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이야 x86이라는 컴퓨터 아키텍처가 세계를 완전히 평정해 버려서 PC부터 슈퍼컴까지.. 그야말로 모바일만 빼면 다 쓰이는 것 같다. 그리고 인텔은 그 x86이란 걸 최초로 개발한 본가로 너무나 유명하다.

x86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하위 호환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아주 점진적으로 진화해 온 아키텍처이다.
1970년대에 8086과 8088이라는 16비트 CPU에서 시작됐는데, 심지어 더 옛날에 8비트 시절의 8080도 x86의 전신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8008이나 4004까지 가면 너무 멀어지는 것 같지만...;;;

이 x86은 1980년대 중반 80386 버전에서 32비트로 확장됐고, 그로부터 20여 년 뒤엔 64비트로도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x86-64는 인텔이 아니라 AMD에서 처음으로 내놓았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이런 주류 라인인 x86 말고 인텔에서 만든 CPU라니, 뭔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 중에서 Windows, Office, Visual Studio가 아닌 계열을 탐방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이런 것들이 있었다. 다들 32비트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1. iAPX 432 (1981)

인텔에서 개발한 최초의 32비트 CPU는 80386이 아니라 바로 이놈이었다.
16비트 x86이 최대한 저가 보급형에 현실 타협 컨셉으로 개발됐으니, 그 다음 32비트 CPU는 큰 포부를 갖고 실험적인 기능을 몽땅 때려박아 보자~~ 이런 목표를 갖고 개발됐던 것 같다.

x86만 해도 명령어가 아주 촘촘하고 내부 구조가 복잡한 CISC 방식이었는데, 얘는 그 이념이 더욱 극대화됐다. 운영체제나 특정 객체지향 언어 vm에서 소프트웨어적으로 담당할 일을 CPU가 회로 차원에서, 길다란 인스트럭션 하나 직통으로 최대한 지원하는 것을 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그 시절에 특수 분야에서 현역으로 쓰이고 있던 Ada 언어와 아주 찰떡궁합을 이루려 했다. 오오~ 그러면 이 CPU를 타겟으로 하는 Ada 컴파일러는 intrinsic 명령이나 구문이 많이 제공됐겠다.

글쎄, 객체지향 언어라면 RTTI 기능이나 가상 함수/메시지 테이블을 뒤지는 기능이 CPU빨로 직통 지원된다면 그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그 시절 기술로 CPU 안에 지나치게 많은 기능을 집어넣는 건 부작용을 야기했다.
CPU 내부가 너무 복잡해졌고 제품의 생산 비용도 치솟았다. 그런 주제에 얘는 동시대의 "16비트" 프로세서인 80286보다도 속도가 훨씬 느려졌다.

그나마 이 CPU의 장점을 살릴 수 있게 코드를 잘 생성하는 컴파일러를 개발하는 것도 영 지지부진했다. 단점은 한 트럭인데 장점도 애매하고.. 총체적인 난국이었으며 결국 이 아키텍처는 실패로 끝났다.

이런 홍역을 치렀으니, 인텔에서 1985년 말에 80386은 기존 8086의 구조를 최대한 유지하고 호환성도 살리면서, 정말 바꿔야 하는 부분만 16비트에서 32비트로 확장하는 컨셉으로 만들어졌다.
32에서 64비트로 넘어갈 때 Itanium은 망하고(너무 파격적) AMD64가 살아남았었다(좀 보수적). 그런데 이와 같은 유형의 삽질이.. 옛날에 32비트로 넘어갈 때도 인텔 내부에서 이미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2. i960 (1988)

iAPX 432의 실패 이후에 인텔에서 오랜만에 새로 만든 비x86 CPU는 바로 얘였다. 정확히는.. 처음엔 지멘스와 공동 개발을 시작했지만 지멘스 쪽이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중도 이탈하면서 최종 결과물이 인텔 것이 되었다.

i960은 CISC가 아닌 RISC 방식으로 설계됐으며, 애초에 범용 컴퓨터가 아니라 산업용 임베디드 MCU 용도로 만들어졌다. 에, 그러니까 절대적인 성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특정 분야 연산만 겁나 잘한다거나, 열악한 환경에서도 퍼지지 않고 끈질기게 잘 돌아가는 것 말이다.
얘는 처음에 군용으로 납품되었으며 초창기 F-22 전투기의 내부에도 들어갔다고 한다. 미군 전투기..?? 거기야말로 오랫동안 Ada 언어를 사용했던 곳이 아닌가? 반면교사 선배격인 iAPX 432가 관심을 가졌던 그 언어 말이다.

i960은 인텔이 만들었던 비x86 CPU 중에서는 가장 성공했다. 범용 컴퓨터가 아닌 덕분에 특정 분야에서 고정된 고인물 수요가 보장되어서 수십 년 동안 생산되고 쓰였다.
얘는 일본 SEGA에서 개발한 버추어 파이터 2의 플랫폼인 MODEL2 기판에 채택되어 쓰이기도 했다.

"게임 크리에이터 열전"이라는 20년 전의 일본 만화에서 '스즈키 유 - 버추어 파이터' 편을 보면, 그 시절 기계로 현란한 3D 그래픽 애니메이션을 구현하기 위해 전투기에 들어가는 CPU까지 구해서 기판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1편 때는 조종사 훈련용 전투기 시뮬레이터에 들어가는 CPU와 GPU를 도입했었다. (MODEL1, NEC V60) 그러다가 MODEL2는 전투기 실물에 들어가는 인텔 i960 CPU가 쓰인 것이다. 그런 차이가 있다~!

3. i860 (1989)

얘는 960과 동시기에 같은 회사의 다른 팀에서 나란히 개발되고 있던 또 다른 32비트 CPU였다. 960보다 숫자가 작지만 960보다 나중에 출시됐다.
얘는 산술· 과학 계산을 빡세게 하는 워크스테이션이나 슈퍼컴을 겨냥하여 FPU를 64비트 스케일로 내장했다. 그리고 명령의 병렬 수행을 여러 모로 의식해서 명령 체계를 RISC를 넘어 VLIW 형태로 설계했다. 사실상 32비트판 Itanium이고 Itanium의 정신적 선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i860은 컴파일러가 특정 분야의 프로그램 한정으로 이 CPU의 특성을 잘 살리는 방향으로 코드를 잘 번역하고 잘 생성해 줘야만 제 성능을 낼 수 있었으며..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대부분의 상황에서 얘의 성능은 기존 CPU나 동급 경쟁사의 CPU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얘는 얼마 못 가고 실패했다.

인텔은 그래도 이 설계 이념을 버리지 못했다. x86이 당장 현실적으로 상업적으로는 잘나가고 있지만 얘는 레거시 때문에 구조적으로 너무 지저분하긴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중에 64비트로 갈아탈 때는 iAPX 432와 i860의 이념을 계승하면서 단점을 보완은 했다고 생각하면서 Itanium을 개발했다. 하지만 Itanium은 실패한 선배의 전철을 거의 그대로 밟으면서 역시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래도 인텔 i960과 i860의 개발진은 훗날 x86 동네에서 Pentium Pro CPU를 개발했다. 멀티미디어 지원에 필요한 병렬화 고속 연산 명령인 MMX를 만들어서 그 이념을 x86에다가 실현해 냈다.

사실은 마소의 Windows NT라는 것도 맨 처음, 최초로 타겟으로 설정한 아키텍처는 놀랍게도 이 i860이었다고 한다. 마소가 전통적으로 인텔 진영과 사이가 좋기도 했으니.. 하지만 본가이던 i860이 망조가 들고, NT는 처음부터 이식성도 있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곧 x86, MIPS 등의 아키텍처로 포팅된 것이다.

나중에 Windows 2000은 NT 버전 5.0 급이었는데, 얘도 64비트용은 Itanium이 정식 출시되기를 기다리면서 대부분의 기간을 DEC Alpha 환경 내지 Itanium 껍데기 시뮬레이터에서 개발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인텔 CPU가 통수를 치는 바람에 Win 2000은 사실상 x86 전용으로, WinNT의 역사상 지원 CPU가 가장 적은 버전으로 개발돼 버렸다.

글쎄, 인텔이 구닥다리 X86을 버리려고 1990년대부터 삽질했었다면, 마소는 NT 커널을 버리려고 2000년대 중후반부터 이것저것 실험하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시도 역시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 과거에 Windows 3.0은 real, standard, enhanced 이렇게 x86 하에서 실행 모드가 다양했다.
  • 그 반면, Windows NT 3~4는 x86, MIPS, PowerPC 등 지원하는 CPU가 다양했다.
  • Windows 2000은 x86 전용이 돼 버렸지만 그 32비트 한계 하에서 PAE나 /3GB 같은 옵션을 제공하면서 메모리를 최대한 많이 뽑아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들어갔다.
  • Windows의 역사상 Itanium을 제대로 지원했던 버전은 XP가 유일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6/07/10 08:35 2026/07/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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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 관순: 나는 공산당.. 아니, 왜놈이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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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관순 열사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중에는..
"유 관순은 일제 강점기 당대에는 인지도가 전혀 없는 듣보잡이었다가 해방 이후에야 뒤늦게 발굴되고 부각됐다. 3· 1 시위에서 천안 나와바리의 행동대장이었을 뿐이지, 딴 지역에도 유 관순 정도의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친일 변절 지식인들에 의해 불순한 의도로 쟤만 혼자 '너무' 신격화된 경향이 있다" 이런 부류의 평가절하가 있다.

저게 유 관순 말고도 타 지역의 여러 열사들을 같이 골고루 기억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라면 얼마든지 고려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고 유 관순이 진짜로 타 지역 시위 주동자 대비 단 1도, 추호도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이 역시 필터링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때 시위 가담자로서 체포되고 투옥돼서 몇 달, 또는 길어야 1~2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사람이야 많다. 물론 그 행적만으로도 훗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겨우 여고생 신분으로 그렇게 고분고분 옥살이를 하지 않고, 서슬 퍼런 법정에서 "너희 왜놈들은 우리를 재판할 자격이 없다!"고 당당히 외쳤고, 심지어 재판정에서 의자를 던져서 가중 처벌을 받고, 형무소 안에서도 만세 시위를 추진하고.. 자기 신념에 따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진짜 악바리 같이 개기다가 기어이 구타로 장살당한 사람은 정말 드문 케이스이지 않은가? 저 증언 자체가 몽땅 조작 구라가 아니라면 말이다.

당연히 그때 투옥됐던 사람들이 전부 다 유 관순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그때 잠깐 수모를 꾹 참고 옥살이 하고 나와서는.. 공부 더 하고 교육자, 사업가 등으로 크게 성장해서 일본을 실력으로 이기는 게 민족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더 이익"일 수도 있다. 하다못해 유 관순도 옥사하지 않고 살아 나왔으면 커서 무엇이 됐겠느냐 말이다.

그러나 저렇게.. 뭔가 이 승복 어린이나 신라의 관창 같은 기개를 보이면서 짧고 굵게 간 예외적인 사람도 의미가 있으며, 후세가 특별히 기억하고 기릴 가치는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만 생각해도 유 관순은 여러 3·1 운동 참가자 추진자 중의 하나 수준은 넘어서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2. 박 열 + 가네코 후미코: 독특한 아나키스트 계열 국제결혼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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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택시 2 마지막 금사회 에피소드를 보고 나서 영화 '박 열'을 봤더니..
무지개 운수가 의뢰를 받아서 타임머신 타고 100년 전의 일본으로 잠입하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주연 배우가 동일인물.. ㄲㄲㄲㄲㄲ)

아~ 저 시절이니까 도기가 택시가 아니라 인력거를 몰고 있는 거고,
이름이 doggy이니까 "나는 개XX로소이다"라는 시도 썼고..
가네코 후미코는 좀 똘끼어린 여성인 게 고은이하고 인상이 아주 비슷한 거 같고..;;

그렇잖아도 모범택시 2의 금사회 에피소드는 도기가 일부러 교도소로 들어가는 내용인데,
박 열도 대부분의 장면은 주인공이 감방에 갇힌 상태로 진행된다. 감방에서도 미친척 하고 똘끼 부리는 거 캐릭터가 비슷하다.
재판 1심 때 조선 예복 코스프레 한 거는.. 진짜 영락없이 부캐 분장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더라. ㅋㅋㅋ

일제 시대를 다룬 한국 영화가 과연 관동대지진을 다룰 일이 얼마나 되겠나? 이건 애초에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이 아닌데. 더구나 일본 판 십볼렛 색출전(삿 12:6)을 영화로 보다니.. 나름 흥미진진한 소재를 고른 것 같다.
박 열은 1920년대부터 해방될 때까지.. 20대부터 40대까지 인생 황금기를 일본 감옥에서 무기수로 보냈지만 그래도 어째 살아서 나오기는 한 게 참 특이한 것 같다. (참고로, 조선총독부 본진에다 폭탄을 던졌던 김 익상 의사는 박 열과 비슷한 나이와 비슷한 시기대에 투옥됐지만, 일제 말기 때 결국 의문사했었다)

박 열 저 사람한테 가네코 후미코는.. 진짜 김 학준 선생에게 최 용신 같은 존재로 기억에 각인됐지 싶다(소설 상록수의 모티브를 제공한 실제 인물).
지진만 없었으면 저 두 사람 인생이 실제 역사와는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어찌 됐을지 참 궁금하다. 공교롭게도 박 열과 김 학준 모두 몰년은 1974년이었다.

