높으신 분들 여러 명이 무더기로 징계를 받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과장 좀 보태서 서정적으로 묘사하면, 하늘에서는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고 땅에서는 영창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탈출한 그 병사가 당연히 최전방 철책 근무를 하던 중에 근무지를 이탈해서 남쪽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근무하던 중에 상관을 상대로 프래깅을 저지른 뒤 탈북한 병사도 실제로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 노크 귀순의 경우는 검색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강원도 소재이긴 하지만 최전방은 아닌 데서 군생활을 하다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탈영했다. 몇십 km를 며칠에 걸쳐 혼자 걸어서 남쪽 전방까지 이동하고, 그 동안 잠은 산 속에서 자는 역경을 거친 뒤에야 탈출에 성공한 것이었다.

게다가 작년 6월에는 무려 함흥에서도 한 북한군 병사가 전방까지 수백 km를 걸어서 탈북했다.
이 시점에서 본인은 먼 옛날, 초딩 시절에 읽었던 반공 동화 <용감한 탈출>이 생각났다. 25년도 더 전에 본 책이다. <한국 서적 공사>라는 출판사를 통해 1987년과 1990년에 두 차례에 걸쳐 발간되었다. 사실 내가 태어나서 '탈출'이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으로 접한 곳도 저기였지 싶다.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은 역시 10살 안팎의 북한 어린이인데 부모가 하루아침에 반동으로 몰린다. 아버지는 어디론가 끌려가서 생사도 모르고 어머니는 벌목장에서 중노동을 하다가 사고로 죽는다. 어머니는 “너는 이 생지옥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라” 이런 유언을 남기고, 애는 탈출을 결심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진짜로 저 노크 귀순자처럼 산 속에서 숨어 지내면서 남쪽으로 내려간다. 마침 집에 흰 개가 한 마리 있어서 아이와 동행한다.
(1) 차를 탄 군인들이 아이가 숨은 곳 근처에서 갑자기 내리는데, 다행히 노상방뇨만 하고 가 버린다. (2) 개가 어디 물자 보급고를 냄새를 맡고 찾아내서 건빵 포대를 물고 온다. 뭐 요런 깨알같은 장면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는 어떤 군인에게 걸린다. 전화를 걸어서 요런 정체불명의 어린이를 잡았다는 걸 본부에 보고를 하려는데, 개가 필사적으로 그 군인을 공격하고 기절시켜서 당장 위기는 넘긴다. 하지만 이제 탈북 시도가 들통났기 때문에 큰일 났다.

결말로 가면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개는 총에 맞아 죽는다. 깨갱 소리와 함께 피 내지 '붉게' 이런 묘사가 분명히 있었다. 남한 쪽에서는 아이를 향해 군인들이 "안심하라. 우리는 대한민국 국군이다! 개는 버리고 어서 xxxxxx해서 여기로 뛰어 와라!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라!" 이렇게 외친다. Aㅏ...

초딩 1~2학년용이라고는 하지만 북한· 반공을 소재로 다소 무겁고 슬픈 내용이었다. 그 먼 옛날 초딩 시절에 잠재의식 속에 각인된 반공 spirit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 성인의 관점에서 봐도 그 spirit은 충분히 유효하고 건전하지, 뭔가 방향이 수정되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는 이 영두라는 분인데, 검색을 해 보니 퇴직한 교사이다. 2014~2015년 현재까지도 아동문학계에서 여러 동화나 희극을 지어 발표하면서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이메일 주소도 있다. 10여 년 전에 작고한 이 오덕 선생과 비슷한 인상이다. 그렇다고 고향이 이북인 실향민이지는 않음.

너무 옛날 책인 관계로 오늘날 상업용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다. 그래서 본인은 국내에서 출판된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 중앙 도서관에 들러서 몇십 년 만에 현물을 다시 구경할 수 있었다. 단, 득템 장소는 본관이 아니라 강남 역 근처 국기원의 옆에 있는 별관인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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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도서 읽기 운동..;; 우리나라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트렌드가 저랬다는 게 믿어지시는가?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쥐를 박멸하자! / 머릿니를 퇴치하자" 이런 구호· 포스터가 나돌곤 했다. 그런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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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여러분! 우리나라는 88 서울 올림픽을 열 수 있을 만큼 국력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북쪽에는 자유와 행복을 몽땅 빼앗고, 얼어붙은 땅을 만들어 버린 음흉스러운 공산당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잘 사는 우리 대한민국을 몹시 배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쳐들어올 흉계만을 꾸미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손발리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한 반공 구호가 웃프게 느껴지겠지만 저 때는 마냥 웃을 일이 아니었다.
배 아파한 거 맞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19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됐을 때, 북한은 같은 민족으로서 축하를 해 주거나 같이 참가하기는커녕 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대한 항공 여객기를 폭파하고(1987, KAL 858) 김포 공항에서도 외국인까지 사주해서 폭탄 테러(1986)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건 수뇌부와 무관하게 말단의 또라이가 저지른 주한 미군의 범죄나 사고 같은 것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저런 인간말종들이 어떻게, 무슨 얼어죽을 민족, 통일 운운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쟤들은 어떤 이념이나 가치도 적화통일 내지 사탄적인 김씨 부자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은 집단이다.

특히 요즘은 북한도 과거 김 일성 시절 초기에, 고난의 행군이 있기 전, 8월 종파 사건이 터지고 주체 사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는 그럭저럭 살 만했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유행인 듯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분단 직후와 6·25 전의 극초창기 때부터 이미 소련군과 김 일성 정권의 만행에 학을 떼고 공산주의의 실체를 깨닫고서 탈출을 생각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음을 알아야 한다. 남한의 반공 독재자들이 그렇게도 싫다면, 월남을 거부하고 북에서 최후를 맞이한 조 만식 선생의 비장한 유언이 어떠했는지라도 절대로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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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어머니가 통나무에 깔려서 다친 그림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쟤네 가족이 반동으로 몰린 이유는.. 다름아닌 삼촌이 탈북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좌제에 걸렸다.
삼촌은 예전부터 저 조카에게도 "우리나라(북한)의 선전선동에 속지 마라. 여기야말로 진짜 헬조선이다. 너도 남조선으로 탈출해야 한다"라고 자기 목숨을 걸고 얘기해 주곤 했다.

"남조선은 지옥이 아니란다." 그런데 책이 출간된 지 거의 30년이 돼 가는 오늘날은 남조선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선동질 조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대기업의 횡포(?)가 심하고 입시· 취업 경쟁이 심하다 한들 남조선이 북조선만도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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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잊고 있었다. 쟤들은 열차를 이용한 히치하이킹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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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은 드디어 전방에 도착하고 북한의 민통선 지대에까지 진입했다. 나중에 어느 병사에게 들켰을 때에도 병사가 "여긴 민간인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고, 일부러 침입하지 않고서야 길을 잃어서 들어오는 게 절대 불가능한 곳이다. 넌 누구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군사 분계선 인근은 민통선까지 넘어서 말 그대로 '비무장 지대'인데, 거기서 저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거기서 개가 피탄되어 죽을 정도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북한의 초딩 꼬마가 혼자서 남한으로 넘어온다는 건 정말 굉장한 허구 각색이긴 하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나중에 지리적인 설정을 더 고찰해 보겠지만, 저 스토리에서 총격전이 벌어질 만한 곳은 판문점과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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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에서는 DMZ에서 적군과 총격 교전이 벌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TV와 신문에서 대서특필을 할 일이다. 그 와중에 "용감한 탈출"의 주인공인 북한 어린이는 온갖 매스컴 인터뷰를 타면서 떠받들어질 것이다. 더구나 TV에 나와서 저 책에서처럼 "우리 부모님과 사랑하는 재롱이(개)를 죽인 공산당은 나빠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외치기까지 하면..;;

저 애는 안 그래도 1980년대 5공 시절, 북풍에 없는 간첩도 만들어 내던 시절에 그야말로 제2의 이 승복으로 거의 국가적인 영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_=;;;; 군대에서 각종 정훈 교육의 소재로도 쓰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 정도로 유명세를 타 버렸으니, 먼저 탈북한 삼촌과의 만남도 큰 어려움 없이 성사되었을 것이다. 삼촌은 어떻게 탈북했을지가 궁금해지지만, 그래도 어린이가 아닌 성인이다 보니 그렇게까지 주목받을 일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자, 그림을 곁들이느라 분량이 길어졌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다. 다음 시간에는 북한 정권 욕 같은 정치 얘기는 없이 북한 지리 얘기를 하면서 <용감한 탈출> 동화의 설정 고증을 해 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12 08:32 2016/03/1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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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글에서 계속됨

1.
백장미단의 홍일점이던 소피 숄은 나치 반대 운동을 하다가 겨우 23세의 나이로 저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독일엔 이와 완벽한 대조를 보이는 아가씨도 있었다.
이르마 그레제(1923-1945)는 생년과 몰년이 모두 소피 숄보다 딱 2년씩만 더 늦어서 23세에 죽은 것은 동일하다. 허나, 이 사람은 나치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은 게 아니라 반대로 전후에 나치 전범으로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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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목은 바로 나치 수용소의 간수로 근무하면서 수용자들을 끔찍하게 학대하며 그걸 새디스틱하게 즐겼다는 것이다. 심심하면 자기 멋대로 수용자들을 구둣발로 조인트 까고 굶기고 때리고 채찍질하고 옷 벗겨서 성고문을 일삼고.. 아니면 굶주린 군견을 풀어서 물어 죽이거나 가스실로 보냈다. 차고 있던 권총으로 즉결처분을 해 버리는 건 차라리 자비로운 조치다.

