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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복종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시는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닌 사람의 작품이다. 그러나 윤 동주의 <십자가> 만만찮게 상당한 영적 통찰력이 엿보이는 것 같다.
시의 각 행에 내가 검색해 낸 관련 성구를 덧붙여 보면 이렇다.

* 복종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갈 5:13, 벧전 2:16)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출 21:5-6, 엡 6:5)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몬 21)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출 20:3-6)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마 6:24, 눅 16:13)

(성구들 직접 다 찾아 보시기 바란다.)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면, 특히 KJV라는 당당한 최종 권위까지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저 '당신'이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KJV 독립 침례 교회들은 바른 지식이 없이 성도들에게 열심과 헌신만 강요하면서 기형적으로 성장한 기성 교회들의 부작용과 폐단을 경험한 사람들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도들을 너무 닥달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자율'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랬더니 이번에는 반대로 그 자유를 무질서와 방종, 영적 태만을 합리화하는 데 써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비록 사실이 아니길 최대한 기대해 보지만 이는 사역자와 여타 성도들을 힘 빠지게 하고 우울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십일조가 신약 교회의 교리가 아니라는 가르침이 성도가 헌금을 안 해도 된다는 가르침으로 와전된다거나,
목사고 교사고 다 필요 없고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이상한 교리가 나온다거나 말이다.

너 혼자 구원받고 너 혼자 성경이고 교리고 다 알긴 하지만, 그게 남에게 끼칠 간증의 영향력을 상실했다면 당신은 영적 전투에서 이미 마귀에게 진 것이다.
구원이 이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성화로 이어져야 하고 그게 자연스럽듯, 바른 성경에 대한 지식은 바른 교회를 세우고 유지시키는 헌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본인은 이런 영적 진리를 나누고자 이 주제와 관련하여 문득 떠오른 시를 인용했을 뿐이다. 타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고 다같이 화합하는 게 좋다는 식의 주장을 할 의도는 전혀 없으므로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끝으로, 시의 저자인 만해 한 용운(1879-1944)에 대해 살펴볼 점이 있다. 그는 시는 저렇게 '해요체' 위주의 아주 여리고 부드러운 여성적인 문체로 썼지만, 평소 언행과 성격은 그와 정반대로 독설과 기행이 가득한 열혈 과격파였던 걸로 잘 알려져 있다.

3· 1 운동 후 투옥된 민족 대표 33인 중 일부가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을까봐 통곡하고 두려워하자 그는 격분하여 감방 안의 똥통을 뒤엎어 그들에게 뿌리고는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 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 때려치워라!” 하고 호통을 쳤다.

또한 전국의 주지 스님들을 모아 놓고 강연을 할 때는 교계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똥이다. 그리고 똥보다 더 더러운 건 썩어 가는 시체이다. 그런데 시체보다도 더 더러운 것은 바로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너희 중놈들의 심보이다!”라고 일갈하고 단상을 내려온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한 용운이 마 23:27-28과 렘 17:9를 알았는지는 난 모르겠다. 그러나 그 과격은 그가 비인격적이고 몰상식해서가 아니라 진짜 국가와 민족과 나름 자기 종교에 애정이 있기 때문에 표출된 과격일 것이다. 또한 딴 사람도 아니고 민족 대표자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비실비실하니까 저렇게 강한 책망을 했고, 일반 민초들이 아니라 주지 스님들 앞에서 당당히 쓴소리를 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야 “뱀들아, 독사의 세대여!”라고 한 치의 두려움 없이 호통을 치셨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오히려 용서하고 다독여 주셨다. 그리고 “주여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라고 애원하는 사람에게는 기적을 통해 믿음을 북돋워 주셨다.
정반대의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언제까지 너희를 용납하리요?” 같은 과격한 책망은(마 17:17) 받은 게 충분한데도 아직 성숙을 못 해서 정말로 책망을 받아야 마땅한 제자들에게나 하셨다!

이렇게 온유와 과격, 단호함을 잘 조절하여 때에 적절한 언행이 나오게끔 나의 행실도 돌아봐야 하겠다는 걸 <복종>이라는 시와 저자를 생각해 보면서 느끼게 되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2/08/15 19:17 2012/08/15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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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제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하늘로 가며,
제아무리 착한 사람, 불쌍한 사람, 의로운 사람, 법조인, 경찰, 검찰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흉악범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라 해도 예수 안 믿고 자기 죄 가운데 죽었다면 지옥에 간다.

그렇다. 그게 사실이다.
그래서 착한 일 많이 하면 구원받는다고 믿는 여타 종교 신자들이나, 자기는 지금까지 남보다 충분히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불신자들은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냐며 항변한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뭐, 지금 내가 그것에 대한 시비를 가리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거 아는가?
흉악범이 구원받으면 구원받은 흉악범이고, 사형수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은 사형수가 된다.
성경의 법칙대로라면 그들은 하늘로 가더라도 교수형은 당하고 간다. 이 땅에서 법이 규정해 놓은 죄값은 치르고 간다!

사형 제도는 지극히 성경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결혼 제도를 제정한 것만큼이나 사형 제도도 만드셨고,
육식을 허락하신 것만큼이나 세상 정부가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걸 허락하셨다.
(창 9:6)
성경의 지론은 “ ‘살인하지 말지니라’를 어기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이다. 아멘.

여기서 살인이란 흉계를 품고(주로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고의로 죽이는 것을 말한다. 요즘 말이 많은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망 사고는 성경으로 치면 출 21:29와 비슷한 맥락의 고의적인 살인으로 간주하여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을 더럽히는 성 범죄도 마찬가지이다. 속도위반 결혼으로라도 수습을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면 성경에 따르면 한 치의 자비심 없이, 속죄 헌물도 안 통하고 무조건 사형이다.

다만, 고의성이 없는 과실치사는 성격이 다르며, 비록 처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사형 정도까지는 아니다. 정당방위도 응당 인정하며, 면책의 범위가 오늘날 근대 국가의 법보다 관대한 편이다(출 22:2).

그리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조직을 인정하고 공권력도 인정하는 성경의 특성상, 군인이 지휘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 역시 그런 살인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병역 거부는 잘못된 행동이다)

공무를 집행하는 경찰이 폭도들에게 발포하는 것이나, 사형 집행관이 교수대 스위치를 누르는 것도 성경적으로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으며, 그런 공무원은 전혀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 오히려 그들은 목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 (롬 13:4)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흉악 범죄가 터질 때마다 국민들은 분노한다. 인터넷 뉴스 기사에는 피의자를 저주하면서 저런 놈은 이렇게 각을 떠서 죽여야 한다는 식으로 온갖 폭력적인 댓글이 달린다. 그리고 너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정치인과 법조인들을 욕하면서, 신은 저런 놈 안 잡아 죽이고 뭐 하냐는 식의 댓글도 올라온다.

그 마음을 나도 이해하며 어느 정도는 공감도 한다. 비록 이런 네티즌들의 마음 상태도 건전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겉으로 표출만 안 되었을 뿐이지 살인자 본성이 남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가 사형(死刑)이라는 필요악을 공의롭게 잘 집행해 줘야, 시민들이 분을 품고 보복 살인 내지 린치(私刑)를 할 생각을 안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정부가 사형 집행을 안 하면 다른 시민들이 실족하여 악한 마음에 빠지기 쉽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것도 불신자들이 하나님 자신보다도 더 자비로울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으며 기대도 안 하신다!

피해자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형 집행 장면이 국영 방송으로 생방송 중계된다. 김 길태, 강 호순, 오 원춘 같은 주인공이 교수대에 오른다. TV에서는 근엄한 분위기 가운데에 이들이 저지른 범죄를 다시 보여주고, 피해자 유족을 인터뷰하고 피의자의 마지막 유언을 공개적으로 받는다. 필요하다면 죄수들을 담당한 종교인 성직자의 인터뷰도 한다.
그 뒤 공개적으로 교수대가 작동하고, 잠시 후 법의관이 사형수가 완전히 죽은 걸 확인한다. 이 과정을 온 국민이 지켜보고, 사형 집행 장면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로 나돈다.

너무 과격한 상상인가?
난 이렇게까지 하는데 사람들이 죄와 벌과 죽음에 대해서 가볍게 여기게 될지, 모방 범죄가 또 생기고 사람들이 감히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왜 이렇게 시행을 안 하는지 궁금하다. 제아무리 인간말종 흉악범이라 해도, 무슨 독립 운동가의 심정으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닌 이상, 자기 목숨 아까운 줄은 알고 죽음이 두려운 줄은 안다. 그래서 사형 당하기 직전에 어쩌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경우도 생긴다.

구약 율법 핑계를 대면서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의견이 아주 많다. 구약 율법 중에는 음식 규정이나 안식일 같은 것처럼 경륜의 차이로 인해 오늘날 전혀 무의미하고 적용되지 않는 제도나 규율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윤리는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유효하고 최소한 그 의도를 되살려 시행했을 때 나쁠 게 없는 게 거의 대부분이다. 가령, 신약 시대라고 해서 짐승과 마음대로 수간해도 괜찮은 건 아니지 않은가? (출 22:19; 레 20:15)

또한 사형 제도는 구약 율법에만 얽매인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존재했으며, 오히려 성경 전체가 인간의 죄와 벌과 구원 계획에 대해 논하면서 사형 제도를 두 말할 나위 없이 당연히 인정하는 뉘앙스에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가령, 롬 1:32) 그래서 오죽했으면 바울조차 행 25:11에서 자기가 죽을 죄를 지었으면 기꺼이 사형 당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자기 아들을 죽인 흉악범을 용서한 손 양원 목사 같은 유명한 사례가 있다. 그런 사람이 나오기 위해서라도 사형 제도가 있어야 한다. 법대로라면 죽어야 하는데 용서를 하고 탄원을 해서 목숨을 건졌으니 그게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당신도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이라면, 나라의 법은 공의롭게 요구하고 나서, 자기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에나 원수에게 그런 사랑을 개인적으로 실천해 보아라. 알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아예 나라의 법이 흉악 범죄자에게 정당한 처벌을 내리지 않으니 오늘날 시국은 전 8:11처럼 되어 가고, 피해자 유족들은 가슴에 피멍이 든다.
오늘날은 정말로 가해자 인권만 있지 피해자 인권은 없다. 그냥 운이 나빠서 당한 것일 뿐이다. 이것만 생각하면 나는 도대체 민주화가 됐다는 요즘이, 옛날의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정권 시절보다 인권이 뭐가 좋아졌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

결론을 내리겠다.
기독교 교리의 논리적인 성립을 위해서라도 사형 제도를 부정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당신이 불신자나 기독교 안티이고 그저 인본주의 박애주의자여서 사형 제도를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이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사형 제도를 반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당신은 지금 살인자 마귀에게 속아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엄한 형벌을 필요하게 만든 것도 죄이지만, 죄에 대한 벌을 공의롭게 집행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 역시 인간의 죄이다.

