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대 주변은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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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철원 평야에서 논농사를 지으려면 물 공급이 원활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철원을 빼앗긴 뒤 물귀신 심보로 철원으로 가는 무슨 강의 물줄기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저수지는 그 난관을 극복하게 위해 만들어진 거라 함. 물론 여기는 낚시꾼 내지 철새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 작가들도 많이 찾아온다.

워낙 날씨가 맑고 미세먼지도 없어서 북한 땅까지 어렴풋이 보였다. 다만, 이 지역엔 개성 공단이나 기정동 마을 같은 명물이 없는 관계로, 파주의 도라 전망대만치 북한 쪽에 딱히 볼거리는 별로 없다. 그냥 천혜의 자연만을 감상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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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인터넷 사진으로만 보며 그리워하던 월정리 역 복원 건물을 드디어 직접 보게 되었다. 오오!! ㅠ.ㅠ 감사와 찬양이 절로 흘러나왔다.
난 역 건물을 팔로 꼬옥 끌어안은 채 감격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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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구내의 선로에는 두 가지 중요 유물이 있는데, 하나는 코레일 4001호 디젤 기관차이고, 다른 하나는 6·25 전쟁 중에 우리 아군의 폭격을 받고 부서진 어느 증기 기관차이다.
4001호 디젤 기관차는 굉장히 옛날 차량이긴 하지만, 월정리 역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여기에 전시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거기 현장에서도 딱히 설명이 돼 있지 않다.

현재 임진각에 가 보면, 알다시피 경의선 장단 역에 있던 녹슨 증기 기관차가 녹을 최대한 벗겨 내는 가공을 거친 뒤 전시되어 있다. 그건 총격 때문에 표면이 벌집이 된 것만 빼면 형태가 비교적 온전한 편이며, 그때 그 기관차를 몰던 기관사가 누군지까지도 알려져 있다. 그 기관차는 '마터'라고 불리던 산악 화물용의 굉장한 대형 기관차였다.
그러나 월정리 역 인근에 있는 '경원선' 기관차는 총알이 아니라 포탄이라도 맞았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으스러져 있다. 이것도 마터 형 기관차인지는 역시 모르겠다.

예전에도 얘기를 한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증기 기관차는 원래 검정색이다. 붉게 녹이 슨 모습 아니면 옛날의 흑백 사진만 봐 왔기 때문에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지금은 온통 녹이 슬어서 퍼렇지만, 원래는 그거야말로 갈색이다. 평양에 있는 갈색의 김씨 부자 동상과 비슷한 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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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리 역의 바로 옆에는 철원 비무장지대에 서식하는 온갖 동물들을 박제해서 전시해 놓은 자그마한 박물관이 있어서 거기도 잠시 둘러봤다. 동물은 원래 화약 냄새를 잘 맡는 편이지만, 지뢰를 밟아서 다리를 잃은 동물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매우 유익한 구경을 한 뒤, 버스는 민통선 안에 있는 옛 철원 역 부지와 몇몇 옛 건물들 흔적을 지나갔다. 딱히 정차하지는 않고 가이드가 설명만 해 줬다. 일제 강점기 내지 북한 정권이 잠시 쓰던 건물 되시겠다.

그 뒤 버스는 처음에 입장할 때 거쳤던 민통선 초소와는 다른 초소에서 민통선 구역을 빠져나갔다. 관광버스가 아니고 민통선 패스를 갖고 있지도 않은 일반인이라면 이건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들어갔던 초소에다 신분증을 맡기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가야 한다. 이 점을 내가 오해한 관계로 추후의 여행 과정에서 약간 착오가 있었다.

전체 관광은 3시간이 약간 넘게 걸렸다. 우리 일행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로 돌아왔다. 시각은 1시 40분쯤. 이제 점심을 먹으러 '전선 휴게소'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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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휴게소! 휴게소라고 간판은 걸려 있지만, 이곳은 잠깐 거쳐 가는 장소가 아니라 엄연한 목적지, 아니 종점 역할을 하는 식당이나 마찬가지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통선 안에 있으면서 민통선 밖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영업을 하는 식당이다. 식사 메뉴는 메기 민물 매운탕이 유일하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근 군부대에서는 회식을 여기서 할지도 모르겠다.

파주 임진각 쪽에서는 민통선 안에 통일촌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인근에 있는지라, 안보 관광 때 거기서 식사를 하는 스케줄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전선 휴게소는 그런 식으로 연계가 돼 있지는 않다. 위치도 좀 외딴 곳이며 수십· 수백 명의 관광객을 한 번에 상대할 정도까지의 규모도 안 되고 말이다.

왔던 길로 돌아가서 국도 43호선을 탄 뒤, 철원 동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지방도 464호선을 갈아탔다. 그 길로 끝까지 가면 길이 더 없이 끊어진 것처럼 나오는 지점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민통선 초소이다. 통과 허가를 받으려면 최소한 당일 아침에 식당에 전화해서 인원 수를 말하고 식사 주문을 한 뒤, 초소에서는 “전선 휴게소 방문”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대표자의 이름· 연락처를 적고 신분증을 맡기고, 동승자들의 이름과 생일 정도를 적어서 제출하면 초소에서는 임시 출입증과 차량 식별용 깃발을 준다. 출입증은 운전석 앞유리에다 두고 깃발은 옆유리에다 끼워서 펄럭이게 해야 한다.
참고로 식당은 민통선 초소에서도 거의 3km가 넘게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철원 북쪽 외곽에서 들판이 아니라 수풀이 우거진 곳이 있다 치면 십중팔구 거긴 지뢰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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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텅 빈 내비 화면으로 민통선 진입을 인증하련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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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지간해서는 개인 블로그에다 맛집 광고나 음식 인증샷 같은 건 좀체 안 올리는데.. 여기 민물 매운탕은 정말 별미였다. 한탄강에서 주인장이 직접 잡아서 요리한다는 생선은 살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으며 곁들어진 수제비와 채소는 담백했다. 국물은 딱 적당히 구수하고 얼큰했으며 너무 맵거나 짜지 않았다.
먼 길을 힘들게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같이 간 일행들도 이를 인정하면서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전선 휴게소 근처에는 진귀한 구경거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금강산선 옛 교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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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경치도 몸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곳에 인파가 북적거리지도 않고 우리밖에 없으니 분위기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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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11 19:34 2014/05/1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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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5월 4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본인은 교회 지인 가족의 초청으로 파주 임진각 일대에 안보 관광을 갔다 왔다.
그 경험에 힘입어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년이 지난 2014년 5월 3일엔, 본인은 교회 친구들을 데리고 철원에 안보 관광을 직접 갔다 왔다.

