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시내버스라는 게 역사상 최초로 운행된 건 1920년 7월 1일, 대구에서이다.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다. 거기는 노면전차와 철도가 국내 최초였고 길거리에 택시는 다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시내버스 같은 건 없었다. 서울에서 시내버스가 등장한 건 그로부터 8년 가까이 지난 1928년 4월의 일이다.

그때는 시내버스만 해도 아무나 탈 수 없었으며, 버스 운전사는 지금의 철도 기관사나 여객기 조종사에 준하는 완전 뽀대 나는 유니폼 착용 전문직이었다. 한 마디로 지금보다 지위가 훨씬 더 높았다.

예전에 버스에 대해서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래도 버스의 외형과 시설의 변천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가장 큰 이유로는 검색해 보니 이 주제를 워낙 잘 정리해 놓은 사이트가 이미 있어서 내가 따로 글을 쓸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지 싶다. 그러니 이 블로그에서는 그냥 변화의 큰 추세를 요약만 좀 해 보겠다.

1. 1950년대: 원박스화

먼 옛날, 20세기 초중반에 자동차들의 디자인 트렌드는 소형차건 대형차건 엔진룸은 전면부 중앙에 튀어나오고 앞바퀴 펜더가 돌출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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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50년대쯤부터는 엔진룸이 별도로 튀어나오지 않고 차체 바닥 밑으로 간 원박스형(혹은 R캡이라고도 불림) 버스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때는 버스의 디자인이 지금과 비슷해지기 시작한 일종의 과도기라 볼 수 있다. 50년대 말에 등장한 시발디젤 버스도 그런 형태이며, 관련 사진은 이 블로그를 검색해 보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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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의 부산 정치 파동 때 국회의원들이 탔던 버스도 사진을 보니 정확한 차종과 제조사는 알 수 없지만 원박스형 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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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0년대: 디젤, 안내양

이때부터 시내버스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어서 시민의 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노면전차가 폐지되었다.
버스의 차체가 더 커지기 시작했고, 엔진이 휘발유에서 디젤 기반으로 바뀌었다. 시발 버스도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냥 버스가 아니라 '디젤 버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시내버스에는 공식적으로 '여차장'이라 불리던 안내양이 등장했다. 모든 승객이 타거나 내린 뒤, 안내양이 차를 툭툭 치며 "오라이!"라고 운전사에게 외치는 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도 나온다.

지하철 업계에는 승객을 강제로 밀어넣는 푸시맨이 있었던 것과 비슷하게, 옛날에 시내버스는 문을 닫을 수 없을 정도로 승객이 너무 많이 탔을 때의 대처법이 있었다. 일단 출발 후 운전사가 직선 도로에서도 오른쪽으로 살짝 급핸들 조작을 해서 사람들을 원심력 때문에 왼쪽으로 강제로 쏠리게 했다. 그 사이에 안내양이 문을 닫았다. 그런 기동이 벌어지기도 했댄다.

옛날엔 시골에서 무작정 올라와서 가진 것 배운 것 없이 맨몸만으로 돈을 벌기 위해 버스 안내양 직업을 선택한 여성들이 많았다. 이들의 애환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버스 요금을 차내에서 현금으로만 거래하던 시절에는 돈 관리도 안내양이 했는데, 정확한 승차자의 집계가 안 되니 승객으로부터 받은 돈의 일부를 안내양이 슬쩍 '삥땅', 횡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 역시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안내양들이 근무 중일 때는 개인 돈을 절대로 지참하지 못하게 하고, 지금의 관점에서는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인권유린일 정도로 가혹한 방식으로 불시 몸수색을 했다고도 한다. 그래도 그때는 약한 을인 안내양들이 이의 제기를 할 수 있지 않았다.
(참고로 조폐공사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지금도 작업장에 드나들 때 개인 돈은 절대 지참하지 못한다. 개인 사물함에다 몽땅 보관해야 한다.)

3. 1970년대: 두짝 문, 고속버스

과거의 버스들은 앞바퀴가 차체의 굉장히 앞에 있었으며, 출입문은 가운데에 한 군데에만 있었다. 지금은 마이크로버스만이 이런 형태인데 말이다. 안내양은 바로 그 문의 문지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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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레알 말죽거리 잔혹사 시절 시내버스의 모습이다.)

그러다 70년대 후반쯤부터 대형 시내버스들은 요즘 버스처럼 앞문과 뒷문 구분이 생겼으며 앞문은 앞바퀴보다 더 앞에 놓이게 되었다. 단, 문은 수동 개폐식이었으며 뒷문도 앞문처럼 폴더(?) 형태로 접혔다. 이런 버스 보신 분 계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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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타는 문과 내리는 문을 분리하고 나니 승객의 승하차가 더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아울러, 시내버스 얘기는 아니지만 1970년에는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 덕분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고속버스라는 게 등장했다.
그 시절에도 경부선 열차를 타면 서울-부산을 5시간 이내에 주파할 수 있긴 했지만 그건 관광호 내지 새마을호처럼 서민이 범접하기 어려운 매우 비싸고 빠르고 정차역 적은 최고 등급 열차를 탔을 때에나 가능했다.

그런데 고속버스라는 '자동차'를 이용해서도 열차 만만찮은 빠른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졌으니 이때 고속버스의 인기는 대단했다.
고속버스 운전사는 지금의 KTX 기장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고속버스에도 안내양이 탑승했다.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안전벨트를 챙겨 주고 짐 나르는 걸 돕는 등, 지금 비행기 스튜어디스가 하는 일을 차내에서 했다. 가고 서기를 반복하는 시내버스 안내양과는 하는 일이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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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80년대: 리어 엔진, 토큰, 하차벨, 자동문

그 뒤 1980년대에는 후방 엔진 버스가 등장해서 대형 버스들은 다 이런 형태로 바뀌었다. 전방 엔진은 앞부분에 타는 곳이 굉장히 높으며, 운전석 옆에 따끈한 물건 거치대가 있었다. 그 대신 맨 뒷좌석은 봉긋 솟아 있지 않고 높이가 다른 좌석들과 동일했다.

그 밖에 이 시기에는 시내버스에서 안내양이 퇴출되는 기술적인 기반이 차근차근 마련됐다. 먼저 현금 대신 버스 토큰이 등장하여 차내에서 번거로운 잔돈 거래를 하는 여지가 줄었다. (서울 시내버스에서의 첫 도입 시기는 1977년)
그리고 차내에 하차벨이 생겼으며, 사람이 일일이 뭘 돌리지 않고 버튼만 누르면 별도의 동력으로 개폐되는 자동문이 등장해서 이쪽으로도 동작이 수월해졌다. 뒷문은 폴더가 아니라 미닫이 형태로 바뀌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1인 승무 시내버스의 원형은 이때쯤 대부분 완성되었다.

5. 1990년대: 에어컨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1989년 12월 말을 끝으로 안내양은 전국의 시내버스에서 법적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여차장을 둬야 한다는 법 조항 자체가 개정과 함께 삭제됐다.
그리고 나라가 좀 살 만해지고 자동차 기술의 발달 덕분에 엔진 출력도 넉넉해지면서 버스에 냉방기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90년대에는 전철도 아직 천장에 선풍기가 달려 있고, 지하철역 승강장은 여름에 너무 덥다고 뉴스에서도 난리를 칠 정도였다.

시내버스에 자동 변속기가 도입된 것도 이 무렵에 도입된 현대 애어로시티가 최초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대형 상용차에 자동 변속기는 비싼 추가 옵션 가격과 연비· 효율 문제로 인해 2010년대인 지금까지도 보급이 더딘 편이다.

6. 2000년대와 이후: 저상버스, 천연가스 버스, 환승 할인, 정거장 안내방송, 위치 안내

21세기에 시내버스는 생각보다 굉장한 발전을 거듭했다.
먼저 타고 내리기 쉬운 저상버스가 등장했으며 버스들이 동력원도 천연가스로 바뀌어서 대도시의 공기 질 개선에 굉장히 큰 기여를 했다.

그 밖에 IT 기술과 접목하여 환승 할인, 정류장 위치 안내 시스템도 20세기에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요 근래에는 그냥 도착 안내만 하는 게 아니라, 오는 버스들의 내부 혼잡도를 같이 표시해 주는 기능도 추가되어 매우 유용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내버스 요금은 먼 옛날과 비교했을 때 평균 물가 상승률보다 훨씬 더 가파르게 많이 오른 요금에 속한다.
버스 요금은 처음에 단가 자체가 절대적으로 굉장히 저렴했으며, 지금은 버스의 수송 분담률이 옛날보다 매우 낮아져서 개인당 단가가 크게 오르기도 했다. 거기에다 우리는 각종 IT 인프라 덕분에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더 편리하게 버스를 이용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비싼 요금이 마냥 바가지인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31 08:26 2017/05/3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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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체계 대통령 대수 대통령 개헌 내력 북괴
미군정 존 하지   소련정
1공 (1948) 1 이 승만 제헌헌법, 대통령 4년+1중임, 부통령, 간선 김 일성
2 1차, 대통령 직선제 (부산 정치 파동, 발췌개헌)  
3 2차, 초대에만 중임 제한 폐지 (사사오입) 8월 종파 사건 (정적 숙청)
2공 (1960) 4 윤 보선 3차, 의원내각. 최초의 졸속 아닌 합법적 개헌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4차, 1공 시절 잔재 청산??  
3공 (1962) 5 (vs 윤 보선) 박 정희 5차, 대통령 중심제로 회귀. 지방자치 사실상 사문화  
6 (vs 윤 보선)    
7 (vs 김 대중) 6차, 3선 개헌  
4공 (1972) 8 단 7차, 유신, 대통령 6년+무제한 중임, 간선 주체사상 명문화 (자가신격화)
9 독
10 출 (1979) 최 규하    
11 마 (1980) 전 두환    
5공 (1981) 12 8차, 대통령 7년 단임  
6공 (1988) 13 노 태우 9차, 대통령 5년 단임, 직선; 지방자치제 부활  
14 김 영삼   김 정일, 고난의 행군 (경제 파탄)
15 김 대중    
16 노 무현    
17 이 명박  
18 박 근혜  3공과 6공 그 어떤 선거 때보다도 많은 득표율로 당선됐지만..;; 탄핵소추 파면 김 정은

대한민국, 남한이라는 이 나라는 다음과 같은 점들로 인해 여느 나라들과 같지 않은 독특한 현대사를 보유하고 있다.

  • 20세기 중반에 주변 나라들과는 달리 매우 이례적으로 공산화되지 않았다.
  • 일본의 덴노 같은 정신적인 지주나 중심점이 있지 않으며, 그나마 있던 것도 조선이 망하면서 싹 사라졌다.
  • 미국처럼 초대 대통령이 2선만 하고 깔끔하게 물러났다거나, 쿠데타 한 번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오지 않았다. 미국은 도중에 중임 관련 규정만이 살짝 바뀌었을 뿐, 대통령의 임기 체계 자체가 우리나라 헌정사 같은 급의 큰 변화나 굴곡을 겪은 적은 없다.

본인은 노 태우 대통령 내지 서울 올림픽 시기가 스스로 경험한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가장 먼 과거이다. 그 이전은 기록을 통해 간접 체험만을 한 선사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5공 시절을 직접 경험한 기억이 없다. 노 태우의 바로 전임까지만 해도 대통령을 5년마다 한 번씩 뽑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 체계가 완전히 달랐다는 얘기가 대단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그땐 도대체 선거를 어떻게 했기에 이 승만이나 박 정희는 1~3대, 5~9대로 대통령을 그렇게 오래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굳이 왜 기간과 대수를 나누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각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야 개인의 정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런 들쭉날쭉한 자국의 헌정사 자체는 역덕후에게 뭔가 유사점과 차이점을 정리하고 분석할 만한 좋은 아이템인 것 같다.

가장 먼저 미군정부터 생각해 보자. 미군정은 기간이 짧고 존재감 없는 과도기여서 잘 부각되지 않지만, 알고 보면 단군의 후손들이 거의 전무후무하게 백인(미군정 사령관인 존 하지 장군)의 통치를 받은 시절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독특하다. 마치 신미양요가 분단 이전에 단군의 후손이 무려 미국과 군사 교전을 벌인 전무후무한 사건인 것처럼 말이다.
한국은 일제 식민지가 됐을지언정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입각한 서양 백인들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나라이다. 영국이라든가 스페인이라든가... 대한민국 역사상의 미군정은 저런 이념에 따른 지배는 아니었다.

그 뒤 우리나라 역사상 통치 기간이 가장 길었던 대통령 톱 3(쓰리)는 이 승만, 박 정희, 전 두환이다. 이 승만은 선출은 선거를 통해 무리 없이 됐지만 훗날 장기 집권을 위한 꼼수 개헌을 했으며, 박 정희는 쿠데타에다가 장기 집권 개헌을 모두 자행한 인물이다. 마지막 전 두환은 집권을 위한 쿠데타만 저질렀으며 임기 만료 후에는 군소리 없이 물러나긴 했는데.. 이것도 전국민적 저항이 없었으면 물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있긴 하다.

초대 제헌헌법이 규정하는 대통령 체제는 보다시피 완전 미국 스타일인 걸 알 수 있다. 이 승만은 1~3대 대통령을 역임했는데, 위의 표에서 보다시피 매번 헌법을 자신의 당선에 유리하게 약간씩 뜯어고쳤다. 직선제는 그 자체는 나쁠 것 없는 선거 제도이지만, 아마도 꼴보기 싫은 야당 의원이 아니라 무지몽매한 민중을 돈과 서커스로 꾀어서 직접 투표를 시키면 여당에게 더 유리할 것 같아서 도입한 듯하다. 그래도 2선 때는 우리나라가 아직 전쟁 중인 관계로 정서적으로 어지간해서는 집권 여당을 바꾸지 않으려고 하니 이 승만의 당선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3선 이상까지 하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심지어 롤모델 국가인 미국에서도 대공황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경험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같은 사례 말고는 찾기 어렵다. 그러니 단순한 정치깡패 동원이나 부정선거만으로는 안 되고 또 헌법을 고쳐야 했다.

다른 대통령도 아니고 초대 대통령이 벌써 저런 짓을 하면 얼마나 안 좋은 선례가 남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그 고령에 그 검소한 구두쇠 대통령이 다른 돈과 권력, 명예를 탐해서 저런 짓을 한 건 아니고, 그냥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내가 꽉 붙들지 않고 야당에게 정권을 선뜻 넘겨 줬다간 남조선이 또 공산당 손에 넘어갈 것 같다."라는 자격지심 똥고집 때문에 저렇게 된 것 같다. 그게 아무 근거 없는 황당한 망상도 아닐 뿐더러 인의 장막은 그 기질을 더욱 부추겼을 테고. 게다가 신 익희(1956), 조 병옥(1960) 같은 야당 라이벌 정치인이 알아서 없어져 주기까지 한 덕분에 3선과 4선은 더욱 수월하게 넘겼다.

