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게임 외

1980년대에 구소련은 미국 포함 전세계에 퍼져 나간 명게임을 두 종류 발명해 냈다.
하나는 1984년, 알렉세이 파지노프라는 프로그래머가 개발한 테트리스라는 비디오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1986년에 드미트리 다비도프라는 심리학자가 고안한 오프라인 소셜 게임인 마피아 게임이다. MT 같은 데서 많이 해 보셨을 그 게임 말이다.

테트리스에 대해 잠깐만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과거 도스 시절에 아래아한글은 테트리스와 두 번 인연이 있었다. 1.51도 나오기 전, 1.2 시절에 잠깐 텍스트 모드에서 실행되던 테트리스를 액세서리로 제공한 적이 있었다가 나중에 2.5 내지 3.0에서 덧실행 기능이 추가되면서 테트리스가 덧실행 프로그램이라는 명목으로 재도입되었다.

테트리스는 게임 자체야 메카닉이 매우 간단하니, 그래픽· 비주얼은 걍 발로 만든 수준으로 넘긴다 해도 게임 진행만 되는 물건 형태로는 고딩/대딩 수준의 프로그래밍 실력으로 몇 시간만 코딩하면 뚝딱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테트리스의 저작권을 보유한 회사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이걸 상업용 소프트웨어에다 번들로 제공하거나 유료 게임 서비스를 하려면 꽤 막대한 양의 로얄티를 지불해야 한다.

잘 알다시피 테트리스는 엄청난 히트를 쳤다. 이것 때문에 학교와 직장 곳곳에서 지각과 태업이 속출하는 바람에, 이건 자본주의 진영을 몰락시키기 위해 소련이 몰래 개발해서 퍼뜨린 거라는 음모론이 나돌 정도였다. 그래도 테트리스 자체에는 딱히 이념적인 요소가 있지는 않다.
그에 반해 마피아 게임은 역시 소련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스머프도 주인공과 설정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가 듬뿍 담긴 만화영화라는 음모론이 있는데, 그것보다는 더 현실적이다.

마피아는.. 인간의 죄성을 교묘하게 잘 이용하는 심리· 정치 게임이다. 게임을 해 본, 특히 크리스천이라면 이 말에 절실히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건국 초기에 벌어졌던 좌우익 진영 대립과 광기어린 학살극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마피아 게임의 현피 실사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전국 곳곳에서 파업, 폭동, 반란이 벌어지고 유언비어 공산주의 선동질에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럽다. 이걸 가만히 놔 두면 나라는 완전히 끝장 나고 망한다. 그러니 쟤들을 색출해서 잡아 가두고 죽이긴 해야 하는데.. 악의 무리들이 대놓고 “내가 빨갱이요”라고 정체를 밝힐 리가 있나..;;

온갖 거짓말이 횡행하고 서로를 믿을 수가 없고, 자고 일어나면 누가 죽어 있을지 모른다. 위에서 까라니 까야 되고 실적을 만들어야 하는 아래 부하들 입장에서는.. 속된 말로 없는 빨갱이라도 만들어 내야 할 판이 된다. 이런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반공 진영이건 용공 진영이건 맛이 안 가는 게 이상한 일이다.

마피아만 해도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고 대신 남을 마피아로 몰아서 죽이는 것 때문에 일명 '우정파괴 게임'으로 통한다. 하물며 그게 당장 내 목숨이 걸린 현실이라고 생각해 보시라.
게다가 마피아 게임은 이거 뭐 아무 단서가 없으니 동등한 조건에서는 마피아가 승률이 시민보다 더 높을 수밖에 없다(심지어 경찰과 의사가 있다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민주주의 인권 운운하는 국가라 한들, 이런 상황에서는 시민의 승률을 강제로 높이기 위해서 초법적인 비밀 첩보/수사 기관을 두는 것이다.

이런 상황 설명 없이, 남로당의 사악한 만행은 쏙 빼 놓고 서북 청년단만 무슨 악의 축인양 욕한다? 혹은 좌우익 둘 다 똑같이 잘못했다고 양비론으로 퉁쳐? 내 양심으로는 동의할 수 없다. 모르고 그런 주장을 한다면 바보인 것이고, 알고도 그런 거짓말을 일부러 퍼뜨리는 거라면 사악한 자이다. 이거 뭐 일본의 역사 왜곡을 욕하고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좌익의 요인 암살, 양민 학살, 대중 선동에 맞서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정신으로 화답한 게 우익 측의 폭력이었다. 자기는 기독교 욕하면서 남은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이길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이지 않은가?

4·3 사건 같은 것도.. 진압 과정에서 대규모 양민 학살이 있었던 것은 분명 너무 과한 흑역사긴 하지만, 그건 분명 주모자가 우리나라 건국을 방해하려고 사전 준비되어 온 조직적인 폭동을 일으켜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 가족이나 젖먹이까지 죽이면서 일으킨 반란이다.

흑역사는 흑역사로 뉘우치고, 정부 입장에서 사과하는 것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흑역사로 말미암아, 국가 전복 반역 행위가 그저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유하자면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에 의해 후세인이 축출된 이라크 정부, 조선로동당은 그 이름도 유명한 IS, 그리고 서북 청년단 같은 반공 단체는 IS의 착취와 악행에 완전히 학을 뗀 쿠르드 민병대 정도에 대응한다고 봐도 되겠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에는 4·3 사건 말고도.. 이 재수의 난 같은 사건도 있더군.. 이런 와중에 우리나라가 공산화되지 않고, 필리핀이나 중남미처럼 되지도 않고 이렇게 우뚝 선 건 정말 기적이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상, 마피아 게임으로부터 든 일련의 생각들이었다. =_=;;
남로당에 대해 절대 침묵하면서 서북단 청년단만 때리는 이런 치우친 아저씨들 때문에.. 한글, 철도, 기독교, 컴터 얘기만 화기애애하게 이어졌을 내 블로그와 SNS도 심각한 글, 과격한 글이 올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지금 대통령에 대해서, 일베에 대해서, 혹은 새누리당과 새민련에 대해서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은 얼마든지 용납한다. 그러나 필요악과 절대악의 관계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좀 용납하기 힘들 것 같다. 앞으로 어지간해서는 '필요악'을 주제로 또 글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27 08:23 2014/10/2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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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주요 사건들과 철도

1.
경부선이 개통하던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 역이 있는 곳보다 더 북쪽에, 서울 중심과 더 가까우며 지금으로 치면 지하철 5호선 서대문 역과 가까운 곳에 경부선 서대문 역이 있었으며 이것이 그때의 진짜 서울 역이었다. 지금의 서울 역은 남대문 역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유 관순 열사는 잘 알다시피 이화 학당을 다녔는데, 이화 학당은 지금의 이화여고가 있는 곳에 있었다.
이화여고는 서대문 역과 가깝다. 따라서 이화 학당 역시 그 시절엔 경부선 서울 역의 역세권에 있었으며, 유 관순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고향 천안을 수월하게 오갈 수 있었다.

서대문 역은 1919년 3월, 3·1 운동이 벌어지던 와중에 폐역되었으며, 남대문 역 이북으로는 서대문이 아닌 신촌으로 꺾는 드리프트 선로가 1920년 말에 뒤늦게 건설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구 서울 역 건물은 1925년 9월에 완공되었다.

2.
농촌 운동가 최 용신 선생은 샘골 학원 주변으로 수인선 철도가 생기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참 애석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1935년 사망, 수인선은 1937년 개통. 약 2년 반 차이) 그래도 자기 지역으로 철도가 건설될 예정이라는 소식 정도는 듣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3.
1929년의 광주 항일 학생 운동의 배경에도 철도가 있다. 나주에서 광주 사이를 열차로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이유는 물론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했기 때문임. 이게 결국은 수십 명의 학생들이 엉겨붙은 패싸움으로 커져 버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호남선 나주 역(광주보다 더 남쪽)과 광주 역을 오가는 열차란 상상하기 어렵다. 서울 방면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는 있어도, 목포 방면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호남선은 몰라도 경전선 쪽은 지금까지 변화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때의 광주 역은 지금의 광주 역과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리고 광주 동쪽으로는 담양과 남원으로 가는 '전남선'이라는 철도가 부설되어 있었다. 이것도 참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남선은 1944년에 일제의 전쟁 물자 공출로 인해 선로가 철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 광주 역은 다른 곳으로 이설되고 새로 건설된 경전선이 광주를 지나게 되었으나, 이마저도 선로가 남쪽 외곽으로 이설되면서 광주 역은 지금과 같은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이다.

