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카낭의 비극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50년 부근에 우리나라의 '축구' 역사는 정말 가난함, 배고픔, 눈물 젖은 빵, 필살의 투혼, 처절함 그 자체였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 가까스로 출전했을 때는 16강전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꺾었다. 하지만 8강전에서 스웨덴에게 0:12로 대패했다.

1954년 FIFA 월드컵(스위스)에 첫 참가할 때는 지역 예선에서 다른 나라도 아니고 불구대천의 원수 일본과 맞닥뜨리게 됐는데..
다른 나라는 몰라도 일본한테는 죽어도 절대 질 수 없다는 불굴의 투지로 일본을 꺾고(1차전 5:1, 2차전 2:2) 본선 진출까지 이뤘다.

이전의 런던 올림픽이야 전쟁이 끝난 직후였고 일본이 전범국 명목으로 반성하고 찌그러져 있느라 참가를 아예 못 했던 상태였다. 허나, 저 때는 세월이 흘러 그런 버로우가 풀렸기 때문에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한일전도 존재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일본을 꺾긴 했지만, 본선에 가서는 헝가리에게 0:9로 지고, 터키에게도 0:7로 져서 탈락했다.
스코어만 보자면 이거 무슨 축구가 아닌 야구의 처참한 콜드게임 스코어 같다. 그러나 이것도 최악의 여건 속에서 홍 덕영 골키퍼가 스코어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슈팅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막아낸 덕분에 얻은 결과였다. 그래서 유럽의 축구 팬들이 한국 골키퍼에게서 싸인을 받아 갈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뭉클한 "졌지만 훌륭하다"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반면.. 비슷한 시기에 지구 반대편의 중남미 브라질에서는 일명 '마라카낭의 비극'이라고 불리는 처절한 흑역사가 만들어졌다.

때는 1950년 7월 16일.. 우리나라는 저 때 전쟁 나서 대전까지 빼앗기네 마네 하던 상태였으며, 조지 리비 중사, 김 재현 기관사 이런 분들도 딱 이 시기에 전사했다.
허나, 그때 브라질에서는 FIFA 월드컵이 개최 중이었다. 브라질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매 경기마다 압도적인 대승과 함께 결승에 진출했으며(스웨덴 7:1, 스페인 6:1), 마지막 우루과이를 상대는 꼭 이길 필요 없이 비기기만 해도 최종 우승이 예정돼 있었다.

브라질은 이 정도면 이미 다 이긴 경기라고 전국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자화자찬용 메달을 미리 만들어 놓고 우승 자축 연설문도 다 써 놓고.. 이 대회만을 위한 승전가까지 작곡하고..

그랬는데 그랬는데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우루과이에게 1:2로 통한의 역전패를 하고 말았다.
스코어가 1:0이었다가 1:1, 1:2로 바뀌니.. 무려 15만~20만 명이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던 관중석 분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싸늘하게 식어 갔으며, TV 카메라는 후반전부터는 관중석은 아예 비추지도 않기 시작했다.

우루과이의 승리로 경기가 끝나 버리자 브라질 관중들은 몽땅 넋이 나가 버렸다. 메달이고 자축 연설이고 승전가고 몽땅 다 나가리가 났다.
무려 17만 명이 넘게 모였었다고 하는 관중석은 파리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인 태초의 고요 그 자체이다가.. 전국적으로 멘탈 붕괴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과 머리에 권총 쏴서 자살한 사람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우와, 을사조약이 맺어졌을 때의 조선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_=;;
우루과이 팀은 이기고도 이 분위기에 해코지· 봉변 당할까 봐 무서워서.. 시상식은 날림으로 대충 때운 뒤, 본국으로 줄행랑을 쳐야 했다.;;
그렇잖아도 브라질과 우루과이는 역사 배경 때문에 서로 사이가 꽤 안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경기는 반쯤 우리나라 한일전 같은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고..

그 다음날 브라질에서는 전국에 조기가 게양됐다.
선수들은 자국 축구 국대에서 영원히 퇴출되었고 어지간한 흉악범 이상으로 평생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

축구 경기에서 진 걸 갖고 사람에게 형사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니.. 브라질 축협에서는 그 선수들의 유니폼을 대신 다 수거해서 싹 불태워 버리고, 유니폼의 도색까지 바꿨다. 원래 흰색이다가 지금 같은 노랑 상의+파랑 하의로 그때 바뀐 것이다.
우리나라 대한 항공이 1983년의 비극적인 007편 격추 사고를 계기로 지금 같은 형태(하늘색)로 기체 도색을 바꿨듯이 말이다.

