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 교통수단에는 도로나 철도 같은 길이 있다. 열차는 레일을 벗어나면 끝장이고, 자동차도 열차보다야 자유도가 높지만 평평한 길이 없는 곳은 못 다닌다.
그에 반해 비행기나 선박은 광활한 창공 아니면 바다 한가운데를 다니니, 딱히 길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얘들도 눈에 당장 보이지 않고 민간 지도에 표시돼 있지만 않을 뿐, 가상의 경로를 설정하고 항상 정해진 길만 다닌다.

배야 물 위만 다닐 수 있지만 비행기는 무엇이든 위로 타넘을 수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움직임의 자유도가 가장 높다. 그러나 자동차만 해도 소유와 운전을 위해서 각종 등록에, 보험에 면허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까다로운 규제와 제약들이 존재하듯.. 비행기도 마찬가지이다. 일정 중량 이상의 비행체가 일정 고도 이상을 비행하기 위해서는 미리 근처의 항공 관제 시설 내지 군부대에 비행 스케줄과 경로를 신고해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허가받은 대로만 다녀야 한다. 이걸 어기면 생각보다 꽤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우리나라 영공에는 사전 신고만 하면 트래픽이 허용하는 한 그럭저럭 OK가 나오는 구역이 있고, 반대로 그렇지 않은 '비행 제한/금지 구역'도 있다. 금지 구역은 국방부 장관 차원에서의 아주 예외적인 승인이 나지 않는 한, 싸제 비행기가 절대로 얼씬거릴 수 없는 곳이다. 이거 뭐, 하늘 위도 사실 온통 민통선 지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물론 인간은 새가 아니며 자기 힘만으로 하늘을 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보니, 제약을 하든 말든 이쪽 업계의 사정은 공항이나 군 관계자가 아니면 민간인이 신경을 쓸 일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이런 규정이 갑자기 부각되고 있는 이유는.. 일명 '드론'이라고 불리는 장난감 무인기를 취미로 날리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드론'이라고 하면 한때는 저그의 일꾼 말벌 유닛이 1순위로 쓰였지만 이제는 무인기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는 듯.

옛날에는 하늘로 뭔가 장난감을 띄우고 싶은 사람은 연을 날렸다. 혹은 자기가 직접 하늘로 뜨고 싶으면 기구를 띄우거나 멀리 언덕으로 가서 글라이더 정도는 탔던 것 같다. 그 반면, 자체 동력을 갖춘 초소형 비행체를 띄우는 건 확실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격추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으면서 그래도 스스로 자세와 방향 조절이 가능할 정도로 동력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불순한 용도로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하다. (도촬이나 폭탄 투하 같은..)

이런 특성을 이용해 요즘은 북한조차도 심심하면 무인기를 날려서 남조선을 정찰하는 게 심심찮게 보도된다. 옛날의 땅굴과 무장공비에 이어 트렌드가 바뀌었다. 그래서 무인기 비행은 결국 안보상의 이유로 인해, 무조건 전면 금지까지는 아니어도 규제· 제약이 크게 걸릴 수밖에 없는 행위가 됐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비행기 관련 취미는 무선 전파나 총기 관련 취미하고도 유사성이 있어 보인다(한쪽은 교통, 한쪽은 통신. 한편, 총기는.. 더 말이 필요하지 않고.).

국내의 비행 금지 구역들은 내부적으로 이름 내지 식별자가 부여되어 있다고 한다. 일단 휴전선 근처는 동· 서부를 막론하고 0순위로 비행 금지이며, 평지의 민통선보다도 영역이 더 넓다.
서울 강북에는 청와대로부터 반경 3.8km까지가 P-73A이라고 명명된 금지 구역이고, 거기에서 추가로 반경 4.6km까지가 P-73B라는 완충 지대이다. 여기는 드론은 물론이고 민항기조차도 못 다닌다. 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한 하늘 위로 비행기가 다니는 걸 구경할 일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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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덕이라면 친숙할 그림이 드디어 나왔다.
P-73을 벗어나서 강북에 노원· 중랑, 강남에 영등포· 강남· 서초구는 금지보다는 수위가 좀 덜한 R-75 '제한 구역'이다. 비행을 위해서는 하루 전에 신고해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강동· 송파 정도의 외곽은 돼야 서울에서 그럭저럭 드론을 띄울 수 있다.
용산구는 강북이고 P-73B의 반경에 포함되는데도 저기만 예외적으로 금지가 아닌 제한 등급인 이유는.. 미군 기지인 관계로 국군의 통제를 덜 받기 때문이지 싶다.

지난 2013년엔 김포 공항을 출발한 한 헬리콥터가 안개 때문에 서울 강남 삼성동에서 아파트와 충돌하여 추락한 사고가 났었다. 이때 헬리콥터는 마치 한강 수상 택시처럼 한강 위로만 다니면서 서울을 횡단했다. 규정상 거기로만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포 공항에서 잠실까지 서울 동서를 횡단하는 예상 소요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자동차밖에 안 타는 땅개의 입장에서는 가히 시공간 워프 수준이긴 했다. 그냥 지하철 두세 정거장 지나듯이 강서구에서 송파구로 슈욱~

청와대나 인구 밀집 지대 말고 드론을 띄울 수 없는 곳은 전국의 민간 및 군 공항의 반경 9.3km 이내이다. 기존 비행기들과 충돌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구로구· 금천구 같은 서울 남서쪽 외곽은 경부선 철도가 지나며 하늘로도 R-75에도 속하지 않는 관계로 김포와 인천 공항을 드나드는 민항기의 항로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차뿐만 아니라 비행기가 수시로 드나드는 걸 볼 수 있다.
내 기억으로는 용인 고기리 유원지에서도 하늘에 비행기를 지나다녔으며, 관악산 중턱의 서울대 공대 인근에서도 비행기가 보였다. IT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판교 테크노 밸리에는 민항기는 없고 군 수송기가 수시로 날아다닌다.

고양시에 있는 한국 항공 대학교는 수도권이라는 위치는 괜찮지만 R-75를 포함한 온갖 제약들 때문에 정작 본캠에서는 비행 실습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조금만 삐끗하면 민항기 항로 침범에다 청와대 근처, 군부대 근처, 휴전선 근처 등의 태클이 걸리기 때문이다. 실수로 거기를 침범했다간 곧장 경고 방송에 갈굼과 욕이 쏟아진다. 그래서 비행 실습장은 멀긴 해도 공간 제약이 없는 지방으로(울진이라든가..) 옮겼다.

자, 항공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서 국내에서 특별히 비행이 추가로 금지된 곳은.. 바로 원자력 관련 시설 주변이다. 전국의 원자력 발전소들 인근은 엄격한 비행 금지 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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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을 벗어나 전국 단위의 비행 금지 구역 지도를 보면 대전 일대가 수도권 이상으로 꽤 넓게 비행 금지 구역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중심지가 세종시도 아니고 정부 청사도 아니고 군 본부가 있는 계룡시도 아니고 대전 북부인데...
그 주인공은 바로 '한국 원자력 연구원'이다. 건물 한두 채가 아니라 대학 캠퍼스 급의 거대한 단지이며 고속도로 나들목과도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 지도에는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최고급 보안 시설이다. 똑같이 민간 지도에 안 나와 있지만 국방 과학 연구소, 국정원 등에 비해서도 굉장히 인지도가 없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얘 때문에 대전에서는 하늘에 비행기를 볼 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객의 입장에서도 서울에서 부산(혹은 그 반대)을 비행기로 가면 육로로 갈 때와는 달리 대전을 구경할 일이 없다. 참 신기하지 않은가? 사실, 서울에서 부산의 직선 경로 자체도 대전이 아니라 충북 중앙을 관통하는 과거의 영남대로가 더 지름길이기도 하고 말이다.

지방으로 나가서 이런 거 저런 거 다 제낀 명시적인 비행 허용 구간에서는 별다른 절차 없이 개인이 싸제 무인기를 띄울 수 있다. 단, 이것도 고도 150m 이내 한정이기 때문에 건물로 치면 4, 50층 정도 높이까지만 가능하다. 더 높이 띄우려면 여전히 허가를 받아야 함. 그리고 시간대 제약도 있는지라 해가 떨어진 뒤에는 비행을 할 수 없다. 아까도 말했지만 영락없이 민통선 출입 제약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비행체들은 땅으로 뭘 떨어뜨린다거나 인구 밀집 지역으로 추락하는 초대형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무인기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원격 조종자가 자기가 조종하는 비행체를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거리까지만 비행체를 보낼 수 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밤에 날아다니는 헬리콥터 같은 비행기를 향해 장난으로라도 레이저 포인터를 쏘지 말아야 하듯(조종사의 시력과 비행기의 안전을 크게 해치는 범죄임), 싸제 무인기를 띄우는 사람에게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법이다.

자동차야 반드시 등록시키고 번호판을 달게 해서 통제한다지만, 비행체들은 일일이 그렇게 할 수도 없으니 더 강력한 규제가 불가피한 것이다. 꼭 무인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디 여행 갈 일이 있으면 여기는 비행기 항로 근처인지 아닌지를 본인은 더 눈여겨보게 될 것 같다.

* 비행 관련 여담:

1. 과거 항공의 선구자들은 참 엄청난 자유를 개척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찰스 린드버그 같은 사람은 기술적으로는 참 미약하고 허접했겠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대공 레이더, 비행 신고와 허가, 영공 통과료 같은 복잡한 물건이나 제도가 없던 시절에 자작 비행기로 대서양을 건너서 다른 나라로 가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겨우 KTX 비슷한 속도밖에 못 내는 프로펠러기로 30몇 시간을 잠을 안 자고 혼자 비행기를 조종했댄다. 그리고 파리에 도착해서 환영 인파들에게 최소한의 인사만 한 뒤 곧장 호텔로 돌아가서 잠부터 잠..;;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돌아올 때는 군함을 타고 왔다.

2. 영어로 fly는 '날다' 이상으로 날아서 '이동하다'의 뜻이 더 많이 담긴 단어 같다. 그래서 fly to New York 같은 말도 쓰이고 비행기 운항편을 일컬을 때도 저 단어 자체를 명사화해서 flight라고 부른다.
무하마드 알리의 명대사 "나비처럼 날아가서 벌처럼 쏜다"의 영어 동사는 fly가 아니라 의외로 float이다. 굳이 물에만 뜨는 게 아니라 공중에 붕 뜬다는 뜻.
본인은 개인적으로 저 문장을 FPS Quake의 매뉴얼에서 처음 봤다. Scrag라는 몬스터에 대해서 무하마드 알리의 말을 인용해서 설명해 놓았는데 저게 딱 정확한 묘사이다. 공중에 둥둥 떠 있기만 한 놈이므로.

Posted by 사무엘

2016/03/31 08:30 2016/03/3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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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 중에는 아동용 위인전을 안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으면서 어떤 인물을 왕창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는데, 나중엔 그 사람에 대해 감춰져 있던 흑역사도 알게 되고 위인전들이 그 인물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면서 미화와 왜곡을 일삼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환상이 깨지고 일종의 동심 파괴를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발명왕 에디슨의 경우 경쟁자인 테슬라와 얽힌 아주 지저분한 흑역사가 존재하며, 나폴레옹도 단순히 전쟁만 벌인 게 아니라 부하의 아내를 비열하게 빼앗은 것과 타 원주민 학살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십일조 잘 바친 신앙인(?) 기업가로 칭송받는 록펠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생리학자 노구치 히데요는 자국의 지폐에 등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지만 사실 업적으로나 인간성으로나 위인 레벨은 절대 아니라는 게 이미 다 까발려져 있다.

