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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할 때는 절대로 남 따위와 비교하지 말고 성경과 비교하고 하나님의 법과 '절대적인 잣대로' 비교한다.
그 반면, 위의 권위와 위정자에 대해서는 “이게 그나마 불신자가 불신자를 통제하고 죄의 결과를 제어하려는 최선의 방법이구나. 비록 멍청하거나 사악하거나 혹은 둘 다일 때도 왕왕 있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세상은 더 망가질 수밖에 없으니, 내 신앙을 가로막는 것만 아니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고 순종해야지”라는 '상대적인 잣대'로 접근하면 된다.

이 생각이 딱 정립돼 있으면 정신 건강에 여러 모로 좋다.
큰 절대악에 대해서는 절대 침묵하고서 불가피한 필요악의 작은 폐해만 자꾸 부각시키면서 없애고 뒤집어엎자고 드는 선동질, 반골 기질, 쓸데없는 세상 비관과 피해의식, 하나님보다 더 자비로운 인권 드립, 그리고 인간의 죄성상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사회 제도가 존재 가능하다고 속삭이는 속임수 등등에 넘어갈 일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저건 전부 성경과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내가 가끔 정치색 띤 글을 쓰는 건(특히 종북들 까는) 전부 이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아이템들로 한정해서이다.

2.
신약 성경에 나온 긍정적인 얘기들, 대표적으로 빌 4:13 (나를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 롬 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 같은 것들은...
쉽게 말해 너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환경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님을 닮고 그분의 열매를 맺는 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얘기다. 세상적으로는 오히려 바보 되고 손해 보더라도 말이다. 빌 4장 전후 문맥을 보면 아주 쉽게 유추 가능한 얘기임. 무슨 예수 버프를 받아서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내 야망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얘기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롬 8:28도 당신이 육신적으로 절대로 원하지 않는 중간 과정과 결말을 다 포함할 수도 있는 얘기다. 신약 성경은 단순히 “차카게 살자” 수준을 넘어서 흔한 통념보다 굉장히 영적이고 고차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가 무엇인지, 그런 문맥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요한복음을 읽을 때쯤부터 미리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도 “제발 복 좀 주시옵소서”에 앞서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이 얼마나 큰지부터 알 수 있는 안목을 주시옵소서” 기도부터 먼저 한 에베소서 1장의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신약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이상한 은사주의 기복 신앙 같은 데에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다.

3.
신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는 인간의 구원이나 크리스천의 양육 같은 게 아니다. 겨우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기에는 성경엔 나머지 잉여스러운 내용이 분량이 너무 많고 그쪽 묘사들이 “쓸데없이 고퀄”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초림보다 재림 예언이 더 많고, 이뤄진 예언보다 아직 안 이뤄진 예언이 더 많이 적혀 있다. 특히 이스라엘, 유대인의 문자적인 회복을 거듭해서 강조한다. 이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문자적인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아니라고 가르치거나 교회가 유대인을 대체했다거나 영적 유대인 드립 친다거나, “예수님을 죽인 나쁜 민족” 운운하면서 반유대주의를 조장한다거나, 14만 4천 명이 자기 교단이라고 가르치는 것들은 전부 성경을 잘못 가르치는 이단 교리다. 그런 데서는 당장 떠나고 나오시라.

성경 내용을 영적으로 적용하더라도,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읽히는 문자적 1차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는 하고서 “그 다음에” 내 개인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영적 교훈을 찾아야 한다. 도대체 어느 문맥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고 어디서 “원수를 사랑하고 왼뺨 맞으면 오른뺨도 대라”가 적용되는지를 제대로 분간할 줄만 알아도 최하 95%가 넘는 이단에는 안 빠질 수 있으며, 성경 읽는 기본 자세의 반은 마스터한 게 아닐까 싶다.

4.
세상에 복음과 구원 말고 공짜란 없다. 어디 하나가 공짜라면 다른 한쪽에서는 반드시 바가지나 착취나 희생이 존재한다. 아니, 구원이라는 공짜마저도 예수님의 보혈 덕분에 가능한 것이니 거시적으로는 공짜가 아닌 셈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인이 예전에 경제관 쪽으로 글을 쓴 적이 있고 성경 교리 쪽으로도 글을 길게 쓴 적이 있다. 중요한 주제이니 관련 글을 반드시 참고하시라.

5.
크리스천의 윤리관은 그야말로 완전 보수 수구 꼴통급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역시 예전 글을 참고하시라.
그리고 역시 위의 예전 글에서 언급한 내용이다만,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은 자에 대한 각종 이상한 미신(귀신 따위), 필요 이상의 신세 한탄, 트라우마, '천추의 한' 같은 게 (일단은) 없다. 이것도 사람의 멘탈을 굉장히 건전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가치관이다.

6.
끝으로..
요즘 같은 세상에서 성경대로 살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신이 대체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구심이 드는가?
예수 믿느라 나 혼자만 잔뜩 손해 보고 생존 경쟁에서 뒤쳐지고 부당한 일,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한다는 생각이 드는가? 도대체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고 어떻게 살라는 건지 감이 안 오는가?
내가 인간적인 논리를 동원해서 그 질문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을 줄 수는 없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마냥 동네북, 호구처럼 로봇처럼 살라는 말도 당연히 절대 아니다. 다만 난 이런 말은 해 줄 수 있다.

먼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구원 조건, 하나님을 찾는 통로로.. 인간의 다른 그 어떤 스펙이나 외모, 능력도 모조리 제끼고.. 제일 하찮고 나약하고 바보 같아 보이는 '믿음'이라는 것만을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이걸 기회로 삼아야 한다.

왜 하나님이 세상을 그런 원리로 만들어 놓았는지 제대로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로 공평해야 하는 것은 진짜 공평하게 돌아가게 해 놓으셨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보다 더 잘났고 더 똑똑하고 더 부유한 사람들이 진작에 하나님을 당신보다 먼저 만났을 것이며 게임 다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데 필요한 그 수단을 인간에게 너무 불공평하게 배분해 놓으신 하나님이 불공평하고 잘못된 꼴이 된다. 다른 능력자들이 다 안 믿을 때 당신이 믿어야 인생의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부당한 일, 억울한 일이라고?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악한 카인을 벌을 내려 일찌감치 죽여 버린 게 아니라 반대로 의인 아벨이 카인에게 살해당하는 걸 허락하실 때부터.. 애초에 그 시절부터 불공평하기 시작했다. 저건 전혀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사건도 얼마나 추악하고 황당무계한 비리와 부조리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는지 역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조차 그 악한 시스템을 한시적으로나마 인정하고 그 시스템을 역이용하여 자기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셨으니 우리 역시 너무 피해의식 갖지 말자.

또한 우리의 모든 마음속 생각과 일거수일투족이 다 훗날 심판석 앞에서 회계보고가 될 텐데, 정산되지 않고 숨겨진 죄가 드러나서 하나님 앞에서 쪽팔림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그렇게 의로운 행실 때문에 손해 보고 부당함과 고난을 당한 것도 “똑같은 맥락으로” 그때 다 드러나서 보상받는 날이 온다는 걸 생각해 보자. 그거.. 영구적인 손해가 절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건 아Q 같은 근자감 정신승리법이 아니다. 영적 배후가 걸린 각종 문제들은.. 그 문제 자체가 물리적으로 제거됨으로써 해결되기보다는
내가 문제를 바라보는 발상을 바꾸고 안목을 바꿔서 성경이 약속한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강(빌 4:7)을 얻음으로써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욥기만 봐도 하나님은 욥의 고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안 하셨지만 욥이 알아서 데꿀멍하게 된 것이다.

또한 악한 마귀의 통치하에 있는 현 세상은.. 사람이 그 믿음을 행사를 못 하게 시스템을 착착 만들어 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이상한 사람들, 잘못 믿고 성경을 잘못 적용하는 사람들의 바보짓, 병크를 잔뜩 부각시키면서 이래서 종교에는 너무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영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한다. 하나님의 뜻을 오· 남용하는 것, 교회와 유대인을 구분 못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
이러니 바른 성경 원천을 토대로 바른 믿음을 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게 오늘날의 모습이다.

“저런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한번 믿어 보고 싶다” 정도의 엄청난 선한 간증이 있는 크리스천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런 평판은 나조차도 감당 못 하며 기대 안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괴감 가질 필요도 없고,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내 힘으로 이를 악물고 뭔가 엄청난 극기과 선행과 고행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필요는 더욱 없다.

