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회사 사이의 알력 다툼 사례

서울 지하철 중에 1, 3, 4호선은 지하철에다가 일명 국철이라고 불리는 코레일 광역전철이 한데 붙어서 직통 운행한다는 것을 다들 아실 것이다. 사실, 1호선은 지하철 구간은 매우 미미하고 압도 다수가 지상 광역전철이다. 비록 그 미미한 구간이 서울의 최고 중심부 도심이긴 하지만 말이다.

1호선은 직· 교류 절연구간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지하철과 광역전철이 동시에 건설되고 개통되기라도 했다. 애초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내지 건국일(1948년)을 일부러 광복절과 동일한 8월 15일로 맞췄는데, 서울 지하철 첫 개통일(1974년)까지 거기에다 맞췄다. 그 날은 사실 서울 지하철 1호선(빨간 전동차)에다가 수도권 광역전철(파란 전동차)이 동시에 개통한 날이기도 했다. 이건 overloading이라는 단어의 적절한 예시인 것 같다.

그러나 훗날 개통한 4호선의 경우는 직결 계획이 전혀 없던 과천선을 서울 지하철과 뒤늦게 한데 연결하다 보니, 절연구간뿐만 아니라 좌측통행과 우측통행도 입체교차로 뒤바뀌는 꽈배기굴이 등장하게 됐다(남태령-선바위).
사실, 넓게 보면 1호선 지상의 노량진-대방 사이에도 꽈배기굴이 있긴 하다. 일반열차와 전동차의 선로 좌우 배치가 어느 샌가 쓱~ 바뀐다. 하지만 이건 선로를 뒤늦게 3복선화화려다 보니 주변 공간이 여의치 않아서 나중에 추가된 선로가 선형이 배배 꼬인 형태가 된 것이기 때문에 실드의 여지가 있다. 유니코드에 문자가 뒤늦게 추가되어서 코드값이 사전 순서대로 깔끔하게 배당 못 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3호선도 구파발· 지축 이북으로 일산선이 건설되기로 결정됐을 때, 철도청 구간과 지하철 구간 사이에는 꽈배기굴 시즌 2가 만들어질 뻔했다. 그러다가 감사원이 개입하여 철도청 구간도 지하철처럼 우측통행 직류로 만들라고 시정 조치를 내림으로써 이런 삽질 만행은 벌어지지 않았다. 1호선 때는 지하철이 철도를 따라 좌측통행으로 통일됐지만 이때는 광역전철이 이미 만들어진 지하철을 따라 우측통행+직류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일산선의 건설이 시작됐는데, 공교롭게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서울 지하철 3호선은 6량에서 10량으로 증결 운행도 시작되었다. 그 당시 3호선의 사실상의 북쪽 종점은 구파발이었고, 그 다음 차량 기지 근처에 있던 지축은 10량 대비도 안 해 놓은 완전 초라한 단선 두단식 종착역이었다.

그런데 지축 이북으로 3호선이 일산선과 직결· 연장되니 지축 역도 10량 복선 승강장 형태로 확장하고 리모델링을 해야 하게 됐다. 그리고 이 일을 한 것은 지하철 공사가 아니라 철도청이었다..;;
이 때문에 지축 역은 지상 고가 형태이면서 섬식 승강장인 매우 드문 형태일 뿐만 아니라, 수도권 전철 전체를 통틀어서 환승역도 아닌 주제에 단일 역사와 승강장에 두 회사가 입주해서 알력싸움을 하는.. 이거 무슨 판문점 같은 역이 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선로를 3:2로 갈라서 남쪽은 지하철 구간, 북쪽은 철도청 구간..;; 양 구간에는 역명판의 글씨체도 다르고(HY울릉도 vs 초롱지하철체) 벤치의 모양도 다르다. 어느 출구로 나가느냐에 따라 승하차자 집계도 양 회사가 따로 하다가 요 몇 년 전부터 그건 그냥 코레일이 지하철에다 양보를 했다. 정말 웃긴다.

3호선은 관할 회사가 바뀌는 구간에 4호선 같은 꽈배기굴은 없지만, 이렇게 또 다른 형태의 명물이 존재하는 셈이다.
4호선의 남쪽으로 과천선은 전구간 지하이고 금정 이남의 안산선은 전구간 지상인 반면, 3호선 구파발 이북의 일산선은 단독 노선에서 지상과 지하가 꽤 섞여서 다이나믹하게 등장한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2010년쯤이던가? 3호선의 남쪽 이남 수서-오금 구간이 개통했을 때는 서울 메트로와 도철 사이의 환승역이 둘 생겼다. 바로 가락시장(8)과 오금(5)인데, 이때는 한 역에서 두 회사가 입주해서 아웅다웅 할 것 없이 한 역은 서울 메트로에게 통째로 주고, 다른 역은 도철이 통째로 맡는 식으로 운영권을 분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게 서메이고 어느 게 도철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남. 옛날에는 까치산 역이 2호선 지선 구간도 서메가 아닌 도철이 모두 관할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물론 이것들은 서메와 도철이 합쳐져서 '서울 교통 공사'가 출범한 지금에 와서는 별 의미 없는 얘기가 됐다.

예전부터 도철은 모르겠고 서메는 아무래도 철도청과 한 선로에서 자주 부대끼기도 하다 보니 철도청을 상대로 갑질을 하면서 잘 요리하긴 했었다.
철도청이 운영 효율화를 위해서 1990년대 초에 1호선 지하철 서울역-청량리 구간을 철도청 일산선, 과천선, 안산선(3~4호선 전체)과 서로 교환하는 거 어떻냐고 제안했을 때도 서메에서는 "분당선도 덤으로 주면 생각해 보겠음~ ㅋ" 이딴 대답으로 협상을 사실상 결렬시켰었다. 이는 또한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 구간이 그만치 알짜 황금노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02년 2월에는 철도청의 신입사원이 선로 보수 차량을 몰다가 수원역 근처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서울 메트로 1호선 전동차를 추돌하는 사고를 냈다. 철도청은 남아도는 중고 저항 전동차 몇 량이나 적당히 보상으로 주는 걸로 퉁치려 했다. 허나, 서메에서는 피해 차량 중엔 뽑은 지 몇 년 안 된 새끈한 신차도 있구만 그에 상응하는 신형 차량으로 안 주면 보상 동의 안 하겠다고 뻗튕겨서 결국 받을 건 다 받아내기도 했다..;;

옛날에도 그랬는데 하물며 지금은 서메와 도철이 합병하여 덩치가 더 커졌으니, 서울 지하철이 코레일을 상대로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낼 수 있을 듯하다.

  • 지축: 앞서 언급했듯이 지상 '고가'로서는 드물게 섬식 승강장
  • 오리: 9호선처럼 완급 결합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지하에 매우 드물게 쌍섬식 승강장
  • 이매: 지하에 최초로 건설된 중간 추가역
  • 석계: 지상의 섬식 승강장이 따로 확장· 분리된 사례 (1호선 신도림 완행선과 유사)

참고로, 지축 역은 이런 식으로 특이할 뿐만 아니라 한글 명칭이 통상적인 한자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도 독특하다. 한자의 표준 한자음은 '지뉴'라는 굉장히 어색한 표기이니까..
동해북부선의 제진 역도 원래는 '저(猪)진'이다. 철도역들 중에 이렇게 한글 표기가 표준 한자음과 따로 노는 사례가 더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7/09/20 08:32 2017/09/20 08:32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407

우리나라 고대사 토막 상식

* 난 우리나라 역사라 하면 알다시피 철도 또는 안보· 이념과 관계가 있는 근현대사 얘기만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고대사 얘기를 좀 꺼내고자 한다. 아, 그렇다고 근현대사도 전혀 안 나오는 건 아니다.

1. 멸망 방식

한반도와 그 주변 나라들을 보면, 단순히 전쟁에서 지거나 내부 혁명과 쿠데타가 발생하는 평범한 시나리오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망한 나라들이 역사적으로 좀 있다.

  • 신라: 왕이 백성들 이끌고 스스로 제 발로 고려로 항복· 귀순함
  • 후백제: 태조가 아들에게 밀려서 피난 간 뒤, 고려로 귀순하여 자기가 세운 나라를 스스로 침공... 꽤 독특하다.
  • 조선 또는 대한제국: 전쟁 하나 없이 야금야금 일제에게 조금씩 단계별로 각종 권리를 뺏기며 열불나는 방식으로 굴욕적으로 멸망
  • 그리고 저 훗날 일제의 괴뢰국이던 만주국: 마치 선장이 비상사태에서 배를 포기한다고 공식 선언하듯이, 황제가 피난길에 국가 셧다운 선언하고 자진 해산함

신라의 경우, 저런 이유로 인해 마지막 경순왕의 무덤은 다른 신라 왕릉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경주가 아니라 연천군 저 북쪽 끝의 민통선 안에 있다. 38도 위도에 정말 근접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남한이 수복한 지역이며, DMZ 신세도 면했다. 신라의 수도 근처가 아니라 고려의 수도 근처에 묻힌 것이다.

난 경주 출신이기도 한지라 신라 왕릉이 웬 생뚱맞은 저런 곳에 있다는 게 개인적으로 굉장히 독특하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훗날 고려는 이 성계의 위화도 회군 쿠데타에 의해 비교적 평범한(?) 방법으로 멸망했다.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무덤이 아예 고양시와 삼척시에 2개로 나뉘어 있으니 신라의 마지막 왕의 경우보다 더 특이하다. (둘 중 하나는 허묘)

우리나라의 경우 6·25 전쟁 당시에 판문점과 송악산, 배수진 지형 등 여러 이유로 인해 개성시 일대를 더 점령하지 못하고 빼앗겼다. 이것 때문에 고려의 존재감이 남조선 땅에서 더욱 없어지고, 반대급부로 '조선'스러운(?) 정서가 더 강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장 오늘날의 서울도 지리적으로 조선의 한양을 계승했으니 말이다.

그 대신 그 '고려'라는 이미지는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쓰고 있다. 고려항공, 고려연방제처럼.
물론, 그래도 남조선의 경우 수도를 조선의 도읍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고, 북조선의 경우 나라 공식 명칭에 여전히 '조선'이 들어가 있긴 하다.

2. 도읍의 위치

말이 나왔으니 수도 얘기도 해 보자.
일단 신라는 경주(금성), 조선은 서울(한성)로 확고한 붙박이이다. 이들은 안 그래도 당대에 역사가 매우 길었던 왕조로 여겨지는데 천도의 내력 역시 전무하다. 신라의 경우 멸망 직전에는 세력이 경주 시내로 극도로 쪼그라들긴 했지만 그래도 왕궁이 딴 데로 옮겨진 적은 없었다.

덕분에 여기는 각종 문화재 유물도 꽤 많이 남아 있다. 서울이야 시기적으로 제일 가까운 왕조의 수도여서 그렇다 치지만 신라는 서기 1000년도 채 되지 않아 멸망한 엄청 옛날 왕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는 과장 좀 보태면 온통 땅만 좀 파면 유물이 나올 지경이어서 도시형 국립공원까지 조성될 정도인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한편, 고려는 전반적으로 개성(개경)이긴 했지만 중간에 몽골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때 강화도로 딱 한 번 천도를 한 적이 있다. 강화도는 내륙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데 몽골은 골수 내륙국이다 보니 해군이나 해병대가 없어서 저기로는 못 쳐들어갔던 모양이다.

후대의 조선은 임진왜란 때 왕이 피난을 갔고, 또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행궁으로 도읍을 옮겼다. 스타로 치면 본진이 옮겨진 격이다.
대한민국 역시 잘 알다시피 6· 25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수도를 잠시 옮긴 적이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건국 직후 한동안은 더 북쪽으로 지금의 중국 땅(졸본, 국내성)에 도읍이 있었다. 하긴, 광개토왕릉비도 괜히 중국에 있는 게 아니다.
리즈 시절 이후와 멸망 때까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가 평양이었다. 남북이 통일이 되고 나면, 정확히 말해서 북괴 정권이 사라지고 나면 도읍이 이북 땅에 있었던 옛날 한반도 왕조들의 흔적을 찾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백제는 한국사에 등장하는 메이저 왕조들 중에 수도에 대한 존재감이 제일 없는 것 같다. 일단 지금으로 치면 서울· 하남 일대였던 시즌 1과,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더 친근한 충남 공주· 부여 일대의 시즌 2로 나뉜다. 이렇게 초점이 분산된 데다 시즌 1 도읍은 흔적이 전해지는 게 별로 없으니 존재감이 더욱 감소한다.

그래도 삼국 시대에 오늘날의 서울과 가장 가까운 곳에 도읍을 뒀던 적이 있는 왕조는 백제이다. 그렇다고 조선 같은 북악산 기슭의 사대문 안이 아니라 한강 이남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뭐 이런 지대이다. 일단 하남, 위례신도시 이런 명칭들이 다 백제의 도읍에서 유래된 것들이라니 신기한 일이다.

가야나 발해 같은 마이너한(?) 나라들의 역사도 갑자기 궁금해지긴 하는데, 고대로 갈수록 사료 자체가 너무 빈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태양계 행성도 천왕성과 해왕성은 표면 사진 자체가 보이저 2호가 찍은 것밖에 없어서 빈약한 것처럼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7/22 08:39 2017/07/22 08:39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84

사상 검증

*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도저히 어려운 주제이다 보니, 팩트폭격과 더불어 조금 거친 표현이 있음을 미리 양해 구한다.

1. 반미 반전 이런 구호나 운동 극혐

1950년 6월 25일 당일이 일요일이었는데 올해도 6월 25일이 일요일이구나.
2000년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불순불온한 진영이 없애라고 외쳐 온 공략 대상을 쭉 살펴보면 (1) 주한미군, (2) 국가보안법, (3) 국정원, 그 다음은 (4) 싸드로 정리된다.
(1)에 대해서 적을 이롭게 하는 사악한 선동질 한 동일한 놈들이 (2), (3)을 거쳐서 (4)에 대해 외치는 구호도 우리나라를 위해서 외치는 구호일 리는 당연히 전혀 절대 만무하다.

저건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북괴의 입장을 100% 정확하게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다. 놈들이 원하는 것의 정반대로 하는 것만이 우리나라가 살 길이다. 북괴가 이런 쪽으로는 의외로 단순무식하게 일관성이 있다. 허나, 지구상에서 제일 반미 할 자격 없는 애들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저 짓거리 하는 걸 보면 울화가 치미는 걸 억제할 수 없다.

