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철도 역사 -- 그땐 그랬지

예전에 한 번씩 언급했던 얘기들도 있지만 다들 한데 모아서 나열해 본다.

1. 구한말

(1) 을미사변이 일어나던 당시, 민비를 살해하러 경복궁으로 침투했던 일본 낭인들은 무려 배를 타고 한반도를 빙 돌아서 인천항에 도착한 뒤, 거기서 서울로 갔다. 그때는 아직 경부선 철도라는 게 없었고, 비행기는 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2) 한반도의 첫 철도인 경인선이 표준궤로 부설된 것은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진 것이고 무척 다행이었다. 일제는 미국이 건설하다가 만 이 철도를 도로 협궤로 개궤할까 고민을 했었지만.. 이내 고민을 접고 표준궤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 궤간이 경부선으로도 이어졌다. 그때는 이미 자국 내에서도 협궤는 좀 아닌 것 같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3)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수원-안양 부근에서 원 태우 의사가 던진 돌에 맞아서 다쳤고, 끝내는 최후도 기차역에서 맞이했다. (국내 철도역은 아니지만)

2. 일제강점기

  • 이때는 부산 방면이 상행이고, 경성과 대륙 방면은 하행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게 당연한 선택이다.
  • 지금의 부산 역은 그때는 그냥 초량 역이었다. 진짜 부산 역은 더 남쪽의 바다 코앞에 만들어져 있었으며, 거기서 곧장 연락선으로 갈아타서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 원래 서대문이 경성 역이었는데 3· 1 운동 이후에 없어지고, 남대문이 경성 역이 된 건 유명한 일화이다. 경성-신촌의 과격한 90도 드리프트에는 사연과 내력이 존재할 것이다.
  • 1930년대 이후의 아카츠키 호가 서울-부산을 6시간 반 만에 찍었다. 이게 그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육상 교통수단이었다.
  • 저 시절에 한반도의 유일한 복선 철도는 경부· 경의선이었다. 경인선과 경원선도 복선화 계획이 있긴 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 저 시절에 한반도의 유일한 전기 철도는 금강산선이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는 게 증기 기관차로는 도저히 무리였기 때문이다.
  • 오늘날 경인선은 전철만 복복선으로 다니는 노선이다만.. 저 시절에는 단선에서 모든 열차가 모든 역에 정차하는 형태로 하루 10여 회 남짓 운행됐었다.
  • 일제가 건설 중이던 최후의 철도는 동해중부선이었다. 금강산선의 선로조차도 전쟁 물자로 공출되어 나가던 와중에 저기는 그래도 일제가 대륙 진출을 위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1) 경부선 철도는 1905년 개통 당시에는 지금의 국도 4호선의 선형처럼 금오산 고갯길을 오르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열차를 운행해 보니 증기 기관차의 출력이 너무 딸려서 고작 그 오르막도 제대로 오르지를 못했다.
보조 기관차를 장착하는 별짓을 다 하다가 10여 년 뒤에는 결국 산기슭을 북쪽으로 빙빙 돌면서 구미 시내를 더 가까이 우회하는 형태로 철길이 새로 만들어졌다. 참 공교롭게도 박 정희가 비슷한 시기에 딱 거기 일대에서 태어났다.

(2) 1930년대에는 경성(서울 역)-서소문(충정로)-아현-신촌-서강-대흥-공덕-용산을 삥 도는 10km 남짓한 '경성 순환 노선'이라는 일종의 단거리 도시철도가 다닌 적이 있었다. 노면전차가 아니니 혼동하지 말 것~!!
이 짧은 단선 철도에서 꽤 빡세게 교행을 하면서 양방향 운행을 했다니 일본이 철도 운영 기술은 정말 뛰어났던 것 같다. 딱 이 비슷한 시기에 서울-부산을 증기 기관차로 6시간 반을 찍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철도는 전철이 아니었으며, 디젤 동차 내지 휘발유 동차가 투입됐었다고 한다.
1944년에 일제가 전쟁 때문에 물자 공출 명목으로 선로와 차량을 뜯어가 버리면서 폐지됐다. 하긴, 저 때는 기름이 없어서 목탄가스 자동차가 다닐 정도로 경제 사정이 궁핍했었다.

3. 해방 이후

(1) 경인선은 나름 증기 기관차 → 디젤 동차 → 전철을 모두 경험한 철도이다. 디젤 기관차나 휘발유 동차가 공식 운행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디젤 동차의 경우, 1965~66년 사이에 복선화와 함께 도입되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요런 차량이 경원선에서도(용산-성북) 전철화 이전에 운행됐었다.

(2) 우리나라 철도에서 공식 운행된 마지막 협궤는 잘 알다시피 구 수인선이다.
정규 열차 운행 구간 중에 마지막 통표 폐색 구간은 정선선 정선-아우라지 구간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선선은 비둘기호가 마지막으로 다녔던 곳이기도 하고, 원시적인 폐색 방식이 최후까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한 셈이다.
한편, 원시적인 완목 신호기가 2024년 현재 아직도 현역으로 쓰이는 최후의 장소는 강원도 북평선의 삼화 역이라고 한다. 여기는 여객철도는 아니고 시멘트 공장에서 운영하는 사철/화물철도라고 한다.

(3) 공장이나 발전소로 들어가던 철길 중에 없어진 것들이 많다. 서천화력선(장항선의 지선), 화순선(우리나라 탄광 1호!), 군산 부근에 있던 전설적인 세풍제지선..
오류동 역에서 뻗어서 남쪽 부천과 시흥시의 공장과 군부대로 들어가던 경기화학선도 생각난다.
부산에는 문현선이라고 1972년, 수려선과 비슷한 시기에 폐선된 철도가 있었다. 그 반면 우암선은 지금도 현역이다.

현대제철(당진)· 포스코 같은 제철소로 들어가는 철도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반면, 서빙고 역에서 용산 미군 기지로 들어가는 철도, 호남선의 지선으로서 논산 육군훈련소 부지로 들어가는 철도(연무대 역!)는 아마 지금은 준폐선 상태겠지..??

(4) 철도청 포함 정부에서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시골에서 전적으로 주민들이 요구하고 주민들이 역 건물을 직접 짓기까지 해서 만들어진 역이 딱 두 곳 있다. 경부선 신거(새마을 운동 관련)와 영동선 양원(진짜 노답 첩첩산중 오지여서). 물론 둘 다 지금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역은 아니다.

(5) 교외선은 폐선될 듯 말 듯하면서도 그래도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복선 노반만 확보해 놓고 일단은 단선으로라도 전철화해서 가끔 전동차나 ITX-청춘, 화물열차를 굴리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해방 후에 우리나라에서는 교외선과 경원선 선로를 주축으로 해서 순환 노선 열차를 운행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 시절 당시의 자그마한 경성순환선보다 고리의 크기가 훨씬 더 커졌다.
고속도로는 '서울외곽순환'이 '수도권1순환'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는데, 철도는 '서울교외'가 그냥 '교외'라고 개명됐다는 차이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4/07/19 19:35 2024/07/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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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위대한 일을 했지만 곧 사자에게 물려 죽은 어느 일회용 선지자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하고 교훈거리가 많다. 그건 예전에 "자의와 타의의 경계 문제" 글에서 이미 다뤘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엘리야 이야기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1. 갈멜 산에서의 불 대결

(1)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엘리야의 갈멜 산 대결 말이다.
안 그래도 극심한 가뭄 때문에 물이 귀한 상태였는데.. 엘리야는 기도를 하기 전에 제단에다가 물을 수십 리터 이상 끼얹어서 아예 도랑을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아 물론 화력 조절을 위해서다. 더 구체적으로는 화재, 산불 예방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내 뇌피셜이다.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왕상 18:38)
모든 게 바짝 말라 있던 산에서 저런 화염이 떨어져서 불똥이 잘못 튀면.. 그야말로 대재앙이 벌어지지 않았겠느냐 말이다. =_=;;

저 때 도랑의 물은 불길의 열기 때문에 순식간에 증발하면서 허연 수증기를 왕창 뿜어냈지 싶다.
로켓 발사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발사대의 아래에는 로켓 엔진이 뿜어대는 어마어마한 화염 열기를 받아내고 주변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 물이 잔뜩 담겨 있다. 로켓 발사 직후에 천지를 뒤덮는 허연 연기들은 대부분이 수증기이지, 단순 배기가스가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대륙 정도나 횡단하는 가벼운 미사일은 순식간에 쌩 날아가서 발사대를 벗어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나 인공위성을 싣고, 정지 궤도 진입까지 목표로 연료까지 왕창 많이 실은 거대한 우주 발사체는..??
너무 무겁다. 발사 직후에는 몹시 굼뜨면서 완전히 상승할 때까지 발사대에 오랫동안 대미지를 준다. 마치 무거운 디젤 트럭이 갓 출발할 때는 시꺼먼 매연이 왕창 많이 나오는 것처럼..
그러니 이런 대형 우주 발사체의 발사대는 하단에 냉각 설비를 특별히 빵빵하게 갖춰야 한다.

아이고 엘리야 얘기하다가 우주 발사체 얘기로..
뭐 엘리야는 신의 도움으로 하늘에서 불을 내린 적이 있었고, 심지어 자기도 승천해서 하늘로 올라갔다. 저런 무거운 로켓 엔진의 도움이 없이도!
그러니 엘리야 이야기와 우주 발사체 얘기는 연결고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으잉? ㄲㄲㄲㄲㄲ

(3) 저 때 엘리야를 대적했던 사람이 무려 950명이나 됐다. 18량에 길이가 388m이나 되는 KTX 열차 한 편성에 간신히 다 탈 수 있는 인원이다.;;
바알 선지자 450은 이해되는데 나머지 400명은.. 아세라(한킹)? 작은 숲(흠정역)? 도대체 뭘 숭배한 걸까?

예전에 한번 얘기한 적 있듯이, 둘은 음역이냐 번역이냐의 차이이다. 나무를 깎아서 무슨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장승 목상이라도 만들어서 숭배한 건 아니고.. 저거는 살아 있는 나무가 심긴 숲을 말한다.
근데 숲이라고 하면 무슨 대자연 mother nature 숲의 정령이라도 숭배하나.. 이런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저쪽 진영에서는 그냥 평범한 숲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아세라' 음역을 선택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자체를 지지하지 않는 진영에서는 장승 같은 '목상'을 떠올리고, 킹 진영에서는 살아 있는 나무가 심긴 숲을 떠올린다. 근데 한킹 진영에서는 숲과 우상을 모두 반영하려고 아세라 음역을 했고, 딴 킹 진영에서는 '작은 숲'을 골랐다는 것이다.
참고로 흠정역은 탬버린도 '작은북'이라고 옮겼기 때문에 '작은'이라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다.

(4)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알인지 뭐시긴지, 그 배후에 있는 사탄 마귀도 원래 하늘에서 불을 내릴 능력 자체는 있는 놈이다. 욥 1:16을 보면 생존자가 이건 하나님의 불이라고 착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 갈멜 산의 대결 중에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불 내리는 걸 막고,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사자들의 입을 막은 것처럼 말이다.

(5) 비가 진짜로 내릴 거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 안 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성을 간다, 내 전재산 다 건다" 이런 극단적인 약속은 못 하더라도 최소한 밖에 나갈 때 우산이라도 챙겨 가야 하는 법이다. 그게 그 사람이 믿음이 있다는 최소한의 증거이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린 다음에는 당장 불보다도 더 필요한 비도 실제로 끌어 오는 데 성공했다. 그 반면, 출애굽기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개구리들을 생성하는 훼이크까지는 쳤지만 개구리를 없애는 일은 흉내 내지 못했다.

