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역사 인물 관련 메모

1. 나이, 종교

옛날 역사 인물들은 중요한 활동을 하고 행적을 남긴 시기가 굉장히 어리고 젊은 경우가 많다.
일례로, 조선 연산군이 겨우 30 초반의 나이로 요절했다는 걸 알고는 굉장히 놀랐다. 정말 짧고 굵게 깽판 치면서 나라 말아먹다가 갔구나..

그리고 본인은 김 대건(안드레아) 신부가 한 4~50대 나이쯤에 순교한 거라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막연히 생각해 왔다.;;
위인전 삽화에 묘사된 노안 중년 인상으로부터 형성된 편견..;; 종교가 나하고 다르다 보니 그리 깊게 진지하게 살펴보지 않은 것, 그리고 20세기에 우리나라에서 일제나 공산당에게 순교한 목사들의 평균 연령 등을 감안하면 이게 자연스러운 추측이었다.
그랬는데 실제 연표를 보니.. 딱~ 윤 봉길 의사 같은 겨우 20대 중반 나이였다..;;

김 대건은 "가톨릭으로부터의" 개종을 거부하고 순교한 반면,
저 때로부터 300여 년 전, 잉글랜드에서 불운의 9일짜리 여왕이었던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거부하고 성공회를 선택한 대가로 순교했다. 나이는 겨우 18세.. 고3~대1, 유 관순 나이였다.

물론 저 처자의 경우, 종교 때문만은 아니고 정치적으로도 피의 메리 여왕에게 위험한 입지였던 것이 고려됐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종교만 개종하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메리가 제안했는데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 대건, 제인 둘 다 목이 잘렸다. 전자는 칼로, 후자는 도끼로 잘렸다는 차이만 있을 뿐..;;

요즘은 최악질 흉악범한테도 사형 집행을 안 하고 너무 인도주의적으로 대해 주는데.. 옛날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생사람을 목을 치거나 심지어 불태우던 시절까지 있었다니.. 참 극과 극이 따로 없다. 반대로 그때는 사람들 사고방식이 지금 같은 황금 물질 만능주의가 아니라 뭔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게 더 강하기도 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가난하고 불편하고 열악한 시절이다 보니 애들이 요즘 애들보다 훨씬 어려서부터 철 들고 어른스러웠을 것이고(그래야만 '생존'을 할 수 있..)
애들 교육도 툭하면 줘 패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잔혹 엄격하고 반인격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자기 신앙을 위해 목숨을 선뜻 바칠 수 있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대단하기도 하다.

끝으로 가톨릭이 중세 유럽에서는 남을 박해 '하는' 편이었는데.. 조선이나 일본 같은 극동 아시아로 가면 쟤들도 박해를 '당하는' 쪽에 있기도 했다는 것 역시 생각할 점이다.

2. 지능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 이 방원은 역대 조선 왕들 중 과거 시험(문과) 합격 이력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건 물론 고려 시절에 응시했던 과거였다.

대한민국 대통령 중 초대인 할배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명예 박사가 아니라 논문을 써서 취득한 정식 박사학위를 소지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것도 자국이 아닌 천조국 일류대에서 취득한 박사이고, 심지어 지도교수조차도 저 제자를 졸업시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조국 대통령이 됐다.;;; (우드로 윌슨. 할배와 윌슨 모두 각각 자기 나라에서 유일한 레일 박사학위 소지 대통령임)

최 규하는 현재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전임 대통령의 임기 중 사망으로 인한 승계를 경험했으며(권한대행), 정당 활동 없이 외교관과 국무위원/총리 커리어만으로 대통령이 된 유일한 사람이다.
하지만 정작 재임 기간은 윤 보선보다도 더 짧았고, 존재감 역시 제일 없다. 죽은 뒤에 개인적인 연고지나 서울 현충원이 아니라 제일 평범하게(?) 규정에 따라 대전 현충원에 묻힌 것으로도 현재까지 유일하다.

셋 다 당대엔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다.

3. 경성제대 학생들

인터넷을 뒤지다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1920년대 말의 꽤 흥미로운 사진을 하나 발견하여 여기에 소개한다. 경성 제국 대학 문과의 어느 조선인 학급 학생들의 단체 사진이라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얘들은 한반도 최고의 똘똘이 엘리트들이었다.
일제 시대엔 법적으로 ‘대학교’라는 게 한반도에 경성 제국 대학 단 하나밖에 없었으며, 얘들은 바로 거기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조선인이 설립했던 연희, 보성, 명륜, 숭실 등의 전문 학교들은 교육 수준이 대학교에 준하긴 했어도 대학교와 동급이 아니었다. 거기를 졸업한 뒤엔 경성 제대 같은 곳으로 편입을 해서 보충 교육(?)을 이수해야만 완전히 대졸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때 경성 제대 교수와 학생들은 특권 의식이 장난이 아니었지 싶다.

이 사진에서 맨 앞줄 왼쪽.. 즉, 좌측 하단에 있는 사람이 ‘서 두수’였다니 굉장히 흥미롭다. 서 남표 전 카이스트 총장의 부친이고 하버드 대학교 한국어/한국학과 교수를 역임한 그 사람 말이다.
서 두수 말고 내게 익숙한 이름은 이 희승밖에 없다. (사진에서 맨 앞줄 좌측에서 넷째, 우측에서 둘째인 사람) 서 두수(1907-1994)는 이 희승(1896-1989)보다 10살 이상 더 어렸다. 그러고 보니 서 교수는 공 병우 박사와 거의 동시대 동갑내기였구나.

4. 고려 시대

(1) 고려 시대엔 무신 정권 기간이란 게 있었고 몽골의 침입과 원나라 간섭기도 있었다. 조선 정부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면, 고려 정부는 강화도로 피난을 간 적이 있었다.

(2) 그리고 고려 말기의 거의 동시기에 문 익점은 목화를, 최 무선은 화약을 들여 왔다. 다만, 원나라의 입장에서 목화는 화약만치 수출 금지 품목이 아니었으며, 문 익점이 붓두껍에다가 목화씨를 숨겨서 기적적으로 밀반출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3) 유능한 배우가 연기만 잘하지 작품을 보는 안목은 부족해서.. 맨날 엄한 망작 졸작 괴작에만 출연하는 바람에 커리어를 말아먹는 경우가 있다. 문 익점은 격변의 시기에 친원이냐 반원이냐, 정 몽주냐 이 성계냐 같은 정치적인 줄을 매번 잘못 서서 독박을 쓰곤 했다. (파괴왕..;;;)
하지만 반대파가 보기에도 문 익점은 그렇게 정치질을 하는 위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그냥 관직을 빼앗기는 선에서 그쳤지, 역적으로 몰려 목이 달아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4) 정 몽주는 우리의 흔한 통념과 달리, 밤이 아니라 벌건 백주대낮에 자객의 철퇴에 맞아서 죽었다;;; 선지교/선죽교의 돌바닥에는 정 몽주의 혈흔이 언제까지 남아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루미놀 시약 같은 걸로 검출 가능하려나?
조선은 건국 과정에서 정 몽주나 최 영 같은 사람이 죽었고, 초창기에 왕씨 일가도 조직적으로 학살 당했으며 심지어 왕자들끼리도 숙청이 벌어지는 등 피바람이 많이 불긴 했다.

5. 조선 시대

  • 사후에 '종-조' 같은 시호를 못 받은 왕: 연산군, 광해군
  • 대원군: 자신은 왕이 아니지만 아들이 왕이 되었고 아들 이전에 섭정까지 했던 사람이다. 조선의 역사상 덕흥(선조), 정원(인조), 전계(철종), 흥선(고종) 네 명이 있었는데, 그 중 마지막 흥선대원군이 가장 유명하다.
  • 생전에 퇴위한 상왕: 1~3대(태조, 정종, 태종), 그 다음은 단종(세조에게..), 고종(일제에 의해..)이다. 그나마 태종은 자발적인 퇴위에 가깝다.
  • 사화: 총 네 번 있었다. 무오(1498), 갑자(1504), 기묘(1519), 을사(1545). 다들 조선의 건국 이후 150년 안에 발생했던 이벤트이며, 임진왜란 이전의 일이다. 결투나 자객 암살이 아니라 다들 임금한테 "저놈은 죽이시옵소서" 이러는 형태였다는 게 참.. 지저분해 보인다.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긴급조치가 취해진 때, 헌법이 고쳐진 때, 계엄이 선포된 때, 국민투표가 시행된 때 같은 아이템들이다. 흥미롭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29 08:35 2021/06/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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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고와 에러

C/C++ 컴파일러가 소스 코드를 컴파일 하는 중에 내뱉을 수 있는 메시지는 흔히 에러 또는 경고라는 두 종류로 나뉜다. 그런데 이걸 더 세분화하면 에러의 앞에는 수위가 더 높은 ‘심각한 에러’(fatal error)라는 게 있다.

얘는 컴파일 중에 컴파일러 자체가 뻗거나 메모리가 부족할 때처럼, 외부 요인에 의해 컴파일이 더 진행될 수 없을 때 나는 편이다. 그런 게 아니면 소스 코드가 문법상으로는 이상이 없지만 각종 수식이나 명칭 선언이 괄호가 너무 깊게 들어가고 복잡할 때, 리터럴 데이터 같은 게 너무 많아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때, #include 깊이나 #define 치환 단계가 너무 깊을 때..

한 마디로 컴파일러의 한계 때문에 코드 생성이 안 되는 것이 심각한 에러로 분류되는 편이다. 이건 통상적인 컴파일 에러와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참, #include 파일을 아예 찾을 수 없는 것, 그리고 #error로 대놓고 에러를 발생시킨 것 역시 추가적으로 심각한 에러의 범주에 든다.

일례로, int a = 999999999999999999999999; 이런 거야 상수가 너무 커서(32비트 범위 초과) 토큰의 스캐닝 단계에서 튕겼기 때문에 일반 컴파일 에러이다.
하지만 int tbl[] = { 10,45,34,33, ... }; 다음에 숫자가 한 100만 개쯤 있다거나,
char msg[] = "......" \ 이런 리터럴이 100MB쯤 이어져서 컴파일이 실패하는 것은 심각한 에러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괄호들이 닫히지 않은 채로 구문을 종료하는 세미콜론이 나오면 일반 에러이지만.. 그 상태로 파일 내용이 끝나 버리면 보통 심각한 에러로 간주된다.