배은망덕한 놈들, 광우뻥 때부터 지금까지 역사로부터 배운 게 없는 미개한 놈들, 군복 차림에 가스통 들고 흥분해서 날뛰는 틀딱충 꼰대보다 더 사악한 놈들. 병역특례 부실복무나 하고서 안보 장사(?) 만화 그리고 있는 모 웹툰 작가보다도 더 위선적인 놈들.

이런 날 내 머리에 곧장 떠오른 성경 본문은 에스겔서 16장이었다.
남조선 인민들의 기구한 내력과 분에 넘치는 은혜, 그리고 병들고 썩어빠진 정신 상태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절묘하게 씽크되는 걸 볼 수 있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저 본문을 꼭 보고 두 번 보시길..
그리고 열왕기상 20장도 같이 보면 좋다. 자기의 적을 보고도 "그는 내 형제니라"(왕상 20:32) 이러는 멍청한 왕을 두면 그 밑의 백성이 얼마나 고생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전쟁의 반대가 평화인 건 자기가 힘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전쟁의 반대는 그냥 항복과 노예이다!
꼭 자기들이 전쟁을 하거나 평화를 유지할 선택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에 본인은 굉장한 어이없음을 느낀다. 남조선이 무슨 스위스 같은 영구중립국이기라도 했냐? 일제 강점기에 6· 25를 겪은 게 100년도 채 안 지났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저런 식으로 하냐? 하다못해 중· 고등학교에서 일진 양아치들한테 안 당하기 위해서라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건(혹은 최소한 힘이 센 것처럼 보이는 것) 너무 당연한 이치 아닌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한반도에서 Imagine 가사나 읊어 대면서 반전 (반미) 평화, 서로 싸우지 맙시다, 남북이 서로 협력하고 화해합시다 이딴 소리 하는 놈들은 그냥 99%는 빨갱이 내지 걔네들에게 놀아나는 저능아들이다. 내 말이 기분 나쁘면 북괴 수뇌부 앞에서나 그런 평화타령 한번 늘어놓아 보든가.

그리고 내가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 경험상 아동문학이 어떻고 사교육 주입식 입시교육 없는 세상, 대안학교.. 애들 참교육이 어떻고 이러는 부류 중에 사상 이상한 사람들 정말 많이 봤다.
옛날에 TV로도 방영됐던 몽실 언니 작가도 보니까 참.. 죄송한 말이지만 불순한 분 같지는 않고 정말 순진한 건지...;;;
유언장 중에 한 대목이 이거다.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그게 당신이 원한다고 굶주리는 애들한테 가 지나? 어유..
누군 뭐 바보여서 자금줄 압박, 고립, 대북제재 하는 줄 아나?
우리나라도 못살던 시절엔 몽실언니 같은 불쌍한 애들 많았지. 사회 분위기도 반쯤 살벌한 병영 분위기에 약자 인권 훨씬 더 열악했던 것도 사실이지.

근데 애들이 그렇게 불쌍하면.. <태양 아래> 같은 영화는 본 적 있나? 거기 나오는 주인공 진미는 오늘 내일 굶어죽는 꽃제비도 아니고 평양 금수저 최상류층이다. 그런 애들조차 완전히 로봇으로 세뇌당하고 개조돼서 지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 보라는 부탁에도 바싹 긴장하고는 당령 읊어대고 앉았는데 걔들은 불쌍하다는 생각 안 드냐?

하이튼 절대악과 필요악 뒤섞어서 사람 속이는 건 도사들이야.. 썩을놈들이.
작정하고 사리분별 못하는 애들 오염시키고, 그리고 법조인들 차근차근 적화시키고. 통상적인 경제력과 병력만 빼고 체제 전복시키는 방법도 정말 치밀하다니까. 한 10대, 20대 나이 때까지는 사회 한쪽에서의 부조리 때문에 필요악만 나쁜 줄 알고 의분에 차서 무작정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딴 생각을 어떻게 30대 40대가 가도록 평생 무덤까지 가져갈 수가 있냐?

"나라가 이제 온통 용공사상에 오염되었다. 좋을 리 없어! 왜 우리는 국가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종북 빨갱이들을 적절히 처리하지 않는거지? 내가 개인적으로 페북과 블로그에 맨날 이런 글이나 싸질러댄다 해도, 남조선은 아이들에게 어떤 곳이 돼 버리겠나? 그리고 아이들의 아이들, 그리고... 아, 나라의 앞날은 어둡다!"
-- 뭐 패러디인지는 알아서 검색을..;; -_-;

2. 바퀴벌레가 극소수 한두 마리 좀 있어 봤자..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냐 종북 같은 게 어디 있냐?
남한과 북한은 군사력과 경제력 차이가 서로 쨉이 안 되는데 극소수 '김 일성 만세' 이러는 또라이가 설령 있다 한들, 일부 병신 미친놈들일 뿐이지 나라에 무슨 위협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사실, 교회식으로 비유하자면
콘스탄틴 로마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 진짜로 기독교가 세상을 이기고 영적 승리를 쟁취한 줄로 안다거나,
요즘 세상에 사탄 마귀가 어디 있냐, 지옥 같은 거 없다 이렇게 생각한다거나 혹은
성경 변개라는 게 "너는 루시퍼를 숭배할지니라" 이렇게 고치는 게 전부인 줄로 아는 참 순진하고 한심한 분별력으로는 이념 쪽으로도 저렇게 naive하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게 만만하고 낭만적이지 않다. 이 문제는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집 싱크대에 바퀴벌레 한두 마리가 주기적으로 대놓고 보일 정도이면 보이지 않는 곳에는 바퀴벌레가 얼마나 우글거리고 있을까?
법정에서까지 극소수 "김 일성 만세" 외치는 미친놈이 있을 정도이면 보이지 않는 곳에 서식하는 빨갱이들은 도대체 몇 마리나 될까?
몇백 명이 먹는 급식 중 극소수에서 머리카락 몇 올이나 바퀴벌레가 한 마리쯤 나와 봤자 식당 위생은 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걸까?
이렇게 말이다.

굳이 핵이나 미사일 같은 비대칭무기 얘기를 하지는 않겠다.
군사력과 경제력 차이가 제아무리 쨉이 안 돼도 이념 적화로 인해서 순식간에 나라 망하는 건, 아주 쬐그만 구멍 하나 때문에 댐이 무너지고 풍선이 순식간에 터지는 것만큼이나,
몇 년을 재부팅 없이 돌아가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메모리 leak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뻗는 것만큼이나 아주 쉽게 가능한 일이다.

조잡한 폭탄으로 자그마한 구멍만 뚫어도 커다란 여객기가 공중분해될 수 있고(대한항공 858처럼), 비슷한 자그마한 결함으로 인해 컬럼비아 우주왕복선도 그냥 확 공중분해돼 버렸었다.
왜냐하면 댐에는 엄청난 양의 물이 담겨 있었고, 비행기와 우주선 역시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좀체 구경하거나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 시국에 대해서도 바로 저런 그림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볼까?
루시퍼의 죄와 아담의 죄(그리고 이전 세상과 현 세상)를 분간 못 하는 정도의 통찰력이라면, 그냥 나라 윗대가리들의 평범한 부정부패 비리랑 아예 적에다가 퍼주는 반역죄의 차이도 분간 못 할 수는 있겠다.
성경과 현 시국... 물론 분야는 다르지만 일관된 논리로 해석 가능하다는 것이다.

3. 국정원의 여론몰이? 댓글 알바?

우리나라 같은 곳은 지나친 방종과 무질서, 안전불감증이 문제이지, 뭐 누가 검열을 하네, 민주주의가 죽었네 공안 통치네 뭐네 하는 건 정말 1도 고려할 가치가 없는 헛소리이다. 그런 건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아직도 카톡 대신에 라인이나 ISIL이나 쓴다는 듣보잡 메신저들 잘 쓰고 계시나? 루머 괴담 하고는.. ㅉㅉ

요즘 같은 세상에 국정원 요원이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얼굴 안 보이는 사이버 공간에서 얼마든지 공작 활동을 한다. 그곳으로부터 지령이 대놓고 내려오고 유언비어 거짓 선동이 하도 많이 나돌고 불길처럼 퍼져 나가니, 저건 국가 안보 차원에서 국정원에서도 자기 정체를 숨기고 맞불 놓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쉽게 말해 악에 대해 같은 악으로 맞서서 대응한 것뿐이다.

왜? 국정원은 세상 정부 소속의 방첩기관일 뿐, 무슨 신약 기독교회 같은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대가 살인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인 것만큼이나 거기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게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니까 말이다.

흉악범들이 교수대에서 사형 당하는 걸 보고 동정하기에 앞서 흉악범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를 훨씬 더 동정해야 하듯.. 국정원의 존재가 불편한 것보다 국정원 같은 기관을 필요하게 만드는 놈들의 존재가 훨씬 더 불편하고 거북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진짜" 검열과 공안 통치 같은 건 그나마 지금 국정원을 무너뜨리고 해체하자고 외치는 애들의 바람이 이뤄졌을 때에나 진짜로 찾아올 것이다.

물론 국정원 요원들이 무능해서 임무 수행이 실패하고, 정체가 들켜서 언론 타고 존재를 노출해 버린 것은 실드 칠 수 없는 흑역사이다. 옛날에 스파르타 애들이 훈련 중에 민가에서 음식을 훔쳐 먹다가 잡히면, 도둑질 때문에 벌받은 게 아니라 병신같이 들키고 잡힌 것 자체 때문에 벌받았듯이 말이다.
저기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걸 봐 주는 곳인 만큼, 평가 내지 비판할 때도 의도나 과정 같은 거 따질 필요 없이 오로지 결과만으로 냉정하게 하면 된다. 단순히 본연의 임무에 실패한 것에 대해서도 없는 간첩을 조작해서 무고한 사람을 조진 것만큼이나 욕해도 된다.

4. (잘못된)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자

우리나라는 헌법에서 '말로는'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게 마치 결혼처럼 나만 잘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현실에서는 남과 북 체제 중 하나가 물리적으로 없어지지 않는 한 통일 그딴 거 저언혀, 네버 가능하지 않다.
이는 우리나라가 사상과 양심의 자유, 인권 같은 걸 기본적으로 보장함에도 불구하고 신념에 따른 병역(집총) 거부자를 계속해서 실형으로 처벌해야만 하는 이유와도 정확하게 일맥상통한다. 유엔까지는 모르겠다만, 엠네스티나 EU 따위가 남의 나라 안보와 체제까지 책임지고 지켜 주지는 않는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 신자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이런 말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을 최신식 국립호텔에서 1년 반만 살다 나오는 걸로 끝나게 해 주는 국가에서 사는 것을 매우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뭐, 그 뒤로도 몇 년간 사회적으로 따가운 시선에다 취업· 여권 발급 같은 데서 불이익이 뒤끝으로 더 따르긴 하겠지만)

우리나라 법조계도 장사를 하루 이틀 하는 게 아니니, 여증들 상대하는 건 이골이 나 있다. 판결문은 보통 "님들에게 대체복무 같은 시스템이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구제책이 없고 사법부가 월권을 해서 그런 걸 마련해 줄 수는 없다. 그러니 실형 땅땅땅" 이런 식으로 나오는 편이다.

사실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실용주의(pragmatism) 관점으로만 접근하자면야 지뢰 제거 내지, 군복무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왕창 힘든 사회봉사로 퉁치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와 사상이 성경 교리로나 사회 통념으로나 근본적으로 옳지 못하고 해롭고 잘못됐다는 것을 일깨우는 차원에서는 계속 실형 때려서 전과자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전국민이 동성애자이면 사회가 유지가 되겠으며,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전국민이 여증 신자가 된다면 남조선이라는 나라가 제대로 유지가 되겠는가?

개인적으로 수혈 안 받는 거야 자유이지만, 자기 애한테도 수혈 안 시키고 심지어 자기가 의료인이 돼서 다른 환자한테까지 수혈 안 시키는 건 갈수록 죄질이 더 나빠지는 범죄이듯이 말이다. (이것도 성경하고 아무 상관 없음)
여증들은 수혈과 집총 거부하는 그 집념으로 술 같은 거나 거부했으면 어지간한 기독교인들 이상으로 더 좋은 평판을 얻었을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은 침략 전쟁을 전혀 지향하지 않으며 근본 이념이 철저하게 방어적이다. 방어를 위한 전쟁 대비조차 하지 말자는 애들은 진짜 온갖 악독한 욕을 들어도 싼 나쁜놈들이다.

5. 5· 18과 6· 25의 차이

뭐, 전대갈이 법이 규정하는 절차대로 곱게 권좌에 오른 건 아니었으니 5· 18은 일단은 누구 말마따나 의로운(?) 항쟁으로 시작했다고 치자. 그러나 나중에 누구의 거짓 선동이 있었건 뭐가 있었건 어찌 됐든 폭동으로 변질된 것도 사실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이 나중엔 결국 정치 항쟁으로 변질되었듯이.
그리고 투입된 군인들 역시 과잉방어건, 스트레스와 패닉 속에서 맛이 가서 그랬든, 잘못된 정보에 입각했든 어쨌든 민간인을 죽인 게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광주 5· 18은 제주 4· 3 사태만큼이나 일종의 쌍방과실이다. 앞으로는 그렇게 자국의 민· 관· 군 간에 비극적인 오해와 오사가 없게 진상을 규명하고 화해할 필요가 있다. 민간인 피해 보상은 해야겠지만, 어쨌든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느라 목숨 바친 군경에 대해서도 명예를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예우해야 한다. 그리고 정황상 둘을 이간질한 진짜 배후의 악한 제3자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니, 이것도 꼼꼼히 연구 조사해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

이에 반해 6· 25는 빼도 박도 못하고 북괴의 고의성과 과실이 100%로 오래 전부터 입증된 침략 전쟁이다. 이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만큼이나 입증된 사실이다.
그런데 역사를 왜곡하는 사악하고 나쁜놈이 하는 짓이 뭐냐 하면.. 정말로 쌍방과실인 사건에 대해서는 오로지 국가 공권력만 일방적으로 나쁜놈으로 몰아가고, 100:0인 전쟁에 대해서는 '남북 공동 책임 반반씩' 이 짓거리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빨갱이라도 6· 25를 무슨 남조선이 먼저 벌인 북침 이럴 수는 없으니, 그 대신 오로지 국군이나 미군 시행착오 저지르고 뭘 민간인 학살을 하고 잘못한 것만 부각시킨다.
그리고 미국놈들만 없었으면 이 모든 부작용(?) 없이 우리끼리 통일 이뤄서 행복하게 잘 살았을 거라 말한다. 물론, 무슨 통일인지는 절대로 얘기 안 한다.
이런 쳐죽일 놈들이 같은 하늘 아래에 있어서 김 정호 옥사설보다 더 해롭고 악질적인 역사 왜곡을 책과 교육을 통해서 퍼뜨리고 있는 한, 나는 일제의 역사 왜곡 같은 훨씬 덜 중요한 왜곡엔 제대로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전 두환 회고록이 무슨 히틀러의 <나의 투쟁> 같은 취급을 받고 어디서는 아예 출판 금지 신청까지 했다는데..
뭐 동의한다. 단, 이 승만에 대해서 거짓말 헛소리 잔뜩 늘어놓고 애들 정신건강 해치는 기존 불쏘시개들도 다같이 싹 회수· 폐기 처분해 준다면 말이다. 나도 역사 인식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드는 걸 지적하라면 그들 만만찮게 많이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5· 18은 설령 폭동 없이 정말 의로운(?) 항쟁만 있었다고 하더라도 4· 19보다는 격이 낮고, 4· 19는 6· 25 참전 용사 유공자보다 더 낮은 격으로 취급돼야 마땅하다. 겨우 이 승만· 전 두환 끌어내리는 데 실패했고 1공 4공 5공이 좀 더 오래 갔다 해도 남조선이 근본적으로 북한 꼴 날 일은 절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민주화? 직선제?는 되면 더 좋고 안 돼도 상관없거나 어쩔 수 없고, 북괴 같은 안보 위협만 없으면 굳이 난리 안 쳐도 더 쉽게 실현됐을 일이었다.
이것이 팩트다.

