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파 사건 회상

본인이 초등학교 말년이던 시절, 1994년 가을엔 오로지 살인을 위해 결성된 폭력 조직이자, 그들의 야망대로였다면 거의 반국가단체 급으로 사회에 해를 끼칠 수도 있었던 '지존파' 사건 때문에 나라가 떠들썩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원래 지었던 조직명부터가 '야망'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마스칸'이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고전인지 현대인지, 성경 코이네인지 어느 그리스어에 저런 음가의 단어가 있는지는 내가 확인을 못 했다. 아무튼, '지존파'라는 이름은 이들을 검거한 경찰 간부가 새로 붙여 하사한(?) 이름이다.

이런 조직이 결성되고 1년 남짓만이라도 안 잡히면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두목이 참 똑똑하긴 했던 덕분이다. 조직원이 단 하나라도 일말의 동정심과 인간성이 남아 있다간, 언젠가 이런 흉악 범죄 행각에 회의를 느끼고 조직을 배신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여지부터 완전히 제거했다. 몸으로는 특수부대를 방불케 하는 치밀한 자체 훈련을 거치고, 공동으로 살인 예행연습까지 하면서 공범 의식과 팀웍을 다지고 동정심을 제거했다. 누굴 납치해서 금품을 뜯은 뒤엔 일체의 협상도 없이 피해자를 무조건 잔혹하게 죽이고, 증거를 은폐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으로는 부자들, 부패한 윗대가리들에 대한 증오심을 강화했다. 게다가 "여자는 친어머니래도 믿지 마라"라는 강령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선견지명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저게 지켜지지 않아서 잡힌 거나 마찬가지이니까.
지존파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여성은 두 명이 있었다. 둘 다 20대 나이에 성이 이씨이고 술집 종업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인터넷을 뒤져 보면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인 것처럼 잘못 써 놓은 글이 나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먼저 등장하는 한 명은 남자친구의 차를 타고 양평에서 데이트를 하던 중에 지존파에게 커플째로 납치당한 피해자였다. 그녀는 자기도 직업 때문에 형편보다 더 고급스럽게 입고 다닐 뿐이지 절대로 당신들이 미워하는 부자가 아니고, 살려만 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필사적으로 읍소를 하여 동정심을 샀다.
여자의 눈물을 보니 마음이 움직였는지, 지존파 팀원 중에서는 그녀에게 반하는 사람이 생겨 버렸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래도 여자는 안 돼 / 돼!"로 팀원간에 다툼이 벌어졌다.

결국은 살려 주고 조직원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여인도 살인에 공범으로 가담시켰다. 당장 자기의 원래 애인인 남자--물론 맨정신은 아니고, 강제로 먹인 술에 만취해서 퍼진 상태이긴 함--를 얼굴에 봉지를 씌운 채 목졸라 죽이는 걸 거들어야 했으며, 다른 납치해 온 중소기업 사장에게는 공기총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가련한 그 여인의 입장에서는 정말 멘탈이 붕괴하는 순간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당장 자기 목에 칼침이 들이대어져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옛날에 731 부대에서도 신참이 들어오면 신고식이 뭐냐 하면, 만만한 마루타를 하나 손수 때려 죽이는 것이었다. 그걸 못 하면 그 군인이 기수열외를 능가하는 끔찍한 응징을 당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부대원들이 마루타에 대한 동정심과 죄의식을 제거하고 공범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악의 집단들이 하는 관행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지존파는 나중에 두목이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교도소에 갇히고, 또 다른 조직원은 다이너마이트를 다루다가 손에 큰 화상을 입었다. 그 여인은 부상당한 팀원을 병원으로 에스코트 하던 도중에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필사적으로, 정말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판사판인데 기왕이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다가 죽고 피해자들에게 사죄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내린 결심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용기 있는 행동 덕분에 지존파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들은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검거될 수 있었다. 예전의 각종 실종 신고와 음주운전 사망 교통사고에 대해서 그녀의 증언이 일치했으며, 덕분에 사건들 간의 끊어진 연결 고리가 발견될 수 있었다.

첫 여인이 연락이 두절된 뒤에 지존파 내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으려나 모르겠다. 그 와중에 그들은 웬일로 기존 강령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 다른 여인을 신규 멤버로 영입했다. 한 팀원의 애인이던 '이 경숙'. 술집에서 노예계약 상태였던 듯한데 지존파에서 1000만 원이 넘는 거액을 주고 업주와 채무 내지 계약을 청산하여 그녀를 데려 온 것이었다. 식사 준비와 잡일 등, 일종의 파출부처럼 부릴 '비전투 요원'의 필요를 느꼈던 듯하다.