사실은 심지어 세종대왕, 이 순신 같은 (복음을 거부하는 핑계로 즐겨 언급되는) 언터쳐블급인 인물이라 해도 업적과는 별개로 다 부족한 죄인인 건 변함없으며, 까보면 다 흑역사가 나올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가 죄인으로 판명되고 지옥에 가는 게 어떤 경우건 아무 이유 없이 어거지로 이뤄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어떤 인물을 다루면서 일방적인 미화나 왜곡을 하지 않고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도저히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 내용도 너무 적나라하게 써 놨다. 그래서 성경은 정황상 도저히 인간의 저작물일 수가 없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이런 식으로 성립할 정도이다.

다윗의 흑역사, 모세의 흑역사.. 그리고 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욥기만 해도 그렇다. 흔한 동화라면 권선징악 구도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나쁜 부자, 구두쇠 악당 부자, 나쁜 계모를 조지는 이야기가 주류일 텐데 이건.. 부자인데 아주 착한 부자이고 의인이 왜 아무 까닭 없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너무 초월적으로 심오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욥이 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이 무조건 모범적이고 바람직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으며, 욥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너무 답답한 나머지 결국 성질 부리고 인간성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사람을 모 종교의 성인처럼 너무 떠받들고 칭송하는 것도 잘못됐지만, 그렇다고 자기도 그 상황에서는 그 이상으로 뻘짓 했을 거면서 남을 탓하고 욕만 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다. 감히 예수님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아무리 까발려 봐도 정말 먼지가 거의 안 나올 것 같은 인물이 있으며, 예수님에 근접하는 삶을 살았던 극소수의 인물은 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때 주 기철 목사는 바로 그런 그룹에 속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교회가 무너지고 교단이 무너지고 조선 기독교계가 황폐화되는 현실 속에서 신사 참배를 홀로 거부하다가 온갖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형무소에서 순교한 분이다. 게다가 유 관순이나 윤 봉길, 조선어 학회 학자들과는 달리 법정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아서 형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걔네들 일제의 관점에서도 법적으로 아무 근거 없이 불법으로 구금· 협박· 폭행을 당한 것일 뿐이다.
작년 성탄절 때 웬일로 KBS1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것을 감명깊게 잘 봤다.

일본은 단순히 조선에서 수탈만 저지른 게 아니라 조센징들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없애고 그들을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영미귀축과 맞장을 뜨려면 자기 제국의 덩치를 부풀려야 했으며, 그래서 조센징들도 단순히 노예에 물자 셔틀에만 머물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덴노 헤이카를 위한 총알받이가 되게 세뇌를 시켜야 했다.
쉽게 말해 SCV, 드론을 넘어서 마린이나 인페스티드 테란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거다. 정신 상태로 치면 질럿에다가도 비유가 가능하겠다. "My life for Tenno!" -_-

지금 생각하면 이건 정말 "무슨 마약 빨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급이었다. 뭐, 일본인으로 만들어 봤자 자국민과 동등한 레벨도 아니고 2류 3류 신민이었겠지만. 일본 자국민과 동급의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신노예를 만들려는 의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그렇다고 자국민도 편하게 지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걔네들 역시 전쟁광 수뇌부 때문에 겁나게 고생하긴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신궁을 보니까 저 정도면 단순히 국기/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가 아니라 종교적인 게 맞긴 해 보였다.
일본에서는 패전 후에 덴노가 인간 선언을 하자 고작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평생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때문에 멘붕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가 신으로 떠받들던 존재가 사실은 나와 똑같이 먹고 자고 싸는 인간에 불과했다니!"

맥아더도 이런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들 습성을 감안했기 때문에, 비록 히로히토 덴노가 악질 전범이긴 하지만 대놓고 그를 법정에 세워 처벌하거나 덴노 제도 자체를 없앨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북한 정권이 확 붕괴하고 김씨 부자가 자기와 똑같은 인간임이 폭로되고 나면 북한에서 제대로 세뇌돼 있던 핵심 계층 중에는 저렇게 멘붕하는 사람이 분명 나오지 싶다.

그 대신, 맥아더는 자신이 히로히토 옆에서 일부러 양아치 같은 거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언론을 통해 내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로 맥아더를 신으로 숭배하고 집에 신사까지 만들어 모시는 사람들이 나왔다고 한다. 거의 행 14:11-13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일본은 전반적인 정신 문화가 성경의 기독교와는 완전 상극이라는 게 느껴졌다. 일제는 이런 정신 문화를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다. "누가 너희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그러더냐? 니 예배도 할 거 다 하고, 여기서 잠깐 고개만 까딱하고 경의를 표해 주면 너도 살고 나도 가오가 살고 아무 탈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구냐? 이건 그냥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이지 종교적인 게 아니래도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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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참배와 동방요배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지켜야 할 신성한 제1의 임무이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성주들께서도 서양 기독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모두 참(수)하고 유황불에 던져 넣었던 것을 기억하라. 저들의 유일신은 우리 천황과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대적하는 것이다."

조선 땅에 있던 대다수의 종교 종파들은 집요한 협박과 회유, 특히 가족까지 동원한 악랄한 해코지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다. 거기에 굴복했다고 해서 딱히 민폐가 가는 게 아니니 이건 애초에 예수님을 안 믿는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비판할 거리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인 민폐는 굴복 안 했을 때 더 끼쳤을 가능성이 높지..

그러나 일부 기독교회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주 기철 목사 같은 영성으로는 저런 일제의 꼬드김은 영적으로 볼 때 출애굽기에서 파라오가 모세에게 제안했던 교묘한 절충안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임이 빤히 보였다. 오늘날로 치면, 성경을 들먹이면서 일부 배도한 목사가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하니까 동성애자들도 다 자기 스타일 대로 순수한 사랑을 하면 됩니다" 이러는 것과도 같다.

회유에 안 넘어가자 일제는 결국 "어쭈? 우리 덴노 헤이카가 더 강한지, 네놈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더 강한지 두고 보자!"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목사는 여러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고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나중에는 목사직에서 해임되어 사택에서도 쫓겨났으며 교회가 폐쇄당했다.

주 기철 목사의 막내 아들 주 광조는 어린 시절, 그 와중에도 평소에는 평양 경찰서를 거의 자기 집처럼 드나들면서 형사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저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도 모른 채. "광조 왔다~!!ㅋㅋㅋ" 그러면 형사들이 용의자 취조할 때 먹이는 코렁탕...은 아니고 주먹밥이라도 쥐어 주고 "요 귀요미 녀석 또 왔냐?" 그렇게 귀여워해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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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주 목사의 가족들을 다 불러 놓고 주 목사를 공개적으로 고문 시연을 했으니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가 생겼겠는가?
주 광조는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몇 년간 실어증을 앓았다고 한다.

저 때 TV에서 맛보기로만 묘사한 고문은 '비행기 태우기'이다. 그 당시에 일제가 행한 '흔한' 고문이다.
그나저나 주 목사 하면 못 위를 맨발로 걸었다는 ㅎㄷㄷ한 일화까지 전해지는데, 이건 언제 어느 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이고 누구의 증언을 통해서 전해지는지 정확한 출처를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게 궁금하다.

성경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친가정적인 교리를 표방하기 때문에, 근대 이래로 마 19:29, 막 10:30처럼 가족을 버리는 것까지 권장하는 정말 극단적인 상황은 대환란이 아니면 역사적으로 북한이나 일제 말기, 이슬람권 같은 곳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들은 나중에는 주 목사의 부인인 오 정모 사모도 두들겨 패면서 분풀이를 했다. "에라이, 남편을 죽으라고 부추기는 독한 년 같으니! (네놈들 때문에 우리까지도 실적 못 내서 상부로부터 잔뜩 갈굼 먹고 고달프단 말이다!)"

주 기철 목사뿐만 아니라 오 정모 사모도 신앙면에서는 정말 한 근성 한 분이었다. "따뜻한 숭늉을 한 사발 좀 마시고 싶소" 이런 유언을 남긴 남편 보고 "당신은 살아서 형무소를 못 나갑니다. 조선의 교회를 위해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런 말을 격려(?)랍시고 이를 악물고 했을 정도이니 일본 경찰과 간수들이 경악할 법도 했을 것이다. "저 조센징이 믿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우리 황국신민 중에 덴노를 위해 저렇게까지 충성을 바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같은 생각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주 목사는 정식으로 사형을 당한 게 아니며, 비록 지독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최후의 순간 자체가 "바보야, 그러게 좀 적당하게 두들겨 패고 강약 조절을 했어야지 아주 죽여 버리면 어떡해!" / "헉~ 죄..죄송합니다 ㅠㅠ"  같은 고문치사도 아니었다. 일제는 이런 면모에서는 오히려 아주 치밀하고 교묘했다. (유명한 고문치사 사건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훗날 대한민국 시대에 몇 건 터졌었다.)

이거 뭐 아무리 고문을 해도 소용없고 주 목사만 회생 불가의 죽기 직전 상태가 되자, 일제는 그를 슬쩍 병보석으로 풀어 주려 했다. "이 사람은 어찌 됐건 우리가 죽인 건 아니야. 우리 손으로 위대한 순교자 따위 만들고 싶지는 않아~" 면피를 위해서였다.

이런 예가 의외로 여럿 있다. 3· 1 운동 당시에 수원의 유 관순이라고 기록을 통해 뒤늦게 알려진 이 선경, 일제 말기에 진실을 외치다 주 기철과 비슷한 시기에 순국한 소년 주 재년도.. 다 의외로 옥중에서 죽은 게 아니다.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 후유증 때문에 몇 달 못 가 죽은 거다. 풀어 줘도 그건 사실상 석방이 아니었다.

이런 속셈마저 눈치 챈 오 사모는 남편에 대한 병보석 제안을 거부하였으며, 주 목사는 마지막 면회 후 감방 바닥에 누워 있던 중에 드디어 기력이 다하고 소천했다. 허나, 오 사모의 강직하고 대쪽같은 행적은 남편이 이렇게 순교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속된 말로 '시체 장사'를 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당연히 외쳐야 할 때 도저히 벙어리로 있을 수가 없어서, 무익한 종으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갔을 뿐입니다. 주 목사의 행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남편 개인이 대외적으로 막 알려지고 떠받들어지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최대한 경계하고 만류했다.
뭐, 주 목사를 거론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개나 소나 "나도 저분 존경해요" 립서비스 차원에서 위선적으로 이러는 건 대단히 보기 좋지 않으며, 이런 짓은 심지어 본인에게조차도 적용되는 사항이 될 수도 있으니 특별히 조심해야겠다.

그 시절에 주 목사의 자녀들은 일제로부터 불령선인 취급을 받아 쫄쫄 굶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너무 고생하면서 컸다. 너무 고지식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부모가 매정하고 야박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의로 양육된 자녀들은 바르게 잘 컸다. 장남 주 영진은 6· 25 때 빨갱이들에게 순교하여 손 양원 목사 가문처럼 부자가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4남인 주 광조가 제일 늦게까지 살아 있으면서 선친의 행적에 대해 증언하다가 지난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 목사는 일제의 통치에 정치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다. 종교 영역의 침범이 아닌 창씨 개명 정도까지는 별 반발 없이 따르기도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간 것일 뿐이지만, 그 행동이 결과적으로 나라 사랑에 항일 운동을 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 됐고 일제로부터 그런 짓(?)을 한 반동분자로 취급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이라는 꽤 높은 등급의 훈장이 추서되었으며(유 관순· 윤 동주와 같은 급) 서울 현충원에 가묘까지 만들어져 있다. 평양에서 유해를 찾아 와 이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특별히 만화로 각색된 것이 <만화로 보는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 기철 목사>(2007), <대동강의 순교자 주 기철>(1998, 두란노) 이렇게 두 종류가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 글에서 몇 컷 소개한 만화는 전자이다.
KBS 다큐멘터리는 일본의 신학계에서도 주 목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취재해 보인 것이 흥미로웠다. 하긴, 일본인들은 이 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그렇게도 치밀하게 연구했다는데 그 국민성으로 주 기철 목사까지 연구하는 건 이상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일제도, 북한 정권 같은 것도 없는 이 대한민국 땅에도 엄연히 신앙 생활에 고난과 시험은 있다. 내가 늘 말하지만, "너 이렇게 믿으면 죽는다" 대신에 "너 여기서 약~간만 타협하면 돈과 명예와 좋은 대외 평판을 무진장 얻을 텐데!"라고.. "눈 딱 감고 나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걸 네게 주겠다"라는 마귀의 시험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시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교리 쪽이든, 행실 쪽이든 참 좁은 길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더 낮아지고 바보 되는 것. 그걸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견디고 할 말한 뿐이다.