에러 말고 경고는.. 컴파일러들이 경고를 이미 여러 단계로 분류해 놓은 편이다. 가령, 초기화되지 않은 변수를 사용하는 것은 다소 심각한 수위의 경고이지만.. 선언만 해 놓고 사용하지 않은 변수는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 경고이다.

또한 요즘은 정적 분석기가 함수 인자의 annotation까지 참조해서 미주알고주알 지적해 주는 잠재적 오류 가능성도 경고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null 포인터를 참조할 가능성이 있다, 버퍼 오버런이 발생할 수도 있다" 따위 말이다.
요즘 세상에 코딩을 글쓰기에다 비유하자면 컴파일· 빌드는 인쇄· 배포에 대응하고, 정적 분석은 맞춤법 검사기와 비슷해 보인다.

2. 빌드 툴들이 말귀를 도무지 못 알아들을 때 확인해 볼 사항

  • 그 소스 파일이 프로젝트에 포함돼 있긴 한가? 포함돼 있더라도 혹시 exclude from build 이런 낚시 옵션에 걸려 있지 않은가?
  • 문제의 구간이 #if 조건을 만족하는 구간에 속해 있는가?
  • 명칭이 이상한 매크로 때문에 다른 엉뚱한 형태로 치환되고 있지는 않은가? (주로 C)
  • C++의 경우, 복잡한 namespace나 using 으로 인한 문맥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가?
  • 링크 에러의 경우, extern "C"로 인한 name mangling 방식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가?

3. 빌드 속도

특별히 다른 부하가 걸린 게 없는 멀쩡한 개발자용 평균 사양의 2~3GHz급 컴터에서.. 2000줄 이하의 평범한 복잡도의 C++ 소스 파일이.. (IOCCC 입상작급 기괴한 난독화, 다단계 템플릿, namespace, #define 떡칠, 다중 다단계 상속 등의 남발.. 이 아닌 "평범한". -_-)
그것도 네트웍도 아닌 로컬 환경에서, 더구나 딱히 빡세게 최적화를 걸지도 않은 디버그 빌드가 컴파일하는 데 개당 0.8초 이상씩 걸리는 건.. 본인은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간주한다. 소스 코드의 #include 구조 및 빌드 시스템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precompiled header가 제대로 적용돼 있는지, 덩치 큰 라이브러리 헤더의 연쇄 인클루드와 파싱이 무식하게 매번 반복되고 있지 않은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저건 컴터한테나 인간에게나 좋지 않은 상황이다.
DB 테이블로 치면 primary key 지정이나 인덱싱과 비슷한 최적화가 필요하다.

4. 안드로이드 앱용 JNI 라이브러리의 빌드

(1) 안드로이드 앱을 개발할 때, 겉에서 돌아가는 java 내지 kotlin 코드 기반의 프로그램이야 로컬 환경에서 Android Studio로 간편하게 빌드할 수 있다. 이 IDE는 Windows용과 mac용이 모두 깔끔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이 앱이 내부적으로 사용하는 native code 라이브러리들의 빌드 환경은 내 경험상 mac이건 리눅스건 여전히 유닉스 기반 터미널에 의존하고 있다. Windows에서 바로는 안 된다는 게 특이한 점이다.;; JNI 쪽 빌드도 IDE와 연계해서 같이 되게 할 수는 없는지..

(2) 디버깅도 앱은 breakpoint와 step in/out/over, 지역변수 값 확인, call stack 같은 통상적인 방법론이 IDE 차원에서 모두 지원되는 반면, 그 아래의 라이브러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런 내부 동작은 로그 printf 신공에 의존해서 추적하는 수밖에 없으니 몹시 불편하다.

(3) 그래도 이런 라이브러리들은 빌드 시스템이 멀티코어/멀티스레드 환경과 굉장히 잘 연계하는 편이다. 그래서 고성능 빌드 서버에서 make -j8 , -j16 이런 식으로 코어 수를 늘려 주면 빌드 속도가 정말 눈에 띄게 매우 빨라진다.
그런데 이 시설에도 이 기능에도 매우 아쉬운 점이 있는데... 코어 수가 늘어나면 빌드 에러 메시지도 진짜 정신없게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와서 확인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Visual Studio처럼 메시지의 앞에 코어 내지 프로젝트의 번호라도 좀 찍어 주면 읽기가 좀 더 수월할 텐데 말이다.
그리고 터미널 접속 프로그램의 본좌인 putty에는 특정 단어나 문자열이 등장했을 때 highlight를 시켜 주는 간단한 기능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putty는 20년이 넘게 0.x대의 버전 번호를 고수하고 있고, 유니코드(W)가 아닌 ANSI API를 사용하는 게 이색적이다.
ANSI API, 0.x 버전, 크로스 플랫폼 공개 소프트웨어라는 점에서는 DOSBOX하고도 무척 비슷하다.

5. 구조체 전방 선언의 부작용(?)

C/C++ 코드에서는 모듈 간의 include 의존도(= coupling)을 낮추기 위해서 자신이 내부적으로 취급하는 구조체는 불완전하게 전방 선언만 명칭만 노출하는 경우가 많다. 외부에서는 전방 선언 구조체의 포인터만 핸들 마냥 갖고 있고, 실제 조작은 실제 내부 구조를 아는 함수의 호출을 통해서를 하는 것이다. 뭐, 이게 C++이 말하는 정보 은닉과도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며, 충분히 바람직한 디자인 패턴이다.

하지만 디버깅을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조작하는 함수로 들어가기 전에, 즉 밖에서 breakpoint를 걸었다. 이때도 이 포인터가 가리키는 구조체 내용을 좀 조회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Visual Studio IDE에서 안 돼서 답답했던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구차하게 소스 코드를 고쳐서 디버깅일 때에 한해서 감춰 놓은 내부 구조체 몸체 선언 include를 시키고 싶지도 않다.
특정 상황에 한해서 컴파일 때는 참고하지 않는 다른 소스 코드의 디버깅 정보를 가져오는 기능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6. 나머지

(1) 컴파일러와 링커는 오늘날까지도 환경 변수라는 게 쓰이는 얼마 안 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환경 변수라는 게 명령줄에서 실행 파일을 자동으로 찾는 PATH, 그리고 컴파일러가 사용하는 기본 include 및 라이브러리 디렉터리... 이것 말고는 쓰이는 곳이 정말 드물지 않은가? 자체적인 환경 설정 파일 같은 게 동원될 법도 한데 컴파일러와 링커는 GUI 프로그램이 아니다 보니 좀 더 저수준이면서 실행되는 세션별로 사용자가 값을 더 간단하게 변경할 수도 있는 환경 변수를 대신 선택한 것 같다.

(2) 과거에 도스용 Turbo C/C++ 같은 물건은 굳이 프로젝트 파일을 안 만들어도 소스 하나만 단독으로 달랑 열어서는 곧장 빌드해서 돌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개발툴들은 단순 텍스트 에디터 이상의 매우 복잡하고 방대한 물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Hello world! 한 줄짜리 프로그램을 만들더라도 최소한의 프로젝트 세팅은 한 뒤에야 빌드와 디버깅이 가능하다.

(3) 그리고 요즘 개발툴들은 여러 소스 파일들을 한데 묶은 프로젝트로도 모자라서.. 프로젝트도 여러 개를 한데 묶은 '솔루션, workspace'라는 개념으로 운용된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이 정도는 돼야 좀 규모 있는 소프트웨어를 원활히 개발 가능하기 때문이다.

(4) 컴터 프로그램 개발을 하다 보면.. 디버깅 로그가 실시간으로 뜨게 해 놓은 채로 디버기 프로그램을 구동하고 일정 주기로 결과를 확인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때 프로그램이 출력하는 로그만 넣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로그에다가 인위로 "=======" 같은 가로줄 같은 걸 즉석에서 추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프로그램에서 동작 시험을 여러 번 할 때 로그의 영역을 하기 위해서이다.

(5) 앞으로는 "주 메모리에 로드되어 실행된 프로그램 / 하드디스크에 설치돼 있는 프로그램 / 원본 설치 패키지"라는 소프트웨어의 통상적인 3단계 구분이 더 모호해지고 단순화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일단 웹 프로그램은 설치라는 과정이 없는 게 확실하며, 메모리 계층에서 보조 기억장치와 주 메모리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도 이런 추세를 더욱 부채질할 테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26 08:35 2021/06/2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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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관행

1. 향교와 서원

조선 시대엔 '향교'와 '서원'이라는 뭔가 유교 냄새가 나는 공공 교육 시설이 있었다. 이게 뭘 하던 물건이며 둘의 차이점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난 잘 모르겠다. 종교 시설은 아니겠지만 일본의 신사 같은 느낌도 좀 드는데 말이다. 위키를 찾아보니 오늘날로 치면 각각 지방의 국· 공립대 vs 사립대 정도의 위상이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런 게 지금보다 더 많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심지어 조선 정부에서도 많이 정리하고 없앴다. 특히 서원 말이다. 너무 많이 난립하니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고 나라가 못 돌아갈 지경이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원에 무슨 초법적인 권한이 있기라도 했는지...?

이런 이유로 인해 오늘날은 행정구역상 인서울엔 향교와 서원이 공교롭게도 각각 딱 하나씩만 남아 있다.
먼저 향교는 강서구에 있는 양천 향교가 유일하다. 원래는 인지도가 완전히 듣보잡이었는데 서울 지하철 9호선에 '양천향교'라는 역이 대문짝만 하게 생김으로써 크게 유명해졌다.

이 향교의 위로는 '궁산'이라는 높이 80m 남짓한 언덕이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고층 아파트를 계단으로 오르는 정도의 수고만 하면 금세 정상에 도달해서 넓은 풀밭과 함께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 아주 좋다.
다음으로 서원은 '도봉 서원과 각석군'이라는 이름으로 도봉산 기슭에 딱 하나 있다.

본인은 지난 2016년 말에 지하철 7호선의 종점인 장암 역 부근에서 수락산을 올랐을 때 '노강 서원'이라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얘는 근소한 차이로 인서울 서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봉 서원과 막 멀지는 않은 거리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2017년 여름에 관악산을 올랐다가 과천 시내 쪽으로 하산했을 때는 산기슭에서.. 그래, 과천 향교를 본 적이 있었다. 등산을 다니면서 이런 쪽 견문도 넓어지는구나.