난 딱 하나가 목표이다. 오로지 교리만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전해서, 누가 그걸 안 믿고 반대하더라도 뭐가 기독교인지 정확하게 알긴 하고서 제대로 반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안 믿을 권리는 있어도, 기독교가 아닌 걸 기독교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굳이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편견을 막는 것도 인정받는 것 맞다.

나일롱 신자인 건 하나님 앞에서 겸손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다. 교회사에 등장하는 순교자나 각종 '성인'(?)들의 행적이 자기와는 완전 별개 딴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이 압수되고 성도들이 화형을 당하던 시대에 치러지던 영적 전쟁이 있고, 성경이라 불리는 물건이 넘쳐나지만 그게 죄다 변개되는 오늘날 같은 시대에 치러지는 영적 전쟁도 따로 있다. 난 그걸 추구하며 지낸다.

Posted by 사무엘

2014/06/18 08:33 2014/06/1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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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미갈 이야기

1. 다윗의 조약돌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장면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 같이 좀 생각해 보자.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왜 조약돌을 5개씩이나 챙겨 갔을까? (삼상 17:40)

“발사한 돌이 빗나가는 경우 / 골리앗이 한 발 만에 안 죽을 경우에 대비해서” 같은 답변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필살의 일격 단 한 발로 미간을 명중시켜서 인간 흉기 골리앗을 즉사 내지 최소한 기절이라도 시키지 않으면, 다윗은 곧바로 반격을 당해서 다음 돌은 쏴 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이 조약돌은 FPS 용어로 치면 일종의 레일건인 것이다. 골리앗은 BFG로 무장해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한 발 이후로는 의미가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비장한 각오를 단단히 한 사람들은... 거사를 치르기 전에 일부러 자기에게 주어진 리소스를 딱 자기 여건에 맞춰 제약하는 퍼포먼스를 행하곤 했다. 일종의 배수진이랄까?
 
안 이숙 여사는 왕복이 아닌 편도 배삯만 치르고 일본에 갔으며,
윤 봉길 의사는 폭탄을 던지러 가기 전에 김 구와 손목시계를 교환하여 자기가 더 저렴한 것을 챙겼다.
옛날 백제의 계백 장군은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 전에 자기 처자식부터 미리 죽였다..;;
 
다윗도 만약 그런 식으로 비장하게 행동했다면 필생필사의 각오로 돌을 달랑 하나만 챙겨 가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스타일로 행동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데 자기는 죽을 일이 절대로 없으며, 골리앗을 무찌르고 멀쩡히 돌아온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일이 틀어질 가능성 따윈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그건 영락없이 '근자감'처럼 보였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는 가진 자의 여유마냥 별 생각 없이 평상시처럼 여러 스페어 조약돌을 챙겼다.

아니, 어쩌면 그는 골리앗 정도를 초월하여 아예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당장 현실의 목표물인 골리앗을 원 샷 원 킬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소리이고, 혹시 이 돌발상황 결과에 불복하여 예정에 없던 다른 거인들이 또 튀어나와서 시비를 걸면, 그놈들까지 이 조약돌로 잡아야겠다는 준비까지 한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거인이 골리앗만 있었던 건 아니며 당장 골리앗에게도 혈육상의 친동생이 있었다고 나오니까 말이다.
 
이 PvP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PK하고, 골리앗이 갖고 있던 커다란 검을 득템했다. 참고로 사무엘기상 17장을 읽어 보면, 성경은 골리앗을 골리앗이라고 부르는 걸 극도로 기피하면서 의도적으로 '그 블레셋 사람'이라고 에둘러 가리키는 걸 볼 수 있다.

2. 사울의 둘째 딸 미갈

성경에서 사울 왕의 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건 다윗이 골리앗을 죽여서 완전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된 뒤부터이다. 영웅이 된 건 좋은데 다윗이 너무 유명해지고 왕보다도 인기가 올라가자, 그는 왕의 눈 밖에 나 버렸다.

이거 뭐 누명을 씌워 죽일 수도 없고.. 왕은 꼼수 차원에서 다윗을 전쟁터에서 죽게 하려고 높은 군사 직위를 주었으며, 자기 딸을 다윗에게 주어 결혼시켰다. 사실, 왕의 사위로 만들어 주겠다는 건 삼상 17:25에서 이미 약속된 사항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 같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감히 왕의 딸과 결혼할 수는 없다고 제안을 고사했다. 이에 왕은 다윗을 또 전쟁터에서 죽게 할 명목으로, 아무 지참금 따위 안 받을 테니 다만 민족의 원수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여서 놈들 포피만 가져오면 둘째딸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다윗은.. 미갈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가서 블레셋 사람 200명의 포피를 갖고 멀쩡히 돌아왔다. 그래서 결혼에 골인했다.
생각을 해 봐. 사랑하는 마누라를 얻으려고 목숨 걸고 전쟁터에서 사람 수백 명을 죽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맺어진 결혼 생활은 그리 단란하지 못했으며 오래 못 갔다.

미갈은 거짓말까지 해 가며 다윗의 도피를 도와 줘야 했으며, 별거 모드에 빠졌던 그녀는 훗날 아버지의 명에 의해 '발디/발디엘'라는 다른 남자에게로 강제 재혼을 당했다. (삼상 25:44) 그 동안 다윗은 타지에서 또 아비가일, 아히노암이라는 아내를 두 명이나 추가했고 말이다.

허나 여기에도 반전이 있었으니...
나중에 다윗은 긴 도피 생활을 마치고 왕이 된 후, 발디에게서 미갈을 도로 뺏어 와 버렸다! (삼하 3:14-16)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마누라를.. 그것도 자기 나라 왕에게 빼앗긴 발디는 엉엉 울면서 미갈을 뒤따라 갔는데.. 군대 대장 아브넬의 “그만 꺼져”(성경에는 그냥 Go return이지만..ㅎㅎ) 한 마디에 “넹.. ㅠ.ㅠ” 깨갱 하고 버로우 타 버린 완전 안습한 남자로 성경에 나온다. 성경에서 처지가 제일 처량한 남자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다윗과 미갈은 재회를 하였으나, 궁극적인 결말은 또 다시 불미스러웠다.
사사 시절 이래로 방치되어 있던 언약궤가 돌아오던 날, 다윗은 왕의 체면도 다 버리고 너무 즐거워서 백성들과 덩실덩실 춤추고 즐겼는데...

미갈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남편에게 “품위라고는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리면서 당신 참 가관이더군요”라는 요지로 비아냥거리면서 굉장한 악담을 퍼부었다.

다윗도 이것만은 영적인 문제인지라 그냥 넘길 수 없었고, 아내에게 굉장히 실망을 한 듯하다. “나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지금보다 더 어리광 부리고 기꺼이 더 망가질 수도 있소. (그리고 그러더라도 나는 당신이 언급한 그런 천한 여자들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더 대접을 받을 테니 걱정 마쇼.)”

그 뒤로 미갈은 자녀 없이 쓸쓸한 말로를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삼하 6:23) 그 시절에 유부녀가 자기 자녀가 없는 것은 거의 죄악에 가까운 굉장한 치욕이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이것이 단순히 금슬에 금이 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생리학적 불임을 만들어 버리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그러나 인간의 출산을 굉장히 주관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성경의 전반적인 심상으로부터 유추했을 때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미갈의 마지막 장면이다. 처음엔 다윗이 미갈을 좋아한 게 아니라 미갈이 다윗을 먼저 사랑했다고 나오는데.. 본의가 아니게 시집을 다시 갔다가 돌아온 뒤, 결국 다윗의 여러 아내들 중 랭킹 끄트머리로 밀려나면서 파경으로 갔구나. 인생 한번 참 파란만장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6/09 08:37 2014/06/0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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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세

제아무리 불신자 무신론자라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이건 마치 “목 잘린 직후의 느낌이 어떻냐”만큼이나.. 체험해 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질 못하니 실험으로 입증할 수 없다. 당연히 과학적인 방법론이 접근할 수도 없으며,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종교관에 의지해서 신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윤회· 환생이든, 완전 소멸이든, 하늘과 지옥이든 그 무엇이든지 말이다.