허나 도를 넘는 부정선거가 폭로되면서 12년 독재를 참다못한 국민들로부터 전국적인 혁명이 일어나자, 이 승만은 현실을 직시하고 하야를 선택하게 됐다. 제1 공화국은 자신은 부정부패와 독재를 저지르면서도, 참 아이러니하게 국민들에게는 국민학교에서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릴 만한 사상적인 기반을 듬뿍 마련해 줬다. 비록 현실이 시궁창이었을지언정 최소한 방향만은 올발랐던 셈. 이로 인해 남한과 북한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이 승만 얘기가 갑자기 좀 길어졌는데, 그 다음 출범한 제2 공화국은 우리나라 헌정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인 의원내각제 정부이다. 군부나 독재자의 입김이 개입하지 않고 나름 최초로 합법적(?)인 절차로 개헌도 이뤄 냈다. 이게 제대로 시행됐으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 승만 시절과는 굉장히 딴판인 나라가 됐을 수도 있지만 박 정희 군사정권으로 인해 송두리째 뒤집어엎어지면서 이건 정말 짧고 존재감 없는 흑역사 헌정 체제가 됐다.

2공이 계속 유지되는 배경을 설정해서 대체 역사물 소설이나 영화가 충분히 나올 법해 보이지 않는가? 아예 조선이 망하지 않아서 입헌군주제가 계속 유지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보다야 더 현실적일 것 같지만.. 그래도 현실에서는 고종· 명성황후가 장 면· 윤 보선보다 존재감이 더 크고 대중적인 인기가 더 좋다.

2공은 '장 면 내각'이라고도 불린다. 다만, 장 면은 국무총리였고 대통령은 엄연히 윤 보선이었다. 이때 행해진 4차 개헌은 친일 반역자..는 아니고 1공 시절의 정치 깡패나 부정 선거 주동자 같은 반민주(반민족이 아님) 행위자를 처벌하고 청산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개헌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과거의 행위를 새로운 법으로 처벌하는 것이니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그때부터 있었다. 4공 시절 박통의 긴급조치 중 3호만은 그리 정치적이지 않고 생뚱맞은 민생 분야인 것과 비슷하게 4차 개헌은 나머지 개헌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그 다음으로,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의 주인공인 박 정희가 등장한다. 그는 대통령 선출은 훗날 전역 후 민간인 신분으로 된 것이고, 쿠데타 직후에 아직 군인 신분일 때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도 역임했었다.
이때는 아직 나라가 워낙 못살고 사회 기강이 불안하고 6· 25 시즌 2가 또 벌어질지 모르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다 갈아엎자" 식의 군사혁명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지지를 많이 받았다. 지금처럼 길거리에 뛰쳐나와 촛불 들고 "민주주의가 죽었습니다" 이럴 상황이 아니었다. 전땅크의 쿠데타 때와는 달리 박통의 쿠데타 때는 누가 막 심하게 저항하거나 죽지도 않았다.

박통은 차근차근 자본을 유치하고 경제 개발을 해 나갔다. 경부 고속도로도 3공 시절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겨우 한두 대만으로는 임기가 너무 짧았다. 온갖 공작으로 야당 후보를 간신히 이겼는데 3선을 하자니 진짜 이 승만 시절의 사사오입 개헌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헌법을 또 날치기로 고쳐야 하게 됐다. 그리고 나중에는 헌정 체계를 전반적으로 다 자기 독재에 맞게 뜯어고치는 유신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4공 체제에서는 단독 후보가 혼자 출마해서 꼭둑각시 의원들의 만장일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지만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앞서 언급했듯이 긴급조치라는 필살기도 내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정치 제도가 이렇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건 정치적으로 엄청난 모험이었기 때문에 반발을 최소화하려면 경제 개발, 민생 안정, 굳건한 반공 안보, "우리식 민주주의" 등 뭔가 좋은 명분을 만들어서 '유신'이라는 브랜드명(?)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세뇌를 시켜야 했다.

박 정희가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이 4공 체제가 도대체 얼마나 갔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가 9대 대통령의 예정 임기만 다 마쳤어도 이미 1984년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에서 5~8호선뿐만 아니라 3호선 양재-수서와 4호선 당고개도 시기적으로는 2기 지하철에 속하듯, 10대 최 규하와 11대 전 두환도 시기적으로는 이런 4공 체제에서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박통 당사자 말고 다른 정치인들이 이런 무지막지한 독재 헌정 체제를 받아들일 리 없었으므로 이내 쿠데타가 일어났고 헌법도 업데이트 됐다. 그래서 4공 중에서 8~9대는 유신 시대이지만, 10~11대는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라는 기구 휘하에 있었다.

박통이 암살 당한 뒤에도 1980년 서울의 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독재자가 물러났다고 해서 군대가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대통령 임기와 관련된 개헌은 그 당대의 대통령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가히 "신의 한 수" 소급 적용 금지 조항이 5공 시절 8차 개헌 때에야 드디어 추가되었다. 뭔가 "자백만이 형사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라면 그 자백은 인정되지 않는다", "피고인에게 유리한 법 개정만 소급 적용되고, 불리한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우여곡절 시행착오를 겪은 뒤, 우리나라는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6· 29 선언이 이뤄졌으며, 박 정희 유신 시절 이래로 없어졌던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고 5년 단임제가 정착했다. (5공 12대 대통령 선거도 유신 시절 같은 노골적인 단독 출마만 아니지, 주요 야당 후보들은 감금당한 채로 관제야당 후보들이나 참여한 답정너 선거였기 때문) 당장 13대 때는 후보 단일화 실패로 인해 또 전 두환의 육사 후배인 노 태우가 당선됐지만, 14대 이후부터는 순수 민간인 대통령이 나오고 있다.

이 1987년 9차 개헌이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10년 넘게, 아니 30년 가까이 장수하고 있는 헌정 체계이다. 과연 이 상태에서 헌법이 부분 또는 전면 개정돼서 7공화국이 나올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총평

1. 본인은 위와 같은 내력을 감안하고도 이 승만과 박 정희 대통령을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전자는 0에서 1을 만든 사람이고 후자는 1에서 100을 만든 사람이다. 그 절망적인 가난과 시궁창인 국민 의식, 북괴의 위협 속에서 그만치라도 이룬 게 용하고, 그 정도 독재는 막 잘했다고 칭송할 수는 없어도 이해와 수긍이 된다. 지금 역으로 의회와 언론의 막장 횡포를 생각하면, 옛날에 그 상황에서 그 정도 의회· 언론의 통제와 독재 없이 적화통일을 어떻게 막고 경제 성장이고 민주주의고를 어떻게 이룰 수 있었을까? 독재 정권이 뭘 그렇게까지 망쳐 놓을 게 있었는지 이상한 피해의식 선동에 공감하지 않는다.

2. 물론 경제 성장을 이룬 뒤에 이 정도 국민의 희생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이룬 것 역시 그 의미와 가치를 폄하하고 싶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는 충분히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군사 정권이 잘한 것을 실드 치더라도 그들의 쿠데타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고 싶지는 않다(장 태완 같은).
하지만 오늘날은 민주화라는 게 그냥 별 명분도 없이 그저 권위에 대항하고 반역하는 걸 합리화하는 데 쓰이고 국가 체제를 부정하고 필요악을 없애자고 하고 더 심하게는 반정부 종북 세력에게 선동되고 이용당하는 추세가 명백하여 본인은 이를 경계한다. 옛날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운동꾼들도 태극기를 들고 나오곤 했는데 요즘 어떤 사람들은 태극기와 애국가를 싫어하는 것 같다.

3. 북괴의 존재로 인해 대한민국은 무슨 분야든 천천히 여유롭게 발전을 할 수가 없어졌다. 여기서 우리나라 20세기 중후반의 대부분의 비극이 시작됐다. 또한 북괴 같은 저질이 존재함으로써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수준까지 하향평준화되었음도 명백히 사실이다. 뭔 무능과 비리를 저지르더라도 최소한 안보관· 사상 자체가 썩었거나 대놓고 북괴에다가 퍼주고 교류하자, 말만 번드르하게 포장해서 공산주의 하자는 놈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이건 우리나라 정치판의 고질병으로 남거나, 아니면 진짜 나라가 망해서 고생해 봐야 해결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28 08:33 2017/05/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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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초에 본인은 1년 전에 한번 오른 적이 있는 불암산을 다시 찾았다. 단, 북쪽의 당고개 역 인근에서 출발했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태릉 방면의 남쪽 구간만 잠깐 오르다가 곧장 하산했다. 여기를 답사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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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으로 지도를 만지작거리던 중, '공릉산 백세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문과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근처에는 서울 과학 기술 대학교와 원자력 병원이 있고, 산기슭에는 서울여대, 육사, 태릉 선수촌 등이 있다. 예전에 불암산을 올랐다가 돌아오면서 이 도로(화랑로)를 버스 타고 지난 적은 있지만, 정작 근처의 불암산 구간을 답사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여기를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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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뒤로 난 언덕길의 좌우로는 처음엔 평범한 울타리가 있다가 나중엔 살벌한 철책으로 바뀌기도 했다. 왼쪽엔 한전 인재 개발원은 고압 전기 시설 때문에 경비가 삼엄하며, 오른쪽에는 문화재인 태릉에다가 태릉 사격장이 있으니 아무래도 아무나 못 들어가게 통제를 해야 한다.
불암산이 남쪽엔 요주의 문화재와 보안 시설이 많이 자리잡아 있다. 그래서 이런 것들 말고 참호 같은 군사 시설도 있었고 거기에는 '촬영 금지 - xxxx부대장 백' 이런 표시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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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는 철책을 따라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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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딱 한 군데 전망이 트인 곳에서는 육사 캠퍼스가 희미하게 보였다. 지인용(智仁勇) 탑과 근처의 동그란 육군 박물관이 보인다. 봉화산에서는 육사를 전혀 볼 수 없었는데 산에서 저기를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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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인재 개발원에서는 한참 멀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바닥에는 한전에서 매설한 듯한 무슨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3 말고 4라고 적힌 것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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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불암산 남부의 등산로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나타났다. 서울 둘레길을 선택하면 인서울에 속한 산중턱 능선만 계속 타면서 북쪽의 당고개· 수락산 방면으로 갈 수 있다. 사실, 공릉산 백세문에서 시작해서 본인이 지금까지 걸은 길도 서울 둘레길이다.

아니면 다른 길로 가서 봉우리를 갈아탈 수 있다. 그러면 거기서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불암산의 정상으로 가거나 아니면 이 상태로 삼육 대학교 방면으로 하산할 수 있다.
본인은 오랜 고민 끝에 서울 둘레길은 더 가지 않고 정상· 삼육대 방면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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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철책이고 울타리고 뭐고 다 없어지고 산행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고 본인은 삼육대 방면으로 하산했다. 그러자 여기부터는 삼육대 사유지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각종 울타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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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정상은 바로 저기이다. 북한· 수락산처럼 얘도 꼭대기 부근은 온통 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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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삼육대 캠퍼스 안에 있는 그 유명한 '제명호'라는 인공 호수이다.
종교 계열 학교 아니랄까봐, 곳곳에서 금주 금연 강조하고 성경 말씀이 걸려 있고 "거룩한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에 등산객 여러분도 초대합니다" 이런 표지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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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육 대학교 백주년 기념관의 모습. 삼육 대학교 캠퍼스를 구경한 건 이번이 난생 처음이었다.
비록 불암산 자체는 별로 높게 오르지 않고 등산을 짤막하게 마쳤지만 작년에 갔던 곳과 중복되지 않는 구간만 다닌다는 목표는 달성했다.

천장산 기슭에 의릉이 있는 것처럼 여기 근처에는 태릉과 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가 보지는 않았다. 그 대신 본인은 여기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낮은 산인 초안산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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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산은 전철 1호선 녹천 역에서 내리면 코앞에 있다.
옆에 중랑천을 흐르는 동부 간선 도로가 원래는 강의 양 옆으로 상행과 하행이 달리는데, 여기 초안산 구간만은 부지가 없어서 전철 선로가 중랑천의 바로 옆을 지난다. 이 때문에 이곳은 동부 간선 도로도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병목과 정체가 발생하곤 했다.

도로의 확장을 위해 철도 선로를 이설하겠다는 계획이 거의 2000년대부터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진행은 지지부진한가 보다. 그래도 여기 주변의 풍경이 가까운 미래에 바뀌기는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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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산은 워낙 작고 낮은 산이며, 비슷한 체급인 봉화산처럼 등산로도 여기저기 많이 뚫려 있었다. 여느 산들처럼 어디에서 어디 지점까지가 수 km 거리가 아니다. 그냥 몇백 m만 설렁설렁 걸으면 된다.
원래는 산의 규모가 더 큰데 덕흥로라는 길을 내느라 둘로 쪼개진 듯하다(창동 주공 4단지 아파트, 생태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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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산치고는 정상 주변에 헬리패드도 있고 정자와 심지어 태극기 등, 메이저급 산의 정상에 있을 만한 시설은 다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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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초안산을 찾은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것.
초안산에는 조선 시대 궁궐 내시, 양반, 서민 등의 무덤이 1000여 개 가까이 있다고 한다. 정상 근처를 보니 웬 묘비와 석상들이 여럿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올랐던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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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 역에서 /자 모양으로 산을 남서쪽으로 가로질러서 하산했다. 역시 빽빽한 아파트와 빌라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25 08:31 2017/05/2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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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리플

  • 저그 해처리 레어 하이브 : 학사 석사 박사
  •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 서울 지하철 1호선 2호선 3호선 (힌트: 색깔의 유사성)
  • 크레용-크레파스-파스텔 : 짜장면-짜파게티-스파게티
  • 레코드 SP EP LP : 그래픽 카드 CGA EGA VGA =_=;;

세상에는 3개로 이뤄진 진영이 속성이 서로 다 동일하거나 제각기 다 다른 경우가 있다.
스타크래프트의 플토, 테란, 저그가 좋은 예이다. 미네랄과 가스, 서플라이를 사용하며 기본적인 공방 업그레이드가 3단계씩 있는 건 공통이지만, 건물을 짓는 방식이나 각종 스킬 같은 건 전부 제각기 다르다. 두 종족은 완전 공통인데 한 종족만 다른 경우는... 일단 없다.

요런 체계를 모델링한 세트(Set)라는 아주 재미있는 머리 싸움 보드 게임도 있다. 4가지 속성(색깔, 도형 개수, 채움 패턴, 도형 모양)이 전부 같거나 전부 다른 카드 트리플을 빨리 찾는 게 목적이다. n개의 카드가 있을 때 세트가 하나라도 존재할 확률 내지 전혀 존재하지 않을 확률도 구할 수 있을 텐데 내 수학 지식으로는 모르겠다.