본인은 예전에는 산 속에 벙커를 보고는 별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다. 그러다가 수 년 뒤엔 거길 뒤늦게 다시 찾아가서 안에서 잠도 자고 온 것처럼..왔다.
그런 것처럼 향교와 서원도 처음엔 잘 모르고 사진만 찍어 놨다가 수 년 뒤에 이렇게 존재감을 다시 생각하고 의미를 재발견하게 됐다.

관련 자료를 더 찾아보니.. 전국에 있는 교동· 교촌이라는 지명은 다 향교의 흔적이라고 한다.
음.. 그럼 교촌 치킨도 향교에서 유래된 것이었구나~! +_+ ㅋㅋㅋㅋ

2. 색깔

하양 - 노랑 - 초록 - 파랑 - 빨강 - 검정
이게 뭔가 사람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색깔 별 등급 내지 레벨 대응인 것 같다.
태권도 도복의 띠 색깔이라든가, 카트라이더의 레벨 별 면허증 색깔, 그리고 서울 버스의 등급 별 색깔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무지개 hue 스펙트럼과 얼추 비슷하지만 시작 지점이 빨강이 아니라 노랑인 셈이다.

그런데 옛날 조선 시대에 궁궐에서 관료와 왕이 입었던 한복은.. 하양 - 초록 - 검정 - 파랑 - 빨강 - 노랑의 순으로 격이 올라갔던가 보다. 흠 그것도 아무렇게나 배치한 건 아니었군.

빨강이 격이 높은 색인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임금님 곤룡포는 다 빨강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칭 유대인의 왕 만세~!" 이렇게 왕 코스프레(?)를 당하실 때 걸쳐졌던 옷도 빨강이었다(마 27:28 등).

그 다음으로 노랑은.. 현대에서는 유치원 초딩, 초보, 조심· 주의의 상징이다. 병아리가 노란색이어서 그런지 스쿨버스나 어린이집 통학 차량도 전부 노랑이지 않은가?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노랑이 완전 고급스러운 색일 수도 있어서.. 중국을 포함한 동양에서는 노랑이야말로 황제의 색깔이었는가 보다.

대국을 받들어 모시던 조선에서는 노란색은 감히 입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국군에 '원수' 계급은 반영구적인 공석인 것처럼.. 노랑은 그렇게 무기한 봉인돼 있었던가 보다.
그래서 대한제국 때 탈중궈를 선언한 뒤, 끄트머리인 고종과 순종의 어진만이 노란 옷차림이다..;; 헐~

3. 종

우리나라 경주에는 신라 왕조에서 유래된 성덕대왕 신종, 일명 애밀레종이란 게 있다.
그리고 서울에는 조선 왕조에서 유래된 보신각 종(?)이 있다.
전자가 후자보다 시기적으로 600년이 넘게 더 앞섰다. 전자는 국보이고 후자는 보물이다. 하지만 둘은 용도와 심상이 굉장히 비슷하다.

요즘이야 새해가 됐을 때 보신각에서 타종 행사가 열리지만.. 먼 옛날(197, 80년대)에는 에밀레종도 타종했다. 텔레비전에서 서울과 경주의 타종 행사를 나란히 중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두 종 모두 문화재 보존을 위해 실물을 건드리지는 않고 있다.

그러다가 보신각 종은 1985년부터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경주 에밀레종을 복제한 새 종을 거기에다가 달아서 매년 타종하게 됐다.
그럼 경주에 있는 진짜 에밀레종은..?? 공식적으로는 1992년 이후부터 제야 타종을 중단했고, 박물관에서는 녹음된 타종 음향만을 주기적으로 쏴 준다. 이런 관계가 됐다.;;

보신각 종 원판은 상태가 안 좋아서 진짜 박물관에 처박혀서 영구 봉인된 듯한 반면, 에밀레종은 그렇지 않았다. 2003년까지 비정기적으로 타종을 좀 하다가 그 뒤로는 타종이 진짜로 중단됐다. 2020년에는 코로나 시국에도 오랜만에 타종한다는 보도 자료가 검색돼 나오지만, 그 뒤에 실제로 했는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23 19:34 2021/06/2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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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권 선언

지난 1948년에는 이스라엘이 건국됐고(5월) 대한민국도 미군정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하여 건국됐으며(8월), 이어서 연말인 12월 10일엔 UN 총회를 통해 '세계 인권 선언'이란 게 선포됐다. (☞ 한국어 번역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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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어떤 아지매가 4절지? 2절지 정도 되는 큼직한 종이에 뭔가가 빼곡히 인쇄된 걸 펼쳐들고 있는 모습 패러디 짤방을 본 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 아지매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영부인이었고, 원전이 바로 세계 인권 선언이라는 것을 본인은 비교적 최근에야 알게 됐다. =_=

  • 어린이 헌장도 아니고(어린이를 학대하지 말고 기본적인 건 보장해 주며 특별히 보호해 주자),
  • 제네바 협약도 아니고(전쟁을 하더라도 지킬 건 지키고 싸우자, 포로의 인권을 최소한은 보장하자),
  • 국민 교육 헌장 같은 것도 아니고(교육 잘 하고 잘 받아서 민족을 중흥시키고 새 역사를 창조하자)..

모든 인간은 누구나 인종 피부색 국적 종교 무관하게 존엄하고 평등하다, 저것 갖고 부당한 차별 박해를 하지 말자,
인간에게는 결혼하고 먹고 자고 국적 선택할 권리가 있고, 거주지 옮기고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전근대적인 세습 노예 제도나 피의자 고문은 잘못됐다, 자국민을 무국적자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등등~~

지금 우리로서는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그야말로 제국주의 식민지와 우생학, 2차 세계 대전 같은 비극적인 짓거리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30개에 달하는 조항에 담겨 있다.

이 선언은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저기에 담긴 이념이 세계 자유 진영 국가들의 헌법에 그대로 녹아들어가 사실상 국제 관습법이 됐다. 그리고 성경 같은 여느 유명 문헌 만만찮게 수백 가지의 언어로 번역됐다.
이 시기에 세계 각국의 나라들이 왕정을 버리고 공화정으로 체계가 바뀌었다. 오죽했으면 조선 만만찮은 꼴통 카스트 신분제 국가이던 인도조차도 최소한 법으로는 이제 신분제를 부정하고 만민이 평등한 민주 국가를 표방하게 됐을 정도이다.

물론 지금은 인권 운동이라는 것들이 너무 오바하고 선 넘어서 사형 제도 폐지와 동성애 합법화, 범죄자 인권만 챙기기, 죄 지을 권리만 챙기기, 죄를 죄라고 말하는 것을 반인권 프레임 씌워서 금지시키기.. 이딴 식으로 변질된 면모도 많다. 하지만 저 시절에 저런 인권 선언이 세계적으로 선포된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었다.

저런 인권 선언이 없던 옛날을 생각해 보자. 서양은 타 인종· 타 민족을 노예로 부렸고, 조선은 자국민의 과반을 노비로 부려먹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국력이 강해지고 나니 아예 인종 전시회, 인간 동물원을 열었다.
흑인 노예는 짐승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도기 생물 정도로 여겨졌다. 죽은 시체를 해부해 보니 장기 구조가 백인과 아무 차이가 없는 걸 보고는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이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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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원주민 여성인 사키(세라) 바트만(1789-1815). 유럽인들의 침략으로 영국에 혼자 끌려와서 알몸으로 구경거리 취급을 당하다가 타지에서 한 많은 삶을 일찍 마감했다.)

그리고 상피병이나 이상한 비늘증 유전병에 걸려 외모가 흉측해진 사람은 구약 시절의 문둥병 환자 취급이었다. 천벌 받은 죄인이니까 왕따 시키거나, 아니면 서커스에 보내서 놀림감으로 만들었다. (요 9:2 같은..).
세계 인권 선언은 바로 저런 짓을 앞으로 되풀이하지 말자고 다같이 결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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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메릭(1862-1890). 흑인이 아니라 엄연히 유럽 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전병으로 인해 심각한 피부 기형이 발생하여 인간 취급을 못 받았다. 평생을 놀림과 학대를 받으며 기구하게 살았다. 이 사람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the elephant man (1980)이라는 영화도 이미 나와 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포로 70년을 겪고 나니 종족 특성이 싹 바뀌었다. 비록 그 뒤에도 주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다해 100점짜리로 섬긴 것은 여전히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옛날처럼 바알 같은 우상을 대놓고 따르지는 않고 외형적으로 골수 유일신 민족으로 탈바꿈했다.
그것처럼 이 인류도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참극까지 겪은 뒤에야 옛날 같은 식민지 쟁탈전, 인종과 종교로 인한 전쟁이 '1세계의 외형'으로 한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멎었다. 아쉬운 대로 평화가 찾아온 셈이다.

다음으로 국제 기구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독교계 중에서도 꼴통에 가까운 보수 우파, 그리고 정치 종교 통합과 세계 단일 정부 음모론 이런 걸 진지하게 고려하는 진영에서는 UN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심지어 UN이 창립된 뒤부터 세상은 전쟁이 오히려 더 늘어나고 더 혼란스러워졌다고 까며, 미국 한정으로는 "The UN wants your gun! 총을 빼앗긴 다음에는 성경을 빼앗길 겁니다" 이런 괴담까지 나도는가 보다.

물론 UN이 딱히 기독교 성경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기관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우리나라부터가 UN이 없었으면 어떻게 버텼겠는가?
글쎄, 미래엔 성경의 예언대로 세계가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대적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6 25 사변 때는 세계가 연합해서 대한민국을 도와줬다. 우리나라는 그게 너무 고마워서 향후 수십 년간 UN 창립일을 공휴일로 기념하고 놀 정도였다.

그리고 20세기 중후반에 전쟁이 늘어난 것은.. 오히려 식민지 지배를 하던 강대국들이 물러나고 나서 그 지역 조무래기들이 정치가 불안정해서 툭탁거리고 싸우는 것의 비중이 더 크다. UN이 능력이 부족한 건 있어도 UN이 잘못한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뭐, 내가 보기에도 21세기의 UN은 20세기 중반의 창립 당시 초심을 갖고 있던 UN과 같은 성격의 조직이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쟤들의 존재 자체를 근본부터 백안시하고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죽했으면 국제 연맹을 계승해서 UN이란 게 생겼을까? 그것도 세계 대전 연합국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따 와서 말이다.
창조 진화 논쟁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우 장춘 박사와 종간 잡종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고, 연대기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우주 배경 복사와 방사성 원소 연대 측정법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떤 입장에 대해 찬성하건 반대하건, 그 대상이 뭔지는 정확하게 알아야 하므로!)