이 분야는 불가지론의 영역이다 보니, 옳다 그르다 같은 감정 싸움은 딱히 없다. 뭐, 굳이 하나 지적하자면 “예수 안 믿으면 다 지옥 간다니 너네 종교는 참 편협하고 배타적이다” 정도의 딴지만 있을 뿐.
그러나 그건 협박이나 공갈이 아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죄를 심판해서 죄인을 지옥에 보낸다는 거지, 그 말을 전하는 크리스천이 다른 사람을 제멋대로 해코지 차원에서 지옥에 보낸다는 말이 아니다. 그 교리가 안 믿어지면 그냥 개인적으로만 안 받아들이고 안 믿으면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내세관은 그 배타적인 것 딱 하나만 받아들이고 넘기면, 나머지는 생각보다 굉장히 뒤끝 없고 깔끔하고 건전하다! 이건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귀신 없고 미신 없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교류 없고, 죽은 사람 갖고 현질(=돈 내라)을 유도하는 지긋지긋한 종교 장난질이 없다! 그 대신 부활의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사람이 죽고 나서 혼이 소멸하고 모든 게 그대로 끝이라면... 내가 단언하는데 이 세상을 지금처럼 힘들게 살 필요라고는 눈꼽만큼도 조금도 없다~~!!! 자살이 전혀 죄가 될 필요가 없다. 누구라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5. 보편적인 윤리

기독교가 가르치는 성경적 윤리관은 어지간한 세상 사람들이 ‘진보 트렌드’라고 생각하는 것들과는 완전 정반대인 수구꼴통(?) 성향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일단 필요악이라고 여겨지는 것에는 다 긍정적이다. 사형제, 체벌, 나라 지키는 군대, 공권력 같은 것. 절대적인 선악 기준이 없을 때는 마치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처럼 흉악범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 피해자 유족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를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은 단호하기 때문이다.

사형제가 있어서 범죄가 줄어들었느냐, 범죄자의 교화는 어떡하냐 그딴 건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다. 성경의 판결은 “흉계를 품고 사람을 고의로 죽게 한 사람은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 / “ ‘살인하지 말라’를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인 것이다. “너 고소”가 아니라 “너 죽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흉악범도 개인적으로야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지만, 법적으로는 형벌에 의해 세상 하직해야 한다. 자기 목숨 바쳐서 피해자 유족들의 한을 풀고 자기 피로 땅을 깨끗하게 해 준 뒤, 빨랑 하늘나라 가야 된다.

그리고 성(sex) 관념도 진짜 깔끔하다. (1) 결혼한 (2) 남자사람과 (3) 여자사람이 하는 것 말고는.. (1)부터 (3)까지 한 단서라도 누락되거나 바뀐 것은 전부 음행, 죄악이고 그것도 굉장히 큰 죄이다.

이런 법칙들이 온갖 인간적인 부조리와 모순을 핑계로 문란해지고 무너졌다고 해서 인권이(특히 여성 인권) 실질적으로 향상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야금야금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헬게이트만이 열릴 뿐이다. 당장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을 낳은 뒤 책임감 있게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성장한 당신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늘 이상한 통계 자료나 주고받으면서 답 없는 쳇바퀴 같은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이 윤리관의 경우, 다른 창조/진화나 성경 같은 이슈와는 달리, 굳이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단순히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크리스천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6. 예수님의 부활

위에서 소개된 여러 아이템들도 중요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가르는 가장 크리티컬한 변수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식이다!

세속 백과사전이나 세계사 만화, 인명 사전, 위키백과 같은 데서 ‘예수’를 찾아 보시라. 제아무리 개독안티라 해도 예수라는 인물 자체가 허구라고는 안 그런다. 그건 역사적 증거가 너무 분명해서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열이면 열 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얘기로 끝난다. 아니면 부활까지도 소개는 하지만 “성경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랬다고 한다, 기독경에 따르면 그랬다고 전해진다”라고 단서는 꼭 붙이고서, 우리는 저 진술에 책임 안 진다는 식으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 내 말이 맞는지 틀린지 직접 확인해 보아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묻혔다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라고 쓰는 순간 그 책은 객관성을 잃고 특정 종교 집단의 교리를 대변하는 경전(?) 내지 간증집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부활이 역사적으로 진짜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 시점에서 관심사가 아니다.

정체불명의 위경이나 이상한 사료를 토대로 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예수는 사실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해 있었으며, 나중에 제자들의 도움으로 무덤을 탈출한 뒤,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후손을 남기고 죽었다는 얘기까지 지어낸 개독안티가 고대로부터 있었다. 고대의 철학자나 석학들도 현대의 지성인 무신론자보다 지성과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얼마 못 가 쏙 들어갔다. 지금도 예수 부활을 공격하는 얘기가 강경한 개독안티 커뮤니티 위주로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성경 자체에 대한 공격 내지 창조/진화보다는 강도가 “훨씬” 덜하다. 이 주제는 너무 민감한 나머지 마치 ‘내세’만큼이나, “진실은 저 너머에” 수준으로 그냥 쉬쉬 하는 분위기다.

그야말로 오합지졸 겁쟁이었던 예수님 제자들이 불과 수십 일 만에 예수 전하느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역전의 용사로 뒤바뀐 것, 고대로부터 수많은 신자들이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믿음을 지킨 것, 더 나아가 오늘날까지 기독교회가 수백, 수천 년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우려먹는 레퍼토리이자 복음의 핵심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새마을호 열차에서 Looking for you가 흘러나온 사건 따위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그게 호락호락 정면으로 뒤집히고 반박당할 것 같은가? 아예 예수님을 비롯해 사도들의 존재를 송두리째 다 무시하고 부정하지 않는 이상, 부활만 쏙 부정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주변의 도움으로 무덤을 탈출해서 살아난 거라면 제자들이 그걸 모를 수가 절대 없었을 텐데, 겨우 그런 예수님을 보고는 역전의 용사로 바뀌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담대히 증언하다가 순교까지 했다고? 에라이..

모르긴 몰라도 아폴로 계획 달 탐사 자작극 음모론을 반박하는 것만큼이나 예수 기절설 같은 건 단박에 반박 가능할 것이다. 법학자로서 무신론· 회의론자이다가 예수님의 부활이 법적으로 너무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이라는 걸 발견한 사이먼 그린리프 같은 사람은 과연 무엇을 알아낸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 예수라는 인물이 정말 부활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성경 전체의 실질적인 진위 여부와 여러분의 혼의 미래까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 결론

잠시 눈을 돌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분쟁을 좀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는 당장 북한과 휴전 상태이고 대립 상태이다. 물론 365일 24시간 내내 긴장만 하고 있으면 너무 피곤하고 피차 좋을 게 없으니, 가끔은 대화도 시도하고 화해 무드도 만들려 노력한다. 그러나 둘은 근본적으로 통치 체제와 지향하는 바가 180도 완전히 너무 다른 정치 집단이며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이 상태로는 둘은 도저히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일본하고도 미묘한 애증의 관계가 있다. 경제 쪽으로는 분명 협력과 공존 관계이며, 개인적으로야 한국인과 일본인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독도 때문에 여전히 대립하고 있고, 과거사 문제도 해결 기미가 안 보인다.

바로 이런 세상 국가들의 정치적 분쟁과 비슷한 맥락으로..
개인간의 영적 세계에는 예수님을 두고, 생명의 기원을 두고, 성경을 두고 다양한 분쟁 지대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도 일시적인 휴전 상태일 뿐, 완전한 종전이 아니다. 기회가 되면 이 불씨는 언제든지 대형 화재로 번질 수 있다. 크리스천은 불신자와는 얼마나 넘사벽급으로 다른 사고방식을 갖췄는지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건 혈과 육의 싸움이 전혀 아니다. 그러니, 이런 걸로 신자와 불신자끼리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싸운다거나, 한 신념을 남에게 폭력과 협박으로 강요한다거나, 그걸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차별의 근거로 활용한다거나 해서는 정말 절대로 안 된다. 크리스천은 다른 불신자와도 ‘가능한 한’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롬 12:18).

그런데.. 종교 쪽 논쟁은 서로 싸워 봤자 별로 답도 안 나오고 서로 말도 안 통하고 감정만 나빠진다고 해서 아예 완전 입 다물고 말을 말고 “너는 네 식대로 믿어라. 나는 내 식대로 믿는다”고 선을 마냥 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성경의 판결대로라면 이건 또 다른 극단이며 크리스천의 직무유기죄로 빠진다. 성경을 읽다 보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진술로 인해 그럼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싶은 딜레마가 느껴질 때가 왕왕 있다.