필기 내지 그리기 도구로서 색연필-크레용-크레파스-파스텔-콩테로 갈수록 특성이 어떻게 달라지나 모르겠다. 파스텔은 그냥 딱딱한 분필 같고, 크레파스는 왁스가 들어가서 그런지 좀 끈적거렸던 것 같다.
콩테나 목탄 같은 건 본 적 없다. 목탄화는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이 화가 지망생이라 쓰던 물건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2. 트윈

  • 지하철역 중에서 종로3가와 종로5가는 영락없이 삼겹살과 오겹살을 떠올리게 한다. -_-
  • 농사에 비닐하우스가 있다면, 야구에는 돔구장이 있는 듯..
  • 서울 강북에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 있다면 강남에는 국정원 뒷산인 대모산이 있다. 그리고 강북에 거대한 군사 시설인 용산 미군 기지가 있다면, 강남에는 국군정보사가 있어서 서초대로에 길이 끊겨 있고 gap이 존재한다. 서로 비슷한 심상이 느껴지는데, 얘들은 가까운 미래에 서울 밖으로 이전할 계획이 잡혀 있다.
  • 스타크래프트에나 있어야 할 옵티컬 플레어의 실사판: 공중으로 쏘는 레이저 포인터(특히 녹색), 육지 자동차에는 HID 불법 개조.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분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주신다고 믿는다.
허나, 사람에 대해서는 능력껏 벌어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다같이 망하고 거지 되는 세상을 부른다.
이것이 신과 인간에 대해서 '필요'라는 개념이 작용하는 방식의 차이점이다. 이건 성악설이 성립하는 한 반박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한편, 컴퓨터와 관련해서는..

  • 옛날에 컴퓨터를 다루던 사람들은 디스크의 배드 섹터를 걱정했지만 요즘 사람들은 모니터의 불량 화소를 신경 쓰는 듯하다.
  • 옛날 사람들은 컴퓨터를 오래 쓰면 Windows 3.x 내지 9x의 리소스 퍼센티지가 줄어드는 걸 보고 바싹 긴장했지만,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배터리 퍼센티지가 줄어드는 걸 보고 바싹 긴장한다.

3. 부정적인 예

  • C++ 템플릿의 문제(소스 코드가 노출된 채 모든 번역 단위에 매번 인클루드 돼야 함)를 해결하려고 고민했는데 기껏 나온 게 export
  • 남북이 통일하랬더니 기껏 나온 게 고려연방제 (1국가 2체제.. 그냥 전쟁만 없는 반쯤 적화통일)
  • ActiveX를 없애라고 하자 나온 게 EXE 프로그램

이들이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4. 긍정적인 예

  • 건축업계· 학계에서는 '철근 + 콘크리트'가 신이 건축· 재료공학계에 내린 천혜의 재료 궁합이라고 그런다. 열팽창 계수가 거의 같아서 혼합 가능하면서도 서로 장점을 부각시키고 단점은 보완하면서 최고의 건축 자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항공업계에서는 하필 여객기의 최적 순항 고도에 제트 기류라는 게 존재하는 게 기적적인 행운이라고 한다.
  • 1970년대에 인류가 우주 개발을 하고 있을 때 마침 태양계 행성들이 가까이 일렬로 배열돼 있어서 보이저 2호는 단독으로 천왕성과 해왕성을 동시에 탐사하는 대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것도 못해도 백수십 년 만에 한 번 찾아오는 기회였다고 그런다.

이런 예가 더 있을지 궁금하다. 혹시 반도체를 만드는 데에도 무슨 천혜의 자연 광물 특성이 활용되는 게 있지 않을까?

5. 예상치 못한 대박

예전에 교통수단 관련 글을 쓰면서 한 번씩 언급한 적이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복습 차원에서..

  • 서울 지하철 9호선은 잠재적 수요를 인정받은 덕분에 서울 3기 지하철 중 거의 유일하게 얘 혼자만 노선 계획이 온전히 살아남아서 건설되고 개통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국가에서는 이거 만들어 봤자 지상의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적수가 못 될 것이고 공기수송 적자이면 어쩌나 지금의 입장에서는 참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그래서 전동차도 달랑 4량으로 편성하고, 최대한 메리트를 끌어올리려고 급행도 만들었다. 그랬는데, 실제로 뚜껑을 열어 보니 9호선은 초대박을 쳐서 최악의 가축수송 혼잡도를 보이는 노선이 됐다.
  • 지난 1960년대 말, 보잉 사에서는 유럽에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개발되는 걸 예의주시하면서 "이거 초음속 여객기가 대박을 치면 어쩌나"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기들도 초음속기인 보잉 2707을 개발 준비만 하면서 간을 보는 한편으로, 이미 개발 중이던 보잉 747 아음속 여객기는 주류에서 밀려날 경우 화물기로 언제든지 개조 가능하게 만반의 대비를 해 놓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초음속기는 가성비가 심각하게 부족했고 오일 쇼크와도 맞물려 영 재미를 못 봤다. 그 대신 747은 대형 여객기로 수십 년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6. 2단계 계층

컴퓨터 프로그램 내지 알고리즘을 보면 작업을 수행하는 양상이 명백하게 독립된 두 phase로 나뉘는 것이 있다.

  • 힙 정렬: 정렬 알고리즘 중에는 얘가 꽤 독특하다. 배열을 기반으로 heap을 생성하는 단계와, 그 heap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정렬된 리스트를 하나씩 뽑아내는 단계로 나뉜다.
  • 컴파일러: 소스 코드를 구문 분석을 해서 내부 representation으로 변환하는 프런트 엔드, 그리고 이를 토대로 최적화와 기계어 코드 생성을 하는 백 엔드로 단계가 분명하게 나뉜다.
  • 일본어 IME: 일본 문자 자체를 입력하는 방식과, 그 일본어 문자열을 NLP 관점에서 분석해서 어절을 나누고 한자 변환 후보를 제시하는 것은 서로 완전히 별개의 단계이다. 그러니 전자와 후자를 분리해서 일부 파트만 서로 다른 알고리즘 내지 DB 제품으로 교체해서 사용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데이터 압축이 있다. 흔히 간과하기 쉬운데, 압축이라는 절차도 두 단계로 나뉜다. 먼저, 원소나열법을 간단한 조건제시법으로 바꿀 만한 규칙성, 반복 패턴을 찾아서 더 간결한 방식으로 표현 방식을 바꾸는 것이 전자이다. 전자를 수행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며, 손실 압축과 비손실 압축도 이걸 수행하는 방식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압축된 데이터는 데이터 + 탈출문자 + 약어에 대한 번문 명령(expansion instruction) + 사전 참조 오프셋 같은 게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 다음으로, 이런 인코딩 결과를 정보 이론 관점에서 빈틈 없는 아주 compact한 형태로 물리적인 표현 방식을 바꿔서 최종 출력하는 것이 후자이다. 후자는 이론적인 압축률의 한계도 다 증명돼 있고 전자에 비해 더 발전할 게 별로 없는 상태이다.
압축 알고리즘이라 하면 이 둘을 싸잡아서 한데 일컫는 경향이 있으나, 이 두 단계는 엄연히 용도와 성격이 다르다. 가령, jpg 이미지 포맷의 경우 이산 코싸인 변환은 전자요, 결과를 허프만 코딩으로 출력하는 것은 후자에 대응한다.

요즘은 보기 힘든데 1990년대에 Windows Installer가 아직 없던 시절에는 마소에서는 확장자가 cab이던가? 독자적인 압축 파일 포맷을 써서 프로그램을 배포했다. 더 옛날에는 원본 디스크를 보면 설치되는 파일들이 확장자만 다 _xe, _ll 혹은 ex_, dl_ 이런 식으로 바뀌고 안에 내용은 어설프게 압축되어 있곤 했다. Lempel-Ziv 같은 알고리즘으로 압축되긴 했는데, 코딩 방식을 조밀화하는 '후처리'는 하지 않아서 가끔씩 원본 파일에 들어있는 문자열이 드문드문 보이곤 했다.

파일을 압축하면 기본적으로 전자 과정을 거쳐서 크기가 줄어드는데, 후처리까지 거치면서 크기가 좀 더 감소할 뿐만 아니라 이때 진짜 난수표 같은 뒤죽박죽 비트 나열로 바뀐다. 둘은 마치 사이다에서 (1) 단 맛을 내는 향신료와 (2) 탄산, 에어컨에서 (1) 온도를 낮추는 압축기와 (2) 송풍기하고 얼추 비슷한 관계가 아닌가 싶다.

7. 혈액형과 상속 개념

코딩 하니까 드는 생각인데..
중등학교 때 혈액형과 수혈 가능성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에서 말하는 상속이라는 개념을 어렴풋이 접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수혈 가능성은 형변환 가능성이고.

O형이 베이스 클래스이고 A, B형은 O형으로부터 상속이며 AB는 A와 B 다중 상속이다.
A형과 B형이 O형을 가상 상속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매끄럽지가 않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반드시 같은 유형끼리만 수혈을 하지, A/B계열형에다가 O형 피를 수혈하고 AB형에다가 A나 B형 피를 수혈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런 얘기는 어렸을 때 과학 책이나 교과서에서 접하지 못했다.

아무쪼록 다중 상속은 포인터의 형변환이 이뤄질 때 오프셋 보정이 필요하게 하며, pointer-to-member도 포인터 하나 형태로 간단하게 구현할 수 없게 만드는 주범이다.
다중상속 받은 한 클래스의 포인터를 다른 상속 파생 클래스의 포인터로 바꾸는 건 굉장히 조심해서 해야 한다. 이럴 때 C-style cast는 reinterpret_cast와 개념적으로 다를 바 없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static_cast를 써야 실수를 예방할 수 있다.
그러니 혈액형간 typecast도 가능한 한 안 하는 게 좋아 보인다. 아무래도 위험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22 08:27 2017/05/2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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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산과 한글 학회

본인은 몇 년 전 한글 학회 관계자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애산 이 인 선생(1896-1979) 추모 학술대회' 초청장이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 약력을 보니 해방 초기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법조인이긴 한데, 본인은 그 당시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 시절의 관련 분야 인물로는 초대 제헌 헌법 초안을 작성한 유 진오 박사 같은 사람밖에 못 들어 본 상태였다. 저분은 진짜로 문학과 법학에 모두 통달하여 공부의 신이요 문과 먹물 계열의 가히 천재 완전체였다.

그러니 처음 보는 인물에 대해서는 "국어학자도 아닌 사람이 한글 학회와는 무슨 상관?" 이런 의문이 들었으며, 그 당시에 또 시간대도 안 맞아서 그 행사에 가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저 분야에서 저렇게 언급된 인물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본인의 머릿속 기억 한 구석에 각인되었다.
그 뒤 나중에 차츰 알고 보니 애산 이 인이라는 분 역시 생각보다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었다. 호머 헐버트와 더불어 한글 학회를 계기로 알게 된 위인 중 한 분이다.

이분은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일제 강점기 때 피식민지 조선인으로서 변호사가 되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변호사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선생은 일제 강점기 동안 의열단, 안 창호 사건 등 여러 항일 운동에서 자진해서 독립 운동가들을 변호했으며, 그것도 국선이 아닌 민간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변호를 무료로 해 줬다. 일본의 국익을 대변하지 않는(?) 변호가 너무 잦고 일제 말기엔 창씨 개명조차 거부하니 조선 총독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으며 변호사 면허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처럼 말이다.

이런 민족 인권 변호사가 이 인 말고 전국적으로 몇 명 더 있긴 했지만(허 헌, 김 병로) 그래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수였다.
그리고 이 인 선생은 여느 변호사와는 달리 한글 학회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역시 문과 전문직답게 자기 나라 말과 글의 소중함을 알고서 조선어 사전 편찬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했으며, 1942년엔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되어서 구속되기까지 했다. 다만, 이분은 옥고를 치른 다른 국어학자들과는 달리 집행유예로 끝났다.

해방 후에 이분은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건국 초기부터 우리나라에서 관련 분야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았으며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한글 학회가 장소가 협소하고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1976년에는 지금의 붉은 벽돌 건물인 한글 회관을 짓는 기금 3천만 원을 쾌척했다. 40년 전 물가로 3천만 원... 이건 마침 비슷한 시기에 막 출시되었던 현대 자동차 포니를 10대가 넘게 살 수 있던 금액이었다(대당 약 230만 원).

그리고 이분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임종 전, 유언을 통해 자기 전재산을 한글 학회에 기증했다! 이 정도이니 한글 학회에서 두고두고 칭송할 수밖에 없겠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두루 우리나라에 끼친 업적이 워낙 출중하기 때문에 사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정확한 수훈 등급이 뭔지 문헌에 따라 국민장과 독립장이 서로 난립해 있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다.

한글 학회는 전신이던 조선어 학회 시절에 최초의 국어사전을 편찬했으며, 이것을 오늘날까지 굉장히 큰 자랑거리와 자부심, 긍지로 여긴다. 특히 조선어 학회 사건을 사건이 아니라 '수난'이라고 자체적으로 의미를 더욱 부여해서 부른다.
국립 국어원의 표준 국어 대사전이 국어사전계를 평정해 버린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 표준 국어 대사전조차도 이해타산 문제로 인해 종이책으로는 더 출간되지 않으니 참 아이러니다. (유니코드 전 영역 차트도 종이책 출간이 이미 진작부터 중단됐고..)

한글 회관의 건립과 관련해서는 그 당시 박 정희 대통령도 큰 기여를 했다.
노산 이 은상 선생이 박통을 직접 찾아가서 한글 회관 건립을 위한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이 "국방 성금은 1원도 안 낸 양반이 무슨 한글 회관 같은 데에 모금 요청을?" 식으로 씨크하게 반응했으나, 다음 날엔 1억 원이라는 돈을 금일봉 형태로 당시 영애이던 박 근혜 씨를 통해 전해 줬다고 한다. (한글 학회 김 종택 회장의 증언)
박통은 이것 말고도 한글 관련 단체 지원이나 어문 정책 쪽으로도 칭송 받을 행적을 여럿 남겼다. 광화문 현판조차도 한자가 아닌 한글로 친필을 남겼을 정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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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글 학회는 학술적인 성향이 절반, 한글 문화 연대처럼 운동 및 계몽적인 성향도 절반 정도 덤으로 갖추고 있다. 애국 단체라고 국내외로 후원하는 분도 적지 않다. 그리고 저런 사연을 거쳐서 1970년대에 건립된 한글 회관 건물 덕분에 서울 도심 금싸라기 지대에 좋은 부동산도 보유하고 있고, 그걸로 임대업 하면서 직원 월급도 준다.
그러나 지은 지 40년 된 건물은 딱 봐도 주변 건물들에 비해 외관이 낡았으며, 온통 임대를 주느라 정작 학회 자체의 문헌과 자료를 쌓아 둘 공간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업무용 건물의 건축 트렌드인 유리궁전과는 달리, 혼자 떡 버티고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한눈에 봐도 완전 옛날스럽다. 부산에서 봤던 동아 대학교 석당 박물관, 부산 임시 수도 청사도 다 같은 붉은 벽돌이지 않던가?
인테리어로 가면 옛날에는 가구나 복도 바닥, 문 같은 것도 요즘처럼 금속, 플라스틱, 콘크리트가 아니라 목재가 훨씬 더 많이 쓰였다.
옛날에는 금연에 대한 경각심도 지금보다 훨씬 덜했으니 저런 건물은 안에 들어가면 담배 냄새가 쩔어 있기도 할 것 같다. 거기에다가 각종 간판이나 표지판 글꼴까지 어설픈 둥근고딕 내지 붓글씨 부류로 넣으면 완벽한 옛날 고증 완성이다.)