그리고 또 생각을 해 보아라. 역사적으로 억울하게 사형 당하기로는 지금까지 크리스천들만치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린 집단이 또 있었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사형 제도 자체를 문제삼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성경에 입각한 바른 교리가 세상에 널리 퍼져서 영화 <밀양>에서처럼 “내가 용서를 안 한 가해자를 어떻게 신이 용서해?” 같은 시험에 드는 사람이 이 땅에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이 믿는 복음은 그저 막연하고 맹목적이고 몰상식· 비합리적인 게 아니라 지극히 건전하고 이치에 맞는 진리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07/31 19:27 2012/07/3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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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자가진단

※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 크게 작용한 요인들
  • 세상 그 어느 종교도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교주가 부활했다고 가르치지 않고, 또 이 정도로 역사적으로 방대한 증거와 증인들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
  • 인간이 자기 노력과 근성으로 신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신이 먼저 인간을 찾아주고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다고 가르치므로
  • 없어졌으면 애시당초 진작에 씨가 말라 버렸을 정도로 황당하고 믿어지지 않는 교리를 갖고 있는데, 아직까지 당당히 존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무시할 수는 없고 한번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으므로
  • 이 정도로 무수히 많은 이단들이 압도적으로 집착할 정도이면, 웬지 이 바닥에 분명 진리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 성경은 그 논조와 내용을 볼 때 인간이 쓸 만한 책이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 (가령, 정치적으로 치우침이 없음. 인간 자신에게 절대 이롭지 않은 내용이 지나치게 장황하게-_- 많이 들어있음)
  • 그래도 몇몇 증명 불가능하고 이해가 안 되는 사항들만 일단 믿고 나면, 이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각종 교리와 윤리관은 아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인간에게 건전하다는 게 너무 분명하게 확 느껴져서
  • 죄 문제라는 인간에 대한 상태 진단과, 그 해결책에 너무나 공감이 가서. 최소한 줘도 못 먹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지?
  •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의의 기준이 온갖 상대주의· 다원주의보다는 훨씬 더 명확하고 깔끔하고 건전하고 뒤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 사회 구조 탓이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등등)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고할 것.

※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 조금 작용한 요인들

  • 개독안티들의 무례하고 표독스러운 말투에, 사실 여부를 떠나 괜히 반발심과 환멸을 느껴서 (다른 건 몰라도 저놈들 말은 절대로 듣지 말아야겠다는 식)
  •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과오라고 알려진 것들이 상당수가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사실은 크리스천들도 오히려 피해자라는 걸 알게 되어서
  •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수준의 간단한 변증론. 가령,
    “지금 예수 믿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없는 게, 지금 안 믿었는데 진짜로 지옥이 있어서 낭패 보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리스크가 적다.”
    “신이 없다고 단정짓기엔 인간의 지식은 너무 좁고 빈약하다” 같은 식.
  • 내세와 심판이 있을 거라는 양심의 자극. 죽음에 대한 두려움
  • 성경이 과학적으로도 옳다는 걸 뒷받침하는 몇몇 자료들
  • 이 정도 교리면, 정말 만에 하나 성경의 내용이 다 거짓이고 허구이고 설령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다 해도, 크게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되어서. 성경은 최소한 날 골탕먹이려고가 아니라 날 '위해서' 기록된 책이라는 느낌이 와서

※ 내 신앙관에 영향을 거의 끼치지 않은 것들

  • 좋든  싫든, 주변 교회 사람들의 행동과 평판
  •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해당 종교계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언행 (그 사람들이랑 나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 나는 베르테르 효과 같은 것과는 담을 쌓고 지냄)
  • 세상 불신자들로부터의 평판, 매스미디어에 묘사된 이미지
  • 육신을 들뜨게 하거나 흥분시키거나 만족시키는 종교심. 나는 그런 부류의 종교심은 이미 철도교로 다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종교에다 내 영원을 걸지는 않는다.
  • 기복신앙

하지만 현실에서는 저런 것들을 보고 교회를 나가거나 종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무진장 많다. ㅜㅜ

※ 지금은 발현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 깊은 시험에 들고 신앙 면역 체계가 무너졌을 때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암적 요소들

  • 성경에서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고 해결이 안 된 의문이나 논리적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 몇 군데. 목사님에게 여쭈거나 주석서를 봐도 알 수 없는 것들
  • 성경이 밥 먹여 주냐... 같은 부류의 유치하지만, 좁은 길을 가는 성도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험. 현실의 염려 (눅 8:14)
  • 신앙생활이 매너리즘으로 변질돼 가는 것
  •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안 하면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들이닥치는 것

Posted by 사무엘

2012/05/21 19:28 2012/05/2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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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불에 타 죽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불은 사람에게 공포를 주고 대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잘 쓰이곤 했다.

작게는 담뱃불, 크게는 다리미나 인두로 생살을 지지는 것은 고문 방법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리고 중세에는 화형이란 게 있어서 반역자나 종교적 이단 같은 죄질이 굉장히 나쁜 죄인은 이 방법으로 처형했다.

동양의 조선이나 중국은 거열형이나 능지처참 같은 다른 끔찍한 형벌이 있을지언정, 화형은 없었나 보다. 그래서 화형 하면 일단 중세 유럽이 떠오른다.
게다가 그 당시는 지금처럼 불에 활활 잘 타는 천연 가스나 석유· 석탄이 개발되어 쓰이기 전이었음을 생각해 보자. 그러니 사형수를 완전히 확 불태우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집행 시간은 길었고 그만큼 사형수의 고통도 더했다.

근현대에 와서는 먹고 살 만해지고 인권(?) 의식이 향상되면서 그런 잔인한 형벌은 사라졌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막장인 곳에서는 열사의 길을 가기 위해 분신 자살이라는 엄청난 방법을 선택한 사람이 이따금씩 나오곤 했다.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예로 전 태일이 있다(1948-1970).
노동청에 탄원서를 보내고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봤지만 바뀌는 게 전혀 없으니,
이놈의 있으나마나한 근로기준법에 사망 선고를 내리자는 차원에서 자기 몸에다 기름을 끼얹은 뒤 불을 지르고 만 것이다.

난 어렸을 땐 우리 민족은 6· 25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냈다고까지만 배웠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희생자도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분신 자살/자결의 예로 가장 유명한 사건은, 틱 광둑이라는 환갑이 넘은 베트남의 어느 불교 승려의 죽음이다.
그는 남베트남의 부패 독재 정권(응고 딘디엠 대통령)의 학정을 세계에 알리고 이에 항거하는 뜻을 전하고자 1963년 5월 29일, 수백 명의 불자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휘발유 화염에 휩싸였다.

아니, 불교에는 대의를 명분으로 하는 이런 행위에 대해서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고 용어가 따로 있다고 한다.
에밀레종 같은 얘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하긴, 한국인에게는 김 동리의 소설 <등신불>을 통해 이 개념이 비교적 널리 소개되기도 했다.

세상에 사람이 라이브로 불에 타 죽는 장면은 영화로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틱 광둑 스님의 충격적인 자결 장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영상과 정지 사진으로 촬영되어 전세계에 알려졌다. 이것이 국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독재 정권의 명을 재촉했음은 물론이다.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통에 울부짖거나 바둥대지 않았고 꼿꼿하게 책상다리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절명해서 몸에 힘이 완전히 빠진 뒤에야 뒤로 벌렁 넘어갔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반세기 가까이 전인 1963년의 일인데 동영상이 컬러로 남아 있고 오히려 정지 사진은 흑백이다.
동영상 (1:34 지점부터 불이 확! 2:21에 시신이 쓰러짐)
정지 사진
비위가 약하신 분은 열람 금지.

동영상은 멀리서 찍은 것이고 활활 타는 불밖에 안 보이는 반면, 정지 사진은 고인의 모습을 비교적 가까이서 여러 장 찍은 듯하다.

처음에 밝은 색 계열이던 승복이 시간이 흐르면서 새까맣게 탔다.
화마가 얼굴 피부까지 검붉게 할퀸 모습은, 흑백이 아닌 컬러 사진이라면 훨씬 더 참혹하고 끔찍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안면 화상을 입은 이 지선 씨 모습만 해도 얼마나 끔찍했던가?

응고 딘디엠 정권은 막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대놓고 탄압까지 했다. 뭐 그렇다고, 시대가 20세기인데 멀쩡한 불자들을 잡아 죽인다거나 한 건 아니고, 사찰을 파괴하고 석가탄신일을 금지하는 등 불교를 제도적으로 디스하고 불이익을 준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서 굉장히 이상한 점이 있는데, 응고 딘디엠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이다! 정부 관료들도 전부 가톨릭 신자만 등용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개신교 계열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불교를 탄압했다고라...
응고 딘디엠의 아내, 즉 베트남의 영부인이라는 사람은 틱 광둑 스님의 죽음을 보고는 아예 “바베큐 파티”라고 천하의 개쌍놈급의 개드립을 공공연히 치기도 했다.