이런 문제의식이라도 느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크리스천으로 최소한의 영적 생명력은 갖췄다고 하겠다.
그런데, 나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고, 모든 분야에서 개독안티와의 어떤 논쟁도 다 이길 방대한 지식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리고 비록 악의적인 의도는 아니었지만 왕년에 간증 잃을 병맛 같은 행실도 많이 남겼다. 게다가 나 또한 하나님의 모든 사고방식이 다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성품을 다듬고 내 행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도록, 오늘은 어제보다는 더 나은 모습을 보이도록 간구하고 노력을 할 뿐이다. 최소한 상대방이 복음이 무엇이고 기독교 교리가 무엇인지 알기는 제대로 알고서 거절하든가 반대하지, 삐쳐서 마음을 확 닫아 버리는 일은 없게 내 말에 너를 ‘위한다’는 진심을 담으려 노력한다.

사실, 불신자가 예수 믿기 위해서 지금 당장 안 믿어지는 창조론이라든가 하나님의 경륜을 납득해야 할 필요도 없고, 자기 힘으로 술· 담배를 끊어야 할 필요도 없고, 성경관· 윤리관 같은 사상을 인위로 개조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노력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불신자의 입장에서 구원을 위해 당장 가장 중요한 건 4번과 6번일 것이다. 일단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나머지 믿음은 추가로 공급된다.

그러니 길거리에서 복음 전하다가 불신자가 1~3, 5번 같은 걸 갖고 불필요하게 논쟁을 걸면서 시간을 끌면, 적당히 커트를 하는 기지도 발휘해야 한다. 그런 데에 끌려가면 힘만 빠지지 결론 절대 안 난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께서 유한하고 부족하고 여건마저 제각각 불공평(?)하게 타고나는 사람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육신적인 스펙이 아니라 ‘믿음’으로 귀착된다.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그래도 공평하게 해 놓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평한 거다.

기독교는 처음에 잘 이해가 안 되는 몇몇 전제조건 아이템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에는 나름대로 상당히 건전한 원칙과 일관성과 체계가 잡혀 있다. 크리스천들은 그걸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리고 안 믿는 건 개인 자유인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고 기독교가 아닌 걸 남들이 기독교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는 것도 분명히 전해야 한다. 이렇게 영적 전투를 치르는 것이 신자의 권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05/06 08:28 2014/05/0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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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사고방식은 불신자의 사고방식과 무엇이 다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1. 신의 존재

사실, 신의 존재 여부 자체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증명도 부정도 할 수 없으며, 그런 방식으로 논쟁을 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이 분야는
“직접 관찰한 적이 없으니 신은 없다고? 그럼 너는 네 뇌를 직접 관찰한 적이 없으니 무뇌아냐?” 라든가
“현대 과학이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무수한 미지의 영역에 신이 전혀 없을 거라고 확신 가능하냐?” 같은
당장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추측+아전인수격의 유치한 논쟁에서 크게 더 나아가질 못한다. 이런 진흙탕 싸움에 이골이 난 사람은 보통 불가지론에 빠지게 된다.

창조과학 같은 데서는 우주와 지구와 자연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예로 들면서 그게 확률과 우연으로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직관을 많이 내세우는 편이다. 그건 성경적인 근거가 있으며(롬 1:19-20), 나 역시 직관과 양심에 근거하여 그 논조를 큰 틀에서 '지지'한다.

그러나 자연 계시는 과학적으로 온전하고 엄밀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 역시 인정한다. 수학으로 비유하자면, 10의 무려 1500승까지 찾아 봤는데도 없었다고 해서 홀수 완전수가 아예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게 증명된 건 아니라고 하니까. 단지, 한 혼을 움직이고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굳이 과학적으로 온전하고 엄밀한 방법을 꼭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 뿐이다.

또한, 같은 논리를 동원하자면, 자연에는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틀어지고 망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처참한 살육과 약육강식도 있다. 온갖 나쁜 병균, 기생충도 있고 바이러스도 있다.
이 세상에는 전능하고 공의로운 신이 정말 존재하기는 한지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때로는 신자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의구심이 들 정도로 끔찍하고 참혹한 일, 불의한 일, 억울한 일도 많이 벌어진다. 물론 그런 것을 성경적으로 설명하는 방법도 없는 건 아니나, 그걸로 영적 안목이 없는 불신자를 당장 충분히 설득 가능하지는 않다.

요컨대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은 자주 불거져 나오긴 하지만 과학적 측면보다는 저런 명분론· 변증법(?)적인 측면에서 더 제기되는 편이다. 그리고 아무리 기독교회가 배도하고 타락하고 자유주의로 빠진다 해도 자기 존재 이유를 성립시키는 신 자체를 대놓고 부정할 정도로 막장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껍데기만 유지한 채 변질만 되며, 하나님을 가르치긴 하나 그분의 성품을 완전히 왜곡해서 가르치게 될 뿐이다.

2. 창조-진화

여기는 과학이라는 미명 하에 진흙탕 싸움이 본격적으로 제일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다.
기원이라는 것도 어차피 실험으로 정확하게 재연 가능한 건 아니며, 단지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해서 마치 범죄 수사처럼 과거엔 아마 이랬을 거라고 재구성과 추적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며 학술논문 스타일로 쓰여진 책도 아니다. 그러나 건전한 신자라면, 성경에 양념으로 기록되어 있는 과학적 사실들은 모두 문자 그대로 참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성경이 최소한 당대의 다른 문헌에 ‘비해서’야 과학적 통찰력이 아득히 앞서갔으며 성경 저자의 식견만으로는 도저히 기록할 수 없는 진술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그 성경이 너무나 평이하게 신의 존재만큼이나 당연한 듯이 창조를 말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성경을 읽고 믿는 신자들의 한계는 솔직히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가령, 성경에 아무리 ‘땅의 원 위에 앉으신 분’(사 40:22), ‘땅을 허공에 매다시고’(욥 26:7), ‘낮과 밤이 동시에’ 같은 구절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고대의 크리스천들이 성경만 읽고서 세속 과학자들보다 더 일찍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걸 선뜻 알아채지는 못했다. 또한 창세기 1장의 연대기 문제는 같은 믿는 신자들끼리도 진영간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아 뭐 그렇다고 해서 창조를 믿는 성경 신자들이 너무 쫄거나 위축될 필요는 없다.
저쪽 사람들은 창조론자를 어떻게든 바보로 만들기 위해 약간 비논리적인 비약, 비과학적인 표현, 팩트 오류 같은 것만을 찾아내어 집요하게 공략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유리한 전제조건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럼 너의 천 대 만 대 조상은 확실하게 원숭이나 아메바냐?” 같은 원초적인 질문을 절대로 정면돌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공정한 대결이랍시고 그 함정 설정에 필요 이상으로 말려 들어갈 필요 없다.

진화론자는 어차피 기원에 대해서 딱히 이렇다 할 시나리오를 갖추고 있는 게 아니다. 일단 원시 생명체가 있으면 거기서부터 진화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아주 제한되고 미시적인 맥락에서 유기물이 합성됐거나 대진화가 관찰· 재연된 것은, 수많은 놀라운 지능을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실제 자연의 생물들과는 여전히 엄청난 괴리감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든, “인간과 원숭이가 공통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든 이거나 저거나 본질 개념상으로는 차이가 없는 진술일 뿐이다.

일상생활에서야 “A가 틀렸으니 B가 자동으로 맞다” 같은 논리 전개는 억지가 맞다. 그런데 기원은 솔직히 A, B 말고 다른 대안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글쎄, 기어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자면 만들 수는 있다. “신이 창조하긴 했을지 모르나 그게 꼭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보장은 없잖아” 같은 식으로 들이댈 수 있겠는데.. 그렇게까지 무슨 수를 써도 절대로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까지 굳이 설득하려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서로 감정만 나빠진다.

3-1. 성경의 보존과 번역

창조-진화가 자연과학 쪽의 전쟁터라면, 여기는 언어학, 고고학 같은 인문계 영역의 전쟁터이다. 사실은 기독교의 근간을 구성하는 성경 자체에 대한 공격이야말로 제일 치열하고 집요하고 처절하다. 인류 역사상 성경만치 공격을 많이 받아 온 문헌이나 종교 경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1) 성경이 자필 원본 이래로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됐을 리가 없다고 공격하고, (2) 그 원문이 있다 해도 그 뜻을 우리가 제대로 알 수 없어서 완벽한 번역이 있을 수 없다고 공격한다. (1)은 원문 계층이고 (2)는 원어 계층 되겠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건 교회 댕기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심지어 목사, 신학자라는 사람들까지 그 공격에 고스란히 넘어가서 불신자· 기독안티와 다를 바 없는 성경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니 이를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그런 허접한 텍스트를 근거로 어떻게 성경은 영감 받은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라고 가르칠 수 있으며, 안 그래도 요즘 교회 이미지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 세상을 상대로 감히 복음 전하고 예수 믿으라고 전할 수가 있는가? 당신이 믿는 그 영감 받은 온전한 말씀은 도대체 무슨 성경이며 지금 우리 손에 있긴 한가? 문체 수준이 아니라 서로 번역과 내용이 제각각인 성경들 중에 무엇이 진짜 옳은 말씀이란 말인가?