2. 애산과 반민특위, 영화 <암살>

그럼 이번에는 한글 학회 말고 법조인으로서 애산 선생이 관계가 있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보겠다.
이분은 명백히 변절 없는 항일 독립 운동 노선을 갔으며, 사후에 건국훈장이 무난하게 추서되었을 정도이다. 그런 한편으로 해방 후에는 반공 우파를 표방하면서 이 승만 정권을 지지했다. 이것도 내가 보기엔 정상적이고 건전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반민특위(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의 위원장까지 돼서는 이 위원회를 완전히 해체시켜 버린 것은 언뜻 보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이것 때문에 이 승만 정권은 친일 청산을 안 한 정권이라고 후대로 욕을 두고두고 쳐먹게 되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는 관련 장면이 영화 <암살>의 결말부에 묘사돼 있다.
염 석진은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증인을 비열하게 미리 죽여 버린 덕분에 증거 불충분 → 공소권 없음 → 불기소 처분으로 끝난다. 이 꼴을 보니 판사조차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는지, 원래 주려고 했던 벌은 못 주고 "단, 법정모독죄로 벌금 2만원에 처한다"와 함께 재판봉을 부서져라 내리치고는 나가 버린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 좌익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 원봉을 띄우고, 남조선은 친일 청산 못/안 한 나라라는 왜곡된 시각'만' 주입한다는 이른바 '좌편향'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 그 얘기를 더 논하지는 않겠다. 우리나라가 북괴나 구소련처럼 기록말살형이 존재하는 속좁고 옹졸한 나라는 아니며, 훗날 일제에게 변절했거나 월북한 사람이라도 흑화 전의 행적 중에 선한 게 있다면, 훈장은 안 줄지언정 팩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있으니 말이다.

사실, <암살>의 원래 대본에는 재판 중에 이런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최종적으로는 짤렸다.

- 검사: (와~ 재산 목록 보소~) 피고는 지금까지 도대체 독립운동을 하셨습니까 사업을 하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팔아서 번 겁니까 이거?
- 염 석진: (개빡침. 검사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다가 손찌검~) 이 친일파 아들놈의 새X가 지금 와세다 법대 나와서 꽃방석에 앉았다고 내 앞에서 떵떵거려? 니 애비도 우리 암살 리스트에 있었어 이 X꺄. 어딜 감히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내 인생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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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 석진이 처음엔 독립운동을 하다가 종로 경찰서 지하 고문실에서 끔찍한 생명의 위협을 겪고서야 밀정으로 변절했듯, 심지어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 반민특위 재판을 진행하는 법조인들조차도 사실 친일파 가문의 금수저 출신이었다는 반전이 숨어 있다. 이 지경이라면 이놈의 나라는 참 꿈도 희망도 없다.;;

영화의 작품성을 위해서는 선악 구도가 일관된 게 더 보기가 좋으며 저 장면이 없는 게 더 낫다. 그러니 편집은 적절하게 한 거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저 장면이 있는 것이 1940년대 말의 완전 시궁창이던 현실의 선악 구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는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일제만 물러갔다고 해서 군· 경 간부가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니고, 판· 검· 변호사 같은 법조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라가 혼란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사회 질서를 유지시키는 사람들이 특별히 노련한 경력자 위주로 더욱 필요했다. 친일 경력 없다고 해서 일자무식한테 법률 자문과 재판 판결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단순 생산· 기술직이 아니라 저런 전문직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결국은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 많이 한 사람 차지가 되는데, 유복한 환경이 아무래도 항일보다는 친일 쪽 집안에 더 많이 조성돼 있었음은 자명하다. 이게 참 불편하다면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니 일본 경찰· 헌병 출신 조선인이 훗날 반공투사로 깃발 바꿔 단 것만큼이나, 일제 치하에서 법조인으로 편하게 살았던 사람이 역설적으로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변신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법조인 중에 저런 민족 인권 변호사만 있었던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애산 선생을 생각해 보자. 그는 영화에 나온 것처럼 친일파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독립 운동가 출신의 법조인이요, 한글 학회의 제일 든든한 후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반민특위 활동을 통한 친일 청산을 반대하는 소신이었을까?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legal mind 관점에서 봤을 때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해체시킨 게 아닐까 싶다.

당장 몇몇 악질 부역자들을 망신 주고 응징해서 감정적인 만족을 얻는 것보다 부작용이 더 커지고 있었다거나, 정확한 진상 규명과 재판이 현실적으로 도저히 곤란했다거나, 불순분자들이 반민특위 조사관을 사칭하면서(문화혁명 당시의 가짜 홍위병 같은!) 생사람 잡는 일이 늘었다거나...

그 당시 이 승만 대통령이나 애산 선생이 반민특위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겠는지는 본인이 기회가 되고 자료를 더 접하는 대로 공부를 더 해 볼 생각이다. 다만, 결과가 무엇으로 귀착되건 그 당시에 나라가 일제 부역자 전문직들을 불가피하게 재등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Windows 9x가 그 당시의 가정용 똥컴에서 돌아가고 도스 호환성을 보장하기 위해 16비트 코드를 불가피하게 재등용할 수밖에 없던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맥락의 한계이다. 우리나라의 친일파 청산을 제일 방해한 것은 사회 혼란과 체제 전복을 조장하던 북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게 절대적인 사실이다. 어떤 경우든 누가 선동하는 것처럼 친일 청산이라는 걸 악의적으로 일부러 안 한 건 아니다.

끝으로, 다시 영화 <암살> 얘기로 돌아오면,
원래 의도했던 것처럼 염 석진이 검사와 싸우는 장면이 들어가 있어야 "법정모독죄로 벌금 2만원형"이 논리적으로 개연성이 성립하겠다.
겨우 웃통 벗고 "내 몸엔 일본놈들의 총알이 6개나 박혀 있소!" 쇼 한 게 왜 지금 물가로 수백만 원 이상의 벌금을 내야 할 법정모독죄인지 본인은 지금까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역시 짤린 장면을 보니까 납득이 된다. 검사랑 현피 주먹다짐 정도는 해야 법정모독죄가 성립하지 않겠는가?

Posted by 사무엘

2017/05/19 08:34 2017/05/1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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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버전 개발 근황

날개셋 한글 입력기 8.9는 지난 8.8과는 달리 딱히 치명적인 버그가 발견된 게 없고 잘 만들어져 있다. 한편으로 다음 버전인 9.0은 현재 이렇게 순조롭게 개발되고 있다.

0. 한글 공식 명칭에서 <> 제거

이 시간부터 내 프로그램의 공식 명칭은 그냥 '날개셋 한글 입력기'임을 밝힌다. 날개셋이라는 단어를 감싸는 화살괄호(angle bracket)를 쓰지 않기로 했다. 프로그램의 모든 UI와 도움말, 각종 예제 파일, 홈페이지에서 이걸 이미 제거했다. 프로그램이 완성되는 날, 웹에다가도 업로드해서 반영만 하면 된다.

몇 년 전에 한번 얘기한 적이 있지 싶은데 검색하기가 귀찮다.
세벌식 최종은 타 한글 글쇠배열과는 달리 가운뎃점이 있으며, 화살괄호(컴퓨터에서는 그냥 부등호일 뿐이지만..)가 아랫글쇠(non-shift)에 있다. 하지만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최초로 개발되던 시절에 여전히 많이 쓰이던 Windows 95는 비록 공식적으로 최종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소 직원의 무지(?)로 인해 기호의 배열에 틀린 게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화살괄호조차도 원래 의도했던 방식으로 입력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허접하게나마 내가 입력기를 직접 만들고 나니 가운뎃점이고 참고표고 화살괄호고 다 제대로 입력이 가능했다. 그 당시엔 그것 하나만으로도 참 감격스러워서 뒷일을 별로 생각 안 하고 프로그램 브랜드명에다가도 화살괄호를 쌌다. 아래아한글이 고유명사에다가 옛한글을 쓴 것처럼 뭔가 튀어 보이는 효과는 덤이고 말이다. 그게 사건의 전말의 전부이다.

하지만 고유명사의 내부에 문장 부호가, 그것도 dash 정도의 작은 물건도 아니고 아예 여닫는 pair가 존재하는 놈이 끼어들어 있는게 그리 보기 좋지는 않다. 아래아한글도 옛한글을 표현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한/글'이라는 대체 표기가 쓰이는데, slash는 그 자체가 디렉터리 같은 토큰 구분용으로 쓰이는 문자이기도 하니 이 역시 그리 보기 좋은 표기는 아니다.

또한 화살괄호는 컴퓨터 키보드로 칠 때는 의미가 완전히 다른 부등호가 돼 버리며, 명령 프롬프트에서는 도스와 유닉스를 막론하고 redirection 기호로 쓰여서 파일명에 들어갈 수 없고.. HTML 태그를 여닫는 기호이기도 해서 본문에 간단히 삽입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지금처럼 공식적으로 화살괄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기 전부터도 내 프로그램의 명칭은 화살괄호가 빠진 형태로도 암묵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었다. 이제 본인은 그렇게 간소화된 명칭만을 사용하기로 했다.

지난 7.0에서는 프로그램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아이콘이 대거 바뀌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그로부터 4년 뒤인 9.0에서는 프로그램의 이름 표기가 바뀌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나름 의미 있는 변화이다.

1.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 허용 한글 범위 제약 기능 + 오토마타 연동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 8.x대 후반, 그리고 본인의 박사과정 연구 기간의 대미를 장식한 그야말로 엄청난 핵심 기능이다. 나로서는 정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구현해 냈고 논문도 썼다. 그래서 주요 기능들이 잘 완성됐으며 동작에 딱히 심각한 버그도 없긴 하지만, 이번 9.0에서는 '허용 한글 범위 제약' 기능과 연계하는 기능들이 또 추가되었다. 허용/금지 등 등급별로 분류된 글자들을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오토마타와 연계하여 재미있는 오덕질을 하는 옵션인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먼저, 허용되는 글자 중에서 더 결합의 여지가 없는 단말(terminal) 글자에 도달한 경우 자동으로 조합을 종료하는 옵션이다.
예를 들어 '고'라는 글자는 ㅏ를 결합해서 '과'가 될 수 있고 종성과 결합해서 '곡', '공' 같은 글자가 될 수도 있다. '안'이라는 글자도 '앉'이나 '않' 같은 글자로 추가 결합이 가능하다. 그러나 '엌', '같' 같은 글자는 더 결합이 이뤄질 게 없다. '판'이라는 글자도 KS X 1001 하에서는 '안'과는 달리 겹받침이 붙을 수 있는 게 없다.

이런 글자를 terminal로 간주하며, 이게 만들어지는 순간 조합을 종료하는 것이 이 기능의 핵심이다. 조합을 미리 끊든 말든 사용자의 타자 행동이 달라지는 건 없지만, 이것이 지금 입력 체계 하에서 더 결합의 여지가 없는 단말 글자였다는 시각· 심리적인 피드백을 준다. 이런 것도 날개셋 한글 입력기로 구현 가능하다는 데모 차원에서 옵션을 구현했다.

'허용 한글 범위 제약' 기능을 사용하면 이 프로그램은 일단 입력 가능한 글자들을 받아서 입력을 위해 추가로 허용해야 하는 글자를 수집하고, 글자가 완성된 뒤에 연속 입력을 위해 다단계 분리 처리를 해야 하는 글자도 제3 그룹에다 수집해 준다. 이 글자들은 기존 허용 글자들의 밖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1은 무조건 허용되는 글자, 2는 무조건 실패하는 글자로 용도가 예약됨)

그런데 이 옵션을 사용하면, 기존 입력 가능 글자들 "중"에서 terminal에 속하는 글자들을 제4 그룹에다가 따로 모은다. 그래서 지금까지 오토마타에서 T==3에 대해 다단계 분리 -12를 적용하듯이 T==4에 대해서는 이미 있는 기능인 -3 (결합 후 조합 중단)만 지정하면 일이 깔끔하게 끝난다.

terminal 감지는 두벌식에서는 그렇게 의미 있는 기능이 아니다. 종성이 있는 글자는 그 종성의 일부나 전부가 다음 글자의 초성이 될 수도 있으니 도중에 조합을 끊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종성이 없는 글자 중에서도 '긔, 꾜, 뀨, 눼, 댜, 듸, 쮸, 켸, 쿄' 등 terminal이 20여 자 있다. 이 글자들 이후에는 종성이 이어지는 게 전혀 없으니 두벌식에서도 조합을 바로 끊어 버려도 안전하다.

얘들은 '쌰, 쓔, 뢔, 쬬' 같은 고아 글자와는 성격이 정반대이다. 고아 글자들은 받침이 붙은 '썅, 쓩, 뢨, 쭁'은 KS X 1001에 있는데 받침이 빠진 형태가 빠진 경우이고, 모음 terminal 글자는 자신 이후로 아무 받침이 붙지 않는 경우이니 말이다. 어쨌든, 고아 글자를 찾는 기능이 있으니 terminal을 찾는 기능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시간을 내어 이 기능을 구현하게 됐다.

세벌식으로는 terminal 감지 기능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극단적인 경우는 현대 한글 기준으로 모든 받침을 1타 만에 입력 가능한 최종(391) 글쇠배열이다. 받침을 찍는 순간 글자가 완성됨과 동시에 그냥 조합이 종료돼 버린다. 물론 이렇게 테이블을 참조할 필요조차 없는 일방적인 경우라면 아예 오토마타 수식을 고쳐 버려도 되지만 '안'일 때만 조합이 유지되고 '판'일 때는 조합이 끊어지게 하려면 이 기능을 사용하면 된다.

(2) 그 다음으로, 허용되지 않는 글자를 만드는 낱자는 다음 글자로 보내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는 옵션이 있다. '또+ㅁ'의 경우 ㅁ을 다음 글자로 보내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한다는 뜻이다. 이 역시 두벌식에서는 종성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없고, 중성에 대해서만 적용 가능하다. T==2에 대해서 -1 (무시)을 되돌리게만 하면 간단히 구현 가능하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완성도를 더욱 끌어올릴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라서 성공적으로 구현되니 좋다. 이제야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는' 진짜로 더 만들 게 (현재로서는) 안 떠오르고 작업이 완전히 종결된 것 같다.
이 옵션이 추가됨으로써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 마법사의 2단계 대화상자는 너무 큼직하고 복잡해졌다. 사실, '허용 한글 범위 제약'은 통상적인 로직 생성 옵션과는 성격이 좀 다른 액세서리에 가깝다. 그렇기도 하니 이건 마법사의 별도의 단계로 분리해 버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가 쓰라는 의도로, "오토마타에 '0번 상태에서 모든 실패 상황을 처리"라는 옵션을 추가했다.
정상적인 한글 입력에 따른 상태 분기와는 달리, 실패 상황의 상태 분기 방식은 지금 오토마타 상태와 무관하게 언제나 동일한 경우가 많다. T가 3이면 -12, T가 4이면 -1 이렇게 T라든가 I~K의 값에 따라 달라질 뿐, 성공 상황처럼 매번 처리 방식이 들쭉날쭉해지는 건 매우 드물다.

이 점에서 착안하여, T==3 ? -12 : T==4 ? -1: 0 같은 수식은 초기 상태에서 A ? 1: B ? 2: C: 3 : (!!) 다음에 한 번만 추가하면 모든 오토마타 상태에서 동작하게 했다.