본인은 철덕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철원을 오래 전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군사분계선의 주변을 지도로 살펴보면, 판문점이 있는 서쪽이야 평지이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빽빽한 산악 지형이 이어진다. 그런데 수풀을 머리숱에다 비유했을 때 땜통 같은 지역이 강원도에 동서로 딱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평야'가 있는 철원이고 다른 하나는 분지처럼 생긴 양구이다. 북한 역시 이 두 지역을 염두에 두고 과거에 남침 땅굴을 팠었다(철원 쪽으로 #2를, 양구 쪽으로 #4를).

철원은 예로부터 천혜의 자연이 살아 있는 곡창 지대요 한반도 중부 지방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6·25 휴전 이후에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건 좀 ㅎㄷㄷ한 일이지만, 그래도 치열한 전투 끝에 철원을 수복해 낸 것은 굉장한 쾌거였고 김 일성도 이를 애석해했을 정도라고 한다. 여긴 나름 38선 이북이기 때문에 분단 직후 6·25 전쟁 전까지는 북한에 속해 있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건 여기에 철도가 있기도 했다는 뜻이다. 경원선이 지났고 금강산 관광 철도도 있었다. 우와..!
그래서 본인은 철원에 있는 다른 자연 관광지나 유적지들은 제쳐 두고 오로지 안보 그리고 철도와 관련된 곳을 골라서 답사하려고 마음먹었다. 로드뷰, 항공 사진 등을 참고하면서 모든 스케줄을 짠 뒤, 드디어 답사를 떠났다.
동반자가 없으면 나 혼자라도 차 끌고 가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교회 친구를 세 명이나 꾀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저런 델 도대체 왜 가 ㄲㄲㄲ” 같은 놀림과 비아냥은 물론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자매까지 한 명 불러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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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반,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토요일 이른 아침엔 도로가 아주 한산하고 소통이 원활했다. 날씨도 아주 쾌청하고 좋았다.
동부 간선 도로를 탄 뒤 의정부에서부터 국도 43호선만 죽어라고 타고 올라가면서 드디어 철원에 도착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군부대가 수시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편도로 약 85km를 달렸다. 고속도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가는 데 2시간이 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래도 1시간 반 만에 잘 갔다.

처음 간 곳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였다.
고석정 계곡은 예정에는 없이 시간이 남아서 들른 것일 뿐이었는데.. 경치가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하루 종일 날씨도 굉장히 좋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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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예매를 해 둔 패키지 안보 관광을 떠났다.
평일에는 허가를 받은 뒤에 민통선 안으로 자가용을 몰고 들어갈 수도 있는 반면, 인파가 몰리는 주말에는 셔틀버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탄 버스는 어린 학생들까지 포함해 44개 좌석이 꽉 찬 만석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파주· 임진각· 도라산 역 일대는 외국인들도 많고 민통선 내부까지 완전 바글바글했던 반면, 여기는 우리 관광객 말고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으며 조용하고 한산한 편이었다. 그 이유로는 여기는 파주보다 서울에서 더 멀고 교통이 불편하며, 또 황금연휴여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놀러 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임진각으로 가는 길은 경의선 철도뿐만 아니라 자동차 도로도 신호 대기가 없는 자유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그러나 철원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다.

버스는 지방도 464호선의 모 구간에서 좌회전하여 민간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초소를 지날 때마다 군인이 수시로 탑승하여 탑승 인원 숫자가 맞는지 검문을 했다. 그리고 버스는 토교 저수지보다도 더 북쪽으로 남방 한계선으로 추정되는 철조망을 따라 쭉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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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2 땅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제1 땅굴이 발견된 지 반 년이 채 되기 전에, 거기서(연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더 깊고 더 큼직한 땅굴이 발견되었으니 국가적으로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제3 땅굴은 열차로 드나드는 진출입로가 뚫려 있으며 제4는 터널 안까지 열차로 다닐 수 있는 반면, 제2는 땅굴 출입과 관련된 그 어떤 동력 시설도 없다. 그리고 내부의 길이도 제3 땅굴보다 더 길다. 그러니 오갈 때 발품을 좀 팔아야 한다.
땅굴 내부는 사진 촬영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땅굴이라는 건 땅 속에 뭔가 빈 공간이 있다는 걸 감지하는 것이 별개이며, 그걸 찾아서 저지하려고 실제로 파 내려가는 게 또 별개이다. 우리나라에서 뚫은 출입로 땅굴에 들어가면, 북쪽으로도 길이 있고 남쪽으로도 길이 있다. 북쪽은 북한이 파 내려온 from 방향이고, 남쪽은 걔네들이 의도한 목적지 to 방향이다. 이 땅굴의 경우, 남쪽은 더 진행할 수 없게 길이 막혀 있고, 북쪽으로 약 500m 정도, 남방 한계선에 2~300m 앞까지 접근한 곳까지가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 그건 제3 땅굴도 마찬가지다.

이 땅굴의 시점은 도대체 북한 어디에 있는 걸까? 쟤네들은 지하에 무슨 짓을 해 놨는지가 몹시 궁금해진다.
한반도가 통일되어서 땅굴도 남쪽 종점과 북쪽 종점이 모두 한데 뚫린 채로 역사 교육 현장으로 개방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통일이란 연방제니 나발이니 하는 말장난이 아니라, 김씨 부자 동상을 무너뜨리고 주체사상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제대로 된 통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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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땅굴을 탐사하고 저지하는 과정에서 이런 희생자가 있었다. 저기 나오는 계급은 아마 최소한 2계급 특진은 받은 것일 테고, 실제로 작업을 한 사람들은 다 병사 신분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제1 땅굴은 발견 직후 지하에 있던 북한군 인부와의 총격전으로 인한 전사자가 있었고, 제2 땅굴 탐사 중에 발생한 전사자는 내부에 있던 지뢰를 밟고 산화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제3 땅굴을 탐사하던 때는 딱히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으며, 제4 땅굴을 탐사할 때는 사람 대신 군견이 희생되었다. 땅굴이 발견되고 위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 안보 관광지로 개방되는 것조차도 다 이런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 덕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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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제2 땅굴을 발견하는 데에도 귀순자의 힌트가 기여했었구나.
땅굴이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들은 제3 땅굴 소개 자료에도 거의 똑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쉽게 말해 북한은 NATM 공법으로 굴을 팠고, 우리나라가 그 땅굴을 관통하기 위해 따로 굴을 판 건 실드 공법과 비슷하다는 얘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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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이면 땅굴이 발견되기 한참 전이었고 서울 근처와 강원도 일대에 온통 무장공비들이 출몰하던 무시무시한 시절이다. 그런데 북한이 그때부터 벌써 땅굴을 팔 생각을 하고 그 땅굴의 남한 쪽 출구를 어디쯤에다 낼지를 생각했다니 이건 뭐 흠..?
그나저나 저 사살된 간첩의 임무가 그런 것이었다는 건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궁금하다.