킹 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로 믿는 진영은 이 문제에 관한 한은 확실한 정답을 가지고 있으며 비판에 대한 대안을 갖추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을 믿느니 차라리 400여 년 간의 선한 열매가 분명히 있는 옛 성경 역본을 믿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기독교계에 다툼과 분열을 야기하는 고집쟁이 전투종족 집단이 절대로 아니다. 기독교를 믿을 거면 제대로 믿으려고 모 아니면 도 신앙 노선을 추구하며, 크리스천의 신앙을 최전방에서 방어하는 건전한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복음을 전할 때는 예수 안 믿으면 다 지옥 간다고 완전 과격하고 배타적이고 편협하게 가르치면서, 성경이 특정 한 역본 말고 다른 내용은 다 잘못됐다는 지극히 당연한 팩트는 왜 그리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가?

성경은 그저 내용 요점만 두리뭉실하게 적혀 있는 도덕 경전이라고 취급하기에는 너무 엄청나고 과격한 내용도 많이 들어있다. 정확도와 신뢰도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성경이라는 책이 말하는 내용들은 그저 판타지일 뿐 진지하게 믿을 가치가 없다!

3-2. 성경의 무오성과 해석

앞의 (1)과 (2)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3) 팩트와 해석 차원의 공격도 무진장 많다. 왜, (a) 성경에 오류와 모순이 잔뜩 있다는 태클들 말이다. 사복음서간에 뭐가 일치 안 하고 동일 사건에 대한 진술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내부 모순이 있으며, 세속 역사 문헌 어디에도 요셉이나 모세나 출애굽 사건,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고증이 안 맞다는 식의 외부 공격도 있다.
또 (b)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든가 “가나안 민족들을 모조리 진멸하라”, “고환이 상한 자는 주께 나오지 못할지니라” 이런 것만 뚝뚝 떼어 와서 하나님이 인종 차별적이고 잔인하고 뭐 같다고 이상한 딴지 거는 얘기들도 한둘이 아니다.

어디 그 뿐이랴? 이제는 아예 (c) “성경 어디에도 예수 말고는 구원의 길이 없다거나, 예수가 자기 안 믿는 사람은 다 지옥 보내 버리겠다는 공갈을 한 적은 없다”고 교리를 제멋대로 정반대로 재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난독증 수준의 억지에 비하면 “모세는 진짜 홍해를 횡단한 게 아니라 근처의 갈대밭을 건넌 거다”는 차라리 애교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들의 얘기에만 끌려가다 보면.. 기독교와 바이블은 진작에 외면받고 사라지고 소멸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존속해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고 내가 정말 어지간히 ‘쎈 걸’ 믿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읽으라고 부탁하고 간청을 해도 안 읽을 재미없는 책을 옛날에 악의 무리들은 왜 그리도 없애려고 발광을 했으며, 그 책을 소지하거나 읽느라 순교까지 당한 바보들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던 걸까?

성경에는 왜 그렇게 적혀 있는지 정말로 알 수 없는 의문 구절도 일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 말고 (a)에 속하는 상당수의 딴지들은 이미 반박과 해결책이 다 알려져 있으며, (b)도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 경륜 구분 같은 걸로 바르게 나누고 분간하면 성경에 왜 그런 무지막지한 말이나 모순점이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오류 없이 거의 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c)는...? 대꾸할 가치도 없을 것 같다. 입만 아프다. 믿어지지 않고 믿기 싫으면 전체를 거부하고 안 믿으면 된다. 단지 취사선택을 하지 말고, 비기독교적인 자기 신념을 기독교라고 우기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떡밥을 하나 남기면서 이 주제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생명의 기원만큼이나 인간의 언어의 기원도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건 화석이나 방사선 원소 연대 측정조차도 동원할 수 없는 물건이다 보니, 오늘날 언어학계에서는 언어의 기원은 그냥 불가지론으로 간주하고 함구하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5/03 08:25 2014/05/03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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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우시니라

요한복음 11장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리시는 장면이다.
죽은 지 그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시신은 시반이 짙어지고 피는 이미 검붉게 썩어 가며 어쩌면 구더기가 일고 부패가스로 인한 팽창까지 시작되었을 텐데(39절), 물리까지는 아니어도 자연의 수많은 생화학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역변환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여담이지만, 갓 죽은 시신에 날파리가 날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과, 교통사고 현장에 견인차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거의 비슷하다는 말도 있다. =_=)
 
그런데 그 문맥에서 슬며시 등장하는 Jesus wept(35절)는 영어 성경 기준으로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이다. 참고로 우리말 성경은 흠정역/한킹을 제외하면 유독 대놓고 '울었다' 대신 '눈물을 흘리더라'라고 돌려 번역되어 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창 50:17 요셉이 울었을 때는 다들 그냥 '울었다'라고 했는데도.
 
이때 예수님의 울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한참을 고의에 가깝게 지체하다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잠시 후면 그 죽은 나사로를 그분께서 살려내실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울음은 당연히.. "네가 죽다니 아이고 꺼이꺼이" 같은 문상과 추모의 의미라고 볼 수는 없다.
"내가 울었던 건 널 부활시킬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도 아닐 거다. 성경이 무슨 김 성모 만화냐?

인간적인 면모를 보자면, 예수님 역시 인간의 감정과 연약함을 모두 아셨다(히 4:15). 그리고 복음서를 보면 그분은 온갖 고뇌와 번민에 매여 있는 민초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마 14:14, 9:36, 막 1:41 등등). 동정심, 즉 compassion 되겠다.

누구 사랑하던 크리스천이 죽었다. 그 사람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다가 훗날 우리를 다시 만날 것이다. 솔직히 처지만 따지면 우리는 고인 걱정은 전혀 할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역시 그 사람이 죽으면 당장은 슬퍼하고 울 수 있으며, 인륜과 예절의 관점에서도 그러는 게 마땅하다. 슬퍼는 하되 단지 "잘 가시오. 곧 만납시다" 수준에서 그치지, 멘붕에 빠져서 "아이고 꺼이꺼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이럴 필요만이 없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클라이막스에 달해서, 부활 권능과는 별개로 울컥하신 거라는 설은.. 우리에게도 큰 위로를 주며 최소한 해롭지는 않다. 행 9:4-5도 이 설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예수님은 예수쟁이 크리스천들에 대한 박해를 예수 자신에 대한 박해와 동급으로 간주하셨다. 나도 너와 늘 동고동락한다는 뜻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요한복음 11장엔 그런 휴먼 드라마스러운 장면만 담겨 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11장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나 주변 인물들이 예수님의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듣고 동문서답을 하는 대화가 유난히도 많이 나온다. 7절부터 16절까지, 그리고 21절부터 24절까지를 보시라. 잠과 죽음을 분간 못 하고, 현세의 부활과 내세의 부활을 분간 못 하고.. 분위기가 심상찮다.

그렇게도 참 생명과 참 부활에 대해서 예수님이 거듭 설명을 해 주셨는데도 예수님을 가장 좋아하고 따르는 가까운 사람들조차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 한다. 물론 현장에 내가 있었으면 나라도 제대로 파악을 못 했을 테니 그 사람들 탓을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영적으로 저 고상하고 저 높은 곳에 가 있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죽은 사람과 유족, 그리고 "저 용한 의사 선생이 지체하지 않고 조금만 일찍 왔으면 나사로가 살 수 있었을 텐데" 뿐이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11장엔 36절만 있는 게 아니라 37절도 있다. 그 말에 예수님이 또 돌직구를 맞아서 '다시 속으로 신음하셨다'라고 38절은 말한다.

사실 11장 전체의 뉘앙스를 보노라면,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실 때와 살리기 직전, 그리고 살리는 과정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기도(41~42절)를 봐도.. 그분 머릿속에는 나사로 유족에 대한 위로보다는 아버지의 일 그리고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은 메시야임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일... 정도밖에 주 관심사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울음의 의미는.. 설령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가미됐다 하더라도 "너희가 나를 제대로 믿었으면 사람 하나 죽은 것 갖고 그렇게 초조하고 통곡하고 멘붕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왜 그렇게 달을 안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있니 ㅠ.ㅠ 보는 내가 너무 안쓰럽다"도 가미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문상 차원의 꺼이꺼이가 아니며, 믿음 부족에 대한 단순 분노나 책망은 더욱 아니다. 다른 예로, 누가복음이 아무리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한 책이라고 해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22:42-44)가 십자가형에 대한 단순한 인간적인 공포가 담긴 거라고 볼 수는 없듯이 말이다.