그리고 지난 3월 17일엔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배경과 출연진을 토대로 <일사각오>라는 영화도 나왔다. .

신사 참배 거부는 단순히 자기 종교 입장에서의 지조만을 고집한 게 아니라 사악한 일제의 군국주의 통치에 대해 거부의 뜻을 당당히 표현한 거라고 의미를 굉장히 많이 부여하고 있다. 그 당시 일제 당국조차 기독교는 자기네 식민 지배에서 굉장한 걸림돌이었다고 문서에다 기록했다고 영화는 소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조선 청년들을 군대에다 강제 징집하자는 발상은 1930년대에 이미 논의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징병은 완전 말기인 1944년이 돼서야 시행됐는데, 여기엔 조선인들의 이런 저항이 기여한 게 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의식이 고분고분 일본인으로 개조되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총을 쥐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6/03/28 08:36 2016/03/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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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곡선의 방정식

* 꽤 오래 전인 블로그 개설 초창기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옛날에 컴퓨터 학원에서 GWBASIC을 중급이나 고급까지 공부해 본 분이라면, 마지막 단원인 그래픽을 공부하면서 이런 비슷한 그림을 하나 그려 본 추억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세로줄을 하나 그은 뒤, 그 선의 윗점은 아래로 n만치 낮추고 아랫점은 오른쪽으로 동일한 n만치 옮겨서 선을 긋기를 반복하면 된다. 세로줄이 완전히 가로줄로 바뀔 때까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단순함에 비해서 생긴 결과물은 꽤 '컴퓨터그래픽스럽고' 뭔가 멋지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지?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저런 식으로 선을 한없이 많이 그어 나갈 때, 가장자리에 형성되는 저 둥그런 곡선은 수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곡선으로 수렴하게 될까? (그림에서 붉은 곡선) 편의상 선을 (0,0)-(0,1)에서 (0,0)-(1,0)까지 긋는 상황을 가정한다면 어떤 곡선이 그려질까? 이거 굉장히 재미있는 문제이다.

x축 (a, 0)와 y축 (0, b)를 지나는 직선의 그래프는 y = -(b/a)*x + b 이며 이건 중학교 수준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 그림에서는 0~1 사이의 a에 대해서 (a, 0)과 (0, 1-a) 사이를 지나는 직선이 만들어지므로 방정식은 y = -((1-a)/a)*x + (1-a)가 된다. 이 식을 [1]이라고 설정하자.

그러면 이 a 지점에서 그어진 직선은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미지의 곡선에서는 어느 지점과 만나게 될까? 이걸 생각하는 게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a 지점에서 그어진 직선이 곡선의 표면에 닿는 지점은 바로.. 그 직선의 바로 극소량 떨어진 옆에 있는 또 다른 직선과의 교점일 것이다. 극한이라는 개념이 필요해진다.

a 지점에서 x축과 y축이 b만치 극미량 전진하여 (a+b, 0)과 (0, 1-a-b)를 지나는 직선의 방정식은 y = -((1-a-b)/(a+b))*x + (1-a-b) 가 된다. 이 식을 [2]라고 한다.
두 직선 [1]과 [2]의 교점을 구하려면 두 식을 연립해서 x, y에 대해서 방정식을 풀면 된다.
그럼 x=a*(a+b), y=(a-1)*(a-1+b)가 나온다.

b가 0에 한없이 가까워져서 두 직선이 근접하게 되면 교점은 결국 (a^2, (a-1)^2)라고 a에 대한 매개변수식으로 귀착된다. 곡선의 궤적이 이렇게 다 구해진 것이다. 게다가 문제 접근 방식의 특성상, x=a^2인 지점에서 곡선의 기울기도 -((1-a)/a)라고 딱 구해졌다.
x의 매개변수식이 a^2이니 (a-1)^2에다가 루트만 씌우면 끝나고, 그리고 기울기의 부정적분을 구해서 f(0)일 때 1이 나오는 상수 C를 덧붙여 줘도 게임 끝이다.

곡선의 방정식은 x-2*sqrt(x)+1, 또는 y = (1 - sqrt(x))^2 이 된다. 오옷~~~ 비슷한 4사분원의 방정식과 비교했을 때 근호와 제곱의 위치만 싹 맞바뀐 형태라는 게 흥미롭다.
이 정도 문제는 난이도가 고등학교 교과 수준이거나 좀 아슬아슬하게 넘는 수준일 것 같다.
임의의 지점에서 기울기가 저렇게 결정되는 곡선을 구한다는 특성상, 제일 확실하게 푸는 방법은 미분 방정식을 동원하는 것이겠지만.. 그 정도면 확실하게 고등학교 수준은 아니다.

곡선의 식이 정확하게 나왔으니 곡선의 성질도 다 알 수 있다. 저 선들이 차지하는 면적은 1/6이 된다(0부터 1까지 식을 적분한 값). 곡선과 y = x와의 교점, 다시 말해 곡선의 기울기가 정확하게 -1이 되는 지점이며 곡선 내부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사각형의 한 변 길이는 1/4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위의 그림에서 빨간 곡선은 내가 손으로 그었을 리는 없고.. 어떻게 그린 걸까?
(a^2, (a-1)^2)라는 궤적은 베지어 곡선의 한 형태이다. 근사가 아니라 2차 베지어 곡선과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일치한다.

시작점 P0, 제어점 P1, 끝점 P2로 이뤄진 2차 베지어 곡선의 식은 (1-t)^2*P0 + 2*t*(1-t)*P1 + t^2*P2 (0<=t<=1)이다.
참고로 임의의 n차 곡선의 식은 각 항의 계수가 1, 3, 3, 1 등 이항정리 계수의 형태로 변하면서 t의 거듭제곱은 증가하고, (1-t)의 거듭제곱은 감소하는 형태로 생성된다.
저 식을 점들의 좌표가 아니라 t에 대해서 풀면 (P0 - 2*P1 +P2)*t^2 + (2*P1 - 2*P0)*t + P0 이 남는다.

문제의 곡선의 매개변수 식을 보면 x축은 a^2로, 2차항 t^2의 계수만 1이고 나머지는 0이다[1, 0, 0]. 따라서 P0은 답정너 0이 되어야 함. 일차항도 P0이 0으로 소거되고 없으면서 전체 계수가 0이 돼야 하므로 P1 역시 0이 된다.
한편, 이차항은 P0과 P1이 모두 0인 상태에서 계수가 1이 돼야 하므로 혼자 남은 P2는 0이 된다. P0, P1, P2의 x축 좌표는 각각 (0, 0, 1)로 정해졌다.

y축으로 가 보면, (a-1)^2는 a^2 - 2*a + 1이므로 맞춰야 하는 계수는 [1, -2, 1]이 됐다. 이로써 상수항 P0은 1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으로 2*P1 - 2*P0이 -2가 되어야 하는데 P0이 이미 1이라면.. P1은 0이 돼야 0-2 = -2가 될 수 있다.
P0도 값이 자동으로 정해진다. P0 - 2*P1 + P2 = 1이어야 하고, P0이 1이므로 P1뿐만 아니라 P2도 0으로 결정된다. P0, P1, P2의 y축 좌표는 각각 (1, 0, 0)이 된다.

이게 무슨 뜻인가? (a^2, (a-1)^2) 매개변수 곡선은 시작점 (0, 1), 제어점 (0, 0), 끝점 (1,0)인 아주 기초적인 2차 베지어 곡선과 동일하다는 얘기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베지어 곡선을 수식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그리는 방법 중에도 한 선분을 저 그림과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선분으로 점진적으로 변화시켜서 그 궤적을 연결하는 게 있었다. 심오함이 끝이 없구나..!

보통 그래픽 프로그램에서는 제어점을 2개를 둬서 2차보다는 더 범용적인 3차 베지어 곡선을 지원하는데, 3차 베지어 곡선의 표현력은 당연히 2차 곡선의 그것의 상위 호환이다.
3차 베지어 곡선의 방정식을 역시나 t 변수에 대해서 나타낸 뒤 2차 베지어 전개식과 계수가 일치하도록 방정식을 풀어 보면.. 시작점 P0과 P2는 동일하고 중간점이 P1일 때,
C1 = (2*P1+P0)/3 , C2 = (2*P1+P2)/3
이라는 식이 나온다. 이렇게 두 중간점을 잡아 주면, 3차 베지어 곡선으로 2차 베지어 곡선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

베지어 곡선으로 수학적으로 100%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는 유명 요소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원/원호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베지어 곡선과 굵기만 다르면서 평행한 파생 곡선이다. 쉽게 말해서 철도 선로의 한 곡선 궤조에 대응하는 다른쪽 궤조 말이다.
그에 반해 저렇게 직선을 찍찍 그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곡선 궤적은 매개변수로 표현하나 일변수 형태로 표현하나 식이 딱 구해지고 초월함수 그딴 거도 안 나오고 부정적분도 구해지고.. 마음대로 요리가 되는 게 좋다.

사이클로이드(최단 강하 궤적)라든가 현수선 같은 곡선 문제도 수학 해석적 관점에서 아주 재미있는 주제인데 이것도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이 글은 5년 전에 썼던 오리지널에 비해 베지어 곡선 얘기도 들어가고 그림도 GDI가 아닌 GDI+의 앤티앨리어싱이 들어간 것으로 바꾸는 등 내용의 품질을 대폭 향상시켰다. ^^

Posted by 사무엘

2016/03/25 08:27 2016/03/25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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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래 전인 블로그 개설 초창기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 1.0부터 9x/ME까지
가난하지만 파이가 가장 큰 16비트 도스 진영을 특별히 공략한 전용 제품이다. 그러니 x86 전용. 가난한 컴에서 리소스를 최대한 짜내야 했던 관계로 코드는 쑤제 어셈블리어가 가득했으며, 어차피 이식성도 없었다.

※ NT 3~4
9x 같은 현실 절충이 아니라, 이상과 이식성을 추구한 컨셉을 살려 x86뿐만 아니라 Alpha, MIPS를 지원했다. 특히 NT 4의 경우 PowerPC까지 지원하여 지원하는 아키텍처가 가장 많았다. 실행 파일 포맷의 이름을 괜히 Portable Executable이라고 지은 게 아니었다.
Alpha의 경우 64비트 아키텍처이긴 했지만, Windows 자체는 여전히 32비트로만 동작했다. 물론 그때는 메모리 용량상으로 64비트는 어차피 전혀 의미가 없었으며, 단지 같은 클럭으로 32비트보다 대용량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한다는 점에서만 의의를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OS/2는 Windows NT에 준하는 귀족 된장(?) OS임에도 불구하고 이식성이 없이 x86 전용이었다. 이식성 있는 코드 위주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000
NT 계열이지만, 이제 한물 가고 망했다고 간주되는 아키텍처들에 대한 지원을 대거 끊어서 사실상 x86 전용이 됐다. 인텔에서 발표 예정인 IA64 Itanium 아키텍처와 연계하여 최초의 레알 64비트 OS로 거듭나려 했지만 CPU의 출시가 늦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 XP
이제야 x86 (32비트)과 Itanium (64비트) 에디션이 동시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Itanium는 알고 보니 정말 대차게 망한 관계로, 얘를 정식으로 지원하는 Windows는 XP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 -_-;;
그 대신 x86과 잘 호환되는 x64 내지 x86-64라는 새로운 아키텍처가 64비트 PC의 대세가 되었다. PC도 이제 메모리가 슬슬 4GB 방벽에 걸릴 타이밍이 되기도 했고.