2. 기근

열왕기상 3장에는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기록돼 있다.
한 집에 같이 사는 여인 2명이 각각 자기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중 한 여인이 자기 아이를 실수로 압사? 질식사 시키고는 남의 아이를 몰래 바꿔치기해 버렸다. 이 때문에 그 아이의 진짜 엄마가 누군지를 갖고 분쟁.

이런 사건은 CCTV나 하다못해 유전자 감식 기술만 있었으면 실제 엄마를 찾아내는 게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저 때는 무려 기원전 900년대였다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은 칼 한 자루만으로 사건을 간단히 해결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0여 년 남짓 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여기서도 여인 2명이 애 때문에 다투고 있고 국왕에게 중재를 호소한다. 여기까지는 솔로몬의 재판과 아주 비슷한데 이 본문에서 여인들이 다투는 이유는 정말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이때도 인류 멸망 급의 기근이 있었다. 그 흉년 기근을 견디다 못해 두 집이 아이를 서로 맞바꿔서 잡아먹을 지경이 됐다. 자기 친자식을 차마 먹을 수는 없어서 말이다. 이거 무슨 더러워진 양말이나 속옷을 갈아입긴 하는데 새것이 아니라 상대방 속옷을 교환한다거나 심지어 겉과 속을 뒤집어서 입는 것 같다.. =_=;;;

그런데 그 와중에 A가 B 집 애를 먹어 놓고는 자기네 애를 B에게 넘겨주지 않고 먹튀를 시전했다는 것이다. ㄷㄷㄷㄷㄷㄷ 이건 왕이 뭐 어찌 중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 >_<

참고로 성경 전체에서 뭔가 물가 예시를 들면서(= 물가 폭등) 극심한 기근을 묘사하는 게 저 열왕기(왕하 6:25), 그리고 계시록 대환란(계 6:6) 이 둘뿐이다.
그 뒤 예레미야애가에도 소말리아나 북한 애들 같은 끔찍한 묘사가 여럿 나온다. 어린애가 밥을 너무 못 먹어서 졸도한다거나(애 2:12), 애엄마가 자녀를 잡아먹거나(애 2:21).. 심지어 제일 인정 많고 여리고 소녀감성 유리멘탈 물멘탈이던 여인일지라도 인륜이고 천륜이고 다 저버리고 오로지 밥에 목숨 거는 짐승처럼 돌변한다는 묘사가 있다(애 4:10)!

요즘은 농업과 상업이 발달한 덕분에 저런 원초적인 기근은 아니어도.. 빚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다 부모가 자녀와 같이 동반 ㅈㅅ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1940년대 태평양 전쟁에서는 천하의 미군도.. 기근은 아니지만 인간의 한계까지 너무 고생하고 쪽발이들의 광기에 학을 떼다 보니 일부가 맛이 가 버리기도 했다. 죽은 일본군 시체를 분해해서 두개골을 전리품으로 갖고 다니고, 찦차나 땅크에다 악세사리처럼 장착하고, 그걸 심지어 여친한테 선물로 주기도 하고.. -_-;;

사람은 조금만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정신줄 놓고 금세 야만인으로 바뀔 수 있는 것 같다. 그게 새삼스러운 일이 절대 아니다.

3. 바빌론 포로기

그 뒤 이스라엘은 갈 데까지 가서 북왕국은 아시리아에게, 남왕국은 바빌론에게 모두 멸망해 버렸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바빌론 포로기 70년은..
이스라엘 민족의 오랜 죄악을 정산한 기간이면서 한편으로 이들 민족을 골수 유일신 민족으로 개조시킨 기간이다. 그리고 안식년을 한 번도 맞이하지 못한 채 혹사당하던 땅을 강제로 휴경시키고 지력을 회복시킨 기간이기도 하다. (대하 36:21)

이때 “쳐맞고 바빌론 갈래, 그냥 바빌론 갈래?”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진실을 선포했던 선지자는 졸지에 매국노 민족반역자 비국민으로 몰려서 고초를 겪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그러나 70년이 지나자 아무 기적이나 이변이 없는데 정말 뜬금없이 귀환령이 딱 떨어진 것도 과거의 출애굽 사건 이상으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70년은 인간의 자연 수명에 필적하는 기간이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나 이스라엘 출애굽 세대의 광야 뺑뺑이 기간의 2배에 가까운 기간이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역사도 인제 얼추 70년을 넘었다.
이 70년은 단기간이 아니니 당장 집 짓고 농사 짓고 정착은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대대로 수백 년 영원무궁토록 눌러앉아 있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기간이다.

이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삶을 사는 크리스천들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당장 이 세상에서 자기 생업을 갖고 돈 벌고 저축도 하면서 열심히 살 필요는 있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인 듯이 미련을 갖고 매몰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들을 언제든지 몽땅 놔두고 버려두고 떠나게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건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특히 구원 받은)이 죽었을 때, 당장은 당연히 슬퍼하고 애도하고 유족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 땅이 꺼질 듯이 멘탈 붕괴되고 실신한다거나, 너무 상심해서 그 뒤로 매일 술에 파묻혀 산다거나 심지어 자기도 같이 따라 죽는다거나.. 그 정도로 극단적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는 것과도 비슷한 자세인 것 같다. 크리스천들에게는 그것보다 더 큰 그림과 보험 보장이 있고 진짜 본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바빌론 포로기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니 꽤 다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대이동을 했던 기원전 500년대부터 400년대 사이.. 하필 이 시기에 아시아에서 불교와 유교가 생기고, 중국 대륙에 온갖 제자백가 사상가 철학자들이 나타나 활동했던 것은 개인적으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4/07/14 08:35 2024/07/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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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1912년 4월)로부터 딱 25년 뒤인 1937년 5월엔.. 그 이름도 유명한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화재· 추락 사고가 났다. 둘 다 출발 후 3일인가 4일 정도 지나서 사고가 났다. 특히 후자는 목적지인 뉴욕까지 완전히 다 와서 착륙 직전이었다.

증기선과 비행선이라니.. 오늘날--적어도 20세기 후반부터--에는 한물 간 느린 물건이 저 시절엔 장거리 대륙 횡단 여행용으로 현역이었다는 게 흥미롭다.
둘 다 엄청 거대하기도 했다. 타이타닉이 길이가 거의 270m인데, 힌덴부르크도 무려 245m에 달했다고 한다.

비행선이 아니라 비행기인 에어버스 A380이나 보잉 747 등은 그냥 70m 남짓이다. 힌덴부르크의 길이의 1/3이 채 되지 않으며, 명함도 내밀 수 없다.
물론 배수량이 50000톤이 넘는 타이타닉과 달리, 힌덴부르크 기체의 최대 이륙 가능 중량은 232톤에 불과했다. 덩치는 저렇게 육중하지만 실제 무게는 오늘날의 대형 비행기보다 가벼웠던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박은 물에만 뜨면 되지만 비행선은 아예 공기 중에서도 떠야 했으니 말이다.

공통점 말고 차이점을 더 살펴보면.. 타이타닉 호는 영국 소속이었던 반면, 힌덴부르크 호는 히 총통 휘하의 나치 독일 소속이었다.
그리고 타이타닉 때는 탑승자가 2200여 명 중 1/3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한 반면, 후자 때는 반대로 탑승자 97명 중1/3 정도만 희생되고 나머지는 살아남았다. 탑승자가 100명이 채 안 됐었고 그냥 옛날 콩코드와 비슷했다;;

2.
일반적인 비행기들은 끊임없이 빠르게 움직여야만 양력을 얻을 수 있는 반면, 비행선이나 헬리콥터나 인공위성(정지궤도)은 공중에 뜬 채로 가만히 있을 수 있다. 떠 있는 방식이 서로 극과 극으로 다르지만 말이다. ㄲㄲㄲㄲㄲ
비행선은 오늘날의 양력 기반 비행기와는 비행 원리가 완전히 다른 관계로, 사고가 나도 비행기보다는 훨씬 덜 위험했다.
일단 화재의 규모부터. 저 거대한 몸뚱아리에다가 헬륨이 아닌 수소를 집어넣었으니 엄청난 불바다 생지옥이 펼쳐졌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비행선 안의 수소는 부력 생성용의 가벼운 몸빵일 뿐, 내연기관 구동용 연료가 아니다! 수소를 초저온에 액화시키거나 압축해서 꽉꽉 구겨넣은 게 아니었다는 걸 생각해 보자. 저 때는 그런 기술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화재라기보다는 가스 폭발에 가깝게 한번 쾅 화염이 치솟은 뒤엔.. 불은 생각보다 금방 꺼지고 없어졌다.

오히려 오늘날 최신 배터리 기술이 접목되어 만들어진 전기차들이 한번 불이 나면 불이 지독하게 안 꺼져서 골칫거리이다. 그 작은 몸체에서 열과 불길이 끝도 없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엄청난 비열을 자랑하는 물조차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불을 끄는 게 아니라 자기가 몽땅 증발해 버린댄다.
그래서 불 끄는 데 물이 수만 리터가 필요하다는 거다. 비행선의 수소 탱크도 위험물이긴 하지만 저 정도로 에너지가 밀집된 위험물은 아니었다.

끝으로.. 힌덴부르크의 경우, 공중도 아니고 다 도착해서 하강과 주기(!!!) 거의 직전까지 가서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했다. 수소가 빠져나가고 부력을 상실할 때도 생각보다 천천히 사뿐히 내려앉았다.
출입문 쪽이 바닥을 향하게 내려앉는 바람에 거기 있던 사람들이 탈출을 못 하고 죽긴 했다. 하지만 이것도 다 화재로 인한 사망이지, 추락 충격으로 인한 사망은 전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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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힌덴부르크가 미국에 다 와서 사뿐히 내려앉는 최후의 모습이 일단 영화 필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러 방송사에서 촬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꽃이 튀고 화재가 발생하는 결정적인 순간엔 하필 아무도 촬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그 모습은 참 안타깝지만 기록이 없다!! 폭발 사고가 나는 모습이 생생히 촬영된 챌린저 우주왕복선과는 상황이 달랐다. (☞ 당시 기록 영상. 2:53~54 사이)

오늘날 전해지는 최후 모습을 보면.. 둥실둥실 기지로 내려가다가 (중간 생략) 갑자기 불길에 휩싸인 채 기우뚱 상태..로 화면이 바뀐다. 눈부신 화염으로 인한 광량차 때문에 하늘 배경은 갑자기 저녁처럼 어두워져 있고 말이다.

1975년에는 나치에 반대하는 유대인 공작원이 힌덴부르크 안에다가 몰래 폭탄을 심었다는 음모론을 넣어서 '힌덴부르크'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긴 했다.
그러나 음모론은 음모론일 뿐.. 도대체 어디서 불이 갑자기 왜 났는지.. 힌덴부르크의 사고 원인은 결국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공식적으로 '불명'으로 처리됐다.

저 당시에 사람이 타는 비행선에 위험한 수소가 잔뜩 들어있었던 이유를 아는 분들은 이미 아실 것이다. 안전한 헬륨은 수소보다 더 비싸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그 당시 미국이 적성국인 나치 독일에다가는 헬륨을 수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찌나 물자가 풍부했는지 독일을 상대로는 헬륨을 안 팔고, 일본을 상대로는 석유를 안 팔아서 추축국들을 똥줄 타게 만들었다. 참 흥미로운 점이다.

