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위대한 일을 했지만 곧 사자에게 물려 죽은 어느 일회용 선지자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하고 교훈거리가 많다. 그건 예전에 "자의와 타의의 경계 문제" 글에서 이미 다뤘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엘리야 이야기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1. 갈멜 산에서의 불 대결

(1)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엘리야의 갈멜 산 대결 말이다.
안 그래도 극심한 가뭄 때문에 물이 귀한 상태였는데.. 엘리야는 기도를 하기 전에 제단에다가 물을 수십 리터 이상 끼얹어서 아예 도랑을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아 물론 화력 조절을 위해서다. 더 구체적으로는 화재, 산불 예방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내 뇌피셜이다.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왕상 18:38)
모든 게 바짝 말라 있던 산에서 저런 화염이 떨어져서 불똥이 잘못 튀면.. 그야말로 대재앙이 벌어지지 않았겠느냐 말이다. =_=;;

저 때 도랑의 물은 불길의 열기 때문에 순식간에 증발하면서 허연 수증기를 왕창 뿜어냈지 싶다.
로켓 발사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발사대의 아래에는 로켓 엔진이 뿜어대는 어마어마한 화염 열기를 받아내고 주변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 물이 잔뜩 담겨 있다. 로켓 발사 직후에 천지를 뒤덮는 허연 연기들은 대부분이 수증기이지, 단순 배기가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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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륙 정도나 횡단하는 가벼운 미사일은 순식간에 쌩 날아가서 발사대를 벗어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나 인공위성을 싣고, 정지 궤도 진입까지 목표로 연료까지 왕창 많이 실은 거대한 우주 발사체는..??
너무 무겁다. 발사 직후에는 몹시 굼뜨면서 완전히 상승할 때까지 발사대에 오랫동안 대미지를 준다. 마치 무거운 디젤 트럭이 갓 출발할 때는 시꺼먼 매연이 왕창 많이 나오는 것처럼..
그러니 이런 대형 우주 발사체의 발사대는 하단에 냉각 설비를 특별히 빵빵하게 갖춰야 한다.

아이고 엘리야 얘기하다가 우주 발사체 얘기로..
뭐 엘리야는 신의 도움으로 하늘에서 불을 내린 적이 있었고, 심지어 자기도 승천해서 하늘로 올라갔다. 저런 무거운 로켓 엔진의 도움이 없이도!
그러니 엘리야 이야기와 우주 발사체 얘기는 연결고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으잉? ㄲㄲㄲㄲㄲ

(3) 저 때 엘리야를 대적했던 사람이 무려 950명이나 됐다. 18량에 길이가 388m이나 되는 KTX 열차 한 편성에 간신히 다 탈 수 있는 인원이다.;;
바알 선지자 450은 이해되는데 나머지 400명은.. 아세라(한킹)? 작은 숲(흠정역)? 도대체 뭘 숭배한 걸까?

예전에 한번 얘기한 적 있듯이, 둘은 음역이냐 번역이냐의 차이이다. 나무를 깎아서 무슨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장승 목상이라도 만들어서 숭배한 건 아니고.. 저거는 살아 있는 나무가 심긴 숲을 말한다.
근데 숲이라고 하면 무슨 대자연 mother nature 숲의 정령이라도 숭배하나.. 이런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저쪽 진영에서는 그냥 평범한 숲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아세라' 음역을 선택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자체를 지지하지 않는 진영에서는 장승 같은 '목상'을 떠올리고, 킹 진영에서는 살아 있는 나무가 심긴 숲을 떠올린다. 근데 한킹 진영에서는 숲과 우상을 모두 반영하려고 아세라 음역을 했고, 딴 킹 진영에서는 '작은 숲'을 골랐다는 것이다.
참고로 흠정역은 탬버린도 '작은북'이라고 옮겼기 때문에 '작은'이라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다.

(4)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알인지 뭐시긴지, 그 배후에 있는 사탄 마귀도 원래 하늘에서 불을 내릴 능력 자체는 있는 놈이다. 욥 1:16을 보면 생존자가 이건 하나님의 불이라고 착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 갈멜 산의 대결 중에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불 내리는 걸 막고,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사자들의 입을 막은 것처럼 말이다.

(5) 비가 진짜로 내릴 거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 안 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성을 간다, 내 전재산 다 건다" 이런 극단적인 약속은 못 하더라도 최소한 밖에 나갈 때 우산이라도 챙겨 가야 하는 법이다. 그게 그 사람이 믿음이 있다는 최소한의 증거이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린 다음에는 당장 불보다도 더 필요한 비도 실제로 끌어 오는 데 성공했다. 그 반면, 출애굽기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개구리들을 생성하는 훼이크까지는 쳤지만 개구리를 없애는 일은 흉내 내지 못했다.

2. 기근

열왕기상 3장에는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기록돼 있다.
한 집에 같이 사는 여인 2명이 각각 자기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중 한 여인이 자기 아이를 실수로 압사? 질식사 시키고는 남의 아이를 몰래 바꿔치기해 버렸다. 이 때문에 그 아이의 진짜 엄마가 누군지를 갖고 분쟁.

이런 사건은 CCTV나 하다못해 유전자 감식 기술만 있었으면 실제 엄마를 찾아내는 게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저 때는 무려 기원전 900년대였다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은 칼 한 자루만으로 사건을 간단히 해결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0여 년 남짓 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여기서도 여인 2명이 애 때문에 다투고 있고 국왕에게 중재를 호소한다. 여기까지는 솔로몬의 재판과 아주 비슷한데 이 본문에서 여인들이 다투는 이유는 정말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이때도 인류 멸망 급의 기근이 있었다. 그 흉년 기근을 견디다 못해 두 집이 아이를 서로 맞바꿔서 잡아먹을 지경이 됐다. 자기 친자식을 차마 먹을 수는 없어서 말이다. 이거 무슨 더러워진 양말이나 속옷을 갈아입긴 하는데 새것이 아니라 상대방 속옷을 교환한다거나 심지어 겉과 속을 뒤집어서 입는 것 같다.. =_=;;;

그런데 그 와중에 A가 B 집 애를 먹어 놓고는 자기네 애를 B에게 넘겨주지 않고 먹튀를 시전했다는 것이다. ㄷㄷㄷㄷㄷㄷ 이건 왕이 뭐 어찌 중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 >_<

참고로 성경 전체에서 뭔가 물가 예시를 들면서(= 물가 폭등) 극심한 기근을 묘사하는 게 저 열왕기(왕하 6:25), 그리고 계시록 대환란(계 6:6) 이 둘뿐이다.
그 뒤 예레미야애가에도 소말리아나 북한 애들 같은 끔찍한 묘사가 여럿 나온다. 어린애가 밥을 너무 못 먹어서 졸도한다거나(애 2:12), 애엄마가 자녀를 잡아먹거나(애 2:21).. 심지어 제일 인정 많고 여리고 소녀감성 유리멘탈 물멘탈이던 여인일지라도 인륜이고 천륜이고 다 저버리고 오로지 밥에 목숨 거는 짐승처럼 돌변한다는 묘사가 있다(애 4:10)!

요즘은 농업과 상업이 발달한 덕분에 저런 원초적인 기근은 아니어도.. 빚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다 부모가 자녀와 같이 동반 ㅈㅅ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1940년대 태평양 전쟁에서는 천하의 미군도.. 기근은 아니지만 인간의 한계까지 너무 고생하고 쪽발이들의 광기에 학을 떼다 보니 일부가 맛이 가 버리기도 했다. 죽은 일본군 시체를 분해해서 두개골을 전리품으로 갖고 다니고, 찦차나 땅크에다 악세사리처럼 장착하고, 그걸 심지어 여친한테 선물로 주기도 하고.. -_-;;

사람은 조금만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정신줄 놓고 금세 야만인으로 바뀔 수 있는 것 같다. 그게 새삼스러운 일이 절대 아니다.

3. 바빌론 포로기

그 뒤 이스라엘은 갈 데까지 가서 북왕국은 아시리아에게, 남왕국은 바빌론에게 모두 멸망해 버렸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바빌론 포로기 70년은..
이스라엘 민족의 오랜 죄악을 정산한 기간이면서 한편으로 이들 민족을 골수 유일신 민족으로 개조시킨 기간이다. 그리고 안식년을 한 번도 맞이하지 못한 채 혹사당하던 땅을 강제로 휴경시키고 지력을 회복시킨 기간이기도 하다. (대하 36:21)

이때 “쳐맞고 바빌론 갈래, 그냥 바빌론 갈래?”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진실을 선포했던 선지자는 졸지에 매국노 민족반역자 비국민으로 몰려서 고초를 겪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그러나 70년이 지나자 아무 기적이나 이변이 없는데 정말 뜬금없이 귀환령이 딱 떨어진 것도 과거의 출애굽 사건 이상으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70년은 인간의 자연 수명에 필적하는 기간이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나 이스라엘 출애굽 세대의 광야 뺑뺑이 기간의 2배에 가까운 기간이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역사도 인제 얼추 70년을 넘었다.
이 70년은 단기간이 아니니 당장 집 짓고 농사 짓고 정착은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대대로 수백 년 영원무궁토록 눌러앉아 있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기간이다.

이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삶을 사는 크리스천들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당장 이 세상에서 자기 생업을 갖고 돈 벌고 저축도 하면서 열심히 살 필요는 있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인 듯이 미련을 갖고 매몰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들을 언제든지 몽땅 놔두고 버려두고 떠나게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건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특히 구원 받은)이 죽었을 때, 당장은 당연히 슬퍼하고 애도하고 유족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 땅이 꺼질 듯이 멘탈 붕괴되고 실신한다거나, 너무 상심해서 그 뒤로 매일 술에 파묻혀 산다거나 심지어 자기도 같이 따라 죽는다거나.. 그 정도로 극단적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는 것과도 비슷한 자세인 것 같다. 크리스천들에게는 그것보다 더 큰 그림과 보험 보장이 있고 진짜 본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바빌론 포로기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니 꽤 다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대이동을 했던 기원전 500년대부터 400년대 사이.. 하필 이 시기에 아시아에서 불교와 유교가 생기고, 중국 대륙에 온갖 제자백가 사상가 철학자들이 나타나 활동했던 것은 개인적으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4/07/14 08:35 2024/07/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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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사기(판관기)의 전반적인 특징

-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주적 '바알'신이 등장한다. 블레셋도 본격적인 악역 몹 몬스터로 등장한다.
- 다들 지 꼴리는 대로 각자도생하던 영적 암흑 무법천지의 극치를 묘사한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 폭력· 살인을 묘사하는 수위가 모세오경 시절보다 더 올라가고 잔혹해진다.
옆구리 칼빵, 대량 학살, 문자적으로 사람 뚝배기를 깨거나(아비멜렉) 못을 박아 넣어서(시스라) 죽이기,
자기 친딸을 문자적으로 번제 헌물로 만들어 버리기, 자기 첩 시체를 토막 내서 전시하기...
인간들이 성경에 무지하고 영적으로 막장으로 치달으면 저런 일들, 아니 저것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벌어진다는 걸 성경은 보여준다.