땅굴 구경을 마친 뒤, 남방 한계선과 DMZ가 코앞인 평화 전망대로 갔다. 동송 저수지 근처이니, 구글 지도에서 위치가 어디인지는 이제 알겠다. (그나저나 철원에는 다른 곳에 승리 전망대도 있다고 그런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09 08:21 2014/05/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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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원 역 전동차 추돌 사고

도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거나 고장· 정체로 인해 서 있는 앞차를 발견 못 하고 추돌하는 건 흔히 발생하는 교통사고 패턴이다.
그런데 이런 부류의 사고가 철도에도 드물게나마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왠지 콩스러운 2002년 2월 22일에 발생한 수원 역 전동차 추돌 사고가 있다.

한 서울 메트로(그 당시 서울 지하철 공사) 소속 1호선 전동차가 수원 역 진입을 앞두고, 하행 무궁화호를 먼저 보내 주기 위해 신호 대기 정차 중이었다.
그런데 뒤따라 오던 철도청(코레일 출범 전) 소속의 선로 보수 차량이 짙은 안개와 신호 오독으로 인해 이 전동차를 발견 못 하고 그대로 추돌했다.
그 결과, 차량과 직접 닿은 객차 2량이 탈선+대파되었고, 30여 명의 승객이 경상을 입었다.

여느 철도 교통사고와는 달리, 이건 가해 차량과 피해 차량의 소속 회사가 서로 다르기까지 하다 보니 보상 문제를 두고 양사간 알력다툼이 있었다.
철도청에서는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잉여 중고 전동차만 달랑 넘겨 주는 걸로 배상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서울 메트로에서는 피해 객차 중에 차령이 3년도 안 된 새 물건이 있다는 걸 내세우면서 신차 도입에 맞먹는 손해 배상금을 청구했다. 이 의견 대립으로 인해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결국은 철도청이 서울 메트로의 요구를 사실상 다 수용하는 걸로 분쟁이 종결되었다. 총 배상금은 일반 자동차 교통사고의 배상하고는 잽도 안 되는 49억 2천만 원에 달했다고..! 참고로 전동차 한 편성이 아니라 한 량의 가격이 10억 원 정도 한다.

근본적으로 그때 전동차에도 웬 신호대기라는 게 있었고 판단 착오로 인해 이런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평면교차 때문이었다.
수원에서 경부선 전동차가 회차를 하려면 일반열차 선로를 타넘어야 했다. 자동차로 치면 일종의 U턴과 같다. 이때 일반열차 눈치를 보는 건 필수다.

즉, 수원역은 근본적으로 종점으로서는 상당히 열악하고 위험한 구조였다. 또한 이 병목 지점 때문에 경부선 전동차를 충분히 증차할 수 없었다. 수원에 다 와 가지고는 n분간 지루한 신호 대기...

경부선 전철이 수원에서 천안까지 연장된 게 2005년부터인데, 그보다 앞서 병점 구간이 2003년에 개통했다. 이는 수원에서의 평면교차 지장을 없애기 위해 먼저 시급히 취한 조치였다. 거기는 병점 차량 기지 입· 출고 및 회차 선로가 경부선 본선과 별도의 입체교차 시설로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2. 미전 신호소 열차 충돌 사고

자동차나 비행기의 좌석에는 안전벨트가 있다. 배는 안전벨트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침몰에 대비한 구명 조끼 정도는 승객 수만치 갖춰져 있다. 그러나 열차는 한번에 수백 명 이상의 승객을 대량으로 수송하는 교통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안전벨트 같은 개인 단위의 구명 수단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철도는 주행 중에 도로와 같은 돌발상황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장애물이 나타난다 해도 어지간해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열차가 그냥 장애물을 밀고 지나간다. 무게 차이가 서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승객이 급정거로 인한 큰 위험에 빠질 일이 없다.

그런데 똑같이 길고 무거운 열차와 열차가 서로 부딪치게 되면 이건 그야말로 대재앙이 된다.
관성 때문에 뒤의 객차들이 탈선하여 앞의 객차들을 타고 올라가게 되며, 깔린 객차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사고까지 나면 어차피 안전벨트도 아무 도움이 안 되긴 마찬가지가 된다.

위의 1번처럼 멈춰 있는 열차를 뒷차가 추돌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서로 마주 보며 달려오던 열차가 머리끼리 정면 충돌하는 건 자동차로 치면 중앙선 침범 교통사고 정도에 해당한다. 이건 단선 구간에서 폐색 처리가 엉망으로 된 완전 막장 철도에서나 가능한 일인데..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었다.
1994년 8월 11일, 경부선 복선과 경전선이 합류/분기하는 구간에서 대구 발 마산 행 경전선 하행 무궁화호(217열차)와 부산 발 대구 행 경부선 상행 무궁화호(202열차)가 그만.. 정면 충돌했다.
이 사고도 당시 위험한 평면교차 시설에 두 열차가 동시에 진입하면서 발생했다.

우리나라 철도는 좌측통행이기 때문에 서울 방면 상행 선로가 부산 방면 하행 선로의 왼쪽에 있다. 그런데 경전선은 경부선의 서쪽, 즉 왼쪽으로 뻗어 나간다.
따라서 맨 오른쪽의 경부선 하행을 달리고 있던 경전선 하행 217열차는 경전선 마산 방면으로 가기 위해 잠시 경부선 상행을 침범했다가 경전선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그리고 202는 217이 다 지나갈 때까지 남쪽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선로 분기기가 원래의 경부선 직진 쪽으로 돌아온 뒤에 진행해야 했다.

그런데 사고가 발생하던 당시에 202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다리지 않고 경부선 상행 선로를 그대로 진행했다.
그러나 이때 경부선 상행의 해당 지점은 평상시처럼 서울 방면으로 향해 있던 게 아니라, 217이 지나갈 수 있게 경전선↔경부선 상행↔경부선 하행으로 잠시 행로가 바뀐 형태였다.
이에 202는 상행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경로를 벗어나 하행 선로로 역주행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경부선 하행 선로에서 마주 오던 217과 충돌해 버렸다. 진짜로 중앙선 침범 사고와 똑같다. (☞ 당시의 MBC 뉴스 보도).

이 사고로 총 4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의 승객이 중경상을 입었다.
결과론적으로는 잘못된 선로에 진입한 202의 기관사의 과실이 의심되었으나 현직 기관사들은 거기는 정황상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발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며 과실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리고 오히려 열차나 선로 시설의 시스템적 오류를 더 의심했다.

하지만 시설 미비 내지 파손으로 인해 기계적인 결함 가능성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었으며, 이례적으로 양 열차의 기관사들도 모두 사망해서 당시 상황을 정확히 증언할 사람이 없었던 관계로, 이 사고는 공식적으로는 '원인 불명'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비행기 추락도 아닌데 철도 사고에서 기관사가 모두 죽는 건 굉장히 이례적이다. 게다가 두 열차가 모두 기관차형 열차가 아니라 무궁화호 디젤 동차(NDC)였고, 기관실이 정말 전방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돌 사고 시에 기관사가 상대적으로 더욱 위험하긴 했다.