  • 8.8: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 첫 도입
  • 8.9: 그 기능에다 '한글 허용 범위 제약' 기능 연계 추가
  • 9.0: '한글 허용 범위 제약' 연계 기능에다가 '오토마타'와의 연계를 또 추가. 이제 진짜 끝?

2. 그 밖에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의 사소한 개선 사항

  • '낱자 최적화' 알고리즘이 좀 더 개선되어서 글쇠에 등장하지 않고 쓰이지 않는 낱자 결합 군더더기를 더 잘 걸러내게 했다.
  • 매우 드문 상황이겠지만, 로직 생성 작업이 아무 메시지 없이 깔끔하게 끝났다면 "작업을 완료했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라도 출력해서 사용자가 심리적으로 혼동하지 않게 했다. PC용 세벌식+현대 한글처럼 복잡한 처리가 필요하지 않은 설정에서는 드물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 초성 문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종성 두벌식 날개셋문자를 사용하더라도 초성에 등장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니 이를 감안하여 동작하게 했다. 물론 원래 소속이 종성이니 이 낱자들은 초성 '대결합'은 전혀 처리하지 못한다는 걸 사용자가 염두에 둬야 한다.

그리고, 입력 데이터를 검증할 때 현재는 대결합의 결과값이 소결합의 시작과 결과값에 또 등장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에러로 처리하는데, 9.0은 여기에 덧붙여 대결합의 결과값이 자신이나 다른 대결합의 과정값에도 등장하지 못하게 조건을 강화했다. ㅂ+ㅅ → ㅄ이 있다고 해서 ㅄ+ㄷ → ㅵ를 줘서는 안 되고 반드시 매번 ㅂ+ㅅ+ㄷ → ㅵ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야 대결합을 실제로 expand할 때 동일 input으로부터 a+b → x와 a+b → y가 동시에 등장하는 식의 논리 오류를 방지할 수 있다.

이런 제약을 가한 대신, ㅂ+ㅅ+ㄷ → ㅵ에서 ㅅ+ㄷ → ㅼ이라는 다른 대결합이 존재하고 ㅼ이 글쇠에 존재해서 한 타 만에 입력 가능한 경우, 이 프로그램이 ㅂ+ㅼ → ㅵ이라는 결합도 자동으로 찾아서 생성하게 했다.

3. 기본 글자판 설정에 두벌식 관련 고급 옵션 추가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제공하는 빠른설정들 중에 '기본 글자판 설정'은 대중적이고 기본적인 입력 기능만 사용하는 분들이 가장 자주 사용할 만한 빠른설정이다. 처음으로 개발된 이래로 별다른 변화 없이 10년이 넘게 존속해 왔다.

본인은 다른 대화상자들이라면 몰라도 얘만은 프로그램 내부 구조 지향이 아니라 사용자 지향· 사용자 친화적으로 만들려 애썼다. 복잡한 각종 옵션들을 어지럽게 한 화면에 몽땅 노출하지 않고 새끈하게(?) 보이게 하려고 단계별 마법사 UI를 쓸까 생각도 했다. 대화상자를 보면 좀 마법사 UI처럼 생겼지 않는가?

그런데 실제로 개발을 해 보니 기본 글자판 설정이란 게 굳이 몇 단계짜리 마법사까지 동원할 정도로 구조가 복잡하지는 않아서 '다음' 단계 대신 그냥 '고급' 버튼만 넣는 걸로 퉁쳤다.
마법사 UI는 먼 훗날에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 빠른설정이 대신 찜했다. '기본 글자판 설정'보다 기능이 훨씬 더 많고 복잡하니 처음에 3단계 마법사로 시작했고 이번 9.0부터는 4단계로 더 늘었다.

이런 사정을 거쳐, 기본 글자판 설정엔 현재까지 '고급' 옵션이라는 게 세벌식 자판과 관련된 것 네 종류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표준 두벌식을 골랐을 때도 '고급' 옵션을 사용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두벌식에만 적용되는 고유한 고급 옵션이 몇 가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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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음의 처리 방식'이다. '초성과 종성 따로'는 일반적인 동작 방식이고, '초성 지향'은 '날 - 나라' 대신 '나ㄹ - 날'이 되는 동작을 말한다. '종성 지향'은 초성도 일단 종성 문맥으로 입력되었다가 나중에 중성을 받았을 때에야 초성으로 바뀌는 동작이다.

기술적으로야 초성 지향은 '고급 입력기'의 옵션을 사용해서 동작하고 종성 지향은 '종성 두벌식'이라는 별도의 날개셋문자를 사용해서 동작한다. 구현 방식이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 이 빠른설정에서는 한데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그리고 표준 두벌식은 오로지 알파벳 26개 자리에만 한글 글쇠가 있고 숫자와 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특성상, 숫자와 기호는 굳이 입력기가 가로채지 않고 응용 프로그램으로 보내도록 하는 옵션을 빠른설정에서 곧장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두벌식과 세벌식 모두 빠른설정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고유한 고급 옵션을 갖게 됐다. 단지 세벌식의 고급 옵션들은 3.x 완전 초창기 때부터 존재했지만, 두벌식의 고급 옵션들은 다 6~7.x에 가서야 도입됐고 빠른설정에 반영은 훨씬 늦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4. 토씨 자동 교정

한글 입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고 평생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토씨 자동 교정 알고리즘을 우연한 계기로 재검토해서 정확도를 조금 올렸다.

토씨 자동 교정 기능은 동작이 은근히 복잡하다. 은/는, 을/를, 과/와 같은 거야 아주 쉬운 케이스이다. 그러나 (으)로는 유일하게 ㄹ 받침도 무받침과 동급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예외가 있으며, '이'는 처리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이나마, 이랑, 이라'처럼 받침 유무에 따라 '이'를 넣거나 생략해야 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다'의 경우는 받침이 없더라도 반드시 생략할 필요는 없다.

이것들부터 먼저 검토한 뒤, 한글이 또 등장하지 않아서 명백하게 주/보격 조사인 '이'에 한해서 '이/가' 처리를 해야 한다. 하긴 중세 국어에서는 조사 '가'가 없었다고 하더라만..
'이'만 처리가 이렇게 복잡한 이유는 한국어의 매우 독특한 단어 '이다'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어의 어절(띄어 쓰는 단위)에서 관형어나 부사· 감탄사, 기능어 등등 잡다한 거 빼고 내용어를 구성하는 것은
딱 (1) '체언+조사' 계열, 아니면 활용을 하는 (2) '용언+어미'라는 두 계열로 나뉜다.
그런데 '이다'라는 단어는 정말 요물이다. 얘는 문법적으로 무엇으로 분류해야 할지 쟁쟁한 국어학자 문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오랫동안 일치하지 않았다.

마치 영어에서 be 동사가 여느 다른 동사들과는 문법적으로 다르게 취급되는 동사이듯, 쟤도 평범한 용언은 아니다.
오늘날 표준 국어 대사전 + 학교 문법에서는 '이다'를 서술격조사로 본다. '이었다' 등 영락없이 용언처럼 생긴 물건이 조사라니.

그래서 '이니', '이고', '이면'처럼 '이다'의 활용형도 다 별개의 접속조사이고, 일단 사전에 일일이 단독으로 등재돼 있다.
이것도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겠지만 이게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귀신이다', '불이야'처럼 체언에 잘도 척척 달라붙는 동사나 형용사가 다른 예가 없긴 하다. (공부하다 이런 건 논외. 그때의 '-하다'는 접사임.)

체언과 용언을 파동과 입자에다 비유하자면, '이다'는 진짜 빛처럼 두 성질을 모두 지닌 이상한 물건이다.
그리고 이 '-이' 때문에 '찾기/바꾸기'에서 한글 토씨 자동 교정 기능도 구현하기 꽤 복잡하고 어려워져 있다.

끝으로, '야'의 경우 호격조사 '아' 또는 보조사 '이야'가 모두 가능한데, 이것은 용례 domain이 겹치기 때문에 글자만 보고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토씨 자동 교정 알고리즘의 구조적인 한계가 될 수밖에 없는 점이다.

5. 기타 사소한 것들

(1) 도움말 부록의 자음 참조표에서 ㅁㅂㅅ의 순서가 잘못 기재되었던 오타를 지적해 주신 분이 있어서 고쳤다. 78이 빠지고 79가 두 번 들어가 있었다. 이 오타는 굉장히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고 지금까지 잘도 숨어 있었다. 오죽했으면 5년 전, 2012년에 발행된 본인의 석사 학위논문의 부록에도 동일한 오타가 그대로 들어갔다!

(2) 편집기에는 프로그램의 중복 실행이 감지된 경우 인스턴스를 또 생성하지 않고 기존 인스턴스에다 새 문서창을 열게 하는 기능이 있다. 그런데 기존 인스턴스가 어떤 이유로 인해 응답이 없고 뻗은 상태라면 그 옵션이 지정되어 있더라도 예외로 그냥 새 인스턴스에서 실행되게 하여 동작에 융통성을 더했다.

(3) 날개셋 편집기를 비롯해 내 프로그램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사용하는 빨랫줄 모양 옛한글 비트맵 글꼴의 중성 자형을 일부 수정했다. 그래서 ㅣㅛ, ㅓㅛ, ㅕㅗ 등, ㅗ/ㅛ가 포함돼 있는 겹모음들이 위의 초성과 더 잘 포개져서 조화롭게 보이게 했다.

(4) 두벌식 옛한글의 Shift+H(ㅗ) 자리에 지금까지 ㅗㅜ가 배당돼 있던 것을 ㅗㅗ로 변경했다. 기왕 내 프로그램은 Shift 자리에는 다른 자모와 겹치지 않는 한 아랫자리에 있는 낱자의 double(쌍) 버전을 넣는 것으로 컨셉을 잡았으니 저렇게 하는 게 더 일관성이 있을 것 같다. 아래아한글의 영향을 받아서 내 프로그램도 까마득한 2.x 옛날 버전부터 ㅗㅜ이긴 했는데, 그냥 breaking change(하위 호환성이 깨지는 단절적인 변화)를 만들었다.
ㅜ와 ㅡ도 double 버전이 있긴 하지만 쟤들은 Shift 자리에 다른 글쇠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double 버전을 넣을 수 없다. 두벌식은 옛한글 배열이라 해도 숫자· 기호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 게 일종의 불문율이긴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16 08:31 2017/05/1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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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생각

1. 첫인상

우리나라의 바다 건너 이웃에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예로부터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고 불리고 있다. 무작정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고, 존재감을 무시할 수도 없는 그런 복잡한 나라이다. 정치적으로 하도 민감한 주제이다 보니 "일본은 없다" "일본은 있다" 이런 책이 나온 것도 벌써 20년 가까이 전의 일이다. 본인이 블로그에서 이 나라 자체에 대해서 심층 취재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럼 비정치적인 얘기부터 가볍고 부담 없게 먼저 시작하겠다. 본인은 일본이라 하면 떠오르는 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무순)

  • 벚꽃이 만발한 오사카 성
  • 후지 산 아래로 달리는 신칸센
  • 지멘스 옥타브를 울리면서 달리는 게이큐 쾌특 전철
  • 앞발 들고 있는 복고양이
  • 게다짝, 기모노, 일본도, 정수리를 민 그 특이한 헤어스타일의 사무라이 (조선 선비들은 머리를 기르는 편이었는데 여기는 정반대)
  • 어두운 복장에 표창 던지는 닌자 (뭐, 후대에 만들어진 컨셉에 가까우며, 정작 옛날에 일본엔 저런 차림의 자객이 없었다고 하던데)
  • 스시, 일본 돈까스와 라멘, 심야식당
  • 학교 수영복 (저기에는 공립 학교에 수영장도 있으니)
  • 도라에몽, 슈퍼마리오, 짱구는 못 말려, 드래곤볼 캐릭터와 그와 비슷한 화풍의 일본 애니들
  •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킬 빌, 자토이치 같은 평범하거나 병맛· 개그스러운 영상물. 토스트 소녀-_- 게임
  • 파이널 판타지 같은 너무 심오하고 도무지 배경이고 스토리고 설정을 이해할 수 없는 안드로메다 영상물
  • 감각의 제국, 쇼군의 사디즘 같은 개막장 영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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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난 일본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고, 일본어는 열차 안내방송 외운 것밖에 모른다. 글자만이라도 작정하고 읽는 법을 틈틈이 외워 놓고 싶지만, 잘 안 된다.

하긴, 작년에 브라질 올림픽 폐막식 때 그 유명한 2020 도쿄 올림픽 홍보 영상이 상영되었는데 그거 정말 강렬했다. 반도에서 병맛스러운 김치 전사 내지 허접한 평창 동계 올림픽 홍보 영상이나 만들던 동안, 재패니메이션의 원조인 저 동네에서는 제한된 시간 동안 자기 나라의 발전된 면모를 저렇게 쭉 소개하면서 아베 총리까지 슈퍼마리오로 변장시켜서 찬조 출연시켰다니.. 쟤네들의 저력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교통

일본은 근대화 산업화가 아시아에서 가장 앞섰으며 경제, 산업, 과학· 기술, 예능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고, 현대 사회의 각종 시행착오들도 먼저 겪은 선진국이다. 그 중 교통 분야만 살펴보더라도, 일본은 세계구급 자동차 제조사를 보유한 자동차 왕국인 동시에 신칸센 고속철까지 개발한 철도 왕국이다.

그런데 얘들은 자동차와 철도뿐만 아니라 '자전거 왕국'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이륜차는 보행자와 자동차 사이에 껴서 만년 콩나물 신세를 면치 못하는 중인 반면, 일본은 이륜차를 더 많이 볼 수 있으며 도로나 주차 시설이 자전거를 더욱 배려하는 형태로 갖춰져 있다.

이건 일면 수긍이 가는 얘기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소득 높고 잘 사는 국력· 경제력에 '비해서' 서민이 자동차 굴리기는 훨씬 더 힘들게 돼 있다. 고배기량에 덩치 큰 차는 더욱 제약이 심하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배려와 혜택을 받는 경차의 배기량이 1000cc 이하로 정해져 있지만 저기는 800도 아니고 겨우 660cc이다. 그것도 21세기에..;; 일본도 한국 만만찮게 산과 험지가 많은 동네인데 저건 세계 자동차들 평균 덩치를 생각해도 너무 가혹한 제약이 아닌가 싶다.

또한 저기는 불법주차 단속이 이곳 반도보다 넘사벽급으로 더 자비심이 없으며, 애초에 1960년대에 마이카 시대가 시작되던 시절부터 차고지 증명제가 딱 시행되어 잘 정착된 걸로 유명하다. 차고든 유료 공영 주차장이든 주차 공간이 법적으로 확보돼 있지 않으면 자가용 구입을 아예 못 한다.
마치 컴퓨터에서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돈 주고 사야 하며, 눈에 보이는 원자재뿐만 아니라 무형의 기술 지원과 서비스에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듯.. 차를 샀으면 굴리는 것뿐만 아니라 세워 놓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에도 주거비만큼이나 돈이 든다는 관념이 박힌 것이다.

