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산과 한글 학회

본인은 몇 년 전 한글 학회 관계자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애산 이 인 선생(1896-1979) 추모 학술대회' 초청장이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 약력을 보니 해방 초기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법조인이긴 한데, 본인은 그 당시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 시절의 관련 분야 인물로는 초대 제헌 헌법 초안을 작성한 유 진오 박사 같은 사람밖에 못 들어 본 상태였다. 저분은 진짜로 문학과 법학에 모두 통달하여 공부의 신이요 문과 먹물 계열의 가히 천재 완전체였다.

그러니 처음 보는 인물에 대해서는 "국어학자도 아닌 사람이 한글 학회와는 무슨 상관?" 이런 의문이 들었으며, 그 당시에 또 시간대도 안 맞아서 그 행사에 가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저 분야에서 저렇게 언급된 인물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본인의 머릿속 기억 한 구석에 각인되었다.
그 뒤 나중에 차츰 알고 보니 애산 이 인이라는 분 역시 생각보다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었다. 호머 헐버트와 더불어 한글 학회를 계기로 알게 된 위인 중 한 분이다.

이분은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일제 강점기 때 피식민지 조선인으로서 변호사가 되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변호사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선생은 일제 강점기 동안 의열단, 안 창호 사건 등 여러 항일 운동에서 자진해서 독립 운동가들을 변호했으며, 그것도 국선이 아닌 민간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변호를 무료로 해 줬다. 일본의 국익을 대변하지 않는(?) 변호가 너무 잦고 일제 말기엔 창씨 개명조차 거부하니 조선 총독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으며 변호사 면허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처럼 말이다.

이런 민족 인권 변호사가 이 인 말고 전국적으로 몇 명 더 있긴 했지만(허 헌, 김 병로) 그래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수였다.
그리고 이 인 선생은 여느 변호사와는 달리 한글 학회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역시 문과 전문직답게 자기 나라 말과 글의 소중함을 알고서 조선어 사전 편찬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했으며, 1942년엔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되어서 구속되기까지 했다. 다만, 이분은 옥고를 치른 다른 국어학자들과는 달리 집행유예로 끝났다.

해방 후에 이분은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건국 초기부터 우리나라에서 관련 분야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았으며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한글 학회가 장소가 협소하고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1976년에는 지금의 붉은 벽돌 건물인 한글 회관을 짓는 기금 3천만 원을 쾌척했다. 40년 전 물가로 3천만 원... 이건 마침 비슷한 시기에 막 출시되었던 현대 자동차 포니를 10대가 넘게 살 수 있던 금액이었다(대당 약 230만 원).

그리고 이분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임종 전, 유언을 통해 자기 전재산을 한글 학회에 기증했다! 이 정도이니 한글 학회에서 두고두고 칭송할 수밖에 없겠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두루 우리나라에 끼친 업적이 워낙 출중하기 때문에 사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정확한 수훈 등급이 뭔지 문헌에 따라 국민장과 독립장이 서로 난립해 있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다.

한글 학회는 전신이던 조선어 학회 시절에 최초의 국어사전을 편찬했으며, 이것을 오늘날까지 굉장히 큰 자랑거리와 자부심, 긍지로 여긴다. 특히 조선어 학회 사건을 사건이 아니라 '수난'이라고 자체적으로 의미를 더욱 부여해서 부른다.
국립 국어원의 표준 국어 대사전이 국어사전계를 평정해 버린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 표준 국어 대사전조차도 이해타산 문제로 인해 종이책으로는 더 출간되지 않으니 참 아이러니다. (유니코드 전 영역 차트도 종이책 출간이 이미 진작부터 중단됐고..)

한글 회관의 건립과 관련해서는 그 당시 박 정희 대통령도 큰 기여를 했다.
노산 이 은상 선생이 박통을 직접 찾아가서 한글 회관 건립을 위한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이 "국방 성금은 1원도 안 낸 양반이 무슨 한글 회관 같은 데에 모금 요청을?" 식으로 씨크하게 반응했으나, 다음 날엔 1억 원이라는 돈을 금일봉 형태로 당시 영애이던 박 근혜 씨를 통해 전해 줬다고 한다. (한글 학회 김 종택 회장의 증언)
박통은 이것 말고도 한글 관련 단체 지원이나 어문 정책 쪽으로도 칭송 받을 행적을 여럿 남겼다. 광화문 현판조차도 한자가 아닌 한글로 친필을 남겼을 정도이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날 한글 학회는 학술적인 성향이 절반, 한글 문화 연대처럼 운동 및 계몽적인 성향도 절반 정도 덤으로 갖추고 있다. 애국 단체라고 국내외로 후원하는 분도 적지 않다. 그리고 저런 사연을 거쳐서 1970년대에 건립된 한글 회관 건물 덕분에 서울 도심 금싸라기 지대에 좋은 부동산도 보유하고 있고, 그걸로 임대업 하면서 직원 월급도 준다.
그러나 지은 지 40년 된 건물은 딱 봐도 주변 건물들에 비해 외관이 낡았으며, 온통 임대를 주느라 정작 학회 자체의 문헌과 자료를 쌓아 둘 공간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업무용 건물의 건축 트렌드인 유리궁전과는 달리, 혼자 떡 버티고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한눈에 봐도 완전 옛날스럽다. 부산에서 봤던 동아 대학교 석당 박물관, 부산 임시 수도 청사도 다 같은 붉은 벽돌이지 않던가?
인테리어로 가면 옛날에는 가구나 복도 바닥, 문 같은 것도 요즘처럼 금속, 플라스틱, 콘크리트가 아니라 목재가 훨씬 더 많이 쓰였다.
옛날에는 금연에 대한 경각심도 지금보다 훨씬 덜했으니 저런 건물은 안에 들어가면 담배 냄새가 쩔어 있기도 할 것 같다. 거기에다가 각종 간판이나 표지판 글꼴까지 어설픈 둥근고딕 내지 붓글씨 부류로 넣으면 완벽한 옛날 고증 완성이다.)

2. 애산과 반민특위, 영화 <암살>

그럼 이번에는 한글 학회 말고 법조인으로서 애산 선생이 관계가 있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보겠다.
이분은 명백히 변절 없는 항일 독립 운동 노선을 갔으며, 사후에 건국훈장이 무난하게 추서되었을 정도이다. 그런 한편으로 해방 후에는 반공 우파를 표방하면서 이 승만 정권을 지지했다. 이것도 내가 보기엔 정상적이고 건전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반민특위(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의 위원장까지 돼서는 이 위원회를 완전히 해체시켜 버린 것은 언뜻 보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이것 때문에 이 승만 정권은 친일 청산을 안 한 정권이라고 후대로 욕을 두고두고 쳐먹게 되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는 관련 장면이 영화 <암살>의 결말부에 묘사돼 있다.
염 석진은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증인을 비열하게 미리 죽여 버린 덕분에 증거 불충분 → 공소권 없음 → 불기소 처분으로 끝난다. 이 꼴을 보니 판사조차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는지, 원래 주려고 했던 벌은 못 주고 "단, 법정모독죄로 벌금 2만원에 처한다"와 함께 재판봉을 부서져라 내리치고는 나가 버린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 좌익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 원봉을 띄우고, 남조선은 친일 청산 못/안 한 나라라는 왜곡된 시각'만' 주입한다는 이른바 '좌편향'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 그 얘기를 더 논하지는 않겠다. 우리나라가 북괴나 구소련처럼 기록말살형이 존재하는 속좁고 옹졸한 나라는 아니며, 훗날 일제에게 변절했거나 월북한 사람이라도 흑화 전의 행적 중에 선한 게 있다면, 훈장은 안 줄지언정 팩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있으니 말이다.

사실, <암살>의 원래 대본에는 재판 중에 이런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최종적으로는 짤렸다.

- 검사: (와~ 재산 목록 보소~) 피고는 지금까지 도대체 독립운동을 하셨습니까 사업을 하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팔아서 번 겁니까 이거?
- 염 석진: (개빡침. 검사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다가 손찌검~) 이 친일파 아들놈의 새X가 지금 와세다 법대 나와서 꽃방석에 앉았다고 내 앞에서 떵떵거려? 니 애비도 우리 암살 리스트에 있었어 이 X꺄. 어딜 감히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내 인생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염 석진이 처음엔 독립운동을 하다가 종로 경찰서 지하 고문실에서 끔찍한 생명의 위협을 겪고서야 밀정으로 변절했듯, 심지어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 반민특위 재판을 진행하는 법조인들조차도 사실 친일파 가문의 금수저 출신이었다는 반전이 숨어 있다. 이 지경이라면 이놈의 나라는 참 꿈도 희망도 없다.;;

영화의 작품성을 위해서는 선악 구도가 일관된 게 더 보기가 좋으며 저 장면이 없는 게 더 낫다. 그러니 편집은 적절하게 한 거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저 장면이 있는 것이 1940년대 말의 완전 시궁창이던 현실의 선악 구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는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일제만 물러갔다고 해서 군· 경 간부가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니고, 판· 검· 변호사 같은 법조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라가 혼란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사회 질서를 유지시키는 사람들이 특별히 노련한 경력자 위주로 더욱 필요했다. 친일 경력 없다고 해서 일자무식한테 법률 자문과 재판 판결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단순 생산· 기술직이 아니라 저런 전문직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결국은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 많이 한 사람 차지가 되는데, 유복한 환경이 아무래도 항일보다는 친일 쪽 집안에 더 많이 조성돼 있었음은 자명하다. 이게 참 불편하다면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니 일본 경찰· 헌병 출신 조선인이 훗날 반공투사로 깃발 바꿔 단 것만큼이나, 일제 치하에서 법조인으로 편하게 살았던 사람이 역설적으로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변신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법조인 중에 저런 민족 인권 변호사만 있었던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애산 선생을 생각해 보자. 그는 영화에 나온 것처럼 친일파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독립 운동가 출신의 법조인이요, 한글 학회의 제일 든든한 후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반민특위 활동을 통한 친일 청산을 반대하는 소신이었을까?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legal mind 관점에서 봤을 때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해체시킨 게 아닐까 싶다.

당장 몇몇 악질 부역자들을 망신 주고 응징해서 감정적인 만족을 얻는 것보다 부작용이 더 커지고 있었다거나, 정확한 진상 규명과 재판이 현실적으로 도저히 곤란했다거나, 불순분자들이 반민특위 조사관을 사칭하면서(문화혁명 당시의 가짜 홍위병 같은!) 생사람 잡는 일이 늘었다거나...

그 당시 이 승만 대통령이나 애산 선생이 반민특위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겠는지는 본인이 기회가 되고 자료를 더 접하는 대로 공부를 더 해 볼 생각이다. 다만, 결과가 무엇으로 귀착되건 그 당시에 나라가 일제 부역자 전문직들을 불가피하게 재등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Windows 9x가 그 당시의 가정용 똥컴에서 돌아가고 도스 호환성을 보장하기 위해 16비트 코드를 불가피하게 재등용할 수밖에 없던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맥락의 한계이다. 우리나라의 친일파 청산을 제일 방해한 것은 사회 혼란과 체제 전복을 조장하던 북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게 절대적인 사실이다. 어떤 경우든 누가 선동하는 것처럼 친일 청산이라는 걸 악의적으로 일부러 안 한 건 아니다.

끝으로, 다시 영화 <암살> 얘기로 돌아오면,
원래 의도했던 것처럼 염 석진이 검사와 싸우는 장면이 들어가 있어야 "법정모독죄로 벌금 2만원형"이 논리적으로 개연성이 성립하겠다.
겨우 웃통 벗고 "내 몸엔 일본놈들의 총알이 6개나 박혀 있소!" 쇼 한 게 왜 지금 물가로 수백만 원 이상의 벌금을 내야 할 법정모독죄인지 본인은 지금까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역시 짤린 장면을 보니까 납득이 된다. 검사랑 현피 주먹다짐 정도는 해야 법정모독죄가 성립하지 않겠는가?

Posted by 사무엘

2017/05/19 08:34 2017/05/19 08:34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61

일본 생각

1. 첫인상

우리나라의 바다 건너 이웃에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예로부터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고 불리고 있다. 무작정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고, 존재감을 무시할 수도 없는 그런 복잡한 나라이다. 정치적으로 하도 민감한 주제이다 보니 "일본은 없다" "일본은 있다" 이런 책이 나온 것도 벌써 20년 가까이 전의 일이다. 본인이 블로그에서 이 나라 자체에 대해서 심층 취재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럼 비정치적인 얘기부터 가볍고 부담 없게 먼저 시작하겠다. 본인은 일본이라 하면 떠오르는 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무순)

  • 벚꽃이 만발한 오사카 성
  • 후지 산 아래로 달리는 신칸센
  • 지멘스 옥타브를 울리면서 달리는 게이큐 쾌특 전철
  • 앞발 들고 있는 복고양이
  • 게다짝, 기모노, 일본도, 정수리를 민 그 특이한 헤어스타일의 사무라이 (조선 선비들은 머리를 기르는 편이었는데 여기는 정반대)
  • 어두운 복장에 표창 던지는 닌자 (뭐, 후대에 만들어진 컨셉에 가까우며, 정작 옛날에 일본엔 저런 차림의 자객이 없었다고 하던데)
  • 스시, 일본 돈까스와 라멘, 심야식당
  • 학교 수영복 (저기에는 공립 학교에 수영장도 있으니)
  • 도라에몽, 슈퍼마리오, 짱구는 못 말려, 드래곤볼 캐릭터와 그와 비슷한 화풍의 일본 애니들
  •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킬 빌, 자토이치 같은 평범하거나 병맛· 개그스러운 영상물. 토스트 소녀-_- 게임
  • 파이널 판타지 같은 너무 심오하고 도무지 배경이고 스토리고 설정을 이해할 수 없는 안드로메다 영상물
  • 감각의 제국, 쇼군의 사디즘 같은 개막장 영상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참고로 난 일본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고, 일본어는 열차 안내방송 외운 것밖에 모른다. 글자만이라도 작정하고 읽는 법을 틈틈이 외워 놓고 싶지만, 잘 안 된다.

하긴, 작년에 브라질 올림픽 폐막식 때 그 유명한 2020 도쿄 올림픽 홍보 영상이 상영되었는데 그거 정말 강렬했다. 반도에서 병맛스러운 김치 전사 내지 허접한 평창 동계 올림픽 홍보 영상이나 만들던 동안, 재패니메이션의 원조인 저 동네에서는 제한된 시간 동안 자기 나라의 발전된 면모를 저렇게 쭉 소개하면서 아베 총리까지 슈퍼마리오로 변장시켜서 찬조 출연시켰다니.. 쟤네들의 저력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교통

일본은 근대화 산업화가 아시아에서 가장 앞섰으며 경제, 산업, 과학· 기술, 예능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고, 현대 사회의 각종 시행착오들도 먼저 겪은 선진국이다. 그 중 교통 분야만 살펴보더라도, 일본은 세계구급 자동차 제조사를 보유한 자동차 왕국인 동시에 신칸센 고속철까지 개발한 철도 왕국이다.

그런데 얘들은 자동차와 철도뿐만 아니라 '자전거 왕국'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이륜차는 보행자와 자동차 사이에 껴서 만년 콩나물 신세를 면치 못하는 중인 반면, 일본은 이륜차를 더 많이 볼 수 있으며 도로나 주차 시설이 자전거를 더욱 배려하는 형태로 갖춰져 있다.

