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예전에 한번 다윗과 미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정작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자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주제 얘기를 작정하고 좀 늘어놓아 보겠다.

구약 성경을 좀 읽은 분들이라면 이미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직후에는 왕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고 사사(재판관)라고 불리는 정치· 종교 지도자가 백성을 통치했다.
정치 삼권 중에서 입법과 행정이 빠진 사법이 부각되어 나오는 점이 특이하다. 입법은 이미 모세의 율법이 있으니 더 건드릴 필요 없고 행정은 글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니 너희 인간들은 이미 있는 법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법의 집행만 하라는 뜻인 듯하다.

그러니 이 시절의 사사는 말 그대로 판관 포청천 같은 위상이었다. 다만, 본업인 재판만 한 게 아니라 때로는 전쟁을 지휘하고 민족을 외세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했다. (혼자 블레셋 사람들을 다 때려잡은 삼손도 사사였으니) 하지만 호화로운 궁전에서 산해진미를 먹고 수많은 종과 상비군을 거느리면서 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른 민족들의 왕과 비교했을 때 '가오'가 안 났다.

이스라엘 역사상 마지막 사사 겸 첫 대언자는 '사무엘'이었다. 그의 시대 때 백성들은 드디어 자기에게 왕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삼상 8:5).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도 이방 민족들처럼 절대권력 국왕 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보고 싶지, 하나님 특유의 '그때 그때 달라요' 식의 믿음 행사가 필요한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반역의 영으로 인한 결과였다.

한편으로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니, 안 그래도 걸핏하면 전쟁에 외세 식민지인데 권력이 부족한 사사 통치 체계로는 나라의 앞날이 영 불안하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도 있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더니"란 표현이 사사기에 도대체 몇 번 나오던가? 사무엘은 인생이 다 좋았는데 자녀 교육만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점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이런 요구를 듣고는 불쾌한 반응이었지만 "이제 올 것이 왔구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긴 하지" 차원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셨다. 애초에 율법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훗날 왕정으로 전환할 때 왕이 지켜야 할 덕목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기도 했다. "율법 말씀을 필사해서 부지런히 묵상해라", "권력의 상징이라고 해서 사치품인 동물 말을 너무 많이 장만하지 말라" 같은. 신명기 17장을 읽어 보면 참 절묘함이 느껴진다.

단, 하나님은 왕을 가져 본 적이 없던 백성에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거듭 확인시켜 주셨다. 간지 넘치고 뽀대 나는 왕권을 유지시키는 원천은 전~~부 죄다 너희들의 노동력과 세금이라는 것을 말이다.
얘들은 안 그래도 율법에 따라 종교적으로 바쳐야 하는 헌물들이 장난이 아닌데, 거기에다가 정치적인 세금 수탈까지 추가되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왕정이 유지되는 동안 안식년은 사문이 되고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또 생산해야 감당이 되니까.

그때 가서 너무 힘들어 죽겠으니 도로 왕을 없애자고 하소연해 봤자, 대통령도 아니고 한번 왕좌에 앉아서 절대권력의 맛을 봐 버린 왕이 호락호락 하야해 줄까? 천만의 말씀. 역성혁명, 쿠데타 급의 일이 터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는 이상 정세가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경고는 단순히 "어쭈? 네놈들이 내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괘씸한 것들! 어디 엿먹어 봐라" 같은 보복성 공갈 협박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었던 것이다(삼상 8:18). 성경은 생각보다 정치 분야의 통찰도 많이 담긴 책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본인은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라는 그 시절의 역사가 지금으로 치면 "우리에게 자가용을 주소서"와 비슷하게 읽힌다. 차가 있으면 이동이 정말 편리해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간지와 뽀대도 많이 난다. 그러나 차도 일단 장만하고 나면 유지비가 도대체 얼마나 깨지던가? 그야말로 그 사람의 생활 패턴과 경제 양상이 확 달라지게 된다. 빚 내 가며 차 잘못 샀다가 도로 무를 수도 없고 손가락만 빨며 카푸어로 전락한 사람 많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역사상 전무했고 현재까지도 다시 없는 왕정 체제가 시작되었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출되었다. 성경의 사무엘기, 열왕기와 역대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중에서 이런 특이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울은 키 크고 잘생긴 미남이었다(삼상 9:2). 군사 영도력도 훌륭했고(삼상 14:47-48), 재임 기간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후임인 다윗과 같은 수준의 큰 병크를 저지른 것도 없었다(밧세바 간음, 인구 조사). 하지만 성경에서의 평가는 다윗과 너무 차이가 난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바닥을 긴다.