난 정말 이상함을 느꼈다.
우리나라는 가톨릭과 불교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가?
성탄절과 석가탄신일 때 천주교계와 불교계가 서로 축하해 주는 건 뭐 관행으로 정착한 지 오래이다.
그러면서 천주교는 타 종교에 대해서 관용과 화합 잘 한다고 폭풍 칭송을 받고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개독 먹사들이 담대하게 복음 전한 것도 아니고 타 종교인들에게 무례한 무개념 병크 저질러서 간증 상실하고 욕 바가지로 얻어먹고 있지 않은가?

물론 가톨릭의 전략을 아는 사람에게야 이런 차이가 그리 새삼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각 국가와 문화에 따라서 자신이 약자일 때나 경쟁자와 아직 동급일 때 취하는 전략이 다르고, 마침내 그들이 진짜 주류가 되고 정치· 종교적 갑이 되었을 때 시행하는 전략이 또 완전히 다르다. 섬뜩할 정도로 다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뭔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이런 패턴을 배워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교회 역사상 순교자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왔으며, <폭스의 순교사> 같은 책을 보면 '흠좀무'라는 말밖에 안 나오는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겉보기로) 아무 고통 없이 화형 당한 사람 얘기가 나온다. 토머스 헉스(Thomas Haukes)라는 사람은 1555년, 피의 메리 시절에 유아 세례 반대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해 순교했는데, 불에 타 죽는 고통이 견딜 만하면 위로 손을 뻗어 손뼉을 치고 죽을 테니 손은 묶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진짜로 손뼉을 세 번 친 뒤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건 자체는 기독교에만 있는 사건이 아닌 것 같다. 불에 타 죽는 고통조차도 인간의 극한의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한 일이다.

틱 광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0년, 문수 스님이라는 노승이 이 명박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4대강 사업의 전면 중단을 촉구하면서 소신공양으로 생을 마감했다. <민중의 소리> 같은 진보 성향 언론에서는 진짜 문자 그대로 새까만 숯덩이가 되어 버린 고인의 시신까지 사진으로 공개했다. 이것 역시 비위가 약한 분은 클릭 금지.

그런 사람들이 인간적으로야 정말 숭고한 뜻으로 자기 목숨을 그렇게 비장하게 초개처럼 버렸을 수는 있다. 허나 인간의 의로 참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육신의 몸이 불타면서 느끼는 고통은 정말 끔찍하긴 해도 그래도 길어야 수 분이 채 안 되어 끝이겠지만, 그 동일한 고통을 죽음으로 종결지을 수조차도 없이 영원무궁토록 겪어야 하는 '그곳'에 또 가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마가복음 9장 끝부분에 기록된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느니라” 3콤보의 경고를 이 시간에 되새기도록 하자.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진짜로 정죄받은 죄인의 최후인 것이다. (단, 3콤보는 KJV에만 있음)

이런 얘기를 접하노라면, 이와는 반대로, 맹렬히 불이 붙었는데도 재가 되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는 떨기나무(출 3:2-3)가 얼마나 대단한 기적인지 실감하게 된다. 또한, 평소보다 연료와 공기를 7배나 더 공급해서 달궈진 맹렬한 용광로 불길로부터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 다니엘의 세 친구들 이야기가 얼마나 경이로운지도 또 실감하게 된다. 하나님은 불을 만드신 분이고, 연소라고 불리는 급격한 화학적 산화 현상을 제어하여 예외로 적용할 능력도 응당 갖추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결박만 없어졌을 뿐 그들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고 옷도 전혀 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단 3:27). 오히려 그들을 용광로에 집어넣으려던 병사가 허둥대다가 불에 타 죽었다. 그러나 용광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곧 성육신 전의 예수님이 그들을 미리 기다리고 있다 맞이했다니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세 명이 아니라 네 사람이 용광로에 있었다. 단 3:25) 그들은 왕이 부르기 전까지는 오히려 용광로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상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만 예외적으로 기적을 허락해 준 것은 하나님의 경륜상의 특별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설령 자기를 불에서 구해내지 않고 죽게 허락할지라도 그래도 느부갓네살 왕의 형상에는 절을 하지 않겠다고, 한 치의 타협도 하지 않고 순교를 불사할 생각으로 단호하게 자기 신앙을 “먼저” 지켰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단 3:17-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찬양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불, 화상, 화형, 분신자살, 순교 등 여러 섬뜩한 주제로 어찌 보면 두서없을 수도 있는 형태로 얘기가 나왔다.
글을 쓰면서 더욱 느꼈는데, 나는 인간의 알량한 의를 내세우지 않는 나의 종교, 아니 나의 신앙이 좋다. 복음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 아무리 큰 죄를 짓고 그 어떤 급으로 하나님이나 교회, 기독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하더라도 진심어린 눈물의 회개만 하면 다 용서하고,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사람을 다시 사용해 주신다. 그래서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과 회개 장면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읽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너희(크리스천) 몸을 하나님께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는 권면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롬 12:1) 그건 무슨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세상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고 시위대의 불화살이 되거나, 명예 회복을 위해 할복을 하라는 소리가 절~대로 아니다. 너도 십자가형 체험을 일부러 해 보라는 소리도 결코 아니다. 남이 먼저 날 죽여서 순교를 하면 했지, 기독교는 그 어떤 명분이라도 자해나 자결 같은 열사의 길을 권장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티를 내 봤자 우리 의가 설마 예수님의 의를 능가하겠는가?

기독교가 세상의 여느 시민 단체, NGO 단체와 다를 바가 없다면, 매 예배 때마다 아마 순교선열들에 대한 묵념도 하고, 각종 유명한 순교자들의 동상도 세워서 떠받들고 숭배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하는 게 딱 이러한 발상에서 비롯된 성인 시성과 성인 숭배이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잡아 죽인 종교이지만, 자기네들이 내세우는  자기네 순교자도 없는 건 아니어서..=_=;; 그러나 성경을 믿는 기독교는 애시당초 그렇게 사람을 떠받들지 않으며, 그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죄 때문에 인간이 정말로 죽어야 할 때도 동물을 대신 피 흘려 죽게 해 주고,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성육신하여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가르친다. 심청전에도 나오는 인신 공양 같은 게 절대로 없다. 다른 종교와는 차원이 다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 민족들을 전부 죽이고 흔적도 남기지 말고 파괴하고 멸하라는 잔인한 명령을 왜 내렸는지 아는가? 이 방법이 아니면 이방 민족들의 그런 악한 관행들을 뿌리뽑을 수가 없어서였다!

아무쪼록 육신의 장막을 벗고 사망도, 슬픔도, 고통도, 울부짖음도 없는(계 21:4) 세상이 올 것을 염원해 본다. 여기에는 불에 의한 사망, 고통, 울부짖음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불 및 불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을 다시 생각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좋겠다.

NOTE:

'스님'은 님짜 때문에 높임의 뜻이 들어가기 때문에, 공식적인 글에서는 '승려' 정도가 적절하다는 지적이 있다. 그에 대해서 나는 좀 회의적이다. 그런 식의 논리이면 '장님'도 분명히 높임말이다. 그런데도 그건 또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성경에 나오는 장님이나 소경도 요즘은 다 그냥 '맹인'이나 심지어 시각 장애인으로 바뀌는 추세이다.

님짜를 뗀 '스'는 말이 되지 않으며, '장'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하나님'도 님짜를 떼면 말이 되지 않는다. 본인은 그런 단어들은 단어 전체를 한 형태소로 보며, 그렇게 의도적인 존칭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서 '스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음을 밝힌다.

그 반면에 '예수님' 다음의 님짜는 명백하게 존칭어미이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글 쓸 때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다른 불신자들은 그냥 예수라고만 부른다.

Posted by 사무엘

2012/04/19 19:22 2012/04/1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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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의 메리

1539년에 크고 아름다운 그레이트 성경까지 나온 뒤에야 영국은 확실히 개신교 국가로 탈바꿈하는가 싶었으나, 헨리 8세가 죽은 후 개신교 계열의 에드워드 6세(병으로 요절)와 그 후의 9일천하 레이디 제인 그레이(지못미..;;)가 제대로 권력 승계를 못 하면서 메리 1세가 역사를 다시 뒤로 되돌려 놓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비운의 9일천하 여왕인 제인 그레이는 삶이 정말 기구했다. 왕위에 앉을 마음이 없었고 사실은 “너 여왕 됐어”란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 졸도를 할 정도였던 여인도 아니고 소녀였다.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등쌀에 떠밀려 정략 결혼을 하고, 조국의 개신교 노선을 이어 나갈 여왕 자리에까지 여차여차 올랐지만 백성들의 의식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던 모양.

결국 골수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메리 1세는 제인 당사자가 권력욕이 있는 인물이 아닌 것을 알았지만, 제인의 부모가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살려 두기도 곤란했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제인더러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 주겠다는 카드를 제안하였으나,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결국 20살도 못 된 고등학생 나이에 처형 당했다. 그땐 단두대 같은 것도 없었고, 사형 방식은 그냥 도끼로 목을 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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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그레이는 라틴· 히브리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똑똑했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외모도 아주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냥 귀족하고만 결혼해서 학자나 교사로 평범하게 살았을 사람인데 저렇게 정치· 종교적 희생양으로 전락하여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다만 겨우 고등학생 나이 때도 자기 신앙을 목숨과도 바꾸지 않았을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 크리스천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역사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최후의 순간에 시편 51편을 외웠으며, 집행을 앞두고 눈이 가려진 뒤엔 “어, 형틀이 어디 있지?” 하면서 당황하며 자신이 목을 내밀 곳을 손을 더듬어 찾았다고 한다. 이 장면은 주변 사람들의 애처로움을 더욱 자아냈으며, 이것이 그림으로 남아 전해진다.