그런 것처럼 세계사,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심 있는 사람, 프란시스 셰퍼의 "그러면 우리는 어찌 살 것인가" 의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UN과 세계 인권 선언의 등장 배경과 맥락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제국주의 시절에 진짜 불쌍한 사람과 희소병 환자의 인권을 당대의 기독교회가 챙겨주지 못했다면, 훗날 그냥 무신론적 인본주의에 입각한 인권 선언이 태동하는 것을.. 신자들이 마냥 부정적· 회의적으로 보고 목소리를 내기란 곤란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반대로 세계 인권 선언의 등장 배후에 성경적인 동기가 들어간 걸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21 08:36 2021/06/2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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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다 살아나온 사람

"한글이 목숨"....;;; 이라는 압도적인 문구를 남긴 외솔 최 현배 선생(박사).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한국 교회에 큰 족적을 남긴 안 이숙 여사.

이분들은 대놓고 정치· 군사· 외교 쪽으로 항일 독립 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어 한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라는 자기 관심분야를 통해서 한국은 일본과 같지 않고 우리 민족은 일본이 강요하는 천황 숭배와 전쟁 프로파간다에 따를 수 없음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저것 말고도 굉장한 공통점이 있다. 무엇인지 아시는가?

일제 말기에 투옥됐고, 1945년 8월 18일에 형무소에서 처형될 예정이었는데 그 전날 17일에 극적으로 석방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 이건 검증 가능한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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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현배는 조선어 학회 사건 때문에 1942년에 체포· 투옥돼서 징역 4년형을 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안 이숙의 기록은 정확도가 더 떨어지는 것 같다. 1939년에 일본 국회의사당에서 불온삐라(?)를 뿌린 뒤 체포됐는데 굳이 조선의 서대문도 아닌 평양 형무소에 옮겨져서 해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슨 죄로 징역 몇 년을 선고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둘 다 이북 지역이긴 하네..
(뭐, 주 기철 목사도 정식 재판과 형 선고 없이 그냥 경찰서 명의로 멋대로 구금 당한 채로 옥사함)

이 자리에서 모든 정황 근거를 나열할 수는 없지만.. 일제는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자기 나라가 망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경우.. 식민지의 형무소 죄수들을 몽땅 죽여 버리고, 본토 안에 있는 조선인들도 어떻게든 제압하고 해코지하고 같이 동귀어진할 시나리오 정도는 준비해 놓고 있었다.
히틀러가 전쟁에서 지자 프랑스 파리를 포함해 자기 휘하의 도시들을 몽땅 불살라서 없애려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심리, 같은 이치이다. 북괴도 무력 싸움에서 지게 되면 저런 식의 자폭을 얼마든지 감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원자폭탄 두 방으로 인해 일본이 8월 15일에 갑작스럽게 항복하고 허겁지겁 본토로 돌아간 건 우리 입장에서도 굉장한 호재이고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장기화됐으면 굳이 8월 18일이 아니었더라도 저 사람들 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뭐 광복군이 참전을 못 해서 나라가 분단됐네..? 애걔 그 병력으로 싸우긴 뭘 싸우냐, 아무 영양가 없는 소리이다.

그런데 정말로 쟤들이 8월 18일에 최소한 함흥과 평양.. 전국의 모든/대부분의 형무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지도 않은 죄수들을 제멋대로 한꺼번에 몽땅 죽여 버릴 계획을 세워 놓았었는지는 나로서는 판단을 못 내리겠다. 비밀 행정 명령 문서 같은 거 나오는 게 없으려나..?? 8월 18일이 또 다른 D-day이기라도 했는지 말이다.

2. 일제 말기의 한국 교회 강제 통합

안 이숙 여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시절 얘기를 하나 첨언하자면..
1945년 7월, 우리나라의 모든 기성 기독교 교파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통합되어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이라는 단일 교파로 잠시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이건 갑자기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라 거의 1940년대 초부터 일제가 한 교파씩 야금야금 회유시키거나 없애면서 집요하게 노력한 끝에 이뤄낸 것이었다.

이제 무슨 평양 봉수교회마냥 어용 단일 교파만이 공인 정통이고, 나머지는 몽땅 비인가 이단이 된 것이다. 주 기철 목사가 순교한 지도 1년 넘게 지난 때이고, 내가 보기엔 이건 신사참배 이상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한 더 심각한 문제 같은걸..? 그러나 다행히도 이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일제가 그로부터 겨우 한 달 남짓 뒤에 완전히 패망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시작되었던 1945년 9월 8일,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기존 교단 교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리고 긴 토론 끝에 통합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교파별로 다시 찢어지고 각자 제 갈 길 가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마치 정교분리만큼이나 불가피하면서도 바람직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거야말로 진정한 일제 잔재 청산이었다.

3. 과거 커밍아웃

박 영희 여사는 함흥여고보에 재학 중이던 1942년경, 전혀 의도치 않게 조선어 학회 사건이 벌어지는 빌미를 제공했다. (자세한 내역에 대해서는 이전 글을 참고할 것.)
저분은 그 당시에는 경찰서에 연행돼서 고생 좀 했지만 곧 풀려나고 학교를 무사히 졸업도 했는데.. 그 뒤로 저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엄청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일생의 비밀 흑역사로 치부한 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랬는데 40년이 지난 1982년 여름, 일본에서 자기네 역사 교과서를 개정해서 침략을 진출이라고 수정하고 일본어 강요를 자발적인 일본어 선택 같은 식으로 말을 이상하게 바꿨다는 게 알려지면서 한국과 중국이 크게 반발하게 됐다. 이때 이분은 자신이 조선어 학회 사건의 발단이 됐던 그 여학생 박영희였다고 커밍아웃을 했다.

“아직 나 같은 역사의 증인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놈들은 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너무 뻔뻔합니다. 나 때문에 고초를 겪으신 분들께 너무 죄송합니다” 라고 언론에다 인터뷰를 했다. 그게 1982년 8월 2일자 중앙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것도 지금도 검색해 보면 나온다.

이분은 1982년 당시에 환갑을 앞둔 58세였다고 소개됐다. 그러니 한국식 나이라면 1925년생이겠다.
이분은 그 뒤로 딱히 다른 근황이나 소식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분이 지금도(2021년) 살아 있을 확률은 극히 낮을 것이다. 1982년 이후로 또 거의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있으니..

그리고 저 박영희 여사보다 훨씬 더 유명한 사람.
김 학순 할머니(1924-1997)는 1991년 8월 14일, 자신이 태평양 전쟁 기간에 타지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납치와 윤간을 당하고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하다가 살아서 나온 피해자라고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 증언했다. 요즘 용어를 동원하자면 일종의 ‘미투’ 운동을 시작했다.

박 영희 여사와 거의 같은 연배이고,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시기도 41~42년 사이.. 조선어 학회 사건과 아주 비슷한 시기이다. 그랬는데 전자는 그나마 학교를 다니던 중에 저런 사건을 겪었고, 후자는 그렇지 못하고 더 험한 일을 당했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커밍아웃을 한 시기가 9년 정도 차이가 있다.

최 현배 박사 vs 안이숙 여사 다음으로는 박 영희 여사 vs 김 학순 할머니 비교가 나왔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그래서 나는 1980년대, 길어야 90년대까지 아직 암울하던 시절에 반일 하던 것은 그럭저럭 진정성을 인정하지만, 2010년, 2020년대에까지 뗑깡 부리듯이 되도 않은 반일 거리는 것은 진정성 신빙성을 굉장히 의심하고 반쯤 정신병으로 치부한다.
여사와 할머니라는 호칭은.. 중요한 커밍아웃을 하던 당시의 나이를 감안해서 서로 달리 붙였다.

4. 조선어 학회와 한글 학회의 사무실

정 세권(1888-1965)이라고 일제 시대인 1920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식 부동산 개발 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해서 건축 사업을 진행한 기업가가 있다. (☞ 관련 링크)

일제 시대에는 남산과 남대문에서 가까운 용산-중구 일대엔 일본인이 주로 살았고(지금의 서울/경성 역도 처음엔 이름이 남대문 역)..
좀 더 북쪽으로 서대문 근처 중-종로구 일대엔 조선인이 주로 살았다. 경부선 철도가 맨 처음 생겼을 때는 서대문 역이 경성 역 역할을 했는데 3· 1 운동 이후에 그 구간이 없어졌다.

이에, 정 세권은 일본인의 주거 구역이 서울의 북쪽으로 더 올라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종로구 북쪽에 한옥 주택을 많이 지을 생각을 했다. 지금의 북촌 한옥 마을도 이때 그의 계획에 따라 조성된 주택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항일 독립운동을 적극 도왔다.
특히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던 조선어 학회에다 건물을 기부해서 사무실을 무료로 마련해 줬다~! 영화 <말모이>에서도 주된 배경으로 나오는 그 작업실 말이다.

딱 종로에다가 사무실을 마련해 줬기 때문에 거기서 일하던 간사장 이 극로 선생이 눈병에 걸렸을 때 근처의 공안과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공 병우 박사가 안과 의사에서 한글 덕후 세벌식 타자기 발명가가 되도록 동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사건의 인과관계가 이렇게 연결된다.
정 세권은 건축과 자금으로 민족 정체성(!!)을 지킨 큰 공로가 인정되어 사후에 당연히 각종 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조선어 학회는 해방 후에 한글 학회로 간판을 바꿔 단 뒤에도 장소와 관련된 혜택을 받았다.
지금까지 입주해 있는 광화문 근처의 빨간 벽돌 한글 회관은 197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이거 건립을 위해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애산 이 인 선생이 사재를 무려 3천만 원이나 기부했고.. (당시 현대 포니 승용차 한 대가 230만 원 남짓) 그걸로도 모자라 죽을 때 자기 재산을 몽땅 한글 학회에다 기증했다.

그리고 박 정희 대통령이 1억 원을 기부하고 그걸 당시 영애이던 박 근혜가 직접 전해 줬다고 전해진다.
한글 회관은 이런 식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지어졌다. 4년쯤 전에 블로그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또 한번 이렇게 복습해 보았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18 08:35 2021/06/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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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회중 찬양 인도 회고

* 본인은 다니는 교회에서 10년 넘게 예배 전의 회중 찬송 인도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우한 폐렴 때문에 무기한 중단된 지 1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청년부 특송의 선곡과 지도도 6년 가까이 해 왔다.