6. 가난한 서민을 위한 정치인 같은 건 없음 -- 위선이나 떨지 말길

요즘 맨날 나오는 말이 수저 계급론에 경제 민주화, 갑질 이런 것들이다. 물론 요즘 사회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제아무리 사회가 빈부격차와 개인의 사리사욕을 인정하면서 발전한다 해도 그 격차라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게 저열한 시민의식과 결합하면서 계층간의 불만과 위화감이 커지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썩어빠진 부자들 기득권들에 대한 증오 부추기면서 세상을 바꾸자느니 적폐청산 하자고 떠드는 애들은 그들이야말로 이미 부자 기득권이며, 눈먼 나랏돈 말고 자기 재산을 남에게 기꺼이 기부하고 베풀어서 자기까지 그 평등의 대상에 포함시킬 생각이라고는 단 1도 없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입시 제도를 평준화시키더라도 자기 자식은 이미 외국 명문 사립학교 다 보낸 뒤에나 한다. 적폐청산? 정말 개뿔 헛소리다. 그냥 당장 입에 발린 거짓말로 우매한 민중을 선동질하는 라이온 킹의 스카 같은 나쁜놈일 뿐이다.

기업을 적대시하고 사업가가 부자가 될 수 없는 세상이면 거기는 그냥 군경· 관료· 법조 공무원 같은 철밥통이 아닌 평범한 기술 스킬로는 부자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세상이고 다같이 거지 되어 평등해지는 세상일 뿐이다. 기업만 부패하지 정부는 그럼 부패하지 않을 것 같냐? 내가 제일 답답해하는 점이 바로 이거다. 사람이 먼저 < "지 아들이 먼저, 북괴가 먼저" 이런 것 보고도 모르겠냐?

가난한 서민을 위한 정치인이 없는 건 가난한 서민을 위한 의적(?) 흉악범이 없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사실이다.
제아무리 주둥이로는 썩어빠진 부자들 기득권들 증오한다는 사회불만형 연쇄살인범 흉악범죄자들이 정작 현실에서 정말 죽여 줬으면 하는 놈들 죽이는 경우란 전혀에 가깝게 없다. 99.9%는 어차피 같은 서민이나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밖에 해치지 못한다! 옛날에 지존파도 그렇고 연쇄살인마 지 춘길도 그렇고 선례는 수두룩하다.

지가 국회의원이고 재벌이고 유명인사 죽이고 싶다고 해서 우주최강 철통보안 속에서 사는 그 사람들이 니 손에 선뜻 죽어 주겠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ㅉㅉㅉ 무슨 윤 봉길· 안 중근의 후예 나셨네. 근데 어쩌나, 그때는 그래도 CCTV 금속 탐지기라도 없던 시절인데.

흉악범죄자의 욕망이 절대 실현 불가능인 것만큼이나 "능력껏 벌어서 필요껏 나눠 쓰는 세상", "사람이 먼저",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이딴 구호들도 서로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차원에서 절대 실현 불가능이다. 저것들 전~부 기출문제들이니 앞으로 또 어떤 선전선동 구호가 문제로 출제될지 예상해 보시라.
그러니 헬조선을 조금이라도 헬이 덜 되게 하고 싶고 타락 속도를 늦추고 싶으면 그딴 망상보다 당장 북괴에다 안 퍼 주는 세상부터 만들려 힘쓰는 게 훨씬 더 현실성 있고 도덕적으로도 올바른 선택이다.

부정부패 없는 세상, 군대가 필요 없는 세상 같은 거야 그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이룩할 수 없다. 그건 예수님의 재림 말고는 답 없는 거 맞다. 허나, 북괴에게 안 퍼 주는 세상, '돈으로 평화를 사려는 수작' 하에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적과 내통하지 않는 세상 정도는 인간의 힘으로도 이룩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우리에겐 이것부터가 먼저다.

옛날에 잉카 황제가 스페인 군대에게서 황금을 댓다리 많이 퍼줘서 평화를 사는 게 성공했던가? 개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그런데 또 같은 사기를 치는 인간 악마가 결국 대통령까지 돼서 주한 미군 철수에 싸드 철회까지 밀어붙이니, 지금이 무슨 재벌 욕할 때이고 겨우 친일파 같은 걸 욕할 때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지금 정치판은 청렴하냐 부패했냐, 친부자냐 친서민이냐 같은 구도로 양 진영이 나뉜 게 전혀, 절대 아니다.
둘 다 부자 기득권들이고 둘 다 기회주의적이며 비슷하게 부패했다! 단지 한쪽은 그래도 국가관과 안보관이 최소한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정도까지는 아니고(병역비리 방산비리까지 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은 아예 대놓고 북괴가 대화 상대라고 사기를 치는 양의 탈을 쓴 이리요, 마음의 조국은 따로 있는 놈들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최악과 차악 중에서는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걸 그 숱한 시행착오로도 깨닫지 못하는 바보 병신이라면 손발이 직접 고생해 보고서 몸으로 깨닫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긴 한데.. 그렇게 하기에는 나 포함 억울하게 피해 보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차마 그렇게 될 대로 되라고 무책임하게는 말 못 하겠다.
간첩의 정체를 폭로하는 일은 정치 성향 취향도 아니고 좌우 균형이 필요한 분야가 아니다. 옳고 그름의 영역이기 때문에 본인은 그 어떤 강경한 표현도 불사하면서 팩트 폭격을 종종 가할 것이며, 욕 먹거나 명성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28 01:44 2017/06/28 01:44
, ,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75

우리나라 자동차계, 특히 자가용이 아닌 상용차 분야에 존재해 온 노인학대의 예를 꼽자면 새한 덤프 트럭이라든가 영운기, 제무시 트럭 같은 물건이 있다. 이 블로그에서도 예전에 소개한 적이 있다. 이 분야를 더 파고들어 보면 제무시 트럭보다 더한 무지막지한 사례도 발견할 수 있다.
먼 옛날에는 증기 기관차가 있었으며 북한에는 아직도 저게 현역으로 굴러다닌다. 일제 말기에는 연료가 부족하자 군부에서는 송진 등 별 희한한 폐급 물질을 집어넣어서 비행기를 띄우고 배를 굴리려 했다.

이런 것까지는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옛날 유물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 일명 '목탄차' 되시겠다.
옛날에 물자가 부족하고 못살던 시절엔 자동차에 이런 동력원이 쓰이기도 했다는 걸 난생 처음 알았다. 이거 무슨 바이오 디젤 기술의 전신격인가? 완전 신기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상시에 자동차나 비행기 엔진에다 위스키 같은 독주를 부어서 연료로 썼다는 얘기는 본인도 들어 봤다. 그런데 자동차에 웬 나무라니?
참고로 증기 기관 얘기가 아니다. 증기 터빈 같은 외연 기관은 육중한 보일러 때문에 저런 덩치의 자동차에는 애초에 탑재할 수가 없다. 발전소나 선박급은 돼야 한다.

목탄차는 나무(또는 더 품질 좋고 잘 타는 숯)를 태웠을 때 같이 발생하는 일산화탄소 및 탄화수소 계열 기체, 일명 '목가스'를 수집 후, 이걸 폭발시켜서 힘을 얻는다. 그러니 고체 연료 기반이긴 하지만 엄연한 내연 기관이다. 하긴, 이 문맥에서는 '태우다'보다 '건류'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이산화탄소가 아니라 일산화탄소처럼 최소한의 연소 에너지가 있는 배기가스를 얻으려면 목재를 산소가 충분치 않은 곳에서 불완전 연소로 어째 잘 태워야 하기 때문이다.

목가스.. 옛날에 아동용 과학책에서 산화와 연소 이런 단원에서 보고서 몇 년 만에 처음 보는가 모르겠다.
그럼 목가스 엔진은 휘발유 같은 점화 플러그 방식일까, 아니면 디젤 같은 압착 점화 방식일까? 자료가 부족해서 잘 모르겠지만 후자가 기술적으로 만들기 더 어려우니 아마 여느 휘발유나 LPG 차량과 마찬가지로 전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특히 미국 차들은 옛날에 버스나 트럭조차도 쿨하게 휘발유 엔진으로 많이 만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동차 제조사들이 애초부터 목탄차 같은 가난한 형태의 자동차를 만든 적은 없다. 목탄차는 처음에는 다 정상적인 석유 자동차로 만들어졌는데 차를 굴릴 석유가 없자 나중에 다 현지에서 목탄차 형태로 '개조'된 물건들이다.
안 그래도 넉넉한 짐받이 공간이 있는 트럭이 개조하기 제일 좋다. 물을 끓이지는 않으니 물탱크 같은 건 없고, 그냥 나무를 건류하는 아궁이가 마치 화물인 것처럼 짐받이 맨 앞쪽에 달린다. 그리고 조수 역할을 하는 화부(?)가 짐받이에 타서 매캐한 연기 마시면서 나무를 집어넣어 줘야 한다. 증기 기관에서부터 첨단 로켓 엔진에 이르기까지 어느 엔진이건 고체 연료는 연료 공급의 자동화와 적절한 화력 조절이 어렵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목탄차의 열악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어떤 나무를 태우느냐에 따라 희든 검든 연기가 엄청 많이 올라올 뿐만 아니라 엔진 내부에서 재를 치우고 그을음을 닦아내는 정비도 자주 해 줘야 한다.
시동 거는 것도 핸들 옆의 차키를 깔끔하게 돌리는 형태는 전혀 아니고 192, 30년대 자동차처럼 조수가 뒤의 크랭크축을 죽어라고 돌려 줘야 걸릴까 말까다. 즉, 목탄차는 근본적으로 1인 운전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습한 건 성능이다..;; 겨우 저렇게 목가스를 박박 긁어 모아서 굴러가는 차가 정상적인 기름 차량처럼 매끄럽게, 힘 좋게, 빠르게 굴라갈 거라는 기대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남한에서는 1940년대에, 북한에서는 2000년대까지 돌아다닌 그런 소/중형 트럭급의 목탄차는 평지에서는 그냥 소 달구지보다 약간 빠른 정도로나 달릴 수 있었다. 평지에서 컨디션이 최고 좋아야 시속 3~40km, 약간 오르막은 10km안팎.. 그냥 달리기로 따라잡힐 수 있다.

잘 가다가도 언제 퍼질지 몰랐으며, 그나마 짐 가득 싣고 오르막 오르는 건...? 불가능이었다. 조수는 슬금슬금 오르던 차가 퍼져서 뒤로 밀려서 미끄러져 내려가지나 않게 뒷바퀴 뒤에다가 굄목을 얹을 준비를 해야 했다.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다같이 힘을 합쳐서 차를 밀거나.
물론 이건 목탄 엔진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연료 탓이 더 큰 문제였다. 목탄차를 굴려야 할 정도인 가난한 동네에 나무라도 질 좋은 게 많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먼저 우리나라의 옛날 기록부터 살펴보자.

2차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군용차에 쓰기 위해 이 땅에서 휘발유를 몽땅 착취해 가자 그 대용으로 등장한 목탄가스 자동차들은 광복을 맞은 직후까지 운행됐다. 당시의 목탄버스는 꽁무니에 달린 숯불 화통에 숯 두 포를 넣고 풀무질을 해 가스가 발생하면 그 힘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숯을 싣고 다닐 자리가 없어 시골버스 정류소에는 매일 오전 또는 오후에 한 번씩 숯 포대를 싣고 다니며 배급해주는 숯 배달 버스가 나타나기도 했다.

정류소에 도착한 버스는 손님이 내리고 탈 동안 조수가 꽁무니 화통에 숯을 가득 채우고 풀무질을 해 불을 벌겋게 피워 놓아야 다음 정류소를 향해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곡식자루 장보따리들을 가득 싣고 가다가 높은 고개라도 만나면 거북이 흉내를 내야 했는데, 이런 때 개구쟁이들을 만났다 하면 그들의 노리갯감이 되기 일쑤였다.

고개주변 마을의 꼬마들이 버스만 오면 뒤따라 올라가며 장난을 치고, 심지어는 화통의 가스밸브까지 열어 놓아 가스가 몽땅 빠지는 바람에 힘겹게 올라가던 버스가 서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부터 조수와 개구쟁이들 사이에 쫓고 쫓기는 일대 추격전이 벌어진다.


그리고 유튜브 동영상도 있다. 1분 47초 이후 지점부터.

