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부정행위

우리나라에서 사람 인생에 큰 영향을 주며 이 때문에 부정행위도 많은 대표적인 전국구 시험은 수능과 토익이 아닐까 한다. 수능은 10여 년 전인 2004년 11월에 치러진 2005년도 시험에서 200여 명에 달하는 수험생이 조직적으로 컨닝을 한 게 뒤늦게 적발돼서 전국적으로 난리가 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과 더불어 국가적인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수능 부정 적발은 뒤끝도 굉장히 오래 간 걸로 기억한다. 이미 대학에 갓 입학한 학생이 수능 무효로 인해 입학이 취소된 건 차라리 양반이다. 더 옛날에 그냥 넘어갔던 것까지 조사를 해 보니, 심지어 대학을 졸업하고 그 경력으로 학사장교로 들어가기까지 했는데 뒤늦게 수능 무효 → 대학 입학과 졸업 무효 → 학사장교도 무효로 테크트리가 모조리 아작난 사례도 있다. 이건 학력위조 적발로 인한 임관 무효 말고, 또 별개로 있었던 사례다.

저 부정행위의 여파로 인해 수능 시험엔 일체의 전자기기가 한 치의 자비심 없는 절대금기가 되었다. 특히 시험장에서 휴대전화란 마치 공항 세관에서 마약, 군대 훈련소에서 담배와도 같은 악의 축 취급을 받게 됐다. 굳이 벨소리가 나지 않아도, 끄고 배터리까지 분리해 놨더라도, 1교시 시작 전에 전화기를 제출하라고 곱게 말로 할 때 제출하지 않은 게 적발되면 무조건 각서 쓰고 퇴장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부정행위 정황이 있건 없건 이번 수능은 무효가 되니 내년에 다시 쳐야 된다.

사실 이마저도 죄질이나 처벌 수위가 가장 약한 '규정 위반'에 속하기 때문에 이번 수능만 무효 처리되고 끝나는 거다. 하물며 대놓고 부정행위를 한 게 적발된다면 올해뿐만 아니라 1년간 추가로 수능 응시 자격 상실이 뒤따른다.
그런데 매년 전국에서 수~열몇 명 정도는 바보같이 휴대전화 규정이 걸려서 퇴장 당하는 안습한 사람이 꼭 나온다고 한다. 자기가 아니라 부모님이 넣어 놓은 휴대전화가 뒤늦게 발견된다거나..;;

시험 부정 행위는 크게 다음과 같은 네 카테고리로 나뉜다.

  • 혼자: 시력, 컨닝페이퍼
  • 다른 수험생과 짜고: 답안지 보여주기, 특정 동작으로 신호
  • 다른 외부인과 짜고: 무선 통신, 대리 시험
  • 시험 관계자와 짜고, 혹은 시험장 "밖에서" 혼자: 아예 문제와 답안 유출, 답안지 바꿔치기

'혼자' 테크닉을 봉쇄하기 위해 같은 문제지도 A형과 B형으로 막 나뉘어 배부된다. 같은 문제를 풀더라도 수험생이 마킹하는 답안이 제각각이 되게 말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치면 소스 코드의 난독화 테크닉과 비슷하다.
그리고 컨닝페이퍼를 책상 주변에다 미리 만들어 놓으려는 시도를 분쇄하려고 학생들의 고사장 좌석도 랜덤화한다. 마치 Windows Vista에서 도입된 실행 주소 랜덤화 기법이 떠오른다.
옛날에 초딩 시절에도 도학력고사 같은 큰 시험은 아예 반을 싹 바꿔서 쳤던 걸로 기억한다.

수험생간에 필기구가 가리키는 방향, 기침, 시선 등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건.. 물증이 없는데 감독이 어지간히 눈썰미가 있지 않으면 혐의를 어떻게 입증해서 어떻게 잡아 내는지 궁금하다. 주고받는 학생들도 언제 걸릴지 모르는데 완전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어떻게 그 짓을 할지? 멘탈이 어지간히 강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위의 1~2단계는 제끼고 최소한 외부인과 공모하는 3단계부터 시작한다. 초소형 카메라와 도청 장치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한 덕분이다. 덕분에 시험장에 출입할 때는(특히 중간에 화장실에 갔다 올 때) 애들을 공항에서 검문하듯이 X선 금속 탐지기라도 통과시켜야 할 판이다.
하긴, 굳이 시험이 아니어도 노름판 같은 데서도 이런 방식으로 사기 치는 놈들이 많긴 하다. 몰래 카메라로 상대방의 패를 다 본다거나, 밖에 있는 고수에게 바둑판을 보여주고 훈수를 듣는다거나.