그래서 2005년, 이미 SP2까지 출시되고 나서야 Windows XP는 x64용 에디션이 나왔다. 허나 정말 존재감 없이 지나가 버렸으며, XP는 대외적으로 여전히 싱글 코어 + 32비트 OS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더 강하다.

※ Vista와 7
Itanium은 칼같이 짤렸고 그 대신 x86 (32비트)과 x64 (64비트) 패턴이 나란히 정착했다. 7부터는 서버 에디션은 이제 32비트가 없이 64비트 에디션만 나오고 있다.

※ 8과 그 이후
저기에다가 모바일용 CPU인 ARM 에디션이 새롭게 추가됐다만, 이 에디션은 키보드 달린 일반 컴퓨터에서 볼 일은 딱히 없을 것 같다. 이 구도가 당분간 계속 이어질 듯.

이렇듯, Windows는 운영체제의 버전이 바뀌면서 지원 플랫폼도 은근히 자주 바뀌어 왔다. 이 외에도 운영체제 별 문자 입력 시스템의 변천사라든가 다국어 글꼴 시스템의 변천사를 다뤄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다국어 하니까 짚고 넘어갈 사항으로는..
Windows NT는 3.51부터 한글화되어 나왔다. 그러나 한글판이 나온 건 1996년, 이미 95도 나오고 NT 4.0이 나오기 몇 달 전이었던지라 3.51의 한글판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니 NT 3.51이 윈도 3.x의 셸 기반이었다고 해서 NT 3.51의 한글판이 한글 윈도 3.x의 투박한 비트맵 바탕체를 썼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Windows 자체가 한글판이 나온 건 무려 2.1때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우리나라 IT 인프라에서 뭘 그리 바랄 게 있겠는가..? 이 역시 3.0이 나오기 얼마 전일 정도로 시기가 매우 늦기도 해서 존재감은 거의 부각되지 않고 싹 묻혔다. 저 광고 말고는 스크린샷이고 기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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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3/23 08:24 2016/03/2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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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호선의 역사

* 꽤 오래 전인 블로그 개설 초창기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1. 개통식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인 8월 15일에 맞춰서 정부 수립을 했다. 그런데 이 8월 15일은 우리나라의 철도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날이다. 1974년 8월 15일은 서울 지하철 1호선 "겸" 수도권 광역전철이 같이 개통한 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최고급 열차이던 관광호가 새마을호로 이름을 바꿔 첫 운행을 시작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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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진을 보자. 이 둘은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겉으로는 흑백 사진이지만, 철덕이라면 전동차의 색깔이 저절로 컬러로 복원돼서 뇌에 비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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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동선과 스케줄을 보면, '서울 지하철 1호선'(종로선)의 개통식이 먼저 청량리 역 승강장에서 열렸다. 마침 친절하게도 당시 시각까지 사진에 담겨 있다. 아침 11시 15분경.
지하철 개통식 때는 서울 지하철 공사(현 서울 메트로) 소속의 흰 배경에 창틀 부분만 빨강 도색인 전동차가 사진에 담겼다.

이 사람들은 저 열차를 마치 자가용처럼 시승하고 다녔다. 그 당시 종합 사령실이 종로5가 역에 있었던 관계로 그 역에서 내려서 사령실도 잠시 들른 뒤, 서울 역도 지나 남쪽으로 쭈욱 내려갔다.

그렇게 지하철 개통식 팀이 도착한 뒤에야 수원, 인천, 성북 방면의 지상 '수도권 전철'의 개통식이 바로 구로 역 승강장에서 아침 11시 50분쯤에 열렸다. 이번에는 철도청 소속의 파란 배경에 창틀 부분만 흰 도색 전동차가 얼굴마담 역할을 했다. 물론 '초저항'이라고 불리는 저 식빵 모양의 일제 전동차 자체는 철도청 것이든 서지공 것이든 완전히 동일하다.

서울에서 수원이나 인천을 가려면 예전에는 털털거리는 디젤 동차를 타야 했는데 그게 모두 깔끔한 전철로 바뀌었고, 그 전철이 서울 종로에 있는 지하철 구간과 직통 운행까지 한다는 것이 이 지하철· 전철 개통의 의의였다.

가끔 코레일이나 서울 메트로 전동차를 타고서 안에서 철도의 역사 관련 동영상이 나오는 걸 살펴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자기 회사에 해당하는 얘기만 한다. 서울 메트로에서는 지하철 개통 얘기만 하고, 코레일에서는 수도권 광역전철 개통 얘기만 한다. 우리는 두 사건이 모두 순차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면 되겠다.

지하철· 전철 직통 시스템의 개통식은 원래는 대통령도 참석하고 아주 웅장· 성대하게 치러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알다시피... 아침 10시부터 장충동 국립 극장에서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광복절 기념식이 있었는데 거기서 영부인인 육 영수 여사가 괴한에게 총격을 당했기 때문이다(10시 23분).

지하철 개통식 사진에 찍힌 11시 15분은 그 대형 사고가 터진 지 50분 남짓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러니 저 사진에 나온 사람들은 마냥 기쁜 표정만 지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은 그 당시 양 택식 서울 시장이 아주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과업이었으며, 원래대로라면 개통식은 그의 인생 최고의 날이 돼야만 했다. 하지만 하필 그 날 대통령의 영부인이 세상을 떠나는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그는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시장 자리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그의 후임인 구 자춘 시장은 양 택식의 지하철 건설 계획을 거의 다 갈아엎었다. 하지만 저 사람도 선임 뺨치는 불도저였으며, 다음 노선인 2호선이 거대한 순환선으로 만들어진 건 그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2. 발전 내력

서울 지하철 1호선 겸 수도권 전철은 처음에는 한 편성당 6량으로 개통했지만 이미 1980년 12월에 8량으로 증설되었고, 1984년에는 10량으로 증설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 당시 열차를 타고 있는 동안은 "객실에서는 금연입니다. 출입문은 30초 동안 열려 있습니다(일반열차보다 훨씬 더 빨리 닫히고 금방 출발하므로). 지하철 전동차 안에는 화장실이 없습니다."라고, 난생 처음으로 일반열차가 아닌 지하철을 타는 사람을 대상으로 초보적인 안내 방송도 일일이 육성으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경부 고속도로가 처음 개통했을 때 "이 도로에는 사람이나 손수레, 자전거 따위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참 홍보를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1974년 첫 개통 당시의 운행 계통과 운행 시격은 다음과 같았다.

  • 청량리-성북(지금의 광운대 역): 40분
  • 서울역-청량리: 10분 (R/H 땐 5분)
  • 서울-구로: 10분
  • 구로-인천: 20분
  • 구로-수원: 40분

즉 남쪽으로는 10분 간격으로 구로, 인천, 수원, 인천 행이 번갈아가며 왔다고 생각하면 되고 북쪽으로는 4대 중 1대 꼴로 성북 행이고 나머지는 청량리까지만 간 셈이다.
인천까지 가는 전철이 급행도 없고 배차간격이 지금의 중앙선과 비슷한 수준이요, 수원 가는 전철은 지금의 소요산 행 열차보다 배차간격이 더 길었다는 얘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경부, 경인선 모두 그냥 복선이었고 특히 경부선 전동차는 지금 급행 전동차가 그런 것처럼 일반열차의 틈새를 이용해서 운행되었으니, 열차를 많이 투입할 수 없었음이 자명하다.
1981년 12월 23일에는 경부선 수원-영등포 구간이 2복선으로 확장되면서 경부선 전동차를 더욱 증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일반열차 눈치 볼 필요 없이 전동차만의 선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때 상대식 승강장을 하고 있던 역은 자연스레 쌍섬식 승강장이 됐다.

2복선화 공사는 그때 이미 구로 이남은 방향별 복복선으로, 서울 시내 구간은 공사가 쉽지 않아 선로별 복복선으로 정착한 것 같다. 방향별 복복선은 기존 복선 선로의 양 끝에 선로를 하나씩 추가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예전부터 있던 내선은 일반열차가 계속 쓰고 신설된 외선으로 전동차가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수원 이남으로도 계속 달리는 일반열차와는 달리, 수원에서 북쪽으로 회차해야 하는 전동차는 선로를 바꾸는 회차 과정에서 일반열차 내선을 침범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회차할 때만은 여전히 일반열차 눈치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2복선의 선로 용량에 걸맞게 전동차를 증차하기가 어려웠다.
이 고질적인 문제는 먼 훗날인 2003년, 병점 역이 개통하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차량기지와 함께 회차 전용 입체 교차로가 신설된 것이다. 병점뿐만 아니라 천안에도 전동차 회차 및 장항선 분기가 모두 입체 교차로로 잘 구비돼 있다.

90년대에 들어서서는 경인선도 2복선화가 추진됐다. 거기는 일반열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 타당성 조사는 진작에 다 통과했기 때문에 일이 성사됐다. 그리고 경부선과 경인선이 합류하는 구로-영등포 간은 아예 3복선화도 진행되었다. 1991년 11월 23일은 경인선 2복선화 기공식과 경부선 해당 구간 3복선화의 개통식이 거행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경인선 2복선화는 부평-주안-동인천의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구일 같은 역은 이를 계기로 형태가 크게 바뀌기도 했다.

사실 그 해 5월 25일에는 공사 때문에 1박 2일 남짓한 시간 동안 전동차가 잠시 단축 운행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 경부 고속철 2차 공사 구간에서 경부 고속도로 위를 타넘는 언양 고가 공사와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되겠다. 첨단 공법을 동원한 덕분에 공사의 대부분은 차량 통행을 막지 않고 그대로 진행할 수 있지만 아치의 기초를 놓는 한나절 남짓한 시간은 고속도로를 잠시 막아야 했다고 한다.

경인선과 더불어 경부선 수도권 전철도 수원이 아닌 무려 천안까지 남하하는 공사가 1996년부터 추진되었다. 그 시절에 경부선 일반열차를 타면서 아직 완공되지 않은 전철역 승강장이 휙휙 지나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경부선은 이제 천안 이북은 2복선 전철이 되었지만 일반열차 때문에 경인선처럼 충분하게 급행 전동차를 운행하지는 못한다.

서울 서남쪽이 그렇게 변화를 겪고 있는 동안, 북쪽 종점인 성북 일대에서는 1호선 전동차의 병목을 야기하고 선로 용량을 깎아먹던 '평면교차' 문제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진행됐다.
1978년 12월에는 경원선 용산-성북 구간에도 전동차가 투입되어 종전의 디젤 동차를 대체하고 1호선의 지선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이놈은 선로 합류와 회차 과정에서 유감스럽게도 1호선 전동차와의 평면교차를 야기하고 있었다.

얘는 2005년에 광역전철 중앙선으로 분리해 나감으로써 문제가 해결됐다. 용산-성북이 아니라 용산-덕소가 됐다. 마치 안산선 열차가 처음엔 1호선 경부선의 지선으로 운행되다가 훗날 4호선으로 완전히 독립해 나간 것과 같은 방식이다.
또한 경춘선 무궁화호가 야기하던 평면교차도 경춘선 복선 전철이 다른 선로로 이설되면서 사라졌다. 다만 이런 조치로 인해 반대로 말하면 성북(지금의 광운대) 역이 그 덩치에 비해서 경춘선도 못 타고 중앙선도 못 타고 오로지 1호선 전동차밖에 못 타는 역으로 역할이 줄기도 했다.

다만, 처음에는 이 수도권 전철의 북쪽 종점은 계속해서 올라가서 한동안 의정부북부에 머물러 있다가 이제는 동두천과 양주를 거쳐 소요산까지 올라갔고, 장기적으로는 무려 연천까지 갈 거라고 한다. 경원선 자체는 아예 민통선 안의 월정리와 철원까지 복원할 계획이 잡혀 있고.. 정말 40년 동안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룬 셈이다.