이건 일면 수긍이 가는 얘기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소득 높고 잘 사는 국력· 경제력에 '비해서' 서민이 자동차 굴리기는 훨씬 더 힘들게 돼 있다. 고배기량에 덩치 큰 차는 더욱 제약이 심하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배려와 혜택을 받는 경차의 배기량이 1000cc 이하로 정해져 있지만 저기는 800도 아니고 겨우 660cc이다. 그것도 21세기에..;; 일본도 한국 만만찮게 산과 험지가 많은 동네인데 저건 세계 자동차들 평균 덩치를 생각해도 너무 가혹한 제약이 아닌가 싶다.

또한 저기는 불법주차 단속이 이곳 반도보다 넘사벽급으로 더 자비심이 없으며, 애초에 1960년대에 마이카 시대가 시작되던 시절부터 차고지 증명제가 딱 시행되어 잘 정착된 걸로 유명하다. 차고든 유료 공영 주차장이든 주차 공간이 법적으로 확보돼 있지 않으면 자가용 구입을 아예 못 한다.
마치 컴퓨터에서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돈 주고 사야 하며, 눈에 보이는 원자재뿐만 아니라 무형의 기술 지원과 서비스에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듯.. 차를 샀으면 굴리는 것뿐만 아니라 세워 놓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에도 주거비만큼이나 돈이 든다는 관념이 박힌 것이다.

우리나라야 지금처럼 건물과 주차장들이 완공돼 버린 와중에 차고지 증명제를 도입하기에는 대략 곤란한 지경이 됐다. 자동차의 판매 실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정책이니 자동차 회사 영업 사원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미국으로 치면 총기 규제 정책 vs 총기 제작사들의 로비와도 얼추 비슷한 구도처럼 됐다.
할 거면 1980년대에부터 했어야지. 옛날 석유 파동 때 외화 아끼려고 차량의 배기량과 엔진 기통수에다는 온갖 규제를 걸었으면서, 정작 차고지 확보 관련 규제는 시행을 왜 안 했나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전기는 1970년대부터 승압을 잘 끝낸 반면에 자동차 쪽으로는 정치인들이 상대적으로 선견지명 안목이 없었던 셈이다. 반대로 일본은 철도 궤간과 전기 규격은 낭패 봤지만 자동차 주차 문화는 잘 정착시킨 경우에 속한다.

아무튼 일본은 경제력 대비 한국이나 미국보다 차 굴리기가 더 비싸고 빡센 나라이다.
그럼 자가용 말고 대중교통은? 대도시엔 물론 잘 구축돼 있고 속도 빠르고 정시성도 높다.

일본은 철도 왕국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지하철 역마다 온통 스크린도어들이 갖춰져 있지는 않다. 허나, 누군가가 선로에 투신 자살이라도 하면 고인이 불특정 다수에게 심한 민폐를 끼쳤다고 국가에서 유족에게 도리어 벌금을 매긴다. "자살을 하게 만든 사회 탓 국가 탓? 힐링힐링?" 그런 거 없다.
과거에 중국에서는 총살형을 집행하고 나서 총알값을 사형수 유족에게서 받아 챙기기까지 했는데, 마치 그와 비슷한 급으로 잔인하다면 잔인한 조치 같기도 하다.

허나 일본은 국민성이 민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향이며, 거기는 철도 업계가 분초 단위로 열차 정시성에 목숨을 걸고 기관사까지 죽도록 갈구고 압박하는 곳이다. 평범한 전철도 몇 분 지연되면 역 직원들이 지연 증명서를 알아서 뿌리면서 승객들에게 너무 죄송하다고 굽신거린다. 그런 와중에 누가 자살해서 열차가 줄줄이 지연을 먹었다면 이거 얼마나 큰 민폐이고 피해인지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05년 4월에 JR서일본 관할의 후쿠치야마 선에서 전철이 과속 탈선 사고가 나서 기관사 포함 107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는데, JR서일본에서는 그로부터 무려 1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홈페이지 첫 화면에 그 날 사고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해 놓고 있다. 그걸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다시는 그런 사고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런 게 정상적인 추모이고 이성적인 재발 방지 다짐이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세월호 노란 리본 타령은 가해자 당사자의 사죄도 아니고 시스템적인 안전 개선과도 상관 없이 그저 감성팔이 반정부 광기 폭동일 뿐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일본의 대중교통은 서비스 좋고 시간 관념도 투철하고 다 좋은데.. 비싸다.
우리나라 식 운임과 임률을 생각했다가는 놀라서 턱 빠질 거다. 정말 왕창 비싸며, 사철 간에 통합 환승 할인 같은 것도 없다. 하물며 장거리 간선인 신칸센 운임은 국내선 비행기보다도 더 비쌀 정도이다.

그러니 일본이 비록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나라는 아니겠지만 미국 같은 나라도 아니니, 가까운 거리는 그냥 걷거나 자전거 타는 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북한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일본도 자전거는 등록하고 번호를 받아야 될 정도라고 한다. 굉장히 뜻밖이다. 물론 북한처럼 주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질서 유지가 필요할 정도로 자전거가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저기서는 학생들, 특히 여자애들도 등하교나 알바 하러 출퇴근 할 때 자전거 많이 타는 거 같다.
어쩐지 일본의 사건사고 같은 이야기들을 봐도 가해자나 피해자들이 그 당시나 직전에 자전거 탔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극단적인 예로는 콘크리트 살인 사건(1989)에서도 그렇다.
또한 철권 시리즈에 나오는 '카자마 아스카'자전거 끌고 다니는 여고생 컨셉이다.
이제야 그 바닥 문화가 좀 이해가 되고 퍼즐 조각이 짜맞춰지는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권위주의

그럼 이제 민감한 주제들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조금씩 논해 보겠다.
일본에는 덴노라는 국가 상징 겸 정치· 종교 복합체 중심 구심점이 있으며, 여기 한국보다 뭔가 전체주의스러운 분위기가 더 강하다. 일제의 패망 후에야 덴노가 인간 선언을 하고 젊은 세대들이 많이 자유분방 개인주의스러워졌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일본의 다른 분야는 몰라도 정치계나 법조계는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보다 권위주의가 훨씬 더 심하고 경직돼 있다. 실수나 잘못· 착오가 생겨도, 누굴 억울하게 누명 씌워서 몇십 년 옥살이 시키고 나서도 그걸 시인해서 직접적인 표현으로 사죄 따위는 거의 안 하다시피한다.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면 자기 권위와 위신이 깎인다고 생각한다. '엔자이'(원죄) 사건이라고 검색해 보면 이런 예가 여럿 나온다.

사고방식이 원래부터 저렇고 '자국민'한테조차 저러는데, 하물며 쟤들이 자기보다 (엄밀히 말해) 국력이 딸리는 외국을 상대로 위안부 피해 문제 같은 거는 절대로 대놓고 사죄할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만치 간접적으로나마 유감 표현했고 돈 이만치 줬고, 이 주제 얘기 더 안 꺼내기로 지도자들끼리 서로 퉁쳤으면 나름 "걔네 입장"에서는 많이 양보하고 챙겨 준 것에 가깝다. -_-;;

뭐, 일본이 저 따구로 나오는 건 이스라엘 앞에서 가히 '도게자' 급으로 굽신굽신 사죄하는 독일과는 참 비교되는 모습이며 본인이라고 해서 보기 좋을 리 없다. 그럼 쟤네들은 원래 저런 놈들인가 보다 하고 우리로서는 과학 기술과 경제와 힘으로 극일을 이루는 것밖에 현실적인 답이 없다. 그 신사적인 독일조차도 이스라엘 급의 국력과 국제 위상이 있는 나라 앞에서나 굽신굽신이지, 다른 듣보잡 소수 민족이 나치에게 피해를 입은 건 상대적으로 모르쇠인 걸로 비판받는 건 변함없다.

이런 넓은 맥락에서의 이해 없이 그저 소녀상에다 반일 반일거리고, 일본하고는 뭘 하고 오든지간에 무조건 굴욕 매국 협상이라고 헛소리 하는 애들.. 정말 지겹다. 백 날 그렇게 설쳐 봐라, 일본의 태도가 바뀌는 게 있겠나?
그리고 또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북괴와 중국한테 그만치 부당하게 당해 온 걸 반의 반만치라도 따지고서 일본에 집착하는 거라면 또 내가 말도 안 한다. 북괴 김 정은이 6· 25 전쟁이나 연평도 포격에 대해서 남조선을 향해 사죄를 할 것 같아 보이냐? 그와 똑같은 맥락이다.

4. 그나마 중국· 북한보다는 더 가까이해야 할 대상

동북아시아 한중일 CJK 국가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로서는 일본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사의 앙금 트라우마 때문에, 중국은 지금 당장 국가 프레임과 이념 차이 때문에 현실에서는 서로 마냥 손잡고 친하게 뭉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게 사실이다.

북괴? 걔들은 국가 프레임· 이념 차이를 넘어서 그냥 묻지 마 남조선을 체제 전복+적화시키려고 눈에 시뻘겋게 불 켠 쌩 양아치에 광신도+노예 집단일 뿐이고. 통상적인 경제력 군사력으로는 그걸 이룰 수 없으니 역사왜곡, 간첩질, 사이버전 선동질 등 방법도 갈수록 교묘하고 추잡해지고 있다.

통일 후에도 김돼지 동상이랑 주체사상 같이 껴안고 살 게 아니라면, 화해네 경제 협력이네 하는 개수작에 절대 응하지 말고 그냥 왕따 고립만이 답이고 진리이다. 굳이 먼저 북폭 하고 쳐들어갈 필요도 없으니, 굶겨 죽이기만 하면 된다.
일부 미사일 발사체 기술이나 소프트웨어 기술이 우리보다 앞서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예외를 빼면 배울 것 선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동북아 이웃 나라들 중에 남조선이 제일 가깝고 친하게 지내야 하는 상대는..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일본이다.
그리고 제일 본받고 배워야 할 상대를 꼽자면 그건 친하게 지낼 대상보다도 더욱 단호하게 일본이다.

물론 구 일본군의 흉악한 전쟁 범죄라든가 그 스타일의 병신 같은 조직 문화와 똥군기 따위를 본받자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걔네들은 그런 지랄맞은 시스템 하에서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척결해야 할 소위 '일제 잔재'라는 것들의 본거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내 관심 분야도 보태자면 한자 같은 불편한 문자를 쓰고도 어쨌든 근대화를 이루고 과학 기술 강국 선진국이 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렇게도 컴플랙스를 갖고 있는 과학 분야 노벨 상도 도대체 몇 개를 탔냐 말이다.

일본이 겉으로는 화해 유감 사죄 운운하면서 한편으로는 윗선에서는 모르는 척 망언 씨부리고 독도는 일본땅이다 교육을 해?
괘씸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래 봤자 군사적으로 같은 친미 동맹이고 동일한 자유 진영 이념 프레임을 공유하는 국가끼리 대놓고 군사 충돌이 일어날 확률은 중국· 북한보다야 훨씬 낮다.

저 정도 앙금과 마찰이 있으면 우리도 겉으로는 웃으면서 얻어낼 거 얻어내면서 한편으로는 "일부" 극렬 민간단체를 모르는 척 묵인하면서 소녀상 한두 개쯤 놓고 시위든 하면서 맞불 놓으면 된다.
딱 그 정도까지만. 그건 나도 전략상 인정한다. 뭐 아무 티 안 내고 묵묵히 실력만으로.. 현대차· 삼성 전자가 일본 기업들 쳐발랐던 것 같은 방식으로 일본 이기는 게 제일 좋고 이상적이겠지만, 그럴 수만은 없고 현실에서는 감정상의 카타르시스도 약간은 필요하지.

필요 이상으로 반일 반일 거리는 애들이 진짜로 애국심? 민족 정기? 그런 순진한 이유로 일본 비판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매우 드물다. 오로지 자국 비하와 북괴의 범죄 물타기라는 매우 불순한 목적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런 비굴한 사고방식으로 일제의 식민사관 내지 조센징 엽전 비하는 어째 비판하고, 무장 항일 독립투사는 어째 칭송할 수 있는지 내 판단력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전국 방방곡곡에 무슨 몇백 개씩 소녀상 세우자고 유세를 떨거나, 특히 아직까지도 우리나라가 친일 청산을 못 했네 웃기는 소리 하는 애들은 우리나라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된다. 누구 때문에 왜 친일 부역자 군경을 활용해야 했는지만이라도 정확하게 가르치면 아무 문제될 거 없고 거짓을 팩트로 격퇴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5~20년 전부터 본인을 봐 온 분들은 잘 알 거다. 난 예나 지금이나 주된 연구 개발 분야가 한글 입력이고, 전통적으로 얼마나 열혈 반일 민족주의자였는지를 말이다.
그랬는데 내가 이렇게 돌아섰을 정도면, 저쪽에 있는 애들이 정말 일관성 없고 주적 구분을 못 하고 필요악과 절대악을 분간 못 하는 거다. 나이가 들수록 "어 저건 아닌데..;; 왜 중국 북한에다가는 단 한 마디도 말이 없지?" 하는 거부감이 들면서 갈라서게 됐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구든 일본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13 08:34 2017/05/13 08:34
, , , , ,
Response
No Trackback , 7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59

강화도 여행

지난 설날 때 본인은 가족과 함께 당일치기로 강화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강화도는 민족 영산(?)이라는 마니산이 있고, 고려 시대에 나라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을 때 임시 수도였으며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장소이기도 해서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그러고 보니 팔만대장경도 지금이야 경남 합천군의 해인사에 있지만, 만들어진 곳은 강화도이다. 고려는 그야말로 "불심으로 대동단결"을 실천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방대한 무게와 부피를 자랑하는 수많은 경전들을 그 시절의 교통 인프라 여건에서 섬-내륙으로 바다까지 건너면서 수송하는 것조차도 굉장히 큰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과거에 신라에 유일하게 여왕이 있었고 여러 가문이 차례로 번갈아가며 왕위를 잇는 관행이 있었다면, 고려에는 저런 종교 배경의 특성상 말기에 신 돈 같은 비선실세(?) 승려도 존재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의 이념은 '숭유억불'이었다. 조선의 개국공신들이 보기엔 고려가 망한 것에는 타락하고 막장으로 치달은 정교일치 불교계의 책임이 커 보였던 것 같다.
뭐, 지금에 와서는 조선도 이미지가 바닥을 기며, 유교 역시 진작부터 꼰대(질)의 상징에  '유교탈레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같은 말이 나돌 정도로 평가가 최악이다. 뭐든지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걸 느낀다.

아무튼,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차를 몰고 서쪽으로 향했다.
서울 근교에서 자연을 벗하며 놀 만한 곳으로는 동쪽으로 남한강이 있는 양평, 혹은 북한강이 있는 가평· 춘천 방면도 생각할 수 있을 텐데 거기보다 더 색다른 곳을 찾다 보니 강화도로 의견이 쉽게 한데 모였다.