차량은 시험장과 적당히 떨어져 있는 외부에서 통신을 주고받는 부정행위 공범에게 훌륭한 엄폐성과 주거성을 제공하는 도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 부정행위 사건 이후로는 시험 시간 동안엔 시험장 주변의 반경 200m 이내에는 차량의 주정차도 전면 금지되었다. 이건 단순히 소음 방지가 아니라 이런 보안을 고려한 측면이 있다. 소음이 문제라면 차량 통과 자체를 금지시켜야지?

아예 시험지나 답안지를 사전에 빼돌리는 건 방송으로 치면 어지간한 방송 사고를 넘어 전파 납치 같은 급의 엄청난 범죄가 된다. 굳이 관계자를 매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혼자 건물에 침입하는(!!) 짓도 여기에 해당되는데, 우리나라는 최근에 이런 사건도 두 번이나 발생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전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사건은 2013년 말에 발생했던 연세대 로스쿨 캐비닛 사건 되겠다. 문제의 그 학생은 변호사 시험도 아니고, 학교 내부 시험 문제를 빼돌리려고 교수 연구실에 몰래 침입해서 컴퓨터에다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하려 했다. 연구실 도어락의 비번은 그 교수가 문을 열고 있을 때 옆에서 몇 차례 몰래 훔쳐봐서 '시력'으로 익혔다고 한다.

그런데 으슥한 밤에 웬 학생이 혼자 교수 연구실에 들어가는 걸 동일 로스쿨의 다른 학생이 우연히 보고 수상하게 여겨서 경비 직원에게 신고했고, 경비원이 출동했다. 경비원들이 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 대담한 학생은 근처의 캐비닛 안에 황급히 들어가 숨었지만... 결국은 덜미가 잡혔다. 들켰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당신은 누구요?" 개쪽에 개망신에;;;

걔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디서든 1등이란 걸 놓쳐 본 적이 없었댄다. 물론 이전에 치른 시험들도 부정행위의 도움으로 1등을 한 게 있었겠지만 모든 성적이 송두리째 조작은 아닐 것이고, 그 친구도 기본적인 머리와 실력이 있으니 컨닝 없이도 올백· 올1등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상위권은 유지 가능했을 것이다.

학부는 당연히 서울대 졸업. 허나 로스쿨은 서울대를 못 가고 겨우 연세대에 그친(?) 것에 무척 애석해하면서 재수를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스쿨은 어딜 가든 그야말로 전국에서 날고 기는 공부 기계 암기 괴물들의 집단이 아니던가? 법학 전공도 아닌 그에게는 서울대가 아니라 연세대 로스쿨도 감지덕지이고 엄청난 학업량을 따라가기가 버거운 곳이었다.

결국 그 친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등 강박관념을 유지하기 위해, 어찌 보면 지금까지 늘 해 오던 대로 저런 짓까지 감행하게 됐고 그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당연히 징계 제적을 당해서 짤렸으며 법조계 쪽으로는 영원히 발을 들일 수 없게 됐다. 몇 년 전에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 가해자가 출교 당하고 의료계에서 매장 당한 것과 같은 처지가 됐다.

이 소식을 접한 동기생들은 그를 그냥 '캐비닛'이라고 부르면서 혀를 차고 허탈해했다. "그럼 그렇지 어떻게 저렇게 시험만 쳤다 하면 올A+을 제조하는 천재일 수가 있나 싶었는데 역시 제 실력이 아니었구나. ㄲㄲㄲㄲ"
그는 최종적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동기생 출신인 본인의 모 지인에게 듣기로는, 걔는 IT 쪽으로 뭔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헐.. 뭘 해도 근성과 끈기는 있으니 나쁜 짓만 안 하면 성공은 하겠다..;;

캐비닛 사건이 가라앉고 얼마 뒤엔(2016년 3월) 웬 공무원 지망생이 정부 서울 청사 인사혁신처에 몰래 침입해서 자기 점수를 고치고 합격자 명단 문서 파일에 자신을 올려 놓다가 결국은 잡혔다. 이 사람은 공부는 그 연세대 캐비닛만치 잘한 것 같지 않지만, 잔머리와 대담성은 어쩌면 캐비닛을 능가한다고도 감히 말할 수 있다. 도대체, 무슨 약 빨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서 그 정도로 실행했는지 그 엽기성과 대담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 서울 청사는 나름 청와대와 같은 급의 보안 시설인데 내부 헬스장에서 직원의 출입증을 훔치고, 경비가 허술한 시간대에 여러 사람들 사이에 껴서 뒷문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감시를 피했다. 게다가 캐비닛의 경우 강의동 건물 자체는 출입이 가능하니 훔쳐보는 걸로 방 비번을 알 수 있었지만, 저 공시생은 처음 들어가 보는 정부 청사 안에서 하필 청소부가 편의를 위해 버젓이 적어 놓은 비번을 이용해 방에 침입해 들어갔다고 한다. (직원이 출근하기 전에 미리 방에 들어가서 청소를 끝내 놔야 하므로)

