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액체

흔히 화학적으로 물질의 상태는 플라즈마 같은 특수한 상태를 제외하면 통상 기체(gas), 액체(liquid), 고체(solid)라는 세 상태 중 하나로 분류된다. 그 중 기체와 액체는 고유한 형체가 없으며 고체와는 다른 공통점을 공유하기 때문에, 유체(fluid)라고 한데 분류되기도 한다. 내부에 부력과 양력이란 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논하는 '유체 역학'이라는 물리 분야도 있다.

그런 유체 역학의 관점에서는 고체가 아웃사이더이다. 하지만 액체를 아웃사이더로 보는 관점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액체에는 액체 그 자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너무나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물’이라는 물질이 있다. 물이 얼마나 흔해 빠진 물질이면서 한편으로 얼마나 특이한 물질인지는 화학을 전공한 사람이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고체 얼음이 액체 물보다 부피가 더 크고 밀도가 작아진다는 것 하나만 생각해도 말이다.

물이 특이한 점은 지구의 특이한 점과도 결부된다. 물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상온'이라는 기온대에서 액체 상태로 존재하는 매우 드문 물질 중 하나이다. 생각을 해 보시라. 물과의 혼합물 말고 화학적인 순물질(원소 또는 화합물) 중에서 액체인 놈이 또 뭐가 떠오르는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수은 같은 것 말고는 선뜻 떠오르는 게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 역시 전우주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표면의 대부분이 바다라는 '액체'로 뒤덮여 있는 매우 희귀한 행성이다! 다른 행성들은 혹독한 저온 또는 고온 때문에 표면 전체가 고체 아니면 기체이다. 착륙할 땅이 없는 목성 같은 행성의 경우, 표면과 가까워질수록 방사능과 유독가스의 농도 및 압력이 겉잡을 수 없이 짙어지면서, 접근하는 모든 물질을 파괴하고 으스러뜨리게 된다.

2. 알코올

지구상에는 물 말고도 '기름'이라는 액체가 있다. 기름은 (1) 물보다 가볍고 (2) 물과 섞이지 않으며 (3) 불에 잘 타는 액체의 총칭으로, 화학적인 특성만을 규정할 뿐, 화학적으로 특정 성분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저 세 속성 중 일부만을 만족하는 물질은 지구상에 거의 없기라도 한지? 어떻게 저 세 특징을 한데 '기름'이라고 싸잡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던 점이다.

(1)과 (2) 때문에 기름에 붙은 불은 물을 뿌려서 꺼서는 안 된다. 또한 (2)는 '물과 기름'이라는 관용구까지 만들어 냈을 정도로 유명한 특성이며, 씻어 내는 것도 물만으로는 안 되고 비누나 세제를 필요하게 만드는 더티한 주범이다. 그리고 (3) 때문에 기름은 '연료'로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은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기름의 통상적인 특성에 비해 알코올은 좀 색다른 면모가 있는 물질이다. 분명 물보다 가볍고 불에 잘 타는 액체인데.. (2)는 아니다. 물과 잘 섞인다! 끓는점의 차이를 이용해 물과 섞인 알코올의 분별 증류가 가능할 정도이다. 세상에 물과 잘 섞이는 액체 연료가 알코올 말고 또 있나..?

이 때문에 알코올은 천연 가스만치 위험하지는 않으면서도 다른 연료에 비해서 깨끗하다는 심상을 주며, 이는 실제로 맞는 말이다. 물만큼이나 쉽게 증발하여 흔적 없이 잘 사라진다. 에탄올을 괜히 소독용으로까지 쓴 게 아니다. (피부에 묻은 에탄올이 증발하면 물이 증발할 때보다 더 시원한 느낌이 든다.)

또한 연소 과정에서도 알코올은 그을음 없고 높은 온도를 잘 낸다. 이게 유용한 면모여서인지, 알코올 램프(+비커+삼발이..^^)는 테란전에서 캐리어가 프로토스의 상징인 것처럼 과학 실험의 상징이다. 가스나 석유 대신 알코올을 쓴다는 뜻. 물론, 굉장한 고온이 필요할 때는 가스를 연료로 쓰는 토치나 분젠 버너가 동원되겠지만.