강화도는 면적이 300㎢가 넘고 생각보다 크더라. 시내와 대부분의 볼거리는 북부에 있는 반면, 마니산만 혼자 최남단에 있는 듯했다. 북부에는 강화대교, 남부에는 초지대교가 있어서 육지와 통한다. 서울에서 강화도 남부를 가는 건 인천 공항 가는 것과 비슷한 거리이고, 북부는 그것보다 거리가 살짝 더 길어지는 듯하다.
강화도로 가는 길은 올림픽대로 + 국도 48호선(북부) 또는 지방도 356호선(남부) 끝이다. 아주 직관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화산성. 강화도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유적이지 싶다. 안내문 표지판 말고 다른 시설은 없이 그냥 도심 속의 공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주차 걱정 없는 시골이니 그냥 골목길 담벼락 아무데나 차 세우고 내려서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고려 행궁도 지도상으로 근처에 있는데 거기에는 못 가 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주도에 돌하르방이 있다면 강화도에는 고인돌이 있다. 그나마 돌하르방은 훗날 유명세를 타서 레플리카가 만들어진 게 훨씬 더 많은 반면, 여기에 있는 고인돌은 옛날에 만들어진 레알이다.
접근하기도 편하게 딱 국도변에 넓은 들판과 함께 강화도 전체에서 가장 고퀄이라 여겨지는 고인돌이 놓여 있었다. 영국의 스톤헨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인돌들은 딱히 식별 수단이 없으니 그냥 발견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서 부르는가 보다.

여기 주변에는 마침 강화 역사 박물관과 강화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두 박물관도 있었다. 하지만 설 당일이 휴관이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그나저나 '고인돌'은 안 그래도 영어로도 dolmen이라고 하는데 故人인지 '고이다+전성어미ㄴ'인지 어원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근리에 있는 고인돌을 하나 더 답사했다. 처음에 봤던 것보다는 크기가 약간 더 작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화도의 풍경은 사방이 온통 논밭 벌판이고, 그러면서 높이가 300m쯤 돼 보이는 낮은 산들이 종종 둘러져 있는.. 그런 형태였다. 산들은 정상에도 뭔가 정자나 군사 시설 같은 게 빠짐없이 세워져 있는 편이었고, 그게 지상에서도 보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뒤 우리는 강화도의 최북단에 있는 평화 전망대로 갔다. 여기는 민통선 안이기 때문에 중간에 검문을 받고 출입증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연고지나 지인 초청이 없어도 되며, 사전 방문 신청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다. 모든 차량 동승자가 아니라 그냥 대표자 한 명의 이름과 연락처, 차 번호만 적으면 됐다. 내 경험상 국내 민통선 안의 출입 정책은 각 지역과 관할 부대마다 케바케였다.

우리나라 군사분계선은 대부분 높은 산지이며, 선 주변에는 DMZ라고 불리는 완충 지대가 있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의 서쪽 끝은 그 특성이 내륙· 동부와는 극과 극 수준으로 다르다. 여기는 육지가 아니라 물이 그대로 군사분계선이고 양측 강변이 남방과 북방한계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는 DMZ 같은 건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대신 동부와는 달리 강안경계라는 게 있다. 한강이 서울 시내 구간만 해도 강폭이 1km 남짓한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육박하고 강북과 강남을 가르는데.. 강화도가 있는 한강 최하류로 가면 강폭은 2km에 달하며, 강남과 강북이 무려 남조선과 북조선을 가른다..! 군사분계선이 육지에서 강으로 바뀌는 경계를 보고 싶으면 강화도에 도달하기 전에 파주의 오두산 전망대에 가 보면 된다.

6· 25 때 우리나라가 지형상의 불리함으로 인해 서부는 오히려 있던 땅도 빼앗겨서 38선 이남,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게 됐다. 이 때문에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졌으며, 군사분계선이 저런 식으로 한강을 따라 형성되었다. 다대포 해수욕장까지 있는 낙동강 하구와는 달리, 한강 하구는 민간인이 접근 불가능한 영역으로 봉인되어 버렸다. 여기를 뱃길로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아라뱃길이라는 경인 운하를 나중에 또 만들어야 하게 됐다.

황해에는 강과 바다에 형성된 군사분계선 근처에 섬이 여럿 있다. 게다가 연평도나 백령도 같은 섬은 위도가 상당히 높고 북한의 본토와 더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남한 땅이다. 이건 북괴가 전쟁 당시에는 섬들을 점령할 해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종전 후에도 남한 땅이 될 수 있었다. 휴전 직전엔 오히려 국군과 UN군이 북한 지역 위도의 다른 섬들까지도 몽땅 점령해 있었지만 휴전과 함께 철수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인해 강화도를 포함한 그 일대의 섬들은 비록 다리가 놓였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육군 전방 부대가 아니라 상륙 작전을 염두에 둔 해병대가 주둔한다. 민통선 검문도 응당 얘네들 몫이다. 그리고 군용차도 일반적인 전차(탱크)보다는 수륙 양용 장갑차 같은 게 더 친숙하다.
아니, 우리나라 해병대 전체가 그냥 서부 전선의 전방 도서 지역을 지키라고 존재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병대는 훈련소와 자대, 본부도 후방인 포항이 아니면 전방인 황해 이렇게 딱 두 지역에만 있다.

옛날에 태평양 전쟁 시절처럼 섬을 땅따먹기 하면서 물과 육지에서 모두 작전을 수행하는 게 쉬울 리 없으니 해병대는 일반 육군 보병보다 전투력이 더 뛰어난 정예 병력으로 간주된다. 100% 지원자만 그것도 경쟁을 뚫고 들어갈 정도이며, 훈련 때 목봉 체조 같은 것도 육군이나 해군이 아닌 해병대만 한다. 다만, 그게 전투력과는 별 관계 없는 지나친 이빨과 마초이즘 기수놀이, 똥군기로 변질된 건 문제이긴 하다.

해병대 아니랄까봐 "빨간 배경에 노란 글씨"로 민통선 내 행동 주의 사항이 적힌 안내판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전망대 내부의 통제는 해병대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리 빡세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것이 바로 강 건너 펼쳐져 있는 북한 땅이다. 황해도 개풍군. 내륙처럼 남북의 DMZ 산림 없이 강 너머로 곧장 북한의 마을과 논밭, 건물, 심지어 사람까지 곧장 보이기 때문에 전국의 어느 전망대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북한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그것도 위도상 최남단의 북한 땅을 말이다. 이게 강화도에 소재한 전망대에서 얻을 수 있는 소득이었다. 그런데 저기는 북한의 입장에서 민통선 내부이지 않을까?

철원의 평화 전망대나 고성의 통일 전망대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안 보였고, 파주의 도라 전망대에서도 기껏해야 군인 극소수만을 봤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당장 빨간 점퍼를 입은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주택 담벼락을 서성거리는 두세 명의 사람 등 역대 전망대들 중 북한 민간인(군인이 아닌)을 제일 다양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같이 "북한 방면 사진 촬영 금지" 이런 통제도 없었다.

아, 물론 사람까지 보는 건 육안으로는 불가능하고 유료 망원경을 동원해서 봐야 한다. 이런 곳에서는 500원 투자할 가치가 있다.
저 멀리 세로로 선전 구호가 쓰인 걸로 추정되는 기둥도 있었는데 글자가 무엇인지는 아쉽지만 망원경으로도 제대로 식별할 수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봉우리의 이름이 제적봉이랜다. '적'의 한자가 enemy(敵)가 아니라 red(赤)이다. 즉, "공산당 빨갱이들을 제압하다"라는 뜻이다.
이름의 유래 설명에 따르면, '제적봉'이라는 이름은 박 정희 대통령의 개입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예전에 이 승만 대통령은 호수의 이름을 반공 컨셉을 넣어서 '파로호'(오랑캐들을 격파하다)라고 지은 적이 있는데, 이것과 무척 비슷한 심상을 형성한다. 조선 시대 얘기지만 '척화비'도 동일한 맥락일 수 있겠다.

이렇게 평화 전망대를 구경한 후, 우리는 교동도를 찾아갔다. 민통선 검문소는 교동대교보다 한참 앞에 있었다. 전망대에 갈 때와 비슷하게 간단한 출입 신청서만 작성하면 출입 허가는 곧장 나오며, 한번 출입증을 받으면 내 기억으로 2~3일 정도 교동도에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여느 민통선 구역처럼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통금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자정~새벽 4시 정도에만 출입을 자제하면 된다.

교동도는 2014년이 돼서야 다리가 놓였으며, 아무래도 주민 출입이 뜸하니 대교 주제에 도로폭은 겨우 2차선이었다(편도 1차선).
그리고 섬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농촌 마을일 뿐 어촌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 게 인상적이었다. 해수욕장? 횟집? 그런 거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보안 때문에 바다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 괜히 민통선 마을이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가 갔을 때는 교동도에 있는 커다란 '고구 저수지'가 온통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하늘의 색과 바닥의 색이 거의 동일한 게 무슨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보는 듯했다. 썰매를 타고 놀고 싶었다.

교동도를 한 바퀴 도니 날이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강화도까지 왔는데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니산을 어귀는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남쪽으로 향했다.
정상의 참성단까지 가는 길은 서울 남산처럼 흙길 등산로와 계단 등산로가 모두 닦여 있는 듯했다. 등산은 차마 못 하고 돌아왔지만 여기도 마치 제주도 한라산이나 성산 일출봉을 보는 것 같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아이고 이거 무슨 예비 의료인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도 하는 것 같다. 등산을 이렇게 거창하게 윤색해 놓은 시는 난생 처음 본다. =_=;;

나중에 강화도를 다시 찾아오는 건 결혼하고 애까지 동반한 뒤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짧은 시간 동안 강화도에서 의미 있는 여행을 했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4/22 08:33 2017/04/22 08:33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52

1. 창군

지금으로부터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과거인 1940년대 말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되었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대, 즉 국군이 창설되었다. 마치 성경의 천지창조에서 궁창 상하의 물이 나뉘듯이 국방 경비대인 육군에서 해군과 공군이 차례로 분리되어 나갔다(1946~49).

조선(또는 대한 제국)이 망해 가던 1907년엔 있던 정규군도 해산되고 군인들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무장 해제를 당했는데..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40년 뒤엔 단군의 후손들도 정규군을 가진 독립 국가로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웃의 일본은 전범+패전의 대가로 명목상으로는 아예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가 됐으니, 그것과 비교해도 행로가 완전 극과 극이 됐다.

정상적이라면 대한민국 국군은 남동쪽의 바다 건너 일본을 견제하고 강 건너 중국과 소련을 마주 보면서 나라 지키는 일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괴뢰로 시작한 북괴의 존재는 안 그래도 좁은 국토를 반으로 분단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숨 돌리고 천천히 자연스럽게 발전할 틈도 주지 않았다. 상황을 너무 긴박하고 급격하게 바꿔 놓았다.

2. 즉결처분

6· 25 전쟁 시작 당시에 국군이 얼마나 허둥대고 당황했으며 싸움다운 싸움도 못 하고 전선이 붕괴했으면, 즉결처분이라는 극약 중의 극약 개막장 처방이 1년 남짓 시행되었을 정도였다. 적진에서 상관의 명령 없이 무단으로 후퇴하고 뒤로 내빼는 부하는 일벌백계 사기 진작 차원에서 상관 재량으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현장에서 바로 쏴 죽여 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옛날 전열보병 전투 시절처럼 "적의 총탄에 장렬히 산화할 확률 90% vs 아군 지휘관에게 맞아 뒈질 확률 100%"를 만든 거다.

하지만 실제로는 읍참마속은 개뿔.. 장군님 훈시 하는 중에 졸거나 몸 움직였다고, 혹은 상관이 탄 차량 주변에서 얼쩡댄다고 부하를 쏴 죽이는 미친놈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병뿐만 아니라 초급 장교까지 상관의 기분대로 괘씸죄로 즉결처분 당했다.
이거 뭐 계급 없는 군대 내지, 린치가 허용되는 사회만큼이나 군대 꼬라지가 개판오분전이 따로 없었다.
즉결처분은 1950년 7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1년 남짓 시행되다가 결국 폐지되었다. 이런 야만적인 제도가 부활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3. 여군 병사

"여러분들은 해병 몇 기라고요?" / "1077기입니다." / "난 해병대 4기예요." / (ㅎㄷㄷㄷㄷㄷㄷ)
예전에 2010년 무렵이던가, 요런 TV 화면 캡처 짤방이 나도는 걸 보신 분이 있을 것이다.
해병대는 안 그래도 자기들끼리 선후배 기수놀이에 완전 목숨을 거는 집단인데, 그 당시에 저 말을 들은 현역병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지 싶다. (내 밑으로 전부 대가리 박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말 사기적인(!) 기수를 인증하신 저 어르신은 제주도에서 살다가 6· 25 전쟁 때 파릇파릇한 17세의 나이로 학도병 명목으로 참전했던 분이다. 그 당시 제주도는 4· 3 사태 같은 비극도 있고 해서 "난 빨갱이가 아니요" 누명 벗기 차원에서 해병대 같은 데에 자진입대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 때 일본계 미국인들이 애국심을 입증하기 위해 미군에 특별히 자진입대 많이 했듯이 말이다. (진주만 폭격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쪽발이'에 대한 인식이 최악 막장으로 치달았었기 때문)

그런데 문제는 저분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라는 점이다. 난 지금까지 이 점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라고 해서 부사관급 이상의 간부로 입대한 게 아니고, 군 병원이나 군수공장에서 일한 것도 아니다. 미인계 차원에서 특별히 양성되어 몰래 침투된 스파이냐 하면 그것도 전혀 아니다. 여느 남자 학도병들과 마찬가지로 기초 군사훈련만 받고 나서는.. 정확한 병과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단의 병 신분으로 투입되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는 총질까지 하는 여자 전투병이 모병 형태로나마 1970년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여군 훈련병만 입소하는 전용 훈련소도 있었다니, 여성 삼청교육대만큼이나 놀랍기 그지없다. 이스라엘군만 그랬던 게 아니구나!
단지, 전쟁이 끝나면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몰렸던 시기도 끝나자 거기엔 아무도 안 가서 관련 규정은 유명무실한 사문으로 전락했다.

솔직히 여자가 병으로 입대하는 건 국가가 아닌 개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봐도 아무 메리트가 없었다. 우리나라가 왕창 못살던 시절엔 당장 남자 장교들도 봉급이 쥐꼬리 수준이었다고 한다. 고학력자 고급 인력이 워낙 부족했던 관계로 진급 적체야 지금보다 덜했을지 모르지만, 그게 딱히 고소득과 우월한 복리후생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으니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하물며..;; 강제 징집 대상도 아닌 여자사람이 최말단의 병으로 가서 고생해 봐야 돈을 많이 모으겠나, 경력 커리어를 쌓겠나 도대체 뭐..?? 시골 깡촌에서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고 식구가 10명이 넘게 있어서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되는데, 배운 것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군대에 가면 최소한 공짜로 먹고 자면서 시간을 벌 수 있다.. 이 정도 막장 상황이 아니고서야 여자사람이 병으로 입대해야 할 이유와 동기는 하등 없었다.
결국 1974년 1월 1일부터 군인사법의 개정으로 인해 여군은 간부만 모집하게 바뀌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4. 6· 25의 여파로 남조선이 바뀐 것들

  • 개전 초기에 삽질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정말 강하게 남았다. 우리나라 수뇌부는 북괴의 추가적인 전쟁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군대의 덩치를 쪽수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나라는 상시(평시에도) 징병제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국과 창군 직후 처음부터 이랬던 게 아니다.
  • 신 성모 같은 민간 출신 X맨이 너무 병신짓을 하면서 안 좋은 선례를 남기는 바람에 우리나라에 국방부 장관에 문민통제 같은 건 정서상 물 건너 갔다. 참모총장이 전역식 하고 나서 1시간 뒤에 곧장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이니 이건 사실상 무늬만 민간인일 뿐이다.
  • 장교(육군 기준)는 누구든지 반드시 야전 통솔 능력이 있어야겠다는 교훈을 받아, 출신과 병과를 불문하고 임관 직후에 소대장은 거의 무조건 일정 기간 하게 됐다.