* 가네코 후미코는 변호사 후세 다쓰지와 더불어, 대한민국 건국 훈장이 추서돼 있는 단 둘뿐인 일본인이다.;;;
사실, '소다 가이치'라고 조선에 정말 엄청난 온정을 베푼 일본인이 더 있긴 한데.. 이 사람은 법이나 정치, 군사 쪽으로 항일을 한 게 없어서 그런지 훈장까지는 못 받았다. 그 대신 이분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묻혀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다.

3. 김 마리아 외: 엘리트 신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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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택시 시리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다들 기억 하시려나 모르겠다. 시즌 1의 첫 에피소드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피해자는 바로 '강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마리아'는 마치 '에스더'처럼 성경의 인물을 그대로 딴 옛날 스타일 여자 이름이다. 가톨릭에서는 이런 이름을 세례명으로만 쓰겠지만, 개신교 쪽은 그런 개념이 없으니 본명을 그대로 저렇게 짓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됐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엔 지식인 신여성 중에 '마리아' 동명이인이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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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 마리아(1891-1944)는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인지도가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기까지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시절에 일본과 미국에서 대학원 급 공부를 한 고학력자였던 데다, 항일 운동 쪽으로도 도쿄 2· 8 독립 선언에다 3· 1 운동까지 할 거 다 했기 때문이다.
그때 붙잡혀 끌려가서 옥고를 치르고, 심문 과정에서 왜경으로부터 잔인한 고문을 당해서 몸이 비가역적으로 상했으며, 이 때문에 지병· 후유증을 평생 달고 살았다. 독신으로 살다가 1944년에 병으로 순국한 것도.. 그 지병이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저분은 행적과 공로가 워낙 탁월하니 1962년에 진작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유 관순 열사도 요절하지 않았으면 아마 김 마리아와 가장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단.. 저분은 전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신학은 주전공과 별개로 따로 공부한 것 같은데 말이다. 설마 이공계는 아니고 문과 무언가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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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다음으로, 참 공교롭게도.. 저분과 띠동갑 후배인 동명이인 김 마리아(1903-1970)도 있다.
사진을 검색해 보면 1891년생 원조 김 마리아는 직모 단발머리의 젊은 얼굴인 반면, 1903년생 김 마리아는 더 나이든 파마머리 중년 모습이 주로 나온다.

이분은 이 범석 장군의 부인이었고 광복군 여군+공작원 커리어를 거쳤다. 사격의 귀재였다고 하니 한국의 애니 오클리 같은 느낌도 드는데..ㄷㄷㄷ 여러 모로 원조 김 마리아와는 활동 분야가 많이 달랐다. 업적의 발굴과 조명이 원조 김 마리아보다 훨씬 늦었기 때문에 1990년에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3) 참고로, 더 늦게 태어난 박 마리아(1906-1960)도 미국 대학원 출신의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이 사람은 세월이 흐른 덕분인지, 유 관순 같은 이화학당도 아니고 이화 전문학교를 나온지라, '이대 나온 여자'의 원조급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제 말기 때 황국신민 내선일체 이딴 짓을 해서 친일 부역자라는 오점이 찍혔고, 해방 후에는 부통령 후보 이 기붕의 아내로서 권력욕을 뿜뿜하며 제대로 흑화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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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가 어땠는지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다. (이 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일가족 동반 ㅈㅅ).. 그러니 박 마리아는 김 마리아와 달리 전혀 영예롭지 못한 악녀로 역사에 남았다. 이름값을 제대로 못 했다.

이 '마리아'들과 비슷한 연배와 비슷한 커리어인 임 영신(1899-1977), 김 활란(1899-1970)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재미있지만..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니 생략하겠다.

4. 윤 형숙: 일제와 공산당 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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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아니라 호남 지방에서는 ‘윤 형숙’(1900-1950)이라는 여성 열사가 있었다. 이분은 3· 1 운동 당시에 광주에서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칼을 맞아 왼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다.
이분은 체포된 뒤에도 제대로 치료를 못 받고 열악한 곳에서 구금· 투옥돼 있다가 병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도 잃고 말았다.

아니, 군인이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해서 팔과 눈을 하나씩 잃은 건 영국의 넬슨 제독이나, 독일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처럼 사례가 있는데.. 윤 열사의 사례는 정말 믿기 힘들다. 사진에 찍힌 모습 중에는 대놓고 저런 신체 장애가 묘사된 게 딱히 없는 것 같다만..
허나,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 행적이 가히 전설적이었는지, 저분은 '윤 혈녀'라는 별명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저분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항일뿐만 아니라 반공에도 진심이었다. 해방 후, 6· 25 사변 중엔 손 양원 목사와 동일한 날짜에 동일한 장소에서 북괴 공산군에 의해 나란히 순교하여 주님 곁으로 가게 됐다.
1950년 9월 28일,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했던 날, 적들은 반동 민간인들을 모두 처형하고서 퇴각했기 때문이다. 호남 지방은 영남보다 위도가 더 낮았는데도, 영남과 달리 지역이 몽땅 다 북괴에게 점령 당했었다.;;;

윤 열사는 아까 3번의 마리아 정도의 고학력 유학파는 아니었지만, 살아 생전에 지방에서 지역 교회를 묵묵히 섬기면서 전도사와 교사로 헌신했었다. 세상에 이런 '여수의 유 관순' 같은 분도 있었다. ㅠㅠㅠ

Posted by 사무엘

2026/06/18 08:35 2026/06/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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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5월쯤에 일제 시대 독립운동에 대해서 글을 하나 썼었는데 공교롭게도 올해도 비슷한 시기에 글감이 떠올랐다.
예전에 한번씩 했던 말도 있지만 다른 형태로 다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 ㄲㄲㄲ

1919년에 벌어졌던 3· 1 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를 기리는 삼일절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중요한 기념일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3· 1 운동은 결과만 냉정하게 따져 보면 당일이 그렇게까지 “기쁜 날”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나라 밖 소식을 접하기가 어렵던 시절에, 선조들은 민족 자결주의라고 어디서 막연히 주워 들었다. 그래서 우리도 당당히 독립을 선언하면 세계에서 다 알아주고 독립을 지지하고 승인하고, 일본이 아닌 한국 편을 들어 줄 거라고 희망회로를 돌리게 됐다.
물론 민족 자결주의 하나뿐만은 아니고.. 거기에다가 고종(암군이긴 해도 미우나 고우나 일단 자국의 군주 얼굴마담이니)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대한 독살 의혹, 1910년대 폭압적인 무단통치에 대한 반감, 스페인 독감과 기타 등등 생활고도 시위에 대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완전히 시궁창이었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서 말석 끄트머리로나마 승전국이었다.
승전국의 식민지는 저 희망회로의 적용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가령, 민족 자결주의는 그 시절에 무슨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주라고 만들어진 이론이 아니었다. 일본으로부터 조선도 마찬가지.

그러면 3· 1 운동은 아무 소득 없이 총칼 앞에서 무참히 진압당했고, 한국인들은 헛다리 짚고 뻘짓만 하다가 괜히 일제로부터 무수한 인명과 재산 피해만 당하고 아무 소득 없이 끝났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지금 같은 교통 통신 수단도 없던 시절에 식민지 피지배민들이 지배자를 상대로 전국적으로 이 정도로 대규모 비폭력 항쟁을 조직적으로 일으킨 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웠다.
일본 입장에서는 저걸 총칼로 마구 찍어눌러서 당장 진압은 했지만.. 국제적 위신의 손상에다 내부적인 멘탈 대미지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크게 입었다.

니들은 식민지를 도대체 얼마나 거지같이 관리했길래 10년도 채 안 돼서 식민지에서 저 정도로 처절한 만세 시위가 벌어졌냐?”
일본은 이웃 열강들로부터 이런 갈굼을 당했고, 그 갈굼이 조선총독부로 전해졌다.
다시 말해, 서구 열강들은 일본을 향해 "당장 조선을 해방시켜 줘라" 이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네 식민 통치 방식에 문제가 좀 있나 보다? 이번엔 좀 선 넘었네?" 정도의 눈치는 줬다.

이때부터 쟤들은 과장 좀 보태면 만세의 만 짜만 나와도 발작을 일으킬 지경이 됐다.
조선 땅에서 조금 무리수인 정책을 추진할 때면 “야, 조센징 만세 폭동을 벌써 잊었냐? 시즌 2가 벌어지는 수가 있다?” 이러면서 몸 사리는 시늉 정도는 하게 됐다.

이 때문에 조선 식민지를 관리하는 치안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일제의 입장에서 식민지의 가성비 하락으로도 이어졌다.
고종 다음으로 나중에 순종이 죽었을 때만 해도 쟤들은 또 만세 시위가 벌어지지는 않으려나 진심으로 긴장했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이 넘어갔음)

솔직히 1919년 3월 1일이 지금 대한민국이 세워진 날이라고 하면 그건 좀 정신승리 보정이 개입된 생각일 것이다. 무슨 시오니즘 대회나 밸푸어 선언이 발표됐던 날이 이스라엘 건국일이기라도 하냐?
그리고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때 조선인들이 남의 전쟁에 강제로 징용되고 끌려간 건 그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기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라도 져야 할 사항이냐? 누구는 약간 나중에 6 25 전쟁 중에 국가가 국민을 제대로 못 지켜 줬던 건 그렇게도 욕하고 비판하던데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세 시위 하나 했다고 일제가 조선을 니에니에 독립시켜 줬을 리는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시도가 쌓이고 쌓인 게 시너지 효과를 낸 것도 사실이다.

일본을 물리적으로 힘으로 패퇴시킨 것이야 한국의 능력이 아니라 연합국, 특히 미국의 원자폭탄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저런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시도가 없었다면 일제의 패망이 곧바로 한반도의 해방으로 이어지지는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로 선언에 코리아의 독립이 따로 명시된 게 괜히 이뤄진 줄 아냐?
이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건 전형적인 “A가 틀렸다고 해서 자동으로 B가 정답이 되는 건 아니다” 논리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정부 수립, 건국 초기부터 관습적으로 삼일절을 아주 성대하게 기념해 왔다. 그리고 그 초창기, 리 승만 할배 시절엔 대한민국이 1919년부터 시작된 나라라고 대놓고 홍보하곤 했다.
특히 저 때는 북괴야말로 1947년인지 48년에 갑툭튀한 듣보잡 사생아 집단일 뿐이고, 남한은 훨씬 전부터 정통이라는 걸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념이 오늘날 우리나라 헌법의 전문에도 명시된 것이다.

이거 마치 Watcom C라는 신생 컴파일러가 볼랜드/마소 제품 대비 자기 내력을 뻥튀기하려고 첫 버전을 1.0이 아니라 무려 6.0부터 매겼던 것과 비슷한 행동 같은데.. 뭐 그랬다. 이런 내력이 있다.
본인은 삼일절과 주일이 겹쳤던 날에 교회에서 준비 찬송으로 특별히 만세, 함성, 승리 이런 단어가 들어있는 곡을 골라서 부르곤 했다.

