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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개발 17주년을 앞두고 있고 9.0 버전에 진입했다. 지금까지 참 멀고도 긴 길을 가 왔다.

일단 계획대로라면 9.x는 지금 내 처지가 크게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진입하는 마지막 버전대가 될 것이다.
9.0 이후의 다음 버전은 가을쯤에 나올 9.1을 목표로 하고 있다. 8.8 이후로 계속 0.1씩 찔끔찔끔 올라가는구나. 오랜만에 새로운 분야인 ‘보조 입력 도구’ 분야의 기능 개선과 강화를 진행한 뒤, 그 다음 버전, 아마 9.3쯤이 세벌식 관련 총체적인 동시치기 시스템을 구현한 버전이 될 것이다.

그때쯤 되면 드디어 핵심 필수 기능 개발 to do 리스트가 비게 될 것이고, 그 뒤엔 나도 박사 졸업도 하고 결혼 같은 다른 거사도 치뤄야 되니, 지금 같은 가중치를 둔 프로그램 개발은 당분간 쉴 것이다. 완전 새로운 입력 기능 추가나 대규모 리팩터링은 뒤로 미루고, 버그 수정, 보안 패치, 그때 그때 생각나는 마이너 버전업만 할 것이다.
아무튼.. 지난달에 한번 9.0 개발 근황을 공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후로 9.0에는 또 여러 새로운 기능들이 또 들어갔다.

1. 24픽셀 글꼴 표시 지원

이번 9.0은 지난 1.0부터 8.x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많은 사용자들이 바라고 있었지만 전혀 이뤄진 적이 없었고, 안타깝지만 프로그램 구조의 한계상 앞으로도 당분간 이뤄질 일이 없을 거라고 부정적으로 못을 박았던 기능이 하나 드디어 극적으로 실현되었다.

바로.. 16픽셀 비트맵 글꼴의 한계를 아쉬운 대로 깨고 더 큰 글꼴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종전보다 50% 더 큰 24픽셀 비트맵 글꼴이다. 이 소식을 전하게 된 것을 본인은 기쁘게 생각한다. 시기적으로도 딱 적합한 숫자인 9.0 버전에서 실현됐다.

그냥 한글 입력 엔진 쪽으로 원래 계획했던 기능들만 구현했으면 그것만으로도 8.9에서 0.1 정도의 변화는 충분했으며, 5월 말쯤에 9.0 버전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고해상도 디스플레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지 오래이고, 세 주 남짓 부랴부랴 진행된 추가 작업은 내 프로그램이 그런 고해상도 디스플레이에 대응하는 뜻깊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24픽셀은 글자를 표현할 공간이 16픽셀보다 두 배 이상 더 넉넉하다. 복잡한 옛한글이나 한자를 더 선명하고 깔끔하게 표현할 수 있으며, 알파벳과 현대 한글 정도면 가로· 세로가 모두 2픽셀인 진한 글꼴도 무리 없이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크기는 화면 출력용으로 오랫동안 대중적으로 쓰인 16픽셀에 비해 글꼴이 매우 부족하다. 그리고 16픽셀은 너무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앗싸리 쑤제 도트 노가다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비트맵 글꼴이 많지만, 24는 비트맵으로 일일이 찍기에는 좀 크고 그렇다고 윤곽선 방식만으로 그리기에는 정교한 힌팅 없이는 여전히 보기 안 좋다.

그래서 이번 9.0에서 곧장 들어간 24픽셀 한글 글꼴은 일단 아래아한글 1.x 도트판에서 추출한 인쇄용 명조· 고딕· 샘물· 필기 4종이다. 과거에 인쇄용으로 쓰던 글꼴을 이제 화면에서 일상적으로 보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도스용 태백한글에도 8*4*4 도깨비 형태로 크기만 더 키운 명조· 고딕 글꼴이 있어서 이를 탑재했으며, ‘굴림· 궁서 옛한글’로부터 옛한글 비트맵도 추출해서 내 프로그램에서 쓸 수 있는 조합형 한글 글꼴을 만들었다. 디렉터리는 종전의 Font에 이어 Font24가 또 추가되었다.
글꼴 본뜨기를 하면 기본 한글 글꼴인 바탕· 돋움· 굴림· 궁서 정도는 물론 완성형 글꼴 형태로 추가되며, 영문 중에서는 16픽셀 시절과 마찬가지로 Courier New, Lucida Console, 그리고 중국어· 일본어 불변폭 글꼴의 영문 글립도 추가된다.

기본 내장 글꼴은 기존 16픽셀 버전을 기계적으로 확대한 뒤, 급한 대로 손으로 최소한의 보정만 한 것이다.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퀄리티를 차차 개선해 나갈 것이다. 둥근모, 한솔바탕, 이야기체 이건 꽤 잘 만든 글꼴 축에 드는데 24픽셀 버전이 같이 좀 있으면 좋겠다.
일부 도스용 프로그램들이 제공하는 인쇄용 글꼴들은 한글과는 달리 영문 글꼴을 사용할 만한 것이 의외로 드물었다. 높이는 24픽셀이지만 폭은 12가 아닌 14픽셀이라거나 해서 아귀가 좀 안 맞았기 때문이다. (일일이 야메로 수정하기엔 시간 부족..)

큰 글꼴은 현재 시스템의 DPI가 150% (또는 144dpi) 이상이면 자동으로 채택되며, 100%나 125% 같은 낮은 DPI에서는 언제나 여전히 종전의 16픽셀 글꼴이 쓰인다. 한 프로그램에서 두 크기의 글꼴이 동시에 쓰이거나 실시간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요컨대 이 기능은 눈으로 보이는 글자 크기를 적극적으로 키워 주는 기능이 아니다. 단지, high DPI 환경에서 비트맵 글꼴이 터무니없이 너무 작게 보이는 것을 막아 줄 뿐이다. 고해상도를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정말 최소한의 방어적인 조치만을 최소한의 시간 동안 취한 것이다.

단, 24픽셀 글꼴 지원을 추가한 주 이유가 high-DPI에 대한 대응이므로, 주요 아이콘과 도구모음줄 비트맵에 대한 확대 작업은 같이 행해졌다.
특히 타자연습은 UI 곳곳이 수정되어서 150% DPI에서 24픽셀 글꼴로 편하게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버전은 3.61에서 3.7로  올라갔다. 기능이 바뀐 것은 전혀 없고 (1) 프로그램 명칭 표기에서 화살괄호를 제거, (2) 큰 글꼴로 high-DPI 지원 이 두 가지가 전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버전을 올릴 명분은 충분하다.

게임의 경우 24픽셀 글꼴 하에서는 드디어 640*480 대신 역시 1.5배가량 더 높은 1024*768 해상도에서 실행된다.
이것도 오늘날 기준으로는 여전히 참 민망한 퀄리티이다. 하지만 (1) 게임을 최신 3D 그래픽 기반으로 처음부터 다시 만들고 (2) 게임 시스템을 좀 전반적으로 개편하는 날이 올 때까지.. 그 날을 기약 없이 무작정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으니 당장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를 취했다. 적극적으로 개선을 못 하고 있을 뿐이지 타자연습 역시 2017년 현재까지 찔끔찔끔 유지보수 중인 살아 있는 프로그램이긴 하다는 뜻이다..

타자연습은 날개셋 엔진 dll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비록 글꼴과 도움말이 없고 '고급 입력기/스키마'를 사용할 수 없을지언정 타자연습만 설치해도 프로그램이 실행은 된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24픽셀 글꼴을 사용할 수 없다(기본 내장 글꼴도 없음). 그렇기 때문에 입력기를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본인은 오랫동안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의 알고리즘을 생각하면서 끙끙거렸으며, 입력 스키마와 문자 생성기에다 새 기능을 추가하느라 지금까지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는데.. 이런 24픽셀 글꼴 지원은 한글 입력 동작과는 아무 관계 없으며 학술적인 의미도 딱히 없다. 그냥 기계적인 구조 확장과 리팩터링, 도트 노가다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내부 구조를 고치고 확장하고, 당장 사용자의 입장에서 실용성이 높은 기능이었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개발 작업을 몇 주 하고 나니 머릿속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손 놓은 지 오래 돼서 긴가민가하던 비트맵 관련 API들 다루는 법도 감이 완전히 되살아났다. 그래도 이런 걸 좀 하고 나니 내가 살아 있는 것 같고 삶의 목적과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2. 타이머

그럼, 다음 소식으로 한글 입력 엔진 얘기로 돌아간다.
한글 입력기는 단순히 사용자의 키보드· 마우스 입력에만 반응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 입력 후 일정 시간 동안 반응이 없으면 뭔가를 자동으로도 할 수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6.0 버전에서 '조합 중단 타이머'라는 이름으로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타이머 기능이 도입된 적이 있었다. 주 용도는 천지인이나 Google 단모음 같은 글쇠배열에서 음절 경계 구분을 하는 것이다. 두벌식은 모바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옛한글 또는 No shift라는 조건이 추가되면 십중팔구 종성과 초성 사이에 모호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히 조합을 무조건 끊기만 하는 기능은 별로 유용하지 못하며, 100점 만점에 70점밖에 안 된다. 음절 경계 구분을 선별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Google 단모음에서 '박' 다음에 ㄱ을 입력했다면 시간 간격에 따라 '밖' 또는 '박ㄱ'이 되어야겠지만, ㅏ를 입력했다면 시간 간격과 무관하게 언제나 '바가'가 되는 게 바람직하다. '박ㅏ'을 원하는 사용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천지인도 마찬가지이다. '안'을 입력하고 나서 또 ㄴ을 입력했다면 시간 간격에 따라 '알' 또는 '안ㄴ'이 되어야겠지만, 중성은 말할 것도 없고 ㅈ도 타이머와 무관하게 언제나 '앉'으로 모아 주는 게 바람직하다. 얘까지 '안ㅈ'로 일부러 끊을 필요는 없다. 요컨대 진짜로 모호성이 발생하는 종성과 초성이 만났을 때만 구분을 해 주고, 나머지 입력에 대해서는 평소처럼 처리하면 된다.

그러니 타이머로 음절 구분을 선별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타이머 이벤트가 발생했을 때 그냥 조합을 끊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여느 글쇠를 눌렀을 때처럼 임의의 날개셋문자를 보낼 수 있도록 이거 구조부터 좀 확장하게 됐다. 뭐, 예전처럼 조합을 끊으려면 C0|0xE라는 '조합 중단' 특수 코드를 보내면 되고, 아니면 '상태 전이'나 특별한 의미를 갖는 가상 낱자 결합, 소문자 변수값 변경 + 글쇠 수식 같은 걸 사용하면 앞서 얘기했던 선별적인 음절 구분을 구현할 수 있다.

타이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동 입력 타이머' 옵션을 켠 뒤, 설정을 눌러서 별도의 대화상자에서 타이머의 발동 조건과 시간, 적중 시에 보낼 날개셋문자 수식 등을 지정하면 된다.
게다가 타이머를 하나도 아니고 용도가 다른 것을 최대 3개까지 동시에 지정할 수 있다. 예전처럼 굳이 조합 상태일 때만 켤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원한다면 조합 상태가 아니고 그냥 아무 글쇠를 누른 뒤부터 자동으로 켤 수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할 타이머의 종류, 각 타이머의 작동 조건, 타이머 적중 시에 입력할 문자, 타이머 중단 조건을 아주 세밀하게 지정 가능하다.
타이머를 일회용으로만 지정할지, 아니면 다회용으로 계속 굴릴지 선택할 수 있고, 또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더라도 이 타이머가 적중했을 때는 삑 소리로 청각 피드백을 주게 할 수도 있다.

다회용 타이머는 반쯤 자동 입력 매크로처럼 활용도 가능하다. 타이머가 왔을 때 '글쇠 누름' 날개셋문자를 보내게 하면 ESC, 엔터, Ctrl+?? 같은 특수글쇠를 반복해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난수 R변수까지 사용하면 더욱 예측불허의 동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입력 중에 발동된 타이머는 사용자가 글쇠배열을 변경하거나 키보드 포커스를 다른 창으로 바꾸는 등 외부 이벤트가 발생하면 취소된다. 하지만 그것 말고 지금 글자의 조합이 종료됐을 때(타이머의 여파가 지금 조합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게 해야 할 때.. 주로 일회용 타이머용), 그리고 사용자가 화살표 키나 마우스 같은 걸로 cursor를 옮겼을 때(주로 다회용 타이머용)에도 타이머를 취소시킬 수 있다.

타이머라는 기능에 존재할 만한 옵션을 이런 식으로 분류하고 저런 대화상자에다 정리하고 지금과 같은 형태로 구현하는 게 과연 '최선'이라 할 수 있는지 확신이 안 서서 오랫동안 괴로웠는데 드디어 모든 고민이 깔끔히 해결됐다. 지금 구현된 형태는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스럽다. 좀 더 일찍 진작부터 이렇게 만들어지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타이머는 기능의 성격이 문자 생성기와 입력 스키마에 반반쯤 걸쳐 있는 이상한 물건이다. 입력 단위인 날개셋문자를 새로 생성한다는 점에서는 입력 스키마와 비슷하지만.. 조합 상태와 깊숙히 관여하고 있고 글쇠배열 자체보다 로직에 가깝다는 점은  문자 생성기와 비슷하다.

안 그래도 다음 버전에서는 이렇게 문자 생성기뿐만 아니라 입력 스키마나 보조 입력 도구도 타이머를 지정하는 기능이 도입될 것이다. 그러니 이번 타이머의 구조 확장은 다음 버전에 대한 준비 작업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렇게 새 기능이 구현되었지만,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 빠른설정이 저렇게 타이머와 연계한 선별적인 음절 구분까지는 지원하지 않을 예정이다. 저건 글쇠배열 차원에서 변수를 써서 구현하는 게 낫지만, 이 빠른설정은 일단은 문자 생성기 계층의 설정만 고치는 것을 지향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냥 지금처럼 모호성이 발생하는 자음 pair 그룹을 찾아서 보여주는 일만 한다.

예제로 제공되는 삼성 천지인 입력 방식은 k, l, m이라는 사용자 변수 세 종류를 사용하여 '안ㄴ'과 '안ㅈ'을 구분하는 음절 경계 타이머를 구현해다. 현재 입력된 글쇠가 이전에 입력된 글쇠와 동일하고(k==l), 타이머가 경과하여 m=1이 됐을 때는 다음 자음이 종성이 아니라 언제나 초성으로 입력되게 함으로써 음절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Google 단모음은 타이머가 적중했을 때 이제 아무 낱자의 결합도 받지 않는 별도의 오토마타로 상태 전환을 시켜서 음절을 구분하게 바뀌었다. 이런 식으로 타이머를 활용하는 방법이 더욱 다양해진 것이 9.0의 의의이다.