1. 현충일 주일

올해는 2010년 이후로 11년 만에 현충일이 일요일(주일)과 겹치게 됐다. (그 전에는 2016년이 윤년이어서 토요일 다음에 일요일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월요일로 이동함.. ㄲㄲㄲ)
그래서 난 이 날은 준비찬송 곡에다가도 조기를 달았다. 바로.. 곡을 몽땅 단조로만 편성했다.

찬송가라는 업계에서 단조는 굉장히 드물다. 이름부터가 괜히 ‘마이너’가 아니다..

  • 중세 엄근진 스타일: “우리 주(여호와) 하나님”이 이 카테고리에서 거의 유일 독점에 가까운 인지도를 자랑한다.
  • 단조이지만 좀 경쾌한 느낌이 드는 CCM: “온 땅이여 주를 찬양” 같은 거..
  • 히브리 민요 스타일: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내가 의도한 건 물론 중세 엄근진이다. 분투와 승리가 아니면 고난, 십자가 장르가 이런 날 어울릴 것이다.
(1) “우리 주 하나님” 다음으로 (2) “온 인류의 구주께서”(behold the savior of mankind)라는 신곡을 발견해서 넣었다. 악보를 읽어보니 “우리 주 하나님”과 거의 같은 중세 엄근진 스타일에 가사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3) “어느 민족 누구게나” 이건 뭐.. 분투와 승리 장르에 있는 절대지존의 단조곡이기 때문에 현충일 주일에 0순위로 광속으로 선택됐다.

끝으로, (4) “밝은 빛을 따라서”는 이스라엘 국가 Hatikvah(희망)와 같은 멜로디이다.
예전에 악보를 처음으로 읽어 보니, 첫 시작이 동요 “썰매” (모두 모두 달려라 달려라)하고 조가 같고 첫 마디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레미파솔 라 라 / 시b …).
그래서 얘도 그 동요처럼 굉장히 경쾌하고 빠른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공식 연주 음원을 들어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훨~씬 느리고 진지한 분위기(?)의 곡이었다.

저런 것들로 곡이 편성됐다.
다만, 세상 음악은 단조라고 해서 마냥 장송곡 스타일만 있는 게 아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기는 좀 그렇지만 댄스곡들도 단조가 많으며, 또 요즘 애들이 단조 음악을 제일 많이 접하는 경로는 누가 뭐래도 게임 BGM이지 싶다. 게임 BGM이 장조이면 분위기가 너무 명랑 발랄하고 안정적으로 바뀌어서 몰입감과 긴장감이 떨어질 것이다.

  • 단조로 시작했다가 중간에 장조로 전환되는 곡으로는 “6 25 노래”(아아 잊으랴), 그리고 송 명희/최 덕신 “동참”(너 고통 당할 때) 정도가 기억 난다.
  • 기독교에는 “부활과 영생”이란 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예배는 분명히 누군가의 죽으심을 기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세상 현충일 기념식과 같지는 않다. “무슨 장례식 온 듯이 깜장으로 조폭처럼 쫙 빼 입고” 마냥 옛날 순교자들을 꺼이꺼이 추모하고 성역화하고 묵념만 하는 게 아니다.
  • 과거에 주일이 9월 18일 철도의 날과 겹쳤을 때는 난 “구원 열차”(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 내지 “다함께 천국행 기차를 탑시다”를 넣기도 했다. 이 얼마나 적절한 선곡인가! ^___^

2. 무반주 생목소리

요즘이야 울 교회가 인원이 늘어서 어지간한 집회(주일 예배, 여름 수련회 집회 등) 때 참석자 중에 피아노 반주가 가능한 사람이 전혀 없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옛날에는 집회를 앞두고 준비 찬송을 불러야 하는데 반주자가 전혀 없을 때가 아주 가끔 있었다.
그럴 때는 부득이하게 인도자인 내가 그냥 무반주 생목소리로 찬송을 부르곤 했다.

그렇게 생목소리로 찬송을 부르는 중에 반주자가 뒤늦게 도착하기도 하는데..
반주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멀뚱멀뚱 기다리다가 다음 곡부터 반주를 하는 게 아니다.
지금 불러지고 있는 부분으로 바로 들어와서 반주를 시작한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내가 무반주 생목소리로도 반주가 있을 때와 아무 차이 없이, 언제나 악보와 동일한 음높이로 찬송가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주자가 악보대로 코드 넣고 반주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다.
반주자가 직접 형제님하고는 아무 때나 이렇게 같이 호흡 맞출 수 있고 반주하기가 편하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서야.. 이 기질이 반주자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난 예나 지금이나 조가 반음이라도 올라가거나 내려간 곡은 다른 곡으로 인식한다. 뭔가 음식이 쉬어서 맛이 변한 것 같은 차이가 느껴진다.
음반에서 G장조로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곡을 Ab 같은 다른 조로 바꿔서 부르게 되면.. 음반을 들으면서 경험했던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색소폰 같은 이조악기를 배울 때도 굉장히 애먹었다.

3. 마구니

한번은 "이 세상의 모든 죄를"이라는 찬송가 3절을 부르던 중..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바른 길을 저버리고 여러가지 죄악으로 주홍같이 되었으니
물 같은 것 가지고는 씻을 수가 아주 없네, 주님 귀한 보배피로 날 정결케 하셨도다"

글자가 순간 "물 같은 것 끼얹어선"이라고 눈에 들어와서 피식 뿜을 뻔했다. 진짜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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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는 방송 타고 퍼지고 있는데.. >_<
순간 아찔했다. 다행히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 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방송사고는 나지 않았다.
어떤 목사가 바둑에 빠져 버려서 기도 마무리를 아멘 대신 '아다리'라고 했네 그게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찬양인도자도 가끔은 마구니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기름이나 화학약품 화재는 물을 부어서 끌 수 없으며, 인간의 죄는 물 같은 걸로 씻을 수 없다.

4. 추억의 특송 편성

예전에도 몇 번 자랑한 적이 있었지만..
본인이 기획했던 역대 교회 청년부 특송 중에서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공들였고 가장 창의적이고 훌륭했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2017년 4월작이었다.

“맑고 밝은 날 / 변찮는 주님의 귀한 약속 /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19세기 찬송가의 앞뒤로 짤막한 1970년대 CCM을 넣은 3곡 메들리이다. (☞ 듣기)

이건 특정 테마 없이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1100여 곡이 수록된 찬송가 책을 거의 2시간 가까이 뒤진 끝에.. 세 곡 조합을 자체적으로 발굴한 것이었다.
박자와 조가 동일하고(E장조 4/4박자), 멜로디와 가사가 모두 연달아 부르기 적합한 곡들 조합 말이다.

세 곡 모두 우리 교회에서 한 번도 불린 적 없었고 나도 모르던 신곡이었다. 처음 보는 곡의 악보를 머릿속으로 읽기만 하면서 “이 곡이 이렇게 끝나니, 다음엔 얘를 부르면 되겠다” 이렇게 시뮬레이션을 하며 곡을 골랐었다.
전주와 간주, 반복 같은 바리에이션도 다 내가 직접 구상했다.
내가 없는 멜로디를 새로 만들어 낼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이미 있는 곡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스킬은 이때 그럭저럭 발휘됐다.

  • “맑고 밝은 날”은 어린이 찬송 스타일의 분위기 띄우는 짤막하고 명랑 발랄한 첫곡.
  • “변찮는 주님의 귀한 약속”은 예수님이 우리의 본보기 예제이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겠다는 가사의 중간 주제곡. <예수 나를 오라 하네>와 후렴 가사가 거의 같다.
    • Where he leads I’ll follow, follow all the way (저거)
    • Where he leads me I’ll follow, I’ll go with him all the way (예수 나를 오라 하네)
  •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는 워십쏭 스타일의 조용하고 우아한 마무리 곡. 특히 조를 올려서 한번 더 반복한다.

지금 다시 보니.. 첫 곡의 마지막 소절 가사 “매일 주님 사랑 따라 말씀대로 살리라”의 원래 영어 가사는 Living each day by the PROMISES in God’s WORD 이다.
그런데 다음 곡 “변찮는 주님의 귀한 약속”은 1절 가사가 Sweet are the PROMISES, kind is the WORD이다.
우와~~! 대박인데? 영어로 불렀으면 똑같이 약속과 말씀이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시너지 효과가 더욱 커졌겠다. 이어서 부르기 더욱 적절한 조합이었다.

교회에서 특송이 계속됐으면 나도 이런 것들 연구를 계속하고 더 많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만..
이게 중단된 지가 벌써 어언 1년 반이 돼 가니 아쉽고 안타깝다.
나야 이 타이밍에 맞춰 청년부 졸업 준비를 하니 그나마 타격이 덜하지만, 20대 시절, 대학 시절의 추억이 집콕과 마스크에 가려져 삭제된 세대는 좀 안습한 처지가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15 08:35 2021/06/1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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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셋 한글 입력기 10.2 이후로 약 3개월 만에 다음 버전인 10.21을 공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타자연습도 오랜만에 버전업을 해서 3.93이 나왔다. 하지만 둘 다 0.01밖에 증가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한글 입력기는 (1) 보조 입력 도구(화면 키보드, 문자표 등)들을 구동하는 엔진 개선, 그리고 (2) 세벌식 동시치기 기능 강화.. 이 둘을 10.x 중반에서 마무리 짓고 나서 내부적인 자체 기능 개발은 이제 진짜 끝을 내려 한다. 이것 말고 ARM64 지원이나 크롬 브라우저 이슈(미래에 또 발생한다면) 같은 건 외부 이슈들이다.

이번 버전은 지난번 개발 근황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크롬 브라우저 보정 내역 업데이트, 보정 UI의 보강, 여러 UI 개선과 버그 수정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추가로 발생한 변화 내역은 다음과 같다.

1. 설치 UI에서 간략한 입력 설정 초기화 기능 제공

프로그램을 설치할 때 다음과 같은 선택 단계를 추가했다.

물론 이것들은 설치를 마친 뒤에 날개셋 제어판을 꺼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사용자가 원한다면 프로그램을 제거/재설치하면서 입력 설정도 같이 싹 리셋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한글 로마자 입력 방식은 사용자가 원한다면 특별히 이렇게 바로 지정 가능하다. 제어판을 꺼내서 로마자 입력기 빠른설정을 번거롭게 불러올 필요조차 없다. 안 그래도 내 프로그램은 아직 영문 도움말도 없는데(UI만..) 외국인이 Windows 환경에서 한글 로마자 입력 방식을 더 간편하게 쓸 수 있게 했다.