그나마 휘발유가 모자라 목탄이나 카바이트로 달리던 트럭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참나무 숯 한 포대를 트럭 위 보일러에 넣고서 엔진을 돌리면 눈물이 나도록 매운 시꺼먼 연기가 나고 크랭크 축에 연결한 쇠막대를 열심히 돌려야 시동이 걸리던 목탄차.
걸핏하면 고장 나서 산길 어디서든 수리를 해야 했던 그 털털이 고물 트럭이라 할지라도, 잘해야 소 달구지 정도 얻어 타거나 아니면 그저 걷고 또 걸어야 했던 시골 사람들의 눈에는 신기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러기에 쌀 석 되 값을 추렴해 삼십 리 장터를 다녀오던 사람들은 흔들리는 트럭 짐받이를 꼭 잡고서도 자랑스러운 얼굴이었고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잠시 허리를 펴고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산허리로 가느다란 연기가 솟고 털털거리는 목탄차 소리가 나면 차를 향해 냅다 뛰었습니다.


이야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제무시 트럭도 1940년대부터 운용되었고 이건 힘이라도 왕창 좋아서 2000년대에까지 쓰인다지만 목탄차는 도대체 뭐냐..;;
그리고 남한은 그나마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일제 대신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아무리 늦어도 1950년대 이후로 목탄차 얘기는 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북에서는 이거 몰면서 개고생했던 탈북자의 증언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을 검색하면 얼마든지 열람할 수 있다.

목탄차를 5년간 직접 몰았었다는 장 씨는 “목탄차의 원료로 가장 좋은 것은 참나무 숯인데 그 숯이 귀하다 보니 지름이 5cm 이상만 되는 참나무는 닥치는 대로 차량 연료로 사용하고 나중엔 그것도 구하기 어려워 알갱이를 털어낸 강냉이 속대를 목탄차 연료로 사용했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 연료나 마구잡이로 사용하다 보니 툭하면 고장에다 평지에서는 소달구지보다 조금 나을 정도이고 언덕길에서는 타고 가던 사람이 내려서 밀어야 하는 게 목탄차”라면서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차를 5년이나 몰았는지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서야 석유가 부족해서 그거 대체제로 목탄차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목탄차마저 운용을 중단하는 추세라고 한다. 환경 문제나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나무조차도 없고 산에 나무가 씨가 마를 지경이 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목탄차를 굴릴 필요가 없어져서가 아니라 목탄차조차 굴릴 여건이 안 되게 됐다는 뜻이다.

어느 나라든지 화석 연료가 대기를 오염시키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화석 연료가 나무를 보호해 주기도 하는 걸 느낀다. 남한만 해도 과거의 산림 녹화 사업이 석탄· 석유의 보급 시기와 잘 맞물린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고 말이다. 또한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인해 바이오 디젤이 마냥 화석 연료의 대체제가 되기도 어렵다.

증기 기관차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기름 먹는 올드카도 아니고 나무를 저렇게 활용하는 기괴한 물건이 옛날에 있었다는 것이 심히 놀랍기 그지없다. 남북 공통으로 목탄차에 가장 좋은 연료가 '참나무 숯'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하긴, 북한도 한동안은 목탄차 따위 안 굴리다가 병신짓 때문에 나라 내부 경제가 완전히 붕괴한 1980년대 이후부터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상, 서울 지리 역사에 이어 자동차 쪽의 역사 얘기를 늘어놓아 보았다.
이거 무슨.. 아이티(나라)에서는 가난한 서민들이 진흙 쿠키-_-를 먹는다는데 그거 자동차 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자동차는 기계이니 수틀리면 저렇게 목탄차로 개조라도 하지만, 사람은 아무리 굶주리더라도 다른 가축이 먹는 풀이나 종이나 흙, 육식동물이 먹는 상하고 썩은 고기를 그것도 날로 먹을 수는 없다. 신체를 생화학적으로 개조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 -_-;;

Posted by 사무엘

2017/06/25 19:22 2017/06/25 19:22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74

서울시의 옛 모습

1. 한강 물줄기

난 옛날 조선 시대엔 서울이 규모가 굉장히 작았다는 것까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좁게는 사대문 안 한정이고 제2권역으로 더 확장해도 지금의 내부순환로와 얼추 비슷한 성저십리 안이다. 그래서 남산이 지금의 관악산이나 청계산만큼이나 서울의 남쪽 끝이었으며, 한강 강변에는 이미 사형장(새남터, 절두산, 사육신묘), 발전소 같은 시설이 있을 정도였다.

오늘날 미군 부대가 들어서 있는 용산 부지는 예로부터 원래 병영이 있던 한양 외곽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거여· 마천 일대의 특전사 부대만큼이나 외곽인 셈인데 지금은 그 군부대조차도 신도시 개발과 아파트 건설의 등쌀을 견디지 못하고 이전 예정이다. 더 남쪽으로 가면 지금의 김포 공항 같은 공항이 여의도에 있었다.

잠실엔 말 그대로 누에밭이나 있었고, 마장동에는 말을 키우는 시설이 있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이미 거기만 해도 서울 중심지에서 벗어난 외곽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이후의 현대와 같은 교통· 통신, 전기, 건축, 상하수도 인프라를 잣대로 옛날 도시의 규모 한계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그런데...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한강의 모양도 지금과는 굉장히 달랐다는 사실은 본인이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고 굉장히 충격적이다.
옛날에는 한강물이 굉장히 맑고 얼추 바닷가 같은 모래사장도 있어서 사람들이 저기서 바로 해수욕 하듯이 수영을 했다는 것까지는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다 밤섬이 일부 폭파되고 여의도 부지가 개발되고, 1980년대 중반의 5공 시절에 한강 종합 개발 사업이 진행되어서 올림픽대로가 닦이고 한강의 서울 시내 구간에 온통 고수부지와 공원이 만들어진 것까지도 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옛날 사진을 보니 한강이 원래는 지금보다 하중도가 더 많이 있었고 강폭과 수심이 지금보다 더 작고 얕았던 것 같다. 건축 용도로 한강 바닥의 모래를 많이 파내기도 했다고 들었다만..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난지도나 뚝섬은 여의도만큼이나 진짜 문자 그대로 한강의 지류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심지어는 잠실도 섬이었다. 세상에 '잠실島'라니! 무슨 대체역사물에 나오는 가상의 서울 모습도 아니고 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과거 일제는 한강에다가 철교를 표함한 교량을 놓았으며, 철길이 나 있는 서쪽(서울 동남쪽의 산들을 피해서)으로 여의도와 영등포 일대를 경성부에 편입시켰고 1920년대 을축년 대홍수를 한번 당한 뒤엔 저지대에 대한 치수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한강의 물줄기를 뜯어고치거나 오늘날 강남이라 불리는 지역(그 당시 광주군)을 수도권 배후로서 개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6· 25 전쟁 때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겼다는 말도 지금처럼 도봉구부터 강동· 송파· 강서· 금천구 같은 거대한 영역을 몽땅 빼앗겼다는 게 아니라 그냥 한강 이북을 빼앗겼다는 뜻이었다.

지금과 같은 서울 개발은 1960년대 이후 박통 때부터 시작됐다. 휴전 이후 서울이 안 그래도 북괴와 더 가까워져 버렸는데 북쪽에는 또 북한산이라는 거대한 장애물도 있으니, 북쪽으로 서울을 확장하는 건 도저히 안 되겠고 한강 이남을 서울로 편입시켜서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저런 하중도들은 확실하게 섬도 내륙도 아니면서 교통이 불편하고 장맛비만 맞으면 침수되니, 개발 효율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 좋은 땅이 아니었다. 그래서 땅을 리모델링하게 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간척 사업 같은 걸 바다가 아닌 하천 버전으로 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겠다. 그래도 그렇지 인간의 토목 기술은 한강 같은 큰 강의 물줄기도 저렇게 마음대로 바꿔서 지도의 그림까지 송두리째 달라지게 하는구나.
석촌 호수가 그냥 생긴 게 아니라 바로 옛날에 한강의 본류(섬의 남쪽)가 지나던 흔적이라고 한다. 여러 모로 흥미롭다.

2. 강북의 옛날 버스 터미널과 운동장

그럼 다음으로 교통 쪽 얘기로 넘어가겠다.
부산에 지금과 같은 김해 공항이 있기 전에 수영 비행장(지금의 센텀시티 부지)이라는 게 있었듯, 서울도 김포 공항이 생기기 전엔 무려 여의도에 민· 군 공용 비행장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서울의 덩치가 커지면서 공항은 저 서쪽 끝으로 이전했다. 김포 비행장은 시작은 공군 기지였는데 완전한 싸제 민간 공항으로 바뀐 것이다.

공항처럼 철도 역시 도시가 커짐에 따라, 혹은 복선전철화 개량을 하는 과정에서 역과 선로가 외곽으로 이설되거나 지하화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서울, 영등포, 청량리 같은 역은 그래도 일제 강점기에 처음 생겼을 때의 위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1920년대 초에 진짜 서울 역이던 서대문 역이 없어지고 그 앞의 남대문이 서울/경성 역할을 하게 된 변화는 있지만, 그건 여느 외곽 이설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굳이 따지다면 대구 역과 동대구 역의 변화 양상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볼 만하다.

그러면 육상 교통수단인 고속버스 내지 시외버스 터미널은 어떨까?
일단 지금의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은 1970년대 후반부터 건설이 시작되어서 1981년에 개장한 것이다. 1970년대엔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과 함께 고속버스 시대가 열리긴 했는데, 서울 여기저기에 고속버스 회사와 터미널이 난립하기 시작한지라 이것들을 이용하기 쉽게 통합하고 이 참에 강남 지방을 육성하는 게 목적이었다.

동서울 터미널은 이보다도 더 늦은 1990년은 다 돼서야 등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개통한 중부 고속도로를 이용하기 좋은 곳에 버스 터미널을 더 만들어서 경부 고속도로의 수요를 분산하는 게 목표이다. 앞으로 평창 동계 올림픽 덕분에 강원도 쪽의 철도 접근성이 좋아지면 시외버스의 위상이 다소 낮아지겠지만, 그래도 철도로 최전방까지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이 터미널은 군인들이 여전히 많이 먹여살릴 것 같다.

강남 고속과 동서울 터미널이 서울의 고속· 시외버스들을 평정하기 전에는 서울에 용산, 신촌 등 여러 곳에 버스 터미널과 정류장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것들을 통합할 목적으로 1969년엔 아마 곧 완공될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을 염두에 두고 그 당시로서는 마장동, 지금은 용두동의 동대문구청 부지에 '마장 터미널'이라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만들어졌다. 이건 20년간 운영되다가 1989년, 동서울 터미널의 개장에 즈음해서 없어졌다.

이건 당시 철도의 역사와 관련지어 생각해 봐도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경춘선 철도가 지금이야 중앙선 망우 이후 구간에서 시작되지만 옛날에는 광운대(성북) 역에서 드리프트를 해서 뻗어나갔고, 더 옛날 완전 초창기에는 성동이라는 자체적인 시점을 갖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동 역의 2번 출구와 그 북쪽이 옛 경춘선 선로 겸 경춘선의 시점인 '성동' 역이 있던 자리였다.

그랬는데 1971년에는 경춘선의 서울 시내 시점이던 성동-성북 구간이 폐선되고 그때부터 경춘선은 청량리에서 출발하여 성북에서 분기하는 것으로 형태가 바뀐 것이다. 경춘선에는 화랑대와 신공덕 역뿐만 아니라 훨씬 더 전에 사라진 역이 있다.
제기동에서 용두는 직선 거리로 600미터가 채 안 된다. 비슷한 시기에 한쪽에서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생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철도가 없어진 셈이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동대문 운동장 vs 잠실 경기장도 이런 동마장 터미널 vs 강남 터미널 같은 관계가 된 게 아닌가 싶다.
동대문 운동장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있었던 역사 깊은 체육 시설이지만 서울 올림픽 때는 딱히 쓰이지 않다가 벌써 10년쯤 전에 철거됐으니 말이다. 그런데 4호선 지하철역 승강장은 벽면에 온통 호돌이가 그려져 있어서 여기가 올림픽 시설이기라도 했는지 보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더라.

3. 서울 톨게이트

그럼, 서울의 관문 이야기 하나만 더 하고 글을 맺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부 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의 사진을 검색해 보면 완전 옛날에 그냥 발로 만든 듯한 서체이던 시절, 그리고 HY울릉도체를 쓰던 시절(2000년대 말까지), 그 뒤로 지금의 서울남산체를 쓰는 시절 이렇게 셋으로 크게 나뉜다.

서울 톨게이트도 처음에는 양재 IC 이남에 말 그대로 서울의 남쪽 끝에 있었다. 그러다가 1987년 10월에 쿨하게 청계산 기슭의 달래내고개를 건너서 저 남쪽 성남 궁내동으로 톨게이트를 옮기고 폭도 크게 확장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저 시기는 공교롭게도 대한항공 858편 사고가 터지기 얼마 전이었다. 당시 계획을 잡아 놨던 서울 외곽순환 고속도로의 건설까지 염두에 두고 톨게이트를 넉넉하게 남쪽으로 옮긴 듯하다.

예전에 서울 톨게이트가 있던 자리는 잘 알다시피 '만남의 광장 휴게소'가 돼 있다. 서울 방향은 죽전 휴게소가 마지막인데, 부산 방향은 어째 서울을 벗어나기 전에 이런 휴게소가 있는 게 인상적이다.

하긴, 1980년대 초에는 원효대교도 민자로 건설된 관계로 잠시 통행료를 걷던 시절이 있었다. 다리 자체는 4차선밖에 안 되어 마포나 한남에 비해 아주 작은 주제에 다리의 남단은 폭이 꽤 넓은 편인데, 이게 바로 과거에 톨게이트가 있었던 흔적이다. 그러다가 얼마 못 가 다리가 국가 소유가 되면서 이내 무료로 바뀌었다.

2020년대에는 전국의 고속도로에서 톨게이트가 없어지는 걸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러면 서울 톨게이트 주변에 차들을 수용하느라 필요하던 방대한 공간들도 필요 없어지고 용도가 공원이나 휴게소 같은 다른 형태로 바뀔 것이다. 물론 통행료 과금 체계를 최첨단으로 바꾼다는 말이지, 톨게이트의 제거가 고속도로의 무료화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예전에는 개방식에서 구간내 무료였던 곳도 그때부터는 단 1km를 이용했어도 기본요금이 부과되게 할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23 08:35 2017/06/23 08:35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73

6· 25 관련 노래

6· 25 전쟁은 그로부터 40년 전의 경술국치와 거의 동급으로, 단군의 후손과 대한민국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사건이 돼 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박 두진 작사, 김 동진 작곡의 main OST가 만들어져 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그 곡 말이다.

