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사와 형사, 고의와 과실

우리나라 형법은 고의성 없이 의도치 않게 실수로 사고를 치고 피해를 끼친 것은 '기본적으로' 처벌을 하지 않는다. 전과자를 만드는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도를 불문하고 어쨌든 사고 쳐서 남에게 피해 끼친 걸 '액면 그대로 물어내도록' 강제 절차를 취하는 건.. 형사가 아니라 민사 소송의 영역이다.

그 대신, 형사의 관점은 가해자가 고의로 저지른 범법 행위의 흉악성이다. 물론 피해가 클수록 더 흉악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 관계가 언제나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형사는 "단돈 100원을 훔쳤더라도, 피해자가 당한 피해가 미미하더라도, 절도는 중죄다." 이런 관점이다. 상습적이거나 직무상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저건 경범죄가 아닌 형사처벌 중범죄가 된다.

그럼 빌려 준 돈 갚으라고 법으로 대응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못 갚는 게 아니라 일부러 배째라 엿먹어라 안 갚는 거고, 돈 빌리던 처음 순간부터 갚을 생각 따윈 전혀 없었을 정도로 (1) 정말 단단히 악의적이어야만..!!
그래야만 민사를 넘어 사기죄로 형사 고발까지 가능하다. 그리고 그걸 입증하는 건 대단히 어렵다.

다만, 아무리 고의성이 없는 실수여도 (2) 비가역적으로 너무 큰 피해를 끼친 건 형사처벌이 뒤따른다.
운전 중에 졸다가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게 하거나 중상해를 입히거나..
담배꽁초를 잘못 버려서 야산을 홀랑 다 불태워 버리거나.

사람 죽인 걸 민사에서 승소했다고 해서 도로 살려 받을 수 있지는 않다.;; 그러니 그건 가해자를 벌주는 걸로 처리해야 정의로울 것이다. 이것이 민사와 형사의 관점 차이라 하겠다. 입법, 사법, 행정이 분리됐을 뿐만 아니라 민사와 형사도 영역이 나뉜 것이다.
형벌인 벌금 역시 피해자의 피해 보상에 쓰이는 돈이 아니다. 그건 그냥 세외수입 명목으로 국고로 갈 뿐이고, 피해 보상금은 배상금, 추징금 등 다른 경로로 움직인다.

또한, 어렵고 위험한 일을 (3) 돈 받으면서 직업으로 수행하는데 큰 실수를 저지른 건.. 미안하지만 '업무상 중과실' 어쩌구 운운하는 형사 처벌로 이어진다.
의사가 어처구니없는 의료 사고로 환자를 죽였거나, 용접공이 작업하다가 불똥 잘못 튀겨서 가스를 폭발시켰거나..
여객기 조종사가 한눈 팔다가 자기 잘못으로 뱅기를 추락시켜서 승객들을 죽였거나 등..

물론 과실범은 고의범보다는 더 가볍게 처벌된다. 감방을 가도 징역이 아니라 금고로 처분된다.
그리고 형사 처벌은 끼친 잘못이나 수습 비용에 '정비례'해서 형량이 한없이 올라가는 시스템이 아니다. 정비례해서 올라가는 건 민사 배상이나 행정처분일 뿐이다.

가령,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이면 킬 수 n에 정비례해서 면허 취소 벌점이 쌓이기는 한다. 그러나 금고/징역 형량이 5+n년으로 쭉쭉 올라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다른 모든 과실 중범죄는 'n년 이하의 금고'인 반면, 산불만은 악질적인 방화가 아닌 단순 실화이더라도 산림보호법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이 규정되어 있다.
지난번에 시청 역 차량 돌진 사고로 사람 9명을 죽인 가해자의 형량이 "금고" 7년 6개월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자.;;

산불로 온 나라를 작살을 낸 사람이라면 감방만 갔다 온다고 일이 끝나지는 않는다. 그 다음은 민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이 숲 다 날리고 나서 임로를 뒤늦게라도 제대로 닦았으면 좋겠다.;;

(4) 형사처벌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실수였다고 무작정 다 용서되지는 않는 사례는 다음과 같이 생각보다 다양하다.

