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 이야기 외

"어린 시절, 어머니가 무대 가수로 일하다 목이 쉬어서 삑사리가 나서 청중들로부터 막 야유를 받고 있었는데.. 그때 자기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천부적인 개인기를 즉석에서 선보여서 '브라보!' 동전세례와 환호를 받았더라.." 본인은 찰리 채플린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아주 어렸을 때 읽은 적이 있다.

그것 말고 본인이 더 알고 있는 건 그 특유의 히틀러 수염 + 중년 정장 복장의 광대 같아 보이기도 하는 개그 캐릭터, 일명 Little Tramp이다. 그리고 모던 타임즈라는 풍자 영화를 만들어서 연기한 것 정도만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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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 이전부터 그야말로 리즈 시절을 누린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영화라는 매체의 초창기 역사를 함께한 산 증인이다.

채플린이라 하면 일단 무성 영화 시절의 인상이 아주 짙지만, 그는 나중에 유성 영화와 컬러까지 다 경험하긴 했다. 애니메이션과 음악만 있는 건 요즘으로 치면 플래시 무비 같은 느낌도 든다. 그 시절엔 화면 전환이나 글자 자막을 전부 아날로그 방식으로 어렵게 넣어야 했겠지만.
유튜브에 굴러다니는 영화 몇 편을 보니 저때 그 사람이 추구한 개그 코드가 이런 식이구나 하는 건 대충 알겠다. 산업 혁명의 원조 국가 출신답게 문명 사회에 대한 풍자가 많다. 밥을 떠먹여 주는 기계는 그 시절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정말 시대를 앞서갔다 싶다.

그리고 광대 연기만 한 게 아니라 각본 쓰고 연출을 하고 음악까지 혼자 다 작곡했다는 건 보통일이 아니다.
대사가 없기 때문에 시종일관 BGM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높던 무성 시절부터 말이다. 연기뿐만 아니라 음악의 천재이기도 했다는 점도 다시 봐야겠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만능 예능인이 맞다.
"빠라라람? (똑딱똑딱) 빠라라람!" CF에서도 들은 적이 있는 음향이었는데 이것도 원조는 채플린 영화였구나.

저 사람 콧수염 모양이 아무래도 히틀러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실제로 닮은 게 맞았다. 채플린은 히틀러를 희화한 영화를 한두 차례 만들어서 히틀러 연기를 했다. 히틀러 당사자 역시 처음엔 자기를 풍자한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고 하지만, 1940년작 <위대한 독재자>는 풍자의 도가 지나쳤는지 나치 독일에서 국내 수입과 상영을 금지당했다고 한다. 참고로 채플린과 히틀러는 나이가 완전 동갑인 동시대 인물이었다. 둘 다 1889년 4월생이고 생일도 나흘밖에 차이가 안 남.

아인슈타인을 백발의 혀 쑥 내미는 얼굴만 보다가 젊었을 때 모습을 보면 적응을 못 하듯, 채플린도 일명 Little Tramp 코디인 중년 신사 연기 모습만이 너무 짙게 각인되어 있는지라, 젊었을 때나 말년 모습을 보면 적응이 안 된다.
채플린은 89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린 뒤, 자던 중에 타계했다. 죽는 과정이 아주 이상적이었다.

다음은 그 밖의 trivia들.

1. 찰리 채플린은 가난하고 못 사는 집안 출신이었고 작품 중에 사회 풍자적인 메시지를 종종 담다 보니, 정치적 소신은 아무래도 성장보다 분배를 좋아하고 노동자를 편드는 쪽에 가까웠다. 그 자체가 문제가 있거나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지만, 일련의 행적으로 인해 그는 그 살벌하던 냉전 시기에 일부 국가와 높으신 분들 계층으로부터는 좀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한때 미국 입국을 금지당하기도 했을 정도이며, 한국에 채플린의 작품이 생각보다 늦게 소개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하긴, 그 시절에 헬렌 켈러도 장애를 극복한 위인이기만 한 게 아니라 굉장한 좌파 성향의 사회 운동가였고, 심지어 피카소 화가도 비슷한 성향이었다.

2.
연예인들이 인기 관리에 대한 압박감과 공연 후의 허무함 때문에 멘탈에 대미지를 입으며 지내고 급기야 마약에 빠지고 자살까지 하는 것처럼.. 저 사람도 남을 웃기는 직업과는 정반대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견디다 못해 하루는 정신과 의사에게서 상담을 받았는데.. 환자가 누군지 모르던 의사는 그에게 이런 권고를 했다.
"찰리 채플린이 나오는 영화를 몇 편 좀 보시죠? 그러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증세가 나아질 겁니다~ ^^"

이런 비슷한 사례가 또 떠오르는 게 있다.
우리나라에 정 근모 박사는 핵 물리학자 출신으로 전 과학기술처 장관, 호서대 총장 등을 역임한 분이다. 학창 시절에는 경기고를 4개월만 다니다가 그냥 고졸 검정고시 + 월반을 해서 서울대 문리과대학에 차석으로 입학해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절대적인 학업 축적량이 부족하니, 수학· 과학만 잘하지 영어까지 바로 따라갈 수는 없었다.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교양 영어 시간 때 교수/강사의 질문에 대답을 못 해서 쩔쩔맸다. 그러자 그 선생은 정 군에게 이렇게 핀잔을 줬다.
"아니 명색이 서울대를 들어왔다는 학생이 이것도 모르냐? 여기에는 고등학교를 4개월만 다니다가 월반해 들어온 천재도 있는데!"
이에 주변의 학생들은 다 빵터졌다고 한다..;; (정 근모 박사 자서전에 언급되어 있는 일화)

3.
옛날에 내 동심을 자극하던 '찰리' 캐릭터로는 찰리 채플린 말고 만화 주인공인 찰리 브라운도 있었다. 만화의 원제가 <피너츠>였고 이 만화는 4컷 형태로 생각보다 오래 최근까지 연재되었다는 것은 작가가 작고하고 나서 한참 뒤에야 알게 됐다. 연재 기간은 1950년부터 2000년 진짜 딱 반세기에 달한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에서 비슷하게 그 정도로 오래 연재된 4컷 만화는 <고바우 영감>이다. 이것도 주간지 시절까지 포함하면 딱 1950-2000이다.
뭐, 채플린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그래도 얘도 20세기 추억의 만화물이고 연재 기간이 채플린이 살아 있던 기간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같이 연상이 될 만도 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5/09/17 08:33 2015/09/1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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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개통과 운행 내력 외

한반도에 KTX라는 이름의 고속철이 개통하여 상업 운행을 시작한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개통한 지 무려 반세기가 넘은 일본의 신칸센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그래도 KTX도 개통 내력이 은근히 복잡해지고 있으니 한번쯤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2004. 4. 1. [경부 1차 개통]
- 경부선: 서울-부산 (고속선은 대전-광명, 대구-옥천만)
- 호남선: 기존선의 복선전철화. 용산-목포 (대전 이남엔 고유한 고속선 구간 없음)
- KTX 개통과 함께 (1) 서울교외선에 정규 열차 운행이 중단됨. (2) 통일호 폐지, (3) 경춘선 무궁화호 폐지.

* 이 일대 시기의 서울/철도 소사를 참고 차원에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청계고가의 철거와 청계천 복원 사업이 시행됨.
- KTX 개통 약간 전에 서울역 민자역사가 개관함.
- KTX 개통 후 얼마 안 있어 경부선은 서울 역, 호남/전라/장항선은 용산 역으로 역의 역할이 완전히 이원화됨.
- 2004년 7월, 서울 수도권의 버스· 지하철 통합 환승 제도가 시행됨.
- 2005년부터 철도청 폐지,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출범.

2007.
- 경부선: 대전-대구 사이만 기존선으로 달리면서 김천과 구미에 정차하는 KTX 일부 운행

2010. 11. 1. [경부 2차 개통]
- 경부선: 대구-신경주-울산-부산 사이의 고속신선 신규 개통. 기개통 구간엔 오송과 김천구미 역이 추가 영업 시작함
김천· 구미 KTX는 폐지. 그 대신 수원· 영등포 정차 KTX 생김

2010. 12. 15.
- 경전선: 기존선의 복선전철화. 대구 이남으로 창원, 마산으로 가는 노선. 수요 폭발이었다고 함.