* 흥미로운 사실

(1) 조선은 특이한 지리빨 덕분에 그 시절에 대영제국의 손아귀로 들어간 적이 없는 꽤 예외적인 나라였다. 어디 대영제국 뿐이랴? 병자호란,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에서 다 지고도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조선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스스로 지켜낸 게 아니었다. 인간들의 과학기술과 군사력이 발달해서 지리빨이 약발이 다했을 때 조선은 그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했다.

열강들은 조선을 먹지 않았지만, 그 대신 19세기 말에 조선이 중립을 선언한 것도 전혀 존중해 주지 않았다.
조선은 서양 식민지가 되지 않은 대신, 이웃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그러니 나중에 독립될 때도 여느 대영제국 식민지와는 좀 다른 격으로 취급받게 됐다.

(2) 1920년대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세계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 편을 드는 것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특히 전간기) 일본은 세계가 일본을 영국 미국과 대등한 열강으로 인정하지 않고 함대 제작 쿼터를 많이 주지 않는 것에 절망하고 분노했었다. ㄲㄲㄲㄲㄲ
이게 지금은 군대를 안 가면 안 되는 나라 vs 군대를 가지면 안 되는 나라의 차이로 이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인물 관련해서도 할 얘기가 있는데.. 분량이 길어지니 이건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6/06/15 08:35 2026/06/1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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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빛

1. 해

박 두진이라는 사람은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어쩌구~~)"
중학교 국어(문학) 시간에 배우는 '해'라는 시를 지은 문인· 시인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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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글귀가 물 흐르듯 흐르고 흥겹고 운율이 느껴지는 게.. 곡을 붙여서 노래로 만들어도 될 것 같다. 건전가요도 될 수 있고 민중가요도 되고, 어쩌면 적절한 장르의 뮤지컬 넘버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검색을 해 보니 민족주의 기조가 넘치던 198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21세기에도 몇 차례 곡이 붙은 사례가 있었다.
아~ 저 사람이 연세대 교수를 해서 그런지, '해'의 싯구 일부가 아예 연세대의 응원가로 쓰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박 두진은 같은 학교에서 후학인 마 광수를 발굴해서 문단에 등단도 시켜 줬다고 하는구나.
나는 일단 그런 선례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상태로 얘기를 계속하겠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는 흥겹고 즐겁고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인데, 딱 한 구간 "달밤이 싫어" 여기만 잠시 암울하고 부정적이다.
이건 영락없이 동요 "아기염소"의 부정적인 구간 "빗방울이 뚝뚝뚝뚝 ... 엄마 찾아 음메" 같은 느낌이 든다. 선율을 붙인다면 "달밤이 싫어.." 구간만 그렇게 단조 코드로 표현하면 되겠다. ㄲㄲㄲㄲㄲ

그리고 이 시는 1946년 5월에 '상아탑'이라는 시집에 수록돼서 처음으로 발표됐다고 한다.
저 때는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땐 경부선 열차의 이름도 "해방자"(liberator)였으며, 광복 후 만들어지고 상영된 최초의 한국 영화도 "의사 안중근"이었다. 공교롭게도 전부 다 1946년 5월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문학, 영화계에서는 그야말로 한이라도 풀듯이 온통 해방의 감격을 표현하고, 반일 항일 독립운동을 예술로 표출하고 있었다.

그러니 박 두진의 저 시에서도 해가 무엇을 의미하고 달밤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대 문맥을 투영시켜 보면.. 뭐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였다.
이 시가 당대에도 반응이 좋았는지, '해'는 1949년에 출간된 박 두진의 개인 시집에도 실리고, 더 나아가 시의 제목이 시집 전체의 제목으로도 채택됐다.

이런 '해'라는 시를 썼던 사람이 그로부터 몇 년 뒤 1951년에는 6· 25 노래의 가사도 썼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이때는 해가 떠오르는 기쁨이고 감격이고 없이 "저 불의의 역적 멧도적 오랑캐들을 하늘의 도움이라도 빌려서 무찌르고 섬멸해 버리리라~~ 우리는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리라~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리라~ 우리의 원쑤들을 단 하나도 살려두지 않으리라!!"
정말 비장하고 섬뜩하게 가사를 썼다. 그도 그럴 것이 북괴 공산당은 그 떠오르던 해를 도로 가려 버리는 먹구름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6· 25 노래는 같은으뜸음인 단조와 장조가 중간 전환되는 곡이다.
그래서 같은 시인이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차를 두고 지은 '해'와 '6 25 노래'가 내 머릿속에 나란히 오버랩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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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나 더..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 대한 남아 가는 데 초개로구나"도 1951년 초, 1· 4 후퇴로 서울을 빼앗긴 지 얼마 안 됐을 때 만들어지고 발표된 시? 노래? 군가이다. 6· 25 노래와 시기적으로 비슷하다.
본인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무찌르자 오랑캐.."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린애들이 공기놀이를 하면서 동요처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원제는 '승리의 노래'라는데, 뭔가 찬송가나 CCM의 제목처럼 느껴진다.

2. 빛

자, 이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꺼내겠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2005년 7월경 새벽엔 이런 일이 있었다.
경기도 광주의 어느 산기슭 농촌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느 가정집에서 불이 났다.

그런데 화재 원인이 참 민망 기구한 게, 무슨 누전이나 배터리 때문이 아니고 완전 정반대.. 밤에 켜 놓고 방치했던 촛불 때문이었다.
그 집은 전기료가 몇 달간 많이 밀리는 바람에 전기가 완전히 끊겼던 것이다.
직장인 점심 밥값이 4~5천 원이던 20년 전 물가로 가정용 전기료가 88만 원이나 밀린 건 적은 양이 아닐 테니까..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그 더운 7월에 전깃불뿐만 아니라 선풍기, 에어컨, 냉장고를 가동을 못 하고서 일가족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나 싶다.

부모가 범죄, 이혼 등으로 인해 막장 파경이거나 심각한 질병· 장애가 있는지 구체적인 정황은 모르겠지만, 거기는 전기료가 밀릴 정도로 많이 가난했다.
슬하에 10대 나이의 딸이 둘 있었는데, 저 때 중학생이던 막내딸이 집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화마에 참혹하게 희생되고 말았다.

이 소식이 매스컴을 타자 뒤늦게 이웃 주민들과 관공서에서 힘을 합쳐 새 집을 마련해 주고, 맏딸이라도 학비 지원해 주고, 누군가가 밀린 전기료도 대납해 줬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전기료가 아무리 밀려도 어느 가구든 "형광등 3개와 TV 하나" 정도 켤 수는 있는 최소한의 전기는 끊김 없이 공급하도록(그게 가능하냐? 그럼 총 몇 와트시 정도??) 인도적 차원의 조치를 추가했다. =_=;;

물론 뒤늦게 그런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건 아니니.. 동생을 잃은 언니는 진짜 한동안 넋이 나갔다고 하며, 애비 되는 사람은 자기가 무능해서 이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딸을 죽게 만들었다고 자책하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고 전해진다.

이 일이 있은 뒤, 한전에서 정말 뜬금없게 이례적으로 "빛으로 만드는 세상"이라는 동요까지 만들어서 공개하면서 이미지 광고를 내보낸 게 내 기억으로 아마 2005년 말~2006년 그 무렵이었다.
무슨 창작동요제 입상작이 아니고, 현직 교사도 아니고 기업에서 웬 동요를 만들면서 따스한 이미지 선전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검색을 아무리 해 봐도 저 곡이 만들어진 사연, 배경이나 작사· 작곡자(유 재광)의 신상이 소개되는 건 이상할 정도로 없다. 정말로! 제목이 비슷한 "빛으로 만든 세상"과 혼동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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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정황이면, 아마 한전에서..
"매정하게 가정집을 단전시켜 버려서 촛불 때문에 집이 불 나서 애까지 죽게 만든 것에 도의적으로(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책임져라"라고 불거진 여론을 의식해서 이미지 쇄신을 시도한 게 아니었을지..?? 이런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저 좋은 빛이라는 게 전기 에너지가 있으니까 1년 내내 존재 가능한 것이고, 그러니 전기를 공급하는 우리 한전이 최고... 그런 식으로 말이다. 남한 대한민국은 밤에 불이 꺼진 암흑천지인(인공위성 사진) 북한처럼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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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백열등과 형광등을 거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이 높은 전기 광원인 LED등까지 발명하는 지경에 다다랐다. LED 덕분에 그 자그마한 스마트폰에 달린 꼬마전구가 어지간한 휴대용 손전등 역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마트 팜 어쩌구 하면서 제한적으로나마 천장 없는 실내에서 식물 농사가 가능해졌다.;; 기존 재래식(?) 하늘에서는 햇볕과 햇빛이라는 넘사벽 급의 자원이 공짜로 쏟아지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자연재해도 쏟아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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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물리적인 빛에 국한시키지 않더라도 성경도 빛에다가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심상을 부여하고, 반대로 어둠은 일관되게 나쁘다고 디스한다.
창 1:2에 나오는 어둠, 고후 4:6와 6:14에 나오는 빛과 어둠, 엡 5:8과 살전 5:5에 나오는 '빛의 자녀', 요한일서에서 시종일관 나오는 '빛'...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니 "빛으로 만드는 세상" 가사가 신앙적으로도 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1950년대에 만들어진 옛날 동요인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은 어떨까?
얘도 가사와 곡이 매우 아름다우며 2000년대 초에 일본의 소학교 음악 교과서에 잠시 소개되기도 했을 정도로 명곡이긴 하다만.. 이 곡의 가사는 딱히 광명과 암흑을 비교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냥 "여름엔 파랄 거예요, 겨울엔 하얄 거예요"이다.

저기서 '빛'은 그냥 '색'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어는 green과 blue를 별로 구분하지 않고 '푸르다'라는 말을 썼듯이, 심지어 color와 light도 별로 구분하지 않고 '빛'이라는 말을 썼다. 그래서 한자도 光(빛 광)뿐만 아니라 色도 "빛 색"이라고 불렀고, 색깔뿐만 아니라 '빛깔'이라는 말도 있었던 것이다.

즉, 결론적으로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의 가사는 "빛으로 만드는 세상"이 아니라 포카혼타스 "Colors of the wind"(바람의 빛깔)와 더 비슷한 공감각적 심상이라고 보면 정확하겠다. 저 동요가 일본어로 번역될 때도 응당 光이 아니라 色이 쓰였다.

영어에 man 남자/사람, good 좋다/선하다, day 낮/날 같은 중의성이 있는 것처럼.. 한국어에도 저 정도 중의성은 감수해야 하는가 보다. 사전만 보고 무식하게 곧이곧대로 번역하다간 실수하기 쉽다.

내 모국어인 한국어는 한편으로 괴상망측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ㅁ과 ㅂ 대응(어머니 아버지, 물 불, 맑다 밝다, 묽다 붉다)이라든가, 빛과 색의 중의적 관계,
내가 아는 다른 어떤 외국어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딱 한 단어짜리 '모르다' 동사,
하필 흑백과 삼원색만 활용 가능한 용언 형태로 말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꽤 심오하다는 생각도 든다. 잘 알다시피 영어는 '빛'이 '색'이 아니라 '가벼운'과 동음이의어 관계다.

이상이다.
아, 앞서 얘기했던 비극적인 화재 사고에 대한 내 견해는 전적으로 중립이다.
한전이 비난받아야 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반대로 저 집 부모의 무능? 가난? 이 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누구 탓도 할 수 없이 운이 나빴던 안타까운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애한테 비싼 장난감을 안 사 줘도 유괴 범죄가 일어날 수 있고, (이 삼촌이 장난감 사 줄게!)
사 줘도 유괴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소신이다. (오~ 이 집은 잘 사는가 보군!)
화재 역시 전기가 들어와도 날 수 있고, 전기가 없어도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꼭 가난이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어 보인다.

뭐랄까, 6 25 전쟁 났을 때 모병관이 어린 꼬마한테 먹을거 주고 구슬리면서 "너희 아빠 어디 있는지 알아?" → "아 우리 아빠요?" (너무 순진해서 솔직하게 다 말함) → (아빠는 징집돼 끌려가고 전사) → 그 꼬마는 고아가 됐고, 나중에 다 커서야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됨
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거 갖고 그 꼬마나, 모병관 그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6/06/03 08:35 2026/06/0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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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한번씩 이전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 같지만..
우리나라의 경제· 금융 내지 통화 정책 쪽의 굵직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1.
가장 먼저 화폐 자체부터..
우리나라는 6· 25 전쟁 때문에 화폐 단위를 여러 번 초기화 리셋을 했다. 돈 찍는 기계와 지폐 도안 원본을 적에게 송두리째 빼앗겼으니 그 돈은 당장 무효화시켜야 했다.