그나저나 먼 옛날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의 내부 인테리어가 온통 빨강이었다는 것이 본인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로마자 표기법이 바뀐 게 반영되고 국철과 지하철 구분 없이 색깔을 남색으로 획일화한 모습만 직접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옛날 사진을 보면.. 오히려 "내가 착각을 하고 있나, 색맹이 됐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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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3/20 08:31 2016/03/2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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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에서 나오는 철도의 정체는?

<용감한 탈출> 책을 다시 보니, 스토리와 관련하여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추가 정보들을 다시 보충할 수 있었다. 그 정보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교통· 지리 분야의 설정이다. 철덕으로서 이런 쪽에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다.

책에서 주인공인 두일이네 가족은 황해도 '사리원' 시에서 살고 있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지리적 배경은 한반도의 동부가 아니라 서부 되겠다.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지만, 삼촌이 탈출하는 바람에 가족이 반동으로 몰리면서 더 서쪽 구월산 기슭의 산골 벽지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한다.
이 설정대로라면 두일이가 탈출하기 위해 집에서부터 이동한 거리는 서부의 고양· 파주 쪽으로 최단 직선 거리를 잡아도 150km가 넘는다. 그 중 상당수의 거리는 철도로 커버가 돼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철도는 무엇이었을까?
본인은 당연히 경의선(북한의 평부선)만이 떠올랐으며, 답부터 말하자면 정황상 그게 맞다. 하지만 당장 떠오른 이 답은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찍은 답일 뿐이다. 사리원에서 개성까지 가는 철도가 경의선만 있는 건 의외로 아니다. 그래서 모처럼 이와 관련된 리서치를 좀 하게 되었다.

국토가 분단되기 전, 해방 당시에 경의선은 문산 역을 지나면 장단, 봉동을 거쳐 개성 역이 나왔다. 장단은 알다시피 시설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DMZ 내부에 터만 존재하며, 반대로 도라산과 판문은 각각 남과 북에서 나중에 만든 역이다.
개성 역을 지나면 선로는 흔히 생각하기 쉬운 북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향하는데, 개성에서 수 km 정도 떨어진 곳에 나오는 그 다음역은 개풍 역(옛 명칭은 토성)이다. 개풍을 지나서야 선로는 마치 남한의 서울-신촌을 연상케 하는 90도 드리프트를 하여 북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개풍에서 드리프트를 하지 않고 서쪽으로 계속 직진하여 연백 평야를 지나고 황해도 '해주'까지 가는 철도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토해선'이다. 토해선 자체는 연백 평야에서 나는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있었지만 그때는 협궤였다. 표준궤인 경의선과는 한 역에서 환승은 가능해도 동일 열차가 직통 운행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훗날 북한에서는 토해선의 선로를 표준궤로 개량했다. 단, 토해선에는 우리로 치면 임진강처럼, 한강 하류로 합류하는 예성강이라는 강을 횡단하는 구간이 있었는데 여기 있던 철교는 6· 25때 파괴된 이래로 복구되지 않았다. 현재는 철도가 아닌 인도· 차도교 형태로만 복구되어 있다.

과거에 일제는 경의선 자체를 해주를 경유해서 만들 생각을 했었다. 경부선을 상주와 충주를 경유해서 만들 생각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직 일제 강점기가 되기도 전인 20세기 초에 강 하류에다 거대한 철교를 그것도 표준궤 규모로 또 만드는 것은 재정상 "지금은 곤란하다" 상태였기 때문에.. 해주를 지나는 철도는 그로부터 수십 년 뒤에 그것도 지선 협궤 형태로 실현됐다.

그 철도가 경유하던 예성강 철교가 파괴되고서 복구되지 않은 것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좀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 다리를 통해 국군· UN군이 강을 쓰윽 건너서 북한군을 대거 엿먹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북한에서 토해선은 강을 건너기 전의 배천 역에서 끊어져 있고, 노선의 이름도 배천선으로 바뀌었다. 개성의 근처까지는 가지만 거기서 더 진행은 못 한다.

해주의 '해주청년' 역에 도착하고 나면, 서쪽 끝까지 더 진행하여 옹진 쪽으로 갈 수도 있고(해옹선, 지금의 옹진선), 북쪽으로 진행하여 사리원까지 갈 수 있다(황해선, 지금의 황해청년선). 북쪽으로 가는 요놈이 바로 경의선보다 더 서쪽에서 황해도를 종축으로 지나는 간선 철도이다. 구월산 기슭에서 탈출을 시작한 두일이의 입장에서는 경의선보다 황해청년선이 위치상으로 더 접근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스토리 설정에서 두일이의 탈북에 도움을 준 철도는 경의선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이는 어떤 형태로든 경의선 구간에 도착해야만 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스토리 상으로 걔는 육로로 탈북을 했기 때문이다. 황해청년+배천(토해)선만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예성강 하나 건너지를 못하고 내륙에서 엄청난 거리를 동쪽으로 뺑이를 쳐야 한다. 동쪽 이동 없이 그대로 남하해 버리면 서해나 한강에 다다르지, 육로와 철책이 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열차에서 내린 뒤 두일이가 휴전선 쪽으로 접근할 만한 경로는 기정동이 있는 개성 시내 외곽의 평지 구간, 아니면 판문점이 있는 곳보다 더 동쪽으로 진행하여 장풍군 일대의 산지이다. <용감한 탈출> 스토리는 시작은 황해도 서쪽인데 전방 도착은 동부 전선스러운 것이 자칫 잘못하면 고증상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도저히 절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개연성이 성립하려면 저기서 철도는 아무래도 경의선이 돼야 하는 건 틀림없을 듯하다.

지도를 찾아 보면서 느낀 건데, 한반도에서 서울에서 인천 정도의 경도가 서쪽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굉장한 오산이다. 인천은 한반도의 서부 중에서도 안쪽으로 제일 옴푹 들어간 지형에 있다. 그 반면, 북한 쪽으로 가면 서쪽 끝은 서울 경도에서는 수십~100수십 km 이상으로 벌어진다. 그러니 경의선의 철도역에서 황해안까지 들어가려면 직선 거리로도 굉장히 긴 거리를 가야 하며, 그 내륙에 황해청년선 같은 추가적인 철도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에는 새로 만들거나 개량한 철도에 '청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노선이나 역이 많다. 서부 말고 동부에는 '금강산청년선'도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말 그대로 20대 청년 공병들을 갈아 넣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 휴전선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형성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휴전선 내지 군사 분계선은 서쪽으로 갈수록 남하해서 심지어 한강의 최하류와도 맞닿아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서부 전선에는 동부 전선에는 없는 "강안경계"라는 게 존재한다. 우리나라가 6· 25 전쟁을 계기로 서울이 북한과 더 가까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이 38선 시절보다 절대적인 땅 자체는 더 많이 수복했지만 휴전선이 수평선이 아닌 / 모양으로 형성됐으며, 특히 고려의 역사가 담긴 개성시를 수복하지 못하고 빼앗긴 이유는 무엇일까? 까놓고 말해 선죽교가 있는 곳이 한때는 남한 땅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게 된 거다.

<용감한 탈출>의 지리적 배경과도 전혀 무관한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저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단 6· 25 전쟁 당시에 휴전 회담이 진행 중이던 판문점이 오리지널 38선과 거의 동일한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판문점 일대는 중립 구역으로서 전투에서 완전히 열외되어 평화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반대로 국군이 서부 전선에서 더 북진을 할 수 없게 발목을 잡기도 했다.

둘째, 지형적으로는 이 송악산 때문이었다. (한자까지 일치하는 동명의 산이 제주도 남부에도 있으니 혼동하지 말 것. 단, 제주도 송악산은 기생 화산으로, 그냥 언덕에 불과한 자그마한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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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시절에는 개성 시내는 남한 땅이었지만 문제는 고지대인 송악산이 여전히 북한 땅이었다는 것. 남한의 개성 시내가 다 내려다보였다. 군사적으로 남한이 방어하는 데 절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북진을 할 거면 저 산까지 몽땅 화끈하게 차지하거나, 아니면 다 내어 주거나 해야 했다.
국군에서 다뤄지는 '육탄 10용사'도.. 사건의 구체적인 전말에 대해서는 미화다 날조다 잡음이 있다만 어쨌든 이건 6·25 전쟁 전, 1949년 5월에 바로 송악산 기슭의 그 불리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벙커링을 뚫고 고지를 지키려는 목적으로 벌어진 전투였다.

더 서쪽으로 옹진 반도 일대도 상황이 열악하긴 마찬가지인지라, 뒤로 물러서면 보다시피 그냥 바다이다. 내륙으로 가려면 38선 이북 지역을 거쳐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그냥 배수진이요 고립된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38선은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쭉 그어졌다 보니, 서쪽 구간은 전반적으로 남한이 점령하고 있는 게 도저히 무리였다.
단지 북한이 해군이 궤멸 상태였기 때문에 연평도 백령도 같은 섬은 북한과 매우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다시 남한이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휴전이 맺어질 즈음, 북한은 영토를 다시 38선 시절로 원복할 것을 제안했으나 남한과 UN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성은 참 아까우며 옹진 반도와 연백 평야를 잃은 것도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 개고생을 하면서 남한이 동부 전선에서 땅을 더 많이 수복했으며, 38선 시절의 경계는 차라리 개성 시내를 포기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남한에게 군사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거기를 포기한 대신 남한이 수복한 땅 중에는 당시로서는 금싸라기 곡창 지대인 철원도 포함돼 있었다.

경원선 소요산 역의 북쪽 다음 역인 초성리 역과, 그 다음 역인 한탄강 역 사이가 옛 38선 경계이다.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양양 국제 공항이 38선보다 아주 살짝 더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 북쪽의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속초, 고성은 약 5년 남짓 동안 북한 땅이었다가 6· 25 때 우리나라가 수복한 것이다. 그러니 철원에 있는 노동당사 같은 건물은 역사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나라가 서쪽으로는 송악산, 동쪽으로는 금강산만 추가로 차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사실, 설악산도 그때 수복한 산이고, 동쪽 끝자락에서는 이례적으로 크게 북진한 덕분에 고성군에 있던 김 일성 별장까지 탈환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별장에 이어서 김 일성이 몰던 개인 리무진 승용차도 그때 전쟁 중에 아주 극적인 계기로 우리 국군이 노획하게 됐다. 여기에 대해서도 나중에 또 자세히 다룰 일이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14 19:38 2016/03/1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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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엔 강원도 동부 전선에서 일명 '노크 귀순' 사건이 벌어졌다.
굶주리던 북한 주민이 목숨 걸고 생지옥을 떠나 자유의 땅에 찾아온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와는 별개로, 남방 한계선의 경계 상태가 지금까지 개판이었다는 게 탄로나는 바람에, 군대의 높으신 분들 여러 명이 무더기로 징계를 받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과장 좀 보태서 서정적으로 묘사하면, 하늘에서는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고 땅에서는 영창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탈출한 그 병사가 당연히 최전방 철책 근무를 하던 중에 근무지를 이탈해서 남쪽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근무하던 중에 상관을 상대로 프래깅을 저지른 뒤 탈북한 병사도 실제로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 노크 귀순의 경우는 검색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강원도 소재이긴 하지만 최전방은 아닌 데서 군생활을 하다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탈영했다. 몇십 km를 며칠에 걸쳐 혼자 걸어서 남쪽 전방까지 이동하고, 그 동안 잠은 산 속에서 자는 역경을 거친 뒤에야 탈출에 성공한 것이었다.

