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성경 읽는다는 사람들은 걸어다니는 성경 구절 검색엔진뿐만 아니라 찬송가 가사 검색엔진이 될 필요도 있다.
상황별로, 혹은 비슷한 가사, 비슷한 조나 박자.. 이어서 같이 부르기 좋은 곡. 이런 게 줄줄이 생각나도록 말이다. 그게 인생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난 개인적으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가는 예수쟁이 크리스천의 아리랑 같은.. 거의 민요 급의 노래라고 생각한다. 진취적인 행진곡 군가풍이 아니고, 3박자이지만 그렇다고 막 왈츠 춤곡 아니고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급의 얼쑤 지화자 좋다~~=_=도 아니고 적당히 샤방샤방한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말이다.
한편, 수십 년 전엔 미국의 어느 군소 장로교 교파에서 저 경기도 아리랑 멜로디에다 영어 가사를 얹어서 Christ, You are the fullness of God이라는 창작 찬송가를 수록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게 무슨 TV 방송에서 "미국인들이 아리랑 멜로디 듣고 엄청 감동하더라" 이렇게 국뽕(!!!) 주입하는 쪽으로 소개됐었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출처 검색이 안 되는 걸 보니, 다 지나간 일인 듯하다.
근데 아리랑이 멜로디가 좋으면 뭐 하냐? 가사는 그놈의 한이 맺혀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걸어가다 1시간도 채 못 되어 발병 나서 자빠질 거다"로 끝이다.
그 반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완전 차원이 다르지 않느냐 말이다.
이 비참한 죄인이던 내가 구원받았고 그 은혜가 너무 고맙고~~ 난 죽더라도 하늘나라 본향으로 돌아갈 거고.
이제는 사람 골병 들게 만드는 원한이란 걸 품을 이유가 없고, 한 맺혀서 남을 저주해야 할 필요가 추호도 없다. 내가 한을 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가 한없는 거지.
사람이 이렇게 삶의 이유와 목적, 명분,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념이 달라지면 그게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건강· 건전한 정도로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저런 찬송가가 만들어졌던 18~19세기 서양의 문화가 다 건전하고 좋기만 했다는 것도 당연히 절대 아니다. 허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정도면 그야말로 불멸의 명작 찬송가이고 세계 각국의 크리스천들이 이 정도면 가사 다 외우고 조선 시대 사람들이 아리랑 불렀듯이 필요할 때 어디서나 암송해야 하지 않겠나 싶다.
2. 미국의 맹인 여성 두 분
(1) 헬렌 켈러 (1880-1968)
나는 죽기 직전에 딱 사흘만이라도 눈을 뜨고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을 좀 해 보고 싶다. 그게 내 소원이다.
눈을 뜨게 된다면 제일 먼저 내 인생의 은사인 설리반 선생을 보러 갈 것이다. 지금까지 감촉으로만 느꼈던 선생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것이다. 그리고 바람에 나풀거리는 잎사귀들, 아름다운 석양과 노을을 보고, (… 무슨 휴가 나온 군인처럼 구경할 거, 돌아다닐 곳 계획 다 짜 놓고…) 마지막 날엔 도시에서 출근하는 사람들 얼굴을 보고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 구경도 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보고 나서 눈을 감기 직전에 사흘 동안이나마 시력을 허락해 주신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영면에 들어갈 것이다.
(2) 패니 크로스비 (1820-1915)
나는 영아 시절에 내 눈을 망가뜨렸다는 돌팔이 의사양반에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평생 맹인인 채로 사용하시려고 그 일을 허락하신 것이다. 나는 이대로도 너무너무 행복하다.
굳이 지금 눈 뜨지 않아도 좋다.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예수님 얼굴부터 맨 먼저 보게 될 테니까!
세상에서 OME로 더럽혀지지 않은 눈, 포장 안 뜯고 “아무것도 안 본 눈 삽니다”를 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인생을 다시 산다고 해도 이렇게 맹인으로 살 의향 있다.
