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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4/12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by 사무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 구원받았다면서 행실에 변화가 없는 사람이 왜 이리 많나?
  • 거짓/페이크 영접 기도로 인해 양산된 거짓 구원 확신, 가짜 크리스천에 대한 트라우마
  • 신이 어떻게 자기가 창조한 인간을 지옥에 보낼 수 있나?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왜 이리도 많나?
  • 신이 존재한다면서 정작 세상엔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왜 이렇게 악이 가득하나?

등등의 이유로 인해, 세상에는 일명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하기 곤란해 보이는 상황이 무척 많다.
그렇다 보니 이 모순을 풀려고 결국 크리스천들은 마치 좌· 우파마냥 내부적으로 크게 두 극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a. 사람마다 구원 여부는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 없이 애초에 다 정해져 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 대해 인간이 감히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vs

b. 아무래도 예수님을 입으로만 믿고 시인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죄로부터 완전히 회개한 뒤에 자발적인 선행이 뒤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미 받은 구원도 이를 통해서만 유지할 수 있다.

a는 흔히 칼빈주의, 예정론이라고 불리며 b는 알미니안주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들은 궁극적으로는 둘 다 비성경적인 양극단이다.

1.

예정론의 매우 큰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하나님이 그냥 허락하시는 뜻'을 완전 혼동하여, 죄를 무슨 죄인 역할극 정도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도, 이북의 김씨 부자가 인민들을 학살한 것도 다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해 놨기 때문에 그리 된 거라니 이런 신성모독적인 발상이 어디 있는가? 그런 신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과 공의가 충만한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겠는가?

죄가 역할극이라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도 아무런 찬양받을 가치가 없이 그냥 짜고 치는 고스톱마냥 역할극에 불과할 것이다.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뜨거운 지옥도 무슨 가상 머신 매트릭스 샌드박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천차만별 불공평한 듯이 배분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지위나 위상뿐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태어나는 애와 북한에서 태어나는 애의 인생이 갈리고, 순교하는 신자와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신자의 인생이 갈린다. 사람마다 신분과 빈부귀천이 갈린다.

그러나 개인의 구원 여부는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공평하다. 송명희 시인의 <나> 기억 안 나냐?
예정되어 있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향후 지위 그 자체뿐이다. 미리 아심(read-only)을 예정(write operation)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가령, 성경의 파라오는 재앙을 자초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순순히 풀어 줬어도 충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인간 백정 인간 악마라 불리는 북한 김 정은이라 해도 어느 날 갑자기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그는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 당연한 말 아닌가? 예수님의 보혈은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이 예수님을 영접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구원이 아무리 대가 없이 행위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 해도, “저 구원받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손을 내미는 것조차 선물 받는 것에 대한 대가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지거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지만, 스스로 예수님을 영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저항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은혜는 스스로 선과 악을 분간 못 하는 어린아기가 받는 특례 구원에나 적용되는 조항일 것이다. 또한,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공의, 전지전능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에 있는 현상일 뿐이다.

난 정말,
하나님이 공의롭거나 전지전능하지 않고 새디스트여서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것하고,
하나님이 공의롭고 전지전능하긴 한데 일부만 사랑하고 택했기 때문에 열외된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것하고..
둘의 차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건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멍청한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아주 멋진 옷을 입고 있다고 둘러대는 것만큼이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자유의지를 빼고서 지옥을 설명하면 그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

여담이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구를 죽이기로 작정하시고 그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고 뭐 어쩌기로 하신 것은, 일종의 가속(acceleration)이다. 그 사람을 보호하지 않고 그가 극단으로 치우치고 스스로 막장으로 빠지게 내버려 둔 것에 가깝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동차나 비행기의 무거운 조향타를 움직일 수 없어서 파워스티어링 유압의 도움을 받는데, 하나님의 역할은 그런 유압인 것이다. 사람이 조향 자체를 무슨 pre-programmed된 로봇 조종 받듯이 하는 건 아니다.

2.

한편, 칼빈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극단도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이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구원 교리를 아예 대놓고 부인하면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기 때문이다. 구원의 결과로서 나오는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혼동하여 이런 오류가 생긴다. 영어로는 fruit / root of salvation이라고 표현한다.