저 경기 당시에 브라질 측의 골키퍼였던 '모아시르 나시멘투'(1921-2000)는 잘나가던 유능한 선수였다. 이 경기에서도 딱히 실수 때문에 두 골을 실점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패배로 인해 그야말로 역적으로 몰리고 커리어가 완전히 꼬여 버렸다.
길거리에서 "어, 엄마, 저 아저씨는 누구야?" / "응, 우리 국민들을 절망과 불행의 나락으로 몰아넣은 원흉이야" 이런 소리를 듣기도 했댄다.

그에게도 이게 평생의 한이 됐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는 "우리나라는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징역 30년이 최대인데, 난 그 경기에서 한번 졌다는 이유로 50년을 죄인 취급을 당했다"란 말을 죽기 전 유언으로 남겼을 정도였다.

1950년, 마라카낭에 있었던 브라질 선수들 중, 그나마 이때 예비 선수 명단에만 올랐고 실제로 경기는 단 1초도 뛰지 않았던 선수 한 명(니우통 산투스의)만이.. 1952년부터 월드컵 국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건 2012년 런던 올림픽의 축구 3· 4위전 때 홍 명보 감독이 병특 혜택을 주기 위해 경기 종료 직전에 김 기희 선수를 딱 4분 설렁설렁 뛰게 해 준 것과 비교되는 면모이다.

한편, 브라질을 상대로 역전골을 넣었던 우루과이의 '알시데스 기지아'(1926-2015) 선수는 역시 비슷한 시기인 2000년경, 늙은 노인이 된 상태로 한번 브라질을 방문했었는데..
입국장에서 새파랗게 젊은 20대 여성 세관원조차 저 사람을 바로 알아봤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님이 그 !@#!@#$@ 경기에서 역전골 넣었던 분이군요~!"
"아.. 아니, 그건 50년 전 일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사건을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이 정도면.. 브라질에서 마라카낭은 이스라엘에서 마사다 내지 아우슈비츠 정도의 트라우마가 걸린 이름인 것 같다..;;
도대체 축구 하나에 얼마나 뼈를 묻었길래..!!

이런 홍역을 치른 브라질이었지만, 쟤들은 그로부터 64년이 지난 2014년에 다시 자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했을 때는 마라카낭을 능가하는 흑역사 비극을 또 창조하고 말았다. 이름하여 미네이랑의 비극. 7월 8일에 실시된 준결승전 경기에서 브라질은 아시다시피 독일에게 무려 1:7의 스코어로 참패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1948년 런던 올림픽(2012년이 아님!)에서 0:12로 진 게 역대 최다 점수차였던 반면, 쟤들은 저 때 역대 최다 점수차 패배 기록을 갱신했다.

얼마나 민망한 광경이 벌어졌으면, 해설자와 캐스터조차 브라질을 은근슬쩍 동정하고 응원하면서 "아~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브라질이 이렇게 무너져서는 안 될 텐데요..! ㅠㅠㅠㅠ" 이럴 정도였고..
서양에서는 방송에서 스코어를 기재할 때 7이 1의 오타가 절대 아님을 인증하면서 밑에다 seven이라고 써 줄 정도였다.

이 경기가 끝나고 다음날, 브라질의 일부 신문은 1면을 그냥 백지로 내걸면서 멘붕하기도 했다.
스코어와 결과 자체는 미네이랑이 과거의 마라카낭보다 훨씬 더 처참하지만, 그래도 이때는 진작부터 패배가 예상됐던 상태이기 때문에 국가적인 패닉이나 심장마비· 자살 같은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상이다.
2014년 월드컵 때는 우리나라 국대도 굉장한 졸전과 함께 탈락해 버려서 홍 명보 감독의 커리어에도 오점이 남았을 정도인데.. 브라질도 만만찮은 상태였던 셈이다. 세상 어느 분야건 영원한 강자란 건 없거나 극히 드물다고 하겠다.

※ 여담

  • 축구의 각종 경기장 규격과 룰이야 50여 년 이상 전의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바뀐 게 없겠지만, 그래도 옛날 경기들이 요즘 경기보다 스코어가 좀 더 큰 편이다. 국가별 실력과 기량이 지금만치 상향평준화되지 않았고 작전이랄지 전략이 다들 비슷하게 수렴진화도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 축구 경기 때 맨날 클리셰로 흘러나오던 BGM "올레 올레 올레~! name of the game.. football!!" 이건 1986년 멕시코 FIFA 월드컵 때 처음으로 소개된 곡이로군...!

Posted by 사무엘

2022/06/02 19:36 2022/06/02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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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잡설

* 스포츠는 내가 극도로 관심이 없는 분야 중 하나이다만..

1. 잘 알다시피.. 2020년 하계 올림픽의 개최지로 일본 도쿄가 선정되었다.
전쟁 범죄를 전혀 반성하지 않은 나라, 더구나 방사선 유출 사고까지 친 나라가 어째 올림픽을 또 유치해 냈는지에 대해 의아해하는 분이 적지 않다만, 아무튼 이로써 일본은 1964년 이래로 거의 반세기 만에 올림픽을 동일 도시에서 또 하게 됐다.
일본은 1988년 올림픽에서 나고야에서 올림픽을 유치하려 했으나, 잘 알다시피 52:27의 표로 우리나라 서울에 패했던 적이 있다. 이른바 바덴바덴의 기적이다.