지금이야 경부선과 경전선이 만나는 구간은 모두 복선에 입체 교차 형태로 바뀐 지 오래이며, 전철화가 되어서 경전선 KTX까지 다니는 상황이 되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4/24 08:36 2014/04/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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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옛날 차들

하루는 인터넷을 돌아댕기다가 심히 놀라운 사진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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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세상에~! 바로 이거다. 내가 초딩이던 시절,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이상하게 생긴 자동차가 시골이나 공사장 같은 데에서 종종 굴러다니고 있었다.
경운기 엔진에다 미군 지프 폐차 부품을 얹어서 급조한 소형 트럭. 일명 딸딸이 혹은 '영운기'라고 불렸나 보다. 어떤 건 짐받이를 들어올리는 '덤프' 기능도 있었다.

외형과 덩치는 군용 지프와 기아 세레스(과거 기아 자동차에서 생산한 사륜구동 1톤 트럭)를 짬뽕한 듯하다. 개인 작품인지, 아니면 어느 기업에서 이런 물건을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옛날에 시발 자동차도 따지고 보면 이런 식으로 부품을 조립해서 만들어지기도 했을 테고.

난 실물을 본 적이 없는 삼륜차도 알고 있는데, 정작 실물을 본 적도 있는 영운기는 21세기 이래로 내 머리에서 존재감이 15년~20년 가까이 완전히 잊혀지고 봉인되어 있었다.
그랬는데 이 사진 덕분에 기억이 순식간에 싹 되살아났다. 너무 반갑다.

영운기는 등록증도 번호판도 없고 각종 세금이나 보험이 붙은 정식 자동차가 아니다.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 겨우 저런 허접한 물건이 대포차로 둔갑해서 범죄에 악용되기라도 할 가능성은 0이나 마찬가지니까..
경운기 엔진이 최고로 돌아 봤자 단기통에 출력도 10마력대에 불과한데 힘과 속도가 얼마나 나오겠는가? 그래도 얘는 동력비를 조절해서 순수 경운기+트랙터보다는 빠르게 최대 시속 50~60km까지는 달렸다고 한다.

참고로 경운기의 엔진은 일반 자동차용 디젤 엔진보다 공기 압축비를 더 높여서 작은 덩치와 저회전 상태로도 성능과 연비를 더욱 무리해서 짜낸 형태이다. 농기계는 기름 덜 먹고 경제적이면 장땡이지, 필요 이상으로 고성능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 대신 경운기는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일반 자동차보다 털털거리는 소음과 진동이 더 심하며, 시동을 걸기도 더 힘들다고 한다.
다만, 승용차처럼 배터리가 방전되어서 시동이 안 걸린다거나 밀어서 시동을 건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뭘 손으로 빙빙 돌려 주면서 시동을 걸었던 것 같다.

자, 이것과 함께 문득 떠오른 추억의 대형 화물차가 있다.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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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 자동차가 내놓은 8톤 덤프 트럭이다. 혹시 얘 기억하시는 분?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생산되었던 물건이다. 참고로 새한 자동차는 오늘날 한국 GM의 할아버지뻘 되는 기업이다. (한국 GM의 전신은 대우 자동차, 그리고 대우 자동차의 전신이 새한 자동차임) 하지만 이 차의 원형은 이스즈(Isuzu) TX/D 시리즈로, 미국차가 아닌 일본차라고 한다.

내가 이 차를 기억하는 건 엔진룸이 운전석의 아래가 아니라 앞에 돌출되어 있어서 우리나라에서는 군용차가 아니면 거의 볼 수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앞에 SMC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것도 기억한다. 도색은 저렇게 국방색 아니면 파란색 두 종류였던 것 같다.

얘는 1990년대에도 이미 보기가 대단히 힘들어진 올드카였다. 그런데 하물며 2010년대는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지금도 극소수 포니가 굴러다니고 있는 것처럼 제주도 포함 일부 벽지에는 '아직도' 새한 트럭이 현역으로 뛰고 있긴 한가 보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용으로 국내외의 올드카를 대여하는 것도 사업 아이템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추억을 되살리니 참 훈훈하다. 게임도 페르시아의 왕자 같은 고전을 좋아하고 자동차도 고전...
난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물론이고 철도, 한글 세벌식, 킹 제임스 성경 같은 것도 하나도 까맣게 모르던 시절, 10살도 채 되기 전에는 월간 자동차생활과 승용차 취급 설명서를 읽으면서 자동차에 매달린 채 지냈다.

그 기질은 훗날 컴퓨터를 비롯한 다른 관심 분야들에 밀려서 점차 봉인되었으나, 그 봉인이 2010년도에 들어서 다시 풀렸다.
(1) 일단 철도 때문에 교통수단간의 체계적인 비교 분석이 시작되었고, (2) 실제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딱히 기계 뜯어보는 걸 좋아하는 공돌이가 아니며, 딱히 자동차가 남자의 로망이고 능력의 상징이어서 그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20여 년 전의 옛날 생각이 나서 추억을 회상하는 그 느낌이 좋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04/09 19:37 2014/04/09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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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해 버렸으니 허접한 게 아니라, 오히려 500년이나 버틴 대단한 왕조이다”라는 요지로 조선 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서울대 중문과 허 성도 교수가 했다는 강연을 보신 분이 있는가 모르겠다. 본인 역시 오래 전에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조선이 그저 말기에 막장으로 치달아서 망할 만하니까 망했고 먹힐 만하니까 일제에게 먹혔다고만 생각하기에 앞서,
조선 역시 리즈 시절에는 기강과 체계가 굉장히 잘 갖춰진 좋은 나라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환단고기 식의 황당한 얘기가 아니라 그럴싸하게 들린다.

다른 제도는 몰라도 특히 조선왕조 실록은 훈민정음에 버금가는 위대한 문화 자산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뭔가... "성경에 과학적으로 아주 정확한 진술이 있다.." 그런 예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

본인에게는 그분의 성함이 낯설지 않게 들린다.
저 강연을 한 허 성도 교수는 '한국사 사료 연구소'에 재직하였으며,
유니코드가 정식 제정되기 전에 아래아한글이 제공하던 '제2수준 확장 한자'를 제정하고 글자를 직접 그리기까지 했던 분 중 하나이다. 아래아한글의 도움말 credits에도 이름이 당당히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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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모로 우리나라 문화와 관련해서 공적이 뚜렷한 분임이 틀림없다.흔히 한글 전용론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한문 고전을 통해 전통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소수의 전문가를 양성해서 고전을 번역을 해야지, 그걸 빌미로 전국민에게 어려운 한자· 한문을 원어 그대로 가르치기에는 국가적인 손실과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허 교수는 그 주장이 가리키는 '소수의 전문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대단한 분이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올해에 갓 정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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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4/03/16 08:16 2014/03/16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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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 30일, 5공 시절에 KBS 텔레비전에서는 6·25가 발발한 지 33주년과 휴전 30주년을 기념하여 소박한(?) 이벤트를 하나 편성했다.
남북 이산가족까지는 못 하더라도 같은 대한민국 안에서라도(domestic) 원치 않게 헤어지고 연락이 끊어진 이산가족을 매스컴의 힘을 동원해서 찾아 보자는 1시간 반 남짓한 길이의 생방송 이벤트 프로그램이었다.