2. 한글 출력 치환 관련

한글 출력 치환은 문자 생성기를 ‘고급’으로 지정했을 때 사용 가능한 기능으로, 내부적으로는 한글 입력 상태이지만 겉으로 비한글 문자가 섞여서 표시되는 처리를 담당한다.
여기서 비한글 문자라는 건 한글 자모를 여러 자로 풀어서 표현하는 것도 포함된다. 간단하게는 히라가나/가타카나 같은 일본어 문자를 한글로 입력하는 것(글자 단위 치환)부터 시작해 한글 한 글자의 범위를 넘어서는 온갖 복잡한 한글 입력 동작을 이 기능으로 구현할 수 있다.

한글 한 글자라는 경계를 기본 입력과 고급 입력으로 구분한 것은 개인적으로 오랜 연구와 고민의 결과였다. 그렇잖아도 고급 입력기는 통상적인 한글 조합과 무관한 사용자 정의 조합을 자체적으로 제공하기도 하니, 한글을 조합하고 있을 때는 이런 customization을 제공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기도 하다.

아무튼.. 이 기능이 지금까지는 아무 낱자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인 0낱자에 대해서는 치환이 지원되지 않았는데, 이번 버전에서는 이것도 가능하게 했다. 즉, 글쇠가 아직 눌러지지 않은 성분에 대해서 기본적인 치환 문자열이 미리 표시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출력 치환 기능은 ‘기본’ 입력기에서 이미 제공하고 있는 가상 낱자와 같이 맞물려서 동작한다. 출력 치환이 걸리고 있는 낱자는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는 0으로 치환되어서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제어판 UI에서 물리적인 낱자가 존재하지 않는 300, 500 같은 영역에서 문자열 치환을 지정했다면, 그 낱자 자신은 0으로 치환되도록 가상 낱자 규칙도 자동으로 추가되게 UI 동작을 개선했다.
이제 낱자 단위 출력 치환 설정을 한 뒤에, 가상 낱자에다가도 0치환을 추가하는 번거로운 두벌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타자연습은..

  • 기본 연습글에 UN 세계 인권 선언문을 추가했다. 수백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이라는 개념을 세계 각국의 법률에다 각인시킨 역사적인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말 번역이 심하게 길고 어색하고 장황한 번역투인 것은 좀 아쉽다.

  • 내 프로그램은 인터넷 유행어와 개드립이 연습글로 수록되어 있는=_=;;; 게 조금씩 입소문을 타면서 주목받고 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과 "독일의 과학력은 세계 제이이이일!!"을 추가했다. 김 성모 어록, 세스코 질답 모음, 부산 운전 후기, 클레멘타인 영화 감상평, 어둠에다크에서 따위는 한참 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들이고..

  • 사소한 사항이지만.. 긴글 연습 입력란을 감싸는 두꺼운 테두리도 고전 기본 스타일이 아니라 다른 창들과 마찬가지로 테마가 적용된 새끈한 형태로 변경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 근래에 타자연습 프로그램이 바뀌어 온 건 멀티모니터 지원, 1픽셀 여백 반영, 그리고 테두리 모양.. 이렇게 정말 소소한 것들밖에 없는 듯하다.;; 그런데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반영하고 버전업을 해야 한다.

이상이다.
2021년 현재까지도 공 병우 박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벌식 자판을 사용하고 10년 이상 날개셋 브랜드 프로그램들을 애용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린다. 정말 느리고 몇 번이나 양치기 소년 같은 불발탄 선언으로 그치긴 했지만, 이 프로그램의 주된 기능 개발도 정말 끝이 보이고 있다.

한글처럼 알파벳이나 한자와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문자가 애초부터 아예 없었다면 모를까, 기왕 있다면 그 한글의 구조적인 장점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 세벌식 자판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윤디자인에서도 한글 IME를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됐다. 오.. 2019년이면 한컴에서 IME를 만든 때와도 얼추 비슷해 보이는데?
내가 대학교 말년, 날개셋 버전 3.x 시절에 TSF라는 규격을 만지면서 낑낑거리고 나서 한 13~15년쯤 뒤에야 다른 싸제 TSF 기반의 한글 IME도 조금씩 만들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작년에는 잘 알다시피 ‘나빌’이라는 입력기도 나왔고..

유튜브에다가 새마을호 Looking for you 동영상을 올리던 시절에만 해도 이런 마이너한 곳에 한국어 댓글이 달릴 일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댓글 천지가 됐듯이..
중국?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TSF 쪽 API를 파는 사람은 전국에서 나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런 IME도 개발되어 나온다니 일면 반갑다.

IME들 간에 평범한 기능들은 결국 다 비슷비슷하게 제공되고 격차가 없어져서 상향평준화 수렴진화할 것이다.
하지만 타 IME들이 결국은 이미 있는 글자판이나 옵션들 몇 가지만 지원하는 반면,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세벌식에 특화돼 있고 입력 동작의 모든 면모를 프로그래머 수준으로 customize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른 제품들과는 근본적인 차별화 요소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13 08:35 2021/06/1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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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0년대 중반의 제품 데모: 3D Studio R3, Windows 95

인터넷이란 게 없던(= 가정용으로 널리 보급되지 않은) 시절에 컴퓨터로 바깥의 최신 문물을 접하는 방법은 기껏해야 PC 통신, 아니면 컴퓨터 잡지와 함께 배포되던 부록 CD였다.
그런데 모뎀으로 접속하던 PC 통신은 접속 시간에 비례해서 부과되는 전화비의 압박이 심했으며, 전송 속도도 지금의 인터넷 전용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느렸다. 그렇기 때문에 수십~수백 MB 이상의 대용량 자료를 배포하는 수단으로는 CD 같은 물리적인 매체가 여전히 의미가 있었다.

PC 통신 자료실이건, 잡지 부록 CD건, 이런 매체에는 유명 소프트웨어의 무료 체험판과 데모가 많이 포함돼 있었다. 유료로 판매되는 제품에서 일부 기능만 사용할 수 있거나 사용 기간이 제한된 것 말이다. 아니면 애초에 사용자가 조작해 볼 수 있는 기능은 없고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처럼 일방적인 기능 소개와 화면 시연만 들어있는 데모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 중 본인이 인상깊게 봤던 것은 3D Studio R3.. 3DS에 MAX라는 이름이 붙기도 전, 게다가 도스용이 존재하던 시절 버전의 데모이다. 이거 화면을 유튜브에서 다시 보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유튜브에 별별 것들이 다 올라온다..;; (☞ 링크)

요즘 같으면 파워포인트.. 하다못해 플래시로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몇몇 화면 전환이나 프로그램 실제 화면 애니메이션 같은 건 난이도의 압박이 있을 것 같다.
1994년에는 아직 플래시도 없었기 때문에 도스에서 exe 형태로 저런 프레젠테이션 데모만 제작하는 전문 업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소개하고 싶은 것은.. 국내에서 제작됐던 Windows 95의 데모 겸 기초 기능 튜토리얼이다. 95~96년 사이에 이거 보신 분 계신가..?? (☞ 링크)

"윈도우즈 구십오", "엠에스 더~스" 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여성 나레이터 목소리가 찰지게 느껴진다.;;
도스와 Windows 3.1의 타성에 젖어 있던 사람들한테 시작 메뉴와 바탕 화면, 탐색기, 단축 아이콘(현재 명칭은 '바로가기') 개념을 처음으로 가르치고 홍보하느라 마소에서 그 당시에 돈 엄청 많이 쓰긴 했다.

이 데모 프로그램은 Windows 95 한글판의 CD에 포함된 프로그램은 아니었는데 어느 경로로 유포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냥 PC 통신이나 잡지 부록 CD였는지..?

2. 게임 데모

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 싶은데.. 과거에 스티브 잡스는 소수의 추종자 매니아를 양성하는 식으로 제품을 판매한 반면, 빌 게이츠는 정말 통 크게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전세계에 컴퓨터를 보급해서 세계인들의 생활을 확 바꿔 놓고, 그 컴퓨터라는 기계에 우리 회사의 운영체제를 몽땅 뿌려 버리겠다는 심보로 장사를 했다.

그래서 Windows 95에서 드디어 32비트로 체제를 바꾸기도 했으니.. 얘를 본격적으로 게임용 홈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으로 만드는 일에 가히 사운을 걸었다. 그래서 거의 곧장 DirectX를 만들었으며, 특히 세계적인 히트를 치고 있던 Doom 2 게임 정말 0순위로 Windows용으로 포팅을 지원해 줬다.

PC에서, 그것도 DOS가 아닌 Windows에서 텍스처 매핑이 적용된 실시간 3D 게임이 돌아간다는 건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Windows는 그저 지뢰찾기나 카드 게임 같은 가벼운 게임만 하는 플랫폼이라는 고정관념이 드디어 깨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Windows 95 원본 CD에는 Hover!이라고.. 범퍼카를 몰고 맵을 돌아다니며 깃발을 상대방보다 먼저 뺏는 게임이 있었다. 마소가 게임 전문 개발 업체는 아니지만, 이건 외주가 아니라 마소에서 직접 개발했던 듯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얘는 비록 세계적인 명작인 Doom만치 막 박진감 넘치는 요소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그래픽은 Doom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초보적이나마 1층 공간 위에 2층이 구현돼 있기도 했다는 점에서 Doom 엔진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Windows 95와 거의 동시에 Fury라고.. Hover의 공중 버전 내지 윙 커맨더의 축소판 같아 보이는 게임도 개발돼 나왔다. 얘는 외부 개발사와 합작 내지 외주 형태로 개발됐고 Windows 95에 포함돼 있지는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임 진행은.. 뭐 공중을 날아다니면서 총 쏘고 부수는 것 정도만 기억에 남아 있다.
마소는 Fury니, Hover!이니 하는 아기자기한 게임들을 같이 내놓으면서 우리 Windows 95는 저런 화려한 3D 그래픽이 가능한 게임용 플랫폼이라는 걸 기를 쓰고 내세웠던 듯하다.

그러고 보니 Win95의 발매 직후에는 DirectX라는 것도 아직 완전 듣보잡이거나, 버전이 2~3 이러던 시절이었을 텐데.. 3D 그래픽 가속이라는 건 퀘이크도 나오고 최소한 96~97년, Voodoo니 뭐니 하던 게 나온 시절부터 주목 받았을 텐데 저런 게임들은 CPU빨만으로 3D 그래픽 애니메이션을 구현했던 건지 궁금해진다.