이때는 일본의 도움까지 받아서 도안을 새로 만들고 돈을 부랴부랴 다시 찍었던 일화가 유명하다. 일본은 한국이 예뻐서가 아니라 한국의 빽인 미국한테 잘 보이고 이쁨 받아야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국을 돕게 됐다. 물론 일본은 한국의 전쟁 특수로 돈을 많이 벌었으니, 저게 오로지 일본만 일방적으로 삥 뜯기고 자선행위 하는 건 아니었다.

그 뒤 우리나라는 전쟁이 끝나 가던 1953년엔 화폐 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1950년대는 지폐에 지금처럼 조선 시대 사람이 아니라 당대 생존 중인 대한민국 사람 얼굴이 있었던 유일한 시절이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뭐... ^^

그러다가 1962년, 박 정희 정권 때 또 화폐개혁이 행해졌으며, 단위 명칭도 환에서 원으로 도로 '환원'됐다. -_- 이게 2025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최후의 화폐개혁이다. 현재까지 통용되는 화폐단위가 이때 완전히 정립됐다.
이렇게 단위가 리셋됐던 직후에는 짜장면 한 그릇이 30원이었으며, 두툼한 사전 같은 책 한 권이 300원 남짓 했었다. 지금 물가는 그 시절에 비해 0이 2개쯤 더 붙었다.

2.
그 다음으로 10년쯤 뒤, 1972년 8월에는 사채 동결이라는 전무후무한 조치가 취해졌다. 제도권 은행을 육성하고 저축을 장려하려고. 그래서 기업들 돈 빌려주고 살리려고 꽤 강압적인 조치가 취해졌었다.

오늘날이야 사채는 밑바닥 인생을 위한 제3금융권으로나 취급되지만, 저 때는 우리나라에 제도권 금융이 그닥 탄탄하지 못했다. 금성사나 삼성전자조차도 직원들 월급 줄 걱정을 하는 평범한 중소· 중견기업에 불과했으며, 부자 개인한테서 사채를 썼다가 기한 내에 못 갚고 망하는 기업도 있을 정도였다.

저 때는 경제 성장률이 높고 금리가 아주 높았기 때문에 개나 소나 사채를 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안 믿기지만 사채가 일종의 주식· 비트코인 같은 재테크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민간인 개미 중에도 영끌해서 고리대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랬는데 갑작스러운 저 조치로 인해 돈을 빌렸던 기업들은 숨통이 트고, 반대로 돈을 빌려줬던 사채업자들이 낭패를 봤다. 종잣돈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출처를 추궁당하고, 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이자가 팍 줄고, 빌려준 돈의 상환 기한도 확 완화됐으니..

그러니 사채 동결은 민생과 나라 경제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송두리째 바꿔 놓은 급진적인 조치였다. 나쁘게 말하면 오로지 그 시절이니까 가능했던 반민주적인 폭거였다.
허나, 그로부터 몇 달 뒤엔 아예 10월 유신이 시작되면서 나라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쪽까지 더 경직되는 쪽으로 바뀌었다.

3.
그런 일이 있고 나서 20여 년 뒤, 1993년 김 영삼 시절에는 금융실명제가 시행됐다. 이건 2025년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내려진 대통령 긴급명령이다.

옛날 박 정희 시절엔 누구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은행에 돈을 맡기게 만들어야 했으니 예금주가 누군지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중에 좀 먹고 살 만해진 뒤에는 검은 돈 범죄자금 지하경제를 척결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에 금융실명제가 시행됐다. 거의 출산 관련 정책이 1990년대 이후부터 정반대로 유턴 했던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런 굵직한 변화 말고 은행과 관련해서는..
1980년대에 ATM과 초보적인 수준의 신용카드 도입, 1990년대에 은행 창구에 대기 번호표 도입, 2000년대에 인터넷 뱅킹 도입, 2010년대부터 모바일 뱅킹 도입, 종이 없는 전자문서 시스템 도입..;;
이러면서 금융이 물류 교통에서 암호화 통신의 영역으로 많이 바뀐 것을 짚을 필요가 있다.

수십 년 전, 금융이 통신이 아니라 물류이던 시절에는.. 직딩들은 월급도 현금 봉투로 받았다.
국제선 여객기 조종사들은 조종실에다 현금 돈가방을 싣고 날아갔다.;; 도착지 공항에서 그 현찰을 써서 주기료와 유류비를 결제했었다.;;
게다가 신용카드도.. 가게 점주들은 카드 전표 종이쪼가리들을 카드사로 직접 보내고, 그로부터 현찰을 답장으로 받는 형태로 돌아갔다! 정말 엄청나지 않은가?

저런 현물 거래가 통신으로 대체될 수 있게 된 건..
공개 키 비대칭 암호화라는 정교한 알고리즘이란 게 개발되고, 그걸 민간인들 PC와 스마트폰에서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컴퓨팅 성능이 발전한 덕분이다.

돈이 오가는데 무슨 게임 세이브 파일 조작하듯이 변조가 가해져서는 절대 안 되니 암호화를 하는데.. 그게 군대에서 암구호 전파하듯이 암호키를 배포하는 식으로는 근본적인 보안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각종 값비싼 소프트웨어들에 대해서 씨디키라든가 시리얼 번호 생성기, 불법복제 방지 장치를 무력화시키는 크랙이 등장했던 이유는? 역공학을 통해 보안 쪽 알고리즘이 유출됐기 때문이다.

그럼 돈이 오가는 건?? 공격자가 금전 거래 패킷을 낚아챘더라도, 암호화 알고리즘을 다 알고 있더라도, 심지어 한쪽의 암호화 키를 알고 있더라도.. 이걸 변조할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러니 암호화의 패러다임, 차원이 완전히 다른 암호화가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뭐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니 생략하고 넘어가겠다. 이건 통상적인 대칭 키 암호화보다 계산량이 차원이 다르게 훨씬 더 많고 복잡하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인터넷 뱅킹을 넘어 모바일 뱅킹 덕분에 계좌이체가 야외에서 거의 현금처럼 통용되게 됐다. 계좌이체는 카드 긁은 내역보다는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결제 내역이 기록으로 남는 건 변함없다.
금융 실명에 이어서 금융 전산화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범죄를 예방하고, 특히 탈세의 여지를 차단했는지를 생각하면 그 혜택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전산 금융은 언제 갑자기 훅 가고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한 번 정도는 은행들이 지금까지 오갔던 돈들의 차액을 현금으로 정산하기는 한다고 한다.

모바일· 인터넷 뱅킹도 밤에 1시간 정도는 중단되곤 한다. 이건 단순히 시스템 정비 차원을 넘어서 정산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시간이다. 이 시간대를 무작정 새벽 3~4시로 옮긴다거나, 예비 서버를 돌려서 무슨 뉴욕 지하철처럼 24시간 끊김 없는 뱅킹을 구현할 수는 없다고 한다. 정산은 날짜가 바뀌기 전에 꼭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화폐라는 걸 만들어 낸 뒤, 처음에는 그 기준 매개물질?물체로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싶어하고 귀중하다고 여기고, 거기에다 변질도 잘 되지 않는 금· 은 같은 귀금속을 사용했다. 중국이나 한국은 여러 사정상 그것보다 더 저렴한 구리를 사용했지만 말이다(엽전 동전..).

하지만 오늘날은 인간들이 생산하는 경제 가치 내지 경제 규모가 지구상의 모든 금을 채굴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고 또 전산화도 됐다. 현금 거래의 비중이 아주 줄어들었다.
이거 덕분에 화폐 개혁도 어지간하면 할 필요가 없어졌다. 자동차 한 대 가격이 무슨 64비트 정수로도 감당 못 할 정도로 커졌다거나 하지 않은 한;;
우리나라는 남한과 북한이 합쳐지는 급의 격변이 생겼을 때 헌법 고치면서 그때쯤에나 화폐개혁도 같이 하면 될 것 같다.

비슷하게 현물 수송이 아니라 통신의 영역으로 바뀔 만도 한 것은 투표이다.
투표 용지 실물이 아니라 누구누구한테 N표 정보만 개인 전자 서명으로 암호화해서 중앙 서버로 보내면 끝.. 선거 비용도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고 얼마나 수월하겠나?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허나, 이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인 불신풍조와 오· 남용 악용, 조작 가능성 때문에 쉽지 않아 보인다.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몽땅 전자투표로만 뽑겠다고 하면 선뜻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뭐 그렇다. 완전 자율주행 자동차가 등장하는 것만큼이나 요원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IT 기술을 몇 가지 더 열거하고 글을 맺도록 하겠다. ㄲㄲㄲ

1.
PC로 인터넷 뱅킹을 하려면 잘 알다시피 여러 보안 프로그램 설치, 공인 인증서 등록과 갱신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나 핸드폰 모바일 뱅킹은 간편 로그인 하나만으로 간단히 시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PC는 여러 사람이 한 기기를 익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위험한 기기인 반면, 핸드폰은 처음부터 주인 1인만 사용하게 돼 있고 기본적인 인증과 보안은 폰의 운영체제에서 자체적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쎄, 생각해 보니 이런 식으로 비슷한 쌍이 하나 더 있다. 내비게이션.
요즘은 폰 내비 앱도 정말 기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맨 처음에 지금 이 차량이 어디에 있고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건 차의 붙박이 순정 내비가 폰보다 월등히 더 뛰어나다. 터널 안에서 안정적으로 위치를 파악하는 것도 폰은 순정 내비의 적수가 못 된다.

왜? 순정 내비는 GPS 신호뿐만 아니라 지금 차량의 핸들 방향과 바퀴 회전수를 통해서도 차의 위치와 속도를 어렴풋이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서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 낫다.
또한 차량 내비는 대부분의 경우, 이전의 차량 위치/방향과 지금 차량 위치/방향이 고정불변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차량을 그대로 탁송이라도 하지 않는 한). 그 반면 핸드폰은 그런 보장이 전혀 없으니 처음에 자기 위치와 방향을 파악할 때 한참 동안 삽질할 수밖에 없다.

뱅킹은 보안과 관련이 있으니 모바일이 PC보다 더 간편하고 유리한 반면, 내비의 동작은 자동차의 그 static한 특성이 모바일보다 더 유리한 구석이 있다. 이 점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2.
인간의 경제 생활에서 현금이 이렇게 많이 없어진 만큼, 종이 통장도 예전보다 훨씬 더 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완전히 퇴출되고 사라진 건 아니니 위상이 애매한 듯..

이렇게 통장에다가 거래 내역을 찍어 주는 용도로는 이 2020년대까지도 구닥다리 도트 프린터가 현역이다. 도트가 이 분야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수단이다.
통장의 빈 여백에다가 incremental하게 줄 단위로 찌익찌익 뭔가를 추가로 찍어 주는 일을.. 무슨 잉크젯이나 레이저 프린터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는 영수증이나 명세표를 출력하는 걸 여전히 도트 프린터가 담당했었다. 하지만 가게 POS기에서 영수증이 '찌익찌익' 소리 내면서 출력되는 걸 마지막으로 본 게 다들 언제이신가? 깜빡거리며 켜지는 형광등과 비슷한 시기에 다들 퇴출됐지 싶다.

군대에서 울퉁불퉁 흔들리는 전차 안에서 뭔가를 인쇄해야 할 때 러기드 장비로서 충격식 도트 프린터가 쓰인다고는 하는데.. 그 정도로 특수한 거 말고 일반인이 도트 프린터와 그 특유의 180dpi 저해상도 한글 폰트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마지노 선은 정말 은행 통장뿐인 것 같다.