- 마약 복용이나 운반이 적발된 거(던지기), 운동 선수가 도핑에 적발된 거는.. 이유 불문하고 당사자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그러니 공항에서 낯선 사람의 물건 운반 요청에 절대 응하지 말아야 한다. 프로 운동 선수는 평소에 감기약 하나 복용하는 것도 일일이 코치나 주치의와 상의하면서 극도로 몸을 사려야 한다.

- 운행하는 자기 자동차의 번호판이 외부의 이물질 때문에 일부라도 가려지는 것 역시.. 아무리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였다 해도 과태료를 꽤 비싸게 먹는다! 이건 넓은 의미에서 대포차를 모는 거나 다름없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니 주의해야 한다.

2. 판사와 검사

지난 1997년 4월경엔 이태원 살인 사건이란 게 벌어졌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느 고삐리 싸이코패스 주한미군이 타메시기리--옛날에 사무라이가 자기 검의 성능을 시험한답시고 길거리의 아무 행인이나 뎅겅 하던 짓거리--라도 하듯이 화장실에서 사람을 흉기로 난자해서 죽인 묻지 마 살인이었다.

옛날에는 잊을 법하면 이렇게 주한미군 중에 질 안 좋은 놈이 사고 친 게 보도되곤 했다. 그러면 또 일각에서는 “더는 못 참겠다! 주한미군은 당장 꺼져라~ 우리민족끼리 통일통일” 이렇게 선동질을 했고 말이다.
햐~ 그러고 보니 효순 미선 장갑차 압사 사고도 벌써 20년도 더 전 일이 됐다. 이런 분야의 사건 사고를 다시 떠올려 보니 참 감개무량하다. 아무튼~~

저 사건은 용의자가 금방 색출되어 붙잡혔는데.. 문제는 2명 중에서 누가 살인범 주범이고 누가 망만 본 종범인지 확실치 않았다는 것이었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두 여인이 이 아기는 자기 꺼라고 주장했듯이, 여기서는 패터슨과 에드워드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이 살인범이라면서 책임을 떠넘겼다.

이럴 때, 전근대 사법 시스템이라면 진범이 겁에 질려 제 발로 자백하고 실토할 때까지 둘 다 진실의 방에 쳐박아 넣고 죽어라고 물리 치료를 시키거나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처방밖에 답이 없었을 것이다. 허나 그건 요즘 관점에서는 너무 무식하고 야만적인 방법이니 아웃이고;;

이 사건에서 둘 중 누가 진범인지를 가리는 건 판사가 아니라 검사의 영역이 됐다. 이렇게까지 너무 고지식하게 역할 분담을 한 게 효율적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쨌든 판사는 기소된 죄목에 대해서만 유죄 여부와 형량을 판정했다.

그리고 이때 이 사건을 맡았던 박 검사라는 사람이 잘 알다시피 심각하게 트롤짓을 했다. 자기 신념 하나에만 꽂혀서 살인범 판정을 정반대로 엉뚱하게 하는 바람에 그 뒤의 일들을 몽땅 꼬이게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을 고생시켰다.
게다가 진범을 출국 정지 연장조차 깜빡(?) 잊고 안 해서 미국으로 보내 줘 버린 건.. 도저히 옹호해 주기 힘들겠다.

자기가 미군 범죄 수사부보다도 정확하게 범인을 찾아냈다고 자뻑하고 있었는데 2015년엔 결국 자기가 풀어 준 범인이 어렵게 도로 한국으로 송환됐다. 그때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실제로 그는 이게 엄청난 흑역사 오점 트라우마가 됐다. 나중에 주변에서 이태원 살인 사건이 거론되기만 하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현실부정에 신경질 히스테리를 보였다고 한다.

저 사람은 나중에는 지방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살다가.. 2023년에는 ㅈㅅ로 석연찮게 생을 마감했다.
의사 중에 돌팔이가 있다면 법조인 중에는 안타깝지만 저런 부류도 있긴 한 것 같다.