끝으로, 비록 저렇게 1인칭 3D는 아니지만 3D 핀볼이라는 유명한 번들 게임도 있었다. 얘는 나름 Windows 3.1 + win32s에서도 돌아갔던 까마득한 옛날 프로그램이다.
마소에서 외부 업체로부터 소스 코드를 구입해서 자사 제품에다 포함시켰는데.. the old new thing 블로그에서의 회고에 따르면 코드가 주석 한 줄 없이 도저히 유지보수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훗날 Windows가 32비트에 이어 64비트로 갈아탈 때가 임박했는데, 얘는 내부적으로 오프셋 계산에 문제가 있었는지 64비트에서는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고 어디를 고쳐야 할지를 알 길이 없었고, 그렇다고 얘는 오픈소스화가 가능한 물건도 아니다 보니 64비트에서는 핀볼이 결국 짤리게 되었다.
그 외부 업체가 코드를 컴파일만 가능하고 유지 보수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형태로 일부러 변조해서 줬던 것 같다.

3. 왓콤 win386

1990년대에 왓콤(Watcom)이라는 컴파일러 제조사는 PC의 도스 환경에서 32비트 프로그램의 개발 환경을 시세 대비 매우 저렴하게 제공한 일등공신으로 칭송받았다.

그 시절에는 아직 386/486급 PC의 가격도 아주 비쌌고, 32비트 코드 생성을 지원하는 컴파일러도 비쌌고, 특히 도스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돌아가게 해 주는 DOS Extender도 아주 고가였다. 그런데 왓콤은 32비트 컴파일러와 무료 번들용 DOS extender까지 아주 파격적인 가격에 보급했던 것이다. 그러니 아주 전문적인 대형 고급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분야에서 수요와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볼랜드나 마소 같은 주류 컴파일러 제조사들은 그저 16비트에 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왓콤의 무서운 면모는 도스용 32비트 개발툴만 만든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초, 아직 Windows NT 3.1이 정식으로 나오기도 전에 멀쩡한 Windows 3.0/3.1를 마개조해서 32비트 코드를 구동해 주는 win386 Extender를 개발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32비트 코드를 생성하는 Windows 타겟용 컴파일러를 덤으로 보급했다. 기존의 16비트짜리 도스/Windows API를 호출할 때는 물론 입출력값을 변환할 테고 말이다. (☞ 더 자세한 소개)

이게 내부적으로 어떤 원리로 동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날의 Windows NT처럼 PE 포맷을 사용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긴, 16비트 시절에는 Windows용 한글 바이오스(한메한글~!!)도 있었으니, 뭔가 시스템 내부를 마개조하기가 더 쉬웠던 것 같다.
당장 마소에서 옛날에 개발했던 FoxPro 2.5~2.6이 왓콤 win386을 기반으로 개발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마소 본가에서 Windows NT를 출시해서 32비트 Windows API가 제대로 정립되고, 32비트용 Visual C++ 1.0과 win32s 같은 게 줄줄이 나오면서 왓콤 win386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됐다.
Windows의 32비트화 내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real 모드: 1.0~3.0 (1985~1990) 사실상 640KB 기본 메모리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초 열악 모드.
  • 286 standard: 2.0~3.1 (1987~1993) real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정확하게 언제 처음으로 등장했고 차이점이 뭔지 존재감이 매우 없음.
  • 386 enhanced: 3.0~ (1990~??) 아직 32비트 코드를 시행하는 건 아니지만 도스창을 완전히 가상화할 수 있고 확장 메모리를 더 사용 가능함.
  • Win32s: 3.1 (1992~1996) 딱 32비트 코드 실행만 가능한 최소한의 모드
  • Windows 9x: 95~ME (1995~2000) 프로세스 별 주소 공간이 독립하고, 멀티스레드가 가능해짐
  • Windows NT: 3.1~10 (1993~현재) 유니코드 기반, 온전한 메모리 보호, 16비트 코드의 완전 가상화까지 실현

사실 386 enhanced mode라는 건 Windows 3.0 이전에 2.x의 386 에디션에서 최초로 도입되긴 했다. 하지만 이건 마치 Windows XP의 x64 에디션만큼이나 존재감이 없다.

4. 오 성식 생활 영어 SOS

우와~~ 이거 정말.. 추억의 멀티미디어 CD 타이틀이었다. (☞ 링크)
그 시절에 ToolBook이라고 CBT 멀티미디어 교육용 소프트웨어 저작도구가 있었는데..
쟤도 바로 툴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었다.
컴터에서 avi 허접 동영상이 재생된다는 것만으로도 왕창 신기하던 시절에 나왔던 물건이다.
저 타이틀에서는 도움말 나레이션만 낭독한 이 보영 씨 역시 현재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는 유명 영어 강사이다.

그 뒤 저런 멀티미디어 컨텐츠를 만드는 플랫폼은 플래시로 넘어갔다가..
요즘은 플래시를 쓸 필요도 없이 저런 건 그냥 웹에서 HTML5 자바스크립트만으로 다 처리 가능하게 된 지 오래다.

쟤는 프로그램을 바로 종료하려 하면.. "공부라는 건 최소한 50분은 넘게 집중해서 해야 효과가 납니다. 그래도 지금 바로 종료하시겠습니까..."라는 확인 질문이 떴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접했던 소프트웨어들 중 가장 훈계조로 종료를 저지하는 물건이었다.
반대로 Doom 2 게임은 온갖 농담 조크를 날리면서 종료를 저지했던 프로그램이고..

인트로 화면 보소..
딱 미리내 소프트웨어 "그 날이 오면 3" 게임의 인트로와 비슷한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가..??

레 솔솔 라 레레 솔 라시 레 시라솔 라~~
25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나는 멜로디를 정~확하게 녹음기로 틀어 놓은 듯이 기억하고 있다. 초딩 나이로 워낙 환상적인 경험이어서...

Credits를 보니.. 요 아름다운 인트로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 이 영수 교수(1951-2018. 영남 대학교 음대 작곡과)였다고 나온다.
어머니의 마음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의 멜로디를 만든 작곡가 이 흥렬의 아들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10 08:36 2021/06/1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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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이야기

물리학이 작용 반작용이 어떻고 하다가 전자기력, 핵력 따위를 다룬다면, 화학은 산과 염기가 어떻고 극성과 무극성(수용성 지용성..), 유기물과 무기물이 어떻고를 논하는 꽤 오묘한 과학 분야이다.
다만, 화학과하고 화학공학과는 일반 음대와 실용음악, 물리학과와 기계/전자공학, 심지어 언어학과 문예창작(!!)이 다른 것 이상으로 공부하는 것과 지향하는 바가 매우 다르다.;;;

20세기 이래로 인류가 누리는 복 중 하나인 합성섬유와 플라스틱, 냉장 냉동 시설의 냉매, 휴대용 전자기기에서 쓰이는 고성능 배터리, 이것 말고도 각종 저렴한 인조 물질들을 존재 가능하게 한 것이 화학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의 다이어그램에서 파랑이 아닌 주황색 화살표는 아무래도 물리보다는 화학의 비중이 더 큰 영역이라 생각된다.
그림에서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열을 효율적으로 내기 위해서 연료를 잘 정제하는 것도 응당 화학의 몫일 테고.. 그러니 화학 회사는 전지 쪽이든 석유 쪽이든 '에너지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좀 있다.

비전공 화알못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화학에서 굉장히 의미심장 대단한 변화/발견이라고 생각하는 건 다음과 같다.

1. 산과 염기 정의의 확장

전자기학에서 + -라는 양극을 다루는 것과 비슷하게 화학에서는 산과 염기라는 상극 개념이 있다. 그런데 그걸 엄밀하게 정의하는 게 은근히 난감했다.
처음에는 물에 용해됐을 때 H+ 이온을 내놓는 물질이라고 비교적 단순하게 정의됐는데(19세기 아레니우스의 정의).. 나중에는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예: 수용액이 아닌 곳에서는?).

그래서 화학에서도 산· 염기의 특성을 더 미시적으로 규정한 새로운 정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비전공자로서 본인이 기억하는 건 루이스의 정의 정도가 전부이다.
이런 게 물리로 치면 미터와 초의 정의가 더 엄밀하게 바뀌는 것과 비슷하고, 수학에서 음수의 거듭제곱이나 로그, 팩토리얼, 제타 함수 따위를 대수적으로 확장하여 정의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스타에서 디바우러가 뱉어내는 독성 물질이 설정상으로는 산성의 독액이다.;;
글쎄, 황산 염산에 비해 강염기가 금속을 녹인다는 말은 딱히 못 들어 본 것 같다. 하지만 생체 단백질을 녹이는 성능은 염기도 산보다 더하면 덜하지 결코 못하지는 않다.

그나저나 염기하고 '알칼리'의 차이는 뭐지..?? 단순 별칭인가?
원래는 동일한 개념인데 지질학인가 특정 분야에서는 둘을 약간 다른 용도로 구분해서 쓰지 싶다.

2. 유기물의 합성

인류는 연금술을 이용해서 구리에서 금을 '저렴하게' 인위로 만들어 내는 건 성공하지 못했다.
(오늘날은 뭐.. 입자 가속기 돌려서 원자 단위의 조작을 가해서 금을 이론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실패 확률이 매우 높고 초극미량밖에 안 생기는데 비해 가속기 돌리는 비용은 가히 살인적.. 그냥 금은방에서 금 현물을 구입하는 게 더 쌀 정도로 가성비가 안 맞을 뿐이다. 물질을 원자 수준에서 본성을 유지시키는 원초적인 힘은 매우 매우 어마어마하게 강하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 기술로도 제어하고 조작하기가 몹시 어렵다.)

그 반면, 인간이 금 생성 대신 다른 영역에서 성공한 것이 있는데.. 바로 요소라는 유기물을 실험실에서 자체적으로 합성해 낸 것이다.
그 전에는 고온에 노출됐을 때 곱게 녹고 달궈지고 증발하기만 하는 물질과(비등점), 불이 붙어서 에너지를 내며 활활 타고 재가 되는 물질(발화점).. 동식물 생명체로부터 유래된 물질은 근본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그 통념이 깨지게 됐다. (플라스틱만 해도 열가소성 수지와 열경화성 수지로 나뉘는 걸 생각해 보자~!)