5. 1. 21의 여파로 바뀐 것들

6· 25 이후로 이것에 준하거나 심지어 이를 능가할 정도로 남조선에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은 바로 1968년의 1· 21 사태임. 순진한 건지 거 참 "내레 박 정희 목(혹은 멱?) 따러 왔수다"라는 인터뷰 내용은 그야말로 광역 어그로를 끌었다.

  • 5분 대기조, 향토예비군
  • 군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주민등록번호 도입
  • 우리도 무작정 주석궁 침투와 김 일성 암살을 목표로 북파공작원을 양성함. (훗날 실미도 사건)
  • 군 복무 기간이 2년 반에서 단축될 예정이었는데 그 계획 완전 나가리 남. 병은 육해공 공통 3년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역대 최장 기간으로 늘었으며, 그게 무려 1984년까지 이어졌다. 울 아버지 세대가 이때 왕창 피 봤다.
  • 교련 왕창 강화. 학교까지 반쯤 "때려잡자 공산당" 병영화
  • 북악· 북한산 일대의 주요 등산로와 도로는 완전 통제 봉인 (21세기가 돼서야 해금)

물론 이런 살벌한 반공 분위기는 아무 근거 없이 조성된 건 아니었다. 1969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울진· 삼척 무장공비에, YS-11기 납북 등 북괴의 대남 도발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엔 땅굴도 발견됐고. 그러니 경각심이 최고조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6. 박 정희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 우리나라가 옛날에는 직업 군인이라고 해서 딱히 풍족하게 산 게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그 당시 박 정희도 생계를 위해 무려 중령 계급으로도 몰래 투잡을 뛰어야 했을 정도이며, 장인인 육 영수의 부친은 영예로운 군인은 개뿔, 돈 못 버는 무능한 사위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신부 쪽 집안이 당대로서는 꽤 잘사는 집안이었음)

박 정희의 장인은 1960년대 중반, 임종을 얼마 안 남기고서야 자기가 큰 인물을 지금까지 못 알아봤다고 사위에게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때는 이미 사위가 혁명인지 쿠데타인지 어쨌든 나라를 통째로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된 뒤였으니...;;;; 박 정희는 일제 강점기 때 교사 하던 시절에 자기를 무시하던 일본인들에게도 나중에 '긴 칼 차고' 돌아와서 설욕하기도 했다. 정말 출세욕 야망이 있고, 뭔가 남에게서 무시당한 걸 되갚는 걸 잘한 듯하다.

육 영수 여사는 이름부터가 좀 남자 같고(=_=;) 키도 굉장히 커서 남편보다 더 컸다. 결혼식 때 주례가 "신랑 육 영수 군과 신부 박 정희 양"이라고 충~분히 실수할 만했으며, 게다가 저건 실화다.
기가 왕창 셌을 것 같고 부부싸움을 하면 진짜 '육박전'이 벌어졌을 법도 해 보이지만, 이분은 남편 내조를 잘 했고 인품이 매우 훌륭했다. 역대 대통령의 영부인들 중에서는 제일 많은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다. 다른 영부인도 아니고 하필 이런 분이 테러리스트의 흉탄에 맞아 비명에 간 것은 대통령 개인에게나 국가적으로나 큰 불행이었다.

7. 야전군 편제 개편

군대 조직의 단위라는 건 분대부터 시작해서 소대, 중대, 대대, 연대로 쭉 올라가서 나중에는 사단, 군단, 야전군, 집단군으로까지 마치 셸 정렬의 묶음 단위처럼 규모가 커진다.
우리나라는 한동안 육군의 야전군 편제가 전방(제1)과 후방(제2)이라는 둘로만 나눠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73년에는 전방이 서부 경기도 전선과 동부 강원도 전선으로 나뉘어서 그 중 서부 전선을 담당하는 제3야전군 사령부가 창설되었다. 포스타 대장이 맡는 보직이 하나 더 생겼다.

그로부터 거의 30년 뒤인 2007년엔 후방을 담당하는 제2야전군 사령부가 경영 효율 명목으로 '제2작전 사령부'로 격이 미묘하게 낮아졌다. 마치 화투에서 삼광이 비삼광으로 바뀐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앞으로 10여 년 뒤 근미래 계획으로는 제1야전군과 제3야전군이 '지상작전사령부'라는 이름으로 다시 통합될 예정이라 한다. 역사는 돌고 도는지 1973년 이전 체제로 다시 회귀하는 듯.

뭐, 저출산과 전문화 기계화 때문에 군의 규모 자체는 앞으로 계속 작아질 수밖에 없긴 하다. 무인운전과 기계화 전자화 때문에 철도나 항공 쪽도 기관사 조종사 채용이 계속 줄듯이 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6· 25 트라우마 때문에 애시당초 몸집만 의도적으로 너무 부풀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징병제를 시행하니 옛날에는 징집 대상 인원이 군 TO를 능가하기도 했을 정도였기 때문에 병역 면제 조건도 지금보다 훨씬 더 널널했으며, 잉여 인원을 처리하기 위해 방위병 같은 것(오늘날 공익, 사회 복부 요원의 전신)도 있었다.

그나저나 사관학교도 3군 통합하고 임관식도 3군 연합으로 하겠다는 말은 한 10여 년 전부터 나돌았는데 그건 각 군 분위기 텃새 때문에 실현될 기미가 안 보인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3군의 상호 관계가 과거 일본군 육군 해군 급의 개막장인 것 역시 물론 아니니..

8. 계급 체계

국군 창군 당시에는 계급 체계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앞에서 6· 25 전쟁 얘기를 했는데, 그 시절에는 짬밥이 주먹밥으로 나왔었고 계급 체계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 병과 부사관의 계급 구분이 지금만치 분명하지 않았으며 병 신분의 계급은 사실상 두 종류밖에 없었다(하사, 이등중사?).

그러다가 상병· 병장 계급은 1962년에야 추가로 생겼다. 그러니 나중에 노 무현 대통령이 당시 월남전 때문에 진급 TO가 부족해서 병장이 아닌 상병 제대를 했네 하는 이야기의 배경이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이 군 복무 3년씩 하던 시절도 아닌데, 개인적으로는 병의 계급 수가 복무 기간 대비 너무 많다고 느껴진다. 병장 빼고 3계급 정도로만 바꿔도 되지 않을까?
그 반면, 부사관은 복무 기간 대비 계급 수가 부족한 감이 있다. 대부분이 중사이고 상사 약간이다. 하사는 너무 금방 끝나고 원사와 준위는 여전히 너무 적다. 현사인지 영사인지 추진하려다 파토 난 거 알고는 있지만, 거기야말로 계급이 하나 좀 더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9. 군인의 간지, 군인에 대한 예우

군인이라면 굳이 사관 생도가 아니라 최말단의 이등병 쫄병이라 해도 최소한의 '가오'와 체통· 위신이 요구되는 게 있다.
일례로, 군인은 상급자에게라도 넙죽 고개를 숙이지 않아야 한댄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군인은 민간인 스타일의 평범한 인사 대신에 그냥 손 끝을 이마로 가져가는 거수경례를 한다. 군인이 전투모 벗고 고개를 숙이는 건 아예 전사해 버린 전우 앞에서 슬픔을 표할 때에나 하며, 이것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경례로 대체된다.

또한 극형을 당할 만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도 여느 민간인은 교수형을 당하지만, 군인에게는 동급의 전쟁 무기를 동원한 총살형이 쓰인다. 심지어 과거에 일본과 나치 독일의 2차 세계 대전 전범들 중에도 어차피 자기를 사형에 처할 거면 군인답게(?) 총살형을 내려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다. 괜히 별 쓰잘데기없는 사소한 디테일에서 명예니 체통이니 따진다는 생각도 든다만, 이런 차이도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지는 않는 듯하다.

잠시 소재를 바꿔서, 태평양 건너 저 멀리 있는 미국, '아메리카', 일명 천조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해 보자.
참 대단한 게 많은 부러운 나라이다. 세계 최강의 과학 기술 강국· 군사 강국· 선진국에 땅 넓고 자원도 풍부하고, 무려 3억이 넘는 인구를 가졌으면서 국민 대부분이 집 있고 차 있고 총 가진 중산층이다. 이런 특이한 나라는 세계에서 미국이 유일하다.
세계 최초의 마천루 대도시를 이미 1900년대 초에 이뤘고 마이카 시대 같은 건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강점기 때 이미 시작됐다.

어떻게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존재 가능했을까? 기본이 잘 돼 있다.
얘들은 거짓말· 위증, 학문 부정행위에 자비심이 없다.
그리고 강력한 문민통제가 정착한 한편으로 군인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예우를 하고 있다. 그 사례는 인터넷 검색 조금만 하면 줄줄이 쏟아져 나오니 굳이 여기서 또 소개하지 않겠다. 이런 게 미국의 저력이 아닌가 싶다.
돈이 많아서 저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인드가 저러니까 그 시너지가 축적되어 저런 부자 나라가 된 거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나라는 겨우 이 좁아 터진 한국 땅에서 같은 민족끼리도 갈라져서 싸우느라 정신 없었는데 쟤들은 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미군은 그야말로 세계 각국에서 싸우기 때문에 국가 유공자라는 마인드에 담긴 심상부터가 domestic이 아닌 international이다. 뺑이 치는 쫄병 '군바리' 아니면 군사정권 이런 거나 떠오르는 우리나라와는 심상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뭐, 미국 칭찬하면서 글을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제복 입고 근무하는 사람들, 근무 중에 긴급피난이 허용되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경찰, 군인, 소방관, 선장· 승무원)
예비군 훈련 따로 없이 전쟁 중에도 자기 직업이 그대로 유지되는 사람들의 고마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런 것과는 완전 상극인 직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2/21 08:31 2017/02/21 08:31
, ,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29

1. 북한에서 수뇌부가 거주하는 곳은?

우리나라야 대통령이 근무하는 관저는 북악산 기슭에 있는 '청와대'이다. 대통령은 출퇴근 이동을 하지도 않으며, 잘 알다시피 보안을 위해 아예 이 캠퍼스 안에 가족이 다 눌러앉아서 지낸다.
그럼 한편으로 북한에서 청와대에 해당하는 건물은 무엇일까?

일명 주석궁이라고 불리는 평양의 그 거대한 건물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지 모르겠다. 본인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다.
주석궁은 2~30년 전, 김 일성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금수산 의사당'이라고 불리면서 김 일성이 거주하고 집무하는 관저로 쓰인 게 맞다. 그러나 저 사람이 죽고 나서는 그 궁전 전체가 무슨 성경에 나오는 지성소 같은 성역이 되어 버렸다. 이름도 '금수산 기념 궁전'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금수산 태양 궁전'이 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직 대통령이 서거하면 현충원에 묻어 준다. 그것처럼 김 일성 역시 개인적으로는 북한의 현충원뻘인 '대성산 혁명렬사릉'에 묻히길 원했으나.. 독재자를 한도 끝도 없이 우상화해야만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북한에서 바랄 걸 바라야지. 그 유언은 상큼하게 씹혔다. (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의 유언도 그렇게 씹혔음.)

그 큰 주석궁 전체가 예전에는 프로토스 넥서스에 해당했는데 이제는 시타델 오브 아둔 같은 역할로 바뀌었다. 김 일성의 미라가 들어갔으며 나중에는 김 정일의 미라까지 추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근처의 지하철역이던 광명 역은 보안 강화를 위해 폐역되고 열차가 무정차 통과하게 됐다. 달랑 미라 두 구만 보관하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큰 건물인데.. 다른 공간은 어떻게 바뀌었나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인해 금수산 태양 궁전은 일종의 박물관 내지 왕릉 같은 곳이 됐기 때문에 지금 김 정은이 거기에 늘 상주하지는 않는다. 김 일성이 죽은 뒤 오늘날까지 김씨 가문이 사용하는 관저 내지 아지트는 평양, 신의주, 원산, 심지어 백두산 근처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평양 근처에 있는 걸로 알려진/추정되는 아지트도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외곽 모처이며, 위성 첩보 사진으로 위치를 추측할 뿐이다.

요컨대 거기는 워낙 폐쇄적이고 비밀도 많은 집단이다 보니.. 대한민국의 청와대, 미국의 북악관 같은 딱 떨어지는 단일 집무 공간이라는 개념이 현재 공식적으로 없는 셈이다. 더구나 그런 아지트들의 지하에는 무슨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가 깔려 있을지 생각하면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김 정일의 카게무샤(대역)

우리나라 육군에는 KCTC(육군 과학화 전투 훈련단)이라는 훈련장이 있으며, 거기엔 '전갈 대대'라고 타 부대를 상대로 북한군 코스프레를 하면서 가상의 적군 역할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부대가 있다. 얘들은 마치 버추어 파이터의 듀랄 컨셉 같아 보인다고 본인이 예전에 언급한 바 있다. 여느 군부대 사격장이나 각개전투장에서 볼 수 있는 북한군 차림의 인형(?) 표적만으로는 실전 같은 훈련을 하기에 충분치 못하니 군대에서 저런 것까지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북한군 코스프레만 하는 게 아니다. 북한 김돼지의 코스프레를 전문으로 하는 북한 전문가를 몰래 양성해서 운용하기도 했다. 요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그런 게 확실하게 있었다는 것이 김 달술 씨 같은 전직 코스프레 요원의 증언을 통해 알려져 있다.

그런 사람을 왜 두냐고? 북한의 고위 관료나 심지어 김돼지를 직접 만날 예정인 우리나라 측의 대통령 내지 고위 관료를 비밀리에 교육· 훈련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언어는 일단 같은 한국어를 쓰는데 현실적으로는 일본보다도 위험한 반국가단체 빨갱이들의 수괴요 적장이고.. 그런데 또 대놓고 적대시만 하기에는 좀 민망한 존재이니..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게 되더라도 절대로 기선제압 당하지 말고 쫄지 마라."라는 취지에서 우리 내부에서 모의 훈련을 할 만도 해 보인다. 이건 북파 공작원을 양성하는 것과도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김돼지 등 북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무슨 공작원처럼 인간흉기로 양성되지는 않는다. 단지, 자고 일어나면 맨날 역대 로동신문과 평양 방송을 송두리째 흡입하면서 북한 정세를 학습하고 김돼지의 말투와 몸짓, 요즘 관심사, 머리에 든 것 따위를 숙지했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단순히 정치 드라마에서 김돼지 연기만 하는 배우와는 차원이 다른 양의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런데 남한 내부에서 북한의 사고방식을 룰 기반으로 정공법으로 익힐 수는 없으니, 결국 통계 기반으로 북한에 대한 빅데이터 머신 러닝 딥 러닝을 몸으로 실행하는 셈이다. 또한, 마치 음란물 자동 탐지 필터를 개발하는 엔지니어가 직업적으로 맨날 음란물에 파묻혀 지내야 하듯, 저 아저씨는 합법적으로 맨날 이적표현물에 파묻혀서 산다고 볼 수 있다.