2011. 10. 5.
- 전라선: 기존선의 복선전철화. 익산 이남으로 여수엑스포 행

2012.
- 드디어 KTX-산천 차량 투입

2014. 6. 30.
- 일부 열차가 인천 공항까지 직결 운행 시작

2015. 4. 2. [호남 1차 개통]
- 호남선: 고속신선 신규 개통. 익산· 정읍· 광주송정을 경유하며 공주 역 추가 영업 시작. 저 역들을 제외한 호남선 기존선 역들은 KTX 취급이 폐지됨(광주, 김제 등).
- 동해남부선(앞으로 동해중부선과 연결되어 동해선이 될 예정): 포항 직결 운행 시작

2015. 8. 1.
- 대전과 (동)대구는 기존선과 인접하는 도심 구간까지도 기존선 연결선이 아니라 고속선이 깔림으로써.. 운행 계통이 일반열차와는 완전히 분리되는 복을 누리게 됐다.

요약하면:
고속신선은 오송에서 분기하는 경부선과 호남선 축으로 깔려 있고, KTX 운행 노선은 거기에다 호남 분기(전라선), 경부 분기(경전선, 동해남부선), 그리고 서울 이북으로 공항선이 추가적인 겉저리로 붙은 형태이다.
차량은 아무래도 1세대 떼제베 차량과 2010년대 이후의 2세대 산천 차량 정도로 나뉜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KTX-산천은 HSR-350의 기술로부터 만들어진 열차이긴 하지만 산천 자체가 HSR-350을 그대로 양산한 건 아니다.

더 먼 미래엔:
(1) 호남 고속철이 광주 이남으로 2차 구간이 마저 개통할 것이며, (2) 수서 발 수도권 고속철과 (3) 강릉 방면 동서 고속철이 남아 있다.
“희망을 싣고 번영을 싣고 뻗어가는 철도 따라 커 가는 나라”대로 될지어다. 아멘. (철도의 노래 가사 중)

* 고속철의 이름: 차량이냐 선로냐

고속철 보유국으로서 프랑스와 일본을 비교해 보면 좋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 떼제베(TGV)는 '매우 빠른 열차'라는 뜻이며 차량 중심으로 작명됐다. 한국의 KTX도 이니셜을 보면 알 수 있듯, 차량 중심이다. 프랑스는 차량 기술에 자부심이 많은지 그 뒤에도 증속 경쟁을 제일 열성적으로 진행해 왔다. 2007년엔 자기 부상 열차가 아닌 재래식 바퀴식 열차로 무려 시속 574km라는 사기적인 시운전을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신칸센은 '새로운 간선 철도'라는 뜻으로 의외로 차량이 아닌 선로 중심으로 작명됐다. 본인은 철덕으로서 이 차이가 매우 신기하게 와 닿는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차량보다도, 기존 협궤가 아닌 표준궤로 고속철 신선을 깔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와 닿았던 것이다. 1964년에 첫 운행을 한 신칸센 0계 전동차는 떼제베 같은 독자적인 디자인도 아니고 걍 자기네 옛날 전투기와 비슷한 투박한 외형이었다.

새로운 교통수단을 만들 때는 성능뿐만이 아니라 안전도 굉장히 높은 가중치로 고려 대상이 되며, 고속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속 200km를 넘게 증속을 하는 기술보다도, 그렇게 고속 주행 중에 장애물이 나타나고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제동 거리를 얼마를 넘지 않고 비상 정지를 도대체 어떻게 할지가 더 심각한 고민거리로 대두되었다. 엔지니어들이 별별 아이디어를 다 짜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싸움이 가장 좋은 싸움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됐다.
"가장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 (They're only good when dead 포카혼타스 Savages 대사;; )처럼.
애초에 비상 정지를 할 일이 없게 만들자는 것이다.
건널목 따위는 전혀 안 만들고 모든 구간을 무조건 입체교차로 만들고, 선로에는 아무도 접근을 못 하게 겹겹이 벽을 두르면서 일본의 경부선뻘 되는 도카이도선을 표준궤 고속선으로 새로 만들었다. 1960년대에 벌써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선로를 내세운 '신칸센'이 됐고 이것이 일본 고속철의 선로, 열차, 시스템의 명칭이 됐다.

이런 일본과 프랑스의 고속철 역사를 살펴보면, 철도라는 걸 처음 만들 때는 당연한 말이지만 차량보다 선로가 먼저라는 원칙을 확인할 수있다.

우리나라도 1992년에 대전-천안간의 경부고속선 본선 겸 시험선 구간을 먼저 착공한 뒤, 차량의 선정 계약은 더 나중인 1994년에 맺었다.

시속 200km를 넘는 장거리 간선 철도의 건설 자체는 1964년의 일본 신칸센이 세계 최초이다. 하지만 그 뒤의 추가적인 속도 경쟁은 후발 주자인 프랑스 떼제베가 앞섰다. 가령, 시속 260km대의 상업 운전은 1981년에 떼제베가 세계 최초로 달성했고 신칸센은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뒤인 1992년에야 300계 전동차가 도입되면서 그 속도를 따라잡았다. (300계는 TGV-R, ICE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속철의 차량 입찰 후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잘 알다시피 1984년 8월에 경부선 천안-서정리 구간에서 겨우 시속 150km 시운전 성공.. 이러던 지경이었다. 그러니 국제적인 안목이 있는 철도 공학자와 경영자들이 통탄할 법도 했다. 1980년대, 전국 곳곳에 포장 도로가 깔리고 마이카 시대가 코앞인데 이래 가지고는 "한국 철도엔 답이 없다"라는 게 뻔히 보였다. 철도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은 선택과 집중, 그리고 증속을 통해 많이 빠르게 실어 나르는 "회전율 향상"뿐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1985년 11월에 서울-부산 4시간 10분이 달성된 후, 지속적인 레일 장대화와 선형 개량, 기관차 출력 증대로 서울-부산을 1980년대 말까지 3시간 반까지 단축시키려는 계획은 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미봉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1992년에 드디어 인천 공항의 건설과 더불어 경부 고속철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뒤의 역사는 여러분이 다 아시는 그대로이다.

우리나라에서 떼제베 대신 신칸센이 낙찰됐다면, 철덕의 입장에서 전망해 보자면 다른 건 몰라도 떼제베보다 폭이 더 넉넉하고 애초부터 역방향 좌석이 없는 열차가 도입됐을 가능성이 높다. 신칸센은 2-3배열 가축수송 열차가(한 줄에 좌석이 5개!) 있을 정도로 같은 표준궤에서도 뚱뚱한 덩치이기 때문이다. 자기네 자위대 전차의 부품도 제대로 수송을 못 할 정도로 빼짝 마른 협궤에 이골이 난지라, 신칸센은 이왕 표준궤로 까는 김에 열차의 폭까지 최대한 더 키운 듯. 하지만 지나친 고자세 때문에 입찰 후보들 중에서는 신칸센이 가장 먼저 탈락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5/09/11 08:32 2015/09/1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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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임 바이츠만. (Chaim Weizmann; 1874-1952)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문과 계열의 만렙 박사였다면, 현대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은...;; 천재 과학자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미국을 끌어들여서 나라를 세웠다면, 저 사람은 영국을 끌어들여서 자기네 땅을 얻어 냈다. 서로 나이 차이도(1874 & 1875년생) 거의 안 나는 동시대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윈스턴 처칠과도 동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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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임 바이츠만은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옥수수로부터 아세톤을 저렴하게 양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게 전시 군수 물자인 탄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이었던지라 그는 이것 덕분에 완전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됐다.
영국 정부에서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에게 훈장을 주려 했다. 그때 그 사람이 말했다. "저는 돈과 명예는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 민족을 약속된 땅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서 살게 해 주세요." 성경에서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자기 동족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우리 대영제국의 식민지 중엔 거기보다 더 넓고 좋은 땅도 얼마든지 있는데. 가령, 아프리카에 우간다 영토 일대는 어때?"라는 제안에도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ㄴㄴ. 런던이 지금 같은 영국 수도가 되기도 전부터 예루살렘은 원래 우리 땅이었습니다. 부디 거기를 돌려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영국 내부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물론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1차 세계 대전의 말에 1917년에 밸푸어 선언이 이뤄졌다.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발효된 카이로 선언 및 포츠담 선언과 비슷하다. 일제로부터 조선의 독립이 그때 명시됐으니 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귀환이 곧장 이뤄진 건 아니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 유대인들이 몇백만 명씩이나 나치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세계 질서가 확 바뀐 뒤에야 이스라엘이 세워질 수 있었다. 사람에겐 기본적으로 귀차니즘이 있는지라 박해를 안 받으면 잘 안 움직이니까.;;

어쨌거나 초대 대통령이 군인이나 외교관 같은 다른 직업이 아니라 과학자라니 참 멋있고 부럽다(우리나라는 박 근혜 대통령이 일단 전자공학과 출신이긴 하다만..). 바이츠만은 자기 실력을 민족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사용한 위인 애국자였다.