수용자 목숨을 정말 파리 목숨 정도로 치부했으며 그녀는 수용소의 모든 수감자들 사이에서 "나치의 악녀"라고 악명이 자자했다고 한다. 하는 짓은 현신한 악마 그 자체인데 얼굴은 참 예쁘장했다니 기가 막힌다.
나중에 그녀의 죄상이 밝혀지고 그녀의 나이와 외모까지 같이 밝혀지자 연합국 측은 이런 아가씨가 저런 짓을 버젓이 저질렀다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사형 집행 직전에 수줍은 듯 "빨리(집행해 주세)요~(Schnell..)"라고만 말했지만, 밧줄이 목에 잘못 걸렸는지 곧바로 목동맥이 부러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말 그대로 목이 졸리는 질식 과정을 거치면서 다소 길고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고의는 아니었다고 하는데..

비슷한 시기를 살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죽기까지 한 같은 20대 여자라도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저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북한 정권이 무너지면 거기 정치범 수용소에서도 이와 비슷한 죄목으로 죽거나 조리돌림 당할 악질 간수들이 많이 발견되지 싶다.

한편, 숄이 +1이고 이르마 그레제가 -1이라면, 그럭저럭 0 내지 -0.1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히틀러의 마지막 비서라고 알려진 여인인 '트라우들 융에'(1920-2002)인데..
전후에 길거리를 걷다가 소피 숄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걸 보고 그 유래를 궁금해하다가 큰 전율을 느끼고 데꿀멍 하고 말았다. "자기가 한창 히틀러 밑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동안, 같은 여자이고 나이도 거의 동갑인 한 이 친구는 나치와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저렇게 죽었구나..! ㅠㅠㅠㅠ 난 너무 어려서 히틀러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도 다 핑계일 뿐이구나"라고 영화 <몰락>에 직접 출연해서 증언을 했다.

그런데 세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간으로 가는 게 제일 무난한 건지.. +1과 -1은 모두 진작에 사형 당한 반면, 정작 저 사람만이 독일이 통일되는 것까지 보고 천수를 누리다가 갔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상. 부정적인 인물 소개는 이걸로 마치고, 다음부터는 긍정적인 인물 얘기를 하겠다.

2.
한편,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의 소년 항일 열사로 뒤늦게 알려진 주 재년(1929-1944)에 대해서도 한번 짚고 넘어갔으면 싶다. 그는 1943년 어느 날, 팀을 짜거나 삐라를 만들어 뿌린 것도 아니고 마을 담장에다가 "일본과 조선은 서로 다른 나라다(내선일체 대동아 공영권 따윈 X까라). 일제는 반드시 패망한다. 조선 만세" 이런 글귀를 써서 일제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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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당연히 "이딴 낙서를 한 놈이 누구냐? 안 나오면 마을 전체가 작살날 줄 알아라"라고 사람들을 위협했고, 이에 주 군은 당당히 "이건 내 소행이니 다른 사람들을 해코지하지 마시오"라고 자백하고 잡혀 갔다.
그는 그때 겨우 10대 중반의 중학생 나이로, 유 관순보다도 어렸다. 일제 강점기 35년을 통틀어 아마 최연소 항일 인사였을 것이다.

일제는 "이 짓을 니 혼자 했을 리가 없다. 누구 지시를 받은 거야? 앙?" 하면서 애를 무자비하게 때리고 고문했다. 주 재년은 몇 달간 헌병대에서 고생하다가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이미 초죽음 상태였던 관계로 석방 후 한 달 남짓 만에 순국하고 말았다.

그냥 단두대에서 목을 뎅겅 쳐 버린 것하고, 대놓고 사형 선고를 내린 건 아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사람을 죽게 한 것. 각각이 다 나치스럽고 일제스러워 보인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니까 "너희들은 전쟁에서 필패한다"라고 치부를 대놓고 찌르고 퍼뜨리는 사람이 더욱 미워 보일 수밖에 없었겠다. 사실 저런 소문은 병사들의 사기와 심리 차원에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3.
일로나 토드(Ilona T?th, 1932-1957)는 헝가리 혁명 때 희생된 의대생이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도 한국어로 된 자료는 거의 찾을 수 없는 인물이다. 네이버의 검색 결과와 구글의 검색 결과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단 영문으로 된 관련글을 하나 링크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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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위의 글을 읽어 보면 그녀는 FM에 엄친딸 모범생 그 자체였다. 집이 가난했지만 늘 검소하고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고, 공부와 운동에 모두 능통했고 기독교 신앙도 독실했댄다. 의대인지 간호대인지 어쨌든 의료 계열 학교에 무난히 진학했다.

그런데 1956년, 나라에서 공산당의 억압· 통치에 반발하여 소련을 몰아내려 한 민중 혁명이 일어났다. 그녀는 딱히 정치에 관심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혁명이 올바른 명분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여 시위 중 부상자를 치료하고 돌봐 줬다. 그냥 돌본 게 아니라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돌봐 줬다. 밤낮으로 환자들을 간호하고 인근 국가로 위험한 무단 월경까지 하면서 음식과 의약품을 구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혁명군은 소련군의 무자비한 유혈 대응에 패배했으며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혁명군의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혁명군에 가담했던 일로나도 체포되었는데, 그녀는 아까 숄 남매나 주 재년 같은 적극적인 저항 활동에 대한 혐의가 붙은 건 아니었다. 그 대신 그녀는 다른 동지를 구하기 위해서 경찰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혼자 뒤집어쓰다시피 했다고 한다. 치료를 가장한 독극물 주입으로. 그것 때문에 공산당 인민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끝내는 20대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했다.

그녀의 모친은 마지막 면회 때 멘붕하여 "이 와중에 도대체 신은 어디 있는 거냐!"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여기 제 바로 옆에 계셔요"라고 너무나 차분한 자세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Don't cry mother, I will die as a brave Hungarian soldier. You know that the charge is false, and they just want to besmirch the holy revolution." (해석은 생략하겠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돈 크라이 마미>라는 좀 어설픈 범죄/복수극 영화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복수극을 만들려면 최소한 테이큰의 반은 따라가는 퀄리티로 만들 것이지, 저건 죽도 밥도 아닌 퀄리티였다. 흥행 실패할 수밖에.)
하지만 일로나의 저 말이야말로 "돈 크라이 마미"의 모범 사례였다. 이 결론을 소개하고 싶어서 이 인물까지 같이 소개하게 됐다. 헝가리에는 당연히 이 사람의 동상도 있고 그녀를 길이길이 기리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03 19:32 2016/03/0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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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산주의 유머

구소련의 사회/정치 관행을 풍자한 공산주의 유머 중에는 이런 게 있다.

(1)
소련의 한 작은 마을에 살던 이반이 시베리아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그나마 살아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한데 모여서 그에게 수용소 생활이 어땠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거기 일상은 물자가 좀 열악하고 따분한 노동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고 털어 놓았다. 이에 어떤 마을 사람이 이렇게 반문했다.

"놀랍군, 이반. 하지만 얼마 전에 시베리아에서 돌아왔다가 다시 끌려간 미하일의 말은 정반대였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끔찍한 인권 유린, 살인적인 중노동이 밤낮으로 이어졌다고 말야."

그러자 이반은 담배를 깊게 빨고는 한 마디 했다.
"아, 그 친구? 말을 그딴 식으로 했으니 당연히 또 끌려갈 수밖에 없지."

... 마을 사람들은 모두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흩어졌다.

(2)
러시아에 사는 한 유대인 부부가 이스라엘로 이주하려고 애썼는데, 행정상의 잘못으로 인해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남편인 아브라함을 제외한 그의 아내와 아이들만 소련을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었다.

가족이 찢어지게 되었고 당분간 서신 왕래만 가능할 텐데, 부부는 소련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간단한 규칙을 정했다. 편지에서 남편이 검은색 잉크로 쓴 글자는 사실이므로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되고, 붉은색 잉크로 쓴 글자는 전부 거짓이니 반대로 이해하라는 것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이스라엘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편지는 검은색 글씨로 "여긴 모든 게 괜찮다. 여건이 더 좋아지고 있고 먹을 것도 풍부하고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등 온통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이었는데...
편지는 끝까지 읽어 봐야 했다. 추신엔 이런 문장이 있었다.