북한 내부에서는 쿠데타나 암살에 대비해서 가짜 김돼지가 예비용으로 돌아다닐 법도 한데, 어쨌든 남한에서는 뭔가 다른 용도로 김돼지의 코스프레가 이런 식으로 그것도 몇 대에 걸쳐 비밀리에 양성되어 왔다는 게 신기하다. 인간을 화성으로 보낼 생각으로 지구의 하와이 모처에다가 화성 같은 환경을 꾸며 놓고 우주인들에게 몇 개월 동안 생존 훈련을 시키는 것과 비슷한 관행으로도 보인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이런 짓을 해 봤자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북한 사람과 만나는 데 무슨 도움이 됐겠냐 싶지만...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실제로 김 정일이 만나서 거론한 것, 질문한 것은 남한에서 자체적으로 준비해 간 예상 문제의 범위를 별로 벗어나지 않았으며 적중률도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상 북한 수뇌를 최초로 직접 대면한 김 대중의 경우 70대 중반의 고령에도 참모진들이 준비해 준 대응 매뉴얼을 일일이 숙지하면서 답변을 아주 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때문에 이 나라에서는 안 그래도 지금까지 곳곳에 비밀도 많고 비리도 많고 숨겨진 게 너무 많은 채로 돌아갔던 게 사실이며, 저 카더라 통신도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니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게 기껏 철저히 준비하고는 김돼지를 만나고 와서 이뤄진 열매가 겨우 이 모양이라면 말이다.
김 대중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국정원을 싹 뒤집어엎고 북파 공작원들의 신원을 북쪽에다 넘겨 줘 버렸다는 말까지 나도는데.. 그것도 내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다만 김 대중· 노 무현 같은 친북 성향의 정권이 설령 악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북한에 엄청난 거금을 퍼 주고도 북한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으며 전화· 서신 왕래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게 없었다. 가만히 놔두기만 하면 붕괴했을 북한 정권은 이 돈으로 원래 계획했던 핵을 무난히 개발하는 쾌거를 이뤘다. 철도 연결이나 이산가족 상봉 깜짝쇼쯤은 도박판에서 돈 다 날리고 받은 위로금 개평 수준?

남북 경제 협력 명목이랍시고 이뤄 냈다는 개성 공단을 온갖 이상한 논리와 궤변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양심이 있다면 박통 시절에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여건(특히 전 태일 열사)을 같이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박통 시절에 아무리 노동자 인권이 열악했어도 임금의 90%를 체제 충성 비용으로 국가가 떼어 가던가?

이래도 햇볕 정책이 악의적이지 않은 실책일 뿐이라고 별다른 비판 없이 넘어간면, 그렇다면 6· 25 때 이 승만 정권의 한강교 폭파와 인명 살상이야말로 훨씬 더 악의적이지 않은 실책일 뿐이라고 실드 치고 넘길 수도 있겠다. 이게 전체 그림의 진실인 것이다.

정치색 들어간 얘기는 이쯤에서 접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이렇듯 국가 대표로서 적성국가 사람과 대면하는 건 어지간히 힘든 일이 아니다. 옛날에 이 후락 중앙정보부장도 몰래 북한을 방문했을 때,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만약을 대비해 언제든지 즉시 자폭 가능하게 독약 앰플을 준비해 갔을 정도였다.

그리고 같은 전방에서도 상대적으로 낙후해 있는 동부 전선 강원도 산간지대 말고.. 서울과 가까운 평지이고 판문점도 있는 서부 전선이 훨씬 더 엄선된(체력· 사상 모두) 정예 군인들이 배치된다. 여기 일대는 민통선과 DMZ의 구분이 좀 므흣해서 북한군과 직접 대면하기 쉽고 각종 높으신 분들도 많이 오며, 덩달아 어느 지역보다도 월북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여기가 그야말로 노다지 진급 코스이다. 육사 졸업생은 바로 이런 데에서 소대장으로 첫 근무를 시작한다.

3. 탈북자가 가는 곳

북한 주민들이 탈북을 하는 경로는 신분과 지위에 따라 다양하다. 외국에 파견 나가 있다가 별안간 망명을 신청하기도 하고, 천신만고 끝에 중국 국경으로 넘어간 뒤 다른 나라를 거쳐 한국으로 오기도 한다. 배를 타고 넘어오거나 국경에서 근무 중인 군인이 별안간 남쪽으로 오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남쪽으로 넘어오는 북한 주민들은 명목상으로는 반국가단체의 지배 하에 있다가 탈출해 온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긴 그들을 최대한 인간적으로 대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탈북자로 위장 행세를 하는 간첩도 있기 때문에, 대접을 하기에 앞서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심과 검증은 거친다. 탈북했다가 별안간 "나 마음이 바뀌었으니 북으로 다시 보내 주쇼" 하고 떼쓰는 이상한 아줌마도 있는데 이건 99.9% 간첩이다.

필요 이상으로 이상하게 북한을 자주 방문하는 사람도 굉장히 의심해야 한다. 그런 놈들은 북에 가서는 돈 왕창 바친 뒤 또 지령 받아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정치· 종교 쪽으로 유명한 사람이 북에서 자기 지위와 관련된 약점을 한번 잡힌 뒤부터는(마약이나 성 스캔들 같은) 북에 대해서 소신 발언은 끽소리도 못 하는 친종북 인사가 돼 버린다.

뭐 이런 경위가 있기 때문에, 탈북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접수되면 곧바로 하나원 같은 정착 지원 시설로 가는 게 아니다. 이들은 정확한 신원 파악을 위해 먼저 탈북자 전용 신문 센터에 며칠간 수용되어 정밀 조사를 받는다. 이건 국정원 자체는 아니지만 국정원에서 관할하는 시설이며, 시흥시 수인로라는 대로변에 자리잡아 있다. 당연히 아무 이정표도 없고, 밖에서 봐서는 이런 시설이 있는지 일반인은 전혀 알 수 없다.

정밀 조사를 통해 이들이 정말로 북한에서 왔고 악의가 없는 탈북자가 맞는지를 최종 확인한다. 우리나라도 정부 수립 이래로 지금까지 탈북자가 한두 명 쌓인 게 아니고 이 바닥 장사를 하루 이틀 하는 게 아닌데, 수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교차 검증 가능한 데이터쯤이야 왕창 쌓여 있다. 정말로 북한의 그 지역에서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내용을 거듭 질문해서 제대로 대답하는지 확인한다.

검증을 통과한 뒤 탈북자들은 하나원에서 총 12주간 남조선 사회 제도에 대한 교육을 받은 뒤, 각종 정착 자금을 받고 사회로 배출된다. 게임에서 튜토리얼을 한 뒤, 캐릭터가 본게임 필드에 스폰돼서 처음엔 깜빡거리는 실드 모드이다가 그 뒤부터는 실드 모드가 꺼지는 것과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탈북자가 워낙 많아지고 이들을 받아들이는 게 '귀순 용사'로 일일이 띄울 필요도 없는 일상적인 일과가 되자.. 하나원 역시 2010년대에 와서는 화천군에 멀티를 또 만들었다. 본원은 안성 품곡마을 근처에 있다.

하나원과 신문 센터 모두 법적으로 '가급 보안 시설'이고 지도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북한이 위치를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시설이니까. 국정원 본원 자체도 코렁시설이지만 신문 센터라든가 국가 정보 대학원 같은 추가적인 연계 코렁시설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나저나 서독산과 수리산의 사이에 있는 안양 박달동은 보아하니 산지 같은데 산 전체가 몽땅 온갖 군부대로 가득하구나. 예비군 훈련장도 당연히 있고. 산 전체가 탄약고인 천안 성환읍 학정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12/05 19:37 2016/12/05 19:37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02

바야흐로 2016년이고 좀 있으면 우리나라에 제6공화국이 출범한 지도 30주년이 되는데.. 우리나라는 개헌과 디노미네이션(화폐 개혁)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21세기 전반부에 풀고 가야 할 대표적인 숙제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둘 다 지금 당장까지는 아니어도 예측 가능한 가까운 미래에 추진하는 것에 찬성 입장이다.
먼저 정치 쪽은.. 대통령 선거 타이밍을 국회의원의 타이밍과 맞추고, 대통령은 미국처럼 4년 + 호응 좋으면 1회 중임 가능하게 하는 게 어떨까?

우리나라가 역사 정서적으로 독재자의 엿장수 식 개헌에 대한 트라우마가 좀 있는 건 사실이다. 이에 대한 반발 때문에 지금 헌법은 반대로 고치기가 너무 어렵게 바뀐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본인이 예전에도 생각을 밝혔듯이, 옛날에 그 정도 독재는 당대의 국민 의식 대비 북한의 위협 때문에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그 정도로 위태롭던 시기에도 그 정도 인권유린이나 정치범 탄압 부작용밖에 없었다면, 세계 역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나마 아주 선량한(?) 독재였다고 본다.

그 독재 권위라도 없이 국론이 완전 사분오열돼서 나라꼴이 도떼기시장 개판오분전이 되고 뭐 하나 큰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맨날 반대를 위한 반대에, 조선 시대식 당파 싸움에, 제발 데모질 좀 하지 말라고 데모가 벌어지고, 이 틈을 노려 공산주의자 간첩들이 활개를 치면서 민· 관을 마음껏 이간질하다가 또 북한이 남침하는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라. 이것보다야 차라리 강력한 독재가 나았으며 특히 그 옛날에는 그게 더 절실한 필요악이었다. 오죽했으면 전땅크의 5. 18은 몰라도 박통의 5. 16 쿠데타는 그 시절에 어지간한 지식인 지도층들도 지지했을 정도였다(예: 장 준하).

그 와중에 민주화라는 것도 백성들이 그냥 저항만 한다고 이뤄질 수 있는 거 아니다. 통치자들이 기본적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최소한의 선량한 마인드는 갖춰져 있었으니 정권 교체가 가능했다. 그게 아니라면 북한은 주민들이 민주 의식 저항 의식이 남조선 인민들보다 부족해서 저 지경이 된 것이겠는가?

예전의 통치자들이 국민을 우습게 여기고 비리 저지르고 잘못한 거야 신나게 까고 비판하고 씹어야 할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게 국민이 감시를 잘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큰 그림을 보면 명백히 썩은 내 풀풀 나는 쓰레기 시궁창 속에서 그나마 이 정도 꽃이라도 기적적으로 피워 낸 거라고 볼 수 있다.

그게 아니라 무슨.. 우리나라가 해방 직후에 우리 민족끼리 아~주 평화롭게 통일 국가 이뤄서 잘 살 수 있었는데 무슨 나쁜놈이 친미 친일 공화국을 만들고 나라를 분단시키고 좋은 기회를 다 망가뜨렸네 하는 그딴 소리에는 본인이 내 양심과 명예를 걸고 죽어도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온몸으로 반대한다.
통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 시절에 그런 식의 통일이란 100% 김 일성 치하의 적화통일을 의미할 뿐이지. 그 나이 쳐먹도록 아직도 그런 순진한 말을 믿고 있냐?

얘기가 좀 엉뚱하게 흘렀다만.. 아무튼 북한을 대치하고 있는 시국 속에서 우리나라는 미군정을 졸업하고 군사 정권까지 청산한 뒤, '직접 민주주의'까지 잘 이뤘다. 하지만 이제는 1987년 체제도 좀 초월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이렇게 정치 시스템을 고치는 일은(민주화? 직선제 등등)..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북한 주민들을 구출한 급이 아닌 이상, 나라를 외적 침략으로부터 지키거나 가난을 극복한 일만치 위대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 역시 변함없다. 그게 급이 서로 같을 수가 없다.

다음으로 화폐 얘기다. 우리나라의 헌정 시스템은 since 1987이라지만, 지금의 '원'이라는 단위 체계는 무려 since 1962이다. 박통 때 제정된 돈이 만약 있기만 하다면 지금도 동일한 액면가로 통용 가능하다. (물론 그런 골동품 돈은 액면가 그대로 써 버리는 건 완전 바보짓이다. 수집가에게 파는 게 훨씬 더 이익이므로.)

허나, 대한민국 급의 선진국들 중에서 이 '원'만치 가치가 너무 작고 반대로 자릿수가 너무 큰 화폐단위를 쓰는 나라는 없다. 반세기 동안 인플레가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10만원 지폐까지 만들 지경이 된다면 그걸 하느니 끝의 0 한두 개를 좀 없애 버리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화폐를 새로 만들 때쯤이면, 제발 조선 시대 이씨 말고 대한민국 시대 인물도 모델로 좀 넣자.
굳이 조선을 또 넣을 거면 성역 고정출연급인 세종대왕 이 순신 말고는 장 영실· 정 약용 같은 발명가, 실학자 계열을 넣고 말이다. 유학자들만 너무 빨아댄다. 유교탈레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요즘 저게 평판이 얼마나 안 좋은데!

이런 개헌과 화폐 개혁이 통일과 함께 안 그래도 어차피 사회 기반을 갈아엎어야 할 타이밍 때 원큐로 싹 같이 진행돼 버리면 비용도 제일 덜 들고 좋을 것이다. 이 시기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광복 전후, 6· 25 전후 같은 급으로 분위기가 싹 달라질 것이고 그 날은 아마 국경일· 기념일 정도는 돼서 달력에 표기될 것이다.

아, 한반도에 유일하게 바람직한 통일, 평화 통일, 진정한 통일이란 당연한 말이지만 이북의 김돼지 정권이 스스로 무너지든, 군사력으로 쳐부수든 어쨌든 걔네들이 축출되고 제거되고 처벌받는 통일밖에 없다. 그것 말고 적과 싸우다 져서 통일 '당하든가', 적과 내통하고 적당하게 타협하고 적에게 왕창 돈 갖다 바쳐서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얻은 통일 따위는 안 하는 것만도 못한 잘못된 통일이다.
아무리 통일이 좋기로서니 주체사상 내지 김돼지 부자 동상을 그대로 놔 두고 존치시킬 생각이신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해 보라.

제대로 된 통일이 불가능하다면 차선· 차악 차원에서 차라리 영구분단이 1억 배 이상 낫다. 사채· 보증 써서 막느니 차라리 평범한 신용불량자가 되는 게 나은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이치이다.

어차피 북괴는 교류 끊고 고립만 제대로 잘 시켜도 알아서 붕괴한다. 굳이 전쟁 벌여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조차 없다.
상황이 급하고 저자세로 나와야 되는 건 걔네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걔네들이 그 와중에 핵까지 개발하는 데 성공한 건 그렇게 고립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군인의 본분에다 비유하자면 작전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경계에 실패한 것과 같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비극이 앞으로 다시는 없어야 한다.

북괴 정권은 완전히 패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폭탄 끌어안고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다. 자기가 없어지더라도 땅 한 평, 인민 한 명이라도 남조선에 도움이 될 건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독 뿌리고 방사능 오염시키고서 망할 게 뻔히 보인다. 차라리 중국에다 주면 줬지 우리한텐 안 준다. 옛날에 일제가 핵폭탄 안 맞았으면 마지막까지 전인민 옥쇄니 뭐니 하면서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했었던가? 그걸 생각하면 된다. 북한은 그런 나라이다.

그렇게 김돼지 정권을 몰아냈다고 생각해 보자. 못 먹어서 허약하고 기형이고 마약에까지 취한 인민들.. 물론 인도적인 차원에서 구제는 해야겠지만, 반쯤 병신인 인민들에게 최소한의 경제력이나 생산 능력이 있을 리 없을 것이고 이건 통일 비용을 왕창 잡아먹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민족끼리'의 허상을 버리고, 북괴 정권을 도와준 건 인민에게는 절대 안 간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괴를 조직적으로 고립 압박해서 망하게 해야 한다. 이럴 자신이 없으면 그냥 영구분단으로 가든가.