금을 인위로 만드는 것과 동급으로 불가능이라고 여겨졌던 유기물의 인위 합성(무기 화합물로부터)은.. 프리드리히 뵐러라는 독일 화학자가 1828년에 최초로 성공했다. 수학으로 치면 초월수임이 최초로 증명된 수, NP 완전 문제임이 자가증명된 최초의 문제와 비슷한 지위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연소와 관련하여 플로지스톤설이 부정되고, 생명의 자연발생설이 부정되고,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는 것이 알려진 것과 비슷한 급의 혁신이었다. 19세기에 물리학에서 전자기학이 새로 태동한 것처럼, 화학에서는 복잡한 탄소 화합물의 분자 구조를 다루는 유기화학이라는 난해한 분야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요소 말고 다른 유기물들도 실험실에서의 합성 성공 사례가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왔다.

3. 암모니아, 아세톤의 합성

역시 독일의 화학자인 프리츠 하버는 1909년, 공기 중의 질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공법을 개발했다. 이 덕분에 질소 비료를 원하는 만치 인위로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고 콩이나 휴경 같은 자연 요법 없이도 지력을 유지하며 농사를 계속해서 지을 수 있게 됐다.

이건 정말 '공기로부터 빵을 만드는 기적'을 행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식량 생산이 인구 증가를 못 따라간다는 맬서스 트랩이 이 업적 덕분에 불식되었다.
그래도 이 사람도 구리로 금을 만들지는 못했기 때문에 조국 독일의 1차 대전 패전 배상금을 갚기 위해서 바닷물을 대량으로 증발시켜서 거기 녹아 있던 금을 추출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건 가성비가 안 맞아서 곧 포기..

비슷한 시기에 '하임 바이츠만'이라는 영국계 유대인 화학자는 또 다른 유기물인 아세톤을 인위로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해서 화약의 대량 생산과 1차 대전 연합국의 승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그거 보답으로 유대인들이 들어갈 팔레스타인 땅을 요구했고,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까지 됐다. 프리츠 하버와 하임 바이츠만의 비교는 수 년 전에 이미 한 적이 있으니 여기서는 그냥 링크로 대체하겠다. (☞ 링크)

20세기 전반은 정말 화학 강세였던 시절 같다. 정확하게는 화학공학..

Posted by 사무엘

2021/06/07 08:33 2021/06/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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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질적이지 않은 오해와 중상모략

세상에는 기독교의 탈을 쓴 이단 사이비가 여럿 있다. 이단들은 단번 속죄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를 이상하게 배배 꼬는 경향이 있다.
아예 구원의 상실,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건 예사이고, 반대편 극단으로 가서 이제 죄 용서 받았고 구원받았고 무슨 짓을 해도 지옥은 안 가니 "니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 심지어 일체의 참회나 회개를 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롬 6:1-2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헛소리를 하는 곳도 있다.

이런 소리를 정상적인 크리스천이 들으면 "그건 성경의 가르침을 일부만 그것도 아주 잘못 적용한 이단 교리일 뿐이다. 성경은 그런 막장 결론을 의도하거나 조장하지 않으며, 우린 그런 가르침하고는 아무 관계 없다"라고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영화 밀양에서 묘사된 것처럼 "나는 신에게 다 용서받았으니까 괜찮아~" 이러는 양심 마비자를 제정신 박힌 크리스천이라고 간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비슷한 논리로, 진화론에 대해서도 진화론적 세계관, 무신론, 유물론, 우생학, 사회 진화론 이런 것까지 연루시키면서 이놈의 사탄 마귀적인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서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생겨났고 젊은이들의 정신이 황폐해지고 어찌 됐네 이렇게 프레임을 씌운다면... 단순히 과학 이론으로서 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하고는 더 대화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진화론자라도 "흑인은 인간과 짐승 사이에 진화가 덜 된 생물이다" 이딴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개인적인 소신은 당연히 "이 우주와 생명이 우연히 저절로 생긴 게 아니고 절대자가 있다"라는 신의 창조이다. 그 정도 진화가 가능하다고 해서 인간 정도의 고등한 생명체가 그런 진화의 산물로 저절로 생기는 건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믿음을 발휘할 영역과 과학 관찰로 승부할 영역,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파생 효과 내지 오해· 중상모략 같은 것은 분명하게 분간해서 주장해야 할 것이다.

2. 과학 관찰은 종교색과 무관

이 세상 학계에서는 누구 말마따나 그저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서 과학 시간에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는 걸까? 20세기에 천문학계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생각해 보면, 이 문제를 좀 다른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천동설과 지동설, 창조와 진화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천문학계에서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대폭발설(일명 빅뱅)과 정상 우주론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당시엔 두 이론이 모두 상대편 이론을 완전히 제압할 정도로 과학적 증거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심상을 고려하면 오히려 빅뱅이 뭔가 시작과 기원, "빛이 있으라" 같은 창세기 1장 느낌이 물씬 풍긴다. 게다가 빅뱅이라는 개념을 1930년대 초에 최초로 제안했던 사람은 천문학자 겸 현직 가톨릭 신부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무신론 과학자들은 이를 심리적으로 거부했다.

이와 달리 정상 우주론--딱히 기원이 없고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하게 있음--은 벧후 3:4의 심상과 비슷하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이건 잘못된 사고방식이라고 깐다. -_-;;
그랬는데.. 훗날 우주 배경 복사라는 게 발견되면서 이 주제는 빅뱅이 맞는 것으로 사실상 결론 지어졌다. 정상 우주론은 천동설 급으로 완전히 폐기된 건 아니지만 거의 소수설 비주류로 전락했다.

요지는.. 세상 학계도 과학적인 증거만 있다면 창세기 냄새가 좀 풍기는 학설이라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공립 학교에서 과학 시간에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세상 인명 사전에서 예수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다음으로 "사흘 만에 부활했고 승천했다"라고 차마 쓰지 않는/못하는 것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비슷한 예로 초능력이니 UFO니 하는 것도 꼭 기독교계에서 사탄의 미혹 운운하며 난리를 치지 않더라도,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하지 않으면 이 바닥 종사자들이 알아서 배척한다.

물론 과학이 만능은 아니고 과학으로 알 수 없는 현상도 많다. 하지만 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지성은 최소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정작 창조 과학 진영에서는 빅뱅을 여전히 배척한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빅뱅이 기원이라는 개념 자체는 성경과 일치하지만 연대기는 젊은 우주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창 1:1,3이나 벧후 3:4가 지구를 넘어 우주의 기원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구절인지 잘 모르겠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땅의 원 위에 앉으신 이"가 딱히 지구가 둥글다는 걸 말하지는 않으며, 계시록에 나오는 "땅의 네 모퉁이"가 지구가 평평하다는 걸 말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성경에 따르면 세상이 과거에 있었던 세상, 현 세상, 다가올 세상이라는 세 종류가 존재하고 하늘도 세 계층이 있다는 것 정도까지만 알 수 있다. 그 개념이 현대의 지질학이나 천문학이 밝혀낸 자연의 모습과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인간이 적절히 잘 풀어야 하는 숙제일 것이다. 다만, 성경이 문자적으로 사실이기 위해서 반드시 젊은 우주, 젊은 지구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본인의 소신이다.

3. 창조 과학의 정체성

창조 과학회라는 곳에서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 성경 내용은 문자적으로 옳고 정확하며, 과학적으로 사실이다.
  • 이 세상(우주, 지구, 생물..)은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질 수 없으며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 지구와 우주의 나이는 젊다.

성경이 오류가 없고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은 본인도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창세기의 6일, 계시록의 1000년이 대표적인 예이다. 성경에 나오는 각종 인물, 명칭과 숫자들, 사건들은 대놓고 비유 허구라고 명시된 게 아닌 한 당연히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정확한 레알이다. 피나 일부 위생 관념에 대해서 말한 것은 분명히 시대를 앞섰던 것도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성경이 원자와 분자를 논하고 definition, theory, lemma가 나오는 이공계 학술서적 스타일로 저술된 책은 또 아니다.
성경에는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만 나오지, 당장 금성 화성 목성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난 성경에 딱히 지구 자체가 둥글거나 평평하다고 말하는 암시는 없다고 생각한다. 욥기 38장에서 하나님의 질문은 이런 식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내가 우주를 한 점에서 시작해서 대폭발 시킬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니가 인간 DNA의 염기 서열을 아느냐? 양성자와 중성자가 서로 붙어 있고 전자가 원자핵을 돌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고 그게 무엇 덕분에 가능한지 니가 아느냐?
길바닥의 이끼도 해내는 광합성의 명반응 암반응 메커니즘을 니가 아느냐? 네가 전자기파의 속도가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능히 측정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성경이 문자적으로 사실이긴 한데.. 도대체 어느 문맥과 scope까지 문자적인 사실인지, '모든'이라고 했을 때 얘는 도대체 어느 범위의 전체를 말하는 건지 정도는 그래도 최소한 성경이 자체적으로 정해 놓은 원칙에 따라 분간을 해야 한다. 그러니 창조 과학이라 해도 과학뿐만 아니라 바른 신학을 저변에 깔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 지적 설계는 심증으로서는 매우 유력하며 신앙을 갖기에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시 19나 롬 1:19가 말하는 일명 자연 계시 말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는 과학으로 증명도 반증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이것이 과학의 관점에서 '물증'이 될 수는 없다.
이건 당연한 귀결 아닌가?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조금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창조 과학 진영에서 위의 두 명제.. 즉, 성경의 사실성과 지적 설계를 입증하기 위해서 그 다음으로 끄집어낸 카드가 바로 젊은 지구이다.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젊다는 학설? 가설 자체는 신학하고 전혀 무관하게 오로지 과학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분야이다.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질 수 없다', '성경은 사실이다' 이런 것과는 좀 성격이 다르다.

이게 제대로 진행됐다면.. 세상 학계에서도 "난 무신론자여서 성경이니 신이니 그딴 건 모르고 믿지도 않음. 하지만 그와 별개로 지층을 관찰하고 물리 법칙을 생각해 보니 우주와 지구의 나이는 1만 년 이내로 보인다" 이렇게 주장하는 과학자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창조 과학이 성경과 과학 중 하나라도 제대로 잡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무척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나로서는 젊은 우주/지구에 대한 일말의 증거가 있다면 그건 아담 이래로 재창조된 현 세상의 연대기가 젊다는 과학적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 good luck~! 우주 배경 복사나 방사선 연대 측정법의 허를 찌르면서 부디 과학계에 좋은 기여를 하길 바란다. 무슨 지구 온난화 허구설, 지구 평평 같은 이상한 유사과학 음모론으로 치부되지 말고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04 19:35 2021/06/0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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