2.
이스라엘의 국가인 Hatikvah(희망)은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우연의 일치인지 <밝은 빛을 따라서 앞만 향해 나가자>라는 희망적인(?) 내용의 찬송가 멜로디로 쓰인다. 하지만 쟤네들 국가 가사는... 나 같은 비유대인이 보기에도 인간적인 감정상 정말 구슬프고 찡하고, 나라 없는 백성의 한이 레알 서려 있는 게 느껴진다. 1절 가사를 대충 드라마틱하게 의역하면 이런 내용이다.

“내 심장은 동방을 향해, 시온을 향해 오늘도 꿈틀댄다.
우리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으리.
약속의 땅에서 자유로운 내 조국을 세우는 날을 염원한 지가 어언 2천 년.
그곳은 시온 땅의 예루살렘이어라.”


이 글에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뺏었네 나쁜 깡패네 하는 얘기는 논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점을 양해 바란다. 원래 그런 분쟁이 얼마든지 안 생길 수 있었고 이스라엘은 합법적으로 땅을 받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도 다 합의가 돼 있었는데 영국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오해가 생기면서 내력이 복잡하게 배배 꼬인 게 있다. 그런 것까지 다 설명하기에는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다.

아 그리고, 이스라엘도 사람 사는 곳이고, 모든 이스라엘 국민들이 자기네 국가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저런 노래가 너무 국뽕스럽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 중에도 애국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일본인 중에도 기미가요가 너무 존재감 없다고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
하나님이 보우하셨는지 유대인들이 참 똑똑하긴 했다. 바이츠만 말고 프리츠 하버(1868-1934)도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천재 과학자이다. 그는 공기 중의 질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인공 질소 비료를 만들어 냈다. 햇볕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핵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공기로부터 사람을 살리는 빵을 만드는 급의 엄청난 기적을 이뤘다. 기아 해소와 인류 복지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는 응당 노벨 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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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는 바이츠만과는 달리 줄을 치명적으로 잘못 섰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도, 시온주의자도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이 아닌 독일에 충성했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그래서 조국을 위해 사람을 살리는 발명만 한 게 아니라 독가스도 발명했다. 1차 세계 대전 때 전장에 처음으로 살포된 염소 가스부터 시작해, 유대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절의 치클론 B 독가스도 다 이 사람 혼자 또는 공동 연구로 만들어졌다.

그럼 그가 그 덕분에 독일로부터라도 인정받고 떵떵거리며 살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이용 가치는 있지만 굉장히 애매한 왕따 포지션이 되어서 타지에서 무척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독일로부터는 나중에 나치 당이 집권하면서 "저런 더러운 생물(=유대인)을 고위 과학자 자리에 앉혀 둘 순 없다"라고 문전박대를 당했고, 영국 등 다른 나라로부터는 "저 자식은 머리는 비상하지만 정신이 완전 맛이 간 싸이코야."라고 단단히 찍혔다.

그래도 다행히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일찍(1934년) 죽은 덕분에 히틀러와 엮이지는 않았으며,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거나 반대로 나치 출신의 전범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관여한 발명품이 가까운 미래에 심지어 자기 동족을 학살하는 용도로까지 쓰인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역설이다. 그는 사람을 살린 엄청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위인전에는 도저히 오를 수 없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과학자의 연구 윤리를 논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씁쓸한 사례가 되었다.

4.
이스라엘 건국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의 건국도 다시 좀 복습하고 글을 맺겠다.
1948년 5월 10일에 우리나라에서 남쪽만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14일에 이스라엘이 건국됐고, 같은 날 낮에 한반도에서는 북으로부터 대남 송전이 끊겼다.
그 달 말일인 31일엔 그 국회의원들을 바탕으로 제헌국회가 개최됐고, 당시 의장이던 이 승만의 요청으로 이 윤영 목사의 감사 기도가 이때 행해졌다.
이어 그 해 7월 17일엔 잘 알다시피 헌법이 제정되었고,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서 약 3년간의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전인 1948년 3월에 이북에서는 이미 자기만의 국기와 국가도 다 정하고 분단은 기정사실이 된 상태로 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악의 무리들은 서로 동무 동무 하면서 비판과 삿대질이나 일삼으면서 어떻게 백성들의 재산과 자유를 빼앗고 몽땅 착취하고, 서로 감시하고 통제하고 믿질 못하는 생지옥을 만들까, 어떻게 남조선까지 몽땅 집어 삼킬까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 반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하나님께서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고 ...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우리에게 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것은 개인의 종교관을 떠나서 매우 다행이고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5/09/05 08:38 2015/09/0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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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 나라이지만 기독교계 종교에 대한 정서는 거의 지구와 금성의 차이만큼이나 극과 극이다. 물론 일본뿐만이 아니라 북한 내지 중국하고 비교해 봐도 극과 극에 가까운 건 마찬가지이지만.

난 솔직히 말해 일본의 보편적인 종교관을 잘 모르겠다. 완전히 불교도 아니고 유교, 도교도 아니고 전적으로 샤머니즘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신사는 무엇이고 덴노(일왕/천황)는 무엇이고 이들이 정치 종교 통합적인 존재인지? 어쨌든 기독교 배경이 절대로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딱히 단군을 숭배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데?

일본은 서양 문물을 잘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잘해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며, 반대로 다른 식민지를 거느리고 침략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할 수 있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흔히 '기독교'라고 부르는 종교 교리도 당연히 전파되었고 선교사들도 들어왔다. 단,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 계열은 아니고 스페인의 예수회가 주축이 된 천주교 중심이었다.

16~17세기 사이는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벌어져서 나라가 작살이 나 있었고, 서양의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 찰스 1세의 순으로 왕이 바뀌고 있었다. 신대륙에서는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 포카혼타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스페인에서는 종교 개혁을 저지하고 유럽을 다시 가톨릭화하기 위해 예수회가 만들어졌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조선도 한때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없지는 않았다. 황 사영 백서 사건 같은 병크 때문에 스스로 매를 번 것도 있었고. 하지만 그 기간이나 규모는 일본의 박해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가 극렬 "안티개독"이었으며, 정말 중세 종교 재판을 뺨치는 가학· 변태적인 악랄한 고문과 형벌로 신자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박멸했다. 천주교고 기독교고 그딴 건 그 양반이 알 바 아니었을 테고.

다른 때도 아니고 서양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이 나오는 동안 동양에서 저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천주교 기독교를 떠나서 일단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시기에 있었던 일들은 일본의 B급 새디스트 사극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어 왔다. <쇼군의 새디즘>처럼.
사람을 십자가에다 묶어 놓고 산 채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기, 미꾸라지가 가득한 어항에다 사람을 옷 벗겨서 집어넣기, 썰물 때 바다 갯벌에다가 십자가 기둥을 꽂고 사람을 거꾸로 묶어 놓기(그 상태로 나중에 밀물이 되면..;;) 이런 건 중세 서양에서는 못 본 장면 같다.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한, 육체적으로 끔찍한 형벌이나 고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의 기독교인을 색출, 고문, 박해하는 형태를 여러 가지로 연구하면서 철두철미하게 기독교 박해를 자행했다. 십자가나 예수나 마리아 상을 새긴 동판이나 목판 위를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후미에 제도는, 1629년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걸쳐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어디에 절을 해라", "입으로 믿음을 부인해라", 아니 단순무식하게 "김 일성 개XX 해 봐라" 식의 더 간단한 판별법도 있었을 텐데, 저건 그야말로 성상, 형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천주교 스타일에 최적화된 판별법이라 여겨진다. 나 같았으면 저런 건 걸릴 게 없었을 것이다. 마치 주의 만찬이 끝나고 남은 빵과 포도 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누가 몽땅 집어먹거나 여느 잔반을 처리하듯이 임의 처분해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소설 <바비도>에 나오는 것처럼, 성찬식에 대한 견해 하나만으로도 서양에서는 한때 순교 사유였다. 기독교인이 천주교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북한은 민주화에 실패하고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완전 김씨 일가의 철권독재 생지옥으로 전락했다. 종교도 주체사상 외에는 당연히 전면 말살. 스페인은 종교 개혁이 실패하고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아가서 20세기까지만 해도 누가 '개신교인'(천주교의 입장에서 기독교의 호칭)이 되면 잡혀 가는 나라가 됐다.