여친과 함께 읽으면서 주찬양 10집 회복 "왕이 없었더니" 트랙을 들려 줬다. 반응은.. 뮤지컬 남바 같다는 평.. ^^
이 음반은 예배 찬송가를 지향하는 게 아니고 그냥 성경 스토리를 노래로 표현한 것이니 뮤지컬 남바라는 비유가 적절해 보인다.

- 한편으로 사사기엔 심은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 참교육, 보복 살인이 자주 나온다.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을 짜르기(1:6-7), 찔레와 가시로 참교육(8:16), 삼손의 깽판 등. 뭐, 넓게 보면 사무엘상에서 아말렉의 왕 아각이 토막(..) 살해 당하는 것도 좀 인과응보 같은 묘사이다.

- 영화 300은 아무래도 기드온의 300 용사를 오마주한 것 같다.;;
- 판관 시대는 세습 왕조가 아니었는데 판관들이 그때 그때 어떻게 선출되었고, 어쩌다가 여성 판관이 등장하기도 했는지 매우 궁금하다.

2. 기드온

기드온은 기본적으로 선한 인물이면서 정말 현실적이고 입체적이고.. 뭔가 오늘날의 크리스천과도 싱크로가 잘 되는 인물인 것 같다.
6:13.. "하나님이 계신다면 지금 우리가 왜 요 모양 요 꼴입니까? 옛 선조들에게 보여주셨다는 그 기적, 리즈 시절은 지금 도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지금 우리가 얼마든지 던질 수도 있는 의문이지 않느냐 말이다.

최대한 의심하면서 하나님에게 증거 표적을 구했지만, 그래도 표적이 충족되자 군소리 없이 믿고 받아들였다. 삐딱하게 하나님을 떠보는 악한 의심을 한 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민족을 구하는 큰일을 하는 데 쓰임받을 수 있었다. 난 이 자세를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는 그렇게 영웅이 되고 부귀영화를 얻자, 인간적으로 호색한 기질도 마음껏 발휘했다. =_=;;; 아내와 첩을 여럿 거느리고 자식이 70이 아니라 아들만 무려 70명을 두는..;;; 업적도 남겼다. 대단하다.
(성경에 아들 70명이었다는 사람은 기드온과 아합밖에 없다. 그런데 아합은 악인이잖아..)

그리고 기드온도 아들 70명을 두면 뭐 하나.. 개차판 아들 한 명(아비멜렉)한테 나머지 아들들이 몽땅 몰살 당하는 콩가루 집안 참극도 벌어졌다. 하긴, 아합의 아들들 70명도 나중에 한꺼번에 처형 당해서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이다.

기드온은 처음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못을 박았었고 주님의 명령만을 신실하게 이행했었다.
그러나 유명해지고 부귀영화를 얻으면서 저렇게 색(...)도 밝히고 이상한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이고 황금 에봇을 만들어 입기도 하면서 교만해지고 흑화했다. 막 대놓고 우상 숭배를 하고 악행을 벌인 건 아니었지만 정신 상태가 초심을 잃은 것이다. 그것 때문에 저런 비극적인 가정사를 맞이한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기드온 자신은 개인적으로 가문의 심판을 당했을지 모르지만, 아비멜렉 같은 또라이가 기드온 집안을 대적한 것도 큰 죄악이었다. 성경은 기드온의 은혜를 잊어버린 배은망덕한 인간들이 아비멜렉 편을 들고 반역했었다고 분명히 언급한다.

3. 나무나라 비유

우리나라엔 “뽕나무가 뽕 하고 방귀를 뀌니 / 대나무가 댓끼놈 야단을 치네 / 이때 참나무가 점잖게 하는 말~ 참아라”
라는 참 유치찬란한 우화 동화인지 동요인지가 있다. =_=;;;;
그런데 성경에도 이와 아주 비슷한 느낌이 드는 나무 우화가 있다. 사사기 9장에서 무슨 동물의 왕도 아니고 나무들의 왕 뽑는 비유가 등장한다. ㅋㅋㅋㅋㅋㅋ

사사기 9:8-15에 나오는 나무나라 비유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어쩜 이렇게 딱 정확하게 저격하고 풍자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근래 모습과도 싱크로율이 아주 높다.
똑똑하면서 선량하고 인성 인품 좋은 사람, 자기 관심분야에서 바쁘고 할 일 많은 사람들은 굳이 권력에 연연하지 않는다. 정치판에 들어오라는 손짓에 어지간해서는 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능력은 쥐뿔 없으면서 찌질하고 열등감 쩔었고 남 앞에 나서길 좋아하고 명예욕 권력욕 많은 저질 인간은..
그런 기회가 오면 넙죽넙죽 나서는 편이다. 심지어 자기보다 더 큰 사람, 더 훌륭한 사람을 모함하고 음해하면서까지 나선다.
그래서 큰 권력을 쥐게 되면 피바람을 일으키고 나라를 다 말아먹는다.

이게 인간 사회 정치의 역설 비극인 듯하다. 진짜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이 정치판에서 버티지를 못하는...
이 비유에서 올리브, 무화과, 포도나무가 나오고, 가시나무는 그런 귀한 열매를 맺는 게 없는 폐급으로 취급된다. 나무가 아니라 박꽈 덩굴로 치면.. 호박도 수박도 참외도 아닌 가시박이나 환삼덩굴 같은 잉여 잡초일 것이다. ㄲㄲㄲ

이 비유가 임팩트가 컸는지 "니 주제, 분수를 파악하라"라는 의미로 "가시나무가 백향목에게 깝치다가 참교육 당했다"는 비유가 훗날 또 등장하기도 한다. (왕하 14:9) 또, 예수님도 이런 나무의 퀄리티 차이를 비유에다 동원해서 눅 6:44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다. bramble, thorn, thistle 등 세부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문맥에서 그리 중요한 차이점은 아니므로 패스..;;

4. 전반부와 후반부

성경에서 창세기 1장은 시간 순서에 따른 6일 창조 얘기이고.. 그 다음 2장은 그 중에서 여섯째 날(아무래도 아담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에 있었던 일의 세부 묘사가 있다.

그런 것처럼 사사기(판관기)는 1~16장은 옷니엘부터 삼손까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 대한 시간 순 연대기이다.
그 다음 17~21장은.. 그 재판관 시대의 특정 시기에 어떤 사건이 있었고 이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악을 행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열거된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더니.. 주께서 이들을 징벌 차원에서 XXX 민족의 손에 YY년 동안 넘겨주었다" 패턴의 세부 내역이 이랬다는 뜻이다.
사사기의 주된 코멘트인 "그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는 바로 후반부에서 반복해서 등장한다. 후반부의 사건으로는 17~18장 종교 타락이랑, 19~21장 흉악 범죄 내전이 언급된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비느하스가 언급될 정도이니 여호수아 이후로 그렇게 먼 미래도 아니다. 가나안 땅 들어가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재판관 시대의 초창기에 벌써 이런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5. 블랙코미디

리암 니슨이 나오는 2019년도 블랙코미디 영화 "콜드 체이싱"이란 게 있다.
거기 보면.. 그냥 심심하면 그냥 사람이 죽는다. 자기 아들이 죽은 댓가로 적대 세력의 누구를 또 죽이고, 소식 전하러 온 전령을 죽이고, 누굴 오인해서 죽이고 또 죽이고..
사사기의 저 후반부도 그런 느낌이었다. 이건 타 민족과의 전쟁· 항쟁 얘기가 전혀 아닌데도 뻑하면 그냥 마을을 통째로 지도에서 지워 버리는 학살이 끊이질 않는다.

앞의 신명기에서 율법을 묵상하고 골수에 새기라는 신신당부가 그렇게도 많이 나오는데 사사기의 저 장면에서는 그런 거 없다. 그냥 뒷일 생각 안 하고 임기응변 병맛 광기로 우르르.. 뻑하면 보복으로 사람 죽이고 악을 다른 악으로 찍어누르고, 부작용 생기면 또 다른 사고를 치고..

아브라함과 롯만 해도 외부 나그네 대접을 얼마나 융숭 극진하게 했는데 사사기 19장에서는 그런 거 없다. "여기 처음 오신 분 같은데.. 노숙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하지 마세요. 봉변 당하십니다"..;;
"저 남자를 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알리라(관계하리라)"
이게 수백 년 이상 전의 소돔 고모라가 아니라, 나름 율법을 받았다는 이스라엘 내부의 상황이었다.
그냥 다들 단체로 미치고 맛이 갔던 거 같다. 사사기 20~21장을 직접 읽어 보면 안다. =_=

애꿎은 여인을 싸패들이 집단 윤간해서 죽게 만든 거.. 정말 끔찍한 죄다. 그 범죄자들을 잡아 넘기지 않은 것도 명백히 그 지파 차원의 죄다. (베냐민)
그런데 그 여인도 이미 불륜 간음을 저지른 상태였다. 차라리 율법대로 돌에 맞아서 처형 당하는 게 나았을지, 아니면 저렇게 윤간 당해서 죽는 게 더 나았을지.. 그건 판단을 못 하겠다;;

하지만 그 여인의 남편 레위 인도 마냥 선의의 피해자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범죄 사실을 주변에 신고할 때 자기가 떳떳하지 못한 것은 일체 함구하고 그냥 감성팔이 선동만 했다.
애초에 그 여인은 정식 부인이 아닌 첩이었다. 그 첩의 불륜을 관대하게 용납한 덕분에 장인에게서 정말 굽신굽신 융숭한 대접을 받을 정도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불량배들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고 여인을 몸소 지킬 정도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진짜 사랑하던 아내가 죽었으면 저렇게 시체를 토막 내서 "이 범죄자 놈들 때려잡자" 시체장사를 절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레위 인이었으니 직업적으로 동물들을 잡고 각 뜨던 그 솜씨로 자기 첩의 시체도 처리했지 싶다.;;

이 본문을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10여 년 전에 읽었을 때보다 느낌, 감흥이 훨씬 더 강하게 와 닿는 것 같다.
원래는 이래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맥락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7/11 08:35 2024/07/1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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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야에서 백성들의 고기 불평

민수기 11장 말이다.
고기 투정 자체야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이해가 된다. 제아무리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전투식량이 배급되었다 해도, 군대에서 1년 내내 C 레이숀만 마르고 닳도록 먹으면 그 누구라도 질리지 않겠는가? 하나님 역시 정상적인 정당한 간구에는 응당 응답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저 장면에서는 백성들이 말하는 싸가지가 심각하게 문제였다. 차라리 이집트 노예 시절이 더 나았다느니, 지금이라도 도로 이집트로 빠꾸하자느니 등등.
이건 철없는 애새끼가 부모한테 “나 왜 낳았어? 날 왜 이런 집구석에서 태어나게 한 거야?” 거의 이렇게 대든 거나 마찬가지이다.
(나 같으면 친자식이어도 저러면 귀싸대기를 날렸을 텐데.. 저런 상황에서 오 은영 같은 사람은 어떤 대처 매뉴얼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다. -_-)

저 때 하나님의 대응은..
“오냐, 그렇다면 그놈의 고기는 니가 신물이 나도록 쳐먹여 주마. (나중에는) 어이구 준다고 또 진짜로 넙죽 쳐먹냐? (역병크리)”
정도 됐다. 범죄도시 2에서 “하이고 얄밉게도 쳐먹네” 부분을 떠올리면 되겠다. ㄲㄲㄲㄲㄲㄲ

쟤들이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거의 8, 90cm 높이로(2큐빗) 잔뜩 쌓인 메추리들을 보고는 기겁을 해서 “헉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우리가 감히 이걸 먹어도 되겠습니까? 우리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이런 립서비스라도 한 마디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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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문득 “아 불고기!!”가 떠오른다. ㄲㄲㄲㄲㄲㄲ

2. 호통판사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중에 하나님이 “이놈의 자슥들 다 홀로코스트 해 버리고 모세 너한테서 민족을 리셋하겠다” 이 정도로 빡쳐서 모세가 “오 노노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전 약속을 기억해 주십쇼 ㅠㅠㅠ” 데꿀멍 했던 때는 두 번이었다.
출애굽기 32장 금송아지 사건이랑 민수기 14장 가나안 정탐 사건.