또한,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예표라 일컬어지는 요셉의 울음처럼 말이다. 자기는 진작에 형들의 과거 죄악을 아무 뒤끝 없이 다 용서했는데..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나니까 형들이 기껏 한다는 간청이 뭐냐면 우리에게 제발 해코지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때 요셉이 운 것은 감정적인 슬픔 때문이 아니요, 형에 대한 배신감이나 분노 때문도 아니요, 다른 차원의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나의 추론이 맞다면..!
실컷 구원받고 나서도 아직도 구원의 상실 때문에 예수님께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거나, 대환란 안 겪게 해 달라고, 혹은 대환란 때 고문 안 당하고 고통 없이 단칼에 가게 해 달라고 고작 그런 기도나 한다면.. 우리 역시 아마 요 11:35-38과 비슷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괴롭게 하고 울릴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영적 적용인 것이다(영적 해석이 아님).

이것이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오묘한 장면, 그리고 그 속에 쏙 들어가 있는 "예수님께서 우시니라"를 읽으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아닐까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4/04/18 08:30 2014/04/1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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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 구원받았다면서 행실에 변화가 없는 사람이 왜 이리 많나?
  • 거짓/페이크 영접 기도로 인해 양산된 거짓 구원 확신, 가짜 크리스천에 대한 트라우마
  • 신이 어떻게 자기가 창조한 인간을 지옥에 보낼 수 있나?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왜 이리도 많나?
  • 신이 존재한다면서 정작 세상엔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왜 이렇게 악이 가득하나?

등등의 이유로 인해, 세상에는 일명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하기 곤란해 보이는 상황이 무척 많다.
그렇다 보니 이 모순을 풀려고 결국 크리스천들은 마치 좌· 우파마냥 내부적으로 크게 두 극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a. 사람마다 구원 여부는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 없이 애초에 다 정해져 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 대해 인간이 감히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vs

b. 아무래도 예수님을 입으로만 믿고 시인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죄로부터 완전히 회개한 뒤에 자발적인 선행이 뒤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미 받은 구원도 이를 통해서만 유지할 수 있다.

a는 흔히 칼빈주의, 예정론이라고 불리며 b는 알미니안주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들은 궁극적으로는 둘 다 비성경적인 양극단이다.

1.

예정론의 매우 큰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하나님이 그냥 허락하시는 뜻'을 완전 혼동하여, 죄를 무슨 죄인 역할극 정도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도, 이북의 김씨 부자가 인민들을 학살한 것도 다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해 놨기 때문에 그리 된 거라니 이런 신성모독적인 발상이 어디 있는가? 그런 신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과 공의가 충만한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겠는가?

죄가 역할극이라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도 아무런 찬양받을 가치가 없이 그냥 짜고 치는 고스톱마냥 역할극에 불과할 것이다.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뜨거운 지옥도 무슨 가상 머신 매트릭스 샌드박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천차만별 불공평한 듯이 배분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지위나 위상뿐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태어나는 애와 북한에서 태어나는 애의 인생이 갈리고, 순교하는 신자와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신자의 인생이 갈린다. 사람마다 신분과 빈부귀천이 갈린다.

그러나 개인의 구원 여부는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공평하다. 송명희 시인의 <나> 기억 안 나냐?
예정되어 있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향후 지위 그 자체뿐이다. 미리 아심(read-only)을 예정(write operation)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가령, 성경의 파라오는 재앙을 자초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순순히 풀어 줬어도 충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인간 백정 인간 악마라 불리는 북한 김 정은이라 해도 어느 날 갑자기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그는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 당연한 말 아닌가? 예수님의 보혈은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이 예수님을 영접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구원이 아무리 대가 없이 행위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 해도, “저 구원받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손을 내미는 것조차 선물 받는 것에 대한 대가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지거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지만, 스스로 예수님을 영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저항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은혜는 스스로 선과 악을 분간 못 하는 어린아기가 받는 특례 구원에나 적용되는 조항일 것이다. 또한,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공의, 전지전능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에 있는 현상일 뿐이다.

난 정말,
하나님이 공의롭거나 전지전능하지 않고 새디스트여서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것하고,
하나님이 공의롭고 전지전능하긴 한데 일부만 사랑하고 택했기 때문에 열외된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것하고..
둘의 차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건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멍청한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아주 멋진 옷을 입고 있다고 둘러대는 것만큼이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자유의지를 빼고서 지옥을 설명하면 그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

여담이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구를 죽이기로 작정하시고 그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고 뭐 어쩌기로 하신 것은, 일종의 가속(acceleration)이다. 그 사람을 보호하지 않고 그가 극단으로 치우치고 스스로 막장으로 빠지게 내버려 둔 것에 가깝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동차나 비행기의 무거운 조향타를 움직일 수 없어서 파워스티어링 유압의 도움을 받는데, 하나님의 역할은 그런 유압인 것이다. 사람이 조향 자체를 무슨 pre-programmed된 로봇 조종 받듯이 하는 건 아니다.

2.

한편, 칼빈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극단도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이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구원 교리를 아예 대놓고 부인하면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기 때문이다. 구원의 결과로서 나오는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혼동하여 이런 오류가 생긴다. 영어로는 fruit / root of salvation이라고 표현한다.

행위가 덧붙은 구원 획득 내지 구원 유지 교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뭔지 모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행의 수준이 뭔지도 모르는 극도의 무지의 소치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 영접 기도를 이런 식으로 한다고 생각해 보아라.

“예수님, 저는 내가 죄인임을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죄악된 삶을 모조리 청산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사랑하는 것만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술, 담배, 마약 다 끊고 예전의 일체의 방탕하던 생활 방식을 다 그만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성결하게 살기 원합니다. 그러니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아멘.”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자기가 예쁜 짓 해서 들어갔다가, 심한 사고 치거나 나쁜 짓 하면 짤리고... 저런 식으로 믿을 거면, 예수 믿는 게 부처· 마리아를 믿거나 심지어 철도교에 입교하는 것과 차이가 도대체 무엇이냐?

선행이 결과론적으로 아무리 좋게 보인다 하더라도, 이런 교리의 누룩은 우리가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
술· 담배, 마약이 나쁜 줄은 솔직히 불신자도 다 알고 그런 건 자기 깜냥과 재량껏 끊을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걸 그만뒀다는 게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뭐가 대수란 말인가?

자기가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알았으면, 그 다음에 구원을 요청하며 따라야 할 고백은 이것밖에 없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하여 내 죄값을 치르고자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걸 믿습니다.” (단, 정말 진심으로 말할 것).

인간의 깜냥으로는 도저히 처리가 불가능한 나의 처참한 죄를 사하기 위해서, 공자· 맹자나 부처나 마리아가 아니라 2000여 년 남짓 전에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그 역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시인하는 게 참 회개이고 기독교의 구원 조건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 구원부터 받은 뒤에야, 물리적인 죄로부터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원동력은 성령님에 의해 차차 생겨난다. 철도는 교통 체증으로부터나 구원할 수 있지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예수님 말고 다른 사대성인 같은 걸 이런 식으로 믿는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 같은 게 생기지는 않는다.

그 구원은 나를 담보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담보로 유지되는 거다. 내가 선행으로 구원받은 게 아닌 것만큼이나 내 악행으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이게 바로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의 넘사벽 급의 차이인 것이다.

구원 절차가 달랑 '믿음' 하나밖에 없고 너무 간단하고 쉬워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 '믿음'이란 게 뭔지를 아직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자꾸 '행위'를 갖다 붙일려고 하는 것이다. 행위가 전혀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저렇게 제대로 믿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이 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물론, 정말 구원받았는데도 엄청 육신적인 신자도 있고 회개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 신자도 있다. 신자의 영적 성장은 아주 느리고 답답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다. 행실만으로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기란 몹시 어렵다.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알 수 없는 것만큼이나 이것은 우리에게는 일면 불리한 면모이다. 그것만 바로 알 수 있으면 교회에서 불순분자를 훨씬 더 수월하게 솎아 내고 각종 분쟁도 시스템의 힘만으로 예방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런 불편을 못 참겠다고 신자들을 거짓 교리로 겁주고 협박하는 건 목사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갖고 장난을 쳐서는 안 되듯, 혼의 구원과 관련된 교리로 장난을 치지는 말아야 한다.

