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인들 대부분의 주거 형태, 또는 최소한 선호하고 지향하는 주거 형태는 아파트임이 틀림없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 수도권 중심부의 직장· 상권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 집을 잡고 살려고 바둥대고 애쓴다. 하지만 결혼해서 처자식이 생기고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지면 어쩔 수 없이 더 멀고 저렴한 외곽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집이 서울 도심에서 몇 km 멀어질 때마다 주거비는 크게 감소하지만 교통비와 통근 시간이 얼마씩 증가하고 삶의 질은 그에 비례해서 떨어진다는 무슨 연구 결과가 나온 게 있다.
다만, 이공계 출신의 경우, 공장이나 연구소, 사업장이 아예 대놓고 지방에 있기 때문에 인서울에 집착하는 게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문돌이도 지방직 공무원에 합격해서 외진 데로 발령 나면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래도 안정된 직업을 얻은 지방행이니 사정이 낫다.

이 와중에 아파트는.. 비록 층· 벽간 소음 같은 문제가 케바케로 있긴 하지만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몰려 살기 용이하게 해 주며, 행정 능률과 토지의 이용 효율을 끌어올리는 여러 장점들이 있다. 그에 비해 단독 주택은 특별히 넓은 정원 있고 차고에다 수영장 있고 개집 있고 다락방까지 있는 미국식 전원 생활이 아닌 이상, 왠지 꾸질꾸질하고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

좁은 골목길에 치안 안 좋고, 주차 문제도 심각하고.. 더구나 집의 모든 관리를 주인이 일일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점은 느긋한 전원 생활형이라 해도 변함없다. 어지간해서는 그냥 월 몇만 원 관리비로 모든 걸 퉁치는 게 나아 보인다. 이런 점에서 단독 주택과 아파트의 차이는 자동차로 치면 자가용이냐 대중교통+렌트냐의 차이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뭐, 반대로 아파트도 좁고 열악하고 닭장 같은 곳은 단독 주택만도 못한 곳, 돈이 부족한 사회 초년생 신혼 부부나 잠시 세들어 사는 곳처럼 묘사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동 주택도 급이 다 같은 게 아니기 때문이며, 사실 저게 미국에서 아파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뭐, 뉴욕 같이 뽁짝뽁짝 대도시는 논외로 하고 말이다.

아파트는 여느 기숙사나 관사, 고시원 같은 곳과 달리, 화장실이 공동이 아니라 각 집마다 따로 있다. 더 좋은 곳은 안방에도 부부 욕실 같은 게 딸려 있기도 하다.
그리고 보통은 입구가 여럿 있어서 각 입구마다 층당 집이 둘만 있는 게 보통이다. 층수는 10층 이상으로 쭉쭉 잘도 올라간다.

하지만 맨션인지 빌라인지 하는 곳은 통상적인 아파트만치 높지 않다. 층수는 그냥 한 자리수이며, 입구는 하나만 있다. 그리고 한 층에서 모든 집들이 한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뭐, 아파트 중에도 이런 형태인 게 없지는 않긴 하지만, 입구별로 층당 집이 둘씩만 있는 아파트보다는 폐쇄성· 보안성이 약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초가집도 기와집도 아닌 이런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는 한국 땅에 언제 처음으로 등장한 걸까? 그리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주거용 아파트는 무엇일까?

2. 일제 시대

아파트라는 게 조선 내지 대한제국 시절에 존재했을 리는 만무하고.. 짐작하다시피 이건 일제 시대 때 일본인이 지은 건물이 최초이다. 1930년에 경성 미쿠니(三國)상사라는 곳에서 일본인 직원을 위한 관사를 지금의 회현동에 지었다고 한다. 그게 '미쿠니 아파트'라고 불렸다.