게다가 작년 6월에는 무려 함흥에서도 한 북한군 병사가 전방까지 수백 km를 걸어서 탈북했다.
이 시점에서 본인은 먼 옛날, 초딩 시절에 읽었던 반공 동화 <용감한 탈출>이 생각났다. 25년도 더 전에 본 책이다. <한국 서적 공사>라는 출판사를 통해 1987년과 1990년에 두 차례에 걸쳐 발간되었다. 사실 내가 태어나서 '탈출'이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으로 접한 곳도 저기였지 싶다.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은 역시 10살 안팎의 북한 어린이인데 부모가 하루아침에 반동으로 몰린다. 아버지는 어디론가 끌려가서 생사도 모르고 어머니는 벌목장에서 중노동을 하다가 사고로 죽는다. 어머니는 “너는 이 생지옥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라” 이런 유언을 남기고, 애는 탈출을 결심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진짜로 저 노크 귀순자처럼 산 속에서 숨어 지내면서 남쪽으로 내려간다. 마침 집에 흰 개가 한 마리 있어서 아이와 동행한다.
(1) 차를 탄 군인들이 아이가 숨은 곳 근처에서 갑자기 내리는데, 다행히 노상방뇨만 하고 가 버린다. (2) 개가 어디 물자 보급고를 냄새를 맡고 찾아내서 건빵 포대를 물고 온다. 뭐 요런 깨알같은 장면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는 어떤 군인에게 걸린다. 전화를 걸어서 요런 정체불명의 어린이를 잡았다는 걸 본부에 보고를 하려는데, 개가 필사적으로 그 군인을 공격하고 기절시켜서 당장 위기는 넘긴다. 하지만 이제 탈북 시도가 들통났기 때문에 큰일 났다.

결말로 가면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개는 총에 맞아 죽는다. 깨갱 소리와 함께 피 내지 '붉게' 이런 묘사가 분명히 있었다. 남한 쪽에서는 아이를 향해 군인들이 "안심하라. 우리는 대한민국 국군이다! 개는 버리고 어서 xxxxxx해서 여기로 뛰어 와라!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라!" 이렇게 외친다. Aㅏ...

초딩 1~2학년용이라고는 하지만 북한· 반공을 소재로 다소 무겁고 슬픈 내용이었다. 그 먼 옛날 초딩 시절에 잠재의식 속에 각인된 반공 spirit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 성인의 관점에서 봐도 그 spirit은 충분히 유효하고 건전하지, 뭔가 방향이 수정되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는 이 영두라는 분인데, 검색을 해 보니 퇴직한 교사이다. 2014~2015년 현재까지도 아동문학계에서 여러 동화나 희극을 지어 발표하면서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이메일 주소도 있다. 10여 년 전에 작고한 이 오덕 선생과 비슷한 인상이다. 그렇다고 고향이 이북인 실향민이지는 않음.

너무 옛날 책인 관계로 오늘날 상업용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다. 그래서 본인은 국내에서 출판된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 중앙 도서관에 들러서 몇십 년 만에 현물을 다시 구경할 수 있었다. 단, 득템 장소는 본관이 아니라 강남 역 근처 국기원의 옆에 있는 별관인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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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도서 읽기 운동..;; 우리나라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트렌드가 저랬다는 게 믿어지시는가?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쥐를 박멸하자! / 머릿니를 퇴치하자" 이런 구호· 포스터가 나돌곤 했다. 그런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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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여러분! 우리나라는 88 서울 올림픽을 열 수 있을 만큼 국력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북쪽에는 자유와 행복을 몽땅 빼앗고, 얼어붙은 땅을 만들어 버린 음흉스러운 공산당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잘 사는 우리 대한민국을 몹시 배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쳐들어올 흉계만을 꾸미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손발리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한 반공 구호가 웃프게 느껴지겠지만 저 때는 마냥 웃을 일이 아니었다.
배 아파한 거 맞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19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됐을 때, 북한은 같은 민족으로서 축하를 해 주거나 같이 참가하기는커녕 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대한 항공 여객기를 폭파하고(1987, KAL 858) 김포 공항에서도 외국인까지 사주해서 폭탄 테러(1986)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건 수뇌부와 무관하게 말단의 또라이가 저지른 주한 미군의 범죄나 사고 같은 것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저런 인간말종들이 어떻게, 무슨 얼어죽을 민족, 통일 운운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쟤들은 어떤 이념이나 가치도 적화통일 내지 사탄적인 김씨 부자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은 집단이다.

특히 요즘은 북한도 과거 김 일성 시절 초기에, 고난의 행군이 있기 전, 8월 종파 사건이 터지고 주체 사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는 그럭저럭 살 만했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유행인 듯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분단 직후와 6·25 전의 극초창기 때부터 이미 소련군과 김 일성 정권의 만행에 학을 떼고 공산주의의 실체를 깨닫고서 탈출을 생각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음을 알아야 한다. 남한의 반공 독재자들이 그렇게도 싫다면, 월남을 거부하고 북에서 최후를 맞이한 조 만식 선생의 비장한 유언이 어떠했는지라도 절대로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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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어머니가 통나무에 깔려서 다친 그림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쟤네 가족이 반동으로 몰린 이유는.. 다름아닌 삼촌이 탈북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좌제에 걸렸다.
삼촌은 예전부터 저 조카에게도 "우리나라(북한)의 선전선동에 속지 마라. 여기야말로 진짜 헬조선이다. 너도 남조선으로 탈출해야 한다"라고 자기 목숨을 걸고 얘기해 주곤 했다.

"남조선은 지옥이 아니란다." 그런데 책이 출간된 지 거의 30년이 돼 가는 오늘날은 남조선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선동질 조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대기업의 횡포(?)가 심하고 입시· 취업 경쟁이 심하다 한들 남조선이 북조선만도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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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잊고 있었다. 쟤들은 열차를 이용한 히치하이킹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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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은 드디어 전방에 도착하고 북한의 민통선 지대에까지 진입했다. 나중에 어느 병사에게 들켰을 때에도 병사가 "여긴 민간인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고, 일부러 침입하지 않고서야 길을 잃어서 들어오는 게 절대 불가능한 곳이다. 넌 누구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군사 분계선 인근은 민통선까지 넘어서 말 그대로 '비무장 지대'인데, 거기서 저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거기서 개가 피탄되어 죽을 정도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북한의 초딩 꼬마가 혼자서 남한으로 넘어온다는 건 정말 굉장한 허구 각색이긴 하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나중에 지리적인 설정을 더 고찰해 보겠지만, 저 스토리에서 총격전이 벌어질 만한 곳은 판문점과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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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에서는 DMZ에서 적군과 총격 교전이 벌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TV와 신문에서 대서특필을 할 일이다. 그 와중에 "용감한 탈출"의 주인공인 북한 어린이는 온갖 매스컴 인터뷰를 타면서 떠받들어질 것이다. 더구나 TV에 나와서 저 책에서처럼 "우리 부모님과 사랑하는 재롱이(개)를 죽인 공산당은 나빠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외치기까지 하면..;;

저 애는 안 그래도 1980년대 5공 시절, 북풍에 없는 간첩도 만들어 내던 시절에 그야말로 제2의 이 승복으로 거의 국가적인 영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_=;;;; 군대에서 각종 정훈 교육의 소재로도 쓰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 정도로 유명세를 타 버렸으니, 먼저 탈북한 삼촌과의 만남도 큰 어려움 없이 성사되었을 것이다. 삼촌은 어떻게 탈북했을지가 궁금해지지만, 그래도 어린이가 아닌 성인이다 보니 그렇게까지 주목받을 일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자, 그림을 곁들이느라 분량이 길어졌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다. 다음 시간에는 북한 정권 욕 같은 정치 얘기는 없이 북한 지리 얘기를 하면서 <용감한 탈출> 동화의 설정 고증을 해 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12 08:32 2016/03/1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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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신분당선이 용인까지 연장됐고 수인선이 인천까지 연장된 이 와중에 철도 분석 카테고리에 몇 년째 새 글이 없었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번에 게재하는 자료는 수 년 전에 한 번씩 다 다룬 적이 있는 주제이지만, 그래도 최신 정보도 같이 업데이트 했다.

1. 이색 지하철역 열전 몇 가지

승강장은 지상이고, 입구와 통로가 지하인 역은?
구일(경인선 분기 직후의 교량 위에 세워진 역. 경인선 2복선화와 관련된 아주 독특한 내력이 있음), 대방(일반열차 선로가 평지이고, 전철 승강장은 고가이긴 하다만), 반월, (신도림도 해당하지만 지하 환승역)

출구가 하나뿐인 역은?
학여울, 독바위, 반월, 마곡(과거 마천 역이 그랬던 것처럼 출구를 추가로 만들려는 계획은 있는 듯함)

옛날 역명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역은?
중앙(바깥에), 신설동(환승 통로 어딘가에 일부러 남아 있음), 야탑(승강장에. 옛날 역번호와 로마자 표기를 볼 수 있음)

2. 역명에 등재된 대학교들

한때, 수도권 광역전철 1호선 회기 역의 부역명은 '경희대앞'이었다. 인근에 경희대 서울 캠퍼스가 있기 때문. 그러나 2009년부터 학교에서 부역명 표기 재계약을 하지 않고 계약금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이 부역명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 대신 2012년 말에 개통한 분당선 영통 역이 경희대 국제 캠퍼스와 가까운 관계로 부역명 '경희대학교'를 차지해 있다. 같은 학교가 두 전철역에다 동일 부역명을 번갈아 가면서 쓴 게 흥미롭다.

전철역명의 본좌급인 학교는 역시 부역명도 아니고 주역명으로 '한양대'(2호선)와 '한대앞'(4호선)을 모두 당당히 차지해 있는 한양 대학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서울 캠퍼스와는 달리, 안산의 에리카 캠퍼스는 전철역에서 그리 가까이 있지 않다.

한양대, 고려대, 숭실대는 지하철 출구가 정문이 바로 이어져 있을 정도로 가까운 학교이다. 서울 근교엔 가천대가 그러하며, 인천에서는 최근에 수인선의 연장 개통 덕분에 인하대도 이 반열에 합류했다.
2호선 신촌은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가 적당한 멀리 떨어진 채 비슷하게 인접해 있는 관계로 어느 학교의 부역명도 끼어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신촌 일대는 교통이 헬인 관계로, 셔틀버스는 경복궁 역을 경유한다.

광운대는 "시종착역"인 성북 역이 자기 학교 이름으로 개명된 덕분에 학교 홍보 효과 하나는 정말 대박으로 누리고 있다.
중앙대는 원래 7호선 상도 역에 교명을 딴 부역명이 붙어 있었지만, 더 가까운 9호선이 개통한 뒤부터는 흑석 역으로 부역명이 이동했다.

그 반면, 총신대는 '총신대입구-이수' 병크 때문에 이 바닥 사정을 아는 철덕들로부터 두고두고 까이고 있는 중.
그리고 서울대입구 역에서 서울대까지 걸어서 가는 사람은 바보 중의 상바보이고. 서울대라는 이름 인지도가 아니었다면, 위치와 거리만으로는 절대로 저런 이름이 붙을 수가 없었다. 그냥 관악구청 역이 됐지 않겠는가.

3. 전철들의 급행 운행

우리나라의 지하철/전철에서 급행의 원조는 평일에 하루 세 번씩 다니던 서울-수원 급행이었다. 1981년에 서울-수원 2복선이 개통하면서 같이 운행을 시작했다.

그 뒤 좀 더 자주 다니는 급행은 경인선에 등장했다. 이 역시 선로의 2복선화와 함께 운행을 시작했다.
경부선에는 2005년 1월, 병점을 넘어 천안까지 2복선화가 완료되면서 경인선과 비슷한 계열의 용산-천안 급행이 추가로 등장했다. 기존 서울-수원 급행도 천안으로 구간이 연장됨. 기존 급행과는 달리 용산 착발 급행은 서울 시내 구간을 일반열차 선로가 아니라 급행 전동차 선로로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별도의 선로에서 상시 운행되는 급행은 경부선과 경인선에만 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2010년대부터는 편도로만(아침엔 상행만, 저녁엔 하행만) 기존선의 일부 구간에서 찔끔찔끔 다니는 급행이 안산선, 경원선, 중앙선, 경의선, 분당선에서 등장했다.