여담이지만.. 옛날에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서 안 중근 의사에게 저격 당했을 때 말이다. 이건 중요한 행사이니 러시아에서 전 과정을 영화 필름으로 녹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상을 일본에서 입수해서는 이토가 총 맞는 장면은 완전히 폐기하고 없애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토의 최후 영상도 이미 쓰러져서 실려가는 장면만 녹화됐지, 안 중근이 나오고 저격 당하는 장면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건 마치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최후와 비슷한 구석이 느껴진다.

4.
저렇게 갑자기 불길에 휩싸여 추락하는 힌덴부르크의 모습을 보고 어느 기자가 너무 멘붕해서 "Oh the humanity!!" 무슨 세상 종말 인류 멸망급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Doom Comics에도 나오는 대사인데 그게 이 힌덴부르크 사고에서 유래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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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몸소 이 지옥의 괴물들을 무찔러 주면 뭘하나~ 지구가 이미 방사능에 오염돼 버렸는걸.. 그럼 우리 아이와 아이의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오~ 인류여!!! (oh the humanity!!)"
이런 미친 병맛 중2병 쩌는 개드립 대사가 있다~~~ ㅠㅠㅠㅠㅠㅠㅠ

5.
비행선의 비행 원리와 관련하여 혹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탱크 안에다가 수소나 헬륨 따위를 넣을 게 아니라, 공기를 싹 빼내서 아무 물질도 없는 진공으로 만들어 버리면 어떨까? 진공 비행선은 만들 수만 있다면 수소 비행선보다도 더 가볍고, 폭발 위험도 없지 않겠느냐 말이다.

옛날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진작부터 했었다. 그러나 이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지구의 대기압이라는 게 진공을 호락호락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힌덴부르크 같은 거대한 비행선이 내부가 진공이면.. 대기압에 짓눌려 금세 짜부러져 버린다.
그리고 그 압력을 버틸 정도로 튼튼한 진공 탱크는 두꺼운 금속 재질이 필수이며.. 그러면 너무 무거워져서 어차피 비행선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뭔가 영구기관 같은 딜레마에 빠진다~!

비록 비행선이 오늘날 같은 정교한 엔진이 탑재된 물건은 아니지만, 저걸 만드는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옛날에 마찰이라는 물리 현상을 모르던 시절엔 사람들이 자연이 물체가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처럼 대기압이라는 걸 모르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자연이 진공을 싫어한다, 진공을 만드는 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거라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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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4 08:35 2024/06/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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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스코(포항 제철) 1고로: 1973 ~ 2021 (48년)

1960년대 말, 울나라에서 그 깜냥에 제철소를 만들겠다니 말도 안 된다면서 선진국 금융기관들에서는 울나라에 돈을 빌려 주지 않았다. (보나마나 실패할 것이고, 빌려준 돈은 떼일 것이다) 그래서 울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갓 수교를 맺은 일본으로부터 일제 시대 착취 피해자 배상 명분으로 받았던 보상금과 차관을 슬쩍 전용해서 제철소의 건설에다 투입했다.

그러니 포항 제철 박 태준 초대 회장은 기공식 때 "우린 조상님들 피값으로 제철소를 만든다. 감히 실패한다면 다같이 우향우 해서 쪼기 영일만 바닷물에 뛰어내려서 죽어서 속죄하자" 이렇게 결의했었다.
1973년 6월 9일, 이렇게 만들어진 고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쏟아져 나오자 박 회장과 측근들은 만세 부르고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한국 철강 협회에서는 6월 9일을 '철의 날'이라고 자체적으로 기리는 기념일로 정했다. 고속도로를 만든 다음에 제철소, 제철소도 만든 그 다음에야 자동차 공장과 조선소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엄청난 고온에서 불순물 없이 품질 좋고 단단한 철을 저렴하게 많이 뽑아내는 건 첨단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바로 그 제1고로가 수명이 한참 다해서 지난 2021년 12월 29일에 종풍식을 하고 폐쇄됐다.
참고로 용광로는 마치 냉동실이나 원자로처럼 일부러 끄고 대대적인 정비를 할 때를 제외하면 중간에 가동이 절대로 중단돼서는 안 되는 크리티컬한 물건이다. 뜨거운 쇳물이 24시간 내내 흐르고 있어야지, 그게 아무 준비 없이 식어서 굳어 버리면.. 고로에 엉겨붙어서 장비가 다 망가지기 때문이다.

포스코 측에서는 이 1고로를 보존하고 활용해서 철강 박물관 같은 걸 만들려는가 보다. 마땅히 그리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제1정수장이 지금 수도 박물관으로 바뀐 것과 비슷한 활용이다.

2. 고리 원자력 발전소 원자로 1호기: 1978 ~ 2017 (39년)

포항제철은 만드는 데 3년이 걸렸지만, 울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는 더 어려워서 그런지 6년이나 걸렸다. 1972년부터 박통의 8대 유신 시절 내내 만들어서 1978년 4월 말에야 상업 운전이 시작됐다.

원자력 같은 어려운 전문 분야는 박통의 공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원자력이라든가 항공· 우주 쪽은 일찍이 1950년대 후반, 할배 때부터 외국 유학파 공돌이들을 국비장학생 명목으로 육성했기 때문이다. 그 가난하던 시절에 나랏돈을 근근이 쪼개서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중에 박통 시절에 "부디 귀국해서 우리나라를 위해서 일해 주시오~" 이렇게 읍소할 한국인 엘리트 공돌이들이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 고리 원전의 건설에도 경부 고속도로나 포항제철, 현대차, 삼양 라면 같은 일화가 전해지는 게 더 있는지 궁금하다.

원자로는 가동을 중단한다고 다가 아니다. 완전히 폐쇄하고 해체하는 데만 10수 년씩 걸린다. 더구나 잔여 시설을 박물관으로 개조하는 것도 좀.. 곤란할 것이다. =_=;;
고리 다음으로 월성 원자력 발전소 1호기의 생애는 1983 ~ 2018이었다. 그 시절 뭉 머시기 정권의 탈원전 기조에 희생되어 실제 성능과 안정성 대비 무리해서 일찍 퇴역하게 됐다고 난 알고 있다.

3. 고가도로들

다음으로 교통 인프라 차례다.
대도시는 길거리에 차가 너무 많이 다니다 보니 차선과 중앙선을 긋고, 폭을 넓혀서 차로를 늘리고, 교차로에는 신호등을 설치하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신호 대기가 없는 입체 교차 고가도로를 만드는 게 상징처럼 됐다.
옛날엔 그랬다. 우리나라는 박통 시절에 이걸 집중적으로 많이 만들었다.

시내 도로뿐만 아니라 고속도로도 옛날에 산을 꼬불꼬불 타넘던 걸 터널과 고가를 남발하면서 곧게 뻗은 길로 다시 만들곤 했다. 그러면 예전의 길은 국도나 지방도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노후하고 붕괴 위험이 커지고, 굳이 유지 보수할 명분이 사라진 고가 도로는 나중에 도로 철거되기도 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열거해도 이 정도이다.

  • 아현(1968-2014)
  • 청계(1976-2003)
  • 서울 역(1969-2015)
  • 서대문(1971-2015)

요즘은 옛날보다는 친환경, 보행자 위주 교통 인프라를 추구하고 있기는 하다. 그래도 예전엔 저런 것들이 조국 근대화 흔적이고 상징이었다.

그나저나.. 이웃 일본에서는 1950~60년대에 수도 고속도로라는 걸 온통 고가도로로 도배하면서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설이 온통 낡고 노후화해서 대대적으로 보수를 해야 하는데 그게 돈이 한두 푼 드는 일이 아니어서 그럴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재정이 부족하니 장기적으로 고속도로 톨비 징수를 폐지하려는 계획도 완전히 물 건너갔다. 이런 것도 참 문제이다.;;

4. 서울 지하철 일명 초저항: 1974 ~ 2004 (30년)

끝으로, 이건 건물이나 시설이 아니라 차량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역사상 최초로 운행되었던 지하철 전동차는 아주 의미심장한 역사 유물이다.

전방에 출입문이 있고 단면이 식빵처럼 생긴 바로 그 차량. 운영 회사에 따라 파랑(철도청) 또는 빨강(지하철 공사)으로 나뉘었던 차량이다. 동호인 용어로는 '초저항'(초기 저항)이라고 한다.
얘는 1986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도입되었다. 초기 도입분은 일본 히타치 사에서 생산했지만, 그 뒤로 한국과 일본의 여러 기업이 이 차량의 생산에 개입했다.

얘는 1호선뿐만 아니라 2호선(지하철 공사)과 안산선(철도청)에서도 활약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개조 저항'이라고 정말 극소수 낡은 차량의 일부 객차 짬뽕 편성에서나 이 차량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거 말고 오리지날 식빵 모양을 유지하던 그 차량은 2004년경에 다 퇴역해서 지금은 없다.

코레일과 서울 메트로 모두 이 차량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자기 방식대로 한 량씩 보존해 놓고는 있다. (철도박물관 vs 신정 차량기지)

Posted by 사무엘

2024/06/09 08:35 2024/06/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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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년쯤 전이던 2023년 4~5월 사이에 국내외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크리스천 세 분 정도가 소천하여 주님 품으로 갔다.
공교롭게도 표준역 킹 제임스 성경 2판이 출간되어서 막 시끌시끌하던 시기와 비슷하다.
다들 이 블로그에서 이전 글에 언급한 적이 있었던 분들이긴 하다만.. 그때 이후로 새로 추가된 정보도 있으니 한데 모아서 다시 소개하도록 하겠다.

1. 론 해밀턴 (1950 ~ 2023. 4. 19.)

O Rejoice in the Lord (God never moves without purpose or plan ...)라는 훌륭한 찬송가의 작사 작곡자이다. “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후렴 끝부분이 “나 주 안에 연단 받은 후 정금같이 되리”인 그 곡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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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은 질병 때문에 왼쪽 눈을 잃고 인생 대부분을 궁예처럼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눈을 하나 잃은 때도 1978년.. 저 찬송가는 작곡자가 눈을 잃은 뒤에 인생 간증을 담아서 만든 거라고 한다.

본인은 저 찬송가 가사의 안티테제(?) 격으로 An American Crime이라는 2007년도 영화가 떠오른다. 1965년에 미국 인디애나 주 깡촌에서 벌어졌던 실비아 라이컨스 양 학대치사 사건을 다룬 끔찍한 범죄 영화 말이다. 이것도 이미 이 블로그에서 옛날에 언급했던 바 있다.
영화에서는 피해자인 10대 소녀가 누적된 질병과 상처, 영양실조로 인해 결국 죽고 나서 쓸쓸히.. 이렇게 독백하는 걸로 끝난다.

Reverend Bill used to say: "In every situation, God always has a plan". (살아 생전에 다녔던 동네 교회 목사의 말)
I guess I'm still trying to figure out what that plan was. (그 계획이 뭔지 난 여전히 알쏭달쏭하다)

개인적으로 저 찬송을 부를 때면 저렇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다 포함해서 하나님의 plan이 무엇이고 허락하시는 뜻이 어디까지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곤 한다. 찬송가 영어 가사에 따르면 하나님은 결코 실수를 하지 않으시고 내 인생 행로를 다 아신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세월이 흘러서 그 가사를 쓴 찬송가의 작곡자도 소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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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실비아 라이컨스를 연기한 배우 엘렌 페이지.
현재는 남자로 성전환을 해서 ‘엘리엇 페이지’가 됐다 ㄷㄷㄷㄷㄷ)

2. 오야마 레이지 목사 (1927 ~ 2023. 5. 16.)