그것처럼 일본도 이 박해를 못 이기고 천주교/기독교를 막론하고 양놈(이 또한 엄밀히 말하면 양놈이 아니라 유대계=_=) 종교는 거의 씨가 말라 버렸으며, 그 상태가 오늘날에 이르렀다. 개신교 계열 교파가 나중에 안 들어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1억이 넘는 일본 인구 중에 그나마 명목상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은 몇십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배경이 있는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이슬람도, 공산주의도 아니고 나름 자유 진영의 강대국 선진국인 것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기독교 선교의 불모지로 여겨진다. 솔까말 기복신앙에 대한 반례이기도 하다. 뭐, 국가가 부유한 것만치 국민들이 다 잘사는 건 아니더라도 말이다. 쟤들이 과거에 한국의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긴 했지만 역사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아예 자국민에 대한 천주/기독교 박해는 그 이상이었다는 점도 고려할 사항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이 일본 선교를 가는 건 마치 요나가 니느웨로 설교하러 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앗시리아가 훗날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게 뻔히 보이니,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 싫어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생쑈를 했던가? 하지만 인제 와서 일본에서 니느웨 같은 대각성 부흥이 과연 일어나기라도 할지는 좀 회의적이다. 성경적으로 민족주의를 적용할 문맥이 있고 그게 별 의미나 영양가가 없는 문맥도 있는 법이다.

한국은 역사가 워낙 스펙타클하다 보니, 조선 정부에 의한 박해보다는 일제 말기에 일제로부터의 박해, 그리고 해방 후에 공산주의자에 의한 기독교 박해가 더 부각되는 편이다. 그리고 아시아의 여느 나라들과는 달리, 기독교회가 이 정도로 양적 성장을 이루는 이례적인 선례를 세계에 남겼다. 신자라면 감사할 일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8/21 08:31 2015/08/2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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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s의 역사 회상

1. 공용 대화상자

먼 옛날, Windows 3.0은 최초로 VGA를 지원하고 팔레트 API, 장치 독립 비트맵, MDI 관련 API가 추가되고, RTF 기반 winhelp 도움말이 추가되고, 버튼이 3D 회색으로 바뀌고 시스템 글꼴까지 가변폭으로 바뀌는 등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386 확장 모드는 2.1때 미리 도입됐다고 하니 그건 논외로 하더라도)
그런데, 3.0에 없다가 3.1에서 새로 추가된 기능들도 만만찮았다. 트루타입 글꼴과 OLE야 워낙 잘 알려진 3.1의 신규 기능이다만.. 이것 말고도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공용 대화상자' 컬렉션들이 역시 3.1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3.1 이전에는 GetOpenFileName 함수가 Windows API에 없었다는 뜻이다. 파일 열기/저장 대화상자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전부 직접 따로 구현해야 했다. MS Office 제품들이 한동안 독자적인 파일 열기/저장 대화상자를 갖추고 있었던 건 운영체제도 Windows 3.1 이전까지는 어차피 해당 기능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싶다. Word, Excel은 이미 1980년대부터 개발되었던 프로그램이니까.
그리고 파일 대화상자뿐만 아니라 색깔 선택, 텍스트 검색, 인쇄 같은 잘 알려진 공용 대화상자들도 3.1에서 처음으로 도입됐다.

옛날 도스 시절에 TUI 내지 GUI를 직접 구현하면서 파일 열기/저장 대화상자도 손수 만들어 본 프로그래머라면 공용 대화상자가 얼마나 혁신적인 물건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엔 아마 ShellAbout 함수도 3.1에 와서야 용례가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나 싶다. 3.0 때는 응용 프로그램별로 About 대화상자도 서로 다르게 생긴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용 대화상자에 이어 리스트/트리 컨트롤 같은 추가적인 "공용 컨트롤"은 Windows 3.1보다 한 박자 뒤인 Windows 95 내지 NT 3.51과 함께 도입됐다.
물론 일반 사용자에게 와 닿는 Windows 3.0과 3.1의 큰 차이는 저런 기술적인 요소가 아니라... 보조 프로그램으로 리버시(오델로 게임)가 짤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지뢰찾기'가 대신 도입된 게 아닌가 싶다.

2. 9x와 NT가 따로 놀던 API

과거에 Windows 95와 NT가 공존하던 시절에는 일반적으로 95의 API는 NT의 API에 부분집합으로서 완전히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보안이나 유니코드, 일부 고급 기능들이 빠져 있을 뿐, 공통 기능은 동일한 형태로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기능은 95에도 전혀 없는 건 아닌데 NT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따로 구현되어 API가 파편화되고, 이 때문에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 번거로움으로 인해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만큼 Windows 95팀과 NT 팀이 마치 MFC 팀과 Office 팀(리본 UI), Windows 팀과 Visual C++ 팀(CRT DLL)만큼이나 생각만치 교류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거 무슨 일본군 육군과 해군도 아니고.

그런 기능으로 무엇이 있느냐 하면 첫째는 사용 중인 파일을 다음 재부팅 때 지우도록 예약하는 기능이요, 둘째는 실행 중인 프로세스와 모듈들을 조회하고 heap 메모리 상태를 조회하는 기능이다.
전자는 NT에서는 MoveFileEx 함수를 쓰면 됐지만 95에서는 그 함수가 지원되지 않았다. 95에서는 wininit.ini라는 살생부 리스트를 수동으로 건드려 줘야 했는데, 이게 처리가 Windows가 아닌 도스 계층에서 행해지는지라 긴 파일 이름을 쓸 수 없어서 더욱 불편했다.

다음 후자의 경우, NT는 커널 API의 연장선 차원에서 EnumProcesses, EnumProcessModules, HeapLock, HeapWalk 같은 함수가 제공되었다. 카테고리의 명칭은 Process status API (PSAPI)라고 불렸다.
그러나 95는 Tool Helper라는 특수한 디버그용 라이브러리 개념으로 CreateToolhelp32Snapshot 이후 [Heap/Module/Process/Thread]32[First/Next] 이런 식으로 함수를 제공했다. 함수를 초기화하고 사용하는 방법이 서로 완전히 딴판이라는 얘기다.

공교롭게도 이 두 기능은 모두 설치/제거 프로그램을 만들 때 필요한 기능이다. "이 DLL은 다음 프로그램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음 재부팅 때 제거하시겠습니까?"를 구현하려면 말이다. Windows Installer 런타임은 당연히 9x용과 NT용이 이런 점을 감안하여 제각각 구현되어 있었을 것이다.
결국 Windows 2000에 가서야 지금까지 9x에만 있던 tool help library를 NT 계열이 마저 흡수하는 걸로 문제가 종결되었다. 마치 95에서 첫 도입되었던 Plug & play를 드디어 2000이 수용했듯이 말이다. 게다가 궁극적으로는 9x 계열 자체가 없어지기도 했고.

3. 그래픽과 사운드 성능 향상

19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컴퓨터의 성능이 향상됨으로써 Windows에 생긴 3대 변화를 들자면 난 다음을 꼽는다. 예전에 한 번씩은 다 언급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1) 화면이 막 고쳐지는 곳으로 마우스 포인터를 가져가도 깜빡임이 없게 되었다. 그래픽 카드가 마우스 포인터 주변은 건드리지 않게 하드웨어적인 처리를 진작부터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즘 형광등이 깜빡임 없이 바로 켜지기 시작한 것만큼이나 신기한 일이다.

초창기에는 흑백의 기본 포인터만 처리가 되지, 컬러 내지 심지어 애니메이션이 있는 custom 포인터, 그리고 마우스 포인터 자취까지는 차마 깜빡임 방지 처리를 다 못 했다. 그러나 이것도 2000년대부터는 제약이 없어졌다.
Windows 2000은 아예 안전 모드에서 16컬러 VGA로 동작할 때에도 마우스 포인터의 깜빡임이 없는 게 무척 신기하다. NT가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2000부터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2) 멀티웨이브가 되기 시작한 것도 아주 신기한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Windows에 사운드/멀티미디어 지원이 처음으로 도입됐던 3.1/95 초창기에는 한 번에 한 프로그램만 사운드 카드의 사용이 가능했다. 그리고 다른 프로그램은 사운드를 이용할 수 없었다! PC에 사운드 카드가 버젓이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운드 초기화가 실패하는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던 것이다.