금송아지는 “이집트로 돌아가자” 이런 드립은 없었고, 뭔가 영역이 다른 별개의 반역이었다.
그 반면, 가나안 정탐 사건은 그야말로 출애굽의 취지를 정면으로 부정해 버린 반역이었다.
이건 그 벌로 사람만 좀 죽은 정도가 아니라, 광야의 뺑이 생활 자체가 40년으로 연장돼 버렸다. 당대의 성인들은 광야에서 몽땅 늙어 죽어 버리고 다음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됐다.

백성들이 혼쭐이 난 뒤에야 뒤늦게 정신 차리고 “이제라도 가나안 땅으로 전쟁하러 들어가겠습니다!” 으쌰으쌰 거렸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은 번복되지 않았다.
“안 돼. 안 바꿔 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 이게 성경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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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민수기 22~25장 발람과 발락 얘기는..
뭔가 대놓고 불평 반역은 아닌데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고 최고 혐오하시는 방향으로 잔머리가 잘 굴러갔던 양다리, 간보기 잔머리의 달인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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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할 수 없는 제안".. 이게 무슨 미국 마피아 영화에 나오는 대사인데
저건 성경 판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에피소드이다. 돈 돈 돈 돈~~ 사람도 기쁘게 하고 싶고 하나님으로부터 벌도 안 받고 싶고..
내가 이 본문을 배경으로 설교를 한다면 제목을 저렇게 정했을 것이다.
발람이 왜 신약에서 발람의 오류, 발람의 교리, 발람의 길이라고 두고두고 까이고 하나님이 이를 갈며 싫어하셨는지를 묵상할 수 있다.

한킹과 표킹만이 발람을 '발라암'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모음이 aa 장모음이어서 그런 듯.
근데 발람을 발라암이라고 표기할 거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이사악'이라고 표기해야 일관성이 있을 것 같다.
그건 희한하게도 우리말 성경 중에서는 천주교 공동번역만이 유일하게 '이사악'이라고 표기했다.

4. 신명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

  •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마라.
  • ... 이렇게 이렇게 해서(주로 해당 죄인을 돌로 쳐 죽여서) 이스라엘 땅에서 악을 제거할지니라.
  • 주야로 이 율법을 묵상하고 골수에 새겨라
  •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명기는 그야말로 거짓 선지자나 살인자, 심지어 부모 말 안 듣는 불효 패륜 망나니까지도 무자비하게 돌로 쳐 죽이라는 명령과 동시에..
응가 한 걸 땅에 고이 잘 파묻어라, 새신랑은 군대에 징집하지 마라, 이삭을 일부 떨어뜨려서 과부나 외국인이 주워갈 수 있게 해라.. 이런 배려 명령이 동시에 나오는.. 극과 극의 책이다.

5. 여호수아기는..

- 성경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허용하고--부녀자고 애들이고 싹 다 학살 몰살 멸절-- 이 땅에서 어딘가 진출하고 정복하는 걸 긍정적으로 묘사한 책이다.
- 지도 없이는 보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후반부.. 하긴, 민수기도 출애굽 경로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별도의 지도가 필요하긴 하다.
-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성공하리라. 우리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리라" 같은 여호수아기 특유의 문구를 볼 수 있다.

개독안티들이 성경에 대해서 단골로, 정말 마르고 닳도록 트집 잡고 욕하는 사항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저 가나안 민족 학살이 잔인하다느니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천부당만부당한 단견이다.
이건 하나님의 경륜 내지 척결 대상 민족의 끔찍한 노답 죄악이 동시에 맞물렸던 덕분에, 그 당시에만 예외적으로 내려졌던 조치이다.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걸 다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아서 일부 이방 민족들과 조공이나 받으며 공존하게 됐고, 그게 그들에게 결국 화근이 됐다.
마치 우리나라가 6· 25 때 북괴를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덕분에 결국 통일이 물 건너가고 영구 분단이 고착화된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리고 "큰 능력에는 큰 책임이 따릅니다".. 이거는 정복 당사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쟤들도 하나님 잊어버리고 타락하고 죄 지었을 때는 가나안 백성들에게 적용됐던 그 심판의 잣대가 진짜 똑같이 적용됐다.
쟤들도 말기에 가서는 서로 자식을 잡아먹기, 임산부의 배 가르기 등 입에 담기조차 끔찍한 꼴을 당하면서 나라가 타 민족에게 멸망 당했다. 오히려 처음부터 하나님의 특별 관리를 받지 않았던 타 민족이라면 같은 죄를 지어도 이 정도까지 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잔인한 게 아니라 죄의 결과가 이 정도로 끔찍 처참 참혹한 것이다.
다음 사사기는 얘기가 좀 길어진 관계로, 다음 글에서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ㄲㄲㄲㄲㄲ

※ 나머지

- 창세기 8장에서 노아가 방주 주변을 정찰하러 까마귀아 비둘기를 날려보낸 걸 보니.. 요즘으로 치면 드론이 떠오른다. 노아가 리모콘으로 카메라 달린 드론을 띄워 보낸다면.. 흐음~~ ㄲㄲㄲㄲㄲㄲㄲ

- 이집트 재앙 중 일부는 저그 디파일러와 정말 비슷한 느낌이 든다. 다크 스웜(파리 떼)이라든가 플레이그 역병, 물이 피로 변하기. =_=;;;
-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은 아무래도 원래는 살아 있던 사람이 병이 걸린 것을 고치거나, 죽어 버린 환자를 살리는 것 위주이다.
그 반면, 출애굽기의 기적은 생물과 아예 처음부터 무생물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것 위주이다.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었다거나, 티끌이 머릿니로 바뀌는 식.

- 구약의 '아간'과, 신약의 아나니야· 삽비라가 참 비슷해 보인다.
- 엘리야는 모세와도 비슷하고 침례인 요한과도 비슷한 심상이 있다. 승천했다는 점에서 에녹과 비슷하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 성경에는 밥/빵(민 14:9)도 나오고, 똥/배설물(빌 3:8)도 나온다.
- "그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신약에도 나오고(고후 12:9; 병 고침 간구 거절) 구약에도 나온다. (신 3:26; 가나안 땅 들어가려는 요청 거절)
- "신발을 벗으라"는 모세 버전도 있고(출 3:5) 여호수아 버전도 있다(수 5:15).

- 사무엘상 초반부를 보노라면, 그때 다곤 신전에 CCTV라도 좀 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곤 상이 자빠지고 박살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녹화되게 말이다.

- 교회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는 교회의 정당성을 초자연적으로 입증하는 사도들의 표적이 있었다. 그것처럼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왕정이 시작됐을 때는.. 사울 왕의 정당성을 하나님 차원에서 입증하는 표적이 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울이 무슨 방언(?)이라도 터진 듯이 막 예언을 한다. 이런 장면들도 생각보다 사도행전을 닮아 있다.

- 성경에는 '아사헬'이라고 달리기를 잘해서 전쟁터에서 적을 추격은 엄청 잘했지만, 기습을 당해서 푹찍악 당한 군인이 있다. 뭔가 길 잃은 바이킹 게임에서 날쌘돌이 캐릭터가 생각난다.
삼하 2:14에서 무술인지 전투인지 모를 이 대련 장면은 고려 시대 수박 대회가 연상되기도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4/07/08 08:36 2024/07/0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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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의 김 유신은 부정한 아기를 갖게 됐다는 이유로 여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이는 시늉을 벌였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부정한 아기를 갖게 됐다는 이유로 며느리 다말을 불태워 죽이려 했다. (창 38:24)

2. 신라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 마시고 흥청망청 놀다가 후백제군에게 완전히 털리고 박살 나고 치욕스럽게 죽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빌론 벨사살 왕은 손가락 경고를 본 뒤에도 흥청망청 놀다가 페르시아에게 완전히 털리고 치욕스럽게 죽었다.

3. 백제의 의자왕, 고구려의 보장왕은 나라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갔고 편하게 못 죽었다.
남유다 왕국 시드기야 왕도 나라 멸망 후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편하게 못 죽었다. 어설프게 이집트와 손잡고 바빌론에 깔짝깔짝 대항하다가 더 험한 꼴을 당했다.

4. 이건 드라마 각색이긴 하다만.. 후백제 견훤의 참모였던 최 승우는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줄 거면 매정하지만 형들을 모두 숙청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들만 잃지만, 지금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아들도 잃고 나라도 잃게 된다"라고 왕에게 조언했다.
그러나 왕이 그 말을 차마 이행하지 않자 최 승우는 이제 국운이 다 끝났음을 직감하고 낙향해서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백제의 운명은 최 승우의 예측대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성경에서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마치 견훤의 아들 신검처럼 쿠데타를 일으켰다!
나중에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듣지 않고 후새의 멍청한 계략을 듣자.. 아히도벨 역시 이제 다 끝났다는 걸 직감하고 낙향해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여기서도 아히도벨의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단, 태조 왕 건에서는 계략가가 왕의 편이었던 반면, 성경에서는 계략가가 반란군 아들의 편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 견훤은 자기가 세웠던 나라를 자기가 도로 무너뜨리고.. 심지어 적국에 귀순해서 아들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했던 비운의 군주였다. 세계사를 통틀어도 보기 드문 인물이다.

* 백제는 삼국 중에서 동물과 사람이 넘나드는 식의 거창한 건국 설화가 없고 시작이 좀 평범한 나라였다. 그러나 신라는 시작부터 끝까지 독특한 점이 꽤 많은 나라였다.