이 사람은 자기 나라가 이웃 민족에게 저지른 참혹한 죄악에 대해 알게 되고는 너무 멘붕해서 반세기 이상 평생을 사죄하는 일에 앞장섰던 엄청난 일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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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19년 4월, 제암리 학살 사건에 꽂혔다. 한국과 일본이 이제 막 수교를 맺었던 1965년~67년엔가 한국을 찾아와서 사죄하고.. 십시일반 모금을 해서 제암리 예배당 재건 비용을 대려 했다.
이때는 정작 제암리 학살 유족 후손들조차 더러운 왜놈의 돈 따위 받기 싫다고 차갑게 거절했는데도 말이다.

“바로 옆의 니 형제와도 화해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일본 교회의 예배를 받아 주실 리가 없다~ 일본은 대대적으로 사죄해야 한다 //
일본의 과거 침략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그만 됐다고 하실 때까지 계속 무릎 꿇고 고개 숙이고 있겠습니다” 이랬고..

제일 최근엔 2019년까지도 노구를 이끌고 한국 와서 도게자를 했다. 당연히 삼일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다.
저분은 소천했지만 그의 아들이 계속해서 사죄와 화해 운동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2020년대에 와서는 새에덴교회 소 강석 목사와 접촉 중인가 보다.

무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죄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신앙의 양심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성 특유의 끈질긴 집념과 근성의 산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JR 서일본에서 2005년도 전철 탈선 사고 사과문을 홈페이지에다 현재까지 박제해 놓고 있고, JAL(일본항공)에서 신입사원들한테 1985년도 여객기 추락 사고를 세뇌 주입시키고, 일각에서 20년 전의 의사자 이 수현 씨를 계속 기억하고 추모하기도 하니 말이다.

저 정도로 진심을 다했으니 승무원들이 훈련이 워낙 투철하게 돼서 지난 1월 2일의 여객기 화재 사고 때 수백 명의 승객들이 단 1명도 사망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정 광진 변호사 (1937 ~ 2023. 5. 19.)

딸을 4명 두고 있었는데 3명을 1995년 백화점 붕괴 때문에 한꺼번에 잃은 그야말로 욥의 현실판인 분이었다. 그것도 다들 20대 꽃다운 나이였는데!!
이분은 종로학원의 설립자 정 경진의 동생이고.. 서울대 법대 나와서 사법시험 합격하고 판사로만 10여 년 재직하며 엘리트 코스를 갔다. 그런데 장녀가 초등학교 시절에 질병으로 인해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론 해밀턴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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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치료를 시도하느라 의료비도 많이 들었는데, 완전히 맹인이 된 뒤에는 특수학교로 통학을 시켜야 하니 자가용이 없으면 도저히 안 되는 지경이 됐다. 자녀 4명이나 키우는데 이런 일까지 생기니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음..;;;

그래도 장녀를 미국 유학까지 보내고 정말 잘 키웠는데.. 그 아이들을 한꺼번에 잃었고 시신조차 못 찾았다고 한다. 그나마 하나 남은 딸도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몇 년 뒤 병으로 죽었다.
이 정도면 이분도 아까 저 American Crime의 결말부 만만찮게 “신이란 게 있다면 도대체 지금 머릿속에 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따질 만도 해 보인다.

저분은 사고 보상금에다가 사재를 보태서 '삼윤 장학재단'이라는 걸 만들어서 자기보다 형편이 더 어렵지만 '살아는 있는' 장애인들의 교육과 지원에 애썼다. 그러고 작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하긴, 이렇게 자녀를 잃은 사람이 죽은 자녀 몸값으로 억만금을 받는다 한들.. 그걸로 서울 한강뷰 아파트를 사겠는가, 세계일주 오성급 호텔 원정을 가겠는가? 자녀 이름을 딴 장학 재단 만들거나 복지와 관련된 일에 보상금을 쓰게 된다.

딸들은 살아 생전에 서울에 소재한 영화교회라는 곳을 다녔으며, 이분도 신앙이 있었고 교회 장로였다고 전해진다. 소천했을 때 빈소가 분당 서울대 병원이었고, 새에덴교회에서 무료 법률 상담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니 노후는 분당에서 보냈던 것 같다.
어째 새에덴교회가 오야마 레이지 목사와 정 광진 변호사하고 모두 접점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Posted by 사무엘

2024/05/14 19:35 2024/05/1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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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조국의 "까라면 까"

1. 까라면 까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공밀레 "까라면 까"는 이 둘이지 싶다. -_-;;

(1) "흠~~~ 엔진이랑(정확히는 보일러) 엘리베이터가 큰 이상 없다니 그럼 됐다. 이 정도 대미지는 사흘이면 충분하다. 요크타운을 이 기한 안에 수리를 마치도록. 우린 지금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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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시절, 배수량이 2만 톤을 넘는 큰 항모가 갑판에 이전 전투(산호해 해전) 폭탄을 맞고 다 부서져서 함재기를 적재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전문가들이 보니 이건 제대로 수리하는 데 3개월은 잡아야 할 큰 대미지였는데.. 우리의 제독님이 3주도 아니고 3일로 기간을 일방적으로 후려쳤다.

군에서는 화들짝 놀라서 SCV들을 싹싹 긁어모아서 밤새도록 갈아넣고 특근을 시켰다. 무려 1400명에 달하는 정비공들이 달라붙어서 사흘 만에 간신히 외형을 복원하고, 함재기 적재와 항해가 가능한 상태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걸로 모든 수리가 제대로 끝난 건 물론 아니었다.;;; 그러니 요크타운이 일본놈들과 싸우러 출항할 때, 공구를 바리바리 싣고 수리공들을 같이 태우고 갔다. 항해하면서도 계속 내부를 땜질하고 수리해야 했다.

이 조치 덕분에 나중에 일본군도 놀랐다. "어, 코쟁이들한테 항모가 하나 더 있었나? 요크타운은 우리가 분명 박살을 냈는데..???"
이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뒤, 이번엔 완전히 격침되어 침몰하는 걸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훗날 우리나라 손 원일 제독은 미국을 상대로 군함을 사 올 때 미친 협상력으로 가격을 말도 안 되게 후려쳤었는데... 니미츠는 이렇게 전시에 군함의 수리 일정을 후려쳤다는 차이가 있다.

(2) "우리는 이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내고 말 것입니다. 그게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케네디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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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이렇게 선언을 덜컥 해 버리니 그 당시 NASA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모든 게 소련에게 뒤쳐져 있었고 아무 기술이고 노하우가 없었는데.. 도대체 어쩌라고?

근데 천조국의 돈지랄과 미친 공밀레가 기적을 만들어 냈다.
1968년 말의 아폴로 8호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실험들을 여러 단계 한꺼번에 밀어붙여서 사람이 기어이 달을 한 바퀴 돌고 무사히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뭐 하나 삐끗 잘못했으면 사람이 지구로 못 돌아오고 우주에서 죽어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다가 10호는 달에 내려가는 시늉만 잠깐 하다가 돌아왔다. 이때 승무원이 자기는 달에 뼈를 묻고 말겠다고 객기 일탈을 부렸으면.. 큰일날 수도 있었다. =_=;; 아직 지구로 귀환하는 시스템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거쳐서 1969년 7월, 아폴로 11호는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정말 가까스로 인간을 달에 무사히 착륙시키고 지구로 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젊은 대통령 케네디.
자기가 직접 글을 썼는지, 아니면 참모진이 대필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역설의 진리로 독자들을 불끈 울컥 하도록 글을 잘 쓴 것 같다. 저 연설도 그렇고, "나라로부터 무엇을 받을지 생각하기 전에 자기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지부터 생각해 주십시오" 라는 취임사부터 그랬으니 말이다. =_=;;

2. 우리나라의 사례

(1) 우리나라에서 6 25가 터져서 한국 은행이 삽시간에 북괴한테 넘어가 버렸다. 이 때문에 울나라는 돈을 황급히 다시 만들어서 찍고 뿌려야 했는데.. 그걸 맥아더에게 부탁했고 맥아더는 "일본을 상대로 까라면 까"를 시전했다.

1분 1초가 아까운 위급한 상황이었고 패전국 일본은 이 기회에 무조건 미국한테 잘 보여야 했으니... 조폐국(?? 그 당시 대장성) 인쇄부 근로자들을 무기한 야근 철야 명령과 함께 갈아넣었다. 나중엔 GHQ 병사들이 총 들고 인쇄 공장을 찾아와서 직원들을 호위 겸 감시· 재촉했대나..
새 돈 도안 마스터판은 단 이틀 만에 완성됐으며, 돈 한 트럭 분량을 열흘 만에 찍어서 비행기로 실어 날랐댄다. 이거 통상적으로 최대 6개월 가까이 걸릴 일이었다고 한다. =_=;;

(2) 미국이 인간을 달에 보내려고 용 쓰던 동안 우리나라는 경부 고속도로 닦겠다고 인력과 물자를 갈아넣으며 용쓰고 있었다. 당재 터널 하나 못 뚫어서 사람 10여 명이 죽고 난리였었다. =_=;;; 지금으로서는 믿어지지 않는다.
인부들이 며칠 씻거나 옷을 못 갈아입으면서 일했고, 도로 포장을 하던 롤러 운전사는 작업하다가 시간이 없어서 용변을 그냥 자리에서 지릴 정도였다. =_=;.

3. 태평양 전쟁 시절의 미국 대통령

사실, 태평양 전쟁 시절엔 니미츠 제독 이전에 미국 대통령부터가 노발대발해서 내리갈굼을 제일 먼저 시전했었다.
영화 진주만에서 나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대사. "Do not tell me it cannot be done"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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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인 나도 이렇게 벌떡 일어섰는데 당신들 내 앞에서 안 된다는 소리는 일체 말고 까라면 까시오.
우리 조국의 아들들이 불의의 기습을 당해서 차디찬 바다 속에 수장됐는데 뭐? 폭격기 항속거리가 부족하다고? 무리하다간 항공모함마저 털릴 위험이 있다고?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왜놈들한테 무조건 당장 보복하도록 하시오! =_=;;"

천조국은 이때부터 한 근성 했던 것 같다.
쟤들은 일본에게 천 배 만 배 보복한답시고 처음부터 일본을 통째로 지도에서 지워 버린다거나, 일본 민간인까지 몽땅 잔인하게 학살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쟤들도 우리처럼 똑같이 기습 당하고 허를 찔리고 뒤통수 얻어맞게 해야 된다고.. 여기에 목숨을 걸었다. 단순히 평범하게 전투에서 힘으로 밀어서 패배시키는 것 이상으로 말이다.
그래서 항공모함에서 자그마한 함재기(프로펠러가 중앙에)가 아니라.. 육중한 육군 폭격기를 발진시킨(프로펠러가 양 날개에) 둘리틀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병맛스러운 일본 카미카제 특공대보다야 비교할 수 없이 멋있지 않은가?

4. 통계와 숫자

영화 미드웨이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 레이튼: 일본군의 현재 동태는 이러한데, 첩보에 따르면 아마 요 때쯤에 요기 일대에서 요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어쩌구저쩌구 브리핑)
- 니미츠: 그래서 결론이 뭐지? 그 추측만으로는 범위가 너무 넓고 막연한데? 어렵겠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라. 그래야 작전을 짤 수 있겠다.
- 레이튼: (하... 나더러 어쩌라고~ 자포자기하듯) 일본군은 오는 6월 4일 현지 시각 아침 7시 정각에 북서쪽 325도 방향으로부터 러쉬를 와서 미드웨이로부터 175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관측될 예정입니다.
- 니미츠: 좋아~ 난 내 부하의 말을 믿는다. 참모진은 저 정보를 바탕으로 곧바로 작전을 짜도록 해라.