이런 사연을 거쳐 왕위에 오른 메리 1세는 잘 알다시피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회를 포함해 개신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선왕이 구축해 놓은 영국 내의 종교 개혁 인프라를 모조리 망가뜨렸다. 그래서인지 메리 1세는 초상화를 봐도 좀 표독스러운 모습의 못생긴 여자로 그려져 있고, 특히 이 원복 교수의 <먼 나라 이웃 나라>에서는 네로에 필적하는 싸이코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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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화형 당한 크리스천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0여 명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숫자만 보면 그래도 1000단위도 아니고 생각보다는 적은 규모인 것 같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공산당 숙청 수준은 아닌 듯. 하지만 메리 여왕이 사람만 죽인 게 아니라 성경까지 죄다 불태우라고 지시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세속 역사가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종교 문제를 빼면 메리는 사회·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악한 군주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그 분야에까지 막장이었으면 진작에 짤렸겠지;; 또한 메리 역시 여왕에 오르기까지 개인사나 가정사는 불운한 편이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지병으로 인해 자녀 한 명 못 낳고 중년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영국에서 갑자기 개신교 박해가 시작되자, 영국에 있던 종교 개혁 성향의 학자들은 죄다 외국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스위스에서 피신해 있는 동안 지금까지 구축된 원어 자료를 집대성하여 더욱 좋은 성경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제네바 성경이다. 예정론과 개신교 교황이라는 오명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는 비교적 좋지 않은 평판을 갖고 있는 존 칼빈이 그래도 이때는 영국의 종교 개혁자들을 잘 보호해 준 공로를 세웠다.

제네바 성경은 처음으로 66권 전서를 모두 원어에서 번역했으며, 오늘날과 같은 장· 절 구분이 처음으로 생겼다. 그리고 무슨 스터디 성경처럼 온갖 난외주가 첨가되어 성경의 각 구절마다 편찬자들이 생각하는 해설과 강해가 성경 본문의 양보다도 많이 들어갔다.

4. 킹 제임스 성경 -- 종교 개혁 성경의 종결자

메리에 이어 엘리자베스 1세 시대가 되면서 영국은 다시 개신교 노선으로 돌아갔다. 이 시절에 영국 내부의 종교 대립은 가히 오늘날 우리나라의 좌우 이념 대립에 맞먹는 수준이었으며, 반가톨릭 진영에서는 진짜 반공 교육 수준으로 교황을 험담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아니라 “나는 교황이 싫어요” 급이었으며, 교황이 성경에서 예언된 적그리스도 바로 그놈이라고 대놓고 가르쳤다.

예전에 헨리 8세에 이어 왕위를 잠시 이었던 에드워드 6세 왕은 어릴 때부터 궁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겨우 초등학생 나이인 11살 때 “교황은 레알 마귀 자식이며, 나쁜 놈이요 적그리스도요 가증스러운 독재자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썼을 정도니까.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이 승복 어린이 수준이지 않은가? “교황을 죽입시다 교황은 나의 원수”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은 정치적으로도 가톨릭과 앙금이 생길 대로 생긴 게 사실이다. 또, 과거의 역대 교황들이 자신을 예수님 급으로 신성시하면서 “교황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같은 안하무인 개드립을 치는 것을 보면, 어차피 그들은 북한 김 일성· 김 정일이 하는 짓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긴 했다.

제네바 성경은 재야(?) 종교 개혁자들이 사용해 온 좋은 성경이긴 했으나 외국에서 자기네끼리 제작된 사역(私譯)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시절엔 국교회 내부에서 또 그레이트 성경의 개정판 격인 비숍 성경이라는 걸 만들어 썼다. 가톨릭-개신교뿐만이 아니라 같은 영국의 개신교 노선 내부에서도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 게 이 시기이다. 가톨릭으로부터의 박해가 없어진 뒤엔 영국 교회가 또 대립과 반목으로 인해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이후, 후임인 제임스 1세 왕은 청교도와 성공회를 중재하는 차원에서, 이제 다시는 성경을 또 만들 필요가 없게끔 완벽한 성경을 만들기로 승인을 내려 준다. 그래서 킹 제임스 성경이 드디어 1611년에 나왔다. 장과 절 구분, 100% 원어 번역, 청교도와 성공회 모두 OK, 국내 인쇄 등 예전 성경들이 차츰차츰 확보한 좋은 속성을 모조리 물려받았다.

이 책이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으며, 킹 제임스 이후 영국에서는 먼 훗날, 1881년에 부패한 웨스트코트· 호르트 본문에 기반한 RSV가 나오기 전까지는 또 새로운 성경이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역본이 나올 필요가 이제는 없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의 대립 구도로 인해, KJV가 번역될 때는 성경 번역 역사상 전무후무한 철저한 검증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며, 이것 덕분에 KJV는 유례가 없는 고품질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위기가 기회로 승화된 셈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종교 개혁을 거꾸러뜨릴 목적으로, 바티칸의 일종의 비밀 결사대인 예수회라는 무지막지한 비밀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KJV에 앞서 듀에이 레임스라는 판타지 짝퉁 성경을 만든 바 있으며, 엘리자베스 다음으로 영국에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왕이 즉위하자 용병을 고용하여 화약 폭발로 제임스 1세 왕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기적적으로 사전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세속 역사가들은 인류가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 휴머니즘을 추구하면서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고 르네상스 시대가 찾아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본인의 시각에서는 성경이 널리 보급되고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고 세상이 암흑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바티칸 교황이 역사적으로 인류의 발전을 가로막고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는 것에는 본인 역시 세속 역사가의 시각과 100% 일치한다만, 그것이 기독교라고 싸잡아 분류되는 것에는 본인은 동의할 수 없다.

유럽 국가들 중 영국만이 종교사가 저렇게 특이한지, 왜 영국만 국가 교회가 존재하며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어 왔는지? 왜 영어 성경만 여러 계보가 존재해 왔는지? 더 나아가 하필 킹 제임스 성경이 세계에 퍼져 나간 최종 권위 성경이 되었는지에 대해 KJV 신자라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도 역사를 잘은 모르지만 내 신앙의 정체성과 뿌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내력은 공부해 두려 한다.

오늘날 인도에 불교가 없으며 예루살렘에 기독교가 없는 것처럼, 영국도 이제 성공회의 노선은 천주교 쪽으로 다시 거의 기울었고 사람들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잘 모른다. 발간 400주년을 맞이한 작년에 반짝 조명 정도나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야만인 바이킹들이나 뛰놀던 섬나라 영국이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이 되었으며,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이 전반적으로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식민지 개척을 할 정도로 강대국이 된 것에 성경과 복음이 기여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03/05 08:28 2012/03/0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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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의 중세 암흑기

천 년이라는 시간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장구한 시간이다. 성경에는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공의로 1000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한편, 한국사에서는 신라가 AD 900년대까지 거의 1000년 가까이 존속하여, 도읍인 경주 역시 ‘천년고도’(千年古都)라고 불린다. 본인이 경주 출신이다만, 그 작은 도시가 천년고도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교회사가 시작되었으나 진리의 빛이 꺼졌던 중세 암흑기가 거의 1000년에 가까이 계속되었다고 여겨진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나중에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신대륙이 발견되고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유럽이 본격적으로 동양을 과학 기술로 압도하기 그 전에! 그 사이 기간에 대해서 나만 아무 정보가 없는 걸까?

그 사이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이라고는 진짜 십자군 전쟁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난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과 잔다르크는 1400년대 사건이니, 중세 중에서는 그나마 나중인 편이고.

그 기간 동안 어느 샌가 교황이 유럽을 모조리 장악했으며 성경은 금서가 되었고 종교 재판과 마녀 사냥이 횡행했다. 어떻게 해서 교황이 저런 국제적인 종교 괴물로 등극할 수 있었는지 그 메커니즘을 잘 모르겠다. 교회사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라도 여기에 대한 지식이 보충되어야 할 것 같다. (아 하긴, 우리나라만 해도 이단 교주들이 얼마나 돈 잘 버는지를 생각해 보면, 교황이 종교 장사로 큰 대박을 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은 했겠다.)

어렸을 때 즐겨 읽었던 유레카 학습 만화 세계 역사 시리즈를 다시 펼쳐 보았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알고 있는 게 잘못된 게 아니었다. 제6권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부터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나오는데, 제8권은 곧바로 메디치 가문이 어떻고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콜럼버스, 루터 따위가 나온다. 시간 차이가 장난이 아닌데 중간에 그야말로 엄청난 skip을 한 것이다. (제7권은 칭기즈 칸과 오스만 튀르크 제국 같은 아시아 편이고 유럽 얘기가 아님.)

더 정확히는 6권의 뒷부분에 ‘중세 유럽’이 특집 형태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짚고 넘어가 있었다. 세심하게 여러 에피소드를 편성하고 스토리가 있는 만화를 넣은 게 아니라, 글과 벽화 소개 위주로 백화사전식으로 “그냥 이런 게 있었다. 끗”이었던 것이다. 중세는 정말 긴 기간이었는데도 이때의 유럽 역사는 이렇다 할 위인이나 큰 변화가 그다지 없었고 사료도 부족하고... 세속 역사가들로부터도 가히 흑역사로 취급받는다는 걸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판타지 게임이나 영화들의 주된 배경이 되기도 하고.. ㄲㄲ

이 글에서는 유럽이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근대로 나아가는 시기에 있었던 일을 영국의 교회사 위주로 요약해 보겠다.
중세에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고 성경을 읽고 침례를 행하던 크리스천들은 알비겐시스, 왈덴시스처럼 지역이나 모임 리더의 이름을 딴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숨어 지내던 소수의 무리들이었다. 루터가 이신칭의를 주장하기 전부터 이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받는 구원’ 정도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고려·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럼 아무 기회도 없이 다 지옥 갔냐”라고 기독교에 트집을 잡는 분들이 많은 줄로 안다. 허나 내가 보기에는, 중세엔 서양도 복음에 대한 접근성이 동양하고 별 차이 없었을 것 같다. 그쪽에서는 어차피 교황이 성경을 다 빼앗아 불태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거짓 교리로 지옥으로 보내 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동양엔 왈덴시스 같은 집단이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종교 재판소도 없지 않았는가? -_-;;; 피장파장이다.