"그런데 말이오, 한 가지 문제가 있소. 아무리 해도 붉은색 잉크를 도무지 구할 수 없구려."


이걸 보면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할 수 없는지, 남한과 북한끼리는 제대로 된 이산가족 상봉은커녕 서신 왕래와 전화 통화조차 왜 절대로 성사되지 못하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조금이라도 정보 왕래의 통로가 뚫리면 사람들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천외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가령, 빽빽한 텍스트에서 세로드립은 고전적인 테크닉 중 하나일 뿐이다.

범죄자가 아닌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은 북한의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소수의 간첩· 불온세력간의 의사소통은 불행히도 남한의 안보를 저해하는 용도로 악용된다. 그러니 서로 왕래를 절대로 할 수 없게 막아 놓는다.

2. 일본의 재일 교포 북송 사업

저 공산주의 유머에서 1은 그렇다 치더라도 2의 경우 실제로 비슷한 사례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과거에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자, 일본은 그 뒤에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렇다고 일본으로 정식 귀화하지도 않고서 자기네 나라에서 계속 정착해 있는 조선인 집단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거 뭐 과거의 식민지 시절처럼 정부 차원에서 대놓고 차별하고 착취하거나 잡아 가둘 수도 없고..;; 그 당시 남한과 북한은 모두 공식적으로 일본과는 서로 생까는 미수교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본토 사정도 워낙 가난하고 혼란스러웠으니 재일 교포들을 일일이 다 받아 주고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6·25 전쟁을 한바탕 치른 뒤 1950년대 말엔 북한이 일본 내부의 조총련을 주축으로 하여 재일 한국인들을 대대적으로 북한으로 데려 오려는 공작을 벌였다. 북한은 노동 인력을 확보하고 자기 체제를 어필하고 싶었으며, 일본은 재일 교포들을 빨랑 워이~ 내보내고 싶었으니..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서 거래가 성사되었다. 물론 일본이 대놓고 공산주의 국가와 손잡는 건 국제 정세상 보기가 안 좋기 때문에 적십자라는 민간 단체를 거쳐서 일을 진행했다.

북한 당국과 일본 적십자사는 우리로 치면 마치 월북 권유 불온삐라처럼, "북한은 공산권 국가로부터 원조를 직통으로 받으면서 한창 발전 중임. 아직도 전쟁 폐허에 거지들이 우글거리는 헬게이트 남조선과는 차원이 다름! 무상 의료 무상 복지! 지금 이 기회에 북한으로 가면 정착 지원이 얼마이고 혜택이 어쩌구" 하면서 온갖 감언이설로 재일 교포들을 현혹했다.

그리고 이 말을 믿고 실제로 북한으로 가는 사람들이 몇백 명 정도 생겼다. 교류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남한/북한과는 달리, 북한/일본은 그 당시 아직 일말의 서신 교류는 가능했던 모양이다. '만경봉호'라고 불린 북송선을 먼저 타기로 한 어떤 교포는 후발대에게 편지로 연락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여기서는 저 서양 유머 버전처럼 변별 요소가 잉크 색깔이 아니었다. CJK 문화권답게 "내가 편지를 세로쓰기로 보내면, 저 소문이 사실이란 뜻이오. 이북이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니 너도 후속 북송선을 타고 빨랑 오시오. 하지만 가로로 써서 보내면 저거 다 거짓말이라는 뜻이니 오지 마시오."라고 규칙을 정했다.

결과가 어땠을까? 후발대에게 도착한 편지들은 검열을 의식하여 겉보기로 내용은 온통 지상락원 드립에 위대한 김 일성 장군님 칭송이었다. 그러나 텍스트가 배열된 형태는 한 치의 예외 없는 가로쓰기였다! 그래서 그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월북(?)을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영락없이 저 공산주의 유머의 실화 버전이지 않은가?
심지어 "여기는 일본의 ○○○만치 풍요로워요!"라는 문장도 있었는데, 북한 관리가 일본 문화를 몰라서 검열을 통과했을 뿐, ○○○는 실제로는 '달동네, 꽃동네' 급의 일본의 극빈민가 명칭이었다. 영락없는 반어법이 된 셈.

일본에서 재일들은 다소 차별 받으며 2등 인민 취급을 받아 왔다고 하지만, 북한에서의 실제 대접은 2등도 못 되는 삼류 이하 적대계층이었고 여건이 훨씬 더 나빴던 것이다. 차라리 일본에서 계속 지내는 게 나았다. 그들은 감언이설에 속은 것이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라. 2등 인민이라지만 일단 자유 진영 바깥 문물을 맛보다가 저 미끼에나 달랑 낚여서 들어온 사람들을 북한 당국이 호의적으로 대접해 줄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감시하고 착취하고 부려먹기나 하겠지.

3. 검열의 과거 실제 사례

하긴 옛날에 유럽에서는 1차 세계 대전 때 참호전이 워낙 참혹한 생지옥이다 보니, 병사들이 고향으로 편지를 보낼 때 현장 묘사를 대놓고 하지 말라고 불가피하게 검열을 했다. 전시에 이 정도로 표현의 자유를 좀 통제하는 건 심지어 미국도 괜히 반전 여론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슬금슬금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면 낫지, 나치 독일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로 가 보자. 입구에는 보통 "ARBEIT MACHT FREI(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한다)"라는 표어가 마치 군부대 입구의 표어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어떤 수용소의 것은 ARBEIT의 B에서 윗부분의 D 모양이 아랫부분의 D보다 살짝 크게 글자 모양이 좀 왜곡돼 있었다. 보통은 둘 다 완전히 동일하거나, 아랫부분이 윗부분보다 더 크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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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자유롭지 않은 참혹한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이 저딴 표어까지 강제로 만들어야 하다 보니, 아~주 소극적이고 깨알같은 저항으로 역설을 표현한 것이었다. 삐딱한 B의 의미는 "자유 같은 소리 하고 쳐자빠졌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였다.
노동 정신을 크게 왜곡한 저 역사적 사례로 인해, 말 자체는 별로 문제될 게 없던 저 표어는 오늘날 그쪽 바닥에서는 나치식 경례만큼이나 절대금기 표어가 되어 버렸다. 뭐, ARBEIT 자체는 알바/아르바이트 덕분에 한국어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독일어 단어가 돼 있긴 하다만..;;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손 기정 마라토너는 일장기와 관련하여 가슴아픈 사례가 과거에 있었다.
3등을 한 남 승룡 선수는 손 기정에 대해... 1등을 해서 금메달을 받고 히틀러와 악수까지 한 건 별로 안 부럽고, 진짜 부러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우승자인 덕분에 월계수 화분을 득템했으며, 그걸로 복부의 일장기를 그럭저럭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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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시상대의 측면에서 찍은 사진은 손 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다시피 일장기가 여전히 노출되는 형태로 찍혔으며, 일본의 언론은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그 사진을 인용하면서 마치 인쇄 실수나 기술 한계인~~ 척 일장기 부분을 하얗게 덧칠하여 슬쩍 지우고 얼룩으로 가려서 사진을 내보냈으나, 포토샵이 없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이건 조선 총독부 검열에서 고의적인 덧칠 삭제라는 게 탄로났다. 그래서 해당 신문사는 기자와 화가가 콩밥을 먹고 사장이 경질되었으며, 그걸로도 모자라서 신문 자체가 정간 처분까지 받는 보복을 당했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였으니까 저런 행동이 항일 독립 운동의 일환이라고 칭송받지, 순수하게 언론의 자세로만 따지자면 저런 식의 사진 변개는 아무리 일본이 원쑤라고 해도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축구 한일전이라 해도, 한국 선수가 반칙을 한 건 한국인 심판이라도 지적할 수 있어야 하며, 언론은 현장에서 있었던 일은 일단은 있는 그대로 보도해야 하지 않는가? 책에서도 번역자는 번역만 해야지 제멋대로 원문을 해석하고 고쳐서는 안 되듯 말이다.

물론, 지금의 배부른 기준을 갖고 그 시절을 제멋대로 판단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일제가 동아일보를 저 정도로 해코지한 이유도 "일장기라는 최고조넘에 대한 모독 때문"이지, 팩트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않고 사진을 왜곡했기 때문" 자체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손 기정 본인도 동아일보 이상으로 표현의 자유 제약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다. 우승 소감 인터뷰를 녹음할 때 말이다. "저 언덕에서 일장기가 나를 반겨 주더군요. (...) 이 승리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전 일본 국민의 승리입네다" 이런 영혼이 없는 말을 강제로 각본대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낯뜨거운 대목에서 손 기정의 말투가 오그라들자 옆에서 누군가가 '크게 말해!' 면박을 주는 장면까지 살짝 녹음되어 들어갔다. 그게 그 시절의 아픈 모습이었다.