(나중에 실전 당일에)

- 아무개: 적 항공모함이 미드웨이 북서쪽 320도 방향, 18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관측됐습니다~!
- 니미츠: (시계를 보더니) 오~ 레이튼. 오차가 딱 5분, 5마일, 5도밖에 나지 않았군?
- 레이튼: 충성! 다음번엔 더 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무 상황에서나 저렇게 레이튼 소령 같은 뽀록을 만들 수야 없겠지만.. =_=;;윗사람, 경영을 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거, 숫자, 통계, 데이터를 좋아한다. 저게 뭔가 군대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일 잘하는 요령이고, 취업이나 이직을 준비할 때 좋은 인상을 주는 이력서를 작성하는 요령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된 계기는 그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이었다. (미드웨이는 거의 2019년 말 개봉이었고 저거는 2020년 초였.. 시기가 아주 비슷하다)

  • 미쿡이 지난 반세기 이래 제일 낮은 실업률.
  • 700만 개의 일자리 창출, 지난 3년 동안 경제활동인구 350만 명 증가. 공장이 12000개 증설.
  • 어디 여성 취업률 72%..;;
  • 주식 시장 70% 성장, 국부 창줄 12조 달러.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우리민족끼리 평화, 착한 경제, 사람이 먼저 소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따박따박 무언가가 얼마만큼 생기고 경제가 살아난 걸 입증해 보이는 게.. 일단 말만 들어도 시원시원하다.

물론 숫자와 통계에도 속임수와 말장난과 조작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 저것만 너무 집착하면 또 전시행정 같은 다른 부작용 폐단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숫자와 통계는 두리뭉실하지 않고 일단 객관적이다. 하다못해 그걸 까고 반박하는 거라도 정확하게 공략해서 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고, 최소한의 전문성과 책임감이 담겨 있다는 인상을 준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숫자를 이용할 뿐이다"란 말도 있잖느냐 말이다. (by 마크 트웨인 ㄲㄲㄲ)

우리나라도 근로자건 정치인이건 저런 사고방식을 지향하고 우대했으면 좋겠다.
자매품으로 '협상 잘하는 요령'은.. 영화 패트리어트에 나와 있다고 여겨진다. 민병대 대장인 마틴이 적진에 홀로 찾아가서 구라까지 쳐서 포로들을 무사히 데리고 온 거 말이다.

5. 미국의 인내심의 한계

미국은 복수귀로 돌변하여 일본을 차근차근 쳐발랐다.
그런데 전쟁이 너무 길어지고, 일본은 제 살 깎아먹으면서도 도무지 항복을 안 하면서 악으로 깡으로 미국에 출혈을 강요했다. 이오지마 전투의 트라우마까지 추가되니 미국도 점점 지치고 악이 받쳤다.

병사들은 일본군 skull trophy를 챙기는 지경이 됐고, 수뇌부들은 핵폭탄 등 온갖 극단적인 방법까지 고려하게 됐다.
핵 투하는 정말 인내심이 한계 중의 한계에 도달한 뒤에야 내린 극약 처방이었다. 미국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쪽발이들은 이래도 항복을 안 할 것이다", "소련이라도 끌어들여서 힘을 합쳐 일본을 조져야 된다" 이런 비관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랬는데 리 승만 할배는 미국에게 그러지 말라고.. "니 혼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일본은 항복할 거다. 소련을 끌어들이지 마라. 전후에 한반도엔 미국만이 단독 진출해야 한다." 이렇게 독려했었다. 그게 해방 후 우리나라의 미래를 내다봤던 선견지명이었는데..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그 뒤 우리나라는 식민지 트라우마 때문에 신탁통치조차도 반대하고 남북분단을 선택했으며.. 그게 이제 반영구적으로 굳어져 버렸다.

Posted by 사무엘

2024/04/28 08:35 2024/04/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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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남 도발 내력

이 글에서는 일단 100% 확실한 팩트부터 늘어놓은 뒤, 논란이 있는 분야로 화제를 차차 옮기도록 하겠다.
쟤들은..

  • 대놓고 전면전을 벌인 건 1950년 6· 25 사변이 3년쯤 뒤 휴전으로 끝난 이래로 두 번 다시 엄두를 못 냈다.
  • 여객기 납치 내지 테러는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가 마지막이다. (그 전엔 창랑호, YS-11기 납북)
  • 남침 땅굴이 발견된 건 공식적으로는 1990년 제4땅굴이 마지막이다. (그 전엔 1970년대 중후반에 1~3땅굴)
  • 전투기를 몰고 온 귀순은 1996년 이 철수가 마지막이다. (그 전에는 1983년, 이 웅평)
  • 고전적인 방식의 무장공비 침투는 1996년 강릉이 마지막이다. (그 전엔 1968년 서울 청와대 부근 습격과, 울진-삼척이 아주 유명)
  • 수상함을 이용한 해상 무력 도발은 2009년 대청해전이 마지막이다. (그 전엔 2002년 제2 연평해전이 유명) 이 방식으로 도저히 승산이 없으니 쟤들은 이듬해에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일으켰다.
  • 핵실험은 2017년 제6차가 마지막이다. (2009년에 첫 시도)
  • 그리고 미사일 도발은 지금까지도 간간이 하고 있다.

북괴는 도발하는 방식만을 바꿨을 뿐, 본질적인 전략은 지금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쟤들이 도발하는 방식을 바꾸게 된 건 국군이 기존 알려진 도발 방식을 꾸준히 차단· 저지하고 가성비를 떨어뜨리고 봉쇄해서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다.

2. 관련 영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잠복 (잠입)" (2020)이라는 독립 영화가 있던데..
나름 "태양 아래"(2016)를 능가하는 엄청난 근성의 산물인 것 같다.
주인공이 북한에 단순 외국인 관광객 신분이 아니라 아예 무기 밀매상으로 위장하고 들어가서 북한의 치부를 아주 오랫동안 몰래 촬영해 온 것이다.
20여 년 전에 '기 들릴'이라는 외국인 만화가가 공개했던 평양 체류기 만화와도 비슷한 느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난 처음엔 영화의 배경부터가 이해가 잘 안 됐다.
"엥 KFA? 유럽에 사는 교포 빨갱이가 아니라 유럽 백인들 중에 위수김동 거리는 미친놈이 있다고? 구소련이 있던 쌍팔년도 시절 얘기 아냐?" 출국(2018) 같은 배경이 떠올랐는데.. 전혀 아니구나.
2010년대, 심지어 "태양 아래"와 동시대 얘기이다.

북괴가 대북제재를 어떻게 회피하고 먹고 살려고 몸부림쳐 왔는지, 쟤들이 얼마나 세계 평화에 도움이 안 되는 민폐 짓거리만 일삼고 있는지를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접했던 그 어떤 북한 고발 매체· 컨텐츠와도 겹치지 않는 참신한 내용이더라.

국정원 1급 요원도 못 할 일을 제3국 평범한 소시민이 해내서 북한 체제를 엿먹였다. 이런 영화가 국내에 더 많이 알려지기를..
북괴에서는 이 영화 내용에 대해 당연히 다 조작이라고 반발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실제 북한 미사일 TEL 같은 디테일을 일개 밀덕이나 영화 감독이 뽀샵으로 주작 가능하지는 않다.

이게 '락스퍼 국제영화제'의 앙코르 상영 명목으로 작년 가을에 서울 종로3가에 위치한 CGV피카디리에서 재상영됐다.
나름 상영관에 사람들이 많이 오고, 주연배우 간담회 때 질문도 많았다. 소재가 소재이다 보니 교회 댕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많이 퍼진 듯했다.

본인은 여기서 일하시고 영화 포스터를 제작도 하신 분의 초청으로 뒤풀이 저녁 식사에도 함께할 수 있었다.
참석한 사람들한테 방명록을 돌리고 있던 게 나한테도 왔다.
앞을 보니 누군가가 이름인지 소속인지를 '오이박사'라고 써 놨더라.
오오~~ 오이라고? 난 '호박박사'라고 쓸려고 하다가... 관뒀다. ^^

오이박사는 알고 보니 '오직 이 승만 박 정희 사랑'의 이니셜이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이와 호박 모두 박과 채소인데... 저분은 농사 짓는 분이 아니었군. ^^
사실 난 그냥 호박소년이지, 호박박사까지는 과분하기도 하다.

이제 다음부터는 글이 다루는 소재와 분위기가 좀 달라질 것이다. 앞의 1, 2번 확실한 팩트를 염두에 두고서 판단을 해 보시기 바란다.

3. 극단적인 성향

우리나라의 지 만원 박사, 그리고 미국의 게일 리플링거라는 저술가는 다 1940년대생이다. 지금은 무려 80 부근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다.
지 박사는 자기가 피타고라스 같은 수학 정리인지 알고리즘인지를 6개나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그는 미 해군대학원과 육사에서 잠시 교수로 재직한 적도 있었다.

리플링거는 건축 디자인, 인테리어 분야를 전공했고, 대학교 전공 서적 급의 교과서를 6권이나 집필했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켄트 주립대에서 수 년간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었고, 테뉴어까지 받았었다고 한다. 다들 1980년대 초의 일이다.

그랬는데 지 박사는 자기 전공이 전혀 아니던 우리나라 현대사와 이념 쪽에 꽂혔고, 나중에는 광주 사태 연구를 계기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버렸다. 땅굴이나 부정선거 말고 저쪽에서 가히 독보적이다.
우리나라의 주요 폭동, 군대 의문사 등등의 배후에는 어지간해서는 다 북괴가 있고, 내 말에 동의 안 하면 다들 빨갱이. ㅠㅠㅠ

이 바닥을 제일 음모론스럽게 강경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적이 많이 생긴 건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같은 우파 보수 사람과도 많이 척졌다. 급기야는 말년에 기어이 구치소에 가게 됐다.

다음으로 리플링거는 자기 전공이 전혀 아니던 성경 역본 이슈에 꽂히더니, New Age Bible Versions라는 책을 써서 이 바닥의 유명인사가 됐다.
그냥 "KJV가 가장 우수한 성경 역본이다" 정도가 아니라 "원래 히브리/그리스어 본문을 언어적으로 압도하고 능가하는 성경이다~" 그리고 나머지 현대 역본들은 변개된 정도가 아니라, 용어와 번역 방식 자체부터가 아주 불순한 뉴에이지(??) 음모론 영향을 받았다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학계부터가 다 부패하고 썩었다고 제일 과격하고 수위 쎈 주장을 한다.

이 때문에 기독교계에 반대자와 적이 많이 생겼으며, 심지어 일부 온건(?) 킹 옹호자조차도 "저건 선 넘었지" 이럴 정도이다. 그렇잖아도 스스로 공개하는 프로필이나 개인사에 불분명한 것, 주작 과장 의심 사항도 있어서 더욱 논란이 되고 있다.

