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인명 사고에 대한 생각

지난 3월 12일에 본인은 출근길에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들으며 월요일 하루를 시작했다.
딱 정확하게 본인이 타려는 지하철이 앞 역에서 웬 인명 사고가 발생해서 열차 운행이 한동안 중단됐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스크린도어까지 버젓이 있는데 웬 인명 사고가 난단 말인가? 이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지하철 지연 증명서(난 뭐 지연이라기보다는 열차 탑승을 애초에 포기한 경우이지만)라는 걸 구경했다.

그런데 사고의 사망자는 놀랍게도 일반 승객이 아니라 지하철 회사의 직원이고, 역무원도 아닌 기관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선로로 접근이 가능한 내부 직원이 마음먹고 자살을 하려 든다면, 제아무리 스크린도어가 갖춰져 있어도 애시당초 소용이 없을 것이다.

철도 공기업에서 승무직으로 일할 정도이면 연봉 빵빵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정년도 보장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아주 부러운 지위에 속하는 사람이다. 군대로 치면 제일 중요한 전투 병과요, 게임 개발로 치면 딱 프로그래머에 해당하지 않는가. 최소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자살할 이유는 없다.

하긴 2004년, 본인이 아직 대학 재학 중이던 시절엔 대구 과학고의 1회 졸업생이고 카이스트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어떤 사람이 대구 지하철 기관사로 취직한 게 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었다. (☞ 관련 기사 클릭 )

그땐 카이스트라는 스펙에 비해 저학벌(?) 직업을 선택한 이례적인 사례로 그 사람이 소개되었지만, 저게 과연 그렇게 만만한 직업일까? 요즘은 SKY급 대학 나오고도 공기업, 공무원엔 말단으로라도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을 텐데. 이런 트렌드와는 무관하게 나도 2007년에 서울 도시철도 공사에서 공채를 하던 시절에 원서를 넣긴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철도 차량 운전 면허가 없으니 승무직은 못 하더라도 다른 부서로라도 말이다. 그때 난 병특 중이었기 때문에 애당초 지원을 할 수가 없어서 못 했을 뿐이다.

다만, 지하철 기관사의 근무 여건은 그리 좋다고 보기 어렵다. 우선, 근무 시간이 불규칙적이고 교대를 돌면서 주기적으로 주말을 반납할 각오를 해야 한다. (일요일에 교회에 가야 하는 사람에겐 큰 마이너스) 아니, 승무직은 입사 지원할 때부터 주말 교대 근무에 동의한다는 각서를 제출한다. 비록 버스 기사처럼 교통 체증과 복잡한 도로, 매연, 차멀미로 인한 데미지는 없어서 좋지만, 몇 시간째 햇빛을 못 보면서 어두컴컴한 터널만 돌아다니는 것도 정서에 좋을 리가 없다. 자세한 건 예전 글을 참고할 것.

그래서 본인은 기관사가 그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할 정도이면, 근무 환경에 적응을 못 해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렸거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사내에서 왕따이거나 대인 관계에 심각하게 문제가 있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이 사고에 대한 후속 뉴스 보도를 보니 내 추측이 얼추 맞는 것 같다.

특히 도철은 1인 승무를 국내 최초로 도입한 지하철 회사이기 때문에 그 점이 노조로부터 두고두고 까여 왔으며, 이번 기관사 자살 사건을 계기로 그게 또 부각되었다. 하지만 차량 상주 승무원 수의 최소화는 철도 기술의 엄연한 트렌드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본적인 까임거리가 될 수는 없을 듯. 도철은 1990년대 중반에 1인 승무로도 모자라서 아예 무인 운전까지 시도한 적이 있는 과감한 회사이긴 하다만 말이다. (운전실이 없는 완전 무인 운전인 신분당선 전동차에도 승객들과 부대끼는 진짜 승무원이 객실에 한 명 있긴 함.)

난 우리나라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를 보면 무척 놀라움을 느낀다. 오죽했으면 국가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2009~2010년을 전후하여 서울 지하철의 거의 모든 역들에다 스크린도어를 도배해 버렸을까? 수백 개에 달하는 그 많은 지하철역들에다 스크린도어를 이렇게 단기간에다 모두 설치한 나라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거의 기네스북 감이 아닐까?

그만치 지하철 자살 러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가 그런 무리수를 둔 것이다. 뉴스 기사들을 검색해 보면, 당장 본인이 이용하는 집 근처의 지하철역에서만 해도 최소한 3명이 각각 2004년, 2007년, 2008년에 선로 투신으로 목숨을 끊은 적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나마 스크린도어가 설치되면서 2008년 기록이 마지막이 된 것이다.

지난 2010년 8월 23일, 분당선 태평 역에서 발생한 인명 사고에도 본인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건 사람이 죽지는 않아서 큰 사고로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사람 만날 일이 있어서 분당에서 학교로 가는 길이었는데 열차 지연으로 인한 불편을 겪었다. 분당선에서 태평과 야탑 역은 2012년 3월 현재까지도 아직 스크린도어가 없다. 다만, 공사 중이긴 하다.