이 개념을 복습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전혀 사실이 아님

  1. 통일은 지금 외세의 방해 때문에 못 하고 있다.
  2. 김씨 부자 정권과 주체사상을 그대로 존치하면서 남북을 통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 적절하다 / 옳다.
  3. 북한 정권은 완전히 개과천선해서 대남적화 야욕이 없어졌다.
  4. 북한은 정부가 인민들을 먹여 살리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도 다른 외형적인 불가피한 이유 때문에 못살고 있다.

* 100% 절대무오한 사실임

  1. 통일은 남 탓 할 필요 없이 북괴의 잘못된 통치 이념과 사상 때문에 못 하는 것일 뿐이다.
  2. 북한은 이념으로서 스탈린이니 레닌이니 하는 공산주의는 물론 진작에 버렸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제일 만만한 나라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위장, 간첩질, 거짓 선동, 유언비어, 역사왜곡, 계층간 이간질 등 온갖 비열하고 더러운 방법은 여전히 적극 운용 중이다.
  3. 정상적인 경제개발 및 군사력 육성으로 남조선을 적화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쟤들은 더 극단적이고(핵 등 비대칭무기) 치사한(위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북쪽에 대해서 positive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쟤들이 공략하는 건 오로지 남쪽에 대한 negative이다.
  4.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아는 게 힘이다. 이제라도 우리보다 힘센 일본을 배우자. 근대화하자" 이런 움직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북한에게서 우리가 일말의 배울 만한 선한 것이 있나? 전혀 그렇지 않다. 쟤들은 하다못해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워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적화통일을 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비열하고 더러운 전술에 속지 말아야 하고 경계 분리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5. 자기도 말로만, 입으로만 북한 정권 싫어한다 김 일성 싫어한다 그러면서 필요악과 절대악은 구분할 줄 모르고, 6·25 전쟁이 무슨 남북 양비론인 줄 알고, 적화통일 반대한다면서 적화통일 자금줄 대주는 일에는 아무 관념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 남조선에 너무 많다.

위와 같은 나의 팩트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내가 우리나라 근현대사 내지 정치와 관련하여 쓰는 글에는 북괴, 종북개빨, 더 나아가서 좌좀 깨시민 같은 과격한 단어가 사라질 일이 없을 것이다.

나의 정치 성향이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해서 견딜 수 없다면, 누구든지 위의 저 전제조건들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면 된다. 남이 지지하는 것의 욕만 자꾸 하지 말고 자기가 지지하는 것이 옳고 맞다는 걸 입증해 보이면 된다. A가 틀렸다고 해서 자동으로 B가 맞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오픈소스가 아니지만 난 사상 체계는 철저한 오픈소스다. 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 논리를 구성하는 근거 팩트들을 아주 투명하게 제시해 놓았다. 저것만 무너뜨리고 논파하면 내 생각을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서 남이 뭐라고 지껄이든 듣지 않고 답은 정해 놓고 박박 우기는 거야말로 폐쇄 클로우즈드 소스겠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한 나라 체계 하에서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서 특혜 받고 나쁜짓 하고 평범하게 부정축재 해 온 놈과,
아예 적국에게 자금 바치고는 그걸 온갖 평화드립 궤변으로 합리화하고 오로지 자국 폄하만 일삼는 놈이 어떻게 서로 레벨이 같냐..? -_-;;
저 둘은 성경에서 아담의 죄와 루시퍼의 죄가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고, 노아의 홍수와 이전 세상 홍수가 다른 것만큼이나 완전히 다르다.

후자가 전자보다 청렴하기라도 한 것도 당연히 절~대 아님. 선조의 친일 내력이나 자식새끼의 특혜/병역비리를 파자면 절대적으로 평균이나 그 이상 나온다. 서로 네거티브 대결만 해서는 양쪽 다 오십 보 백 보이고 끝이 안 난다. 6· 25의 책임이 양비론인 게 아니라 이런 거나 양비론 피장파장이다. 그러니 결국은 대적관과 이념의 건전함으로 결판을 낼 수밖에 없다.

통일이란 건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마치 결혼이나 교통사고처럼 나(혹은 우리나라)만 잘한다고 혼자 할 수 있거나 예방 가능한 게 아니다.
그게 어느 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통일에 덧붙여서 개헌· 디노미네이션까지 국가 체계를 적절한 타이밍에 잘 개편해 내는 복을 누리게 될지는 모르겠다. 옛날에 더 늦기 전에 좋은 타이밍 때 220볼트 승압을 싹 해치웠고 철도 표준궤 개궤를 해서 미래에 후손들이 편해진 것처럼 말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그때쯤이면 한글 글자판도 세벌식 중심으로 다시 제대로 논의됐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10/26 08:31 2016/10/26 08:31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287

인천 상륙 작전 (영화)

영화 인천 상륙 작전, 혹은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
일부러 날짜를 맞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6· 25 전쟁의 휴전이 타결된 날인 7월 27일에 개봉했다.
보는 내내.. 감독이 표현하고자 한 사상이 본인의 내면과 잘 통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반대로 좌빨 매체에서 별 이유 같지도 않은 궤변 늘어놓으면서 이 영화를 왜 저렇게 못 물어뜯어서 야단인지가 적극 이해되었다. 북괴 치하에서 벌어지던 잔학한 공포통치, 세뇌, 인민재판, 숙청을 저렇게 적나라하게 그려 놨으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유는 막론하고 전쟁은 그저 참혹한 거고(그 전쟁을 먼저 일으킨 쪽이 누군데?), 공산당도 알고 보면 사실 착한놈이고 미군 국군도 민간인 왕창 학살했어(민간인 위장해서 치사하고 비열하게 도발한 놈 얘기는 절~대로 없이), 동족상잔의 비극은 남북 모두 책임이네 식의 메시지를 본인은 거의 부모 모독 패드립과 같은 급으로 정말 온몸으로 혐오한다. 저건 정말 천하에 듣기 싫은 불순하고 사악하고 마귀적인 사상이다.

이 영화는 요즘 각종 다른 매체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미 다 검증돼 있는 선악 구도를 괜히 비비 꼬고 비틀고 재해석(?)하고 절대악과 필요악을 교란하는 식의 전개가 없다. 그래서 참 건전하다.
스토리의 표현이나 묘사가 옛날 영화처럼 좀 진부한 건 일단 사상이 건전한 것에 비해서야 그리 큰 흠이 아니라고 본다.

특공대가 기차를 타고 적진으로 침투하는 건 김 재현 기관사(미군 딘 소장 구출 작전)의 이야기를 다룬 <미카 129>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1950년 7월에 있었던 일이니 시기적으로 인천 상륙 작전보다 2개월 전, 이제 막 대전을 빼앗겼던 시절의 얘기다. 그 시절엔 열차 객차들이 다들 저렇게 목재에 직각 의자로 돼 있었나 보다.

그리고 대원들이 흩어지기 직전에 서로 손목시계의 시각을 동기화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래야 시간 약속에 맞춰 정확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그 정도로 소형화된 손목시계는 굉장한 사치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해방 직후에 소련군이 들어와서는 민간인에게 행패와 약탈을 일삼았으며, 특별히 약탈한 손목시계들을 한 팔목에다 주렁주렁 차고 다녔다는 걸 생각해 보시라.
그로부터 20여 년 전에 윤 봉길 의사가 김 구와 교환한 시계는 손목시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회중시계였다는 점도 같이 생각해 보자.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 영화에서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배우는 잘 알다시피 그 이름도 유명한 리암 니슨이다. 테이큰에서 내가 완전 반해 버린 그 아저씨가 '군산, 원산, 인천' 등 한국의 지명을 발음하면서 맥아더 연기를 하다니 무진장 기쁘고 고맙다. 잘생겼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호의적이고 개인적인 품행과 사상이 건전한 배우인 것 같아 더욱 믿음직스럽고 호감이 간다. 아주 건전하고 뜻깊은 역사물 영화를 만든대서 여느 할리우드 영화를 찍을 때보다 훨씬 더 저렴한 출연료만 받고 선뜻 출연해 줬다고 한다.

이 사람이 전화통 붙들고 김 일성과 "난 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전쟁을 멈추고 철수하지 않으면 난 군대를 보내서 널 찾아내고 널 죽여 버릴 것이다." / "풋~ 잘해 보라우" 설마 이런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영화엔 더 감격스러운 장면이 있었다.
팔미도 등대가 점등되었을 때, 그리고 선발대로부터 조명탄이 성공적으로 발사됐을 때.. 어둠 속에서 '빛'이 쫙~ 비친다. 맥아더도 이걸 보고는 감격한다. 작전 성공을 이렇게 묘사한 게 단순히 적진을 다 때리부순 장면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었다. 성경에서도 빛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심상이고 어둠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이고 나쁜 심상이다.

  • 어머니를 지켜 주고 싶어 군대에 자원한 이 정재 vs 이념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 범수
  • 부하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이 정재 vs 홧김에 부하를 쏴 죽이는 이 범수
  • 대통령 하고 싶어서 인천 상륙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은 반대 세력 vs 나라를 지킬 총과 탄약을 더 달라는 소년병의 군인정신에 감동해 반드시 이 전쟁을 이기겠다고 다짐한 군인 맥아더
  • 인민군 내부에서조차 림 계진과 박 남철은 서로 감시 vs 국경을 초월하여 서로 신뢰하는 맥아더와 장 학수

어느 게 선이고 어느 게 악인지, 어느 게 빛이고 어느 게 어둠인지를 이 영화는 단순하게 잘 대조해서 보여 줬다.
또한 러시아어를 읊조리는 북한군 애들은 "신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보이기나 해?" 이러지만 맥아더 포함 미군 장성들은 수시로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러는 것 역시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간호사로 출연한 진 세연은 여기서도 항거 대상이 일제에서 북괴로 바뀌었을 뿐, 각시탈의 오목단과 비슷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결말부로 가면 드디어 인천 시내에 시뻘건 저주받을 선전 구호들이 철거되고 시내가 태극기 물결로 바뀐다. 이건 그야말로 8· 15 해방과 동급의 기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걸 아미타불로 바꾼 원흉이 중공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미제 분단 식민지로 들어갈 게 아니라 김 구와 함께 김 일성 밑에서 무혈 통일 이뤄서 우리 민족끼리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다" 요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인천 상륙 작전>은 감동적이면 감동적이지 불편할 내용은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괜히 표현이 식상하고 진부하네 이런 거 불평하기에 앞서 난 이런 역사를 다룬 귀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일단 고맙고 기쁘다.

이 영화에서는 일명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소년병" 씬이 흑백 과거 회상 형태로 잠깐 들어갔다. 이건 문헌에 따라서 날짜와 대사가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한데.. 6월 27일 or 29일, 서울 영등포 or 흑석동.. 어쨌든 개전 초기 서울을 빼앗기기 직전 또는 직후에 서울 한강 이남 전선을 시찰하던 맥아더 장군이 통역 장교를 대동하여 어느 앳된 병사와 실제로 나눈 대화이다.

"후퇴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자리를 지킬 것이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싸울 것입니다."
"원하는 건.. 딴 건 필요 없고 단지 총과 실탄을 좀 더 주십시오."


본인은 저 일화를 먼 옛날 시스템클럽 글을 통해서 진작부터 접했었다. 거기 운영자분이 맥아더를 굉장히 좋아하시기 때문에.

훗날 박 정희 대통령이 무슨 미국 무기 회사 임원과 청와대에서 몰래 거래를 하면서 "님이 내게 준 개인 비자금 100만 달러를 도로 님에게 줄 테니 이 가격만치 M16 소총을 더 주시오" 뭐 이랬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그런데 그건 솔직히 출처와 정확도를 확신을 못 하겠다. 그것과는 달리 맥아더 + 소년병 일화는 국내외 여러 군 관계자의 회고록에도 수록돼 있으며, 주작이 절대로 아니다.

일제 강점기를 생각해 보자. 비록 당장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무모한 짓으로 보여도, 계속 항쟁과 의거가 벌어지니까 외국에서도 "조선은 정말로 일제와 한 뿌리가 아니며 독립을 원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윤 봉길 의사가 폭탄 투척을 했을 때 장 제스가 얼마나 감탄했던가?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니 1940년대의 국제 여론은 구한말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일제를 쫓아낸 뒤 조선을 독립시키자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조선은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일제 식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카이로 선언에서 독립 보장이 명시되는 감격의 성과가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 그것처럼.. 당장 자국민부터가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확연한 의지를 드러내니 그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맥아더 장군의 심리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역사를 바꾸게 됐다.

개전 초기에 국군은 전열이 무너지고 지휘 체계가 황폐화되는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허둥대다 1개월쯤 뒤부터는 희대의 막장 조치인 즉결처분조차 시행할 정도로 암울한 지경에 도달했다. (군기가 얼마나 개판이었으면 상관의 '까라면 까' 명령에 불응하는 부하를 현장에서 재판 없이 바로 사살 허용..;; 부하란 굳이 병뿐만 아니라 초급 장교들도 포함이다. license to kill -_-)
게다가 맥아더는 채 병덕 같은 남한의 X맨 급인 무능한 수뇌부에 이골이 나 있기도 했다. (유 재흥은 전투 패배 후에 밴 플리트 장군에게 까였고, 채 병덕은 개전 초기부터 맥아더에게..)

그랬는데 그 타이밍에 마침 저런 모범 병사를 만난 것이다. 맥아더가 포레스트 검프에서 "이런 씨발. 내가 지금까지 들은 가장 훌륭한 대답이다. 귀관은 IQ가 한 160쯤 되는 천재임이 틀림없다!" 거의 이런 급으로 감탄했을지도 모르겠다.

66년 전에 거기에 있었던 그 소년병 당사자(고 신 동수 옹. 2013년에 작고)의 부인 되시는 분<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관람하고는 감격에 눈시울이 젖었다고 한다! "우리 남편이 살아서 같이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데 기자 양반, 혹시 이 영화 비디오로 하나 살 수 없을까? 남편 얼굴이 가뭇가뭇할 때마다 보고 싶어서 말이야." 가슴 뭉클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분의 인터뷰가 보도되고 나자 주연 배우인 이 정재 씨가 직접 비디오 테이프와 꽃다발을 들고 그분을 찾아뵈었으며, 리암 니슨도 직접 이분을 칭송하고 격려하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인천 상륙 작전은 평론가 평점 3점대 테러나 당할 작품은 절대로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경은 시 2:2-4라든가 계시록에서 여러 민족들이 한데 뭉쳐서 특정 한 민족을 대적하는 사건을 언급한다. 이것은 영적으로 명백하게 좋은 현상이 아니며, 사실은 UN조차도 앞으로 그런 악역을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저런 트렌드와는 반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들이 한데 뭉쳐 한 나라를 도왔던 6· 25 전쟁은 거의 전무후무한 사례이고 예외적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미국이 개입했던 전쟁들 중 정당성 명분이 톱급으로 가장 큰 전쟁이었다.

뭐 괜히 쓸데없이 김치, 된장, 한복 이런 것보다야 차라리 한글이라든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시대를 너무 앞서 간 엄친아 괴수요 국제 정세의 달인인 어느 할배에 의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건국됐고, 저렇게 드라마틱하게 지켜져 왔다는 사실에나 좀 자부심 가졌으면 좋겠다. 과장 보태면 그런 건 좀 국뽕에 취해도 되겠구만, 왜 저런 정말 중요한 아이템엔 사람들이 관심이 별로 없나 하는 생각이 든다.