3. 고급 입력 스키마

지금까지 고급 입력 스키마에는 한 글쇠의 연타를 감지하는 것과 관계 있는 I~K 변수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동시에 누른 글쇠의 개수를 감지하는 V, W 변수가 추가되었다.
'고급 글쇠 인식'에 등록되어 있는 글쇠 중 여러 개가 동시에 눌러진 게 있다면 그 개수만큼 V의 값이 증가한다. 그리고 한 순간에 가장 많은 글쇠가 눌러진 최대값이 W에 보관되고 업데이트된다. W는 모든 글쇠에서 손이 떼어진 뒤에도 남아 있다가, 다음에 한 글쇠가 단독으로 새로 눌러졌을 때 다시 1로 되돌아간다.

이 변수를 통해 사용자는 어떤 글쇠가 눌러지거나 떼어졌을 때 자기 말고 다른 글쇠도 눌러진 것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Shift나 Ctrl의 경우 대부분 다른 글쇠와 결합해서 쓰이는 modifier 글쇠인데, 자기 혼자만 단독으로 길게 누르거나 뗐을 때에만 특수한 처리를 하고 싶다면.. 저 변수를 활용하면 된다.

또한 글쇠배열에 공통 전처리· 후처리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날개셋문자를 결정하기 전에 임의의 글쇠가 눌러졌을 때에 한해서(keyup 말고 keydown 때만) 공통으로 실행할 수식도 지정할 수 있게 했다. 이건 고급 글쇠 인식에 등록된 글쇠와 그렇지 않은 글쇠를 달리 지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도 여러 글쇠를 동시에 눌렀을 때 혹시 딴 글쇠가 같이 눌러졌는지를 판별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고급 입력 스키마도 제어판에 자신의 고유한 옵션을 지정하는 탭이 하나 추가되었다. 이전까지는 고급 인식 글쇠 리스트를 지정하는 탭 하나만 있다가 9.0부터 2개가 된 것이다.
기본 입력 스키마와 기본 문자 생성기가 탭이 각각 2개와 3개인데, 고급 스키마와 고급 생성기도 자신만의 탭을 각각 2개, 3개씩 갖고 있다. 그러니 고급 스키마와 고급 스키마를 사용할 경우 탭의 개수는 총 10개로, 5개에 비해 정확하게 2배로 늘게 된다.

물론 고급 입력 스키마의 옵션 탭은 아직 아이템이 매우 적어서 화면이 썰렁하다. 그러나 타이머, 눌러진 글쇠 개수 파악, 그리고 별도의 옵션 탭들이 모두... 머지않아 세벌식에 특화된 동시치기 기능 추가를 위한 준비 작업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기능들과 오토마타까지 다 연계해야 구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입력 스키마와 문자 생성기가 모두 "빈-기본-고급"이라는 3단계 계층이 싹 갖춰져서 보기 좋다.
사실, 잉여력이 조금만 더 충분하다면 이것도 좀 다른 관점에서 새로 설계해서 '꼬마 스키마' 내지 '꼬마 입력기'를 또 만들어 보고 싶긴 하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

4. 기타

(1) 지난 8.9 버전은 버그가 발견된 게 '거의' 없었다. 덕분에 이번 9.0은 변화 사항 문서에 '개선'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항목이 일단은 없다.
단, 편집기에서 텍스트에다 블록을 4개 이상 잡고서 '도구-분량 계산'을 하고 나면 프로그램이 그냥 무한 루프에 빠지면서 응답을 멎는 문제가 있어서 고쳤다. 정말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이며, 뻗거나 메모리 폭주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무한 루프에만 빠진다.

이건 워낙 간단한 기능이기 때문에 해당 기능이 한번 구현된 뒤에 딱히 고쳐질 일은 없으며, 따라서 8.9에만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고 남아 있다가 이번에 발견되어 고쳐졌다.

(2) bksp 동작 방식.. 이를테면 글자부터 낱자까지 지우는 단위라든가 앞 글자 달라붙기+역도깨비불 시도 여부 같은 것을 지금처럼 단순히 고정된 옵션이 아니라 이것도 수식으로.. 앞 글자가 실제로 무엇이고 소문자 변수 값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용자 정의 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추가했다.
실생활에서 bksp를 이 정도로 변태적으로 제어해야 할 상황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completeness 유지 차원에서, 혹시나 해서 추가했다.

(3) 날개셋 브랜드에 속하는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이번 high DPI 작업 추세에 맞추어 '세벌식 파워업' 프로그램도 2015년 이후 2년 만에 잠수함 패치를 했다.
수행할 기능을 선택하는 라디오 버튼을 더블 클릭만 해도 해당 명령이 바로 실행되게 했고, 글쇠배열 그림이 high DPI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비율로 더 크게 나오게 했다.
실질적인 기능이 바뀌거나 버그가 고쳐진 건 없다. MS 한글 IME가 글쇠배열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은 Windows Vista 이후로 딱히 바뀌지 않고 있다. 덕분에 새로운 알고리즘이 추가돼야 할 일은 없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15 08:30 2017/06/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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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 이야기

1. 전근대 시절의 장거리 항해

본인은 초-중딩 시절에 대항해시대 2 게임을 즐겼던 세대이다. 이 게임과 세계 역사 만화책과 학교에서의 세계사 공부를 통해 서양에서는 과거의 중세와 근세 사이에 범선만 달랑 타고 신대륙을 막 개척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배웠다.

현실에서 전쟁은 스타크래프트나 FPS 게임이 아니다. 과거에 양치기 목동은 절대로 낭만적인 전원 생활을 누리는 게 아니었다. 현실에서는 하다못해 결혼 생활조차도 소꿉놀이와는 딴판인 티격태격 전쟁이다.
그리고 그것처럼 배 타고 멀리 떠나는 것도 절대로 편한 일이 아니다. 최첨단 문명의 이기와 통신 장비가 있는 오늘날도 그러한데 하물며 옛날에는.. 선원 생활의 열악함과 비참함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영양 문제다. 지금 같은 냉장 냉동 기술이 없으니 모든 식품은 닥치고 소금에 절여서 보관해야 했다. 비타민이라는 걸 몰랐으니 각기병이나 괴혈병 같은 병의 원인조차 알지 못했다. 장거리 항해를 한번 하고 나면 괴혈병 때문에 건장하던 근육질 선원들이 시름시름 앓다 픽 죽어 나갈 지경이었다. 세포들이 형체 유지를 못 하고 몸 곳곳에서 피가 철철 나다가 죽는 건 오늘날로 치면 거의 방사선 피폭에 준하는 끔찍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기 전엔 뱃사람 업계에 미신과 괴담 같은 것도 얼마나 많이 나돌았을지 모를 일이다.

화재 예방을 위해 배에서는 온수 목욕 같은 것도 할 수 없었다. 또한 과거의 범선은 폭풍우와 높은 파도만 악재인 게 아니라, 망망대해에서 바람이 오랫동안 너무 안 불고 잔잔한 것도 끔찍한 재앙이었다. 배가 나아가질 못하면서 선원들이 그 안에서 꼼짝없이 굶어 죽기 때문이다.
배 안의 도구와 시설이 원시적일수록 승선 근무는 공동 작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며, 한 명만 잘못하면 다같이 죽는 위험이 더 컸다. 그러니 거기 조직 문화는 반쯤은 군대와 다를 바 없었다. 채찍질과 교수형 등 온갖 전근대적인 규율과 잔혹한 처벌로 선원들을 통제해야 했다.

그러니 선원들의 생활이 얼마나 헬이었을까? 이런 것들이 바로 대항해시대 같은 게임만 해서는 알 수 없는 레알 대항해시대의 실상이다.
그 시절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면, 대양을 누볐다는 배가 덩치가 이렇게 작았다는 사실에 추가적으로 굉장히 놀라게 된다. 배수량이 겨우 몇백 톤이 될까말까인 쪽배 유람선에 10~20여 명의 남정네들이 타고 도대체 어떻게 대륙을 건널 수 있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엔진도 없이 돛만 달랑 달고, 게다가 금속도 아닌 나무로 만들어진 배가 요즘의 컨테이너선이나 유조선 같은 덩치일 수는 없다. 건축· 재료공학적으로 따져볼 때 목선은 길이 약 100미터, 배수량 2000톤 정도가 사실상의 한계로 여겨진다고 한다.

목재는 쇳덩이처럼 무슨 용접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금속보다 약한데 이어 붙이는 시점에서부터 강도가 더욱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저 덩치를 부분적으로 초과하는 목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목선의 끝물인 19세기 중후반은 가서야 예외적으로 등장한 것들이며, 덩치를 무리해서 키우느라 항해 중엔 펌프로 물을 일일이 빼 줘야 하는 등 태생적으로 지병을 안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같은 거대한 선박을 목재만으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있다.. 허나 그건 꼭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수 있다.
300큐빗은 1큐빗을 50cm 남짓으로 잡아도 150m 남짓한 길이이다. 방주가 무슨 타이타닉을 능가하는 덩치였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얘는 표류만 하지 항해 기능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었으니 어지간한 배들이 갖는 유체역학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을 것이다. 항공기에다 비유하자면 비행선이 아니라 그냥 기구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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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목재의 한계 얘기가 기왕 나왔으니 첨언하자면, 옛날에 황룡사 9층 목탑도 어떻게 존재 가능했을까 싶은 의문이 추가로 든다. 기록대로라면 높이가 거의 80m에 달하는 건물을 나무로 만들었다는 얘기인데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콘크리트 건물처럼 딱 직육면체 형태로 그렇게 높은 목조 건물을 만들 수는 없고, 위로 갈수록 면적이 좁아지긴 해야 할 것이다. 롤러코스터조차도 에버랜드 T 익스프레스 같은 목제는 철제보다 내부 구조물이 훨씬 더 많고 복잡하고, 철제처럼 360도 상하 회전을 구현하지 못하지 않던가.

2. 근대: 기계화가 됐지만 여전히 원시적임

아무튼, 그러다 근대에 와서는 실용적인 수준의 증기 기관이 발명되었고, 땅에서 마차보다 빠른 철도 차량도 만드는 와중에 이 기관을 선박에다가 써먹으려는 시도도 응당 행해졌다. 오늘날처럼 스크류 프로펠러가 정착하기 전의 과도기에는 외륜이나 물갈퀴 같은 다양한 동력 전달 메커니즘이 등장했으며, 이때부터 배의 재질도 목재에서 금속으로 바뀌었다. 불을 때는 연소를 나무로 만든 기계 안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인류 역사상 몇천 년의 짬밥을 먹어 온 목재 범선이 주력 교통수단에서 드디어 퇴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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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선은 증기 기관차와는 달리 왠지 유럽이 아닌 미국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든다. 허클베리 핀, 톰 소여의 모험처럼 말이다.
다만, 증기선의 선구자이던 존 피치 같은 사람은 당대에 성공을 못 하고 빈곤에 허덕이다가 자살로 불운한 생을 마감했다. 훗날 디젤 엔진의 발명자도 자살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런 선구자들의 노력을 거쳐서 1910년대에는 잘 알다시피 초대형 증기 여객선인 타이타닉 호가 건조되기에 이르렀다. 전장 269m, 배수량 52310톤짜리다.

오늘날이야 비행기가 있으니 저런 대륙간 장거리 여객선은 필요가 없어졌고 배는 그냥 라이너나 관광 크루즈 위주로 바뀌었다. 물론, 여객 분야 한정으로만 말이다. 국가와 대륙간의 화물 수송은 타 교통수단이 절대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대량 수송 가성비 때문에 선박이 여전히 영원무궁토록 본좌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무역선 제조사들과 무역선을 조종하는 상선사관들이 없으면 굶어죽고 말라죽는 거 순식간이다.

타이타닉 호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참 원시적이다 싶은 것은.. 먼저 엔진이다. 20여 개가 넘는 대형 보일러에 엔진 2기, 증기터빈 1기로 중무장하고 굴뚝도 4개나 달려 있었던 반면, 요즘의 디젤 엔진은.. 그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덩치의 주 엔진 1 + 보조 엔진 1기만으로도 타이타닉과 비슷한 덩치의 배를 비슷한 속도로 굴릴 수 있다.
놀라울 정도로 가벼우면서 방한 보온 효과는 탁월한 요즘 첨단 재질의 패딩 점퍼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또한 2200명이 넘는 타이타닉 탑승 인원 중에서 승객이 아닌 직원이 이미 800명을 훌쩍 넘고 거의 900명에 가까웠다는 점도 날 놀라게 한다.
굳이 항해에 직접 관여하지 않더라도 지하의 기계실에서 보일러에다 삽으로 열심히 석탄을 퍼 넣던 화부부터가 이미 170여 명이나 됐다. 갤리선 시절의 노꾼보다는 발전한 작업 형태인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매우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 거북선도 1척의 정원이 150명가량이었는데 그 중 무려 과반인 8~90명은 노꾼이었다고 하니...;;

또한 거기 안의 상점에서 일한다거나 승객간 우편· 통신을 담당하는 등, 어떤 형태로든 타이타닉 배가 자기 직장이고 월급을 받는 터전이었던 사람들의 수가 그만치 됐다. 배 안에서 일종의 '작은 사회'를 꾸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은 비행기에 법적으로 승객 50명당 승무원이 겨우 1명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비행기나 열차를 조종하는 인력도 1인 승무를 하네 마네 싸우는 중인 세상이다. 이걸 감안하면 요즘은 얼마나 사람 수가 줄었는지 알 수 있다.
까놓고 말해 타이타닉 호에 탔던 승객들은 요즘 식으로 치면 보잉 747이나 A380급 여객기 세 대면 다 실어나를 수 있다.
옛날 배의 덩치가 너무 작았던 것에 한번 놀랐고, 덩치가 커졌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비효율적이었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하긴, 전투기· 폭격기, 미사일 같은 게 지금처럼 발달하기 전에 딱 2차 세계 대전 타이밍 때는 전함도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게 돌아다니긴 했다. 요즘은 항공모함이 아닌 이상 그렇게까지 큰 배를 굴릴 필요가 없다.

3. 해군과 해전의 역사

기왕 배의 역사 얘기가 나왔으니 해전의 역사 얘기도 조금만 더 하자면..
선원 생활도 고되고 군생활도 고된데 둘을 합쳐 놓은 해군 수병은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악의 기피 직종이었다. 하지만 내륙국이 아닌 이상 바다를 장악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으니 어떤 나라든 해군을 육성하지 않을 수 없으며, 섬나라의 경우 그 필요성이 더욱 컸다.