박 두진이라 하면 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듯이 “해야 솟아라 맑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시조가 떠오르지만, 동일 인물이 그로부터 겨우 2년 뒤에 6· 25 노래의 가사도 썼다. (<해>는 1949년에 발표되었으니, 아마 해방의 감격을 해에다 비유했을 것이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1.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2.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 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이 노래는 휴전 후가 아니라 아직 전쟁 중이던 1951년에 만들어지고 발표되었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전국토가 쑥밭이 되고 공산당 빨갱이들이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꼴을 생생히 목격한 그 트라우마가 가사에 담겼다.
단순히 나와 다르니까 적군이 아니라 상대방은 도덕적으로 완전 불의하고 천벌 받아야 마땅하며 인간으로서 상종 못 할 역적패당 인간말종임을 적절하게 잘 표현해 놓았다. 2, 3절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곡도 잘 썼다. 슬프고 엄숙한 느낌이 나는 E단조풍으로 시작했다가 그래도 희망적인 G장조 분위기로 끝난다.

북괴 얘기는 쏙 빼고 6· 25가 무슨 남북 공동의 책임인양 가사를 굉장히 이상하게 바꿔 놓은 “신 6· 25 노래”가 한때 나돌았는데 본인은 그건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빼고 '지옥'을 삭제하는 변개와 동급으로 극도로 저주하고 혐오한다.

이것 말고 승리의 노래라는 것도 있다. 다만, 제목이 고유명사 같지 않으며, 요즘은 그런 문구로 검색하면 찬송가가 더 많이 튀어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가사 첫 줄로 검색하는 게 변별력이 훨씬 더 낫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 대한 남아 가는 데 초개로구나
2. 쳐부수자 공산군 몇 천만이냐 / 우리 국군 진격에 섬멸뿐이다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얘 역시 1951년작이며, 위의 그림은 작사 내지 작곡자가 1951년 1월 11일에 자필로 직접 쓴 악보의 복사 이미지라고 한다. 서울을 도로 빼앗긴 1· 4 후퇴로부터 겨우 1주일 뒤의 일이다. 이 곡은 작사자는 잘 모르겠고 작곡자 권 태호가 "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라 물고요" 동요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위의 두 노래는 북한군을 공산군 괴뢰군을 넘어 오랑캐라고 일컬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들어진 시기도 비슷하니 6· 25 전쟁이 벌어지던 그 시절엔 진짜 그런 표현이 쓰였는가 보다. 우리 어머니도 “무찌르자 오랑캐”에 맞춰서 고무줄 놀이 하시던 추억을 생생하게 기억하시더라.
<멸공의 횃불>보다 훨씬 더 수위가 높고 적개심이 강한 군가풍의 노래가 민간에까지 널리 불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죽했으면 1953년 8월,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 된 거의 직후에는 반공 정신 투철한 학생들이 “이렇게 전쟁을 어영부영 끝낼 수는 없다. 반드시 멸공 북진 통일을 완수해야 한다”이러면서 행진을 했는데, 북괴 빨갱이들을 아래와 같은 징그러운 괴물로 묘사하면서 신랄하게 디스를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휴전 회담에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자.

more..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짓거리가 저 괴물의 묘사만치 간악하고 비열했기도 했고, 또 전쟁이란 게 기본적으로 인간성을 황폐화시키기 때문이다. 지금도 북괴는 공산주의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수법”이 문제이다. 오늘날 종북 용공분자들은 저런 괴물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양의 탈을 쓰고 평화, 대화, 우리민족끼리 이런 타령이나 늘어놓으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불평 불신풍조 조장하면서 체제 전복 공작을 벌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매년 6월 25일엔 국가 차원에서 기념식을 열어서 6· 25 노래를 부르면서 “이 날을 죽어도 절대 잊지 말자 뿌드득” 그랬다. 그리고 70년대까지는 우리나라를 구해 준 UN도 고맙다면서 UN 창립일까지 공휴일로 지키곤 했다.

저 때에 비해 지금이야 세월이 참 많이 흘렀고 북괴로부터 적어도 재래식 병력에 의한 전쟁 도발 가능성은 0에 가깝게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통일은 무슨 외세나 반통일 수구꼴통들 때문에 못 하는 게 아니라, 99.99% 북괴의 잘못된 주체사상 대남적화 통치 이념 때문에 못 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와중에 우리나라 헌법이 아무리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고 규정한들, 북괴가 저런 체제인 한 평화적인 통일은 현실적으로 사실상 불가능이다. 둘 중 하나가 없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난 개인적으로 빨갱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며, 빨갱이는 빨갱이라고 적극 부를 것이다. 걔네들의 성품에 잘 어울리는 멸칭이다.
빨갱이 소리 들어서 제아무리 기분 나쁘다 한들, 그게 설마 “6· 25 남북 공동 책임론” 이딴 소리보다 사람 더 열받게 하고 기분 더 잡치게 할까?

아직도 웬 케케묵묵은 반공 타령이냐고 혀를 차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북괴가 1950년대나 지금이나 케케묵은 이념이 하나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북괴가 대남적화 이념을 완전히 버렸다는 것을 입증할 생각은 안 하고 오로지 자국 정부가 반공 빌미로 잘못한 것밖에 내세울 줄 모르는 애들은 백 날 떠들어 봐도 내 생각을 절대로 반박하거나 바꾸지 못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잠자코 조용히 있기 바란다.

이상, 6월 25일을 며칠 안 남기고 든 생각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20 19:32 2017/06/20 19:32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72

선박 이야기

1. 전근대 시절의 장거리 항해

본인은 초-중딩 시절에 대항해시대 2 게임을 즐겼던 세대이다. 이 게임과 세계 역사 만화책과 학교에서의 세계사 공부를 통해 서양에서는 과거의 중세와 근세 사이에 범선만 달랑 타고 신대륙을 막 개척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배웠다.

현실에서 전쟁은 스타크래프트나 FPS 게임이 아니다. 과거에 양치기 목동은 절대로 낭만적인 전원 생활을 누리는 게 아니었다. 현실에서는 하다못해 결혼 생활조차도 소꿉놀이와는 딴판인 티격태격 전쟁이다.
그리고 그것처럼 배 타고 멀리 떠나는 것도 절대로 편한 일이 아니다. 최첨단 문명의 이기와 통신 장비가 있는 오늘날도 그러한데 하물며 옛날에는.. 선원 생활의 열악함과 비참함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영양 문제다. 지금 같은 냉장 냉동 기술이 없으니 모든 식품은 닥치고 소금에 절여서 보관해야 했다. 비타민이라는 걸 몰랐으니 각기병이나 괴혈병 같은 병의 원인조차 알지 못했다. 장거리 항해를 한번 하고 나면 괴혈병 때문에 건장하던 근육질 선원들이 시름시름 앓다 픽 죽어 나갈 지경이었다. 세포들이 형체 유지를 못 하고 몸 곳곳에서 피가 철철 나다가 죽는 건 오늘날로 치면 거의 방사선 피폭에 준하는 끔찍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기 전엔 뱃사람 업계에 미신과 괴담 같은 것도 얼마나 많이 나돌았을지 모를 일이다.

화재 예방을 위해 배에서는 온수 목욕 같은 것도 할 수 없었다. 또한 과거의 범선은 폭풍우와 높은 파도만 악재인 게 아니라, 망망대해에서 바람이 오랫동안 너무 안 불고 잔잔한 것도 끔찍한 재앙이었다. 배가 나아가질 못하면서 선원들이 그 안에서 꼼짝없이 굶어 죽기 때문이다.
배 안의 도구와 시설이 원시적일수록 승선 근무는 공동 작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며, 한 명만 잘못하면 다같이 죽는 위험이 더 컸다. 그러니 거기 조직 문화는 반쯤은 군대와 다를 바 없었다. 채찍질과 교수형 등 온갖 전근대적인 규율과 잔혹한 처벌로 선원들을 통제해야 했다.

그러니 선원들의 생활이 얼마나 헬이었을까? 이런 것들이 바로 대항해시대 같은 게임만 해서는 알 수 없는 레알 대항해시대의 실상이다.
그 시절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면, 대양을 누볐다는 배가 덩치가 이렇게 작았다는 사실에 추가적으로 굉장히 놀라게 된다. 배수량이 겨우 몇백 톤이 될까말까인 쪽배 유람선에 10~20여 명의 남정네들이 타고 도대체 어떻게 대륙을 건널 수 있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엔진도 없이 돛만 달랑 달고, 게다가 금속도 아닌 나무로 만들어진 배가 요즘의 컨테이너선이나 유조선 같은 덩치일 수는 없다. 건축· 재료공학적으로 따져볼 때 목선은 길이 약 100미터, 배수량 2000톤 정도가 사실상의 한계로 여겨진다고 한다.

목재는 쇳덩이처럼 무슨 용접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금속보다 약한데 이어 붙이는 시점에서부터 강도가 더욱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저 덩치를 부분적으로 초과하는 목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목선의 끝물인 19세기 중후반은 가서야 예외적으로 등장한 것들이며, 덩치를 무리해서 키우느라 항해 중엔 펌프로 물을 일일이 빼 줘야 하는 등 태생적으로 지병을 안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같은 거대한 선박을 목재만으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있다.. 허나 그건 꼭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수 있다.
300큐빗은 1큐빗을 50cm 남짓으로 잡아도 150m 남짓한 길이이다. 방주가 무슨 타이타닉을 능가하는 덩치였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얘는 표류만 하지 항해 기능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었으니 어지간한 배들이 갖는 유체역학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을 것이다. 항공기에다 비유하자면 비행선이 아니라 그냥 기구였다는 뜻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뭐, 목재의 한계 얘기가 기왕 나왔으니 첨언하자면, 옛날에 황룡사 9층 목탑도 어떻게 존재 가능했을까 싶은 의문이 추가로 든다. 기록대로라면 높이가 거의 80m에 달하는 건물을 나무로 만들었다는 얘기인데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콘크리트 건물처럼 딱 직육면체 형태로 그렇게 높은 목조 건물을 만들 수는 없고, 위로 갈수록 면적이 좁아지긴 해야 할 것이다. 롤러코스터조차도 에버랜드 T 익스프레스 같은 목제는 철제보다 내부 구조물이 훨씬 더 많고 복잡하고, 철제처럼 360도 상하 회전을 구현하지 못하지 않던가.

2. 근대: 기계화가 됐지만 여전히 원시적임

아무튼, 그러다 근대에 와서는 실용적인 수준의 증기 기관이 발명되었고, 땅에서 마차보다 빠른 철도 차량도 만드는 와중에 이 기관을 선박에다가 써먹으려는 시도도 응당 행해졌다. 오늘날처럼 스크류 프로펠러가 정착하기 전의 과도기에는 외륜이나 물갈퀴 같은 다양한 동력 전달 메커니즘이 등장했으며, 이때부터 배의 재질도 목재에서 금속으로 바뀌었다. 불을 때는 연소를 나무로 만든 기계 안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인류 역사상 몇천 년의 짬밥을 먹어 온 목재 범선이 주력 교통수단에서 드디어 퇴출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증기선은 증기 기관차와는 달리 왠지 유럽이 아닌 미국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든다. 허클베리 핀, 톰 소여의 모험처럼 말이다.
다만, 증기선의 선구자이던 존 피치 같은 사람은 당대에 성공을 못 하고 빈곤에 허덕이다가 자살로 불운한 생을 마감했다. 훗날 디젤 엔진의 발명자도 자살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런 선구자들의 노력을 거쳐서 1910년대에는 잘 알다시피 초대형 증기 여객선인 타이타닉 호가 건조되기에 이르렀다. 전장 269m, 배수량 52310톤짜리다.

오늘날이야 비행기가 있으니 저런 대륙간 장거리 여객선은 필요가 없어졌고 배는 그냥 라이너나 관광 크루즈 위주로 바뀌었다. 물론, 여객 분야 한정으로만 말이다. 국가와 대륙간의 화물 수송은 타 교통수단이 절대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대량 수송 가성비 때문에 선박이 여전히 영원무궁토록 본좌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무역선 제조사들과 무역선을 조종하는 상선사관들이 없으면 굶어죽고 말라죽는 거 순식간이다.

타이타닉 호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참 원시적이다 싶은 것은.. 먼저 엔진이다. 20여 개가 넘는 대형 보일러에 엔진 2기, 증기터빈 1기로 중무장하고 굴뚝도 4개나 달려 있었던 반면, 요즘의 디젤 엔진은.. 그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덩치의 주 엔진 1 + 보조 엔진 1기만으로도 타이타닉과 비슷한 덩치의 배를 비슷한 속도로 굴릴 수 있다.
놀라울 정도로 가벼우면서 방한 보온 효과는 탁월한 요즘 첨단 재질의 패딩 점퍼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또한 2200명이 넘는 타이타닉 탑승 인원 중에서 승객이 아닌 직원이 이미 800명을 훌쩍 넘고 거의 900명에 가까웠다는 점도 날 놀라게 한다.
굳이 항해에 직접 관여하지 않더라도 지하의 기계실에서 보일러에다 삽으로 열심히 석탄을 퍼 넣던 화부부터가 이미 170여 명이나 됐다. 갤리선 시절의 노꾼보다는 발전한 작업 형태인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매우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 거북선도 1척의 정원이 150명가량이었는데 그 중 무려 과반인 8~90명은 노꾼이었다고 하니...;;

또한 거기 안의 상점에서 일한다거나 승객간 우편· 통신을 담당하는 등, 어떤 형태로든 타이타닉 배가 자기 직장이고 월급을 받는 터전이었던 사람들의 수가 그만치 됐다. 배 안에서 일종의 '작은 사회'를 꾸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은 비행기에 법적으로 승객 50명당 승무원이 겨우 1명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비행기나 열차를 조종하는 인력도 1인 승무를 하네 마네 싸우는 중인 세상이다. 이걸 감안하면 요즘은 얼마나 사람 수가 줄었는지 알 수 있다.
까놓고 말해 타이타닉 호에 탔던 승객들은 요즘 식으로 치면 보잉 747이나 A380급 여객기 세 대면 다 실어나를 수 있다.
옛날 배의 덩치가 너무 작았던 것에 한번 놀랐고, 덩치가 커졌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비효율적이었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하긴, 전투기· 폭격기, 미사일 같은 게 지금처럼 발달하기 전에 딱 2차 세계 대전 타이밍 때는 전함도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게 돌아다니긴 했다. 요즘은 항공모함이 아닌 이상 그렇게까지 큰 배를 굴릴 필요가 없다.