그랬는데..
이 프로가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영된 이후,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상상도 못 한 이변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막혀 있던 봇물이 터졌다.

KBS 사무국은 전화통이 불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일 밤과 새벽까지, 출연 신청도 없이 수천 명의 이산가족이 여의도로 찾아왔으며, 1회로 기획되었던 생방송은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무려 138일 동안 연달아 방영되는 기염을 토했다.
쉽게 말해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고(그 해 9월)와 아웅산 폭탄 테러(그 해 10월)가 벌어진 동안에도 저 프로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여기에라도 내 모습을 내보내서 어떻게든 가족을 찾으려고 여의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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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은 외신으로도 특종을 타고 보도됐으며 기네스북에 당당히 등재되었다.
TV에서 사람을 공개적으로 찾는 건 십중팔구 범죄자 수배밖에 없을 텐데 TV가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을 찾는 역할을 하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태어난 해에 있었던 옛날 일이다. 그러니 난 당연히 직접 체험한 적은 없고,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편린 정도만 머릿속에 지니고 있다.
인터넷, 휴대전화, SNS 없고 전화 보급률도 더딘데 마침 5공 시절에 컬러 텔레비전은 딱 집집마다 보급되던 시절이었으니 기술적으로 시기가 적절했다.

어느 중년의 남매가 서로 다른 지방에서 전화로 연결이 됐다. 혈육 인증을 위해 이름과 가족, 가족사, 신체 특징 같은 걸 물었는데 그게 일치하자..
그냥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두 사람 모두 자지러지게 펑펑 울음을 터뜨린 장면이 내 기억에 남는다. 이건 그 어떤 연기로도 제대로 재연할 수 없을 것이다. 방청객도, 아나운서도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이 스튜디오에서 만나게 됐을 때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성경을 아는 분이라면 이쯤에서 요셉 이야기를 떠올려도 좋을 것 같다. (창 43:30, 45:1-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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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천도 울어 버린 인간 드라마, 1983년 KBS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그때 TV 출연 신청이 총 10만 건 정도가 들어와서 그 중 절반인 5만 건 정도가 실제 접수되어 방송을 탔으며, 거기서 또 20% 정도 되는 1만여 가족이 상봉에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혈육을 끝끝내 찾지 못한 이산가족도 굉장히 많았다는 뜻이다. 6·25가 가져온 분단의 비극은 이렇게 처참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프로가 방영된 때로부터 또 무려 30년이 지나 있다.
참고로 국내 이산가족이 아니라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행사는 대한 적십자사가 민간 차원에서 1971년에 실태를 조사하고 1985년에 한번 추진했던 것 이후로는, 김 대중· 노 무현 정권이 돼서야 성사되었다. 규모는 아무래도 저 국내 이산가족 상봉에 비할 바가 못 되며, 상봉 후 재결합은 당연히 안 되고 이 사람들은 잠깐 만났다가 도로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만 했다. =_=;;.

그 당시 북한에서는 남한 사람과 만나는 이산가족들을 행사 몇 달 전부터 평양으로 불러서 밥 잘 먹이고 잘 재워서 굶주린 티, 험하게 산 티를 최대한 감추고 내보냈다. 또한 남한 사람과 만났을 때는 “우리는 수령님, 장군님의 은혜로 잘 지내고 있다”라고 기계적으로 대답하라고 세뇌 교육도 당연히 시켰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런데 님 달러 좀”이라고 뒷돈까지 삥뜯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런 궁색한 이벤트도 이산가족의 입장에서는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은지 모르겠다만, 겨우 저런 식의 상봉은 바람직한 통일을 정말로 염두에 둔 조치라고는 볼 수 없다. 남과 북이 정말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개방과 평화 통일을 할 의향이 있다면 상식적으로 그 전에 서신 왕래와 관광 여행부터라도 성사시켜야 하지 않겠나?

구원받은 지체들은 이 세상에서 헤어지더라도 다시 부활하고 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복된 소망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13 08:26 2014/03/13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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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이 보낸 사람>

난 아시다시피 개인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철도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연예, 스포츠, 드라마, 영화 같은 건 거의 관심 없으며 안 보고 지낸다.
그 흥행 대박이라는 겨울왕국조차도 안 봤다. 난 솔직히 월트 디즈니 스타일을 싫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여유가 아주 많으면 저것도 보기 싶긴 한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엔 꼭 봐야 하는 영화를 발견했다. 그래서 불금 시간을 쪼개서 야밤에 혼자 차까지 몰고 영화관 갔다.
내가 본 영화는 바로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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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를 깔끔한 상태에서 편견 없이 직접 감상하고 싶으신 분은 이 글을 읽지 말 것.

- 탈북자로부터 코치를 받았는지, "-했지비", "-하라우" 글로만 봤던 이런 북한 사투리를 실제로 들을 수 있다.
- 김 일성· 김 정일 사진이 벽에 걸린 집 책상 위에 놓인 성경책... 정말 살떨린다.
- 북한 주민의 실상이라 하면 마약도 빠질 수가 없을 텐데, 역시 그것까지 놓치지 않고 화면에 담았다. 훌륭하다.

1. '카타콤'이 고대 로마 제국 시절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지금 바로 이북 윗동네에 있다. 물론, 나처럼 이미 북한 사정에 대해서 어지간한 거 다 찾아보고 이미 아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 영화에서 크리스천은 한결같이 광신자, 위선자, 나약한 찌질이로만 묘사되고 그나마 좋게 나오는 건 죄다 천주교 쪽뿐인데, 미화는 바라지도 않고 최소한 중립적으로 묘사된 영화가 있어서 보기에 심리적으로 편했다.

2. 영화에서 지하 교회 신도들이 "나 예수쟁이요"라고 자기 명을 재촉하면서 티내는 방법은 물고기나 십자가 형상 같은 게 아니라 오로지 찬송가 흥얼거림과 성구 암송이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가 얼마나 큰일을 냈는지가 영화 중에 나온다.