2. 그 전까지 역사상 올림픽을 두 번 개최한 동일 도시는 그리스 아테네(1896/2004)와 프랑스 파리(1900/1924)가 있고, 세 번은 런던(1908/1948/2012)뿐이었다.
미국은 올림픽을 네 번이나 개최한 유일한 국가이지만, 전부 다 다른 지역이다(1904/1932/1984/1996).
독일은 두 번 개최하긴 했으나, 나치 독일-베를린(1936), 그리고 서독-뮌헨(1972)이어서 둘의 위상이 서로 미묘하게 다르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도 다른 지역에서 두 번 개최한 나라이다(1956/2000).

3. 사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이 아니었으면 20년 전인 아예 1944년에 올림픽 개최가 예정되었을 선진국이었다. 그로부터 20년 뒤, 일본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의 개최에 맞춰 세계 최초로 상용 최대 속도가 시속 200km를 넘는 신칸센 철도를 개통했었다. 신칸센은 표준궤일 뿐만 아니라 같은 표준궤 철도 중에서도 열차의 폭이 한국이나 유럽의 철도 차량보다 수십cm가량 더 넓게 설계되었다. 그래서 한 줄에 2-2뿐만 아니라 2-3 좌석 배치도 있다. 협궤 철도의 한계에 이골이 난 걸까.

전쟁은 일본의 올림픽 개통뿐만 아니라 지하철의 개통까지도 늦췄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긴자 선이라 불리는 도쿄 지하철을 1927년에 개통했었다.
그러나 그 다음 노선인 마루노우치 선은 그로부터 또 무려 27년이나 지난 1954년에야 개통할 수 있었다.
전쟁 때문에 물자가 부족하니, 신규 철도 건설은 고사하고 이미 있는 철도 선로도 뜯어가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4. 2020년 이전에 일단 요 몇 년간은 남아메리카 브라질이 꽤 주목을 받을 것 같다.
2014년 FIFA 월드컵도 브라질, 2016년 올림픽도 브라질(리우데자네이루)이기 때문이다. 특히 올림픽의 경우 역사상 최초의 남아메리카 개최이다.
월드컵은 매 경기가 서로 다른 지역의 다양한 경기장에서 개최되기 때문에, 올림픽과는 달리 개최국만 지정하지 도시 이름까지 하나로 콕 지명되지는 않는다.

5. 끝으로, 축구 얘기를 좀 한 후 글을 맺겠다.
지금이야 우리나라는 홈그라운드에서 무려 4강에까지 진출한 적이 있고 얼마 전엔 원정 16강까지도 진출한 축구 강국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축구의 시작은 심히 미약했다는 걸 알 만한 분들은 다 알 것이다.

광복 후 최초 참가였던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1라운드에서 멕시코를 5:3으로 이겼으나, 2라운드에서 우리나라는 스웨덴에게는 무려 12:0으로 패해서 올림픽 역사상 최다 실점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1954년에 첫 참가한 FIFA 월드컵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 월드컵은 스위스에서 열렸는데, 헝가리에게 9:0, 터키에게 7:0으로 졌다. 월드컵에서 9점차라는 실점 규모는 역사상 공동 1위이다.

물론 이건 부끄러워할 기록이 전혀 될 수 없다. 해방 직후에, 또 전쟁으로 전국토가 폐허가 된 직후에, 국제 스포츠 경기 참가를 위해 나라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시피하던 시절이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참가의 경우, 선수들은 먼저 부산까지 열차를 타고 간 뒤 일본을 거쳐서 각종 배와 경비행기를 갈아타면서 런던까지 가는 데만 무려 3주가 걸렸었다! 배 타고 갑판 위에서 축구 연습을 했다면 믿으시겠는가?

의류비(단복, 운동복 등)나 숙소 체류 비용조차 제대로 못 내서 완전 추레한 촌티를 팍팍 낸 채, 이들은 도착 직후에 시차 적응도 못 한 채 경기를 뛰어야 했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공격에 골키퍼는 상처투성이가 되는 투혼을 발휘하면서 온몸으로 공을 막아 냈다. 오히려 12:0으로, 9:0으로밖에 지지 않은 게 대단하다고 외신들이 골키퍼를 칭찬할 정도였으니... 눈물젖은 빵+헝그리 정신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다.
스포츠도 나라가 부강하고 잘 살아야 제대로 육성이 가능하다는 걸 느낀다.

Posted by 사무엘

2013/09/15 08:30 2013/09/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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