일산선과 과천선은 너무 짧고 딱히 건너뛸 만한 구간이 없어서 그런지 급행 운행이 없다.
경인선에는 한때 급행보다 더 정차역 수가 적은 특급까지 잠시 운행되기도 했지만 없어졌다.
경춘선은 역시 한때는 급행이 존재했으나, 지금은 급행 역할을 ITX-청춘이 대체한 지 오래이다.

서울 지하철 9호선은 광역이 아닌 도시철도에서 대피선을 이용한 급행이 처음부터 계획되고 운행되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한때는 개통해 봤자 공기수송일까봐, 지하철의 메리트를 만들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낸 아이디어였으나, 9호선은 예상을 뛰어넘는 대박을 쳐서 극심한 혼잡과 차량 부족을 호소하는 중이다.
서울 지하철 7호선도 이제 부천과 인천까지 가는 굉장한 장거리 노선이 됐는데 연장 구간만이라도 급행이 다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신분당선은 일단은 컨셉 자체가 '모든 열차 급행'이다. 하지만 정자 이남부터는 도시철도화할 가능성이 있으며, 중간에 자꾸 역이 생기면 완급 구분이 추가될지도 모른다.

공항 철도의 직통열차는 여느 급행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중간의 모든 역을 씹어먹고 진짜 서울 역과 인천 공항만을 찍는다. 이제는 KTX까지 공항까지 가게 됐지만, 그래도 공항 직통열차는 경춘선 급행과는 달리 고유한 자기 역할이 있다 보니 여전히 운행되고 있다.
전철들의 급행 운행에 대해서 이렇게 분석해 보니 재미있다.

4. 철도 터널

요즘 우리나라 철도의 대세는 왕창 깊고 왕창 긴 터널이다. 정말 시원시원하게 팡팡 뚫어 댄다. 철덕들은 반드시 암기하고 숙지할지어다.

(1) 금정 터널: 2010년, 경부 고속철 2차 개통과 함께 우리 곁을 찾아왔다. 부산 북부 노포동에서 부산진 역까지.. 거의 20km에 달하는 부산 시내 종축을 전부 지하로 관통해 버린다. 물론 부산은 어차피 동서를 가로막는 산이 있으니 고속선 역시 많은 구간을 산 아래로 지난다.
서울 쪽은 광명까지 20km를 약간 넘는 거리를 전부 지상의 기존선을 타면서 천천히 달리는 것과 대조적으로 부산은 참 복 받았다. 다만, 부산의 경우 고속선이 울산 쪽으로 우회하느라 근본적으로 거리 페널티가 굉장히 큰 것으로 인해 장점이 상쇄되기도 한다.

(2) 솔안 터널: 우리나라에 최후로 남아 있던 영동선 스위치백을 대체하여 새로 건설된 '루프식 터널'이다. 즉, 얘는 직선으로 빨리 이동하는 게 아니라 고저 차이를 극복하는 게 목적이다. 길이는 16.7km에 달한다. 2012년 6월 말에 개통함.
현재 우리나라에는 얘를 포함해 루프 터널이 총 4개가 있다. 중앙선에 두 군데, 그리고 함백선에 한 군데, 그리고 저것. 그 중 솔안 터널이 그리는 원은 다른 세 터널의 회전 반경보다 훨씬 더 크다.

(3) 율현 터널: 길이로 따지자면 위의 저 두 터널을 아득히 버로우 태우는 괴물이다. 서울 수서 역과 무려 평택에 있는 지제 역 사이의 50.3km를 지하로 연결했다! 작년 6월 말에 개통했다. '율현'이란 수서 역 남쪽으로 자곡· 세곡동의 사이에 있는 서울의 외곽 끝자락 그린벨트 지대이다. 그래도 행정구역상으로는 아직 인서울임.
이 선로는 수도권 고속선과 GTX(고심도 급행 광역전철)가 공유한다. 즉, KTX 산천이라는 장거리 고속열차와 누리로 급의 통근형 열차가 한 선로를 같이 쓴다는 뜻이다. 동일 선로 공유라니, 그 깊은 지하에서 속도 차이도 꽤 많이 나는 열차가 완급 결합을 하면 양쪽 다 선로 용량 제약도 많이 걸릴 텐데, 운영이 잘 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4) 대관령 터널: 평창과 강릉을 잇는 21.7km짜리 터널로, 평창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곧 개통할 원주-강릉선 구간에 속한다. 부산을 관통하는 금정 터널보다 약~간 더 길다. 작년 11월 말에 개통했다.
서울에서 강릉을 가기 위해 먼 옛날에는 무려 영주까지 내려가야 했으나 1970년대에는 분기점이 제천으로 바뀌었고(태백선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해방 후에 만들어졌음), 이제는 원주로 바뀔 예정이다.

2000년대 초엔 영동 고속도로가 산을 몽땅 타넘는 고가로 다시 만들어졌는데, 철도는 오르막을 오르는 게 힘들다 보니 그냥 닥치고 지하 터널로 아주 완만한 경사를 만들어 냈다.
예전에도 한번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1) 광명 역에서 분기하여 인천대교를 따라 곧장 인천 공항으로 가는 철도가 필요하고, (2) 신분당선은 서울 남산 아래를 지나서 광화문까지 직통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이 없는 게 아쉽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09 08:37 2016/03/0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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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Windows 9x 시절에는 내부의 16비트 코드가 gdi/user 계층에서 사용하는 64KB짜리 구닥다리 힙으로 인해 일명 '리소스' 제약이란 게 있었다. 그래서 램이 수백, 수천 MB으로 아무리 많더라도, 프로그램을 많이 띄워서 UI와 관련된 오브젝트들을 이것저것 생성하다 보면 리소스가 바닥 나고 운영체제가 패닉에 빠지곤 했다.

지금으로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제약이다. 9x에서는 메모장이 60KB를 조금만 넘는 파일도 열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숫자 세는 단위 자체가 16비트로 제한돼 있으니, 실제 메모리가 아무리 썩어 넘쳐도 셀 수 없는 영역은 몽땅 그림의 떡이었던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꼴랑 64KB짜리 중에서 메모리가 몇만 바이트 남았다고 출력하는 건 좀 민망했는지, 남은 리소스의 양은 퍼센트 비율로 출력되었으며, Windows 기본 프로그램들의 About 대화상자에서 값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퍼센티지를 얻어 오는 API는 무엇일까? Windows 3.x에서 도입된 GetFreeSystemResources라는 함수가 그 주인공이었다. 얘는 0~2 사이의 정수 인자도 받아서 시스템 전체, GDI, user 종류도 얻을 수 있었다.

Windows 3.1 SDK에서 windows.h를 열어 보면 저 함수는 #if WINVER >= 0x030a 안에 고이 감싸진 채 선언되어 있었다. 즉, 초창기부터 처음부터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Windows 1, 2 시절에는 샘플 프로그램들의 About 대화상자를 보면 그냥 남은 주메모리의 양(수백 KB)과 주 하드디스크의 남은 용량만 출력했지, 저런 비율을 따로 알려 주지는 않았었다. NT 계열이 아니라 도스 위에서 돌아가던 16비트 시절에도 말이다.

저 함수의 공식적인 수명은 Windows 3.x에서 그대로 끝났다. 32비트 Windows API에는 정식으로 이식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16비트 user.exe를 통해서만 제공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32비트 프로그램이 시스템 정보 같은 기능을 구현할 일이 있어서 남은 리소스 퍼센티지를 얻으려면... 원래는... 마치 32/64비트 훅 DLL을 따로 만들듯이 16비트 DLL을 만들어서 그 DLL이 16비트 API를 호출하여 값을 얻고.. 32비트 프로그램은 그 DLL과 flat 썽킹을 해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썽킹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한번 다룬 적이 있다.

이런 번거로운 일이 필요한 이유는 32비트 프로그램이 user.exe로 직통으로 API 호출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말이다.
옛날에 한컴사전이 노클릭 단어 인식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그래픽 API 훅킹을 했었는데, 훅킹용으로 32비트 DLL과 16비트 DLL이 모두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32비트 gdi32.dll뿐만 아니라 16비트 gdi.exe로 직통으로 들어가는 그래픽 API 호출까지 잡아 내서 거기 문자열을 얻기 위해서 만든 거지 싶다. 그러니 32비트 DLL엔 훅 프로시저가 들어있고 16비트 DLL엔 썽킹 루틴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없는 길을 부분적으로나마 만들어 낸 용자가 그 시절에 이미 있었다.
Windows 9x의 kernel32.dll이 제공하는 비공개, 봉인, 문서화되지 않은 API를 이용해서 32비트 프로그램이 user.exe를 직통으로 호출해서 리소스를 얻어 온 것이다. Windows 95 Programming Secret의 저자인 Matt Pietrek가 그 용자이다.

마소 내부에서만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비공개 API 중에는 16비트 바이너리를 로딩할 수 있는 일명 LoadLibrary16 / GetProcAddress16 / FreeLibrary16 세트가 있다. 얘는 kernel32.dll의 export table에 이름이 노출돼 있지도 않아서 ordinal 번호로만 접근이 가능한데.. 이 번호를 근성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일단 알아 냈다. 참고로 얘들은 Generic 썽킹용으로 쓰이는 LoadLibraryEx32W처럼 뒤에 32W가 붙은 함수하고는 다른 물건이므로 혼동하지 말 것.

그런데 알아 냈다고 전부가 아니다. Windows 9x의 GetProcAddress에는 특별한 보정 코드가 들어 있어서 kernel32만은 예외적으로 ordinal을 이용한 함수 주소 요청을 고의로 막았다! 고로 이름이 없이 ordinal만 존재하고 운영체제 내부에서만 사용되는 비공개 API를 제3자 프로그램이 멋대로 사용하는 걸 자연스럽게 차단했다.

이런 조치를 취한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같은 함수라도 운영체제의 버전이 바뀜에 따라 ordinal이 수시로 바뀔 수 있으니 일반적인 함수라면 어차피 번호가 아닌 이름만으로 import하는 게 맞다.
또한 프로그램들이 비공개 API를 무단으로 사용하다가 Windows의 버전이 바뀌면 그 프로그램들이 호환성이 깨져서 동작하지 않게 되는데, 이 경우 사용자는 프로그램의 제작사가 아니라 마소를 비난하는 편이었다. 신제품을 팔아 먹으려고 일부러 프로그램의 동작을 막았네 뭐네 하는 음모론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마소에서도 이런 힐난에 이골이 났는지 더 방어적인 조치를 취하게 됐다.

그래도 이런 비공개 API들을 끝끝내 끄집어내서 사용하려면
(1) 로드 타임 차원: kernel32.dll의 비공개 API ordinal을 직결로 연결하는 import library를 직접 만들거나,
(2) 런 타임 차원: PE 파일 포맷을 분석해서 GetProcAddress 함수를 손으로 직접 구현하면 된다. 메모리에 로드된 kernel32.dll 내부의 export table을 수동으로 뒤지면 된다는 뜻이다.

L(로드), F(해제), G(함수 탐색) 함수의 ordinal은 1부터 시작하는 번호 기준으로 35~37이라고 한다. Windows 95부터 ME까지 변함이 없다. 어차피 더 바뀌어야 할 이유가 없는 번호이기도 하고.