4.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

주변 잡설이 또 길어졌으니 다시 재일 교포 북송 얘기로 돌아오겠다.
이렇게 일본과 북한이 서로 짜고 재일 교포들을 북송하는 것에 대해, 남한을 접수하고 있던 이 승만 정권은 굉장한 불쾌함과 거부감을 표시했다. 비록 우리 남한도 너무 가난해서 이들을 다 포용하고 먹이고 재우고 일자리를 줄 처지는 못 되지만, 그래도 이들도 같은 동포인데 북한으로 그것도 거짓말로 꾀어서 보내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뭐, 남북 체제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압박감도 덤으로 있었겠지만 말이다.

지금으로 치면 중국과 불거져 있는 탈북자 북송 문제와 비슷하다.
목숨 걸고 탈북을 시도한 사람들을 다시 생지옥으로 돌려보내는 건 인간적으로는 정말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짓이다.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저 탈북자들은 자국 땅에 있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고, 또 북한과 맺은 약속도 있고 하니 저렇게 미지근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일본이 재일 한국인이라는 '난민'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도 이와 같지는 않지만 비슷했다. 저놈들이 북한 가서 어찌 될지는 내 알 바 아니고, 일단은 골치 아픈 사람들이 우리 땅에서 나가 주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다.

게다가 그 당시에 이 승만은 평화선을 선포해 놓고, 독도 일대에서 깝죽거리는 일본 어선을 해군까지 동원해서 무자비하게 쫓아내고 나포하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쓰시마 섬까지 한국 땅이니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가 찬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편지나 소포가 왔는데 우표가 울릉도· 독도가 그려진 것이면, 그 우표에서 독도 부분을 뜯어내고 물건은 그대로 반송을 해 버릴 정도였다...;; 그런 쪼잔한 저항이 통용될 정도로 한국과 일본은 안 그래도 미수교인 데다 앙숙이 돼 가고 있었다. 이런 일본이 재일 교포 북송 문제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고집불통 대통령의 말을 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있었겠는가? 도대체 무슨 이쁜 구석이 있다고?

이 승만은 어렸을 때 조선이 외교전에서 밀려서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서서히 일제에게 먹혀 망하는 걸 똑똑히 지켜본 대통령이었다. 그게 평생 남는 트라우마였다. 그래서 먼 훗날 대통령이 된 뒤엔, 비록 내치에서는 부하를 잘못 뽑고 병크도 많이 저질렀지만 외교는 정말 한 치의 양보가 없는 초강경 노선을 고집했다. 그는 그 시절 세계 각국의 정상들 중에 최강의 고학력자였으며, 이 바닥은 똘끼 충만한 고수 100단이 돼 있었다. 이 꼰대 영감쟁이가 뭔 똥고집을 부리다 무슨 사고를 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는 전쟁 중에 북한 송환을 원치 않던 거제도 반공 포로를 무단으로 석방해 버린 전력도 있다. "자유를 원하는 개인에게 자유를 선사해 주는 게, 그들을 인질로 잡고서 외교 거래를 하는 것보다 더 올바른 일이다. (그러니 이 자유를 지키는 전쟁을 무작정 정치 논리대로 어중간하게 휴전해 버려서도 안 된다!)"를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재일 교포의 북송은 비록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판사판인데 무슨 북파 공작원마냥 공작원을 "일본에다" 보내, 북송 주선 기관인 일본 적십자사 본사에다 테러를 가하려 했다.

실미도 북파 공작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군사 정권이 아닌 이 승만 때 우리나라가 북한도 아닌 일본에다가 공작원을 보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무슨 항일 독립 운동가도 아니고! 이게 1959년의 일이다. 게다가 그 공작원 중에 김 구의 암살범인 안 두희까지 있었다는 건..;; 어지간한 소설과 영화를 능가하는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첫 시도가 그만 검문에 의해 발각되어 버렸으며, 추가적인 양성과 투입이 있기 전에 4·19로 인해 이 승만이 하야하면서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묻히게 됐다.

곧이어 박 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이들은 쿠데타 이력를 무마하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공 + 경제 개발을 적극 실천해야 했다. 그래서 1965년에는 그 당시에 매국질이라고, 일제 강점기 피해를 푼돈에 졸속으로 퉁쳤다는 욕을 잔뜩 쳐먹으면서 결국 일본과 재수교를 하게 된다. 경제 개발을 할 자금 밑천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 승만 시절에는 일본이 아직 전범 낙인이 단단히 찍혀 있던지라, 뼛속까지 반일 대통령이 비록 허세뿐이나마 일본을 상대로 갑질을 막 해댔다. 그러나 박통 때는 우리가 급전이 필요한 관계로 일본에게 상대적으로 저자세로 굽히고 들어가야 했다. 평화선도 이때 폐지되었다.

과거에 재일 교포 북송에 관여하던 조총련은 나중에 박통 때엔 육 영수 여사 피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이미지를 더욱 나쁘게 구겼다. 이때는 책임 소재 규명에 미온적인 일본이 괘씸하다면서 박통의 입에서도 "(우리라고) 동경 폭격 못 할 줄 알아?"라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에 버금가는 강한 말이 나왔다.
하긴, 일본은 역사적으로 핵폭탄뿐만 아니라 도쿄 소이탄 대공습의 끔찍한 트라우마가 있는 동네인데 저 소리 들으면 굉장히 발끈하긴 했겠다. 박통도 언제나 일본에 무조건 굽신굽신 하지는 않았다.

박 정희가 나라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끼친 영향이 워낙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이 승만 시절의 배고프던 남한은 남한의 역사인 것 같지가 않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 정도로 이질감이 크다. 화폐 단위만 해도 1962년 이래로 현행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으니 딱 박 정희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이 승만은 '박 근혜' 같은 직계 후손도 없어서 더욱 단절감이 크다. 조선과 일제 강점기를 모두 경험하고서, 이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세워만 놓고 건국 초기의 시행착오 병크로 인한 뭇매는 다 맞은 뒤 혜성처럼 사라져 버린 그리운 영웅이다. 기적을 통해 민족 해방을 경험하고, 나중에 타지에서 죽은 건 성경의 모세를 닮았다.

끝으로, 재일뿐만 아니라 먼 옛날에 쿠바에 이민 간 교민들도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환영받지 못하고 사생아뻘 되는 지위로 전락해 있다고 들었다. 쿠바도 우리나라와는 아직까지 미수교 상태이다. 이 역시 슬픈 20세기 한반도 역사의 단면인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6/02/18 08:30 2016/02/1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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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죽었다

“왕을 해하려 하는 모든 자들은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삼하 18:32)
성경에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은 것을 부하의 이 말만으로 바로 알아채고 멘붕에 빠졌다.
사람의 생사를 확인하는 과정이 저렇게 은유적이고 드라마틱한 경우가 실제 역사나 창작물에서 종종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엔 잘 알다시피 박 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당시 대통령의 주치의였고 국군 수도 병원 서울 지구의 원장이던 김 병수 공군 준장은 엄중한 감시 하에서 얼굴도 모르는 어느 VIP 중상자의 의학적 사망을 인증했다. 허나, 복부를 보고서 이 사람이 다른 외국 귀빈이나 극비 첩보 요원이 아니라 대통령 각하임을 직감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군 보안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하지만 그는 청와대 경호원의 감시 때문에 이 사실을 마음대로 발설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때 전화를 건 우 국일 준장이 거기 상황을 눈치 채고는, 대답을 예/아니요로 아주 간접적으로만 하면 되게 상황을 만들어 줬다.

작고했나? / 예
차 실장(차 지철)이냐? / 아니요
코드 원(각하)이냐?


이로써 군부는 대통령의 죽음을 확인하게 됐다. 무슨 통화를 했느냐는 경호원의 추궁에 김 병수 준장은 즉석에서 이렇게 둘러댔다고 한다.

거긴 아무 일 없냐? / 예
너 혹시 지금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냐? / 아니요
알았다. 여기도 잘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말고 있어라. / 예


2. 사람이 살았다

사망이 아니라 생존을 은유적이면서도 아주 짜릿하게 잘 표현한 경우는... 비록 실화가 아니라 영화 속 허구이긴 하지만 <에어 포스 원> 대사를 따를 게 없다. 이 영화는 딱 두 마디만 기억하면 된다. “내 비행기에서 내려! (Get off my plane)”와 바로 이것.

“자유 24호, 콜싸인을 변경합니다. 자유 24호가 이제 에어 포스 원입니다! (Liberty 24 is changing call signs. Liberty 24 is now Air Force One.”
“와아아~~~!!”


대통령이 죽거나 실종돼 버렸다면, 이 비행기는 대통령의 유가족만 탔기 때문에 콜싸인이 에어 포스 원이 아닌 다른 명칭이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이터를 켜라>도 "열차가 부산 역에 안전하게 멈춰 섰다. 다시 반복한다. 열차가 ..." 이런 방송과 함께 중앙 통제실이 환호 분위기로 바뀐다는 점에서는 <에어 포스 원>의 결말과 좀 비슷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간지는 훨씬 덜하다.