남조선에서 자유롭게 교회 다니고 계신 분들은, 앞으로 주일 예배 때 기쁜 마음으로 자기 최고의 성량과 음감을 동원해서 예배당이 떠나갈 정도로 씩씩하게 회중 찬송에 동참하시기 바란다. 이건 설교 만만찮게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절차이며, 저쪽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목숨 걸고 하고 있다.

3. (스포일러) 극중에 기적은 없었다.
주인공은 너무 확신에 차서 내 손으로 우리 주민들을 다 탈출시키겠다고 그랬지만.. 때마침 김 정일이 죽으면서 국경의 경계가 매우 강화되고, 뇌물이 안 통하는 냉혈한 군 간부가 부임한다. 주민들의 신뢰와 팀웍도 와해되고 지하교회는 일망타진되어 주민들은 하나씩 잡혀 가고 죽는다. 그리고 주인공도 총살당하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교회 멤버는 어느 꼬마 소녀 한 명뿐이다.

4. 사실, 주인공은 분명 지하 교회에 소속돼 있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믿긴 하지만, 그래도 아내만치 독실하지는 않고 마음 상태가 종종 동요도 하는 일종의 입체적인 인물이다. 주연 배우인 김 인권 씨가 대본을 보고는 “난 저런 주인공을 연기하기엔 너무 신앙이 부족하다”라고 말했다곤 하지만, 주인공이 그렇게까지 초인적인 인물은 아니다.

마약도 하고, 또 모든 게 끝장 난 결말부에서는 “아.. 혹시나 했지만 역시 신은 우리를 돌봐주지 않았다. / 아예 믿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딱 한 번만 시치미 떼고 예수 부인하면 살 수도 있었는데 왜 내 아내는 저런 고지식한 길을 고집했을까?” 같은 인간적인 심정의 말도 한다.
기독교 신앙보다는 그냥 아내의 죽음에 감명을 받아서 마을 사람들을 전부 어떻게든 탈북시켜야겠다는 인도주의적인 신념이 더 부각되어 그려진다.

5. 설정상 주인공의 출신과 배경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혼자 저렇게 트럭을 몰래 얻어타고 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건 현실에서는 그리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평양 교회에 도움을 받으러 원정 가 봤는데, 거기는 알다시피 북한 정권의 하수인인 어용교회일 뿐임. “우리나라에 종교 박해 같은 건 없다” 대외적으로 이 개드립을 치던 아저씨는 잠시 후 주인공에게 분노의 린치를 당해서 피떡이 된다. 저 사람은 주인공과 원래 아는 사이였는데 뭔 일을 겪으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변절한 듯.

6. 교회 동지 중 어떤 남자 하나는 도강하다가 들켜서 군인으로부터 무참한 구타와 성희롱을 당하는데.. 그 뒤 완전히 멘붕하여 미치광이로 변한다. 몰래 숨겨 둔 예수 얼굴 그림에다 눈 모양만 뚫어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집 지붕 위에 올라가서 남들 보는 앞에서 헬렐레 하다가 갑자기 분신 자살한다.
이것은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탈북자의 증언과도 관계 없이 집어넣은 창작이고 허구인 듯하다.

7.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중엔 북한에서 찍혔다는 각종 탈북자 심문· 구타 동영상과 북한 지하 교회 녹취 동영상, 육성 녹음이 흘러나온다. 이것도 지금 내가 목숨이 붙어 있는지 내 목을 손으로 만져보게 될 정도로 소름 끼치고 엄청나게 섬뜩하다.

참고용 동영상이다. 2분 40초대 이후부터..
“아버지여! 교회가 다 무너졌습니다. 살얼음 같은 이 땅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순교가 발생했는지요! ... 복원하시고 역사하시는 주의 보혜사를 보내 주옵소서” (문장 보정)

북한의 지하 교회는 가장 연약하면서도, 북한의 저 미친 체제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악질 반동분자들의 모임이다! (아래 그림 중 하나는 조선 혁명 박물관과 만수대 언덕 근처에 있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김씨 부자 동상이고, 다른 하나는 금수산 기념 궁전 내부의 은은한 배경으로 새겨져 있는 부자 석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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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쓴소리) 끝으로, 내가 이런 자리에서 또 험악한 말은 가능한 한 하고 싶지 않다만...
여기에까지 신천지 갖다붙이는 애들은 도대체 정체가 뭔지 궁금하다. 지난번 대선 시즌 때 새누리당이 신천지하고 커넥션 있다고 괴담 퍼뜨린 놈들하고 혹시 같은 배후 아닌가?

그래, 만에 하나 신천지와 커넥션이 있다고 치자. 그래도 신천지가 과연 종북 빨갱이보다 더 사악하고 해로운 인간들일까 싶다. 신천지는 교회에나 해를 끼치지만 쟤들은 아예 나라 전체를 무너뜨리고 좀먹는 놈들인데. ㅡ,.ㅡ;;

Posted by 사무엘

2014/02/21 08:32 2014/02/2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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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국민의 외국 여행이 완전히 자유화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년쯤 전인 1989년 1월 1일부터다.
그 전에, 특히 1980년대 이전에는 대한민국 국민은 단순 관광 목적으로는 아예 여권을 만들 수 없었다.

대학생의 어학연수나 배낭 여행? 그런 거 없었다.
신혼여행으로 하와이나 몰디브? 푸켓? 그런 거 없었다. 단순히 돈이 없어서 밖으로 못 뜨는 게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믿을 수 없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옛날에는 외교관의 관용 여권 내지 무역 회사 간부의 상용 여권 정도만이 있었다. 그런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 일반인이 합법적으로 외국으로 나가려면 유학이나 해외 취업 같은 정말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만 했다.
그때는 여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완전 엘리트 똘똘이 내지 심지어 정부와 커넥션이 있다는 보증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다가 1983년에는 50세 이상 중장년층만 그 당시 물가로 100~200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예치금을 낸 뒤에야 관광 해외 여행이 허가되었다. 그때는 미국 비자 받기도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테고 물가 대비 비행기 운임도 더욱 비쌌을 테니 해외여행은 가히 세상 살 만치 다 살고 아주 풍족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어르신들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나 국제선 비행기를 탈 수 없던 시절에 대한 항공 007편, 902편, 858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참 억울하긴 했을 것 같다)

그 연령이 1987년경에 40대를 거쳐 30대까지로 낮아진 뒤, 서울 올림픽까지 끝난 1989년부터 장벽이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때는 우리나라가 소련과 수교하고 차우세스쿠 정권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격변기이긴 했다. 아 참, 대한 항공에 이어 아시아나 항공이 취항한 것도 딱 이 시기이고.

그런데 생각해 보자.
하다못해 그 전의 일제 강점기 때에도 조선인들은 '황국 신민' 자격으로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 러시아, 대만까지 별다른 제약 없이 드나들 수 있었으며 일부 용자는 미국도 갔다 왔다.