3. 해군과 해전의 역사

기왕 배의 역사 얘기가 나왔으니 해전의 역사 얘기도 조금만 더 하자면..
선원 생활도 고되고 군생활도 고된데 둘을 합쳐 놓은 해군 수병은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악의 기피 직종이었다. 하지만 내륙국이 아닌 이상 바다를 장악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으니 어떤 나라든 해군을 육성하지 않을 수 없으며, 섬나라의 경우 그 필요성이 더욱 컸다.

해군은 배가 전장 겸 내무반이니 육군 같은 행군이나 숙영, 각개전투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함(배를 버리고 바다로..) 같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당연한 말이지만 수영을 잘해야 한다.
먼 옛날, 로마 제국이 있던 시절에는 인간의 무기들이 화력이 약했기 때문에 큰 배를 단번에 부숴 버릴 수 없었다. 그나마 배가 온통 나무로 만들어져 있으니 불화살 같은 걸로 화재를 일으키는 것이나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껏해야 배와 배끼리 부딪치거나 다리를 놓고 서로 근접해서 냉병기로 육박전을 벌이는 식으로 싸웠다. 그리고 배 자체는 그냥 나포와 노획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화약이 발명되고, 파편을 날리는 폭탄 대신 볼링공 같은 탄환을 날려서 배를 부수는 재래식 대포가 등장했으며, 이것이 함포가 되어서 성능이 갈수록 향상되었다. 배가 크고 무거워야만 더 크고 반동이 강한 함포를 얹을 수 있으며, 더 많은 승무원을 싣고 더 멀리까지 오랫동안 항해할 수 있다.

그러니 제국주의 군국주의 분위기에 편승해서 20세기 중반까지는 군함의 크기가 갈수록 커졌다. 그러다가 앞서 얘기했듯이 군용기와 미사일의 등장으로 인해 군함의 대형화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군함을 잡는 용도로 같은 군함의 함포만 있는 게 아니라 기뢰, 어뢰, 잠수함 같은 기묘한 물건도 등장했으며, 그런 것들을 퇴치하여 기함을 호위하는 용도로 구축함 같은 배가 또 따로 등장하게 되었다.

바다 위의 비행장인 항공모함은 태평양 전쟁 같은 전쟁이 또 터진다면 모를까 세계 경찰 우주 방어 미국 같은 나라가 아니면 또 쓸 일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유지비가 정말 억 소리 나게, 작살나게 깨진다는 것 하나는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
2차 세계 대전이 컴퓨터, 핵무기, 미사일이 발명되기 (직)전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그래도 한 박자 이전 세대의 전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4. 운하

육상 교통수단에 교량이 있다면, 선박에는 reverse 버전인 운하가 있다.
자동차나 열차가 물 위를 최단거리로 가로질러서 갈 수 있게 하기 위해 교량을 건설하듯, 반대로 배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최단거리 횡단 가능하도록 육지에다 운하라는 수로를 건설하니 말이다.
선박은 평소에는 끝없이 펼쳐진 2차원 평면에 가까운 망망대해 위를 다니지만, 좁은 운하를 통과하는 중에는 앞뒤로밖에 진행할 수 없는 열차와 비슷한 처지가 된다. 흥미로운 면모이다.

운하는 총기가 화살을 도태시키듯이 기선이 범선을 확인사살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자체 동력을 가진 기선은 어느 지형에서나 고정된 속도가 나오니 정시성이 보장되는 반면, 범선은 그런 곳에서 제대로 주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닷바람이라는 게 주변이 온통 차가운 바닷물이어서 공기와의 온도 차이가 생겨야만 발생하는데, 온통 땅으로 둘러싸인 좁은 물길에 불과한 운하에서는 그런 바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운하로는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 그리고 남북 아메리카 대륙 사이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가 있다. 파나마 운하가 수에즈보다 더 나중에 만들어졌으며 건설 난이도도 훨씬 더 높았다.

수에즈 운하는 그냥 배가 길을 따라 설렁설렁 지나가면 되고 폭도 넉넉하지만, 파나마 운하는 놀랍게도 양 말단의 해수면 높이가 서로 다르다. 그래서 물을 채웠다 빼기를 반복하는 여러 도크를 단계적으로 거치면서 고도를 올려야 한다. 철도로 치면 이건 완전 인클라인 내지 스위치백 방식이나 마찬가지로 보이는데, 이런 번거로운 절차 때문에 파나마 운하는 하루에 최대 30여 척 남짓한 배밖에 통과할 수 없다.

비행기에 협동체와 광동체가 있고 철도 궤간에도 광궤· 협궤가 있듯, 운하에는 응당 폭의 제한이 존재한다. 열악한 환경에 만들어진 파나마는 수에즈만치 큰 배는 통과할 수 없다. 그리고 아까 언급한 단계별 진행 특성으로 인해, 폭뿐만 아니라 길이의 한계도 존재한다. 2010년대에는 선박 통행 트래픽 증가와 대형화에 대응하기 위해 두 운하 모두 확장 공사도 거쳤다고 한다.

5. 배의 닻

좀 무식한 얘기이다만 본인은 선박이나 해운 쪽으로는 문외한이다 보니 오랫동안 닻과 돛의 차이도 잘 모르고 있었다. 용도가 서로 완전히 다른 부품이구만.. 돛이야 배의 동력원이 엔진으로 바뀐 뒤부터는 필요 없어졌지만 닻은 자동차로 치면 정말 주차 브레이크 같은 필수품이다.

둥실둥실 물에 떠 있는 배에다가 자동차처럼 바퀴에 굄목을 설치하거나, 접지 마찰을 이용한 브레이크를 장착할 수는 없다. 그러니 배의 중량을 증가시키는 걸 감수하고라도 무거운 갈고리 같은 걸 따로 달았다가 바닥에 내려서 그걸로 배를 정박시켜야 한다. 왕창 큰 배의 경우, 닻만 해도 수 톤~10수 톤에 달하는 육중한 쇳덩어리가 장착된다.

배는 브레이크가 없는 관계로 어지간해서는 그냥 관성과 자연 감속에만 의존해서 정지시키지만.. 만약 불가피하게 급제동을 해야 하면 엔진을 역추진하거나 이 닻을 내려뜨린다(비상투묘). 대형 여객기가 착륙 직후에 여전히 시속 200이 넘게 속도가 붙어 있는데.. 랜딩기어의 브레이크뿐만 아니라 엔진 역추진과 플랩· 스포일러까지 총동원해서 필사적으로 감속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다만, 무리하게 투묘했다가는 배가 서는 게 아니라 반대로 랜딩기어를 붙잡고 있던 부품이 저항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고 떨어져나가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집채만 한 배를 고정시켜 준다는 우직한 심상으로 인해 배나 해군의 상징에는 닻이 꼭 그려져 있다.
성경에서는 사도행전 27장, 바울이 배 타고 로마로 가는 장면에서 배의 닻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사도행전 27장은 나 같은 육지 사람이 읽기만 해도 뭔가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하물며 그쪽 업계 종사자 중에 크리스천이신 분이 읽으면 더욱 의미심장할 것 같다.

여기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딱 한 번, '소리 내다'가 아니요, '건전한'도 아니요, '수심을 측정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로 sound가 나오기도 한다. 그 시절에는 당연히 줄자 같은 걸 내려뜨려서 수심을 측정했겠지만, 동사가 sound이다 보니 그 시절에 마치 초음파 같은 걸 쏘기라도 해서 깊이를 측정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음으로 성경에서 또 닻이 나오는 곳은 그 유명한 히 6:19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anchor of the soul)이다. 인생이라는 항해 중에 둥실둥실 불안하게 이리 휩쓸리고 저리 끌려가는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반석, rock-solid함을 나타낼 때 닻이라는 물건을 동원해서 비유한 게 인상적이다. 히브리서는 저자에 대해서 논란이 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배 타고 전도 여행 많이 다닌 바울이 썼다는 것이 유력한데, 이 점을 생각하면 표현에 더욱 수긍이 간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12 08:32 2017/06/12 08:32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69

버스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시내버스라는 게 역사상 최초로 운행된 건 1920년 7월 1일, 대구에서이다.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다. 거기는 노면전차와 철도가 국내 최초였고 길거리에 택시는 다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시내버스 같은 건 없었다. 서울에서 시내버스가 등장한 건 그로부터 8년 가까이 지난 1928년 4월의 일이다.

그때는 시내버스만 해도 아무나 탈 수 없었으며, 버스 운전사는 지금의 철도 기관사나 여객기 조종사에 준하는 완전 뽀대 나는 유니폼 착용 전문직이었다. 한 마디로 지금보다 지위가 훨씬 더 높았다.

예전에 버스에 대해서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래도 버스의 외형과 시설의 변천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가장 큰 이유로는 검색해 보니 이 주제를 워낙 잘 정리해 놓은 사이트가 이미 있어서 내가 따로 글을 쓸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지 싶다. 그러니 이 블로그에서는 그냥 변화의 큰 추세를 요약만 좀 해 보겠다.

1. 1950년대: 원박스화

먼 옛날, 20세기 초중반에 자동차들의 디자인 트렌드는 소형차건 대형차건 엔진룸은 전면부 중앙에 튀어나오고 앞바퀴 펜더가 돌출된 형태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다 1950년대쯤부터는 엔진룸이 별도로 튀어나오지 않고 차체 바닥 밑으로 간 원박스형(혹은 R캡이라고도 불림) 버스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때는 버스의 디자인이 지금과 비슷해지기 시작한 일종의 과도기라 볼 수 있다. 50년대 말에 등장한 시발디젤 버스도 그런 형태이며, 관련 사진은 이 블로그를 검색해 보면 나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52년의 부산 정치 파동 때 국회의원들이 탔던 버스도 사진을 보니 정확한 차종과 제조사는 알 수 없지만 원박스형 버스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1960년대: 디젤, 안내양

이때부터 시내버스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어서 시민의 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노면전차가 폐지되었다.
버스의 차체가 더 커지기 시작했고, 엔진이 휘발유에서 디젤 기반으로 바뀌었다. 시발 버스도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냥 버스가 아니라 '디젤 버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시내버스에는 공식적으로 '여차장'이라 불리던 안내양이 등장했다. 모든 승객이 타거나 내린 뒤, 안내양이 차를 툭툭 치며 "오라이!"라고 운전사에게 외치는 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도 나온다.

지하철 업계에는 승객을 강제로 밀어넣는 푸시맨이 있었던 것과 비슷하게, 옛날에 시내버스는 문을 닫을 수 없을 정도로 승객이 너무 많이 탔을 때의 대처법이 있었다. 일단 출발 후 운전사가 직선 도로에서도 오른쪽으로 살짝 급핸들 조작을 해서 사람들을 원심력 때문에 왼쪽으로 강제로 쏠리게 했다. 그 사이에 안내양이 문을 닫았다. 그런 기동이 벌어지기도 했댄다.

옛날엔 시골에서 무작정 올라와서 가진 것 배운 것 없이 맨몸만으로 돈을 벌기 위해 버스 안내양 직업을 선택한 여성들이 많았다. 이들의 애환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버스 요금을 차내에서 현금으로만 거래하던 시절에는 돈 관리도 안내양이 했는데, 정확한 승차자의 집계가 안 되니 승객으로부터 받은 돈의 일부를 안내양이 슬쩍 '삥땅', 횡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 역시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안내양들이 근무 중일 때는 개인 돈을 절대로 지참하지 못하게 하고, 지금의 관점에서는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인권유린일 정도로 가혹한 방식으로 불시 몸수색을 했다고도 한다. 그래도 그때는 약한 을인 안내양들이 이의 제기를 할 수 있지 않았다.
(참고로 조폐공사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지금도 작업장에 드나들 때 개인 돈은 절대 지참하지 못한다. 개인 사물함에다 몽땅 보관해야 한다.)

3. 1970년대: 두짝 문, 고속버스

과거의 버스들은 앞바퀴가 차체의 굉장히 앞에 있었으며, 출입문은 가운데에 한 군데에만 있었다. 지금은 마이크로버스만이 이런 형태인데 말이다. 안내양은 바로 그 문의 문지기 역할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게 레알 말죽거리 잔혹사 시절 시내버스의 모습이다.)

그러다 70년대 후반쯤부터 대형 시내버스들은 요즘 버스처럼 앞문과 뒷문 구분이 생겼으며 앞문은 앞바퀴보다 더 앞에 놓이게 되었다. 단, 문은 수동 개폐식이었으며 뒷문도 앞문처럼 폴더(?) 형태로 접혔다. 이런 버스 보신 분 계신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타는 문과 내리는 문을 분리하고 나니 승객의 승하차가 더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아울러, 시내버스 얘기는 아니지만 1970년에는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 덕분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고속버스라는 게 등장했다.
그 시절에도 경부선 열차를 타면 서울-부산을 5시간 이내에 주파할 수 있긴 했지만 그건 관광호 내지 새마을호처럼 서민이 범접하기 어려운 매우 비싸고 빠르고 정차역 적은 최고 등급 열차를 탔을 때에나 가능했다.

그런데 고속버스라는 '자동차'를 이용해서도 열차 만만찮은 빠른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졌으니 이때 고속버스의 인기는 대단했다.
고속버스 운전사는 지금의 KTX 기장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고속버스에도 안내양이 탑승했다.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안전벨트를 챙겨 주고 짐 나르는 걸 돕는 등, 지금 비행기 스튜어디스가 하는 일을 차내에서 했다. 가고 서기를 반복하는 시내버스 안내양과는 하는 일이 사뭇 달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4. 1980년대: 리어 엔진, 토큰, 하차벨, 자동문

그 뒤 1980년대에는 후방 엔진 버스가 등장해서 대형 버스들은 다 이런 형태로 바뀌었다. 전방 엔진은 앞부분에 타는 곳이 굉장히 높으며, 운전석 옆에 따끈한 물건 거치대가 있었다. 그 대신 맨 뒷좌석은 봉긋 솟아 있지 않고 높이가 다른 좌석들과 동일했다.

그 밖에 이 시기에는 시내버스에서 안내양이 퇴출되는 기술적인 기반이 차근차근 마련됐다. 먼저 현금 대신 버스 토큰이 등장하여 차내에서 번거로운 잔돈 거래를 하는 여지가 줄었다. (서울 시내버스에서의 첫 도입 시기는 1977년)
그리고 차내에 하차벨이 생겼으며, 사람이 일일이 뭘 돌리지 않고 버튼만 누르면 별도의 동력으로 개폐되는 자동문이 등장해서 이쪽으로도 동작이 수월해졌다. 뒷문은 폴더가 아니라 미닫이 형태로 바뀌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1인 승무 시내버스의 원형은 이때쯤 대부분 완성되었다.