뭐 지금의 광주송정 역인 구 송정리 역이 호남선과 전남/경전선과의 환승역이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1929년에 다녔던 열차는 어떤 형태로든 호남선 남부와 전남/경전선을 직결하는 통근열차요, 지금으로 치면 광역전철뻘 되는 열차였던 것 같다.

그리고 여담으로, 대도시 중심부에 있지만 철도 선형상으로는 왠지 고립된 고자처럼 되었다는 점에서는 신촌과 광주 역이 서로 좀 비슷한 구석이 있다.

4.
끝으로, 조선어 학회 사건이 있다.
1942년 여름, 영생 여자 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이 방학을 맞이하여 집에 가러 열차를 탔다. 한 열차를 같이 탄 여학생들이 낄낄대며 한국어로 수다를 떨었는데, 하필 옆에 조선인 사복 형사가 타고 있었다.
때는 이미 창씨 개명에 조선어 사용 금지 등의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 중이던지라.. 일제의 앞잡이이던 그 형사는 “이것들이 황국 신민이면 신민답게 일본어를 쓸 것이지 왜 조선어를 쓰고 난리냐?”라고 꾸짖었다. 그 학생들은 우리끼리 얘기를 나누는 것일 뿐인데 웬 참견이냐는 식으로 대들었다. (상대방이 일제 끄나풀인지 처음엔 몰랐음)

이에 형사는 빡쳐서 다음 역에서 여학생들을 강제로 끌어내려 심문을 했고, 나중에는 일행 중에 제일 강하게 반항하던 박 영희라는 학생의 집에까지 쳐들어가서 옛 일기장을 압수했다. 그런데 거기에 “학교에서 국어(=일본어)를 썼다가 선생님에게서 꾸지람을 들었다”란 문장이 있는 걸 보고는...

국어를 썼으면 칭찬을 받아야지 왜 꾸지람이냐? 그 선생 누구야? 이거 악질 반동 새끼구만?” 취조를 한 끝에.. 옛 교사였던 한글학자 석인 정 태진 선생의 정체가 드러났다.
일제 고등 경찰은 이 사람이 소속되었던 조선어 학회까지 과격 무장 독립 운동 조직으로 날조하고 일망타진해서 성과 한 건 올리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조선어 학회 사건이 벌어진 계기이다. 더 자세한 내력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참고하시라.

난 옛날에는 한글, 국어 쪽으로만 관심이 있었는데 지금 이 사건을 다시 읽어 보니, 그 당시 영생여고보 학생들이 이용한 철도 노선은 함경선이었고 지금의 북한 치하에서는 평라선 구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깊이 와 닿는다. 아아~ 지금도 국토가 분단되지만 않았다면..!
철도교에 입문하고 나면,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철도를 중심으로 다시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긴다.

안 중근 의사가 중국이 아닌 국내의 철도역 승강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라도 했다면 거기는 그야말로 철덕들의 성지가 되지 않았겠는가?
6·25 때도 군인· 경찰 말고 민간인 중에 가장 많이 순직한 사람들이 바로 철도인이다. 철도 사랑과 나라 사랑이 별개가 아닌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12 08:32 2014/10/1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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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선된 철도, 안성선을 아십니까?

우리나라의 간선 철도인 경부선을 보면 대전에서 호남선이 서쪽으로 분기하고 천안에서 장항선이 서쪽으로 분기한다. 동쪽 내륙 쪽으로 분기하는 건 조치원(충북선)과 김천(경북선) 정도다.
아울러, 과거에는 수원에서 서쪽으로 수인선이 분기하기도 했다.

한 쪽으로만 분기하는 게 아니라 양방향으로 모두 분기하는 역은 흔치 않다. 안산선과 과천선이 만나는 금정 정도가 고작인데, 얘들은 일반열차가 아니라 전철만 다니는 노선이어서 존재감이 좀 덜하다.

먼 옛날에는 수원에 서쪽으로 수인선뿐만 아니라 동쪽 여주 방면으로 수려선도 있어서 동서남북이 모두 철길로 통했었다. 그러나 수려선은 영동 고속도로 개통의 타격으로 인해 이미 1973년에 폐선됐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수원은 분당선과 수인선이 만남으로써 일반열차+전철이 수직+수평 양방향으로 분기하는 역이 될 예정이긴 하다.

그때는 수원이 그랬던 것처럼 천안도 양방향 분기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서쪽으로 장항선이 있었다면, 동쪽으로는 안성 방면으로 가는 안성선이라는 철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도와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안성에도 철도라니? 게다가 둘은 사실 1920년대에 매우 비슷한 시기에 착공되어 개통했다. 그 당시 장항선과 안성선의 이름은 각각 충남선, 경기선이었다.

천안에서 안성까지는 30km가 좀 안 되는 거리이고, 평택과 안성은 지리적으로 수원과 용인 정도의 관계와 비슷하다.
일제는 안성선을 연장해서 이천을 지나 여주까지 가게 할 생각이었다. 여주에는 수려선이 있긴 했으나, 안성선은 표준궤이고 수려선은 협궤인 관계로 선로의 직결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즈 시절에 안성선은 안성을 지나 경기도 이천의 장호원읍까지 약 70km 남짓한 거리가 뻗어 있어서 수려선의 길이와도 비슷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공사를 하면 실제로 여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안성선은 연장은커녕 이미 있던 선로도 뜯겨져 나가서 천안-안성 사이의 짤막한 로컬선으로 전락해 버렸다. 해방 후에도 이 구간은 복원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0년대에 안성선을 연장해서 여주가 아니라 원주까지 가게 할 계획을 한때 했었다. 경북선(김천-영주), 충북선(김천-제천)에 이어 경부선과 중앙선을 잇는 제3의 철도를 만든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정부는 철도보다 자동차 도로를 더 육성하면서 이 계획을 백지화해 버렸다. 경부 고속도로가 안성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건설되자 안 그래도 짤막하던 안성선은 더욱 잉여로 전락하고 말았다. 1970년대 말에 안성선은 하루에 겨우 n회밖에 열차가 운행하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나마 표준궤인 덕분에 수려선보다는 더 오래 명맥을 유지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뒤 1985년 4월 1일, 수인선이 영업을 중단하기 10년 남짓 전에 안성선은 여객 열차의 운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리고 1989년 1월 1일부로 완전히 폐선 처리되어 모든 선로가 사라졌다. 수려선과 수인선의 종말 사이에 이런 사건도 있었다는 걸 알아 두도록 하자.

Posted by 사무엘

2014/09/04 19:21 2014/09/0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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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여러 번 글을 통해 내 의견을 피력했듯이.. 대한민국의 건국/초대 대통령인 이 승만 박사를 매우 존경하며 그는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지엽적인 병크나 비리에도 불구하고, 정말 기적적으로 건국되고 지켜지고 유지된 자랑스러운 나라이다.

김 구의 <백범일지>만 읽다가 이 승만의 <독립정신>도 접하고 나면, 정말 독자의 지성과 품격, 안목까지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다. 그 꼬질꼬질하던 옛날 구한말에 벌써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를 생각하고 한 나라의 이상향을 옳은 방향으로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니. 사악한 공산주의자들의 흉계를 외교력으로 저지하고 나라의 반쪽이라도 붉게 물들지 않게 지켜 낸 것을 감사하게 된다.

이 박사에 대해서 독립 운동가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악의적인 흠집과 필요 이상의 온갖 중상모략에 대해서 본인은 거의 대부분 실드가 있고 대응책이 있다. 임시정부 시절에 부린 똘끼라든가 친일파 등용(?) 정도는 얼마든지 해명 가능하다.

중국의 마오 쩌둥을 생각해 보자.
그는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수천만 명의 인민을 굶겨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대약진운동에 문화혁명 홍위병 등 온갖 삽질 개뻘짓을 자행하여.. 196, 70년대에 우리나라가 반사 이득으로 경제 도약을 할 기회까지 줬다. 6·25 때 일본이 덕을 본 것만큼이나 우리도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삽질의 덕을 본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 쩌둥은 중국 내부에서 여전히 공7 과3 정도의 국부로 예우받고 있고, 심지어 국내에서도 마오 쩌둥 존경한다는 사람까지 있다. -_-;; 정신 좀 차리시길. 마오 쩌둥은 6·25 때 중공군 파병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멸공 북진통일의 기회를 영원히 박탈해 버린 적장이다!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

“비록 적장이지만 훌륭하다” 급의 다른 실드는? 내가 보기엔 글쎄...??
그리고 인간적으로 훌륭한 면모가 있다고 해서 당신은.. 히틀러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토 히로부미 같은 사람을 존경하고 흠모하고 위인전에까지 선뜻 올리시겠는가? -_-;;

아무리 사람마다 가치관과 견해가 차이가 날 수 있다 해도, 마오 쩌둥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그 누가 보더라도 이 승만보다 더 존경할 만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_-;;;; 최소한 한강 다리 폭파 병크보다는 우리에게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친 인물이다.
저건 6·25 때 보도연맹인지 국민방위군 같은 거 일일이 다 끄집어내서 때리는 잣대와 동일한 잣대라고는 절대로 볼 수 없다. 내 말 틀렸나?