정부에서 운용하는 물리적인 대통령 전용기가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현실에서는 그 특정 비행기가 아니라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그냥 에어 포스 원이 된다. 물론 평소에는 대통령은 줄곧 그 전용기만 타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오성장군 군대 계급인 원수랑, 국가 수장을 뜻하는 원수만큼이나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될 개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것은 병역특례 티오하고도 비슷한 개념이다. 처음엔 병특 지정 회사들이 병무청으로부터 올해는 총 몇 명을 채용할 수 있다는 티오(인원 편성)를 받는다. 하지만 회사가 티오를 써서 일단 사람을 채용한 뒤에는, 그 티오는 회사가 아니라 복무자 자신의 소유가 된다.

어떤 회사가 2명 티오를 받아서 그만치 채용을 했다고 치자. 그런데 도중에 한 명이 전직· 만료하고 나간다 해도 그 회사는 다른 한 명을 병특으로 또 채용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 복무자는 병특 지정 업체이기만 하다면, 이미 티오를 다 쓰고 없거나 애초에 올해 티오를 한 명도 못 받은 회사로도 얼마든지 전직이 가능하다. 복무자 자신이 곧 추가적인 티오이기 때문이다.

즉, 회사 사정이 어떤지와 무관하게 업계 전체의 관점에서는 '병특 인원 보존의 법칙'이 성립한다. 그러니 이 제도는 상대적인 약자인 복무자에게 유리할 뿐만 아니라 병무청의 입장에서도 인원 관리하기가 수월해서 좋다. 복무자가 사고로 죽기라도 해야 그 티오가 그 사람이 당시 종사하던 회사로 돌아가지 싶다.
얘기가 어쩌다가 옆길로 한참 샜지...;; 아무튼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곧 에어 포스 원인 것만큼이나, 병특은 복무자 자신이 곧 티오인 시스템이라는 얘기를 엮어서 하고 싶었다. -_-;; 본인이 산업 기능 요원 출신이기도 해서 말이다.

3. 넌 죽을 것이다

사람이 죽었거나 살았다는 통보에 이어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죽을 거라는 경고 차례다. 이 분야는 간지 넘치는 대사가 픽션이 아닌 현실의 정치 분야에도 꽤 있다. 예전에 한 번씩 인용한 적이 있는 대사들이지만 다시 복습해 보고자 한다.

(1) “빈 라덴을 용서하는 건 신이 할 일이다. 그러나 빈 라덴과 신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건 우리가 할 일이다.
너무 멋있지 않은가? 이것은 빈 라덴이 살아 있던 시절에 미군 해병대의 모토였다고 한다. 그런데 '빈 라덴'을 임의의 '테러리스트'라고 말만 바꿔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또 유사한 드립을 쳤다고 한다.

(2) “아이를 살려 보내면 너도 살고, 아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 1980년 가을에 이 윤상 군 유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전대갈 아저씨가 남긴 대통령 특별 담화이다. 나중에 가해자가 잡히고 아이가 죽은 채로 발견되자, 전대갈은 실제로 사법부에 압력을 넣어 강제로 사형을 때려서 가해자도 죽여 버렸다.
삼권분립의 관점에서는 좀 아슬아슬하게 월권을 한 것이진 하지만, 요즘처럼 강력 사건에 가해자 인권만 있고 피해자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시기엔 저렇게 시원시원하던 옛날이 그리울 때도 왕왕 있다.

(3) “지금이라도 내 딸을 보내 주면 그걸로 일이 끝날 거다. 하지만 안 보내면 난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네놈을 기필코 찾아 내어 죽여 버릴 거다.”
테이큰, 브라이언의 전화 대사 의역.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난 복수극 영화 취향인가 보다. <테이큰>, <킬 빌>, <에어 포스 원>이 딱 내 스타일이다.
성령 충만으로 용서하는 게 가능한 맥락이 아니라면(개인이 아닌 공권력/국방 문제라든가..) 악당은 다 때려 부숴야 제맛 아니겠는가? 성령 충만은 악에게 굴복하는 나약함을 조장하는 게 결코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괜히 쓸데없이 종교색 표방하면서 성경이나 교회 왜곡하는 것들은 극혐(<밀양> 같은 거). 세계관이 너무 비현실적이거나 뭔 어설픈 열린 결말 이런 것도 싫음.

Posted by 사무엘

2016/02/15 08:34 2016/02/1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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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빨고 영상물 만드는 실력은 일본이 무척 탁월한 편이니 먼저 일본 얘기부터 좀 하겠다. 200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 환타 CF 시리즈가 떠오른다.
A반 가죽점퍼(록커) 선생부터 시작해서 아침 멜로 드라마 여선생까지 골고루 나오고, 별난 선생 때문에 학교 생활이 참 고달픈데 그래도 결론은 기승전..환타이다. 나중에 번외편으로 교장 선생편도 있었다.
DJ 선생은 학생에게 문제 풀이를 시킬 때도, 그리고 풀이의 정오 여부를 알려 주기 전에도, 심지어 교장 선생이 훈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완전 음악에 심취해서 지내더라.

뭐, 그래 봤자 환타는 인공 색소와 설탕이 가득하고 마치 콜라만큼이나, 스팸 가공육만큼이나 몸에는 별로 좋을 게 없는 탄산음료일 뿐이겠지만, CF에서는 한자 선생이던가? '트로피칼 후르츠'를 강조하면서 열대 과일을 표방한다는 선전을 잔뜩 했다.

그리고 공익 광고 중에 이런 게 있었다.
학교에서 동물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어떤 애는 도대체 뭐가 씌였는지 흰 도화지 몇 장째를 온통 새까맣게 도배할 뿐이다. 장난 깽판을 친다고 보기에는 아이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고 눈이 초롱초롱하니, 차마 대놓고 혼내지도 못하겠고.. 그래서 선생과 부모는 그 아이에 대해 정신 감정을 의뢰한다.
그런데, 각각의 종이들을 가로 x칸 세로 y칸으로 연결하니까 아이는 무진장 큰 시꺼먼 고래를 그리고 있었다는 게 밝혀진다.
...;; 아이의 잠재성과 창의성을 어른의 잣대로 단정짓지 말라는 뭔가 의미심장한 광고였다.

다음으로, 토요타보다는 아니고 '혼다'라는 일본 자동차 회사에서 2000년대에 창의성과 근성이 돋보이는 2분짜리 CF를 두 편 선보였다.
혼다 시빅(Civic)이라는 아반떼급 준중형차 CF는 무슨 합창단이 자동차의 엔진음과 주행음, 바깥 소음을 사람의 발성 기관만으로 흉내 내는 궁극의 비트박스를 시전했다. 컴퓨터에서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아스키 아트 텍스트 파일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 씨디를 집어넣어서 카오디오에서 음악이 나오는 것까지도 비트박스로 재현했다.

그리고 혼다 어코드(Accord)라는 쏘나타급 중형차 CF는.. 근성 도미노 스타일이다. 자동차 부품을 일렬로 쭈욱 늘어놓고 하나만 툭 건드려 주니까 나사가 돌아가고 나사 하나의 무게 차이 때문에, 기름 몇 방울의 무게 때문에 시소가 기울고 뭐가 툭 굴러 떨어지는 장치가 열몇 개씩 이어진다. CG가 아니라 진짜 다 실제로 세팅해서 촬영한 것이며, 세팅을 처음부터 전부 갖추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을 정도의 극도의 근성의 산물이라고 한다.

옛날에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 <뮬란>에서 황제의 대사 중에는 "A single grain of rice can tip the scale. (쌀 한 톨의 무게 차이만로도 저울이 기울어질 수가 있는 법일세)"가 있었다. 영화에서 그 대사는 뮬란이 바로 전쟁이라는 저울의 승패를 가르는 그 쌀알이 될 거라는 복선이다만, 저 CF는 황제의 그 대사의 물리적인 실사판이나 다름없었다. ㄲㄲㄲ 다만, 타이어가 관성만으로 오르막을 저렇게 오른다거나 기름통이 너무 잘 굴러가는 건 현실성 개연성이 좀 떨어져 보여서 어색하다.

저것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근성 도미노의 원조가 있었다. 바로 지금은 KCC로 바뀐 고려 화학의 '고려 페인트' CF다. 고려 페인트 광고는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참신함과 기발함 덕분에 굉장한 호평을 받으며 회사 이미지의 제고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려 페인트의 도미노 CF는 원조가 첫 등장한 게 1989년이고 2차가 1992년, 마지막 3차가 1996년으로, 총 세 종류의 버전이 있다. 저 엄청난 양의 도미노는 CG가 아니며 실물을 직접 만들어서 쓰러뜨리며 찍은 거라고 한다. 세팅 하느라 굉장히 고생 많았을 듯. 1992년 당시의 신문 기사를 보면, 2차분 CF의 경우 8만 개에 달하는 도미노 칩을 사용해서 제작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도미노는 개념상 카드섹션 매스게임의 무인 버전뻘 되지 않을까 싶다. =_=;;

사실, 1990년대 초는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애니메이션 업계에서조차 CG가 이제 막 슬금슬금 도입되던 과도기 단계였다. 가령, 월트 디즈니를 예로 들자면, 1989년에 나온 <인어 공주>가 CG가 전혀 없이 100% 셀 애니메이션만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작품이고, 그 뒤 <미녀와 야수>, <알라딘>에서는 배경부터 시작해 CG가 조금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나라는 그 시절의 CF는 아직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실사 제작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19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기술 격차는 갈수록 줄어들고, 우리나라 역시 기상천외한 CG 합성 CF들이 곧 등장했다. 당장 떠오르는 건 하이칼스(1993) Alias라는 워크스테이션급 CG가 온통 도배가 돼 있다.