해군은 배가 전장 겸 내무반이니 육군 같은 행군이나 숙영, 각개전투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함(배를 버리고 바다로..) 같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당연한 말이지만 수영을 잘해야 한다.
먼 옛날, 로마 제국이 있던 시절에는 인간의 무기들이 화력이 약했기 때문에 큰 배를 단번에 부숴 버릴 수 없었다. 그나마 배가 온통 나무로 만들어져 있으니 불화살 같은 걸로 화재를 일으키는 것이나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껏해야 배와 배끼리 부딪치거나 다리를 놓고 서로 근접해서 냉병기로 육박전을 벌이는 식으로 싸웠다. 그리고 배 자체는 그냥 나포와 노획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화약이 발명되고, 파편을 날리는 폭탄 대신 볼링공 같은 탄환을 날려서 배를 부수는 재래식 대포가 등장했으며, 이것이 함포가 되어서 성능이 갈수록 향상되었다. 배가 크고 무거워야만 더 크고 반동이 강한 함포를 얹을 수 있으며, 더 많은 승무원을 싣고 더 멀리까지 오랫동안 항해할 수 있다.

그러니 제국주의 군국주의 분위기에 편승해서 20세기 중반까지는 군함의 크기가 갈수록 커졌다. 그러다가 앞서 얘기했듯이 군용기와 미사일의 등장으로 인해 군함의 대형화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군함을 잡는 용도로 같은 군함의 함포만 있는 게 아니라 기뢰, 어뢰, 잠수함 같은 기묘한 물건도 등장했으며, 그런 것들을 퇴치하여 기함을 호위하는 용도로 구축함 같은 배가 또 따로 등장하게 되었다.

바다 위의 비행장인 항공모함은 태평양 전쟁 같은 전쟁이 또 터진다면 모를까 세계 경찰 우주 방어 미국 같은 나라가 아니면 또 쓸 일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유지비가 정말 억 소리 나게, 작살나게 깨진다는 것 하나는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
2차 세계 대전이 컴퓨터, 핵무기, 미사일이 발명되기 (직)전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그래도 한 박자 이전 세대의 전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4. 운하

육상 교통수단에 교량이 있다면, 선박에는 reverse 버전인 운하가 있다.
자동차나 열차가 물 위를 최단거리로 가로질러서 갈 수 있게 하기 위해 교량을 건설하듯, 반대로 배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최단거리 횡단 가능하도록 육지에다 운하라는 수로를 건설하니 말이다.
선박은 평소에는 끝없이 펼쳐진 2차원 평면에 가까운 망망대해 위를 다니지만, 좁은 운하를 통과하는 중에는 앞뒤로밖에 진행할 수 없는 열차와 비슷한 처지가 된다. 흥미로운 면모이다.

운하는 총기가 화살을 도태시키듯이 기선이 범선을 확인사살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자체 동력을 가진 기선은 어느 지형에서나 고정된 속도가 나오니 정시성이 보장되는 반면, 범선은 그런 곳에서 제대로 주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닷바람이라는 게 주변이 온통 차가운 바닷물이어서 공기와의 온도 차이가 생겨야만 발생하는데, 온통 땅으로 둘러싸인 좁은 물길에 불과한 운하에서는 그런 바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운하로는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 그리고 남북 아메리카 대륙 사이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가 있다. 파나마 운하가 수에즈보다 더 나중에 만들어졌으며 건설 난이도도 훨씬 더 높았다.

수에즈 운하는 그냥 배가 길을 따라 설렁설렁 지나가면 되고 폭도 넉넉하지만, 파나마 운하는 놀랍게도 양 말단의 해수면 높이가 서로 다르다. 그래서 물을 채웠다 빼기를 반복하는 여러 도크를 단계적으로 거치면서 고도를 올려야 한다. 철도로 치면 이건 완전 인클라인 내지 스위치백 방식이나 마찬가지로 보이는데, 이런 번거로운 절차 때문에 파나마 운하는 하루에 최대 30여 척 남짓한 배밖에 통과할 수 없다.

비행기에 협동체와 광동체가 있고 철도 궤간에도 광궤· 협궤가 있듯, 운하에는 응당 폭의 제한이 존재한다. 열악한 환경에 만들어진 파나마는 수에즈만치 큰 배는 통과할 수 없다. 그리고 아까 언급한 단계별 진행 특성으로 인해, 폭뿐만 아니라 길이의 한계도 존재한다. 2010년대에는 선박 통행 트래픽 증가와 대형화에 대응하기 위해 두 운하 모두 확장 공사도 거쳤다고 한다.

5. 배의 닻

좀 무식한 얘기이다만 본인은 선박이나 해운 쪽으로는 문외한이다 보니 오랫동안 닻과 돛의 차이도 잘 모르고 있었다. 용도가 서로 완전히 다른 부품이구만.. 돛이야 배의 동력원이 엔진으로 바뀐 뒤부터는 필요 없어졌지만 닻은 자동차로 치면 정말 주차 브레이크 같은 필수품이다.

둥실둥실 물에 떠 있는 배에다가 자동차처럼 바퀴에 굄목을 설치하거나, 접지 마찰을 이용한 브레이크를 장착할 수는 없다. 그러니 배의 중량을 증가시키는 걸 감수하고라도 무거운 갈고리 같은 걸 따로 달았다가 바닥에 내려서 그걸로 배를 정박시켜야 한다. 왕창 큰 배의 경우, 닻만 해도 수 톤~10수 톤에 달하는 육중한 쇳덩어리가 장착된다.

배는 브레이크가 없는 관계로 어지간해서는 그냥 관성과 자연 감속에만 의존해서 정지시키지만.. 만약 불가피하게 급제동을 해야 하면 엔진을 역추진하거나 이 닻을 내려뜨린다(비상투묘). 대형 여객기가 착륙 직후에 여전히 시속 200이 넘게 속도가 붙어 있는데.. 랜딩기어의 브레이크뿐만 아니라 엔진 역추진과 플랩· 스포일러까지 총동원해서 필사적으로 감속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다만, 무리하게 투묘했다가는 배가 서는 게 아니라 반대로 랜딩기어를 붙잡고 있던 부품이 저항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고 떨어져나가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집채만 한 배를 고정시켜 준다는 우직한 심상으로 인해 배나 해군의 상징에는 닻이 꼭 그려져 있다.
성경에서는 사도행전 27장, 바울이 배 타고 로마로 가는 장면에서 배의 닻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사도행전 27장은 나 같은 육지 사람이 읽기만 해도 뭔가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하물며 그쪽 업계 종사자 중에 크리스천이신 분이 읽으면 더욱 의미심장할 것 같다.

여기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딱 한 번, '소리 내다'가 아니요, '건전한'도 아니요, '수심을 측정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로 sound가 나오기도 한다. 그 시절에는 당연히 줄자 같은 걸 내려뜨려서 수심을 측정했겠지만, 동사가 sound이다 보니 그 시절에 마치 초음파 같은 걸 쏘기라도 해서 깊이를 측정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음으로 성경에서 또 닻이 나오는 곳은 그 유명한 히 6:19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anchor of the soul)이다. 인생이라는 항해 중에 둥실둥실 불안하게 이리 휩쓸리고 저리 끌려가는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반석, rock-solid함을 나타낼 때 닻이라는 물건을 동원해서 비유한 게 인상적이다. 히브리서는 저자에 대해서 논란이 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배 타고 전도 여행 많이 다닌 바울이 썼다는 것이 유력한데, 이 점을 생각하면 표현에 더욱 수긍이 간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12 08:32 2017/06/1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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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영장산 (성남)

본인은 한동안 인서울 산만 오르다가 오랜만에 다시 성남을 찾아갔다. 이 지역에서는 작년에 분당의 동남부에 있는 불곡산을 오른 적이 있다. 성남 분당과 광주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산들을 오르는 건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 뒤 이번에는 불곡산보다 더 북쪽에 있는 산을 올랐다.

지도를 펴서 분당선 내지 성남대로의 동쪽을 살펴보면 야탑과 서현은 시가지가 동쪽으로 깊숙히 조성돼 있다. 그러나 그 중간의 이매의 동쪽은 곧바로 산으로 뒤덮여 있으며, 기슭에는 고도 제한이라도 있는지 저층 건물로 된 아담한 마을만 좀 있는 정도이다. 지금이야 이매가 경강선과의 환승역까지 됐지만 분당선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절엔 역이 있지도 않았었다. 야탑에서 서현은 거리가 3km가 훌쩍 넘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엔 중간에 역을 만들 필요가 인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본인은 저 산을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했다. 그런데 다른 산들과는 달리 이 산은 이렇다 할 등산로 진입로가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정상까지 가는 경로가 비법정 탐방로까지 포함해서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빽빽이 그려져 있는 '네임드급' 산인 북한산과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동안 이 산으로 갈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도에 안 나와 있다고 해서 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판교로'라고 야탑 역 근처의 도로 한구석에 등산로가 있으며, 이매동 마을에서도 이 산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단지 이 산에는 역시나 군부대 같은 보안 시설도 많이 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유명해지거나 등산객이 몰리지는 말라고, 아는 사람만 조용히 찾아오라고 지도에 등산로가 표시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본인은 인터넷 검색을 한 끝에, 경남아너스빌 아파트와 807 의무경찰대 생활관이 있는 곳에서부터 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의무/전투경찰들은 군부대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식 경찰 공무원도 아닌데 병영이라고 해야 하나 평소에 어디서 먹고 자는지 의문이 들었다. 도봉산인가 북한산도 오르는 길목에 의무경찰 생활관이 있는 걸 본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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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의 등산로는 요렇게 계단에서 시작되었다. 친절하게도 불곡산과 영장산을 한눈에 그려 놓은 안내도가 곁에 있어서 좋았다.
예전에 불곡산은 우측 중앙 하단의 이마트 근처 '정자공원 등산로'에서 올라서 불곡산 정상과 근처의 형제봉을 오른 뒤, 태재고개 쪽으로 가다가 반대편 광주 방면으로 하산했다.

오늘은 왼쪽 최하단의 '전경대 등산로'에서 올라서 종지봉(글자가 잘 안 보임)과 매지봉을 거쳐서 영장산 정상까지 간 뒤, 새마을 연수원 방면으로 하산했다. 광주 쪽으로 가기에는 그 뒤로 넘어야 할 산이 더 많이 있어서 다시 분당 방면을 선택한 것이다.
안내도에서 보다시피 이 산맥의 능선이 성남과 광주의 경계인 듯하다. 영장산과 태재고개 사이의 길고 긴 능선은 두 번의 등산으로도 답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게 됐다. 그래도 전경대-영장산까지만 해도 봉우리를 여럿 넘으면서 4km에 달하는 장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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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오른 언덕은 높이도 별로 안 높고 나무들에다 일정 간격으로 정자와 운동 기구들이나 놓여 있어서 별 특징 없는 평범한 동네 뒷산 티가 풀풀 났다.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저 아래로는 성남 아트 센터 건물이 보였다.
그런데 성남 아트 센터를 지난 뒤부터 남쪽에 갑자기 예기치 않은 철조망 울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이매동 일대에 숨겨진 무슨 군부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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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이 둘러진 등산로도 지나자 급격한 비탈길이 이어졌다. 이를 다 오르고 나자 '종지봉' 정상에 도달했다. 정자도 하나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높이도 별로 안 높고 그리 볼 게 없었다. 진짜 등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지금까지 1.7km 정도를 이동했고, 여기서 영장산 정상까지는 2.3km 남짓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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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걸으니 또 양 옆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지대가 나타났다. 한쪽은 분당 예비군 훈련장 방면이고 다른 한쪽은 국군 수도 병원 방면이다.
산을 오른 날이 평일이었던 관계로 안 그래도 아침에 야탑 역 주변에서부터 군복 입은 아저씨들이 보였다. 그리고 나중에 아침 10시 무렵엔 역시나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등산로에까지 들렸다.
참고로 본인은 예비군이 7, 8년차까지 완전히 끝났고 올해부터 민방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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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보듯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맑고 적당히 쌀쌀해서 등산 가기 아주 좋은 날씨였다. 그래도 얼굴은 추워서 콧물이 날 지경인데 점퍼를 입고 있던 팔과 어깨는 더워서 땀으로 흠뻑 젖고, 땀이 식으면서 또 추워졌다. 이런 날씨에도 열 조절을 하기가 참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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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는 '분당 메모리얼 파크', 쉽게 말해 서울 망우산에 있던 묘지 공원이다.
아마 이 부근의 땅 아래로 경강선 이매-삼동 구간 선로도 지나가고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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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있는 연못은 반대편 율동 공원 인근에 있는 '분당 저수지'이다.
이 산은 전구간 통틀어서 전망대가 하나도 없어서 먼 곳 경치를 촬영할 만한 곳이 없었다. 아쉬운 점이다. 딱히 옛날 유물 같은 게 있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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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앞두고 경사가 급격히 가팔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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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100m 정도 남겨 두니 태극기가 펄럭이는 돌무더기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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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상에 도달했다. 등산객이 종종 다니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번엔 혼자 타이머 맞춰 놓고 쇼를 하지 않아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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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지나 온 길을 다시 복습해 보면 맹산 자연 생태 공원은 구경을 못 했고 그 대신 종지봉(정자)을 지났다. 그 뒤 산불 감시탑 겸 전망대가 있던 매지봉을 지나쳤고, 솔밭쉼터도 거친 뒤 정상에 도달했다. 이들 명칭에 대해서는 첫 화면에 있는 안내도를 참고할 것.
그 다음으로는 앞으로 더 진행해서 거북터로 내려간 뒤, 거기서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새마을 연수원 방면으로 하산했다.