  • 실존했던 천년왕국..;; 특히, 그 긴 기간 동안 도읍이 옮겨진 적도 없었다.
  • 김씨와 박씨가 번갈아가며 통치했다.
  • 신분 제도가 그 악명 높았던 조선의 양반 쌍놈보다도 더 복잡했다고 그러는데..
  • 그래도 여성 인권이 괜찮았는지 전근대 시절에 유일하게 여왕도 존재했다. 심지어 화랑 제도도 전신은 남자가 아니라 미녀를 뽑는 제도에서 시작했었다.
  • 김 유신은 정치 권력이 없는 순수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기까지 했다(흥무대왕). 지금 우리나라 군에다 비유하자면.. 명예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오성장군 원수로 추존된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예도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했다.

신라가 괜히 삼국 통일을 이루고 1000년 가까이 간 게 아니었던 것 같다. 100% 신라 자력이 아니라 나당 연합군을 끌어들인 것 때문에 이걸 폄하하는 시각도 있지만..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어 보인다. (그럼 나중에 임진왜란 때는 왜를 격파하는 데 조선과 명이 각각 얼마나 기여한 건지 궁금해진다.)
신라는 북쪽의 대륙으로 뻗어 가지 않은 대신, 그 시절에 남쪽의 먼 바다로 진출해서 먼 외국과 교류했다. '발해를 꿈꾸며'도 좋지만, 장 보고가 얼마나 큰일을 이뤘는지, 그 사람이 허망하게 죽지 않았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그건 그렇고, 다음으로..

* 신라는 망하기도 정말 적절하게 최고로 잘 망했다.
마지막 경순왕은 궁예나 견훤, 왕 건 같은 무예의 달인이 아니었으며, 그저 견훤에 의해 대타로 세워진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망국의 마지막 군주로서 그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정을 베풀었다.

줄을 잘 서서 후백제에게는 대항하면서, 적절한 타이밍 때 고려로 딱 깔끔하게 귀순했다.
덕분에 백성들도 살고, 자기도 고려로부터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귀순 후에도 반세기에 가까운 천수를 누리고 고려의 5대 왕이 즉위하는 것까지 보면서 죽었고.. '김부왕'이 아니라 경순왕이라는 시호까지 받았다.

이건 남극점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귀환해서 모든 대원들을 생환시킨 어니스트 섀클턴과 비슷하다. 또 북한의 귀순 파일럿 1호인 노 금석이 그 뒤로 미국 가서 평생을 떵떵거리며 산 것과도 맞먹는다. 망국 군주가 이렇게 잘 살고, 백성들로부터도 칭송 받다가 간 건 우리나라 역사상 다른 유례가 없을 것이다. (고종 순종은 칭송 받는 사람은 아님..-_-)

이런 거 생각하면 인생 한번 참 타이밍이다.
그에 반해, 고려 말기의 문 익점은 고려냐 조선이냐, 원이냐 명이냐.. 그 격변의 시기에 매번 파괴왕 급으로 줄 잘못 서서 피 봤었다. -_-;; 그래도 정치색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목이 달아나지는 않고 관직에서 짤리고 잠시 귀양만 가는 수준으로 끝났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3/08/25 08:35 2023/08/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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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사람 요셉

성경에서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의 끝부분을 장식하는 매우 드라마틱한 에피소드이다. 본인은 먼 옛날에 이집트의 왕자 만화영화와 같이 모세 얘기는 한 적이 있었는데.. 모세 만만찮게 흥미진진한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블로그에다 진지하게 늘어놓은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예표 인물이 여럿 있다. 하나님 앞에서 개기다가 고래에게 잡아먹히고 죽다 살아 나온 선지자(대언자) 요나조차도 예수님의 위대한 예표이다. 그런데 요셉은 예수님과 무려 100~150가지가 닮았다고.. 무슨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법만큼이나 많은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옛날에 한국 컨티넨탈 싱어즈에서 "꿈의 사람 요셉"이라는 뮤지컬 음반을 내놓은 적이 있고, 드림웍스에서도 이집트의 왕자 다음으로 2000년에 요셉 이야기를 애니로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스토리상 속편이 전혀 아닌 작품도 그냥 2라고 붙이는 걸 좋아해서.. 옹박 2, 이집트의 왕자 2 이런 식의 작명을 거쳐서 개봉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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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세상 물정 모르는 색동옷 차림의 늦둥이 막내아들 철부지 꿈쟁이였다. 그러나 형들로부터 시기를 받아 인신매매를 당하고 하루아침에 밑바닥 노예로 전락해서 인실X을 혹독하게 체험하게 됐다..;;

그 뒤 이집트에서 겨우 기반을 잡는가 했는데 이번엔 성폭행 흉악범 누명을 쓰고 감방에 갇히고 말았다. 석방되는 동료 죄수의 꿈을 해몽해 줬지만, 그 동료의 무관심으로 인해 2년을 감방에서 더 썩었다. 요즘 현대인들의 정신 상태였다면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에 억울하고 원통해서 몇 번이고 자살했을 법도 한 상황이었다.

요셉은 성경에 인생 흑역사나 결점이 기록된 게 전혀에 가깝게 없으며, 특히 이성의 유혹을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FM대로 제일 모범적으로 잘 대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대가로 당장 돌아온 게 저 지경이었다.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성경에 자세히 적혀 있지는 않지만... 보디발의 아내 겁탈 누명의 경우, 보디발도 이건 요셉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 싶다. 요셉이 아니라 자기 마눌에게 바람기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했을 것이다.
일개 노예가 감히 주인의 아내를 범한 건 최악의 파렴치 중범죄이며, 이건 투옥이 아니라 그냥 즉결 사형감이다. 만약 요셉이 진짜 범인이라면 그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요셉을 완전히 무죄방면해 버리면 자기들의 입장이 심히 난처해진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으니, 절충안으로 요셉을 죽이지는 않고 그냥 감옥에 격리시키는 것으로 일을 덮은 게 아닐까? 요셉이 투옥된 뒤 보디발 집안에서는 대판 부부싸움이 벌어졌지 싶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요셉은 "해석이란 건 {주}께 속해 있지 않습니까?"라는 명대사와 함께 파라오가 꾼 뒤숭숭한 꿈을 정확하게 해석해 냈다. 덕분에 그는 이집트에서 의전 서열이 파라오의 바로 다음 2위인 총리로 순식간에 신분이 바뀌었다.

그리고 꿈에서 계시되었던 바와 같이, 7년 풍년 이후에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흉년 기근이 창궐했다. 이에 대한 대비가 철저히 된 나라는 이집트밖에 없었다. 그러니 요셉의 형들도 곡식을 사러 이집트까지 찾아와서 요셉을 대면하게 됐다. 자, 그럼 요셉은 형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이건 요셉이 지혜를 발휘해서 거의 하나님 급으로 공의와 사랑을 적절히 보이며 처신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마냥 "오 어째 이런 우연이~! 형님들 잘 오셨습니다~ 난 이집트 총리가 됐답니다~ 멋있쪙?" 할 수도 없고, "오냐, 옛날에 날 노예로 팔아넘겼던 네놈들이 제 발로 찾아왔군. 이제 내가 보복할 차례다. 한번 제대로 엿먹어 봐라" 이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처음에는 까칠하게 굴면서 형들이 자기 정체와 과거의 죄를 제 발로 털어놓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장 생존은 가능하게 기본적인 곡식을 무료로 챙겨 주긴 했다. (받았던 곡식값을 자루에다 같이 반환함)
형들이 과거의 죄를 완전히 회개했고, 막내동생 베냐민을 위해서는 필살의 형제애를 발휘하여 차라리 자기들이 대신 노예로 잡혀 있겠다고 호소하는 걸 확인하고서야 요셉도 드디어 엄격 진지 근엄 모드를 풀고 자기 정체를 밝혔다.

성경에서 요셉은 울었다는 장면이 유난히 자주 기록돼 있다.
어린 시절에 형들이 갑자기 자기를 매정하게 생까면서 노예상에게 팔아넘길 때, 억만 리 타지에 끌려가서 노예 취급 받을 때도 당연히 멘붕 해서 "아빠~ 보고 싶어어헝헝" 식으로 엄청나게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엔 그런 건 적혀 있지 않고 더 고차원적인 이유로 운 장면만 기록됐다.

특히 저렇게 형들에게 커밍아웃 하기 직전엔 요셉은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모두 물러가라"부터 시전했다. 그 뒤엔 궁궐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으허허허헝엉엉~!" 하며 울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방영했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같은 분위기를 생각하면 된다.

나중에 부친인 야곱이 죽고 장례까지 치르자,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요셉이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고 우리를 해코지 하면 어떡하지?" 이런 심정으로 요셉에게 자비를 호소하는 애원 간청을 했다. 성경에 따르면 요셉은 이때 마지막으로 또 울었다. 형들이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고 자기 진심을 몰라 준다고.. 이건 요 11에 기록된 예수님의 울음 장면과 매우 비슷한 분위기라고 보면 되겠다.

이것이 성경의 스토리이다.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요셉이 형들과 이렇게 밀고 당기는 동안, 형뿐만 아니라 아버지 야곱의 믿음도 시험대에 올라서 야곱 모드와 이스라엘 모드를 오락가락했다. 야곱 모드일 때는 멘붕 자포자기 해서 "아이고~ 오래 살아 봤자 험한 꼴밖에 안 보고.. 난 어서 뒈져야지ㅠㅠㅠ" 내지 "요셉으로도 모자라서 베냐민까지? 절대 못 보내~" 같은 육신적이고 꼰대스러운 고집을 시전했었다.

요셉의 일생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유다와 며느리 다말 개족보 이야기(38장), 그리고 하몰-세겜 지역 보복 학살극(34장) 사건도 삽입장으로 들어가서 철도 노선으로 치면 간선에서 짧게 뻗어 나간 지선 역할을 한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21/02/16 19:34 2021/02/16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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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수 년 전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는 멘탈이 붕괴되고 매우 비참하게 몰락하긴 했지만, 근본 성품이 무슨 카인, 이세벨, 발람 같은 급의 순악질은 아니었다.

그냥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적당히 오락가락 한 정치인이었으며,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점수와 하나님 관점에서의 점수가 매우 크게 차이 나는 사람에 속한다. 요즘으로 치면 구원받고도 계속 죄 짓고 하나님과 제대로 교제하지 못하다가 간증 잃고 건강 잃고 끝내 목숨까지 잃은 불행한 신자와 비슷하다.