사울은 영적으로 점점 타락했다. 다윗이 자신의 위험한 정치 라이벌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그를 정당한 이유 없이 죽이려 했으며, 다윗을 신고하지 않고 보호해 줬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막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가 금지해 놓고는 위급하니까 결국 부리는 영을 지닌 무당을 찾아가서 점괘를 구할 정도로 심각한 막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런 행적에 대해서 본인은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정말 불신자스러운 '적당히' 세상적인 사고방식의 관점에 아주 충실했다. 세상의 정치판에서 성공하는 데는 이런 유도리 타입이 딱 적절하다.
그는 하나님께 대놓고 반역을 한 게 아니었고, 발람처럼 교묘하게 잔머리를 굴리는 사악한 타입도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전적으로 드린 건 아니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완전히 일심동체가 되고 하나님의 심정을 경험하는 그런 영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저런 부분적인 순종과 온전하지 않은 마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것보다 하나님이 광장히 싫어하시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잔인하고 부정적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하나님께 헌물로 바친답시고 가축들을 살려 갖고 왔다. 사무엘이 이를 지적하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그 유명한 말로 책망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한 듯 회개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먼저 혼자 휙 가 버리시면 전 뭐가 됩니까? 백성들 앞에서 가오가 안 서니, 같이 좀 나가시죠, 네?"(삼상 15:30)라고 자신의 정치 생명과 체면치레 걱정만 했다.

사실 사울은 예전에도 위급한 상황에서 사무엘이 좀 도착이 늦어진다 싶으니까 자기가 제사장 행세를 하면서 하나님께 헌물을 바친 적이 있었다. 성직과 관련된 절차와 규율이 제멋대로 문란해지는 걸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는 구약 성경 역사서 곳곳에서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이때에도 사울은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 내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 같은 영적인 일에 전반적으로 관심이 별로 없는 딱 세속 정치가 타입이었다.

이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근본이 글러먹은 사고방식으로 인해 하나님은 사울에게서 완전히 학을 떼 버리신 것이다. 이것이 사울이 간음과 살인방조죄를 저지른 다윗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나게 저평가되고 있는 이유이다.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면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삼하 16:11-12)라고 말한 다윗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예수 믿는 크리스천은 이 점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거지이기라도 해서 사람으로부터 헌물을 받아야만 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할 처지가 전혀 아니란 말이다!

자, 사울이 몰락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충분히 분석과 설명이 됐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좀 꺼내 보겠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가 됐다. 다윗은 자기가 쫓아낸 상태이고 사무엘은 죽고 없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 응답도 주지 않으셨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변덕쟁이여서가 아니라 사울이 여전히 자신의 나쁜 버릇을 안 고치고 "흐음.. 대충 기도해 보고 이래도 응답이 없으면 마지막 카드로 점이라도 쳐야겠다" 같은 불순하고 이중적인 마음을 품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으며, 대상 10:13-14에서는 사울이 하나님께 애초에 여쭌 게 아니었다고 진술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있다.
엔돌의 무당이 불러 낸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이었을까? (삼상 28:7-14)

나도 옛날에, 한 15~20년쯤 전에는 무당이 불러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개 무속인이 그렇게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낼 능력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그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생각이었으며,
또 진짜 사무엘이라면 지금이라도 사울과 다윗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겠지, 저렇게 잔인하고 매정하게 사울을 멘붕시키고 죽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인간적이고 '사람을 살리는' 사고방식이 당시에 더 우세했기 때문이다. 마치 입다의 딸이 설마 진짜 죽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물론 지금은 진짜 사무엘이라고 생각이 바뀐 지 오래다.
무당은 평소에 하는 것처럼 사무엘 행세를 하는 부정한 영이나 하나 불러내려고 푸닥거리를 했는데.. 하나님이 그 타이밍에 맞춰 레알 사무엘을 소환시켜 주셨다. 돌발 예외상황이 발생하는 바람에 무당은 깜짝 놀라 자빠지고, 자기에게 온 고객이 무려 이 나라의 왕인 것도 알아채게 됐다.

