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에서 나오는 철도의 정체는?
<용감한 탈출> 책을 다시 보니, 스토리와 관련하여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추가 정보들을 다시 보충할 수 있었다. 그 정보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교통· 지리 분야의 설정이다. 철덕으로서 이런 쪽에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다.
책에서 주인공인 두일이네 가족은 황해도 '사리원' 시에서 살고 있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지리적 배경은 한반도의 동부가 아니라 서부 되겠다.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지만, 삼촌이 탈출하는 바람에 가족이 반동으로 몰리면서 더 서쪽 구월산 기슭의 산골 벽지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한다.
이 설정대로라면 두일이가 탈출하기 위해 집에서부터 이동한 거리는 서부의 고양· 파주 쪽으로 최단 직선 거리를 잡아도 150km가 넘는다. 그 중 상당수의 거리는 철도로 커버가 돼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철도는 무엇이었을까?
본인은 당연히 경의선(북한의 평부선)만이 떠올랐으며, 답부터 말하자면 정황상 그게 맞다. 하지만 당장 떠오른 이 답은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찍은 답일 뿐이다. 사리원에서 개성까지 가는 철도가 경의선만 있는 건 의외로 아니다. 그래서 모처럼 이와 관련된 리서치를 좀 하게 되었다.
국토가 분단되기 전, 해방 당시에 경의선은 문산 역을 지나면 장단, 봉동을 거쳐 개성 역이 나왔다. 장단은 알다시피 시설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DMZ 내부에 터만 존재하며, 반대로 도라산과 판문은 각각 남과 북에서 나중에 만든 역이다.
개성 역을 지나면 선로는 흔히 생각하기 쉬운 북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향하는데, 개성에서 수 km 정도 떨어진 곳에 나오는 그 다음역은 개풍 역(옛 명칭은 토성)이다. 개풍을 지나서야 선로는 마치 남한의 서울-신촌을 연상케 하는 90도 드리프트를 하여 북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개풍에서 드리프트를 하지 않고 서쪽으로 계속 직진하여 연백 평야를 지나고 황해도 '해주'까지 가는 철도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토해선'이다. 토해선 자체는 연백 평야에서 나는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있었지만 그때는 협궤였다. 표준궤인 경의선과는 한 역에서 환승은 가능해도 동일 열차가 직통 운행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훗날 북한에서는 토해선의 선로를 표준궤로 개량했다. 단, 토해선에는 우리로 치면 임진강처럼, 한강 하류로 합류하는 예성강이라는 강을 횡단하는 구간이 있었는데 여기 있던 철교는 6· 25때 파괴된 이래로 복구되지 않았다. 현재는 철도가 아닌 인도· 차도교 형태로만 복구되어 있다.
과거에 일제는 경의선 자체를 해주를 경유해서 만들 생각을 했었다. 경부선을 상주와 충주를 경유해서 만들 생각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직 일제 강점기가 되기도 전인 20세기 초에 강 하류에다 거대한 철교를 그것도 표준궤 규모로 또 만드는 것은 재정상 "지금은 곤란하다" 상태였기 때문에.. 해주를 지나는 철도는 그로부터 수십 년 뒤에 그것도 지선 협궤 형태로 실현됐다.
그 철도가 경유하던 예성강 철교가 파괴되고서 복구되지 않은 것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좀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 다리를 통해 국군· UN군이 강을 쓰윽 건너서 북한군을 대거 엿먹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북한에서 토해선은 강을 건너기 전의 배천 역에서 끊어져 있고, 노선의 이름도 배천선으로 바뀌었다. 개성의 근처까지는 가지만 거기서 더 진행은 못 한다.
해주의 '해주청년' 역에 도착하고 나면, 서쪽 끝까지 더 진행하여 옹진 쪽으로 갈 수도 있고(해옹선, 지금의 옹진선), 북쪽으로 진행하여 사리원까지 갈 수 있다(황해선, 지금의 황해청년선). 북쪽으로 가는 요놈이 바로 경의선보다 더 서쪽에서 황해도를 종축으로 지나는 간선 철도이다. 구월산 기슭에서 탈출을 시작한 두일이의 입장에서는 경의선보다 황해청년선이 위치상으로 더 접근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스토리 설정에서 두일이의 탈북에 도움을 준 철도는 경의선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이는 어떤 형태로든 경의선 구간에 도착해야만 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스토리 상으로 걔는 육로로 탈북을 했기 때문이다. 황해청년+배천(토해)선만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예성강 하나 건너지를 못하고 내륙에서 엄청난 거리를 동쪽으로 뺑이를 쳐야 한다. 동쪽 이동 없이 그대로 남하해 버리면 서해나 한강에 다다르지, 육로와 철책이 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열차에서 내린 뒤 두일이가 휴전선 쪽으로 접근할 만한 경로는 기정동이 있는 개성 시내 외곽의 평지 구간, 아니면 판문점이 있는 곳보다 더 동쪽으로 진행하여 장풍군 일대의 산지이다. <용감한 탈출> 스토리는 시작은 황해도 서쪽인데 전방 도착은 동부 전선스러운 것이 자칫 잘못하면 고증상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도저히 절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개연성이 성립하려면 저기서 철도는 아무래도 경의선이 돼야 하는 건 틀림없을 듯하다.