이 길은 일종의 계곡이었다. 난 지금까지의 등산 경험을 생각해 보니 하산은 계곡 쪽으로 많이 하는 편이었다. 수락산이나 북한산을 갔을 때도 그랬고.
그리고 이쪽은 산중턱까지 개발이 많이 돼서 논밭도 있고 건물도 이것저것 많이 지어져 있었다. 영장산의 환경 파괴가 심하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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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새마을 중앙 연수원'의 입구에 도달했다. 연수원은 말 그대로 무슨 수련원이나 학교 분교처럼 건물 한 채에 운동장 하나가 전부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대학 캠퍼스 같은 으리으리한 규모였다.
지금까지도 개발도상국을 상대로 우리나라의 '새마을 정신' 컨설팅/카운슬링을 해 주는 곳인가 보다. 누가 언제 세운 기관이고 어떤 사람이 근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2~3분 간격으로 으리으리한 고급 승용차도 드나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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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원을 뒤로 하고 시내로 나가는 길은 이랬다. 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배차간격이 심각하게 길기 때문에 좀 기다려야 했다. 예전에 검단산 등산을 마친 뒤에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시절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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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 길을 걸어서 밖으로 나가니 국군 수도 병원과 율동 공원으로 가는 길목이 보였다. 여기가 이런 동네이구나! 교차로이지만 신호등은 그냥 황색 점멸이었다.
수도 병원 간판의 에메랄드 배경색이 굉장히 예뻐 보였다. 율동 공원도 자동차 내지 자전거라도 있으면 더 돌아다녀 보고 싶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무리였다. 이런 게 있다고 풍경 사진 몇 장 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여친이라도 생기면 데이트 코스로 적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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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하늘 위로는 비행기가 자주 날아다녔다. 근처의 서울 공항에서 띄운 걸로 추정되는 군용기뿐만 아니라 민항기도 볼 수 있었다.
폰 카메라가 화소 수와 색감, 시야각 등이 경이로울 정도로 발전했지만 아무래도 렌즈 크기의 제약으로 인해 줌 성능은 취약하다. 하늘의 비행기 사진을 제대로 찍으려면 별도의 디지털 카메라가 필요하더라.

이것으로 등산을 마쳤다.
성남 분당은 분당선 및 성남대로를 조금만 벗어나서 동쪽으로 가면 이런 미지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게 흥미롭다. 물론 서쪽도 미지의 세계이긴 마찬가지이다. 다음에는 기회가 되면 서쪽의 대장동· 석운동에 있는 산, 그리고 성남 검단산 같은 북쪽의 산을 답사할 계획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09 08:37 2017/06/0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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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산· 서울 현충원 답사기

6월을 맞이하여 본인은 호국보훈 이념을 등산과 결합한 꽤 특별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서울 현충원이 자리잡아 있는 서달산을 오르고, 현충원을 정문이 아닌 산을 통해서 방문하고 왔다.
본인은 비록 서울 현충원과는 아무 연고가 없는 가문의 출신이지만, 지난 2007년에 한번 혼자 현충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딱 10년 뒤에 거기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참고로 사진들을 보면 짐작이 가겠지만, 시간대가 이른 아침은 아니고 그냥 낮~저녁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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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이 아니라 숭실대입구 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3번과 4번 출구 사이로 나 있는 비탈길을 계속 올랐다. 일명 '살피재'라는 고갯길이다. 지하철역 자체도 고도 차이로 인해 굉장히 깊지만 그래도 역이 있는 곳이 제일 높은 지점은 아니었다.
길가에는 한 경직 기념관, 기독교 박물관 등 숭실대 캠퍼스 건물이 계속 보였다.
그렇게 버스 한 정거장 거리 정도를 계속 걸으면 건물이 없이 산길 같은 구간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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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 생태다리를 통해서 서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숭실대 뒷쪽으로 달마사를 거쳐서 서달산을 오르는 경로도 있긴 한 모양이던데, 길이 골목길 위주로 복잡한 것 같아서 본인은 그리로 가지 않았다.
참고로 서달산은 해발 높이가 200m가 채 되지 않는 낮은 산이며, 산 속 숲에 들어가기 전부터 길거리에서 이미 고도를 상당수 올려 놓은 상태이다. 저기서 추가로 오르는 높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서달산의 정상은 서쪽 끝자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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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니나다를까, 건물 몇 층 높이를 계단으로 오르는 기분으로 설렁설렁 언덕을 오르자 현충원의 상도 방면 뒷문이 나타났다. 오후 6시까지 개방이라고 하며, 가 보지는 않았지만 동쪽으로 사당 방면 뒷문도 하나 더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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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은 하늘을 제대로 보기 어렵고 어두컴컴할 정도로 나무들이 빽빽했다.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그야말로 싱그러운 초록색 그 자체였으며, 아카시아 같은 향기도 느껴졌다.
6월에 나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많았는지, 주변엔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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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가 낮을지언정 그래도 산은 산이니 정상에 도달했다. 저 정자는 이미 동네 어르신으로 추정되는 아저씨들이 점령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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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는 이런 2층짜리 정자도 있었다. 정자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 산이 숲이 얼마나 조밀하게 우거져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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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정상을 구경한 뒤엔 서쪽의 숭실대 방면으로 하산하거나 동남쪽으로 산길 산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그쪽으로 가지 않고 아까 그 상도 방면 뒷문으로 가서 현충원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직선 거리로만 따지면 현충원 묘소들 중 산속 가장 깊은 곳에 놓인 박 정희 대통령 묘소와 아주 가깝다. 하지만 이 길은 묘소는 고사하고 곧장 현충원 내부로 들어가는 길도 아니었다. '호국지장사'라는 절까지 굉장히 우회를 한 뒤에야 현충원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우회가 심한 데다, 내리막이 계속되기까지 하니 나중에 다시 이쪽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 비록 수평 이동이 길더라도 현충원을 나갈 때는 그냥 정문으로 나가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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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을 거쳐서 박 정희 대통령 부부 묘소를 10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 대통령까지 되긴 했지만 애비의 처지와 딸의 처지가 모두 참 기구하다.
지금의 악한 대통령은 노골적인 좌편향과 친중종북 성향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으며 도덕 청렴은 개뿔, 우리나라에서 정말 청산되어야 할 적폐는 무슨 이중국적· 위장전입이나 논문 표절 따위가 아니라 그냥 '내로남불'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입증해 보이고 있다.

왜, 자기가 좋아하는 대통령,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혼자 똥을 싸도 그저 잘한다고 언론에서 칭송해 댈 것 같은 우리 달님 달링님을 까니까 기분 나쁘신가? 문 창극, 김 종훈, 윤 창중 시절에 그 정도까지 쌍욕 안 퍼붓고 개 난리 안 쳤으면, 나도 지금 이렇게 거친 말 독한 말을 안 늘어놓는다. 잣대가 동일해야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나라 꼴이 도대체 어찌 되려는지.. 이러려고 공산화 막고 가난 떨쳐내고 근대화 한 게 아니었을 텐데.. 저기 모셔져 있는 가문의 대통령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는지를 깨닫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본인은 묵념을 하고 방명록에 이름도 당당히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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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길을 내려가면서 병사 묘역의 구도 좋은 지점에서 사진을 하나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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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서 100을 만든 분에 이어 아예 0에서 1을 만든 위대한 건국 대통령 할배의 묘소도 참배하고 방명록에다 내 이름을 썼다. 시뻘겋게 미쳐 돌아가는 나라 현실에 대한 자그마한 저항의 뜻을 이렇게 표현했다.

"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 있는 백성 되게 하시고"라는 시작하는 헌시를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한다.
저기서 나라란 당연히 자유가 있는 정상적인 나라를 말한다. 북괴 같은 나라 말고. 일제만 망하고 물러났다고 해서 결코 저절로 수립 가능하지 않았다.

난 이분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중상모략과, 정황에 대한 고려 없는 악성 거짓 루머를 어지간한 부정부패 이상으로 나라를 좀먹으며 사람 정신을 병들게 하는 사회악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내 인생을 걸고, 그 어떤 인간관계 단절과 물질적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평생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서 싸울 것이다.

누차 말하지만 그냥 단편적이고 개인적인 대통령 호불호를 문제 삼는 게 결코 아니다. 단순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승만은 건국의 공을 무색케 하는 과오도 너무 많이 저질러서 괜히 호감이 안 간다" "난 외교 노선보다는 무장 항쟁 노선을 더 좋아한다" 수준이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건전한 생각과 취향으로서 존중한다.

단지 내가 극도로 싫어하고 공격하는 건, 예전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악의적으로 일부러 친일 청산을 안 하고 전쟁 초기에 그냥 도망갔네 식의 개소리, 그리고 각종 학살 참극에 대해서 김 일성· 마오 쩌둥과 이 승만에 대한 비판의 잣대가 전혀 같지 않은 것 따위를 말한다. 이젠 정말 지긋지긋하다.
왜 그냥 싫어하는 게 아니라 거짓을 근거로 싫어하며, 그 근거가 거짓이라고 반박해 줘도 듣지를 않는가? 그렇게 귀를 틀어막고 살 거면 남이 과격한 어조로 거짓을 저격하는 건 왜 듣고 반응하는데? 그런 것에 불쾌해할 자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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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간 끝에 드디어 정문에 도착했으며, 입구에 있는 멋진 분수대를 마지막으로 사진에 담았다.
10년 전과는 달리 지금은 지하철 9호선이 생겨 있으며, 특히 9호선이 현충원 입구와 더 가까이 만들어져 있어서 접근성이 더욱 좋다. 하지만 4호선과 9호선간의 막장환승은 답이 없는 것 같다. 고속터미널 7-9호선은 무빙워크라도 있다지만 저건.. 답이 없다.

글을 맺기 전에 역사 상식 하나..
현충원의 유래 정도는 검색만 하면 다 나오긴 하지만, 본인이 기억하고 있는 바를 이곳에다가도 또 늘어놓자면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6· 25 전쟁 이전에도 38선 부근에서는 호전적인 북괴의 도발에 의한 국지적인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 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만큼이나 분위기가 험악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사자가 계속 찔끔찔끔 발생했으며, 이들은 처음엔 서울 중심부에서 가까운 장충단 공원에 매장되었다. 다시 말해 그때는 매장지가 지금 같은 '서달산'이 아니라 남산 기슭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6· 25라는 전면전이 터지자 전사자가 훨씬 더 많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매장하고 추모할 공간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새로 묘지를 만들 만한 곳을 전국적으로 물색하게 됐다. 아직 전쟁 중이던 1952년에 이와 관련된 신문 보도가 나갔었다.

그때 투표 같은 민주적인 절차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리박사 할배 각하가 여러 후보들을 몸소 검토해 본 뒤 그냥 답정너로 지금의 서달산 부지를 지목한 게 아닐까 싶다. 1950년대엔 한강 이남은 아직 인서울조차 아니었고 동작대교 같은 것도 없었다. 교통이야 지금과 비할 바가 못 됐겠지만 저 정도면 솔직히 서울 교외에 묘지로서 굉장히 좋은 입지이긴 했다.

그래서 이 묘지는 1955년에 '국군 묘지'라는 이름으로 첫 개장했다가 나중에 '국립 묘지'라는 명칭을 거쳐서 지금은 현충원이 됐다. 정부 청사가 서울, 과천, 대전, 세종 등 여러 곳에 있듯, 현충원도 서울에만 있는 시설이 아니다. 그래서 전체 명칭은 '서울 현충원'이다. 이 승만 당사자도 비록 하야 후 외국에서 죽었지만, 그래도 자기가 남을 위해 장지해 놨던 명당에 고이 묻히게 됐다.

서울 현충원은 이제 공식적으로는 공간이 더 없다. 국민 정서상 극히 예외적인 특례로 봐 줄 만한 위인· 유명인이 아니고 단순히 국가원수, 전투 중 전사, 몇십 년째 군 장기 근속 같은 규정만을 만족해서 현충원에 가는 거라면 신규 인원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서울 대신 대전 현충원으로 가야 한다. 대전 현충원도 무려 1985년에 개장했다.

우리나라가 군사· 정치적으로 안정화가 됐고 굳이 나라를 구하는 특출난 위인이 나올 상황이 아니라면, 앞으로 서울 현충원에 누군가가 무리해서 비집고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대전 현충원의 국가 원수 묘역에 최 규하 다음으로 둘째로 들어가는 인물은 과연 누가 될지 무척 궁금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06 08:31 2017/06/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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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부르는 찬양곡 중에 "찬양하라 내 영혼아"라는 짤막한 곡이 있다.
국내외로 모두 대체로 작곡자 미상이라고 적혀 있고, 국내에서는 '예수전도단 번역'이라고 소개돼 있다. CCM 앨범 중에는 1991년에 나온 주찬양 7집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에서 거의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성경 좀 읽은 분들은 이 곡의 가사가 기본적으로 시 103:1에서 착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절은 시편 구절대로 "찬양하라"인데, 2절은 "감사하라", 3절은 "기뻐하라"라고 뭔가 다른 좋은 동사들로 바리에이션이 있다. 이것은 살전 5:16-18의 3대 권면에서 '기도하라'만 빼고 적당히 가져와서 가사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기뻐하라'(시 33:1 등), '감사하라'(시 106:1, 107:1, 136:1 등)는 시편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오기도 하고 말이다.

단, 가사의 번역에는 아쉬운 점이 좀 있다. 먼저 1절의 동사는 원래 praise가 아니라 bless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우리말 성경의 번역 관행에 따라 단어를 구분하자면 찬양보다는 찬미, 찬송이 더 적합하다.
그리고 한국어 찬송가 특유의 영/혼 혼동도 아쉽다. "내 영혼아"가 아니라 "오 내 혼아"가 되면 음절수가 딱 맞다. 성경 구절에는 감탄사 O가 실제로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내 평생에 가는 길>(It is well with my soul) 찬송도 후렴이 "내 영혼 평안해" 대신 "내 혼이 평안해"라고 고쳐 주면 교리적으로 더 정확해진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겠는지를 생각해 보자. '내 속에 있는 것들'의 정체는 뭘까? 내 자아? 내 세포? 내 장기? 혹은 병균? 박테리아? '그들의 벌레'만큼(막 9:44, 46, 48)이나 알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성경은 성경으로 풀면 된다. 성경에서 within me에 속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면 답이 나온다.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시 43:5, 시 42:11) 등.

사람의 자아 내지 인격, '나 자신'을 구성하는 것은 혼이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몸이라는 껍데기 안에 '혼'이 들어있어서 나 자신이 나의 혼을 제3자 대면하듯이 "내 혼아" 이런 형태로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구약 시절에는 교리적으로 몸과 혼이 완전히 밀착해 있었다고 함) 내 속에는 혼도 있고 영도 있고 마음, 생각 등도 있다. 한편, '내 속중심'(bowel)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이건 문자적인 신체 장기와 마음(창 43:30, 왕상 3:26)을 모두 가리키더라.

이런 심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내 속에 있는 것들아"가 내포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결국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명령처럼 혼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다. 찬양 악보집에 따라서는 "내 속에 있는 것들아"라는 표현이 생소하다고 가사 자체를 "온 맘과 정성 다하여"라고 고친 물건도 있다.

또한 그냥 in이 아니라 within이기 때문에 '안'이 아닌 특별히 '속'이라고 번역한 듯하다. 둘은 구분이 굉장히 헷갈리기 쉬운 단어이긴 한데, '안'의 반의어는 '밖'이고 '속'의 반의어는 '겉'이다. 이런 관점의 차이가 있다.