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인 가장 성경적인 이유는.. 인간적인 거 나발이고 다 필요 없고,
사무엘의 예언이 다음날 정말 문자 그대로 정확· 정밀하게 적중했기 때문이다. 비록 마귀에게도 예언을 적중시킬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모호하게 한 예언이 어쩌다 부분적으로 적중할 수도 있지만, 일단 저 문맥에서 사무엘이 가짜라고 생각하기에는 "예언의 성취"라는 건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너무 너무 긍정적으로 흐르는 심상이다.
욥의 행동에 대해 사탄이 예언한 것, 이스라엘을 말아먹은 거짓 대언자들의 온갖 거짓 예언들 등등과 비교했을 때 말이다. "예언의 성취 여부"만이 중요하지 그 예언에 담긴 메시지가 긍정적인 내용이냐 부정적인 내용이냐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성경을 많이 읽으면 자연스럽게 사고방식이 성경의 저술 분위기대로 바뀌는 현상이다.
다른 예로, 한때는 예수님이 그저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피땀 흘리면서 울부짖었고, 동정과 연민 때문에 울었을 거라고 나도 실제로 생각했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많이 읽고 나면.. 그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셨다는 게 납득이 되게 된다. 그런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끝으로, 사울은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말년에 너무 타락했고 자살까지 했는데 도저히 하늘로 갔을 것 같지 않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 듯. 성경에서도 사울은 신약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단서를 얻을 수도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구원조차 못 받은 사람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아무래도 사울도 구원받은 사람인 사무엘 내지 요나단과 같이 있을 거라는(= 낙원에) 언질이 있으니(삼상 28:19) 굳이 따지자면 사울도 구원은 부끄럽게나마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단은 지배적이다.
신약에 부끄러운 구원의 상징으로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있다면, 구약에서는 사울이 그와 비슷한 급이 아닐까 싶다.

관심 있는 분은, 사울 왕과 관련된 의문을 더 자세하게 다룬 윤 성목 목사님의 글을 참고하시라.
난 아시다시피 '새마을'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닉으로 쓰고 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5/06/21 08:28 2015/06/2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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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미갈 이야기

1. 다윗의 조약돌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장면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 같이 좀 생각해 보자.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왜 조약돌을 5개씩이나 챙겨 갔을까? (삼상 17:40)

“발사한 돌이 빗나가는 경우 / 골리앗이 한 발 만에 안 죽을 경우에 대비해서” 같은 답변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필살의 일격 단 한 발로 미간을 명중시켜서 인간 흉기 골리앗을 즉사 내지 최소한 기절이라도 시키지 않으면, 다윗은 곧바로 반격을 당해서 다음 돌은 쏴 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이 조약돌은 FPS 용어로 치면 일종의 레일건인 것이다. 골리앗은 BFG로 무장해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한 발 이후로는 의미가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비장한 각오를 단단히 한 사람들은... 거사를 치르기 전에 일부러 자기에게 주어진 리소스를 딱 자기 여건에 맞춰 제약하는 퍼포먼스를 행하곤 했다. 일종의 배수진이랄까?
 
안 이숙 여사는 왕복이 아닌 편도 배삯만 치르고 일본에 갔으며,
윤 봉길 의사는 폭탄을 던지러 가기 전에 김 구와 손목시계를 교환하여 자기가 더 저렴한 것을 챙겼다.
옛날 백제의 계백 장군은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 전에 자기 처자식부터 미리 죽였다..;;
 
다윗도 만약 그런 식으로 비장하게 행동했다면 필생필사의 각오로 돌을 달랑 하나만 챙겨 가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스타일로 행동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데 자기는 죽을 일이 절대로 없으며, 골리앗을 무찌르고 멀쩡히 돌아온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일이 틀어질 가능성 따윈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그건 영락없이 '근자감'처럼 보였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는 가진 자의 여유마냥 별 생각 없이 평상시처럼 여러 스페어 조약돌을 챙겼다.

아니, 어쩌면 그는 골리앗 정도를 초월하여 아예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당장 현실의 목표물인 골리앗을 원 샷 원 킬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소리이고, 혹시 이 돌발상황 결과에 불복하여 예정에 없던 다른 거인들이 또 튀어나와서 시비를 걸면, 그놈들까지 이 조약돌로 잡아야겠다는 준비까지 한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거인이 골리앗만 있었던 건 아니며 당장 골리앗에게도 혈육상의 친동생이 있었다고 나오니까 말이다.
 