세상에 지 만원 박사와 게일 리플링거를 비교하다니 내 스스로 생각해도 진짜 뜬금없군.. -_-;; 활동한 분야 자체 what은 완전 극과 극이고 접점이 1도 없는 사람이다만, how에서는 일말의 동질감이 있는 것 같다. 똑똑한 것 같긴 한데 중년에 생뚱맞은 분야에서 큰 어그로와 논란을 일으키고 강경 파이터가 됐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도 정치 쪽이든 종교 쪽이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장 자체의 사실 여부, 논리적 타당성만 보면서 판단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비판 대상에 대해서 제대로 정확히 알기는 하고서 비판하자. 그리고 인신공격을 하지는 말자."
이 주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 나도 5 18 항쟁을 무슨 6 25 참전이나 심지어 4 19보다도 더 위대한 듯이 미화하고 무슨 벼슬처럼 나대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한다. 폭동이라고 비하까지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광주 사태라고 계속 부르고 싶다.
  • 6 25는 북괴의 일방과실이고, 광주 사태는 민군경 간의 쌍방과실이다. (민간인 사격이나 반대로 군경 희생자 발생 같은) 희생자를 추모하고 화해니 과거 청산이니 하려면 양측을 다 추모해야 한다.

  •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부 지방 해안까지 북괴 간첩이나 무장공비가 침투하긴 했었다. 저 때 광주에도 소수의 정체불명의 양측 이간질 선동꾼 공작원이 있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무슨 600명씩은 아니며, 시민군이 빨갱이였던 건 더욱 아니다. 600명 침투는 6 25 대한해협 해전 때 있었을 뿐이다. (얼굴 매칭 광수놀이는 제발 좀 ㅠㅠㅠ)

  • 허나,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 아저씨를 무슨 징역 2년씩이나 매기는 것도 매우 잘못됐다. 광주 왜곡을 처벌하려면 이 승만 대통령 왜곡도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
  • "광화문에서 김 일성 만세"를 허용하려면 "금남로에서 전 땅크 만세"도 똑같이 허용해라. 김 일성 회고록을 출간하려거든 전 두환 회고록도 출간 허용해라.

4. 다른 우파 인사

(1) 조 갑제: 한때 엄청난 극우 수꼴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과격 극단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지금 종북은 친일보다 더 나쁘다,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는 넘들은 대한민국 땅에서 사라져야 된다" 정도... 이 당연한 말이 뭐 어때서?? 더구나 젊은 시절, 이 사람이 서슬 퍼런 군사정권 때 기자로서 남긴 행적은 그 누가 보기에도 훌륭하고 대단했으니 말이다.

이 사람은 "내가 그때 현장에 직접 취재를 가 봐서 아는데.. 광주에 북한군 따윈 없었다" 이것 때문에 지 박사와 견원지간이 됐다. 다만, 겨우 저런 주장은 "니가 취재한 것만이 전부라고 어떻게 장담하는데?"라는 카운터에 취약해 보인다.

(2) 서 정갑: 옛날에 노 무현 대통령 장례식 때 분향소에서 깽판 쳤던 바로 그 사람이다. 군복 차림에 전형적인 아스팔트 까스통 수꼴 우파스러운=_=;;; 인상이 짙은 분이다만.. 이 사람도 광주 북한군 개입은 단호히 부인한다. 그 시절에 광주 취재는 아니지만.. 계엄사에서 실제로 근무를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개미 새끼 하나 틈타지 못할 정도로 우리 기관에서 샅샅이 다 뒤졌슴다. 그런데 북괴군 600여 명 중에 한 놈도 안 걸렸다..?? 그건 말이 안 돼요."

그는 5 18뿐만 아니라 무슨 이상한 땅굴 음모론도 단호히 일축하고, 530 GP가 단순 아군 팀킬 총기 난사가 아니라 북괴와의 교전 중 전사라는 음모론 역시 부인한다. 이것들이 아예 대한민국 우파 진영을 좀먹는 3대 거짓말이라고까지 선을 긋는다.
근데 이건 최대한 의심하면서 삐딱하게 보면.. 단순히 군의 명예 위신을 위해서 저렇게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과거에 타이타닉 호 생존 승무원이.. 배는 절대로 두 동강 나지 않았다고 입을 맞춰 증언했던 것처럼 말이다.

(3) 이 진삼: 이 사람은 예편 후의 이빨 까는 행적은 좀 똥군기 똥별스러워서 인상이 별로 안 좋지만.. 그래도 1960년대 말에 전방에서 북괴 무장공비와 여러 차례 교전하면서 적을 때려잡고 도발 시도를 저지한 적이 있다. 20여 년 뒤 지휘관 시절엔 제4 땅굴을 찾아내기도 했고.. 그러니 왕년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데 기여한 게 제법 있는 사람이다. 그건 인정해 주자.

이 사람은 "내가 땅굴에 대해서는 좀 아는데... 무슨 내륙 지방까지 땅굴은 개뿔.. 북괴 입장에서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다. 만에 하나 그게 가능하다 쳐도, 그렇게 긴 땅굴을 하나 파느니 그냥 전방에 짧은 땅굴 수십 개를 파고 만다" 이런 식으로 제법 디테일한 논리를 동원해서 땅굴 음모론을 부정한다.

지 만원, 서 정갑 모두 최종 계급이 대령인 반면, 이 진삼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포스타 대장=_=;; 출신이다. 군에서의 레벨이 까마득히 다르다. (뭐,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대령만으로도 대기업 부장 급의 아득한 고위직이지만.)
하긴, 지 박사는 5 18과 530 GP에 대해서는 좀 무리수스러운 북괴군 개입을 주장하긴 해도, 땅굴 음모론은 주장하지 않는 걸로 난 알고 있다. 글쎄, 전자는 천동설이지만 후자는 아예 지구 평평이 아닌가 우려되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4/14 08:35 2024/04/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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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20세기에 외세로부터 침략 받아서 주권을 빼앗긴 적 없고, 공산화된 적 없고, 쿠데타나 비민주 군사 독재를 겪은 적 없고, 헌정 체제가 널뛰기 하듯 바뀐 적도 없고.. 대공황 때문에 고생했던 것만 빼면 정치적으로는 큰 트러블 없이 살기가 참 좋았을 것 같다. 전쟁 참전은 다 남의 나라를 지켜 주러 했지, 자기 나라를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천하의 미국도 완벽한 유토피아는 아니니 사법 흑역사가 몇 건 있었다. 그것도 공교롭게도 굉장히 비슷한 시기에 말이다.

1. Joe Arridy (1915-1939) -- 가스실

이 사람은 15세 소녀를 강간하고 손도끼로 찍어 살해한 혐의를 받고 처형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는 20대 청년이지만 지능이 5세 어린이 수준밖에 안 되는 정신지체아였다는 것이다. 저런 끔찍한 흉악 범죄를 저지를 능력 따위는 1도 없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사건 현장 곁에 얼쩡대다가 붙잡혀 가서는.. 실적 올리고 싶은 형사와 검사에게서 집요하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다 보니, 뜻도 모르는 조서에다 지문 찍고 “그 아이 내가 죽였어요”라고 거짓 자백을 하게 됐다.

이 사람은 교도관한테는 “우와~ 근육빵빵 아저씨다~!” 이러면서 교도소에서도 기차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작은 하마 이야기’에도 나오는 그 유서깊은 장난감 말이다!!
이런 사람이 “범행을 언제 어떻게 저질렀습니까” 같은 질문에 일관성 있게 제대로 대답도 할 리가 만무했다.

지금이야 미국에서 사형이 교수형, 전기의자, 아니면 약물 주사인데.. 저 때는 미국도 무슨 나치 독일처럼 가스실을 운용했는가 보다. 그는 gas chamber이라는 게 무슨 장소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해맑은 표정으로 사형장으로 들어갈 때도 기차 장난감을 갖고 들어갔다. 교도관들이 그건 허용해 줬는가 보다.

천하의 미국에서 그때 경찰과 검사, 판사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은 살인이고 사형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이어서 무슨 행복한 왕자도 아니고 행복한 사형수 the happiest prisoner on death row라는 역설적인 별명까지 붙었다. 모파상의 소설 ‘행복한 사형수’하고는 관계 없다.

이 사건은 정작 진범이 딴 지역에서 잡혀서 그놈도 처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통 통신이 열악해서 소식 업데이트가 더뎠는지, 한번 내린 사법 결정을 호락호락 번복할 수 없다는 똥고집이 작용했는지, 아니면 세뇌당한 저 사람도 자기가 진범인 듯 거짓 자백을 너무 진지하게(ㅠㅠ) 해 버렸는지.. 그래도 저 사람도 같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2011년에야 주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사면을 받았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4년 12월에 부산에서 어느 발달장애 1급 청년이 아주 잠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2살짜리 아기를 창 밖으로 휙 던져서 바닥으로 떨어뜨려 죽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가해자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죽음이 뭔지 모르고 경찰이나 검사의 질문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사리분별과 판별이라고는 단 1도 못 하는 말 그대로 저능아였다.

자기가 저지른 짓에 대한 자각이 없고 형사 책임을 질 능력도 전무했으니.. 피해자 집안의 입장에서는 정말 분통 터지겠지만 가해자는 아무 처벌 없이 무죄 방면되고 그 대신 치료 감호 판정만 내려졌다.
이랬는데 미국에서 저 때 저런 분위기 속에서 같은 사건이 터졌으면 가해자가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2. George Stinney Jr. (1929-1944) -- 전기의자

이건 앞의 1번보다도 더 뼈아픈 흑역사인 것 같다. 집 주변에서 7세· 11세 소녀 2명이 끔찍하게 살해 당했는데, 마침 곁에 있던 '만만한 흑인 소년'이 졸지에 용의자로 몰려 체포되고 범인으로 몰렸다. 이 소년은 오히려 경찰에게 그 당시의 주변 상황에 대해 증언을 하고 수색 작업을 도와 주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피해자 가족, 그리고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과 검사, 배심원들은 모조리 백인이었다. 이들이 모두 짜고 입을 모아서 “보나마나 추잡한 검둥이놈이 사고 쳤구만”으로 몰고 갔다. 재판은 거의 나치 인민재판 급으로 속전속결로 진행됐고, 피고인 측은 제대로 변호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죽였어요”라는 자백을 얻기 위해.. 비록 대놓고 물· 전기 고문이나 몽둥이 찜질까지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굶겨 놓고는 “배고프지? 자백하면 밥 줄게~!” 정도는 시전했다고 한다. 중학생짜리 애한테.

결국 이 소년은 유죄 판결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겨우 15세의 나이로 전기의자형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체격이 너무 작아서 엉덩이 부분에다가 두꺼운 성경책을 몇 권 올려놓고 애를 앉혔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 게다가 이 친구도 학교에서 싸움박질이 잦긴 했지만 명목상 교회 댕기는 크리스천이었다고 한다.

그는 근현대 이래로 미국 역사상 최연소 사형수라는 타이틀까지 차지하게 됐다. 이 기록은 앞으로 깨질 일이 없을 것이다. 머리가 좋아서 저 나이에 대학교를 입학한 것도 아니고, 저 나이에 사형을 당했다니.. 그것도 누명을 쓰고..

이 사건은 어째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져서 2014년에야 무죄 판결이 났다. 1번은 '사면'이라고 하고 2번은 '재심 결과 무죄'.. 법적 처분이 왜 서로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사건은 정황상 의심되는 진범(백인..!)이 있긴 하지만, 이놈은 빽이 있어서 법의 심판을 피해 갔다. 심지어 그놈의 부모가 배심원으로 들어가서 애꿎은 흑인을 범인으로 조작해서 사형장으로 보내는 추악한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미국은 프랑스나 독일처럼 유대인을 괴롭히는 건 없었지만 저기 특유의 인종 차별이 있었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근절된 건 아니라 여겨진다. 특히 남부 텍사스 같은 레드넥 동네 말이다.. -_-;;
요즘도 경찰들이 과격한 범죄 현장에서 흑인을 더 줘 패거나 심지어 권총 쏴서 사살해서 과잉 진압이라고 욕 먹기는 하는데.. 이 사건은 법적으로 사람을 누명 씌우고 사형장으로 보내 버린 거니 사건의 막장성이 차원이 다르다고 하겠다.