비주얼 다음으로 청각적인 면을 살펴보자면, 고려 페인트의 1차 CF에서는 도미노가 쫙 넘어지는 동안의 BGM은 그냥 피아노 건반으로 음이 또르르르르르 올라가는 소리 위주이다. 마치 보글보글에서 잔기가 하나 늘었을 때 나는 소리(점수가 일정 숫자 돌파, 혹은 EXTEND 보너스)와 비슷하게 들린다.
2차에서는 '도도 도 솔파미레도'로 시작하는 C장조 전자음 BGM이 추가되어서 음향이 더 미려해졌으며,
3차에서는 도미노가 실사 사진으로 바뀌는 효과가 더 부각되고 BGM은 뭔가 코러스가 곁들어진 명랑한 외국 팝송으로 바뀌었다.

본인은 3차 CF에서 나오는 A플랫 장조의 짤막한 BGM을 무척 좋아했다. 저런 음악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이 역이 고려 페인트 CF의 일부인 줄은 모르고 있었는데 도미노 CF에 대해 검색하던 과정에서 지금까지 끊어져 있었던 연결 고리를 되찾았다.
고려 페인트 CF에는 클래식 음악이 쓰였고 출처가 뭐냐 하면 그리그의 <페르 귄트 모음곡 - 솔베이그의 노래>라고 각종 지식인, 개인 블로그, 음악 음원 사이트에 잔뜩 소개되었으며 심지어 1996년도의 신문 기사에도 올라 있다.

그런데... 저건 도대체 고려 페인트의 어느 CF에 들어간 음악이지?? 아시는 분?
내가 듣기에는 2차 버전, 3차 버전 그 어느 것도 여자 솔로인 "솔베이그의 노래"하고는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는데?

딱 들어 봐도 CF에 들어간 음악은 명랑한 장조이지만 저 원조 클래식은 단조풍이다.
원곡을 리메이크 했다고도 볼 수 없고 그냥 완전히 다른 음악이다. 저 세 편의 고려 페인트 도미노 CF에는 클래식이 들어간 적이 없다. 3차 CF에 들어간 그 명랑한 BGM의 정확한 출처를 알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래 전에 한번 다루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의 역대 공익 광고들을 또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내가 인생에 대한 기억이 본격적으로 생겨서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바뀐 게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이다. 그래서 그 시기에 텔레비전 화면을 본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시절엔 환경 오염, 반공, 마약 등을 소재로 하는 공익 광고는 강한 훈계조에 섬뜩하고 무섭기로 악명 높았다.

시꺼먼 감방 같은 배경에서 "마약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가 흘러나온다든가(1989) 올가미가 휙휙 던져지기도 하고..(1991) 국민 소득 4천$, 소비 수준은 2만$. 풍선이 뻥 터지는 과소비 추방 광고(1989)까지. 어린애들은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인은 초딩 시절, "두껍아 두껍아..."로 시작하는 요 1990년작 CF를 직접 본 기억이 있다. 음산한 BGM과 함께 흰 바닥에서 시꺼먼 얼룩이 불어나는 게 공포 그 자체였다. 마약 광고보다도 더 무서웠다. ㅠ.ㅠ 하물며 저 얼룩이 블랙이 아니라 핏자국을 표방하는 레드였다면 아마 최악의 안구 테러가 됐을 것이다.

사실은 고려 페인트 이전에도 도미노를 소재로 한 광고가 있었다. 바로 도미노 블럭이 쓰러지는 걸 범죄자들이 소탕되는 것에다 비유한 1989년도 공익 광고이다. 본인은 이걸 직접 본 기억이 있다.
20년 남짓한 세월 동안에도 영상 문화의 흐름이라는 게 정말 확 달라졌다.

그 중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고퀄의 공익 광고는 "필름 역주행"(1991, 1분)이다. 처참한 정면 충돌 교통사고가 난 동영상을 뒤로 돌려 보니 결국 발단은 질펀한 술자리. "필름은 되돌릴 수 있어도 생명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와 함께 영상이 끝난다. 이건 당시 무슨 국제 광고 공모전에서도 입상했다고 한다.
시대 정황상 역시 CG의 도움을 그다지 받지는 못했을 텐데 설마 자동차 두 대를 진짜로 충돌시켰을까? 어떻게 만들었까 싶은 생각도 든다. 8만 개짜리 도미노 블럭이야 그래도 생명의 위협이 없으니 근성으로 만들었다 치더라도. 아니면 충돌해서 운전자가 튕겨 나가는 부분만 실제 배우 대신 정교한 마네킹으로 대체했을 수도 있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에 만들어진 음주운전 추방 광고는.. 아주 경쾌한 BGM과 함께 맥주잔이 출렁거리면서 도로를 질주하다가 교통사고가 나는 걸로 끝난다. 묘사가 훨씬 덜 간접적인 형태로 바뀌었으며, 앞부분만 봐서는 오히려 맥주 상업 광고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결말부에는 역시 "즐거우셨습니까? 인생의 마지막 운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는 경고문이 나온다.

이렇게 내 기억에 남는 CF들을 좀 늘어놓아 보았다.
작곡가, 기자, 작가(글/사진), 영화 감독처럼 뭔가 창의력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생 한두 번 찾아올까 말까인 '명작운', '특종운'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난 영상이나 음악은 아니고 아시다시피 글과 코드를 주로 창조해 왔다. 하지만 음악 쪽도 언젠가 내가 만든 곡에 내가 꺼뻑 가는 작곡을 하는 순간이 왔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프로그램 쪽이야 난 날개셋을 계속 만들지 않았으면 진작에 철도로 전공과 직업을 바꿨을 수도 있다. -_-;; 어쩌다가 약을 단단히 빨고서 이렇게 아무도 관심 안 갖는 분야의 엽기적인 프로그램의 창조자가 됐는지 모르겠다.
여러 분야의 글 중에서 기독교/성경 쪽만 예를 들자면, <음란한 성경은 가라>에 아마 평생의 명작운이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 투입되지 않았나 싶다. 그게 정말 독보적인 대박을 쳤으며 킹 제임스 옹호 진영과 반대 진영 모두에 내 이름을 알렸다.

페인트 광고에 근성 도미노가 나오고, 자동차 광고에 궁극의 부품 도미노와 합창단 비트박스가 나오는.. 그런 급의 명CF가 앞으로 또 국내외에서 얼마나 등장할지 지켜볼 일이다.
본인 역시, 30여 년 평생에 뭔가 똑같은 내용을 공부하고 암기해서 치는 시험에서 남보다 앞서고 뭔가 재미를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남 안 하는 짓, 창의적인 분야에서 뭔가를 기여하고 명성을 얻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게 꼭 부귀영화를 가져오는 분야는 아니어서 문제이긴 하다만=_=, 난 앞으로도 계속 그 방면을 파면서 살게 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6/02/09 08:35 2016/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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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은 안 중근 의사가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린 날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딱 70년 뒤, 1979년 10월 26일은 박 정희 대통령이 부하인 중앙정보부장 김 재규의 권총에 맞고 절명한 날이다. 10.26 사태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이후 역사를 크게 바꿔 놓은 사건이었다.

박통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1961년부터 시작된 18년간의 군사 독재가 이제 좀 끝이 나는가 싶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게 아니었던 것만큼이나 이것도 시민의 힘으로 직접 독재 정권을 끌어내린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박 정희가 남긴 뒷자리는 그의 심복이던 전 두환이 냉큼, 날름, 덥석 차지하게 됐다. 어차피 사람만 바뀌었지 또 다른 군사 독재인 건 마찬가지다. 오늘은 그 얘기를 좀 더 늘어놓아 보겠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통은 삽교천 준공식을 마치고서 서울로 돌아와서 피로도 풀 겸 궁정동 안가에서 회식을 했다. 최측근 참모들과 더불어 20대 중반의 어여쁜 여대생, 그리고 비슷한 연배의 잘나가던 여자 가수까지 데려 와서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회식은 누가 박통에 대해 험담하는 것처럼 그 정도로 사치스럽고 음란방탕한 자리는 아니었다. (저걸 갖고 험담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여자와 관해서 일체의 난잡한 면모가 없었고, 극도로 근검절약 검소했으며 회식 자리에 기생이 아니라 각자 자기 부인을 데려 오게 한 전직 대통령을 좋아하느냐 하면, 그것도 어차피 아니다.)