이 PvP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PK하고, 골리앗이 갖고 있던 커다란 검을 득템했다. 참고로 사무엘기상 17장을 읽어 보면, 성경은 골리앗을 골리앗이라고 부르는 걸 극도로 기피하면서 의도적으로 '그 블레셋 사람'이라고 에둘러 가리키는 걸 볼 수 있다.

2. 사울의 둘째 딸 미갈

성경에서 사울 왕의 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건 다윗이 골리앗을 죽여서 완전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된 뒤부터이다. 영웅이 된 건 좋은데 다윗이 너무 유명해지고 왕보다도 인기가 올라가자, 그는 왕의 눈 밖에 나 버렸다.

이거 뭐 누명을 씌워 죽일 수도 없고.. 왕은 꼼수 차원에서 다윗을 전쟁터에서 죽게 하려고 높은 군사 직위를 주었으며, 자기 딸을 다윗에게 주어 결혼시켰다. 사실, 왕의 사위로 만들어 주겠다는 건 삼상 17:25에서 이미 약속된 사항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 같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감히 왕의 딸과 결혼할 수는 없다고 제안을 고사했다. 이에 왕은 다윗을 또 전쟁터에서 죽게 할 명목으로, 아무 지참금 따위 안 받을 테니 다만 민족의 원수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여서 놈들 포피만 가져오면 둘째딸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다윗은.. 미갈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가서 블레셋 사람 200명의 포피를 갖고 멀쩡히 돌아왔다. 그래서 결혼에 골인했다.
생각을 해 봐. 사랑하는 마누라를 얻으려고 목숨 걸고 전쟁터에서 사람 수백 명을 죽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맺어진 결혼 생활은 그리 단란하지 못했으며 오래 못 갔다.

미갈은 거짓말까지 해 가며 다윗의 도피를 도와 줘야 했으며, 별거 모드에 빠졌던 그녀는 훗날 아버지의 명에 의해 '발디/발디엘'라는 다른 남자에게로 강제 재혼을 당했다. (삼상 25:44) 그 동안 다윗은 타지에서 또 아비가일, 아히노암이라는 아내를 두 명이나 추가했고 말이다.

허나 여기에도 반전이 있었으니...
나중에 다윗은 긴 도피 생활을 마치고 왕이 된 후, 발디에게서 미갈을 도로 뺏어 와 버렸다! (삼하 3:14-16)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마누라를.. 그것도 자기 나라 왕에게 빼앗긴 발디는 엉엉 울면서 미갈을 뒤따라 갔는데.. 군대 대장 아브넬의 “그만 꺼져”(성경에는 그냥 Go return이지만..ㅎㅎ) 한 마디에 “넹.. ㅠ.ㅠ” 깨갱 하고 버로우 타 버린 완전 안습한 남자로 성경에 나온다. 성경에서 처지가 제일 처량한 남자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다윗과 미갈은 재회를 하였으나, 궁극적인 결말은 또 다시 불미스러웠다.
사사 시절 이래로 방치되어 있던 언약궤가 돌아오던 날, 다윗은 왕의 체면도 다 버리고 너무 즐거워서 백성들과 덩실덩실 춤추고 즐겼는데...

미갈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남편에게 “품위라고는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리면서 당신 참 가관이더군요”라는 요지로 비아냥거리면서 굉장한 악담을 퍼부었다.

다윗도 이것만은 영적인 문제인지라 그냥 넘길 수 없었고, 아내에게 굉장히 실망을 한 듯하다. “나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지금보다 더 어리광 부리고 기꺼이 더 망가질 수도 있소. (그리고 그러더라도 나는 당신이 언급한 그런 천한 여자들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더 대접을 받을 테니 걱정 마쇼.)”

그 뒤로 미갈은 자녀 없이 쓸쓸한 말로를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삼하 6:23) 그 시절에 유부녀가 자기 자녀가 없는 것은 거의 죄악에 가까운 굉장한 치욕이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이것이 단순히 금슬에 금이 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생리학적 불임을 만들어 버리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그러나 인간의 출산을 굉장히 주관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성경의 전반적인 심상으로부터 유추했을 때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미갈의 마지막 장면이다. 처음엔 다윗이 미갈을 좋아한 게 아니라 미갈이 다윗을 먼저 사랑했다고 나오는데.. 본의가 아니게 시집을 다시 갔다가 돌아온 뒤, 결국 다윗의 여러 아내들 중 랭킹 끄트머리로 밀려나면서 파경으로 갔구나. 인생 한번 참 파란만장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6/09 08:37 2014/06/0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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