영성의 레벨이 다르구만. ㅠㅠㅠ
헬렌 켈러는 좌파적인 사회 활동 때문에 쌍팔년도 우리나라 위인전에서는 오로지 어린 시절만 다뤄지곤 했다. 저 사람이 장애를 극복하고 대학까지 나와서 뭐가 됐고 무슨 활동을 했는지 얘기는 함구하곤 했다. ㅡ,.ㅡ;;; 뭔가 마크 트웨인과 비슷한 인상이다.
패니 크로스비야 뭐.. 인류 역사상 찬송시를 제일 많이 남긴 단일 인물이다.
현대인들이 페북이나 트위터 인스타에다가 자기 먹방이나 여행 자랑글 올리는 것과 대등한 빈도로.. 그딴 글 대신 예수님 생각하고 자랑하고 찬송하는 시만 썼던 사람이다. ㄷㄷㄷ
그리고 패니 크로스비는 간호사 겸 의료 행정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동갑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죽은 사람이기도 했다. ㄲㄲㄲㄲ
3.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의 작사자
찬송가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은 울나라 기독교계에서 두루 사랑받는 명작 찬송가이다. 가사 내용의 특성상 연말이나 교회 창립 기념일 때 부르기 좋다.
얘는 특이하게도 멜로디가 두 버전이 존재한다. 한국인 박 재훈 작곡의 흥겨운 민요풍 버전이 있고, 그것보다는 차분하게 "복의 근원 강림하사" 멜로디 기반인 외국곡 버전이 있다.
우리나라 찬송가들엔 둘이 쌍둥이처럼 같이 수록돼 있는 편이다. (이렇게 같은 가사에 두 멜로디가 모두 유명한 다른 예로는 성탄 찬송인지 캐롤인지 애매한 Away in a manger도 있음)
그런데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의 작사자는.. 한국인이나 서양인이 아니라 '사사오 데스사부로'라는 일본인 목사이다. 일본 교회들이야 박 재훈 멜로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멜로디로만 부른다. 신기하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아마 반일 감정 때문에 작사자가 오랫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것 같다. 미들 네임이 아닌데도 이름을 T. Sasao 이렇게 때우거나 아니면 아예 미상이라고 처리하기도 했다. 일본 법학 서적에서는 어떤 법리를 지지하는 학자들 실명이 일일이 언급돼 있는데, 그게 울나라로 번역되면서 싹 다 짤리고 쪽수만 남아서 다수설 소수설 이렇게 바뀌었듯이 말이다.;;;
그나저나 사사오 데스사부로는 "우리들이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도 작사했다.
일본어 가사답게 처음에는 후렴이 "일심(一心)으로써 힘써 싸우세"였다. 그러다가 21세기 새찬송가에서는 "한마음으로"라고 더 순화됐다.
마치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시 103:1)"가 "온 마음 정성 다하여 다 찬양하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4. "주 다시 세상에 오시리 -- 오늘 오신다면?"
끝으로.. Jesus is coming to Earth again -- what if it were today? 라는.. 꽤 드라마틱한 종말· 재림 카테고리의 찬송가가 있다.
참고로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캐롤 "울면 안 돼"가 제목이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이다. ㄲㄲㄲㄲㄲㄲ
그것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신대.. 혹시 그게 오늘 지금 당장이면 어떡하지? 얼마나 신날까?" 라는 뉘앙스가 저 찬송가에 담겨 있다.
통상적인 클래식 찬송가들은 앞절은 구원이나 순례자의 길, 평안 등을 노래하다가 '마지막' 절이 재림이나 천국 등을 거론하는 편이다. 자기가 죽든지 아니면 세상이 끝나든지. 허나, 이 곡은 마지막 절뿐만 아니라 가사 전체가 몽땅 재림 얘기이다.
나머지 가사들은 다 성경을 근거로 유추 가능하고 그대로 부르면 되는데.. 3절 "주 오실 징조가 넘치고 새 날의 먼 동이 터 온다"가 오래 전부터 내 눈길을 끌었다.
"주 오실 징조", 재림의 징조가 넘친댄다. Signs of His coming multiply..
그런데 이 곡은 1912년에 발표됐다.