3.
오늘날 현대인들이 누리는 전자 금융을 가능하게 한 주역은.. 지금도 수많은 암호화 트랜잭션들을 거뜬히 소화하고 계시는 메인프레임 컴퓨터들이다.
메인프레임은 입출력 대역폭이 매우 크며, 수많은 작은 작업들을 동시에, 중단 없이 처리하는 것에 최적화돼 있다. 렌더링이나 시뮬레이션을 위해 오로지 대용량 병렬 연산에만 최적화돼 있는 슈퍼컴퓨터하고는 설계 이념이 미묘하게 다르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IBM이라는 공룡 기업이 있는데도 과거엔 CRAY처럼 슈퍼컴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기업이 또 존재했던 것이다. (IBM System/360  vs CDC 3600처럼)

메인프레임은 모바일은 말할 것도 없고 PC나 슈퍼컴과도 다른 수요가 있는 시장이다. 예나 지금이나 IBM이 전용 아키텍처 설계하고 칩 만들고 전용 컴퓨터에 전용 운영체제를 독점 공급하고 있다.
즉, 일반 유저들이 실감을 못 할 뿐, 저 분야에서는 IBM이 일종의 애플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랬는데 IBM은 PC를 과소평가 했다가 마소와 인텔에게 자리를 빼앗겼고, 쟤들은 또 모바일을 과소평가 했다가 구글· 애플이나 ARM에게 자리를 빼앗겨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저런 메인프레임은 구닥다리 COBOL 프로그램들이 현역으로 돌아가는 주 무대이기도 하다. ㄲㄲㄲ 반세기 전에 Y2K 문제를 일으키면 어쩌나 제일 우려의 대상이었던 분야가 바로 이런 쪽이었다.

COBOL은 코드가 영어 문장과 비슷하게 돼 있고, 인라인 어셈블리나 포인터 따위 없는 아주 쌈박한 고급 언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는 인터프리터나 가상머신 바이트코드 언어는 아니고, 네이티브 코드로 컴파일되는 언어이다.

오늘날 COBOL 같은 언어가 새로 개발됐다면 당연히 저런 식으로 구현됐겠지만 COBOL은 가상머신 바이트코드 같은 개념이 아직은 너무 사치스럽고 급진적이던 시절에 만들어진 옛날 언어이다. 그래서 저렇게 됐다. 비슷한 시대의 레거시 언어인 FORTRAN도 비슷한 처지와 위상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6/02/10 08:35 2026/02/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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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 집 앞 주유소에 찍힌 휘발유 가격을 보면서 세계사 연표를 떠올리곤 한다.

한동안 기름값이 대항해시대 르네상스 종교개혁을 가리킬 땐 좋았는데.. 요 근래에는 갈릴레오, 돈키호테, 동의보감, 킹 제임스 성경을 넘어서 병자호란과 경신대기근까지 찍었다. =_=;;
나중에 나폴레옹, 실학자, 프랑스 대혁명, 오일러, 가우스까지 갈까 봐 겁난다.
형사가 경찰서 구내식당에서 "요즘 반찬들이 전부 잡범뿐이네~ 어디 살인 사건 없나?" 이런 드립 치는 거랑 비슷하게 느껴진다. ㅠㅠㅠㅠ

코로나 직후에 비행기들이 싹 멈춰 버렸던 2021년 초였나.. 그땐 기름값이 잠깐이지만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반대로 지난 2010년 초 MB 때 금융위기에다 고환율 정책 이러던 시절엔 딱~~ 한 번 기름값이 근현대를 넘어 미래까지 간 적이 있었다. 기억 나시는가? 지하철 요금이 아직 1000원 초반대이던 시절에 휘발유 1리터가 2030~2050이었던 거 말이다.
이 정도면 유닉스 epoch이 부호 있는 32비트 정수 기준으로 오버플로가 나는 시기까지 도달한 거다. 그러다가 몇 년 뒤에 셰일 가스가 발견되면서 기름값이 다시 확 내려갔다.

2.
율곡 이 이는.. 조선 역사 500여 년을 통틀어 공부 머리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친 괴수 천재였다고 한다.
10대 중후반부터 20대 초반 나이에 과거 시험에 급제를 9번 하고 공부로는 어디서든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댄다.

이건 요즘으로 치면 대학교 1~2학년 나이에 휴학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게 아니라, 사시 행시 외시를 모조리 덜컥 합격해 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아니면 의대 졸업장 겨우 하나만 있는 건 시시하니까 의사 다음으로 변시 합격+변호사 면허라든가.. 의대 재학 중에 취미로 비행기 조종 사업용 면장까지 같이 득템.. 이런 것과도 비슷하다. (의대 공부를 다 소화하고도 비행기 조종을 익히고 비행 시간을 채울 여유가 있음 -_-)

율곡 선생은 수천~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중국 고전들이 머리에 사진 찍듯이 스캔 이미지 파일로 박혀 있고, 자기 주장을 글로 쓸 때 적재적소에서 문장이 톡톡 튀어나왔는가 보다.
글은 당연히 붓으로 한문으로 쓰고 말이다. 그땐 컴퓨터 키보드나 중국어 IME 같은 건 없었으니까.

이러니 저 사람은 우리나라 5천 원 지폐에 얼굴이 들어가 있고, 저 사람의 모친은 5만 원 지폐에 얼굴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말이다..

율곡 선생은 그럼 그 좋은 머리로 세상에 뭘 창조해 내고 무슨 기여를 했는가..??? 물건이 아니면 무슨 참신한 사상· 이론이라도 정립했는가?
뭐 관료로 일하면서 몇몇 선진적인 정책을 내놨다고는 하지만 채택되지 못했고.
겨우 공자 왈 맹자 왈 먹물질에만 재능 낭비를 했던 건 아닐까..?

참고로 율곡보다 1세기 가까이 전을 살았던 서양의 초천재 중 하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이 사람이 남긴 게 뭔지는.. 두 말하면 잔소리일 테고.

율곡은 딱 16세기를 풍미했던 사람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거의 동시대 인물이었다. 서양에서는 딱 비슷한 시기에 각종 종교개혁자와 신학자가 등장하고, 그 뒤부터는 슬슬 과학혁명을 주도한 수학자 과학자들도 나온다. (티코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오 ...)

이런 게 동양과 서양의 발전 양상의 차이를 만든 것 같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공평하게 시험 점수만으로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을 시행한 게 서양보다 몇백 년을 앞섰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그리 큰 메리트가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3.
내가 늘 하는 말인데 조선은 기록에 정말 진심인 나라였다.
조선왕조 실록이라든가, 수원 화성의궤 같은 기록은 정말 대단한 유물인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기록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매우 아쉽다고 생각하는 건 (1) 뭐, 한글을 창제해 놓고는 쓰지도 않고 여전히 한문일색인 것, 그리고 (2) 온갖 미주알고주알을 다 기록해 놨다면서 정작 공돌이 장 영실과 지도 제작자 김 정호 같은 국가유공자의 출생과 최후 기록이 없는 것이다.

처음엔 기록돼 있었는데 나중에 소실된 거면 더 할 말은 없지만, 유학자 먹물이 아니어서 기록에 소홀했던 거라면 매우 유감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4.
조선 왕들 중에서는 이 방원이 유일하게 고려 시절 과거에 급제했던 이력이 있는 왕이다. 즉, 이 사람도 왕창 똑똑한 사람이긴 했다.
비록 정 몽주를 제멋대로 죽여서 애비와도 척지게 된 흑역사도 있긴 하지만, 이 사람이 그래도 나름 제일 잘한 건.. 맏아들 대신에 세종을 후계자로 삼고 아들이 나라를 안정되게 다스릴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이었지 싶다. (경쟁자들은 몽땅 다 제거.. 피는 이 애비만이 묻힘)

종묘 떠받드는 거, 경복궁 가리던 중앙청 청사 헐어버린 것도 좋다 치는데..
오늘날까지 지폐에 대한민국 시절의 인물이 없는 건.. 이건 너무 심하게 에바인 것 같다.

정치인이나 군인을 제외한다면 공 병우, 우 장춘, 전 길남, 앞으로 50년~100년쯤 뒤엔 이 종욱 이런 사람도 제발 좀 넣었으면 좋겠다. 도대체 언제까지 조선 아니면 일제시대에만 머물러 있을 참이냐.
아니면 조선 시대 중에서는 하다못해 정 약용 같은 사람이라도 말이다. (정 약용은 뭔가 조선판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인상이 느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25/11/29 19:35 2025/11/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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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고 또 오랫동안 새 글을 못 올리다가 이제야 한참 전부터 써 왔던 글을 하나 마무리 지었다. ㄲㄲㄲㄲㄲㄲ

미국은 넓은 땅과 자원에다 최첨단 과학기술과 생산력을 갖추고 세계에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초강대국이다.
단순히 땅 넓고 자원 많고 인구만 많은 게 아니다. 3억이 넘는 인구가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이 집 있고 차 있고 총까지 있고 기본적인 구매력이 갖춰진 중산층이다.

나라가 꽉 막힌 사회주의 공산당 독재 체제가 아니며,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이념에 충실하다. 심지어 그걸 세계에 퍼뜨리면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미국이 해 온 짓이 다 선하고 옳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것만으로도 매우 대단하고 부러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미국은 넘사벽 급의 군사 강국임이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은 자국 영토엔 전방이라는 게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군은 자기 나라가 아니라 미국과 이념을 공유하는 동맹국들을 지키는 데 투입되며 거기가 전방으로 취급받는다. 누구를 넘어서는 게 목표가 아니고 그냥 현상유지가 목표이다.

미군이 거위걸음 연습해서 대규모 열병식을 한다거나, 굳이 에이브럼스 전차나 F-22 전투기 잔뜩 끌고와서 군사 퍼레이드 하는 일 따위는 없다.
그건 서울대나 육사가 무슨 졸업생 취업률 운운하면서 학교 홍보하거나 광고를 뿌리는 일이 절대 없는 것과 완전히 같은 맥락이다. 쟤들은 가끔씩 독립전쟁 하던 시절 옛날 코스프레 정도나 할 뿐이다.

뭐, 미국의 니미츠 급 항공모함을 1개월인지 n개월인지 운용하는 데 드는 유지비는..
그 니미츠 항공모함의 함재기 패거리로부터 공격 당한 나라가 입는 피해 비용과 비슷할 거라는 말이 있다. 둘 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액수일 텐데.. ㄲㄲㄲㄲ
딴 나라들은 저런 항모가 있어도 도저히 유지를 못 하겠지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저 천조국만은 그걸 감당할 수 있다.

이런 미국의 20세기 시대상은 이랬던 것 같다. 이때 나라의 모습이 정말 순식간에 바뀐 것 같다.

  • 1800년대 중후반: "금 캐러 가세" 이러던 서부 개척, 총잡이 카우보이 보안관, 황야의 무법자, dead or alive 딱지가 붙은 현상수배범 포스터, 남북전쟁!!
  • 1900년대: 록펠러, 카네기 등.. 나라가 미칠 듯이 발전하고 현대화되고 부강해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폐단과 산업화의 부작용도.. 강도귀족 도금시대
  • 1920년대: 금주법, godfathers 시카고 마피아, 중산층들은 이미 다 차 끌고 다니고 라디오도 갖고 있음, 뉴욕엔 이미 초고층 빌딩이 있고 교통체증도 있었음
  • 1940년대: 대공황에다 전쟁까지..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Remember Pearl Harbor. 세계에서 유일하게 군 장병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배급했음
  • 1960년대: 월남전, 히피, 비틀즈 뭐 이러던 시대. 겁나게 크고 각진 캐딜락 엘도라도 같은 자동차. 중산층급 자가용이 자연흡기로 8기통 6000cc급..
  • 1980년대: 전자음향, 마이클 잭슨, 카세트 테이프와 VHS 비디오, 컬러 텔레비전

병맛 영화 쿵 퓨리(2015), Grand theft auto Vice city 게임(2002)도 다 배경이 1980년대 마이애미 해변도시이다. 저게 1980년대 미국 리즈 시절의 상징인 듯..
당대에 Windows 1.0 광고에서도 스티브 발머가 오바 연기를 하면서 Lotus 1-2-3와 Miami vice를 언급하던데.. 후자는 게임인지 영상물인지 무슨 매체를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한편,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육해공 군종별로 미국의 인상적이었던 군인은 개인적으로 다음 인물이 떠오른다.
세계 어느 나라 군대가 안 그렇겠냐마는.. 미국도 군 수뇌부가 정말 겁나게 호전적이었다.

1. 육군: 조지 패튼 (최종 계급: 대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질은 진짜 더럽고 지랄맞지만 그래도 어쨌든 아군을 전투에서 이기게는 만드는 지휘관..;;;이었다.
군인, 특히 고위 장성 중엔 군인으로서 유능할 뿐만 아니라 물욕과 권력욕이 있어서 자기 PR과 인맥 관리, 기름칠, 언플, 정치질에도 능숙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맥아더처럼 말이다.