파라핀 촛불의 노란 겉불꽃이 1400~1500도 정도인 반면, 알코올 램프의 파란 겉불꽃은 1700도를 넘어서 더 뜨겁다. 양초에 비해 알코올 램프의 심지는 더 굵직하다. 촛불은 불기만 해도 꺼지지만 알코올 램프는 불어서 끌 수 없으며 이는 위험한 시도이다. FM은 불길 위에다 램프 뚜껑을 확 씌워서 공기 공급을 끊어서 끄는 것이다. 불을 끈 뒤, 뚜껑을 다시 열어서 알코올 증기를 내보낸 뒤, 다시 닫아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알코올은 상온에서 액체이긴 하지만 알코올이 너무 적은 상태로 램프가 장시간 방치되면, 증발한 알코올 가스가 램프 안에 고이게 되고, 이게 나중에 램프를 켜는 불꽃에 닿는 순간 한꺼번에 퍽 폭발할 수 있다. 이게 무슨 어지간한 도시가스 누출 사고처럼 실험실을 다 박살 낼 정도의 비극을 부르지는 않겠지만, 램프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다치게 할 수준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험실 안전 수칙에는 어딜 봐도 “알코올 램프에는 알코올을 최소한 2/3 이상의 양으로 충분히 채워 둘 것”이 명시되어 있다.

3. 술

알코올은 수산화(OH) 기질을 담고 있는 여러 탄화수소 화합물의 총칭이기 때문에 한 종류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종류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건 역시 분자 구조가 간단한 에탄올과 메탄올. 둘 중에서는 메탄올(CH3OH)이 에탄올보다((C2H5OH)도 더 단순한 가장 간단한 구조이며, 이게 알코올 램프를 포함해 연료로 공업적인 용도로 쓰이는 물질이다.

그러나 알코올은 연료로만 유명한 물질이 아니다. 알코올은 그 이름도 유명한 '술'의 주성분이기 때문이다.
일단 메탄올은 그야말로 샤악이나 마찬가지인 맹독성 물질로, 인체에 들어가면 장기를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10ml남짓만 섭취해도 눈이 멀어 버리고, 30~40ml가 체내에 들어갔다간 죽는다. 주사기나 스포이트 하나를 차지할 만한 적은 양만 먹어도 그 정도의 참극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독약을 먹고 죽는 건 뭘 먹든 굉장히 고통스러운 죽음이다.

그런데 알코올에 속하는 화합물 중 유일하게 에탄올은 얘기가 좀 다르다. 물론 무슨 식용유 같은 부류가 아니며, 많이 먹어서 몸에 좋을 건 절대 없지만... 그래도 먹는다고 메탄올처럼 저렇게 곧바로 몸이 망가지고 죽는 건 아니며, 신체를 약간 각성시키고 기분을 전환시키는 효과가 있다. 왜 하필 에탄올만 그런 걸까?

물론, 술은 그 약간의 순기능만 논하기에는, 사람을 개로 만들어서 인류에게 역사적으로 끼친 해악도 솔직히 너무 크다. 인류 역사상 세상의 그 어떤 마약보다도 많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가정을 파괴한 약물이 바로 알코올이다. 각종 종교라든가 종교 수준의 엄격한 도덕을 요구하는 집단에서 술을 괜히 절대적으로 죄악시· 금기시하는 게 아니다. 술만 처먹으면 괴물로 변해서 부인이나 아이들을 때리는 가장을 둔 가정 구성원의 피눈물은 당사자가 아니면 정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지난 여름엔, 만취 상태에서 정신줄 놓은 어느 운전자가 공항 고속도로에서 시속 거의 180에 가까이 과속을 하다가 앞서 가던 승용차를 추돌시켰었는데 그 사고 기억하시는가? 뒷부분을 추돌 당한 승용차는 화재가 났고, 일가족 네 명이 차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몽땅 몰살을 당했다! 도대체 정체도 없이 고속도로를 멀쩡히 잘 달리던 차가 중앙선 침범 정면충돌도 아니고 추락도 아니고, 어떻게 추돌을 당해서 일가족이 몰살 당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게 가능한 정확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보험사들도 바보는 아니니, 음주운전 교통사고는 자해나 다름없다고 봐서(=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쌤통이라는 뜻) 자차 보상은 안 해 준다. 대인· 대물 보상은 가해자가 최대 200만원까지는 부담해야 하고, 그 이상 넘어가는 액수만 원래는 보상을 안 하다가 하기 시작했다. 음주운전은 교통사고 처리 특례법에서 열외되는 11대 중과실에 당연히 속하며, 각종 벌금이나 징역 같은 행정 처분에 대해서는 보험사도 면책이다. 아마 저 운전자는 차도 내 기억으로 제네시스이던데 자비로 수리하거나 폐차해야 하고, 면허 취소에 100% 구속에 몇 년간 교도소에서 징역 살면서 술로 인한 패가망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 봤자 피해자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사형에 처해도 분이 안 풀리겠지만.