도미니크 구즈만(천주교에서 성 도미니크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라는 수도승이 그런 크리스천들과 교리 논쟁(오늘날로 치면, 종교갤에서의 키배)을 종종 벌였으나, 그들을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가톨릭은 교리도 완전히 잘못됐을 뿐만 아니라 그 기원부터가 로마 제국 시절에 세상 권력과 결탁하여 순교자들의 피를 부르며 시작되었다고 조목조목 반박하는데,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말로 곱게 회유가 안 되는 반동분자들을 적당히 꼬투리 씌워 조지기 위해 도미니크 수도회가 만들어 낸 게 종교 재판소의 원조이다. 서기 1223년, 교황 그레고리 9세에 의해 드디어 정식 공표된 종교 재판은 마녀도 아니고, 이슬람 같은 완전히 다른 이교도도 아니라 전적으로 크리스천들을 죽이고 그들 재산을 빼앗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나머지 목적은 2순위, 3순위일 뿐이다.

2. 헨리 8세 이후 영국의 성경 번역의 역사

그러다가 존 위클리프라는 영국 사람이 처음으로 14세기에 처음으로 영어 성경이라는 걸 만들었다. 열악한 당대 상황 때문에 비록 본문이 부패한 천주교 라틴 벌게이트 기반이었지만, 영어 철자법도 아직 정립해 있지 않던 시절에 원어가 아닌 영어 성경이 나온 것만 해도 어디냐. 그 위상이 가히 영국의 개역성경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구한말에 나온 한글 개역성경도 부패한 본문 기반 + 맞춤법 비정립 시기! 1881년 RSV 할 때의 그 개역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번역한 덕분에 천주교로부터 극심한 미움을 받았으며, 나중에 죽고 나서 40년 가까이 지나서야 무덤에서 시신이 다시 꺼내어져 목이 잘렸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국어에서 욕설로 쓰이는 육시(戮屍)를 실제로 당했다는 뜻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영국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겪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오래 된 영국 왕으로 헨리 8세 아니면 기껏해야 7세 정도까지만 기억을 할 것이다. 이 헨리 8세는 원래는 당시 유럽의 여느 군주들이 그랬듯이 막강한 교황의 권세 앞에서 깨갱 하고 있었다. 친가톨릭이었고 딱히 소신 있는 종교 개혁자 성향도 아니었다.

그랬는데 부인을 6명이나 둔 호색한이었던 그는 치정 문제로 인해, 더 정확히는 ‘아라곤의 캐서린’이라고 불리는 왕비와의 이혼을 교황의 승인 없이 추진하려다 보니 교황과 결별· 단절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수장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바티칸은 이 소식에 당연히 발칵 뒤집혔으며, 헨리 8세에게 험담과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천주교는 이 사람을 루터만큼이나 몸서리치게 미워하며 나쁘게 말한다. 비록 헨리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똘끼를 선한 방향으로 이끄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영국이 천주교의 손아귀에서 정치적으로 벗어날 징조가 보이던 15~16세기엔 천주교에는 악재, 기독교에는 호재가 연달아 터졌다. 에라스무스라는 학자가 바른 성경 계보인 공인 본문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에는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멸망이라는 당대 정세도 기여를 했다.

이때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시작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공인 본문을 기반으로 신약 성경을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했다. 마침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 인쇄술로 책을 값싸게 많이 찍어 보급할 수 있게 된 것도 지금으로 치면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에 필적하는 정보화 혁명이었다.

그리고 영국에는 윌리엄 틴데일이라는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선배가 등장하여 그 독일어 성경을 다시 영어로 번역한 영어 성경을 만들었다(신약+모세오경+알파. 아직 전서를 만들지는 못함). 바른 원문 계보에서 번역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다.

틴데일은 “누구나 성경을 휴대하고 읽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 소 몰고 밭 가는 촌뜨기 아이라도 교황보다 성경을 많이 알게 만들어 놓겠다”라는 도발적인 공언까지 했는데, 이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발상이었고, 그런 열성 때문에 그는 결국은 나중에 순교자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교수형과 화형을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당하면서 죽었으며, 죽기 전에 “주여, 우리나라 왕의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라고 크게 외쳤다. 아직 영국은 친가톨릭과 친개신교 노선이 오락가락하는 중이었고, 영국의 고위 관료나 성직자 중에는 친가톨릭 성향에 틴데일을 미워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헨리 8세 왕이 틴데일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틴데일의 기도는 그가 죽은 지 6개월 남짓한 시간 만에 응답되어, 헨리 8세는 틴데일의 친구인 마일스 커버데일이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국 성공회가 공식 사용할 영어 성경을 만들게 했다. 커버데일은 사역(私譯)이던 틴데일의 번역물을 십분 활용하여 1535년, 커버데일 성경을 만들었다. 왕이 승인하고(公譯) 성경 66권이 모두 번역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 바로 이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는 존 로저스라는 사람이 매튜라는 가명을 써서 매튜 성경을 내었다. 이것은 잉글랜드라는 자국내에서 인쇄된 최초의 성경이라 한다. 틴데일과 커버데일 성경은 모두 영어 성경이지만, 각각 독일과 스위스에서 인쇄된 후 영국으로 밀반입되었기 때문이라고. 국가가 떳떳하게 대놓고 성경을 찍을 정도로 개신교 세력이 충분히 크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2/03/03 08:24 2012/03/0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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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 성모 화뷁님의 만화에 있는 아래의 유명한 짤방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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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부친'으로 잘못 적은 게 아닐까 싶다. ㅋㅋ
그런데 어라? 성경을 보니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남편도 부친이 복수인 거 같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 (마 1:16)
비로소 예수님 자신이 서른 살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분은 요셉의 아들이신데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 (눅 3:23)

물론,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부부 관계에 의해 태어난 분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다른 인물에 대해서는 '낳고 낳고' 일색이다가 예수님에 대해서만 저렇게 예외적인 진술을 해 놓았다. 요셉이 예수님을 '낳은' 게 아니므로.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요셉의 아들인 것처럼 보였다고 기록해 놓은 독특한 필체를 주목하기 바란다. 재미있지 않은가?

허나 이것은 그리 어려울 것 없는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계보는 마리아네 집안의 계보이다. 헬리는 요셉의 장인이다. (☞ 자세한 설명 클릭)

성경이 사위를 아들이라고 적은 것은 모순이 아니며, 부정확하고 모호한 표현을 뭉뚱그려 쓴 것도 아니다. 그 당시 사위는 법적으로 장인의 아들과 동급으로 취급되었다. 영어 표현이 괜히 son-in-law가 아니다. 삼상 26:17에서는 사울이 사위 다윗을 아들이라고 일컬었으며, 룻기를 읽어 본 분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시종일관 딸이라고 불렀음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막 6:3처럼 요셉과 마리아의 부부 관계에 의해 태어난 진짜 아들딸들까지 전부 아예 사촌으로 해석하면서 마리아가 평생 동정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모 종교의 주장은 내가 보기엔 드립이다.. 사위· 며느리라면 차라리 아까처럼 성경적 근거라도 있지. -_-;;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마리아는 남에게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그대로 따라라”(요 2:5)라는 말도 하고, 성령 강림을 위해 다른 성도들과 같이 열심히 기도도 하는 등(성경에서 마리아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인 행 1:14), 신실한 크리스천의 모습이 더 부각될 뿐, 하나님의 어머니 따위의 이미지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김 화백 만화에는 오류가 많지만,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언뜻 보기에 자비심 없어 보이는 문체와 이해가 잘 안 되는 구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KJV 이외의 변개된 성경들은 유감스럽게도 성경의 정확도와 신뢰성을 김 화백 만화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루시퍼를 '계명성/새벽별'로 변개하여 사탄 마귀에게 예수님의 칭호(계 22:16)를 붙였다거나,
이스터를 유월절로 바꿔서(행 12:4), 베드로의 재판(과 처형) 스케줄을 이미 지나 버린 유월절 타이밍으로 엉뚱하게 뒤섞어 버렸다.

유월절이 지나고 무교절 기간에 베드로가 체포되었는데, 그 베드로를 유월절이 지난 뒤에 끌어낸다고라?
2만 1천원짜리 밥을 사 먹고는 2만원 내던지면서 “잔돈은 애새끼들 과자나 사 주라”고 쿨하게 나가는 논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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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2/01/17 08:44 2012/01/1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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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으며 당신과 그분과의 관계는 현재 어떠한가?
성경의 인물들과 비교해 보면 판단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장 친밀했다고 기록된 인물은 단연 다윗임이 틀림없다. 그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사랑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하나님 앞에서 심지어 어리광을 부리고 망가지는(?) 것까지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삼하 6:14, 21-22).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 비천하고 불쌍하게 보이면 하나님도 결국 자신을 동정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삼하 16:12).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도 사람의 손에 떨어지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직통으로 징계를 받는 것을 택했다(삼하 24:14).

