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들 열전

1. 중국: 한어병음의 고안자

중국에서는 1950년대 말을 기해서 공식 표기 문자를 간체자로 바꿨으며, 비슷한 시기에 발음 표기도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주음부호 대신 알파벳 기반의 한어병음으로 교체했다.

간체자는 모르겠고 한어병음을 고안한 사람은 '저우 유광'(周有光)이라는 경제학자 겸 언어학자이다. 중국을 우주 개발 강국으로 터를 닦아 놓은 첸 쉐썬만큼이나 자기 나라에 큰 영향을 끼친 천재 중 하나이다. 각각 문과, 이과 버전인지..?

저우 유광은 겁나게 똑똑했을 뿐만 아니라 겁나게 장수하기도 했다. 1906년에 태어나서 바로 3년 전, 2017년에 죽었다! 이 얘기를 해 주니 중국인 지인들도 꽤 놀라더라. >_<
철덕의 예시를 든다면, 경부선이 개통해서 증기 기관차가 다니던 해에 태어난 사람이 SRT 수서 고속철이 개통하는 걸 보고 죽었다는 얘기다. 심지어 자기 아들이 2015년에 80살의 나이로 먼저 죽었다..!!

남자가, 그것도 장수촌에서 평생 농사만 지으며 스트레스 없이 산 할배도 아니고, 교수 등 고위관직을 넘나들던 아저씨가 110세를 찍었다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백 선엽 장군이 오늘 내일 100세 진입이긴 하다만..

그리고 첸 쉐썬 박사도 저우 박사만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1911년 태생, 2009년 사망으로, 100세에 근접하며 꽤 장수했다.
비슷한 연배인 타국의 로켓 과학자들과는 확연하게 비교된다. 독일-미국의 베르너 폰 브라운(1912-1977), 소련의 세르게이 코롤료프(1907-1966) 말이다.
누구든 몸 관리는 자기가 알아서 잘 해야겠다.;;

2. 일본: LHA의 개발자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1988년에 한국에서는 어떤 겁나게 똑똑한 의사가 '백신'이라는 이름으로 안티바이러스 유틸을 만들었다.
그런데 1988년에 일본에서는 어떤 겁나게 똑똑한 의사가 파일 압축 유틸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LHA. 개발자인 요시자키 하루야스는 최근 사진과 근황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은 아니다만, 여러 사이트들에서 1955년생의 내과의사(physician) 겸 아마추어 프로그래머라고 그럭저럭 소개돼 있다.

저 사람이 압축 알고리즘 자체를 완전히 새로 고안한 건 아니었다. 단지, 그 당시 외국 서적을 통해 압축 알고리즘 이론을 공부해 보고는 흥미를 느껴서 그걸 그대로 또는 자기 식으로 조금 바꿔서 어셈블리어로 코딩해 보고 lzh 파일 포맷을 만들고, 파일들을 한데 묶어 주는 유틸리티를 구현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그때는 PC 통신으로 파일을 주고 받기 위해서는 압축 유틸을 다루는 게 필수였다. 소요 시간과 전화 요금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껏해야 format a: , diskcopy a: b: 이러던 시절에 압축 유틸리티는 이례적으로 명령 옵션 사용이 좀 복잡한 프로그램이었다. 그 시절에 압축 유틸리티라는 게 lha a xxx.lzh *.* (압축하기) 이런 식으로 사용되곤 했기 때문이다.

LHA는 일단 일본 내부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국민 압축 프로그램으로 등극했으며, 일본과 가까워서 그런지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탔다. 내 개인적으로도 집 컴이 286 AT이던 시절, 태어나서 처음으로 써 본 압축 유틸리티는 pkzip이 아니라 LHA였다.
한국· 일본뿐만 아니라 영미권에도 알려졌는지, id 소프트웨어에서 Doom 같은 게임을 배포할 때 바이너리들이 이 방식으로 압축되었다고 한다. (정작 그 시절에 도스용 아래아한글은 내 기억으로 zip 압축이었는데..)

개발자분은 pkzip의 개발자인 필 카츠와도 종종 연락하고 친목을 나누면서 90년대 초까지는 프로그램을 버전업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인지라(능덕..) 프로그래밍에서는 서서히 손을 떼게 되었고, LHA는 후임 개발자 없이 압축률과 처리 속도 면에서 ZIP을 비롯한 타 압축 파일에 밀리기 시작했다. 유니코드, 64비트, 멀티코어 지원, 보안 문제 등등에도 대응하지 못했다.

Windows의 경우 XP에선가 zip 압축 파일 내부를 탐색기에서 일반 폴더 들여다보듯이 직통으로 조회하는 기능이 추가되었는데, 일본어판은 LZH 파일 내부도 그렇게 들여다보는 기능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직접 확인은 못 해 봤음)

허나 2010년대에 와서는 일본 내부에서도 각종 소프트웨어에서 LZH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대를 풍미했던 압축 파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누가 만들었는지 LHICE라는 프로그램과 *.ice라는 압축 파일도 나돌았었는데.. 이건 그냥 LHA/LZH과 동일한 클론일 뿐이다.

3. 한국: 배우 신 영균

지난해 11월엔 원로 배우 신 영균 씨가 전재산 환원을 선언하면서 언론 인터뷰에 나섰다. (☞ 링크)
기사의 제목을 "내 관엔 성경책만 넣어 달라"라고 뽑으니 이거 뭐 당사자가 오늘 내일 하는 위독한 상황이고 유언을 남기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사자는 91세의 나이에도 쟁쟁하시다. 사진만 보면 그냥 평범한 70대 노신사 정도로나 보일 정도로 건강하다~!