이런 잣대하고만 비교해 봐도 이 승만에 대한 잣대만 비정상적으로, 불순한 의도로 지나치게 가혹하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걍 건국하지 말고 간판 내리고 김 일성 치하에서 통일 조국 이루며 살았어야 했다”가 아닌 이상.. 그 시절에 불가능했던 일을 못 이뤘다고 헛소리 하는 건 건전한 생각이 아니며 이성적인 판단도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난 이 승만을 미화, 우상화, 숭배 따위를 하지 않는다. 단지, 멀쩡한 애국자 초대 대통령에게 별 희한한 생트집 구실로 부관참시를 하고, 그냥 긍정적인 면모를 얘기만 하면 미화네 숭배네, 일베충 뉴라이트 수꼴 이 따위 헛소리를 해 대며, 저 사람 독재가 김 일성 독재와 똑같았다는 둥의 역사 왜곡, 능멸, 난도질을 하는 꼴을 보니 피거솟을 느끼며 그걸 극도로 혐오하여 반박할 뿐이다.

뭐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이 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실책이 없는 건 당연히 아니며 잘못한 것도 적지 않다. 설령 아랫사람 부하 잘못이라고 해도, 그런 병신 같은 부하들을 통제를 못 하거나 인재 등용을 제대로 못 한 건 대통령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노 무현 전대통령을.. 법조인으로서는 좋아하지만 그는 대통령 그릇이 아니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듯, 이 승만도 외교 독립 운동가로서만 좋아하고 대통령으로서는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 정도야 충분히 정당한 비판이고 이견이다. 그 사람이 외교를 잘한 것만치 내치를 잘하지는 못했다는 것은 나도 응당 동의하는 바다.

다만,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 승만의 정치적 과오는.. 최소한 누가 자꾸 헐뜯는 것처럼 절대 악의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과정에서 발생한 돌발행위나 과잉진압, 너무 위급하고 나라가 가난하고 열악해서.. 피아 식별도 안 되고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 여건이 아니어서, 인재를 도무지 구할 수 없어서, 지금 뭐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당장 뭐든지 다 보장하고 허용하기에는 빨갱이들의 거짓 선동이 너무 위험해서 등등등...으로 대부분~~ 실드가 쳐진다.

옛날에 했던 비유를 또 들겠다. Windows 95가 32비트 선점형 멀티태스킹 OS임에도 불구(자유 진영 민주주의)하고 도스와 16비트 코드가 섞인(구시대 악습, 친일 경찰 간부, 일부 자유 제약 등등) 불안정하고 BSOD가 만연한 이상한 제품으로 만들어졌던 건.. 그 당시 일반 “사용자들의 컴”이 Windows NT / OS/2를 도저히 돌릴 수 없는 환경이었고 도스 호환성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 없다. 지금 컴퓨터 환경을 갖고 옛날에 Win95를 만든 엔지니어를 욕하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승만이 악의적이지 않았다는 건 차라리 햇볕 정책이 비록 실패이지만(북한 체제나 주민 인권 개선에 아무 도움도 안 됐고 우리 돈만 엄청나게 축났고, 도리어 그게 다 핵 개발로 돌아왔고.. -_-) 악의적이지는 않았다고 믿는 것보다는 100배 이상 훨~씬 더 쉽게 믿을 수 있다. 자, 더 흥분할 것 같으니, 개인의 정치색이 들어간 논쟁은 여기에서 커트하도록 하고.

본론으로 돌아오면, 잘 알다시피 북한의 갑작스러운 6·25 남침 때 우리나라 정부와 군대는 우왕좌왕 허둥대다가 영남 지방까지 밀려나면서 졸전을 거듭했다. UN군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때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지워질 뻔했다. 그런데 이게 우리 입장에서는 꼭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기만 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승만 대통령은 저 북한 빨갱이들이 조만간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미국에다가 추가 군사 지원을 끊임없이 요청했지만 미국이 그 요구를 묵살하고 쟤들이 설마 그러겠느냐고 안이하게 대처한 것도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 군부 역시 대통령의 선견지명과는 반대로, 국지전에서 더 나아간 전면전 남침 조짐이 거듭 보고되는 걸 무시하고 태평하게 지내기도 했었다. (그렇게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천하의 군사 강국 미국조차도 옛날에 진주만 기습 폭격을 당하고 9·11 테러를 당했듯이..)

개전 당시에 대통령 수뇌부가 서울을 너무 금방 포기해 버린 것, 국민들에겐 페이크를 치면서 마치 세월호 선장이 도망치듯이 먼저 피난을 가 버린 것 때문에 여론이 안 좋아졌다. 이건 오늘날까지 이 승만을 씹는 사람들이 단골로 꺼내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건 그렇게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A. 이 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에 측근들로부터 피난을 안 가면 안 되겠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난 국민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라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프란체스카와 측근들이 1시간 가까이 설득한 뒤에야 비로소 피난을 갔다.

B. 반대로 무초 대사가 26일 밤쯤에 대통령을 찾아가 벌써 서울을 버리고 떠나서는 안 된다고 1시간 가까이 설득했다. 그러나 “내가 잡혀서는 안 돼. 좀 안전하게 피난 가야겠어”라는 대통령의 말에 더 설득을 포기했다.


이 두 모순되는 이야기가 인터넷을 찾아보니 공존한다. 누가 무슨 얘기를 갖고 대통령을 1시간째 설득했다는 건지? 둘 다 책 인용이고 여러 군데에 동일한 형태로 복붙이 돼 있어서 신뢰도는 충분히 갖춘 source이다.

그런데, 내가 잠시 리서치를 한 바로는.. 교차검증이 잘 안 된다.
A 문헌에서는 무초 대사는.. 참모진이 이미 대전으로 내려간 뒤부터에나 등장하며, B 문헌은 반대로 A 정도의 디테일로 26~27일 사이의 대통령의 구체적인 전후 행적이 나와 있지 않다.
한밤에 국제 전화를 걸어서 “군사 지원이 필요하니, 자고 있는 맥아더를 깨워서라도 당장 불러 달라. 안 그러면 한국에 있는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한 명씩 죽을 줄 알아라” 이렇게 대통령이 협박조로 강하게 얘기한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맥아더는 그 당시 미국이 아닌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 시차가 비슷함)

“A 사건에 의해서 피난이 결정된 뒤에 B에 기록된 대로 무초가 최후에 피난을 만류했다”.. 라고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게 자연스러울 듯하지만, 그렇게 종합하기에는 A가 말하는 시간대가 너무 늦다.

설마 진짜로 B와 A가 나란히 시간 순으로 벌어진 걸까? 이 승만이 그렇게까지 우왕좌왕 변덕쟁이였을 것 같지는 않은데. (처음엔 피난 가기로 결심 → 무초와 싸우고 난 뒤 피난 안 가기로 슬그머니 마음을 고쳐먹음 → 다시 측근의 제안을 받아들여 피난)

참고로 이 승만에 대해 '덜 긍정적'으로 진술하는 B도 조 갑제 닷컴 같은 우파 논객 홈페이지에 소개되고 인용돼 있다.
또한, 엔하위키조차도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와 함께 A안과 B안을 모두 소개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혼란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팩트가 아니라 이 승만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서 각자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A 또는 B를 미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나도 한때는 A 설만 있는 줄 알았으나, B도 신뢰도가 무시 못 할 수준이어 보인다.
이건 정치 성향이나 정치인 호불호 문제가 아니라 역사 팩트 문제이기 때문에 편견 없이 자료를 나중에 좀 더 조사해 봐야겠다. 어느 쪽이든 역사 왜곡과 조작이 부디 없기를.