본인은 그래도 사울도 구원은 받았으며, 특히 삼상 28에 기록된 엔돌의 무당 씬에서 나타난 사무엘은 진짜가 틀림없다고 글을 썼다. 그는 신약의 바울과 비교되는 상징적인 인물인 데다, 명색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데 하나님이 구원도 못 받은 사람을 자신의 선민들의 왕으로 지명하셨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요 근래에는 사울의 구원 여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삼상 28의 사무엘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서 논쟁을 벌였다. 가짜설을 믿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이건 마치 재창조 간극 논쟁과도 비슷하다. 저 사울이 진짜였건 가짜였건 그게 크리스천의 구원이나 행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계산 결과가 아니라 계산 과정이다. 저 사람들의 성경관이 본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게 말하면 성경으로 성경을 풀이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성경이 정확하고 무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는 신· 구약의 시대 차이와 구원관 같은 것도 엉망진창인데, 그것까지 거론했다가는 얘기가 끝이 안 나고 싸움만 날 것이다.. =_=;;;

이런 논쟁을 24시간 맨날천날 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다. 계산 결과가 아니라 계산 과정의 검증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본인의 근거와 논리를 복습 차원에서 다시 전개하고자 한다.

문제의 인물이 진짜 사무엘인 이유는 (1) 첫째, 성경이 그냥 평이하게 사무엘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걸 특별히 뒤집을 만한 문맥이 주변 어디에도 없으며 관련 참조 구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 상징? 가짜? 도대체 무슨 근거로?

다른 유사 논쟁거리를 살펴보면..

  • 욥기에서 "네가 시작은 미약해도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 같은 것이야 그냥 욥의 친구의 개똥철학 뇌피셜 문맥일 뿐이다.
  • 재창조 간극이야 창세기 1장의 문맥을 넘어 베드로후서나 예레미야 같은 참조 구절들과 연계해서 약간 간접적으로 유도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6천 년 젊은 지구 덕후가 창조과학 진영에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재창조 교리가 주장하는 바도 현 세상의 창조 6천 년 자체는 맞는 얘기이고 단지 큰 전체 그림이 6천 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6천 년이라는 문자적인 단어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 가룟 유다는.. 그놈 자체가 마귀(요 6:70)라는 말도 있고, 사탄이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고(눅 22:3, 요 13:27), 사탄이 놈의 생각을 주입하고 조종했다는 말도 있다(요 13:2). 이런 건 진짜로 인간과 사탄의 관계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표현이 다양하게 나오니까 말이다.

허나, 삼상28의 본문은 다른 참조할 만한 구절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그냥 여기 문맥만 잘 살피면 된다.
15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16절 "이에 사무엘이 이르되", 20절 "사울이 사무엘의 말들로 인해..".. 그냥 성경이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사무엘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 달리, 사울 혼자만 쟤가 사무엘이라고 착각한 게 아니다.

그 와중에 저 사무엘이 페이크라면 성경이 독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자기 직관과 안 맞는다는 이유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입다의 딸은 진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피지배민들에게 그냥 노동만 시켰지 진짜 톱으로 사지를 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대상 20:3) 같은 온갖 못된 습관이 시작된다. 이게 발전하면 나중에는 "처녀가 아니라 그냥 젊은 아가씨일 것이다", "홍해가 아니라 갈대밭일 것이다"가 되는 것이다.

(2) 그리고 둘째.. 어찌 보면 이게 진짜 중요한 이유인데,
이전 글에도 썼듯이 저 사람의 말에 담긴 미래 예언(사울 부자의 최후)이 매우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적중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자라매 {주}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그의 말들 중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게 하시니라." (삼상 3:19)


머리털이나 참새가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성경의 다른 부분을 보면 나온다.

"... 곧 {주}께서 아합의 집에 관하여 말씀하신 {주}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왕하 10:10)


쉽게 말해 예언 적중이다. 그럼 저 사무엘(?)의 말은 어찌 되었는가?

"... {주}께서 왕국을 네 손에서 찢으사 네 이웃에게 곧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주}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분의 맹렬한 진노를 아말렉에게 집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이 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또한 {주}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주}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리라" (삼상 28:17-19)


정말 빼도 박도 못하고 완벽한 적중이지 않은가?
성경에서 어둠, 누룩, 썩음이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심상이라면, 예언 성취는 정말 우선순위 0순위의 최상급 긍정적인 심상이다. 애초에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이 담긴 초자연적인 책인 주된 이유도 정확하고 구체적인 예언의 성취이다.

아합 왕을 미혹한 거짓 영이라든가,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사탄 마귀, 예레미야와 맞장 떴던 거짓 대언자 하나냐를 생각해 보라. 성경 어디에도 나쁜놈이 부정적인 팩트 폭격과 정확하게 적중한 바른 예언을 한 경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예언의 적중 여부만으로 진짜 대언자와 거짓 대언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 당당히 써 놓기까지 했다(신 18:21-22).

반대자들은 무당만 사무엘을 봤지 사울은 사무엘을 보지도 못했다면서 사무엘 진짜설을 부정하는데.. 사무엘을 봤건 못 봤건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무엘의 저 말이 가짜가 할 수 있는 말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단일 증거만으로도 충분하다.
게다가.. 너무 매정하고 잔인한(?) 말 때문에 사울을 더 낙담시키고 절망시켰다면서 저건 진짜 사무엘의 말이 아니라 그러는데..;; 그건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예수님이 우셨더라"(요 11:35)가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게 슬퍼서 우셨다는 말만큼이나 그냥 감성 충만한 견해로 보인다.

사무엘의 말과 관련하여 하나 더 생각할 게 있다.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대사 같지 않은가?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눅 23:43) 그럼 사무엘이 예수님 같은 구석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것도 심증상의 증거가 있다. 사무엘과 예수님은 성장 과정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호의를 입었다고 기록된 유일한 트윈이다. 이것도 누가복음 구절이고,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도 누가복음 구절이다.

  • "아이 사무엘은 점점 자라면서 {주}와 사람들에게 호의를 입었더라." (삼상 2:26)
  • "예수님께서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호의를 입으시더라." (눅 2:52)

그러니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무엘의 저 말은 거짓 대언자, 마귀 등의 나쁜놈이 내뱉었다고 성경에 기록될 만한 말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설령 그게 참말이건 거짓말이었건 그와도 무관하게 말이다.
저 말이 마귀 내지 지옥 자식의 입장에서 참말이라면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은 지옥불에서 같이 활활 타고 있을 것이다" 정도의 의미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런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무엘 가짜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건 성경의 난제를 성경으로 풀어 본 경험이 없고, 그냥 자기 직관을 여전히 성경의 관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저 단순히,

"사무엘 같은 위대한 신앙 거장이 한낱 무당의 푸닥거리에 소환되다니, 그럴 리가 없다.
진짜 사무엘은 사울과 연을 완전히 끊었으며, 아말렉 전투 이후로 평생 사울을 전혀 만나지 않았다. 사울이 사무엘 사칭 귀신을 진짜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마귀의 예언도 적중할 때가 있다"


이 정도가 전부이다. 먼저 예언 부분을 살펴보자.

물론 마귀 졸개들이 죽은 사람 흉내를 낼 수 있고, 과거 학습을 통해 인간의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도 아주 조금은 맞힐 수 있다. 정확도가 0%라면 애초에 저런 데에 사람이 현혹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허나 그런 잡스러운(??) 예언은 사무엘의 예언과 같은 퀄리티에 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성경 내부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만큼은 마귀의 예언도 적중할 수 있다는 가정은 정말로 전혀 할 필요 없다.

그리고 무당 소환이라.. 다른 성경들은 무당을 그냥 무당 medium이라고 번역했지만, 사실 KJV는 부리는 영..(familiar spirit) 지닌 사람이라고 풀어서 표현했다. 마치 동성애자라고 안 하고 남색하는 자,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성 이렇게 길게 풀어서 표현하듯이 말이다. (내 글 <음란한 성경은 가라> 참고)

부리는 영은 familiar. 말 그대로 친숙한 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무엘이 뿅 소환되었을 때 그 무당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전혀 familiar한 반응이 아니었다. 무당의 푸닥거리 타이밍에 맞춰서 사무엘이 그냥 뿅 나타나 준 거지 애초에 무당이 자기 능력으로 소환해 낸 것도 아니었다. 구약 성도들이 가 있는 지하 낙원에서 대충 이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괘씸해서 내(하나님)가 쟤(사울)에게 응답을 안 하고 가만히 있어 보니, 쟨 아예 무당까지 찾아가는 막장짓을 하는구나. 안 되겠다, 내키지는 않겠지만 네(사무엘)가 좀 가서 딱 한 번만 더 따끔한 돌직구 날려주고 오너라. 쟤한테 지은 죄를 깨닫고 죽을 준비를 하게 최소한의 아량은 베풀어 주도록 하자."


이런 상황에 가깝다.
성경대로라면,

  • 초자연적인 기적이 발생해서 사람이나 식물이 불이 붙어도 타 죽지 않을 수 있다. (출애굽기, 다니엘)
  • 동물이 말을 할 수도 있다. (발락과 발람)
  • 죽은 사람이 올라와(구약 시대 기준) 살아 있는 사람을 잠시 만난다거나, 아예 완전히 살아날 수는 있다.

하지만,

  • 거짓 대언자, 마귀 졸개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한 게 버젓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거나,
  • 하나님이 버젓이 거짓말을 성경에 써 놓는다거나,
  • 신 18:21-22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가 생긴다거나 할 일은 없다!!

전자는 그냥 단순히 과학적으로만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인 반면, 후자는 아예 하나님의 성품, 성경의 무오성과 정확성을 뒤흔드는 짓거리이지 않은가?

"진짜 사무엘이 무당의 푸닥거리에 맞춰서 나타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정도는 마치 "천사는 인간과 결혼할 수 없다", "짐승에게는 영이 없다"만큼이나 그냥 인간의 편견일 뿐이다. 그 사무엘이 가짜일 때 성경에 야기될 모순과 오류보다는 훨씬 더 개연성이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도 저 사무엘이 문자 그대로 그냥 사무엘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도 어렵고 납득이 안 된단 말이냐..??

결론을 내리겠다. 거듭 말하지만 성경이 사무엘이라고 말했다면 문자 그대로 사무엘이 맞다. 성경이 자체적으로 정의하는 문맥이나 참조 구절을 통해 다르게 해석하고 보정해야 할 사유가 없는 한, 6일은 문자적인 6일이요, 천 년은 문자적인 천 년, 나사로는 실존 인물, 유대인은 문자적인 유대인, 그리고 저 사무엘은 실제 사무엘이다.