지도를 찾아 보면서 느낀 건데, 한반도에서 서울에서 인천 정도의 경도가 서쪽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굉장한 오산이다. 인천은 한반도의 서부 중에서도 안쪽으로 제일 옴푹 들어간 지형에 있다. 그 반면, 북한 쪽으로 가면 서쪽 끝은 서울 경도에서는 수십~100수십 km 이상으로 벌어진다. 그러니 경의선의 철도역에서 황해안까지 들어가려면 직선 거리로도 굉장히 긴 거리를 가야 하며, 그 내륙에 황해청년선 같은 추가적인 철도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에는 새로 만들거나 개량한 철도에 '청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노선이나 역이 많다. 서부 말고 동부에는 '금강산청년선'도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말 그대로 20대 청년 공병들을 갈아 넣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 휴전선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형성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휴전선 내지 군사 분계선은 서쪽으로 갈수록 남하해서 심지어 한강의 최하류와도 맞닿아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서부 전선에는 동부 전선에는 없는 "강안경계"라는 게 존재한다. 우리나라가 6· 25 전쟁을 계기로 서울이 북한과 더 가까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이 38선 시절보다 절대적인 땅 자체는 더 많이 수복했지만 휴전선이 수평선이 아닌 / 모양으로 형성됐으며, 특히 고려의 역사가 담긴 개성시를 수복하지 못하고 빼앗긴 이유는 무엇일까? 까놓고 말해 선죽교가 있는 곳이 한때는 남한 땅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게 된 거다.
<용감한 탈출>의 지리적 배경과도 전혀 무관한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저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단 6· 25 전쟁 당시에 휴전 회담이 진행 중이던 판문점이 오리지널 38선과 거의 동일한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판문점 일대는 중립 구역으로서 전투에서 완전히 열외되어 평화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반대로 국군이 서부 전선에서 더 북진을 할 수 없게 발목을 잡기도 했다.
둘째, 지형적으로는 이 송악산 때문이었다. (한자까지 일치하는 동명의 산이 제주도 남부에도 있으니 혼동하지 말 것. 단, 제주도 송악산은 기생 화산으로, 그냥 언덕에 불과한 자그마한 크기이다.)
38선 시절에는 개성 시내는 남한 땅이었지만 문제는 고지대인 송악산이 여전히 북한 땅이었다는 것. 남한의 개성 시내가 다 내려다보였다. 군사적으로 남한이 방어하는 데 절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북진을 할 거면 저 산까지 몽땅 화끈하게 차지하거나, 아니면 다 내어 주거나 해야 했다.
국군에서 다뤄지는 '육탄 10용사'도.. 사건의 구체적인 전말에 대해서는 미화다 날조다 잡음이 있다만 어쨌든 이건 6·25 전쟁 전, 1949년 5월에 바로 송악산 기슭의 그 불리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벙커링을 뚫고 고지를 지키려는 목적으로 벌어진 전투였다.
더 서쪽으로 옹진 반도 일대도 상황이 열악하긴 마찬가지인지라, 뒤로 물러서면 보다시피 그냥 바다이다. 내륙으로 가려면 38선 이북 지역을 거쳐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그냥 배수진이요 고립된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38선은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쭉 그어졌다 보니, 서쪽 구간은 전반적으로 남한이 점령하고 있는 게 도저히 무리였다.
단지 북한이 해군이 궤멸 상태였기 때문에 연평도 백령도 같은 섬은 북한과 매우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다시 남한이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휴전이 맺어질 즈음, 북한은 영토를 다시 38선 시절로 원복할 것을 제안했으나 남한과 UN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성은 참 아까우며 옹진 반도와 연백 평야를 잃은 것도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 개고생을 하면서 남한이 동부 전선에서 땅을 더 많이 수복했으며, 38선 시절의 경계는 차라리 개성 시내를 포기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남한에게 군사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거기를 포기한 대신 남한이 수복한 땅 중에는 당시로서는 금싸라기 곡창 지대인 철원도 포함돼 있었다.
경원선 소요산 역의 북쪽 다음 역인 초성리 역과, 그 다음 역인 한탄강 역 사이가 옛 38선 경계이다.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양양 국제 공항이 38선보다 아주 살짝 더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 북쪽의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속초, 고성은 약 5년 남짓 동안 북한 땅이었다가 6· 25 때 우리나라가 수복한 것이다. 그러니 철원에 있는 노동당사 같은 건물은 역사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나라가 서쪽으로는 송악산, 동쪽으로는 금강산만 추가로 차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사실, 설악산도 그때 수복한 산이고, 동쪽 끝자락에서는 이례적으로 크게 북진한 덕분에 고성군에 있던 김 일성 별장까지 탈환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별장에 이어서 김 일성이 몰던 개인 리무진 승용차도 그때 전쟁 중에 아주 극적인 계기로 우리 국군이 노획하게 됐다. 여기에 대해서도 나중에 또 자세히 다룰 일이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