Posted by 사무엘

2014/08/24 08:33 2014/08/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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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턴 워커 중장 (1889~1950)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하고, 나중에 한국 전쟁에도 중장 계급으로 참전했다. 그가 세운 가장 큰 공은, 필사적으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더는 물러나지 않게 하고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코리아를 지키겠다.” 이게 성공한 덕분에 나중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도 가능했다.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은 임무에 사병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워커의 옆에 있던 맥아더도 워커를 거들면서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라고 “까라면 까”를 돌려서 표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지프를 타고 이동 중인데 맞은편에서 다른 군용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 왔다. 그걸 피하려다 지프는 길 밖으로 굴러떨어져 뒤집혔고, 운전병과 장군은 모두 현장에서 즉사했다. (하긴, 한글학자 석인 정 태진도 6·25 중이던 1952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었고..)

가해 차량도 군용차였기 때문에 이 승만 대통령이 나서서 그 차의 괘씸한 운전병을 총살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하긴, 저 때는 아직 즉결처분 제도가 있던 막장 시절이었다.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침략에 국군은 졸전에 후퇴를 거듭하면서 사기가 떨어지고 군 기강이 개판이 돼 있었다. 명령과 통솔이 안 먹히고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부대가 와해되는 지경이다 보니.. 오죽했으면 정말 고육지책으로 윗사람이 자기 말 안 듣는 부하를 재판도 없이 초법적으로 응징할 권한을 줬었다. “내 명령이 있기 전에 멋대로 전선에서 후퇴하는 놈은 곧바로 총살이다!” 같은 식.

그랬는데 현실에서는.. 아 글쎄 사단장이 자기 기분 좀 나쁘다고, 훈시하는데 좀 몸을 움직였다고 사병을 제멋대로 총살하고,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명령을 수행 안 한다고 중대장이 소대장을 꼬투리 잡아 총살하는 지경이 벌어진 것이다. 무슨 보노의 삼류만화 패밀리 <아침조회> 편도 아니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하물며 미군 장군을 교통사고로 죽게 한 운전병이 과연 목이 온전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워커 장군의 유족들이 이 승만을 필사적으로 뜯어말렸고, 이건 고의가 아닌 실수로 인한 사고임이 밝혀지면서 해당 운전병은 징역 3년형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즉결처분 제도는 부작용과 병폐가 너무 많기도 하고, 또 극약 처방이 아니면 지휘가 안 될 정도의 위기가 그럭저럭 해소도 된지라 이듬해인 1951년 7월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걷다'라는 동사에 -er이 붙은 walker이라는 단어를 본인은 레밍즈 게임에서 처음으로 봤던 듯하다. 특별한 작업이나 임무 없이 그저 좌우로 돌아다니기만 하는 보통 생쥐를 가리키고 있으면 저 명칭이 뜬다. 오늘날 서울 광장동에 조성된 '워커힐'이라는 지명과 호텔 상호는 저 워커 장군을 기려셔 명명되었다.

수 년 전엔 지인 초대를 받아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하루 투숙한 적이 있었는데, 시설도 호화롭고 산과 강이 어우러진 주변 경치도 굉장히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한다.

2. 윌리엄 딘 소장 (1899~1981)

6· 25 개전 초기이던 7월 중순에 대전을 사수하는 전투를 지휘했던 분이다. 그러나 병력의 열세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대전을 내어주고 후퇴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어 대열에서 이탈하고 실종되었다.

그래서 미군은 특공대를 열차에 태우고 대전으로 다시 투입하여 그를 구출하려 했으나, 북한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이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전에 자원하여 미카 129호 증기 기관차를 운전하다가 적진에서 총격을 받고 순직한 분이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김 재현 기관사이다.

딘 소장은 참으로 놀랍고 한편으로 부끄럽게도, 한국인의 배신과 밀고를 몇 번 당하는 바람에 무려 투스타의 신분으로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혔었다. 평양에까지 끌려가기도 했지만 그나마 심각하게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으며, 1953년 휴전 후에 포로 교환 차원에서 석방된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이 대인배인 건, 이런 천하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특별히 부각시키고 트집잡고 늘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딘 소장은 자신을 밀고한 사람이 나중에 체포되었을 때도 그를 용서하고 감형을 탄원했다고 한다.
온갖 편파적인 선동질과 역사 왜곡, 시체 장사로 가득한 오늘날 좌익 매체들의 사악한 짓거리와는 참으로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미군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한국 철도인의 은혜를 미국은 끝까지 잊지 않았다. 여러 차례 미국의 높으신 분들이 고인에게 감사를 표했을 뿐만 아니라 2012년 6월 26일에는 고인에게 미국 국방부 특별 민간 봉사상(특별 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전후에 딘 소장은 영예롭게 예편하였으며, 천수를 누리다 별세했다.

3. 조지 리비 중사 (1919~1950)

공병대 소속의 미군 병사로, 위의 김 재현 기관사와 매우 비슷한 시기와 장소(1950년 7월 19일)에서 전사한 분이다(이 사람은 7월 20일!). 대전 전투에서 딘 소장이 후퇴할 때 같은 그룹에 속해 있었던 셈이다.

그는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위험한 일(= 자기를 적군에게 노출하는)을 용감하게 도맡아 하고, 심지어 인간 총알받이 역할까지 하면서 적을 교란시키고 전우들의 탈출과 부상병 이송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총알을 여러 발 맞고 과다출혈로 산화한다. 살아남은 전우들에 의해 그의 무용담이 알려지면서 그에게는 훈장도 일찌감치 추서되었다.

영문 위키백과에는 이 행적만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에 대해서 대전 전투 이전의 행적이 더 알려져 있는 듯하다. 북한군의 진격이 코앞에 임박한 위험한 상황에서, 파주의 임진강 위에 놓여 있던 어느 다리를 끊어서 진격을 저지했다고 한다.

파주시는 임진강 이북이 민통선으로 봉인된 형태인데, 장파리에 가 보면 국도 37호선과 민통선 지대를 연결하는 한 교차로가 '리비 사거리'라고 명명되어 있다. 본인은 작년에 이 길을 따라 들어가서 허 준 선생 묘소에 가 봤었다.
이것이 저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리고 민통선 지대로 들어가는 다리가 바로 '리비교'이며, 이게 그 사람이 끊었던 다리를 훗날 복원한 것이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4/08/19 08:20 2014/08/19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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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컴퓨터라는 물건이 발명된 지가 아직 100년도 채 안 됐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세상을 이렇게 완전히 180도 뒤바꿔 놓은 기계가 역사가 그렇게도 짧다니! 그 내력이 최소한 전화기나 자동차의 역사 정도는 될 법도 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하긴, 텔레비전이 컴퓨터보다 약간 더 일찍 발명된 정도다.

오늘날의 컴퓨터와 비슷한 컨셉이라도 탑재된 물건이 최초로 등장한 시기는 아무리 일찍 잡아도 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전자식+2진법+튜링 완전+프로그램 내장형 같은 기본 중의 기본 단서만 추가해 줘도 시기는 더 늦어진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덩치와 성능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노트북과 스마트폰하고는 차마 비할 바가 못 됨은 주지의 사실이다.

컴퓨터가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산물이라는 건, 다시 말해 단군의 후손들이 역사상 컴퓨터라는 걸 접한 시기는 오로지 '대한민국' 시대가 유일하다는 뜻이다. 일제 강점기나 조선 시대엔 그런 거 없었다. 그러니, 세계의 컴퓨터 역사뿐만 아니라 그 컴퓨터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도입하고 전산망을 개설한 선구자들의 전설의 레전드를 공부해 보는 것도 전산/컴공 전공자이든 비전공자이든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 분야의 거장으로 성 기수 박사(1934-), 전 길남 박사(1943-)가 있다. 난 성 박사는 고등학교 때 어느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아주 아주 대단한 분이라고 우연히 알게 됐다. 전 박사는 알지도 못하다가 대학에 진학해서야 내가 다니는 학교의 학과에 소속돼 있는 만렙 명예교수 중의 한 분 정도로나 접하게 됐다.

두 분 다 업적이 워낙 전문적이고 비가시적인 곳에 있는지라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는 않다. (2011년 10월에 1주일 간격으로 나란히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브 잡스와 데니스 리치의 대외 인지도의 차이를 생각해 볼 것!)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약간 더 유명하다. 우리나라 인터넷의 아버지라고 최근에 웹툰도 올라왔고 이게 각종 SNS에 퍼날라지면서 반짝 뜨곤 했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1982년 5월 15일, 구미 전자 기술 연구소와 서울 대학교 사이에 국내 최초 원거리 컴퓨터 네트워크 교신에 성공. 이건 모뎀이냐 랜이냐 뭐냐? 무슨 물리 메커니즘으로? 으음...;;)

저분은 은퇴한 뒤에도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고, 게다가 저 웹툰을 보고는 작가에게 고증 오류 피드백까지 친절하게 해 주셨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저분의 배우자가 여성 운동가인 조한 혜정 교수라니 깜짝 놀랐다.