6· 25 개전 초기에 남한 정부의 우왕좌왕 실책과 병크가 나온 것을 비판할 건 비판하더라도... 국내 관료들과 미국 정치인들이 그 할배의 선견지명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받아들였다면 애초에 그 전쟁 자체가 벌어지지 않고 피해가 훨씬 줄어들 수도 있었다는 걸 먼저 감안해야 될 것이다.

그에 반해 김 구는 '그 할배' 같은 선악 관념이 없이, 남북 분단을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하며 어떻게든 중재하고 막으려 했다. 이 사람이 덜컥 암살 당해 버리는 바람에 중재자가 없어졌고 남북 관계는 더욱 싸늘하게 식으면서 전쟁이 났다는 식의 해석도 있는데.. 그건 김 일성을 너무 착하고 순진하게 본 어리석은 생각이다.

김 구는 암살 당하지 않았고 계속 살았다면 최악의 경우 피아 구분을 못 한 채 적화통일 꼭둑각시로 이용당하면서 이 승만의 4· 19 부정선거 하야보다도 대한민국의 미래에 더 악영향을 끼치고 더 추하게 몰락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잘해 봐야 그냥 전쟁 타이밍의 시간만 약간 더 버는 역할밖에 못 했을 것이다. 악한 힘은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고 견제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이런 북한이 <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좋게 평가했을 리는 만무하다. 대남 종북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신랄하게 디스했다. 지난 7월 29일자 보도를 보면 "남조선 괴뢰들이 지난 27일 그 무슨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에 대한 시사회 놀음을 벌리였다. 불가능한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작전이니, 죽음을 불사한 이야기니 뭐니 하는 희떠운(분에 넘치며 버릇이 없는) 수작들을 늘어놓고 있다."고 비난했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나에게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새 기능을 코딩할 자유를 지킨 호국영령들의 은혜를 잠시 생각하며 감사한다. 이상.

Posted by 사무엘

2016/08/23 08:33 2016/08/23 08:33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264

영화: 태양 아래

개그에 장난끼가 농후하던 <디 인터뷰>보다야 훨씬 더 고퀄이고 진지하고 고증 잘 됐고,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외국 영화가 하나 만들어져 나왔다. 감독은 러시아 사람임. 본인은 바로 극장에 가서 관람했다. 이런 진귀한 영상은 돈 주고 볼 가치가 있다.
제목이 태양 아래(under the sun)라니, 영락없이 전도서의 표현에서 모티브를 딴 건지는 모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얼마 전엔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가 그야말로 국내외로 초대박을 쳤는데, 한편으로 뭔가 반인륜 범죄를 폭로하는 영상물에도 '태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경우가 있다. 국내에 마루타라고 소개되었던 1988년작 고어 영화 <흑태양 731>도 영어 제목은 the men BEHIND the sun이다. 물론, 이제 와서 북괴는 잔학함(함수의 특정 지점 최대값)과 지속 기간(함수의 구간 적분값)이 둘 모두 과거 일제를 능가하고 있긴 하다만 말이다.

<태양 아래>는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이지만 딱히 스릴 넘치게 싸우고 죽이는 장면 같은 건 전혀 없다. 이건 탈북자나 북한 지하 교회, 국경의 버려진 꽃제비나 정치범 수용소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며, 오히려 완전히 반대다.
북한이 외국인에게 어느 정도 촬영해도 좋다고 허가를 했을 정도로, 평양에서 핵심계층으로 최상위급으로 잘사는 어느 집안의 애가 2014년도 김 일성 탄신일(태양절) 행사를 앞두고 소년단에 가입하고 행사 준비에 어떻게 투입되는지를 굉장히 잘 묘사해 놓은 일종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그러니 잘 조작되고 각본대로 돌아가고, 북이 찍어도 좋다고 OK 한 장면 위주로 영화를 만든 건데 애초에 그런 위기나 돌발상황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장면에다가 감독이 위험을 무릅쓰고 추가로 몰래 찍은 북한의 민낯 폭로 장면이 들어갔을 뿐이다.

영화에서 먼저 인상적으로 와 닿았던 건 언어와 말투다.
이 영화에는 북한 사람들의 라이브 실황이 담겨 있다. 남한 사람이나 다른 외국인, 재외 교포가 북한 사람을 어설프게 연기한 게 아니다.
먼 옛날, 초등학교 사회/도덕 시간에 교과서에서 "남과 북은 언어도 차츰 이질감이 생기고 있다"의 예로 딱 한 번 들은 걸로 기억하는 북한말 '마사지다'(못 쓰도록 망가지다)를 현지인이 구사하는 걸 난생 처음 봤다. 저 영화 중에 나온다.
" '입빠이'는 일본어 잔재이니 쓰지 맙시다" 이런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일본 사람이 직접 저 말을 쓰는 걸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 봤을 때 신기하게 느낀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평양 사람들이 대놓고 "일정이 급하지비. 날래 하라우. 내레 죽겠시요." 이렇게 사투리를 구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신이 보낸 사람>에서는 남한의 배우가 종결어미만 저렇게 어설프게 북한 말 흉내를 내면서 북한 사람 연기를 했지만, 현실적으로 진짜로 어색하고 북한말처럼 느껴지는 요소는 내가 이 자리에서 차마 흉내내기 어려운 고유한 억양이더라.

학교에서는 한복을 입은 여선생이 김 일성 수령님의 리즈 시절 행적을 설파한다. 사악한 왜놈과 지주놈들을 방법했으며, 1950년에 원쑤 미국놈들이 백두조선을 침략했을 때 전투기를 무슨 척 노리스처럼 빵~ 하고 떨어뜨리면서 무용담을 남겼다고 가르친다.
애들이 언제부터 세뇌 받았는지 "동방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고운 나라래서 이름도 '조선'이래요. 아~ 세상에 부러울 것 없어라" 이런 오글거리는 노래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부른다. 여기가 정녕 2016년에 서울에서 불과 200km쯤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말인가... 연기가 아니라 라이브 실황??

수령님의 탄신일이 다가오니 평양의 어린이들은 다들 온갖 매스게임에 동원된다. 체제 선전 내지 외화벌이용으로. 저것들 정말 얼마나 연습해서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2012년쯤이던가, 이 명박 대통령이 이 태양절 행사를 겨냥해서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에 돈지랄 안 하면 인민이 얼마든지 더 먹고 살 수 있다"라는 요지로 살짝 쿠사리를 먹였더니.. (말 표현을 대놓고 저렇게 한 건 당연히 아니지만, 뜻은 통하게)
북에서는 발끈 해서 "우리의 최고존엄을 모독한 불구대천의 원쑤 쥐명박 역적패당 무리를 죽탕치자!!"라는 구호로 또 인민들을 끌어들이며 더 지X을 해 댔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사항은 옛날 글을 참고할 것.
그런 식의 인민 동원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이뤄지고 각본이 어떻게 짜여지는지, 저거 연기를 하다가 어떤 NG가 나기도 하는지를 저 영화를 보면 얼추 알 수 있다.

그렇게 밤낮으로 안무 공연 연습을 하던 중, 여자애 하나가 발목이 삐어서 병원 입원 신세를 지게 됐다.
그러자 학교 선생과 급우들이 단체로 문병을 가는 장면도 선전용으로 취재해서 내보냈는데.. 선물에 잔뜩 둘러싸여 있는 당사자는 "저는 수령님의 은덕으로 완치 중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복귀하겠습니다" 이러고, 선생과 급우들은 "네가 없으니 너무 가슴이 아파 연습이 안 될 지경이야. 동무야, 빨리 복귀해서 같이 자리를 빛내자" 대사를 카메라 앞에서 읊어 댄다..

다친 당사자는 속으로 얼~마나 압박을 느꼈을까..? ㅠㅠ 이거 뭐 한 번만 더 다쳐서 병원 갔다가는 나가 죽어야 하지 싶다. 사실, 북한은 자살조차 했다가는 가족에게 뒤끝 해코지가 가는 곳이긴 하다만..;;

북한은 정말 개인은 없고 오로지 집단, 당만이 존재하는 숨막히는 곳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완벽한 실사판이다.
임금님이 아주 아름다운 어의를 입고 계신다고 침이 마르도록 아부를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이 벌거벗었네?" 그랬다가는 가족이 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곳. 그게 동화와 다른 점일 뿐이다.

영화는 제일 압권인 장면을 맨 마지막에 보여준다. 주인공인 북한 소녀(진미)에게 어느 기자가 "이제 소년단 가입해서 빨간 머플러 받으니 뭐가 좋을 거 같아요?"라고 슬쩍 물었는데.. 얘는 오로지 각본 대사만 읊지 자기 생각을 말을 못 하고 울먹인다.
"좀 서정적인 동시 같은 거 생각나는 거 없어요?"라는 질문에 즉시 튀어나오는 건 "나는 소년단에 가입하면서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 ..." 어쩌구저쩌구다.

이 영화를 찍은 만스키 감독은 "북한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와 삶이 얼마나 행운인지, 북한에서 반인륜적인 범죄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그래서 난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한반도 전체를 이런 생지옥으로 만들지 않고 반쪽에나마 자유를 선사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그 남조선 할배가 떠올랐다.

내치에서 잘못한 것, 병크와 과오도 많았지만 공로가 과오를 넘사벽급으로 압도한다고밖에 볼 수 없다. "ㅇㅅㅁ 없었으면 적화통일"은 "ㅂㅈㅎ 없었으면 아직도 보릿고개"보다야 훨씬 더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그 할배에 대해서 뭐 부정선거, 야당 탄압, 다리 끊고 도망한 거(?) 그거야 결과만 보면 뭐 잘못한 거니 더 할 말이 없는데, 딴 건 몰라도 분단의 원흉이라고?? 이건 한 마디로 정신병자 급의 미친 소리다.

난 자유가 없는 곳에서 살았으면 일찌감치 미쳐 버리거나 자살했지 싶다. 내 인생 최고의 업적인 날개셋 한글 입력기도, <음란한 성경은 가라> 같은 글도 자유가 있으니 만들어질 수 있었지. 난 남조선 정도의 통제나 억압도 못 견뎌서(교육제도, 군대 문제) 옛날엔 개 깽판 난리를 쳤는데 하물며 북에서는 상상도 하기 싫다.

한편으로 ㅅㅇㅁ 같은 사악한 미국 서식 종북충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평양은 참 살기 좋은 도시예요" 저런 악한 인간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는데 지금이 어디 겨우 일베충 따위나 욕하고 있을 때냐?
"남이나 북이나 '똑같다' " 이러는 인간들하고도 난 정말 상종을 하고 싶지 않다. 대학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라면 자기 나라가 마음에 안 들고 현 대통령이 싫고 더러운 감정을 표출할 게 있더라도, 정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이지 좌우 이념 문제가 아니다.

저런 악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서 저 무리들과 공존? 통일? 개가 웃고 소가 웃을 일이다. 저기엔 절대 침묵하면서 일본 욕만 하고 민족 팔고 통일 파는 그 어떤 짓거리들도 내 경험상 다~ 멍청하거나 사악한 수작이다. 그놈의 전쟁이 무서워서 저 체제를 무너뜨릴 수가 없다면야 차라리 영구 분단을 유지하면서 놈들을 고립시켜서 말려 죽이고 굶겨 죽이기라도 하는 게 100배 1000배 나은 전략이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난 그 어떤 금전적인 손해나 인간 관계 단절을 감수하고라도 한 치도 뒤로 물러서고 싶지 않다. 악의 제국을 미화하면서 자국 정부과 국민을 이간질시키는 악한 무리들은 대한민국 땅에서 썩 꺼질지어다.

영화 제목에서 '태양'이란 김씨 왕조의 자칭 타이틀을 풍자하여 붙은 단어이다. 아래 성경 말씀은 굳이 북한 왕조 같은 곳이 아니어도 보편적인 세상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겠지만, 이북 저 동네는 정말 이 말씀이 절실히 적용된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해 아래에서(under the sun)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는데,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 (전 1:14)

Posted by 사무엘

2016/05/01 08:38 2016/05/01 08:38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221

1. 고종 어차(1903)

황제의 즉위 무려 40주년을 기념하여 도입됐으며(참고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60년이 넘었다만..), 이게 한반도 땅에서 최초로 달린 자동차이다. 차종은 '포드 모델 A'이라는 2도어 오픈카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확실치 않으며, 자동차 역사 연구자 사이에서 그게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이런 거야말로 고종 실록 같은 데에 수록되지 않았나?

허나, 이 차는 얼마 못 가 러일 전쟁 기간 중에 소실된 관계로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시절에 자동차는 얼마나 비싼 물건이었을 텐데, 명백한 사고 폐차도 아니고 러일 전쟁 자체가 한국 땅에서 벌어진 것도 아닌데(청일 전쟁이 아님), 도대체 그 당시에 국가 자산 관리가 얼마나 막장으로 되고 있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래서 얘는 가정사로 치면, 첫째 자식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이름도 없이 일찍 죽은 형· 누나 정도의 존재감으로 취급된다.

2. 순종 어차(1913)

일제 강점기가 된 뒤에 데라우치 총독이 자기 차와 더불어 조선 황실에 대한 예우를 위해 선물해 준 차라고 한다. 1911년엔 고종 어차 시즌 2로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이 들어왔고, 1913년에는 순종 어차 명목으로 더 큰 캐딜릭 8기통 리무진이 들어왔다. 고종-순종 부자가 타라고 차를 두 대 구매했으나, 실소유자는 곧 순종-왕비 부부로 바뀌었다. 도입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운전대는 명백하게 오른쪽에 있다.

이 차들에 대해서도 도입 시기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아니다. 1911-1913년 도입이라고 하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한참 나중인 1918년식이라는 얘기도 있고. 저래 뵈어도 엔진의 배기량은 5000cc가 넘는데 제원상 최대 출력은 30몇 마력밖에 안 됐다는 것 역시 참 안습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자동차 기술의 한계가 거기까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들은 엄연히 현재까지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자동차 실물이다. 그리고 저 차종 자체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차량이 전세계적으로 극소수인데, 한국에 있는 물건은 보존 상태가 양호해서 세계 자동차 역사의 관점에서도 유물로서 가치가 대단히 높다고 한다. 6· 25 전쟁의 포화까지 견뎠을 정도이니, 얼마 타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종 어차 최초 도입분과는 운명이 정반대이다.

일단 아래 사진에서 왼쪽 것이 1911년도 다임러 리무진이고 오른쪽 것이 1913년도 캐딜락 리무진이다. 범퍼와 라디에이터 그릴의 모양이 서로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들은 한때는 흙 묻고 빛 바래고 먼지가 수북이 앉은 채로 창덕궁 차고에 방치돼 있었으나, 1990년대 말에 현대 자동차와 영국의 올드카 복원 전문 업체가 협력해서 표면을 광 내고 대대적으로 보수를 했다. 복원하는 덴 시간이 5년에 가깝게 걸렸으며 비용도 10억 원가량이 들었다고 한다.