이태원 살인 사건과 비슷한 시기인 1995년에 치과 의사 모녀 살인 사건도.. 우리나라 검찰이 외국 법의학자들까지 동원한 변론 방어를 못 이기고 피고는 최종 무죄 판결, 그 대신 진범은 영원히 놓친 케이스가 됐다. 저것도 참 아리까리한 사건이었다.
이러니 법조인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3. 과거와 현재

옛날 조선 시대엔..

(1) 남을 고의로 죽인 살인죄라도 그 이유가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그랬다"이고 그게 사실이었다면 정상참작을 매우 많이 해서 형량을 크게 줄여 줬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 패륜 범죄는 더 엄하게 처벌했다. 그리고 옛날답게 존속에 대한 패륜에 비해서 반대 방향으로 아동학대 같은 것에 대한 인식과 처벌은 미약했다. 아예 왕궁에서 왕자조차 애비로부터 혹독한 학대를 당하기도 했을 정도이니..

(2) 지방 수령이 국고를 사적으로 횡령하는 큰 부정부패를 저질렀더라도..
횡령한 재물을 자식새끼 장가· 시집 보내는 혼수 비용에 썼다고 하면 정상참작과 감형이 많이 됐다.
횡령 액수에서도 그건 차감하고 계산했을 정도였다.

(3) 저 때는 오늘날 관점에서 비인간적인 '연좌제', '삼족을 멸할 죄'라는 게 존재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적 정도로 선 넘는 게 아니라면.. 죄 짓고 쫓기는 죄인을 '가족'이 숨겨 주고 도피를 도운 것에 대해서는 불고지죄나 연대책임을 묻지 않았다.
가족 혈연에 대해서 "가재는 게 편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가 뭔가 보편적인 인륜이고 법리라고 인정한 것이다.

저 때는 법이 지금보다 좀 더 친가정적인 면모가 있었던 것 같다.;;
가족이기 때문에 이럴 때는 더 눈감아 주는 대신, 반대로 저걸 어겼을 때는 더 크게 처벌한다~~ 이런 식이라면 논리적으로 충분히 수긍이 간다.

이 이념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에도 어느 정도 반영돼 있다. 허나,

  • 중증 정신병자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감금시키는 건 오로지 가족이 동의했을 때만 가능하다. (더 글로리 드라마에서도 묘사됐듯이!)
  •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한 애들이.. 정작 알바를 하려고 해도 부모 동의가 있어야 하니 밖에서 먹고 살기 위해 당장 할 만한 게 범죄밖에 없다~~

이건 그 가정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을 때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오죽했으면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사법 역사상, 고의 살인 중에 최고의 동정 실드를 얻은 건 "김 보은 양 사건"이었으니 말이다(의붓애비가 딸한테..).
그리고 "이 은석 사건"도 단순 존속살인 패륜 사건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 사람 정도면 가석방도 되지 않을지..?

애가 극심한 가정폭력 아동학대를 못 견뎌서, 혹은 중증 치매 간병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부모를 죽이고 자수한 거,
아니면 덩치 커지고 힘은 센데 중증 자폐 때문에 사고 치는 걸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반대로 부모가 "너 죽고 나 죽자" 심정으로 아들을 죽여 버리고 자수한 거..
이런 것도 뉴스에 뜨면 댓글은 온통 동정 실드로 가득해진다. 이런 건 비록 고의적인 살인이지만 여느 흉악범죄 살인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영예(!!)를 얻은 살인은 박 기서 씨의 안 두희 피살 사건이지 싶다. 부모의 원수 정도를 넘어 국가의 원수를 갚는 급의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몽둥이여도 구일본 해군의 정신주입봉은 그냥 똥군기의 상징이지만, 우리나라 '정의봉'은 뭐.. 심지어 경찰이 범행 도구를 몰수하지 않고 당사자에게 고이 돌려줬을 정도였다.

Posted by 사무엘

2025/06/04 08:36 2025/06/0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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