심지어 이렇게 흑인에게 누명 씌우기가 그 뒤에도 몇 건 더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행히 사형까지 가지는 않고 교도소에서 몇 년 썩다가 누명이 풀렸을 뿐..

  • 이 소년은 우리나라 여수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일제는 패망한다” 이런 낙서를 한 게 들통나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주 재년 열사와 동갑이다. 역시 1929-1944.

  • 이렇게 인종 차별이 쩔었으니 미국에서는 n**** 이 단어가 f*** 급의 금기어 트라우마로 남았고, 치킨과 수박이라는 맛있는 음식조차 금기시되어버린 것 같다.
  • 그래도 그 미국에서도 흑인 남자(1870)가 백인 여자(1920)보다는 훨씬 더 먼저 투표권이 주어졌다고 한다. 전근대 시절엔 세상 어디에나 가부장적 이념이 강했으니 일면 이해는 된다.

  • 근데 평등은 평등이지만, 반대로 멀쩡한 기존 '인어공주'나 '미녀와 야수'에다가 쓸데없이 유색인종 주인공 집어넣는 PC 리메이크짓은 좀 안 했으면 좋겠다. 같은 유색인종이 보기에도 안 좋다. -_-;;

3. Edward Donald Slovik (1920-1945) -- 총살

이 사람은 군인이었고, 위의 두 사례 같은 막장 사법 살인을 당한 정도는 아니다. 결과만 따지자면 군생활에 적응을 못 하고 전시 탈영을 저질렀고, 이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 안 좋은 타이밍에 굉장히 운 나쁘게 일벌백계 시범 케이스로 걸려서 사형 당했기 때문에 좀 억울하다면 억울한 사례가 됐다.

그는 성장 배경이 불우했는지 좀 질이 안 좋게 컸고, 10대 소년 시절부터 각종 기계에 자동차까지.. 온갖 절도죄로 잡범 전과가 주렁주렁했다.
저 사람은 소년원인지 교도소인지를 실컷 드나들다가 1942년에야 겨우 석방됐다. 출소 후엔 직장 잡고 연애에 성공해서 결혼도 하고, 이제 좀 마음 고쳐먹고 바르게 살려고 했다. 근데 결혼 생활 1년을 못 채운 타이밍 때 군 징집 영장이 날아왔다.

평시에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저 사람 정도로 전과가 화려한 사람은 군대에서도 필요 없다고 안 받아 줬다. (무공 전과가 아니라 범죄 전과..ㄲㄲㄲㄲ)
그러나 저 때는 2차 세계 대전 시국이었다. 병력이 많이 필요하니, 캐 싸이코패스 흉악범만 아니면 어지간히 범죄 이력이 있는 사람도 데려갈 정도로 징집 기준이 아주 낮아졌다.

그는 성장 배경의 특성상 단체 생활 잘 하고 군대에 적합한 체질이 아니었다. 각종 훈련이나 작전에서 수시로 낙오를 빙자해 전선을 이탈해 버리면서 전우들을 엿먹이고 고문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심지어는 6주 동안이나 짱박혀 잠적하기도 했다고.. 그는 “나 이런 데서는 도저히 못 견디겠으니 앞으로 또 탈영하겠다”라고 상관에게 항명을 예고하는 편지를 보내서 결국 찍혔다.

그의 상관들은 이런 편지는 그냥 없는 걸로 하고, 얘를 전투 스트레스가 덜한 부대로 전출이라도 시켜 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어차피 이판사판인데 군사 재판을 받아서 교도소에서 몇 년 썩는 걸로 군생활을 통째로 퉁치고 싶어했다.
사실, 미국 역사상 사형 선고를 받은 탈영병은 탈영 후에 살인· 강간 같은 흉악 범죄까지 저지른 사람뿐이었다. 이렇게 단순 탈영이나 병역 거부 자체만으로 사형이 선고된 적은 옛날 남북 전쟁 이래로 전무했다. 그러니 이 사람도 그걸 노렸는데..

그때는 2차 세계 대전 시국이었다는 것이 역시 문제였다. 천조국도 지긋지긋한 전쟁에 어지간히 이골이 나 있었고, 군복무 부적격자의 인권을 챙기는 것보다는.. 다른 멀쩡한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군기 빠진 꾀병 의심 탈영을 일벌백계 하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땐 한 집안 출신의 5형제가 몽땅 한 군함에서 성실히 근무하다가 다섯 명이 한 날 한 시에 몽땅 전사해 버린... '설리번 5형제'(1942) 같은 극단적인 사례도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자.

이 때문에 이 '에디 슬로빅'의 죄질은 정말 불행히도 예상보다 훨씬 더 나쁘게 평가되었으며, 그는 미국의 역사상 탈영죄 단 하나만으로 사형이 선고된 유일한 사례가 되어 버렸다. 그의 선택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결과를 야기한 것이다.
그의 아내와 친척들이 대통령에게 수차례 감형 탄원서를 냈지만 전시이다 보니 별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요청이 받아들여지지도 못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군 탈영병이 21000여 명이나 발생했는데 순수 탈영만으로 사형 선고는 49건, 그게 실제로 집행된 건 이 사람 혼자뿐이었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4/04/02 08:35 2024/04/0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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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의 발전사

인류가 물 위를 건너기 위해 선박이라는 물건을 만들어서 띄운 지는 수천 년이 됐다. 심지어 그걸로 바다 위에서 전쟁도 치렀다.
하지만 그걸로 사람만 잔뜩 실어 나르는 장거리 전문 여객선이라는 게 등장한 건 역사가 의외로 짧다.

전근대 시절에는 평민들의 경제력과 교통 수요가 그런 걸 받쳐 주지 못했다. 거기에다 그 당시엔 선박 자체가 너무 위험하고 느리고 정시성을 장담 못 하는 물건이었다.
배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는 것의 포스와 리스크가 요즘으로 치면 과장 보태서 무려 우주로 나가는 것에 맞먹었다. 보험 회사의 이름이 'oo 화재, xx 생명'뿐만 아니라 'xx 해상'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낭만적인 여행이 절대 아니고 모험 탐험이었다.

그 시절에 사람을 잔뜩 태운 배가 있다면 그건 지하에 노꾼이 잔뜩 탄 갤리선이거나, 아니면 아예 노예 무역선.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_-;; 사람을 살인적인 중노동을 시키거나, 아니면 용변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꼼짝달짝 묶어서 짐짝처럼 쌓아 놓거나.. 둘 중 하나였다.
(단, 노예이면서 동시에 노꾼이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호흡 맞춰서 엉킴 없이 노 젓는 건 극심한 중노동일 뿐만 아니라 전문성도 필요했다. 일자무식에다 더 잃을 것도 없는 노예에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ㄲㄲㄲ 질 낮은 죄수를 호락호락 총 쥐어 주고 군인으로 부려먹지는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50미터 남짓한 길이에 엔진이 아니라 돛-_-이 달렸고 배수량도 200톤이 채 안 될 대항해시대 나무 범선 갖고 호화로운 장거리 여객선 영업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근데 그 시절에는 그 가냘프고 열악한 배에 남자들 수십 명이 낑겨 앉아서 신대륙을 개척하러 갔다는 거다. 이 정도면 교도소 복역이랑 선원 생활을 퉁쳐도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지금 우리가 잠수함에 대해서 생각하는 위험함, 갑갑함, 열악함 등등이 그때는 일반 수상 범선에 적용됐고 수위가 더 높았다.

선박을 굴려서 돈을 벌려면 그 비좁은 공간에 화물을 왕창 실어야 했다. 그러니 선원들 복지는 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근대 시절에 선박은 화물 수송이 main이었고, 여객은 거기에 꼽사리로 낑겨 타는 정도였다.

자, 그러면 성경의 요나서도 어떤 배경인지가 완벽하게 이해가 될 것이다. 요나 역시 여느 상선 화물선에 낑겨 탔기 때문에, 편안한 좌석이나 선실이 아니라 어디 한구석에 짱박혀서 잠들었다. 그리고 배가 위험에 처하자 선원들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무거운 화물들을 바다에 버린 것이다. 그건 승객 개인이 들고 다니던 더플빽이나 캐리어 같은 덩치의 짐이 아니었다.

참고로, 옛날 목선 범선에 대해 생각해 볼 거리를 좀 더 나열하자면 이렇다.

(1) 노아의 방주도 오늘날 기준에서는 그렇게까지 막 큰 배는 아니다. 길이 150미터 남짓한 목선이니 대항해시대 범선보다 좀 큰 정도이고, 20세기에 등장한 여객선이나 군함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 크기와 부피이면 배수량은 여러 자료로 추정하건대 1만 톤 안팎쯤 됐을 거라고 여겨진다.
참고로, 현대의 조선공학 관점에서는 목선은 길이가 100미터, 배수량 2000톤 정도가 현실적인 한계로 여겨진댄다. 목재는 금속처럼 단단하지 못하고, 용접으로 이어붙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2) 노아, 요나 이상으로 성경에서 바다 항해를 제일 진지하게 다루는 곳은 사도행전 27장이지 싶다. 바울이 죄수 호송선을 타고 이스라엘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가는 장면 말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뱃길로 약 2400km 거리라고 한다.
이건 부담 없는 단거리는 절대 아니고 2000여 년 전의 항해 기술로는 더욱 만만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태평양이나 대서양도 아니고 기껏해야 지중해 횡단일 뿐인데 그걸 한 번에 못 가서 중간 정박을 하고 겨울을 나네 마네 논쟁이 오갔던 것이다.
게다가 배에 사람이 276명이나(행 27:37) 탔었다. 선내에 공간이 절대로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고 승선 환경은 몹시 열악했을 것이다.

(2) 500여 년 전,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는 대장인 마젤란을 비롯해 250명에 달하는 선원을 잃고 배 세 척 중에 한 척만 겨우 귀환하는 개막장 거지꼴 패잔병 상태로 종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 한 척에 실린 외국 향신료만으로도 그들은 항해 비용을 다 뽑고 남는 흑자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 향신료 가격이 지금의 마약 가격 정도라도 됐나 싶다. =_=;; 후추가 아니라 필로폰이었는지.. -_-;; 하긴, 그때는 화약 가격도 그렇게도 비쌌다니까 말이다.

암튼, 이런 열악한 상황은 증기 기관이 발명되면서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얘 덕분에 선박이 바람을 거스르는 정시 항해가 가능해지고, 해풍이 불지 않는 육지 한가운데 운하도 주행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배가 더 크고 무거워질 수 있게 됐다.
배의 재질이 나무 대신 철로 바뀌었고, 동력 전달 매체도 처음에 외륜이 쓰이다가 스크루 프로펠러로 바뀌었다. 엔진조차도 왕복이던 게 터빈으로..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좀 뭔가 호텔 같은 배가 등장할 수 있게 됐다. (해상 호텔이라, 옛날 범선 시절에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치.. ㄲㄲㄲㄲ) 민간이 아닌 군함은 훨씬 더 강하고 사정거리 긴 함포를 장착해서 적을 압도할 수 있게 됐다.
1906년경에 영국에서 만든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 그리고 드레드노트 전함이 민간과 군함 각 분야에서 최첨단 과학기술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대서양· 태평양을 건너는 장거리 대형 여객선이라는 게 운항을 시작하고, 군에서는 순양함을 넘어 전함이라는 등급이 등장했다. 19세기 말에 서 재필이니 이 승만이니 하는 우리나라 선각자들도 저런 배를 타고 미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비행기 1시간이 선박 1일에 맞먹으니, 편도로 2주 이상 걸렸을 듯.)
그 이름도 유명한 타이타닉이 이 바닥의 정점을 찍었다. 인류가 이런 배를 구경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1차 세계 대전을 겪은 뒤 세계 열강들은 군함만 만들다가 등골 빠지고 공멸하지 말고, 군함을 일정 배수량 이상은 다같이 만들지 말자고 군축 조약을 맺었을 정도였다. 그때는 전함을 더 만들지 말자는 게 지금으로 치면 핵무기를 다같이 만들지 말자고 약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개념이었다.