화장실은 공동이고 단순 기숙사· 숙소 같은 느낌을 탈피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으나, 그래도 이게 한반도에서 상업· 업무가 아닌 주거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3층 이상짜리 건물이었다.
지금처럼 여러 동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그냥 한 채가 전부였지만, 그 시절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이 아파트 한 채 안에 수십 세대가 한꺼번에 입주해서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미쿠니 아파트는 1990년에 철거돼서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 뒤 1935년에, 같은 회사에서 또 지은 아파트가 바로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로 지어진 '유림 아파트'이다. 얘는 직원 관사가 아니라 일반인에게 임대· 분양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진정한 아파트였다. 뭐, 그래 봤자 그 시절에 이런 곳에서 살 만한 사람은 일본인밖에 없었다. 조선인은 부자라 해도 이런 데가 아닌 전용 한옥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얘는 '충정 아파트'라고 이름이 바뀐 뒤, 놀랍게도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고 심지어 거주민도 아직 있다! 2019년 현재 한국 땅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가 이 아파트이다.
위치도 어디 엄한 산기슭 비탈길이 아니다. 충정로 역 9번 출구로 나가면 100미터도 채 안 되는 전방에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흐음.. 녹색 도색이 참 추레해 보인다..)
이 아파트는 중간에 호텔로 용도가 바뀌었다가 다시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1979년쯤에 충정로 도로의 확장 공사 때문에 일부가 헐리기도 했다. 그 대신 한 층 더 증축되어 5층이 됐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무허가 불법 증축이었으며, 헐린 것과 인과관계가 있는 증축도 아니었다.

충정 아파트 다음으로 1942년엔 대한 주택 공사의 전신인 '조선 주택영단'이라는 조직 명의로 한국인이 건설한 아파트도 등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는 게 없으며, 건물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인이 지은 아파트의 역사는 역시나 해방 후, 더 구체적으로는 6· 25 전쟁까지 끝난 뒤에나 제대로 시작될 수 있었다.

옛날 일본인들이 건물 하나는 튼튼하게 잘 만들어 놨나 보다. =_=;;; 구 서울 역이나 중앙청 건물처럼 말이다. 사실, 태평양 전쟁이 없었고 일제 식민지가 평화롭게 계속됐으면 아파트도 더 지어졌고 1940년대엔 경성에 아예 지하철이 들어설 수도 있었을 거라고 그런다.
일본은 아예 경기도 용인 정도에다가 일본의 수도를 옮겨서 본진으로 삼고, 조선인들은 지진 많은 자기네 섬이나 아니면 만주 벌판으로 쫓아낼 작정이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그런 망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3. 해방 이후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는 1958년 11월, 고려대 근처의 야산 기슭에 지어진 종암 아파트였다(3개동). 철도나 원자로 같은 기간 시설, 공공시설이 아니라 민간 아파트 건물이 지어졌을 뿐인데 준공식 때 무려 할배 대통령이 참석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아파트의 완공이란 게 그 시절엔 보통일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편리하고 위생적인 수세식 화장실이 갖춰진 것조차도 그때는 최첨단 테크놀러지라고 언론 대서특필감이었으니 말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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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암 아파트는 37년을 존속하다가 1995년에 헐렸으며, 그 부지에는 다른 아파트가 재건축되어 들어섰다.

할배 시절은 워낙 가난하고 열악했으니 국내의 아파트 건축 기록이 이런 것밖에 없다. 본격적으로 아파트가 지어진 것은 역시나 그 다음 박통 때부터이다.
박통 때 최초로 지어진 아파트는 1962년과 1964년 두 차례에 걸쳐 완공된 '마포 아파트'이다. 얘는 우리나라 최초로 대규모 단지 형태를 표방하고(10개동 642세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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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동까지만 지어졌던 1962년 당시의 항공 사진. 광활한 공간이 참 인상적이다.)
이 아파트는 30년 남짓 존속하다가 종암 아파트보다도 더 이른 1991년에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는 마포 삼성 아파트(1994년, 14개동 941가구!!)가 들어섰는데, 얘는 우리나라 최초의 "재건축 아파트"(2세대!)라고 한다.

종암과 마포라는 두 원조 아파트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아파트는 처음엔 상류층을 위한 고급형으로 출발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중에 60년대 중· 후반에는 세운 상가, 낙원 상가 같은 주상 복합 아파트가 만들어졌으며, 미군 간부를 포함해 외국에서 모셔 온 VIP가 처자식 데리고 편히 지내라고 '외인 아파트'도 지어졌다. 이것들 역시 모두 서민과는 큰 관계가 없는 고급형이었다. 대학 교수, 정· 재계 인사, 인기 연예인 같은 계층이나 들어가 살 수 있었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9/08/30 08:33 2019/08/3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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