최근의 강연 내지 인터뷰에서 전 박사는 인터넷은 너무나 대중적으로 퍼진 만큼 앞으로는 좀 더 안전해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 적이 있다.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의 개발자로 유명한 카스퍼스키는 강력한 인터넷 규제와 신원 확인에 찬성하는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인데 그것과도 비슷한 맥락인가 싶었다. 초창기에 인터넷의 각종 규격을 설계했던 엔지니어들은 이 비싼 통신 인프라가 어중이떠중이가 다 쓰는 보편적인 물건이 될 거라고는 감히 생각을 못 했었을 것이다. 그러니 보안보다는 성능과 효율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지.

난 전산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네트워크, 보안 쪽은 제일 까막눈 문외한이다 보니..;; 저런 분을 보면 그냥 입 쩍 벌리고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그럼, 다음으로 성 기수 박사 얘기를 좀 하겠다.
이분도 완전 날고 기는 수재였으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 박사를 3년 만에 뚝딱 마친 것은 오늘날까지도 유학생들 사이에 전설로 회자된다고 그런다. 원래 전공은 기계· 항공 공학 쪽이었으며 전자· 전산이 아니었다. NASA 같은 데에나 들어가서 우주선과 로켓 엔지니어가 됐을 분이 “아무래도 우리나라엔 컴퓨터가 필요하다”는 신념 하에 한국으로 돌아와 KIST 전산실 실장을 맡았다.

전 길남 박사가 라우터 등 인터넷 기술을 자체 개발하여 우리나라를 인터넷 대열에 합류시켰다면, 성 기수 박사는 그보다 옛날에 우리나라의 행정, 은행, 병원, 철도 등 각 분야의 시스템 전산화를 이끌었다. 전산학이라는 학문이 국내 학계에 제대로 정립조차 되기 전인 초창기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넘나들며 우리나라의 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워낙 옛날이기 때문에 구분이 별로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저분의 세부 관심사는 HW와 SW 중 어디에 가까웠을지가 궁금해진다.

2000년대 초반에 바둑 연구를 끝으로, 그 뒤부터는 저분은 언론에 보도되는 근황은 없이 조용히 노후를 보내고 계신 듯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성 박사의 일대기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시선을 고정시키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도 더 전인 1970년, KIST 전산실에서 그의 주도하에 한글 전자 인쇄 장치를 개발해 냈다고 한다.
유니코드고 트루타입 글꼴이고 뭐고 하나도 없던 까마득한 옛날에 일종의 1세대 비스무리한 한글 기계화를 이룬 거라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여기서 벌써 한글 입력 방식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 글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은 다루는 시기가 굉장히 옛날이라는 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대상이 흔히 생각하기 쉬운 기계식 타자기가 아니라 컴퓨터라는 점이다. 물론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일반인이 간편하게 다룰 수 있는 오늘날의 개인용 소형 컴퓨터 얘기는 전혀 아니다. 저건 애초에 그런 범용(general-purpose) 컴퓨터도 아니다.

저 때보다 약간 전인 1969년 여름에 국가에서는 타자기용으로 네벌식 글자판을 표준으로 지정했다.
난 그 시절엔 두벌식이라는 게 전혀 없었고 그건 나중에 1980년대에 와서야 생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아니고 그 이전부터 두벌식과 네벌식이 모두 있었던 듯하다. 사료를 모두 종합해서 고찰해 보면, 1969년에는 “타자기는 네벌식, 전자 기기는 두벌식”으로 표준이 제정됐고 나중에는 네벌식이 공식 폐기뒨 후 “기계식 타자기까지도 받침 글쇠를 넣어서 두벌식”으로 바뀐 것 같다.

또한 같은 두벌식이라 해도 그때의 두벌식은 오늘날의 '바지들고서' KSX5002 26키 배열하고는 차이가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나의 역사 지식에 오류가 있다면 수정 지적을 환영하는 바이다.

아무튼, 성 기수 박사가 한글 전자 인쇄기를 개발하던 당시에 국가에서는 이미 네벌식과 두벌식을 밀고 있었다. 그리고 성 박사는 자신이 개발하는 기계에 들어가는 한글 입력 소프트웨어를 별다른 고민 없이 두벌식 기반으로 설계했다.
그분도 그렇게 타자기 따로, 컴퓨터 따로 식인 글자판 표준에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씁 어쩔 수 없지”였고, 그런 문제의식만으로 끝이었다.

기계식 타자기가 연극과 같다면 컴퓨터는 영화와 같은 매체이다. 기계식 타자기야 메커니즘이 복잡해서 어쩔 수 없지만, 컴퓨터에는 아무 제약이 없으니 글쇠배열은 가능한 한 간단할 수록 좋을 것이다. 자음의 초· 종성 구분은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알아서 판단하게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자동화가 되어서 좋고, 개발자의 입장에서는 오토마타 이론을 구현하면서 자신의 프로그래밍 실력을 과시할 수도 있어서 좋다..는 게, 컴퓨터쟁이가 한글 입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딱 전형적인 의식 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았을까?

그 시절, 공 병우 박사는 안 그래도 나라에서 자기의 세벌식 글자판을 외면한 것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다. 그랬는데 마침 한글 전자 인쇄기에 네벌식 대신 두벌식 글자판이 들어간다고 하자 책임자인 성 박사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로비(?)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공 박사는 그 시절에 이미 그야말로 억만장자가 된 60대의 안과 의사였고, 성 박사는 30대 중후반으로 공 박사의 아들 연배인 파릇파릇한 공학자였다. 물론 전공은 다를지언정 두 분 다 대한민국 0.1% 이내에 드는 천재들인 건 주지의 사실이다.

공 박사는 고급 외제차를 몰고 성 박사를 데리러 홍릉 KIST를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 호화로운 자기 집에서 최고급 요리를 대접하면서 제안을 한 게.. “당신 같은 사람이 세벌식을 지지해 준다면 당신이 필요한 연구비는 내가 얼마든지 대 주겠소.”였다고. 여러분도 잘 아시잖는가. 공 박사는 기계덕후였으며 평생 젊은 프로그래머, 엔지니어들을 굉장히 좋아하셨다.

국가로부터 받는 예산만으로는 당장 연구실의 장비 내지 컴퓨터의 업그레이드조차 빠듯할 지경이었는데.. 그 제안에 성 박사가 귀가 솔깃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거 뭐 “KIST에 공 병우 박사의 기증으로 슈퍼컴퓨터가 한 대 도입되었다” 같은 역사가 쓰여질 수도 있었다!

허나 설득은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공 박사의 입장에서 성 박사는 장래는 촉망되지만 한글이나 글자판에 대한 건전한(?) 소신이 없이 그냥 어용학자로 빠질 위험이 있는 인재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성 박사의 입장에서 공 박사는 그냥 자기 발명품만 꽉 껴안고 놓을 생각을 안 하는 고집쟁이 타자기 덕후로만 보였을 것이다. 늘어놓는 이야기가 서로 핀트가 안 맞았다.

성 박사는 공 박사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세벌식 한영 타자기를 한 대 선물로까지 받았지만, 세벌식 같은 덴 애착이 별로 안 갔으며 그건 곧 그걸 갖고 싶어하는 다른 후배에게 줘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두 '박사'간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저 사이트의 글도 “성 기수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반공병우파의 손을 들어 준 셈이 되어 버렸다.”라고 씁쓸하게 끝난다.

그래. 하버드에서 3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은 공돌이라고 해도 그 옛날에 타자기와 컴퓨터의 글자판 통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글자판 일체형 직결식 글꼴이 항공· 기계 분야하고 관계가 있지는 않잖아.

물론 공 박사도 의사 겸 의학자일 뿐, 언어학이나 타이포그래피를 체계적으로 공부해서 그 분야에 학위가 있지는 않은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분야의 식견에 관한 한은 더 옛날부터 이 극로 선생으로부터 감화를 받아서 한글덕후로 개조가 끝나 있던 공 박사가 더 앞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글에서 덕후 타이틀만 무려 3개가 나왔군.. -_-)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사이트의 글에서는 꼭 공 박사가 성 박사를 무슨 불의한 일에 접대로 유혹하고 매수라도 하려 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어서 좀 유감스럽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하겠다.
이거 무슨... “통일교를 공인해 주면 내 사재로 IMF 빚 다 갚아 주겠다”도 아니고.. 뭐냐?