9x 시절에는 일부 고급형 사운드 카드만이 멀티웨이브가 가능했다가 2000부터는 드디어 그냥 아무데서나 멀티웨이브가 가능해졌다. 이쯤에서 미디 역시 노래방 수준의 소프트웨어 신시사이저로 대체되었고 XP쯤부터는 오디오 CD까지 모든 사운드의 음원이 waveform으로 통합되었으며, Vista부터는 장치가 아닌 스피커/응용 프로그램별로 구분해서 볼륨을 지정하는 게 가능해졌다.

오늘날도 PC에 따라서는 출력 단자에 헤드폰/스피커 같은 게 전혀 연결돼 있지 않으면 사운드의 초기화가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PC 자체에 스피커가 달려 있는 노트북 PC에서는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 옛날에도 입력 단자를 감지해서 녹음 버튼의 성공/실패를 감지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던 것 같다.

(3) 그리고 제일 늦게 생겼고 Windows Vista가 이뤄낸 쾌거 중 하나는 역시 동영상 장면도 Print screen으로 간단히 캡처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창을 움직였는데 동영상 영역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화면 캡처를 하면 그냥 컬러 키를 나타내는 이상한 단색만 캡처된다거나.. 이런 것도 이미 10년쯤 전부터 옛날 추억이 됐다.
기술적으로 따지고 보면 동영상만 추가적인 하드웨어 가속을 받는 게 아니라 아예 모든 그래픽이 동등하게 하드웨어 가속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GDI조차도 그 위에서 돌아가니까 BitBlt 같은 GDI API로 간단하게 캡처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Vista가 처음으로 선보인 flip3d나 live preview에도 동영상이 실시간으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4. Windows 10

그리고 그 Windows 95가 출시된 지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Windows 10이 출시되었다. 95 출시 당시에 중학생이던 본인은 뭐 이미 30대 중반의 성인이 됐고.
2015년에 마소 소프트웨어의 최대의 이슈는 단연 새 운영체제와 새 개발툴이다. Windows 10과 Visual Studio 2015.

IE가 11에서 종결되고 Edge로 넘어가는 것만큼이나 마소에서는 Windows 10이 독립된 브랜드 형태로는 Windows의 마지막 버전이 될 것이고 그 뒤로는 그때 그때 인터넷 업데이트만으로 유지보수를 할 것이라고 밝혔댄다.. 그 정책이 실제로 언제까지나 유지될지는 모르겠다.

하긴, 매번 XP, Vista 같은 브랜드명에다 숫자에다.. 이런 발상 자체가 식상해지고 아이디어가 고갈될 때도 되긴 했다.
허나 과거에 마소 내부에서는 IE 팀이 Windows 팀으로 합병될 뻔한 적도 있었고, 또 이미 윈도 7 시절부터 이건 NT 커널 기반 Windows의 마지막 버전이고 그 뒤로는 Midori던가 뭐던가 완전히 새로운 기반의 운영체제가 나온다는 식의 설레발도 나돌았다. 트렌드라는 건 언제든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니 변화를 신중하게 지켜봐야겠다.

그래도 마소에서 이번 Windows 10을 뭔가 완결판이라는 컨셉을 두고 만들었다는 티가 벌써부터 팍팍 느껴진다.
외형이 8하고 별 차이가 없는 줄 알았는데, 프로그램의 제목이 가운데 정렬이던 것이 다시 왼쪽으로 복귀한 건 좀 사소한 점일 테고. ㅋㅋ
그리고 운영체제의 버전뿐만 아니라 커널의 내부 버전 번호도 Vista 이래로 지금까지 6이던 것이 7~9를 건너뛰고 10으로 맞춰졌다.
Windows 10이 저런다고 하니까 마치 Mac OS X 같은 느낌도 든다. 저 X도 10을 나타내니까.. 인터넷을 뒤져 보니 당연히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한편, Visual Studio의 경우, 2012 이래로 외형 색상의 변화는 크게 없다. 그럼 그렇지, 매 버전마다 비주얼을 다 뒤집어 엎는 것도 언제까지나 가능한 건 아니겠지 싶었다. ^^ 2013 커뮤니티 에디션이 나온 것부터가 굉장히 놀라웠는데, 갈수록 개방적으로 바뀌는 한편으로 이클립스 내지 xcode의 전통적인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
운영체제, 브라우저, 개발툴에서 모두 마소가 종전의 소프트웨어 개발 방식 내지 패러다임을 종결하고 단절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듯하다. 확실히 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5/08/03 19:38 2015/08/0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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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프트웨어의 추억을 발굴하는 작업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몇 달 전엔 비트맵 그래픽 에디터 얘기를 했다. 구글링으로도 좀체 정보를 발견할 수 없던 Splash와 Image72를 찾아 냈다. 이어서 오늘은 도스용 셸 유틸리티 얘기를 해 보겠다. 출처를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한 외국산 프로그램의 정체를 또 파악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름하여 Packard Bel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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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도스 시절엔 부팅이 끝나면 화면에 뜨는 건 시꺼먼 화면에 C:\ 프롬프트가 전부였다. 이런 인터페이스로는 초보자건 전문가건 컴퓨터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몹시 불편했기 때문에, 컴퓨터에 존재하는 다른 프로그램들을 빠르고 편하게 실행시켜 주는 '셸'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이 별도로 여럿 만들어지곤 했다.

전문가를 위해서는 MDIR이나 노턴 커맨더처럼 파일 관리 유틸리티를 겸하는 셸이 쓰였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파일 정보만 표시하면 되니 보통 텍스트 모드에서 실행되었다.
그러나 초보자를 위해, 당시의 Windows 3.0에 준하는 GUI를 표방하면서 알록달록한 아이콘이 나오는 그래픽 셸도 있었다. 골치 아픈 단축키를 외울 필요 없이 마우스 클릭만 하면 원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었다.

MS-DOS 버전 4인가 5부터 제공되었던 '도스셸'은 그래픽 모드에서 실행되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래도 전자와 후자 중에서는 전자의 성격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래도 GUI의 불모지인 도스에서 나름 마우스 드래그 드롭을 구현했고, 프로그램의 색상과 화면 모드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자, 그 와중에 저 '패커드 벨'이라는 프로그램은 우리 집 컴퓨터에 처음부터 있었던 프로그램은 아니고, 친구 집 컴퓨터에서 접했다. 그런데 GUI가 굉장히 고퀄이고 화면이 예뻤다. 16색 VGA에서 실행되는데 투박한 표준 팔레트를 쓴 게 아니라 보다시피 자체적으로 팔레트 색상을 재정의했으니 더욱 이색적인 느낌이 났다. 색상도 그렇고 글꼴도 그렇고, 알록달록한 아이콘까지, 뭔가 프로그래머가 대충 발로 그린 게 아니라 그래픽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티가 났다. 어린 시절에 본인은 저렇게 "나만의 세계가 느껴지는 비주얼"을 보면 아주 사족을 못 썼다.

저 스크린샷에서는 안 보이지만, 원래는 마우스 드라이버가 있건 없건 마우스 포인터도 나타난다. 그런데 포인터도 운영체제가 그냥 기본으로 주는 작고 투박한 화살표가 아니라, 무려 살색의 사람 손가락 모양이다. 요즘으로 치면 웹 브라우저에서 링크를 가리킬 때 나타나는 그 마우스 포인터와 비슷하다.
화살표 키를 누르면 지금의 마우스 포인터 위치에서 그 화살표 방향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버튼으로 포인터가 이동하는데, 이것도 즉시 되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궤적을 그리면서 이동한다.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워드 프로세서나 그래픽 에디터가 아니고, 그렇다고 게임도 아니고.. 자체 한글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는 외국산 도스용 유틸리티가 그래픽 모드에서 가변폭 영문 글꼴 출력까지 구현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도대체 이 프로그램은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서 뒤늦게 인터넷을 수소문했지만, 정보를 도저히 얻을 수 없었다.