행위가 덧붙은 구원 획득 내지 구원 유지 교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뭔지 모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행의 수준이 뭔지도 모르는 극도의 무지의 소치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 영접 기도를 이런 식으로 한다고 생각해 보아라.

“예수님, 저는 내가 죄인임을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죄악된 삶을 모조리 청산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사랑하는 것만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술, 담배, 마약 다 끊고 예전의 일체의 방탕하던 생활 방식을 다 그만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성결하게 살기 원합니다. 그러니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아멘.”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자기가 예쁜 짓 해서 들어갔다가, 심한 사고 치거나 나쁜 짓 하면 짤리고... 저런 식으로 믿을 거면, 예수 믿는 게 부처· 마리아를 믿거나 심지어 철도교에 입교하는 것과 차이가 도대체 무엇이냐?

선행이 결과론적으로 아무리 좋게 보인다 하더라도, 이런 교리의 누룩은 우리가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
술· 담배, 마약이 나쁜 줄은 솔직히 불신자도 다 알고 그런 건 자기 깜냥과 재량껏 끊을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걸 그만뒀다는 게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뭐가 대수란 말인가?

자기가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알았으면, 그 다음에 구원을 요청하며 따라야 할 고백은 이것밖에 없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하여 내 죄값을 치르고자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걸 믿습니다.” (단, 정말 진심으로 말할 것).

인간의 깜냥으로는 도저히 처리가 불가능한 나의 처참한 죄를 사하기 위해서, 공자· 맹자나 부처나 마리아가 아니라 2000여 년 남짓 전에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그 역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시인하는 게 참 회개이고 기독교의 구원 조건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 구원부터 받은 뒤에야, 물리적인 죄로부터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원동력은 성령님에 의해 차차 생겨난다. 철도는 교통 체증으로부터나 구원할 수 있지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예수님 말고 다른 사대성인 같은 걸 이런 식으로 믿는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 같은 게 생기지는 않는다.

그 구원은 나를 담보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담보로 유지되는 거다. 내가 선행으로 구원받은 게 아닌 것만큼이나 내 악행으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이게 바로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의 넘사벽 급의 차이인 것이다.

구원 절차가 달랑 '믿음' 하나밖에 없고 너무 간단하고 쉬워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 '믿음'이란 게 뭔지를 아직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자꾸 '행위'를 갖다 붙일려고 하는 것이다. 행위가 전혀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저렇게 제대로 믿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이 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물론, 정말 구원받았는데도 엄청 육신적인 신자도 있고 회개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 신자도 있다. 신자의 영적 성장은 아주 느리고 답답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다. 행실만으로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기란 몹시 어렵다.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알 수 없는 것만큼이나 이것은 우리에게는 일면 불리한 면모이다. 그것만 바로 알 수 있으면 교회에서 불순분자를 훨씬 더 수월하게 솎아 내고 각종 분쟁도 시스템의 힘만으로 예방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런 불편을 못 참겠다고 신자들을 거짓 교리로 겁주고 협박하는 건 목사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갖고 장난을 쳐서는 안 되듯, 혼의 구원과 관련된 교리로 장난을 치지는 말아야 한다.

3.

믿음과 행위 사이에 모순처럼 보이는 관계 문제는 크리스천 사이에서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는 논쟁거리로 남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답이 분명히 나와 있는 아주 쉬운 문제인데, 그걸 모순이 많은 이 현실에 적용하기가 껄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어떻게 '없음'이 있지? 완전한 성경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사항이므로 크리스천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바른 관념도 갖추어서 내가 도대체 예수님의 어떤 면모를 믿고 있는지를 잘 따져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믿는 종교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느라 논리적으로 빼도 박도 못할 치명적인 모순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도 절대무오하다는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겠는가?

본인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오로지 믿음'이 모두 반영되어 있는 위와 같은 해석이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제시하며, 이 모델로 속 시원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참고 기다리면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런데 무척 재미있는 것은 극과 극은 서로 통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도 은사주의와 거짓 영접 기도를 비판하면서 선행과 회개를 강조하는 폴 워셔 목사의 경우, 개념상 골수 알미니안주의일 것 같은데 실은 칼빈주의자이다. 아무나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주권 구원이 결국 행위 구원이나 다름없게 되는 셈이다. 계산 과정은 다르지만 궁극적인 결과는 일치한다고나 할까. 이 점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4/12 08:12 2014/04/1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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