Posted by 사무엘

2014/08/13 08:35 2014/08/1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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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의 철도계 새소식

내 블로그에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 있기에 잠시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겠다.

1. ITX 새마을 운행 개시

등굣길에 근처 철길에서 지금까지 못 보던 열차가 지나가는 걸 봤다.
이 빨간 열차는 바로.. 지금의 새마을호(전후동력과 기관차 견인형 모두)를 대체할 차세대 열차 ITX 새마을이다. 지난 5월 12일부터 상업 운전을 시작했다~!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가 작년 초에 퇴역하고서 1년 4개월 만의 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마을'.. 1974년에 등장한 이래로 40년째 열차 이름으로서 명맥을 이어 가는구나!
10여 년 전, 정식 개통 전에 클로즈 베타테스트 중이던 지금의 떼제베 개량 KTX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누리로, ITX 청춘 등, 2010년대부터는 여객열차들이 이렇게 하나 둘씩 전부 전동차 기반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열차 호칭에서 등급명-차량명을 병기하는 체계도 차츰 정착해 가고 있다. KTX 산천이 원조였고 말이다.

누리로의 명칭도 이런 체계에 편입되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어찌 되려나 모르겠다.
무궁화호라는 이름은 그냥 예전의 기관차 견인형 여객열차 내지 개량형 디젤 동차의 총칭으로 남을 듯. 그리고 배 이름 관행의 잔재이던 '-호' 접미사도 이제는 없어져 가는 추세다.

우리 학교는 앞에 철길이 있어서 매우 아주 굉장히 좋다.
가끔 디젤 기관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멀리서라도 들으면 마음의 기쁨과 안정과 평안이 찾아온다.

2. 평화열차 DMZ train 운행 개시

'경의선' 하면 내력과 관련하여 철덕이 할 말이 참 많다.
서울 시내 구간이 일반열차들의 기지 회송 구간으로 쓰인다는 특성상 오랫동안 수도권 광역전철 버프를 못 받고 있다가 2009년에야 전철이 개통했다.
그 전, 2006년 가을에는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의 1987년 초기 도입분이 퇴역하면서 일명 '임진강 라이너' 새마을호가 3년 남짓 운행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경의선 수도권 전철이 문산까지 뚫리면서 임진강 라이너는 자연스레 폐지되었으며, 통근열차가 다니는 단선 비전철 구간은 운천, 임진강, 도라산 같은 남북 철도 연결 버프를 받은 21세기 구간으로 확 줄어 버렸다. 운행 거리가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지선 수준이 된 것이다. 전국에서 CDC 기반의 통근열차(구 통일호)가 최후까지 다니던 구간은 이 경의· 경원선밖에 없었는데, 이 둘 사이에서도 경의선은 경원선과는 처지가 많이 달라졌다. 경원선은 동두천 이북으로도 거의 50분에 가깝게 달릴 비전철 구간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4월을 끝으로 통근열차 명목의 경의선 여객 열차의 운행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럼 오리지널 CDC를 볼 수 있는 곳은 진짜로 경원선밖에 안 남는구나.
그 대신 등장한 것은 일명 DMZ-train이라고 불리는 '평화 생명 관광 열차'이다. 어차피 경의선에서 그 짤막한 CDC 구간의 수요는 안보 관광객밖에 없었으니 적절한 조치인 것 같다. 이 열차는 운임 체계상으로 KTX, 무궁화호 같은 일반열차가 아니라 O-train, V-train 같은 관광열차의 위상이 된 것이다.

운행 횟수는 하루 두 번이고 당연히 패키지 안보 관광과 연계해서 다닌다. 차량은 새로운 건 아니고 기존 CDC를 관광용으로 개조한 물건이라 함. 물론, 운임은 과거의 통근열차보다 훨씬 더 올라갔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민통선 구간에 있는 도라산까지 갔다 오려면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하며 돌아오는 표도 반드시 같이 구입해야 한다.

모든 변화가 달갑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특히 관광열차 명목으로 비싸진 운임) 본인은 이게 철도 경영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한 변화인 것 같다.
또한 한 가지 좋아진 점은, 이 열차는 문산이 아니라 서울 역에서 도라산까지 환승 없이 직통으로 간다는 것이다. 서울과 문산 사이엔 능곡 한 곳에서만 추가 정차한다.

올여름에는 경원선에도 이런 컨셉을 반영하여, 청량리에서 백마고지까지 가는 경원선 버전의 DMZ train도 운행을 시작할 거라고 한다. 그래도 경원선에는 정규 여객 통근열차도 여전히 병행이 필요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은 정선선, 그리고 교외선에도 안보 쪽은 아니어도 비슷한 컨셉의 관광열차가 좀 다녔으면 어떨까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4/05/17 08:26 2014/05/1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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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관광도 하고 식사도 한 뒤, 다음 남은 시간 동안은 철원 서북부의 민통선 이남 지대를 차를 몰고 다니면서 내 마음대로 답사했다.
우리가 전선 휴게소로 갈 때는 지방도 464호선의 동남쪽을 통해 민통선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으로 답사하는 곳은 그 도로의 서쪽 구간에 있다. 그래서 민통선 밖으로 나갈 때 그쪽으로 바로 나가면 목적지에 훨씬 더 빨리 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가야 했으며, 철원 동북-서북 외곽을 횡단하기 위해 다시 남쪽의 고석정으로 되돌아갔다가 국도 87호선을 거쳐서 다시 지방도 464로 갈아타야 했다. (전선 휴게소는 동북 외곽에 있음) 동선이 대략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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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 가는 코너다. '오덕'의 압박..;;
하긴 그래도 야동리보다는 낫다. 옛날에 사람 중에도 이 오덕이라는 분이 계시기도 했고.
차 안에서 밖을 촬영한 것이어서 화면이 좀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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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로만 들었던 백골 부대 백골 구조물을.. 국도 43호선상에서 실제로 봤다..;; (저건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은 아님.)

자, 내가 동선의 삽질까지 감수하면서 찾아간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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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87과 지방도 464가 만나는 월하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얼마 안 가면 '한다리'라는 자동차 교량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남쪽) 방면으로 한 200m쯤 떨어진 곳엔 옛날 금강산선 철도의 교량이 기둥만 남아 있다. 이걸 현장 답사했다.
그 옆을 보면 언덕이 두 동강 나기도 했을 정도로 옛날에 철길이 있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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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다리로부터 3km 정도 동쪽으로 더 가면.. '대위교'라는 교량이 나오며, 역시 여기서도 오른쪽을 보면 한다리보다 더 온전한 형태의 금강산선 교량이 남아 있다! “금강산 가던 철길!”이라는 글자까지 있음을 주목하시라.
이걸 직접 발견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을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으시겠는가? 자동차는 이런 걸 답사할 때 쓰라고 만들어진 물건인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 보면 나보다 어린 친구가 차도 없이 철원까지 대중교통으로 찾아간 뒤, 민통선이 코앞인 여기까지는 근성으로 걸어서 답사한 경우도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빠르고 편안하게 찾아갔는가? 완전 양반이다.
한다리, 대위교 근처에 있는 교량과, 전선 휴게소 근처에 있는 교량을 지도에서 찾아서 한 선분으로 이어 보면, 옛날에 금강산선의 선형이 대략 어떠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대위교 인근에는 '철길가든'이라는 식당이 있고, 또 민통선 구역으로 들어가는 초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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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교까지 간 뒤 본인은 차를 돌려 서쪽 백마고지 역으로 향했다. 지도를 보면 국도 87호선이 90도 꺾이는 지점이 있는데, 사실 길이 그것밖에 없는 건 아니다. 다른 방향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는 길일 뿐. 그리고 바로 그 교차점에 그 이름도 유명한 노동당사가 있었다.

철원이 북한 치하에 있었을 때 그들이 후딱 지어 사용하던 일종의 관청 건물이다. 근대 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22호.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었으면, 6·25 때 주변의 다른 건물들은 폭격 때 다 폭삭 무너지고 부서졌지만 쟤만 그래도 뼈대는 저렇게 온전히 남았을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조선 총독부 청사나 서대문 형무소를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이 건물을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는 북한 공산당이 양민을 수탈하고 애국 우파 인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죽이던 악마의 소굴이었다. 공산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사상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그걸 강제로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을 감시· 억압하고 거짓 선동하고 자유를 빼앗는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하고 잔학한 만행을 저질러 왔다.