본인은 이 프로그램의 이름이 Pen Bel(l) Desktop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왕년에 베이직 프로그래머였으니 PB라고 하면 파워베이직의 이니셜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저 추억의 프로그램의 실행 파일에도 PB라는 문자가 포함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저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검색이 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얻은 곳은 IE is evil!로 유명한 이 사람의 GUI 갤러리 웹사이트였다.
도스는 말할 것도 없고 Windows 3.1 시절까지만 해도 기존의 허접 구닥다리 '프로그램 관리자'를 대체하는 싸제 셸 유틸이 수요가 있었다. 노턴 데스크톱, 그리고 MS의 흑역사 Bob 같은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어? Packard Bell 내비게이터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3.5 버전은 완전히 Bob처럼 그래픽 기반으로 바뀌었지만, 1.1은 보아하니 도스용과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색상과 외형이 웬지 도스용 프로그램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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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토리얼, Support, your software처럼 큰 메뉴 구성이 꽤 비슷해 보이는 데다 자음 이니셜이 일치하기도 하니 동일 회사의 프로그램일 거라는 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이 키워드로 구글링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단 '패커드 벨'은 컴퓨터 제조 회사인지라 걸려 나오는 것은 온통 컴퓨터 사진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어느 국내 블로그에서 드디어 월척을 낚는 데 성공했다. 내가 찾던 바로 그 프로그램의 스크린샷이 나온 것이다. 프로그램과 개발사 이름이 동일하게 '패커드 벨'인 듯하다.
이 회사는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가 주력 상품이고, 프로그램은 자기 컴퓨터에 번들로 설치되는 것 위주로만 개발한 듯하다. 소프트웨어만 전문으로 만든 게 아닌데도 1991년경에 도스와 Windows용 셸을 모두 그것도 상당히 뛰어난 퀄리티로 만든 것이 무척 대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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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도스용 '패커드 벨' 셸은 메뉴 구조가 좀 특이했다. ESC를 누르면 도스셸이나 '로터스 웍스' 같은 붙박이 고정 프로그램이 있고, 'Your software'을 골라야만 아까와 같은 프로그램 아이콘 리스트가 나타났다. 패커드 벨 컴퓨터에는 원래 '로터스 웍스'도 번들로 제공되었던 듯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로운 프로그램을 등록하는 화면이다. 아이템에 사용할 '아이콘', 밑에 표시할 텍스트, 그리고 실제로 실행할 프로그램 이렇게 세 가지 정보를 서로 다른 화면에서 지정해 줄 수 있다. 아이콘은 저 35종류의 기성 그림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고 다른 외부 그림 파일을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게 특이하고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이다. 기성 그림들은 각각 어떤 컨셉으로 만든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저 스크린샷에서는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원래 이 프로그램은 하드디스크에 존재하는 모든 실행 파일들을 아래의 리스트에다가 표시해 준다. 그래서 사용자는 일반적인 파일 열기 대화상자를 다룰 때처럼 매번 디렉터리를 오갈 필요 없이 한 목록에서 실행 파일을 곧장 선택할 수 있었다. 이건 사실 MS 도스 셸에도 있던 기능이다. 2~30여 년 전, 한 하드디스크가 크기가 수십~100수십 MB밖에 하지 않던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다시 저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다면 무척 감회가 새롭고 흥미진진할 것 같다.

도스 셸 하니까 생각나는데, 옛날에 MS-DOS 4.0은 우리가 아는 그 4.0만 있는 게 아니라 '멀티태스킹 에디션'이라고 유럽 쪽에서 주로 쓰인 다른 브랜치가 있었다고 한다. 16비트 Windows가 사용하던 New Executable 포맷도 사실은 이때 처음으로 제정되었다고 하고.

또한, 국내에서 개발된 그래픽 위주 도스 셸로는 먼 옛날(1993년쯤) 이 종하 씨가 개발한 '능금'이라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옛날에는 '파란연필'이라는 텍스트 에디터도 개발했던 분인데 본인은 요것들은 옛날 컴퓨터에서 다 직접 써 봤다.
'능금'은 셰어웨어였으며, 비등록 공개판은 등록할 수 있는 그룹과 프로그램 개수에 제한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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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셸로서 '능금'이 지닌 가장 독특한 점은.. 한 아이템에 대한 아이콘을 최대 5개까지 연달아 지정해서 초보적인 수준의 '움짤'을 만들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외부 파일 사용 가능함. 저 스크린샷을 보면 '그래픽'의 경우 물결이 출렁거렸고, '게임'은 테트리스 블록이 내려가는 모습이 반복되곤 했다.
그래도 '능금'의 기본 팔레트 화면과 저 아이콘들은 '패커드 벨'에 비하면 좀 아마추어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 ^^

Posted by 사무엘

2015/07/07 08:34 2015/07/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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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과 사망의 차이

1.
1993년 가을에 서해훼리(페리) 호 침몰 사고 때의 일이다. 탑승자들을 구조하고 수색하는데 웬일인지 이 배의 최고 책임자인 선장이 행방이 묘연해 보였다. 그런 와중에 일각에서는 "선장이 혼자 살아서 배를 탈출하여 몰래 튀는 게 목격됐다"라는 카더라 루머가 나돌았고, 언론은 이것을 확인도 안 하고 냅다 물어서 동네방네에 소문을 냈다.
이에 경찰조차 별 의심 없이 이 말을 믿게 되었으며 선장을 대문짝만 하게 공개 수배하고 가족들을 압박하여 선장더러 자수를 권유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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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말은? 선장은 수색 닷새 만에 기관장과 함께 배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서해훼리호의 선장은 세월호의 선장 같은 급의 인간말종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예전의 선장 생존 보도는 국내 언론 역사에 길이 남을 오보 흑역사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기자들은 선장의 유가족을 찾아와서 싹싹 빌었다. 범죄자를 숨겨 주고 있다는 누명을 이제야 벗은 유가족들은 "당신들이 선장이 살아 있다고 말했으니 이제 그 선장을 살려내 보시오"라고 그들을 꾸짖었다.

2.
1996년 가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에는 싸리비를 만들기 위해 싸리나무를 벌목하러 혼자 나갔던 표 종욱 일병이 덜컥 실종됐다. 군에서는 제대로 수색도 안 하고 이걸 전시 무단 탈영으로 단정짓고 탈영병을 찾는다는 방송을 전국에 내보냈다. 그의 집엔 헌병대 사람들이 와서 표 일병 내놓으라고 마치 사채업자가 빚독촉 하듯이 수시로 온갖 민폐를 끼쳤다.

그러나 이 역시 결말은? 그는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건 부끄럽게도 군 당국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수색해서 찾은 게 아니라, 사살한 무장공비에게서 노획한 '일기'에서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여 그걸 토대로 추적한 덕분에 찾은 것이었다. 그 무장공비는 위장을 위해 표 일병에게서 국군 군복을 빼앗은 상태였으며, 그 대신 표 일병은 시신 발견 당시 속옷 바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헌병대 관계자들은 표 일병의 유가족 앞에서 그야말로 석고대죄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생사도 알 수 없는 치욕스러운 탈영병과, 현충원에 묻히는 영예로운 전사자는 그야말로 한 끗발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전시 탈영은 평시 탈영보다 처벌이 훨씬 더 무겁다!)

무장공비는 그를 결박하고 목을 졸라서 살해했다. 총은 시끄러운 데다 걔네들 입장에선 안 그래도 총알 한 알이 극도로 아까운 지경일 텐데 당연히 총을 썼을 리는 없다.
또한, 생지옥 북한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남파 간첩이나 무장공비까지 됐을 사람이라면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성이라고는 그야말로 완전히 제거된 인간 흉기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수함을 좌초시키고 비밀 작전에 실패했다고 동지들끼리도 무자비하게 처형을 했는데, 하물며 자신을 발견해 버린 민간인도 아니고 적군을 살려 둘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생포해서 인질극 협상을 벌일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기록을 찾아 보니 표 일병은 군 복무 당시 계급이 이미 일병이었다.
“이제 일병을 달고 군생활에도 적응이 되었지만 원인모를 한숨과 동경이 계속되고 있다. 언제까지 이 신세타령을 해야 하는지 내자신도 한심하다.” (고인의 일기 중)

그럼 전사자니까 이제 공식 매체에서는 '표 상병'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제설을 하다가 사고로 죽어도 작전 중 순직이기 때문에 1계급 특진 추서인데.
탈영 중으로 잘못 알려졌을 때의 계급이 너무 깊게 인식돼 버려서 그런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거짓 선동이라든가 오보의 해악은 더욱 큰 셈이다. 한번 생긴 사람의 편견은 쉽게 고쳐지지 않으니까.

* 그러게 사람이 없어진 듯이 보이면 덮어놓고 악한 추측부터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긴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도 따지고 보면 그런 심성을 바탕으로 벌어졌다. 이때 모세는 시신이 발견된 게 아니라 멀쩡히 살아 돌아오기도 했고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24 08:30 2015/06/2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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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개발과 관련하여 일반적인 항공· 우주덕, 역덕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사고는 아폴로 1호나 13호, 그리고 챌린저와 컬럼비아 우주왕복선처럼 유인 우주선에서 발생한 인사사고 위주이다. 그게 임팩트가 크다.