준비 찬송으로 이거 부르면서 '내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해 주니 아주 도움 됐다면서 반응이 좋았다.
나 역시 나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찬송을 회중들에게 같이 부르자고 주문할 수는 없으니 곡들의 배경과 의미에 대한 공부가 필수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이번 기회에 성경이 말하는 몸, 혼(soul), 영(spirit)에 대해서 얘기를 해 보겠다.
한글 글자판에만 두벌식과 세벌식이 있는 게 아니라 신학계에서도 2분법(몸 / 영혼)과 3분법(몸 / 혼 / 영)으로 해석 노선이 대립하는가 보다.
하지만 본인은 언어· 단어 차원에서 명백하게 다른 개념을 자기가 당장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왜 한데 싸잡아서 일컫는지 모르겠다.

물론 혼과 영은 단순한 언어 직관만으로는 엄밀한 구분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 엄밀하게 구분해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성경적으로 혼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대충 영혼이라고 싸잡아서 말하고,
성경에서 영이라는 일컫는 더 추상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성령' 말고는 나머지는 다 그냥 정신, 기운 정도로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Q정전에서 유래된 그 이름도 유명한 병맛 용어인 '정신승리'도 영어로는 spiritual victory이다.

혼, 영에 해당하는 '가장' 가까운 순우리말을 굳이 찾자면 내 생각엔 각각 넋, 얼 정도라고 본다. '넋을 잃다/넋이 나가다/얼이 빠지다/넋을 위로하다' 이런 데에만 쓰기에는 아까운 단어이지만, 지금은 좀 국뽕(우리얼! 말과 글과 얼 ㅋㅋ)이나 동양철학스러운 느낌이 너무 짙어져 버린 것도 사실이다. 정서상 당장 성경 번역에다 반영하자는 말은 아니다.
반도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고 성경이 처음으로 번역됐을 때 성경의 표현이 언어의 용례를 주도해서 정착시켰다면 모를까 지금은 좀 늦은 감이 있다.

단순 어학 사전에서는 이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용례를 찾을 수 없다. soul을 찾아도, spirit을 찾아도 다 비슷하게 정신, 영혼 따위의 풀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넋, 얼을 찾아도 마찬가지이고. 마치 heart-mind, 생각-마음 같은 미묘한 유의어 관계이다.

이런 전문용어들의 엄밀한 구분을 위해서는 어학사전이 아니라 해당 업계의 전문 용어사전을 참조해야 한다.
가령, 국어/영한사전에서 철도 용어인 궤조/궤도/선로, rail/railway/track의 엄밀한 차이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 뒤섞여서 제시돼 나오지. 이런 예가 한둘이 아닐 것이며 성경· 신학 용어도 예외가 아니다.

성경엔 spirit이 비인격적인 '정신' 같은 용례가 없지는 않다.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보고는 너무 놀라서 멘탈이 붕괴되었다고 할 때 "there was no more spirit in her"이 딱 한 번 있다. 어쩌면 저 숙어 자체가 그냥 관용구인 것일지도..
언행에서 어떤 영이 나왔느냐는 물음(욥 26:4)에서의 영(사람의 영, 짐승의 영, 마귀의 영, 하나님의 영..)도 영 자체에 어떤 인격적인 의미를 부여한 용례는 아니다.

하지만 아합 왕을 꾀어내어 죽이겠다고 말한 것은 독립된 인격체로서 어떤 영이다(왕상 22:21). 이게 이해가 안 되니 평범한 공포물을 많이 본 현대인들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장면(마 14:26)이나 욥 4:15 같은 장면에서 ghost 같은 '귀신, 유령'을 떠올리며, 심지어 성경조차 그렇게 번역된 경우가 있다.

성경의 표현은 여기서도 그냥 a spirit이다. 영은 살과 뼈가 없는 존재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다(눅 24:39). 이건 사람이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귀신 같은 존재가 아니다.
ghost는 성령님을 나타내는 Holy Ghost가 아니면 다 give/yield up the ghost라고 해서 말 그대로 '숨지다/죽다'에서 '숨'을 의미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그 이상 wraith, phantom, spectre 같은 개념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저런 영들이 사람의 관점에서 gods(신들)라고 일컬어지긴 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굳이 콧구멍 두 개, 손발가락 5개 같은 외형뿐만 아니라 사람도 몸· 혼· 영으로 하나님의 삼위일체 계층을 이어받았다는 뜻도 있다. 한글 개역성경은 영과 혼 구분을 전혀 안 한 건 아니지만 사람의 창조를 설명하는 창 2:7에서 혼을 영으로 뒤바꿔서 번역했고, 짐승에게도 영이 있음을 말하는 전 3:21에서는 영을 혼으로 뒤바꿔 번역한 흑역사가 있다.

복음을 전해서 다른 사람을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는 행위를 영어로 soul-winning이라고 하는데.. 이게 우리말로는 번역이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여기서도 멀쩡한 혼을 영으로 바꿔서 흔히 '구령'(口令 말고)이라고 하는데, 동음이의어는 둘째치고라도 명백히 오역이다. 개역성경이 창 2:7의 'living soul'을 '생령'으로 엉뚱하게 번역한 것과 동급의 오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을 혼이라만 바로잡으면 우리말은 婚과 동음이의어가 되어서 매우 생뚱맞은 결혼 프러포즈처럼 들리게 된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어느 동네에서는 win을 문자적으로 번역해서 '혼을 이김/이겨 옴'이라고 자체적으로 말을 만들어 쓴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뜻을 표현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저건 더 이상한 번역이 아닐 수 없다.
상을 탔다고 할 때 상을 이겨 왔다고 말하지는 않잖아(win a prize)..;; 트로피나 상장을 발로 잘근잘근 짓이기기라도 하나?

상대편을 무슨 승부를 벌여서 이겼다고 자동사가 아닌 '타동사' 형태로 영어로 말할 때는 beat를 쓴다. win은 대회 이름(win the game)이나 보상을 목적어로 받을 때에나 '이기다'라는 뜻이지, 적군이나 경쟁자를 받는 단어가 아니다. Doom 게임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은 아래의 1994년도 어느 PC 잡지의 문구가 두 단어의 용례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올해의 게임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고(win) 싶은 신작 게임이 있는가? 그렇다면 Doom부터 제치고(beat) 올라와라." 대~~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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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win에 beat 같은 인격체 목적어가 들어갔다면 그건 남의 마음을 얻어서 내 편으로 끌어들였다고, '승리하다'와는 완전히 별개의 의미와 용례가 있다고 봐야 한다. 아무튼 이런 것도 영· 혼과 관란하여 언어에 존재하는 혼동의 카오스의 한 예이다.

개인적으로 spirit이라는 단어를 태어나서 최초로 본 곳은 페르시아의 왕자 2 게임의 부제 the spirit and the flame이었다.
soul이라는 단어는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서울시가 '아시아의 혼(심장, 눈동자?)' 이라고 자화자찬 홍보를 하는 듯하다. 이거 아니면 쏘울메이트 같은 거.

둠 2의 몬스터 중에는 대놓고 '(구원받지 못하고) 잃어버려진 혼'이 있다(lost soul). 그런데 lost soul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곳은 pain elemental(고통의 근원?)이라는 몬스터이다. 이것도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작명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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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기독교 카테고리에 넣을지 언어 카테고리에 넣을지 꽤 고민되는 내용이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03 08:33 2017/06/0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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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시내버스라는 게 역사상 최초로 운행된 건 1920년 7월 1일, 대구에서이다.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다. 거기는 노면전차와 철도가 국내 최초였고 길거리에 택시는 다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시내버스 같은 건 없었다. 서울에서 시내버스가 등장한 건 그로부터 8년 가까이 지난 1928년 4월의 일이다.

그때는 시내버스만 해도 아무나 탈 수 없었으며, 버스 운전사는 지금의 철도 기관사나 여객기 조종사에 준하는 완전 뽀대 나는 유니폼 착용 전문직이었다. 한 마디로 지금보다 지위가 훨씬 더 높았다.

예전에 버스에 대해서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래도 버스의 외형과 시설의 변천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가장 큰 이유로는 검색해 보니 이 주제를 워낙 잘 정리해 놓은 사이트가 이미 있어서 내가 따로 글을 쓸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지 싶다. 그러니 이 블로그에서는 그냥 변화의 큰 추세를 요약만 좀 해 보겠다.

1. 1950년대: 원박스화

먼 옛날, 20세기 초중반에 자동차들의 디자인 트렌드는 소형차건 대형차건 엔진룸은 전면부 중앙에 튀어나오고 앞바퀴 펜더가 돌출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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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50년대쯤부터는 엔진룸이 별도로 튀어나오지 않고 차체 바닥 밑으로 간 원박스형(혹은 R캡이라고도 불림) 버스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때는 버스의 디자인이 지금과 비슷해지기 시작한 일종의 과도기라 볼 수 있다. 50년대 말에 등장한 시발디젤 버스도 그런 형태이며, 관련 사진은 이 블로그를 검색해 보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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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의 부산 정치 파동 때 국회의원들이 탔던 버스도 사진을 보니 정확한 차종과 제조사는 알 수 없지만 원박스형 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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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0년대: 디젤, 안내양

이때부터 시내버스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어서 시민의 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노면전차가 폐지되었다.
버스의 차체가 더 커지기 시작했고, 엔진이 휘발유에서 디젤 기반으로 바뀌었다. 시발 버스도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냥 버스가 아니라 '디젤 버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시내버스에는 공식적으로 '여차장'이라 불리던 안내양이 등장했다. 모든 승객이 타거나 내린 뒤, 안내양이 차를 툭툭 치며 "오라이!"라고 운전사에게 외치는 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도 나온다.

지하철 업계에는 승객을 강제로 밀어넣는 푸시맨이 있었던 것과 비슷하게, 옛날에 시내버스는 문을 닫을 수 없을 정도로 승객이 너무 많이 탔을 때의 대처법이 있었다. 일단 출발 후 운전사가 직선 도로에서도 오른쪽으로 살짝 급핸들 조작을 해서 사람들을 원심력 때문에 왼쪽으로 강제로 쏠리게 했다. 그 사이에 안내양이 문을 닫았다. 그런 기동이 벌어지기도 했댄다.

옛날엔 시골에서 무작정 올라와서 가진 것 배운 것 없이 맨몸만으로 돈을 벌기 위해 버스 안내양 직업을 선택한 여성들이 많았다. 이들의 애환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버스 요금을 차내에서 현금으로만 거래하던 시절에는 돈 관리도 안내양이 했는데, 정확한 승차자의 집계가 안 되니 승객으로부터 받은 돈의 일부를 안내양이 슬쩍 '삥땅', 횡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 역시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안내양들이 근무 중일 때는 개인 돈을 절대로 지참하지 못하게 하고, 지금의 관점에서는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인권유린일 정도로 가혹한 방식으로 불시 몸수색을 했다고도 한다. 그래도 그때는 약한 을인 안내양들이 이의 제기를 할 수 있지 않았다.
(참고로 조폐공사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지금도 작업장에 드나들 때 개인 돈은 절대 지참하지 못한다. 개인 사물함에다 몽땅 보관해야 한다.)

3. 1970년대: 두짝 문, 고속버스

과거의 버스들은 앞바퀴가 차체의 굉장히 앞에 있었으며, 출입문은 가운데에 한 군데에만 있었다. 지금은 마이크로버스만이 이런 형태인데 말이다. 안내양은 바로 그 문의 문지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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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레알 말죽거리 잔혹사 시절 시내버스의 모습이다.)

그러다 70년대 후반쯤부터 대형 시내버스들은 요즘 버스처럼 앞문과 뒷문 구분이 생겼으며 앞문은 앞바퀴보다 더 앞에 놓이게 되었다. 단, 문은 수동 개폐식이었으며 뒷문도 앞문처럼 폴더(?) 형태로 접혔다. 이런 버스 보신 분 계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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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타는 문과 내리는 문을 분리하고 나니 승객의 승하차가 더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아울러, 시내버스 얘기는 아니지만 1970년에는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 덕분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고속버스라는 게 등장했다.
그 시절에도 경부선 열차를 타면 서울-부산을 5시간 이내에 주파할 수 있긴 했지만 그건 관광호 내지 새마을호처럼 서민이 범접하기 어려운 매우 비싸고 빠르고 정차역 적은 최고 등급 열차를 탔을 때에나 가능했다.

그런데 고속버스라는 '자동차'를 이용해서도 열차 만만찮은 빠른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졌으니 이때 고속버스의 인기는 대단했다.
고속버스 운전사는 지금의 KTX 기장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고속버스에도 안내양이 탑승했다.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안전벨트를 챙겨 주고 짐 나르는 걸 돕는 등, 지금 비행기 스튜어디스가 하는 일을 차내에서 했다. 가고 서기를 반복하는 시내버스 안내양과는 하는 일이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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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80년대: 리어 엔진, 토큰, 하차벨, 자동문

그 뒤 1980년대에는 후방 엔진 버스가 등장해서 대형 버스들은 다 이런 형태로 바뀌었다. 전방 엔진은 앞부분에 타는 곳이 굉장히 높으며, 운전석 옆에 따끈한 물건 거치대가 있었다. 그 대신 맨 뒷좌석은 봉긋 솟아 있지 않고 높이가 다른 좌석들과 동일했다.

그 밖에 이 시기에는 시내버스에서 안내양이 퇴출되는 기술적인 기반이 차근차근 마련됐다. 먼저 현금 대신 버스 토큰이 등장하여 차내에서 번거로운 잔돈 거래를 하는 여지가 줄었다. (서울 시내버스에서의 첫 도입 시기는 1977년)
그리고 차내에 하차벨이 생겼으며, 사람이 일일이 뭘 돌리지 않고 버튼만 누르면 별도의 동력으로 개폐되는 자동문이 등장해서 이쪽으로도 동작이 수월해졌다. 뒷문은 폴더가 아니라 미닫이 형태로 바뀌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1인 승무 시내버스의 원형은 이때쯤 대부분 완성되었다.

5. 1990년대: 에어컨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1989년 12월 말을 끝으로 안내양은 전국의 시내버스에서 법적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여차장을 둬야 한다는 법 조항 자체가 개정과 함께 삭제됐다.
그리고 나라가 좀 살 만해지고 자동차 기술의 발달 덕분에 엔진 출력도 넉넉해지면서 버스에 냉방기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90년대에는 전철도 아직 천장에 선풍기가 달려 있고, 지하철역 승강장은 여름에 너무 덥다고 뉴스에서도 난리를 칠 정도였다.

시내버스에 자동 변속기가 도입된 것도 이 무렵에 도입된 현대 애어로시티가 최초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대형 상용차에 자동 변속기는 비싼 추가 옵션 가격과 연비· 효율 문제로 인해 2010년대인 지금까지도 보급이 더딘 편이다.