아직 1차 세계대전도 시작되지 않았고 UN이고 WCC고 이스라엘 국가고 뭐고 없던 시절이었는데? 핵무기, 미사일, 컴퓨터, 인터넷도 없었는데? 이 곡의 작사자는 그 시절에 뭘 근거로 재림 징조가 넘치고 "말세다 말세"라고 추측을 했던 걸까?
먼저, 과학기술을 생각해 보자. 20세기의 포스에 밀려서 그렇지 19세기도 중후반은 과학기술이 과거 대비 정말 폭발적으로, 상상을 초월하게 발전했던 시기이다.
증기기관, 내연기관, 자동차, 철도, 흑백이나마 사진과 영화, 타자기, 교류 전기, 전화, 전신기, 축음기, 증기선 철갑선, 기관총, 길거리 공중 화장실.. 이런 게 다 이때 등장했다.
끈질긴 비과학 낭설이던 생물 자연발생설이 요 시기에야 완전히 논파되고 부정되고 폐기됐다. 세균이라는 게 이제야 알려져서 "길거리에서 침 뱉지 마시오" 캠페인이 미국에서 1900년대 초에 막 벌어졌을 지경이었다.
작고 허접하긴 해도 무려 비행기(!!)가 발명됐으며, 이제 막 타이타닉 호도 건조됐다. 선박으로 위험한 모험이 아니라 안락한 장거리 대륙 횡단 여행이 가능해졌다.
초보적인 수준의 국제기구들도 등장했다. 이때는 그런 기관의 명칭이 '국제 ***, 세계 ***'가 아니라 '만국 ***'이라고 번역되는 편이었다.
세계 언어들을 통합적으로 분석하려고 IPA 음성부호가 제정됐고, 심지어 에스페란토라고 국제 공용어를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다.
서유럽에서 예전에 비해 꽤 오랫동안 전쟁이 없으면서 과학기술 물질문명이 저렇게 발전했고, 쟤들이 가히 세계를 정복했다. 그래서 세계사에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재임기를 포함하는 이 19세기~20세기 초를 '벨 에포크'라고 부른다.
이렇게 서양 백인들이 찬란한 물질 문명을 이룩하고 세계를 석권하고 선교사까지 곳곳에 보냈으니, 인간 세계는 볼짱 다 봤고 예수님만 다시 오시면 되는 걸까 설마???
하지만 이 시기에 밝은 면모만 있는 건 당연히 절대 아니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뼈빠지게 일하고도 복지 사각지대에서 빈곤에 시달렸다. 아예 자국민도 아닌 피식민지 원주민들은 논밭이나 광산에서 지옥 같은 착취를 당했다. 흑인은 인간과 짐승 사이에 진화가 덜 된 생물이라고 여겨졌고, 장애인도 인간 취급을 못 받았다.
저 브루주아들을 쓸어버리고 혁명을 이뤄야겠다고 공산주의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때 상류층이 다니던 기독교회들은 무력과 권력으로 빨갱이들 때려잡고 노동자 운동을 진압하자는 선동만 했지, 이웃 사랑 실천은 너무 안 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자정 노력의 일환인지, 영국에서 자선냄비 구세군이라는 교파가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거기에다.. 내 뇌피셜로는 1908년 퉁구스카 대폭발,
1910년 핼리 혜성의 꼬리 괴담...에 대한 경험도
저 작사자의 뇌리에 "주 오실 징조가 넘치고"라고 녹아들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ㅎㅎ 저것들도 당대 사람들을 크게 동요시키고 큰 충격을 줬던 사건이다. 종말 신드롬이 굳이 1990년대 세기말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거다.
암튼.. 인류가 앞으로 또 무슨 세상 징후를 겪은 뒤에야 예수님이 오실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1910년대에나 2020년대에나 맹 똑같이 주님 다시 오실 징조는 늘어나고 있고, 예수님은 동일한 확률로 언제든지 오실 수 있는 거다.