이런 사무엘마저 가짜라면.. 지금 지구와 우주도 6천 년밖에 안 됐는데 하나님이 페이크로 엄청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한 거라는 어거지 논리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통할 수 있지 싶다. 이건 마치 이사야서의 뒷부분은 제2의 다른 이사야가 썼네 하는 소리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9/07/18 08:33 2019/07/1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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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6일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뭐 모세 다얀 장군의 영도력, 하나님의 기적, 국민들의 근성과 애국심, 미국의 지원 버프 등등 여러 얘기가 나도는데, 그 승리의 비결 중에는 첩보 활동도 있었다.
‘엘리 코헨’(1924-1965)은 이스라엘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급의 스파이였다. 아마 국정원 공채 같은 걸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일 게다. 우리나라 군대에서 정훈 시간에 강 재구 소령이나 연평해전 영웅을 가르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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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코헨은 유창한 외국어와 수려한 외모, 그리고 모사드가 지원해 준 자금빨을 총동원해 인심 후한 사업가로 위장해서 적국 시리아의 고위 공직자들과 인맥을 맺었다. 그러면서 전장인 골란 고원을 관광 가는 척 방문해서는, 주변에 있는 것들을 몽땅 비상한 기억력으로 암기하거나 도촬해서 이스라엘군에게 보내 줬다. 우리로 치면 북한으로 침투해서 북한의 고위 간부들을 교묘히 속인 후, DMZ 안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거기 있는 북한군 GP 등의 군사 시설 위치와 상황을 고스란히 알려 준 것과 같다. 1960년대 초엔 구글어스 같은 게 없었으니까. 그야말로 스타크래프트 맵핵의 실사판이다?

“여기서 근무하는 장병들은 땡볕에 고생이 참 심할 텐데, 빨리 자라는 유칼립투스 나무를 심어서 그늘을 만들어 놓는 게 어떨까요?”라고 제안까지 슬쩍 했는데 그게 받아들여졌다. 덕분에 이스라엘군은 나중에 유칼립투스 나무가 있는 쪽에다가만 포를 쏘면 되게 됐다. Oh shit;;

그는 무전기로 정보를 너무 오랫동안 많이 보내다가 “꼬리가 길면 밟힌다”와 같은 과정으로 결국 정체가 탄로나고 체포됐다. 기가 막힌 연전연패에 이거 아무래도 우리 내부에 첩자가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시리아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체 불명의 전파가 송신되는 것으로 의심되는 지역의 건물들을 일부러 강제 정전시켜 봤는데, 하필 혼자 배터리를 이용한 기기로 전파가 발사되고 있는 지점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소련으로부터 기술과 장비 원조를 받고서야 잡아 낼 수 있었다.

범인이 잡히자 시리아 당국은 충격에 빠졌다. 그 인심 좋게 생긴 사업가가 자국의 고위직 인사들을 몽땅 농락한 골수 간첩이었다니! 그는 숱한 고문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협력자를 더 불지 않았으며, 자국에다 교란용 역정보를 송신하라는 강요에 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교묘한 테크닉으로 모스 부호를 만들어서, 어째 자기가 체포 당했다는 사실을 자국으로 알렸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애국자 엘리 코헨을 “우린 저런 요원 보낸 적 없는데?”라고 외면하지 않았다. “우리가 체포해 있는 시리아 간첩/포로 10명과 교환하자, 그걸로 모자라면 현금박치기에 트럭 등 원하는 거 다 주겠다!”고 제안했으며, 국제 여론까지 동원해서 그의 석방 내지 감형을 촉구했다.

그러나 시리아는 자기네 약점과 기밀을 너무 많이 알아 버린 엘리 코헨을 도저히 살려 둘 수 없었다. 시민들이 지켜보는 데서 그를 교수대에 매달고, 처형 과정을 동네방네 생중계했다. 사실, 생각 같아서는 그들은 그를 아예 각을 뜨고 능지처참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처형 당시 그의 몸에는 아랍어로 온갖 문구가 써진 커다란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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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이스라엘은 시신이라도 돌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 역시 단칼에 씹혔다. 그것조차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시리아의 분노와 증오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는 돼지의 오물이 뒤섞인 채(유대교 율법에서 돼지란..) 대충 아무렇게나 매장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제 와서는 유해를 찾을 수도 없다.

국익을 위해서라지만 거짓말과 위장을 능수능란하게 해야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한다”에 따라야 하는 국정원 요원 같은 업종에 크리스천이 종사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건 크리스천이 정치인이 되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의 문제 같다.

세상 사람들이야 믿음이 아닌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 대 국가끼리는 개인 대 개인과는 달리, 힘에는 더 큰 힘으로 대응하고 악에는 악으로 맞서야 할 때가 있다. 성경에서 간첩은 창세기의 요셉도 알고 경계할 정도의 직업이었다(창 42:9). 곧이어 출애굽기의 히브리 산파는 비록 첩보는 아니지만 일단 거짓말을 했는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경우가 있고, 이스라엘 역시 전쟁 과정에서 당연히 정탐꾼을 운용했다. 거짓말을 동원해서 정탐꾼을 숨겨 준 창녀 라합은 완전 의인으로 칭찬받기까지 했다. 물론 그건 하나님이 “목표는 수단을 정당화한다” 급의 철학에 입각해서 인정하신 건 아니며, 믿음의 행위에다 정당방위· 긴급피난 같은 정황이 인정된 것에 가깝다.

시간과 분량 관계상 이 글에서 모든 디테일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예수 믿는다고 해서 국정원 요원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여겨진다. 애초에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군인부터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든지 인정받는 직업이고 병역 거부는 잘못된 행동인데, 그걸 대놓고 하나 좀 자기 정체를 숨기고 하나 무슨 차이이겠는가? 상관의 명령대로 나라 지키는 궂은일만 하는 거라면 말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런 일이 자기 양심에 걸리고 적성상 도저히 못 하겠으면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무 비위가 약해서 해부 실습을 못 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공부를 잘한다 해도 의대에 가지 말아야 하듯이. 양심에 거리낀다면 그건 죄가 된다.
적성국가에서의 첩보 임무는 실패하면 자기만 죽는 게 아니라 동료 요원까지 다 죽게 만드는 경우가 태반이니 말이다. 국정원 요원은 존재감이 있어서는 안 되는 관계로, 순직해도 전사 군인과는 달리 현충원에도 못 간다. 저렇게 대대적으로 알려진 엘리 코헨이 오히려 굉장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따지고 보면 엘리 코헨이 한 일은 엘리사가 한 일의 정확한 판박이였다. (비록 엘리사는 본업이 대언자이지 전문적인 간첩· 공작원은 아니었지만..;;) 열왕기하 6장을 쭉 읽어 보시라. 게다가 이 시절에도 이스라엘의 적국은 시리아였다!

이러므로 이 일로 인해 시리아 왕의 마음이 매우 괴롭게 되어 그가 자기 신하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을 돕는지 너희가 내게 알려 주려 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그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오 내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에 있는 대언자 엘리사가 왕께서 왕의 침실에서 하시는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니라. (왕하 6:11-12)

Posted by 사무엘

2015/09/25 19:35 2015/09/2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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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임 바이츠만. (Chaim Weizmann; 1874-1952)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문과 계열의 만렙 박사였다면, 현대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은...;; 천재 과학자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미국을 끌어들여서 나라를 세웠다면, 저 사람은 영국을 끌어들여서 자기네 땅을 얻어 냈다. 서로 나이 차이도(1874 & 1875년생) 거의 안 나는 동시대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윈스턴 처칠과도 동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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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임 바이츠만은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옥수수로부터 아세톤을 저렴하게 양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게 전시 군수 물자인 탄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이었던지라 그는 이것 덕분에 완전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됐다.
영국 정부에서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에게 훈장을 주려 했다. 그때 그 사람이 말했다. "저는 돈과 명예는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 민족을 약속된 땅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서 살게 해 주세요." 성경에서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자기 동족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우리 대영제국의 식민지 중엔 거기보다 더 넓고 좋은 땅도 얼마든지 있는데. 가령, 아프리카에 우간다 영토 일대는 어때?"라는 제안에도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ㄴㄴ. 런던이 지금 같은 영국 수도가 되기도 전부터 예루살렘은 원래 우리 땅이었습니다. 부디 거기를 돌려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영국 내부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물론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1차 세계 대전의 말에 1917년에 밸푸어 선언이 이뤄졌다.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발효된 카이로 선언 및 포츠담 선언과 비슷하다. 일제로부터 조선의 독립이 그때 명시됐으니 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귀환이 곧장 이뤄진 건 아니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 유대인들이 몇백만 명씩이나 나치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세계 질서가 확 바뀐 뒤에야 이스라엘이 세워질 수 있었다. 사람에겐 기본적으로 귀차니즘이 있는지라 박해를 안 받으면 잘 안 움직이니까.;;

어쨌거나 초대 대통령이 군인이나 외교관 같은 다른 직업이 아니라 과학자라니 참 멋있고 부럽다(우리나라는 박 근혜 대통령이 일단 전자공학과 출신이긴 하다만..). 바이츠만은 자기 실력을 민족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사용한 위인 애국자였다.

2.
이스라엘의 국가인 Hatikvah(희망)은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우연의 일치인지 <밝은 빛을 따라서 앞만 향해 나가자>라는 희망적인(?) 내용의 찬송가 멜로디로 쓰인다. 하지만 쟤네들 국가 가사는... 나 같은 비유대인이 보기에도 인간적인 감정상 정말 구슬프고 찡하고, 나라 없는 백성의 한이 레알 서려 있는 게 느껴진다. 1절 가사를 대충 드라마틱하게 의역하면 이런 내용이다.

“내 심장은 동방을 향해, 시온을 향해 오늘도 꿈틀댄다.
우리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으리.
약속의 땅에서 자유로운 내 조국을 세우는 날을 염원한 지가 어언 2천 년.
그곳은 시온 땅의 예루살렘이어라.”


이 글에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뺏었네 나쁜 깡패네 하는 얘기는 논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점을 양해 바란다. 원래 그런 분쟁이 얼마든지 안 생길 수 있었고 이스라엘은 합법적으로 땅을 받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도 다 합의가 돼 있었는데 영국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오해가 생기면서 내력이 복잡하게 배배 꼬인 게 있다. 그런 것까지 다 설명하기에는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다.

아 그리고, 이스라엘도 사람 사는 곳이고, 모든 이스라엘 국민들이 자기네 국가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저런 노래가 너무 국뽕스럽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 중에도 애국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일본인 중에도 기미가요가 너무 존재감 없다고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
하나님이 보우하셨는지 유대인들이 참 똑똑하긴 했다. 바이츠만 말고 프리츠 하버(1868-1934)도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천재 과학자이다. 그는 공기 중의 질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인공 질소 비료를 만들어 냈다. 햇볕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핵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공기로부터 사람을 살리는 빵을 만드는 급의 엄청난 기적을 이뤘다. 기아 해소와 인류 복지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는 응당 노벨 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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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는 바이츠만과는 달리 줄을 치명적으로 잘못 섰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도, 시온주의자도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이 아닌 독일에 충성했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그래서 조국을 위해 사람을 살리는 발명만 한 게 아니라 독가스도 발명했다. 1차 세계 대전 때 전장에 처음으로 살포된 염소 가스부터 시작해, 유대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절의 치클론 B 독가스도 다 이 사람 혼자 또는 공동 연구로 만들어졌다.