이렇게 얻어 낸 HMODULE (WINAPI* pfnLoadLibrary16)(PCSTR)을 호출해서 "user.exe"를 로드한다.
그리고 GetProcAddress에다가 "GetFreeSystemResources"를 하면 드디어 우리가 원하는 함수 포인터를 얻을 수 있는데, 얘는 바로 호출 가능하지가 않다. kernel32에 존재하는 또 다른 비공개 API인 QT_Thunk를 거쳐서 함수를 호출해야 하는데, 이 함수는 또 기계어 차원에서 호출 방식이 반드시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대략 다음과 같은 인라인 어셈블리를 넣어야 한다.

_asm {
    push 0~2  ; 시스템, GDI, user. 얻고 싶은 리소스 타입
    mov edx, [pfnGetFreeSystemResources] ; 32비트 주소
    call QT_Thunk ; kernel32에 대해 "QT_Thunk"를 GetProcAddress 한 결과
    mov [ret_val], ax ; 함수의 실행 결과를 받을 16비트 WORD 변수
}

이렇게 하면 32비트 프로그램이 일단 16비트 API를 호출해서 리소스 값을 얻어 올 수 있다. (참고로 Windows NT 계열은 QT_Thunk 함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실험해 본 바로는.. 저거 사용하는 게 굉장히 까다롭다.
저 어셈블리 코드에 도달할 때까지 각종 DLL를 로드하고 여러 단계에 걸쳐서 여러 함수들의 포인터를 얻는 등 절차가 복잡한데, 클래스를 만들어서 중간 단계의 결과들을 저장해 놓거나 절차를 여러 단계의 함수로 분리하면.. asm 부분이 갑자기 동작하지 않게 된다.

비공개 API가 내부에서 썽킹을 수행하는 동안 프로그램의 스택이라든가 내부 상태를 이상하게 건드리는 것 같다. 컴파일러의 최적화 옵션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서야 위의 저 간단한 어셈블리 코드가 딱히 뻑이 날 리가 없는데 말이다.

16비트 DLL을 따로 만들지 않고 편법을 동원해서 16비트 API를 호출하고 구체적으로는 리소스 퍼센티지를 얻는 방법을 알아 봤는데, 참 어렵긴 하다는 걸 느꼈다. 사실, 과거에 thunk 컴파일러가 하는 일 중 하나도 내부적으로 UT_Thunk를 호출하는 중간 계층 코드를 생성하는 것이었다. 더 들여다보니 말로만 듣던 ThunkConnect32 같은 함수도 쓰는 듯했다.

비공개라고 해서 무슨 ntdll 같은 하위 계층도 아니고 참 신기한 노릇이다. 어차피 Windows 9x는 kernel32가 최하위 계층이지 ntdll 같은 추가적인 하위 계층은 없으니 말이다.
Windows Programming Secret 책을 당시의 마소 Windows 95 팀의 엔지니어들이 직접 봤다면..
블리자드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직접 개발한 프로그래머들이 스탑 럴커처럼 자신조차 상상하지 못한 컨트롤과 테크닉을 구사하는 프로게이머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 싶다.

리소스를 되돌리는 함수 정도야 간단한 정수 하나만을 인자로 받고 역시 정수 하나를 되돌리는 아주 단순한 형태이다. 그러니 이런 테크닉을 구현하는 것에도 큰 무리가 없다. 구조체나 문자열의 포인터가 동원되기라도 했다면 메커니즘이 훨씬 더 복잡해지며, 그냥 정석적인 썽크 컴파일러를 쓰는 것밖에 답이 없지 싶다.
그러고 보니 문득 든 생각인데, 과거에 GWBASIC이 처음 구동되었을 때 Ok 프롬프트 앞에 "6만 몇천 바이트 남았습니다(6xxxx bytes free)"라고 메시지가 떴던 게 저런 리소스와 성격이 좀 비슷한 것 같이 느껴진다.

저런 식으로 프로그램이 시작된 직후, 혹은 프로그램의 도움말이나 About 대화상자 한 구석에다가 간단하게 남은 메모리/자원의 양을 표시하는 건 오랫동안 소프트웨어 업계에 남아 있던 관행이었다. 심지어 도스 시절부터 말이다.
그랬는데 요즘은 메모리가 너무 많아지고 숫자 단위가 커져서 그런지 Windows의 작업 관리자는 남은 메모리의 양을 KB 단위 대신 비율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64KB짜리 리소스는 스케일이 너무 작고 민망해서 퍼센트로 표시한 게 아닐까 의심될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너무 커져서 세부적인 숫자가 무의미한 지경이 됐으니 다시 퍼센트로 복귀한 걸로 생각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06 08:35 2016/03/0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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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글에서 계속됨

1.
백장미단의 홍일점이던 소피 숄은 나치 반대 운동을 하다가 겨우 23세의 나이로 저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독일엔 이와 완벽한 대조를 보이는 아가씨도 있었다.
이르마 그레제(1923-1945)는 생년과 몰년이 모두 소피 숄보다 딱 2년씩만 더 늦어서 23세에 죽은 것은 동일하다. 허나, 이 사람은 나치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은 게 아니라 반대로 전후에 나치 전범으로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죄목은 바로 나치 수용소의 간수로 근무하면서 수용자들을 끔찍하게 학대하며 그걸 새디스틱하게 즐겼다는 것이다. 심심하면 자기 멋대로 수용자들을 구둣발로 조인트 까고 굶기고 때리고 채찍질하고 옷 벗겨서 성고문을 일삼고.. 아니면 굶주린 군견을 풀어서 물어 죽이거나 가스실로 보냈다. 차고 있던 권총으로 즉결처분을 해 버리는 건 차라리 자비로운 조치다.

수용자 목숨을 정말 파리 목숨 정도로 치부했으며 그녀는 수용소의 모든 수감자들 사이에서 "나치의 악녀"라고 악명이 자자했다고 한다. 하는 짓은 현신한 악마 그 자체인데 얼굴은 참 예쁘장했다니 기가 막힌다.
나중에 그녀의 죄상이 밝혀지고 그녀의 나이와 외모까지 같이 밝혀지자 연합국 측은 이런 아가씨가 저런 짓을 버젓이 저질렀다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사형 집행 직전에 수줍은 듯 "빨리(집행해 주세)요~(Schnell..)"라고만 말했지만, 밧줄이 목에 잘못 걸렸는지 곧바로 목동맥이 부러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말 그대로 목이 졸리는 질식 과정을 거치면서 다소 길고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고의는 아니었다고 하는데..

비슷한 시기를 살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죽기까지 한 같은 20대 여자라도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저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북한 정권이 무너지면 거기 정치범 수용소에서도 이와 비슷한 죄목으로 죽거나 조리돌림 당할 악질 간수들이 많이 발견되지 싶다.

한편, 숄이 +1이고 이르마 그레제가 -1이라면, 그럭저럭 0 내지 -0.1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히틀러의 마지막 비서라고 알려진 여인인 '트라우들 융에'(1920-2002)인데..
전후에 길거리를 걷다가 소피 숄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걸 보고 그 유래를 궁금해하다가 큰 전율을 느끼고 데꿀멍 하고 말았다. "자기가 한창 히틀러 밑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동안, 같은 여자이고 나이도 거의 동갑인 한 이 친구는 나치와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저렇게 죽었구나..! ㅠㅠㅠㅠ 난 너무 어려서 히틀러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도 다 핑계일 뿐이구나"라고 영화 <몰락>에 직접 출연해서 증언을 했다.

그런데 세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간으로 가는 게 제일 무난한 건지.. +1과 -1은 모두 진작에 사형 당한 반면, 정작 저 사람만이 독일이 통일되는 것까지 보고 천수를 누리다가 갔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상. 부정적인 인물 소개는 이걸로 마치고, 다음부터는 긍정적인 인물 얘기를 하겠다.

2.
한편,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의 소년 항일 열사로 뒤늦게 알려진 주 재년(1929-1944)에 대해서도 한번 짚고 넘어갔으면 싶다. 그는 1943년 어느 날, 팀을 짜거나 삐라를 만들어 뿌린 것도 아니고 마을 담장에다가 "일본과 조선은 서로 다른 나라다(내선일체 대동아 공영권 따윈 X까라). 일제는 반드시 패망한다. 조선 만세" 이런 글귀를 써서 일제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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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당연히 "이딴 낙서를 한 놈이 누구냐? 안 나오면 마을 전체가 작살날 줄 알아라"라고 사람들을 위협했고, 이에 주 군은 당당히 "이건 내 소행이니 다른 사람들을 해코지하지 마시오"라고 자백하고 잡혀 갔다.
그는 그때 겨우 10대 중반의 중학생 나이로, 유 관순보다도 어렸다. 일제 강점기 35년을 통틀어 아마 최연소 항일 인사였을 것이다.

일제는 "이 짓을 니 혼자 했을 리가 없다. 누구 지시를 받은 거야? 앙?" 하면서 애를 무자비하게 때리고 고문했다. 주 재년은 몇 달간 헌병대에서 고생하다가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이미 초죽음 상태였던 관계로 석방 후 한 달 남짓 만에 순국하고 말았다.

그냥 단두대에서 목을 뎅겅 쳐 버린 것하고, 대놓고 사형 선고를 내린 건 아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사람을 죽게 한 것. 각각이 다 나치스럽고 일제스러워 보인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니까 "너희들은 전쟁에서 필패한다"라고 치부를 대놓고 찌르고 퍼뜨리는 사람이 더욱 미워 보일 수밖에 없었겠다. 사실 저런 소문은 병사들의 사기와 심리 차원에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3.
일로나 토드(Ilona T?th, 1932-1957)는 헝가리 혁명 때 희생된 의대생이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도 한국어로 된 자료는 거의 찾을 수 없는 인물이다. 네이버의 검색 결과와 구글의 검색 결과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단 영문으로 된 관련글을 하나 링크로 소개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단 위의 글을 읽어 보면 그녀는 FM에 엄친딸 모범생 그 자체였다. 집이 가난했지만 늘 검소하고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고, 공부와 운동에 모두 능통했고 기독교 신앙도 독실했댄다. 의대인지 간호대인지 어쨌든 의료 계열 학교에 무난히 진학했다.

그런데 1956년, 나라에서 공산당의 억압· 통치에 반발하여 소련을 몰아내려 한 민중 혁명이 일어났다. 그녀는 딱히 정치에 관심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혁명이 올바른 명분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여 시위 중 부상자를 치료하고 돌봐 줬다. 그냥 돌본 게 아니라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돌봐 줬다. 밤낮으로 환자들을 간호하고 인근 국가로 위험한 무단 월경까지 하면서 음식과 의약품을 구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혁명군은 소련군의 무자비한 유혈 대응에 패배했으며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혁명군의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혁명군에 가담했던 일로나도 체포되었는데, 그녀는 아까 숄 남매나 주 재년 같은 적극적인 저항 활동에 대한 혐의가 붙은 건 아니었다. 그 대신 그녀는 다른 동지를 구하기 위해서 경찰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혼자 뒤집어쓰다시피 했다고 한다. 치료를 가장한 독극물 주입으로. 그것 때문에 공산당 인민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끝내는 20대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했다.

그녀의 모친은 마지막 면회 때 멘붕하여 "이 와중에 도대체 신은 어디 있는 거냐!"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여기 제 바로 옆에 계셔요"라고 너무나 차분한 자세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Don't cry mother, I will die as a brave Hungarian soldier. You know that the charge is false, and they just want to besmirch the holy revolution." (해석은 생략하겠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돈 크라이 마미>라는 좀 어설픈 범죄/복수극 영화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복수극을 만들려면 최소한 테이큰의 반은 따라가는 퀄리티로 만들 것이지, 저건 죽도 밥도 아닌 퀄리티였다. 흥행 실패할 수밖에.)
하지만 일로나의 저 말이야말로 "돈 크라이 마미"의 모범 사례였다. 이 결론을 소개하고 싶어서 이 인물까지 같이 소개하게 됐다. 헝가리에는 당연히 이 사람의 동상도 있고 그녀를 길이길이 기리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03 19:32 2016/03/0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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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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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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