이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했으니 그가 시편의 대부분을 기록하게 되고, 하나님 역시 그를 ‘내(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행 13:22)이라고 일컬으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백부장은 놀라운 믿음으로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한 대단한 사람이다(마 8:6-13). 그는 병에 걸린 부하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선한 군인일 뿐만 아니라, 군인 정신에 입각하여 놀라운 신앙관을 갖고 있었다. 자기도 부하를 거느리고 명령 권한이 있는 장교인데, 하물며 예수님이라면 말만 하면 병이 뚝 떨어질 것이니 구태여 자기 집에 감히 찾아올 필요조차 없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거 생각해 보아라, 엄청나지 않은가? 덕분에 그는 원격 진료 즉각 완치(?)라는 기적을 그 믿음대로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능을 주시고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놀라게 할 수 있다(긍정적인 쪽, 기쁜 쪽으로!). 심지어 천장을 뜯어서 병 걸린 친구를 예수님 앞에 내려다 놓은 친구들처럼 돌발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머리를 써서 무엇이 더 합리적인지를 하나님과 reasoning을 하고(사 1:18), 그걸 끈기 있게 밀어붙여 보도록 하자. 이건 교만이나 하극상이 아니며, 가나안 여인의 명대답(마 15:27)이라든가 히스기야의 항변(왕하 20:3), 불의한 재판관 비유(눅 18:1-5) 같은 좋은 예가 있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군대식 “까라면 까”가 아니다.

3.
욥은 의인이었다. 너무 흠잡을 데 없는 스펙이기 때문에 뭔가 특이한 계기가 없이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하는 기회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고난을 당했다.

욥은 그때도 딱히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아주 잘한 행동이다. 그는 끝까지 자기 결백을 주장하면서 자기 인생에 대한 회의감을 나타냈고, 하나님이 계신다면 많이는 안 바랄 테니 이 상황에 대해서 잘잘못이나 한번 같이 공정하게 따져 보고 싶다고 거듭 호소했다. 이것도 논리적으로는 지극히 정당한 대응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너무 선하게 살아서 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진면모를 알고 그 앞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일을 벌여 놓으실 수도 있고, 그 어떤 일을 벌여 놓더라도 선하고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고민이 해결된 것이다.
세상의 악함을 한탄한 시편 73편 기자나 대언자 하박국도 비슷한 체험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참고: 2번의 reasoning과 3번의 reasoning은 상황과 문맥이 약간 다르므로 적용할 때 올바른 나누기가 필요하다.)

4.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일수록 자기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남 기도에 대한 비중이 늘어나고, 더욱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남으로부터 연보를 받아서 고맙고 기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에게 연보를 함으로써 그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보상이 추가된 걸 생각하니 기쁘다고 성경에다 쓴 적이 있다(빌 4:17) 그리고 에베소서 1장에 기록된 그의 기도 제목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 좀 달라”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풍부한 영적 복을 이미 받았는지부터 좀 깨닫게 해 달라”이다.
바둑으로 치면 수읽기의 수준이 평범한 신자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금송아지 사건 때의 모세의 중보 기도(출 32:11-13)도 단순히 자기 동족의 영달을 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좋은 기도였다. 이런 기도일수록 응답률은 크게 올라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한 사람은 기도 자체도 이런 식으로만 하게 된다. 그러면서 선순환...;;

그럼, 이제부터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부정적인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5.
최초의 여성 이브는 남편 아담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조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나 쓴뿌리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창 2:16-17과 창 3:3을 비교했을 때, '만지지도 말라' 같은 극단적인 말이 불쑥 추가되기까지 하기는 어렵다.
“에이, 기왕이면 다 먹게 해 주지 하나만 저렇게 제약을 거는 이유가 뭐야? 치사하다.” 정도?

6.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기 주인에 대해서, 아주 까칠하고 엄격하고 인색하고, 종들을 불가능· 부당한 요구로 착취만 하는 악덕 고용주로 알고 있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도, 눅 15:29로부터 미뤄볼 때 아버지에 대해 평소에 꽤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혹시 여러분은 악한 현 세상 안에서 신앙생활을 육신의 깡으로만 버티면서 하다가, 제풀에 지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해서 저런 오해에 빠지는 경우는 있지 아니한가?

주인이 맡겨 놓은 1달란트를 있는 그대로 잘 간수해서 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은 주인에게서 심한 꾸지람을 듣고 벌까지 받는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잘 생각해 보자.

7.
예후는 아합 왕족을 개발살내고 바알 숭배자들을 학살하는 일은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하였으며, 이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하나님을 그렇게 신실하게 잘 따랐다고 보기 힘들다. (왕하 9-10)
잘못된 것, 이단 교리를 정죄하고 파괴하는 일에만 앞장설 뿐, 그 대안인 바른 것을 세우고 보급하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성도가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8.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세상적으로는 정말 괜찮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키 크고 인상 좋고, 초기엔 성격도 아주 겸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카인 같은 '적당히 자기 식'이라는 게 치명적인 문제였다. 불완전한 순종(세상적으로 보기엔 그리 큰 잘못도 아닌데!)과 변명 일색은, 기본부터 글러먹어서 하나님께서 굉장히 싫어하시는 방식이었다.

다윗 같은 급의 큼직한 살인· 간음죄도 없건만 하나님은 이런 사울에게서는 일찌감치 정이 떨어졌고 손을 떼고 말았다.
사울은 다윗과는 달리, 성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사고방식이 어떠한지를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그게 그의 가장 큰 문제였으며, 그는 말년에는 정 안 되니까 무당을 찾을 정도로 영적 상태가 막장으로 치달았다.

9.
성경에는 카인, 아합, 이세벨, 가룟 유다 등 여러 악역(?)이 등장한다. 그러나 성경 66권을 통틀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악질적인 악역은 아마 발람일 것이다. 돈을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 양다리 회색분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영악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이용해 잔머리까지 굴린 사람이다.

민수기 24장과 25장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각색하자면 이렇다.
“이스라엘 민족은 참 신인 여호와 하나님이 보호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평범한 군사력만으로는 우리가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나 기쁨조 미인계를 동원해서 쟤네들을 우상 숭배와 음행으로 타락시키면 하나님이 제 발로 자기 민족을 징계할 수밖에 없게 된다. OK?”

이스라엘을 직접 저주하지는 못한 대신, 발람이 요런 천기를 누설해 준 것이다.
그래서 비록 이스라엘은 이 작전에 말려서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으나, 성경은 이 원수 발람도 결국은 제 명에 못 살고 뒈졌다고 민 31:8에서 친절히 써 놓았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까지 발람의 길, 발람의 교리 등으로 두고두고 그를 디스한다. 신약에서 나쁘게 등장하는 구약 인물은 죽어서 지옥 가 있다고 간주하면 정확하다.

※ 맺는 말

내가 느낀 건데, 영적 성장에는 영재· 천재가 없다.
초등학생 나이 때 미적분을 술술 풀고 성경 100구절 이상을 암송하고 토플 만점을 받는 애는 있어도,
초등학생 나이 때 부모님의 마음을 다 이해하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때리면서 훈계할 필요가 없어서 잠 22:15의 예외에 해당하는 애는 없다. 이래서 성경이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자동차 운전은 그야말로 개나 소나 다 할 정도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동차 설명서와 도로 교통 법규를 다 외우고 있다 해도 그런 어린아이에게 운전을 맡기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 역시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가 있으니, 위에서 열거한 예에 따라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바람직한 예를 벤치마킹하고 이를 따라가도록 노력해야겠다.

한동안 미친 듯이 컴퓨터나 철도, 교통수단 쪽 글을 썼지만 성경의 사색과 묵상의 결과도 틈틈이 메모해 놓은 게 있다.
필요악에 대해서, 그리고 모세에 이어 요셉에 대해서도 아이디어만 적어 놨는데 본격적으로 집필을 할 시간이 없다.

아 끝으로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믿음 행사를 위한 위법 행위의 적법성 여부에 대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case by case”이다. 위법 행위가 뭔질 물으신다면 라합 내지 이집트 산파의 거짓말 같은 걸 가리킨다. 미래에 기회가 되면 이런 경우에 대한 분석도 다루고 싶다.
여백이 부족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쓰련다.

Posted by 사무엘

2012/01/10 19:28 2012/01/1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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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크리스천이라면 인간의 '탐욕'이라는 심보에 대해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나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황금 만능주의 사회에서는 말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covet-ous-ness (동-형-명사)이라는 단어가 주로 쓰이고, lust도 그 자체가 동사도 되고 명사도 되는 단어이다.

살인· 간음보다야 격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종종 간과될 뿐이지, 탐욕도 살인· 간음만큼이나 십계명의 마지막 10째 계명으로 당당히 등재되어 있는 금기 사항이다.
아니, 저걸 충족하기 위해서 살인(6)· 간음(7)· 도둑질(8)이 저질러지며, 그걸 합법의 이름으로 위장하거나 은폐하기 위해 거짓 증언(9)이 저질러지는 게 태반이니, 알고 보면 탐욕은 정말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잠시 첨언하자면, 본인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무수한 죄들이 죄라는 n차원의 벡터 공간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여러 점· 선· 면이라고 했을 때, 십계명의 각 계명이 커버하는(금지/정죄하는) 영역은 그 벡터 공간의 기저 벡터들이 아닐까?
물론 기저 벡터이니 각 계명들은 벡터 공간 안에서 서로 선형적으로 독립(linearly independent)일 것이다.

아놔 갑자기 웬 선형대수학 드립이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마치 삼원색의 각 색을 여타 색깔의 혼합으로 얻을 수 없듯이, 탐욕은 여타 다른 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원천이라는 것.
살인과 도둑질은 몸으로 짓는 죄요, 간음은 몸'에다' 짓는 죄요, 거짓 증언은 입으로 짓는 죄라면,1) 탐욕은 마음만으로 지을 수 있는 죄이다.
그럼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자.