그럼 그가 그 덕분에 독일로부터라도 인정받고 떵떵거리며 살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이용 가치는 있지만 굉장히 애매한 왕따 포지션이 되어서 타지에서 무척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독일로부터는 나중에 나치 당이 집권하면서 "저런 더러운 생물(=유대인)을 고위 과학자 자리에 앉혀 둘 순 없다"라고 문전박대를 당했고, 영국 등 다른 나라로부터는 "저 자식은 머리는 비상하지만 정신이 완전 맛이 간 싸이코야."라고 단단히 찍혔다.

그래도 다행히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일찍(1934년) 죽은 덕분에 히틀러와 엮이지는 않았으며,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거나 반대로 나치 출신의 전범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관여한 발명품이 가까운 미래에 심지어 자기 동족을 학살하는 용도로까지 쓰인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역설이다. 그는 사람을 살린 엄청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위인전에는 도저히 오를 수 없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과학자의 연구 윤리를 논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씁쓸한 사례가 되었다.

4.
이스라엘 건국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의 건국도 다시 좀 복습하고 글을 맺겠다.
1948년 5월 10일에 우리나라에서 남쪽만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14일에 이스라엘이 건국됐고, 같은 날 낮에 한반도에서는 북으로부터 대남 송전이 끊겼다.
그 달 말일인 31일엔 그 국회의원들을 바탕으로 제헌국회가 개최됐고, 당시 의장이던 이 승만의 요청으로 이 윤영 목사의 감사 기도가 이때 행해졌다.
이어 그 해 7월 17일엔 잘 알다시피 헌법이 제정되었고,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서 약 3년간의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전인 1948년 3월에 이북에서는 이미 자기만의 국기와 국가도 다 정하고 분단은 기정사실이 된 상태로 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악의 무리들은 서로 동무 동무 하면서 비판과 삿대질이나 일삼으면서 어떻게 백성들의 재산과 자유를 빼앗고 몽땅 착취하고, 서로 감시하고 통제하고 믿질 못하는 생지옥을 만들까, 어떻게 남조선까지 몽땅 집어 삼킬까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 반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하나님께서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고 ...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우리에게 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것은 개인의 종교관을 떠나서 매우 다행이고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5/09/05 08:38 2015/09/0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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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예전에 한번 다윗과 미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정작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자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주제 얘기를 작정하고 좀 늘어놓아 보겠다.

구약 성경을 좀 읽은 분들이라면 이미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직후에는 왕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고 사사(재판관)라고 불리는 정치· 종교 지도자가 백성을 통치했다.
정치 삼권 중에서 입법과 행정이 빠진 사법이 부각되어 나오는 점이 특이하다. 입법은 이미 모세의 율법이 있으니 더 건드릴 필요 없고 행정은 글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니 너희 인간들은 이미 있는 법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법의 집행만 하라는 뜻인 듯하다.

그러니 이 시절의 사사는 말 그대로 판관 포청천 같은 위상이었다. 다만, 본업인 재판만 한 게 아니라 때로는 전쟁을 지휘하고 민족을 외세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했다. (혼자 블레셋 사람들을 다 때려잡은 삼손도 사사였으니) 하지만 호화로운 궁전에서 산해진미를 먹고 수많은 종과 상비군을 거느리면서 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른 민족들의 왕과 비교했을 때 '가오'가 안 났다.

이스라엘 역사상 마지막 사사 겸 첫 대언자는 '사무엘'이었다. 그의 시대 때 백성들은 드디어 자기에게 왕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삼상 8:5).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도 이방 민족들처럼 절대권력 국왕 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보고 싶지, 하나님 특유의 '그때 그때 달라요' 식의 믿음 행사가 필요한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반역의 영으로 인한 결과였다.

한편으로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니, 안 그래도 걸핏하면 전쟁에 외세 식민지인데 권력이 부족한 사사 통치 체계로는 나라의 앞날이 영 불안하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도 있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더니"란 표현이 사사기에 도대체 몇 번 나오던가? 사무엘은 인생이 다 좋았는데 자녀 교육만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점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이런 요구를 듣고는 불쾌한 반응이었지만 "이제 올 것이 왔구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긴 하지" 차원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셨다. 애초에 율법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훗날 왕정으로 전환할 때 왕이 지켜야 할 덕목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기도 했다. "율법 말씀을 필사해서 부지런히 묵상해라", "권력의 상징이라고 해서 사치품인 동물 말을 너무 많이 장만하지 말라" 같은. 신명기 17장을 읽어 보면 참 절묘함이 느껴진다.

단, 하나님은 왕을 가져 본 적이 없던 백성에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거듭 확인시켜 주셨다. 간지 넘치고 뽀대 나는 왕권을 유지시키는 원천은 전~~부 죄다 너희들의 노동력과 세금이라는 것을 말이다.
얘들은 안 그래도 율법에 따라 종교적으로 바쳐야 하는 헌물들이 장난이 아닌데, 거기에다가 정치적인 세금 수탈까지 추가되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왕정이 유지되는 동안 안식년은 사문이 되고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또 생산해야 감당이 되니까.

그때 가서 너무 힘들어 죽겠으니 도로 왕을 없애자고 하소연해 봤자, 대통령도 아니고 한번 왕좌에 앉아서 절대권력의 맛을 봐 버린 왕이 호락호락 하야해 줄까? 천만의 말씀. 역성혁명, 쿠데타 급의 일이 터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는 이상 정세가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경고는 단순히 "어쭈? 네놈들이 내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괘씸한 것들! 어디 엿먹어 봐라" 같은 보복성 공갈 협박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었던 것이다(삼상 8:18). 성경은 생각보다 정치 분야의 통찰도 많이 담긴 책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본인은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라는 그 시절의 역사가 지금으로 치면 "우리에게 자가용을 주소서"와 비슷하게 읽힌다. 차가 있으면 이동이 정말 편리해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간지와 뽀대도 많이 난다. 그러나 차도 일단 장만하고 나면 유지비가 도대체 얼마나 깨지던가? 그야말로 그 사람의 생활 패턴과 경제 양상이 확 달라지게 된다. 빚 내 가며 차 잘못 샀다가 도로 무를 수도 없고 손가락만 빨며 카푸어로 전락한 사람 많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역사상 전무했고 현재까지도 다시 없는 왕정 체제가 시작되었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출되었다. 성경의 사무엘기, 열왕기와 역대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중에서 이런 특이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울은 키 크고 잘생긴 미남이었다(삼상 9:2). 군사 영도력도 훌륭했고(삼상 14:47-48), 재임 기간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후임인 다윗과 같은 수준의 큰 병크를 저지른 것도 없었다(밧세바 간음, 인구 조사). 하지만 성경에서의 평가는 다윗과 너무 차이가 난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바닥을 긴다.

사울은 영적으로 점점 타락했다. 다윗이 자신의 위험한 정치 라이벌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그를 정당한 이유 없이 죽이려 했으며, 다윗을 신고하지 않고 보호해 줬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막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가 금지해 놓고는 위급하니까 결국 부리는 영을 지닌 무당을 찾아가서 점괘를 구할 정도로 심각한 막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런 행적에 대해서 본인은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정말 불신자스러운 '적당히' 세상적인 사고방식의 관점에 아주 충실했다. 세상의 정치판에서 성공하는 데는 이런 유도리 타입이 딱 적절하다.
그는 하나님께 대놓고 반역을 한 게 아니었고, 발람처럼 교묘하게 잔머리를 굴리는 사악한 타입도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전적으로 드린 건 아니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완전히 일심동체가 되고 하나님의 심정을 경험하는 그런 영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저런 부분적인 순종과 온전하지 않은 마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것보다 하나님이 광장히 싫어하시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잔인하고 부정적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하나님께 헌물로 바친답시고 가축들을 살려 갖고 왔다. 사무엘이 이를 지적하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그 유명한 말로 책망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한 듯 회개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먼저 혼자 휙 가 버리시면 전 뭐가 됩니까? 백성들 앞에서 가오가 안 서니, 같이 좀 나가시죠, 네?"(삼상 15:30)라고 자신의 정치 생명과 체면치레 걱정만 했다.

사실 사울은 예전에도 위급한 상황에서 사무엘이 좀 도착이 늦어진다 싶으니까 자기가 제사장 행세를 하면서 하나님께 헌물을 바친 적이 있었다. 성직과 관련된 절차와 규율이 제멋대로 문란해지는 걸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는 구약 성경 역사서 곳곳에서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이때에도 사울은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 내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 같은 영적인 일에 전반적으로 관심이 별로 없는 딱 세속 정치가 타입이었다.

이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근본이 글러먹은 사고방식으로 인해 하나님은 사울에게서 완전히 학을 떼 버리신 것이다. 이것이 사울이 간음과 살인방조죄를 저지른 다윗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나게 저평가되고 있는 이유이다.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면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삼하 16:11-12)라고 말한 다윗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예수 믿는 크리스천은 이 점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거지이기라도 해서 사람으로부터 헌물을 받아야만 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할 처지가 전혀 아니란 말이다!

자, 사울이 몰락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충분히 분석과 설명이 됐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좀 꺼내 보겠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가 됐다. 다윗은 자기가 쫓아낸 상태이고 사무엘은 죽고 없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 응답도 주지 않으셨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변덕쟁이여서가 아니라 사울이 여전히 자신의 나쁜 버릇을 안 고치고 "흐음.. 대충 기도해 보고 이래도 응답이 없으면 마지막 카드로 점이라도 쳐야겠다" 같은 불순하고 이중적인 마음을 품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으며, 대상 10:13-14에서는 사울이 하나님께 애초에 여쭌 게 아니었다고 진술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있다.
엔돌의 무당이 불러 낸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이었을까? (삼상 28:7-14)

나도 옛날에, 한 15~20년쯤 전에는 무당이 불러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개 무속인이 그렇게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낼 능력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그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생각이었으며,
또 진짜 사무엘이라면 지금이라도 사울과 다윗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겠지, 저렇게 잔인하고 매정하게 사울을 멘붕시키고 죽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인간적이고 '사람을 살리는' 사고방식이 당시에 더 우세했기 때문이다. 마치 입다의 딸이 설마 진짜 죽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물론 지금은 진짜 사무엘이라고 생각이 바뀐 지 오래다.
무당은 평소에 하는 것처럼 사무엘 행세를 하는 부정한 영이나 하나 불러내려고 푸닥거리를 했는데.. 하나님이 그 타이밍에 맞춰 레알 사무엘을 소환시켜 주셨다. 돌발 예외상황이 발생하는 바람에 무당은 깜짝 놀라 자빠지고, 자기에게 온 고객이 무려 이 나라의 왕인 것도 알아채게 됐다.