하지만 컴퓨터공학 관련 수업에서 종종 언급되는 우주 사고는 저런 것들보다는 덜 알려진 무인 우주선의 오동작· 자폭 사고 두 건이다. 바로 (1) 1999년에 미국이 발사한 화성 기후 탐사 인공위성의 추락 사고와, (2) 1996년 유럽 우주국에서 발사한 정지 궤도 진입용 아리안 5호 로켓의 자폭 사고이다. 이것들은 다른 기계 구조적인 실수· 결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발사체 포함 로켓을 제어하는 소프트웨어의 버그로 인해 발생했기 때문이다.

전자는 서로 다른 팀의 엔지니어들이 같은 물리량에 대한 단위계를 제각각 다르게 가정하고 코딩을 하는 바람에, 계산 결과의 scale이 산으로 가 버려서 위성이 추락한 정말 안습한 사례이다. 흔히 길이(미터 vs 인치)의 착오라고 알려져 있는데, 더 자세한 문헌을 찾아 보니 사실은 단위 시간당 힘(킬로그램힘 vs 파운드)의 착오이다. 뭐 어느 것이든 표준 단위계와 비표준 단위계의 착오인 건 마찬가지이고 우리나라로 치면 제곱미터와 평, 킬로그램과 근 같은 게 헷갈린 것과 동일하다.

이 때문에 무려 9개월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기껏 화성까지 잘 가서 궤도에 진입하려던 위성은 예상보다 고도가 급격히 낮아졌으며, 화성의 뒷면으로 들어가는 예상 시각보다 더 일찍 통신이 끊어졌다가 다시는 통신이 회복되지 못했다. 화성의 대기권에까지 들어가 버린 위성은 대기와의 마찰열로 인해 파괴되고 추락했다.

지구로부터 수천만 km나 떨어져 있는 다른 행성에서 벌어진 사고이다 보니, 사고 장면도 전해지는 게 없다.
사고의 원인이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이었음이 밝혀지자 미국 내부에서도 “우리도 미터법의 국내 도입이 시급합니다”라는 여론이 당연히 일었다. 그러나 오랜 관행을 바꾸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한편, 후자의 사고도 사연이 만만찮게 안습하다.
로켓을 제어하는 프로그램의 내부에는 64비트 float 부동소수점을 16비트 int로 형변환을 하는 루틴이 있었다. 알다시피 이건 양 자료형의 표현 범위의 차이가 엄청나다. 단순히 소수점이 잘리는 것 이상으로 수의 표현 가능한 범위 자체가 잘릴 위험이 높다.

다만, 이전의 아리안 4호에서 이게 별 문제가 된 적이 없었던 관계로 이 부분을 맡은 엔지니어는 앞으로도 오버/언더플로우가 발생할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성능 향상을 위해 범위 검사를 하는 옵션을 제외하고 프로그램을 빌드해서 우주선에다 탑재했다.

그런데 아리안 4호와 5호는 로켓의 규격이 서로 달랐으며, 일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완전히 엉뚱하게 형변환된 정수 숫자가 예외 처리도 없이 계산식에 들어가면서 프로그램의 내부 상태는 엉망이 되었으며, 사태 극복을 할 수 없던 컴퓨터 프로그램은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설정되어 있던 자폭 모드로 진입했다. 그래서 아리안 5호 로켓은 발사된 지 겨우 37초 만에 기수를 아래로 숙이면서 추락했다.

중앙 통제실은 싸늘한 초상집 분위기로 변함. 망연자실한 직원들..;; (☞ 동영상 링크)
무인 우주선인 관계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둘 모두 수억 달러급의 손실을 초래했다. 나로 호의 발사 실패하고도 급이 다른 게, 아리안 5호만 해도 나로 호보다 5배 이상 더 무거운(= 크기도 더 큰) 로켓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고스란히 폭죽으로 전락해 버렸으니.

학부 시절에 소프트웨어공학 수업 시간 때 들은 얘기를 먼 훗날 대학원에서 프로그래밍 언어 수업에서 다른 교수로부터 또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전자 시간에는 체계적인 소프트웨어의 테스트/검증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면서, 후자 시간에는 프로그래밍 언어 차원에서 타입 검증과 예외 처리의 필요성을 얘기하면서 저것들이 타산지석 사례로 소개되었다.

그나저나 아리안 5호에 들어가는 프로그램도 Ada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Ada에는 배열 첨자 범위라든가 형변환 overflow 예외를 감지하는 기능이 있고, 그걸 끄는 옵션도 별도로 존재한다.
C/C++처럼 무작정 프로그래머에게 모든 걸 맡기기보다는 적당히 언어 시스템이 개입해서 안전을 추구하는 것도 많다 보니 Ada가 프로그래밍 언어계에서는 꽤 noble한 대접을 받는가 보다. 하지만 배열 첨자를 마치 함수 호출처럼 ()로 하고, 명칭에 대소문자 구분이 없는 것은 좀 Basic스럽고 요즘 언어가 아닌 구시대 언어 같은 느낌이 든다.

참고로 Ada는 명칭 자체가 여자 이름인 반면, 코볼은 주 설계자가 수학자 출신의 여성 해군 장성이다(그레이스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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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9 08:36 2015/02/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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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임시 철도

철도 얘기를 하기 위해 먼저 컴퓨터 비유를 들어 보겠다.
어떤 복잡한 컴퓨터 아키텍처가 완전 처음으로 발표되었고 이걸 타겟으로 하는 고급 언어 컴파일러를 완전 최초로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상황일까?

이 경우, 일단 그 언어를 타겟 기계어로 옮기는 컴파일러를 그 언어와 타겟 환경 기준으로 만든다. 그런데 그 컴파일러의 소스 자체가 컴파일되지 못했으니 아직 그 언어를 타겟 기계어로 곧장 옮길 수는 없다.
이럴 때는 원래 목표로 하는 아키텍처보다 구조가 훨씬 더 간단한 가상 기계 내지 임시 P-code 아키텍처를 설계한 뒤, (1) 원래 언어를 임시 기계어로 옮기는 컴파일러와 (2) 임시 기계어 코드를 돌리는 가상 머신을 타겟 기계용으로 야메로 만든다. 둘 다 성능 따위는 쌈싸먹어도 되고 그냥 정확하게 돌아가기만 하게 극도로 단순하게 후딱 만들면 된다.

그 뒤, 원래의 컴파일러 소스를 (1)을 이용하여 컴파일하면 임시 코드 기반이긴 하지만 일단 타겟에서 돌아가고 원래 타겟 기계어를 생성하는 컴파일러가 완성된다. 이렇게 생성된 컴파일러를 이용하여 원래 소스를 다시 컴파일하면.. 드디어 타겟 기계에서 돌아가는 타겟 기계어 컴파일러가 완성된다. 자기 자신도 컴파일할 수 있고, 다른 소스도 컴파일할 수 있고.. 이제 컴파일러 2.0은 1.0을 이용하여 개발한 뒤, 그 2.0 소스를 2.0 컴파일러로 다시 빌드하는 식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자, 이런 얘기가 철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컴퓨터가 난수를 생성하기 위해 먼저 난수가 필요하고, 자동차나 발전기가 동력을 생산하기 위해서 먼저 최소한의 동력이 필요하며, 또 고급 언어로 작성된 고급 언어 컴파일러는 먼저 동작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소스부터가 컴파일되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철도 역시 부설을 위해서 다른 보조 철도가 먼저 필요하여 건설된 경우가 드물지만 있다.

가까운 예로는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온수-신풍 구간 개통 때의 일이다. 전동차를 천왕 차량기지에다 반입하기 위해 경인선 오류동 역에서 기존 경기화학선 선로를 이용하여 차량을 최대한 접근시켰다. 거기에서 최종 목적지까지는 임시 선로를 지상에다가 깔아서 옮겼다.
그러니 1990년대 중반에 거기 주변을 살았던 사람들은 거대한 지하철 전동차가 마치 지상 전차처럼 이동해 가는 걸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차량의 견인은 디젤 기관차가 했겠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한 우진 님 블로그, 그리고 '전동차를 사랑하는 모임' 다음 카페의 게시글을 성지순례 하시기 바란다.
차량 반입이 끝난 뒤엔 그 임시 선로는 곧장 철거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예는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해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던 시절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히 먼 옛날이다.
흔히 우리나라 철도에서 스위치백이라고 하면 영동선에만 딱 한 군데 있다가 지금은 없어진 그 스위치백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영동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건설된 철도이고, 더 옛날의 일제가 한반도에다 건설한 철도 중에도 스위치백이 없지는 않았다. 단지 그것들은 한반도의 최하 중· 북부 구간 한정이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로서는 실감이 잘 안 날 뿐이다. 대표적인 예가 지금은 흑역사가 된 금강산선이고 말이다.