복원 작업은 2001년 말에 완료됐으며, 이 덕분에 어차는 완전히 새 차처럼 변했다. 캐딜락의 경우 원래 검정이었는데 표면 도색도 빨강으로 바꾼 듯하다. 현재 이들은 경복궁 안의 국립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캐딜락 리무진의 before과 after를 대조한 것이다.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했다. 저 차들이 191X년대에 갓 들여 온 직후에는 저렇게 반들반들 윤이 났을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지금 시퍼렇게 녹이 슬었다고 해서 그게 처음 만들어지던 당시에도 퍼렇지는 않았으며(동상은 원래 갈색· 구리색임), 옛날 사진이 지금 누렇게 바래 있다고 해서 옛날 그 당시의 풍경 자체가 누렇게 바랬던 건 아니듯이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3. 김 일성 리무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것은 다름아닌 북한의 수괴인 김 일성이 몰고 다니던 승용차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구소련 시절의 자동차이다.
구소련이라 하면 총(AK47!)과 비행기(AN-??)와 우주선은 만들었어도 정작 고유 모델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정보는 영 생소하다. 저건 ZIS 110이라는 모델로, 1948년에 김 일성이 스탈린으로부터 선물받았다고 한다.

김 일성은 이 차를 즐겨 몰고 다녔다. 6· 25 전쟁 중에는 안전한 후방에서 보고나 받고 명령만 내린 게 아니라, 경북 왜관까지 남하해서 전선을 시찰하고 북한군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고속도로도 없던 와중에 참 멀리까지도 내려왔다. 낙동강을 사수하네 마네 하던 리즈(?) 시절엔 그야말로 한반도 전역의 적화통일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는데 1950년 가을,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었고 김 일성은 시급히 후퇴를 해야 했다. 평양까지 빼앗기고 계속 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앞은 강으로 가로막혀 있고 다리가 없고 차량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다. 다른 길로 뺑뺑이를 칠 수도 없고.. 그래서 김 일성은 (아마 눈물을 머금고) 자기 애마를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난 차량이 남한에서 노획되었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이 차량은 1950년 10월 22일,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km쯤 떨어진 청천강 근처에서 남한 국군(6사단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고 노획됐다. 국군이 38선을 최초로 넘어서 국군의 날이 시초가 된 10월 1일 이후로 정확히 3주 만의 일이다.
이걸 최초로 발견하고 신고한 병사가 누군지를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검색은 더 귀찮아서 안 하련다. 그 병사는 당연히 큰 포상을 받았다.

김 일성의 리무진은 대한민국의 국고로 귀속됐다. 김 일성은 차만 버렸지 차키까지 놔 두지는 않았겠지만, 그 시절의 옛날 차들은 지금 같은 첨단 이모빌라이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타터 모터의 배선만 연결하면 강제 시동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차가 그때 이후로 줄곧 한국에서 애지중지 보존되어서 반공 안보 교육(?) 아이템으로 쓰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 승만 대통령은 1951년, 미 8군 사령관이던 월튼 워커 장군의 부인에게 이 차를 선물로 줬다. 워커 장군은 잘 알다시피 1950년 12월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교통사고로 한국 땅에서 순직했기 때문이다(교전 중 전사는 아니고..).

부인 되시는 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인수했지만 차는 곧 고장 났다. 냉전 중에 미국에서 적성국인 구소련제 차량은 부품을 구해 유지 보수를 하기도 어려웠던 관계로, 그녀는 차를 또 처분해 버렸다. 그렇게 김 일성 리무진은 미국 땅에서 정처 없이 30년 가까이를 방황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차가 사고가 나고 폐차됐다면 김 일성 리무진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랬는데 사단법인 유엔 한국 참전국 협회라는 단체에서(대표: 지 갑종) 1970년대에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이 차의 소재를 미국에서 찾아 냈으며, 뉴저지에 소재한 어느 자동차 수집상으로부터 거금을 주고 1982년에야 그 차를 한국으로 도로 역수입을 해 왔다. 먼 나라로 수출되었던 포니가 20여 년 뒤에 드라마 촬영을 위해 도로 역수입된 것처럼. 그때 고맙게도 대우 그룹 김 우중 회장이 재정적인 지원을 해 줬다고 한다.

또한, 그때 이래로 지 회장이 러시아 엔지니어까지 초청해서 관리를 잘 한 덕분에, 김 일성 리무진은 현재도 간단한 정비만 하면 곧장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좋다고 한다. 이분은 6· 25 전쟁 휴전 60주년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2013년 7월 16일, 차량을 전쟁 기념관에다 기증했다. 덕분에 우리는 전쟁 기념관에서 김 일성 리무진과 동시에 곧 소개할 이 승만 리무진도 나란히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6· 25 전쟁을 계기로 김 일성은 자기 애마뿐만 아니라 강원도 고성에 있던 자기 별장도 빼앗겼다.

4. 이 승만 리무진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 일성 차량에 비해 이 승만 리무진은 설명할 게 훨씬 없다. 1956년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의전용 방탄 캐딜락이다. 그러므로 전쟁 중에 굴러다닌 건 아님. 애초에 이 승만은 6· 25 때 피난도 자차가 아니라 열차를 타고 갔다.

얘는 어차처럼 창덕궁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2000년부터 전쟁 기념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었으며, 2013년경에는 역시 때 빼고 광 내는 부분적인 복원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이 작업은 당연하지만 구한말 어차를 복원하는 것만치 힘들고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차 역시 당장 시동 걸고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정태를 넘어 동태보존 상태라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28 08:31 2016/04/28 08:31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220

1. 본문에서 나오는 철도의 정체는?

<용감한 탈출> 책을 다시 보니, 스토리와 관련하여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추가 정보들을 다시 보충할 수 있었다. 그 정보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교통· 지리 분야의 설정이다. 철덕으로서 이런 쪽에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다.

책에서 주인공인 두일이네 가족은 황해도 '사리원' 시에서 살고 있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지리적 배경은 한반도의 동부가 아니라 서부 되겠다.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지만, 삼촌이 탈출하는 바람에 가족이 반동으로 몰리면서 더 서쪽 구월산 기슭의 산골 벽지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한다.
이 설정대로라면 두일이가 탈출하기 위해 집에서부터 이동한 거리는 서부의 고양· 파주 쪽으로 최단 직선 거리를 잡아도 150km가 넘는다. 그 중 상당수의 거리는 철도로 커버가 돼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철도는 무엇이었을까?
본인은 당연히 경의선(북한의 평부선)만이 떠올랐으며, 답부터 말하자면 정황상 그게 맞다. 하지만 당장 떠오른 이 답은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찍은 답일 뿐이다. 사리원에서 개성까지 가는 철도가 경의선만 있는 건 의외로 아니다. 그래서 모처럼 이와 관련된 리서치를 좀 하게 되었다.

국토가 분단되기 전, 해방 당시에 경의선은 문산 역을 지나면 장단, 봉동을 거쳐 개성 역이 나왔다. 장단은 알다시피 시설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DMZ 내부에 터만 존재하며, 반대로 도라산과 판문은 각각 남과 북에서 나중에 만든 역이다.
개성 역을 지나면 선로는 흔히 생각하기 쉬운 북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향하는데, 개성에서 수 km 정도 떨어진 곳에 나오는 그 다음역은 개풍 역(옛 명칭은 토성)이다. 개풍을 지나서야 선로는 마치 남한의 서울-신촌을 연상케 하는 90도 드리프트를 하여 북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개풍에서 드리프트를 하지 않고 서쪽으로 계속 직진하여 연백 평야를 지나고 황해도 '해주'까지 가는 철도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토해선'이다. 토해선 자체는 연백 평야에서 나는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있었지만 그때는 협궤였다. 표준궤인 경의선과는 한 역에서 환승은 가능해도 동일 열차가 직통 운행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훗날 북한에서는 토해선의 선로를 표준궤로 개량했다. 단, 토해선에는 우리로 치면 임진강처럼, 한강 하류로 합류하는 예성강이라는 강을 횡단하는 구간이 있었는데 여기 있던 철교는 6· 25때 파괴된 이래로 복구되지 않았다. 현재는 철도가 아닌 인도· 차도교 형태로만 복구되어 있다.

과거에 일제는 경의선 자체를 해주를 경유해서 만들 생각을 했었다. 경부선을 상주와 충주를 경유해서 만들 생각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직 일제 강점기가 되기도 전인 20세기 초에 강 하류에다 거대한 철교를 그것도 표준궤 규모로 또 만드는 것은 재정상 "지금은 곤란하다" 상태였기 때문에.. 해주를 지나는 철도는 그로부터 수십 년 뒤에 그것도 지선 협궤 형태로 실현됐다.

그 철도가 경유하던 예성강 철교가 파괴되고서 복구되지 않은 것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좀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 다리를 통해 국군· UN군이 강을 쓰윽 건너서 북한군을 대거 엿먹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북한에서 토해선은 강을 건너기 전의 배천 역에서 끊어져 있고, 노선의 이름도 배천선으로 바뀌었다. 개성의 근처까지는 가지만 거기서 더 진행은 못 한다.

해주의 '해주청년' 역에 도착하고 나면, 서쪽 끝까지 더 진행하여 옹진 쪽으로 갈 수도 있고(해옹선, 지금의 옹진선), 북쪽으로 진행하여 사리원까지 갈 수 있다(황해선, 지금의 황해청년선). 북쪽으로 가는 요놈이 바로 경의선보다 더 서쪽에서 황해도를 종축으로 지나는 간선 철도이다. 구월산 기슭에서 탈출을 시작한 두일이의 입장에서는 경의선보다 황해청년선이 위치상으로 더 접근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스토리 설정에서 두일이의 탈북에 도움을 준 철도는 경의선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이는 어떤 형태로든 경의선 구간에 도착해야만 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스토리 상으로 걔는 육로로 탈북을 했기 때문이다. 황해청년+배천(토해)선만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예성강 하나 건너지를 못하고 내륙에서 엄청난 거리를 동쪽으로 뺑이를 쳐야 한다. 동쪽 이동 없이 그대로 남하해 버리면 서해나 한강에 다다르지, 육로와 철책이 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열차에서 내린 뒤 두일이가 휴전선 쪽으로 접근할 만한 경로는 기정동이 있는 개성 시내 외곽의 평지 구간, 아니면 판문점이 있는 곳보다 더 동쪽으로 진행하여 장풍군 일대의 산지이다. <용감한 탈출> 스토리는 시작은 황해도 서쪽인데 전방 도착은 동부 전선스러운 것이 자칫 잘못하면 고증상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도저히 절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개연성이 성립하려면 저기서 철도는 아무래도 경의선이 돼야 하는 건 틀림없을 듯하다.

지도를 찾아 보면서 느낀 건데, 한반도에서 서울에서 인천 정도의 경도가 서쪽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굉장한 오산이다. 인천은 한반도의 서부 중에서도 안쪽으로 제일 옴푹 들어간 지형에 있다. 그 반면, 북한 쪽으로 가면 서쪽 끝은 서울 경도에서는 수십~100수십 km 이상으로 벌어진다. 그러니 경의선의 철도역에서 황해안까지 들어가려면 직선 거리로도 굉장히 긴 거리를 가야 하며, 그 내륙에 황해청년선 같은 추가적인 철도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에는 새로 만들거나 개량한 철도에 '청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노선이나 역이 많다. 서부 말고 동부에는 '금강산청년선'도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말 그대로 20대 청년 공병들을 갈아 넣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 휴전선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형성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휴전선 내지 군사 분계선은 서쪽으로 갈수록 남하해서 심지어 한강의 최하류와도 맞닿아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서부 전선에는 동부 전선에는 없는 "강안경계"라는 게 존재한다. 우리나라가 6· 25 전쟁을 계기로 서울이 북한과 더 가까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이 38선 시절보다 절대적인 땅 자체는 더 많이 수복했지만 휴전선이 수평선이 아닌 / 모양으로 형성됐으며, 특히 고려의 역사가 담긴 개성시를 수복하지 못하고 빼앗긴 이유는 무엇일까? 까놓고 말해 선죽교가 있는 곳이 한때는 남한 땅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게 된 거다.

<용감한 탈출>의 지리적 배경과도 전혀 무관한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저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단 6· 25 전쟁 당시에 휴전 회담이 진행 중이던 판문점이 오리지널 38선과 거의 동일한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판문점 일대는 중립 구역으로서 전투에서 완전히 열외되어 평화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반대로 국군이 서부 전선에서 더 북진을 할 수 없게 발목을 잡기도 했다.

둘째, 지형적으로는 이 송악산 때문이었다. (한자까지 일치하는 동명의 산이 제주도 남부에도 있으니 혼동하지 말 것. 단, 제주도 송악산은 기생 화산으로, 그냥 언덕에 불과한 자그마한 크기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8선 시절에는 개성 시내는 남한 땅이었지만 문제는 고지대인 송악산이 여전히 북한 땅이었다는 것. 남한의 개성 시내가 다 내려다보였다. 군사적으로 남한이 방어하는 데 절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북진을 할 거면 저 산까지 몽땅 화끈하게 차지하거나, 아니면 다 내어 주거나 해야 했다.
국군에서 다뤄지는 '육탄 10용사'도.. 사건의 구체적인 전말에 대해서는 미화다 날조다 잡음이 있다만 어쨌든 이건 6·25 전쟁 전, 1949년 5월에 바로 송악산 기슭의 그 불리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벙커링을 뚫고 고지를 지키려는 목적으로 벌어진 전투였다.

더 서쪽으로 옹진 반도 일대도 상황이 열악하긴 마찬가지인지라, 뒤로 물러서면 보다시피 그냥 바다이다. 내륙으로 가려면 38선 이북 지역을 거쳐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그냥 배수진이요 고립된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38선은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쭉 그어졌다 보니, 서쪽 구간은 전반적으로 남한이 점령하고 있는 게 도저히 무리였다.
단지 북한이 해군이 궤멸 상태였기 때문에 연평도 백령도 같은 섬은 북한과 매우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다시 남한이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휴전이 맺어질 즈음, 북한은 영토를 다시 38선 시절로 원복할 것을 제안했으나 남한과 UN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성은 참 아까우며 옹진 반도와 연백 평야를 잃은 것도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 개고생을 하면서 남한이 동부 전선에서 땅을 더 많이 수복했으며, 38선 시절의 경계는 차라리 개성 시내를 포기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남한에게 군사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거기를 포기한 대신 남한이 수복한 땅 중에는 당시로서는 금싸라기 곡창 지대인 철원도 포함돼 있었다.

경원선 소요산 역의 북쪽 다음 역인 초성리 역과, 그 다음 역인 한탄강 역 사이가 옛 38선 경계이다.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양양 국제 공항이 38선보다 아주 살짝 더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 북쪽의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속초, 고성은 약 5년 남짓 동안 북한 땅이었다가 6· 25 때 우리나라가 수복한 것이다. 그러니 철원에 있는 노동당사 같은 건물은 역사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나라가 서쪽으로는 송악산, 동쪽으로는 금강산만 추가로 차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사실, 설악산도 그때 수복한 산이고, 동쪽 끝자락에서는 이례적으로 크게 북진한 덕분에 고성군에 있던 김 일성 별장까지 탈환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별장에 이어서 김 일성이 몰던 개인 리무진 승용차도 그때 전쟁 중에 아주 극적인 계기로 우리 국군이 노획하게 됐다. 여기에 대해서도 나중에 또 자세히 다룰 일이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14 19:38 2016/03/14 19:38
,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203

« Previous : 1 : 2 : 3 : 4 : 5 : 6 : 7 : 8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674873
Today:
1565
Yesterday:
1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