게다가 이 사람도 과거 이력은 더 화려했다는 게 밝혀졌다. 꾀병으로 약시 진단서를 받고 기간을 위조까지 해서 각종 시험에서 응시 시간을 1.5배 더 받았다. 다음으로, 매 시험의 1배수 시간이 끝날 때마다 수능 문제의 정답이 인터넷에 공개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때 화장실에 가서 사전에 잘 숨겨 놓은 휴대전화로 인터넷에 접속 후 답을 알아 와서 마킹을 했다. 이런 허점을 찾아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잔머리가 아닌 거 같다~!
또한 대학 진학 후에 7급 공무원 시험의 지역 예선급 시험을 학원에서 칠 때는 대놓고 문제 유출까지 해서 압도적인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러니 여죄를 수사한 경찰들부터가 경악하고 "얘는 국정원 같은 데에 특채 좀 시켜야겠다 ㄲㄲㄲㄲ" 이런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다. 거기는 그야말로 위장과 조작이 직업인 곳이니, 혹시 사법 거래라도 하면 난폭운전 폭주족을 F1 서킷으로라도 보내는 인재 활용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_-;;

그야말로 영화 Catch me if you can을 떠올리게 하는 행적이 아닐 수 없다. 그 영화의 배경에서는 그래도 사회 시스템이 전산화되기 전이었으니 그 짓이 가능했을 뿐이다. 지금은 서버 DB를 직접 해킹하지 않는 한, 어설프게 엑셀/워드 문서 몇 개에다 점수 조작하고 자기 이름 넣어 봤자, 없던 공무원 자리가 하나 더 뿅 생겨서 자기 신분이 성공적으로 조작될 리는 만무하다.

컨닝을 소재로 기가 막힌 첩보물 학원물 짬뽕을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웹툰으로는 <빵점동맹>을 참 재미있게 봤는데, 재미는 있지만 그래도 현실과는 많이 동떨어진 허구라는 점을 감안해야겠다. 백 희지는 주토피아에서 토끼 주디 같고 남캐인 임 수영은 여우 닉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정성껏 컨닝을 할 시간과 머리가 있으면 공부나 빡세게 하라고 다들 말한다. 하지만 차근차근 공부하는 데 필요한 지적 능력과, 정교하게 컨닝하는 데 동원되는 지적 능력이 같지는 않은 관계로.. 사람을 변별하는 중요 시험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부정행위를 자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각박한 경쟁 사회에서 앞으로 또 무슨 엽기적인 부정행위자가 적발되어 뉴스 사회면을 장식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 여담

1. 이 글에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토익도 나라 망신을 시킬 정도의 대규모 부정행위가 몇 번 저질러지고 적발된 적이 있다. 그래서 이 때문에 다수의 선량한 토익 응시자들이 싸잡아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불법복제 때문에 정품 사용자가 도리어 피해를 입은 것처럼 말이다. (올라가는 구입 가격, 제품 인증 관련 번거로움)

2. 그러고 보니 정부 서울 청사는 더 전에 2012년에도 어떤 이상한 사람이 무단으로 뚫고 들어가서 투신 자살까지 했었다. 어째 그리 보안이 허술한지 그것도 질타 사항이다.

3. 예전에 '짜장면'이 표준어로 인정받게 됐을 때 '컨닝'도 같이 좀 등재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장면만큼이나 커닝도 완전 현실성이 없지 않은가?

Posted by 사무엘

2016/12/20 08:29 2016/12/2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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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6/12/21 16:45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사무엘 2016/12/21 18:19 # M/D Permalink

      ㅇㅇ 당연히 그렇게 바뀌어야겠지.
      그 규정 헛점을 찾아낸 건 스타에서 스탑 럴커나 얼라이 마인을 생각해 낸 것과 비슷한 급의 급의 창의력이 아닌가 싶다.

  2. 사무엘 2017/11/02 23:39 # M/D Reply Permalink

    컨닝을 소재로 한 영화가 근래에 하나 나오긴 했구나..!
    "배드 지니어스"라고.. 무려 태국 영화이다.
    "catch me if you can"과,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합친 듯한 작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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