직접 겪어 보지도 않고 남이 처한 상황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만..
저렇게 작정하고 자살하려는 사람을 치는 사고를 낸 기관사는 하나도 잘못이 없는데 왜 그 정도까지 충격과 정신 공황을 겪는지 잘 모르겠다.

사람이 끔살 당하는 장면을 라이브로 본 것에 대한 정신적 데미지는 있겠지만, 자기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식의 생각엔 제발 안 빠졌으면 좋겠다. 이건 불의의 사고로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작정하고 자살하려는 사람이 죽은 것이다. 사형 집행관만큼이나 하나도,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가 없다. 일본처럼 죽은 사람 유족에게 민폐에 대한 책임으로 벌금을 때리지 않은 걸 고맙게 여겨야 할 판.

그나저나 작년 12월엔 공항 철도에서 정말 어이없는 사고가 난 적이 있다. 막차 운행이 아직 안 끝났는데도 끝난 줄 알고, 선로 보수 인부 여러 명이 선로로 들어갔다가 전동차에 치여 끔살 당한 것이다. 한밤중인 데다 요즘은 전동차가 기술이 좋아서 워낙 조용하게 달리기 때문에, 저런 상황에서는 답이 없다..;; 기관사도 갑툭튀한 사람들 보고 간이 떨어질 정도로 얼마나 놀랐을까? 이건 승강장 자살도 아니고..! 텅 빈 막차를 몰고 저기까지만 가면 오늘 근무 끝이고 들어가서 잘 일만 남았을 텐데!

원래 그런 건 다 규정이 있다. 지하철의 경우, 심야에 업무를 위해 선로 내부로 들어가는 직원은 열차 운행 영업이 종료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차선(전깃줄)이 완전히 단전된 걸 확인하고 들어가야 한다. 사탄의 인형 처키는 건전지 없이도 움직였지만-_-, 현실의 전동차는 그렇지 않으니까. -_-;; 선로 보수· 청소 차량들은 애시당초 전기가 아닌 기름으로 움직인다.
그러니 내가 보기엔 저 사고는 일차적으로는 일종의 근무 기강 문제이다. 거기에다 또 선로 보수 인력이 외주 용역이다 보니 앞뒤 손발이 안 맞은 것일 수도 있겠고.

그랬는데, 고의적인 자살이 아니면서 사람이 여럿 죽는 사고가 나 버리는 바람에, 내 기억이 맞다면 애꿎은 전동차 기관사도 일단은 잡혀 들어갔다. 경적을 안 울리고 완벽한 수준의 안전 조치를 안 취했다고... 구속인가? 한국은 법을 적용하는데 동기나 과정보다 결과를 더 우선시하는 풍토가 있어서..;; 안타까운 일이다. 기관사의 입장에서는 저건 정말 운이 없어서 이런 신세로 전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하루에 전철이 수송하는 승객 수가 얼마나 엄청나고 방대한지를 감안하면, 그에 비해 저 정도로 예외적인 급으로 발생하는 사고는 정말 극소수이고 새 발의 피도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철도는 정말 수송 효율이 좋고 안전한 교통수단이 맞다. 오늘도 수도권 시민들의 운송을 책임지는 지하철/전철 기관사님들 힘내시길.

Posted by 사무엘

2012/03/25 08:26 2012/03/25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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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바바 2012/03/25 15:30 # M/D Reply Permalink

    법을 적용하는데 동기나 과정보다 결과를 더 우선시하는 풍토...는 하셨는데, 속세의 법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타인의 동기나 과정을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거든요. 법을 집행하려는 입장에서는 편견을 버리고 조사해야하는 만큼 일단 사고가 났으니 입건되어 수사받는 것은 피할 수 없지 않은가 싶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불구속 수사가 당연한 것이고 실제로도 구속은 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사격 선수의 오발 사고로 코치가 사망한 사고가 있었는데 그 때도 수사만 받고 법정에 가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당시 사고와 관련해서도 그렇게 처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으로 요사이 슬슬 주목받고 있는 범죄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보상제도의 뿌리가 철도 초창기 영국에서의 철도 인명사고를 겪은 기관사에 대한 보상제도에 있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인명사고로 인한 기관사의 심리적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오늘날과 달리 그야말로 돈만 생각하던 자본주의사회였던 당시 영국에서 관심을 가지고 또 국가적인 정책으로까지 이어졌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1. 사무엘 2012/03/25 20:19 # M/D Permalink

      네, 사람은 신이 아니고 mind reader가 아니며, 더 결정적으로 죽은 자는 말이 없죠.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처럼 어쩔 수 없는 면모가 있음을 저 역시 모르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나라는 정당방어를 참작하는 기준이 굉장히 엄격하고 보수적입니다.
      또, 군대에서 누가 자살 같은 대형 사고를 일으키면, 그 사람이 진짜 상관이 지휘를 잘못해서 사고를 친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그 병사가 통제불능 구제불능급의 부적격자였는지를 보는 게 아니라 일단 지휘관들을 거의 무조건 직위 해제부터 시키고 보는 게 우리나라 문화라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저것보다는 좀 더 상황을 공정하게 파악해서 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지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쉽지 않은 문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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