6. 2000년대와 이후: 저상버스, 천연가스 버스, 환승 할인, 정거장 안내방송, 위치 안내

21세기에 시내버스는 생각보다 굉장한 발전을 거듭했다.
먼저 타고 내리기 쉬운 저상버스가 등장했으며 버스들이 동력원도 천연가스로 바뀌어서 대도시의 공기 질 개선에 굉장히 큰 기여를 했다.

그 밖에 IT 기술과 접목하여 환승 할인, 정류장 위치 안내 시스템도 20세기에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요 근래에는 그냥 도착 안내만 하는 게 아니라, 오는 버스들의 내부 혼잡도를 같이 표시해 주는 기능도 추가되어 매우 유용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내버스 요금은 먼 옛날과 비교했을 때 평균 물가 상승률보다 훨씬 더 가파르게 많이 오른 요금에 속한다.
버스 요금은 처음에 단가 자체가 절대적으로 굉장히 저렴했으며, 지금은 버스의 수송 분담률이 옛날보다 매우 낮아져서 개인당 단가가 크게 오르기도 했다. 거기에다 우리는 각종 IT 인프라 덕분에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더 편리하게 버스를 이용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비싼 요금이 마냥 바가지인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31 08:26 2017/05/3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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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체계 대통령 대수 대통령 개헌 내력 북괴
미군정 존 하지   소련정
1공 (1948) 1 이 승만 제헌헌법, 대통령 4년+1중임, 부통령, 간선 김 일성
2 1차, 대통령 직선제 (부산 정치 파동, 발췌개헌)  
3 2차, 초대에만 중임 제한 폐지 (사사오입) 8월 종파 사건 (정적 숙청)
2공 (1960) 4 윤 보선 3차, 의원내각. 최초의 졸속 아닌 합법적 개헌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4차, 1공 시절 잔재 청산??  
3공 (1962) 5 (vs 윤 보선) 박 정희 5차, 대통령 중심제로 회귀. 지방자치 사실상 사문화  
6 (vs 윤 보선)    
7 (vs 김 대중) 6차, 3선 개헌  
4공 (1972) 8 단 7차, 유신, 대통령 6년+무제한 중임, 간선 주체사상 명문화 (자가신격화)
9 독
10 출 (1979) 최 규하    
11 마 (1980) 전 두환    
5공 (1981) 12 8차, 대통령 7년 단임  
6공 (1988) 13 노 태우 9차, 대통령 5년 단임, 직선; 지방자치제 부활  
14 김 영삼   김 정일, 고난의 행군 (경제 파탄)
15 김 대중    
16 노 무현    
17 이 명박  
18 박 근혜  3공과 6공 그 어떤 선거 때보다도 많은 득표율로 당선됐지만..;; 탄핵소추 파면 김 정은

대한민국, 남한이라는 이 나라는 다음과 같은 점들로 인해 여느 나라들과 같지 않은 독특한 현대사를 보유하고 있다.

  • 20세기 중반에 주변 나라들과는 달리 매우 이례적으로 공산화되지 않았다.
  • 일본의 덴노 같은 정신적인 지주나 중심점이 있지 않으며, 그나마 있던 것도 조선이 망하면서 싹 사라졌다.
  • 미국처럼 초대 대통령이 2선만 하고 깔끔하게 물러났다거나, 쿠데타 한 번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오지 않았다. 미국은 도중에 중임 관련 규정만이 살짝 바뀌었을 뿐, 대통령의 임기 체계 자체가 우리나라 헌정사 같은 급의 큰 변화나 굴곡을 겪은 적은 없다.

본인은 노 태우 대통령 내지 서울 올림픽 시기가 스스로 경험한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가장 먼 과거이다. 그 이전은 기록을 통해 간접 체험만을 한 선사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5공 시절을 직접 경험한 기억이 없다. 노 태우의 바로 전임까지만 해도 대통령을 5년마다 한 번씩 뽑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 체계가 완전히 달랐다는 얘기가 대단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그땐 도대체 선거를 어떻게 했기에 이 승만이나 박 정희는 1~3대, 5~9대로 대통령을 그렇게 오래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굳이 왜 기간과 대수를 나누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각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야 개인의 정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런 들쭉날쭉한 자국의 헌정사 자체는 역덕후에게 뭔가 유사점과 차이점을 정리하고 분석할 만한 좋은 아이템인 것 같다.

가장 먼저 미군정부터 생각해 보자. 미군정은 기간이 짧고 존재감 없는 과도기여서 잘 부각되지 않지만, 알고 보면 단군의 후손들이 거의 전무후무하게 백인(미군정 사령관인 존 하지 장군)의 통치를 받은 시절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독특하다. 마치 신미양요가 분단 이전에 단군의 후손이 무려 미국과 군사 교전을 벌인 전무후무한 사건인 것처럼 말이다.
한국은 일제 식민지가 됐을지언정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입각한 서양 백인들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나라이다. 영국이라든가 스페인이라든가... 대한민국 역사상의 미군정은 저런 이념에 따른 지배는 아니었다.

그 뒤 우리나라 역사상 통치 기간이 가장 길었던 대통령 톱 3(쓰리)는 이 승만, 박 정희, 전 두환이다. 이 승만은 선출은 선거를 통해 무리 없이 됐지만 훗날 장기 집권을 위한 꼼수 개헌을 했으며, 박 정희는 쿠데타에다가 장기 집권 개헌을 모두 자행한 인물이다. 마지막 전 두환은 집권을 위한 쿠데타만 저질렀으며 임기 만료 후에는 군소리 없이 물러나긴 했는데.. 이것도 전국민적 저항이 없었으면 물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있긴 하다.

초대 제헌헌법이 규정하는 대통령 체제는 보다시피 완전 미국 스타일인 걸 알 수 있다. 이 승만은 1~3대 대통령을 역임했는데, 위의 표에서 보다시피 매번 헌법을 자신의 당선에 유리하게 약간씩 뜯어고쳤다. 직선제는 그 자체는 나쁠 것 없는 선거 제도이지만, 아마도 꼴보기 싫은 야당 의원이 아니라 무지몽매한 민중을 돈과 서커스로 꾀어서 직접 투표를 시키면 여당에게 더 유리할 것 같아서 도입한 듯하다. 그래도 2선 때는 우리나라가 아직 전쟁 중인 관계로 정서적으로 어지간해서는 집권 여당을 바꾸지 않으려고 하니 이 승만의 당선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3선 이상까지 하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심지어 롤모델 국가인 미국에서도 대공황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경험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같은 사례 말고는 찾기 어렵다. 그러니 단순한 정치깡패 동원이나 부정선거만으로는 안 되고 또 헌법을 고쳐야 했다.

다른 대통령도 아니고 초대 대통령이 벌써 저런 짓을 하면 얼마나 안 좋은 선례가 남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그 고령에 그 검소한 구두쇠 대통령이 다른 돈과 권력, 명예를 탐해서 저런 짓을 한 건 아니고, 그냥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내가 꽉 붙들지 않고 야당에게 정권을 선뜻 넘겨 줬다간 남조선이 또 공산당 손에 넘어갈 것 같다."라는 자격지심 똥고집 때문에 저렇게 된 것 같다. 그게 아무 근거 없는 황당한 망상도 아닐 뿐더러 인의 장막은 그 기질을 더욱 부추겼을 테고. 게다가 신 익희(1956), 조 병옥(1960) 같은 야당 라이벌 정치인이 알아서 없어져 주기까지 한 덕분에 3선과 4선은 더욱 수월하게 넘겼다.

허나 도를 넘는 부정선거가 폭로되면서 12년 독재를 참다못한 국민들로부터 전국적인 혁명이 일어나자, 이 승만은 현실을 직시하고 하야를 선택하게 됐다. 제1 공화국은 자신은 부정부패와 독재를 저지르면서도, 참 아이러니하게 국민들에게는 국민학교에서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릴 만한 사상적인 기반을 듬뿍 마련해 줬다. 비록 현실이 시궁창이었을지언정 최소한 방향만은 올발랐던 셈. 이로 인해 남한과 북한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이 승만 얘기가 갑자기 좀 길어졌는데, 그 다음 출범한 제2 공화국은 우리나라 헌정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인 의원내각제 정부이다. 군부나 독재자의 입김이 개입하지 않고 나름 최초로 합법적(?)인 절차로 개헌도 이뤄 냈다. 이게 제대로 시행됐으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 승만 시절과는 굉장히 딴판인 나라가 됐을 수도 있지만 박 정희 군사정권으로 인해 송두리째 뒤집어엎어지면서 이건 정말 짧고 존재감 없는 흑역사 헌정 체제가 됐다.

2공이 계속 유지되는 배경을 설정해서 대체 역사물 소설이나 영화가 충분히 나올 법해 보이지 않는가? 아예 조선이 망하지 않아서 입헌군주제가 계속 유지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보다야 더 현실적일 것 같지만.. 그래도 현실에서는 고종· 명성황후가 장 면· 윤 보선보다 존재감이 더 크고 대중적인 인기가 더 좋다.

2공은 '장 면 내각'이라고도 불린다. 다만, 장 면은 국무총리였고 대통령은 엄연히 윤 보선이었다. 이때 행해진 4차 개헌은 친일 반역자..는 아니고 1공 시절의 정치 깡패나 부정 선거 주동자 같은 반민주(반민족이 아님) 행위자를 처벌하고 청산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개헌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과거의 행위를 새로운 법으로 처벌하는 것이니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그때부터 있었다. 4공 시절 박통의 긴급조치 중 3호만은 그리 정치적이지 않고 생뚱맞은 민생 분야인 것과 비슷하게 4차 개헌은 나머지 개헌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그 다음으로,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의 주인공인 박 정희가 등장한다. 그는 대통령 선출은 훗날 전역 후 민간인 신분으로 된 것이고, 쿠데타 직후에 아직 군인 신분일 때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도 역임했었다.
이때는 아직 나라가 워낙 못살고 사회 기강이 불안하고 6· 25 시즌 2가 또 벌어질지 모르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다 갈아엎자" 식의 군사혁명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지지를 많이 받았다. 지금처럼 길거리에 뛰쳐나와 촛불 들고 "민주주의가 죽었습니다" 이럴 상황이 아니었다. 전땅크의 쿠데타 때와는 달리 박통의 쿠데타 때는 누가 막 심하게 저항하거나 죽지도 않았다.

박통은 차근차근 자본을 유치하고 경제 개발을 해 나갔다. 경부 고속도로도 3공 시절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겨우 한두 대만으로는 임기가 너무 짧았다. 온갖 공작으로 야당 후보를 간신히 이겼는데 3선을 하자니 진짜 이 승만 시절의 사사오입 개헌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헌법을 또 날치기로 고쳐야 하게 됐다. 그리고 나중에는 헌정 체계를 전반적으로 다 자기 독재에 맞게 뜯어고치는 유신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4공 체제에서는 단독 후보가 혼자 출마해서 꼭둑각시 의원들의 만장일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지만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앞서 언급했듯이 긴급조치라는 필살기도 내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정치 제도가 이렇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건 정치적으로 엄청난 모험이었기 때문에 반발을 최소화하려면 경제 개발, 민생 안정, 굳건한 반공 안보, "우리식 민주주의" 등 뭔가 좋은 명분을 만들어서 '유신'이라는 브랜드명(?)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세뇌를 시켜야 했다.

박 정희가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이 4공 체제가 도대체 얼마나 갔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가 9대 대통령의 예정 임기만 다 마쳤어도 이미 1984년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에서 5~8호선뿐만 아니라 3호선 양재-수서와 4호선 당고개도 시기적으로는 2기 지하철에 속하듯, 10대 최 규하와 11대 전 두환도 시기적으로는 이런 4공 체제에서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박통 당사자 말고 다른 정치인들이 이런 무지막지한 독재 헌정 체제를 받아들일 리 없었으므로 이내 쿠데타가 일어났고 헌법도 업데이트 됐다. 그래서 4공 중에서 8~9대는 유신 시대이지만, 10~11대는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라는 기구 휘하에 있었다.

박통이 암살 당한 뒤에도 1980년 서울의 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독재자가 물러났다고 해서 군대가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대통령 임기와 관련된 개헌은 그 당대의 대통령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가히 "신의 한 수" 소급 적용 금지 조항이 5공 시절 8차 개헌 때에야 드디어 추가되었다. 뭔가 "자백만이 형사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라면 그 자백은 인정되지 않는다", "피고인에게 유리한 법 개정만 소급 적용되고, 불리한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우여곡절 시행착오를 겪은 뒤, 우리나라는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6· 29 선언이 이뤄졌으며, 박 정희 유신 시절 이래로 없어졌던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고 5년 단임제가 정착했다. (5공 12대 대통령 선거도 유신 시절 같은 노골적인 단독 출마만 아니지, 주요 야당 후보들은 감금당한 채로 관제야당 후보들이나 참여한 답정너 선거였기 때문) 당장 13대 때는 후보 단일화 실패로 인해 또 전 두환의 육사 후배인 노 태우가 당선됐지만, 14대 이후부터는 순수 민간인 대통령이 나오고 있다.

이 1987년 9차 개헌이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10년 넘게, 아니 30년 가까이 장수하고 있는 헌정 체계이다. 과연 이 상태에서 헌법이 부분 또는 전면 개정돼서 7공화국이 나올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총평

1. 본인은 위와 같은 내력을 감안하고도 이 승만과 박 정희 대통령을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전자는 0에서 1을 만든 사람이고 후자는 1에서 100을 만든 사람이다. 그 절망적인 가난과 시궁창인 국민 의식, 북괴의 위협 속에서 그만치라도 이룬 게 용하고, 그 정도 독재는 막 잘했다고 칭송할 수는 없어도 이해와 수긍이 된다. 지금 역으로 의회와 언론의 막장 횡포를 생각하면, 옛날에 그 상황에서 그 정도 의회· 언론의 통제와 독재 없이 적화통일을 어떻게 막고 경제 성장이고 민주주의고를 어떻게 이룰 수 있었을까? 독재 정권이 뭘 그렇게까지 망쳐 놓을 게 있었는지 이상한 피해의식 선동에 공감하지 않는다.

2. 물론 경제 성장을 이룬 뒤에 이 정도 국민의 희생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이룬 것 역시 그 의미와 가치를 폄하하고 싶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는 충분히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군사 정권이 잘한 것을 실드 치더라도 그들의 쿠데타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고 싶지는 않다(장 태완 같은).
하지만 오늘날은 민주화라는 게 그냥 별 명분도 없이 그저 권위에 대항하고 반역하는 걸 합리화하는 데 쓰이고 국가 체제를 부정하고 필요악을 없애자고 하고 더 심하게는 반정부 종북 세력에게 선동되고 이용당하는 추세가 명백하여 본인은 이를 경계한다. 옛날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운동꾼들도 태극기를 들고 나오곤 했는데 요즘 어떤 사람들은 태극기와 애국가를 싫어하는 것 같다.