그런데 중앙선도 아니고 경부선의 건설 과정에서 작업을 위해 인근에 보조 철도가 그것도 스위치백 형태로 건설된 적이 있었다.
바로 경북 청도군에 있는 삼성-남성현 역 사이에 터널을 뚫는 구간이다.
서울 사람이라면 강남에 있는 지하철 2호선 삼성 역밖에 기억이 안 날지 모르나, 철덕이라면 경부선의 대구 이남에 있는 삼성 역도 알 것이다.

거기는 경부선 본선이 부설되는 공사 현장의 지대가 높고 좁고 험준하여 공사 자재를 운반하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그래서 무려 8단계의 스위치백을 거쳐서 터널의 남북 양 끝을 우회하여 연결하는 임시 선로를 먼저 만들게 되었다. 이건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도 처음 시도하는 대공사였다고 한다.

경부선의 대전-대구도 아니고 대구-부산 사이에 이런 곳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컴파일러로 비유하자면 산을 직통으로 뚫는 터널은 본디 기계어요, 우회하는 임시 선로는 그 임시 P코드인 셈이다.
그 스위치백은 경부선의 완공 이후에는 응당 철거되었고 철거된 지 무려 100년이 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흔적을 아주 약간은 확인할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이 블로그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Posted by 사무엘

2015/02/11 08:37 2015/02/1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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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부에 있었던 옛 철도들

서울 중에서 1970년대 이후부터 육성되기 시작한 강남 일대는 바둑판 모양의 반듯한 도시 디자인에 도로 폭이 무진장 넓고 지하철 역시 엄청나게 많이 다닌다(2, 3, 7, 9, 분당, 신분당!). 하지만 일반열차가 다니는 철도는 완전히 불모지이다. 그나마 고속철 수서 역이 개통하고 나면 완전 동남쪽 끝자락 정도나 장거리 간선 철도의 혜택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반면 강북, 특히 서부 지역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포함한 먼 옛날부터 계속 인서울이었다. 자동차 교통이 발달하기 전부터 형성된 도시이기 때문에 여기는 도로 폭이 강남만치 여유가 있지는 않으며, 꼬불꼬불한 선형에 오거리 같은 교차로도 있고 철도도 진작부터 이것저것 많이 건설되었다. 1899년에 경인선보다 몇 달 먼저 개통했던 노면 전차 말고도 이런 예가 몇 가지 더 있었다.

물론 그 철도들은 오늘날은 남아 있지 못하고 다 폐선되고 없어졌다. 주된 이유는 자동차 통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서울 노면 전차는 1899년에 경인선보다도 몇 달 더 일찍 개통해서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다 겪은 유서 깊은 궤도 교통수단이지만, 서울 지하철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폐선되었다. 그리고 21세기가 돼서야 제일 최근에 없어진 건 용산선 지상 구간이 되겠다. 뭐, 엄밀히는 없어진 건 아니고 그 선형 그대로 지하로 들어가서 경의선과 공항 철도의 복층 공용 구간이 된 것이지만.

그것 말고 서울에, 특히 마포 일대에 있었던 철도는 다음과 같다. (출처: 다음 철도 동호회)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당인리선

그나마 이 바닥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는 철도이다. 경의선의 지선인 용산선에서 또 분기하는 지선으로, 지금의 홍대입구 역 인근과 남쪽의 서울 화력 발전소(구 당인리 발전소)를 연결하였다. 발전소의 완공보다 살짝 이른 1929년에 개통하여 발전소가 사용하는 석탄 연료를 수송해 왔으며, 엄청난 옛날 리즈 시절에는 부분적으로 여객 수송도 했는가 보다. 그러니 '방송소앞' 같은 역까지 있었을 터. 발전소를 연결하는 철도라는 점에서는 오늘날 장항선의 지선인 서천화력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철도는 발전소가 석탄 연료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존재의 의미가 없어졌으며, 가성비가 안 맞게 되자 1982년 6월 10일에 폐선됐다. 지금 '서울 마포구 어울마당로'가 옛 당인리선의 선형을 나타낸다. 홍대앞 걷고 싶은 거리, 예술의 거리 일대 말이다. 건물들이 어설프게 곡선 선형으로 좁게 다닥다닥 붙었고 길쭉한 주차 공간도 있는 거기 말이다.
'동'이 2차원 평면 공간을 나타낸다면 도로명 주소 체계에서 도로명은 1차원 선형을 한꺼번에 나타낼 수 있어서 좋다.

오늘날은 당인리선뿐만이 아니라 당인리 발전소 자체조차도 지하화하네 이전하네 하면서 존폐가 불투명해져 있는 듯하다.
허나 옛날엔 한강과 인접한 당산, 이촌 일대만 해도 오늘날로 치면 마곡, 세곡, 내곡에 준하는 완전 서울 외곽이었다. 조선 시대엔 근처에 아예 사형장이 있을 정도였는데(새남터, 절두산 순교 성지!) 하물며 비슷한 위치에 발전소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본인은 '당인리선'이라는 단어를 영화 <튜브>에서 처음으로 접했다. 물론 고증과 개연성 따위는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보낸 설정 속에서 등장한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당인리선은 그 당시로서도 무려 20년 가까이 전에 이미 폐선되고 없구만, 지하철이 그 선로를 타고 질주해서 발전소와 충돌하여 대형 참사를 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2. 경성순환선

경성/경룡/외곽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이 노선은 철도 노선이라기보다는 열차 운행 계통의 이름이다. 당인리선과 비슷한 1929년에 개통하여 잘 영업하다가 1944년에 폐선되었는데, 폐선 이유는 수요 감소나 자동차 통행 같은 건 아니다. 연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전쟁 물자 공출로 인한 폐선이다.

이 열차는 경의선 서울, 신촌을 경유했다가 신촌-연희에서 경의선과 용산선을 연결하는 짤막한 신선 구간으로 들어간 뒤, 용산선 서강, 공덕리를 경유하여 용산으로 간다. 순환이라고는 하지만 용산에는 삼각선이 없는 관계로 서울로 고리를 완전히 완성하지는 못했다. 경성의 야마노테선 같은 상징성을 부여하기에는 노선 길이가 매우 심하게 아담하긴 하다. (서울-용산 9km 남짓.)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성순환선의 신선이라 할 수 있는 경의선-용산선 연결 구간은 오늘날 서울 서대문구의 신촌로10길과 신촌로11길에 대응한다! 창서 초등학교 서쪽의 그 길 말이다. 물론 당인리선보다는 훨씬 더 일찌 폐역했기 때문에 흔적을 찾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시가지가 대놓고 구부정하게 철길 부지를 따라 형성되었다는 티가 난다.

요약하자면 당인리선은 용산선의 남쪽으로 뻗고, 경성순환선의 연결선은 경의선 방면이니까 용산선의 북쪽으로 뻗는다.
용산선은 원래 경의선의 본선 구간이었는데 1920년대 초에 서울-신촌 신선이 생기면서 여기가 경의선 본선으로 바뀌고 용산선은 잉여로 전락했다. 그러니 이미 만들어 놓은 용산선을 활용하자는 차원에서 당인리선과 경성순환선이 생겼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나중에는 경선순환선은 일제 말기에 진작에 없어졌고, 당인리선도 없어졌다 보니 용산선도 통째로 지하로 들어가 없어졌고 말이다.

재미있지 않으신지? 이런 게 바로 강남에서는 찾을 수 없는 서울 철도 발달사이다.
폐선 덕후라면 이런 용산선과 지선들뿐만 아니라 경의선 자체에 남아 있는 옛 서소문, 아현리 역의 흔적에도 집착할 것이다.
오늘날 남북이 통일되고 서울에서 중국· 러시아로 가는 철도의 필요성이 부각된다면.. 기존 경의선의 시내 구간을 2복선 이상으로 확장하는 건 진작에 물 건너 가 버렸으니.. 아예 서울을 우회하여 멀찌감치 외곽에서 경부선과 경의선을 연결하는 철도가 생겨야 하지 않나 싶다. 가령, 소사-원시선을 남북으로 길게 늘어뜨려서 말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오래 된 도시는 도로의 폭이나 교차로 같은 것뿐만이 아니라 길거리 위로 전봇대와 전선이 치렁치렁 달려 있는지, 아니면 전부 지중화되어 있는지를 봐도 구도심인지 신도시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이것은 분당, 일산이 미관이 아주 깔끔해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5/01/14 08:30 2015/01/1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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