그러나 패튼은 그런 건 나몰라라 out of 안중이고, 오로지 적진으로 미친 듯이 달려들어서 적군을 죽이는 일밖에 모르는 다혈질 싸움닭이었다.
이 사람의 대표적인 어록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전쟁이 너무 좋아 죽겠다~ 하루라도 전투가 없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겠다 (..)

- (전투를 앞두고 부하들에게 훈시) 나는 신이 우리의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기도한다. 난 자비를 베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뜨악..)
"빈 라덴을 용서하는 건 신이 하실 일이지만, 빈 라덴과 신의 만남을 주선하는 건 우리의 임무이다" 뭐 그런 얘기 같다. ㄲㄲㄲㄲㄲㄲ

- (역시 훈시) 제군들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치지 마라! 적들이 우리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치게 만들어라! ㄷㄷㄷㄷㄷ

- (훈시) 제군들은 먼 훗날 손주새끼를 무릎에 앉혀 놓고 무용담을 당당히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할애비는 2차 대전 때 후방에서 편하게 뒹굴뒹굴 꿀이나 쳐 빤 게 아니란다
최전방에서 조지 패튼이라는 이 천하의 빌어먹을 X새X와 함께 전방에서 용감하게 진군했지!!" 라고 말이다~~!!!!!!

정말 기백 넘치지 않는가? ㅎㄷㄷㄷㄷ
이 아저씨는 정말 뼛속까지 군인이었다. 용맹하게 싸우는 군인정신을 뼛속까지 숭상하던 아저씨였다.
그래서 무려 쓰리스타 포스타를 자랑하는 넘사벽 신분으로도 야전병원에 몸소 위문도 갔다. 부상병들을 일일이 위문하고 진심으로 격려하는 본을 보이기도 했으나..

반대로 외형상 피 튀기는 부상이 별로 심해 보이지 않던 PTSD(정신병) 환자나 참호족 환자를 의지박약 꾀병으로 오인하고는 싸대기와 함께 "이런 겁쟁이 새끼를 봤나~ 나가 뒤져! / 이 나일롱놈을 당장 영창에 집어넣고 군법재판에 넘겨!"...
이런 막말 말실수 사고를 몇 번 쳐서 커리어에 오점을 찍기도 했다.;;;

패튼은 서부 전선에서 육군을 지휘하면서 나치 독일과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해병대나 일본이나 태평양 전쟁 쪽과는 접점이 없다.

2. 해군: 윌리엄 홀시 (최종 계급: 원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아저씨는 "앞으로 태평양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 계획이십니까?"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 왜놈들을 그저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일 겁니다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 좋은 쪽발이는 죽은 지 6개월 지난 쪽발이뿐이다!
  • 앞으로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이는 언어가 될 것이다~!

라는 정말 주옥같은=_=;; 명언을 남겼던 해군 제독이다. 이 사람은 아이스크림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미군은 2차 대전 중에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장병들에게 투게더 같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펑펑 배급해 주던 군대였다.
하루는 병사들이 휴식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줄을 길게 늘어섰는데, 소위 중위.. 초짜 장교들이 계급으로 갑질하면서 앞으로 새치기를 시전했다.

그런데 저 뒤에서 누군가가 그 새치기 장교들에게 니들도 뒤로 와서 줄 안 서냐고 쌍욕을 퍼부으면서 고함을 쳤다.
알고 보니 그렇게 뒤에서 줄을 서 있던 사람이 바로.. 저 윌리엄 홀시.. 무려 포스타 장군이었다고 한다.

저 사람은 적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막말을 퍼부어도 자기 부하들은 아끼고 챙기고 장병들 복지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던 대단한 사람이었다.

3. 공군: 커티스 르메이 (최종 계급: 대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사람은 미군 육군 항공대에서 공군이라는 조직을 창설한 주역이다.
그는 비행기를 이용한 공습.. 다른 말로는 폭격에 재미를 붙여 버렸다. 그래서 그냥 말 끝마다 "저것들 다 폭격해서 석기시대로 만들어뿐다" (Bomb them back to the Stone Age)
석기시대 드립이 이 사람의 밈이 됐다.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기 직전이던 1945년 초에 도쿄를 포함해 주요 대도시이 모두 미군으로부터 불바다 폭격을 당했었다. 그 공습을 다 이 사람이 계획하고 주도했다.
단, 폭격 정확도를 위해 폭격기들을 위험할 정도로 너무 저공으로 비행시켰다. 그래서 아군이 일본 측의 대공화기에 맞을 뻔하고 죽다 살아나오는 고비를 여럿 겪었다.

그래서 하루는 부하 조종사들이 뭐 이런 걸 작전이라고 짰냐며 항의하러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이 아저씨는..
"으하하하~ 오늘 공습 덕분에 이 적은 폭탄만으로 쪽발이들 나라의 수도가 다 박살나고 쪽발이가 10만 명이나 죽었다구.
오늘 작전은 대성공이다! 제군들도 같이 승리의 축배를 들자구!" 이러면서 항의는 그냥 씹어 버렸다.
사실, 이 아저씨도 "적진에서 폭격은 이렇게 하는 거야!" 그러면서 그 위험한 작전에 솔선수범하며 나서기도 했었다.

몇몇 부하가 "민간인 사는 곳에다가 이렇게 폭탄 떨궈도 될까요..?"라고 좀 망설였다. 그러나 이 사람 왈,
"요즘 전쟁에 무고한 민간인 같은 건 없다, 알겠나? 우리를 죽이는 왜놈들 폭격기가 다 이집 저집 돌면서 나사 조립하고 철판 용접해서 만들어지거든. 그냥 다 밀어버리면 됨."
이렇게 우려를 일축했다. 이게 그냥 합리화가 아니라 일본의 상황 기준으로는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가내수공업)

즉, 이 사람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전쟁은 민간인 피해나 오폭을 최소화하면서 전투를 소심하게 조심스럽게 안전하게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짧고 굵게 화력을 미친 듯이 쏟아부어서 전쟁 자체를 빨랑 최대한 빨리 끝내 버리는 게 궁극적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 여담

(1) 미국은 현재까지 포스타 대장보다도 높은 오성장군, 원수가 총 9명 배출되었다. 맥아더가 가장 유명할 것이고, 위에서 거론된 사람 중에는 해군의 윌리엄 홀시가 여기까지 진급했다.
물론 1950년대 이후에는 지구상에 세계 대전 급의 전쟁이 없는 관계로, 미군에서 이런 계급을 현역에게 부여하지는 않고 있다.

(2) 심지어 더 옛날엔 원수보다도 더 높은 '대원수, 육성장군'도 있었다. 이건 미국-스페인 전쟁(조지 듀이)이라든가 1차 대전(존 퍼싱) 시절의 영웅에게 부여된 게 마지막이다.
뭐, 건국 200주년 기념으로 국부인 조지 워싱턴에게도 대원수 계급이 '추서'되기는 했지만 이건 평범한 군대 진급은 아닐 것이다.

(3) 미국에서 징병제는 월남전 때 마지막으로 부활했다가 1973년을 끝으로 폐지되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징병제로 전환할 수 있게 지금도 군 복무 가능자를 조사하고 리스트를 관리하고 있다고는 한다.
마치 서울 지하철 9호선이나 공항철도가 언제든지 독자적인 추가 운임을 징수할 수 있게 형식적으로나마 고유한 환승 게이트를 관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그런 게 없더라도)

(4) 미국은 냉전 이전, 1945년에 핵 실험을 해 본 유일한 나라이다.
그 뒤 냉전 기간 내내 핵 실험을 하다가 1992년을 끝으로 더 하지 않고 있다.
글쎄, 트럼프 아재가 30여 년 만에 그걸 다시 하라고 요 근래에 지시를 했다는데 실제로 수행됐는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5/11/19 08:35 2025/11/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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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 차원에서의 역린, 트라우마

- 우리나라는 초대 대통령 시절부터 강렬한 선례가 있었다 보니 부정선거에 아주 민감하다. 선거에 출마한 후보가 유권자에게 조금이라도 향응을 주는 걸 엄격하게 단속하고 단칼에 처벌한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른 채 향응 접대를 덥석 받은 쪽에도 어떤 형태로든 불이익이 가해진다.

- 잦은 북괴 도발 때문에 반국가단체 내지 범죄 집단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우리나라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은 처벌이 이례적으로 꽤 엄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론적으로는 조폭을 결성한 우두머리는 뭔가 실제로 강도, 절도, 폭행 등의 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그렇게 조직을 만든 것만으로도 최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제4조1항)

- 비행기 납치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다. 창랑호와 YS-11기 납북 사건.. 이 때문에 미국에서 9· 11을 겪은 뒤에야 적용된 보안 정책이(기장실 절대 봉인)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더 일찌감치 적용된 경우가 있었다.

- 뭐, 북괴뿐만 아니라 반일 트라우마도 있다. 우리나라는 출입국관리법 차원에서 일제강점기(1910~1945) 때 일본 편에 서서 반인륜 행위에 부역했던 외국인은 입국을 금지시키고 있다. 물론 지금은 사실상 사문이 됐다.

- 대구 지하철 참사와 세월호 때문에 민간 차원에서는 교통수단 승무원에 대한 불신 트라우마도 쪼금 생겨 있다. 하지만 다른 교통수단은 몰라도 비행기는 정말로 미우나 고우나 승무원 말을 무조건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이런 우리나라 말고 일본은...? 쟤들은 전쟁 때 적군이 땅끄 몰고 쳐들어온다거나(6 25), 적들이 새까맣게 배 타고 상륙하는(임진왜란) 걸 경험한 적이 민족 차원에서 전무하다.
그 대신 쟤들은 도쿄 대공습 때 폭격기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면서 폭탄 떨군 것, 즉 공습에 대한 트라우마가 진심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 만드는 만화영화에도 괴물이 폭격 공습을 퍼붓는 묘사가 많다.

- 중국은 아편전쟁 이래로 마약에 진절머리 트라우마가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천안문 사태'를 입에 담는 걸 불편해한다. 하다못해 중국에서 개발한 언어 AI조차도 이 주제는 절대 함구한다.
중국은 20세기 초에 서구 열강과 일본한테 좀 짓밟혔던 역사가 있는지라 아직도 "다시는 우리 중국을 무시하지 마라, 우리도 한다면 한다" 이런 자격지심이 있다.

- 독일과 이스라엘은 나치에 극심한 트라우마가 있다. 팔 하나 잘못 뻗치는 것만으로도 린치 당하거나 경찰에게 잡혀 갈 수 있다.

- 미국은 워낙 강대국이다 보니 울나라처럼 특정 나라· 민족에 대한 지엽적인(?) 트라우마는 사실상 없는 것 같다. 뭐 굳이 찾자면 9· 11 테러에 대한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는 정도.. 그래서 항공 보안 쪽은 여전히 아주 깐깐· 까칠하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2. 약했던 나라와 강했던 나라

- 한국은 힘이 없는 상태에서 내전이나 치르면서 어렵게 어렵게 독립을 얻었다 보니, 군대에 안 가면 안 되는 나라가 됐다. (징병제)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고 세계를 상대로 너무 큰 사고를 쳤다 보니, 군대를 보유하면 안 되는 나라가 됐다. (자위대) 서로 처지가 완전히 극과 극이다.

- 20세기 초에 한국은 일제 통치의 부당함과 조선 독립을 국제 사회에 호소했지만 무시당했다.
일본은 자기도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니, 서구 열강과 대등한 대우를 받고 떡고물도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국제 사회에 호소했지만(해군 전함 배수량 TO 같은..).. 무시당했다. 이것도 서로 처지가 완전히 극과 극이긴 했다.