언제나 종말 정신에 입각해서 살면 되지, 굳이 이 찬송가가 만들어지던 당대의 배경 맥락을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따질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 다만 이렇게 너무 막연하고 보편 일반적이고 원론적인 얘기에만 빠져들다가 "예수님이 문자적으로 재림 자체를 안 하신다, 그냥 마음 속에 오신다, 이미 와 계신다".. 그 따위로 교리가 변질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저런 정황을 생각하면.. 19세기 말에 근대화된 서구 열강과 일본은 천국이었고 오로지 구한말 조선 땅만 시궁창 헬이었다고 너무 "지나치게" 열등감 갖고 자조 자괴할 필요까지는 없는지도 모르겠다. (세계 평균 이하의 미개한 시궁창이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지나치게'까진.. 정도의 문제다. =_=).
5. 여담: 자매 감성
찬송가와 관련하여 100% 다 그렇다는 건 아니겠지만, 교회 다니는 젊은 자매님들은 대체로 이런 경향이 있더라.
(1) 나는 favorite 찬송가가 "주 하나님 큰일을 행하셨네", "놀라운 주의 은혜", "주 보혈로 날 구해 준", "그 참혹한 십자가에" 등 구원· 복음과 관련된 쪽에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에서 만났던 여러 자매들은 전반적으로 공통적으로.. 뭐 인도하시느니, 힐링하시느니, 어루만져 주신다느니.. 그런 인도와 보호 장르의 곡을 확실히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킹 진영, 비킹 진영을 불문하고. ^^
(2) "주 품에 품으소서"(Still; Reuben Morgan)와 "참 좋으신 주님"(김 기영).. 두 곡을 약속이나 한 듯이 완전 너무 좋아하곤 했다. 물론 다들 훌륭한 곡이긴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감흥을 느낀 건 아니다.
(3) 앞서 소개했던 찬송가 "주 다시 세상에 오시리"라든가 "샤론의 꽃 예수",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는 뭔가 자매 감성이 느껴지곤 했는데 역시나 작사 작곡자가 여성이다. 후자는 1절 가사가 너무 몽환적인 판타지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일부 교파에서는 가사를 살짝 수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형제보다는 자매가 확실히 더.. 단순히 성경적인 설교, 은혜로운 설교 정도가 아니라 "오늘 설교 완전 나 저격이었어~!! 어제 이런 일이 있었는데 마침 주일 예배 설교가 딱 이런 내용이었어" 식으로 주관적인 감탄사를 훨씬 더 자주 말하더라. 이런 사례가 여러 사람들에게서 계속 나오는 게 흥미로웠다. 겨우 한두 케이스였으면 내가 이렇게 글을 안 남긴다.
(4) 이건 신앙의 영역은 아니겠지만.. 한창 우한 폐렴 때문에 백신 좀 맞으라고 국가적으로 난리였던 시절에 말이다. 현직 의사들 중에서 백신의 효능에 대해 의구심을 적극적으로 표시한 사람도 남자보다는 여자 의사 중에서 훨씬 더 많았다.
뭐 유사과학 음모론 괴담에 홀렸건, 진짜로 통계적으로 의심스러웠건 의학적인 근거는 내가 판단하지 못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성향이 그랬다. 이런 거 감수성도 남자와 여자의 종특 차이인지 모르겠다.
(5) 여친을 비롯해 나보다는 최신 CCM 동향에 더 밝은 사람들과 교제를 해 보면.. 아예 19세기 클래식 찬송가 아니면 2010년대 이후의 복잡현란한 CCM을 잘 알지(마커스워십??), 198~90년대 초창기 국내 CCM은(최 덕신, 옹기장이) 대체로 잘 모르더라. 음~ 나이대나 신앙 생활 짬이 나하고 별로 차이가 안 나는데 이런 차이가 있구나~~ ^^
난 반대로 2000년대 이후 CCM은 유입이 끊겨서 최신 동향을 잘 모르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최신 게임도 몽땅 고전 게임으로 바뀌는 와중에, CCM도 초창기 버전은 이제 C~ 컨템퍼러리(동시대, 현시대)하지 않게 된 듯하다. ㄲㄲㄲ
이제 엑셀이라고 하면 자동차가 아니라 컴터 소프트웨어가 떠오르고, 봉고라고 하면 승합차가 아니라 트럭을 떠올리는 시대이다. 이러니 신 상우 '하나님의 은혜'는 2020년 손 경민 '은혜'에 밀려 잊혀지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