이분은.. 그야말로 만능 엄찬아였다.
집안 사정 때문에 서울대 치의대를 나와서 치과 의사를 시작했지만.. 연기를 너무 좋아하던 개인적인 꿈을 떨칠 수 없어서 결국 병원 때려치우고 이미 처자식이 있는 상태에서 데뷔했다. 196~70년대에 배우 및 영화 제작자로 전격 전업했다.
그래서 그 이름도 유명한 1964년의 최고 흥행작 <빨간 마후라>에서 주연 배우를 맡았다.

이분은 그러다가 사업과 부동산 투자에도 손대서 대성공을 거뒀다. 영화관을 통째로 소유하는 등 몇백억 대의 자산가가 되었고, 나중에는 교수, 정치인까지 역임했다.
인생 자체가 영화나 다름없는 입 쩍 벌어지는 ㅎㄷㄷ한 분이다. 의사부터 하다가 사업, 정치까지 다 손대고 갑부가 됐다는 점에서는 안 철수나 공 병우하고도 비슷하네..

그런데 이분은 그냥 세상적인 성공으로도 모자라서 신앙까지 완전 독실했다. 프로필 상의 종교는 침례교였다는데..
그 당시에 잘나가던 배우들이 갖은 스캔들에 이혼 이력 하나 없는 경우가 없다시피했던 반면, 이분은 그렇지 않았다. 술· 담배 안 하고, 평생 한 아내하고만 아무 트러블 없이 가정과 직업에 충실하며 살았다.

이 정도면 가히 모든 걸 완벽하게 이룬 분 같다. 완전 부럽다. 자기 인생이 자기가 연기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자서전이라도 쓴 게 없나 궁금하다.
이런 옛날 사람에 대해 내가 어떻게 아냐 하면.. 잘 알다시피 예전에 “소령 강 재구”부터 시작해서 옛날 영화 좀 뒤져보다가 프로필이 하도 인상적인 분이 있어서 기억에 남게 됐다.

비슷한 시기에 마침 17년을 재직하다가 91세 나이로 퇴직하신 맥도널드 최고령 알바 어르신 얘기가 보도됐던데.. 그분하고 거의 같은 연배인 것도 신기하다.

4. 박사

우리나라와 관련된 근현대 인물 중에는.. 대학원에서 논문 쓰고 통과되어 정식으로 박사학위를 받지 않았지만 관례상 박사라고 불리는 인물이 좀 있다.

가령, 서 재필은 의사이지, 박사학위 소지자는 아니다. 아마 의사 doctor와 박사 doctor가 헷갈려서 박사라는 호칭이 붙은 것 같다. 옛날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여사를 보고도 '호주댁'(오스트레일리아?)이라는 별명이 통용될 정도였으니..
뭐, 서 재필은 한국인 최초로 서양의 의대 코스를 마친 사람었으며, 의사는 그 자체만으로 석· 박사에 준하는 고된 교육과정을 마친 사람이긴 하다.

또한, 호머 헐버트 역시 다트머스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박사학위 소지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 정도 공식 학력만으로도 교육자로서 거의 대학 강사급의 일을 한 똑똑한 사람이긴 했다. 언어학, 신학 등 다방면에서 말이다.
이들과 달리 이 승만 할배야 누구나 잘 알다시피 진짜 미국 대학 박사 1호였고, 프랭크 스코필드는 수의학 박사였다. 공 병우 박사도 단순 의사를 넘어 나고야 제국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까지 딴 사람이다.

5. 과학 분야 노벨 상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일본은 이제 일곱째도 아니고 17째도 아니고.. 무려 27째 노벨 상 수상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저 동네는 애초에 중소기업 연구원이 노벨 상을 받는 미친 나라이다. 노벨 상이 무슨 동네 똥개 이름도 아니고 뭐 저렇게 흔해 빠졌냐..

지난 2014년엔 청색 LED 관련 연구를 한 사람이 물리학상을 받았었는데 이번에는 리튬이온 전지 차례구나. 디스플레이, 그리고 2차 전지.. 다 오늘날 매우 중요하고 실용성이 높은 연구 분야이다.
일본의 저력은 알면 알수록 대단하고 무섭다. 그리고 저런 라이벌을 과거에 실력으로 꺾었던 현대와 삼성 경영주와 엔지니어들이야말로 진짜 우리나라 최고의 애국자였다.

요즘은 노벨 상 수상자들의 연령이 예전에 비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평생을 한 분야 외길만 파다가 인생 황혼기인 7, 80대 때 받는 게 보통이다.
정말 엄청난 돈지랄 인프라가 필요해서 여기 국력과 경제력으로 도저히 감당 불가능한 예외적인 분야가 아닌 한.. 노벨 상 수상자가 나오려면 방망이 깎던 노인, 독 짓는 늙은이, 은전 한 닢 같은 근성의 외곬수 과학 기술 덕후가 존중받고 예우받고 마음껏 오덕질을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저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 그냥 떼거지로 우글거려야 하고, 상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는데 덤으로 따라오는 구조가 돼야 한다.

우주인이니 금메달리스트니 스타 과학자(그놈의 노벨 상 받는)니 육성하겠다고 난리법석 떨고 나라에서 멍석 깔고 전시행정 쑈 헛짓을 벌이면 벌일수록, 우리나라는 노벨 상과는 더욱 멀어지고 요원해질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1/01 08:32 2020/01/0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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