- 우리나라는 그냥 광복절이라고 기린다. 일제로부터 해방됐으니 기쁘다는 관점이다. 그리고 현충일은 북괴와 맞서 싸우든, 일제와 맞서 싸우든 어쨌든 오로지 자국을 위해서 목숨 바친 분들을 기리는 날이다.
그 반면, 미국은 VJ.. 태평양 전쟁 때 자력으로 싸워서 일본을 꺾고 쟤들로부터 항복을 받아 낸 날을 기린다. 그리고 미국 ‘재향군인의 날’은 그야말로 세계 각지에서 파병 가서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운 자국 군인들을 기린다. 2차 세계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등등.. 스케일이 한국과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3. 한미일의 교통 문화

(1) 미국이야 1920~30년대에 이미 초고층 마천루라는 걸 만들어냈고 대도시엔 자동차들 때문에 극심한 교통체증이라는 게 있었다.
일본 도쿄는 저 시절에 동아시아답지 않게 엄청나게 번화한 대도시이긴 했다. 증기 기관차가 고가 선로 위를 달리고 있기도 했고.. 다만, 자동차가 미국처럼 보급되지는 못했으니 인력거는 일본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 반면, 한반도는 일제 시대까지는 경성 한복판에서도 아스팔트 포장이나 차선, 중앙선, 신호등 같은 게 아직 전혀 없었다.

(2) 1960년대 말에 우리나라는 시속 100km짜리 경부 고속도로 하나를 국가 차원에서 겨우 만들어서 낑낑댔던 반면..
일본은 그때 시속 200km짜리 고속철 신칸센을 100% 자체 기술과 자본으로 만들어냈고.. 미국은 그때 이미 인간을 달에 보내고 있었다. 이것도 참 전설적인 예화이다.
일제가 1930년대에 경부선 단선에서 증기 기관차로 달성했던 최고 속도(아카츠키, 서울-부산 6시간 반)를 우리나라는 1960년쯤 돼서야 디젤 기관차(특급 무궁화호)로 겨우 따라잡기도 했었다.

(3) 미국은 의료비가 비싸고, 일본은 교통비가 비싸고, 한국은 식비가 비싸다고 여겨진다(우유, 소고기 등등..). 허나, 일본도 식당 밥값이 너무 비싸서 직장인들이 돈 아끼려고 도시락 혼밥하는 게 유행이 됐다고는 하던데..

우리나라는 근대화 산업화 타이밍이 열강들에 비해서는 한 박자 늦었다. 그래서 고속도로나 철도의 건설은 국가 주도로 하는 게 너무 당연시됐고, 2000년대가 다 돼서야 민자 고속도로가 찔끔 등장한 정도이다.
그 반면, 미국과 일본은 철도는 일찌감치 민영 사철이 발달했다. 이 때문에 운임이 왕창 비싸고 운영 시스템의 파편화가 심하지만.. 열차가 엄청 빠르고 서비스가 좋은 면모도 있다.

4. 전통의 계승과 단절

(1) 한국은 20세기에 조선에서 일제 시대, 일제 시대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가던 시기가 그야말로 극심한 넘사벽 대격변기였다. 일례로, ‘국악’이라는 건 1910년 일제 시대 이전까지의 고전 음악을 다루며, 그 이후부터는 현대 음악으로 간주한다.
중국은 청나라가 멸망한 1911년 신해혁명을 엄청난 대격변기로 보니 한국과 사정이 비슷하다. 그 뒤에 중공과 대만이 갈라져나간 것도 비슷하다.

한편,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과 1947년 일본국 리뉴얼이 격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이나 중국과 같은 급으로 헌정 체제가 근본적으로 싹 바뀐 시기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2) 우리나라는 화폐개혁은 1962년에 한 게 마지막이고, 개헌은 1987년이 마지막이다. 맞춤법의 개정은 1988년이 마지막이고 로마자 표기법이 2000년에 개정됐었다. (요 근래까지 계속 추가되고 업데이트되고 있는 건 표준어이지, 맞춤법이 아님)
중공은 1956년에 간체자가 제정되고 1958년에 한어병음이 제정되어 어문 규정이 크게 바뀌었다. 글자를 바꾸지 않고 주음부호를 계속 쓰고 있는 대만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일본은 패전 후 1949년에 신자체가 제정됐고 1946~47년 사이에 새 헌법이 제정됐으니 이런 것도 한국이나 중국을 앞섰다. 그리고 일본은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화폐개혁이나 개헌은 전혀 없었다.

(3) 미국 역시 지난 200년이 넘는 역사 동안 대통령의 암살은 있었을지언정 쿠데타나 헌정 체제의 단절적인 변화가 전혀 없었다. 어쩌다 보니 FDR 루스벨트만이 대공황부터 2차 세계 대전까지 4선 집권을 하긴 했지만 이조차도 불법적인 장기 집권은 아니었다. (후대부터 3선 이상 연임 금지가 법으로 명시)
미국 달러는 화폐개혁도 20세기 이후로 전혀 없었다. 아니, 있으면 안 될 것이다.;;

(4) 한국은 1953년 이후로 전쟁이 무기한 휴전 상태이며, 20세기 중후반에 수십 년 동안 군사정권을 경험했었다.
대만은 신기하게도 1949년부터 1987년까지 무려 38년 동안이나 계엄이 내려져 있었다고 한다.

(5) 가까운 미래에 우리나라는 모병제로 전환한다거나, “통일을 지향한다” 같은 문구가 헌법에서 삭제될지도 모르겠다. 남한과 북한 간에 영구분단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우리나라가 통일 지향 이념을 부정할 정도라면 일본도 자위대를 아예 정식 군대로 승격시켜 버리려나? 하지만 무려 100년 가까이 한 번도 개정한 적 없었던 헌법을 겨우 저걸 위해서 고친다? (평화헌법) 국민 정서와 법 정서상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와일드 서부 개척 시대의 흔적인 민병대나 총기 소지 관련 법을 고치려나 모르겠는데.. 이것도 220V 승압만큼이나 매우 매우 힘들고 어렵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25/08/08 19:35 2025/08/0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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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베네딕트 아놀드'(1741~1801)라는 사람이 거의 미국의 이 완용, 배신자 변절자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이던 시절에 미국군에서 장성급 장교로 복무하던 군인이었다. 그런데 영국 스파이와 내통하면서 군사정보 유출과 이적행위를 시도했고, 이게 발각되자 영국으로 빤스런.. 아니, 도피 귀순을 해 버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이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나쁜짓을 한 건 아니었다. 자기가 전쟁터에서 일말의 공을 세운 게 제대로 카운트되지 않은 것, 미국군 내부에서의 부조리 같은 여러 변명거리가 있긴 했다. 그는 처음부터 구제불능의 기회주의자 인간쓰레기 급 인성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군생활 도저히 못 해 먹겠으면 간첩짓은 하지 말고 공개적으로 "난 영국으로 전향하겠다~ 저쪽에서는 계급을 더 올려주고 연봉도 2배로 더 주기로 했다" 이렇게 떳떳하게 밝히기라도 하고 미국을 떠났어야 했다. 저 사람의 처사는 신사답지 못했으며, 당시 통념상으로 용납될 수 없었다.

이 사람은 그렇게 무리수를 불사하며 미국을 통수 치고 배신했지만.. 영국이 기대했던 것 같은 막 커다란 전술적인 이익을 주지는 못했다. 애초에 이 사람은 엄청나게 유능해서 영국으로 스카웃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베네딕트와 접촉하던 저 스파이가 삐끗 실수로 정체가 탄로나는 바람에 포로로 잡혔다. 이 사람이야말로 영국 입장에서 더 유능· 충직한 군인 애국자였다.

미국 측에서는 베네딕트와 그 스파이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영국도 생각 같아서는, 사람의 가성비만 따진다면 당연히 쌍수 들고 그러고 싶었다. 스파이는 돌려받고, 베네딕트는 본국으로 재송환돼서 바로 반역죄로 처형.. 그러면 땡이니까.

그러나 영국은 명예와 약속과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고방식 때문에 차마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편으로 제발로 귀순해 온 사람을 제멋대로 갖다버린다면.. 그 소문이 퍼져서 앞으로는 아무도 영국으로 귀순을 안 할 테니 말이다. 옛날에 스위스 용병들이 신용에 목숨을 걸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 같다!

결국 인질 교환 협상은 결렬됐다. 베네딕트는 영국에서 목숨 부지한 대신, 영국군 스파이는 미국에서 처형 당했다.
그 스파이는 미국군을 상대로 베네딕트에게 불리한 증언을 일절 하지 않았다! 자기 목숨을 건 그 어떤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의리를 지키다가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서 그를 처형한 미국군 측에서도 "적이지만 훌륭하다"라고 칭송하면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허나, 베네딕트는 영국에서 그 스파이 이상의 값어치를 못 했다. 그 스파이의 상관이었던 영국군 지휘관은 베네딕트를 죽도록 싫어했다. 베네딕트는 예편해서 민간인이 된 뒤에도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사람들로부터도 아주 멸시받으면서 입에 간신히 풀칠이나 하다가 갔다.
단지, 그 스파이가 들키고 잡힌 것 자체가 베네딕트의 이중 배신이나 뻘짓 때문은 아니라는 거.. 이거 하나만이 최소한의 위안(?)이 될 뿐이다.

자, 이 일화에는 꽤 성경적인 원리가 담겨 있다.
베니딕트의 영국인 신분은 베네딕트가 뭘 이쁜 짓 잘해서 유지된 게 아니었다. 뭐, 영국 군함으로 달려가서 귀순 요청을 한 것까지는 자기 의지와 결단으로 한 것이지만, 그 뒤부터 자기의 신분은 자기 노력으로 유지된 게 아니다. 그냥 영국이라는 나라의 의리와 자비심으로 유지됐을 뿐이다.

그것처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거의 어디 망명 가고 귀순한 급으로 신분이 확 바뀐 사람들이다. 그들의 구원은 그들의 행실이 아니라 구원자의 한결같음, 자비심, 신실하심으로 유지된다.

※ 같이 생각해 볼 점

1.
베네딕트는 미국의 입장에서 배신자, 반역자라는 불명예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배신 전에 공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일례로, 뉴욕 주의 ‘새러토가’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영국군과 맞서 싸우다가 발목에 총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목발이나 휠체어(!!) 신세까지 야기할 정도의 중상은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연히 나라를 위해 싸우다 영예롭게 다친 것이니 임팩트가 컸다. 오죽했으면 이 사람의 도주와 배신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 측 사령관(토머스 제퍼슨??)이 이렇게 말했었다고 한다.
“우린 그놈을 붙잡는다면, 다리만 짤라서 전쟁 영웅으로 정중히 예우하고 국립묘지에 묻어 줄 것이다. 나머지 몸뚱아리는 반역자의 최후에 걸맞게 교수형에 처하고!”

새러토가에는 지역의 역사를 소개한 공원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베네딕트 아놀드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고 “미국 식민지 소속으로 이곳에서 가장 용맹한 무공을 펼쳤던 어느 군인”이라면서 사람의 발 모양의 기념비가 만들어져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거 무슨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 같은 느낌이다.
베토벤은 한때는 나폴레옹을 칭송하는 교향곡을 만들고 있었지만.. 칭송 대상이 황제로 흑화해 버리자 크게 실망해서 인물 이름을 없앴기 때문이다. 그 곡은 “과거의 위대했던 어느 영웅을 추억하며”라고 컨셉이 바뀌었다.

2.
이렇듯, 새러토가 전투에서 입은 부상은 베네딕트의 커리어에서 분명히 플러스가 됐다. 하지만 그는 겨우 그 정도만 플러스 된 것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죽했으면 “헉, 괜찮으십니까?”라는 부하의 질문에 “다리에 총 맞았다. 차라리 가슴팍에 맞았으면 더 좋았을 걸..” 이런 말까지 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 말은.. 공교롭게도 훗날 진주만 공습 때 허즈번드 킴멜 사령관이 했던 말과 아주 비슷하다.
그 사람도 현장에 있다가 일본군 함재기가 쏜 총탄에 맞기는 했으나.. 직격이 아니라 딴 델 맞고 튕겨나온 도탄이어서 파괴력이 약했다. 옷이 살짝 찢어지고 피부에 찰과상을 입는 정도로만 다쳤다.

킴멜은 어이가 없어서 “내가 저 총알을 급소에 정통으로 맞고 전사를 했으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것을.. 적의 총알조차 날 안 도와주네 ㅠㅠ”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진주만을 지키려다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어쨌든 영예롭게 전사한 군인 vs 진주만 수호에 실패한 채 목숨만 부지하는 바람에 한직으로 좌천됐다가 초라하게 예편한 군인..은 차이가 어마어마하니까 말이다.