우리나라야 지금처럼 건물과 주차장들이 완공돼 버린 와중에 차고지 증명제를 도입하기에는 대략 곤란한 지경이 됐다. 자동차의 판매 실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정책이니 자동차 회사 영업 사원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미국으로 치면 총기 규제 정책 vs 총기 제작사들의 로비와도 얼추 비슷한 구도처럼 됐다.
할 거면 1980년대에부터 했어야지. 옛날 석유 파동 때 외화 아끼려고 차량의 배기량과 엔진 기통수에다는 온갖 규제를 걸었으면서, 정작 차고지 확보 관련 규제는 시행을 왜 안 했나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전기는 1970년대부터 승압을 잘 끝낸 반면에 자동차 쪽으로는 정치인들이 상대적으로 선견지명 안목이 없었던 셈이다. 반대로 일본은 철도 궤간과 전기 규격은 낭패 봤지만 자동차 주차 문화는 잘 정착시킨 경우에 속한다.

아무튼 일본은 경제력 대비 한국이나 미국보다 차 굴리기가 더 비싸고 빡센 나라이다.
그럼 자가용 말고 대중교통은? 대도시엔 물론 잘 구축돼 있고 속도 빠르고 정시성도 높다.

일본은 철도 왕국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지하철 역마다 온통 스크린도어들이 갖춰져 있지는 않다. 허나, 누군가가 선로에 투신 자살이라도 하면 고인이 불특정 다수에게 심한 민폐를 끼쳤다고 국가에서 유족에게 도리어 벌금을 매긴다. "자살을 하게 만든 사회 탓 국가 탓? 힐링힐링?" 그런 거 없다.
과거에 중국에서는 총살형을 집행하고 나서 총알값을 사형수 유족에게서 받아 챙기기까지 했는데, 마치 그와 비슷한 급으로 잔인하다면 잔인한 조치 같기도 하다.

허나 일본은 국민성이 민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향이며, 거기는 철도 업계가 분초 단위로 열차 정시성에 목숨을 걸고 기관사까지 죽도록 갈구고 압박하는 곳이다. 평범한 전철도 몇 분 지연되면 역 직원들이 지연 증명서를 알아서 뿌리면서 승객들에게 너무 죄송하다고 굽신거린다. 그런 와중에 누가 자살해서 열차가 줄줄이 지연을 먹었다면 이거 얼마나 큰 민폐이고 피해인지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05년 4월에 JR서일본 관할의 후쿠치야마 선에서 전철이 과속 탈선 사고가 나서 기관사 포함 107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는데, JR서일본에서는 그로부터 무려 1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홈페이지 첫 화면에 그 날 사고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해 놓고 있다. 그걸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다시는 그런 사고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런 게 정상적인 추모이고 이성적인 재발 방지 다짐이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세월호 노란 리본 타령은 가해자 당사자의 사죄도 아니고 시스템적인 안전 개선과도 상관 없이 그저 감성팔이 반정부 광기 폭동일 뿐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일본의 대중교통은 서비스 좋고 시간 관념도 투철하고 다 좋은데.. 비싸다.
우리나라 식 운임과 임률을 생각했다가는 놀라서 턱 빠질 거다. 정말 왕창 비싸며, 사철 간에 통합 환승 할인 같은 것도 없다. 하물며 장거리 간선인 신칸센 운임은 국내선 비행기보다도 더 비쌀 정도이다.

그러니 일본이 비록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나라는 아니겠지만 미국 같은 나라도 아니니, 가까운 거리는 그냥 걷거나 자전거 타는 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북한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일본도 자전거는 등록하고 번호를 받아야 될 정도라고 한다. 굉장히 뜻밖이다. 물론 북한처럼 주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질서 유지가 필요할 정도로 자전거가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저기서는 학생들, 특히 여자애들도 등하교나 알바 하러 출퇴근 할 때 자전거 많이 타는 거 같다.
어쩐지 일본의 사건사고 같은 이야기들을 봐도 가해자나 피해자들이 그 당시나 직전에 자전거 탔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극단적인 예로는 콘크리트 살인 사건(1989)에서도 그렇다.
또한 철권 시리즈에 나오는 '카자마 아스카'자전거 끌고 다니는 여고생 컨셉이다.
이제야 그 바닥 문화가 좀 이해가 되고 퍼즐 조각이 짜맞춰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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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권위주의

그럼 이제 민감한 주제들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조금씩 논해 보겠다.
일본에는 덴노라는 국가 상징 겸 정치· 종교 복합체 중심 구심점이 있으며, 여기 한국보다 뭔가 전체주의스러운 분위기가 더 강하다. 일제의 패망 후에야 덴노가 인간 선언을 하고 젊은 세대들이 많이 자유분방 개인주의스러워졌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일본의 다른 분야는 몰라도 정치계나 법조계는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보다 권위주의가 훨씬 더 심하고 경직돼 있다. 실수나 잘못· 착오가 생겨도, 누굴 억울하게 누명 씌워서 몇십 년 옥살이 시키고 나서도 그걸 시인해서 직접적인 표현으로 사죄 따위는 거의 안 하다시피한다.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면 자기 권위와 위신이 깎인다고 생각한다. '엔자이'(원죄) 사건이라고 검색해 보면 이런 예가 여럿 나온다.

사고방식이 원래부터 저렇고 '자국민'한테조차 저러는데, 하물며 쟤들이 자기보다 (엄밀히 말해) 국력이 딸리는 외국을 상대로 위안부 피해 문제 같은 거는 절대로 대놓고 사죄할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만치 간접적으로나마 유감 표현했고 돈 이만치 줬고, 이 주제 얘기 더 안 꺼내기로 지도자들끼리 서로 퉁쳤으면 나름 "걔네 입장"에서는 많이 양보하고 챙겨 준 것에 가깝다. -_-;;

뭐, 일본이 저 따구로 나오는 건 이스라엘 앞에서 가히 '도게자' 급으로 굽신굽신 사죄하는 독일과는 참 비교되는 모습이며 본인이라고 해서 보기 좋을 리 없다. 그럼 쟤네들은 원래 저런 놈들인가 보다 하고 우리로서는 과학 기술과 경제와 힘으로 극일을 이루는 것밖에 현실적인 답이 없다. 그 신사적인 독일조차도 이스라엘 급의 국력과 국제 위상이 있는 나라 앞에서나 굽신굽신이지, 다른 듣보잡 소수 민족이 나치에게 피해를 입은 건 상대적으로 모르쇠인 걸로 비판받는 건 변함없다.

이런 넓은 맥락에서의 이해 없이 그저 소녀상에다 반일 반일거리고, 일본하고는 뭘 하고 오든지간에 무조건 굴욕 매국 협상이라고 헛소리 하는 애들.. 정말 지겹다. 백 날 그렇게 설쳐 봐라, 일본의 태도가 바뀌는 게 있겠나?
그리고 또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북괴와 중국한테 그만치 부당하게 당해 온 걸 반의 반만치라도 따지고서 일본에 집착하는 거라면 또 내가 말도 안 한다. 북괴 김 정은이 6· 25 전쟁이나 연평도 포격에 대해서 남조선을 향해 사죄를 할 것 같아 보이냐? 그와 똑같은 맥락이다.

4. 그나마 중국· 북한보다는 더 가까이해야 할 대상

동북아시아 한중일 CJK 국가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로서는 일본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사의 앙금 트라우마 때문에, 중국은 지금 당장 국가 프레임과 이념 차이 때문에 현실에서는 서로 마냥 손잡고 친하게 뭉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게 사실이다.

북괴? 걔들은 국가 프레임· 이념 차이를 넘어서 그냥 묻지 마 남조선을 체제 전복+적화시키려고 눈에 시뻘겋게 불 켠 쌩 양아치에 광신도+노예 집단일 뿐이고. 통상적인 경제력 군사력으로는 그걸 이룰 수 없으니 역사왜곡, 간첩질, 사이버전 선동질 등 방법도 갈수록 교묘하고 추잡해지고 있다.

통일 후에도 김돼지 동상이랑 주체사상 같이 껴안고 살 게 아니라면, 화해네 경제 협력이네 하는 개수작에 절대 응하지 말고 그냥 왕따 고립만이 답이고 진리이다. 굳이 먼저 북폭 하고 쳐들어갈 필요도 없으니, 굶겨 죽이기만 하면 된다.
일부 미사일 발사체 기술이나 소프트웨어 기술이 우리보다 앞서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예외를 빼면 배울 것 선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동북아 이웃 나라들 중에 남조선이 제일 가깝고 친하게 지내야 하는 상대는..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일본이다.
그리고 제일 본받고 배워야 할 상대를 꼽자면 그건 친하게 지낼 대상보다도 더욱 단호하게 일본이다.

물론 구 일본군의 흉악한 전쟁 범죄라든가 그 스타일의 병신 같은 조직 문화와 똥군기 따위를 본받자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걔네들은 그런 지랄맞은 시스템 하에서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척결해야 할 소위 '일제 잔재'라는 것들의 본거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내 관심 분야도 보태자면 한자 같은 불편한 문자를 쓰고도 어쨌든 근대화를 이루고 과학 기술 강국 선진국이 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렇게도 컴플랙스를 갖고 있는 과학 분야 노벨 상도 도대체 몇 개를 탔냐 말이다.

일본이 겉으로는 화해 유감 사죄 운운하면서 한편으로는 윗선에서는 모르는 척 망언 씨부리고 독도는 일본땅이다 교육을 해?
괘씸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래 봤자 군사적으로 같은 친미 동맹이고 동일한 자유 진영 이념 프레임을 공유하는 국가끼리 대놓고 군사 충돌이 일어날 확률은 중국· 북한보다야 훨씬 낮다.

저 정도 앙금과 마찰이 있으면 우리도 겉으로는 웃으면서 얻어낼 거 얻어내면서 한편으로는 "일부" 극렬 민간단체를 모르는 척 묵인하면서 소녀상 한두 개쯤 놓고 시위든 하면서 맞불 놓으면 된다.
딱 그 정도까지만. 그건 나도 전략상 인정한다. 뭐 아무 티 안 내고 묵묵히 실력만으로.. 현대차· 삼성 전자가 일본 기업들 쳐발랐던 것 같은 방식으로 일본 이기는 게 제일 좋고 이상적이겠지만, 그럴 수만은 없고 현실에서는 감정상의 카타르시스도 약간은 필요하지.

필요 이상으로 반일 반일 거리는 애들이 진짜로 애국심? 민족 정기? 그런 순진한 이유로 일본 비판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매우 드물다. 오로지 자국 비하와 북괴의 범죄 물타기라는 매우 불순한 목적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런 비굴한 사고방식으로 일제의 식민사관 내지 조센징 엽전 비하는 어째 비판하고, 무장 항일 독립투사는 어째 칭송할 수 있는지 내 판단력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전국 방방곡곡에 무슨 몇백 개씩 소녀상 세우자고 유세를 떨거나, 특히 아직까지도 우리나라가 친일 청산을 못 했네 웃기는 소리 하는 애들은 우리나라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된다. 누구 때문에 왜 친일 부역자 군경을 활용해야 했는지만이라도 정확하게 가르치면 아무 문제될 거 없고 거짓을 팩트로 격퇴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5~20년 전부터 본인을 봐 온 분들은 잘 알 거다. 난 예나 지금이나 주된 연구 개발 분야가 한글 입력이고, 전통적으로 얼마나 열혈 반일 민족주의자였는지를 말이다.
그랬는데 내가 이렇게 돌아섰을 정도면, 저쪽에 있는 애들이 정말 일관성 없고 주적 구분을 못 하고 필요악과 절대악을 분간 못 하는 거다. 나이가 들수록 "어 저건 아닌데..;; 왜 중국 북한에다가는 단 한 마디도 말이 없지?" 하는 거부감이 들면서 갈라서게 됐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구든 일본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13 08:34 2017/05/1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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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에 썼던 글을 내용을 보충하여 리메이크 한 것이다.

Windows 운영체제에서 생성하는 윈도우들은 그 본질이 크게 overlapped, popup, 그리고 child 이렇게 셋으로 나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Windows 1.0 사진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그때는 이 세 종류의 구분이 지금보다 훨씬 더 명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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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verlapped

1985년에 발표된 Windows 1.0 첫 버전은 기술적인 한계 때문..은 아니고, 애플 사와의 이상한 특허 분쟁에 얽히는 바람에 응용 프로그램 창들이 서로 겹치지를 못하고 타일 형태의 배치만 가능한 정말 괴상한 형태로 개발되었던 걸로 유명하다.
그러다 Windows 2.0에서는 타일 제약 봉인이 풀렸기 때문에 이 윈도우들은 겹쳐지는 게 가능해졌으며 Z-order라는 개념도 생겼다. 그게 워낙 뜻깊은 일이었던지라 명칭에까지 OVERLAPPED가 붙은 것이다.

그리고 저렇게, 타일 형태의 배치가 가능한 응용 프로그램의 최상단 껍데기 윈도우가 바로 오늘날의 개념으로 치면 overlapped 윈도우이다. 캡션이라고 불리는 제목 표시줄이 달려 있고 크기가 언제든지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으며, CreateWindow(Ex) 함수에다 위치와 크기를 지정할 때 CW_USEDEFAULT(대충 적당히 알아서)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타입의 윈도우이다.

사실, WS_OVERLAPPED의 값은 그냥 0이다. popup이나 child 같은 속성이 따로 지정되지 않은 윈도우는 기본적으로 overlapped 속성이 지정된다. 여기에다가 최소화/최대화(WS_M??MIZEBOX)/닫기(시스템 메뉴 WS_SYSMENU) 버튼, 크기 조절 가능한 굵은 껍데기(WS_THICKBORDER) 비트들이 합쳐진 것이 바로 WS_OVERLAPPEDWINDOW 스타일이다.

2. popup

그럼 popup은 무엇이냐 하면 저 위의 About 대화상자처럼, overlapped window의 위에 겹쳐져서 배치될 수 있는 윈도우이다.
그런데 당장 Windows 2.0부터 오버랩은 말 그대로 overlapped window에서도 다 가능해졌으니, 둘의 실질적인 차이가 없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둘은 여전히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popup 윈도우는 기본적으로 캡션이 없는 형태이며, WS_CAPTION 같은 별도의 옵션을 줘야만 캡션이 달린다. 그러나 overlapped 윈도우는 옵션을 주지 않아도 캡션이 무조건 달려 나온다. Windows 2~3 시절까지만 해도 응용 프로그램에서 캡션이 없고 제목이 없는 대화상자는 지금보다 훨씬 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대화상자들도 다 캡션이 달려 있으며 일반적인 응용 프로그램처럼 아이콘에다 최소· 최대화 버튼과 두꺼운 프레임까지 별도로 스타일로 주고 나면.. popup 형태의 대화상자 프로그램과, overlapped 형태의 일반 프로그램 창과 외형상의 구분은 사실상 다 사라지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opup과 overlapped의 구분이 원래 저런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면 되겠다. 다른 창의 내부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화면에 떠 있으면서 캡션 같은 외형이 없거나 취사선택 가능한 모든 custom 윈도우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WS_POPUP을 주면 된다.