3.

믿음과 행위 사이에 모순처럼 보이는 관계 문제는 크리스천 사이에서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는 논쟁거리로 남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답이 분명히 나와 있는 아주 쉬운 문제인데, 그걸 모순이 많은 이 현실에 적용하기가 껄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어떻게 '없음'이 있지? 완전한 성경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사항이므로 크리스천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바른 관념도 갖추어서 내가 도대체 예수님의 어떤 면모를 믿고 있는지를 잘 따져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믿는 종교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느라 논리적으로 빼도 박도 못할 치명적인 모순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도 절대무오하다는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겠는가?

본인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오로지 믿음'이 모두 반영되어 있는 위와 같은 해석이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제시하며, 이 모델로 속 시원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참고 기다리면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런데 무척 재미있는 것은 극과 극은 서로 통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도 은사주의와 거짓 영접 기도를 비판하면서 선행과 회개를 강조하는 폴 워셔 목사의 경우, 개념상 골수 알미니안주의일 것 같은데 실은 칼빈주의자이다. 아무나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주권 구원이 결국 행위 구원이나 다름없게 되는 셈이다. 계산 과정은 다르지만 궁극적인 결과는 일치한다고나 할까. 이 점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4/12 08:12 2014/04/1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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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

성경의 요한복음 8장의 초반부에 나오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사건은 비기독교인이라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인지도가 높은 만큼 사건에 대한 오해도 굉장히 많다.

1. 먼저, 통념과는 달리 이 이야기--정확히는 요 7:53부터 요 8:11까지--는 정말로 원래 성경 원문에 있었는지 의심을 받고 있다. 거의 모든 성경들을 보면 “오래 된 사본에는 이 단락이 없음. 이것은 후대에 추가된 것임.” 같은 단서가 붙어 있다! 신약 성경에서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막 16:9-20)과 더불어 양대 의심 단락인 것이다.
물론 KJV 신자에게는 이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시내 사본 및 바티칸 사본 같은 변개된 고대 필사본을 기준으로 하는 잘못된 주장일 뿐이다.

2. 간음은 여자 혼자서 지을 수가 없는 죄다. 간음하다가 누군가가 현장에서 적발되었고 이에 대해 여러 사람의 증언이 일치한다면, 율법대로라면 간음을 저지른 “남자와 여자를” 모두 죽여야 한다. 그런데 저 사건에서는 남자는 어딜 가고 왜 여자만 붙잡혀 있는가? 단순히 여자의 순결이 의심되기만 하는 상황이라면 곧장 죽일 게 아니라 민수기 5장의 판별법을 사용해야 한다.

3. 여자는 법적으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단순히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무슨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 무조건 다 사랑과 아량으로 감싸자는 식으로 물타기 된 게 아니다! 이 사건은 무슨 사형제 폐지, 간통제 폐지 등 온갖 이상한 비성경적인 프로파간다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절대로 될 수 없다.

4. 또한, 그 여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름으로써 구원받았다고 우리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요 8:11)

5. 북한 문화어로 성경을 번역한다면 stone(동사)을 '돌탕치다' 정도로 번역해도 되겠다.

6.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사건은 이런 패러디나 만들라고 성경에 기록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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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3/12/26 19:22 2013/12/26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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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가 세상적으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고, 인간의 머리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종교(?)인 이유

1. 여타 종교들을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단호히 배척하여 '따'를 자처한다.

2. '원수를 사랑하라' 등, 육신적인 가식· 위선으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요구를 한다.

3. '부활' 같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걸 가르친다. 사실 교주가 부활해서 무덤이 비어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도 여기 말고는 없고..;;

4. 잘 믿으면 부귀영화 성공은커녕, 박해를 받을 거라고 대놓고 버젓이 예고한다.


이건 내가 정리한 건 아니고 L.E.맥스웰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책에 있는 내용이다.

세상엔 복음에 반감을 갖고 있는 똑똑하고 '이성· 합리적인' 무신론자들이 엄청 많다.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들의 각종 폐단들을 지적하면서 자신들은 반종교가 아니라 비종교를 표방한다고 그러는데...
그에 대한 나의 생각/반론은 이러하다.

1. 글쎄, 리처드 도킨스가 나처럼 있지도 않은 신을 무작정 쫓아다니는 불쌍한 무지렁이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무신론을 설파하기 위해 나 대신 죽어 주기까지 했으면(그리고 부활까지 했으면).. 그 사람 주장도 좀 고려해 보겠다.

2. 내가 왜 태어났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고 죽어서는 어떻게 되고, 절대적인 선과 악이 무엇인지.. 이런 것에 대한 관념이 없는 사람치고 건전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은 난 못 봤다. 절대자 없이 인간이 과연 그렇게 자기끼리 질서정연하게 잘 살고 있었을까? 글쎄? 난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ㅎㅎ

3. 위에도 잘 설명돼 있지만, 인간이 자기 머리로 종교를 만들었다면 나 같으면 단언하건대 철도교를 만들었지 기독교 같은 건 미쳤다고 만들겠나. 절대로 안 한다.

Looking for you 같은 마약 같은 황홀경 음악이 있고, 수인선 복선 전철과 동해남부선 광역전철의 부활 신앙이 있고, 국토 사랑 정신과 희락과 화평과 사랑이 넘치는 철도교를 믿으면 되지 뭐 하러 쓸데없이 사탄 마귀, 지옥, 심판, 휴거 같은 걸 논하겠나? 왜 골치아프게 영적 전투를 치러야 하나? 나도 종교에 대해서 도킨스만치는 그래도 생각을 해 보고 예수 믿는다. ㅎㅎ

이성· 합리적인 무신론자라면 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세상에 인간들이 당신보다 똑똑하지 못해서, 머리 쓸 줄 몰라서 기독교가 안 없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 크리스천이 겪는 슬픔과 고통

크리스천이 아무리 죽음에 대한 준비가 다 된 사람이라 해도, 이와 별개로 죽는 과정은 충분히 두려울 수 있다. 그리고 고통 때문에 울부짖을 수 있다. 예수쟁이도 총 맞으면 죽는 보통 사람이며, 고문 당하면 괴로운 건 마찬가지다.
또한 크리스천이 아무리 부활의 소망이 있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걸 기약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당장 죽었는데 당연히 슬퍼서 울 수 있다. 성경에도 그 유명한 Jesus wept가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뭔가 천추의 한이 맺히고 서러워서, 혹은 증오심과 원망이 맺혀서 “이놈/이것만 아니었으면 내가 요 모양 요 꼴 되지는 않았을 텐데” 같은 식으로 울 일은... 영적으로 잘 성장했다면 없는 게 정상일 것이다.

물론, 크리스천 중에 여전히 그런 것 때문에 세상 비관하고 앓는 소리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무작정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모 아니면 도 식인 것은 진리이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지 못할 거면 걍 때려치워라” 같은 돌직구는 정말 신중하게 날려야 한다. 그런 걸로 기껏 자라려던 남의 믿음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3/11/16 08:30 2013/11/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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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의 크리스천 지인 중에는 크리스천의 ‘인격, 행실’에 대해서 정말 많은 관심을 갖고 거기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분이 있다. 왜 있잖은가, “크리스천이 되기에 앞서 인간부터 돼야지!” 같은 식의 주장 말이다.

크리스천으로의 사명감과 책임감이 얼마나 투철했으면, 세상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세상이 악하고 마음이 강퍅해져서가 아니라, 기존 교회들이 병신같이 선교 행위를 하고 예수 간증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아주 강조한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후 4:4보다 롬 2:23-24를 선호한다는 뜻.

이런 성향이 종교적으로 극단으로 치달으면, 결국 선행이 드러나 있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은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예정론을 잘못 적용한 주권 구원 내지 행위 구원 쪽으로 빠진다.

그리고 이런 성향이 정치적으로 극단으로 치달으면, 오로지 대형 교회들을 흠집 내고 잡아먹기 위해서 불신자들하고까지 손잡을 지경인 진보 성향으로 바뀐다.

뭐, 저 정도의 잘못된 극단으로 빠진 게 아니라면, 그런 성향에도 일리가 있는 지적이 분명 있다. 예전에 같은 교인들로부터 몰상식적이고 무례하고 육신적인 언행 때문에 상처를 많이 입었거나, 아니면 기성 교회의 비성경적인 관행에 트라우마가 생긴 경험 때문에 그런 성향이 깊어진 게 아닐까 싶다. 이해는 한다.