이 경숙은 지존파 일당이 검거되기 겨우 나흘 전에 조직에 가입한 것이어서 따라 다니기만 할 뿐 실제로 범죄 행동에 가담한 것은 없었다. 그래도 적극적인 신고와 탈출 정황이 없었으니, 범죄 단체 가입과 사체 은닉 혐의로 일단 다같이 체포되고 구속됐다. 처음에 5년형이 구형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으로 귀착되었다.

두 이씨 여인이 지존파 아지트 내에서 같이 마주친 적은 없다. 이 경숙은 전원 사형을 당한 남자 팀원들에 비해서 존재감이 훨씬 덜하기 때문에 결말이 잘 언급되지 않는 반면, 그래도 실명은 아주 쉽게 금방 검색된다. 순수한 피해자인 첫 여인은 그 반대로 결말은 잘 검색되지만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옛날 신문· 방송을 검색해 보면 ㅅㅎ라는 이름이 나오긴 하지만, 이것도 사실은 그냥 대외적으로만 쓰인 가명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성경에서 동명이인을 헷갈리고 마태복음의 피 밭과 사도행전의 피 밭을 헷갈리듯이 저 두 여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잘못된 정보도 나도는 듯하다. 파편화된 두 정보를 취합하여 피해자 여인이 이름이 이 경숙이고, 이 사람은 탈출을 했지 검거된 지존파 멤버 중에 여성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피해자인 첫 여인이 살인에 가담한 것에 대해서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불가항적인 정황이 인정됐다. 검찰은 애초에 기소도 하지 않았으며, 신변 노출 없이 탈북자마냥 모처에서 집과 직장을 마련하여 새 삶을 살 수 있게 오히려 그녀를 도와 줬다. 전쟁터에서도 정말 도저히 불가피한 상황에서 항복하고 포로로 잡혔다가 송환된 군인을 무슨 여적, 항명죄로 처벌하지 않듯이 말이다.

오늘날 지존파는 당연한 말이지만 잔당이나 공범, 추종자, 후계자 따위는 전혀 남지 않고 모조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없다. 워낙 흉악하고 죄질이 나쁘며 무고할 가능성이나 교화 가능성 따윈 0인 부류에게 대한민국의 법이 관대해야 할 이유는 추호도 없었다. 온갖 범죄자들을 상대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형사, 검사 등등도 이들의 살인 공장과 유치장, 사체 화장 아궁이, 각종 흉기와 심지어 이들의 식인 행각까지 듣고 보고는.. 충격과 공포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지방/대법원에서는 신속하게, 남자 조직원 6명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94년 9월 말 체포, 10월 말 사형 선고, 항소심과 상고심에서도 사형 확정, 그리고 1995년 11월 2일에 곧바로 집행! 1년 남짓한 시간밖에 안 걸렸다.

군사 정권 시절도 아니고 민주화 이후에 비정치 단순 흉악 범죄자에 대해 이렇게 신속하게 사형이 떨어지고 무려 6명에게 대규모로 집행된 사례는 거의 전무후무할 것이다. 집에 불을 질러 자기 친아버지를 죽인 패륜아 박 한상도 비슷한 시기에 사형이 확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집행은 차마 안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잔당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니 피해 여인은 이제 와서 신변이 공개된다고 한들 '탈출과 신고 사실' 자체로 인해 보복 범죄나 다른 불이익 따위를 당할 가능성은 전혀, 저언~혀 없다. 오늘날 적극적인 신변 보호가 필요한 여느 증인이나 내부 고발자와는 처지가 다르다.

그래도 그녀는 악마의 집단에 끌려가서 생명의 위협과 윤간을 당하고 강제로 살인에 시늉으로라도 가담해야 했던 끔찍한 트라우마를 평생 지고 가는 가련한 사람이다. 술집 업주에게서 풀려나는가 싶었는데 졸지에 흉악 범죄에 연루되어서 쇠고랑 차고 집행유예로나마 전과자가 된 이 경숙의 처지도 딱하다면 딱하지만, 그 처지가 첫 여인에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애초에 두 여인은 애인의 처지가 서로 완전히 반대였으니 말이다(지존파 가해자 vs 피해자).

앞으로 이런 지존파 사건 같은 비극이 없어야 하겠지만, 사회의 모든 부조리, 불공평을 사회 탓, 정치인 탓으로만 돌리는 사고방식으로는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없으며, 그 누구라도 멘탈이 병들고 피폐해지고 분노를 엉뚱한 곳에 표출하는 병크가 곳곳에서 터질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9/23 08:36 2015/09/2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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