성경은 구약 율법 시절에서부터 지도자의 요건으로 탐욕을 미워하는 성품을 제시하고 있으며(출 18:21),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기 드립 범죄 역시 그 원인이 탐욕이었다고 거듭해서 말한다(민 11:4, 시 106:14). 아간은 또 어땠던가(수 7:21)?
성경 66권을 통틀어 최악의 양다리 회색분자요 잔머리 굴리기의 달인으로 기록된 발람을 보라. 성경은 그도 탐욕이 문제였다고 지적하면서 신약에서까지 그를 두고두고 깐다(벧후 2:15, 유 11).2)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하나님도 이런 사람은 '싫은 녀석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출처는 개그 만화 일화 종말편.

이 탐욕 앞에서는 그 대인배인 사도 바울마저 GG를 쳤다! (롬 7:7) 이거 내가 보기엔 꽤 심각한 사실이다. 자기는 지금까지 어지간한 기독교인들보다 의롭고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며 예수 따윈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하지만 탐욕이 출동하면 어떨까? ㄲㄲㄲㄲ 타! 암! 욕!

그렇게도 육신의 스펙이 완벽한 엄친아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가 충분했다고 생각한 바울도, 그 계명으로 인해 고꾸라지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지한 것이다.
뒤이어 유명한 골 3:5는 탐욕이 우상숭배와 같다고 선언하며, 딤전 6:10은 돈을 사랑함이 그야말로 모든 악의 축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세상이 원수지간(약 4:4)이며 세상에 태양이 둘일 수 없는 것만큼이나,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도 없다(마 6:24, 눅 16:13).

한국의 일부 몰지각한 '교인'들이, 돌부처 앞에서 절하고 조상신 숭배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고 각종 무례한 짓(병크라고 부르는-_-)을 저질러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난 그 친구들이 지능안티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쉴드를 치고 싶다만, 뭐 지능안티가 아니라 해도 거기까지는 좋다 이거다.

그런데 그러는 당신도 하나님을 들러리 삼아서 돈님을 더 섬기고, 예수 믿어서 삼박자 축복 받고 팔자 펴고 예수 이름으로 주식 대박이나 나고 로또가 당첨되고 벼락부자 되길 바라고 있다면, 당신의 마음 상태도 그런 돌부처 섬기는 미개한(?) 부류들과 똑같다. 동일한 목적인데 추구하는 방법만 다를 뿐, 극과 극은 통한다! 이것이 성경의 판결이다. 아시겠는가?

남과 비교하면서 나도 더 열심히 살고 분발해야겠다고 단순히 긍정적으로 다짐하는 걸 넘어...!
자신의 정당한 수입에 만족하지 못하며 자기 신세 비관하고, 남이 잘 되는 걸 배아파하고 그게 미움으로까지 발전하는 것은 탐욕이며 죄악이다.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말 자체가 그런 심보가 어떤 형태로든 반영된 말이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라)

“누구누구는 강남에 번듯한 아파트 장만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월세야, ㅆㅂ” 라고 한탄하는가?
당신은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를 정확히 위반했다. 근거는 출 20:17을 찾아보면 다 나온다.
“누구누구는 30대 나이에 벌써 그랜저 뽑았는데 우리는 아직도 마티즈야” 하면서 부럽고 갖고 싶고 배가 아픈가?
약간 transform을 하자면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저촉이다.
자기도 유부남인데 친구나 친인척의 배우자가 너무 예뻐 보이고 같이 자고 싶은가? 이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내가 보기엔 요즘 TV 광고, 인터넷이 전-_-부 저걸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칼 들고 강도짓 하는 걸 금지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은 저런 것도 금지하신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교과서적으로 훈계조로 “그러니 넌 무조건 닥치고 꾹 참고, 욕심이라곤 부릴 생각도 하지 마”로만 결론을 낼 거라면 내가 이런 글을 길게 쓸 필요도 없었을 터이니, 이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어디까지가 인간의 정당한 욕구 충족이며 어디부터가 죄악인 걸까?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도 일부 아주 완전 막장 인생이 아닌 이상, 자기도 욕심 부리고 싶어서 부리는 건 아니다.
이렇게 안 하면 이 험악한 세상에 눈 뜬 채로 코 베이고 바보 신세 되고, 뒤쳐지고 도태하는 것 같으니까 치열하게(?) 산다.

게다가 사실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자식 먹여 살리고 자식을 잘 되게 해 주려고 나쁜짓 하는 사람도 많다. 성경에도 마 7:11과 눅 11:11-13에서 이런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듯이 말이다.
이런 케이스들 때문에, 직업 종교인들은 사리사욕을 안 품으려면 아무래도 가정을 아예 안 꾸리고 평생 동정-_-으로 사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천주교나 불교를 옹호하는 사람까지 있다. 음, 그럼 사랑의 열매를 허락해 준 하나님이 나빴던 것이군. -_-

인간이 말세에 자동차와 컴퓨터 같은 눈부신 기계 문명의 혜택을 입으면서 나타나고 있는 분명한 추세가 있다. 인간의 심성 내지 양심을 이젠 도저히 믿을 수 없고(그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 대신 눈에 보이고 분명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 위주로 사회 구조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덕목과 심성은 눈에 절대 보이지 않고 측정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는가?

우리나라 교육 제도의 본질적인 문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아무리 제도를 개혁해도 입시 병폐는 없어질 수가 없으며, 이렇게 땅 좁고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낀 콩라인인 우리나라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려면, 그런 형태로라도 애들 교육을 빡세게 안 시킬 수가 없다. 정말 측정해야 하는 걸 인간의 기술로 측정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와 자유 경쟁 구조에서 그나마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 건 돈뿐이니, 영적 조명이 없이는 세상은 결국 황금 만능주의와 양극화로 당연히 치달을 수밖에 없다. 그게 효율적이니까. 고삐 풀린 탐욕은 바이러스의 효과적인 매개체이다. 욕 얻어먹어도, 남들도 다 똑같이 하는데 나도 안 하면 나만 바보 되니까 어쩔 수 없다.

이제 세상은 적당히 먹고 살 만하게 지내는 중산층이라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잠 30:8의 기도 제목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의식주' 중에 주(집!)조차도 빠진 채, “생명이 붙어 있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걸로 만족하라”는 성경 말씀은 너무나 고리타분하고 비현실적이고 지킬 수 없는 명령인 것 같아 보인다. (딤전 6:8)

누구는 손 하나 안 더럽히고 돈으로 돈을 벌고 지내는 반면, 평생 뼈빠지게 일하고도 가난을 못 벗어날 것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가난 구제는 나랏님이라도 못 한다”란 속담은 신 15:11로부터 미뤄 봤을 때 굉장히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명언이다.3)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이삭 줍기 같은 복지 제도는, 부자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독려함과 동시에 수혜자도 직접 나가서 활동을 함으로써 생존할 만큼만 식량을 모으는 등, 여러가지 바람직한 면모를 갖추고 있긴 한데... 지금은 그조차도 시행하지 못할 정도로 인간이 악해졌으니 문제이다.

다만,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한 구조라고 해서 그 대안이, 정부에서 부자들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서 나눠 주는 것이 돼서는 절대 안 된다. 교도소 인권이 아무리 좋아지더라도 “어차피 할일도 없는데 사고 한번 치고 빵에나 갔다 와야지”가 될 정도로 좋아져서는 안 되고, 복지 제도가 아무리 좋아져도 신체 멀쩡한 인간이 “연금만 받으면 되니 이제 일할 필요가 없네”가 돼서는 절대 안 된다. 그건 정말 망조가 단단히 든 미친 사회이다.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를 만든 것도 탐욕이지만, 사악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계를 만든 것도 탐욕이다. 난 개인적으로 그런 식으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부추기는 복지 포퓰리즘을 혐오 수준으로 굉장히 싫어한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나라를 무슨 유럽의 복지 국가들과 비교하면서 이상하게 열등감과 피해의식 조장하는 글 내지 통계도 싫어한다. 자세한 이유는 이 자리에선 언급을 생략함.

이제 슬슬 글을 맺겠다.
지금 전세계 국가들이 경제가 어렵다고 하고, 특히 막대한 빚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 패권 국가인 미국조차도 빚이 억소리 나는 수준이라고 하니, 이 세상에 그럼 도대체 진짜 채권자는 누구인지 궁금하다. 극소수 석유· 에너지 재벌? 돈놀이를 세계적으로 잘 하는 은행? 도대체 누굴까?

결혼을 위해 집을 마련해야 한다거나, 누가 갑자기 불치병에 걸렸다거나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어지간하면 없으면 그냥 없는 대로 분수껏 살고 싶은데 이 세상의 신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다가 돈 돌아가는 통로 어디선가 지뢰가 빵! 터지기라도 하면, 전세계 경제가 가까운 미래에 수습 불가능의 막장 패닉으로 빠지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성경을 통해, 인간의 탐욕이라는 관점에서 문제의 원인을 진단해 보았으나, 그 처방은 영적 전투를 야기하며 결국은 역시 개인의 믿음과 영적 상태에 달려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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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다고 탐욕이라는 번뇌가 극복되는 건, 만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ㄲㄲㄲㄲㄲ

Notes:

1) 성경은 당연히 거짓말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며 사탄 마귀가 거짓의 아비(요 8:44)라고 말한다.
하지만 십계명의 제9계명은 쉽게 말해, 돈이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곳에서 부당한 이익을 위해 거짓말--특히 법정에서 위증--을 하지 말라는 문맥이다. 일체의 거짓말을 무조건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가령, 좋아하는 여자를 꼬시려고-_-, 데이트 분위기를 매끄럽게 유지하려고 당장 마음에 없는 말을 좀 한 걸 갖고 나중에 하나님이 “너 임마, 그때 왜 거짓말 했어?” 라고 책망을 설마 하시겠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그렇게까지 기계적이고 융통성 없고 deterministic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ㄲㄲ

뭐 그렇다고 해서 모든 white lie가 성경적으로 다 바람직하기만 한 건 또 아닌데.. 대표적인 예로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그 사실을 솔직하게 알려 주는 게 좋겠냐 하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나열하자면 글이 또 길어지니 일단은 여기까지만 쓰자.