박통은 알다시피 수 년 전에 영부인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뒤부터 멘탈이 많이 피폐해졌다. 곁에서 쓴소리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자제력을 잃고 예전보다 점점 더 과격 고집불통 폭주끼도 보이기 시작한 건 사실이어 보인다. 박통은 육 영수 여사를 두고 "지금 내 옆에 제일 상대하기 까다로운 골수 야당 총수가 있소" 이런 농을 치기도 한 바 있다.

이 와중에 암살 가해자인 김 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경호실장이던 차 지철과 박통에 대해서 쌓인 앙금이 많은 상태였다. 그러다 무슨 자극을 받았는지 이 패거리들을 오늘 회식 자리에서 해치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안 그래도 권총까지 챙겨 가서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회식 자리에서 차 지철과 박통은 합심해서 김 재규를 코너로 몰아 넣었다. "야당이며 반대파들이 이렇게 정권에 대항하면서 날뛰고 있는데 중정은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좀 더 강하게 짓밟아 버리지 못해?" 이렇게 갈구고 있으니 김 재규가 속이 얼마나 뒤집어졌을까?

결국 김 재규는 차 지철과 박통을 권총으로 쏘고 말았다. 그에게서 지시를 미리 받은 그의 부하들은(박 선호, 박 흥주 등) 총소리를 듣고서 주변의 경호원들을 사살해서 궁정동 안가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김 재규는 사살 계획 자체는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해서 결국은 성공했다. 그러나 일을 저지른 뒤에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멘붕· 당황· 우왕좌왕 하고 패닉에 빠져 버렸다.

그는 차 지철이 하극상을 벌여서 원조각하를 살해했으며, 자기는 이를 저지하다가 정당방위 차원에서 그를 사살했을 뿐이라고 얼~~마든지 의심 안 사고 조작과 은폐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위장과 조작의 달인인 중앙정보부의 최고 수장이었으니 말이다. 왜 저렇게 하지 않았는지는 정말 제1의 미스터리이다.

그리고 더 따지고 보면, 박통은 암살 안 당했으면 대통령을 도대체 언제까지 해 먹었을지도 궁금해진다. 이건 제2의 미스터리이다. 할 거 다 하고, 1990년대에 수도 이전과 올림픽 유치까지 다 해 놓은 뒤, 7· 80대 나이쯤 됐을 때 물러나겠다고 증언한 기록도 있다고 하는데 출처는 지금 기억이 안 난다. 뭐 어쨌든..

김 재규는 일을 저지른 뒤 상황을 자기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조작하기 위해서는 자기 휘하의 남산 중정으로 갔어야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보안을 위해서는 군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중정 대신 육본으로 가는 일생일대의 패착을 뒀다. (정확히는 현장에 같이 초청했던 정 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제안을 별 생각 없이 따른 것)
그는 누가 각하를 죽였는지 대놓고 거짓말은 차마 못 한 채, 어영부영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고 계엄드립만 늘어놓다가 군 수뇌부 앞에서 탈탈 털렸다.

원조각하의 죽음이 확인되고 더구나 이게 북한이 아닌 내부 소행임이 확실시되자, 군 내부에서는 평소에도 월권과 하극상을 일삼던 차 지철의 도발을 먼저 의심했다. 그리고 혹시 군 내부에 다른 차 지철 파 쿠데타 세력이 있는지 의심했다. 그러나 입막음을 당부받았던 김 계원 비서실장이 양심의 가책을 견디다 못해 김 재규의 단독 범행(= 중정 말고 군 내부에 다른 배후 세력은 없는)을 정 승화 장군에게 몰래 실토하는 바람에, 김 재규는 그대로 인생 운지하고 말았다.

김 재규의 패착은 북한에서 6·25 전쟁을 조장했던 박 헌영의 패착과 거의 동급 수준이었다.
사건을 제대로 은폐하지 못한 채 저런 허술한 행동에 뜬금없는 기승전 계엄 얘기만 한 걸로 미뤄 보면, 그는 대통령을 살해한 와중에도 일말의 국가 안보 걱정은 최우선으로 한 듯하다. 다만, 무슨 민주화를 위해서 각하를 쐈다는 말은.. 글쎄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사건 당일엔 차 지철에 대한 증오심이 더 컸지, 그런 거창한 이념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을 것 같다.

갑자기 철권 독재 대통령이 없어지고 경호실장과 정보부장까지 없어지니 나라에는 엄청난 통치 공백이 생겼다.
이 와중에 최 규하는 우리나라 역사상 제일 존재감 없는-_- 대통령으로 기록됐지만, 한편으로 정당 활동이 없이 학자와 관료 테크만 거쳐서 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대통령에 오른 유일한 사람이다. 덩치 크고 엄청난 학식과 인품의 소유자이고.. 그는 스펙은 참 훌륭했지만 국가 지도자로서는 지지 기반이 너무 없고 우왕좌왕했다.

뭐, 결과적으로는 김 재규의 요청대로 전국에 계엄이 선포됐다. 그리고 10.26 사태의 수사권을 쥔 군부가 사실상 권력의 실세가 됐다. 미우나 고우나 군부 말고 다른 대안이 없으니...
정 승화가 계엄 사령관이 됐고, 그 밑에 육사 동기들 중에 제일 잘나가던 전땅크가 10.26 수사본부장이 됐는데... 그는 이 엄청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절히 활용하여 뒤통수를 쳤다.

"어? 정 승화 저 사람도 그때 현장 근처에 있었다면서 왜 김 재규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거나 신고하지 않았을까? 혹시 이 사람도 쿠데타 가담 세력 아냐? 김 재규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린 당사자라지만 좀 냄새가 나는데?"
이렇게 어거지를 씌운 게 12.12 군사반란의 본질이다. 군대 인사 발령이 끝나고 10·26 사건에 대한 수사도 끝나 가던 12월 12일이 사고 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였다. 이후 스토리는 다들 아시는 대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주범이 다른 멀쩡한 사람을 도리어 쿠데타범으로 몰아 가다니.. 역사적으로 정치판 싸움은 이런 식의 암투로 진행된 듯하다. 선배고 후배고, 내 부대 네 부대 구분 따위도 없었다.
제5 공화국 드라마의 명대사인 "야 이 반란군놈의 새X야! ... 내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어!"(장 태완 장군)도 정 승화 참모총장이 반란군에게 억류 당해 있을 때 나온 대사이다.

전대갈· 전땅크, 29만원 아저씨는 독재(?)를 했다지만 전임인 이통, 박통에 비해서야 존재감이 덜하며 우파로부터도 그 전임들만치 긍정적인 평판은 못 받는 전직 대통령이다. 군대를 장악한 뒤에 정권도 장악하고(5· 17 쿠데타) 최 규하 대통령까지 완전히 사임시키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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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16년 1월 현재 일단 생존 중인 최고 오래 된 전직 대통령이다. 몸 관리 잘한 군인들이 대체로 그런 것처럼(1920년대생인 백 선엽 장군도 아직 살아 있다!) 그는 역시 얄밉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전한 저택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천수를 누리다 갈 것으로 예상된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 말이야" 드립을 칠 정도의 여유와 멘탈갑 센스-_-도 갖추신 지 오래다.. 저 기백과 배짱을 보라. 그러니 하야· 암살과는 차원이 다른 가성비를 얻었다.

전땅크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아저씨는 권좌에 앉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지, 일단 대통령이 된 뒤에는 7년 단임만 하고 진짜로 물러났다는 점이다. 집권 도중에 장기 통치하려고 헌법을 뜯어고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1987년의 6월 항쟁도 개헌을 통해 '5년 단임 직선제'라는.. “후임 대통령의 선출 방식”을 민주화하기 위한 시위였지, 전땅크의 장기 집권 자체를 규탄하는 시위가 아니었다.

독재자 타이틀이 있는 전임들의 행적과 비교하면 이렇다.