그와 대조적으로 대한민국은 자유를 표방하면서도 왜 그토록 오랫동안 국민의 해외 여행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을까?
나라에서 자국민의 외국 방문을 너무 엄하게 통제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외국으로 유학 갔다가 귀국 안 하고 거기서 정착해 버린 고학력자 엘리트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1. 냉전으로 인한 불온사상 통제

옛날에는 냉전 때문에 국제 정세가 지금보다 매우 험악했다. 그 시절에 동북아시아에 공산화가 되지 않은 나라는 별로 없었다는 걸 명심하시라. 북한, 중국, 소련 같은 사상적으로 위험한 나라와 방문 금지 국가가 이웃에 즐비했다. 국민들을 호락호락 외국으로 보내 줬다간, 누가 밖에서 공산주의 물 몰래 먹고 와서 뻘짓을 할지 어떻게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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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은 초대 대통령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주로 제시하는 그림이긴 한데..)

그래서 1980년대에는 여권을 만들려면 예치금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시키는 반공 교육도 잔뜩 받아야 했다. 거액의 예치금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안정된 사회 기반이 있으며, 나이도 충분히 먹어서 알 거 다 알고 용공사상에 낚일 우려가 없는 사람에게만 여권 발행을 허락했는데도... 그걸로도 안심이 안 돼서 반공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하긴, 일제 강점기 때에 한반도에 공산주의 사상이 전래되었던 것도 비교적 자유로웠던 국제 왕래 덕분이니 저러는 사정을 이해는 한다.

2. 여행을 빌미로 한 원정출산 내지 병역기피 방지

미국으로 날아가서 자기 배 속의 자식 새끼를 미국 시민으로 만들고 군대에서 빼는 약삭빠른 부유층 집안 얘기를 들으면 누구라도 열받지 않겠는가?

더구나 주민등록 전산 시스템도 없고 정부의 행정력이 지금보다 빈약하던 시절에 부유층 자제가 저런 꼼수를 써서 외국에서 잠적해 버리면... 징병제를 하는 나라에서 병역기피자를 잡아낼 길이 없었다. 부자들에 대한 서민들의 반감과 증오심은 더욱 커질 것이고.
게다가 옛날엔 지금보다 우리나라의 군사 안보가 더욱 위태로웠었다.

3. 과소비 + 외화유출 방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나라 분위기가 어땠던가? 외화 벌이에 목숨 걸고 완전 국산품 애용 + 양담배 추방 이러던 시절이었다. WTO(세계 무역 기구) 가입, 세계화, 개방 같은 풍조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단순 관광 목적 해외 여행은 사치를 넘어 죄악· 금기시되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하다못해 1970년대 박 정희 시절엔 기술적으로는 이미 다 가능해졌는데도 빈부 계층간에 위화감이 조성된다는 이유로 텔레비전조차도 컬러를 도입하지 않고 흑백 시스템을 일부러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외국 여행도 통제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 이유가 있으니, 과거에 있었던 이 나라의 외국 여행 통제에 대해서도 무슨 군사 정권의 산물이네 어쩌네 하면서 부정적인 면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970년대에 20대 나이를 보낸 본인의 부모님께 그 시절의 분위기에 대해 여쭤 봤다. 사실 그 시절엔 대다수 서민들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궁핍했고, 먹고 사느라 바쁘지 해외 여행 따위는 어차피 꿈에도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었다고 한다. 신혼여행도 당연히 강원도나 부산 정도에, 돈 좀 보태면 제주도인 게 당연시되었고 말이다. 그러니, 나라에서 해외 여행을 막든 안 막든 그딴 거 관심 없고, 어차피 그건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니 딱히 제약이나 억압이라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1989년에 봉인이 풀리자마자 중산층 이상 서민들은 휴가철에 앞다퉈 해외로 나갔다. 각종 여행사 산업이 흥왕하기 시작했다. 1988년까지 흑자이던 관광 수지가 곧바로 적자로 떨어졌다. 그리고 해외 관광을 처음 하는 사람들 중에 일부 몰지각한 부류들이 벌이는 '어글리 코리안' 추태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국제 매너라는 개념 자체가 지금까지 없었을 테니.. 쩝~

요즘 경제가 어렵고 서민들 살기가 힘들어 죽겠다고 징징대는 말이 많다. 하지만 휴가철만 되면 공항은 외국 여행 가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성수기에 유명 관광지로 가는 비행기 표는 없어서 못 구한다. 솔직히 우리나라 정도면 서민들이 평균적으로는 정말 잘 살고 세계 상위급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옛날과 비교했을 때는 더욱 말이다.

우리 이전 세대가 마음대로 해외 여행도 못 가고 꾹 참고 일하여 국력을 일으키고 국위를 세계에 선양한 덕분에 다음 세대들은 마음껏 지구촌을 누비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대한민국 여권 정도면, 극소수 최상위 선진국을 제외하면 무비자로도 못 가는 나라가 없지 않던가.

“밤이 피는 김포 공항 비가 내리고 시간은 자꾸 가는데..”라고 바니걸스의 <김포 공항>이라는 가요가 있다. 이건 해외 여행 자유화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1977년에 발표된 곡이다. 그때는 국제선은 정말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 탈 수 있었을 테고 지금보다 국내 도로 인프라가 열악했을 테니, 오히려 국내선의 운영 비중이 더 높지 않았나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4/02/18 08:31 2014/02/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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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엔 <응답하라 199x>라는 레트로 장르의 TV 드라마가 인기가 많았다.
요즘은 사극 드라마라도 하나 방영되면 전국의 역덕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별 희한한 곳에서 고증 오류들을 찾아 올리는 게 관행이다. 이 드라마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2013년 10월 18일 방영분에는 아래와 같은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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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호선의 노선색이 빨간색이고 역명판이 둥글게 만들어져 있던 옛날 시절을 재현한 것까지는 좋다. 솔직히 말하면 본인조차도 그 실물을 본 적은 없다. 본인은 서울 태생이 아니며 서울 지하철을 이용하기 시작한 건 21세기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장면에는 여러 크고 작은 고증 오류가 존재한다.
벽면의 인테리어가 실제 지하철 서울 역과 다르며 섬식 승강장 역을 상대식 승강장으로 만들어 놓은 건 애교라 친다만...
역명판의 글꼴을 2003년에 만들어진 걸로 쓰면 어떡하냐. 무려 코레일체!