2) 발람의 길, 발람의 잘못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까지.

3) 천년왕국은 절대로 공산주의의 이상향처럼 운영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동안에도 사유 재산 제도는 건재하며, 가난한 사람과 빈부 격차는 존재한다! 사유 재산은 마치 부부간의 사생활만큼이나, 그리고 보호 모드 운영체제에서 각 프로세스의 메모리 공간만큼이나 철저하게 개인별로 보장된다.
구약 성경에 '네 포도원', '네 우물'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던가.

Posted by 사무엘

2011/11/10 19:21 2011/11/1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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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下

첫째, 하나님은 죄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 자비심이 없다. 지옥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는 국민 정서가 좀 이상하고 사법 체계도 그런 관행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나쁜짓을 저질러도 가해자 역시 죽었다거나, 술 취해서 실수한 것이라거나, 우울증 때문이라거나, 뭐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면 굉장히 동정· 미화와 정상 참작을 잘 한다. 싸움을 중재하는데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으며 시빗거리가 정당한 것인지를 보는 게 아니라 누구 처지가 더 딱한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누가 더 많이 얻어맞고 다쳤는지를 더 감안하는 식이라고나 할까? (그냥 눈에 보이는 결과로, 객관적인 증거 확보가 용이한 쪽으로만. -_-)

하나님은 이런 사고방식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지옥엔 히틀러, 유 영철 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너무 착해서 구원도 못 받은 사람도 많고, 비참하게 살다 불쌍하게 죽은 사람도 엄청 많이 가 있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죄는 철저히 미워하고 회개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로 인해 민망해하고 가슴 아파하고 죄의 결과를 수습하고 그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한다. 죄를 무슨 치유 받아야 할 질병인 것처럼 여기고 동정하는 것, 죄 지어서 당연하게 받은 벌을 무슨 의인이 받는 시련과 영적 전쟁처럼 미화하는 것, 그 사람도 잘못된 사회 시스템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감싸는 것...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복음에 대해 아주 잘못된 인식을 심어 놓는다. 이런 사고방식을 종교의 탈을 쓰고 부추기는 위선자들에게 절대 속지 말아야 한다. 용공 사상만 불온 사상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은 진심어린 회개에는 무한 관대하다.

제아무리 인간의 죄가 무겁고 심각하다 한들 하나님의 사고방식에는 명예 살인이란 건 없다. 자해나 자결로 명예를 회복하는 행위를 결코 정당화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본과 서양 문화권 사이에 죽음에 대한 인식을 서로 극과 극으로 갈라 놓기도 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 때문에 진짜로 죽어야 할 때에도 동물을 대신 죽게 하셨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셨다! 하나님의 보혈이 대가로 치러졌는데 그 무슨 죄인들 회개하면 사해지지 않겠으며, 과거에 어떤 나쁜짓을 한 사람이라도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쓰시지 않겠는가? 죄에 대한 찔림부터 있은 후에 그 상처를 아물게 해 줄 복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법칙이다. 예수님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성도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 "넌 그리스도인이 될 자격도 없다. 너처럼 우리 교회를 배반하고 내 명예에 먹칠을 한 녀석은, 부끄러운 줄 알면 나가서 곱게 할복해라" 그러시지 않는다!

셋째, 박해 상황만 아니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과의 관계와 대체로 모순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양심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양심도 믿음도 필요하지 않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 발달시키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엔 별 관심이 없다. 크리스천은 불신자가 언뜻 보기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을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 말도 안 되고 보편적인 이성과 양심에 위배되는 사항을 믿는 게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모습은 불신자에게 어떤 형태로 비쳐져야겠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는 사람에게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게 당연하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래서 성경엔 굳이 야고보서 말씀을 차치하고라도 요 13:35, 요일 4:11-12 같은 준엄한 구절이 있다.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사람하고부터 먼저 화해하라고 말한다(마 5:23). 하나님 따로 사람 따로가 절대 아니다. 대인 관계와 대신(對神) 관계는 별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하나님께 고백하더라도, 죄의 결과로 인해 야기된 잘못과 허물은 사람 간에 서로 고백하라고 성경이 명령한 것이다. (약 5:16)

- 하나님께 자백(소스 코드 차원에서): 돈을 사랑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사람으로부터의 칭찬을 구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어겼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죄는 결국, 선하신 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고 그분 말씀을 믿지 않은 잘못된 마음 상태에서 비롯됐다 등등..

- 사람에게 자백(실행 결과 차원에서): 오늘도 내 성질대로 욱하고 말았는데 이건 내 잘못이다. 미안하다, 내가 좀더 당신 입장에서 생각을 못 했다, 이 사고는 내가 잘못된 지시를 내려서 일어난 것이다, 내가 뭘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 내가 몰래 슬쩍 했다 등등...

명확하지 않은가? 그 후 회개의 열매는 당연히 행동으로 나타난다. 마음을 완전 정반대로 돌이키고, 과거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수습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임재하고 죄에 대해 극도로 민감해진 사람이라면, 저렇게 안 하는 게 비정상이다.

남이 받아들이든 말든 내가 사과해야 하는 일이면 사과하고, 처벌을 감수하고, 필요하다면 물질적인 배상도 하고...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그럼 평생 나쁜 짓 해 놓고서 주둥이로 예수 믿고 회개만 달랑 하면 천당 가냐?” 뭐 이런 식의 비아냥거림이 나올 일이 없게 하나님은 다 배려해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불신자에게라도 그런 식의 실족거리를 만들지는 않는다.

죄를 마음껏 지을 수 있던 상황에서는 온갖 나쁜 짓 다 하다가, 죄가 탄로나고 경찰에 검거된 뒤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입 싹 씻듯이, 잘못을 일단 인정하는 게 전략상으로 더 나으니까 '죄송~' 이러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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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것 말이다. ㄲㄲㄲㄲㄲㄲㄲ 개그 만화 일화 3기 4화 요가 교실 편 -_-;; 비둘기의 포즈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또한, 몇 년 전엔 우리나라에서 어느 사형수가 그저 죄책감과 불안에 사로잡혀서 안절부절 못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마치 가룟 유다의 도피성 자살을 연상케 하는 이런 행위도 회개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이며, 동정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냥 속 시원하게 사형 집행 해 주는 게 당사자와 국가와 국민 모두를 위해서 훨씬 나을 텐데!

본인은 보지는 않았지만, 수 년 전에 개봉한 영화 <밀양>에도 복음을 왜곡하는 여러 스토리 중, 이런 장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저 놈(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 안 했는데 어떻게 신이 먼저 용서를 할 수 있어?” 정말 가슴아프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이 글의 서론에서 언급한 저 두 사람은 “피해자 여러분께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길 원합니다” 같은 말이 입에 발린 위선으로 비치지 않도록, 더는 실족거리를 만들지 않도록, 어느 사역자보다도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자기를 희생하여 회개의 열매를 보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성경에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구원과는 완전 별개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개념이 있음을 첨언하고 글을 맺겠다. (요일 5:16-17) 이 사망이란 하나님께서 도저히 회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성도를 극단적으로 데려가시는 경우라든가 사회의 형벌을 의미할 수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연쇄 살인 흉악범이 회개하여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그는 구원 받은 사형수이다.
기독교 만화 전도지를 보면, 안티들이 그렇게도 조롱하듯이 흉악범이 감옥에서 예수 믿어서 사형 당한 뒤 천당 가고, 그 반면 자기 의에 가득차서 예수님을 거부한 형사 내지 교도관은 죽어서 지옥 가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심지어 더 극단적으로 가자면, 그 흉악범에게 살해 당한 피해자는 지옥 가고 가해자는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것마저도 가능하다. 교리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단 하나 최후의 보루. 성경은 사형수에게도 인격이 있네 같은 인권 드립-_-이나 치면서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사형 제도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구원받아서 천당 가더라도, 사형은 당하고서 그 뒤에 간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논리 체계이다. 지금도 사형 반대 외치면서 피해자 유족들의 가슴에 두 번 못을 박는 위선적인 종교인들 역시,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다시 공부하면서 자기의 오류에 대해 깊이 회개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CASE STUDY:

1980년엔 5공 시절을 떠들썩하게 한 이 윤상 군 유괴 살해 사건이 있었다.
원조 교제로 여고생을 임신시키기도 하고 도박빚에 시달리기도 하던 어느 불량한 체육 교사가,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던 제자인 이 군을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려 했는데, 가혹한 환경에서 감금당해 있던 이 군이 그만 질식사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이 군이 수 개월째 행방불명이고 수사가 벌어지던 동안엔 전통이 이 군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부모를 위로하고, “유괴범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살려 주면 당신도 살고(정상 참작-_-), 아이를 죽이면 당신도 죽는다”고 이례적으로 전두환스럽게 강경한 대국민 담화를 손수 발표할 정도였다.

범인은 결국 잡혔고, 전통은 약속을 지켰다. 살해범인 주 영형이 수차례 항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2년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1983년, 서울 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떠났다.
제아무리 29만원, 빛나리, 전통이라 해도, 저 순간만큼은 정말 사회 정의를 실현해 냈다. 멋있다. -_-;;;

돈 때문에 제자를 유괴· 살해한 천하의 개쌍놈인 주 영형도 옥중에서 기독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 군과 그의 유족에게 사죄하는 말을 남겼으며, 나름 두 눈과 콩팥을 기증하고 죽었다. 오늘날도 사회 구조가 최소한 이런 결말이라도 만들 수 있는 형태라면 유가족들에게 그나마 덜 억울할 텐데!

Posted by 사무엘

2011/10/31 08:41 2011/10/3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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