  • 이 승만: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자체는 적법하게 됐지만, 2대· 3대에 4대까지 연임하는 과정에서 사사오입 개헌에다 야당 정치인 탄압 등 지저분한 짓거리가 끼어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12년 동안 1~3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이 시기를 헌정 시스템 기수로는 제1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은 하야 후 명목상 노환으로 자연사하긴 했지만 타지에서 최후를 맞이했으며, 귀국이 좌절되면서 더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다. (쿠데타 ×, 장기 집권 목적 개헌 )
  • 박 정희: 정말 통 크게 해 먹었다. 집권 때도 그 당시에는 혁명이라고 불린 5· 16 쿠데타를 일으켰고, 집권 중엔 유신 헌법 버프를 자가발동하여 총 무려 18년 가까이 집권했다. 5~9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제3과 제4 공화국을 새로 썼다. 대한민국의 헌정 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이다. 말년엔 잘 알다시피 부하에게 피격 당했다. (쿠데타 , 장기 집권 목적 개헌 )
  • 그리고 전땅크: 이 승만과는 반대로 집권 과정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집권 중에는 다른 뻘짓 없이 임기를 채우고 물러났다. 아주 해피하게 살다가 갈 것으로 예상. (쿠데타 , 장기 집권 목적 개헌 ×)

(어느 나라건 독립 운동가 출신 초대 대통령은 독재자로 흑화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어떻게 해서 이룬 독립이고 어떻게 해서 세운 나라인데, 불안해서 선뜻 후임에게 놔 주고 싶지 않은 심정을 본인도 나이가 드니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처음부터 2선만 딱 하고 물러난 미국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참 이례적인 대인배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저렇게 XO, OO, OX를 거친 뒤에야 현재의 대통령들은 일관되게 XX가 유지되고 있다.
뭐, 전땅크는 명목상 11, 12대 대통령이지만, 중간에 연임을 해서 두 대가 커버된 건 아니다. 집권 초기에 헌정 시스템이 바뀌었기 때문에 대수가 올라간 것이다. 5공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12대가 전부인 게 맞다.

박통에서 전땅크로 넘어간 과정을 살펴본 본인의 생각은 이러하다.
10.26 사태는 남한 내부에 정말 심각한 수준의 권력 공백과 혼란을 그것도 너무나 갑작스럽게 야기했다. 이 승만이 하야하던 시절보다도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Windows API에다 비유하자면 ExitProcess와 TerminateProcess의 차이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틈을 노려 북한이 도발을 하지 않은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또한 정치 불안으로 인해 상황이 얼마든지 더 나빠지고 혼세마왕 강림 급의 헬게이트가 열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나마 피해가 저 정도밖에 발생하지 않은 쿠데타(?)로 그럭저럭 내부 수습과 권력 이양이 된 것도 무척 다행이다.

이 시절에 벌어졌던, 일부 반공을 빙자한 인권 유린은 당연히 욕 쳐먹어야 하고 두고두고 까여야 함이 마땅하다. 그 중 최악의 흑역사는 영화를 능가하는 병맛을 자랑하는 수지 킴 간첩 조작 사건이 아닐까 한다. 어휴..;; 성경에서 다윗이 아무리 성군이었다 해도 우리야의 유족에게는 석고대죄해야 할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전땅크 정권도 특정 개인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땅크를 비롯해 5공 주역들이 일차적으로 근본적으로, 민생을 생각하고 여전히 경제를 일으키는 독재를 했다는 건 감사할 점이다. 5공 시절의 물가 안정과 경제 호황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우리나라가 뭐 언제부터 그렇게 성숙한 민주주의를 시행해 왔다고.. 군부 말고 무슨 탄탄한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들 군인 출신 정치인들이 뭐 잘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반대로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민주주의를 치명적으로 유린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난 개인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정치 체계는 높으신 분들이 뭐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든 별 상관 안 한다. 일단 독재자의 개막장 자기우상화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뜻이므로.).

이런 이유로 인해 본인은 "옛날에는 지금처럼 대통령을 5년마다 한 번씩 뽑는 게 아니었다. 군사 독재가 횡행했다. 반공을 빌미로 억울한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서 고초를 겪었다." 이런 말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위생이 안 좋아서 집집마다 머릿니를 잡고 쥐를 잡아서 꼬리를 할당량 채워서 학교에다 제출해야 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텔레비전도 사치품 중의 사치품이었다. 결핵이나 천연두, 콜레라 같은 후진국형 질병이 횡행했다. 서민이 해외 여행을 하기도 훨씬 더 어려웠다. 사회· 조직 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더 험악하고 폭력적이었다." 이런 말하고 하등 전혀 다를 바 없다.

과학 기술 없고 돈 없고 못 살던 시절에 무슨 일인들 없었겠는가? CCTV도 유전자 감식도 없고, 공산주의자의 흉악한 이간질에 서로 믿을 수가 없고, 한두 사람의 잘못이나 악행 때문에 집단 전체가 망하게 생겼는데 언제까지나 신사적이고 인간적으로만 사람을 대할 수가 있었겠나? 그땐 어쩔 수 없이 그랬고 일부 부작용도 있었지, 그 시절의 정치 행태가 그~렇게까지 이를 물고 비관할 정도가 아니었다는 게 본인의 지론이다. 원래부터 현실이 시궁창이었지, 뭔가 잘되려는 걸 누가 망쳐 놓은 게 아니라는 거다. "김 구만 대통령 됐으면, 장 준하만 대통령 됐으면 민주주의가 뭐 어떻고, 친일 척결만 잘했으면.." 이런 식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건 정치 제도이고, 정치 제도는 생각보다 아주 상대적인 개념이다. 까놓고 말해 세종대왕 급의 아주 유능한 1인 독재자가 있으면 굳이 n년 주기로 대통령을 힘들게 새로 뽑아야 할 필요가 있겠나.. =_=;; 하다못해 지금도 이 사회 시스템으로는 답이 없으니, 확 다 갈아엎고 강력한 독재자가 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물며 그 못살던 시절에는 어떠했겠는가.
대통령 직선제라는 건, 뭐 이뤄낸 건 잘한 일이다만, 이게 무슨 북괴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거나 5천 년 가난을 물리친 것만치 그렇게까지 위대하고 훌륭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면 독재 미화 발언처럼 들릴지 모르는 말이나, 세계 역사에서 '진짜 악의 악질적인 독재자'가 하는 짓거리를 객관적으로 관찰해 보면 저건 절대로 근거 없는 실드가 아니다. 정말 작정하고 몇천~몇만 명 이상 짓밟아 버리면 민중 항쟁, 시위? 그런 건 애초에 일어나지도 못한다. 북한과 캄보디아를 생각해 보아라. 우리나라가 저 상황에서도 예외적으로 복 받은 거 맞다. 함부로 여기나 북한이나 똑같다는 소리 하지 마라.

10여 년 전에 MBC에서 방영했던 제5 공화국 드라마는 지금 다시 봐도 굉장히 고퀄로 잘 만들어지긴 했다. 실제로는 5공보다 여전히 4공 시절 이야기가 더 많긴 하다만..
또한, 논조가 그냥 일방적으로 전땅크와 신군부를 병크 저지른 것, 잘못한 것만 부각시키는 게 목적이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정말 객관적으로 그 시절의 역사를 다룰 의도라면 최소한 1983년의 아웅산 테러라든가 이 윤상 군 유괴 사건도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유괴범은 듣거라. 아이가 살면 너도 살고 아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라는 대사를 이 덕화 씨가 읊었으면 재미있지 않았겠는가?
그럼 다음 잡설들을 추가로 늘어놓으면서 글을 맺도록 하겠다.

(1) 난 박통의 최종 계급이 투스타인 걸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전역 직전에 명목상 포스타로 쾌속 진급을 한 뒤에 전역했다. 이건 전땅크, 심지어 후임 노 태우도 마찬가지. 다 예비역 대장이다.
이러니 김 영삼이 자기 정권 코드 네임을 '문민정부'라고 지었겠다 싶다. 군인 출신이 아니라 순수 민간 정치인이 정권다운 정권을 역사상 처음으로 잡았다고 말이다.

몇 달 전에 고인이 된 김 영삼 전대통령은 교회 장로여서 그런지 이 승만에 대해서는 좋게 말한 반면, 직접적으로 자기를 탄압했던 박 정희에 대해서는 늘그막까지도 혹평과 악담 스탠스를 바꾸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박통 말기에 이 정권은 얼마 못 가 무너질 것이고,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무너질 거라고 저주를 내리기도 했다.
보통은 둘 다 좋아하거나 둘 다 싫어하고, 하나만 고르라면 차라리 박 정희를 이 승만보다 더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 영삼과 같은 성향은 좀 흔치 않아 보인다.

(2) 이 승만, 장 면, 윤 보선, 최 규하, 노 태우는 다 영어를 작살나게 잘한 정치인이었다. 학구파 기질이 있었다. 거기에다 지금 레이디 가카도 영어를 포함해 외국어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에 반해 전땅크는 공부 타입은 아니고 체력, 리더십, 인맥 연줄, 사회성처럼 사업가나 정치인에게 어쩌면 더 필요한 아날로그스러운 자질이 충만했던 타입이다.

(3) 전땅크는.. 좀 얄미운 구석은 있다만, 그래도 대통령으로서 인사 배치와 리더십은 나쁘지 않았다. 군인이던 시절엔 1.21 사태 때 큰 전공 세우고 나중에 그의 주도하에 제3 땅굴까지 발견했다. 그리고 아까도 잠시 언급했지만, 집권 중에 이 윤상 군 유괴 사건을 잘 해결하고 사형 집행 잘해서 사회 정의를 실현한 것도 잘한 점이다.
잘한 건 잘한 거다만.. 돈 많은 거 알고 있다, 선고받은 뇌물 추징금은 빨랑 뱉어라. -_-;;

Posted by 사무엘

2016/01/29 08:44 2016/01/29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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