20세기 설정에 너무 깔끔한 21세기 서체가 혼자 확 튀어 보인다.
게다가 저건 철도청/코레일의 전속 서체이지 서울 지하철에서 쓰던 서체도 아니다.
완전 어처구니없는 고증 오류가 아닐 수 없다.ㅋㅋㅋㅋㅋ

또한, 글꼴만치 부각되는 건 아니지만 '서울驛'이라는 한자 병기가 들어간 것도 오류다.
서울 지하철이 처음 개통했을 때는 역명판에 한자 병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1999~2000년대가 돼서야 추가되었다. 딱 그 시기에 로마자 표기법 개정분 반영, 한자 병기와 더불어 국철(= 광역전철) + 지하철 노선색 통합까지 몽땅 진행되었으니 수도권 전철의 외형이 크게 바뀌는 시기였다.

그건 그렇고 아무튼...
그럼 1994년 기준으로 코레일체 대신 저기에 무슨 글꼴이 들어가야 맞는지 궁금하다면, 아래의 '진짜' 옛날 사진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엔하위키엔 관련 자료가 이미 다 올라와 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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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풍미해 온 지금의 지하철 전속 서체와 같거나 최소한 비슷한 투의 납작한 헤드라인이 그때에도 쓰였다.
초롱테크에서 1990년대 중반에 정식으로 내놓은 그 디지털 서체는 그걸 좀 더 세련되게 다듬은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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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개인적으로 이 서체를 굉장히 좋아한다. 마치 런던 지하철의 전속 서체가 그야말로 런던 지하철 전체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명물이 되어 있듯, 저 서체는 수도권 전철까지는 아니어도 서울 지하철을 대표하는 서체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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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그걸 함부로 바꾸고, 이미 만들어 놓은 멀쩡한 시설까지 돈 들여서 뜯어고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서울 도시철도 공사 관할역들의 경우, 지상에 있는 검은 배경의 세로형 역 폴사인의 서체가 어느 샌가 야금야금 서울 남산체로 바뀌고 있다.

오히려 지하철이 아니라 광역전철 소속이어서 우측도 아닌 좌측통행으로 건설된 신분당선이 클래식 지하철체를 살려 쓰고 있으니.. 혼란스럽다.

음, 그나저나 응답하라 1994의 오류가 또 생각 났다.
내가 언뜻 본 기억으로는 그 드라마 내부에서 등장하는 TV 뉴스 화면의 자막이...
굴림은 양반이고 아예 나눔고딕인 장면이 있었다!

서 태지가 은퇴하는 소식이 나오는 20세기 복고 드라마에, 2008년 한글날에 무료 배포된 서체가 등장한다는 게 말이 되냐.. ㅋㅋㅋㅋ

요즘은 유튜브만 검색하면 1990년대 옛날 영상 매체의 주요 장면을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다.
자막에다가는 엑스포체나 그래픽체만 넣었어도 지금으로부터 2, 30년 전의 영상 매체의 구리구리한(?) 분위기를 아주 손쉽게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무슨 서체를 쓰든 CG 처리는 똑같이 필요했을 텐데, 이게 무슨 돈이 더 드는 일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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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1. 이렇듯 글꼴 유행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2. 철도와 성경의 융합에 이어 철도와 글꼴의 융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4/01/06 08:13 2014/01/06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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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반공 교육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로 기적적인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저 이북 동네는 오로지 자기 권력 유지만을 위해 다른 공산주의 종주국조차 가지 않은 최악의 길만을 골라서 가면서 고립과 폐쇄, 공멸의 길을 갔다. 그리고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이 품고 있는 대남적화 야욕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꿈도 희망도 없고 심지어 종교조차 없는 주민들이 절망 끝에 상당수가 전국적인 수준으로 마약에까지 빠진 것은 흔히 접하는 기아· 영양실조나 정치범 수용소 같은 것과는 레베루가 다른 문제다. 안 그래도 0으로 수렴해 가던 남북간의 화합· 일치 가능성을 완전한 0으로 확인사살 시키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원래는 마약이 위조지폐, 불법 무기와 더불어 북한의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였는데, 그게 국제간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수출이 불가능해지자 북한 내부에서 나돌기 시작하면서 나라를 헬게이트로 만든 것이다.

정말 국제적으로도 나쁜짓은 가지가지 골라서 하는 양아치들이다. 중국이 탈북자를 강제 북송시키는 것은 인륜적으로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걔들이 마약 유통을 단속하는 건 지극히 정당한 행정 조치이지 않은가.
어지간해서는 정치적인 발언은 자제하려 하나, 소위 친북 정권의 햇볕 정책이라는 건 저런 북한의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도 전혀 해결한 게 없으면서 그저 북한에게 나쁜짓 할 자금만 잔뜩 그것도 심각하게 많은 액수로 준 걸로 보인다. 그러니 내가 도무지 고운 시선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뭐 아무튼.

현실이 엄연히 그런 이상, 우리는 알량한 민족 드립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며 반공 정신이 그때나 지금이나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아무리 밉고 마음에 안 들어도, 김씨 부자가 그들보다 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반공 교육이라 하면 뭐 어떤 게 떠오르는가? 내 경험상 내가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반공 교육은

  • 그저 북한 공산당의 잔인한 만행만 부각시키면서 증오심, 적개심을 키우는 것이 아니요,
  • 경제 이론을 들먹이면서 공산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유치한 숫자놀음이 아니요,
  • 우리나라 정치· 법조계에 간첩· 종부기들이 이미 싹 다 깔려서 나라가 거덜나기 직전이라고 호소하는 것도 아니요,
  • 심지어는 종교적으로 접근해서 신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마귀 적그리스도 666 식으로 선동하는 것도 아니다.

아 물론... 김 정은의 목을 따라고 초특급 인간흉기 북파공작원이라도 양성한다면야 그 정도 요원에겐 정신교육 차원에서 '원쑤'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 세뇌를 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 게 아니고 일반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역시나 우리나라의 수립과 발전 과정에 대한 “감사와 자부심”, 그리고 위의 권위에 대한 “신뢰”가 아닌가 싶다.
한 마디로 말해 남에 대한 디버프가 아니라, 나에 대한 버프가 필요하다! 이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돌려 놓기란 대단히 어렵다.

마치 학교에서 하는 성교육으로 어린 학생에게 성경적인 성 관념을 심어 줄 수 없듯, 저런 사상도.. 형식적이고 유치한 “때려잡자 공산당” 식의 반공 교육만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기 나라에 아무 애착도 없고, 이상한 음모론이나 믿는 사람들에게 백 날 간첩· 종부기 드립을 쳐 봐야 씨알도 먹히겠나?

방향이 잡히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왜 우리나라가 이상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가 이해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치라도 온 게 정말 기적에 가까우며 그 비결이 무엇인지가 이해된다.
큰 방향이 잡히고 나서는 더 세부적인 팩트, 데이터 같은 건 그저 논쟁용으로나 필요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무슨 일베니, 뉴라이트니 친일 나부랭이 같은 특정 계층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상한 딱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선량하고 건전한 애국 사상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버프'의 많은 부분을 우리나라 철도를 통해서 받았다~!!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3/12/22 08:20 2013/12/2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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