남산 안기부? 남영동 대공분실? 노동당사의 악랄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는 될까 싶다. 내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절대악과 필요악을 분간 못 하는 오류를 절대로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상대로 빨갱이라는 극단적이고 경멸적인 호칭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북한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겠지만,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사용해 온 악한 방법론과 배경 사상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사악한 반국가단체일 뿐이다. “우리나라에도 공산당도 허용돼야 진정한 민주주의..” 운운하는 건 정말 역사와 현실을 모르는 극도의 무개념· 무지의 소치이다..

오해가 없게 말씀드리자면, 나의 정치 성향은.. 악의 세력으로서 본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북한 수뇌부와 잘 검증된 과거 역사 팩트에 굳건한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겨우 무슨 새누리당이니 민주당이니 일베 오유 같은 것에 뿌리가 있는 게 아니다.
달랑 진보냐 보수냐, 성장이냐 분배냐 그딴 것만을 논하는 거라면 정치색 같은 걸로 논쟁하고 싸울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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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각은 벌써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서쪽으로 수 km를 더 달려 도착한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지난 2012년 말에 개통한 경원선의 북쪽 종점인 백마고지 역이었다. 근처에 백마고지 유적지가 있기도 하다.

원래 옛날에는 백마고지 역 일대도 민통선 지대였는데 나중에 해제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어차피 또 민통선을 만나게 된다. 역 주변엔 걸어서 가 볼 만한 건 없다시피하다니, 연계 교통수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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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선은 경의선과는 달리 남북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로가 심지어 민통선 안 구간에도 못 들어가고 이렇게 딱 끊어져 있다. 경의선 도라산 역은 잉여롭긴 해도 출입국 사무소가 있고 승강장에서 북쪽으로 쭉 이어진 선로를 볼 수 있었던 반면, 이곳은 단촐하고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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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신탄리 역 이북에 철도 중단점이 있었는데 그걸 그대로 옮긴 건 아니고.. 철도 중단점을 새로 만들었다. 그래, 이걸 실물을 직접 보면서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승차권이나 입장권 없이도 승강장과 선로 끝에 슬쩍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철원에서 철도 and/or 안보와 관련된 대부분의 명소들을 답사하면서 철덕력을 키웠다. 그리고 대한민국 땅에 주어진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는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돌아올 때는 국도 3호선을 이용했다. 길이 상당 부분 경원선 철길과 겹치다 보니 돌아오면서도 철도역과 철길 구경을 덤으로 할 수 있었다. 도로 정체 때문에 돌아오는 길은 2시간이 좀 넘게 걸렸으며, 아침 7시 반으로부터 정확히 12시간 뒤인 저녁 7시 반에 서울에 무사히 귀환했다.

돌아오는 길엔 친구들은 너무 피곤해서 간식을 먹을 기력조차 없이 차에서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은 절대로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단지 집에 도착한 뒤에 침대에 쓰러져서 시체 모드가 됐을 뿐.

철저한 준비 덕분에 길에서 전혀 헤매지 않았으며 시간도 적절히 분배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장소를 답사할 수 있었다. 인파가 바글바글 몰리는 데가 아니어서 분위기가 좋았으며, 완벽에 가깝게 좋던 날씨 역시 성공적인 여행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고 말이다.
다음날 교회에서는 같이 간 친구들의 부친께서 한 분씩 날 개인적으로 불러서 좋은 구경을 시켜 주느라 수고 많았다며 칭찬을 해 주셨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4/05/14 08:24 2014/05/1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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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주변은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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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철원 평야에서 논농사를 지으려면 물 공급이 원활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철원을 빼앗긴 뒤 물귀신 심보로 철원으로 가는 무슨 강의 물줄기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저수지는 그 난관을 극복하게 위해 만들어진 거라 함. 물론 여기는 낚시꾼 내지 철새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 작가들도 많이 찾아온다.

워낙 날씨가 맑고 미세먼지도 없어서 북한 땅까지 어렴풋이 보였다. 다만, 이 지역엔 개성 공단이나 기정동 마을 같은 명물이 없는 관계로, 파주의 도라 전망대만치 북한 쪽에 딱히 볼거리는 별로 없다. 그냥 천혜의 자연만을 감상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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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인터넷 사진으로만 보며 그리워하던 월정리 역 복원 건물을 드디어 직접 보게 되었다. 오오!! ㅠ.ㅠ 감사와 찬양이 절로 흘러나왔다.
난 역 건물을 팔로 꼬옥 끌어안은 채 감격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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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구내의 선로에는 두 가지 중요 유물이 있는데, 하나는 코레일 4001호 디젤 기관차이고, 다른 하나는 6·25 전쟁 중에 우리 아군의 폭격을 받고 부서진 어느 증기 기관차이다.
4001호 디젤 기관차는 굉장히 옛날 차량이긴 하지만, 월정리 역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여기에 전시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거기 현장에서도 딱히 설명이 돼 있지 않다.

현재 임진각에 가 보면, 알다시피 경의선 장단 역에 있던 녹슨 증기 기관차가 녹을 최대한 벗겨 내는 가공을 거친 뒤 전시되어 있다. 그건 총격 때문에 표면이 벌집이 된 것만 빼면 형태가 비교적 온전한 편이며, 그때 그 기관차를 몰던 기관사가 누군지까지도 알려져 있다. 그 기관차는 '마터'라고 불리던 산악 화물용의 굉장한 대형 기관차였다.
그러나 월정리 역 인근에 있는 '경원선' 기관차는 총알이 아니라 포탄이라도 맞았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으스러져 있다. 이것도 마터 형 기관차인지는 역시 모르겠다.

예전에도 얘기를 한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증기 기관차는 원래 검정색이다. 붉게 녹이 슨 모습 아니면 옛날의 흑백 사진만 봐 왔기 때문에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지금은 온통 녹이 슬어서 퍼렇지만, 원래는 그거야말로 갈색이다. 평양에 있는 갈색의 김씨 부자 동상과 비슷한 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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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리 역의 바로 옆에는 철원 비무장지대에 서식하는 온갖 동물들을 박제해서 전시해 놓은 자그마한 박물관이 있어서 거기도 잠시 둘러봤다. 동물은 원래 화약 냄새를 잘 맡는 편이지만, 지뢰를 밟아서 다리를 잃은 동물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매우 유익한 구경을 한 뒤, 버스는 민통선 안에 있는 옛 철원 역 부지와 몇몇 옛 건물들 흔적을 지나갔다. 딱히 정차하지는 않고 가이드가 설명만 해 줬다. 일제 강점기 내지 북한 정권이 잠시 쓰던 건물 되시겠다.

그 뒤 버스는 처음에 입장할 때 거쳤던 민통선 초소와는 다른 초소에서 민통선 구역을 빠져나갔다. 관광버스가 아니고 민통선 패스를 갖고 있지도 않은 일반인이라면 이건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들어갔던 초소에다 신분증을 맡기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가야 한다. 이 점을 내가 오해한 관계로 추후의 여행 과정에서 약간 착오가 있었다.

전체 관광은 3시간이 약간 넘게 걸렸다. 우리 일행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로 돌아왔다. 시각은 1시 40분쯤. 이제 점심을 먹으러 '전선 휴게소'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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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휴게소! 휴게소라고 간판은 걸려 있지만, 이곳은 잠깐 거쳐 가는 장소가 아니라 엄연한 목적지, 아니 종점 역할을 하는 식당이나 마찬가지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통선 안에 있으면서 민통선 밖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영업을 하는 식당이다. 식사 메뉴는 메기 민물 매운탕이 유일하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근 군부대에서는 회식을 여기서 할지도 모르겠다.

파주 임진각 쪽에서는 민통선 안에 통일촌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인근에 있는지라, 안보 관광 때 거기서 식사를 하는 스케줄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전선 휴게소는 그런 식으로 연계가 돼 있지는 않다. 위치도 좀 외딴 곳이며 수십· 수백 명의 관광객을 한 번에 상대할 정도까지의 규모도 안 되고 말이다.