5. 1990년대: 에어컨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1989년 12월 말을 끝으로 안내양은 전국의 시내버스에서 법적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여차장을 둬야 한다는 법 조항 자체가 개정과 함께 삭제됐다.
그리고 나라가 좀 살 만해지고 자동차 기술의 발달 덕분에 엔진 출력도 넉넉해지면서 버스에 냉방기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90년대에는 전철도 아직 천장에 선풍기가 달려 있고, 지하철역 승강장은 여름에 너무 덥다고 뉴스에서도 난리를 칠 정도였다.

시내버스에 자동 변속기가 도입된 것도 이 무렵에 도입된 현대 애어로시티가 최초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대형 상용차에 자동 변속기는 비싼 추가 옵션 가격과 연비· 효율 문제로 인해 2010년대인 지금까지도 보급이 더딘 편이다.

6. 2000년대와 이후: 저상버스, 천연가스 버스, 환승 할인, 정거장 안내방송, 위치 안내

21세기에 시내버스는 생각보다 굉장한 발전을 거듭했다.
먼저 타고 내리기 쉬운 저상버스가 등장했으며 버스들이 동력원도 천연가스로 바뀌어서 대도시의 공기 질 개선에 굉장히 큰 기여를 했다.

그 밖에 IT 기술과 접목하여 환승 할인, 정류장 위치 안내 시스템도 20세기에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요 근래에는 그냥 도착 안내만 하는 게 아니라, 오는 버스들의 내부 혼잡도를 같이 표시해 주는 기능도 추가되어 매우 유용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내버스 요금은 먼 옛날과 비교했을 때 평균 물가 상승률보다 훨씬 더 가파르게 많이 오른 요금에 속한다.
버스 요금은 처음에 단가 자체가 절대적으로 굉장히 저렴했으며, 지금은 버스의 수송 분담률이 옛날보다 매우 낮아져서 개인당 단가가 크게 오르기도 했다. 거기에다 우리는 각종 IT 인프라 덕분에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더 편리하게 버스를 이용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비싼 요금이 마냥 바가지인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31 08:26 2017/05/31 08:26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65

 
헌정체계 대통령 대수 대통령 개헌 내력 북괴
미군정 존 하지   소련정
1공 (1948) 1 이 승만 제헌헌법, 대통령 4년+1중임, 부통령, 간선 김 일성
2 1차, 대통령 직선제 (부산 정치 파동, 발췌개헌)  
3 2차, 초대에만 중임 제한 폐지 (사사오입) 8월 종파 사건 (정적 숙청)
2공 (1960) 4 윤 보선 3차, 의원내각. 최초의 졸속 아닌 합법적 개헌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4차, 1공 시절 잔재 청산??  
3공 (1962) 5 (vs 윤 보선) 박 정희 5차, 대통령 중심제로 회귀. 지방자치 사실상 사문화  
6 (vs 윤 보선)    
7 (vs 김 대중) 6차, 3선 개헌  
4공 (1972) 8 단 7차, 유신, 대통령 6년+무제한 중임, 간선 주체사상 명문화 (자가신격화)
9 독
10 출 (1979) 최 규하    
11 마 (1980) 전 두환    
5공 (1981) 12 8차, 대통령 7년 단임  
6공 (1988) 13 노 태우 9차, 대통령 5년 단임, 직선; 지방자치제 부활  
14 김 영삼   김 정일, 고난의 행군 (경제 파탄)
15 김 대중    
16 노 무현    
17 이 명박  
18 박 근혜  3공과 6공 그 어떤 선거 때보다도 많은 득표율로 당선됐지만..;; 탄핵소추 파면 김 정은

대한민국, 남한이라는 이 나라는 다음과 같은 점들로 인해 여느 나라들과 같지 않은 독특한 현대사를 보유하고 있다.

  • 20세기 중반에 주변 나라들과는 달리 매우 이례적으로 공산화되지 않았다.
  • 일본의 덴노 같은 정신적인 지주나 중심점이 있지 않으며, 그나마 있던 것도 조선이 망하면서 싹 사라졌다.
  • 미국처럼 초대 대통령이 2선만 하고 깔끔하게 물러났다거나, 쿠데타 한 번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오지 않았다. 미국은 도중에 중임 관련 규정만이 살짝 바뀌었을 뿐, 대통령의 임기 체계 자체가 우리나라 헌정사 같은 급의 큰 변화나 굴곡을 겪은 적은 없다.

본인은 노 태우 대통령 내지 서울 올림픽 시기가 스스로 경험한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가장 먼 과거이다. 그 이전은 기록을 통해 간접 체험만을 한 선사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5공 시절을 직접 경험한 기억이 없다. 노 태우의 바로 전임까지만 해도 대통령을 5년마다 한 번씩 뽑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 체계가 완전히 달랐다는 얘기가 대단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그땐 도대체 선거를 어떻게 했기에 이 승만이나 박 정희는 1~3대, 5~9대로 대통령을 그렇게 오래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굳이 왜 기간과 대수를 나누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각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야 개인의 정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런 들쭉날쭉한 자국의 헌정사 자체는 역덕후에게 뭔가 유사점과 차이점을 정리하고 분석할 만한 좋은 아이템인 것 같다.

가장 먼저 미군정부터 생각해 보자. 미군정은 기간이 짧고 존재감 없는 과도기여서 잘 부각되지 않지만, 알고 보면 단군의 후손들이 거의 전무후무하게 백인(미군정 사령관인 존 하지 장군)의 통치를 받은 시절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독특하다. 마치 신미양요가 분단 이전에 단군의 후손이 무려 미국과 군사 교전을 벌인 전무후무한 사건인 것처럼 말이다.
한국은 일제 식민지가 됐을지언정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입각한 서양 백인들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나라이다. 영국이라든가 스페인이라든가... 대한민국 역사상의 미군정은 저런 이념에 따른 지배는 아니었다.

그 뒤 우리나라 역사상 통치 기간이 가장 길었던 대통령 톱 3(쓰리)는 이 승만, 박 정희, 전 두환이다. 이 승만은 선출은 선거를 통해 무리 없이 됐지만 훗날 장기 집권을 위한 꼼수 개헌을 했으며, 박 정희는 쿠데타에다가 장기 집권 개헌을 모두 자행한 인물이다. 마지막 전 두환은 집권을 위한 쿠데타만 저질렀으며 임기 만료 후에는 군소리 없이 물러나긴 했는데.. 이것도 전국민적 저항이 없었으면 물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있긴 하다.

초대 제헌헌법이 규정하는 대통령 체제는 보다시피 완전 미국 스타일인 걸 알 수 있다. 이 승만은 1~3대 대통령을 역임했는데, 위의 표에서 보다시피 매번 헌법을 자신의 당선에 유리하게 약간씩 뜯어고쳤다. 직선제는 그 자체는 나쁠 것 없는 선거 제도이지만, 아마도 꼴보기 싫은 야당 의원이 아니라 무지몽매한 민중을 돈과 서커스로 꾀어서 직접 투표를 시키면 여당에게 더 유리할 것 같아서 도입한 듯하다. 그래도 2선 때는 우리나라가 아직 전쟁 중인 관계로 정서적으로 어지간해서는 집권 여당을 바꾸지 않으려고 하니 이 승만의 당선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3선 이상까지 하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심지어 롤모델 국가인 미국에서도 대공황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경험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같은 사례 말고는 찾기 어렵다. 그러니 단순한 정치깡패 동원이나 부정선거만으로는 안 되고 또 헌법을 고쳐야 했다.

다른 대통령도 아니고 초대 대통령이 벌써 저런 짓을 하면 얼마나 안 좋은 선례가 남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그 고령에 그 검소한 구두쇠 대통령이 다른 돈과 권력, 명예를 탐해서 저런 짓을 한 건 아니고, 그냥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내가 꽉 붙들지 않고 야당에게 정권을 선뜻 넘겨 줬다간 남조선이 또 공산당 손에 넘어갈 것 같다."라는 자격지심 똥고집 때문에 저렇게 된 것 같다. 그게 아무 근거 없는 황당한 망상도 아닐 뿐더러 인의 장막은 그 기질을 더욱 부추겼을 테고. 게다가 신 익희(1956), 조 병옥(1960) 같은 야당 라이벌 정치인이 알아서 없어져 주기까지 한 덕분에 3선과 4선은 더욱 수월하게 넘겼다.

허나 도를 넘는 부정선거가 폭로되면서 12년 독재를 참다못한 국민들로부터 전국적인 혁명이 일어나자, 이 승만은 현실을 직시하고 하야를 선택하게 됐다. 제1 공화국은 자신은 부정부패와 독재를 저지르면서도, 참 아이러니하게 국민들에게는 국민학교에서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릴 만한 사상적인 기반을 듬뿍 마련해 줬다. 비록 현실이 시궁창이었을지언정 최소한 방향만은 올발랐던 셈. 이로 인해 남한과 북한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이 승만 얘기가 갑자기 좀 길어졌는데, 그 다음 출범한 제2 공화국은 우리나라 헌정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인 의원내각제 정부이다. 군부나 독재자의 입김이 개입하지 않고 나름 최초로 합법적(?)인 절차로 개헌도 이뤄 냈다. 이게 제대로 시행됐으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 승만 시절과는 굉장히 딴판인 나라가 됐을 수도 있지만 박 정희 군사정권으로 인해 송두리째 뒤집어엎어지면서 이건 정말 짧고 존재감 없는 흑역사 헌정 체제가 됐다.

2공이 계속 유지되는 배경을 설정해서 대체 역사물 소설이나 영화가 충분히 나올 법해 보이지 않는가? 아예 조선이 망하지 않아서 입헌군주제가 계속 유지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보다야 더 현실적일 것 같지만.. 그래도 현실에서는 고종· 명성황후가 장 면· 윤 보선보다 존재감이 더 크고 대중적인 인기가 더 좋다.

2공은 '장 면 내각'이라고도 불린다. 다만, 장 면은 국무총리였고 대통령은 엄연히 윤 보선이었다. 이때 행해진 4차 개헌은 친일 반역자..는 아니고 1공 시절의 정치 깡패나 부정 선거 주동자 같은 반민주(반민족이 아님) 행위자를 처벌하고 청산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개헌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과거의 행위를 새로운 법으로 처벌하는 것이니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그때부터 있었다. 4공 시절 박통의 긴급조치 중 3호만은 그리 정치적이지 않고 생뚱맞은 민생 분야인 것과 비슷하게 4차 개헌은 나머지 개헌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그 다음으로,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의 주인공인 박 정희가 등장한다. 그는 대통령 선출은 훗날 전역 후 민간인 신분으로 된 것이고, 쿠데타 직후에 아직 군인 신분일 때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도 역임했었다.
이때는 아직 나라가 워낙 못살고 사회 기강이 불안하고 6· 25 시즌 2가 또 벌어질지 모르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다 갈아엎자" 식의 군사혁명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지지를 많이 받았다. 지금처럼 길거리에 뛰쳐나와 촛불 들고 "민주주의가 죽었습니다" 이럴 상황이 아니었다. 전땅크의 쿠데타 때와는 달리 박통의 쿠데타 때는 누가 막 심하게 저항하거나 죽지도 않았다.

박통은 차근차근 자본을 유치하고 경제 개발을 해 나갔다. 경부 고속도로도 3공 시절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겨우 한두 대만으로는 임기가 너무 짧았다. 온갖 공작으로 야당 후보를 간신히 이겼는데 3선을 하자니 진짜 이 승만 시절의 사사오입 개헌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헌법을 또 날치기로 고쳐야 하게 됐다. 그리고 나중에는 헌정 체계를 전반적으로 다 자기 독재에 맞게 뜯어고치는 유신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4공 체제에서는 단독 후보가 혼자 출마해서 꼭둑각시 의원들의 만장일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지만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앞서 언급했듯이 긴급조치라는 필살기도 내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정치 제도가 이렇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건 정치적으로 엄청난 모험이었기 때문에 반발을 최소화하려면 경제 개발, 민생 안정, 굳건한 반공 안보, "우리식 민주주의" 등 뭔가 좋은 명분을 만들어서 '유신'이라는 브랜드명(?)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세뇌를 시켜야 했다.

박 정희가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이 4공 체제가 도대체 얼마나 갔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가 9대 대통령의 예정 임기만 다 마쳤어도 이미 1984년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에서 5~8호선뿐만 아니라 3호선 양재-수서와 4호선 당고개도 시기적으로는 2기 지하철에 속하듯, 10대 최 규하와 11대 전 두환도 시기적으로는 이런 4공 체제에서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박통 당사자 말고 다른 정치인들이 이런 무지막지한 독재 헌정 체제를 받아들일 리 없었으므로 이내 쿠데타가 일어났고 헌법도 업데이트 됐다. 그래서 4공 중에서 8~9대는 유신 시대이지만, 10~11대는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라는 기구 휘하에 있었다.

박통이 암살 당한 뒤에도 1980년 서울의 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독재자가 물러났다고 해서 군대가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대통령 임기와 관련된 개헌은 그 당대의 대통령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가히 "신의 한 수" 소급 적용 금지 조항이 5공 시절 8차 개헌 때에야 드디어 추가되었다. 뭔가 "자백만이 형사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라면 그 자백은 인정되지 않는다", "피고인에게 유리한 법 개정만 소급 적용되고, 불리한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우여곡절 시행착오를 겪은 뒤, 우리나라는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6· 29 선언이 이뤄졌으며, 박 정희 유신 시절 이래로 없어졌던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고 5년 단임제가 정착했다. (5공 12대 대통령 선거도 유신 시절 같은 노골적인 단독 출마만 아니지, 주요 야당 후보들은 감금당한 채로 관제야당 후보들이나 참여한 답정너 선거였기 때문) 당장 13대 때는 후보 단일화 실패로 인해 또 전 두환의 육사 후배인 노 태우가 당선됐지만, 14대 이후부터는 순수 민간인 대통령이 나오고 있다.