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인 가장 성경적인 이유는.. 인간적인 거 나발이고 다 필요 없고,
사무엘의 예언이 다음날 정말 문자 그대로 정확· 정밀하게 적중했기 때문이다. 비록 마귀에게도 예언을 적중시킬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모호하게 한 예언이 어쩌다 부분적으로 적중할 수도 있지만, 일단 저 문맥에서 사무엘이 가짜라고 생각하기에는 "예언의 성취"라는 건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너무 너무 긍정적으로 흐르는 심상이다.
욥의 행동에 대해 사탄이 예언한 것, 이스라엘을 말아먹은 거짓 대언자들의 온갖 거짓 예언들 등등과 비교했을 때 말이다. "예언의 성취 여부"만이 중요하지 그 예언에 담긴 메시지가 긍정적인 내용이냐 부정적인 내용이냐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성경을 많이 읽으면 자연스럽게 사고방식이 성경의 저술 분위기대로 바뀌는 현상이다.
다른 예로, 한때는 예수님이 그저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피땀 흘리면서 울부짖었고, 동정과 연민 때문에 울었을 거라고 나도 실제로 생각했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많이 읽고 나면.. 그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셨다는 게 납득이 되게 된다. 그런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끝으로, 사울은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말년에 너무 타락했고 자살까지 했는데 도저히 하늘로 갔을 것 같지 않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 듯. 성경에서도 사울은 신약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단서를 얻을 수도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구원조차 못 받은 사람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아무래도 사울도 구원받은 사람인 사무엘 내지 요나단과 같이 있을 거라는(= 낙원에) 언질이 있으니(삼상 28:19) 굳이 따지자면 사울도 구원은 부끄럽게나마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단은 지배적이다.
신약에 부끄러운 구원의 상징으로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있다면, 구약에서는 사울이 그와 비슷한 급이 아닐까 싶다.

관심 있는 분은, 사울 왕과 관련된 의문을 더 자세하게 다룬 윤 성목 목사님의 글을 참고하시라.
난 아시다시피 '새마을'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닉으로 쓰고 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5/06/21 08:28 2015/06/2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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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의 모세 이야기 -- 上에서 계속된다.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지식과 더불어 김 성모 화백 명대사에 대한 지식이 동시에 필요함을 밝힌다. ㅋㅋㅋㅋㅋ)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막대기를 뱀으로 만들고, 물을 피로 만들고 각종 재앙을 행할 때,
“폐하, 저거 다~ 사기입니다. 우리 마술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라고 훼방을 놓은 이집트 마술사의 실명이, 웬 생뚱맞은 바울 서신에 거론되어 있다. (딤후 3:8) 그러나 이들도 재앙의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결국은 GG 치고 “이건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리에 제임스 랜디 같은 마술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_=;; (가짜 초능력자 잡아내는 걸 업으로 삼던 양반.)

보라, 주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들에게 임하여 매우 심한 전염병이 있으리라. (출 9:3)

이건 구제역, AI 같은 것들일까...?? 이건 정말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답이 없어서 닥치고 가축들을 매몰 도살 처분하는 수밖에 없는데.
재앙이 하나씩 지날 때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던 이집트가 거덜날 지경이 되었다.
이건 그야말로 생명과 무생물의 경계를 넘나들고 기상 현상이 마음대로 바뀌는 말 그대로 초자연적인 이적이었다.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는 건 둘째치고라도, 이런 재앙을 겪으면서 이집트 국민들은 자기 왕에 대해서, 또 자기들이 믿던 신에 대해서 분명 심각하게 다시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모세 자신도 점차 믿음이 생기고 담대해졌다. 성경을 보면 알겠지만, 나중에 그는 파라오를 상대로 “아~ 그러셨어요? 님 저한테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졸라 무섭군요” 같은 식으로 농을 치거나 말을 비꼴 정도로 간이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오는 칠전팔기 불굴의 의지로 모세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파라오는 결코 남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는다. 누가 이기나 보자!” 파라오는 정말로 김 화백이 롤모델로 삼기에 손색이 없을 근성가이였다. 마치 돈을 계속 잃으면서도 도박을 그만두질 못하는 것처럼.

아홉째 재앙은 말 그대로 어둠의 다크에서 죽음의 데스를 느끼는 재앙이었고, -_-;;
결국 마지막 열째 재앙인 모든 장자가 몰살 당하는 재앙으로 인해, 파라오는 자기 맏아들을 잃고서야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 줬다. 앞의 재앙들이 이집트의 각종 동물· 자연 잡신들을 무력화하는 심판이라면,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가 과거에 저지른 이스라엘 유아 학살에 대한 심판이었다.

이 심판에 앞서 하나님은 이집트 탈출을 염두에 두고 유월절을 제정했다. 양을 잡아서 급하게 먹는 건 좋은데 왜 하필 피를 문설주에다 발라 놔야 할까? 아래의 그림에서 보듯,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가정은 일명 죽음의 천사가 들어가지 않고 휙 돌아서서 열외(passover!)한 반면, 그렇지 않은 집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집트의 왕자>(이하 '이왕')에서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죽음의 천사가 여러 스레드로 갈라져서 길거리 그래프를 DFS 탐색하는 듯하다.

'이왕' OST인 When You Believe가 흘러나오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변덕 한번 심한 파라오는, 군대를 보내서 이들을 죽이거나 도로 잡아 오기로 작정한다.
마침 유대인들이 모인 곳은 하필 막다른 홍해 바닷가였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오병이어만큼이나 불신자들도 다 아는 성경의 그 유명하고 위대한 기적이 행해진다.

홍해 바닷물이 둘로 갈라져서 경부 고속도로가 중앙에 생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출 14:21을 보면, 하나님께서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냄으로써 길을 만들었다고 하신다. 동풍이라 함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방향이다. 동쪽으로 부는 바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경로는 서쪽에서 동쪽 방면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바다는 모세가 있는 곳에서부터 바다 건너편으로 쭉 전진을 하면서 폼나게 밀려난 게 아니라...
바다 건너편에서부터 물 밀려나기 시작해 그 흐름이 모세가 있는 쪽으로 왔을 거라는 뜻이다. 이해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위의 영화 장면도 엄밀히 말하면 고증 오류라는 뜻이 되겠다.. -_-;;;

백성들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홍해를 건넌다.
그런데
http://www.youtube.com/watch?v=6ZjgH0H7DkE&feature=related
의 3:44-46 지점. 낙타가 입 헤 벌리고 '오오욱' 하는 소리가... 둠에서 좀비 몬스터가 죽을 때 나는 소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다. ㄲㄲㄲㄲ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해가 갈라져서 생긴 길의 폭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살림 가득 싣고 노약자와 어린이까지 다 싣고 가는 수십, 백수십만 명의 행렬의 진행 속도가 빠를 수가 없을 것이다(창 33:13-14 참고).
이들이 모두 홍해를 건널 때까지 하나님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집트 군대의 진입을 차단하고 시야도 가리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 동안 이집트 군대는 근처에서 진을 치고 한없이 기다리다가, 유대인들을 추격하러 멋도 모르고 갈라진 홍해 밑바닥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갈라져 있던 바닷물이 원상복귀되면서 시ㅋ망ㅋ.

이때 파라오 자신도 죽었을까? 아들에 이어 아버지까지??
'이왕'에서는 파라오 혼자 살아남는 설정으로 나오고, 모세는 홍해 건너편에서 “형. 이제 영원히 굿바이.”라고 한 마디 한다.
성경에는 명시적인 언급이 없지만, 출 14의 정황으로 볼 때 파라오도 추격 작전의 선두에 나섰고 그 인원들이 한 명도 남김 없이 몰살당했다고 했으므로, 이집트는 이제 왕까지 잃고 군대도 잃고 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몰렸을지도 모르겠다.

천지창조 이래 전무후무한 기적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과 자신감으로 용기백배 했다. 정말 얼마나 기뻤겠는가? 출애굽기 15장의 대부분이 그 감격을 못이겨 불러진 찬송시이다. 이 엄청난 소식은 사실 해당 지역 주변의 민족들에게도 퍼져서 흠좀무와 충공깽을 선사했다. (수 2:9-10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을 통해 홍해를 직접 건너지 않았다면, 이집트 군대의 몰살 같은 다른 수많은 관련 에피소드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란 말인가? 그런데 이걸 무슨 얘네들은 홍해가 아닌 갈대밭을 건넌 거라고 심지어 성경 지도의 출애굽 경로도 영 엉뚱하게 설명해 놓은 책도 있다. 원어상 홍해가 아니라 갈대밭이라고 설명하는 신학자까지 있는 모양인데, 이건 거의 '싫어요'가 두음법칙 상 '좋아요'로 바뀐 개드립 급이다.
믿기 싫으면 자기가 안 믿는 거야 개인 자유이고 내가 절대로 뭐라 안 하는데, 남이 믿는 것에 대해서 엉뚱하게 해석이나 하지 마셈..;;

역사를 보면, 성경 구절을 자기의 이념적인 일에다 영적으로 적용한 사람이 있다. 몇 가지 유명한 예를 소개한다.

A father of the fatherless, and a judge of the widows, is God in his holy habitation. (시 68:5) -- 고아원을 기도만으로 운영한 조지 뮬러
Stand fast therefore in the liberty (...) and be not entangled again with the yoke of bondage. (갈 5:1) -- 평생을 조국 독립을 갈망하고, 광복 후에도 자유 민주주의를 추구한 이 승만
...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롬 1:17 등) -- 종교 개혁자 루터


이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영적으로 적용하여 우리나라 개신교의 성시 교독을 보면, 광복절 편에 “내가 주께 노래하리니 그분께서 영화롭게 승리하셨도다. 그분께서 말과 거기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도다.” (출 15:1) 같은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이집트 군대의 패배를 일제의 패망에다가 비유한 모양이다.

맹렬한 김 정일 안티로 유명한 북한 인권 운동가 남 신우 씨는 “Let my people go”를 아주 즐겨 인용한다. 성경에서는 66권 전체를 통틀어 출애굽기 5장~10장 사이에서밖에 등장하지 않는 문장이다. 그가 사용하는 문맥은 물론 파라오로부터가 아니라 “인간개백정 김 정일로부터 가게 하라”이다.

이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래봤자 모세를 포함해 홍해를 건넌 이 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뺑이 치다 다 죽었으니 그저 안습.
아니, 홍해를 건너면서 이제 뭘 해도 하나님 앞에서 꺼뻑 죽을 정도로 자신만만하던 그들도... 겨우 며칠 못 가 광야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그만치 연약하고 어떤 면에서는 간사하다.

모세는 120세에 약속의 땅을 몸소 밟지는 못하고, 대신 산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면서 감격에 찬 채로 쓱~ 쓰러져 죽었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배려하셔서 죽는 순간까지 몸이 노쇠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 아마도 몰래 부활, 승천하지 않았나 추정된다(유 9).

그 위대한 모세가 출애굽 2세대들을 교육하면서 예수님이 오실 것임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예언을 남겼으며(신 18:15),
신약 성경은 사도행전에서 두 번이나 그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맞다고 입증했다(행 3:22, 행 7:37).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모세를 그렇게도 추종하면서 정작 예수님을 모른다. 다른 엉뚱한 메시야 기다린다고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말고 하루빨리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여야 할 텐데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1/01/21 15:29 2011/01/2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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