대화상자 리소스 편집기에서도 이 대화상자의 초기 스타일을 지정해 줄 수 있다. 프로퍼티 페이지처럼 다른 대화상자의 내부에 들어가는 대화상자이면 WS_CHILD를 주면 되고, 나머지 경우에는 WS_OVERLAPPED는 신경 쓸 필요 없고 그냥 WS_POPUP을 지정하면 된다.
여담이지만, 인터넷을 하면서 수시로 튀어나오는 웹브라우저 팝업창은 명칭과는 달리 사실은 overlapped 윈도우라고 생각하면 된다. 팝업창에도 웹브라우저 창 고유의 캡션과 프레임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overlapped 윈도우의 정의에 훨씬 더 부합하는 걸 알 수 있다.

3. child

끝으로, WS_CHILD는 동작 방식이 위의 둘과는 굉장히 다르니 이해하기 쉽다.
자기의 위상이 독자적이지 않고 외형상 부모 윈도우의 내부에 종속된 모든 윈도우들은 child 윈도우이다. 대화상자의 내부 컨트롤들이 대표적인 예임.

얘는 컨트롤 ID라는 정보도 갖는다. HWND는 운영체제가 창들을 식별하기 위해 부여하는 가변적인 번호인 반면, ID는 창을 생성하는(= 운영체제에다 생성을 요청하는) 주체 측에서 고정붙박이로 부여하는 번호라는 차이가 있다. GetDlgItem은 이름처럼 굳이 대화상자의 자식 컨트롤뿐만 아니라 부모-자식 관계를 갖는 아무 윈도우에서나 ID값으로부터 자식 창을 얻을 때 사용 가능하다.

popup이나 overlapped 윈도우에는 저런 ID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대신 메뉴를 표시하는 기능이 있다.
뭐, child 윈도우도 비록 메뉴는 태생적으로 없을지언정 마치 overlapped 윈도우처럼 캡션과 프레임, 그리고 시스템 메뉴를 갖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는 MDI 프레임 윈도우이긴 한데.. 그래도 그걸 빼면 캡션과 프레임을 갖춘 child 윈도우는 매우 드물다. 캡션과 프레임 자체가 최상위 윈도우의 상징과도 같으니 말이다.

이렇게 보면 overlapped와 popup이 한 묶음이고, 성격이 다른 child가 혼자 좀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일한 클래스의 윈도우가 상황에 따라서 popup과 child 속성을 취사선택해서 동작하는 경우도 의외로 있다. 콤보 박스에서 내부적으로 쓰이는 ComboLBox라는 리스트 박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콤보 박스의 타입이 Simple이어서(대표적인 예는 글꼴 선택 대화상자) 리스트가 언제나 표시되어 보일 때는 얘는 콤보 박스에 딸려 있는 child 윈도우이다.
그러나 콤보 박스를 클릭하거나 F4를 눌렀을 때만 리스트가 표시되는 drop list 상태일 때는 그 리스트는 대화상자의 위에 별도로 표시되는 popup 윈도우 형태로 생성된다. 이해가 되시겠는가?

차일드 윈도우의 표시 위치는 자기 부모 윈도우의 클라이언트 위치를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산정된다. 그런데 자기가 현재 부모 윈도우의 클라이언트 위치 기준으로 어디에 있는지를 한 번에 얻는 게 은근히 힘들다. 대화상자 크기에 따라 차일드 컨트롤들을 적절하게 재배치하는 코드를 작성해 보았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이다.

이 경우 GetWindowRect를 한 후에 부모 윈도우를 기준으로 ScreenToClient를 하여 화면 좌표를 한번 거쳐야 하거나, 아니면 번거로운 구조체 초기화를 해야 하는 GetWindowPlacement 함수를 호출해야 한다. 후자 함수의 경우, 최대화된 윈도우라도 원래 있던 위치와 크기까지.. 그 윈도우의 위치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되돌려 주기 때문에 유용하다. 응용 프로그램이 종료 후 나중에 재실행될 때 원래 위치를 100% 그대로 실행되기를 원할 때 이 구조체 값을 백업해 두면 된다.

4. 윈도우 간의 부모/자식 관계

child 윈도우야 그 정의상 태생적으로 부모 자식 관계가 명백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popup 윈도우도 비록 child처럼 표시되는 위치와 영역이 부모 윈도우 내부로 한정되는 급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 자식 관계 비스무리한 개념이 물론 존재한다.

popup 윈도우는 Z-order상으로 자기 부모 윈도우를 가리고 언제나 더 앞에 출력되며, 부모 윈도우가 소멸될 때 자기도 같이 없어진다. 요렇게 child가 아닌 popup 윈도우의 부모 역할을 하는 윈도우를 개념상으로 owner 윈도우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그럼 popup 말고 overlapped 윈도우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쟤는 애초에 주 용도가 응용 프로그램의 최상단 프레임 껍데기이다. 그러니 태생적으로 부모 윈도우 같은 걸 지정하지 않고 생성되며 부모 자식 관계를 따지는 건 딱히 의미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EnumChildWindow나 GetWindow(GW_CHILD) 함수에서 찾아 주는 건 순수하게 child 윈도우들뿐이다. Spy++를 실행하면 계층 구조로 표시된 윈도우 트리를 볼 수 있는데, 이것도 child 윈도우들의 관계만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어떤 대화상자 내부의 대화상자(프로퍼티 페이지)라든가 각종 컨트롤들은 계층 구조로 표시되지만, 대화상자에서 얘를 owner로 삼아서 또 다른 modal 대화상자를 꺼내 놓은것을 계층 구조로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을 부모(정확히는 owner)로 갖는 서열상 하위의 popup 윈도우들을 한번에 찾아 주는 API는 의외로 존재하지 않는다. 난 이게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없는 걸 발견하고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놀랐다.
일단 top-level 윈도우들을 다 enumerate 한 뒤, 얘들의 owner가 일치하는 놈을 일일이 뒤져 봐야 한다. 그래서 Spy++가 표시해 준 윈도우 리스트가 생각보다 직관적이지 않고 top-level 윈도우가 많은 것이었구나.

이상이다. Windows 프로그래밍을 15년 가까이나 판 본인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child는 그렇다 치더라도 popup과 overlapped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 구분인지를 잘 몰랐다. 그리고 parent 윈도우와 owner 윈도우의 관계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고 owned 윈도우는 child 윈도우 조회하듯이 곧장 조회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미처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요 근래에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 것들을 이렇게 정리해 보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10 08:35 2017/05/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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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로남불 이중잣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중잣대.
이래도 X랄, 저래도 지X. 어떻게 대답을 하든 꼬투리 잡아 불평불만 욕하기.
이건 성경에도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종특이다. 정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마귀 들렸다,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매 그들이 말하기를, 보라, 음식을 탐하는 자요, 포도즙을 많이 마시는 자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다, 하는도다. ... (마 11:18,19; 눅 7:33,34)

이솝 우화에 아주 비슷한 예가 있다. 나귀를 끌고 가는 부자 이야기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각각 나귀를 타거나 타지 않는 2*2 = 4가지 경우를 어떻게 조합하건 주변 사람들은 욕을 했다. 이건 뭐 답이 없다.

마녀사냥이 괜히 천하의 개쌍놈 짓이라고 지탄받는 게 아니다. 멀쩡한 여성을 물에 쳐박아 넣었는데 안 죽고 버티면 레알 마녀 괴물이니 화형에 처한다. 꼬르륵 익사해 버렸으면 사람이니 마녀 누명은 벗지만, 당사자는 이미 죽고 없다. 뭘 해도 걸린다. 뭐 이런 식의 논리이니까.. -_-;;
destructive testing을 무슨 양산형 제품 중 하나를 무작위로 추출해서 시행하는 게 아니라 사람한테 시행하는 거다.

“난 이 승만은 보도연맹 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 때문에 극혐하지만, 마오 쩌둥은 아무래도 좋고 대약진운동이건 제사해 운동이건 상관 안해요.” 같은 부류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런 범주에 속한다.
김씨 부자는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흉악 범죄자, 음주운전 교통사고 가해자, 731 부대장,히틀러나 도조 히데키 같은 전쟁광 인간 쓰레기들 한테도 안 쓸 욕과 저주와 악담을.. 좀 희생과 부작용 감수하고라도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조선이 적화되지 않게 막은 잘못밖에 없는 자국 초대 대통령에게 도대체 무슨 의도로 퍼붓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 시절에 그 욕 안 쳐먹고 곧이곧대로 신사적으로만 일 추진했으면 그냥 대한민국 간판 내리고 김 일성에게 정권 갖다바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뭐, 자기도 김 일성 싫어는 한댄다. 그러나 눈빛만 보면 안다. 똑같이 싫어한대도 이 승만을 욕할 때와 같은 혼과 진심은 절대 담겨 있지 않다. 이건 정상적인 분별력과 판단력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남조선 일부 대통령의 독재랑 북괴의 독재가 아무 차이가 없다는 망발도 사상에 이상한 데에 지독하게 오염된 중증 정신병이다.

그러니 이 정도면.. 그냥 “난 논리고 팩트고 뭐고 아무 필요 없고 특정 정치인은 그냥 괜히 아무 이유 없이 싫어요”가 차라리 솔직하고 정직하고 양심적인 대답이다. 그건 최소한 거짓말은 아니거든. 그러면 나라도 “아~ 그러세요?” 하면서 그 사람 앞에서는 정치 얘기 더 안 꺼낸다. 취향이야 존중해 줘야지?

그렇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건 얼마든지 자유이고, 심지어 그 주장을 자기 개인 사이버 공간에다 올리는 것 역시 자유다. 단지 그 따위 논리 체계를 갖고서 남의 사이버 공간을 더럽히고 오지랖을 놓는다거나, 남에게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치려고 하지만 않으면 된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직업은 몰라도 정치인, 외교관, 법조인, 문과 계열 교사 같은 직업은 안 갖고 살면 된다 -_-;; )

애초에 저런 성향의 사람들은 미국 같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자기 나라를 욕하고 비관하지만, 정작 추종하고 모델로 삼고 친해지려는 나라는 북한이나 중국처럼 인권이나 민주 따윈 있지도 않은 나라들이다. 똑같이 외국이고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비판하는 잣대가 같지가 않다. 쟤들은 원래 저렇다. 그러니 종북 빨갱이라고 백 날 욕 먹어도 할 말 없다.

2. 악마의 편집, 기레기 기질

그때에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이 말씀이 형제들 가운데 널리 퍼졌으나 예수님은 그에게,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 것을 내가 원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셨더라. (요 21:23)

이것도 완전 대박이다.
본문이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은 “요한은 설령 순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너(베드로)랑은 무슨 상관이니? 오지랖 부리지 마라”라고만, 즉 “안알랴줌” 노코멘트라고 대답을 하셨다. 그런데 그게 곧장 “요한은 순교 안 하고 천수를 누릴 거래!”라는 루머로 변한 채로 커뮤니티에 쫙 퍼졌다.

이게 인간의 심성이다. 다른 예로, 구약의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신약에서는 성경에 약속된 보상 자체가 영적인 것이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는 그 취지나 정신을 빼면 교리적으로 신약 교회와 무관하긴 한데, 그 얘기를 하면 "어 그럼 아예 헌금을 안 내도 되네, 내 물질 안 바쳐도 되네"처럼 원문이 의도하지 않은 내용까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슬그머니 넘겨짚는 사람이 꼭 있다.

성경 얘기 말고 더 선정적인 예로는, 15년도 더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결혼하고 나서도 너무 바빠서 자녀계획 같은 거 생각할 겨를이 없네요”라는 인터뷰가 어느 찌라시에서 “최 진실 임신 못 한다”라는 제목으로 한 줄 요약되기도 했다. ㅠㅠㅠㅠ 저건 거짓말은 안 한 건가..?? -_-

그러니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온대도 언론은 얼마든지 천하에 죽일놈 개쌍놈으로 조작할 수 있다. 전혀 이상한 일도, 놀랄 일도 아니다.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처형하라고 날뛰던 백성들 하나도 욕할 자격 없음. 오늘날까지 괴벨스의 후예들이 워낙 많이 날뛰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앞에서 언급한 내로남불 이중잣대 테크닉이 합해지면 삼인성호 같은 건 일도 아니다.

성경을 보면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옳습니까?”(마 22:17), “간음하다 붙잡힌 이 여인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요 8:4-5)처럼 겉으로는 평범한 정치· 종교 질문 같지만 결국은 Yes/No 뭐라고 대답하든 앞뒤 문맥 짤라서 사람을 매장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불순한 함정 질문도 있다.

그러니, 하물며 “성전 헐고 사흘 만에 재건” 운운은 기레기· 선동꾼들이 앞뒤 문맥 떼어내고 집어물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떡밥이었다.
원전은 요한복음(요 2:19)에 있는데 사람들이 나중에 써먹는 건 다른 책인 마태복음(마 26:61)에서 나온다는 게 흥미롭다.

3. 극단적인 것, 예외적인 것만 부각시켜서 큰 진실 왜곡

(1) 큰 그림: 남자는 여자보다 힘이 세다.
작은 그림: 그런데 장 미란은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훨씬 더 힘이 세다.

(2) 큰 그림: 미국은 한국을 군사적으로 정~말 많이 도와줬고 물자 원조도 하고 고아들도 왕창 많이 받아줬다.
작은 그림: 근래에 주한미군에 그렇게 질 좋은 사람이 오질 않다 보니 윤 금이 살해 사건에, 이태원 살인 사건 같은 범죄가 가끔 발생했다. 장갑차 교통사고 때는 가해자가 실실 쪼개고 앉아 있었다.

(3) 큰 그림: 88 서울 올림픽을 우리 민족의 저력으로 아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작은 그림: 그런데 개막식 때 성화 점화와 비둘기 날리기가 서로 아귀가 안 맞아서 "세계가 지켜보던" 중에 비둘기 몇 마리가 산 채로 통구이가 돼 버리긴 했다. 그리고 미관에 안 좋다고 동선상의 판잣집들이 강제로 철거당하고 개고기는 더욱 음지화하게 됐다.

(4) 큰 그림: 북괴는 끊임없이 남한에 무력 도발을 하고 테러 저지르고 간첩 보내고 땅굴도 팠다. 악랄함의 수위로 따지자면 일제를 능가한다.
작은 그림: 그렇게도 반공 강조하던 박 정희도 김 일성으로부터 선물 받은 적 있고, 그 딸은 한때 평양 가서 김 정일한테 공손히 인사도 하고 온 적 있다.

(5) 큰 그림: 일제는 조선 땅의 물자를 가혹히 수탈했으며, 말기로 갈수록 전쟁 준비와 민족 말살 정책으로 조선인들을 매우 괴롭혔다.
작은 그림: 그런데 조선 말기가 워낙 너무 막장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본이 아니게 한반도에다 철도 도로 전기 등 각종 인프라를 설치하고 근대화(?)를 시켜 주기도 했다. 초기엔 일제 순사가 마을 집집마다 파리채를 나눠주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 모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전히 대체로 여자보다 힘이 더 세며,
미국은 한국의 매우 고마운 우방국이다.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반도는 반미 할 자격 천하에 없는 나라다.
88 서울 올림픽은 전반적으로 매우 잘 치러서 한국의 리즈 시절 추억을 남겼고,
북괴는 오히려 그렇게 화해하는 척하면서도 호박씨 까면서 더욱 비열하게 도발을 했을 뿐이다.