3. 북괴의 존재로 인해 대한민국은 무슨 분야든 천천히 여유롭게 발전을 할 수가 없어졌다. 여기서 우리나라 20세기 중후반의 대부분의 비극이 시작됐다. 또한 북괴 같은 저질이 존재함으로써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수준까지 하향평준화되었음도 명백히 사실이다. 뭔 무능과 비리를 저지르더라도 최소한 안보관· 사상 자체가 썩었거나 대놓고 북괴에다가 퍼주고 교류하자, 말만 번드르하게 포장해서 공산주의 하자는 놈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이건 우리나라 정치판의 고질병으로 남거나, 아니면 진짜 나라가 망해서 고생해 봐야 해결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28 08:33 2017/05/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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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초에 본인은 1년 전에 한번 오른 적이 있는 불암산을 다시 찾았다. 단, 북쪽의 당고개 역 인근에서 출발했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태릉 방면의 남쪽 구간만 잠깐 오르다가 곧장 하산했다. 여기를 답사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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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으로 지도를 만지작거리던 중, '공릉산 백세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문과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근처에는 서울 과학 기술 대학교와 원자력 병원이 있고, 산기슭에는 서울여대, 육사, 태릉 선수촌 등이 있다. 예전에 불암산을 올랐다가 돌아오면서 이 도로(화랑로)를 버스 타고 지난 적은 있지만, 정작 근처의 불암산 구간을 답사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여기를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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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뒤로 난 언덕길의 좌우로는 처음엔 평범한 울타리가 있다가 나중엔 살벌한 철책으로 바뀌기도 했다. 왼쪽엔 한전 인재 개발원은 고압 전기 시설 때문에 경비가 삼엄하며, 오른쪽에는 문화재인 태릉에다가 태릉 사격장이 있으니 아무래도 아무나 못 들어가게 통제를 해야 한다.
불암산이 남쪽엔 요주의 문화재와 보안 시설이 많이 자리잡아 있다. 그래서 이런 것들 말고 참호 같은 군사 시설도 있었고 거기에는 '촬영 금지 - xxxx부대장 백' 이런 표시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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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는 철책을 따라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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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딱 한 군데 전망이 트인 곳에서는 육사 캠퍼스가 희미하게 보였다. 지인용(智仁勇) 탑과 근처의 동그란 육군 박물관이 보인다. 봉화산에서는 육사를 전혀 볼 수 없었는데 산에서 저기를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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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인재 개발원에서는 한참 멀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바닥에는 한전에서 매설한 듯한 무슨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3 말고 4라고 적힌 것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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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불암산 남부의 등산로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나타났다. 서울 둘레길을 선택하면 인서울에 속한 산중턱 능선만 계속 타면서 북쪽의 당고개· 수락산 방면으로 갈 수 있다. 사실, 공릉산 백세문에서 시작해서 본인이 지금까지 걸은 길도 서울 둘레길이다.

아니면 다른 길로 가서 봉우리를 갈아탈 수 있다. 그러면 거기서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불암산의 정상으로 가거나 아니면 이 상태로 삼육 대학교 방면으로 하산할 수 있다.
본인은 오랜 고민 끝에 서울 둘레길은 더 가지 않고 정상· 삼육대 방면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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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철책이고 울타리고 뭐고 다 없어지고 산행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고 본인은 삼육대 방면으로 하산했다. 그러자 여기부터는 삼육대 사유지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각종 울타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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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정상은 바로 저기이다. 북한· 수락산처럼 얘도 꼭대기 부근은 온통 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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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삼육대 캠퍼스 안에 있는 그 유명한 '제명호'라는 인공 호수이다.
종교 계열 학교 아니랄까봐, 곳곳에서 금주 금연 강조하고 성경 말씀이 걸려 있고 "거룩한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에 등산객 여러분도 초대합니다" 이런 표지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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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육 대학교 백주년 기념관의 모습. 삼육 대학교 캠퍼스를 구경한 건 이번이 난생 처음이었다.
비록 불암산 자체는 별로 높게 오르지 않고 등산을 짤막하게 마쳤지만 작년에 갔던 곳과 중복되지 않는 구간만 다닌다는 목표는 달성했다.

천장산 기슭에 의릉이 있는 것처럼 여기 근처에는 태릉과 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가 보지는 않았다. 그 대신 본인은 여기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낮은 산인 초안산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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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산은 전철 1호선 녹천 역에서 내리면 코앞에 있다.
옆에 중랑천을 흐르는 동부 간선 도로가 원래는 강의 양 옆으로 상행과 하행이 달리는데, 여기 초안산 구간만은 부지가 없어서 전철 선로가 중랑천의 바로 옆을 지난다. 이 때문에 이곳은 동부 간선 도로도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병목과 정체가 발생하곤 했다.

도로의 확장을 위해 철도 선로를 이설하겠다는 계획이 거의 2000년대부터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진행은 지지부진한가 보다. 그래도 여기 주변의 풍경이 가까운 미래에 바뀌기는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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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산은 워낙 작고 낮은 산이며, 비슷한 체급인 봉화산처럼 등산로도 여기저기 많이 뚫려 있었다. 여느 산들처럼 어디에서 어디 지점까지가 수 km 거리가 아니다. 그냥 몇백 m만 설렁설렁 걸으면 된다.
원래는 산의 규모가 더 큰데 덕흥로라는 길을 내느라 둘로 쪼개진 듯하다(창동 주공 4단지 아파트, 생태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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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산치고는 정상 주변에 헬리패드도 있고 정자와 심지어 태극기 등, 메이저급 산의 정상에 있을 만한 시설은 다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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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초안산을 찾은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것.
초안산에는 조선 시대 궁궐 내시, 양반, 서민 등의 무덤이 1000여 개 가까이 있다고 한다. 정상 근처를 보니 웬 묘비와 석상들이 여럿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올랐던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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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 역에서 /자 모양으로 산을 남서쪽으로 가로질러서 하산했다. 역시 빽빽한 아파트와 빌라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25 08:31 2017/05/2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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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리플

  • 저그 해처리 레어 하이브 : 학사 석사 박사
  •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 서울 지하철 1호선 2호선 3호선 (힌트: 색깔의 유사성)
  • 크레용-크레파스-파스텔 : 짜장면-짜파게티-스파게티
  • 레코드 SP EP LP : 그래픽 카드 CGA EGA VGA =_=;;

세상에는 3개로 이뤄진 진영이 속성이 서로 다 동일하거나 제각기 다 다른 경우가 있다.
스타크래프트의 플토, 테란, 저그가 좋은 예이다. 미네랄과 가스, 서플라이를 사용하며 기본적인 공방 업그레이드가 3단계씩 있는 건 공통이지만, 건물을 짓는 방식이나 각종 스킬 같은 건 전부 제각기 다르다. 두 종족은 완전 공통인데 한 종족만 다른 경우는... 일단 없다.

요런 체계를 모델링한 세트(Set)라는 아주 재미있는 머리 싸움 보드 게임도 있다. 4가지 속성(색깔, 도형 개수, 채움 패턴, 도형 모양)이 전부 같거나 전부 다른 카드 트리플을 빨리 찾는 게 목적이다. n개의 카드가 있을 때 세트가 하나라도 존재할 확률 내지 전혀 존재하지 않을 확률도 구할 수 있을 텐데 내 수학 지식으로는 모르겠다.

필기 내지 그리기 도구로서 색연필-크레용-크레파스-파스텔-콩테로 갈수록 특성이 어떻게 달라지나 모르겠다. 파스텔은 그냥 딱딱한 분필 같고, 크레파스는 왁스가 들어가서 그런지 좀 끈적거렸던 것 같다.
콩테나 목탄 같은 건 본 적 없다. 목탄화는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이 화가 지망생이라 쓰던 물건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2. 트윈

  • 지하철역 중에서 종로3가와 종로5가는 영락없이 삼겹살과 오겹살을 떠올리게 한다. -_-
  • 농사에 비닐하우스가 있다면, 야구에는 돔구장이 있는 듯..
  • 서울 강북에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 있다면 강남에는 국정원 뒷산인 대모산이 있다. 그리고 강북에 거대한 군사 시설인 용산 미군 기지가 있다면, 강남에는 국군정보사가 있어서 서초대로에 길이 끊겨 있고 gap이 존재한다. 서로 비슷한 심상이 느껴지는데, 얘들은 가까운 미래에 서울 밖으로 이전할 계획이 잡혀 있다.
  • 스타크래프트에나 있어야 할 옵티컬 플레어의 실사판: 공중으로 쏘는 레이저 포인터(특히 녹색), 육지 자동차에는 HID 불법 개조.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분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주신다고 믿는다.
허나, 사람에 대해서는 능력껏 벌어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다같이 망하고 거지 되는 세상을 부른다.
이것이 신과 인간에 대해서 '필요'라는 개념이 작용하는 방식의 차이점이다. 이건 성악설이 성립하는 한 반박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한편, 컴퓨터와 관련해서는..

  • 옛날에 컴퓨터를 다루던 사람들은 디스크의 배드 섹터를 걱정했지만 요즘 사람들은 모니터의 불량 화소를 신경 쓰는 듯하다.
  • 옛날 사람들은 컴퓨터를 오래 쓰면 Windows 3.x 내지 9x의 리소스 퍼센티지가 줄어드는 걸 보고 바싹 긴장했지만,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배터리 퍼센티지가 줄어드는 걸 보고 바싹 긴장한다.

3. 부정적인 예

  • C++ 템플릿의 문제(소스 코드가 노출된 채 모든 번역 단위에 매번 인클루드 돼야 함)를 해결하려고 고민했는데 기껏 나온 게 export
  • 남북이 통일하랬더니 기껏 나온 게 고려연방제 (1국가 2체제.. 그냥 전쟁만 없는 반쯤 적화통일)
  • ActiveX를 없애라고 하자 나온 게 EXE 프로그램

이들이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4. 긍정적인 예

  • 건축업계· 학계에서는 '철근 + 콘크리트'가 신이 건축· 재료공학계에 내린 천혜의 재료 궁합이라고 그런다. 열팽창 계수가 거의 같아서 혼합 가능하면서도 서로 장점을 부각시키고 단점은 보완하면서 최고의 건축 자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항공업계에서는 하필 여객기의 최적 순항 고도에 제트 기류라는 게 존재하는 게 기적적인 행운이라고 한다.
  • 1970년대에 인류가 우주 개발을 하고 있을 때 마침 태양계 행성들이 가까이 일렬로 배열돼 있어서 보이저 2호는 단독으로 천왕성과 해왕성을 동시에 탐사하는 대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것도 못해도 백수십 년 만에 한 번 찾아오는 기회였다고 그런다.

이런 예가 더 있을지 궁금하다. 혹시 반도체를 만드는 데에도 무슨 천혜의 자연 광물 특성이 활용되는 게 있지 않을까?

5. 예상치 못한 대박

예전에 교통수단 관련 글을 쓰면서 한 번씩 언급한 적이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복습 차원에서..

  • 서울 지하철 9호선은 잠재적 수요를 인정받은 덕분에 서울 3기 지하철 중 거의 유일하게 얘 혼자만 노선 계획이 온전히 살아남아서 건설되고 개통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국가에서는 이거 만들어 봤자 지상의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적수가 못 될 것이고 공기수송 적자이면 어쩌나 지금의 입장에서는 참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그래서 전동차도 달랑 4량으로 편성하고, 최대한 메리트를 끌어올리려고 급행도 만들었다. 그랬는데, 실제로 뚜껑을 열어 보니 9호선은 초대박을 쳐서 최악의 가축수송 혼잡도를 보이는 노선이 됐다.
  • 지난 1960년대 말, 보잉 사에서는 유럽에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개발되는 걸 예의주시하면서 "이거 초음속 여객기가 대박을 치면 어쩌나"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기들도 초음속기인 보잉 2707을 개발 준비만 하면서 간을 보는 한편으로, 이미 개발 중이던 보잉 747 아음속 여객기는 주류에서 밀려날 경우 화물기로 언제든지 개조 가능하게 만반의 대비를 해 놓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초음속기는 가성비가 심각하게 부족했고 오일 쇼크와도 맞물려 영 재미를 못 봤다. 그 대신 747은 대형 여객기로 수십 년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6. 2단계 계층

컴퓨터 프로그램 내지 알고리즘을 보면 작업을 수행하는 양상이 명백하게 독립된 두 phase로 나뉘는 것이 있다.

  • 힙 정렬: 정렬 알고리즘 중에는 얘가 꽤 독특하다. 배열을 기반으로 heap을 생성하는 단계와, 그 heap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정렬된 리스트를 하나씩 뽑아내는 단계로 나뉜다.
  • 컴파일러: 소스 코드를 구문 분석을 해서 내부 representation으로 변환하는 프런트 엔드, 그리고 이를 토대로 최적화와 기계어 코드 생성을 하는 백 엔드로 단계가 분명하게 나뉜다.
  • 일본어 IME: 일본 문자 자체를 입력하는 방식과, 그 일본어 문자열을 NLP 관점에서 분석해서 어절을 나누고 한자 변환 후보를 제시하는 것은 서로 완전히 별개의 단계이다. 그러니 전자와 후자를 분리해서 일부 파트만 서로 다른 알고리즘 내지 DB 제품으로 교체해서 사용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데이터 압축이 있다. 흔히 간과하기 쉬운데, 압축이라는 절차도 두 단계로 나뉜다. 먼저, 원소나열법을 간단한 조건제시법으로 바꿀 만한 규칙성, 반복 패턴을 찾아서 더 간결한 방식으로 표현 방식을 바꾸는 것이 전자이다. 전자를 수행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며, 손실 압축과 비손실 압축도 이걸 수행하는 방식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압축된 데이터는 데이터 + 탈출문자 + 약어에 대한 번문 명령(expansion instruction) + 사전 참조 오프셋 같은 게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 다음으로, 이런 인코딩 결과를 정보 이론 관점에서 빈틈 없는 아주 compact한 형태로 물리적인 표현 방식을 바꿔서 최종 출력하는 것이 후자이다. 후자는 이론적인 압축률의 한계도 다 증명돼 있고 전자에 비해 더 발전할 게 별로 없는 상태이다.
압축 알고리즘이라 하면 이 둘을 싸잡아서 한데 일컫는 경향이 있으나, 이 두 단계는 엄연히 용도와 성격이 다르다. 가령, jpg 이미지 포맷의 경우 이산 코싸인 변환은 전자요, 결과를 허프만 코딩으로 출력하는 것은 후자에 대응한다.