제아무리 “술은 취하지만 않을 정도로 마시면 된다”라고 술에 관대한 사람이라 해도,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음주운전에 대해서까지 관대한 사람은 없다. 얼굴 안 뻘개져도 한 잔을 마셨으면 한 잔만치 소량이나마 취한 것이고,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신체와 머리의 대처 능력이 감소해 있다. 그리고 술을 금지하는 종교는, 동일한 맥락에서 음주운전이 아니라 아예 “음주생활”을 하지 말자는 차원에서 술을 금지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 같은 일반인이 먼저 술을 입에도 안 대야, 진짜 알코올 중독자 개차반들도 술을 끊게 될 테니까.

그런데 이놈의 술은 아무리 얄밉다 해도 아주 없앨 수는 없다. 세속의 관점에서 술은 안타깝게도 사회와 문화 전반에 현실적으로 너무 깊게 뿌리박혀 있다. 제아무리 혼자 의롭고 유능한 통치자, 아니 독재자가 나타난다 해도 술은 못 없앤다. 우리나라의 서슬 퍼런 독재 정권도 관습상의 음력 설(구정)은 결국 못 없앴으며, 이스라엘의 선한 왕도 산당들을 못 없앴듯이 말이다. 조선 영조 때의 금주령, 20세기 초 미국의 금주법도 성공하질 못했다. 법으로 금지해도 술 마실 사람들은 결국 어둠의 경로로 구해다 마시면서 사회 구조는 더 망가져 왔다.

술을 금지할 수는 없으니 결국 높으신 분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담배와 마찬가지로 술도 유통을 합법화는 하되 세금을 왕창 매기는 것이다. 이건 꼼수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리고 솔직히 술· 담배로 거둬들이는 세금 수익보다, 술· 담배 때문에 건강 망쳐서 발생하는 의료보험 추가 지출, 각종 사고 수습 비용이 여전히 더 “많다”. 술· 담배 많이 소비해 주는 건 국가의 입장에서도 세금 셔틀 애국(?) 행위가 아니다! ㅎㅎ

우리나라도 못 살던 시절엔 의료 소독용 에탄올을 몰래 빼내서 물에다 섞어서 술이랍시고 마시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의료· 공업용으로 쓰이는 알코올은 주류용 알코올 같은 세금이 붙어 있지도 않으니 일거양득. 그러니 요즘은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비주류용 알코올은 에탄올이라 해도 색소나 메탄올이나 여타 독극물을 약간씩 섞어서 공급되며, 당연히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된다. 천연 가스는 누출을 감지하기 쉬우라고 냄새 나는 물질이 가미되어 공급되는데 알코올에는 이런 사연과 후처리가 있는 셈이다.

4. 맺는 말

자동차에 기름을 넣고(휘발유)을 넣고, 식용유로 튀김을 만들어 먹다가 액체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고 알코올의 특성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됐고, 이 글까지 쓰게 됐다.
물과 섞이면서 불에도 잘 타는 알코올 같은 물질이 세상에 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게다가 그런 부류에 속하는 물질이 하필 술을 만드는 데도 쓰인다니.

알코올은 분명 유용한 연료이며 여러 용도로 쓰인다. 하지만 그 자체의 폭발력이나 화력, 쉽게 말해 옥탄가가 천연 가스나 석유에 비할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그랬으면 진작에 자동차용 연료로도 개발됐겠지. 어차피 알코올 자체도 공업적으로 합성할 때는 석유의 추출물로부터 만들어지기도 하니 아주 별개의 물질도 아니다.

한국어의 외국어 표기법은 모음이 연달아 오는 것을 싫어하며 특히 장모음을 표기에 반영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알콜'이 아니라 '알코올'이 됐을까? alcohol이라는 단어의 구조에서 볼 수 있듯, 사실 원래 단어는 '알코홀'에 가깝다. 음절이 하나 더 들어있기 때문에 '알콜'로까지 줄이지는 않고 '알코올'로 적는 듯하다.

이 단어는 이례적으로 어원이 아랍어이다. 아랍어에 유난히 '알'자가 많은데, 이는 영어로 치면 the와 비슷한 아랍어의 관사이다. '알코올'의 '알' 역시 같은 용도의 형태소이다. 심지어 알고리즘, 대수학(algebra) 같은 수학스러운 용어들도 어원이 아랍어 내지 아랍의 고유명사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11/21 11:55 2012/11/21 11:55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759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759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1545 : 1546 : 1547 : 1548 : 1549 : 1550 : 1551 : 1552 : 1553 : ... 2204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987233
Today:
270
Yesterday:
2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