일제 역시 조선을 조금 근대화시켜 준 건 돼지를 잡아먹기 직전까지 잘 먹이고 살찌우는 것과 같은 목적으로 한 것일 뿐이다. 쟤들이 말기엔 단군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아예 싹 없애려고 창씨개명, 한국어 사용 금지, 신사 참배와 궁성요배 강요 짓거리를 한 걸 생각해 보아라.
이건 사람을 대놓고 독가스실로 보낸 것만 아닐 뿐이지 몸이 아닌 정신에 대해서는 거의 나치 유대인 학살 급의 죄질이다. 이 엄청난 만행이 겨우 1920년대 리즈 시절에 알량한 인구 증가와 식량 생산 증가, 철도와 공장 건설 산업화 따위로 실드 쳐지겠는가?

작은 그림을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은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은 그림에 "만" 꽂혀서 큰 그림을 부정하려 하는 외눈박이 이단들로부터는 반드시 도망쳐 나와라. 그런 애들은 순진하고 멍청하기보다는 사악하고 불순한 경우가 더 많더라.

기독교계에 이런 방식으로 넘어진 이단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두룩하다.
진리의 성경 말씀을 올바로 나눠야 하지만(딤후 2:15), 한편으로 역사 팩트도 올바로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 divide란 분할, 구분, 분간..을 의미한다.

4. 결론

이것 말고 또 무슨 예가 더 있을까?
성경에는 마태복음의 끝부분처럼 로마 정부가 “예수 시체 도난”이라고 여론 조작과 매수를 시도하는 장면도 나오고,
또 고라 일당처럼 자기가 권력욕 대통령병에 걸려 있으면서 말은 “성직 계급 반대, 만민 제사장론” 드립을 치면서 모세를 상대로 반역을 부추기는 장면이 나온다. 사회·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능력껏 벌어서 필요한 만큼 쓰는 세상,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이런 것도 다~ 저런 케케묵은 전략의 후신일 것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의 본성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인간이 그래도 뇌가 있고 일말의 지능이 있다면 최소한 옛날 사람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또 겪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실수를 하더라도 주토피아 OST 가사처럼 새로운 실수를 계속 만들면서 발전이나 변화를 해야지 뻔히 실패가 검증된 길을 또 가서는 꿈도 희망도 없다.

내가 늘 말하듯이 성경은 신약 크리스천의 행실 차원에서는 정교 분리를 명시하며, 기본적으로 정치 중립적인 책이다. 예수님이 재림해서 지구를 직접 다스리기 전까지는 인간이 만드는 완벽한 세상 정부와 지상락원 유토피아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성경은 "위의 권위와 주인과 갑에게 순종하라" 같은 보수적인 이념 위주이지만, 누가복음이나 야고보서 같은 매우 좌파스러운 책도 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데는 유대인, 로마인, 백성과 지도자와 외세가 공평하게 똑같이 기여했다.

이런 기본적인 균형이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소위 좌와 우 중에서 누가 더 크게 잘못하고 있고 더 반역적이고, 더 반성경적인 방법론을 즐겨 사용하는지는 정말 답이 이미 나와 있는 문제인 것 같다. 모두가 공평하게 잘사는 세상 따위야 인간의 힘으로 결코 이룩할 수 없지만 북괴에 안 퍼 주는 세상 정도는 인간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으며, 반드시 이룩해야만 한다!

물론 사람이란 게 성장 배경과 관심분야가 제각각이고, 보고 듣고 정보를 입수하는 경로가 제한돼 있다 보니 삼라만상을 보는 관점이 편파적이 될 수는 있다.
누구는 일본이 더 싫지만 누구는 북한이 더 싫고.. 누구는 경제와 안보에 더 관심이 많지만 누구는 약자 인권과 복지에 더 관심이 많을 수는 있다.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 일기장이나 SNS에다가만 끄적거리는 거면 그건 아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감히 대통령을 물러나라고 요구할 정도의 강한 결론이 담긴 주장을 하거나, 남의 주장을 반박하고 남의 SNS에다가 오지랖을 부리거나 남을 설득해서 논쟁에서 이기고 내 편을 만들려면 논리가 편파적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 아예 법조인, 정치인, 또는 문과 계열의 교사· 교수처럼 나라의 미래를 좌지우지 하고 남에게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처지의 사람이 사상 체계가 그따구여서는 절대 안 된다.

일관성이 없으려면 차라리 일관성 없게, 랜덤하게 일관성이 없어야(?) 그건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정말로 그 사람이 생각이 짧거나 식견이 부족했거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서 편파적으로 생각한 것일 수 있다. 그건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인권을 얘기하고 나라의 비극과 흑역사를 얘기하면서 오로지 북괴에 대해서만 절~~~대 침묵하고, 꼭 그쪽으로만 "일관되게 일관성이 없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일부러 작정하고 그러는 것이며 매우 불순하고 사악한 태도이다.

그래 가지고는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설득을 못 할 것이고 내가 쓰는 글의 논조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얻다대고 비겁하게 팩트나 끄집어오다니? 인권 민주 복지 평화 통일 팔아서 거짓 날조와 선동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 이러려는 것 같은데, 그런 속 뻔히 보이는 전술은 나한테는 절대로 안 통할 거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07 08:32 2017/05/0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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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희 대통령의 자녀들

1. 박 근혜(1952)

* 주의: 오늘은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오랜만에 정치 얘기 좀 꺼낼 것이고 글 중간에 필터링하지 않은 진지한 욕설도 늘어놓을 것이다. 독자들에게 미리 양해 구함.
나하고 정치 성향이 맞지 않고 북괴는 같은 '우리민족'이니 남조선의 존립에 전혀 위협이나 해가 되지 않는다고 태평스럽게 생각하는 분, 내 글을 팩트와 논리로 반박· 저격할 의향이 없는 분은 박 근혜 얘기는 그냥 건너뛰기 바란다. 난 분명히 미리 주의를 줬다.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나온 나름 이공계 출신이고, 잘 알다시피 그냥 독신이다.
이 사람은 바로 얼마 전까지 제18대 대통령을 역임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 과반 당선 등의 기록을 달성했다. 그러나 헌법을 고치면서 18년씩이나 대통령을 한 부친과는 달리, 딸은 예정되었던 임기도 못 마치고 탄핵 인용 파면으로 대통령 생활을 마감했다. 하긴, 만기 퇴임을 못 한 건 부녀가 동일하네..;;

글쎄, 내 소신을 말하자면 본인은 박통이 재임했던 4년 동안 약간이나마 행복했다. 지금은 그 행복이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되어 마음이 착잡할 따름이다.
박통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의견에 대해서야 개인 자유이며 내가 더 시비를 걸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이 무능했다거나,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에는 본인이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한 게 없긴 왜 없냐?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라.

  • 통합진보당 해산
  • 전교조 법외노조화
  • 한미 연합사 전시작전권 전환 무기연기, 전쟁 위협 시 선제 타격 가능
  • UN 북한 인권 결의안 채택
  • 개성공단 폐쇄 및 대북지원 (명목상) 0원

야당 후보가 죽었다 깨어도 절대로 안 하거나 못 할 일을 얼마나 많이 해냈냐? 박 근혜는 애초부터 DO보다 BE의 업적이 더 뛰어난 대통령이었다. 우리나라 적화통일을 한 4년쯤 늦춰서 최소한 시간은 벌어 줬다.

이 정도로 퍼 주고 시행착오를 겪었으면, 이제는 북괴에 대해서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주민들 해치지 마라"가 아니라
네일건 쏘면서 "두 번 협상은 없어. 한 시간 내로 핵무기 포기해" 이래도 모자랄 판 아닌가?
전쟁? 얼어죽을 북폭 선제공격 같은 건 할 필요도 없다. 그냥 모든 돈줄을 차단하고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해도 된다. 급한 건 북괴이지 우리가 아니다. 모든 정황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대화나 협력으로 북핵을 해결하자 나불대는 인간말종 개새끼들은 정말 대놓고 종북 개빨갱이들 아닌가? (너무 화가 치밀어서 욕설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Let's make North Korea great again이다.
꼭 저러는 놈들이 일제에게 비굴하게 평화를 구걸했던 구한말 매국노 친일파는 같은 입으로 어째 저렇게 욕을 해 대나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박통 레카는 행적이 분명히 있다. 단지 종북좌빨들이 좋아하는 행적이 아니었을 뿐이다. 레카가 훌륭한 대통령이었던 이유는.. 적들의 평가가 말해 준다. 이 이상 더 말이 필요하지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로동신문 2016년 3월 16일자라고 함. 그로부터 딱 1년 뒤에 북괴의 "꿈은 이루어졌다."

바보 멍청이들이 꼭 "위수김동 장군님 만세"만 외쳐야 종북인 줄 알어.. 사탄 마귀가 빛의 천사로 나타나지 그럼 반공 포스터에 그려진 것처럼 뿔 달리고 꼬리 달린 흉측한 괴물로 나타날 줄 아냐?

박 근혜가 아들이 비리 저지른 전직 대통령, 부인이 뇌물 받은 전직 대통령 등 온갖 친인척 비리가 얽히고 설켜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청렴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저런 거 다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지금의 뇌물 수사네 구속이네 하는 거.. 정말 정의를 위해서 하는 건 1도 아니라는 것쯤은 진영논리로 양심과 지능이 마비되지 않은 한 삼척동자라도 알지 싶다. 개돼지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기억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학습효과가 있는 사람을 속이고 선동할 순 없지!

레카가 탄핵돼야 하는 이유는 내가 보기에 거의 전부가 탄핵까지 당할 잘못도 아니고 그냥 지가 닭그네가 싫은 이유들(= 좀 심하게 말하면 적화통일에 걸림돌이 되니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더라.

  • "북괴한테 물어 보는 건 괜찮고 최 순실한테 물어 보는 것만 그렇게까지 죽을 죄냐?" (다른 비정치적인 주제도 아니고 인권 결의안 같은 아주 크리티컬한 것을)
  • "지금이 어느 시댄데 빨갱이 타령이냐고? 그럼 더 오래된 친일파· 위안부 타령은 뭐냐?"
  • "그 무개념녀는 그래도 허접하게나마 승마 단체전 메달이라도 땄지, 수많은 고시낭인 취준생들을 농락하고 아무 스펙 없이 특혜만으로 공기업 합격부터 한 뒤에, 대충 쓴 이력서 달랑 제출한 누구 아들은 그럼 뭐냐? 게다가 뭐 저런 놈이 서민 타령이냐?"

등, 저격할 아이템들은 한도 끝도 없다.

판결문 어딘가에 있던 문장인데..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고? 나 참 기도 안 차서.. 외국까지 나가서 북핵 열심히 옹호하고 실드 치던 모 대통령의 짓거리는 씨발 그럼 자국 헌법 수호 의지가 있는 행동이더냐? 사람들이 진짜 큰 위험한 죄가 뭔지 우선순위 분간을 못 한다.
자 그럼.. 흥분은 가라앉히고, 다음 얘기로..

2. 박 근령(1954)

이분은 박 근영, 박 서영을 거쳐서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을 어찌 된 일인지 두 번이나 했다. 서울대 음대 나왔으며, 그 이름도 유명한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새마을 노래'의 실질적인 작곡자로 알려져 있다.

이 글을 쓰는 본인은 1980년대생으로 박통은커녕 전대갈 시절을 경험한 기억조차 없다. 서울 올림픽 이전 시기는 직접체험의 기억이 없는 선사시대의 영역이다. 민주화 운동 같은 것도 모름.
허나, 새마을 노래를 동요 테이프에서 들은 적이 있고 엄청 옛날 음악 교과서에서 악보를 보기도 했다.

새마을 노래는 가사 내용대로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기 좋게", 노동요처럼 참 흥겨운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기서 싸우는 건 같은 편끼리 치고 받고 싸우는 게 아니라 적군(=북괴)과 싸운다는 얘기다. 성경에서 느헤미야서에 완벽한 예시가 있다. (느 4:15-18)

이 새마을 노래는 공식적으로 박 정희 대통령의 작사 작곡으로 등재되어 있다.
일단 작사는 아랫사람을 시킨 뒤 대통령 이름만 올린 게 아니라 정말로 박통 당사자가 한 것으로 보인다. 저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교사와 장교를 모두 역임했고 그림과 글씨, 음악 등 예체능에도 두루 조예가 깊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작곡에 대해서는 사실은 세월 간격을 두고 조금 상이한 증언이 존재한다. 2004년경 굿데이 인터뷰에서는 작곡을 딸이 다 했다고 나오지만 더 최근 인터뷰에서는 작곡까지 아버지가 했는데 딸은 그걸 악보로 받아 적고 편곡만 한 것으로 나온다(2008년 11월자 인터뷰, 그 뒤 2015년에도). 어떤 형태로든 그 당시 대통령의 영애가 개입을 했다.

박 근령은 훗날 1982년에 대기업 회장 가문 아들과 결혼했으나 6개월 만에 이혼하고 오랫동안 언니처럼 솔로로 지냈다. 그러다 그로부터 30년이 넘은 2007년에 50이 넘은 나이로 무려 13살 연하의 전문대 교수와 재혼했다. 자녀는 없음.

3. 박 지만(1958)

육사까지 나오긴 했지만 잘 알다시피 젊은 시절에 방황 많이 했고, 40대 중반 나이가 된 2004년에야 16살 연하의 변호사와 결혼했다. 그 이듬해에 득남했다가 2014년에 9살 터울의 둘째 아들을 얻었고, 그 다음 2015년에는 쌍둥이 아들을 얻어서 자식은 아들만 넷이다. 부인이 젊다지만, 그래도 58세의 나이에 얻은 아들이니 정말 엄청난 늦둥이이다. 박 정희가 1917년생인데 증손자도 아닌 막내 손자가 2015년생이라니...

박 지만이 학교에 들어가던 1970년대 초중반엔 이제 막 고등학교 평준화가 시행되었으며, 학교 배당에 컴퓨터 추첨이 동원되었다.
KIST가 정부로부터 이거 뺑뺑이를 의뢰받아서 실시했는데, "추첨을 살짝 조작해서 대통령의 아들인 박 지만 군을 그래도 명문 K고에다가 배정하라"라는 외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KIST 전산실 실장이던 성 기수 박사가 이에 소신껏 응하지 않고 아무 조작 없이 추첨을 돌려서 그는 J고에 진학하게 됐다... 고 성 박사의 회고록이 전해진다. K와 J가 어디인지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이렇듯, 이쪽 가문은 결혼 여부와 시기, 자녀 유무나 시기 같은 가정사가 다들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사실은 박 정희는 어렸을 때 억지로 떠밀려서 결혼한 전 부인 김 호남에게서 얻은 딸도 하나 있다. 박 재옥(1937)이라고 박 근혜 전대통령의 입장에서는 15살이나 더 많은 이복 언니이다. 이분은 그나마 평범하게 산 듯하며, 친부에게서 그렇게 아주 버림받지는 않고 특혜도 종종 받으며 지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04 08:30 2017/05/0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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