요즘은 보기 힘든데 1990년대에 Windows Installer가 아직 없던 시절에는 마소에서는 확장자가 cab이던가? 독자적인 압축 파일 포맷을 써서 프로그램을 배포했다. 더 옛날에는 원본 디스크를 보면 설치되는 파일들이 확장자만 다 _xe, _ll 혹은 ex_, dl_ 이런 식으로 바뀌고 안에 내용은 어설프게 압축되어 있곤 했다. Lempel-Ziv 같은 알고리즘으로 압축되긴 했는데, 코딩 방식을 조밀화하는 '후처리'는 하지 않아서 가끔씩 원본 파일에 들어있는 문자열이 드문드문 보이곤 했다.

파일을 압축하면 기본적으로 전자 과정을 거쳐서 크기가 줄어드는데, 후처리까지 거치면서 크기가 좀 더 감소할 뿐만 아니라 이때 진짜 난수표 같은 뒤죽박죽 비트 나열로 바뀐다. 둘은 마치 사이다에서 (1) 단 맛을 내는 향신료와 (2) 탄산, 에어컨에서 (1) 온도를 낮추는 압축기와 (2) 송풍기하고 얼추 비슷한 관계가 아닌가 싶다.

7. 혈액형과 상속 개념

코딩 하니까 드는 생각인데..
중등학교 때 혈액형과 수혈 가능성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에서 말하는 상속이라는 개념을 어렴풋이 접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수혈 가능성은 형변환 가능성이고.

O형이 베이스 클래스이고 A, B형은 O형으로부터 상속이며 AB는 A와 B 다중 상속이다.
A형과 B형이 O형을 가상 상속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매끄럽지가 않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반드시 같은 유형끼리만 수혈을 하지, A/B계열형에다가 O형 피를 수혈하고 AB형에다가 A나 B형 피를 수혈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런 얘기는 어렸을 때 과학 책이나 교과서에서 접하지 못했다.

아무쪼록 다중 상속은 포인터의 형변환이 이뤄질 때 오프셋 보정이 필요하게 하며, pointer-to-member도 포인터 하나 형태로 간단하게 구현할 수 없게 만드는 주범이다.
다중상속 받은 한 클래스의 포인터를 다른 상속 파생 클래스의 포인터로 바꾸는 건 굉장히 조심해서 해야 한다. 이럴 때 C-style cast는 reinterpret_cast와 개념적으로 다를 바 없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static_cast를 써야 실수를 예방할 수 있다.
그러니 혈액형간 typecast도 가능한 한 안 하는 게 좋아 보인다. 아무래도 위험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22 08:27 2017/05/2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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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산과 한글 학회

본인은 몇 년 전 한글 학회 관계자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애산 이 인 선생(1896-1979) 추모 학술대회' 초청장이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 약력을 보니 해방 초기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법조인이긴 한데, 본인은 그 당시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 시절의 관련 분야 인물로는 초대 제헌 헌법 초안을 작성한 유 진오 박사 같은 사람밖에 못 들어 본 상태였다. 저분은 진짜로 문학과 법학에 모두 통달하여 공부의 신이요 문과 먹물 계열의 가히 천재 완전체였다.

그러니 처음 보는 인물에 대해서는 "국어학자도 아닌 사람이 한글 학회와는 무슨 상관?" 이런 의문이 들었으며, 그 당시에 또 시간대도 안 맞아서 그 행사에 가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저 분야에서 저렇게 언급된 인물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본인의 머릿속 기억 한 구석에 각인되었다.
그 뒤 나중에 차츰 알고 보니 애산 이 인이라는 분 역시 생각보다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었다. 호머 헐버트와 더불어 한글 학회를 계기로 알게 된 위인 중 한 분이다.

이분은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일제 강점기 때 피식민지 조선인으로서 변호사가 되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변호사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선생은 일제 강점기 동안 의열단, 안 창호 사건 등 여러 항일 운동에서 자진해서 독립 운동가들을 변호했으며, 그것도 국선이 아닌 민간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변호를 무료로 해 줬다. 일본의 국익을 대변하지 않는(?) 변호가 너무 잦고 일제 말기엔 창씨 개명조차 거부하니 조선 총독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으며 변호사 면허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처럼 말이다.

이런 민족 인권 변호사가 이 인 말고 전국적으로 몇 명 더 있긴 했지만(허 헌, 김 병로) 그래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수였다.
그리고 이 인 선생은 여느 변호사와는 달리 한글 학회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역시 문과 전문직답게 자기 나라 말과 글의 소중함을 알고서 조선어 사전 편찬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했으며, 1942년엔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되어서 구속되기까지 했다. 다만, 이분은 옥고를 치른 다른 국어학자들과는 달리 집행유예로 끝났다.

해방 후에 이분은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건국 초기부터 우리나라에서 관련 분야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았으며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한글 학회가 장소가 협소하고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1976년에는 지금의 붉은 벽돌 건물인 한글 회관을 짓는 기금 3천만 원을 쾌척했다. 40년 전 물가로 3천만 원... 이건 마침 비슷한 시기에 막 출시되었던 현대 자동차 포니를 10대가 넘게 살 수 있던 금액이었다(대당 약 230만 원).

그리고 이분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임종 전, 유언을 통해 자기 전재산을 한글 학회에 기증했다! 이 정도이니 한글 학회에서 두고두고 칭송할 수밖에 없겠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두루 우리나라에 끼친 업적이 워낙 출중하기 때문에 사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정확한 수훈 등급이 뭔지 문헌에 따라 국민장과 독립장이 서로 난립해 있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다.

한글 학회는 전신이던 조선어 학회 시절에 최초의 국어사전을 편찬했으며, 이것을 오늘날까지 굉장히 큰 자랑거리와 자부심, 긍지로 여긴다. 특히 조선어 학회 사건을 사건이 아니라 '수난'이라고 자체적으로 의미를 더욱 부여해서 부른다.
국립 국어원의 표준 국어 대사전이 국어사전계를 평정해 버린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 표준 국어 대사전조차도 이해타산 문제로 인해 종이책으로는 더 출간되지 않으니 참 아이러니다. (유니코드 전 영역 차트도 종이책 출간이 이미 진작부터 중단됐고..)

한글 회관의 건립과 관련해서는 그 당시 박 정희 대통령도 큰 기여를 했다.
노산 이 은상 선생이 박통을 직접 찾아가서 한글 회관 건립을 위한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이 "국방 성금은 1원도 안 낸 양반이 무슨 한글 회관 같은 데에 모금 요청을?" 식으로 씨크하게 반응했으나, 다음 날엔 1억 원이라는 돈을 금일봉 형태로 당시 영애이던 박 근혜 씨를 통해 전해 줬다고 한다. (한글 학회 김 종택 회장의 증언)
박통은 이것 말고도 한글 관련 단체 지원이나 어문 정책 쪽으로도 칭송 받을 행적을 여럿 남겼다. 광화문 현판조차도 한자가 아닌 한글로 친필을 남겼을 정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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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글 학회는 학술적인 성향이 절반, 한글 문화 연대처럼 운동 및 계몽적인 성향도 절반 정도 덤으로 갖추고 있다. 애국 단체라고 국내외로 후원하는 분도 적지 않다. 그리고 저런 사연을 거쳐서 1970년대에 건립된 한글 회관 건물 덕분에 서울 도심 금싸라기 지대에 좋은 부동산도 보유하고 있고, 그걸로 임대업 하면서 직원 월급도 준다.
그러나 지은 지 40년 된 건물은 딱 봐도 주변 건물들에 비해 외관이 낡았으며, 온통 임대를 주느라 정작 학회 자체의 문헌과 자료를 쌓아 둘 공간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업무용 건물의 건축 트렌드인 유리궁전과는 달리, 혼자 떡 버티고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한눈에 봐도 완전 옛날스럽다. 부산에서 봤던 동아 대학교 석당 박물관, 부산 임시 수도 청사도 다 같은 붉은 벽돌이지 않던가?
인테리어로 가면 옛날에는 가구나 복도 바닥, 문 같은 것도 요즘처럼 금속, 플라스틱, 콘크리트가 아니라 목재가 훨씬 더 많이 쓰였다.
옛날에는 금연에 대한 경각심도 지금보다 훨씬 덜했으니 저런 건물은 안에 들어가면 담배 냄새가 쩔어 있기도 할 것 같다. 거기에다가 각종 간판이나 표지판 글꼴까지 어설픈 둥근고딕 내지 붓글씨 부류로 넣으면 완벽한 옛날 고증 완성이다.)

2. 애산과 반민특위, 영화 <암살>

그럼 이번에는 한글 학회 말고 법조인으로서 애산 선생이 관계가 있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보겠다.
이분은 명백히 변절 없는 항일 독립 운동 노선을 갔으며, 사후에 건국훈장이 무난하게 추서되었을 정도이다. 그런 한편으로 해방 후에는 반공 우파를 표방하면서 이 승만 정권을 지지했다. 이것도 내가 보기엔 정상적이고 건전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반민특위(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의 위원장까지 돼서는 이 위원회를 완전히 해체시켜 버린 것은 언뜻 보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이것 때문에 이 승만 정권은 친일 청산을 안 한 정권이라고 후대로 욕을 두고두고 쳐먹게 되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는 관련 장면이 영화 <암살>의 결말부에 묘사돼 있다.
염 석진은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증인을 비열하게 미리 죽여 버린 덕분에 증거 불충분 → 공소권 없음 → 불기소 처분으로 끝난다. 이 꼴을 보니 판사조차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는지, 원래 주려고 했던 벌은 못 주고 "단, 법정모독죄로 벌금 2만원에 처한다"와 함께 재판봉을 부서져라 내리치고는 나가 버린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 좌익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 원봉을 띄우고, 남조선은 친일 청산 못/안 한 나라라는 왜곡된 시각'만' 주입한다는 이른바 '좌편향'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 그 얘기를 더 논하지는 않겠다. 우리나라가 북괴나 구소련처럼 기록말살형이 존재하는 속좁고 옹졸한 나라는 아니며, 훗날 일제에게 변절했거나 월북한 사람이라도 흑화 전의 행적 중에 선한 게 있다면, 훈장은 안 줄지언정 팩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있으니 말이다.

사실, <암살>의 원래 대본에는 재판 중에 이런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최종적으로는 짤렸다.

- 검사: (와~ 재산 목록 보소~) 피고는 지금까지 도대체 독립운동을 하셨습니까 사업을 하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팔아서 번 겁니까 이거?
- 염 석진: (개빡침. 검사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다가 손찌검~) 이 친일파 아들놈의 새X가 지금 와세다 법대 나와서 꽃방석에 앉았다고 내 앞에서 떵떵거려? 니 애비도 우리 암살 리스트에 있었어 이 X꺄. 어딜 감히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내 인생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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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 석진이 처음엔 독립운동을 하다가 종로 경찰서 지하 고문실에서 끔찍한 생명의 위협을 겪고서야 밀정으로 변절했듯, 심지어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 반민특위 재판을 진행하는 법조인들조차도 사실 친일파 가문의 금수저 출신이었다는 반전이 숨어 있다. 이 지경이라면 이놈의 나라는 참 꿈도 희망도 없다.;;

영화의 작품성을 위해서는 선악 구도가 일관된 게 더 보기가 좋으며 저 장면이 없는 게 더 낫다. 그러니 편집은 적절하게 한 거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저 장면이 있는 것이 1940년대 말의 완전 시궁창이던 현실의 선악 구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는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일제만 물러갔다고 해서 군· 경 간부가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니고, 판· 검· 변호사 같은 법조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라가 혼란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사회 질서를 유지시키는 사람들이 특별히 노련한 경력자 위주로 더욱 필요했다. 친일 경력 없다고 해서 일자무식한테 법률 자문과 재판 판결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단순 생산· 기술직이 아니라 저런 전문직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결국은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 많이 한 사람 차지가 되는데, 유복한 환경이 아무래도 항일보다는 친일 쪽 집안에 더 많이 조성돼 있었음은 자명하다. 이게 참 불편하다면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니 일본 경찰· 헌병 출신 조선인이 훗날 반공투사로 깃발 바꿔 단 것만큼이나, 일제 치하에서 법조인으로 편하게 살았던 사람이 역설적으로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변신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법조인 중에 저런 민족 인권 변호사만 있었던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애산 선생을 생각해 보자. 그는 영화에 나온 것처럼 친일파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독립 운동가 출신의 법조인이요, 한글 학회의 제일 든든한 후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반민특위 활동을 통한 친일 청산을 반대하는 소신이었을까?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legal mind 관점에서 봤을 때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해체시킨 게 아닐까 싶다.

당장 몇몇 악질 부역자들을 망신 주고 응징해서 감정적인 만족을 얻는 것보다 부작용이 더 커지고 있었다거나, 정확한 진상 규명과 재판이 현실적으로 도저히 곤란했다거나, 불순분자들이 반민특위 조사관을 사칭하면서(문화혁명 당시의 가짜 홍위병 같은!) 생사람 잡는 일이 늘었다거나...

그 당시 이 승만 대통령이나 애산 선생이 반민특위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겠는지는 본인이 기회가 되고 자료를 더 접하는 대로 공부를 더 해 볼 생각이다. 다만, 결과가 무엇으로 귀착되건 그 당시에 나라가 일제 부역자 전문직들을 불가피하게 재등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Windows 9x가 그 당시의 가정용 똥컴에서 돌아가고 도스 호환성을 보장하기 위해 16비트 코드를 불가피하게 재등용할 수밖에 없던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맥락의 한계이다. 우리나라의 친일파 청산을 제일 방해한 것은 사회 혼란과 체제 전복을 조장하던 북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게 절대적인 사실이다. 어떤 경우든 누가 선동하는 것처럼 친일 청산이라는 걸 악의적으로 일부러 안 한 건 아니다.

끝으로, 다시 영화 <암살> 얘기로 돌아오면,
원래 의도했던 것처럼 염 석진이 검사와 싸우는 장면이 들어가 있어야 "법정모독죄로 벌금 2만원형"이 논리적으로 개연성이 성립하겠다.
겨우 웃통 벗고 "내 몸엔 일본놈들의 총알이 6개나 박혀 있소!" 쇼 한 게 왜 지금 물가로 수백만 원 이상의 벌금을 내야 할 법정모독죄인지 본인은 지금까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역시 짤린 장면을 보니까 납득이 된다. 검사랑 현피 주먹다짐 정도는 해야 법정모독죄가 성립하지 않겠는가?

Posted by 사무엘

2017/05/19 08:34 2017/05/1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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