왔던 길로 돌아가서 국도 43호선을 탄 뒤, 철원 동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지방도 464호선을 갈아탔다. 그 길로 끝까지 가면 길이 더 없이 끊어진 것처럼 나오는 지점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민통선 초소이다. 통과 허가를 받으려면 최소한 당일 아침에 식당에 전화해서 인원 수를 말하고 식사 주문을 한 뒤, 초소에서는 “전선 휴게소 방문”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대표자의 이름· 연락처를 적고 신분증을 맡기고, 동승자들의 이름과 생일 정도를 적어서 제출하면 초소에서는 임시 출입증과 차량 식별용 깃발을 준다. 출입증은 운전석 앞유리에다 두고 깃발은 옆유리에다 끼워서 펄럭이게 해야 한다.
참고로 식당은 민통선 초소에서도 거의 3km가 넘게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철원 북쪽 외곽에서 들판이 아니라 수풀이 우거진 곳이 있다 치면 십중팔구 거긴 지뢰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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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텅 빈 내비 화면으로 민통선 진입을 인증하련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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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지간해서는 개인 블로그에다 맛집 광고나 음식 인증샷 같은 건 좀체 안 올리는데.. 여기 민물 매운탕은 정말 별미였다. 한탄강에서 주인장이 직접 잡아서 요리한다는 생선은 살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으며 곁들어진 수제비와 채소는 담백했다. 국물은 딱 적당히 구수하고 얼큰했으며 너무 맵거나 짜지 않았다.
먼 길을 힘들게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같이 간 일행들도 이를 인정하면서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전선 휴게소 근처에는 진귀한 구경거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금강산선 옛 교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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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경치도 몸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곳에 인파가 북적거리지도 않고 우리밖에 없으니 분위기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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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11 19:34 2014/05/1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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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5월 4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본인은 교회 지인 가족의 초청으로 파주 임진각 일대에 안보 관광을 갔다 왔다.
그 경험에 힘입어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년이 지난 2014년 5월 3일엔, 본인은 교회 친구들을 데리고 철원에 안보 관광을 직접 갔다 왔다.

본인은 철덕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철원을 오래 전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군사분계선의 주변을 지도로 살펴보면, 판문점이 있는 서쪽이야 평지이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빽빽한 산악 지형이 이어진다. 그런데 수풀을 머리숱에다 비유했을 때 땜통 같은 지역이 강원도에 동서로 딱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평야'가 있는 철원이고 다른 하나는 분지처럼 생긴 양구이다. 북한 역시 이 두 지역을 염두에 두고 과거에 남침 땅굴을 팠었다(철원 쪽으로 #2를, 양구 쪽으로 #4를).

철원은 예로부터 천혜의 자연이 살아 있는 곡창 지대요 한반도 중부 지방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6·25 휴전 이후에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건 좀 ㅎㄷㄷ한 일이지만, 그래도 치열한 전투 끝에 철원을 수복해 낸 것은 굉장한 쾌거였고 김 일성도 이를 애석해했을 정도라고 한다. 여긴 나름 38선 이북이기 때문에 분단 직후 6·25 전쟁 전까지는 북한에 속해 있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건 여기에 철도가 있기도 했다는 뜻이다. 경원선이 지났고 금강산 관광 철도도 있었다. 우와..!
그래서 본인은 철원에 있는 다른 자연 관광지나 유적지들은 제쳐 두고 오로지 안보 그리고 철도와 관련된 곳을 골라서 답사하려고 마음먹었다. 로드뷰, 항공 사진 등을 참고하면서 모든 스케줄을 짠 뒤, 드디어 답사를 떠났다.
동반자가 없으면 나 혼자라도 차 끌고 가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교회 친구를 세 명이나 꾀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저런 델 도대체 왜 가 ㄲㄲㄲ” 같은 놀림과 비아냥은 물론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자매까지 한 명 불러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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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반,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토요일 이른 아침엔 도로가 아주 한산하고 소통이 원활했다. 날씨도 아주 쾌청하고 좋았다.
동부 간선 도로를 탄 뒤 의정부에서부터 국도 43호선만 죽어라고 타고 올라가면서 드디어 철원에 도착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군부대가 수시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편도로 약 85km를 달렸다. 고속도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가는 데 2시간이 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래도 1시간 반 만에 잘 갔다.

처음 간 곳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였다.
고석정 계곡은 예정에는 없이 시간이 남아서 들른 것일 뿐이었는데.. 경치가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하루 종일 날씨도 굉장히 좋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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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예매를 해 둔 패키지 안보 관광을 떠났다.
평일에는 허가를 받은 뒤에 민통선 안으로 자가용을 몰고 들어갈 수도 있는 반면, 인파가 몰리는 주말에는 셔틀버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탄 버스는 어린 학생들까지 포함해 44개 좌석이 꽉 찬 만석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파주· 임진각· 도라산 역 일대는 외국인들도 많고 민통선 내부까지 완전 바글바글했던 반면, 여기는 우리 관광객 말고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으며 조용하고 한산한 편이었다. 그 이유로는 여기는 파주보다 서울에서 더 멀고 교통이 불편하며, 또 황금연휴여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놀러 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임진각으로 가는 길은 경의선 철도뿐만 아니라 자동차 도로도 신호 대기가 없는 자유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그러나 철원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다.

버스는 지방도 464호선의 모 구간에서 좌회전하여 민간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초소를 지날 때마다 군인이 수시로 탑승하여 탑승 인원 숫자가 맞는지 검문을 했다. 그리고 버스는 토교 저수지보다도 더 북쪽으로 남방 한계선으로 추정되는 철조망을 따라 쭉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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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2 땅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제1 땅굴이 발견된 지 반 년이 채 되기 전에, 거기서(연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더 깊고 더 큼직한 땅굴이 발견되었으니 국가적으로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제3 땅굴은 열차로 드나드는 진출입로가 뚫려 있으며 제4는 터널 안까지 열차로 다닐 수 있는 반면, 제2는 땅굴 출입과 관련된 그 어떤 동력 시설도 없다. 그리고 내부의 길이도 제3 땅굴보다 더 길다. 그러니 오갈 때 발품을 좀 팔아야 한다.
땅굴 내부는 사진 촬영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땅굴이라는 건 땅 속에 뭔가 빈 공간이 있다는 걸 감지하는 것이 별개이며, 그걸 찾아서 저지하려고 실제로 파 내려가는 게 또 별개이다. 우리나라에서 뚫은 출입로 땅굴에 들어가면, 북쪽으로도 길이 있고 남쪽으로도 길이 있다. 북쪽은 북한이 파 내려온 from 방향이고, 남쪽은 걔네들이 의도한 목적지 to 방향이다. 이 땅굴의 경우, 남쪽은 더 진행할 수 없게 길이 막혀 있고, 북쪽으로 약 500m 정도, 남방 한계선에 2~300m 앞까지 접근한 곳까지가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 그건 제3 땅굴도 마찬가지다.

이 땅굴의 시점은 도대체 북한 어디에 있는 걸까? 쟤네들은 지하에 무슨 짓을 해 놨는지가 몹시 궁금해진다.
한반도가 통일되어서 땅굴도 남쪽 종점과 북쪽 종점이 모두 한데 뚫린 채로 역사 교육 현장으로 개방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통일이란 연방제니 나발이니 하는 말장난이 아니라, 김씨 부자 동상을 무너뜨리고 주체사상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제대로 된 통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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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땅굴을 탐사하고 저지하는 과정에서 이런 희생자가 있었다. 저기 나오는 계급은 아마 최소한 2계급 특진은 받은 것일 테고, 실제로 작업을 한 사람들은 다 병사 신분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제1 땅굴은 발견 직후 지하에 있던 북한군 인부와의 총격전으로 인한 전사자가 있었고, 제2 땅굴 탐사 중에 발생한 전사자는 내부에 있던 지뢰를 밟고 산화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제3 땅굴을 탐사하던 때는 딱히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으며, 제4 땅굴을 탐사할 때는 사람 대신 군견이 희생되었다. 땅굴이 발견되고 위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 안보 관광지로 개방되는 것조차도 다 이런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 덕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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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제2 땅굴을 발견하는 데에도 귀순자의 힌트가 기여했었구나.
땅굴이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들은 제3 땅굴 소개 자료에도 거의 똑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쉽게 말해 북한은 NATM 공법으로 굴을 팠고, 우리나라가 그 땅굴을 관통하기 위해 따로 굴을 판 건 실드 공법과 비슷하다는 얘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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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이면 땅굴이 발견되기 한참 전이었고 서울 근처와 강원도 일대에 온통 무장공비들이 출몰하던 무시무시한 시절이다. 그런데 북한이 그때부터 벌써 땅굴을 팔 생각을 하고 그 땅굴의 남한 쪽 출구를 어디쯤에다 낼지를 생각했다니 이건 뭐 흠..?
그나저나 저 사살된 간첩의 임무가 그런 것이었다는 건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궁금하다.

땅굴 구경을 마친 뒤, 남방 한계선과 DMZ가 코앞인 평화 전망대로 갔다. 동송 저수지 근처이니, 구글 지도에서 위치가 어디인지는 이제 알겠다. (그나저나 철원에는 다른 곳에 승리 전망대도 있다고 그런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09 08:21 2014/05/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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