이 1987년 9차 개헌이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10년 넘게, 아니 30년 가까이 장수하고 있는 헌정 체계이다. 과연 이 상태에서 헌법이 부분 또는 전면 개정돼서 7공화국이 나올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총평

1. 본인은 위와 같은 내력을 감안하고도 이 승만과 박 정희 대통령을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전자는 0에서 1을 만든 사람이고 후자는 1에서 100을 만든 사람이다. 그 절망적인 가난과 시궁창인 국민 의식, 북괴의 위협 속에서 그만치라도 이룬 게 용하고, 그 정도 독재는 막 잘했다고 칭송할 수는 없어도 이해와 수긍이 된다. 지금 역으로 의회와 언론의 막장 횡포를 생각하면, 옛날에 그 상황에서 그 정도 의회· 언론의 통제와 독재 없이 적화통일을 어떻게 막고 경제 성장이고 민주주의고를 어떻게 이룰 수 있었을까? 독재 정권이 뭘 그렇게까지 망쳐 놓을 게 있었는지 이상한 피해의식 선동에 공감하지 않는다.

2. 물론 경제 성장을 이룬 뒤에 이 정도 국민의 희생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이룬 것 역시 그 의미와 가치를 폄하하고 싶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는 충분히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군사 정권이 잘한 것을 실드 치더라도 그들의 쿠데타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고 싶지는 않다(장 태완 같은).
하지만 오늘날은 민주화라는 게 그냥 별 명분도 없이 그저 권위에 대항하고 반역하는 걸 합리화하는 데 쓰이고 국가 체제를 부정하고 필요악을 없애자고 하고 더 심하게는 반정부 종북 세력에게 선동되고 이용당하는 추세가 명백하여 본인은 이를 경계한다. 옛날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운동꾼들도 태극기를 들고 나오곤 했는데 요즘 어떤 사람들은 태극기와 애국가를 싫어하는 것 같다.

3. 북괴의 존재로 인해 대한민국은 무슨 분야든 천천히 여유롭게 발전을 할 수가 없어졌다. 여기서 우리나라 20세기 중후반의 대부분의 비극이 시작됐다. 또한 북괴 같은 저질이 존재함으로써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수준까지 하향평준화되었음도 명백히 사실이다. 뭔 무능과 비리를 저지르더라도 최소한 안보관· 사상 자체가 썩었거나 대놓고 북괴에다가 퍼주고 교류하자, 말만 번드르하게 포장해서 공산주의 하자는 놈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이건 우리나라 정치판의 고질병으로 남거나, 아니면 진짜 나라가 망해서 고생해 봐야 해결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28 08:33 2017/05/28 08:33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64

1. 애산과 한글 학회

본인은 몇 년 전 한글 학회 관계자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애산 이 인 선생(1896-1979) 추모 학술대회' 초청장이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 약력을 보니 해방 초기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법조인이긴 한데, 본인은 그 당시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 시절의 관련 분야 인물로는 초대 제헌 헌법 초안을 작성한 유 진오 박사 같은 사람밖에 못 들어 본 상태였다. 저분은 진짜로 문학과 법학에 모두 통달하여 공부의 신이요 문과 먹물 계열의 가히 천재 완전체였다.

그러니 처음 보는 인물에 대해서는 "국어학자도 아닌 사람이 한글 학회와는 무슨 상관?" 이런 의문이 들었으며, 그 당시에 또 시간대도 안 맞아서 그 행사에 가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저 분야에서 저렇게 언급된 인물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본인의 머릿속 기억 한 구석에 각인되었다.
그 뒤 나중에 차츰 알고 보니 애산 이 인이라는 분 역시 생각보다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었다. 호머 헐버트와 더불어 한글 학회를 계기로 알게 된 위인 중 한 분이다.

이분은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일제 강점기 때 피식민지 조선인으로서 변호사가 되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변호사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선생은 일제 강점기 동안 의열단, 안 창호 사건 등 여러 항일 운동에서 자진해서 독립 운동가들을 변호했으며, 그것도 국선이 아닌 민간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변호를 무료로 해 줬다. 일본의 국익을 대변하지 않는(?) 변호가 너무 잦고 일제 말기엔 창씨 개명조차 거부하니 조선 총독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으며 변호사 면허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처럼 말이다.

이런 민족 인권 변호사가 이 인 말고 전국적으로 몇 명 더 있긴 했지만(허 헌, 김 병로) 그래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수였다.
그리고 이 인 선생은 여느 변호사와는 달리 한글 학회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역시 문과 전문직답게 자기 나라 말과 글의 소중함을 알고서 조선어 사전 편찬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했으며, 1942년엔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되어서 구속되기까지 했다. 다만, 이분은 옥고를 치른 다른 국어학자들과는 달리 집행유예로 끝났다.

해방 후에 이분은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건국 초기부터 우리나라에서 관련 분야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았으며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한글 학회가 장소가 협소하고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1976년에는 지금의 붉은 벽돌 건물인 한글 회관을 짓는 기금 3천만 원을 쾌척했다. 40년 전 물가로 3천만 원... 이건 마침 비슷한 시기에 막 출시되었던 현대 자동차 포니를 10대가 넘게 살 수 있던 금액이었다(대당 약 230만 원).

그리고 이분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임종 전, 유언을 통해 자기 전재산을 한글 학회에 기증했다! 이 정도이니 한글 학회에서 두고두고 칭송할 수밖에 없겠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두루 우리나라에 끼친 업적이 워낙 출중하기 때문에 사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정확한 수훈 등급이 뭔지 문헌에 따라 국민장과 독립장이 서로 난립해 있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다.

한글 학회는 전신이던 조선어 학회 시절에 최초의 국어사전을 편찬했으며, 이것을 오늘날까지 굉장히 큰 자랑거리와 자부심, 긍지로 여긴다. 특히 조선어 학회 사건을 사건이 아니라 '수난'이라고 자체적으로 의미를 더욱 부여해서 부른다.
국립 국어원의 표준 국어 대사전이 국어사전계를 평정해 버린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 표준 국어 대사전조차도 이해타산 문제로 인해 종이책으로는 더 출간되지 않으니 참 아이러니다. (유니코드 전 영역 차트도 종이책 출간이 이미 진작부터 중단됐고..)

한글 회관의 건립과 관련해서는 그 당시 박 정희 대통령도 큰 기여를 했다.
노산 이 은상 선생이 박통을 직접 찾아가서 한글 회관 건립을 위한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이 "국방 성금은 1원도 안 낸 양반이 무슨 한글 회관 같은 데에 모금 요청을?" 식으로 씨크하게 반응했으나, 다음 날엔 1억 원이라는 돈을 금일봉 형태로 당시 영애이던 박 근혜 씨를 통해 전해 줬다고 한다. (한글 학회 김 종택 회장의 증언)
박통은 이것 말고도 한글 관련 단체 지원이나 어문 정책 쪽으로도 칭송 받을 행적을 여럿 남겼다. 광화문 현판조차도 한자가 아닌 한글로 친필을 남겼을 정도이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날 한글 학회는 학술적인 성향이 절반, 한글 문화 연대처럼 운동 및 계몽적인 성향도 절반 정도 덤으로 갖추고 있다. 애국 단체라고 국내외로 후원하는 분도 적지 않다. 그리고 저런 사연을 거쳐서 1970년대에 건립된 한글 회관 건물 덕분에 서울 도심 금싸라기 지대에 좋은 부동산도 보유하고 있고, 그걸로 임대업 하면서 직원 월급도 준다.
그러나 지은 지 40년 된 건물은 딱 봐도 주변 건물들에 비해 외관이 낡았으며, 온통 임대를 주느라 정작 학회 자체의 문헌과 자료를 쌓아 둘 공간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업무용 건물의 건축 트렌드인 유리궁전과는 달리, 혼자 떡 버티고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한눈에 봐도 완전 옛날스럽다. 부산에서 봤던 동아 대학교 석당 박물관, 부산 임시 수도 청사도 다 같은 붉은 벽돌이지 않던가?
인테리어로 가면 옛날에는 가구나 복도 바닥, 문 같은 것도 요즘처럼 금속, 플라스틱, 콘크리트가 아니라 목재가 훨씬 더 많이 쓰였다.
옛날에는 금연에 대한 경각심도 지금보다 훨씬 덜했으니 저런 건물은 안에 들어가면 담배 냄새가 쩔어 있기도 할 것 같다. 거기에다가 각종 간판이나 표지판 글꼴까지 어설픈 둥근고딕 내지 붓글씨 부류로 넣으면 완벽한 옛날 고증 완성이다.)

2. 애산과 반민특위, 영화 <암살>

그럼 이번에는 한글 학회 말고 법조인으로서 애산 선생이 관계가 있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보겠다.
이분은 명백히 변절 없는 항일 독립 운동 노선을 갔으며, 사후에 건국훈장이 무난하게 추서되었을 정도이다. 그런 한편으로 해방 후에는 반공 우파를 표방하면서 이 승만 정권을 지지했다. 이것도 내가 보기엔 정상적이고 건전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반민특위(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의 위원장까지 돼서는 이 위원회를 완전히 해체시켜 버린 것은 언뜻 보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이것 때문에 이 승만 정권은 친일 청산을 안 한 정권이라고 후대로 욕을 두고두고 쳐먹게 되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는 관련 장면이 영화 <암살>의 결말부에 묘사돼 있다.
염 석진은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증인을 비열하게 미리 죽여 버린 덕분에 증거 불충분 → 공소권 없음 → 불기소 처분으로 끝난다. 이 꼴을 보니 판사조차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는지, 원래 주려고 했던 벌은 못 주고 "단, 법정모독죄로 벌금 2만원에 처한다"와 함께 재판봉을 부서져라 내리치고는 나가 버린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 좌익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 원봉을 띄우고, 남조선은 친일 청산 못/안 한 나라라는 왜곡된 시각'만' 주입한다는 이른바 '좌편향'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 그 얘기를 더 논하지는 않겠다. 우리나라가 북괴나 구소련처럼 기록말살형이 존재하는 속좁고 옹졸한 나라는 아니며, 훗날 일제에게 변절했거나 월북한 사람이라도 흑화 전의 행적 중에 선한 게 있다면, 훈장은 안 줄지언정 팩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있으니 말이다.

사실, <암살>의 원래 대본에는 재판 중에 이런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최종적으로는 짤렸다.

- 검사: (와~ 재산 목록 보소~) 피고는 지금까지 도대체 독립운동을 하셨습니까 사업을 하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팔아서 번 겁니까 이거?
- 염 석진: (개빡침. 검사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다가 손찌검~) 이 친일파 아들놈의 새X가 지금 와세다 법대 나와서 꽃방석에 앉았다고 내 앞에서 떵떵거려? 니 애비도 우리 암살 리스트에 있었어 이 X꺄. 어딜 감히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내 인생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염 석진이 처음엔 독립운동을 하다가 종로 경찰서 지하 고문실에서 끔찍한 생명의 위협을 겪고서야 밀정으로 변절했듯, 심지어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 반민특위 재판을 진행하는 법조인들조차도 사실 친일파 가문의 금수저 출신이었다는 반전이 숨어 있다. 이 지경이라면 이놈의 나라는 참 꿈도 희망도 없다.;;

영화의 작품성을 위해서는 선악 구도가 일관된 게 더 보기가 좋으며 저 장면이 없는 게 더 낫다. 그러니 편집은 적절하게 한 거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저 장면이 있는 것이 1940년대 말의 완전 시궁창이던 현실의 선악 구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는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일제만 물러갔다고 해서 군· 경 간부가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니고, 판· 검· 변호사 같은 법조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라가 혼란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사회 질서를 유지시키는 사람들이 특별히 노련한 경력자 위주로 더욱 필요했다. 친일 경력 없다고 해서 일자무식한테 법률 자문과 재판 판결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단순 생산· 기술직이 아니라 저런 전문직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결국은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 많이 한 사람 차지가 되는데, 유복한 환경이 아무래도 항일보다는 친일 쪽 집안에 더 많이 조성돼 있었음은 자명하다. 이게 참 불편하다면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니 일본 경찰· 헌병 출신 조선인이 훗날 반공투사로 깃발 바꿔 단 것만큼이나, 일제 치하에서 법조인으로 편하게 살았던 사람이 역설적으로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변신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법조인 중에 저런 민족 인권 변호사만 있었던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애산 선생을 생각해 보자. 그는 영화에 나온 것처럼 친일파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독립 운동가 출신의 법조인이요, 한글 학회의 제일 든든한 후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반민특위 활동을 통한 친일 청산을 반대하는 소신이었을까?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legal mind 관점에서 봤을 때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해체시킨 게 아닐까 싶다.

당장 몇몇 악질 부역자들을 망신 주고 응징해서 감정적인 만족을 얻는 것보다 부작용이 더 커지고 있었다거나, 정확한 진상 규명과 재판이 현실적으로 도저히 곤란했다거나, 불순분자들이 반민특위 조사관을 사칭하면서(문화혁명 당시의 가짜 홍위병 같은!) 생사람 잡는 일이 늘었다거나...

그 당시 이 승만 대통령이나 애산 선생이 반민특위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겠는지는 본인이 기회가 되고 자료를 더 접하는 대로 공부를 더 해 볼 생각이다. 다만, 결과가 무엇으로 귀착되건 그 당시에 나라가 일제 부역자 전문직들을 불가피하게 재등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Windows 9x가 그 당시의 가정용 똥컴에서 돌아가고 도스 호환성을 보장하기 위해 16비트 코드를 불가피하게 재등용할 수밖에 없던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맥락의 한계이다. 우리나라의 친일파 청산을 제일 방해한 것은 사회 혼란과 체제 전복을 조장하던 북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게 절대적인 사실이다. 어떤 경우든 누가 선동하는 것처럼 친일 청산이라는 걸 악의적으로 일부러 안 한 건 아니다.

끝으로, 다시 영화 <암살> 얘기로 돌아오면,
원래 의도했던 것처럼 염 석진이 검사와 싸우는 장면이 들어가 있어야 "법정모독죄로 벌금 2만원형"이 논리적으로 개연성이 성립하겠다.
겨우 웃통 벗고 "내 몸엔 일본놈들의 총알이 6개나 박혀 있소!" 쇼 한 게 왜 지금 물가로 수백만 원 이상의 벌금을 내야 할 법정모독죄인지 본인은 지금까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역시 짤린 장면을 보니까 납득이 된다. 검사랑 현피 주먹다짐 정도는 해야 법정모독죄가 성립하지 않겠는가?

Posted by 사무엘

2017/05/19 08:34 2017/05/19 08:34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61

« Previous : 1 :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 30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985440
Today:
993
Yesterday:
2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