그런데 이 이슈에 대한 나의 내면의 생각을 좀 말해 볼까?

첫째, 기독교의 교리가 “크리스천이 되기에 앞서 인간부터 돼야지!”였다면, 나는 크리스천이 절대로 못 됐으며 인간은 더욱 못 됐을 것 같다. 나 자신부터 옛날에는 인간성· 사회성, 인격 따위가 지금보다 훨씬 더 거칠고 더러웠다. 그나마 예수 믿고 나서 같은 성도들끼리 부대끼면서 아주 차츰차츰 개선된 것이다.

둘째, 난 기독교의 탈을 쓴 종북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교인’들의 행실에 대한 기대 따위는 진작에 안드로메다에다 보내고 왔다. 이건 무슨 대형 교회의 부정부패나 몰상식한 선교 행위 같은 것하고는 아예 레벨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악행이지 않은가! (걔네들은 애초에 예수님을 내 구주로 제대로 영접도 안 한 사람일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은 한다)

종북이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그 구원에 감격하고 지금 처한 여건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국가와 민족에 자부심과 애착이 생기고, 우리에게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와 지금 진짜 인권 유린을 당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다 자동으로 깨달을 줄 알았는데, 종북이 예수 믿으면 그냥 구원받은 종북이더라!

이게 겨우 일개 인격이나 성품 따위하고 비교가 가능한 문제일까? 성경 말씀이 그런 사람들의 사상 하나조차 제대로 바로 이끌어 주지 못한 걸까?

그러니 난 애초에 혼의 구원과 영원이 걸린 종교 문제는 전적으로 핵심 사상인 교리의 우월성을 보고 선택했지, 주변 사람들의 말단 행실이나 평판 같은 건 “개별적인 case by case”일 뿐, 진지한 고려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정말로 비성경적인 수위가 도를 넘어서는 잘못된 목사나 잘못된 교회가 있으면, 당신 혼자 그 교회를 조용히 탈퇴하면 된다. 대한민국은 자유가 있는 좋은 나라이다. 당신이 그런다고 해서 당신을 고문하거나 수용소로 보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도저히 구원받았을 것 같지 않은 막장 성도라면.. 성경에 규정된 대로 징계하고 쫓아내든가, 아니면 그냥 교제 끊고 이교도나 세리 대하듯이 최소한의 예의와 격식만 차려서 대하면 된다. 그 사람이 만에 하나 진짜 구원받은 게 맞다면 나중에 하늘나라에서나 오해가 풀리기를 바라는 수밖에.

영적 전쟁터는 원래 그 어떤 희한한 짓 험한 꼴이 벌어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바닥 아닌가?
크리스천이 행동이 병신이었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으며, 그게 그렇게까지 납득이 안 되는 일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현실을 지나치게 탓하고 비관하는 건, 예수님이고 성경이고 복음이고, 게다가 그냥 성경도 아니고 신줏단지 같이 떠받드는 KJV 성경조차도 현실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자기 입으로 영적 전투의 패배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그냥 구원받는 것하고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사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자기와 같은 사상을 지니고 자기처럼 성장하고 자기처럼 행동할 거라고는 절대로 기대하지 말지어다.

교회는 영적 전투 수행을 위한 무슨 소수정예 특수부대가 아니다. 이 세상에 아무 결점이 없는 완벽한 성도들로만 이뤄진 교회가 존재한다면, 당신이 그 교회에 가입하는 순간부터 무결성이 깨진다는 심정으로 교회 생활을 하면 된다.

구원과 행실 사이의 관계 문제는 하나도 어려울 것 없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이는 행위로 나타내야 한다는 내 안의 성령님의 압박이 느껴진다면, 남 신경 쓰지 말고 당신이나 잘하면서 남에게 좋은 본을 보이면 된다.

잘못하고 있는 교회 지체를 성경으로 일깨우면서 권면하는 것 이상으로,
누구 다른 사람 때문에 복음이 실추되고 있다는 식으로 피해의식은 어떤 경우에도 가질 필요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3/11/08 08:17 2013/11/0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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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ful Grace of Jesus에 이어 본인이 최근에 팍 꽂혔던 명찬양이 있어 내 블로그에다가도 소개를 좀 하겠다.
참고로 CCM이 전혀 아니다. 가사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300년 전에 찰스 웨슬리가 썼고, 곡은 거의 200년 전에 토머스 캠벨이 만든 완전 고전이다.
유튜브 링크: And Can It Be That I Should Gain

클래식답게 리듬도 아주 규칙적이고 쉬운 찬송가 스타일인데 딱히 국내에 많이 소개된 것 같지 않다.
멜로디가 Wonderful Grace of Jesus만치 그저 화사 발랄한 느낌은 덜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려하고 웅장하고 감동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사가 정말 고퀄 일품이다. 너무 '찐하다'. 직접 보시라.

1.
And can it be that I should gain
An int’rest in the Savior’s blood?
Died He for me, who caused His pain?
For me, who Him to death pursued?
Amazing love! how can it be
That Thou, my God, shouldst die for me?

2.
’Tis mystery all! The Immortal dies!
Who can explore His strange design?
In vain the firstborn seraph tries
To sound the depths of love Divine!
’Tis mercy all! let earth adore,
Let angel minds inquire no more.

3.
He left His Father’s throne above,
So free, so infinite His grace;
Emptied Himself of all but love,
And bled for Adam’s helpless race:
’Tis mercy all, immense and free;
For, O my God, it found out me.

4.
Long my imprisoned spirit lay
Fast bound in sin and nature’s night;
Thine eye diffused a quickening ray,
I woke, the dungeon flamed with light;
My chains fell off, my heart was free,
I rose, went forth, and followed Thee.

5.
No condemnation now I dread;
Jesus, and all in Him, is mine!
Alive in Him, my living Head,
And clothed in righteousness Divine,
Bold I approach the eternal throne,
And claim the crown, through Christ my own.

후렴
Amazing love! how can it be
That Thou, my God, shouldst die for me?

어찌하여 나 같은 자가 감히 내 구주의 보혈의 수혜 대상이 될 수 있었는가!
나는 민폐만 끼쳤는데 그분은 나를 위해 죽어 주셨다.
죽으실 수 없는 분이 죽다니, 세상에 이런 신비· 미스터리가 따로 없다.
그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섭리를 누가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천사들도 하나님의 지혜의 깊이를 측량하려 했지만 다 실패로 끝났다.
후렴: 놀랍기 그지없는 사랑이로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실 수 있는가?

대충 이런 내용.
영어에서 it is는 흔히 it's로 줄여 쓰는데, 시나 만화 대사 같은 데서는 이따금씩 2음절이 아닌 1음절의 모음을 생략하여 'tis라고 줄이기도 한다. 우리말로 비유하자면 '오타쿠'를 오덕이라고 줄이느냐 덕후라고 줄이느냐의 차이와 같다.

감상평을 잠시 얘기하자면, 1절 처음에는 I should gain이라고 했다가 후렴에서는 thou, my God, shouldst라고 should가 굴절되는 차이가 발생한다. 가사가 맨 처음부터 And로 시작하는 것도 특이점.

4절은 죄에서의 자유를 묘사하면서 My chains fell off가 나오는데, 이것은 감옥에 갇혔던 베드로의 사슬이 풀리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행 12:7). 그리고 2절의 sound는 '소리'나 '건전한'이라는 뜻이 아니라 '깊이를 측량하다'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도행전에서만 쓰인 용법이다(행 27:28). 따라서 이 찬양의 가사는 전반적으로 사도행전스러운 느낌을 준다.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가사가 무려 5절까지 있는 관계로 긴 편이다. 악보에 따라서는 천사가 어떻고 스랍이 어떻고 하는 너무 형이상학적인 2절을 주로 생략하고, 때로는 5절까지 생략하기도 한다. ㅎㅎ

우리 교회에서 지난 8월에 청년부 찬양으로 이 곡을 선정해서 불렀다. 가사는 물론 원판보다 깊이가 훨~씬 덜한 한국어 번역으로..
심지어는 나조차도 한 주간은 Looking for You마저도 제치고 이것만 들을 정도였다.
이런 찬양을 놔 두고 철도 음악을 들을 수는 없어서였다.

작사자와 작곡자는 이걸 한번 부르면서 테스트하고 나서는 “오~ 주여, 우리가 정녕 이런 찬양을 만들었단 말입니까? ㅠㅠㅠㅠ” 하면서 얼싸안고 꺼이꺼이 했을 법도 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3/10/11 08:26 2013/10/1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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