그 뒤 선박은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 디젤 기관으로 바뀌면서 리즈 시절을 찍었지만, 비행기가 발명되면서 추세가 또 바뀌었다. 비행기는 터빈을 기반으로 한 제트 엔진이 도입되면서 세계의 하늘을 석권하게 됐다.
오늘날 배가 거대한 건 항공모함이나 초대형 유조선/화물선 정도이고, 인명을 태우는 건 말 그대로 해상 호텔인 관광 크루즈선만이 남았다. 100년 전과 같은 ocean liner(대륙 횡단 정기 여객선)라는 개념은 없어졌다.

거함거포주의는 항공모함 때문에 논파됐고, 지금은 미사일 때문에 더욱 확인사살됐다.
요즘은 해군보다도 해병대에서 상륙작전을 벌일 때 정도에나.. 뒤에서 펑펑 쏴 주는 전함의 함포를 그리워하는 지경이 됐다. 포탄이 그래도 비행기나 미사일보다는 화력 대비 훨씬 더 저렴하기도 하지.

20세기 초-중에는 여객선과 비행선이 대륙을 횡단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부터는 여객기와 미사일이 대륙을 횡단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_=;;
우리나라 기준으로 여객선으로는 부산에서 일본, 인천에서 중국, 동해안에서 러시아 정도만 갈 수 있다. 즉, 아주 단거리 한정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3/17 08:35 2024/03/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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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뒷북이긴 하다만.. 본인은 요 근래에 <건국전쟁>을 보면서 국뽕을 한 사발 잘~~ 흡입하고 왔다.
제목이 뭔가 낯익어 보이던데? 10여 년 전 옛날에 정반대 성향의 진영에서 만들었던 좌빨 다큐 영화는 <백년전쟁>이었구나. 그걸 의식해서 저 영화가 제목을 저렇게 지은 게 아닐까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울나라는 딴 게 국뽕이 아니라 리 승만 보유국이었다는 거, 초대 국부가 할배 같은 사람이었다는 게 너무 과분한 국뽕이었다.
SNS에서는 애국우파 네티즌들이 자기도 이 영화를 봤다면서 티켓 인증샷을 막 올리더라만.. 난 그런 릴레이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화 내용 요약 내지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던 관련 생각을 올리련다. ㄲㄲㄲㄲㄲ

1. 패턴

  • 조선은 말기에 일본까지 끌어들여서 동학을 진압하고 나서는 그 일본한테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다.
  •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은 소련까지 끌어들여서 일본을 항복시켰다. 그러나 이게 훗날 한반도 남북 분단의 화근이 됐다.

미국은 저 끈질긴 쪽발이 일본놈한테 학을 떼 버려서 진짜 될 대로 돼라~ 핵도 터뜨리고 "소련까지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제3자가 보기에 그 심정이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리 할배는 아무리 그래도 소련은 끌어들이지 말고 한반도에 미국이 단독 진출해야 한다고 그렇게도 당부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이것 때문에 미국도 두고두고 고생하게 됐다.
하긴, 미국은 일본이 쳐들어올 거라고 경고했던 할배의 선견지명도 업신여겼다가 된통 당했었다. ㄲㄲㄲㄲ

  • 박 정희는 기업을 육성하려고 민간 사채를 싸그리 정리하려다 보니(1972년 8 3 사채 동결 조치) 시간이 부족해서 유신 독재를 감행했다.
  • 그것처럼 리 승만은 재일 교포 북송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일본으로 공작원도 보내고(1959년).. 이걸 결판 내려는 욕심이 이듬해에 무리해서까지 4선 출마를 강행하는 데 영향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오~~ 둘이 요렇게 연결된다니 신기하다.

2. 할배의 업적

  • 혁명적이었던 농촌 토지 개혁 -- 단군의 후손들을 단순히 나라 있는 백성으로만 만든 게 아니라, 자기 땅도 있는 백성으로 만들었다.
  • 그 가난하고 못살던 시절에도 교육에 투자하고 쓸데없이 민주주의 정신을 너무 많이 함양시킴
  • 반공 포로 석방과 한미 상호 방위 조약. 50여 년 전에 조선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걸 겪었으니.. 울나라는 이젠 두 번 다시 미국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외교 역사상 최고의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을 맺어 버렸다.

3. 누명

(1) 한강 다리 폭파 관련 거짓 날조 누명은 이제는 최초로 거짓말이 유포된 배후를 추적해서 학술적으로 다 까발려야 하지 않나 싶다.
건국전쟁 영화를 싫어하고 내용을 반박한 사람들 글을 검색해 보니 맹 사사오입 개헌이나 조 봉암, 최 능진.. 이런 사람들 사형 당한 것만 거론할 뿐, 이 런승만 날조의 반박에 대해 또 재반박을 하지는 않더라.

(2) 말단의 군경 간부라면 모를까, 우리나라 초대 내각은 친일파 반민족주의자 출신이 개뿔 절대 아니었다. 이 시영 가문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이고, 애산 이 인??
이 사람은 독립운동가 변호하고 한글학회에 재산 엄청 기부했던 애국자 법조인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이런 식의 친일파 단죄는 비현실적이고 무리라고 생각해서 반민특위의 해체에도 앞장섰었다!

(3) 리 승만 할배는 4 19 시국을 뒤늦게 파악하고는 "내가 맞아야 했을 총을 우리 젊은 친구들이 맞았구나" 그러면서 4 19 시위 부상자들을 위문하러 갔다.
선뜻 하야하겠다고 그러자 오히려 시위대며 시민들도 도로 같이 울었고 "리 박사님, 만수무강하십시오" 그랬다. 세상에 참 이상한 바보같은 독재자다.
오히려 그 시절 언론 기레기들이 할배와 시민 사이를 마구 이간질했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의 짤막한 여행을 무슨 죄 짓고 도피 망명이라도 가는 양 부풀려서 조작 보도를 했다.

4. 어처구니없는 현실

(1) 김 구는 단순히 남북 분단을 반대하고 남북 간 오해를 풀러 북한을 방문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쏘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조만간 남조선에 쳐들어갈 거고, 그러면 쟤들은 꼼짝없이 함락당할 것이다" 그는 이런 소리까지 뻔히 들어서 아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남한에 돌아와서는 "북한은 절대 쳐들어오지 않습니다~ 미군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런 거짓말을 했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김 구는 우리가 아는 그 애국자 김 구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을 10만원 지폐 도안에 넣겠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주미 한국 대사관에는 할배가 아니라 서 재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딴 나라들은 간디 등 정상적인 자기 국부들 동상)

(3) 하와이에서 리 승만의 날 기념일을 제정하려고 했는데 본토 조선인들이 하도 분노하고 반발· 반대하는 바람에 시도가 무산됐다고.. 허 참 기가 막힌 일이 많았다.

건국전쟁은 정말 국뽕 충만하면서 울컥하면서 너무 훌륭하고 아름다운 다큐 영화였다.
영화가 다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오고 상영관 불이 켜지자..  누가 시작했는지 절로 박수가 터져나왔다. 기립이었는지 착석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만.. 곧장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이 거의 5초~10초는 박수를 치고는 나갔다.
할배가 1953년인가 54년인가 미국 상원 연설을 해서 열혈 기립박수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박수 정도가 아니라 중간 중간에 몇 번이나 “옳소!” “아멘!” 이럴 뻔했다. 말은 차마 못 하고 그냥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걸로 격한 공감을 대신 표현했다.

왜, "세상을 바꿔 놓은 책" 킹 제임스 성경 400주년 다큐와도 오버랩됐다.
그 위대한 성경의 번역을 지시한 왕은 정작 유해라고 해야 하나 정말 보잘것없이 어디 쳐박혀 있던데..
우리나라 국부도 저렇게 존재감 없는 취급을 받고 있구나..

이 조선? 한국이라는 나라는 중국처럼 쪽수 많은 대국도 아니고, 일본처럼 일찌감치 근대화 잘해서 열강 반열에 든 나라도 아니었다.
얼마든지 식민지가 되든 공산화가 되든 이상할 게 없었고,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같은 국력의 나라로 남는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 듣보잡 한구석에 미국을 너무 잘 알고 미국의 이념을 적극 따르는 지도자를 둔 ‘깨어 있는 나라’가 있으니 “미국 니들도 여기를 다시는 무시하거나 저버리지 마라~~ 니들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나라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될 거다”이걸 각인시켜 놓은 주역이 바로 그 할배다. 이 능력을 겨우 킬구 아재랑 비교하냐? 허 참~~~

이런 영화 보는 것엔 돈 아깝지 않다. 다들 보고 그냥 파일 소장해라. 누구든지 꼭 봐라 두 번 봐라.
그야말로 할배가 잘한 것을 논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고 불편해하는 거.. 진짜 정신병이다.
외국 나가서 교양과 상식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할배를 비하하고 부정하면 그냥 남한이라는 나라 품격 자체가 그냥 통째로 폄하되고 깎일 것이다.

크리스천인 가수 나얼이 이 영화 포스터를 개인 SNS에 올렸는데 그걸 갖고도 미친놈들이 욕하고 악플 달고 난리를 쳤었다. 기도 안 차서 원..
하지만 그 대신, 나얼이 누군지 모르고 기독교인도 아니던 사람들 중에서도 "나얼? 저 사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애국자군. 음반을 구매해야겠다" 이러는 사람이 생겼다. =_=;;; 팩트만 늘어놓은 다큐가 도대체 왜 정치색 논쟁이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건국전쟁 같은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할 게 아니라 공중파 방송국에서 매년 국경일에 틀어 줘야 한다.
실제로 옛날에(2015~2016년) KBS TV에서는 주 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일사각오' 다큐를 무려 전국구로 방영한 뒤에 이듬해에 증보판(?) 영화까지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죽으면 죽으리라' 안 이숙 여사 얘기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난 그때 솔직히 놀랐다. 어떻게 KBS에서 CBS 같은 성향의 다큐를 저렇게 방영할 수 있었지?

아무리 일제에 의해 투옥과 고문을 당했다지만, 주 목사는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항일 독립운동이 아니라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에 더 가깝다.
우리나라가 국교가 있는 나라가 아니거늘, 광고 없는 국· 공영방송 급이라면 솔직히 주 목사 얘기보다는 리 박사 할배 얘기를 더 우선적으로 방영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일사각오와 비슷한 시기에(2016) 울산 MBC에서는 '마지막 간수'라는 안 중근 다큐를 독자적으로 만들어서 방영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방송사에서 마음만 먹으면 할배에 대한 진실을 전하는 애국 다큐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텐데. 방송사 관계자들의 마음과 의지가 아쉽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21 08:35 2024/02/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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