미군은 일본군 정도로 똥군기를 강요하고 무의미한 죽음을 미화하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래도 군대라면 어느 나라 군대든 오로지 결과 지향적이고 “이기든지 죽든지” 근성을 중요시하는 풍조가 없을 수 없었다.

3.
내가 인간의 구원에 대해 설명할 때 즐겨 사용하는 비유가 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으면 그 사람의 영적 신분이 탈북 귀순자와 비슷한 급으로 달라진다고 말이다.
대한민국에 들어온 탈북자는 여기서 그 어떤 죄를 지어도 대한민국 교도소나 대한민국 사형장에서 인생을 종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북으로 송환은 절대 되지 않는다. 인도주의적으로나, 북한 주민도 원래 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명분으로나.. 이게 지극히 합당하다.

바로 이와 정확히 같은 맥락에서.. 한번 제대로 예수 영접하고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면 그 뒤에 그 어떤 죄를 짓고, 심지어 회개 안 하고 개망나니로 살아도.. 일단은 지옥에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타이틀, 신분은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 하지만 제일 기본적인 구원 말고 다른 거 잃을 게 왕창 많을 따름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사람들 앞에서의 간증, 기도 응답, 하늘나라 가서의 보상과 상급, 어쩌면 당장 육신의 건강과 생명까지..
그런데도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마치 마음대로 죄 지어도 된다는 모랄빵이라고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할 수 있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는다고 해서 대한민국 교도소가 편한 곳인 건 절대 아니다. 목숨 걸고 탈북해서 대한민국 땅에 왔으면 여기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자유를 누리고 자기 인생을 펼 생각을 해야지, 여기까지 와 갖고는 범죄나 저지르면서 빌빌대다가 교도소에서 자기 인생 종쳐 버릴 텐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예전에 뭉괴 시절에 우리나라에서.. 명백히 탈북 의사를 밝혔던 북한 주민들을 범죄자라는 핑계로 북으로 도로 송환시켜 버린 건.. 정말 천인공노할 반인륜 범죄였다. 범죄자면 대한민국 공권력으로 다스릴 것이지 왜 저런 미친 짓을 했는가?
그때 저 사람들.. 도로 북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진짜 기절초풍 멘붕했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이젠 남조선 땅으로 가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이런 소문이 퍼지고 더욱 탈북 의지가 꺾였을 것이다.

이렇게 된 걸 김돼지 놈들은 기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이전 정권이 빼박 친종북 정권이었고 두고두고 욕 먹고 씹혀도 할 말 없는 악행이었다.

아무쪼록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인간의 신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유지되는 것이다.
베네딕트도 완전 찐따였지만 그래도 영국의 의리 덕분에 미국으로 송환되지 않고 영국인 신분이 유지됐다.
그런 것처럼 정상적인 대한민국 정부라면 탈북자를 북으로 송환시키지 말아야 한다.

4.
뭐, 이 글만 보면 영국이 어지간히도 명예와 약속을 잘 지키는 신사 집단인 것 같지만,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게 주지의 사실이다.
쟤들이 너무 신사적이어서 청나라를 상대로 아편 전쟁을 일으킨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영국은 저 시절에 군인이라면 "나 죽여 주쇼~" 하듯이 한줄로 쭉 늘어서서(전열보병!!!) 총질을 해야지~ 미국처럼 싸우는 건 신사답지 못하고 치사하고 비열하다고 막 징징댔다.
미국이 어떻게 싸웠냐고? 자원과 병력이 부족하니 저 멀리 숨어서 영국군의 장교만 골라서 저격하는 식으로, 일종의 게릴라 전술을 썼다. ㄲㄲㄲㄲ

영국군은 20세기 초까지도 잠수함조차 치사하고 비열 비겁하다고 깠다. 그러니 독일군 유보트에 치를 떨었던 거구나.
영국 신사는 언행이 어떤 사람인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조선 양반의 서양 버전 같은 꼰대 기질도 있었던 듯.. =_=

5.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민법에 따르면 친자식은 도 넘는 개망나니 노답이면 의절하고 상속에서도 제외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족보에서 파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슴으로 낳은 양자녀는 한번 입양을 결정했다면 파양 의절이 사실상 안 되거나, 조건이 훨씬 더 까다롭게 돼 있다고 한다. 입양 전에 소개받은 아이의 상태나 성장 배경 자체가 실제와 완전히 다르고 악의적인 거짓 구라 사기 급인 정도로.. 극단적으로 억울하고 불가피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어찌보면 성경적으로 이혼이 허용되는 조건과 비슷해 보인다. 정말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 단순 성격 차이 감정 싸움 같은 걸로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는 그리스도인이 접붙여짐 받은 양자와 같다고 말한다.
선천적 혈통상인 하드웨어 유대인과 달리, 그리스도인은 후천적이고 소프트웨어적인 개조를 거쳐서 양성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굳건하게 보호받고 구원이 보장된다고 볼 수도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26 08:35 2025/07/2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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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1592-98)과 6 25 사변(1950-53).

1. 공통점

  •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국제 전쟁이다. 대리전 같은 양상도 띠었다.
  • 적국으로부터 전쟁 준비 정황이 여럿 포착됐지만 그에 대비를 제대로 못 했다.
  • 초기에는 신무기 때문에 맥을 못추고 털렸었다. (조총, 땅끄)
  • 우리나라가 멸망할 뻔했지만 어쨌든 기적적인 계기로 방어에 성공했다. (이순신, 맥아더 / 한산도 대첩, 인천 상륙작전 등) 그래도 나라가 멸망만 당하지 않았지, 몽땅 쑥대밭이 되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 우리나라 쪽 대표가 없이 남들끼리 종전(정전) 협정이 진행됐고 오랫동안 질질 끌었다. (일본 vs 명, 북괴 vs UN)
  • 저 전쟁 기간의 대부분은 종전(정전) 협상이 오랫동안 질질 끌리는 동안 벌어졌던 소모전 기간이다.
  • 저 전쟁의 말기 때 적국 진영의 수장이 죽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스탈린)

2. 비슷한 점

(1) 임진왜란은 그 전까지 수시로 한반도를 집적대던 왜구들 국지전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었다.
6 25는 그 전까지 38선 부근에서 수시로 툭탁툭탁 벌어지던 국지전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었다.

(2) 임진왜란 때 왜군은 자기들이 성읍을 점령하던 방식처럼 조선의 왕만 빨랑 사로잡으면 전쟁이 바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은 잽싸게 피난 가고 없었고, 왕이 부재 중인데도 동네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서 왜군을 당황케 했다. 조선과 일본은 사회관과 국민 정서가 서로 많이 달랐다.
6· 25 때 북괴 측에서는 자기들이 쳐들어오면 20만 빨치산들이 자기를 반겨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쳐들어가 보니 그런 거 없었고 남조선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3)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왕이던 선조는 사람 보는 안목이 거의 트롤러 수준이었다.
원 균과 이순신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든가.. 한국 역사상 최악의 개망나니 미친놈이던 아들 순화군을 기를 쓰고 감싸던 걸 생각하면 말이다.
순화군이 함경도에서 깽판 치고 있자, 도저히 견디다 못한 거기 백성들이 서로 짜고 순화군을 왜군에다 넘겨 줬을 정도였다.
6 25때는? 뭐 리 승만 할배의 정치적 과오 중 상당수가 인사와 관련이 있었다는 거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 차이점

(1) 6 25 때 전황이 제일 안 좋았을 때는 경상도 동남부만 빼고 남한 땅이 다 함락당하고 북괴에게 넘어갔었다.
임진왜란 때는 반대로 전라도 빼고 다 함락당한... 정도는 아니었다. 부산 일대, 그리고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 길목 좌우를 제외하면 왜군이 조선 땅을 몽땅 다 점령할 재간은 없었다.

(2)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 자체가 완전히 망하고 멸절당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는 자기는 전대 정권과 전혀 무관하다면서 고개를 숙였고, 조선과 일본은 다시 수교를 맺었다.
그 반면, 6 25가 휴전으로 끝난 뒤, 남한과 북괴는 완전히 단절되고 최악의 적대 관계로 전락했다.

(3) 6 25 때 월북한 남한 지식인들은 다들 좋은 최후를 맞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끝까지 잘 대접받고 잘 살았다.

※ 나머지 이야기들

(1)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과 일본(왜)이 벌였던 해전의 양상을 공부해 보면 흥미로운 게 많다. 가령, 조선의 판옥선은 단면이 U자형이어서 평평한 바닥이 있는 반면, 일본의 전투함은 V자형이었다고..
일본 배는 더 빠르게 이동이 가능한 반면, 조선 배는 안정적이며 제자리에서 변침(조향, 회전)까지 가능할 정도로 최대속도 말고 다른 기동성이 좋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군함의 설계 이념부터가 조선은 방어 지향이고 일본은 공격 지향이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배는 닥치고 상대방에게 달려들어서 다리를 놓은 뒤, 자기 수병들이 그리로 건너가서 백병전을 벌이고 상대방 배를 점령하는 것에 최적화돼 있었다. 옛날에 해전이 진행되는 게 이런 식이긴 했다.

그러나 이 순신은 일본 배의 이런 장점 내지 특성을 봉쇄하는 쪽으로 기가 막히게 작전을 짰다.
지형 특성과 조수 간만 물때를 잘 활용한 건 말할 것도 없고, 판옥선의 강화판이던 거북선은 저렇게 남의 배로 건너와서 백병전 벌이는 걸 봉쇄하려고 등짝을 온통 고슴도치처럼 만들었다.

(2)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들은 자기 전술이 통하지 않는 거북선을 ‘장님배’(메쿠라부네)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했다고 한다. 눈에 뵈는 게 없이 달려드는 깡패 같은 배라는 뜻에서 장님이라는 별명을 붙인 듯..

그 다음으로 1850년대에 일본은 서양의 시꺼먼 철갑선 ‘쿠로후네’를 보고는 단단히 쫄게 된다. 이때는 얘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잘 했다.
그래서 임진왜란으로부터 300년쯤 뒤엔 지들도 군함 끌고 조선을 상대로 똑같은 짓을 했다. 운요 호 사건 이후로 조선을 겁 주고 차근차근 무장해제 시키고 이것 빼앗고 저것 빼앗은 뒤, 외교적으로도 고립시키고 끝내는 자기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이런 내력이 있고, 또 러시아를 기적적으로 명목상으로는 승리도 했다 보니 큰 군함을 만드는 일에 진심이 됐다. 그래서 결국은 야마토까지 온갖 삽질 끝에 만들었지만.. 결국 그들에게 20세기 쿠로후네 같은 존재는 바로 미주리 전함이 됐다.
21세기엔 일본이 크고 아름다운 군함과 관련하여 또 무슨 일을 겪게 될지 궁금해진다.

(3) 일제 시대 독립군의 전과 같은 이야기 중엔 과장 주작이 들어가거나 잘못 알려진 것도 적지 않았다. 허나, 일제 이후에 북괴와 싸웠다는 이야기 중에도 그런 예가 있는가 보다.

6 25가 터지기도 전, 육탄 10용사야 한참 전부터 자잘한 논란이 많이 불거졌기 때문에 요즘은 무용담을 신격화하고 띄워 주는 트렌드가 많이 줄었다.
철도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김 재현 기관사는? 전시에 열차 운행을 하다가 피격 당해 전사한 것은 팩트이지만, 일반적인 보급 수송 임무였지 무슨 윌리엄 딘 소장 구출 임무는 아니었다고 하네..;; 이게 왜 지금까지 오랫동안 잘못 알려졌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6 25 개전 초기의 대한해협 해전도.. 뭔가 정체불명 괴선박을 격침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진짜로 북괴 공작원들을 수송한 배였는지는 오리무중이라고 한다. 정확한 전과 보고를 위해서라도 우리측에서 사건 현장 주변을 정밀 수색했지만, 북괴군 시신 같은 거라도 도무지 발견된 게 없었다고 하니..

오히려 6 25보다 수백 년 전의 일을 기록한 난중일기가 단순 일기를 넘어서 정확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 일기에서 언급하는 인물이나 사건이 당대의 외국 사료와 일치하고 교차검증이 됐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난중일기가 백범일지보다 더 신뢰할 만한 사료라는 게 놀랍기 그지없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23 19:35 2025/07/2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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